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참된 의미
(조셉 얼라인)
조셉 얼라인은 1643년 잉글랜드 월트셔 지방에 있는 더비츠에 살던 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청교도 혁명의 와중에서 성장하였고 링컨 신학교를 거쳐 스톤턴 박사가 이끄는 코퍼스 크리스티 청교도 신학교를 나와 교목이 되었다. 그는 거기서 경건과 면학의 생활을 계속하면서 학생들뿐만 아니라 동료 교수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인근 마을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그후 청교도의 영향이 매우 컸던 타운톤에서 목회하다가 청교도 혁명이 실패하고 왕정이 복고되면서 다른 청교도 목회자들과 함께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일깨워주다가 1668년 34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사역은 짧았지만 죠지 휫필드나 스펄전과 같은 많은 복음 전도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I. 회개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
1.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곧 회개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 사데와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색만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명색만 가진 까닭에 그리스도로부터 책망과 버리시겠다는 경고를 받았다.(계 3:14-16) 오늘날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서 죄에서 떠나지 않는(딤후 2:19),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하는(딛 1:16)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참으로 회개한 사람들로 인정하시지 않는다. 여전히 죄 안에서 살면서 회개했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도 행악자들로 판단받아 배척되는 것을 본다.(마 7:22-23)
2. 세례라는 그리스도의 뺏지를 다는 것이 곧 회개는 아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리고 마술사 시몬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례를 받았다. 만일 회개나 중생이 세례와 동일한 것이라면, 이것은 마태복음 7:13-14절이나 그 외의 많은 말씀들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문은 좁고 길은 협착하여”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더 이상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청함을 받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다”는 말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마 22:14) 이 주장이 옳다면 제자들처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하는 대신에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이까?”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세례만 받으면 간음을 한 사람이든, 욕하는 사람이든, 시기하는 사람이든, 주정뱅이든,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지 않겠는가!(고전 5:11, 6:9-10)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무엇을 받았든지 혹은 받은 체 했든지 간에 그 뒤로 경건의 능력이 없어 무지하거나 세속적이거나 형식적일 경우에는 ‘반드시 거듭나야 하고’(요 3:7)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지옥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한마디로 거룩하고, 엄격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히 12:14)
3. 회개는 도덕적 의에 근거하지 않는다.
이런 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를 뛰어넘지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마 5:20)
4. 회개는 겉으로 경건의 규율을 지킨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경건의 능력 없이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딤후 3:5),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다.(마 6:5) 자주 금식할 수 있다(눅 18:12).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을 낼 수 있다.(사 1:11) 그러면서도 회개와는 무관할 수 있는 것이다. 위선자들도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을 할 수 있다.(고전 13:3)
5. 회개는 조명을 받거나 깨닫거나 혹은 피상적인 변화나 부분적인 개혁을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번 조명을 받은 사람이라도 배도할 수 있다.(히 6:4-6), 벨릭스도 깨닫고 두려워했다.(행 24:25) 헤롯도 이러한 반응을 많이 보였다.(막 6:20) 깨달음으로 죄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것과 회개의 은혜로 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죄문제로 양심의 고통을 겪는다. 그런 까닭에 자기 죄를 깨닫는 것을 회개한 것으로 오해하고서 자기들의 상태에 안심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방종하던 생활을 청산했기 때문에, 악한 세상 친구들이 정욕을 끊어버리고서 정신차리고 살기 때문에 이제는 참으로 회개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거룩하게 되는 것과 점잖아지는 것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잊고 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쓰다가 결국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그리스도교에 거의 도달했다가 결국 이르지 못한 사실을 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채찍이 무섭게 후려칠 때에는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읽고 죄짓기를 두려워하지만, 양심의 사자가 잠들면 바로 다시 죄를 짓는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 때의 유대인들보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고난이 그치자 하나님을 잊었다. 여러분도 고통스런 죄를 버리고, 세상의 난잡한 행위들을 피한 후일지라도 육체의 본성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살려면 제 말을 들으시오. 왜 스스로를 속이는가? 왜 모래 위에 희망을 쌓으려고 하는가? 그 희망을 산산이 부수는 어려운 일이 여러분 앞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친 채 죽어 지옥에 들어가기보다는 차라리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배우고, 여러분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 희망을 버리는 편이 낫지 않은가?
만일 내가 앞에서 말한 것보다 더 나은 터 위에 희망을 두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양심의 소리를 들으라.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이 회개했음을 변호하겠는가? 성직자 의복을 입은 것으로 변호하겠는가? 교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해다는 것으로 변호하겠는가? 성경의 내용을 안다는 것으로 변호하겠는가? 교양이 있고, 종교적 의무를 잘 이행하며, 사람들과 정직한 거래를 하고,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으로 변호하겠는가? 나는 주님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다. 그런 변호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들이지만, 여러분이 회개했음을 증명해 주지는 못하며, 따라서 여러분이 구원을 얻는 데에도 충분하지 못하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지체하지 말고 철저히 돌아서기로 결단하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살피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사역을 마치실 때까지 쉬지 마시오. 여러분은 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버려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죄짓기를 그만두고 회개하고 돌아서시오. 그리스도께 돌아가 용서와 새롭게 되는 은혜를 구하시오. 여러분을 그분께 드리고 그분과 함께 거룩한 생활을 하시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을 뵐 길이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경고를 귀담아 들으시오.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시오. 근신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사시오. 여러분의 손을 씻으시오. 둘로 갈라진 여러분의 마음을 정결케 하시오. 행악을 버리고 선행을 배우시오.(잠 1:23, 9:6, 사 1:16-17, 딛 2:12, 약 4:8) 그러나 이전의 생활을 계속하면 여러분은 반드시 죽을 것이오.
II. 회개의 본질
회개란 간단히 말해서 마음과 생활 양면에 일어나는 철저한 변화이다.
1. 회개를 일으키는 분은 성령이시다.
회개를 가리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살후 2:13)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삼위 하나님 중 다른 분들을 제외하는 것은 아니다.(벧전 1:3, 행 5:31) 그렇지만 성경은 이 일을 주로 성령께로 돌리며, 따라서 우리에 대해서도 “성령으로 난” 자들이라고 한다.(요 3:5-6)
그렇다면 회개는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요 1:13) 자기 힘으로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려면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회개란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이며(엡 2:1),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으로서(갈 6:15, 엡 2:10), 전능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이다.(엡 1:19) 이런 일들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연인이 가지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착한 성품, 온유하고 순수한 기질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참된 회개는 할 수 없다. 회개는 초자연적인 역사이다.
2. 회개에 유효한 동인(動因)은 내적인 동시에 외적이다.
1. 내적인 동인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뿐이다.(딛 3:5, 약 1:18, 엡 1:4)
하나님은 사람 속에서 마음을 돌이키실 만한 것을 찾지 못하신다. 불결해서 외면하실 뿐이다. 우리 안에 그 분의 사랑을 일으킬 만한 것은 없다. 그러나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릴 일이 생겼다. 그 일을 보는 사람은 “은총, 은총이 네게 있을지어다!”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슥 4:7)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자녀들인 여러분이여, 배은망덕한 여러분이여, 값없이 주시는 그 은혜를 더이상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사실과 더 이상 찬양하고 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라.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 있으며, 상투적이고 가벼운 몇 마디 말로 넘겨버릴 수 있는가?(벧전 1:3, 엡 2:4-5)
2. 외적인 동인은 예수님의 공로와 중보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신령한 복들을 받는다. 그분은 아직 믿지 않으나 선택함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신다.(요 17:20) 회개는 모두 그분의 수고의 열매이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모든 고통은 우리를 낳으시려는 해산의 고통이었다. 그분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스스로를 거룩하게, 즉 스스로를 희생의 제물로 구별하셨다.(요 17:19) 우리는 그 분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단번에 당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일을 통해 거룩하게 된다.(히 10:10)
만일 여러분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여러분이 누구에게 빚지고 있는지를 알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고통과 기도이다. 망아지가 어미에게 달려가서 젖을 먹는 것도 신자가 그리스도께 달려가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는가? 세상에 그리스도처럼 여러분을 생각해 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그리로 가라. 세상이 여러분들의 편인가? 여러분들은 이런 세상의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여, 생명이 남아 있는 동안에 여러분의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시오.
3. 하나님은 사람과 말씀을 회개의 도구로 쓰신다.
1. 하나님은 사람을 회개의 도구로 쓰신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복음 전도와 목회 사역을 회개의 도구로 쓰신다.(고전 4:15)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역자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행 26:18)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주님의 사자들을 박해하고 있다.
2. 하나님은 말씀을 회개의 도구로 쓰신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영혼을 소성케 하고(시 19:7),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것(딤후 3:15)이 말씀이다.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썩지 않을 씨이다.(벧전 1:23) 우리가 씻김을 받는 것도 말씀에 의해서이다.(엡 5:26)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도 이 진리를 통해서이다.(요 17:17) 이것은 우리에게 믿음이 생겨나게 하고,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롬 10:17, 약 1:18)
말씀의 새롭게 하는 능력을 맛본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말씀을 목에 걸고, 손가락에 끼고, 가슴에 새기시오.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가고, 잘 때도 말씀의 보호를 받으며, 깰 때도 말씀과 대화를 나누시오(잠 6:21-22, 시 119:93)
회개하지 않은 분들은 성실히 말씀을 읽고, 또 말씀이 힘있게 전파되는 곳으로 찾아가시오. 성령님이 말씀 안에서 여러분에게 임재하시기를 기도하시오. 무릎을 꿇고 설교를 듣고, 설교를 듣고 무릎을 꿇으시오. 설교가 여러분 속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그것을 기도와 눈물로 받지 않고,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4. 회개의 목적은 사람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이다.
우리는 거룩함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되었고(살후 2:13), 영화롭게 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롬 8:30) 그러나 우리가 선택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사 60:21), 그분의 아름다우신 덕을 선전하며(벧전 2:9),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되기 위함이다.(골1:10)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은 왜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잊지 마시오. 여러분의 빛을 환히 비추고, 여러분의 등불을 계속 타게 하며, 시절에 맞춰 많은 열매를 맺으시오(시 1:3). 하나님의 계획을 좋아 여러분의 인생 계획을 설계하시오. 그러면 그분은 여러분 안에서 존귀히 되실 것입니다.
(빌 1:20)
5. 회개의 주체는 선택받은 죄인들이다.
회개는 자기의 모든 지체와 마음을 다 드려서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정하신 자들만 부르신다.(롬 8:30)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양들 외에는 아무도 그분을 믿고 나올 자가 없다.(요 6:37,44) 효과적인 부르심은 영원한 선택과 나란히 진행된다.(벧후 1:10) 선택 받았는지의 여부를 먼저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시작하는 일이다. 회개를 바로 했으면 선택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내가 만일 구원받기로 선택되었다면 굳이 무슨 일을 할 필요가 있는가? 만일 선택받지 않았다면 내 입장에서 어떤 일을 해도 그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말한다면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읽어보라. 행 3:19, 롬 8:13, 마 4:17, 롬 2:5, 계 2:21
확실한 것은 하늘의 예정이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정죄를 받는 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이 얼마나 쉽고 간단한 길인가? 이 길을 마다하고 여전히 돌짝 길을 가려 하는가? 회개의 변화는 사람의 인격 전체에 미친다. 자연인도 도덕적으로 선한 면을 몇 가지 지닐 수 있지만, 인격 전체가 선하지는 못하다. 회개는 낡은 건물을 보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무너뜨리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것이다. 헌옷을 거룩함이라는 새 옷감으로 깁는 것이 아니다. 참된 회개는 그 순간부터 자기의 모든 힘과 원칙과 실천을 가지고 거룩함이라는 옷을 새로이 지어 가는 것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바닥부터 지붕까지 완전히 새로운 건물이다. 그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이다. 모든 것이 새 것이 된다.(고후 5:17) 회개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사는 새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과 육체와 생명 전체의 움직임, 즉 사람 전체에 미치는 것이다.
1. 마음 : 회개는 판단의 저울을 바꾸어 놓는다. 회개는 옛 사람과 세상적인 관심사보다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비중을 두게 한다. 회개는 마음의 눈을 열게 하고, 타고난 무지의 각질을 눈에서 벗겨주며, 사람을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게 만든다. 그리하여 전에는 자기의 처지에서 아무런 위험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가 상실된 사람이며, 은혜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된다.(행 2:37) 전에는 죄를 짓고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던 사람이 이제는 죄가 모든 악의 주범임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죄가 불합리하고 불의하며 추하고 냄새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죄를 경계하고 메스거워하며 두려워하고 피해버린다. 이전에는 그리스도에게서 흠모할 만한 아무런 모습도, 아름다움도 보지 못했는데, 이제는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고서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이 감춰져 있는 밭을 사려고 한다. 이제 그리스도는 자기가 찾는 진주이다. 이 새로운 빛에 따라 사는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마음과 판단을 지닌다.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의 전부이다. 하늘에도 땅에도 그분 같은 이가 없다. 세상 모든 것보다 진정으로 그 분을 좋아한다. 위선자도 하나님이 최고선(最高善)이라는 말에는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위선자는 하나님을 자기에게 가장 바람직하고 적합한 선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분께 순종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회개한 사람은 의지의 방향이 바뀐다. 그는 새로운 목적과 계획을 세운다. 이제는 하나님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세상에 속한 것들은 바라지도 계획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케 되시기를 바란다. 그는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향유하는 것보다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을 더 행복하게 여기면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분께 영광드릴 수 있기를 소원한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크게 되는 것, 그것이 그가 지향하는 목표이다.
회개한 사람은 선택도 바뀐다. -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최고 복(福)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와 거룩함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매개로 정한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인정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억지로 혹은 그저 필요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그분께 나온다. 그의 선택은 심한 양심의 가책이나 혹은 임종하면서 지옥보다는 그리스도를 택하는 식의 두려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자기의 최선의 선택임을 굳게 믿으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경우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보다도 그분을 소유하게 된 것을 더 좋아한다.(빌 1:23) 또한 그는 좁지만 의로운 길을 간다. 어쩔 수 없어서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기고 사랑해서 간다. (시 119:173)
그는 하나님의 언약들을 굴레로 생각하지 않고 유업으로 생각한다. 그는 그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쁨으로 생각한다. 그것을 속박으로 생각하지 않고 좋은 음식으로 생각한다.(요일 5:3, 시 119:14, 16, 47) 그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멜뿐 아니라 이를 스스로 원하기도 한다. 그는 거룩한 생활을 하되,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쓴 약을 먹듯이 하지 않고, 배고픈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을 대하듯이 한다. 거룩함을 실천하려는 시간만큼 달게 여겨지는 게 없다. 이것이 그의 양식이요, 그의 체질이며, 그의 눈이 바라는 바요, 그의 마음이 기뻐하는 바이다.
회개한 사람은 정서의 물길이 새롭게 뚫린다. - 이제는 요단강이 거꾸로 흐르며 자연적인 방향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희망이 된다. 이것이 그의 상급이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희망이 되며, 이것이 그의 상급이다. 그는 여기에 눈을 두고, 마음을 둔다. 풍랑을 만나 죽게 된 상인이 목숨을 건지려고 물건들을 바다로 내던지듯이, 그는 기꺼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이 보석만 지닌다.
그의 가장 큰 욕구는 금이 아니라 은혜이다. 그는 은혜를 목말라 한다. 마치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며, 감춰진 보물을 찾듯이 그것을 캐내려 한다. 그는 위대하기보다는 은혜롭게 되기를 바란다. 유식한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가 회개하기 전에는 이렇게 말했다. “유명 인사가 되고, 큰 부를 누리며, 무한한 향락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은) 이 지긋지긋한 빚을 다 갚아버리고 나와 식구들이 먹고 살 걱정없이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회개한 후에는 말이 이렇게 바뀐다. “내 부패한 본성이 말갛게 씻겨지고, 하나님과 화목한 생활을 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말자. 나처럼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독자 여러분의 영혼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회개한 사람은 좋아하는 것이 바뀐다. - 그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많은 재산을 좋아했듯이 좋아한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율법을 이제는 기뻐한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분의 백성들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며, 그들이 번영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제 고통당하는 것보다 죄짓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전에는 재산이나 명성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잃을까 두려워했다. 고통이나 가난이나 망신 등 아무것도 아닌 것이 두렵게 들렸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불명예나 노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불명예나 노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다는 생각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회개한 사람은 슬픔의 성격도 변한다.(고후 7:9-10)- 자기 죄를 살펴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이제는 전과 달리 그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준다. 회개한 사람은 죄에 대해서 증오심을 갖는다. 죄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는다.
2. 육체 : 회개하기 전에는 육체가 죄의 도구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성전의 거룩한 기구들이 된다. 전에는 자기 몸을 함부로 사용하던 사람이 이제 회개하고 난 뒤에는 거룩함과 영예, 절제와 정절, 그리고 근신함을 간직하며 주님께 온전히 드린다.
눈 - 전에는 정처없고 음란하며 거만하고 질투로 가득 찼으나, 이제는 죄를 회개하는 마리아의 눈이 되고,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을 읽고 긍휼을 베풀 대상을 찾으며,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찾는데 쓰인다.
귀 - 전에는 사단의 소리에 열려 있었고, 부도덕한 말이나 시시한 잡담, 내용없는 우스갯소리를 즐겨 들었지만, 이제는 평생 그리스도의 종이 되겠다는 표시로 하늘의 문설주로 향해 있으며, 그분의 제자들을 향해 열려 있다. 그것은 언제나 “주인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겠습니다.”라는 자세[를 하고 있다. 그것은 가뭄에 비를 기다리듯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며, 일정한 음식보다(욥 23:12), 꿀과 꿀송이보다(시 19:10) 그 말씀을 더 귀하게 여긴다.
머리 - 전에는 세상적인 계획으로 가득했으나 이제는 다른 것들로 가득하며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는 데로 기울어 있다. 회개한 사람은 머리를 소유욕을 채우는 데 쓰지 않고 자기 사명을 깨닫고 발휘하는 데 쓴다. 그의 머리에 들어 있는 생각과 관심은 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에서 떠날 것인가에 몰두해 있다.
마음 - 전에는 더러운 정욕의 소굴이었지만 이제는 향기로운 제단이다. 거기서는 거룩한 사랑의 불이 항상 타오르고 매일 기도와 찬미의 제사가 드려지며 거룩한 소원의 향기와 감사와 눈물의 호소가 끊임없이 올라간다.
입 - 이제 생명의 우물이다. 회개한 사람의 혀는 순백한 은과 같과 그의 입술은 많은 사람의 영혼을 먹인다. 이제는 은혜의 소금이 그의 말에 맛을 내고 부패를 막아주며(골 4:6) 더러운 대화, 아첨, 자랑, 욕설, 거짓말, 맹세, 험당 등 이전에 마음속의 지옥에서 불처럼 타올라오던 것들(약 3:6)로부터 사람을 깨끗하게 해 준다. 목구멍은 이전에는 열린 무덤이었으나, 이제는 기도와 거룩한 대화의 순결한 숨결을 내보낸다. 회개한 사람의 언어는 이제 세상 사람의 언어와 다르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내세의 일에 대해서 말할 때처럼 유창할 때가 없다. 그의 입은 지혜를 낸다. 그의 혀는 자기를 지으신 분의 덕과 영광을 찬미하는 은 나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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