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

[스크랩] 성육신과 속죄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12. 7. 25. 15:16

 

 

성육신과 속죄의 관계는 무엇인가?

 

 

Ⅰ. 서 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기독론)은 성부와 성자, 성자와 인간 그리고 인간과 성부와의 포괄적인 내용들을 내포한다. 이때 그 중심가운데 흐르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한 가운데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인한 속죄이다. 그러나 성육신과 속죄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해서는 성경을 통하여 대부분 일치점을 확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혹은 해석학적 시각과 견해에 따른 기독론 논쟁은 고대로부터 치열한 논쟁을 이어왔다. 특히 성육신 부분에 있어 역사적 예수 탐구, 위로부터의 기독론-아래로부터의 기독론 등은 계속적으로 논쟁되어지는 진행형들이다. 그러나 논자는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 그리고 속죄는 동일선상에서 이해해야 함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성육신과 속죄의 관계를 고찰하기 위하여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양성에 관해 연구한 후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죽음당하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관한 견해들을 연구 정리하고자 한다.

 

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양성(兩性)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인간의 삶을 취하신 성육신의 역사이다(갈 4:4; 요 1:14-18).
  사도 바울은 성육신을 두가지 면에서 인식했는데 하나는 성부 편에서의 성육신 인식이며(롬 8:3; 갈 4:4-5 등), 다른 하나는 성자편에서의 성육신 인식이다(딤후 1:9; 빌 2:5-15 등). 성부편에서의 성육신 인식은 바울에게 있어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한 행동이었다. 한편 성자 편에서의 성육신 인식은 바울만이 볼 수 있는 독특한 면에서의 성육신 이해이다.
  초대교회 이후 고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신성과 참 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많은 논쟁을 벌였다. 주후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회의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선언함으로써 신학적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중세에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리에 추가된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자 중 기독론에 있어서 가현설적 그리스도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의 집대성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고스의 위격은 성육신에서 합성되었으며, 인성과의 연합은 인성이 독립적인 인격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고 주장함으로서 새로운 논점을 부각시켰다.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위격 교리에 대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 교회는 모두 칼케돈 회의에서 공식화된 기독론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루터의 교리는 속성간의 교류를 도출해 내었는데, "그리스도의 양성은 제각기 상대편으로 침투하며, 그의 인성은 신성의 속성들에 참여한다"고 주장하였다.
  18세기 이전의 기독론의 출발점은 주로 신학적이었고, 그러므로 당연히 신중심적이었다. 그러나 18세기말이 되면서 좀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에서 출발하면서, 복음서 기자들이 묘사한 예수와, 신학 사상가들의 풍성한 상상력의 소산이며 오늘날 교회의 신조 속에 그 상이 반영되어 있는 신학적 그리스도 사이에 광범하고 유해한 구별이 생겨났다.
  19세기의 기독론은 역사적 예수에서 출발하여 철두철미하게 자연주의적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자유주의 시대의 도래 및 전성기를 맞으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시킴으로 인간 예수 이해를 가능케하였다. 이런 가운데 칼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으로 20세기의 포문을 열었다. 칼 바르트에 의한 200년 가까이 무너졌던 정통주의가 '신(新)정통주의'라는 이름으로 회복되었다.
  칼 바르트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매우 확고하게 옹호하는 학자이다. 초기 바르트(변증법적)의 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도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그리스도는 아래로부터 온 분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분이다.
  불트만의 기독론도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들림받은 예수에게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다. 그러나 바르트와 차이점이 있다. 바르트는 예수가 하나님이므로 그는 내게 의미가 있다고 한 반면에, 불트만은 예수는 내게 의미가 있으니까 그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전형적인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틸리히와 판넨베르크의 기독론이다. 틸리히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인간의 상황과 접촉하는 그의 상관관계 신학의 귀결이다. 틸리히의 "비하적 기독론"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라고 하는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역설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실존의 제약 아래서 출현했다고 하는 역설"로부터 출발했다.
  판넨베르크는 그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틸리히와 다르게 구상했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이미 예수의 신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기독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예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의 근거를 해명하는 데 있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잘못된 점은 그것이 하나님의 입각점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판넨베르크의 구상인 '역사로서의 계시'에서 볼 때, 하나님과 예수의 신성은 오직 역사 속에서만 계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아래로부터, 곧 역사적 인간 예수로부터 그의 신성의 인식으로 상승하는 기독론'만이 가능할 뿐이다.
  한편 오토 베버와 더불어 K. 바르트(Barth) 신학의 연구가 T.F 토렌스(Torrance)의 기독론를 묘사하는 데에는 여러 중요한 요소가 있다. 첫째, 성육신으로 복합적 수준사이(inter-level)에 거룩한 행위에 경험적으로 관계된 예수의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토렌스는 '위로부터'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둘 다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전체가 하나의 독립적 인격안에 신인(그리스도)과 같은 것으로 결합하여 이해한다. 성육신, 즉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세계의 상호작용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조와 같은 것으로 주목되었다. 둘째, 하나님-세계의 상호작용의 범위안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위에 있는 토렌스의 해석관점으로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과 이것의 대리적 삶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위한 사역의 정황(상황)이 그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왜곡되지 않은 기독론은 우리 이방인의 문화로 덧칠해지고 관찰되어진 이미지의 눈를 통할 것이 아니라 유대적 눈을 통하여 모양지어질 수 있다. 셋째, 부활은 그의 실재와 객관적 기독론의 관점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역사적이며 실제적인 부활입증, 완전 그리고 확증에 집중된다.

 

  2. 그리스도의 양성(兩性)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와 연관되는 많은 기록들이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칼케돈 공의회(451년) 사이에 조사되어 칼케돈 공의회 때 미래를 위해 주요한 신조들의 진로를 정해 놓았다. 칼케돈 신조는 어떤 대안(alternative)이 없이 한 위격이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을 어떻게 연합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분명하게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하여 논쟁이 자연히 발생했다. 오랫동안 성과 없는 논쟁을 한 후에 제 2차와 3차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과 680년)를 개최하여 단성론과 단의론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두 본성의 의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일치되고 있다고 재확인하였다.
  V.A. 하비는 기독론과 구원론이 구별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사역, 즉 속죄론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대부분의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 구별을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K. 바르트(K Barth)에게 있어서 기독론은 신학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제IV권 2부에서 성육신의 교리를 언급하면서 시간 안에 있어서의 예수의 존재를 다룬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최대의 신비이다. 이 성육신의 의미는 네 가지이다. 첫째, 하나님이신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 안에 존재한다. 셋째, 한 인격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졌다. 넷째,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 본성을 자기 자신에게까지 고양시켰다.
  R. 불트만(R. Bultmann)은 신약성서의 해석의 맥락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오늘 나에게 구원 사건으로 고백되고 선포되어지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트만의 기독론적 사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트만의 성서해석학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불트만의 해석학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딜타이의 해석학적 과제와의 연속성 상에서 그리고 하이데거의 실존적 인간 이해(특히 전기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성서해석은 동시에 비(탈)신화화의 과정을 통해서 수행된다. 불트만의 실존론적 성서해석은 곧 실존론적 기독론으로 나타난다.
  한편 자연과학에서 사용하던 패러다임의 개념을 한스 큉(Hans Kung)은 '해석, 설명, 이해의 모델'로, 토렌스(T.F Torrance)는 '인식의 틀'로(frames of Knowledge), 반 후이스틴(Van Huyssteen)은 '전거의 틀'(frames of reference)로, 그리고 히베르트(Hiebert)는 '신념 체계로 이해'하면서 이 개념을 인문사회 과학과 신학에 적용하였다.
  신학 연구가 T.F 토렌스(Torrance)는 "신약성경은 하나님과 반대편에 계신 또는 하나님 옆에 계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아리아니즘 또는 에비온니즘 등과 같은 이단들의 설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분리시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된 것처럼 완전하고 분리되지 않은 인성과 신성의 실체로서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고 말하며 Homoousion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는 신약의 본질적인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Ⅲ.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

 

  십자가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속죄의 방법으로 구약시대는 제사장 제도를 두고 동물을 통해서 속죄제를 드렸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림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죄로 인하여 원수가 되었던 것을 화해하게 된 것이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롬 1:17). 바울의 '십자가 신학'을 계승한 루터는 피조물과 역사 내에 있는 업적을 토대로 한 신 인식을 거부한다. 중세의 교회 중심적 사회가 지녔던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에 반대한 루터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해방시키는 복음에 대한 인식을 '십자가 신학'으로 표현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십자가 신학'은 교회의 신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여러 교회 전통에서 부활하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칼 라너(K. Rahner)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U von Balthasar)에 의해, 문학에서는 니콜라스 베르자에프(N. Berdyaev)로부터, 정교회에서는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개신교에서는 디이트리히 본훼퍼(D. Bonhoeffer), 칼 바르트(K. Barth), 카조 키타모리(K. Kitamori),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 에버하르트 융엘(E. Juengel)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몰트만(J. Moltmann)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 이해의 한계성을 역사적 한계와 정치적 한계로 구분하여 지적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할 것을 제안한다. 몰트만의 저서중 잘 알려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란 책에서 몰트만은 십자가 신학이란 관점에서 기독론, 신론, 인간론, 교회론, 사회비판론 등을 전개한다. 그의 신학 체계의 핵심 개념은 삼위일체론적 십자가 신학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되어지는 모든 물음들을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이러한 출발점에서 전제는 "십자가 위에서 고난 받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라는 신학적인 질문이다. 그는 이러한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인 물음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은 이 그리스도의 사건의 핵심 위에 근거되어 있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건이다"는 것을 강조한다.

 

Ⅳ. 죽음당하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기독교 교리는 속죄를 바라보는 어느 특정한 방식을 정통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속죄교리에는 기독론의 두 본성 교리와 비슷한 데가 없다. 그 결과 "그렇게 오래전에, 그리고 그렇게 먼 지역에서 발생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오늘날 이곳에 있는 나를 구원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대답하는 방식도 여러가지로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사 20세기 동안에 나타난 다양한 속죄이론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향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이레니우스(Irenaeus)와 오리게네스(Origenes)의 배상설
  이것은 초기 신학자 이레니우스(Irenaeus)와 오리게네스(Origenes)가 주장한 학설이다. 인류를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배상금을 지불하였는데 그 속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2) 안셀므스(Anselmus)의 객관적 속죄론
  안셀므스(Anselmus)의 전통적인 견해의 객관적 속죄론이다. 전통적인 견해로 속죄론을 철저히 사색에서 교리로 서술한 시작은 칸터베리의 안셀므스에게서 찾을 수 있고 그는 교리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e?)란 책에서 전개한 만족설(滿足說)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업적은 마귀를 이긴 일이라는 견해를 전적으로 극복할 수는 없었을 지라도 진압할 수 있었다. 안셀므스는 구원을 육체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더 오랜 견해 대신에 죄책에서의 구원이라는 그의 가르침을 전개시켰다. 특히 그는 "객관적인" 속죄론을 가르쳤는데 그것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행위의 대상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서 화해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안셀므스 이론의 강점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점과, 사죄의 과정에서 도덕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3) 아벨라르(Abelard)의 주관적 속죄론
  아벨라르(P. Abelard)의 주관적 견해의 속죄론이다. 안셀므스와 그의 젊은 동시대인 아벨라르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며 후자를 속죄론의 소위 "주관주의"적 견해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오랫동안 교리사 공부의 정석이었다. 이런 주장은 대체로 건전한 것이다. 아벨라르에게 있어서 흥미있는 일은 라틴형의 속죄론이 완전한 신학적 서술을 얻지마자 비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같이 하여 시작된 논쟁은 오늘날까지 줄곧 계속되는 것이다. 아벨라르는 속죄를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끼친 효과라는 면에서 본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사랑을 묵상할 때 사람의 감동을 받아 회개를 하고 다시 그분을 사랑하게 되고, 이로써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주관적이다.

 

  4) 루터(Luther)와 칼빈(Calvin)의 형벌 만족설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 신학자들이 안셀름의 만족설을 따르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포함시켰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이라는 것이다. 인류의 죄를 그대로 벌하면 모든 사람이 죽게 되니까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벌을 받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갈 3:10).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사람은 반드시 구원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나타난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 삼중직에 대한 존 칼빈(John Calvin)의 교리는 우리의 속죄론 이해를 보다 열려 있고 포괄적으로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 첫째,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함으로 우리에게 그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한다(도덕감화설). 둘째,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완전한 사랑과 순종의 제사를 드린다(만족설). 셋째,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악의 세력의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를 다스리며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의 다스림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약속하신다(승리자 그리스도).

 

  5) 소치누스(Socinus)의 모범설과 그로튜스(H. Grotius)의 통치설
  17세기 소치누스는 용서를 핵심으로 하는 속죄를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여 모범을 보이신 것이라는 뜻이다. 한편 종교개혁 당시 그로튜스라는 신학자는 소치누스에 반박하여 인류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너진 통치권을 재확립하기 위해서 죄를 벌하셨는데 그 길은 십자가의 길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6) 아울렌(Aulen)의 합리적 속죄론
  '고전적', '극적' 견해의 속죄론 및 아울렌(G. Aulen)의 합리적 이론의 가능성이다. 아울렌은 속죄론을 '고전적', '극적' 견해로 부른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속죄를 속전(ransom)으로 말하는 성경 본문들에 크게 의존하며, 죄인들이 그들의 죄 때문에 당연히 사탄에게 예속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7) 칼 바르트(K. Barth)의 정교한 화해론
  칼 바르트(K. Barth)는 그의 정교한 화해론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개념을 사용하면서, 그것들을 고전적 두 본성론(신성과 인성)과 두 상태론(낮아짐과 높아짐)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결합한다. 그 결과로 다음의 세 가지 주제가 얻어진다. 1) '종이신 주님'(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신성은 우리의 제사장으로 겸손하게 행하시는 가운데 교만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속한다). 2) '주님이신 종'(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신성은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의 왕적 동반자로 높여지는 가운데, 우리를 태만의 죄에서 구속한다). 3) '참된 증인'(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하나됨은 그 자신의 예언적 능력을 행사함으로 우리로부터 거짓됨의 죄를 몰아낸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에 대한 칼빈과 바르트의 신학은 신약성경의 증언의 다양한 은유들을 포괄적으로 처리하고 고전적 신학의 상호보완적 주제들을 잘 다루는 점에 있어서 매우 풍성한 모습을 보여 준다.

 

  8) 토렌스(Torrance)의 존재론적 속죄론
  토렌스는 어떠한 도덕적이나 법적인 관점의 속죄론을 강하게 거부한다. 토렌스는 니케아 신조와 헬라 교부신학에서 말하는 것 즉 homoousion과 hypostatic(위격적연합, 신성과 인성연합)인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구성내에 궁극적인 구속개념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류한다. 토렌스의 속죄는 성육신과 대속의 본성가운데 주어진 고유의 것이다. 토렌스는 성육신과 존재론적 관점의 속죄사이에 상호관계를 언급하는데 속죄는 그리스도의 인격안에 인성과 신성 사이의 화해의 현실화와 구현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인격과 함께 존재론적이며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성육신과 구속은 그리스도안에 하나이며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인간성은 존재론적 본상 화해를 통하여 아낌없이 수용된 것이다.

  속죄론에 대한 지금까지의 성찰을 통해서 볼 때,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하여 우리 시대의 보다 풍성한 해석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원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첫째, 모든 것을 하나의 이론으로 통일하려는 의도보다는 고전적 표현들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그리스도 속죄의 사역은 한가지 부분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사역의 전부분 곧 그의 사역, 가르침, 십자가, 그리고 부활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셋째, 속죄의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주도하심에 기초하는 동시에 인간의 응답을 요청한다는 점 등이다.

 

Ⅴ. 결 론

 

  이상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속죄에 관한 여러가지 주장을 살펴보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두가지 속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상징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공의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매를 드시고 때리시는 하나님의 의가 강하게 나타났는가 하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고난의 종으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의와 사랑의 표현이요,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신 사건이다. 한편으로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속죄제사를 드린 사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고, 대표하여 속죄제사를 드림으로 완전한 제사가 되었다. 그러므로 천하만민은 믿음으로 십자가 앞으로 나가면 구원을 얻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인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해야하는' 속죄의 사역을 대신한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확보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앙이 선포하는 구원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Aulen G., 「속죄론연구」, 전경연 역, 서울: 복음주의 신학장서,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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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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