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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세계관 4.5.6장 요약

하나님아들 2015. 7. 18. 15:09

제 4장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

 

  기독교세계관의 존재론적 토대

 

 

 

이 부분은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틀의 첫째 부분입니다.

 

1. 세계 창조 이전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충족적인 하나님

 기독교세계관은 이 세상이 스스로 생긴 것이거나 우연히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했기에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이 있기 전에는 하나만 계셨다. 그 분 홀로 계셔도 무엇이 부족한 것이 없는 그 스스로 충족하신 분(자충족적)이십니다. 자존적인 분이시며 "필연적 존재" (necessary being)이다.

 

 

2. 창조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창조의 인식 가능성)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일을 본 사람은 없다. 창조는 그 과정을 보고서 알게 되는 것이다. 또 과학으로 증명하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준 줄을 우리가 아나니 " (히 11:3)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만이 이 세상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지식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서야' 하나님의 창조를 알 수 있다.  믿음으로서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인격을 믿고 신뢰함으로 그가 창조에 대해서 하신 말들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을 창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정보의 원천으로 여겨야만 한다. 창조 기사는 신화도 비유도 아닌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3. 창세기 1,2 장에 보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과 특성들

(1) 무로부터의 창조

 하나님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데서 홀로 존재하고 계셨고, 그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 "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롬4:17)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그 태초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시간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시간과 역사가 이 태초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어 그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의식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하심

 그저 말씀만으로도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다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를 포함한다. 또 하나님 말씀으로의 창조는 창조 사역에 있어서 성육신 하기 전의 로고스(말씀)이신 성자께서 그 창조의 주체(agent)요, 창조의 중보자 역할을 감당하셨음을 말해 준다. (요 1:1~3)

 

(3)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Trinitarian work of creation)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다. 창조의 사역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다같이 관여하셨다고 단언할 수 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역, 말씀이신 성자의 사역, 최초로 창조된 원물질을 싸고 계시며 그로부터 말씀의 작용에 따라 피조계를 내시는 성령의 작용

 " 하나님의 신(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1:2)

 

(4) 질서 있는 창조 (orderly creation)

 하나님의 창조는 매우 질서 있게 이루어졌다. 매우 질서 있는 창조였다.

 

(5) 그 종류대로(after its kind)

 동식물을 다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이 모든 것을 그 종간의 차이가 분명하며, 그 종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창조하셨다. 인간들의 본래적인 사명은 분류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분류와 일치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분명한 차이들을 염두에 두시고 이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 인간은 아주 별다르게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만든 고귀한 존재이다.(최후로 사람을 만드실 때에는 사람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after the image of God) 창조하셨다.

 

(6) 선하신 창조(good creation)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모든 것이 매우 선한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악한 것으로 만드신 것없다.  지으신 후에 그것을 기뻐하시며 매우 좋다고 하셨던 것이다. 물론 인간의 타락에 의해 이 피조계의 모든 것이 다 악한 것이 되었다. 전체가 악해졌다. 그 중 일부는 선하고 일부만 타락한 것이 아니다.

 구속받은 성도는 이  세상을 이미 구속의 빛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의 모든 일과 관계에 대해서 구속의 빛을 적용시켜 보아야 한다.  모든 일과 관계에 대해서 구속의 빛에서 접근해야 한다.

 

 

4. 창조의 기독교세계관적 함의

- 이 세상은 창조된 하나님의 피조계- 

(1) 세상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의존적인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피조계에 관심을 가지시고 깊이 관여하신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피조계에 관여하시는 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을 하나님 자신 밖에 존재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부이거나 하나님의 한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 밖에 나와 존재하게 된 존재이다. 

(3) 이 피조계는 그 창조주의 뜻을 구현해야 한다. 그저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일정한 목적을 가지시고 유목적적으로 창조하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존재이다. 이세상의 모든 것이 모두 선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이루는 수단인 것이다.  

 

 

 

제 5장  인간의 창조와 그 상태의 변화

: 기독교 세계관의 인간론적 토대

 

 

1. 인간 창조의 독특성 개관

 하나님은 사람을 맨 마지막에 창조하셨다. 이것은 이 세상에 인간이 해야할 일을 미리 창조하신 후에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라는 관점을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다른 것들을 창조하실 때와 달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떤 방식대로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하실 것인지를 먼저 천명하셨다. (창 1:26) 사람을 창조하시는데 일종의 과정을 두셨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계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남자만 만드셨다.

 

2. 인간의 독특성: 인간이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형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모양대로" (after God`s likeness) 만드셨다. (창1:26) 인간 이외의 피조물과는 다른 인간의 독특성이 아주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형상됨은 인간됨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원형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영해야 한다는 인간의 존재의 이유와 사명도 함의하고 있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복사본이 아니다. 또한 허상도 아니다. 인간은 이 땅 위에실제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나 그는 그 형상 노릇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왜곡된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곡되고 뒤틀린 '하나님의 형상' " 말이다. 자신의 본래적 모습에 대해 모순된 것이다. 그 형상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성령께서 개인에게 적용시켜 주실 때"형상의 회복"이 일어난다.

    " 왜곡된 형상(deformed image)" --------------> "개혁된 형상(reformed image)"

 

 이 형상의 회복에는 두 가지 측면을 다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측면(중생, 즉각적 성화, 칭의)이고, 다른 하나는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측면(점진적 성화)이다.

 

 

(2) 사회적 존재, 교제적 존재로서의 인간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은 개별자로 있는 인간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인간이요, 더불어 사는 인간이다. (창 1:27)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속에는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고 계신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이해가 있다.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인간의 참된 모습의 모든 측면에 충실할 때 진정한 인간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혼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서로 돕도록 하신 그 뜻에 충실하는 일의 한 측면이다. 인간이 교제적 존재요 함께 하는 존재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온전한 사회적인 삶 가운데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피조세계를 발전시키고 지배하는 일을 함께 하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3) 통치적,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

우리 모두 온 세상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대로 잘  파악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잘 다스려야 한는 사명을 가진 존재이다. 이 세상을 통치하는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요, 부왕인 것이다. 인간은 통치적 존재(dominion being)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이 세상 안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만드는 일을 한다. 인간은 자신이 부여받은 창조성과 창의성을 발휘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문화를 만들어야만 한다. 인간은 문화적(cultural being)인 존재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명령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의 한 부분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그 관계의 특성도 탐구하고,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의 특성도 잘 탐구하며, 그것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미를 잘 발견해내고 그것을 발전시킬 책임이 있다. 

 

 

3. 인간의 인간됨에 관한 기독교 세계관의 함의 

(1) 인간이 다른 동물들로부터 진화되었다는 모든 관념을 거부한다. 

(2) 하나님을  잘 반영하는 형상 역할을 항상  잘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자신의 몸을 사용함. 다른 사람과의 교제 관계에 있어서, 피조계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다스리는 데서도 말이다.

(3) 인간 중심주의(휴머니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중심주의적 입장을 견지해야만 한다. 먼저 하나님과 관련해서, 이 세상의 다른 피조계에 관련해서도 결코 인간 중심주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제 6장 기독교적 진리 이해

: 기독교 세계관의 인식론적 토대

 

이 장은 기독교인 진리와 지식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1. 일반적 전통 진리관

1) 상응설(correspodence theory of truth)

 머리 속에 있는 개념(idea)이 밖에 실재하는 실재(reality)와 일치하면 그것이 참된 것이라는 입장을 말한다. 주로 경험론적 전통에서 강조되는 진리관이다. 밖에 있는 실재, 즉 경험하는 실재와 우리의 관념이 일치해야 그것이 진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상응설이 어떤 입장에서 보면 매우 좋은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이는 수많은 문제를 지닌 의견 제시라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2) 정합설(coherence theory of truth)

 생각하는 관념과 명제들이 일종의 수미일관성을 가지고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진리로 여길 수 있다는 견해이다. 논리적 일관성과 무모순성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주로 합리론에서 진리의 이론을 제시한 입장이다.  이 것은 어떤 신념이나 판단의 진리서 여부는 감각적 경험에 의한 검증으로보다는 논리적 사유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3) 실천적 진리관

 위의 두 가지 이론적 진리 이해에 대해 반감을 표현하면서 제시된 것이다.

(1) 마르크스주의적 진리관

 이제는 이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별로 의미 없는 일이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만이 진리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다 비진리라고 말한다. 이 진리관은 결국 매우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 예로 해방신학적 진리관을 들 수 있다. 민중을 진정으로 해방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진리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다 허위의식에 찬 것이고 비진리라고 주장한다.

(2) 실용주의적 진리관

 진리는 신념의 기능이나 역할에 따라서 결정된다. 다른 것을 고려하지 않고 현실의 문제와 사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그래서 인간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 무엇을 믿어야 더 나은 것인가? " -윌리엄 제임스-

 결국 인간은 결코 절대적 진리를 획득할 수 없으므로 그저 신념의 가장 유용한 기능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실존적 진리관 

 실존적 진리관을 말하는 이들이 모든 진리 문제를 실존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진리 주장이 적용되는 영역(수학, 과학, 경제의 영역)이 있지만,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진리는 다른 영역에서의 진리와는 다른 것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이다. 만일 인간의 실존 문제를 수학, 과학, 경제 등의 영역과 같이 다룰  경우, 실존문제를 곡해하게 된다. 이중 진리관을 말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진리인 것이 실존적으로는 진리가 아닐 수도 있으며, 그것은 각기 서로 다른 영역에 대한 언급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실존주의에는 겸손(인간 실존은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다)과 함께 있는 교만(따라서 신같은 존재도 없으며, 그런 존재도 인간을 규정할 수 없고, 인간은 인간이 그 의미를 부여해 가는 것이다.)

 

 

2. 현대의 다양한 진리관

1) 다중적 진리관 (실존주의적 진리관과 연관)

 인간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어서 그 각자의 영역에 대한 진리 주장이 각기 다르게 있을 수 있다느 주장이다. 과학적 진리, 사회적 진리, 문학적 진리, 종교적 진리가 있다. 어느 하나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진리의 원리가 다른 영역까지를 통제하는 것을 거부하는 각각의 영역의 독자적인 진리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현대적 의미의 대학 제도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단일한 진리체계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부추겼고, 그래서 결국에는 상대주의적인 진리 이해를 허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낳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을 배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입장 자체는 아직 상대주의적 주장은 결코 아니고, 그 자체로서는 그래도  각 영역에서의 진리 주장의 가능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된다.

 

2) 의사소통진리관

 사회 속에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의사소통적인 사회 속에서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그래도 같이 인정할 수 있는  의사 전달의 기준을 합리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명석판명하여 누구나 자명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의미의 합리성에 대한 주장은 있을 수 없으나, 그래도 만인이 의사 소통적 사회 속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일만한 것은 있다는 것이다.

 

3) " 누구의 합리성인가? "

 합리성이 항상 그런 합리성을 통하는 맥락 가운데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서 합리성이 과연 "누구의 합리성"인지를 심각하게 물으면서 사유하고 활동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유와 행동을 일정한 전통 안에 있는 합리성에 근거해 이끌어 내려고 한다.

 

4) 포스트모던주의적 진리 이해

 진리 추구라는 것도 결국 주관적 권력에 의지적 투시(will to power)로 보든지, 모든 것을 정신분석적으로 보든지, 심지어 형이상학적 체계 모두를 그렇게 보기도 하고, 모든 과학적 논의를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 결과 학문은 객관성을 상실하고, 상대주의적 입장이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2. 포스트모던 상황 속의 그리스도인

 포스트-상황은 그 안에서 활동해야 하도록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조검임에는 틀림이 없으나(그리스도인은 이런 포스트모던적 조건 아래에 있으므로 그 안에서 다양한 포스트모던 주장들과 씨름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지만), 결국 포스트모던적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이다.

 

 

 

3. 기독교적 진리 이해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를 전제로 하는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결국 하나님의 존재와 그가 창조하신 세상의 존재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진리 이해를 말할 수밖에 없다. 일종의 존재론적 인식론(형이상학적 인식론)이 된다.

 하나님이 지식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이해를 따라 이해하는 것이다(유비진리관).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것이 '원형'이고, 인간의 생각은 항상 그것을 따라서 생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시는 바진리의 기준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할 수 있을 때, 피조물의 한도 내에서 진리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한 '계시'를 주셨으므로 이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해서 피조물의 한도 내에서 "비록 완벽하지는 않으나 바른 이해"에 이를 수 있다.

 

1)타락않은 상태에서의 인간의 진리 이해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한 계시를 받아 들이며, 온전하게 피조물의 수준에서 재구성하여, 하나님의 지식과 같이 완벽한 것은 아니나 그래도 피조물의 수준에서는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창조받은 상태에서의 인간은 바른 인식 작용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해석을 바르게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2) 타락한 상태에서 인간의 진리 이해

 타락한 인간은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비진리이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다. 진리에 대해 전인격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진리에 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때로 자신이 진리를 추구한다고 생각하며, 진리 추구에 평생을 바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 자신의 의식과 활동으로 진리를 억누르고 있다(롬1:18).

 타락한 인간은 그 안에 있는 신의식(하나님을 알만한 것)과 자연계시에도 불구하고 결코 바른 신지식을 형성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그 진리를 억누르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롬 1:23)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무 것도 모른다(죄의 인지적 영향). 그 영향으로 그는 이제 자신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창조하고 구성하는 것은 잘못된 것을 구성할 뿐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못 아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의 어떤 부분은 제대로 관찰하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일반은총의 작용이 강력하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그리고 때때로 바르게 보고 말할 수는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해석하는 빛에서 말하지는 않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바르게 보는 것이 결국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작용하는 현실이 이런 문제를 잘 드러내어 주는 것이다.

 

3) 구속받은 이들의 진리 이해

 중생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계시 내용을 옳고 바른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하나님의 계시라는 시금석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경험과 이성의 활동을 통제해 나가려고 한다. (중생의 인지적 영향) 그는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 그 이성의 작용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파악하고 온 세상을 바르게 해석하며 판단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계시에 근거한 인식 작용(게시의존 사색)든 학문 분과와 모든 실천적 활동에서 감당해야만 한다. 어떤 분야의 학문적 활동을 하든지 결국 성경이 계시하시는 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그 토대 위에서 학문적 활동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제한 이 세상에 현존하는 학문과 실천과 문화의 현실을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의 빛에서 변혁하려고 해야 한다. 이런 변혁의 노력이 없는 것을 결국 기독교적 사유가 없거나, 그것이 너무 연약해서 자기들의 세계에 갇혀버리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자신의 실수와 잘못과 무지를 항상 인정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서 자신의 생각과 사유와 행동을 항상 고쳐가려고 하며 모든 비판에 대해 열려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를 절대화하며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절대화하지는 않는다. 또한 결코 상대주의자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이해를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부단히 고쳐 나가려고 한다.

 "개혁된 사유는 항상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개혁된다."

 

 

4. 인식 과정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의 시론적 서술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주신 계시에 대해 중생한 의식이 작용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상을 바르게 인식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1) 하나님이 모든 인식 활동의 존재의 원리이다.

(2) 하나님께서 객관적으로 주신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의미와 방향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인 특별계시가 우리의 객관적 인식의 원리이다.

(3)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한 이의 중생한 이의 의식 활동이 인식 활동의 주관적 원리가 된다.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 그는 그 존재의 원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나 객관적인 인식적 원리를 따라 판단하지 않으며, 주관적 인식 원리를 따라 사유하지 않으므로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에 이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적 진리와 진리의 단편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의 원리가 강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5. 결론

 기독교 진리관은 참된 객관성참된 주체성 모두를 중시하는 진리관이다.  진리에 대한 명제적 진술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인격과 삶에서 드러내어져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객관적으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인격과 관련되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이 유익한지를 묻는다.

 

출처 : 도형분석상담연구소
글쓴이 : doulos12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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