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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5. 그리스도의 임재와 영광의 임재

하나님아들 2015. 6. 11. 16:52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5. 그리스도의 임재와 영광의 임재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슬픈일 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슬픈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비극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당장은 살아가는 데 별 어려움이나 지장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갈망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동산 나무에서 교제하시는 아름다운 시절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도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3-4)

 

성경의 처음과 끝이 이러하듯이 성경의 구석구석에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과 함께 거하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참 많이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 속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교제를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혹은 그리스도의 임재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저내신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19:4)

 

하나님은 가나안을 부산물로 주시겠다하시면서,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 백성들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임재라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죄를 지었을 때, 주님은 마지못해 그들에게 가나안은 주겠지만, “나의 임재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 하실 정도 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다른 모습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부르시며 “자기와 함께 있게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로 영입한 첫 번째 목적이 함께 있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함께 있는 만남을 전제로한 친밀한 교제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신학적으로 설명을 하려면, 수많은 문헌을 참고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실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이론이 실제 행세를 할까 두려워서입니다. 이론적으로 정립되지 않으면 실제로 나아가기 힘든 몇몇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다른 이론서를 먼저 탐구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주님이 우리 속에서 사신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삶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 이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놀랍게 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3:17).

 

이것이 갈라디아서 2 20절의 말씀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에 대한 의미입니다.

 

주님이 내주하시는 삶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이라면,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를 위하여 그들이 이 삶을 살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은, 순간순간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십자가를 의지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믿음으로 설 때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을 주도해 가시는 삶을 말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사시고 나타나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삶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그분의 임재를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임재였습니다. 십자가 이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 신약시대입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그리스도의 임재로 인식하였습니다. 바울서신과 요한서신 모두 그렇게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용어사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도 맞는 말이지만, 정확하게는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간의 신학적 오해

 

이것만큼은 반드시 점검하고 시작해야 할 주제입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는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하여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인격적인 만남이 무엇인지 줄기차게 오해합니다. 특히 지금시대는 더욱 심합니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으로 이성과 과학이라는 명제로 성경을 연구하게 되면, 성경의 풍성한 진리들을 수많이 발견합니다. 성경말씀 속에 담겨있는 그 깊이와 넓이 그리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은 정말 대단합니다. 과거에 제가 이곳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저의 경험담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성경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 기쁨은 대단합니다. 특히 아무도 그런 방향으로 생각지 않았고, 주석에서 조차도 발견할 수 없는 진리를 얻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일반 학문하는 사람들도 과거의 저와 마찬가지로 그것에 열광하고 미칩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 대가 됩니다. 성경을 연구하여 얻는 기쁨과 일반 학문을 통해 새로운 것을 얻는 기쁨이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설교 할 때 말씀을 쪼갠다는 표현을 성도들이 사용하더군요. 정말 잘 쪼개고 연결하고 배경을 설명하여 성도들이 그 성경말씀의 깊이에 쏙 빠져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스펄전이 개신교 최고의 설교자라고 누구나가 인정합니다. 스펄전의 설교가 끝나면 교회당 밖을 나오는 성도들의 입에서는 “영광스러운 주님”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성경의 깊이와 넓이와 크기의 놀라움과 열정이, 인격을 대체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신학에 영향을 주었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자유주의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복음주의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이 세대주의입니다. 세대주의는 이성과 과학이라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연구하다보니, 지금까지 이룩하지 못한 수많은 큰 성경진리에 대한 폭넓은 연구 업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성과 합리성에서 벗어나는 성경의 신비한 모든 것을 없애고 싶은데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각 세대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들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이루셨다는 개념 속에, 성경 속에 나타난 모든 신비한 것은 성서 시대에 끝났다는 명제를 집어넣어서, 자신들의 이성과 합리성을 합리화 하였습니다. 이것이 세대주의의 실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말론에 있어서 세대주의 종말론이 틀렸으니, 세대주의는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주장한 것으로만 기억합니다. 과학과 이성으로 요한 계시록을 보면,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신학적으로는 세대주의 이지만, 종말론은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배척하는 이상한 기류가 한국의 모습입니다. 세대주의는 이성과 과학이라는 합리주의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적 사조입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신학교에서는 따르지 않지만, 우리나라 많은 신학교와 교회가 종말론만 빼고, 신학적으로는 이 부류에 속합니다. 특별히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교회는 어김없이 이 부류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수적인 교회와 신학교가 이런 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임재는 말도 안 되는 비루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성으로 합리적으로 인식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충족시키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의미로 설명하기도 하고, 신학에서 완전히 배제하여 언급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또 간간히 성경에서 언급되어 나오면 성서시대에만 특별하게 있었던 신비한 현상으로 설명하고 끝을 내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 성경 본문을 설교해야 할 때는, 빨리 간략하게 언급하고 지나가 버립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면, 교인들이 신비한 것을 추구할까 두려워서입니다. 과거에 제가 이런 합리적이고 이성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의 경험을 적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이성과 과학이라는 합리적인 과고방식으로, 수많은 성경의 진리를 더 깊게 연구할 수 있게 되어서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러나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성경에 나타난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신앙적인 미성숙의 산물인 것으로 취급하거나, 비루한 것을 취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사조이며 철학적 사조를 따라 성경을 연구하는 물결 속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는 비루하고 쓸데없는 미성숙한 미신적인 신앙행위로 취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에, 십자가 구원으로 모두 설명합니다. 그래서 세대주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이 불완전하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과학과 이성이라는 합리적인 신학을 하는데 칼빈주의가 융화되는 것이 불가능한데, 한국은 그 불가능을 연결시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예배로 설명하고 기도로 대체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성과 합리성에서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개입을 고의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아주 어렵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실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한 설명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합리적인 생각으로 신앙에 있어서 무엇인지 설명하려니 어렵고 복잡하고 장황한 설명을 해서 일반적인 신앙의 마음가짐으로 설명합니다. 이성과 과학이라는 합리주의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적 사조에서는 수많은 애매하고 모호한 표현은 많은 경우 그들이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설명하기 위해 어렵고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요한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 안에서”와 “생명”이라는 단어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실 때, 나라의 의미는 “통치”의 개념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통치의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제적인 신앙을 설명하는 것이 모호합니다.“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통치” 이 모든 것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사조 안에서는 이것을 설명하는 자체가 어렵고, 복잡하고, 모호합니다. 이성과 합리성에서 벗어나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임재의 교제가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 안에서는, 인식자체가 안 되는 개념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이 이성과 합리적 사고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고, 그러한 추론 자체를 하기 싫어합니다. 모든 것이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자기의 세계관 안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 회복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성과 과학으로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신학사조에 대하여, 반성과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시대에 다시 찾고 회복시켜야할 하나님의 열망인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아닌

 

1.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기구와 행위 의식자체가 임재가 아닙니다.

 

성막과 그 안에 놓인 모든 기물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성막은 하늘보좌방의 모형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와 치유의 상징이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언약궤와 그것의 뚜껑, 빵과 그것을 놓는 상, 분향과 단, 등대와 등불, 안수와 기름부음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성막에서의 제사와 예배행위는 하나님의 임재를 전제로 하나님 앞에서 이뤄졌습니다. 기독교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전제로 그분의 존전에서 이뤄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참여자의 많고 적음이나 예식의 장엄함과 소박함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임하여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 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은 상징일 뿐입니다. 상징이 곧 임재는 아닙니다.

 

2. 눈에 보이는 것이 임재가 아닙니다.

 

대강절,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 재림, 주의 만찬, 침례(세례), 안수 등 교회에서 행하는 거의 모든 행사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에게 임재 하셨고, 말씀하셨으며, 개입하셨는가를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임재를 논하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들, 현상적인 것들, 감각적인 것들에 대해서 우상숭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믿기 쉬운 것보다 믿기 어려운 참 것, 옳은 것에 눈을 뜨고 밝히 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그림자요, 허상일 뿐, 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방언 기도가 임재가 아닙니다.

 

 “방언은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비밀의 말이자(고전 12:2), 성령으로 하는 기도이다( 8:26-27). 따라서 우리가 모르는 비밀을 하나님은 아시고 우리는 모르지만 성령이 친히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뜻이나 지혜를 알려주신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방언과 방언찬양을 통해 임재가운데 들어간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 의식”입니다. 방언을 통해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은사이지, 임재가 아닙니다.

 

4. 찬양의 감동이 임재가 아닙니다.

 

찬양 또는 신령한 노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수 있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성경구절을 인용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그런데 문제는 찬양의 감동이 임재가 아닙니다.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울게도 하고, 회복도 시키는 감정의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음악의 영향으로 감동을 가지는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가 아닙니다. 찬양을 할 때 감정적인 사람이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양합니다. 이러한 감정이 임재가 아닙니다.

 

찬양이 임재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지만,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태가 임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할 때 선명하게 하나님 그 분이 인식되는 것입니다. 임재에 대한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있을 때 찬양은 큰 능력을 가지고 주님을 선명하게 보게 합니다.

 

5. 성령의 임함이 하나님의 임재는 아닙니다.

 

기도를 하다가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자신에게 들어온 사건을 하나님의 임재라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성령의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한 것을 하나님의 임재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지, 하나님의 임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러한 이상하고 신령하다고 생각되는 체험이 아닙니다.

 

6. 예수기도(Jesus Prayer)를 통해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아닙니다.

 

 예수 기도란 예수님의 이름을 단순하게 반복하여 부르면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반복적인 되새김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표준형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로 잡고 있습니다.  이 형태가 다소 변형되어 “주 예수여, 사랑을 베푸소서” 또는 단순히 “주 예수여!” “주여, 도우소서”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는 근거를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2:32; 2:16-2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51:1).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10:47). 와 같은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그의 빛으로 우리 심령을 채우신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예수 기도가 최근 수십 년간 서방의 교회에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마음을 예수께 고정하고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처절하게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구할 때,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거나 병이 낫거나 심령이 치유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계속적인 반복을 하는 것은 자기 쇠뇌입니다. 자기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고 자기 최면에 빠지게 하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한 방법론이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방법론이 인격체 되신 하나님과의 만남 자체를 불가능 하게 합니다.

 

우리가 너무 하나님에 대하여 간절히 찾기 위해 주님을 여러 번 부를 수 있습니다. 저도 자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가다 주님을 찾을 때, “예수여!”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기도 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찾을 때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여 부를 수 있지만, 반복적인 기도문이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7. 흠뻑 젖는 기도

 

예배나 집회 마지막에 초청의 시간에 쓰러지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 팀의 사역팀이 " 주님, 오셔서 주님의 임재로 채워주소서, 당신의 더 많은 사랑을 부으소서"라고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사역합니다.

 

그들은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안식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임에서 이런 현상들을 경험하기 때문에 이 팀에서는 'catcher'를 준비해 기도 받는 사람들 뒤에서 돕도록 합니다. 기도할 때 쓰러지는 것에 대해 덜 염려하게 되고 편안히 기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이것을 흠뻑 젖는 기도모임이라 부릅니다.

 

사람이 뒤로 넘어가는 것은 초자연현상으로 성령이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밀어서 넘어지게 할 수도 있고, 앞에 나와 있는 사람이 자기가 넘어져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넘어질 수도 있고, 집회의 분위기에 걸맞게 넘어져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성령이 아닌 다른 요인에 의해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임재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사람이 넘어가는데, 그것을 임재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집회를 인터넷을 통해 이런 것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자세히 알지 못하기에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의 임재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8. 주님이 옆에 있는 인격체로 취급하고 사는 삶이 하나님의 임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하여 정리하면서, 제가 과거에 어떤 목사님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또한 여러 선교단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이렇게 가르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옆에 계신 것처럼 인식하고 살아야지 하면서, 자신이 곁에 늘 하나님이 있는 모든 표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비가 오면 예수님께 우산을 밭쳐드리고 자기는 비를 맞고 길을 걷습니다. 길을 걸어갈 때 주먹을 쥐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주님 손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옆에 있다고 생각하고 주님을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대접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로 생각합니다.

 

노력만 대견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임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처럼 자신이 노력해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혼자노력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곁에 두고 실존하신 것처럼 사는 것을,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사는 것이라 착각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과의 임재는 방법론에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방법론은 잘못된 하나님의 임재의 실제를 모습을 만들어가는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한 예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방법론적으로 생각해낸 인간적인 자기 방식입니다.

 

사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목사님과 또 아주 큰 선교단체에서 까지도 대부분 하나님의 임재를 이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고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경에 약속한 말씀을 의지하여, 그것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9.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다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광의 임재를 부어주시는 것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보다 훨씬 강력하고 초월적이고 확실하게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들을 인간이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 이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이 초자연적으로 직접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뒷부분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규정하기 힘든 하나님의 임재

 

저는 아직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그 넓이와 깊이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에, 제가 판단하기 어려운 여러 현상들에 대하여 판정을 보류할 수밖에 없는 상황 몇 가지를 이 주제에 넣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현상들에 대하여 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1. 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올 수 있다.

 

안수를 통해 안수 받은 자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논리는 이해하지만, 성경에는 안수를 통하여 성령이 다시 불일 듯 일어나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일으키시는 일에 대하여 없는 내용이지만, 관련이 있는 해석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규정하기가 애매합니다.

 

2. 집단이 협력하여 임재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가

 

프랭크 루박이 주장하는 요점입니다. 한 집단의 사람들이 다 함께 협력하여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교제하는 삶을 추구할 때, 갑자기 불가능한 것이 가능한 것으로 변하였다는 자신의 경험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함께 시작하였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는 개인이 직접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발전합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추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중도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함께 시작하였더라도 모두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은 다루실 것이고, 다양하게 하나님께로 인도되어 질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많은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의 오류

 

1. 내적인 자신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순종하는 사역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있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론적으로는 성경에서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 사실입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입니다. 성서에서의 임재가운데 음성을 듣고 행하심을 본 후 사역한 것이 많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그렇게 사역하셨고, 초대교회 사도들도 그렇게 사역하였고,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안수 집사도 그렇게 사역하였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나오는 그 사람들의 임재 수준을 못 따라가는 것을 자신이 모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면서 사실 주님과 대화를 많이 해야 하는 줄 아는데, 대화를 많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프랭크 루박은 주님께 아주 많이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가장 좋은 행동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께 말을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가운데 그분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명제는 정말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가지 않으면 아직 임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실패를 통해 배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말을 많이 해야 한다는 설명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와 너무 동떨어진 주장이라서 당황하기까지 합니다.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방법론이 없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님을 갈망하면, 하나님이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른 사람이 추구하였던 과정을 알아보고 싶다면, 가장 추천하는 책은 로렌스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입니다. 여러 책을 참고 하라고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이후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천천히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임재에 대한 실제가 진짜인 것처럼 둔갑한 내용들이 아주 많습니다.

 

어떤 책의 저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라 확신하고 성경을 모두 인용하여 확증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 저자와 같은 과정을 모두 격어 왔습니다. 책의 저자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인 것이라는 확신까지 가졌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책의 내용 속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라고 하지만, 사실상 많이 부족합니다. 그것은 과정입니다. 저자가 진짜라고 생각했던 임재가 아닌 것도 있고, 유사한 것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임재가운데 있으면, 선명하게 주님이 인식됩니다. 그러나 선명하게 인식되었다고 임재가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리스도 의식 가운데 우리의 일상생활을 하거나, 특별히 그리스도의 위엄이 깨달아져 몇 시간이고 그 위엄 때문에 두 눈에 눈시울을 적시고 그 감격가운데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실패하고 착각하고 또 좌절하기도 하고 수많은 기쁨도 느끼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 없이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실제가 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성경에서 그리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무언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내적인 음성을 통해 들은 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 규정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선택을 해야 할 때 언제나처럼 그렇게 질문하고 내적인 음성을 듣고 판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친밀한 관계 가운데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이라 주장합니다. 성경의 구절들을 뽑아서 이야기하면 맞을지 모르지만, 실제에서는 틀린 것 입니다.

 

지금 현제, 하나님의 임재를 제대로 추구하고 있지도 않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몰라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하나님과의 임재를 추구하는 것은 아직도 야망이 내려 놓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다 하더라도 야망이 자기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무슨 지시를 내려달라며, 바른 행동의 방향을 잡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리스도 그 분으로 만족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십니다.

 

자신의 내적인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난후,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이 하나님의 행하심이라 가르치는 유명한 목사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오해입니다.

 

아직 하나님 임재가 무엇인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상태에서 매일 무언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많이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는 기간이 필요하고, 그 깊이와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로렌스 형제는 그것을 시작한지 10년 동안 자신의 죄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며 하나님 임재를 계속 추구하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의 죄 때문에 고뇌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극적인 회심을 합니다. 그는 유대교의 엘리트 종교학자였기 때문에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조금의 시간동안 그에게 진리를 가르치면 곧 탁월한 사역을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약10여 년간 역사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등장하였을 때 사도로 명칭이 바뀌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역하는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신학적 지식이 풍부하였던 바울조차도 10여년의 기간이 필요하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큽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의 행로를 결단하였다고 무조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내면의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그때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렇게 행동도 해보고 말도 해보았습니다. 제가 처해있는 상황은 저의 죄 때문에 죽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으면서 회개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기꺼이 저에게 말씀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세워지고 있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만나주신다 했으니, 내적인 음성이 주님의 음성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동으로 옮기고 말한 모든 것은 나의 내면적 음성이었습니다. 이것이 잘 된 적도 있었지만, 안 좋은 결과를 낳을 때도 있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결과를 낳을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였고 지시였으니, 지금은 내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최선의 길을 음성으로 알려주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생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내적 음성을 듣고 안 좋은 결과가 나온 것 보다, 행동으로 옮겼다가 잘 된 적도 많이 있고, 적중한 적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음성의 근원지가 자기 자신이 되는 위험을 항상 가르칩니다. 자기 소리를 듣는 이유는 의심과 탐심 그리고 자기 야망이라 가르칩니다. 자기 음성을 들으면 갈등과 혼동이 오는지, 그리고 자신의 유익에 집착하고 있는지, 분별하는 분별법을 가르칩니다. 성서적 입장에서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내면에서 들리는 자신의 소리가, 위에서 언급한 분별법에서 위배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단정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보다 훨씬 높은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성경에 나온 것처럼, 아버지 안에 거하시며 아버지의 행하심을 보고 일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14:10-11)

 

바울이, 사도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임재가 충만하지 않고 아직 미성숙한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었을 리 만무합니다. 바울만 하더라도 그가 회심이후 약10년 이상 무명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 임재가운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거하시는 수준까지 못 갔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쫒아서 하려니까, 자신의 내면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임재수준이 문제입니다. 성서적으로는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은 모두 맞지만, 현실적으로 잘못된 임재를 추구하고 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임재수준을 못 따라 갈 뿐만 아니라, 잘못된 임재 실제를 가지고 있는데, 성경에서 예수님이 그리고 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역한 것을 보고 따라하려니, 자신의 음성을 의지하게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항상 이야기한 것처럼, 이론을 아는 것이 실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시대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관한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모두 없어져야 할 책들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책들이 내적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가 충만하여져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죠지 뮬러에게 하나님의 음성인지 자기 음성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냐고 누군가 질문하였을 때, 죠지 뮬러는 고민하지 않고 그냥 안다고 하였습니다. 임재가 충만해져서 그리스도의 의식가운데 있으면, 저절로 알아집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책을 통해 공부할 필요도 없고, 분별법을 따로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알아지고 그냥 분별이 됩니다.

 

저에게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신 음성이 있었는데, 그것은 부담감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부담감 때문에 3달 동안 고민하다가 순종하였는데, 엄청난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내적인 음성에 대한 저의 결과들을 가지고, 마음에 의문점들을 가지고 있었고,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가운데, 주님이 너무나 강한 모습으로 이야기하셨는데, 내적인 음성도 아니었고 육성도 아니었고, 강한 부담감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언어와 문화를 배워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을 찾으라는 강한 부담감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것이 이슬람 속에서 찾으라 한 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웬지 모르는 두려움이 앞서서 먼저 기독교 안에서 찾기로 하고, 한국 선교사들 모임에서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선교사나 목사가 있는지 찾았지만 없었습니다. 그 후 시각을 돌려 이슬람 안에서 있는지 찾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한 무슬림을 찾은 것입니다. 그는 무슬림입니다. 그는 성경책을 가지고 모스크마다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하고, 십자가와 그의 부활과 재림, 죄사함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무슬림이었습니다. 그와의 대화에서 제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와 일치하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것은 개신교 선교역사에 처음 발견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무슬림 형제를 통하여 수많은 무슬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무슬림으로 남아서 성경을 매주 모여서 공부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이 치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역한 선교지에서의 첫 번째 저의 사역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많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음성듣기 원하는 저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그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

 

2. 임재를 선포함으로 하나님이 임재 한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내적인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이라 생각하면서 살면, 여러 가지 실수도 하는데, 자신은 그것이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라 굳게 믿습니다.

 

어떤 집회때 자신이 선포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곳에 임재 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보고 통회하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또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스러워 눈을 뜨고, 그 분위기가 마칠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끝가지 기다려도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출애굽기처럼 하나님을 앙모하는 자들 모두가 그 임재를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이것은 이성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막아버릴 만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집회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시면, 그 집회에 모인 모든 사람이 그냥 알아집니다.

 

출애굽기 시대, 하나님의 임재가 진중에서 떠나가고 다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이 진중에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진 밖에다가 회막을 세웁니다.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 33:7-11)

 

하나님을 앙망하는 백성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을 모두 알았습니다. 누가 알려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을 그냥 알아졌습니다. 표징이 있었지만 그것의 의미를 알려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집회 때 하나님이 임재 하셨다고, 자신이 선포함으로 하나님이 임재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와 예수님조차도 그런 일을 한적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자신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3. 인간의 직관력을 예언으로 간주하는 잘못된 은사 활용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며 인격체 되신 하나님 그분을 추구하는 어떤 세미나에 간적이 있습니다. 예언사역을 한다면서, 세미나가 끝나고 기도사역자들이 앞으로 나와서 초청된 사람들을 위하여 예언 사역을 합니다. 저는 기도사역자는 초청 때 나온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상담해주는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초청된 사람들에게 가서 예언을 해주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훈련된 사역자라는데, 그것은 예언 사역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해주는데, 그들은 초청된 사람을 위해 기도해줄 때 마음에 떠오르는 무언가 들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단어가 떠오르고, 그림이 떠오르고, 어떤 특이한 마음이 지나가거나 하면, 그것을 초청 되어 나온 사람에게 말해주기도 하며 기도해 줍니다.

 

한 사람을 대상으로 예언 사역은 이렇게 합니다. 여러 예언 사역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먼저 찬양하고, 그 사람에 대하여 떠오르는 것들을 이야기 합니다. 글자가 떠오르면 글자를 이야기하고, 형상이나 그림 환상 같은 것이 떠오르면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어떤 것은 맞고 어떤 것은 맞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저와 저의 아내도 이것을 경험해보았는데, 10%가 맞았고 90%는 틀렸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많은 시간동안에 있었던 자신과 일치하였던 몇 개의 연상되는 단어나 그림 환상 때문에 울며 회개하기도 하고, 마음이 열리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언은 사람이 따뜻하게 하는 기능이라며, 격려를 통하여 이러한 모든 과정 뒤에는 힘이 솟아나게 하는 능력이 정말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언 사역자들은 은사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실전을 통해서 은사가 개발된다고 믿습니다.

 

사람에게는 직관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인으로 M씨를 알고 있습니다. 그와 이야기할 때는 절대 속마음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저와 이야기하는 모든 시간동안 저의 얼굴 표정과 몸의 자세 그리고 목소리 턴까지, 저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세미한 것을 감지하여 저의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저와 여러번 대화 나누었습니다. M씨와 대화를 할 때에는 가식과 거짓이 하나도 없는 진솔한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런 직관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어디에서 배운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그냥 알아진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으면 그림이 떠오르기도 하고, 단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환상이 보이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맞다고 하였습니다. 단어가 떠올랐는데 그 사람과 관련된 비밀이 나오는가하면, 미래에 있을 법한 일들이 떠올라 이야기하였는데, 정말 그대로 다 이루어졌는데, 90%의 자신의 직관력이 그 사람에게 정확하게 맞는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과 조금만 대화를 하면 그 사람의 성향과 앞으로 무슨일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대화를 하고 나면 힘을 얻습니다. 그는 어릴때부터 그러한 직관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이 그냥 알아진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있기에 어떤 때는 상대방에게 힘을 주는 많은 이야기들을 해서 용기를 얻게 하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일반 사람들과 같지 않은 범상치 않은 직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아주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수천 명이나 알고 있습니다. 모두 M씨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엘리트 계층이고, 자신이 가진 직관능력을 자신의 일에 100%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언 사역자와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러한 직관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은, 자신이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명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배운 적도 없고 그냥 알아진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케톨릭과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천적인 재능이라 생각하지, 은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언을 해준다며 예언하는 사람은 예언 받는 사람과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눕니다. 그리고 방언을 하며 방언을 통역해주는데, 여러 가지 많은 말들을 합니다. 이렇게 에언 사역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직관으로 알아지는 것을 방언으로 이야기하고, 예언 방언 통역이라면서 이야기 합니다.

 

저는 처음에는 은사가 어떻게 현실가운데 나타나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성경에 나와 있는 은사가 그렇게 나타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 현상에 마음이 불편하였지만, 그때는 분별할 수 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그분만을 초점으로 그분을 모든 것 삼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추구하고, 주님의 기준을 계속 질문하고 삶 속에 실제가 되게 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니, 그러한 것들이 성경 말씀을 기초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직관능력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직관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이 은사라고 말한다면, 성령이 은사로 주신 은사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도 태어날 때부터 이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가 아닙니다.

 

좀 더 초대교회시대에 일어난 은사에 대하여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은사는 일어 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이 시대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세대주의는 성경을 읽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 말합니다. 많은 오순절 계통과 많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인정하고, 인격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음성과 자신의 직관력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인식합니다.

 

우리시대 올바른 길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고 싶어 하시지만,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로랜스 형제에게 배우는 그리스도의 임재


로랜스 형제가 그의 책 “하나님의 임재 연습”을 통하여, 그리스와의 임재에 대한 대가의 경험을 전해줍니다. 저는 이 책을 제가 알기 쉽게 정리하였습니다.

 

로랜스 형제에게 배우는 - 그가 가진 최고의 열망

 

 

“그는 만일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각오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가 그 어떤 속임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p.21)

 

“로렌스 형제의 오매불망 한 가지 목표는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분을 생각하지 못한 채 얼마간의 시간을 흘려 보냈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일단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 그는 이내 전보다 훨씬 더한 확신과 기쁨 속에서 그분께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서는 도무지 기쁨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혹 은혜스럽지 못한 생각이 일어나거나 어떤 유혹 같은 것이 생겨날 때면 그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어쩔 줄 몰라 하지 않았다. 차분히 기다렸다가 적시에 부르짖을 수 있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누차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내려놓았고, 그 즉시 악한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날아가곤 했다.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이런 여상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로렌스 형제는 어떤 외부 업무에 가담해야할 일이 생기더라도 결코 미리 염려하는 법이 없었다. (p. 22)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 같은 단순한 모습으로 무슨 일이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고자 하며, 그때마다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사람이 되었다……. 외부 업무를 하는 중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산만하게라도 될라치면 주님께서는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아주 작게라도 무슨 신호를 보내사 그의 영혼을 다시금 소유하곤 하셨다. 그러면, 그의 영혼에 다시 하나님의 형상이 홍수처럼 충만해졌다.

그것이 얼마나 기뻤던지 그는 어떤 때는 마음에 불씨가 당겨진 사람마냥 충일한 기쁨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저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고 싶고 외치고 싶고 주님 앞에서 기쁨으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솟구치는 충동을 경험하곤 했다.(p. 23)

 

“그에게 있어 최악의 시련은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p. 23)

 

내가 더 우선으로 여기는 것은 가능한 한 자주 그분과 함께 영혼 가장 깊숙한 곳으로 물러나 앉아 있는 것이라네. 그분과 함께 거기 거할 때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네. 하지만 일단 그분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기만 하면 나는 금방 괴로워진다네. (p. 41)

 

“그분과 함께라면 고난도 쉬워지지만, 그분이 없다면 극치의 즐거움도 별로 흥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범사에 우리의 송축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p. 45)

 

그분의 명령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분을 향한 사랑이 아닌 그 어떤 다른 동기에서라면, 저는 땅바닥에 있는 지푸라기 하나라도 집어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을 향한 순전한 사랑만이 제 삶의 모든 원동력입니다.(p. 48)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은 완전히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p. 51)

 

로랜스 형제에게 배우는 -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자의 자세

 

1. 하나님의 임재 기술을 배우지 말고 마음을 드려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기술도 필요하지 않고 지식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오직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분께만 드려진 마음이라 할 수 있다.(p. 25)

 

2.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서 하나님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그분께 어려움을 내어 드리고 그분이 주신 것들을 인하여 감사드리기만 한다면, 그것이 자매님께 시종 참 위로가 될 것입니다.(p. 44)

 

3. 하나님만이 우리의 목적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목적이네. 만일 우리가 부지런히 그분의 임재를 연습하기만 한다면 전에 사용하던 그런 수단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걸세. 우리는 그저 그분의 거룩하신 임재 속에 남아 있음으로써 계속하여 그 분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네.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게.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데는 수없이 많은 방법들이 있다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네. "(p.42-43)

 

4. 하나님의 임재는 단순하게 지속적으로 유치해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일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기 위하여 저는 중보기도 외에는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저는 그저 단순하게 사랑으로 저의 시선을 하나님께만 두고 삽니다.

그것은 실제적이고 끊임없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제 영혼의 은밀한 체험입니다. 거기서 오는 만족과 기쁨이 어찌나 큰지, 어떤 때는 무슨 유치한 일을 해서라도 그것을 표현해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끼곤 합니다.(p. 48)

 

5.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으면 장래의 문제에 고민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장래에 내게 어떤 일을 당하게 하실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내 영혼은 너무나 평안하여 그런 것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분과 함께 있는데 도대체 누구를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하여 그분과 함께 살아갑니다.

주님, 이 모든 것을 인하여 주께서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아멘.(pp. 52-53)

 

6. 고난 당할수록 더욱 하나님 임재가운데 머물러야 한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대화를 나눠야만 하며 지금처럼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을 때는 특히 더 그렇다네.

우리의 영혼을 들어 하나님만을 우러르는 것으로 충분하다네. 씨름의 와중에서도 짤막하게나마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을 찬양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무척이나 기뻐하시지. 그렇게 할 때 그 군인 친구는 용기의 상실을 극복하고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네.

그에게 가능한 한 하나님 안에 거할 것과 점차로 그 단순하면서도 거룩한 연습에 익숙해져 갈 것을 권면해 주게. 그것은 누구도 눈으로 볼 수 없지. 그러나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네.(p. 55)

 

로랜스 형제에게 배우는 - 임재로 들어가는 가장 핵심은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에게 있어 최악의 시련은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그런 상태로 보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그분을 결코 완전히 떠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자기가 큰 곤경을 겪어야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감당해 내는 데 필요한 힘도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로렌스 형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에 대하서 죽거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야 말로 자기가 좆아야 할 유일하게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언제나 충분한 빛이 있어서 그를 안전한 여정으로 인도해 주었다.(p. 24)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태도 하나뿐이라네. 그 밖에 다른 관심사들은 모두 다 버리도록 하게. 거기에는 목표의 수단으로 삼고자 취해졌던 모든 특심한 헌신들도 다 포함된다네." (p. 42)

 

에필로그 - 허드슨 테일러에게 배운 것

 

허드슨 테일러의 편지에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가장 큰 핵심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 대한 그의 경험을 볼 수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자신의 아들에게 편지한 것이 남아있습니다. 이 편지에는 한 순간도 하나님을 잊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잊어버리고 마는 자신 때문에, 몸서리치는 그의 신앙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너희도 예수님께 너희 마음을 맡겨 주님께서 매일 보호하시도록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를 원한다.

 

나는 내 마음을 내 힘으로 보호해 보려고 애썼었단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노력은 항상 허사였지.

 

그러던 중 마침내 자신이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대신 보호해 주실 것을 의뢰하기로 했단다. 너희들 생각에도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마 너희들은 가끔 “나는 지금부터 이기적이지도 않고 불친절하지도 않으며 불순종하지도 않겠다.” 라고 작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그것을 내게 맡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을 내 능력으로 보호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또한 실제로 그렇게 해주신단다.

 

한 때 나는 예수님을 한 순간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꾸 잊어버리곤 했단다.

 

이제는 내가 주님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 맡기고 있으면 주님은 그렇게 해 주신단다. 이것이 가장 좋은 길이란다.

 

블레췰리 양에게 이것에 대해서 더 얘기해 달라고 말하려무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진리를 너희에게 분명히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려무나. 그리고 너희가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하려무나.

 

아이들의 보모 블레췰리 양에게 보낸 편지

 

나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편지했습니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내재하시는 것에 관한 고귀한 진리를 일찍 체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 진리가 아주 뒤늦게 깨달아졌지만 이 진리는 구속에 관한 진리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며,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췰리 양이 나의 아이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생활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되 놀랍게 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마음의 평안과 안식이 지금 이 세상에서는 가능하다고 믿지를 못했었습니다. 천국은 이곳 지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경우, 하늘과 땅은 중요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저도 허드슨 테일러처럼 한순간도 주님을 잊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세 가지 방법을 하였습니다.

 

1, 허드슨 테일러처럼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의뢰해야지 하면서, 기도하고 신뢰해~~~ 하면서 그냥 있었습니다. = 저는 주님을 늘 잊어버렸습니다.

 

2,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노력하고 노력했습니다. = 그래도 좀 더 잊어버리지 않고 몇 번 더 생각하였습니다. 주님께 기도하면서 비참했습니다. 이렇게 밖에 못하는 나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였습니다.

 

3, 허드슨 테일러처럼 주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의뢰하면서, 생각날 때마다 주님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도 해야지. = 가장 최악이었습니다. 주님을 기억하기는커녕. 한순간도 주님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모두 다 해보았지만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의 마음은 주님을 찾고 갈망하고 주님을 잊지 않고 싶었지만, 곧 잊어버리는 나의 모습 때문에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참 한심하게 보였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나의 갈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6개월이 지났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죽고 싶을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고 추구하고 사모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 되시고, 나와 친밀한 교제를 원하시는 분이셨기에,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하였습니다.

 

저는 허드슨 테일러가 자신이 얻는 그 놀라운 경험에서, 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약 1년간, 넘어지고 울고 몸부림치면서, 어느 순간 저는 믿음으로 주님을 의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내어 맡긴다는 의미를 수많은 넘어짐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성경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선포하고, 그것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뢰하였습니다. 아주 간단하였지만, 그동안의 실패와 좌절과 수많은 마음의 실망들이, 더욱 확실한 믿음의 반석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거짓말처럼 믿음으로 신뢰한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하루의 삶 가운데 선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분의 따뜻함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를 찾아왔고, 죄책감으로 가득찬 저의 마음 때문에 십자가 앞에 기어들어가는 것으로 하루의 시작이 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루 종일은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자주 일어났습니다.

 

내가 죽고,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것이 무엇인지 저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는 경험을 하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의 내 속에서 통치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삶 가운데 경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고뇌의 기간을 마무리하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친밀함을 저에게 부어주시기 위해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매일 저의 마음의 죄 때문에 몸이 견디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방을 맞았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임재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한순간도 잊지 않으려는 것, 그것은 많이 실패하고 괴로워하고 울고 몸부림치는 경험이 없었다면, 결코 내 삶에 실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방법론에 있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하였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그 말씀처럼, 내가 주님을 잊어버리것 같은 두려움 까지도 주님께 믿음으로 의뢰하였을 때,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그 친밀함과 따뜻함이 내 삶 가운데 실제가 되어졌습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의뢰하고, 신뢰하는 것이,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내 삶에 실제가 되어 나타날 때, 진정한 주님의 통치가 내 삶 구석구석에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궁극적으로 성령이 답이었지만, 그에 대한 힌트를 허드슨 테일러의 편지 속에서 찾았습니다.

 

로랜스 형제에게 배우는 -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요소

 

1.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요소를 포기하라.

 

“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분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그때그때 계속하여 포기하는 작업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아주 단순하고 막힘없이 그분과 지속적인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아주 친밀한 분으로 와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p. 26)

 

“사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위로받게 해 달라고 구할 목적으로 그분을 찾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허락하지 않으신다네. 그분의 임재 속에서 때를 따라 자신을 드리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역스럽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네. 그게 될 말인가. 하나님은 거룩한 자유 속에서 드려지는 섬김을 원하시는데 말일세.

신실하게 수고를 쏟으시는 분은 오히려 그분일세. 그분은 우리 영혼이 그분을 떠날 때마다 근심이나 불안 없이 고요하게 우리 영혼을 일깨우사 그분께로 이끄신다네. (p. 42)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한다는 것은 꼭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예배처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원할 때면 언제든지 그리로 나아가 하나님께 은밀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화는 참으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대화가 될 수 있으며, 또 누구라도 그것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pp. 44-45)

 

“무슨 규칙이나 특별한 헌신의 양식들로 하나님을 향한 자매님의 사랑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믿음 안에서 과감히 전진하십시오. 사랑과 겸손을 지니고서 말입니다.(p. 45)

 

2.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는 기도 시간을 다른 시간들과 특별히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중대한 과오라고 믿었다. 경건의 시간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그분과의 연합하게 한다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나는 다른 모든 활동들도 우리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해야만 한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차 있다고 했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외에는 그 어떤 것들에 대한 의식도 모두 잊어버린 채 잠잠히 그분 안에서만 쉬고 있었다.

그는 기도하고 있지 않을 때도 그와 똑같은 의식 속에 살았다. 늘 하나님 곁에 가까이 머물면서 온 힘을 다하여 그분을 찬양하고 송축했다. 그 덕분에 그의 삶은 언제나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로렌스 형제는 지적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 그분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한다고 했다.(p. 28)

 

3. 처음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또한 초기에 실패했다고 해서 결코 낙심에 빠져서는 안 된다. 계속 꾸준히 연습을 해나가면 그 수고가 헛되지 않아 마침내 아름다운 습관이 될 것이며, 그때 가서는 특별한 의식 없이도 그렇게 올바른 자세로 범사에 임할 것이다. (p. 29)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도록 꾸준히 연습하십시오. 매순간 자매님의 마음을 그분 앞에 쏟아 놓으십시오.(p. 45)

 

4. 갈망하고, 임재를 추구한다고 실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깨끗함이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더욱 주님을 닮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또 낮추실 것이다. 이런 깨끗게 하심의 과정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p. 30)

 

우리의 깨끗함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말씀과 같이 성령의 법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무조건 구하고 찾는다고 임재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깨끗함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입니다.

 

5. 방법론이 임재 가운데로 인도하지 않는다.

 

“저는 이제껏 영적인 성장을 위해 어떤 특별한 단계들을 따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규정된 방법들은 오히려 저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던 때 제가 했던 생각은 나 자신을 단번에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p. 46)

 

로랜스 형제에게 배우는 - 40년간의 그의 임재연습의 여정

 

1.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고뇌의 기간 10년을 보냄

 

“저는 그분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제 죄에 대한 값을 지불하기 원했고 또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내어 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드린 첫 기도들은 주로 죽음, 심판, 지옥, 천국 그리고 나의 죄 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태는 몇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p. 47)

 

“하지만 처음 10년 동안에는 주님과 동행하는 나의 걸음이 그리 충분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제 안에 있었습니다. 저는 과거의 죄들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분께서 제게 보이신 그 모든 은혜들을 생각할 때마다 늘 죄책감을 느끼곤 했습니다.(p. 47)

 

“저는 계속해서 넘어졌다 또 일어나고 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하나님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이 다 나를 대적하는 것 같았고 오직 믿음만이 내 편인 듯 했습니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제가 그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신앙 초년생이면서도 다른 그리스도인이 몇 년에 걸쳐 얻은 그 성숙의 수준을 똑같이 내보이려고 애쓰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때는 정말이지 상태가 너무 나빠져 내가 지금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므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이제 나에게 구원이란 결코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pp. 47-48)

 

그의 친구 조셉(Joseph de Beaufort)이 로렌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 로렌스 형제가 보다 신령한 삶으로 깊이 있게 나아가려 하자,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들이 그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엄청난 죄인이라고 판단했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깊은 두려움과 불안의 시기가 찾아오는데,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구원마저도 자주 의심하곤 했다. 마음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문제들을 쏟아 놓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의 총체적인 구원에 완전히 대항하는 위치에 처하고 말았다.

쓰라리고 어두웠던 이 시절에는 기도조차도 이렇다 할 위로가 되어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로렌스 형제는 기도를 쉬지 않았다. 그의 가장 궁극적인 갈망은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었기에 그는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고자 했다.

 

다 그만둬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에도 그는 버틸 수 있는 내적인 힘과 용기를 되찾았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 중심을 토로했다.

“오, 제가 아버지의 뜻과 하나 되어 사랑으로 그 안에 거할 수만 있다면, 제가 무엇을 하든 제 고민이 무엇이든 그것은 이제 조금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로렌스 형제에게 당신의 임재의 축복을 쏟아 부어 주시기에 앞서서 그가 갖추기를 원하셨던 성품이었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죄인들에게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가 하는 점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후로 그의 영혼은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견고해졌다. 금방이라도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순식간에 로렌스 형제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이다.

그는 거룩하게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받아들였다. 그 위험이 그의 영혼을 밝게 해주고 모든 두려움을 흩어버렸으며 그의 내적인 갈등과 고뇌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성품과 자비를 묵상하는 것으로 로렌스 형제는 자신의 성품을 벗어 가게 되었다.(pp. 102-104)

 

로랜스의 친구를 통해 구원은 십자가에 있다는 증언이 책에 쓰여 있습니다. 로랜스 형제가 구원에 대한 문제보다 자신의 죄에 대한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고뇌의 기간을 가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세우기 - 회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회개가 되지 않으면, 그 어떤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되어지지 않습니다.

 

2. 고뇌 과정을 통해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실제가 됨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런 염려들(10여 년간 고뇌의 기간이)이 하나님을 향한 제 믿음을 약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나의 여생이 무척 어려워지겠구나 하는 지점에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저는 비로소 제 자신이 갑자기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는 그토록 줄곧 문제만 겪던 저의 영혼이 마침내 깊은 내적 평안 가운데서 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하나님을 단순하게, 그리고 겸손과 믿음으로써 섬겨 왔습니다. 늘 사랑 안에서, 혹시라도 그 분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그 어느 것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저의 유일한 바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을 제게 온전히 다 행하시는 것입니다.(p. 48)

 

“저는 기도하지 않을 때, 예컨대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조심스레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렀습니다.

그분은 늘 내 곁,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계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제게는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경외심이 일었으며, 저는 오직 믿음만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그런 식으로 기도했고, 하나님은 제게 엄청난 평안과 기쁨을 주셨습니다.(p. 47)

 

3. 하나님의 임재에 머무르는 삶

 

“신부님, 요약을 한다면 저는 30년이 넘는 지난 세월 동안 제 영혼이 하나님과 같이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왕이신 데도 저는 그분 앞에서 온갖 죄악을 다 저질렀습니다.

그분께 죄를 고하며 용서를 구함으로써 저는 그분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다 행하시도록 저 자신을 그분 손 안에 다시 올려놓습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충만한 이 왕께서는 결코 저를 벌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부드러운 사랑의 팔로 저를 감싸 안으시며 저를 청하여 그분과 한 상에서 먹게 하십니다. 그분은 친히 저를 섬겨 주시고 제게 그분의 보고의 열쇠를 맡기시며 저를 그분의 하나뿐인 아들처럼 대해 주십니다.

그분은 저와 대화할 때 저의 죄나 사함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저의 구습들은 그분 앞에서 잊혔습니다. 저는 그분께 모든 뜻을 다 행하실 것을 간구하지만, 그분이 제게 주시는 것은 오직 사랑스레 쓰다듬어 주시는 것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의 거룩하신 임재 안에 거하는 삶일 것입니다.

제 하루하루의 삶은 단순하고 사랑에 찬 저의 시선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로 시작되고 끝납니다. 그분은 제 마음이 흐트러지면 초자연적인 아름다운 목소리로 다시 저를 불러 주십니다.(pp. 49-50)

 

“저의 기도는 똑같은 이 임재 경험의 단순한 연속입니다. 때로 저는 제가 조각가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한 덩어리의 돌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그분은 사랑하시는 맏아들의 완전한 형상으로 저의 영혼을 조각하기 시작하십니다.

또 어떤 때는 저의 온 마음과 심령이 마치 아무 노력 없이도 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리는 느낌을 맛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자기 기만적인 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기만이라고 부르는 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누리는 상태 속에서 제가 갈망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임재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일 저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고쳐 주셔야만 할 것입니다. 저는 저를 향한 그분의 모든 기쁘신 뜻을 다 행하시기를 원합니다.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은 완전히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pp. 50-51)

 

그의 친구 조셉(Joseph de Beaufort)이 로렌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가꾸어 감으로써 그 연습을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란 지식이나 말보다는 마음과 사랑으로 지속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방법에서는 생각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사랑이 전부다”라고도 말했다.

계속해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 꼭 큰일만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후라이팬의 작은 계란 하나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는다. 그 일도 다 끝나 더 할 일이 없으면 나는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한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그분이 주시는 은혜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일어날 때면 나는 어느 왕보다도 더 만족감을 느낀다. 설사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여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방바닥에서 티끌 하나를 주워 올리는 것만으로 족하다.

 

4.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최고의 직무로 생각

 

“사랑하는 벗이여, 인생에 있어 우리의 유일한 직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뿐임을 자주 기억하도록 하세. 그 밖에 무엇이 우리에게 의미를 줄 수 있겠는가.

자네와 나는 지금껏 40년이 넘는 세월을 주님과 함께 동행해 왔네. 과연 우리는 그 기간들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 소비했는가 되물어야 할 걸세.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르신 목적일텐데 말일세.(pp. 58-59)

 

5. 더더욱 그리스를 닮아 가기 위해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리고 지금도 주고 계신 그 축복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워진다네. 나는 그 축복들을 잘못 사용해왔다는 생각이 들더군.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하여 그것들을 요긴하게 사용했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로 우리에게 조금의 시간을 더 주신다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지. 그분은 우리로 잃어버린 기회를 보상하여 완전한 확신 가운데 우리의 자비하신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신다네. 그분은 언제나 사랑스럽게 우리를 맞아들이실 준비가 되어 있다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모두 다 포기하게. 그분은 마땅히 그러한 대접, 아니 그 이상의 대접을 받아야 할 분이 아니신가? 끊임없이 그분을 생각하고 온전히 그분만을 신뢰하게. 이내 그분의 풍요로운 은혜가 우리를 푹 감싸 안을 것이네.

그것만 있다면 우리는 뭐든 할 수가 있지. 하지만 그게 없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오직 죄짓는 것뿐이라네.

우리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움이 아니고서는 인생의 위험들을 피할 수 없다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만 하지.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분의 도우심을 구할 수가 있겠는가? 그분과 함께 있으려면 우리는 자주 그분을 생각하는 거룩한 습관을 길러야만 한다네.

어쩌면 자네는 내가 언제나 똑같은 말만 한다고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진실인 것을.

나는 이보다도 더 쉬운 방법은 알지도 못하거니와 여타의 방법들은 아예 연습하지도 않는다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나 이 방법을 권하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 사람을 알아야만 한다네.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주 그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만 한다네. 일단 그분을 알게 되면 우리는 더 자주 그분을 생각 하게 될 걸세.

재물(보배)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게 마련이지!(pp. 59-60)

 

로랜스 형제에게 배우는 - 임재로부터 마음이 흩어지면

 

1. 의지를 사용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마음이 흩어지게 되는 일은 자네한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기에 나는 그것이 얼마든지 이해가 간다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하지만 기억하게. 우리의 모든 힘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바 우리의 의지라네. 의지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해 주어야만 하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방황하며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속으로 끌려 다니게 될지도 모르니까.(p. 56)

 

2. 허물을 고백,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춤(겸손)

 

“내 생각에 이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께 우리의 허물들을 고백하고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싶네. 기도할 때 굳이 말을 많이 해야 할 필요는 없네. 장황한 기도는 생각을 산만하게 만들 뿐이니까.(p. 56)

 

3. 간절히 찾고 하나님의 임재에 고정시키라.

 

“부자의 대문을 두드리는 가난한 자라도 된 것같이 그저 자네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기만 하게. 그리고 관심을 오직 그분의 임재에만 고정시키고,

이따금씩 마음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도 거기에 너무 신경 쓰지 말게. 거기에 신경 써 봐야 마음만 더 산만해질 테니까. 그럴 때는 의지적으로 관심을 다시 하나님께로 부드럽게 되돌리면 된다네. 그러한 인내를 하나님은 무척 기뻐하신다네.(pp. 56-57)

 

4. 스스로 훈련하라

 

“기도할 때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하루 온종일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는 것이라네.

그것을 일종의 ‘연습’으로 삼으면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자신을 일깨우는 데도 도움이 될 거고, 그렇게 되면 기도 시간에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르는 일도 좀 더 쉬워질 것이네.(p. 57)

 

로랜스 형제에게 배우는 - 임재연습은 어떻게 하는가?

 

1. 아주 작은 사소해 보이는 순간에도 그분을 기억하라.

 

“밥을 먹을 때나 허드렛일을 할 때에도 심령을 그분께 올려 드리십시오. 아주 작고 사소해 보이는 순간에 그분을 기억하는 것이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때문입니다. 꼭 큰소리로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자매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거한다는 것은 꼭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예배처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원할 때면 언제든지 그리로 나아가 하나님께 은밀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화는 참으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대화가 될 수 있으며, 또 누구라도 그것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p. 44)

 

2. 하나님을 첫째로 여기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좇아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 형제의 사랑 속에는 이 세상이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는 그 잃어버린 친구에게 너무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친구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여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권면해 드렸던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 낮에나 밤에나 할 수 있는 한 자주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 말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사모님과 함께 계십니다. 만일 사모님이 혼자서 사모님을 찾아온 친구를 외면해 버린다면 매우 무례한 행동이 되겠지요? 그런데 하물며 어떻게 하나님을 버리고 홀로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그분을 잊지 마십시오. 자주 그분을 생각하고 쉬지 말고 그분을 경배하십시오.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과 함께 죽으십시오.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참 직무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이 우리의 직업입니다. 만일 아직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라도 그것을 배워야만 합니다.(pp. 61-62)

 

3. 하나님을 알아가는 법에 대한 책이 훨신 더 혼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법과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법을 다루고 있는 몇 권의 책들을 보긴 했네만, 내가 보기엔 나의 영혼을 한층 더 혼란스럽게만 할 뿐이었네. 내가 원하던 바는 단순히 내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것 이었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가장 커다란 축복을 얻기 위하여 내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리기로 마음먹었네.(p. 63)

 

4. 하나님을 거스를만한 일은 무엇이든 다 포기하라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고 나의 모든 죄에 대한 그분의 용서를 받아 들였으며 그 후로는 그분을 거스를만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다 포기했네. 마치 이세상에 하나님과 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기 시작했지.

어떤 때는 나 자신이 재판관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수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분을 나의 아버지로 누리기도 했네. 나는 할 수 있는 한 내 마음을 아버지와 자녀 관계에 두면서 거기서 그분을 경배하려고 노력했다네.

나는 나의 영혼을 그분의 거룩하신 임재 안에 지켜 두고자 했고 혹 그것을 벗어나 곁길로 갈 때는 즉시 회복하고자 했네.

이 연습은 결코 쉽지 않았다네. 하지만 고의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흩어져 버렸을 때는 그다지 큰 어려움 없이 그 연습을 계속할 수 있었네.

그 연습은 기도 시간뿐 아니라 규칙적인 일과 시간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네. 하루 종일, 매시 매분마다 나는 나를 하나님 생각으로부터 떼어놓으려 드는 모든 것들을 내 영혼 바깥으로 몰아내었다네.

내가 하나님과의 동행을 시작한 이후로 그 연습은 매일 매일의 일과가 되었다네. 물론 그 연습이 주춤주춤해지고 많은 굵직한 실수들로 얼룩지는 시간들도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로 인하여 커다란 축복을 누리고 있다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하심과 긍휼 덕분이라네. 우린 참으로 그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네. (이 사실이 특히 내게는 더 그러했다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신 임재 안에서 자신들을 신실하게 지키고 또 그분이 우리 앞에 계신다는 것을 늘 기억한다면, 적어도 의도적으로 그분을 거스르게 하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된다네.(pp. 63-65)

 

5. 자연스러운 현상이 됨

 

“그럴 때 우리는 때를 따라 은혜를 구할 수 있는 거룩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지. 그분의 임재에 대한 이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그분은 점점 더 우리에게 친밀해 지고 그분의 임재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네.(p. 65)

 

로랜스 형제에게 배우는 - 시련에 처해 있을 하나님의 임재는?

 

1.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렇게 하라.

 

1) 끊임없이 아뢰라 - “그러니 그분께 자네의 문제들을 끊임없이 아뢰고”

2) 힘을 달라고 기도 -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3) 자주 말씀 드려라 - “가능한 한 자주 그분께 말씀을 드리고”

4) 그분을 잊지 말라 - “그분을 잊지 않도록 힘쓰게”

5) 그분을 찬양하라 - “그분을 찬양하게”

6) 힘들면 어린아이같이 그분께 나아가라 - “어려워 못 견딜 것만 같을 때는 겸손하고 사랑스럽게 그분께 나아가게. 마치 어린아이가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가는 것같이 말이야”

7) 은혜를 구하라 - “그리고는 자네의 어려움을 도와 달라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게”

8) 함께 기도하라 - “나도 미천한 기도로나마 자네를 지원해 줄 테니”(p. 66)

 

2.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셨다고 생각 될 때

 

“하나님께는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많은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네. 그러나 그분은 어떤 때는 자신을 숨기기도 하신다네. 그럴 때 우리의 유일한 의지처는 온전히 하나님께로만 향한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만 한다네. 그런 믿음이라면 흔들리지 않을 거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떠났지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나.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분리되지 않기 위해 각별히 주의해야 하네. 우리는 시종 그분 안에 거해야만 한다네. 지금도 그분 안에서 살고 날이 이르러 죽을 때도 그분 안에서 죽는 것이지.(p. 67)

 

3. 시련이후

 

“하나님을 아는 일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세. 그 분은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분일세. 사랑이란 앎과 더불어 불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될 걸세. 우리는 또한 시련의 시절이든 기쁨의 시간이든 똑같이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일세.(p. 69)

 

4.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보다, 궁핍과 시련의 시간이 하나님 그분께 더 가깝게 인도하신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주셨던 축복들 때문에, 혹은 앞으로 주실 축복들 때문에 그분을 구하고 사랑하는데.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말기로 하세. 사실 그런 축복들은 아무리 큰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궁핍과 시련의 시간에 그분께 드리는 단 하나의 단순한 믿음의 행위보다도 우리를 하나님께 가깝게 인도해 줄 수는 없지.

이러한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세.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다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데서 그분을 구할 필요가 없네.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인생의 사소한 것들로 우리 마음을 채운다면 그 잘못은 오직 우리들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네. (p. 69)

 

5. 그분의 임재를 잃어버릴 것을 상상해보라.

 

“주님께서는 인내 가운데 우리의 연약함들을 참고 견뎌주신다네, 하지만 그분의 임재를 잃어버림으로 우리가 지불하게 되는 대가를 한번 상상만이라도 해보게나.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그분의 전적인 소유가 되세. 우리 마음과 영혼 속에 예수님을 나타내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몽땅 다 내어 버리세. 그렇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은혜를 구하세. 그리하여 오직 그분만이 우리 심령을 다스리실 수 있도록 해드리세.(pp. 69-70)

 

친구 조셉이 전하는 - 신령한 생활로 나아가는 필요한 연습

 

1. 하나님과 정답게 이야기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필요한 연습은 곧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다. 이 말의 의미는 위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동행 안에서 끊임없이 기쁨을 발견하고, 매순간 어떤 식으로든 대화의 막힘이 없이 항상 그분과 겸손하면서도 정답게 이야기 나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특히 유혹과 슬픔의 시간,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시간, 그리고 불성실과 범죄의 시간에 더더욱 중요하다.(p. 76)

 

2. 순수하게 우리 심령을 하나님께 말하라.

 

“우리는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상황에 걸맞은 방법으로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는 암송해 둔 기도문을 외운다거나 미리 준비한 생각을 그대로 반복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수하고 단순하게 그때그때 입에서 나오는 말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내어 보이는 것을 말한다.(p. 76)

 

3. 충동적이지 말고, 안연하고 부드럽게 마음을 모아라.

 

“우리는 범사를 매우 조심스럽게 행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충동적인 행동을 삼가야 한다. 충동적인 행동은 영혼이 정돈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서 우리 일을 받아 주실 것을 구하는 자세로 안연하고 부드럽게,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과 더불어 일하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계속적으로 하나님께로만 마음을 모을 때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여 도망가게” 할 수 있다(4:7)(pp. 76-77)

 

4. 무엇을 하든 잠깐 멈추고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을 가지라.

 

“우리는 무엇을 할 때든, 심지어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에도 몇 분 동안 잠깐 멈추고 우리 여혼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 그 은밀한 중에 그분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가능한 한 자주 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 때든 잠깐 동안 멈춰 서서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분께 간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아뢰며 감사드리지 않아도 될 만한 구실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영혼이 잠깐 동안 세상의 모든 염려들을 내어 버리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보다 더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렇게 순간순간 뒤로 물러가 그분만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기심이란 세상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단 한순간이 될지라도, 그분을 기뻐하기 위해서 하루에도 수천 번씩 우리의 세상적인 자아를 포기하는 것보다 우리의 충성심을 하나님께 더 잘 보여 드릴 수 있는 길은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의 의무들에서 아주 손을 떼야만 한다는 의는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지혜롭게 분별해야만 한다. 어쨌든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세상의 염려를 버리고 잠깐 동안이라도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또 그분의 거룩하신 임재가 주는 평강 속에서 쉬지 못하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라고 믿고 있다.(pp. 77-78)

 

5. 마음의 경배와 마음의 예배를 드리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배는 믿음 안에서 드려져야 한다. 즉 그분이 과연 우리 마음 가운데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분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받고 섬김 받으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믿는 가운데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분이심을 믿으라. 그분은 우리 모두가 의지해야 할 분이시다.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도 믿어야 한다.

주님의 완전하심은 실로 측량할 수 없다. 그분은 모든 것에 무한히 뛰어나시고 또 우리의 창조주이시면서 구세주라는 주권적인 위치에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야말로 우리들과 하늘과 땅의 모든 만유를 소유하실 권리가 있다.

우리 각자에 대하여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분이 선히 여기시는 바를 행하는 것은 그분의 선하신 기쁨이 된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도 말도 행동도 모두 다 그분에게 마땅히 되돌려 드려야만 한다. 우리 모두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려하자.(pp. 78-79)

 

6. 어떤 경우에 자신이 죄에 빠지는지 주의 깊게 살펴, 연약함을 고백하고 도움을 구하라.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덕목이 가장 필요하며 또 어떤 덕목이 가장 이루기 힘든지 알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자기가 가장 자주 빠지게 되는 죄들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며 어떤 경우들이 그 죄에 빠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온전한 신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거룩하신 위엄의 임재 가운데 견고히 서서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영역들에서의 진진한 씨름의 시간들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겸허한 경배의 자세로 그분께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환난 날에 은혜로 도우실 것을 사랑의 마음으로 간구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전혀 소유하고 있지 못한,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덕목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p. 79)

 

친구 조셉이 전하는 -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방법

 

1. 새생명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p. 88)

 

2. 하나님의 임재를 꾸준히 연습하는 것이다.

 

“이것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불안이나 다른 문제들에 휩싸이지 말고 언제나 부드럽고 겸손하게,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p. 88)

 

3. 영혼의 눈은 언제나 하나님께 고정돼 있어야 한다.

 

“바깥세상에서 뭔가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때는 특히 더 주의해야 한다. 이 연습을 숙달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되므로 한두 번의 실패에 결코 낙심해서는 안 된다. 이것도 하나의 습관이기에 몸에 배기까지는 쉽지 않지만 한번 습득되고 나면 거룩한 기쁨의 원천이 된다.

생명의 근원이요 몸의 다른 모든 지체들을 지배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시작이요 끝이 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은 우리의 모든 영적, 육체적 행동들의 시작이요 끝이다. 더 넓게 말하면 마음은 우리네 인생에서 우리가 생하는 모든 일들의 시작이요 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하나님께 집중해야만 하는 것도 바로 이 마음인 것이다.(pp. 88-89)

 

4. 이 연습을 시작할 때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짤막한 기도의 말을 하라.

 

“예컨대 “주님,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주님의 뜻대로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등과 같은 말들을 고백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마음이 헤매거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만 시선을 못 박아 두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연습을 해야만 한다.(p. 89)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면 어떤 말이든 소중한 자신의 표현을 하나님께 할 수 있고, 이것 없이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고 그리스도 의식 가운데 들어갈 수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이것을 말한 적이 없었고, 책을 쓴 저자의 좋은 습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5. 신실하게 연습하면, 주님의 은혜가 풍성해진다.

 

“이러한 연습은 처음에는 지속하기가 어렵겠지만, 일단 신실하게 연습이 되면 우리 영혼에 엄청난 영향력을 구사한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쏟아 부어지게 하며, 언제 어디서나 순전하고 사랑에 찬 시선으로 주님의 임재를 바라볼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가장 거룩하고 가장 견고하고 가장 수월하고 가장 효과적인 기도의 태도이다.(pp. 89-90)

 

친구 조셉이 전하는 - 임재의 축복들

 

1. 믿음이 더욱 생생해지고 적극적이 된다.

 

“영혼이 하나님 임재 연습으로부터 얻는 첫 번째 복은 영혼의 믿음이 언제 어디를 막론하고 훨씬 더 생생해지며 더욱 적극적이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려움을 만날 때에 특히 잘 드러난다. 그러한 영혼에게는 세상 속에서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을 지키는 데 필요한 은혜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의 실천 연습에 익숙해진 영혼은 글자 그대로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실제로 하나님을 보고 느낄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 쉽게 접근하고 모든 필요를 채움 받는다.

그러다 마침내 이 영혼은 천국의 성도들에 거의 근접한 곳까지 다다르게 되어, “나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냥 보고 느낄 뿐이다”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 영혼의 믿음은 연습을 거듭해 나갈수록 점점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p. 91)

 

2. 소망을 강하게 해준다.

 

“하나님의 임재연습은 우리의 소망을 강하게 해준다. 우리의 믿음이 거룩한 연습의 실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들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게 되면, 그에 따라 우리의 소망도 점점 자라간다.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이 땅에서 보는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의 아름다움에도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뛰어난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자라나고 강해지며, 우리가 장차 누리기를 기대하는 엄청난 선()과 또 어느 정도 이 땅에서 맛보는 선으로 인하여 그 소망은 더욱 확신과 능력을 덧입는다.(pp. 91-92)

 

3. 세상과 분리되게 한다.

 

“이 연습은 우리의 의지에 거룩한 사랑의 불을 질러 우리로 세상에서 분리된다는 것의 기쁨을 알게 해준다. 소멸하는 불이시며 거치는 것은 다 가루로 빻아 버리고 마는 그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우리 영혼이 동행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렇게 불붙여진 영혼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지 않으면 더 이상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 임재는 영혼 안에 거룩한 열정과 신성한 긴박감,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는 그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심어 준다.(p. 92)

 

4. 하나님과 친숙해져 간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고 쉬지 않고 그분을 바라보는 사이에 영혼은 자신이 하나님과 점점 친숙해져 가는 것을 경험한다. 그 정도가 어느 만큼이냐 하면, 우리의 사랑과 찬양과 신뢰와 감사와 드림과 간구 등의 계속적인 행위들을 총망라하여 거의 모든 생활 속에 그 친숙함이 두루 스며들게 된다.(pp. 92-93)

 

(조셉) 친구 로랜스는 이렇게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1. 연습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기 위해 갈망하라.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그 방법들을 알고자 한다.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참으로 수많은 방법들에 의하여 거기에 도달하려고 애쓴다. 숱한 방법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려 해보지만 오히려 마음에 고통만 가중된다.

범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고, 자신이 현재 처한 우치에서 모든 수고를 다함으로써 하나님께 자신의 사랑을 모두어 드리며, 늘 자신의 심령이 하나님과 사귐을 지속하게 함으로써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임재를 계속 지켜가는 것, 그것보다 더 쉽고 직접적인 방법이 있을까?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에는 무슨 특별한 기교가 없다. 우리는 그저 늘 똑같은 마음으로 단순하게 그것을 연습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한번은 형제들 가운데 한 명이 로렌스 형제에게 그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의 비결을 끈질기게 물어 온 적이 있었다. 로렌스 형제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단순했다.

“수도원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나는 내영혼의 모든 생각과 감정의 시작과 끝에 있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어려운 명상이나 독서에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성품과 진리를 묵상하면서 보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빛에 의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묵상하면 할수록 나는 사랑스러운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갔고, 영원히 그분과 거하리라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p. 105)

 

2. 스쳐지나가는 하나님의 위엄이 깨달아질 때.

 

“너무도 엄청난 하나님의 위엄이 깨달아져 그 속에 완전히 푹 파묻히게 되면, 나는 혼자 부엌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채 우선 해야 할 일들을 다 마친 뒤 나머지 모든 시간을 기도하는 데 보내곤 합니다.(p. 106)

 

3. 일을 시작하고 끝낼 때 기도

 

“나는 일을 시작하기 전과 다 끝낸 후에 늘 기도 시간을 갖습니다. 시작할 때는 확신 가운데 주님께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나의 하나님, 하나님은 저와 함께 계십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외적인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제가 은혜를 내리사 주님과 함께 있게 하시고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저와 함께 일해 주옵소서. 그러면 제 일은 최상의 것이 될 것입니다. 저의 이 일과 지금의 모든 감정들을 하나님을 향한 저의 사랑의 제물로 받아 주옵소서’”(p. 106)

 

4. 일 하는 도중에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시종 주님과 쉬지 않고 애기를 나눕니다. 진짜 그분이 내 옆에 서 계신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나의 봉사를 그분께 올려 드리며 날 도와주시는 그 도움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일이 다 끝나면 나는 주의 깊게 다시 살펴보곤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되었으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혹 흠이 발견되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기가 죽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일에 좀 더 손을 봅니다. 여전히 그분 안에 거한 채로 말입니다.(pp. 106-107)

 

5. 임재가 자연스럽게 된다.

 

“이렇게 매일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연습을 계속하고, 혹 넘어지거나 곁길로 빠졌을 때는 즉시 용서를 구하며 살아오는 동안, 한때는 그렇게 얻기 힘들었던 그분의 임재가 이제는 말할 수 없이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p. 107)

 

(조셉)친구 로랜스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삶의 특징

 

1. 허둥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종 두 사람 몫의 일도 해내야 했지만 단 한 번도 허둥대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p. 108)

 

2. 시종일관 평화와 고요 속에 거하였습니다.

 

“그는 그저 가각의 일에 적절한 시간을 분배하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일을 해 나갔다. 시종 평온하고 안연한 마음을 한시다로 잃지 않은 채 그는 무엇 하고도 바꿀 수 없는 평화와 고요 속에 거하고 있었다. (p. 108)

 

3. 그가 가진 성품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 존경심과 선한 뜻을 가지고 그를 대하게끔 하였습니다.

 

“주님과의 이토록 친밀한 연합을 맛보게 되면서 그의 열정은 점점 평온해져 더 이상 자신도 느끼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의 속에서는 온유한 성품, 온전한 정직 그리고 세상 최고의 자애심이 무르익어 갔다.

그의 온화한 얼굴, 공손하고 정중한 태도, 단순하고 겸허한 몸가짐은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심과 선한 뜻을 가지고 그를 대하게끔 만들었다.

그와 더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그의 심오한 거룩함과 정직함을 맛볼 수 있었다.(p. 108)

 

4. 자신을 위장한 모습 혹은 구별된 존재로 보이지 않았게 했습니다.

 

“그는 비록 수도원에서 단순하고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그렇다고 경건한 척하거나 늘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꾸며 내지는 않았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을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할 뿐이다.

거꾸로 그는 모든 사람들을 형제처럼 따뜻하게 대하고 동료 수사들을 친구처럼 대했으며 조금도 그들로부터 구별된 존재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pp. 108-109)

 

5. 겸손만을 추구했고, 자신의 행실은 하나님이 증거 하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한 번도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존경을 얻을 심산으로 자신의 덕성을 은근히 내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숨겨진 삶, 감춰진 삶을 살아가고자 애썼다.

그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음에도 결코 겸손의 영광을 구한 적이 없고, 오직 겸손 그 자체만을 추구했다.

그는 자기의 행실을 증거해 주실 분으로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그가 바라본 유일한 상급은 바로 하나님 자신뿐이었다.(p. 109)

 

6. 그는 단순하고 담백하게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천성이 얌전한 사람이었지만 형제들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대화를 나누는 데는 조금도 어려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박식한 사람보다는 단순하고 담백하게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사람을 더 좋아했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혹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들과 함께 나누었다. 놀랍도록 단순한 방식으로 로렌스 형제는 신령한 삶의 가장 아름다운 비밀들과 거룩한 지혜의 보배들을 그들에게 온전히 열어 보였다.(p. 109)

 

7. 그의 대화는 사랑이 뿜어 나왔습니다.

 

“그의 말에 담겨 있는 그 아름다움이 듣는 이들에게 어찌나 깊은 영감을 주었는지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찔러 쪼갬을 받았으며, 로렌스 형제가 가르쳐준 그 위대한 진리들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슴이 불타올랐다.

하나님은 로렌스 형제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자연히 그의 대화도 그와 똑같은 사랑을 뽑아내곤 했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하기를, 영적인 생황의 인도자로서 학식 있는 사람들의 지식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뢰하라고 말해 주곤 했다.(pp. 109-110)

 

8. 하나님으로부터 경험으로 체험한 진리는 이론적인 지혜보다 깊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 이십니다 한 순간에 우리 심령에 겸손을 가르치시는 분도 그분입니다. 또한 우리 믿음의 신비와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수십 년을 공부하여 알아내는 것보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시는 분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쓸데없는 경박한 질문들, 영혼에 짐만 지우고 심령을 말라붙게 만드는 질문들에 그가 조심스럽게 대답을 피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회의 같은 데서 어려운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진술해 보라는 요청을 윗사람들로부터 받았을 때에는, 그의 대답은 항상 매우 명료하고 핵심에 잇닿아 있어서 더 이상의 부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러한 놀라운 능력은 많은 학식 있는 사람들도 다 보아서 알게 되었다. 프랑스의 한 저명한 주교는 로렌스 형제와 여러 차례 대화를 가진 뒤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로렌스 형제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그에게 당신의 거룩한 신비들을 드러내신다. 그분을 향한 그의 사랑이 깊고 순결하기 때문이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 속에서 그분을 발견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웅장함과 다양성에 할 말을 잃어버린 그의 영혼은 어찌나 끈끈하게 하나님께 붙어 있던지 아무도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었다.

그는 모든 피조물 하나하나의 그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보았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았고, 그분의 능력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특성들을 보았다.

그럴 때면 그의 영혼은 그분을 향한 경탄으로 가득 차 사랑과 기쁨 가운데서 이렇게 소리치곤 했다. “오 주 하나님, 하나님의 생각은 얼마나 넓으시며 하나님의 지혜는 얼마나 깊으신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얼마나 능하신지요!(pp. 110-110)

 

9. 믿음이 하나님을 알아 가게 해주는 유일한 빛이었습니다. (믿음의 정의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의 신앙 여정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대한 이런 깊은 이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지식이 그의 모든 온전함의 씨앗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믿음이 그가 하나님을 알아 가게 해주었던 유일한 빛이었다. 성숙해가면서도 그는 믿음 외에 어떤 것에게도 자신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이제껏 자기가 들은 모든 것, 자기가 책에서 읽은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자신이 쓴 모든 것들도 자기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계시해 준 그 믿음에 견준다면 실로 초라해 보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pp. 111-112)

 

1) 하나님만이 자신을 알려 주십니다.

 

“그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자. “오직 그분만이 있는 그대로 그분 본연의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수 있다.우리가 이성과 과학으로 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형편없는 모조품만 남길 뿐, 뛰어난 본래의 모습을 놓쳐 버리고 만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 영혼 깊은 곳에 당신 자신을 그려 주신다. 우리는 믿음을 구사해야 하며, 모든 감정을 뛰어 넘어 믿음을 통하여 자신을 견고히 세워야 한다.

그것은 모든 거룩한 온전함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스스로 그분 안에 거하신다. 이러한 믿음의 길이야 말로 교회의 생명이며, 높은 온전함에 이르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로렌스 형제의 첫째가는 덕문은 곧 그의 영혼의 삶과 양분이 바로 믿음이었다. 그의 영적인 생활이 드러나게 진보해 갈 수 있었던 것도 이 믿음이 그의 영혼을 뒤에서 떠받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믿음이 그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었다. 그를 높이 들어 올려 세상을 뛰어넘게 해준 것도 이 믿음이다. 세상은 그의 눈에는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자연히 그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안에서만 행복을 찾게 되었다.(pp. 112-113)

 

2) 믿음은 그의 가장 위대한 교사였습니다.

 

“믿음은 그의 가장 위대한 교사였다. 그가 왕으로 거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이 높고 귀하게 여기게 해준 것도 그 믿음이었다.

그는 예수님께 깊이 헌신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분께 충성과 경배를 드리기 위하여 그분 발 앞에 엎드려 많은 시간, 많은 낮과 밤을 보냈다.(p. 113)

 

3)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존중하고 사랑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믿음은 또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존중하고 사랑하게 해주었다. 로렌스 형제는 그 어느 저명한 석학의 책도 하나님의 이 위대하신 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 말씀을 향한 그런 확신 속에서 그는 믿음이 자기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들을 굳게 믿었다.

그는 종종 하나님에 관하여 세상에서 읽거나 듣는 그 어느 것도 자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말하곤 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은 무한하기 때문에 인간의 말로 그분을 묘사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분의 위대하심을 완전히 묘사하기에 충분할 만큼 표현력 있는 말들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분의 그분 되심을 내게 알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나는 짧은 시간에 학교에서 수년간 배우는 것보다도 그분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울 수가 있습니다.(p. 113)

 

4)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견고한 소망과, 그분의 주권적인 섭리에 대한 확신과, 자신을 하나님의 손 안에 내어 드릴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믿음은 로렌스 형제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견고한 소망과, 그분의 주권적인 섭리에 대한 확신과, 자신을 하나님의 손 안에 내어 드릴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결코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무한하신 자비의 품안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겼다.

일이 어렵게 되어 가면 갈수록 그는 더욱 큰 소망을 품었다. 마치 폭풍우에 시달리면서도 그 한가운데 더욱더 우뚝 버티고 서 있는 바위 같다고나 할까.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의뢰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하고 하나님의 보호에만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이라고 그가 말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 태도로부터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진지한 인식과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진실된 고백이 나오게 된다.

로렌스 형제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뜻만을 보는 눈을 가졌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너무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그에겐 끊임없는 평화가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커다란 악에 대한 애기를 들었을 때조차도 그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그것이 전체 질서에 선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그저 자신의 심령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할 뿐이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계속 살 것인지 죽어서 바로 하늘나라에 갈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가정 하에,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께 선택권을 맡기겠노라고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보여 주실 때가지 자기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pp. 113-115)

 

10. 항상 전체의 유익을 구했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가장 거룩한 곳에까지 가지고 다니는 자기 조국에 대한 자연스러운 집착이 로렌스 형제에게는 따라 다니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부터도 동일하게 사랑을 받았다.

그는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누구를 위하여 그 일을 하는지 등을 따지지 않고 항상 전체의 유익을 구하였다. 그는 땅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천국의 시민이었다.(p. 115)

 

11. 비전을 이루기 위한 조급함이 없었습니다.

 

“그의 비전은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영원하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신도 그분처럼 영원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었다.(p. 115 )

 

12. 하나님을 거룩한 연인으로 인식하고 애정을 바쳤습니다.

 

“로렌스 형제의 마음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완전히 통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거룩하신 ‘연인’에게 자신의 모든 애정을 다 바쳤다.(p. 116)

 

13.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하나님을 알게 하였습니다.

 

“믿음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통치하시는 진리’로 받아들이게 해주었고, 소망이 그로 하여금 그분을 완전하신 행복으로 생각하게 해주었으며,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분을 만유 가운데 가장 완전하신 분으로, 아니 완전 그 자체로 인식하게 해주었다.(p. 116)

 

14.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수단은 매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그가 중시한 것은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 모든 곳, 모든 일이 다 똑같았다. 이 선한 형제는 기도 모임에 참석하고 있을 때나 구두를 수선 하고 있을 때나, 어디서나 언제든지 하나님을 발견하였다.

그는 쉼을 갖기 위해 특별히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외다른 광야에서뿐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도 자신이 사랑하고 경배해야 할 똑같은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로렌스 형제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수단은 매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게 되는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중시한 것은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다.(p. 116)

 

15. 하기 싫은 일일수록, 하나님께 드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자신의 본능적 성향과 어긋나는 것이면 어긋날수록 그 일을 주님께 드리는 자신의 사랑의 가치는 그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사소한 일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드릴 가치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뭔가가 부족하여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시며, 또한 우리가 행하시는 일들을 보실 때 오직 거기 담겨지는 사랑만을 보는 분이시기 때문이다.(pp. 116-117)

 

16. 견고함과 담대함을 가진 너그러운 영혼이었습니다.

 

“로렌스 형제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뛰어난 견고함이다. 흔히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 담대함이라 불리기도 한다. 거기서부터 두려움과 하나님 아닌 모든 잘못된 소망들을 초월하여 높이 들린 관대하고 너그러운 영혼이 발견된다.

그는 아무것도 탐내지 않았고,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영혼의 견고함도 추적해 보면 그의 모든 다른 덕목들과 똑같은 것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는 하나님이 아주 존귀하신 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그분이 공의의 통치자시며 무한한 지선(至善)이라는 사실은 뒤 뒤를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것이었다.(p. 117)

 

17.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기에 그분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속이지 않으시며 오직 우리에게 선만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는 그분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굳게 마음이 정해져 있었으며,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기로 확정하였다.(p. 117)

 

18. 하나님 그분만으로 만족하고 사랑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그분께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대가를 드리는 그런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든가 아니면 무슨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는 오직 그분을, 그분 자신을 사랑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갈망했고, 그분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소원했다.(p. 118)

 

19. 병에 걸려 임종 앞에서도 하나님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병에 걸려서 최후의 호흡을 마치던 때에 특별히 더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그의 영혼은 어찌나 자유로웠던지 마치 몸에 아픈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평소와 똑같이 자기 마음속의 것들을 표현했다.

그의 사랑은 너무도 순결했다. 심지어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들을 그분께서 보지 말아 주시길 바랄 정도였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일이 이런지라 그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라곤 하나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랑스러운 형제에게 백배로 갚아 주시지 않고는 아무것도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럴 때마다 로렌스 형제는 놀라운 기쁨을 맛보았고, 숨 막힐 것 같은 그분의 거룩하심에 형언할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그럴 때 그가 하나님께 외치곤 하는 기도가 있었다.

“오, 하나님 너무 많아요. 저한텐 너무 벅찹니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면 이런 은혜와 위로를 아직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죄 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옵소서.

그리하여 그들도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섬기게 하옵소서. 저는 이미 믿음으로 아버지를 아는 기쁨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와 같이 부요하시고 후하신 손으로부터 오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들을 저는 받아들입니다.

, 아버지! 주께서 기뻐하신다면 제가 그것을 받은 뒤 아버지께서 그것을 저에게 주신 것처럼 저도 그것을 다시 아버지께 돌려 드릴 수 있게 하옵서.

아버지께서는 제가 아버지께 구하고 원하옵는것이 그런 선물들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 자신이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어떤 다른 것으로도 저는 이렇게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pp. 118-119)

 

20. 하나님만으로 만족했기에 시시 때때로 얼굴의 광체가 있었습니다.

 

“시시 때때로 이러한 기도를 드려도 그의 심령은 더욱더 거세게 사랑으로 불타올랐기 때문에 그 불꽃은 도저히 그의 속에 갇혀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그의 광체 나는 얼굴을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p. 119)

 

21, 젊으면 젊을수록 하나님께 자신을 모두 드리라 충고하였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어렸을 때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지 못했던 시절을 후회하면서 그의 후배 형제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그분은 그토록 오래 전부터 계셨으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늘 새로운지. 나는 그분을 너무 늦게 사랑했습니다.

“형제들이여, 형제들은 나처럼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형제들은 젊습니다. 나의 이 진실된 고백을 듣고 꼭 유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젊을 적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일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미미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그분께 드리십시오. 내가 지금 애기하고 있는 것들을 누가 나에게 애기만 해주었더라면, 그분을 사랑하게 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을 흘려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간절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드려지지 않는 모든 시간들은 잃어버린 시간으로 간주하십시오.(pp. 119-120)

 

22,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상 같은 일이기 때문에, 로렌스 형제는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자기가 주님을 향하여 품고 있는 그 애정과 똑같은 애정으로 대하였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통하여 나타내신 것이라고 믿었다. 즉 그가 형제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 하나하나도 주님께서는 바로 당신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받아 주신다는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각별히 조심하여 형제들을 섬기고자 했다. 부엌에서 일할 때는 특히 그랬다. 거기서 일할 때 그는 사람들을 천사처럼 생각하며 일했다. 그가 보인 그런 형제 우애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감을 주어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자기 능력 닿는 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한 가난한 자들을 도와 필요를 채워 주었다. 문제가 있을 때는 위로해 주었고 조언이 필요할 땐 그것도 아까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몇 마디 말로 간단히 요약한다면, 그는 이웃을 위해서 자기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했으며, 어떤 식으로든 결콘 다른 사람을 해하려 하지 않았다.(pp. 120-121)

 

23. 죽는 순간까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죽음도 로렌스 형제를 두렵게 만들지 못하였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그는 놀라운 수준의 안정된 모습과 순응의 태도를 보여 주었으며, 보통 사람으로서는 지니기 힘든 기쁨을 누렸다. 오히려 소망은 견고해졌고 사랑은 더 불타올랐다. 살아생전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던 그는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특히 그가 모든 덕목들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겼던 덕목인 믿음이야말로 그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생생히 살아 움직여서, 그 큰 믿음이 그를 온전히 사로잡았으며 그 믿음의 광채로 인하여 그의 얼굴에선 빛이 났다.

로렌스 형제는 마지막 순간에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그는 평생에 하나님이 주셨던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쭉 돌이켜보았다.

형제들이 그에게 혼자 있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고 묻자, 그는 자기가 앞으로 영원히 하게 될 일을 하고 있었노라고 말했다.

“하나님을 송축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분을 경배하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여생에 대한 모든 염려일랑 그분께 맡겨 버리십시오.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만이 우리의 온전한 목표요, 해야 할 일입니다.

이튿날인 1691 2 12, 아무런 고통도 없고 조금의 의식의 흐려짐도 없이 부활의 소망을 간직한 로렌스 형제는 주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여든의 나이로 그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돌려 드렸다. 단잠에 빠진 사람처럼 평화롭고 고요한 모습으로…….

그의 죽음은 달콤한 잠과도 같았다. 그 잠은 그를 이 세상 삶에서 더 축복된 삶으로 옮겨 주었다.(pp. 121-122)

 

24. 그는 지금 주님과 영광중에 거하며 기뻐하고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결론을 내리건대, 로렌스 형제의 죽음은 주님 보시기에 아주 귀했을 것이다. 그의 죽음 이후 그에게는 지체할 여지없이 상급이 주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주님과 더불어 영광중에 거하며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믿음을 지녔더니

이제 그 상급으로

주님을 분명히

뵈올 수 있게 되었네

 

소망을 지녔더니

이제 그 상급으로

주님을 곁에서

소유하게 되었네

 

사랑을,

꽃봉오리 같은

사랑을 지녔더니

이제 그 상급으로

완전한 사랑을

꽃피우셨다네” (p. 123)

 

에필로그

 

저는 임재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 하나님의 기준을 쓰게 된 순서나 구성은 모두 저의 경험이 기초가 되어서 주님이 저를 다루신 것을 정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저를 인도해 온 과정입니다. 저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성서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아주 조금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제인 그리스도의 임재는 저의 경험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여서 그리스도의 임재의 대가인 로렌스 형제를 연구하여 그를 통하여 제가 배우고자 글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제가 가장 큰 도전을 받았고, 또 제가 가장 많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글을 써나갔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산 것이 약40년이 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추구하지 말고, 그리스도 그분을 갈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믿음으로 의뢰하는 것이 핵심이라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전부인 삶을 추구하였습니다.

 

로렌스 인생의 약10년 동안 그는 죄 문제에 대하여 깊은 고뇌의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임재를 추구하고 나서 첫 번째 나타난 현상은 죄에 민감함이었고,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지는 경험을 하며 고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 하면 지금 우리시대에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께 많이 말하고 그분의 내적 음성 듣기인데 반해, 로렌스형제는 아무것도 나타나는 것이 없이 자신의 죄 때문에 몸서리치는 시기들을 보냈습니다. 임재와 관련된 현상이 나타나기는커녕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을 정죄하는 과정을 가졌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그를 지속적으로 임재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가장 첫 번째 징조는 죄에 대한 민감성입니다. 저의 글 “하나님의 기준세우기 - 회개”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런 회개가 로렌스 형제의 삶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성서적인 회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로렌스 형제는 수많은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책과 방법론들이 더욱 혼란만 가져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었지만,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사모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분과의 깊은 사귐의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하여 다른 누구에게 배우적도 없었고, 책을 통해 안내받은 적도 없었던 것을 감사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처음으로 임재에 대하여 연구한 글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지식적인 방법을 찾기보다, 오직 하나님 그분과의 친밀함이 나의 유일한 전부인 주님만을 추구하였는데, 많은 시행착오와 오류과정을 거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아직 하나님의 임재의 깊이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깊지도 못합니다. 저는 주님과의 더 깊은 사귐의 자리로 가고 싶습니다. 이 글은 제가 앞으로 지속적으로 추구해야할 길이기에 저에게는 소중합니다.

 

이글을 쓰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위엄의 능력이 저에게 강하게 부어졌습니다. 약 하루였습니다. 로렌스형제의 글을 정리하는 저녁때부터, 어느 때보다 그리스도 의식에 싸여서 그리스도를 강하게 의식하며 글을 정리하였습니다. 너무나 강렬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늦게 일어났는데, 눈을 뜬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이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구세주” 이 단어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의 크기와 넓이와 영광이 가슴에 넘쳐흘렀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분의 고통과 대속에 대한 것으로 감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시간 구세주에 초점이 맞추어져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앞에 있었습니다. 온 세상의 바다와 산들과 대지들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리고, 그의 위엄 앞에 벌벌 떨었습니다. 온 세상을 지배하시는 위대한 왕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셔서 능히 그의 능력으로 저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실 권능이 보였습니다. 한없이 그분 곁에 머물고자 원하는 저의 마음의 간절함을 노래로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약 8시간정도, 오직 구세주의 위엄 앞에 감격을 눈물을 흘리며, 그냥 방에서 온종일 있었습니다. 그때 흘린 감격의 눈물을 커피 잔에 받았다면 넘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구세주 의식”이 저의 생각과 행동과 가족에게 대하는 저의 모든 대화가운데에도 가장 중심에서 시작되어 흘러나왔습니다. 특별히 저의 마음을 하나님의 거룩함에 더욱 민감하게 만들어서, 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저를 보며, 죄로 죽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행위에서 나온 죄가 아니라 저의 마음속에 잠시 동안 높아진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번 그리스도의 위엄을 1-3 시간씩 경험한적 있지만, 어느 때보다도 이 글을 쓰는 동안 제가 경험한 가장 강렬한 그리스도의 임재로,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보다 더 소중한 예수님, 그분이 나와 함께 있는 것과 바꿀만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

 

그리스도의 임재와 다르게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는 성경 출애굽기에 너무나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33:18-23)

 

하나님이 자신의 인격과 성품과 속성들을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십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한 그 분의 음성을 통해, 삶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과 같이 다양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 그분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인간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이 땅에 살면서 주어진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가장 큰 복입니다. 영적 회복이 일어나는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항상 하나님은 자신이 사용하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임재 하셨습니다.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에반 로버츠, 죤 웨슬리, 데이비드 몰간, 하웰 해리슨, 다니엘 로렌드, 존 리빙스턴, 그리고 한국의 길선주 장로 등등……. 부흥은 항상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부흥 때마다 이러한 영광의 임재는 교회와 도시와 나라에 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이끌려서 교회로 몰려들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는 말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선하심 즉,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인간에게 보여주시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에 대한 오해

 

1. 성령의 기름부음이 영광의 임재가 아닙니다.

 

성령의 기름부음과 영광의 임재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성령의 기름부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특별한 은혜나 감동, 신령한 체험 등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광의 임재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분의 속성, 성품. , 그 분 자신을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신령한 경험이 영광의 임재가 아닙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였다는 사람이 있어서 먼 길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는 기도실에서 금식하며 오랫동안 기도하고 있는데, 불같은 것이 자기에게 들어오는 경험을 하였는데, 그 후 감출 수 없는 기쁨과 찬양이 흘러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광의 임재라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하다가 갑자기 번쩍 하더니 빛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한 달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지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광의 임재라 생각하였습니다.

 

영광의 임재 시에 빛을 보지 못하지만, 눈부신 현상이 있어서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광의 빛이 아닙니다.

 

영광의 임재의 특성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반포하시고, 하나님의 이름에 속한 자신의 성품들을 초자연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모세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그대로 초자연적으로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아니면, 신령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3. 영광의 임재는 곧 큰 은사나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경험하고 나면 큰 능력을 받아 온갖 은사가 임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흥 때마다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들이 나타났지만, 영광의 임재 자체는 은사를 갖게 하고, 능력을 부어주는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그분의 성품과 인품과 속성을 초자연적으로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면 속사람의 근본적인 부분이 변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영원히 그분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의 임재를 인간에게 보여주시나?

 

1.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영광의 임재를 인간에게 보여주시는지에 대해서 성경과 기독교 2000년 역사가운데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서 있게 되면 반드시는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그 분이 가지신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여러 가지 모습은 달라도 하나님의 속성을 그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5:37)

 

본문에서 형용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뜻한다고 많은 주석가들은 해석합니다. 구약에서 주님의 보좌, 얼굴을 보았다는 표현들은 영광의 임재가운데 있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세인들에게 하신말씀이, 너희가 정말 신앙의 본질에 서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리세인은 신학적으로 바른 신학이었고, 열심으로서는 교회에서 타에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 드렸지만, 영광의 임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과 바른 행동이 바로 신앙으로 생각하였지, 인격체 되신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2.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길입니다.

 

특별히 부흥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회복이 필요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묻고,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들어주십니다.

 

회복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초자연적으로, 하나님 그분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들에게, 초자연적으로 자신의 성품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리기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어떻게 경험할 있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경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상태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의 극치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누구에게 부어주시는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어디에 부어주시는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언제 부어주시는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는 예측도 할 수 없고, 아무리 기도하고 사모해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부어주십니다.

 

부흥 때마다 주님의 주권으로 어느 지역에 잠간 머물러 있기도 하고, 특정인에게만 잠간 머물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권한이 없습니다. 모두 주님께만 모든 주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 4:6)

 

그리스도인은 정도와 분량의 차이가 있을 지라도 이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어떤 삶의 습관이나 행실의 변화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단순히 종교적이 된다 라든지, 예배를 잘 드린다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영광의 임재를 직접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이후시대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통하여 영광의 임재를 부어주십니다. 얼굴 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성품, 속성을 뜻하는 의미입니다. 영광의 임재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본 영광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또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였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사건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책 안에는 역사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여러 가지를 서술하면서 이 영광의 임재는 일종의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몇 가지를 인용하여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부흥”. 서문강역. 생명의 말씀사. pp. 318-325)

 

1. 모세

 

우리가 모세를 통하여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것을 위의 설명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2. 이사야

 

이사야도 하나님을 어렴풋이 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5)

 

그는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성전에 연기가 가득하고 문지방 터가 움직였습니다. 그 영광을 어렴풋이 보았을 뿐인데도 그는 “화로다. 나는 이 일을 목격했기 때문에 부적합한 자다. 나는 합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너무 놀라 비틀거릴 정도였습니다.

 

3. 사도 요한

 

그 영광을 언뜻 보게 되었을 때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1:17)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과 똑같은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어째서 우리는 그러한 체험을 하지 못합니까? 어째서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서 조금밖에 알지 못합니까?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7:3). 단지 하나님에 대해서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4. 사도 바울과 제자들

 

다소 사람 사울로서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갑자기 정오의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어떤 한 일이 일어났는지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땅에 엎드러져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 영광이 사울에게 그러한 일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영광을 보는 것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갈수록 더 많이 이해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핵폭탄의 폭발 능력에 대해 읽었습니다. 또한 그 섬광 때문에 눈을 보호해야 된다는 것도 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알기 위해 그런 핵폭탄의 섬광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상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있었을 때, 그 변모한 모습을 보며 깊이 잠들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 영광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며 우리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그러한 상황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깊은 잠을 자게 했던 것입니다.

 

5. 조나단 에드워드

 

1837년 어느 날, 내 건강을 위해서 숲속으로 말을 타고 달려가다가, 말에서 내려 늘 하던 대로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정말 특이하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놀랍고 위대하며 충만하고 순결하며 달콤한 은혜와 사랑, 온유하고 겸손한 낮아지심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야 말로 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생각과 관념을 다 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탁월하게 보였는데,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 시간가량 그러한 일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 내내 거의 대부분을 나는 눈물의 홍수에 빠져 큰소리로 울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텅 빈 채로 쓰러져, 먼저 속에 누워 오직 그리스도로만 충만해지고, 거룩하고 순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은 강한 영혼의 열망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것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를 신뢰하고 바라보며, 섬기고 따르며, 완전히 성화되고, 하늘에 속한 거룩한 순결함으로 깨끗해지기를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른 때도 여러 번 그러한 광경을 보았고 그럴 때마다 그것은 똑같은 효과를 발하였습니다.

 

6. 스펄전

 

그의 설교 가운데 그가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고 사모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간절히 알기 원한다면,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그러한 하늘의 영광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는지 분명히 알고 싶어 견딜 수 없다면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입니다. 강렬하게 사모하는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가 확실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앞뒤 문맥과 그의 사역을 보았을 때 마틴 로이드존스는 임재를 사모하고 부흥을 사모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6.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체험한 그날은 몹시 추워 얼음이 얼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땀을 흘리게 했습니까? 그것은 영광, 영광의 성격의 초월성 때문이었습니다.

 

7. 무디

 

그 사람은 육체적으로 매우 강건하고 다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어렴풋이 보여 주셨을 때, 그는 하나님께 그만 손을 거두어 달라고 구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죽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만 그것을 느낀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한 다른 사람들도 인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육체적 체질이 그 영광 아래서 부서지고 녹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손을 거두어 달라고 요구해야만 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즉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게 그 영광의 표증만을 주겠다. 그 영광을 얼른 지나가면서 볼 수 있게 해주겠다. 그러나 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보지는 못할 것이다. ‘내 등만을’볼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987 1월쯤 되었을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지 1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주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2009년 선교지에서, 그것도 기독교인들이 아주 거리감을 느끼는 이슬람식 기도 및 예배 방법인 샬랏을 하라는 강한 부담감에, 못하는 샬랏을 흉내 내며 주님 앞에 앉았을 때,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는 1987, 주님이 육성으로 말씀하실 때, 다시 영광의 임재를 부어주시겠다고 한, 두 번째 영광의 임재를 선교지에서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성으로 말씀 하신 그 일이 다 끝나면, 세 번째 영광의 임재를 다시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았고, 아직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그는 곧 임박 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직접 그의 성품과 속성들을 보여주시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고, 그 하나님 앞에 죽은 것 같이 되어져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해 했습니다. 여러 번 임재를 경험하였지만, 마지막으로 영광의 임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임재 하시는지 그는 알게 되었고, 글로 남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임재하시는 과정

 

그가 두 번째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기 전,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임재하시는 과정을 정리하기 위하여 노트필기와 mp3 녹음기를 옆에 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번만 임재해주신 것이 아니라, 임재해주시는 기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 번 그 기간 안에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여러 번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는데, 첫 번째 영광의 임재가 가장 강렬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임재 하셨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님이 임재하시는 방식과 과정을 잘 파악해두어야 된다는 마음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리스도께서 임재 하시자, 노트필기와 녹음기에 이 과정을 잘 정리해두려고 하는 모든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노트에 적거나 녹음하려는 순간에, 하나님 그 분을 잠시라도 놓치는 것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이것만큼은 놓칠 수 없어서 모든 계획을 내려놓았습니다. 잘 기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1. 약 한 달이나 두 달 전부터 눈이 조금씩 부시고, 주님을 찾고 갈망하고 애타는 마음이 증가합니다.

 

그는 주님이 그분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전에 일어나는 것은, 단계적으로 계속 눈이 부신 증상이 약 두 달에서 세달 이상의 기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혹은 잠자리 들기 위해 눈을 감으면 눈이 부신 경험이 있었습니다. 낮에도 눈이 부셔서 눈에 이상이 있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습니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주님을 찾고 갈망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많이 하루종이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꿈에서 조차도 주님을 갈망하고 찾고 애타게 부르짖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어떤 생각을 하든지 24시간 내내 오직 아이가 부모를 찾듯 애타게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단번에 그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자신의 몸이 견디지 못해서 그러지 않나 생각해 본다고 하였습니다. 1987년도에 처음 주님의 영광을 그에게 보여주실 때도 동일하게 그러하였던 기억이 있어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임재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처음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그에게 하나님이 와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거나 이야기 한 것이 아니지만 조용한가운데 하나님이 임재 하셨다는 것을 그냥 알아졌습니다. 서 있을 때 다리가 서있기 힘들 정도로 그분의 임재 앞에 압도되었습니다. 앉았지만 나중에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항거할 수 없는 그 영광의 임재 때문에 바닥으로 몸이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선하신 하나님이 보이는데 자신이 죄인 중에 죄인이고, 지옥에 떨어질 것 같은 자신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뒹굴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반포하시고, 그 이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자 인식되고 경험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 33:19)

 

모세에게 영광가운데 임재하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형상 즉 여화와의 이름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성품, 속성들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선한형상의 의미입니다. 영광의 임재가운데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알려주시면서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그는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셨을 때, 자신의 마음에 ‘여호와’하나님. , 스스로 계신 그 하나님이 실제로 느껴졌습니다. 자신이 직접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계신자로 바라보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 자신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보듯, 여호와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만왕의 왕이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 창조 전에 스스로 계셨던 그 하나님의 실체가 그의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반포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나님 그분을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끝 보다 더 먼 우주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모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끝없는 우주와 세심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이 세상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감격해하며, 그 하나님의 성품 앞에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반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랍어의 “알라후 아크바르”가 생각이 났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란 아랍어 입니다. 전능하신 그 하나님 때문에 그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 분은 생각하신 무엇이든이 하실 수 있는, 즉 그가 생각하는 모든 일 보다 더 큰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실 수 있는 그런 분으로 다가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 앞에 티끌보다 못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반포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는 지옥에 떨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벌레보다도 못한 자신 때문에 울고 또 울었습니다. 죽은 것 같이 되어 숨 쉬는 것조차 죄송함을 느꼈습니다. 몸은 꾸부러져 바닥에 너부러졌고, 죽은 것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반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와 하나님이 회복하시고자 하시는 그분의 기준(다림줄)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 버린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질투하시는 하나님 앞에 그는 그의 모습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떠나가 버린 교회와 선교현장을 회개하였습니다. 모두 자신이 회개해야할 그의 죄였습니다.

 

그리고 공의의 하나님이 반포되었습니다. 그는 그 두려움 앞에 죽어버린것 같았습니다. 무서운 일을 당하였을 때, 혹은 무서운 사람 앞에 섰을 때 당하는 두려움과 다른 두려움이었습니다. 기절해버리고 싶었지만 기절할 수 없었습니다. 한없이 슬피 울며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름을 반포하시고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라 이야기하였습니다.

 

4. 그리스도 그 분으로 나를 채우고자 하는 갈망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선하신 그 분 앞에 있는 것이 죄스러워 죽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죄 때문에 몸서리를 치며 울고 있을 때, ‘사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보이신 그 십자가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터져버릴 것 같은 갈망함을 느꼈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갈증을 해결 해 줄 수 있는 무한한 갈망이 그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평생 동안 우리가 알아가합니다. 그리스도 그 분 안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 영광의 임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5.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빛을 보지만 빛을 보지 못합니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 33:20-23)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눈을 가리시고 직접적인 영광의 빛을 차단하신 후 간접적으로 모세에게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모든 사람은 빛을 보지 못하지만 빛을 보게 된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실 때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고 하셨습니다. 눈을 뜨고 있으나 감고 있으나 똑같았습니다. 눈에 이상이 생겨서 영원히 앞을 보지 못하지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곧 걱정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너무나 눈이 부셨기 때문에 눈이 고통스러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임재의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였기에 눈에 대한 신경은 곧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 그분에게 집중하였습니다.

 

6. 주님이 보여주시는 영광의 임재는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사이였습니다.

 

영광의 임재를 여러 번 경험하는 것은 실제로 그 영광 앞에 엎드려져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인데,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영광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는 심지어 이대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어떨 때는 그만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 영광의 임재가 끝나버리면 세상을 다 잃어버릴 것만 같아, 괴로워도 주님께 모두 내어드리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더라도 그 영광 앞에 죽는 것이, 자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에서 면류관을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돌려 드리는 그 광경이, 지금 그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영광의 임재 앞이라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싫지만 지옥 있더라도 그 영광의 임재와 함께라면, 그 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7. 처음 주님의 영광의 임재를 처음 경험할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1987, 그가 처음 주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할 때는, 1시간이상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이름을 반포하시는 것도, 그 분의 성품이 그에게 실제가 되어서 경험되어진 모든 일들이, 영광의 임재가 끝나고 나서도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오직 한없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울었고, 그분의 선하심을 보았다는 기억뿐입니다.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성품에 놀라, 오직 그 분이 보여주시는 성품 때문에 죄로 죽을 나의 모습 때문에 울고 또 울며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 덩어리가 나 자신임을 인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가슴에 다 채우고도 다 채우지 못하는 갈증만 남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영광의 임재를 여러 번 경험하며, 주님이 허락하셔서 그가 그 과정을 다 인식할 수 있게 마지막 영광의 임재를 약하게 그리고 천천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 과정을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말합니다. “주님이 지금 다시 영광의 임재를 부어주시면, 그는 그 과정을 기억하지 못하고 주님의 인격과 성품과 그분의 속의 모든 속성들 때문에 정신없이 울고 울다가 예수님으로 자신의 가슴을 채우고자하는 미친듯한 갈증으로 가득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8. 처음 영광의 임재를 경험할 때 선잠에 빠질 수 있습니다.

 

변화산상에서 일어났던 예수님의 일상적인 사역이 아닌 특별한 사건은, 영광의 임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주님은 산이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변모되셨습니다. 옷은 희어지고 가장 밝은 태양보다도 더 밝은 광체의 빛을 발산하였습니다. 용모와 모든 것이 다 변하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변화 앞에서 갑자기 졸리고 곤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절대적인 영광을 보고 살자가 없습니다. 모세에게 영광의 임재를 보여주실 때는 손으로 그를 가려서 보호하셨듯이, 그 영광의 빛을 감추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선잠에 빠지게 하여 제자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선잠에 빠졌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기억하지만, 자세히 보지 못하였습니다. 잠을 자고 일어나서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9:5-6)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선잠을 자고 담대히 말한 것이, 이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선잠을 자면서 본 영광의 임재가 얼마나 인간에게 영원히 그 가운데 거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지 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처음 영광의 임재를 경험할 때 바로 이러한 선잠에 빠졌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너무 밝은 빛이 비춰오는데,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랫동안 어찌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데 자신이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는지, 정말 한심하여 죄책감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본문말씀을 통하여, 잠시 선잠을 잔 것은 자신을 지켜주시기 위한 배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선교지로 갔을 때는 이러한 선잠을 자는 일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지 1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자신이 영광의 임재 때 잠에 빠지는 경험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9. 주님이 영광가운데 임재하실 때 주변도 영광의 임재 가운데 들어갑니다.

 

그가 선교지에서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같은 집 안에 다른 방에 아내가 있었고, 또 다른 방에 무슬림 한명이 있었습니다. 그가 영광의 임재가운데 있을 때, 아내는 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염없이 울며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있었습니다. 동일하게 다른 방에 있던 그 무슬림도 울면서 기도하며,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직접 영광의 임재의 경험한 사람보다는 영광의 임재가 약하였지만, 주님이 임재하시는 한 시간 반 동안 그 누구도 꼼짝하지 못하고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주님이 모스크에 가서 기도할 마음을 주셔서 모스크에 갔을 때, 그가 그 지역 모스크에서 그 때만 목격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다 하염없이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 모스크 가서 기도할 때 마다, 기도하던 무슬림들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하염없이 통곡하며 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걷히는 시기가 될 때 그 누구도 울며 기도하는 사람은 볼 수 없었습니다. 2년 동안, 그가 주님의 임재 앞에 붙들려 있을 때밖에. 그러한 광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무슬림들은 기도가 끝나면 집에 가기 바빴고, 심지어 이맘은 서둘러 집에 도망치듯 가버리는 무슬림들을 남겨서 기도훈련을 시키기 까지 하였지만, 다시는 그렇게 울며 기도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모스크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가 임할 때, 일어날 부흥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10. 영광의 임재 중에는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이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고서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9:6)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는 모두가 두려움으로 죽은 듯 있었다고 합니다. 영광의 임재가 임하면 하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11. 영광의 임재는 한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정하신 기간 동안 여러 번 임재하십니다.

 

1996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후, 그는 몇 번 더 주님이 임재하시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처음 영광의 임재가 가장 강렬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2009년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선교지에 갔을 때도, 주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영광의 임재를 부어주셨는데, 여러 번 경험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처음 영광의 임재가 가장 강렬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가장 강한 영광의 임재는, 모두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기의 첫 번째 경험이었습니다. 강렬하고 확실하였으며 그의 모든 것이 변화되는 계기였다고 하였습니다.

 

11. 개신교가 아닌데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15장에 예루살렘회의가 있었습니다. 회의가 이루어진 이유는 이방인 즉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재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기독교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인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유대인이라 지칭하였습니다.

 

이 회의 결과 이 이방인들 모두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반드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며 강조하지 말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 15:19)

 

그리고 “최소한의 요구사항들”을 주문합니다.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고 어떠한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좋으나,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종교를 떠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여전히 문제가 되는, 그전에 가지고 있던 우상에게 절하던 것을 금한 것입니다. 또한 율법에서 벗어나는 먹는 것과 관련하여 유대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으로써, 함께 식사를 하거나 교제를 할 때 거리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금하였습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 15:20-21)

 

이것은 초대교회 시대와 그 이후에도 사용된 하나님의 선교전략이었습니다. 초대교회시대에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할 없는 엄청나게 빠르게 복음이 로마전체에 퍼저 나갈 수 있었던 비밀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로 이러한 선교자체가 중단되었고, 이러한 폭발적인 질적 양적 성장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만 허용되었고, 지금은 안 된다고 말한다면, 이미 세대주의 신학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각 세대에 한해 특별한 역사는 한정되게 발생하였다는 주장과 같습니다. 그리고 세대주의자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 자신들이 싫어하는 것을 성서가 아닌 논리로 부정해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오늘날 이 본문에 나온 것처럼, 예루살렘 종교회의 때에 언급된 성령이 이방인에게 부어졌다는 말씀이 있는데, 마귀도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므로, 가장 확실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가 부어진 것이 사실로 드러나야 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만큼은 절대 마귀가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개신교 선교 역사가운데 이러한 개념을 가진 것이 아주 최근의 일이고, 이러한 보고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보고가 없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선교사도 보고된 적이 개신교 선교역사상 아주 극소수 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다른 종교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가 일어나도, 그것이 맞는지 틀린지 분별할 수조차도 없었고, 이러한 개념조차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슬림인데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무슬림으로써 그리스도 십자가를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가 전한 무슬림들을 모두 모으면 한국의 대형교회 하나 세울 정도로 열심히 그리스도를 전하러 다닌 형제입니다. 과격무슬림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그는 두려움이 가득하여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두려워서 주님 앞에 기도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영광가운데 임재해주셨습니다. 그 임재 후 그는 두려움이 없어지고 그전보다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동안 이 형제의 경험이 영광의 임재인지 성령의 기름부음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이 형제를 만나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3번 그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것을 이야기 들었습니다. 처음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면 어떻게 이 경험을 이야기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 형제와 함께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나누었을 때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맞았습니다.

 

이 형제는 그리스도로 자신을 채우고 싶은 갈증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무슬림 형제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더 전하러 다니라고 주님이 영광가운데 임재하신 것 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지금도 그리스도를 전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개신교는 유대교, 동방정교회, 케톨릭보다도 더 늦게 발생한 종교입니다. 만약 하나님 종교를 통하여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셨다면, 개신교는 이미 하나님을 떠난 이방종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교를 통하여 구원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통하여 구원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삼으십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일어난 일이지만, 현대 개신교 선교역사에 이방인에게 하나님이 영광가운데 임재 하셨다는 예가 보고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선교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어버리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종교개혁과도 같은 사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가 주는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일종의 천국을 먼저 맛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미리 맛보고 즐거워하는데 그것은 영광의 임재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자신이 경험한 영광의 임재 후 달라진 것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습니다.

 

“ 때로는 한 단어만 언급해도 내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이름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내게 영광스럽게 나타나셨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높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체험한 것 중에서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은, 나 자신의 성공과 유익에 대한 소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광스러운 것들을 직접 보는 데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달콤함을 누릴 때 그것은 마치 나 자신의 성공에 대한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로 나를 끌어올리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내가 나의 밖에서 보는 그 영광스럽고 즐거운 대상에서 눈을 떼어, 나 자신과 나 자신의 유익에 관심을 갖는 것이 정말 손해처럼 여겨져 참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을 들을 때도, 영광의 임재와 같은 현상이 있습니다.

 

개신교 탄생의 시작은 마틴루터와 칼빈이었습니다. 쯔빙글리도 많은 기여를 하였지만, 이 두 사람은 탁월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인물들입니다. 지금까지 이들에 대한 기록이 내려오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이 두 사람 모두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을 들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을 들었고 또 그분의 계획을 말씀해주시며 자신을 초청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을 들었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주장한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사도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육성으로 불렀다는 단편적인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도라 서로 칭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을 먼저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나타나는 현상은 영광의 임재와 같은 형상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사도운동에 참여하지도 않고, 사도라 하는 자신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1. 주님의 육성을 들을 때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1) 그 소리에 죽듯이 되어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2) 그 소리는 천둥소리 같았고 메아리쳐 울렸습니다.

 

3) 그 큰 소리를 자신만 듣고 있었고, 그의 옆에 자고 있는 그의 동생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성으로 말씀하신 것이 끝나고, 영광의 임재가 끝난 뒤, 잠에서 깨어나 꿈에서 무섭고 두려운 느낌이었고 천둥소리를 들었는데,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는 동생의 말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날은 비가 온 적 없고, 천둥소리도 없는 겨울이었습니다. 그의 동생은 잠자는 것이 두려워서 계속 잠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며칠 뒤 주님이 육성으로 다시 혼자 자고 있을 때, 그에게 말씀하셨는데, 그의 옆방에서 자고 있던 그의 아버지도 그의 동생과 동일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4) 자신을 부르는 소리는 잠을 자고 있을 때 들었지만, 육성을 들은 것은 깨어 있을 때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자고 있을 때 그를 깨우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처음 그를 부르셨던 것과 같은 방법이었습니다.

 

처음 그가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놀라서 부모님 방으로 갔습니다. 왜 자신을 불렀냐며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자다가 깨어서 그를 부르지 않았다며 방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는 다시 그 소리를 듣고 부모님 방에 갔더니, 그의 어머니는 염려하는 마음으로 그를 부르지 않았고 아침이 될 때까지 부르지 않을 거니까, 편안하게 자라 하였습니다. 그는 그 후에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몇 번을 깨어났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지 몰랐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학교에 가서 간밤에 자신이 경험한 것을 친구에게 말하였더니 그 친구가 성경 한 구절을 보여주었습니다.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삼상 3:9-10)

 

친구는 또 그 음성이 들리면 사무엘처럼 대답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후 밤이 되어 자고 있는 그를 부르시는 음성에 놀라 깨어나서 부모님이 주무시고 계신 건넌방으로 가려고 마루에까지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다시 부르면 사무엘처럼 대답해야 갰다며 잠을 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무릎을 꿇고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씀함으로 그리스도의 육성을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두 세 번 그리스도의 육성을 들었는데, 단번에 하나님의 음성 앞에 반응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육성에 허둥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주님의 음성이어서, 다시 잠을 청하였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반드시 사무엘처럼 대답해야 되는 줄 알고 그렇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육성을 듣는다면, 다시는 다시 잠이 드는 행동은 안할 것이라 이야기하였습니다.

 

5)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마음의 생각을 읽으시며 그와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는 입을 사용하여 주님께 목소리로 말씀드린 적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을 바로 바로 읽으시고, 말씀을 전개해 나가셨습니다. 그가 잘못 이해하면, 바로 교정해 주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지 1달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을 하실 때는 그가 그분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까지 침묵하시고 기다려 주시기도 하였고, 여러 가지 쉬운 말로 그를 이해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주님의 의중과 뜻을 바로 다 이해하실 때까지 주님은 다음 주제로 넘어가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6) 주님이 이야기하실 때 마다 그 자신이 유리창이 깨지듯이 와장창 깨지는 것 같았습니다. 정확하게는 거울이었습니다. 그 거울이 바로 그였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마다 그가 깨어지는데, 온 영혼이 거울조각이 파편이 깨어지는 듯 하였습니다.

 

7) 주님이 이야기를 하실 때 또 다른 경험은, 베개를 갈고리로 마구 파헤치듯, 주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과 그의 영혼과 그의 육신까지 갈고리로 파헤치는 듯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심히 괴로웠습니다.

 

8) 영광의 임재를 경험할 때와 같이 주님의 성품이 느껴졌고, 그 앞에 죽은 듯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바닥에 쓰러져 일어날 힘도 없이 누워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9) 주님의 육성이 그에게 심히 큰 고통을 주지만, 주님의 말씀이 끝나고 나서,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육성을 듣는 것은 죽어지는 경험인데, 그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그 음성듣기위해 애타게 사모하고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 육성을 갈망하고 사모합니다.

 

2.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성은 들은 내용

 

1) 첫 번째 육성으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를 사랑하신다와 하나님은 한분 이시다는 말씀만 하였습니다.

 

2) 두 번째 육성으로 말씀하셨을 때, 부흥과 종교개혁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슬람과 개신교와 케톨릭에 십자가 복음의 부흥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이 종교개혁이라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일어날 일과 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건이 일어났고, 진행 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3) 세 번째 육성으로 말씀하셨을 때,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있다 말씀하셨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려 주님의 뜻과 의중을 이루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던져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에 동의하고 자신을 드렸습니다. 주님을 대적하였던 그들의 이름은 프리메이슨 이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이 그에게 몇 번 죽음의 고비까지 갈 정도로 심하게 그를 대할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획대로 프리메이슨 맴버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 신학 그리고 좋지 않은 습관까지 배울 것이라 하며, 앞으로 만날 사람들을 말씀하시고,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시고, 특별히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 때 행동할 것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거의 다 일이 일어났고, 육성으로 말씀하신 모든 일이 끝나면, 자신이 프리메에슨에게 당한 후유증까지 모두 주님이 치료하실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한국의 프리메이슨은 육성으로 말씀하신 2번째 이야기 부분까지만 그들이 알고 있고, 3번째 부분은 모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에필로그

 

마틴 로이드존스는 그의 책 “부흥”을 통해, 부흥은 스쳐지나가듯 언뜻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도 항상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항상 이러한 영광의 임재를 경험케 하시고, 부흥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해 세우셨습니다. 항상 주도권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인간의 방법과 계획과 노력 모두가 쓸모없는 휴지조각이 되게 하시고, 오직 그분이 가지진 뜻과 의중대로 부흥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오늘날 정말 이러한 부흥을 사모한다면, 부흥으로 번지는 영적인 회복운동의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임재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 영광의 임재를 교회가, 마을과 도시가, 한 나라가 경험하는 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만 들어도 그분의 속성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 곁에 있고 싶은 갈망으로 넘치게 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이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 그분만을 추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카페 회원들이 하나님의 기준위에 영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좋은 충고와 가르침이 이 글을 더욱 알차게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발전하고 다듬어 질 것을 소망합니다.

 

 

김바울 선교사 // 다음카페 //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

 

출처 :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글쓴이 : 샤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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