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복음의 선지자 - 이사야
*- 본문 : 사 6:1-5 -*(구약974쪽)
Ⅰ. 이사야의 인적사항
1) 이사야의 뜻 :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2) 이사야의 부친 : 아모스
3) 이사야의 아들 :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
마헬살랄하스바스(“약탈은 빠르고 먹이는 서두른다.”)
4) 남유다의 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때 선지자로 활동
5) 이사야의 소명 :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소명을 받음6) 활동지역 : 유다와 예루살렘
Ⅱ. 시대적 배경
이사야의 어린 시절에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남유다는 웃시야가 통치하면서 최고의 번영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그러나 앗수르에 디글랏빌레셀3세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고 앗수르는 살만에셀때에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킨다. 남유다는 히스기야 왕때 앗수르왕 산헤립이 쳐들어 오면서 심각한 위기를 직면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넘긴다. 이처럼 이사야의 활동시기는 역사적으로 평화와 참상을 경험하는 격동의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다.
Ⅲ. 이사야
이사야는 정치가로서, 역사가로서, 혹은 예언자로서 뛰어나게 그 임무를 수행한 선지자이다. 세계문학을 연구했던 모울톤 교수는 이사야에 관해 이렇게 썼다.
“한 작품 속에 위대한 사상들이 이렇게 많이 다루어진 책은 세계 문학속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사야서를 읽다 보면 그 박진감과 감성을 자극하는 용어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탐욕과 부, 과도한 욕심을 고발하고 약탈과 방탕 지나친 쾌락사상에 대하여 고발합니다. 그래서 곧 심판이 임할 것을 강하게 선포합니다. 그러는가 싶으면 어느새 새로운 메시야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을 선포합니다. 그러다가는 또 다시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주변의 강대국을 들어서 몽둥이 역할을 하고 채찍 역할을 할 것이다. 유다의 파멸과, 징계의 참상이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라고 말하다가는 어느새 이방 나라들의 잔악상을 고발한다. 앗수르, 바벨론, 구스, 모압, 에돔, 애굽의 나라들의 포악성을 경고하고 그들의 심판이 곧 임할것을 고발한다. 그러다가는 어느새 어머니의 품처럼 따듯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 위로자요, 회복자요, 복을 주시는 이시다. 이렇게 경계를 뛰어넘으면서 전개되는 이사야는 긴장과 안도, 불안과 평안을 넘나들면서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여행하게 하면서 우리 자신을 심장과 폐부를 꿰뚫어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를 살펴보면서 방대한 이사야 전체를 살펴볼 수는 없기에 이사야가 소명 받는 장면을 중심으로 이사야를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가 본 환상
남유다의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을 보게 된다. 이사야가 환상을 본 것에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1.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 2. 자기 자신을 보았다. 3. 사역의 특성과 영역을 보았다. 오늘은 이 세가지 영역에서 이사야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환상
1) 하나님의 보좌와 권위의 환상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이사야는 왕족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왕실에서 왕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당시 솔로몬 이후에 가장 큰 번영을 누렸던 웃시야 왕의 시대는 보좌라는 것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항상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를 본 것이다. 그 보좌가 아주 높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일개 한 나라의 보좌만을 보아 왔던 이사야는 이 땅이 보좌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목도했을 것이다. 여호와의 보좌는 너무나 위대하고 광대하고 그 높이 들린 보좌가 얼마나 크고 광대해 보였을까? 그 보좌아래엥 펼쳐진 것은 작은 공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들이 보였을 것이다. 그 아래 온 우주 만물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공간을 뛰어넘고, 나라와 나라를 뛰어넘고, 온 우주를 아우르는 높으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것이다.
보좌는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이 상상하는 통치와는 다른 것이다.
예)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가면 저 아래에 내려다 보이는 시내를 바라보면서 쓴 웃움을 지을 때가 있다. 저렇게 작에 보이는 곳에서 아웅 다웅하면서 살고 있었지 않았는가 하는 회한이 밀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 이사야는 너무나 광대하신 하나님의 보좌를 본 것이다.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얼마나 크게 드리워져 있는지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계신 곳이 지성소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하나님의 옷자락의 환상을 보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권위의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어느 한 곳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님을 온 성전을 덮는 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권위는 하나님께 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크신 사랑과 권위를 나타내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거룩성과 영광을 봄
이사야가 또 본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이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섰는데 이 천사들이 6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날개의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날개의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날개의 둘로는 날면서 외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사야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본 것이다. 이 찬양은 이사야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말로 표현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회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그 환상을 보는 이사야가 생각할 때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거룩성이었다. 천사들조차 자신의 얼굴과 발을 가리고 거룩하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구별된 분임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무나 거룩하기에 이사야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했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사야를 기록하면서 ‘만군의 주“라는 말을 60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을 30번인나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3) 하나님의 임재의 환상
이러한 환상을 볼 때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했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때에도 임재의 상징으로 연기가 가득함을 보여 주었다.
“시내산에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매(출19:18)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2:2,3)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충만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향과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그 거룩하심과 위엄과 영광과 임재에 압도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환상으로 볼 때 거기에서 살아남을 자가 어디있는가?
그래서 이사야가 하나님을 표현할 때 엄청난 표현들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 40:15-17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교훈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거룩성과 임재의 영광을 바로 볼 수 있다면 우리가 어찌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을 바로 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 중에서도 거장을 만나면 우리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물며 하나님을 환상으로 본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만난 하나님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 내가 고백하는 하나님을 만나야 할 것이다. 그럴때 우리의 삶이 바뀌는 것이다.
2. 자신에 대한 환상
이사야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위와 거룩성과 임재를 체험한 이후에 순간적으로 자신을 볼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 그 문제가 있다.
1) 자신의 교만을 본 것이다.
하나님의 환상을 본 이사야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는 자신의 교만을 본 것이다. 사실 이사야는 당시에 바울과 같이 율법이 기준으로 보아 당당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악상을 고발하기에 앞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사야는 자신을 돌아본 것이다.
예) 현미경으로 우리 손바닥을 들여다본다면 우리 손바닥에 우글거리는 세균덩어리들을 볼 것이다. 이사야는 환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된 것이다. 자기 내면에 우글거리고 있는 온갖 탐욕과, 교만과, 이기심과, 교활함들을 보았을 것이다. 죄악의 벌레들이 득실 거리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이사야는 외치고 있는 것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자신의 절망을 본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본 것이다. 자신의 죄악상을 본 것이다.
현대의 풍조는 지나치게 자기 암시적인 것이 있다.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긍정의 생각을 가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로 설 때 희망이 있는 것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된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실체를 바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2) 자신과 이스라엘을 동일시했다.
이어서 이사야의 고백이 어떤 고백인가?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것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이다. 이사야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서 이기죽거렸습니다.
사1:4-6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사야의 선포가 어떤 선포인가?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부패한 자식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성한 곳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이사야가 이미 자신이 그렇게 더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의 입술이 부정함을 알게 되었다.
이사야는 자신과 유다의 백성들과 분리해서 보고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는데 알고보니 그 선포는 자신에게 해야 하는 선포였던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괴로운가? 그래서 고백한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고 부정한 백성중에 거주하는 자였다. 백성과 나는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선포한 말은 교만한 말, 빈정대고 찌르는 말, 냉정하고 사랑이 없는 말, 진지하지 못하고 위선된 말, 생각없는 잡담, 화내는 말, 과장되고 거짓된 말, 깨닫지도 못하고 진리를 말하고, 형식적인 기도에 젖어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이사야는 철저히 자신을 본 것이다.
교훈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할 때 회중을 향해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향해서 괴로운 마음으로 울부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교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죄악된 백성의 일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사역에 대한 환상
1. 죄사함
이사야가 이렇게 낙담하여 있을 때 천사중에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피어있는 숯을 가져와서 이사야의 입술에 댑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환상중에 영광의 하나님, 권위의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을 보고 낙담하여 절망하고 있을 때 자신의 죄악상과 교만과, 위선과, 부정과, 교활함의 쓰레기를 보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치유하시는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천사를 통해 피어있는 숯불을 가져다 이사야의 입술에 대고 정결케 합니다.
이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께서 이사야를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날 120문도가 성령을 받을 때도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을 체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교훈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정결케 씻김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케 되어야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2. 헌신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물음 앞에 어찌 이사야가 침묵할 수 있습니까? 이사야는 그 자리에서 헌신을 다짐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보여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자의 마땅한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우리 다같이 말해볼까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앞에 헌신으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 희망
이사야는 희망과 복음의 선지자로 활동하게 됩니다. 물론 심판을 선포합니다. 열방들의 심판을 선포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선포는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선포 뒤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녹아있음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13절에도 희망을 말하지 않습니까?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씨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이 땅의 그루터기 거룩한 씨를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을 약속하고, 위로를 약속하고, 희망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씨가 무엇입니까? 거룩한 씨는 메시야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민족의 희망이고 개인의 희망인 메시야를 노래해야 합니다. 이사야만큼 메시야를 많이 노래한 선지자가 없습니다.
그의 상처 그의 고통과 슬픔, 수치는 우리의 치료와 회복과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희망의 선지자로 복음의 선지자로 사명을 감당하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 부름 앞에서 희망의 선지자로 복음의 선지자로 서야 하겠습니다.
Ⅳ. 결론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서 몇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권위, 거룩성, 영광, 임재를 체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경험하는 하나님이 더욱 크고 광대해 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자기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은 자신을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정함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내가 동일한 존재임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사명자의 길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름 앞에 죄사함을 받고 헌신을 다짐하고 희망의 선지자로 복음의 선지자로 끝까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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