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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토크10.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아들 2015. 5. 28. 23:26
교회에 대하여? 엡2:14-18




< 서 론 >




교회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 - 정의를 내려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가족으로써 사랑으로 함께 결속이 됩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예수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가족, 그 사람들의 모임, 이것을 교회라 볼 수 있지요.




- 통속적인 오해 -

1. 교회 = 예배

교회 다니는 사람 가운데서도 교회 하면 예배하는 것인데 예배란 아주 지루한 것으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신학교 앞에 자리잡은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는 장로님들이나 교회 중직들이 기도를 하면 특별히 길게 기도하는 장로님, 권사님이 계셨던 모양이예요. 이분은 한번 기도를 하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출애굽기, 레위기...요한계시록까지 가야 끝이 납니다. 그러면 기도가 30분도 되고 40분도 되고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신학생들이 가끔 멀리 자기 교회까지 못 가니까 가까운 예배당에 참석해서 수요일 저녁 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학생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기도시간에 빠져 나와요. “너 언제 나왔냐?󰡓”난 모세 때 나왔다.󰡓 “난 다윗때 나왔어.󰡓 ”난 그래도 신약까지는 갔는데, 난 바울 때 나왔어.󰡓 그런데 한번은 기도가 길어지는데 창세기만 더듬는데 그만 30분이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 봤더니 교인들이 아무도 없어요. 신학생이 다 가버렸어요. 목사님이 하도 기가차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권사님도 목사님을 쳐다보다가 “교인들이 다 어디 갔습니까?󰡓물었더니 목사님이 ”노아 홍수 때 다 떠내려갔어요.󰡓그러더랍니다.




교회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루한 것 그런걸 생각하게 되지요. 오늘 우리 2부예배는 전통적인 예배를 드려 보았구요. 3부예배는 모던한 예배를 드려보았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오해가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2. 교회 = 교역자

일반적으로 목사 교역자 하면 세상 사람들이 세상과 어울릴 줄 모르는 고리타분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이런 것을 생각해 본다고 하는 것이지요.




3. 교회 = 어느 특별한 교단

교회는 어느 특별한 교단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우리나라에 초창기에 와 있던 선교사님들이 한국교회 교회가 싸우면 장로교도 예수교 장로교와 기독교 장로교가 나누어지고, 감리교도 예수교 감리교 기독교 감리교, 성결교도 예수교 성결교 기독교 성결교 - 나누어졌다 그러면 예수교 기독교가 나누어지니까? 외국 사람들이 물었어요. 한국의 기독교 예수교 그거 뭡니까? 물었더니 싸워서 예수하고 그리스도하고 나누어진 거예요. 싸웠다 그러면 예수하고 그리스도하고 나누어지는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요즘도 신도시 같은데도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같은 빌딩 내에 여러 교회가 있는 것, 이런 것들을 불신자가 보면 이해하기가 참 어려운 부분들이지요.




4. 교회 = 건물

교회하면 건물로 오해가 되어졌습니다. 교회 간다 그러면 예배당에 들어가는 것, 이것을 우리는 교회 간다 그렇게 오해를 해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건물이 좋은 교회는 좋은 교회이구 그렇지 않는 교회는 그렇지 못한 교회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반대의 이미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좀 화려한 교회는 세속적인 교회이고 낡은 교회는 고리타분한 교회로 오해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 문 제 >

교회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우리교회 성도들이 되셨으면 우리교회의 가치가 뭔가? 우리교회 가치관을 잘 이해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교회를 어떤 조직적으로 행정적으로 잘 하면 교회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교인들이 우리교회 비전과 같이 생각하고, 우리의 비전에 대한 감동을 같이 느끼고, 우리교회의 비전과 함께 행동하고, 우리교회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함께 소중히 여기는 것, 이게 우리교회 한 교회 교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가치는 이 도시에 있는 구원받아야 될 사람을 살리는 교회입니다. 이 도시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키워주는 교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 = 셀, 이 셀을 통하여 건강을 행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임재와 권능을 경험하는 것을 우리교회가 소중히 여기고 있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에 접속하는 것입니다. 찬양 한곡을 부르더라도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기도 한번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권능에 접속되어지는, 모든 예배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의 권능을 맛보는 이것을 우리교회가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과 같이 걸어가는 사람을 교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세례공동체다. 교회는 교회의 일원으로 들어가는 결혼식과 같은 것이 바로 세례인데, 세례 받은 공동체를 교회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이 땅에 그의 몸을 남기셨어요. 그게 바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싹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열매가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목사님이 “할머니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어요.󰡓물었더니 ”그 양반 죽었어요?󰡓그러더랍니다. “예수님이 왜 돌아 가셨냐니까요?󰡓 할머니가 하는 얘기가 ”아이고 그 양반 맨발로 머리 풀고 돌아다닐 때 내 알아봤다.󰡓그러더랍니다. 아마 영화를 본 모양이죠.




하나님의 백성들




1. 세례 - 들어감의 표시

세례? 죄를 다 씻기는 것입니다. 이전의 삶, 과거를 다 묻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예수님하고 신혼살림을 차린 거예요. 그리고 성령으로 도장을 꽝 친다. 인치심을 받은 거다. 천국에 호적신고를 한 거예요. 혼인신고를 한 거예요. 그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주님과 더불어서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것 그것을 교회다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2. 우주적 교회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라 그렇게 이름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각 교회에 - 장로교 감리교, 한소망교회 영락교회 명성교회 소망교회 - 하듯이 이 눈에 보이는 교회가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완전한 교회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불안전한 교회입니다. 여기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혼돈을 일으킵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인 한소망교회가 완전해야 된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교회생활이 불편해지는 거예요.




이 교회 안에는 가족이기 때문에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요, 함께 부지런히 성장하고 자라가야 될 걸핏하면 실수 잘하는 청년들도 있고요, 이제 막 걸음마 하는 어린아이도 있고요, 젖을 먹여줘야 되는 혼자 설 수 없는 어린아이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똑같은 수준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왜? 세상적인 눈으로 보니까. 똑 같이 어른이 되어서 학교 가야 되고 시집장가 가니까 그들도 다 어른으로 본단 말이지요.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어린 아이예요. 그래서 교회 안에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고 싸움이 있고. 어린아이 키워보세요. 둘만 있는데도 매일 싸우고 울고 그게 교회이거든요. 이게 가족이란 말이지요. 우리는 가끔 눈에 보이는 이 교회가 완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공사중입니다.




한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공사중이다. 아직도 공사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는 천국이요 눈에 보이는 교회는 병원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아픈 사람 있다고 그래서 불편하지 않잖아요. 당연한 거잖아요. 교회 안에 실수도 있을 수 있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 가운데 허물이 눈에 보일 수 있어요. 이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 세계에 서방 선진국들을 보면 100% 기독교 국가들이예요.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나라의 부흥과 역사의 부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상당히 전세계적으로 전통적인 교회들이 상당히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매년 미국에서만도 3%의 신자들이 줄어가고 있고요 장로교는 1.8%가 줄어가고 있습니다. 감리교는 0.6%가 감소하고 루터교는 0.2%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지금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테러사태가 있고 난 다음에 급속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가 다시 그 수준으로 내려가고 있는 추세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계통의 교회와 남침례교 계통에서는 급속한 부흥을 이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새로운 이해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 전통적인 교회들이 교회를 조직으로 보는 겁니다. 관리행정으로 보는 겁니다. 이런 교회들은 다 망해가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교회들은 통계적으로 보면 2078년도가 되면 교회가 다 문을 닫을 것이라는 통계가 있어요. 그만큼 교회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3. 개 교회(각 지역의)

교회 안에는 마치 교파, 개교회가 분열된 것처럼 보일 수가 있고 천주교회는 굉장히 고상해 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요. 천주교회는 분열이 없습니다. 거기는 교파가 없지요. 그리고 천주교회는 굉장히 타협을 신속하게 하기 때문에 그 지역에 들어가면 그 지역 문화를 급속하게 흡수를 합니다.




가령, 우리나라에 가면 제사문제, 음주, 흡연문제, 이런 것들이 심각한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되니까 신속하게 제사 지내도 된다. 담배 피워도 된다. 술 먹어도 된다. 이렇게 타협을 해 버리는 것이죠. 그러니까 세상하고 잘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여 질 가능성이 있지요.




또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교회를 세우고 난 다음에 교회가 죽~ 내려오다가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개신교회가 돼지 뒷발톱처럼 옆으로 삐쭉 나간 것 이게 개신교회라고 생각해요. 이런 큰 오해를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오해를 거꾸로 풀어가야 될 필요성이 있는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내려오다가 천주교회가 옆으로 빠져서 타락해서 그것을 잘라버리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원형 교회로 가서 전통을 계승한 교회가 개신교예요.

또 분열이 없으니까 천주교회가 고상해 보이는 것 - 이것도 우리가 해결하고 넘어가야 될 문제중에 하나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비교적 건전해요. 특별히 필리핀에서 살아보신 분들은 이것은 완전히 무당지꺼리들입니다. 전 세계 남미에 있는 천주교들도 보면 완전히 무당이예요. 우리나라도 어떻게 보면 불교 같기도 하고 천주교 같기도 하고 그 양반들이 자기들끼리 잘 통해요. 왔다 갔다 뭔가 잘 통합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 기독교는 그런 게 아니예요. 싸우는 것처럼 여겨지고 혼돈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교파가 많은 것처럼 여겨지지만 우리 기독교라는 게 얼마나 풍성한 것입니까? 이것은 아무리 한쪽 면 - 기도하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고요, 성경공부하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고요, 전도하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고요, 구제하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는 게 - 우리 기독교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교파들이 강조점에 따라서 서로들 보완작업, 보완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한다. 이렇게 한다.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어떤 교파는 코끼리를 그림을 그리는데 코를 강조하는 교파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코끼리 코를 붙들고는 이것이 중요하다, 코끼리 코가 짐도 나르지 않느냐, 이걸로 다 말한다 그럽니다. 그것도 아니고 기둥같은 다리가 중요하다고 그래서 다리를 붙들고 이렇게 교회를 세워야 된다고 강조를 하는 겁니다. 어떤 교파들은 그래도 널찍한 등짝, 이게 코끼리지 그래서 등짝을 그리는 겁니다. 다 싸움박질 하는 것 같지만 코하고 다리하고 등 짝하고 꼬리하고 다 붙여 놓으면 한 마리 온전한 코끼리가 되는 거예요.




감리교 장로교 순복음 무슨 교회 막 싸우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것을 다 하나로 종합하다 보면 그 풍성하고 넓고 크고 어마어마하신 영광의 교회를 함께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 기독교, 개신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파가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몰라요. 여러분 살아있는 나무는 가지를 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지 없이 똑바로 자란 서 있는 나무는 죽은 나무예요. 우리 기독교는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령한 역사에 따라서 많은 가지들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온전한 하나의 나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3. 개 교회

대륙별로도 보면 기독교회를 이루어 가는 그 모양이 참 달라요.

독일사람들, 구라파 사람들은 앉아서 뭔가 생각하는 민족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집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믿으면 될 것 가지고 앉아서 글을 쓰는 겁니다. 그 양반들의 논문집을 읽어보면 골이 아파서 읽기가 힘듭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뼈대를 세워갑니다. 그래서 신학은 독일에서 나오는 거예요. 구라파에서 제대로 된 신학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 동양적인 사람들은 감정이 풍성합니다. 기독교는 이 감성적인 영성적인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것이 없으면 기독교는 메마름, 건조한, 철골만 세워놓은 것 같은 뼈다귀만 세워놓은 이런게 되어 버리고만단 말이지요.

미국 사람들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Just do it.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면 그대로 가서 살아보려고 하고 실천하려고 하고 세상에 전파하려고 하고 세상을 정복하려고 하는 도전의식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신명이예요. 기독교에 신명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사람들은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더라도 신명이 있어요. 이것이 다 합쳐져서 하나를 만드는 거예요.




뼈대를 세우고 풍성한 감성과 영성을 덧입히고 행동을 덧입히고 거기다가 신과 명을 더하는 이런 모습들이 우리 기독교가 아니겠습니까?




교단도 마찬가지예요. 보수적인 교단들은 복음을 강조합니다. 전통을 강조합니다. 성경의 말씀에 원리대로 그대로 믿으려고 생각합니다. 일점일획에도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려고 몸부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자유적인 교회들은 세상에 가서 선교를 해야 된다. 세상을 바꿔야 된다. 개인구원만 강조해선 안된다. 사회구원을 해야 된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강조한 대로 복음, 그것도 안되니까 순 순 순 복음도 생겼어요. 통합측 교단처럼 이쪽만 강조해도 안되고 저쪽으로 강조해도 안되고 이것도 붙들고 저것도 붙들어야 된다. 중용의 도를 지켜서 가운데로 정통을 해서 지켜가야 된다. 이쪽으로 흘러가다가 양쪽을 가슴에 끌어안고 가야 된다. 그래서 넓은 가슴을 열고 보수는 보수대로 끌어안고 진보는 진보대로 끌어안고 순복음은 순복음대로 끌어안고 자유는 자유대로 끌어안고 다 가슴에 끌어안고 걸어가려고 하는 통합측 교단이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교단이 모두가 합쳐져서 하나를 이루는 겁니다.




형제들이 많이 있는 자녀들이 모였을 때 아버지 어머니께 어떻게 효도해야 될까? 나는 관광을 해드려야 된다. 나는 보약을 해 드려야 되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옷을 해 드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용돈을 드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팔 다리를 주무르고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게 효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녀들이 옷 해 주고 관광 보내드리고 보약 사드리고 용돈 주고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 주머니가 두둑해 지는 것 이게 가족 아니겠습니까? 모든 자녀들이 관광만 효도라고 생각한다면 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떻게 되겠어요. 오늘은 제주도 갔다가 내일은 괌에 갔다가 필리핀에 갔다가 그 다음에 피곤해서 지쳐서 돌아다니다 죽어요.




한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다양성 속에 하나!”




뭐가 나쁘냐? 나 혼자 옳고 다른 사람 틀렸다고 하는 게 잘못된 거예요.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살아가는데 내가 못하는 것 하니까 잘한다 박수 쳐주는 거예요. 나는 이쪽을 강조하고 저 사람은 저런 것 강조하니까 그것도 참 좋네. 그러고 우리가 높여 주는 겁니다. 서로들 인정해 주고 높혀주지 못하는 게 잘못이지 우리가 다양하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게 잘못이지 다양성 자체에 잘못이 있는 것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구성이 되어지는가? 세 개의 C자로 구성이 되어집니다.

1. 축제의 예배(Celebration)

2. 교구교회(Congregation)-선교회

3. 셀(Cell) - 순, 구역, 목장




이 세 개 중에 하나만 잘못되어도 하나만 없어도 그건 교회가 아닌 거예요.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구라파 많은 교회들도 보면 모여 있는 것만 교회인 줄 알았어요. 이것은 주님이 디자인한 교회가 아니었어요.




성경에 보면 전부다 가정에 있는 교회, 가정에 있는 교회, 우리 한국의 기독교는 전부 개인주의와 전체 모이는 큰 덩어리 하나밖에 없어요. 참된 교회는 카타콤에서 10가정 5가정 6가정이 모이는 바로 그게 진정한 교회였다 그런 얘기지요. 미국에 있었던 부흥운동, 얼마나 영광스런 운동이었습니까? 개인의 구원을 강조하고 거듭남과 중생을 강조하던 바로 그런 운동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운동의 영향력으로 많은 선교사들이 헌신하게 된 것입니다.

언더우드라는 사람이 인도의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하나님 한국 땅에 선교사를 보내 주십시오.󰡓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네가 가면 어떻겠니?󰡓그래서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이런 분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진 것이 개인의 구원을 강조했습니다. 거듭남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강조했습니다.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으로 공동체로 이해하는 공동체성이 모자라는 그런 교회를 만들고 만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초 단위는 셀입니다. 물방울은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도 물방울이듯이 아무리 작게 쪼개도 H2O = 물 아닙니까? 바다에 다 모아놓아도 H2O = 물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세 사람만 모이면 거기에는 예향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임재와 권능과 아름다운 교제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광스러움의 모든 모양이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3가지 기능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온전한 교회가 아니예요. 여러분들 가운데 주일날 예배는 잘 드리는데 셀목장의 모임을 주중에 안 가진다. 그런 사람들의 신앙이 잘 성장이 안돼요. 그런 사람들 가지고 세상을 정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놀먹씨예요. 놀고 먹는 사람말이예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단 말이예요.




교회는 그런 사람들 가지고는 세상을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정복할 에너지를 그 사람들에게 쏟다 보니까 교회가 무력한 공동체로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축제의 예배와 속교회와 셀목장이 온전히 조화를 이룰 때에 참된 주님이 원하는 교회를 이룰 수 있다.




교회가 뭐냐? 하나님의 가족이다. 교회는 가족적이 아닙니다. 가족 같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모여서 가족을 이루는 것 바로 그것이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끔 다투는 걸 볼 수 있어요. 교회가 분열될 수 있습니다. 서로들 갈등을 느낄 때가 있어요. 당연한 거예요. 하루를 살아도 형제들이 다툼이 있는데 우리가 평생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데 갈등이 왜 없겠습니까? 여러분 교회 안에 갈등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서로를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너 잘났다 나 잘났다 아니고,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가 아닙니다. 너하고 나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손가락들이 모여서 누가 잘났는지 싸움을 했습니다. 엄지가 그럽니다. “내가 최고잖아. 내가 최고야.󰡓 ”무슨 얘기야! 앞장서서 물건 살 때 이것 얼마예요. 물을 때마다 앞장서는 것은 검지야.󰡓 “야 일어서 봐! 키는 내가 제일 크잖아. 그러니까 내가 대장이야.󰡓 ”무슨 소리야! 주인이 나를 제일 사랑해. 금가락지는 나한테 끼워주잖아. 약속의 반지는 나한테 있다구. 주인이 나를 제일 사랑하니까 내가 왕초야. 까불지 마.󰡓 그러니까 새끼 손가락은 할 말이 없는 겁니다. 내가 최고야도 아니지, 요것 주세요도 아니지, 키가 제일 큰 것도 아니지, 반지 끼는 것도 아니예요. 가끔 실반지는 끼지만 그건 진짜 반지가 아니거든요. “그래, 니네들끼리 잘 살아 나 없으면 니네들 병신이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안 되는 겁니다. 얼마나 소중한 공동체입니까? 교회는 가족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본질적인 문제, 꼭 필요한 자리에서는 하나가 되고 비본질적인 문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에서는 자유와 용납이 허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보면 막다른 골목도 있고 울타리도 있고 아파트가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고 연립도 있고 단독도 있고 그러지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서 저 밑을 내려다보면 똑같이 보여요. 15층이나 5층 연립이나 단독이나 똑같이 보입니다. 골목이 이리 뚫리고 저리 뚫리고 다 소용없어요. 하나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높이 올라가서 보면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눈 아래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입니다.

한번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눈 아래 하나입니다.”




우리 가족 안에서 공부를 못 한다고 몸이 불편한 아이가 있다고 그래서 그 아이를 천대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아이 때문에 어머니의 마음은 더 녹아요. 우리 교회 안에 연약한 지체 때문에 더 마음이 쓰여지고 그에게 더 애정과 사랑이 집중되어지는 셀목장을 가족으로!




교회가 뭐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몹시도 핍박했어요.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이 “사울아 사울아 니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랬습니다. 사울은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핍박합니까? 다만 교회를 핍박했을 뿐이예요.




무슨 얘기입니까?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다. 교회를 높이는 것은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다. 교회를 존귀하게 만드는 것은 예수님을 높여 드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교회다. 교회는 예수님이시다.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심판의 바로메타가 뭐냐? 이 교회를 어떻게 섬겼느냐? 우리가 섬기는 예향 교회를 어떤 교회로 만들었느냐. 여러분 얼마만큼 성장했느냐가 아니예요. 정말 주님이 원하는 교회를 만들었느냐. 이것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 심판의 바로메타가 되는 거예요. 이 교회를 위해서 뭘 헌신했느냐.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뭘 포기했느냐.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얼마만큼 애를 썼느냐. 얼마만큼 몸부림했느냐. 이것 가지고 영원히 사는 겁니다.




이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몸 된,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지체는 좋고 어느 지체는 나쁘고 그런게 없는 겁니다. 우리 몸에 좀 더 많이 쓰임받는 지체는 있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덜 소중한 지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직분이 중요한게 아니예요. 우리 모두는 주님의 지체라는 것이지요.




마지막 교회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주님이 교회를 얼마나 예뻐하시는지 모릅니다.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신부를 볼 때에 황홀하지 않는 신랑이 어디 있겠어요. 교회는 예수님의 애인이예요.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우리 주님이 너무 너무 소중히 여겨 주시는 거예요. 교회를 위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함부로 찢거나 상처를 내는 것, 주님이 너무 너무 마음 아파하신다구요.




주님 재림하실 때 정말 주님이 원하는 그 교회, 주님이 그렇게도 세우기를 원했던 그 교회,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영광스러운 교회, 1세기를 이끌어 갔던 그 능력있는 교회, 주님이 그렇게도 21세기 이 마지막 때에 보고 싶어하는 그 교회를 우리가 닮으려고 몸부림하고 애를 쓰고 또 애를 써도 거기다가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래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부족함 때문에 그 교회를 다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데 멍청하니 쳐다만 보고 있어 가지고 그런 교회를 이루겠습니까? 여러분 몸부림을 하더라도 그 교회를 다 이루기가 어려워요.




그 교회가 어떤 교회냐? 거룩한 교회,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그런 교회를 우리가 만들어 봐야 된다구요. 예배속에 영광스러움이 나타나도록,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광스러운 교제가 나타나도록. 그리고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 우리와 함께 신랑만 식장에 세워두면 되겠습니까? 신부를 찾아내야지. 그래서 예수님의 신부된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지금 버려져 있단 말이예요. 그 사람들을 빨리 찾아서 다 주님 앞에 세워가는 것입니다.




< 결 론 >

「만일 교회가 신약성서의 모습에 더 가까워진다면 교회 예배는 단조롭거나 권태로움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주님과 더불어서 나누는 이 교제가 이 신앙예배가, 이 예배 공동체가 영광스러운, 예배의 영광을 예배의 능력을, 예배의 권능을 회복할 때 주님이 너무너무 기뻐하신다.

출처 : ●…화평동산…●
글쓴이 : 거룩한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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