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

[스크랩] 인간론2/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하나님아들 2015. 12. 29. 15:52

인간론2/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한우리교회 박홍섭 목사

 

서론-인간존재의 기원, 인간이 진화의 산물인가?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바뀌어 진다는 데 대해서는 지질학도, 형태학도, 발생학도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의 창시자인 다윈의 저작들은 불 확신을 말하는 말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추측해도 좋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두개의 주요 저작 속에서 무려 800회 이상이나 나온다.(브리얀;Bryan) ) 찰스 다윈의 종말을 아는가? 죽음에 임박한 다윈은 나는 미숙한 경험을 알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하려고 헤매다가 진화론이라는 종교를 만들었다. 소작인들에게 말해 달라. 예수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구원에 대하여... 그것이 최고의 주제가 될 것이다. 창문을 열고 찬송해 주길 바라오. 함께 찬송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윈은 죽음 직전에 진화론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창조론을 고백하였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다. 지난 주에 확인한 것처럼 피조 된 인격체이다. 기독교 인간관은 창조서부터 시작한다(139:13-16). 우리는 시인처럼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의 기적에 의해 조직된 것임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내면까지 투명하게 살펴본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1. 인간창조의 목적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창조된 목적은 무엇인가? 수메르와 바벨론의 창조 설화에서는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신들의 멍에를 메고 가기 위한' 것에 있다. 즉 신들이 매일 무거운 고역을 인간에게 지우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한다. "아트라카시스 서사시'(The Atrachasis Epic)에서는 인간창조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매일 고된 노동의 책임을 진 하층계급의 신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들은 회의를 소집한 후, 인간에게 그 고역을 맡기기 위해 인간창조를 결정하였다. 그래서 신들은 고역의 멍에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인간창조를 축하했다. 수메르에서는 아주 고대로부터 대대적인 민중부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성전건축과 종교의식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은 바로 이런 부역을 위해, 신들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바벨론의 아카드 제국의 창조설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 6편도 같은 내용을 전해준다: 마르둑(Marduk) 신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피를 모으고 뼈를 만들겠다. 내가 야만인을 창조하겠다. 그의 이름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진실로 야비한 인간을 나는 창조하겠다. 그는 신들을 섬기는 책임을 맡을 것이다. 신들이 편안해지도록!"

 

그러나 성경은 인간창조의 목적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43:21). 물론 다른 부가적인 목적이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다루기로 하고 근원적인 인간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목적도 항상 그에 부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소요리 문답 1문이 무엇이라고 묻고 답하고 있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는가?

 

2.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이러한 목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다. 어떻게 지어졌는가?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본질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흔적들. 발자취 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특별히 구별된 존재이며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며 살아있는 계시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인간학이 가장 중요시하는 인간이해의 열쇠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이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을 놓치면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1)구약의 진술

구약은 직접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창세기에 세 번을(1:26-27, 5:1, 9:6) 말하고 있으며 간접적으로 시8편이 언급한다. 먼저 창1:26-27에서 동물들은 각기 종류대로 창조함을 받았지만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 곧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고 한다.

 

2)신약의 증언

3:9 “이 혀를 가지고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기도 하고 이 혀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도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등의 구절이 있다.

 

3.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진술하는 창1:26-28절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형상첼렘이라는 단어이고 모양데무스라는 단어로, 이 두 단어는 라틴교부들의 주장처럼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되어진 것이 아니라 둘 다 ‘~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교차 사용된 단어이다. (Keil and Delitzsch의 주석, Biblic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1, The Pentateuh, trans. James Martin, p63에서 루터를 인용해서 말하고 있다. 70인 역과 라틴어 번역은 형상과 모양 사이에 접속사를 삽입했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이 두 단어 사이에 접속사가 없다.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의미적 차이가 없다. 1:26절에서는 형상과 모양이 같이 사용되었고, 5:1절에는 모양이라는 단어만 사용되고 또 창5:3절에는 다시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은 두 단어가 같은 뜻으로 혼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레니우스는 형상을 인간의 합리적이고 자유스러운 성품이라고 말하며 모양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덧입혀주신 신성한 의복이라고 말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image)으로 창조되었지만 타락 시에 하나님의 모양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하면서 형상과 모양을 구분한다. 이런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이 중세까지 이어져 스콜라주의적 신학자들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타락시에 상실한 것은 단지 덧붙여진 은사뿐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토마스아퀴나스는 이레니우스처럼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과 닮은 것이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같은지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거울이 실체를 반영하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투영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모양대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시켜 주는 유일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인간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바빙크는 말하기를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인간의 그 전체성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했으며, 칼 바르트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면 인간일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사실 속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이 담겨있다.” 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어쩌다 덧붙여진 부산물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을 닮았고 무엇이 하나님을 반영시키고 있는 것인가?

 

1)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본 인간-삼중적 관계의 존재

우리가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1:15).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삶을 보면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있었던 것을 보게 된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4:34)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 동시에 그리스도는 온전히 이웃을 향하여 서 계셨다.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에게 나올 때에 그는 언제나 그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만물을 다스렸다.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하게 했고, 물위를 걸으셨으며, 초자연적인 고기잡이를 하셨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을 통해 만물의 통치권이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적 요소 중의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진 상태, 이웃을 향하여 열려진 상태, 그리고 자연을 통치하는 행위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 인간, 자연이라는 삼중적 관계 속에 놓으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하여야 한다. 물고기가 물 속에 있듯이 인간도 하나님께 속해 있으므로 그의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면전에서 사는 것같이 살아야 한다. 물고기가 물로부터 자유로움을 추구할 때 자신의 생명을 잃게 만들 듯이 인간도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할 때 죄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참되고 옳은 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인간론은 마땅히 거짓된 인간론으로 배격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은 다른 인간을 향하여 열려 있는 존재이다. 1:27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 한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떠나 홀로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창2:18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면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신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보완하면서 부족을 채워 온전하게 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떠나서 참된 인간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그의 모든 재능을 자신의 개인적인 만족과 세력 강화의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완하고 풍요롭게 하는 수단으로 여겨야 함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로 인간은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이다. 1:26-28절은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과 지배권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음을 말한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인간이 땅의 자원을 찾아내어 토지를 경작하고 농업, 원예, 축산업, 학문, 과학기술, 예술 등을 발전시켜야 함을 보여준다. 8:5-6절도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청지기적인 사명을 갖고 자연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 모든 관계 속에 넣으셨다. 우리는 이 세 관계 중 어느 하나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바르게 기능할 수 없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 되며(요일4:20), 나아가 이웃사랑이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바른 지배와 돌봄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 가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형상의 올바른 기능도 이 세 가지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2)구조적 측면과 기능적 측면의 하나님의 형상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의 형상과 좁은 의미의 형상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왔다. 루이스 벌콥은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구조적 측면의 형상으로 인간이 맺고 있는 삼중적인 관계성과 소명들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도록 하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부여된 상태라고 정의하고,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창조될 때 소유된 영적인 특성들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 작동하게 하는 인간의 올바른 기능성이라고 하면서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성이 그것이라고 말한다(3:10, 4:24). 헤르만 바빙크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함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본체와 질, 자연과 은총, 창조와 구속 사이의 연관성을 가장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죄로 인한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는 것이다. 타락 이전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생생하게 나타내었으나 타락 이후 인간은 좁은 의미의 형상은 전적으로 상실되었고, 넓은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형상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되고 그 방향이 삐뚤어져버려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없게 되었다. 칼빈은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미친 영향을 말하면서 그 형상이 전적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없어지고, 도말되어서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삶 속에는 끊임없는 무질서와 격정이 위험스럽게 도사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인간 안에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으며 그 흔적과 잔여물이 여전히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시켜 준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의 구조적, 기능적 측면의 구별을 통해 타락 이전과 이후를 말할 수 있게 된다.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여 구조적, 혹은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기능적,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도 생생하게 나타내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사람은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넓은 의미의 형상인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재능과 능력들조차도 죄악의 불순종한 방법들로 사용해서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죄의 심각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3)본래적 형상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지녔던 하나님의 형상을 본래적 형상(The Original Image)이라고 부른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그때에는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으며 조금 전에 말했던 삼중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서로를 사랑하고 섬겼으며, 하나님께서 맡기셨던 피조세계를 지배하고 돌봄으로 그들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은 아니다. 그들은 죄의 가능성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했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아담은 행로의 마지막 단계에 서있던 자가 아니라 행로의 초기에 서있는 자였다. 그의 상태는 잠정적이요 임시적인 상태였으며 그 상태로 그냥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더 높은 영광의 단계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죄와 사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다음과 같은 유보적 명령을 하신 것이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6-17)

 

4)변질된 형상(The Perverted Image)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은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심하게 파괴되고 변질되고 일그러졌다. 그러나 타락을 통해 인간이 재생 불가능한 마귀가 된 것이 아니다. 마귀의 종노릇 하지만 마귀는 아니다. 그러므로 타락으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타락한 인간은 타락했지만 여전히 인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능력, 재질, 재능들을 변질되었으며 방향이 너무도 크게 바뀌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고 오직 육체의 법을 만족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후의 인간에게도 있다고 말한다. 9:6과 약3:9은 타락 이후에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증언한다. 여기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로마교회와의 차이는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건재를 말하지만 우리는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마저도 전적인 부패한 가운데 있어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구조는 남아있는데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 우상을 섬기고(1:20-23),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자연과의 관계도 완전히 일그러져 버린 것을 변질된 형상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재능들을 가지고 도리어 죄를 범한다. 최상의 것이 부패하여 최악의 상태가 된 것이다.

 

5)새롭게 된 형상(The Renewed Image)

타락으로 변질된 형상은 갱신과 회복의 필요성을 갖게 된다. 이것이 구속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럼 이 회복은 손실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서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향하여도 올바른 방향으로 서 있을 수 있고, 피조세계를 향하여도 바르게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형상의 갱신과 회복은 사람의 생애 가운데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온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사건이며 다가올 세상에서 그 형상의 부요함과 완전함이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후7:1)고 말하고 있고 엡4:22-24절에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새롭게 된 형상으로 영화를 소망하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6)온전케 된 형상

기독교 인간론은 최초의 창조상태로 돌아가는 구원이 아니다. 더 나은 상태로 완성되는 것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이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게 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죄를 짓지 않고 죽지 않을 수 있는 존재였지만 영화롭게 된 성도는 죄를 지을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가올 세상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다.”(3:21) 그때 우리는 인간이 창조된 삼중 관계의 무한한 풍요로움과 온전함을 누리게 될 것이며 인간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비로소 완전하게 될 것이다.

 

7)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

다음 시간에....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