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세계관에 대한 생각들
손기창
들어가면서
이 글은 95년 3월 한달동안 교회 청년회 주보에 연재했던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처음에 부탁받은 주제는 ‘세계관’에 대한 것었습니다. 저는 ‘세계관’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별로 좋은 발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계관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세계관이라는 것이 글이나 말, 독서만으로 이해하려 해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오히려 역효과가 생긴다는 나름대로의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세계관 관련 서적에 있는 내용은 짧게 요약하고 주로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정리하고 세계관과 신앙, 교회와 관련된 문제를 논하겠습니다. 마지막엔 주요 관련 도서들의 목록을 서평과 함께 제시할 것입니다.
세계관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지금 ‘세계관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만약 들어보셨다면 세계관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글은 대부분이 세계관에 대해 들어봤다는 전제에서 시작하겠습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까지에 걸쳐 한국 교회에는 세계관에 대해 일종의 붐이 일어났습니다. 비록 모든 교회에 이 ‘운동’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운동’의 여파로 많은 교회의 청년․대학부나 선교단체에서 세계관에 관한 내용을 양육과정에 포함시켰습니다. 서점에 가도 이 주제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번역되고 쓰여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대다수의 청년들이 세계관에 대해 들어 봤을 것입니다. 이 흐름의 과정을 돌아볼 때 거기에는 몇가지 중요한 오류들(이해, 전달과정, 적용과정 등의 면에서)이 있었고 그 결과 세계관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적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위의 질문에 대해 예상되는 답변 몇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세계관이란 현실참여(과거 운동권 학생들이 얘기하던 그런 의미에서의 현실참여)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공산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와 노동문제 등에 개입하듯이 이에 기독교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한 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면 현실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접근함에 유리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적 세계관을 형성해야 하는 이유가 공산주의에 대응이나 현실참여를 위한 도구가 필요해서 도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다수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성경적 세계관의 필요성도 점차 잊게 되었습니다.
둘째, 성경적 세계관이란 조직신학의 몇몇 주제들을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개 성경적 세계관의 기본적인 틀로는 ‘창조-타락-구속-(완성)’을 제시합니다. 이는 조직신학에서 다루는 주제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또 실제로 성경적 세계관을 ‘공부’하다보면 신학적 견해에 대한 인용도 나오고 성경에 대한 해석의 문제도 등장하고 경우에 따라선 신학서적을 공부할 필요성(예를 들면, 언약, 구원, 교회, 하나님 나라, 종말론 등)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세계관이란 일반 평신도의 삶에는 필요없는,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세계관은 철학자들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런 생각은 성경적 세계관을 다루는 책들보다는 현대사회를 성경적 세계관에 의해 조망하고 문제점을 찾고 답변을 제시하는 식의 책들(Francis A. Schaeffer, James Sire의 책 등)을 읽어본 사람들이 주로 갖는 생각입니다. 과연 이 사람들의 책을 읽다보면 계몽주의니 실존주의니 인식론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고 인간이란 무엇이냐 등 철학적 질문들과 대답들이 쉴새없이 튀어나옵니다.
넷째, 세계관을 외치는 사람들은 과격 내지는 비판적(심지어는 파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비판적이어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가까이 하기는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혹 있습니다. 이는 세계관에 대해 언급하는 자들이 기존질서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정말 파괴적일 수도 있기는 합니다.
다섯째, 세계관은 성경, 기도, 찬양, 봉사, 선교 등과 같이 우리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어서 성경, 기도, 찬양, 봉사, 선교처럼 우리는 세계관도 공부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관을 여타의 신앙생활의 한 영역과 동등하게 보는 견해입니다. 이런 경우 세계관은 시간과 능력이 남는 자들을 위한 선택사항이 됩니다.
여섯째, 세계관은 학자나 지도자와 같이 지적 활동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학자나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모두가 세계관에 대한 것을 공부하거나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계관에 대한 것에는 철학, 신학, 인문, 사회과학적 지식들이 많이 필요하며 그렇기에 누구나(지식인이 아니어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기 때문에 세계관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반면에 위의 생각들은 세계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견해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오해에 대한 책임의 일부는 세계관을 외치는 자들의 잘못(그들의 전달과정, 삶의 양식 등)에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몇가지 부정적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모든 사람들이 세계관에 대해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세계관을 철저히 ‘공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관에 대해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위의 생각들에 대한 변명과 함께 세계관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인식, 정립해야할 당위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세계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공산주의가 몰락해 버린 지금에는 필요없는 것입니까? 공대생 출신인 내게는 필요없는 머나먼 주제들입니까? 혹은 누구처럼 과격하고 파괴적이라면 전혀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내용은 좋지만 성경 읽고 기도하고 봉사하기도 바쁜 마당에 세계관까지 알아야 하다니 너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십시오.
Ⅱ.세계관과 신앙생활
세계관 ???
기존의 세계관에 대한 글을 보면 대개 ‘성경적’ 세계관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설명이 대부분의 지면을 채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세계관은 무엇이라고 명시하기보다는 세계관에 대한 예를 들고 간단히 정리하는 것으로 구체적인 ‘성경적’ 세계관 내용 소개를 대신할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에 관심있는 사람은 후에 제공할 도서목록을 참조하거나 메일을 보내주십시오.
‘늑대와 춤을’ 이라는 영화를 대부분이 봤을 것입니다. 그 영화에는 풋내기 장교 John Dunbar가 인디언 ‘늑대와 춤을’이 되기까지 그의 삶의 양식이 변화되는 과정이 그려있습니다. 영화 속에 그려지는 백인과 ‘수’족 인디언의 삶의 양태는 전혀 다릅니다. 두 부류는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차이를 요약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은 그들의 이름입니다. 장교 John Dunbar가 인디언으로 받아들여지고 인디언으로서 살아가기 시작한 증거로 ‘수’족이 어느날 그를 ‘늑대와 춤을’이라고 부르기 시작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인디언 ‘늑대와 춤을’은 자신을 직무유기한 장교 John Dunbar로 생각하고 압송하는 군인들을 동료 인디언들과 함께 죽입니다. 추장인 ‘열마리 곰’이 말합니다. “백인들이 찾는 John Dunbar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를 한 명의 인디언 ‘늑대와 춤을’로 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영화의 중간에 John Dunbar와 ‘수’족은 버팔로 사냥을 가서 일부 백인들이 잔인하게 껍질을 벗겨놓은 버팔로 시체를 보게되는데, 이것이 백인과 ‘수’족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백인에게 버팔로는 착취의 대상이었지만 ‘수’족에게 그것은 그들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백인은 백인으로서 그의 삶의 양식이 있고 ‘수’족은 그들 나름대로 삶의 양식을 갖는데 이는 단지 버팔로에 대한 견해만의 차이가 아닙니다. 각각은 그 삶 전체가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기반에서 진행되는데, 사물을 보는 방식뿐 아니라 가치, 사고방식, 의복 등등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른 어떤 일관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보고 그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총체적인 틀, 그것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세계관이란 용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세계관이란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하고, 실제로 세계관이란 용어를 모른다 해도 성경적으로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 ‘삼위일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도 이 말이 신앙생활에 어떤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그려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전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성경에는 ‘새것’이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바울 사도는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새로운지 그 삶의 양식도 달라집니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볼 때 그 ‘全삶’이 달라지기보다는 이전의 삶에 ‘종교생활’만을 더해놓은 듯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종교영역과 ‘세상’의 영역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여 두 영역이 서로 모순된다 해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살기 쉽습니다. 실제로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많은 영역을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영역이란 있어서는 안됩니다. 세계관이란 용어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삶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일관되게 사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이 이 용어를 도입한 것입니다.
세계관과 신앙
세계관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지난주에 쓴 것과 같이 세계관은 신앙의 부분적인 것으로, 혹은 일부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계관에 대해 철저히 ‘공부’하고 체계화하는 일은 모든 사람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관을 ‘그 사람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지 간에 그 사람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삶의 방식(틀)’이라고 한다면 이는 신앙(기독교 뿐 아니라, 타종교나 심지어 무교의 경우에도)의 일부분이 아니라 ‘신앙으로 구체적인 삶을 판단하고 행하는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신앙인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의 세계관은 철학자나 일부 기독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그들이 알고 있든지 모르든지간에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서로 삶의 양식이 다르듯이 이 땅위의 세계관은 여러가지가 있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끼리도 서로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각자가 가졌던 세계관이 조금씩 다를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우리의 세계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의 성경적 세계관, 즉 ‘성경’에 바탕을 둔 ‘하나’의 세계관을 제시하면서 그 세계관을 견지하고 살아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성경적’ 세계관이 여타의 세계관들과는 서로 상충된다고 말합니다. 서로를 ‘침노’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이를 심각하게 고려해야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즉, 모든 영역에서 성경적 세계관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 삶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反성경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중립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고 했을 때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은 우리가 이 세대를 배우려고 기를 쓰고 노력해서 본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여 살아가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지 않음은(그 용어를 사용하든지 않든지) 결국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게 됨을 의미합니다.
세계관에 대해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침노’당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려는 소극적인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무관한(즉, 하나님을 反하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영광을 돌리도록 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때때로 과격한 사람들로 보이거나 공산주의에 대한 대항의 도구로 세계관을 이해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 의지를 발현해 감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런 전반적인 태도는 개혁주의 전통의 근간이 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이 땅에 실현하려는 몸부림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다음에는 성경적 세계관을 어떻게 습득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견지하고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Ⅲ.성경적 세계관 갖기
세계관은 삶을 통해서
제 조카 녀석이 집에 와 있으면 아기를 대하는 두 방식의 재미있는 대조를 보게 됩니다. 누님은 아기와 놀면서 아주 밝은, 경쾌한 장조의 노래를 부릅니다. 반면에 아버지는 가끔 자장가를 부르시는데 누나와는 달리 우리나라 전통의 민요처럼 다소 구슬픈 단조입니다. 앞의 내용과 같이 이런 문화적 차이는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아버지의 자장가는 특별히 배우신 것이 아니라 어려서 자연스럽게 익혀온 삶의 양식입니다. 자장가뿐 아니라 우리 삶의 양식(형태)의 대부분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익힙니다. 즉 듣고 보고, 한번 두번 해 보는 가운데서 어느덧 우리의 것이 됩니다. 우리의 세계관은 끊임없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 속에 생성되고 변합니다. 주변환경과 주위 사람들의 삶을 별다른 비판의식없이 보고, 느끼며 살아갈 때 그 삶의 양식들에 의해, 그 삶의 양식에 맞게 우리의 세계관은 조절됩니다.
실존주의가 철학서적이 아닌 대중문학(특히 까뮈)을 통해 사상을 접하게 함으로써 여타의 철학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줬던 것처럼 우리의 세계관은 삶, 삶의 이야기(영화, 소설, 연극, 노래)에서 더 많이 영향받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좋든지 나쁘든지간에 말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의 전수
성경적 세계관을 갖게 되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이런 글을 통해서나 강의, 혹은 독서토론회 등을 통해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영향을 주기는 하겠지만 가장 자연스럽고 힘이 있게 변화시키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본’입니다. 주변에서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철저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이를 따라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할 때 우리의 세계관은 성경적인 형태로 조율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이렇게 삶이라는 자연스러운 방식을 통해서 성경적 세계관, 사고방식, 삶의 양식을 익히도록 의도된 두 제도가 있음을 봅니다. 그 둘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닌데 다름 아닌 교회와 가정입니다.
가정은 우리가 외부에 대해 개방적인 어린 시절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들을 가정을 통해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 6:5-7). 부모님이 살아가는 방식, 삶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 언어, 사람을 대하는 방식, 심지어 자장가의 곡조 등등 삶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비판적 생각없이 보고 있는 어린이들은 부모님의 세계관을 따라가게 됩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를 통해 다양한 그리스도인을 만남으로써 보다 폭넓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교회가 커다란 가정임을 생각하면(엡5:22-33) 이것이 잘 이해됩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또다른 중요한 방법은 예배입니다. 예배는 어떤 면에서는 삶의 태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예배가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 크심에 자신의 全人을 낮추고 경배하며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할 때, 성경적 세계관의 필수적 요소인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모든 영역에서 자신을 낮추고 드리는 것’에는 공식적인 예배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전술한 두가지를 심각하게 고려한다면 특별히 청년들로서는 혼인, 데이트, 가정 등을 생각할 때 이런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재고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삶을 그대로 보고 그에 따라 세계관을 형성할 자녀들을 생각할 때, 우리의 세계관과 그에 따른 삶의 모습이 성경적이지 않다면 혼인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기보다는 反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에 害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예배드리는 태도는 철저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하며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삶의 중심에 와야함을 다시금 생각게 됩니다.
세계관과 知性
세계관이 삶을 통해 전달된다고 하지만 또 한가지 중요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知的 활동을 통해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다양한 세계관들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자기의 세계관에 의해 어떤 것은 거부하고 어떤 것은 적극 수용합니다. 이 거부와 수용은 필연적인데 우리가 접하는 세계관들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知性의 비판적 활동은 대부분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삶에 대해 ‘저건 아닌 것 같다’라거나 ‘참 멋있다’등의 생각을 할 때는 이미 이 知的인 비판 활동이 그 背面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知的인 면도 창조하셨습니다. 비록 타락으로 왜곡되었으나 타락이 知性을 무의미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어눌하고, 하나님을 아는데 전적으로 무능력하지만 知性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뜻이 있는 것이고, 구속으로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었기에(골 3:10) 知性의 사용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知的인 체계는 적극적으로 啓發하고 심오화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맡아 그 뜻대로 섬기는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知性은 우리의 세계관을 체계화하고 튼튼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에 따라 세계관이 체계화된 정도가 서로 다른데 이는 知的인 활동을 啓發한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체계화된 세계관은 다른 세계관에 대해 비판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별 영향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세계관과 그에 따른 문화를 자신의 세계관에 따라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세상에서 구별되어야 하고 모든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변혁시켜야할 것을 생각하면 知性의 중요성은 다시 再考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知性을 계발한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열심히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성경적 세계관이 타 세계관과 구분되는 독특성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경적’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성경을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를 ‘啓示依存的 思考’라고 했습니다. 피조물이고 타락한 우리들로서는 자율적이고 중립적으로 사고를 진행해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느냐 거스리느냐의 양자택일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 ‘啓示依存的 思考’의 기초는 역시 예배입니다. 성경은 글로 표현되어 있고 글을 이해하는데는 知的활동이 전제되는데, 특별히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이해는 다른 어떤 말씀이해보다 철저하게, 그리고 全人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모든 인간에게 열려있는 복음을 소수의 엘리트에게 제한하는 것이 아니냐는 反論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로 많은 경우 그런 위험이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적 知性을 啓發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知的 능력의 차이가 實在하고 그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힘을 가져서 엘리트로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심하면 압제함에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데 있습니다. 굳이 답하자면 하나님께서 각기 다르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啓示依存的 思考를 훈련할 기회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잘 생각해 본다면 그 결과는 무시나 압제가 아닌 섬김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 혹은 가르침으로 혹은 경고함으로 하나님께서 더 많이 주신 능력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반면에 반대편에서는 이를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그 가르침 혹은 경고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자신의 知性을 계발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James W. Sire의 주장이 합당합니다. 그는 기독교적 知性을 계발하기 위해 두가지 태도가 요구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태도로서 敬畏함과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로서 겸손입니다.
지금까지는 성경적 세계관을 갖는 방법에 대한 것으로 그 속에 가정과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리고 기독교적 知性 啓發의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번에는 실제적인 적용문제의 한 예로서 컴퓨터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Ⅳ.컴퓨터에 대한 소고
제한점
세계관이란 인간, 기술, 컴퓨터 등 몇몇 분야에 대한 견해가 아닙니다. 이 글은 컴퓨터에 대해 정확하고 체계적인 論旨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생각지 못한 몇몇 아이디어를 제공함으로써 세계관이 이런 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과 실제 이 분야에 대해 생각해 나감에 있어 약간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목적입니다.
컴퓨터에 대한 생각들
현대인의 필수품, 직장인들에게도, 학생은 물론 가정주부에게도 꼭 필요한, 그래서 모르면 ‘컴맹’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 컴퓨터입니다. 어느 컴퓨터 상품광고에 나오듯이 영화도 보고, 복잡한 서류도 문제없고, 회화공부에도 그만인 것이 컴퓨터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반면에 컴퓨터 사용에 따른 부작용도 많이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컴퓨터에 從屬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전에 컴퓨터로 시작한 일을 다시 손으로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한시간짜리 리포트를 컴퓨터로 쓰느라고 11시간이 걸렸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이라는 구조적 특성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계속 발전해 갈 수밖에 없는데 이에 따라서 얼마후면 지금 쓰던 기계와 프로그램은 사용하기 힘들게 되고 결국 발전의 흐름을 따르려면 끊임없이 추가 비용뿐 아니라, 새로운 기능들을 배우는데 엄청난 헌신이 요구됩니다.
두번째로 주의를 요하는 것은 컴퓨터의 代理 人格化입니다. 컴퓨터는 말을 잘 듣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기에게 종속된 것으로 느끼게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와는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요즘의 아이들은 사람과 노는 것보다 컴퓨터와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접하고 만나는 대상을 닮아가게 마련이어서 대인관계에도 컴퓨터에게 하듯이 자기 중심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지금은 잘 볼 수 없지만 컴퓨터에 익숙한 세대들이 많아질 때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에서는 인격과 기술을 분리할 수 있는지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그것을 분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문제가 컴퓨터 통신에 있습니다. 채팅(Chatting)이라 불리는 서비스를 이용하면 키보드를 통해서 여러 곳에 떨어져 있는 다수의 토론자가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은 완전한 인격적 만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채팅에서는 자신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기껏 상대에게 제시되는 것은 ID(identification)라고 하는 별명뿐입니다. 서로 신상소개를 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자신에 대해 공개를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진행되는 얘기이므로 무책임하기 쉽습니다. 소위 채팅족들은 匿名性이라는 장점을 최대한 이용합니다. 이때는 전인격적인 교제는 익명성 속에서 그저 즐기기 위한 유희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컴퓨터의 자리 매김
위에 언급한 컴퓨터에 대한 몇몇 생각들은 그리스도인은 컴퓨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낳습니다. 컴퓨터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들은 대부분 현대기술의 진보가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사고 방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부정적인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기술의 발전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다라는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커녕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됩니다.
얼마전에 INTEL사의 Pentium칩에 대한 얘기가 新聞紙上에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펜티엄 칩에 오류가 있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현대인이 신뢰하는 컴퓨터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윈도우즈 3.1에 딸려있는 계산기에도 오류가 있음이 발견되어 MS사는 조용히 이를 교환시켰습니다. 이런 오류들은 우리 삶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은 틀릴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기술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기술을 만들고 사용하는 타락한 인간에 대한 성경의 견해와 背馳될 뿐 아니라, 일종의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컴퓨터는 어떤 자리에 있게 됩니까? 컴퓨터뿐 아니라 모든 기술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創意性과 지혜를 활용한다는 면에서 우리가 접근해야 합니다. 부정적이기보다는 굉장히 긍정적인 요소를 갖습니다. 이는 다른 학문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기술이나 학문을 창의적으로 지혜있게 행해야 함은 비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달라야 하는 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에 방향 지워져야 합니다(마 22:37-40). 이 말은 학문이나 기술을 종교적인 영역에 제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 사용에만 관계된 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동기에서 과정, 그리고 최종적 사용 결과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향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학문 혹은 기술에 종속되지 않아야 합니다. 학문이나 기술을 過信하면 그것은 첫번째 목적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창 1:26-28). 컴퓨터를 사용할 때 이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면, 혹은 학문의 영역에서 이성, 실험, 객관성 등을 과신하게 되면 결국 우리가 그것의 종이 되며 하나님의 자리에 기술, 학문, 이성 등이 올라앉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는 첫번째와 관련있는데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가 요구됩니다. 지식과 학문이 세분화된 오늘날, 자기 영역 밖의 일에는 그야말로 깡통이기 쉽고, 자신의 하는 일이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와 인간의 삶의 다른 측면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결국은 무책임하게 자기 분야에만 묻혀 종속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교회의 지체로서 개인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며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와 관계있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늘 새롭게 붙잡아주실 때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음받은 하나님 형상으로서 우리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인격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동일한 모양을 한 기술도 하나님 앞에 의미있게 사용될 것입니다.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몇가지 관련도서의 서평과 책을 읽는 방법, 그리고 몇가지 종합적으로 강조되야 할 것들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Ⅴ.세계관 관련 추천도서, 그리고 …
책을 읽는 방법과 추천도서 목록
대학 입시를 염두에 두고 한국의 교육풍토를 생각할 때 우리의 앎과 배움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인본적이고 희랍철학적 냄새가 납니다. 저도 그렇지만 대개 말하기를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등에서 아는 것을 행하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성경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요 참진리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으로 안다는 것은 행하는 것을 포함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너는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을 경외하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학 입시에 밀려 적어도 12년 이상을 공부해 온 우리는, 우리가 공부하는 것들은 우리의 삶과는 유리된 어떤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윤리시간에 열심히 외웠던 것이 우리 삶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운전면허 시험을 보면서 차선은 위반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을 ‘공부’하는 것과 실제 운전을 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너무 단순화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우리가 책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무엇인가를 배울 때 그 내용은 우리의 인격과는 떨어진 어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세계관에 대한 책들을 소개하여 세계관을 ‘공부’하도록 권하면서도 그렇게 ‘공부’한다면 우리의 세계관을 성경적으로 조율하기는커녕 우리를 교만하게 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많은 책을 이미 읽었다고, 좋은 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책의 의미와 함축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미 읽었다 해도 다시 읽어 보라고 권하면서 바르게 읽기 위한 몇가지 방법을 제안합니다.
바르게 읽는다는 것은 읽되 무작정 읽는 것도 암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계관을 공부하는 것은 외부로 향하기 위함이 아니라 철저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고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의 내용을 따라 ‘사고’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첫째 천천히 읽으십시오. 내용을 走馬看山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셜록 홈즈가 사건현장을 조사하듯이 꼼꼼히 읽어야 합니다. 둘째, 자신의 말로 정리하십시오. 별도의 노트를 이용하거나 아니면 책에 요점을 기록하면서 읽으십시오. 셋째,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 성격을 생각한다면 여러명이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계관 관련 책자 중 상당수가 책에 이해를 위한 질문 내지는 토론을 위한 질문이 있습니다. 이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몇몇 책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책들은 난이도, 내용, 유용성 등을 고려해서 엄선한 것입니다. 먼저 읽기 적합한 것 순서로 소개하겠습니다. 보다 폭넓은 목록이 필요하시면 HiTel의 KCM이나 Jesus 등의 동호회 자료실을 찾으시면 제가 작성한 약 50 권으로 구성된 도서목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① 죄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 (IVP) : 성경적인 세계관의 필요성과 구체적 방법에 대해 간략하게 제시하는 책으로 이 분야에서 드물게 한국인이 쓴 서적이어서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들을 설득력있게 제시합니다. 세계관에 대한 체계적인 제시는 어렵지만 입문서로서는 훌륭합니다. 세계관의 필요성을 이원론이라는 현실에서 출발하기보다 성경적 당위성에서 시작하는 것이 이책이 갖고 있는 또다른 장점이자 독특함입니다.
② 그리스도인의 비젼 (IVP) : 기독교인의 세계관을 창조-타락-구속의 틀로 설명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뿐 아니라, 이원론의 발전과정과 우리시대의 우상들에 대한 소개, 세계관의 적용, 그리고 참고도서 목록(주로 영서이지만)을 싣고 있습니다. 세계관을 익히는데 가장 표준적인 교재로 사용되고 있고 실제로 그만큼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③ 창조․타락․구속 (IVP) : 이 책에서 독특하게 제시되는 것은 구조-방향이라는 개념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논리를 철저하게 검토하면서 진행하는데 특별히 창조에 대한 부분을 비중있게 잘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비젼과 함께 교과서적인 책입니다.
④ 성경적 세계관 자료집 (기독교학문연구회편) : 기독교 학문 연구회(기학연)에서 성경적 세계관 세미나를 위해 편집한 것으로 「창조․타락․구속」과 「그리스도인의 비젼」등의 독서를 위한 문제, 토론문제, 성경공부 문제를 주축으로 공부에 도움이 되나 출판되지 않은 몇몇 외국학자의 글들과 오랫동안 세계관을 가르친 분들이 한국실정에 맞춰 쓴 글도 있습니다. 특별히 “80년대의 ‘세계관 운동’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반성”은 세계관을 공부하면서 빠지기 쉬운 위험등을 잘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계관 공부에 필수적입니다.
⑤ 지성의 제자도 (IVP) :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에 이은 저자의 걸작입니다. 책 제목의 지성이라는 것은 특정 elit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지성의 위치를 자리매김 함에 있어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위치, 그리고 그 인간의 일면으로서 지성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해 가는 접근 방식이 모범적입니다. 지성의 바른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한국 상황에 이 책은 앎과 행함의 관계를 명확히 해줄 것입니다. 과학, 학문, 문학과 대중매체, 역사 등도 지성의 활용 예로 다루고 있습니다.
⑥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의 말씀사) : 서양의 문화를 그리스-로마시대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훑어가면서 그 문화의 배후에 깔려있는 세계관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역사의 전후문맥 속에서 사상의 흐름을 일관성있게 제시하는 것과 그 시대의 세계관을 구체적인 문화를 통해 접근함으로써 세계관이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쉐퍼전집 5권에 포함되어 있는데 여러 사진들이 반드시 필요하므로 단행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⑦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 (IVP) : 세계관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를 내린 후에 유신론,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동양의 신비주의, 뉴에이지 등에 대해서 개괄합니다. 지난 2월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보다 깊이 있게 이 시대의 세계관들을 조망하려는 사람은 필히 읽어야 할 책입니다.
연재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으로 한마디로 ‘헌신’된 자세입니다. 사실 성경적 세계관을 ‘공부’하는 것 자체가 바쁜 오늘날은 굉장한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더 큰 헌신은 그 세계관을 따라 思考하고 그 세계관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계관은 잠시 유행했다 지나가는 일시적 운동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평생에 계속될 과업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에 따라 살려고 할 때 끊임없는 싸움(나 자신, 형제, 자매, 가족, 사회, 문화)이 필연적입니다. 더욱이 여기에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때론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던 것과 단절되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론 생계를 위협할 수도 있고, 자신의 기득권을 모두 버려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헌신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귀한 것을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비록 지금은 아프다 해도 버리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공동체로서 교회의 중요성입니다. 이전에 몇차례 언급했으므로 한 단락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를 기독교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예배이다. 철저한 공동체는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데, 이 공동체가 지배적인 문화를 타파하는 것은 그 예배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예배는 그 공동체의 생활패턴을 정해 준다. 그것은 세상에 순응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의 정신 곧 세계관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는 공동체이다. 결국 그 공동체의 예배는 단순한 의식적(liturgical) 활동정도로 퇴보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의 전 생활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이것이 로마서 12:1-2의 요점이다). 바로 여기에, 몰락해 가는 사회 속에서의 기독교의 문화적 증거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비젼중에서)
세번째는 이 모든 일을 주장하시는 성령에 대한 바른 인식의 요구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그 말씀이 우리의 전인격에 녹아들어 우리의 세계관을 바꾸는 일, 우리를 완전히 새것으로 만드는 일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아울러 이 일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인식한다면 그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시고 그 속에 유기적 관계가 지속되며 활발한 교통함이 있게 하시는 일도 성령께 돌려야 할 일입니다. 세계관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께 대한 의지함을 도외시한 채 그들의 주장을 펴나갈 때 그것은 서구의 이성중심적 세계관이 걸었던 것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즉, 명목상은 기독교 세계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이 되며 하나님을 배제하는 길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네번째, 성경적 세계관은 어떤 可視적 결실을 거둘 것은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어떤 결실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세계관이 진리이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지만 우리가 어떤 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결실인지 여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구체적 결실이 보이지 않아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종말론적 관점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결실은 하나님께서 각자의 공력을 시험하실 때에 드러날 것입니다(고전 4). 쉽사리 판단하여 낙심하거나 경망스럽게 좋아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 공력이 어디에 기초했는지 보이실 그날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것이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적 세계관을 따라 사는 사람의 모델은 날카롭고 파괴적인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찬 모습입니다. 이 말은 사랑은 날카롭지도 않고 어떤 것을 파괴하는 것과 대립하는 어떤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것이 막연하고 감정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책임있는 사랑에는 깊이 있는 생각이 바탕이 되어야 하고 때로는 무엇인가를 파괴하는 일도 생깁니다. 아무 비판적 태도없이 대인관계의 원활함만을 추구하는 것은 책임있는 사랑이 아니며 지극히 자기중심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분명히 사랑에는 철저히 비판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판적이어서 파괴적이기만 하다면 그것 또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의 중심 메세지일진대 우리의 세계관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에 드러나는 우리의 인격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고전 13장)의 모습으로 채워져야 하며 우리는 이 그림을 꿈꾸며 우리의 세계관을 조율해야 합니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읽으면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자신을 드리며 우리 전 인생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득차기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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