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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암 박윤선과 개혁주의 언약사상: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 문병호 교수 (총신대학교)

하나님아들 2016. 3. 12. 13:24

 

 

 

정암 박윤선과 개혁주의 언약사상: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문병호(총신대학교)

 

 

1. 서론: 주제의 적합성

 

개혁주의 언약사상을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것은 낯선 작업이 아니다. 언약사상을 개혁주의로 한정하여 개념화하는 자체가 이미 조직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암 박윤선 박사님의 작품들에 나타난 개혁주의 언약사상을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추구하는 것은 그리 여상치 않다. 우선 정암 자신이 조직신학적 논구를 정치하게 추구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놓여있다. 신약신학을 조직신학에 연결시켜 개혁신학을 한결 심오하고 부요하게 만든 학자들로서 G. 보스, B. B. 워필드, J. G. 메이천, J. 머레이, 오늘날 R. 레이몽드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성경적 조직신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과연 정암도 이들과 함께 분류될 수 있는가? 오히려 정암은 조직신학의 체계적 · 종합적 방법을 빌어 성경신학을 역동적으로 구축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지 않겠는가?

물론 성경전권을 일생을 통하여 주석한 어느 학자가 있다고 할 때, 그는 항상 성경신학자일 필요는 없다. 어거스틴의 성경주해들이나 루터와 칼빈의 주석들 그리고 C. 홧지의 로마서 주석 등은 가장 심오한 교의학자들의 작품들이었다. 정암이 우리 손에 넘겨 준 책들은 대부분 주석들이다. 그러나 여전히 강단에 서 계신—이미 고인이 되셨지만—그분을 우리는 고매한 조직신학자로 여긴다. 정암에 대한 이러한 시각이 본고의 관점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정암의 주석으로부터 조직신학의 강의를 듣는 것이다.

정암이 전개한 조직신학은 필생의 강의안 「개혁주의 교리학」에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은 그가 일생 동안 주석한 성경을 교리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유작이다. 그리고 단행본으로 출간된 「성경신학」에도 주요한 몇몇 교리들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G. 보스, H. 리델보스 등에 의지하여 “계시사적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 두 권의 책은 정암의 방대한 주석들에 전개된 사상적 골격을 보여주므로 본고에서도 길잡이 역할을 한다.

본고 제2장에서는 개혁주의 언약사상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고찰한다. 그리하여 본고의 관점을 수립한다. 제3장에서는 몇몇 글과 주석에 전개된 언약에 대한 정암의 입장을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논의한다. 제4장에서는 이러한 정암의 언약신학이 주석에 어떻게 반영되어 나타나는지를 고찰한다. 그리고 결론적인 고찰을 제5장에 할애한다.

 

 

2. 개혁주의 언약사상

2.1. 구원협약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 중보자로 정하시고 그의 성육신과 속죄 제사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서로 간에 협약하셨다. 학자들은 이를 화란 신학자 콕체우스(Johannes Cocceius)의 예에 따라서 “구속언약(救贖言約, pactum salutis)”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은 이를 또 다른 언약이 아니라 “은혜언약(pactum gratiae)”의 영원하며 확고한 기초가 되는 “구속협약(救贖協約, consilium salutis)”으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 가운데 역사상 체결되는 것으로서 삼위 하나님이 내적으로 영원히 정하신 구원의 협약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이러한 구원협약이 성자를 선택 받은 자의 머리와 구주로 삼으시는 성부와,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자원하여 대신하시는 성자 사이에 맺어진 영원한 협정으로 자주 나타난다(엡 1:3-14; 3:11; 살후 2:13; 딤후 1:9; 약 2:5; 벧전 1:2).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구원을 계획하셨다. 그리하여 제2위 하나님을 구원자로, 그분의 대속을 구원방식으로,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선택된 사람들을 구속백성으로 정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세전에 창조의 협약을 하셨듯이(창 1:26), 구원의 협약도 그리하셨다. 그것은 역사상 인류와 은혜언약을 체결하시고 아들을 통한 전적인 은혜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었다.

구원협약은 타락이 전제되지만 영원한 협약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확실히 마치 시간상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보다 앞서듯이 전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타난 것은 하나님이 인류의 비참을 치료하고자 원하셔서 만세 전에 결정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협약에 따른 계획이 역사상 계시되고 성취된다. 언약은 하나님이 사람의 대표와 맺은 이러한 경륜에 대한 약속이다.

 

2.2. 행위언약

 

행위언약은 아담을 머리로 하나님이 인류와 맺은 첫 번째 언약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약속하셨다. 콕체우스는 “행위언약(foedus operum)”이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 자연법의 형태로 주어졌기 때문에 “자연언약(foedus naturae)”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행위언약은 자연법의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특별히 세우신 것이다(창 2:16-17).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대체로 행위언약을 인정한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의 형벌을 받고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원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면 행위언약의 교리는 무익하다. 하나님은 자연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언약적인 관계를 수립하시고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여겨 특별한 명령을 하셨다. 아담이 순종할 경우에 그의 모든 후손은 영생을 누리는 약속을 보장 받았다. 비록 행위가 요구되었으나 그것은 창조주의 계속적인 은혜를 드러내었다.

행위언약에 관해서 율법의 요구가 있고 조건적인 약속이 있는 한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이 있다(레 18:5; 롬 10:5; 갈 3:12). 반면에 타락한 이후에는 영생을 얻는 수단으로서 그 효력을 상실했다거나 중보자 그리스도가 첫 언약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견해가 있다.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은 그 불순종으로 폐기되었지만,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순종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하나님의 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을 은혜로 이루시겠다는 약속이며 주님이 언약의 당사자가 되시는 새언약은 은혜언약의 약속의 수행으로서 행위언약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마지막 심판의 때에 행위계약 앞에서 “정죄”를 면하게 되나 “행위계약의 대상자의 관계”가 도말되는 것은 아니다.

 

2.3. 은혜언약

 

아담의 타락 후 하나님이 인류와 맺은 모든 언약은 은혜언약이다. 은혜언약은 주님의 새언약을 바라볼 뿐, 그 자체로 종결적인 성취는 없다. 타락한 인류는 아무도 스스로 언약의 실체적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구약을 통하여 “언약을 맺다(, o`rkia temnein, foedus ferire)” 라는 표현은 언약이 피로 세운 생명의 약정(레 17:11; 히 9:22)임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언약(, )은 상호합의에 기초하나 약자를 향한 은혜로운 수여의 경우에는 베푸는 자의 일방적인 규율(qxo)을 의미한다. 언약의 시행에 신실하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 약속은 변개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항상 이루어진다. 은혜언약에 있어서 쌍방적(bilateral) 약속은 일방적(unilateral) 은혜에 기초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m[) 혹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yb) 맺어진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l) 맺으신 것이다. 은혜언약의 인간 당사자는 그 약속의 수혜자로 선다. 그는 조건을 성취함으로써 은혜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조건의 성취를 맛본다. 은혜언약이 닻을 내리는 곳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있다. 은혜 언약은 진노하신 하나님과 죄를 범했으나 택함을 받은 죄인 사이에(갈 3:15-18) 맺어진 은혜로운 협정이다.

행위 자체의 공로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 믿음을 행위에 이르는 공로로 여기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나 로마 가톨릭주의자들, 믿음 자체의 공로를 운위하는 루터의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구원협약에 따른 역사적 은혜언약의 경륜이 올바르게 추구되지 않는다. 반면에 어거스틴과 칼빈의 맥을 잇는 개혁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언약의 조건(conditio)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그것에 등가성—혹은 이러한 뜻으로서 조건성—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믿음이 구원의 질료인(causa materialis)이 아니라 형상인(causa formalis) 혹은 도구인(causa instrumentalis)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믿음은 언약의 조건이 되나, 믿음은 오직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므로 언약을 쌍무계약으로 만드는 것은 니라고 본다. 은혜 언약은 무조건적이다. 다만 믿음이 그리스도와 생명의 교제를 나눔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conditio sine qua non).

칼빈이 강조했듯이, 신구약에 있어서 은혜언약의 실체(substantia)는 그리스도로서 동일하다. 다만 그 역사하는 경륜(oeconomia, dispensation, administratio)이 다를 뿐이다. 신구약 백성 모두는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언약을 믿었으며, 그 경륜의 성취자로서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었다. 칼빈은 아담에게 주어진 “구원의 첫 약속(prima salutis promissio)”은 연약한 불꽃같이 희미했지만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맺은 언약들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하여서 “자비의 언약(misercordiae foedere)”은 그리스도에 의한 은혜의 충만한 계시의 때가 다가옴에 따라서 점점 더 명료하게 드러났다는 점을 지적한다. 신구약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는 “그들 자신의 언약의 보증(foederis sui pignus)”이었다. 이러한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신(히 7:22) 주님이 친히 그 언약의 머리가 되셔서(롬 5:12-21; 고전 15:22) 새언약을 체결하셨다.

 

2.4. 새언약

 

구원협약은 모든 일을 함께 하시는(同事)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영원한 작정이다. 구원협약에 의해서 성자는 “새언약(foedus novum)”을 세우시고 구원 중보자가 되셨다. 새언약(렘 31:31-33)은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과 그의 피로 세우신 언약이다(마 26:26-28; 막 14:22-24; 눅 22:15-20; 히 7:21; 8:6-13; 9:11-15; 12:24). 그것은 제사장이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자신을 드림으로써 조건을 성취하는 언약—아버지와 우리 사이에서 중보하시는 중보자의 언약이었다(히 8:6-13; 9:15; 12:24; 13:20).

새언약의 피로 주님은 구약의 모든 은혜언약의 약속들을 성취하셨다. 노아와 맺은 피조물에 관한 언약(창 9:8-11), 아브라함과 맺은 믿음으로 자녀가 되며 또한 그 가운데 누리는 복에 관한 언약(창 12:1-3; 17:2, 4-8), 모세와 맺은 율법의 언약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해지는 삶의 언약(출 19:5-6; 레 26:9) 등 구약에 계시된 200번이 넘는 언약의 약속들이 주님의 새언약으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요 19:30). 모세와 맺은 언약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조건으로 하지만 그 성취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행위언약의 조건을 확인하는 은혜언약이다.

새언약을 성취하신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주께서 친히 성령을 부어주시고(행 2:33) 이제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신다(요 14:17; 갈 2:20).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한 상속자가 된다(롬 8:9, 17).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여 얻게 되는 특권을 누린다(요 14:13-14; 15:7). 새언약의 성취로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영원한 임마누엘이 되셨다(요 14:16; 마 1:23). 주님은 모든 언약을 다 이루심으로 아담의 인성에 속한 우리를 자신이 취한 인성으로 이끌고자 하셨다. 칼빈과 그를 잇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새언약을 다룸에 있어서 두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한다. 중보자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향해서는 모든 것을 순종해야 하는 행위언약의 당사자였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서는 그 이루신 의를 그저 전가해 주시는 은혜언약의 당사자였다. 그리하여 가장 값진 것을 그저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부각된다. 우리에게 전가되는 주님의 공로는 모태에서 조성되시는 성육신의 비하에서부터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시는 죽음에 이르는 모든 행하신 순종(obedientia activa)과 당하신 순종(obedientia passiava)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언약의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순종에 대해서 등한시했으며 오직 쯔빙글리와 불링거로 이어지는 쮜리히 신학자들이 강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두 가지 개혁주의 전통(two Reformed traditions)”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칼빈은 행위언약의 조건이 이제는 그 불순종에 대한 형벌과 함께 주님께 전가되었다는 사실과 주께서 그 모든 의를 다 이루심으로 우리가 죄사함과 의의 전가를 동시에 받게 된다는 것을 누차 강조하였다.

우리는 새언약이 행위언약의 수행이며 은혜언약의 성취라는 측면을 함께 강조함으로써 신구약이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경륜에 있어서는 다양하다는 사실과 함께 언약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대속의 속죄론적 의미를 함께 추구하게 된다. 학자들은 대체로 전자에만 몰두하며 언약을 단지 약속의 계시로만 보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그러나 언약은 약속과 성취, 그리고 성취의 가치를 함의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언약의 이러한 측면이 칼빈에 의해서 개진되었다. 그리하여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영원한 구속의 경륜과 성취, 그 의의 전가로 말미암은 구원,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함께 거론되었다.

 

 

3. 정암이 전개한 “계약론”의 체제

 

정암은 언약(foedus, pactum, testamentum)을 “계약”이라고 주로 부른다. 성경적 용례를 좇아서 “언약”이라고 할 때도 있으나 대체로 “계약”이라는 말을 쓴다. 이는 라틴어 “pactum”에 대한 자구적 번역에 염두를 둔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정암은 “계약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책 「성경신학」에서 언약에 대한 개괄적인 고찰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정암의 이사야 55장 3절 주석에 부기한 설명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또한 대동소이한 내용이 「개혁주의 교리학」에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이 세 권의 책을 중심으로 주요한 주석들을 참조하여 정암이 추구한 “계약론”의 체제를 고찰한다.

 

3.1. 계약의 의의와 가치

 

정암은 H. 바빙크를 인용하여 종교의 실체를 계약에서 찾는다.

 

“진정한 종교는 계약(혹은 약속)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진정한 종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은덕에 근원을 가진다. 진정한 종교의 이 성격은 인조(人祖)의 타락 전후를 물론하고 있어 온 것이다. 인간은 피조물일뿐더러 타락한 죄인인 만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과 권리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자비의 덕에 의하여 인간을 찾아 오셔서 말씀하실 때에 비로소 진정한 신인교통(神人交通)이 열리며 계약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대로의 신인 관계이다.”

 

정암은 기독교가 구원의 종교인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맺어주신 계약”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계약”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 “신인교통”의 방식이다. 그것은 신인과의 “관계”를 총칭한다. 그러므로 타락 전과 후를 통하여 지속되었다. “하나님의 계약행위(契約行爲)란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음이다.”

정암은 신인과의 계약은 그 자체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첫째, 계약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축복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게 된다. 둘째, 계약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를 거룩하게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셋째, 계약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은 필히 그분 자신이 이루신다는 위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넷째, 사람들의 종교 윤리적 성격을 시험해 보는 도구로서 계약이 필요하다. 계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이를 수행하며, 그 결과를 참고 기다림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가게 된다.

정암은 이러한 계약을 “행위계약”과 “은혜계약”으로 나눈다. 그리고 구약의 은혜계약과 신약의 은혜계약을 나누어 각각 “구계약”과 “신계약”이라고 부른다. 신계약은 우리가 말한 새언약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창세전의 작정을 “영원한 계약”이라고 부른다.

 

 

3.2. 영원한 계약

 

정암은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구원협약(pactum salutis)”을 “영원한 계약”이라고 부른다.

 

“삼위일체(三位一體) 안에서 영원 전에 서로 계약하신 대로 인류를 구속하실 계획이 있었으니, 그것이 곧, 영원한 계약(pactum salutis)이요, 이 영원한 계약에 뒤이어 역사상에 나타난 것은, 행위계약(行爲契約)과 은혜계약(恩惠契約)이다.”

 

우리가 개혁주의 언약사상을 다루면서 보았듯이 학자들은 대체로 구원협약을 은혜언약에만 연관시킨다. 그러나 정암은 여기서 “영원한 계약”이 은혜계약과 함께 행위계약의 원형도 된다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정암이 계약을 하나님과 인류사이의 관계 자체로 폭넓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 서게 되면 타락전예정설을 좀 더 용이하게 설명하고 모든 언약을 일괄적으로 구원의 경륜에 포함시키는데 유익함이 있다. 다만 구속에 관한 작정으로서 구속주, 구속방식, 구속백성을 정한 삼위 서로 간의 영원한 구원의 협약 즉 “영원한 계약”이 과연 구속과 무관한 “행위계약”과 본질상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이는 정암이 성경신학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조직신학적 엄밀함을 놓쳐버린 한 예라고 볼 것이다.

영원한 계약을 이렇게 이해하는 입장에서 정암은 역사적 구속사역이 창세전에 미리 결정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며 그 은혜는 신약 성도들뿐만 아니라 구약 성도들에게도 미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증거가 되는 구절들을 열거하면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의 공로로 창세전에 작정되었음을 강조한다(시 89:3; 사: 42:6; 눅 22:29; 요 5:30, 43; 6:38-40; 17:4-12, 24; 행 13:33; 롬 5:12-21; 고전 15:22; 엡 1:4; 3:11; 살후 2:13; 딤후 1:1; 히 1:5; 5:5; 10:5-7, 18: 약 2:5; 벧전 1:2).

정암은 H. 바빙크를 인용하면서 영원한 계약이 없다면 은혜계약은 단지 허공에 떠 있을 뿐이며 따라서 노아와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과의 약정에 앞서서 창세전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정하신 “삼위일체의 의론(議論)”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정암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와 그의 대속의 예언 자체를 들어서 이를 확정한다. 그리하여 아들이 중보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며(시 2:7), 또한 그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여긴 점을(사 53:4-11) 거론한다. “아들의 중보가 영원 전부터 의정(議定)되신 것이 사실이다” 라는 점이 정암이 서 있는 계약론의 기반이 된다. 정암은 아들의 영원한 존재 자체로부터 영원한 구속경륜의 증거를 이끌어낸다(사 42:1; 43:10; 마 12:18; 눅 24:26; 행 2:23; 4:28; 벧전 1:20; 계 13:8).

 

3.3. 행위계약

 

정암은 “행위계약”을 “하나님께서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 상대하시고 세우신 것인데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면 영생을 얻도록 된 것”이라고 말한다.

정암은 H. 바빙크를 인용하면서 창 2:16-17에서 하나님이 주신 명령은 그 사건의 본질에 있어서 계약이라고 주장한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에는 미래의 일을 조건부로 삼아 약속을 성취하고자 하는 계약적 요소가 있다. “정녕”이라는 말이 이러한 “진실성(확실성)”을 확고하게 보여준다. 호세아 6: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라는 말씀은 이를 확정한다. 그들이 어긴 것은 “과연 하나님을 알며 사랑하는 여부(與否)를 알아보시려는 시험의 언약이었다.”

정암은 행위계약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첫째, 행위계약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삼으셨다(롬 5:12-14). 둘째, “계명에 대한 순종(행위)”를 요구하셨다. 셋째, 계약론의 원리에 따라서 아담의 불순종으로 범죄, 정죄, 사망 등이 들어왔다.

정암은 로마서 8:12-19를 주석하면서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는 14절의 말씀은 아담과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의 “영수(領首)” 즉 머리가 된다는 측면에서 “대표 원리,” “대신 원리,” “대리 행동의 원리”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본문에서 “한 사람”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 것은 역사상 인물인 아담과 같이 예수님도 역사 가운데 우리를 대표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정암에 의하면 행위계약은 비록 실패했지만 폐지되지는 않았고 그 계약을 지킬 자가 이제 대속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성경의 은혜언약이 있지만 행위계약은 여전히 “고소”를 계속하고 있다. “행위계약은 폐지되지 않고 계속 존속한다. 그 이유는 은혜계약은 행위계약의 고발 앞에서만 그 의의를 명백히 하기 때문이다.”

정암은 행위계약을 중요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가 분명히 부각되기 때문이다. 행위계약은 언약의 머리로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연결시키는 고리라고 정암은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암은 “하나님께서 벌써 오래 전에 첫 사람 아담에게서 그리스도의 속죄 원칙을 예표하셨다. 그러므로 대표 원리는 우연한 것이 아니고 구원사적(救援史的)인 진리이다”고 단언한다. 정암은 아담의 행위계약에서 이미 구원의 대표 원리를 읽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계약론의 본질에 따라서 원죄는 “생래적(生來的)”이며 “분배적(分配的)”이라고 정암은 말한다. “생래적”이라 함은 타고난다는 뜻이며, “분배적”이라 함은 전가된다는 뜻이다. 계약의 머리로서의 아담의 죄가 인류 모두에게 전가됨을 뜻한다. 이러한 전가의 원리가 아담과 그리스도의 계약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리하여 정암은 다음을 다소 고양된 어조로 말한다.

 

“대표 원리에 의하여 타락한 인류는, 역시 대표 원리의 방법으로 구원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의의 세력은, 타락을 연출한 죄의 세력보다 훨씬 강한 것이다. 죄의 세력은 인류의 조상 한 사람을 대표로 하고 모든 인류에게 임했으나, 의의 세력은 창조자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로 하고 임한 것이다. 죄의 세력이 피조물의 힘이라면, 의의 세력은 창조자의 힘이다. 그러므로 의의 세력은, 죄의 세력을 이기고 무한 분량으로 넘친다. 우리가 보는대로 죄의 세력은 세상에 편재하여 홍수 같이 무서운 것인데, 이것보다 천양지차(天壤之差)로 크게 나타나는 의의 세력은 어떠할 것인가!”

 

창세기 2:16-17를 주석하면서 정암은 행위계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의 원리”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처음 아담에게는 오직 하나의 계명이 주어졌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한 가지 행동으로 많은 사람을 생명에 이르게 하시려는 뜻에서였다고(롬 5:14 하반-19) 주장한다. 정암은 이렇듯 첫언약 즉 그가 말하는 아담과 맺은 행위계약과 새언약 즉 그가 말하는 신계약을 긴밀히 연결시키고 있다.

 

3.3. 구약의 은혜계약: 구계약

 

정암은 은혜언약 가운데 “구약과 신약의 모든 계시 운동”이 나타나며 그것은 또한 이에 따른 “하나님의 행동”을 취급한다고 본다. 이러한 계약의 “약속 방면”이 구약이며 “성취 방면”이 신약이라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은혜언약은 정암에게 있어서 구약의 계약 즉 구계약에 해당한다. 정암이 단순히 은혜계약이라고 말할 때에는 이러한 구계약을 뜻할 때가 많다. 이에 반해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새언약은 정암에게 있어서 신약의 계약 즉 신계약에 해당한다. 정암은 이를 “성취된 은혜계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구계약을 다룬다.

우리가 원(原)복음 혹은 모(母)복음이라고 부르는 창 3:15를 정암은 “조종적(祖宗的)인 은혜계약”이라고 칭한다. 하나님은 아담이 행위계약을 어겼을 때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기억하시고(합 3:2)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 죄와 마귀를 이김으로 영생 얻을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정암은 죽음을 자연에 속한 것이라고 보는 칼 바르트를 비판하면서, 마귀를 이김이 구원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요 12:31; 롬 16:20). 이러한 구원의 은혜가 세상 끝까지 이른다(계 17:14). 정암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구원이 하나님의 “단독역사”로 일어나며 이를 “택한 백성의 대표자 격(代表者格)인 메시야”가 감당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구약의 계약은 모두 창 3:15의 약속에 놓여 있다. 노아가 맺은 계약(창 8:21-22; 9:8-18)도 “은혜계약에 부종(附從)한 것이다.” 정암은 이를 “자연계약”이라고 부른다. 노아가 번제를 드리고 계약을 체결한 것은 그 약속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공로로 성립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연계약은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보장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암은 “자연계약을 은혜계약의 모형”이라고 부른다. 이 부분을 다루면서 우리는 정암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함께 주목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계약이 단지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훈육하는 방법이 된다는 점이 그리하여 부각된다.

정암은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창 12:15, 22; 15:4-21; 17:5-8; 18:18-19; 22:17-18)을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에 대한 예언”이라고 부른다. 구약의 백성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 자신을 믿은 “인격상대(人格相對)”의 신앙이었다. 아브라함에게 뭇별과 같은 백성을 약속하신 것은 그의 후손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을 것을 미리 예언한 것이다(갈 2:16; 3:16). 아브라함의 계약은 “육적 이스라엘 나라로 표현될 신정국가(神政國家)”가 “메시야 중심의 영적왕국”이 될 것임을 미리 약속한다. 그리하여 그를 열국의 아비라고 부른 것이다. 이렇듯 정암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하나님의 왕국의 백성이 되는 자격이 믿음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여호와의 복으로 살아갈 것을 전하여 이후 신약의 복음 운동까지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암은 모세의 계약(출 19:5-6; 24:8; 신 29:13)을 다루면서 은혜계약은 아담과 맺은 행위계약의 조건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 혹은 완성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율법은 은혜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주신 것이다. 시내산 계약도 아브라함의 계약의 연속이다. 그것은 율법은 메시야 왕국의 질서로 나타나고, 특히 제사를 통하여 속죄의 원리를 미리 보여주었다. 시내산의 계약은 신계약을 예표한다. 정암은 모세의 계약을 행위계약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은혜계약으로 보고 있다. 모세의 계약은 자력구원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약속을 담고 있다. 그것은 쌍방의 책임을 동등하게 고려하는 “조약”이 아니라 은혜의 “언약”이다.

정암은 이러한 은혜계약의 약속과 질서 가운데 구약의 신정(神政)을 논한다. 오직 정치적 주권은 하나님 한분께 있으며 신민은 제사장과 거룩한 백성이 된다(출 19:6; 벧전 2:9). 율법에 따른 구약의 통치는 이미 오실 그리스도의 피 구원을 표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윗에게 주신 통치계약이 다루어져야 한다(삼하 7:11-17; 시 89:3-4; 사 49:8; 55:3-4).

정암은 구계약을 다루면서 신구약의 관계에 주목한다. 그는 제세례파(Anabaptism), 쏘키누스파(Socianism), 알미니우스파(Arminianism), 그리고 초기의 루터가 구약을 신약으로부터 분리한 것을 비판하면서 칼빈을 위시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계약신학”을 전개하여 신구약을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구약도 피 없이 성립된 것이 아니며, 그때에 이미 그리스도가 계약의 중보자로 나타났다. 그리스도가 구계약의 머리요 내용이었다. 신약을 단지 구약에서 진화한 것으로 보는 현대주의는 은혜계약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세대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경종을 울린다. 정암은 그리스도의 중보가 단일하며 연속적이라는 측면에서 “은혜계약의 단일성(單一性)”을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3.4. 신약의 은혜계약: 신계약

 

신계약은 주님이 죄값을 다 치르고 그 의를 값없이 베푸는 행위와 은혜의 계약을 모두 포함한다. 정암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은혜계약에서도 인간에게 그 불순종의 죄값 지불과 및 율법 순종을 요구하므로 인간의 부담은 행위계약과 마찬가지이다. 단지 은혜 계약에 있어서 달라진 것은 그 죄값 지불과 그 율법 순종의 책임자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아담의 자리에 대입(代入)되신 것뿐이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계시운동은 이 은혜계약을 보여 주며, 또한 그것과 관련된 하나님의 행위를 취급한다.”

 

구계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마 1:1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씨”(창 22:18), 영원한 다윗의 위(삼하 7:16)에서 만국을 다스리실 분(사 55:3 후반-5)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한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표로서 아담과 같아야 하며, 아담 이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의 은혜가 아담으로 말미암은 사망보다 더욱 풍성하다.”신계약은 “계약의 약주(約主)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시므로 세운 계약”이다. 첫째, 신계약은 그리스도의 피 계약이다. 이것이 속죄의 제물이 되어서 죄의 장벽을 소멸시킨다. 주님은 자신의 피를 속죄물(마 26:28; 히 9:14, 22)로 “신계약식(新契約式, 눅 22:14-20)”을 맺으셨다. 둘째, 신계약에 참여한 사람은 이제 죄사함을 받고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천국을 기업으로 얻게 된다(눅 22:29-30). 여기에서 주님은 친히 “계약의 대표자”가 되어서 홀로 책임을 다 수행하시고 어떤 “조건적인 부담”도 그의 백성들에게 지우지 아니하신다. 신계약으로 하나님은 창세전 구원협약에 따라서 역사상 체결된 모든 언약을 다 이루셨다. 신계약은 행위계약과 구계약의 동시적 성취이다. 그것은 행위계약의 성취로서 보혈의 값을 치렀다; 구계약의 성취로서 그 보혈의 값을 값없이 전가하였다. “그리스도의 공로” 외에는 새계약의 질료(materia)가 없다고 정암은 보고 있는 것이다.

신계약은 구계약에 약속된 실체적 조건 즉 대속의 행위를 그리스도가 친히 자신을 주심으로 이루시는 계약이다. 이는 제사장이 친히 제물이 되시는 계약이다. 목자가 되실 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시는 계약이다. 주가 되실 분이 종이 되셔서 자기를 버리시는 계약이다. 만약 행위계약이 폐지되었다면, 만약 그 조건이 무화(無化)되었다면, 역사상 새계약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의 담대함을 누린다. 예수님의 명령 속에는 이미 능력의 약속이 담겨 있다. 그 헌장이 8복에 기록되어 있다. 정암의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그의 계약론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신계약에 대한 정암의 이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신계약의 당사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죄인들을 대신하는 그리스도시다. 둘째, 신계약의 수혜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된 신자이다.

셋째, 영원전의 계약이 삼위간의 협약에 따른 구속의 작정이라면 신계약은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일하심으로 그 경륜이 성취된다. 즉 성부의 계획에 따른 성자의 성취와 이에 따른 성령의 시행으로 구원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벧전 1:2).

넷째, 신계약은 영원불변하다.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히 13:8)의 “영원한 언약의 피”(행 4:12; 히 13:8, 20)의 공로가 오직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행 4:12) 역사한다.

다섯째, 영원한 계약에 따른 삼위 하나님의 협약에 따라서 신계약은 선택된 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된다.

여섯째, 신계약에 따라서 보혈의 지극한 값을 그저 값없이 누리는 성도는 그 관계에 따른 책임을 실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어떤 대가적 공로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에 따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인이 아니라 언약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신계약으로 창세전의 영원한 협약이 이루어졌다. 신계약으로 행위언약의 조건을 만족시켰으며 구계약의 모든 약속이 다 이루어졌다. 시간적으로는 구계약이 신계약보다 앞서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계약으로부터 구계약으로 나아간다. 신계약에 대한 정암의 다음 정의는 이를 잘 구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약의 머리로 하여 최종 계약이 설립되어 있다(롬 5:12-21). 이 계약은 구약의 모든 계약들의 바닥에 흐르는 것이요, 모든 약속의 궁극적 성취이다. 그것은 창 3:15의 성취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계약의 실체요, 모세에게 주신 계약의 목표인 것이다. 아담을 비롯하여 모든 택한 백성(신약이나 구약이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둘째 아담이시요 인류의 대표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에 세워진 것이다.”

 

 

4. 언약의 열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서 영생

 

위에서 고찰하였듯이, 정암은 창세전의 영원한 계약이 은혜계약뿐만 아니라 행위계약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일견 양립이 불가능해 보이는 행위계약과 은혜계약이 하나님의 한 뜻 가운데 영원 전에 작정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행위계약과 은혜계약이 동일한 목적을 추구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정암이 행위계약을 다룸에 있어서 불순종했을 때의 형벌만을 강조하고 순종했을 때의 복은 등한시했다고 비판한 차영배 학장의 견해는 과한 점이 있다. 정암은 행위계약이 단지 현상을 유지하는 불사(不死)의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히 온전한 삶을 사는 영생(永生)의 계약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처우하시는 “계약의 원리”는 타락 전후를 통하여 일관적이라고 그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렇다면 정암이 계약의 목적이라고 여긴 영생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를 속죄론과 구원론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속죄론은 그리스도의 공로의 가치를 다루고 있으며 구원론은 그것의 적용을 논하고 있다. 영생을 말하지 않고는 양자를 거론할 수 없다. 그 역도 진실이다.

먼저 속죄론의 관점에서 논한다. 정암이 자신의 입장으로 표방한 “대신구속론(Substitutionary Atonement)”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체적이고 직접적인 전가를 주장하는 객관적 전가론에 서 있다. 속죄의 형벌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그것은 단지 주관적이거나 정서적인 회복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분명히 선을 긋는다. 주관적 감화는 객관적 대속에 따르는 부속물일 뿐 속죄의 본질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무엇을 함의하는가? 정암은 그것이 고난을 당하신 순종(passive obedience, obedientia passiva)과 율법을 행하신 순종(active obedience, obedientia activa)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의 죽으심만이 아니라 그의 삶도 우리를 위한 의가 된다고 한다.

정암의 이러한 입장은 정통적인 개혁주의 속죄론과 일치한다. 여기에서 구원의 전체 과정을 그리스도의 은혜에 돌리고 인격뿐만 아니라 행위도 의롭다 여김을 받아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새로운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의 초석이 놓여진다. 여기에서 정암은 H. 바빙크에 다시금 문의한다.

 

“예수는 행위계약의 대표자이신 공적 신분으로서 율법을 완수하셨다. 그러니만큼 그가 살아 계신 동안에 율법을 지키신 효과는 자기 개인에게만 아니고 그가 대표하신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의(義)가 되는 것이다. 그의 죽으심만 아니고 그의 생활도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다.”

 

이어서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에 따라서 성도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영생이 가지는 구원론적인 의의를 논한다.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것은 정암이 영생을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이라고 측면에서 파악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정암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서정의 한 부분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암은 자신의 계약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를 수시로 강조한다. 정암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영생의 본질로 여기고 있다.

정암은 성취된 “영원한 계약의 효과”를 논하면서 “영생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라고 단언하면서,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pavnte" ga;r aujtw'/ zw'sin)”(눅 20:38) 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이러한 입장은 아브라함의 계약을 다루면서 뚜렷해진다. 정암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약속 자체가 영생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이시고(요 14:6), 그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을 소유한 자는 영생을 소유한다. 하나님을 소유한 것이 곧 영생이라는 의미에서, 성경은 많이 말씀하고 있다(계 21:6-7). 하나님께서 그 백성으로 더불어 계약하실 때에 이것을 중점적으로 말씀하신다(출 29:45; 레 26:12; 렘 24:7, 33; 32:38; 겔 11:20; 34:24; 37:23, 27; 슥 8:8; 고후 6:16; 히 8:10; 계 21:3).

 

여기에서 정암은 영생이 하나님의 소유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영생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연합된 생활을 하는 윤리적 차원 정도에 머물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그렇게 본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리적 속죄가치가 무용해지기 때문이다. 정암은 창 15:6을 주석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전가해 주시는 “의”는 곧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것은 “추상적(抽象的) 상태가 아니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이니, 곧 살아있는 의를 얻음이다” 라고 단언한다. 곧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심으로 우리가 그와 함께 영원히 사는 의의 전가가 영생이라는 열매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암은 하나님의 법을 자신의 백성 안에 두시겠다는 새계약의 약속이 성도가 그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편지가 되는 것(고후 3:3)이라고 주석한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특히 강조한다. 정암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다루면서 성도가 그리스도가 연합하는 것은 영원한 계약에 따른 것임을 강조한다. H. 바빙크를 인용하면서 이러한 연합이 이미 창세전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C. 홧지의 다음 말에 주목한다.

 

“이 연합은 신비로우며 초자연적이고 대신 원리의 것이요 생명 있는 것이다. 이 연합에 의하여 우리는 창세전에 그의 안에 있었고(엡 1:4), 우리가 아담 안에 있었던 것처럼 그의 안에 있고(롬 5:12, 21; 고전 15:22), 우리와 그와의 관계는 머리와 몸의 관계요(엡 1:23; 4:15; 고전 12:12, 27), 우리가 그에게 관계된 것이, 포도나무에게 대한 가지의 관계와 같다(요 15:1-12). 이 연합에 의하면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이 되어졌고(갈 2:20), 우리는 그와 함께 살았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았다(엡 2:1-6). 이 연합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정도에서 그와 같아졌으며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의 하신 것이 우리의 것이 되었으니 만큼, 그의 의(義)가 우리의 것이며, 그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며, 그의 높아지심이 우리의 높아짐이 된 것이다.”

 

정암에게 있어서 영생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총체적인 양상을 뜻한다. 그것은 창세전의 영원한 구원 작정 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에 있어서 그분과 연합하는 것, 성도의 전체 구원과정에 있어서 그리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의 열매는 지상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과 행실을 포괄한다. 이러한 전인격적 연합은 성찬의 “구원사적 의의”와 부합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택된 백성에게 구원의 의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심령을 사랑으로 강권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물로 드린 “제사장(i`ereu,j)”으로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mesi,thj)”가 되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와 연합하게 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그분이 우리의 중보자시다. 그분은 구속의 중보를 다 이루시고 여전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다. 주님의 계속적인 중보로 말미암아 다 이루신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그분의 의가 전가된 삶이 영생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정암이 “저 좋은 언약의 중보자”(히 8:6) 라는 말씀을 주석하면서 헬라어 “mesi,thj“가 “계약의 실행을 보증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특별히 강조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구속사적 성취와 구원론적 적용—에 계약의 핵심이 있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5. 결론: 정암의 개혁주의 언약사상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정암의 “계약론”은 개혁주의 언약사상의 본류에 속한다. 정암은 구원협약(pactum salutis)을 “영원한 계약”으로, 행위언약을 “행위계약”으로, 은혜언약을 구약의 언약 즉 “구계약”으로, 새언약을 신약의 언약 즉 “신계약”으로 부른다. 특히 신계약은 “성취된 은혜계약”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정암의 입장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언약을 다룬 제3장과 제7장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다.

정암은 아담의 타락 이후 나타나는 신 · 구약의 모든 언약을 은혜언약으로 보는 칼빈의 입장에 충실하다. 칼빈은 신 · 구약은 경륜에 있어서는 다양하나 실체는 같다고 하였는데, 정암은 이를 충실하게 자신의 신학에 반영하고 있다. 다만 구약을 구계약으로 신약을 신계약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언약 즉 새언약에 대한 별도의 심오한 고찰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속죄론 등 기독론의 다른 부분에서 간헐적으로 언급되어 있으므로, 내용 자체를 결한 것은 아니다.

정암의 이러한 입장은 죽산 박형룡의 언약이해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죽산은 조직신학자로서 인죄론을 다루면서 언약 전체를 논한다. 이는 대부분의 조직신학자들이 행위언약은 인간론에서, 은혜언약은 기독론의 서론적 위치에서 다루는 것과는 구별된다. 죽산은 정암이 말한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을 “구속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역사상 체결된 언약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나누고 후자는 다시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고찰한다. 다만 정암이 이 부분을 다룸에 있어서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책이었던 H.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에 거의 의지하고 G. 보스, H. 리델보스, C. 홧지, G. C. 뻘카우어 등을 보충해서 다루었다면, 죽산은 C. 홧지, A. A. 홧지, W. 스트롱, R. L. 답니, G. 보스 등을 주로 인용한다. 죽산의 신학이 H. 바빙크의 신학을 미국에 잘 소개한 L. 뻘코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점도 여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암의 신학에는 그 자신의 학문의 여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정암은 후기로 갈수록 화란의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했으며 그만큼 자신의 글에 그것을 반영하였다.

정암은 칼 바르트의 신학을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하고 로마서 주석 등에 이를 반영하기도 하였지만 전문 조직신학적 정치함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정암의 조직신학적 식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정암의 “계약론”이 보여주듯이, 그는 조직신학적 진리를 확고하게 견지하는 가운데서 자신의 주석 작업을 수행했다. 그는 성경주석의 말미에 본문에 해당하는 교리를 별도로 논하여 부록과 같이 수록하고는 하였는데 이는 성경의 가르침이 곧 교리라는 그의 신념을 방증한다.

정암은 자신이 말했듯이 일생동안 세 가지 즉 “신학교육, 주석집필, 설교”에 힘썼다. 그의 역동적인 교리이해는 이러한 토양 가운데서 배태되었다. 정암의 언약사상은 칼빈과 칼빈을 잇는 개혁주의 전통에 정확히 서 있다. 정암은 “칼빈주의는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르쳐 준다”고 확신했다. 정암의 이해는 행위언약의 조건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은혜의 절대성을 말하는 개혁주의 언약사상을 확고하게 따르고 있다. 정암은 개혁주의의 구속사적—구원론적 이해에 충실하게 자신의 언약신학을 전개하였다. 구속사적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대속의 의를 역사상 다 이루셨다. 구원론적으로, 그 다 이루신 의를 이제 우리를 위하여 전가해 주신다. 이러한 구속사적 구원론적 이해의 근저에는 중보자 그리스도가 한분이시며 동일하시다는 중보의 유일성(unity)과 계속성(continuity)에 대한 인식이 가로 놓여있다. 이러한 가운데 정암은 언약의 목적 혹은 열매인 영생을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관점에서 논한다. 정암의 “계약론”의 폭과 깊이는 이러한 연합의 폭과 깊이와 비례한다.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Soli Deo Gloria in Aeternum)!

 

 

 

출처: 기독교개혁신보 http://rpress.or.kr/xe/87735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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