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사함!생명 얻는!!다시사는 회개!!

[스크랩]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2. 회개

하나님아들 2015. 2. 22. 23:06

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2. 회개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회개에 대한 잘못된 이해

 

1.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회개와 별개의 것입니다. 많은 죄를 지었으므로 헌금을 바침을 통해 죄를 사함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 참석하고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임을 통해 죄를 사함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외형적인 것들은 신앙의 표현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2. 얼마든지 회개하지 않고서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지식적으로 복음에 대한 모든 것을 동의하고 그것을 자신이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와 상관없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사람의 잘못된 이해 때문에, 전도 문구에 따라 기도하고 회개를 따라 기도함을 통해 자신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전달받게 됩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단순히 교리를 동의하고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사탄도 우리가 진리로 믿는 모든 교리를 진리로 동의하고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3. 교육, , 가혹한 억제를 통해서 타락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를 못 짓게 강제로 막는 것이지 회개가 아닙니다.

 

4. 한 번 복음에 대해서 듣고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분이 나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죄책감도 느끼고, 나름대로 피상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 삶의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과정입니다. 회개는 어느 한 순간이 아니고 과정입니다. 프로세스 입니다. 내가 어느 한 순간에 회개를 경험하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함 받고 나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완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버리는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회개는 우리가 그 즉시로 결단하고 내리는 선택과 어떤 행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5. 후회한 것을 회개한 것이라 착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울부짖으면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합니다. 많이 볼 수 있는 광경은 교회의 어떤 집회 때일 것 같습니다. 설교말씀이 끝나고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생각이 납니다. 심각성을 인식하고 울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회개라 생각합니다. 또 많은 목사들이 성도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회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로 이어질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자신의 죄를 후회하여 울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를 다루시기 전까지, 저도 오랫동안 속아 왔습니다. 이것이 회개인지 알았습니다. 후회하며 울며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회개에 대한 잘못된 신학적 적용

 

 

저는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는 정확하게 맞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잘못되어서 잘못된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대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외치기보다,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기 쉬운 시대

 

1830년대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성경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것보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았다는 식의 태도입니다. 오늘날 더욱 심각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인 교리가, 하나님 그분 자신을 인격으로 대하고 실제적인 신앙의 모습을 대체한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의 대칭되는 하나님의 모습이 가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이시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진노를 삭제해버렸습니다. ‘공의와 의’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을 삭제해버렸습니다. 특히 설교는 더 심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복과 성공과 그리고 치유에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는,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드러내지 않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 설교에 집중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가 틀린 것이 아니고, 우리 가운데 적절하게 필요한 것이지만,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균형을 무너뜨리고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외치면 자유주의 신학이거나 사회복음을 외치는 자라고 오해받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책 “부흥”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람이 무엇을 행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 가서 잘못했다고 말하며 용서를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나 교회에서 목격하는 그 방종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태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은 저를 하나님의 진리의 길로 가르치실 때, 하나님의 ‘공의와 의’를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시각으로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기준 앞에 지옥에 떨어지는 경험들을 하였습니다.

 

2. 신학적 요약이 준 피해 - 십자가는 죄를 사해 주신 것인가? 죄에 대한 책임을 사해 주심으로 결론적으로 죄를 사해 주신 것인가?

 

하나님은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죄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실 때는 의로운 방식으로 용서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책임에 대한 방법을 마련하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중대한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가 당할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벌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자에게는, 자신이 받을 죄에 대한 책임이 그리스도에게 옮겨질 것이고, 하나님은 그 죄책을 벗은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자비롭고 은혜롭게 대하십니다. 그래서 죄책에서 벗어난 우리는 죄를 사함 받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죄 자체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함으로 결론적으로 죄를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시대에 중요합니다. 사소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성경공부 책의 대다수가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죄를 사하신 것이 아니라, 죄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킴으로 죄를 사하셨다는 정확한 교리를 설명하는 목사님들이 극히 일부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죄 사함에 대한 성경에서의 정확한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문제 뿐만이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정확한 진리가 우리의 삶에 실제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전가했다는 교리로 그쳐버리면, 그 뒤에 심각한 신앙의 왜곡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가장 심각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타락하였는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죄에 대한 교리자체가 미묘하게 변질함으로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전가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교리는 우리를 더 이상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경향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죄를 전가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예수님께 전가하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심각한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서, 우리 신앙을 병들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보지 못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에게 선한 것이 없되 하나도 없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요약된 교리는, 미묘하지만 우리 삶 가운데 죄책감이 밀려오는 것에서 자유를 주고 해방감을 주는 역할을 합니다. , 원래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에 대하여 볼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처절하게 심각한 상황임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미묘한 차이가 지속적으로 매일 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교리적으로 자신이 그렇게 단정해버렸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였다는 것에는, 자신이 지은 죄책감도 수반됩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된 것을 믿지만, 죄책감은 그대로 있어서 자신이 죽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회개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나라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매일 십자가 앞에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사는 삶 자체가 가능하려면, 지옥에 떨어지는 자신의 죄책감 자체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5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요,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않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표준새번역 요6:53-58)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한국 성경에는 시제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헬라어는 시제가 한국말보다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54)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 한 주님의 말씀의 시제는 단순과거형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한번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십자가에서의 구원을 염두에 두신 것 같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그의 대속과 부활을 시인하고,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을 지칭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한번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하여 일생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를 섬기는 기도를 드립니다.

 

두 번째(53), 세 번째(56)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라 한 주님의 말씀의 시제는 현제형입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십자가를 경험하였고, 현제도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고, 미래에도 역시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는, 늘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는 현제형의 의미입니다. 매일매일마다, 시간시간마다, 순간순간마다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핵심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이 얼마나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인지 보지 못하면, 이러한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교리적으로 알고 있고 동의한다고 해도, 매일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신앙은 실제입니다. 이론만으로는 신앙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타락정도를 실감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요약된 교리 자체가 미묘한 차이지만, 우리를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더 이상 죄의 심각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하도록 인도하고 있는 요인 중에 한 가지인 것을 저는 발견하였습니다.

 

구약에서 회개의 단어적 의미

 

히브리어 슈브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로 그 기본적인 의미는 원래 있었던 곳으로 움직이는 것, 즉‘돌아오다’, ‘되돌아오다’이며 이것이 발전하여 신학적성서 용어 해설로는‘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 즉 회개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니함은 주로 니팔 형태로 사용되면서 감정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언서에서 회개의 목적은 원래 상태를 다시 회복하는 것, 즉 하나님과의 원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돌아감은 단순히 옛날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원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슈브가 의미하는 회개의 신학적인 개념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는 방향의 전환입니다. 이러한 방향 전환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회개의 과정은 예레미야 3:22 - 4:2에서 명확히 묘사되는데 그것은 회개의 참된 예전,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3:22),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3:23), “제(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말로 자백하는 것(3:25),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것(3:25), 새로 운 행동을 하기로 맹세하고 지키는 것(4:1-2)입니다.

 

구약성경은 슈브를 통해 기본적으로‘돌아오다’ 를 의미하며 돌아오기 전에 했던 악행, 폭력, 우상숭배 및 죄 등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다루는 구절들에 나타나 회개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의 회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전부인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전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으로의 전환을 회개라 하였습니다.

 

회개의 단어적인 의미를 찾기 위해 몇 가지 자료들을 찾아보았는데, 구약에서의 회개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한 한 연구자는 구약에서는 회개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는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상 가장 회개에 대하여 깊게 연구한 사람 중에 한 사람 이었습니다. 교리적인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모르는, 그리고 합리주의적인 사고에 의해 이성과 과학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부정해버리는 신학적인 체제 아래에서는, 회개의 의미가 감도 안 잡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회개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가 없다는 결론은, 이미 회개에 대한 성경의 의미를 잘 연구해놓고, 그것을 받아들일 자신의 사고 체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합리주의적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으면, 성경을 분석하고 정리하는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핵심진리를 인식할 수 없는 사고체제가 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동양적인 사고체계를 포함하고 있으나, 신학은 서양적인 사고체계를 가지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래서 서양적인 사고체계를 가지고 인식이 안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내 인생의 유일한 전부인 그런 삶으로의 전환을 구약에서는 회개라 하였습니다.

 

신약에서 회개의 단어적 의미

 

회개라는 단어는 metavnoia(metanoevw)라는 단어로써, 이 말이 전치사 metav(after, with, around )와 명사 nou'"(mind, intellect, insight )과 어우러진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는‘생각이나 태도의 변화’혹은‘다른 관점을 취하다’를 뜻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느낌이나 감정, 혹은 의지나 생각에 영향을 끼치며 단순히 이지적인 사유의 결과에 따른 생각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코이네 헬라어에서 이 말은 주로 단순히‘생각의 변화’라는 의미 로 사용되고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 , 구약에서의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실제가 되도록 설명하셨는데, 회개는 모두 하나님나라의 삶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회개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들에 대해 헌신을 요구합니다( 10:13; 11:32 병행). 따라서 회개는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1:15). 즉 예수님이 선포한 회개는, 소극적인‘돌아섬’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하고 있는‘구원’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보다 누가에게 있어서 회개는 죄의 용서( 2:38; 3:19; 5:31; 8:22 ) 혹은 침례(세례) 및 구원(혹은 성령, 2:38; 11:18 ) 을 받아들이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누가에 따르면 회개는 용서의 전제이자 구원을 받아들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입니다.

 

바울 서신에서는 유대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내하심이 인간을 metanv oia(metanoevw)에 이르게 하지만( 2:4), 반대로‘회개하지 않는 마음’(ajmetanovhto" kardiav , 2:5)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7 9절 이하와 12 21절에서는 metanv oia (metanoevw)가‘마음의 변화’라는 다소 약화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회개를 통해 요구되는 삶은 주로‘믿음’이라는 개념에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회개’가 명시적으로 부각되어 있지 않다 는 점이 곧 바울이 회개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외의 다른 서신들에서 metavnoia는 올바른 가르침과 행실로 돌아섬(딤 후 2:25), 죽은 행실로부터 돌아섬( 6:1), 신성모독으로부터 돌아섬(벧후 3:3 이하 단락) 등의 의미로 사용되며, 특히 베드로후서에서는 회개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경건한 삶의 실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용례들에 기초하여 생각할 때 이 용어는 어원적이거나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전인이 무엇인가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삶이나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이 말을 단순히‘회개’(repent)라는 뜻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그 의미를 심화시켜 하나님을 향한 영적이고 윤리적인 태도의 온전한 변화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회개는 순수하게 외적인돌 아섬이나 단순한 내적인 생각의 변화가 아니라 양자 모두를 포괄하는‘진한 돌아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참 어려운 신학적인 연구를 지면을 통하여 소개하면서 제가 말하는 것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회개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사용은, 모두 인격적인 하나님 그분으로의 삶의 전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하나님 나라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 한분만이 인생의 유일한 전부인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위해 그리고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전환하는 것을 회개라 하였습니다. 신약의 복음의 개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며 목적이 되는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으로 전환하는 것을 회개라 하였습니다.

 

회개의 과정

 

1.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

 

회개에 있어서 자기처지를 인식하는 것만큼 중요한 출발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출발점이기도 한 이것을, 교리가 대체한 지금시대의 모습은 정말 참담하기 그지없을 만큼 가슴이 아픕니다. 신앙의 실제가 서야할 자리에 이론이 실제인양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안다고 착각하고 삽니다. 하나님을 경험을 통해 직접 체엄하고 영광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온갖 이론으로 가득한 학설들을 많이 아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합니다. 바른 교리가 중요하지만, 교리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바리세인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바리세인이 이단으로 규정하신 적이 없을 정도로 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세인이 하는 말은 모두 순종하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시며, 그들의 신학이 문제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바른 교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알게 하는 안내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입니다. 문제는 실제가 무엇인지 감도 못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실제입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성경이든, 예수님의 부활이후 2000년 역사동안 동방정교회, 로마케톨릭, 개신교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들을 다 읽어보십시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하나님은 동일한 방식으로 신앙을 회복시키십니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그의 책 ‘부흥’을 통해 부흥이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오는데, 첫 번째가 자기 처지를 인식하는 것이라 하며, 교회사에 일어난 어떤 위대한 영적 운동에 대한 기록이든지 다 읽어보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첫 번째 과정은 항상 자기처지를 인식하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 동안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읽어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로 인도하실 때 항상 자기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 여실히 보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현실가운데 처해있는 무기력함에 분통하며, 그것이 회개의 처음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생각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하나님 앞에 떨어져 있는 상태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너무나 하나님에게 멀리 있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할 것만 같은 상황에 처한 것을 인식하고 애통해 합니다. 사실상 자신의 처지를 보게 되면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다른 사람이 보이지도 않고, 교회의 상황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옥에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실 앞에 애통해 합니다.

 

2. 회개는 선하신 하나님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자신을 볼 때마다 지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공황상태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오직 자신이 죽어야할 죄인이라는 것만 생각합니다. 공황상태와 다른 차원입니다. 공황상태도 똑같은 증상을 보이지만, 그것은 병으로 그런 것입니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황상태는 어느 순간 갑자기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발생하는 법칙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자기 처지를 인식할 때마다, 즉 하나님 기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깨달을 때 마다 지옥에 떨어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공황상태와 다르게 선하신 하나님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지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멀리 떨어져있는지 정도에 따라 강도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의사출신의 신학자이며 목회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부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그의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보고, 하나님의 성품과 선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한 말이 “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5)” 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 죄인인지 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였다는 설명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보게 됩니다. 이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그 메시지를 듣고, 제자를 예수님이 선택하시는 장면이 성경에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5:8)” 베드로는 자신이 천리만리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할지 아무것도 판단이 안 됩니다. 마음의 혼돈도 혼란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지옥에 가까이 있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로 자신을 사용하겠다고 하여도,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베드로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회개의 메시지에 반응은 자기 처지를 인식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하나님은 저의 처지를 보게 하신 계기가 있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윤리적인 부분을 가지고 저를 많이 다루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윤리적으로 보이는 삶 가운데는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들로 저를 다루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론이 실제인양,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이 신앙인양 착각하고 있는 저를,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보게 하신 것이 첫 번째 계기였습니다. 저는 제가 앉아 있는 의자에서 앉아있지 못할 정도로 나 자신이 한심하고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한동안 저는 공황상태와 같은 상태로 있었습니다. 한동안 어떤 사역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저의 처지를 보게 하신 것은 내가 바로 바리세인이었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의 바리세인이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 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상태를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생각을 읽으시고 동기를 중요시 여기십니다. 그것이 저의 삶 구석구석 예민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저의 처지를 보게 하신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천리만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죽고 싶을 정도로 참담하였습니다. 저는 한동안 지옥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3. 회개는 마음 아픈 과정이 있습니다.

 

회개를 결단이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회개는 결단 이상의 하나님의 개입이 있습니다. 회개는 변화된 삶을 통해 알 수 있다고 하는데, 회개를 통해 변화되는 삶에도 회개의 과정이 있습니다. 이 회개의 과정이 없다면 십자가가 지금 우리의 삶에 의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교리적으로 동의하고 부르짖는 십자가 지금 우리에게 생명이요 능력이라 말만 멋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후회한 것을 회개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후회하며 마음 아파하고 울며 기도하는 것은 후회입니다. 물론 회개도 똑같은 과정을 가지지만, 후회와 회개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회개에 대한 책이나 글을 보면서 이것을 다룬 사람은 마틴 로이드존스 와 다른 몇 사람 이외에는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학식으로 회개를 설명하였지만, 자신은 경험하지 못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성서와 2000년 역사가운데 하나님이 사용하신 인물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셨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하나님이 다루실 때, 삶의 모습과 환경은 다르지만, 신앙적으로 하나님이 동일한 과정으로 다루셨습니다.

 

회개는 후회보다 더 깊은 의미가 과정을 통해 진행됩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고, 2000년 역사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을 회복시키는 과정읕 보아도, 모두 동일합니다.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알고서 후회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함으로써 여러분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 그 변호, 그 의분, 그 두려워하는 마음, 그 그리워하는 마음, 그 열정, 그 응징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모든 일에 잘못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새번역, 고후 7:8-11)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단호한 편지를 세 번째 보낸 것이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쓴 첫 번째와 두 번째 쓴 편지를 함께 읽고는 심각한 자신들의 처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에 아픔을 당하였습니다. 가슴이 아프고 애통하고 자신들의 죄책감에 휩싸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과정을 통하여 신앙의 수많은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고 그 죄 때문에 죽어지는 경험을 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마음 아파하는 과정을 통해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마음 아파하는 과정” 이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회개에 이르렀다 말하였습니다.

 

8, 9, 10, 11절에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아픔”이라는 단어입니다. 다른 번역본에서는 상심, 근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모두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는 가슴에 몰려오는 죄의 심각성 앞에 괴로워하고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심각성을 갖게 됨으로 고린도교인들은 열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고, 의분이 생겼고,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하나님께 헌신하려는 마음이 생겼고, 악을 징벌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고후7:11)

 

이것이 회개에 대한 완벽한 정의라고 마틴 로이드존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순리대로 되지 않은 것 혹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아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것의 섬뜩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 문제를 스스로 질책하였으며, 그리고 자신들을 미워하였고 자신들에 대하여 복수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진수입니다.

 

출애굽기시대 하나님 앞에 우상을 부어 만든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그것을 섬겼고, 자신들이 만든 우상 앞에 벌거벗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싫어하는 죄인지, 뼛속 깊이 경험합니다. 모세로부터 전해 듣는 참담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통곡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 기쁨을 줄 만한 것을 제거합니다. 장식품을 모두 제거합니다(33:4). 그리고 다른 신에게 절하거나 마음이 나누어져서는 안 되는 질투라는 이름을 가진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34:14). 백성들은 자신들이 보아도 이것이 이렇게 나쁘거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어떠한지 인식하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심각한 죄인지 인식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미워했으며 혐오했으며, 철저하게 자신들을 정죄하였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지금 우리시대는 죄를 지어도 그리고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여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죄의 민감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리적으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사하신 교리를 재빨리 잡아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음아픔의 과정이 생략되어 버렸습니다. 이 마음아픔의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삶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전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였듯이, 눈을 들어 인격적인 하나님을 처다 보지 못하는 과정이 바로 마음아픔의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의 이러한 기도에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렇게 회개에 대하여 설명하여도, 회개에 대한 성서의 진리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이 가려져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4. 회개는 죄에 대하여 민감해집니다.

 

하나님이 회개의 마음을 주시고 인도하시면, 전체적으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게 만드십니다. 지금까지 별 의미 없이 지나쳤던 일들이 마음속에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의중을 묻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졌는지 점검합니다.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죄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시작합니다. 마음속에 미움을 가졌던 사람과 마음속에 서운한 마음을 가졌던 모든 사건 가운데,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이 견딜 수 없어서 마5:21-26처럼, 마음에 걸리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만나지 못하는 처지에 있으면 눈물로 편지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새번역, 5:21-26)

 

용기만으로 자신이 가졌던 미움의 대상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 고백하고 자신이 미워했던 사실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미워하였던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옳고, 자신이 틀렸다고 인식하게 될까봐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순종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지만, 순종의 마음만으로 자신이 모든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프란시스의 생애를 읽어보십시오. 처음으로 미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죠나단 에드워드의 생애를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끌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가운데, 하나님이 회개를 이끄실 때는 동일하였습니다.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특별히 부흥시기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메시지에 회개로 나가갔던 수많은 군중들이 모두 동일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회개로 이끄시면,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있고 진노아래 놓여 있는지 인식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 삶 가운데 죄에 대하여 민감함을 줍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5. 회개는 압도적인 권세에 밀려 영혼의 고뇌에 빠집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해 고뇌함으로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지 깨닫는 것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압도적인 권세에 밀려 심지어 육신적으로 아픔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혼의 고뇌”라고 합니다. 특히 부흥시기의 기록들에서는 일상과 같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신앙을 회복하시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때 동일하게 사용하신 하나님의 다루심입니다.

 

“부흥”책의 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존 번연은 자신의 책 “넘치는 은총 Grace Abounding"에서, 18개월 동안 어찌나 죄의식의 고뇌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지, 들에서 먹이를 찾고 있던 기러기가 부럽기까지 했었다고 토로합니다. 차라리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을 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고뇌, 이 무시무시한 죄책감, 부흥이 일어날 때 이러한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혼의 고뇌를 하며 애통해합니다. 그들은 울부짖고 흐느끼며 다른 이들에게 들릴 정도(통성기도를 뜻합니다)로 고뇌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거기에만 머물다 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어찌나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성령의 권능을 어찌나 강하게 느꼈던지 기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질 정도였습니다. 때로는 경련을 일으키기까지 했습니다. 어떤 사람 사람들은 무의식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고, 일종의 실신 상태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시간 동안 그와 같은 상태로 있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영혼의 고뇌는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어떤 사람은 오랜 고뇌의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둘째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를 이기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은 사람들이 산출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회복시키는 회개의 차원은 인간이 산출할 수 없고 또 산출했었던 적도 없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를 너무 날카롭게 느낀 나머지 자신의 육체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뇌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어떤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의 죄 됨을 인식한 나머지 육신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나타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에필로그

 

회개를 가지고 하나님이 저를 가르치실 때, 용서도 함께 가르치신 것을 간증하고자 합니다.

 

저에게는 저를 아주 많이 미워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저의 신학교 3년 선배입니다. 특수목회를 하다가 대형교회 담임목사가 되어서, 그 교회로 부임하면서 대형교회 사역 경험이 있는 저를 부사역자로 함께 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담임목사님이 특수목회 경험에서 일반목회로 전환되는데,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전임 목사와 지금의 목사를 비교하는 기존에 있었던 십 수 명의 사역자들이었습니다. 1년 만에 기존의 모든 사역자를 사임시키면서 저도 함께 사임시켰습니다. 목사는 1년 만에 강제로 사임시킬 수 없는 것이 한국의 법입니다. 모두 무시하고 다른 사역지도 알아볼 시간조차 주지 않았고 모든 사역자들을 잘랐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제가 선교사로 모든 훈련을 받고 선교지로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교단선교부를 찾아가서 저를 교단선교부에서 내보지 않으면 모든 선교헌금을 중지하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서류상으로나 인성검사와 심리검사와 같은 부분과, 선교 훈련원의 평가에서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선교후원금이 빵빵한 교단 선교부를 쫓겨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부족함을 저의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왜 그 교회를 잘릴 만큼 문제가 될만한 사역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담임목사님을 끝까지 돕고 그의 편에 서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에게 그 목사님에게 찾아가서 저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전까지 그 목사님이 저에게 찾아와서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가슴에 박혀서, 도저히 항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목사님께 서운하였던 저의 마음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기분 좋아서 이런 저런 말들을 하였는데, 하마터면 제가 그 자리에서 화를 낼 뻔할만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래도 꾹 참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에 기쁨과 함께 아직도 도사리고 있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렇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님얼굴을 구하고 있는데, 그 교회의 설교단상에 서있는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현상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저는 다시는 그 목사님과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다음날 그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선교지로 떠나기 전에 한번 들리라면서 시간과 날짜를 알려주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마음속에 전정으로 그 목사님을 용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용서를 구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하였습니다.

 

저는 목사님을 만나서 다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설교단상에서 그동안 그 교회에서 이유도 모르고 교회를 나오게 되어서 교회를 미워했던 저의 죄를 성도들에게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참으로 큰 해방감과 행복이 밀려들어왔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저의 경제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그리고 사역에까지 상처를 준 사람을 주님처럼 용서한 것에 대하여, 대단히 흥분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렇게 선교지에 가서 생활하면서 다시 그 목사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2번이나 찾아가서 저의 서운했던 마음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였지만, 아직도 99%는 용서하였는지는 모르지만, 1% 용서하지 못하는 저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죄를 가지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은 저에게 완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함께 저의 야망을 다루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저를 미워하고 자신의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면서 미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목사님은 자신의 생각을 직접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고, 저는 저의 마음속 깊은 곳에 그런 마음이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것뿐인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 둘 다 똑같은 죄인이되, 하나는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행동으로 옮긴 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죄인인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저의 마음은 죄에 짓눌려서 죽어지는 경험들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죽을 것 같았느냐하면, 밤중에 천정에 쥐나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소리를 듣고는 쥐와 고양이가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나 후회되었습니다. 바퀴벌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모기를 잡아먹는 방의 벽에 붙어있는 도마뱀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만약 제가 죤 번연이 경험한 사건을 알지 못했다면, 저는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99%용서하고 1% 용서하지 못하는 저의 죄와 저의 야망이 완전히 내려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어느 날 너무 제가 한심하고 죄질이 무거움을 느껴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경찰소로 향해가는 저를, 저의 아내가 잡지 않았다면, 저는 경찰서에서 저를 감옥에 가두어 달라고 애원했을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갈 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감옥에 가두어 달라고 아우성 쳤던 사건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저는 저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때때로 저는 하나님이 다루고 계신 용서와 야망 때문에, 기절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한 병이나서 병원에서 스트레스성 두드러기 치료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1년 반을 살았습니다. 저는 저의 죄 때문에 정말 죽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붙드는 교리를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믿음으로 인정하고 고백해도, 저의 마음속에 죽어지는 경험은 더욱 강해져만 갔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고 있다가 출애굽기 32장에서 33장의 사건을 읽는 가운데, 저는 말씀의 무게 때문에 바닥에 주저 않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2번에 걸쳐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질투(열심)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질투(열심)하시는지, 말씀을 통해 체험하면서 제가 그동안 몸부림쳤던 용서와 야망이 내려놓아졌습니다. 정말 극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모세시대에 가서 그 시대의 인물들이 되어서 성서가 이야기하는 사건들을 모두 실제로 체험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저는 경험하지 못하였던 경험인데, 그것으로 하나님의 질투가 저에게 부어졌습니다. 그렇게나 고대하였던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이 정착되어졌고, 십자가에 의한 삶도 그것을 통해 삶속에 정확하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용서도 야망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주님의 임재가운데 생활하는 것이 무엇인지 저의 생활가운데 실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제가 극히 일부분을 소유함으로 얻게 된 변화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내가 얼마나 죄인 중에 괴수이며 선한 것이 없되 하나도 없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십자가의 보혈이 삶 가운데 실제가 되는 것을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모두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6. 회개의 목적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빼놓고서는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로 인도하신 사건이 출애굽기에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2장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백성들이 부패한 것을 알리시고 진노하십니다. 모세는 회막에서 삼천 명을 죽입니다. 이튿날 모세는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지 않으시면, 주님이 기록하신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합니다. 모세는 지금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모세는 지금 지옥에 떨어져 있는 백성들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신 것이 바로 지옥인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그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자를 앞서 보내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쫒아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 백성들과 친히 함께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33:3).

 

회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사실에 당황합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그토록 슬퍼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죄인인 나와 함께 하지 않는 다는 사실에 통곡하고 삶의 의욕을 모두 상실하고 맙니다. 그토록 처절하게 고뇌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공동번역 개정판에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 너희는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들어가거라. 너희는 고집이 센 백성이기 때문에 동행하다가는 내가 도중에 너희를 없애버릴지도 모르니,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는 않겠다." (33:3)

 

이 말씀의 섬뜩함을 느끼시는 지요?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절감하고 계시는지요?  더 이상 죄인 된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고, 바로 지금 지옥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시는 지요? 회개는 바로 이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고개를 돌리신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있는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심각한 것이, 이 세상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약속한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주겠다고하신 것처럼 성경의 모든 약속을 다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유일한 목적이고 목표가 아닌 너희들을, 약속한 것을 다주기만 할뿐 나는 너희에게 임재하지도 않고 교제하지도 않고 함께하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모세는 인격체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그 분이 자신의 모든 것 되었습니다. 자신이게 부귀영화와 사람들에게 명성을 주지 않아도, 하나님 그분 한분을 잃어버리는 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슬픔도 마찬가지 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장신구를 떼어내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모든 부귀영화와 면류관과 자랑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보다도 더 가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개인이 그리고 교회가 번창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두드러지게 성공을 거두고 많은 재정과 훌륭한 건물을 가지고 수많은 회심자들을 얻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또한 원수가 패배당하고 모든 것이 잘 되어 나가고 기독교 신물들이 그 사실을 보도하며 모든 것이 잘 되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과연 우리가 그 영화로운신 하나님의 임재를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까?  진실로 하나님의 임재가 개인과 교회에게 부어져 있다면 이러한 회개의 진수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흔히 보고 경험하는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모세와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젖과 꿀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것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원합니다. 당신이 저의 삶의 모든 것 되십니다. 당신만이 나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고 목표입니다”

 

바울은 성공적인 복음 전도자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공동번역 개정, 3:10-11)” 라고 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의 모든 것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존재 가치도 없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번영하고 유익한 성공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시면 네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16:27).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실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와 함께 계신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더 이상 형식적인 종교의 모습을 버립니다. 회개의 목적이며 회개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후회와 회개의 절대적인 차이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후회는 잠간 지나가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너무나 심오하여 사람의 의지와 세계관과 삶의 목적과 목표에까지 영향을 주는, 삶의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7. 행동을 유발합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기 까지는 결코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처지가 어떠한지 실감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심각한 죄를 깨닫고 그들이 취한 행동은 자신의 몸에 있는 단장품을 떼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가슴 아픈 말씀을 듣고 온 백성은 통곡하였다. 패물로 몸을 단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전하여라. '너희 고집이 센 백성아,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와 같이 올라가다가는 너희를 멸종시킬 것이다. 그러니 이제 너희는 모든 패물을 몸에서 떼어버려라. 그러면 내가 무엇이든지 알아서 해주리라.'" 호렙 산을 떠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은 몸에 패물을 두 번 다시 붙이지 않았다. (공동번역개정판, 33:4-6)

 

회개는 우리의 죄악성, 특히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죄악성이 어떠한가를 이처럼 심오하게 인식하고서,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것을 힘껏 최선을 다해 행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찾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를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스스로 단장품을 제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변화된 삶을 하나님께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단장품들이 그들의 함정이 되었습니다. 그 단장품을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자신을 멋지게 꾸밀 수 있는 단장품을 다시는 몸에 걸치지 않는 회개의 변화된 모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8. 역대하 7:14

 

회개에 대한 주옥같은 구절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역대하 7: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개역개정판 한글성경 본문은 회개에 대하여 히브리 원어의 의미를 따르지 않고 단어도 마구 섞어놓았습니다. 새번역 같은 성경은 다른 번역 성경 보다 현제 한국의 실정에서는 히브리어에 가장 가깝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새번역, 대하7:14)

 

본문이 회개에 대한 차례를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개에 대한 바람직한 모습을 설명하였다고 생각됩니다. 회개는 스스로 겸비(겸손)하는 것, 기도하는 것, 나를 찾는 것(=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그리고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 네 가지를 포함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1) 스스로 겸비하는 것.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겸비 혹은 겸손은 다른 번역본에서는 ‘스스로 낮춘다’ 또는 ‘머리를 숙인다’라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은 남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나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것이나 자신에 대해 늘 비하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유교문화가운데 있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겸손의 의미입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겸손 이라는 단어의 의미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동의하고, 그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심각한 것은 명백한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까지 합니다. 여러 가지 핑계들을 대기에 바쁩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적당한 선에서 넘어갑니다. 자기들의 죄를 직면하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죄를 심각하게 다루는 메시지를 원치 않습니다. 자기들이 듣기 좋아하는 메시지를 만을 듣습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서는 절대 회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인물들과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대면하고 회개하며 나아갔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만이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입니다. 그러기에 정직하게 말씀을 대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한다는 말은, 요시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과 그 기준 앞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옷을 찢으며 하나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동의하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2) 기도하는 것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비춰주신 그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하나님)를 찾는 것 =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히브리어에서는 인격, 성품, 속성을 뜻하는 의미의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를 “얼굴”이라는 단어와 “이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찾는 다는 의미와 성경에서 얼굴을 구한다는 표현은 같은 의미인데,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과 속성 등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 자체를 알기 위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과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가 서로 안다고 하는 것 같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한분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4) 악한 길에서 떠나나는 것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은 그동안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대체하였던 모든 우상을 철저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물질주의, 돈을 사랑하고 중시하는 것, 형식적인 예배, 자기 자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의지하는 것, 전통적인 신앙, 성경 지식을 전달하고 신앙의 본질이 없는 성경공부와 같은 모든 것을 철저하게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를 의지하기보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모든 것,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추구하기보다 화려하고 감동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던 모든 것. 그리고 소위 성장을 위해 행하였던 모든 그릇된 마음 자세와 행동,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보다 자기의 사람 만들려고 했던 것, 사람들을 대할 때 진정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로 끌어 들이려고 했던 모든 노력, 하나님께서 교회의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리기보다 사람들을 교묘하게 조정하여 헌금하게 하는 것,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직분을 남발한 것,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일꾼을 분별하여 세우려고 힘쓰기보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을 일꾼으로 세우는 것, 직분을 섬기는 직무로 이해하기보다 계급적인 신분으로 이해한 것, 하나님의 직분을 세상의 사업을 위해 이용한 것 등 이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버리고, 그러한 죄악들로부터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과 교회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포함합니다. 가치관, 삶의 목표와 목적과 형태, 사역에 대한 이해와 태도, 예배에 대한 이해와 자세와 형태 등 모든 면에서 인위적인 방법론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준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큰 대가를 요구합니다. 회개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룰 준비가 된 사람만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헨리 블렉가비 목사의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회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완전한 회개를 이루려면, 죄로부터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우상을 허물어 부수는 것, 행동양식의 변화, 전통을 버리는 것, 재산과 물질을 파는 것, 잘못된 일에 대한 보상, 다른 사람들과의 화해 혹은 하나님이 용납한 사람들을 용납하는 일 등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부터 잘할게요. 라는 말로는 불충분합니다. 회개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이 구현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은 단계적으로 신앙의 성숙함으로 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건한 성도라면 자신의 그러한 모습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망을 신앙의 성숙됨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생겨났습니다. 자신의 처지는 신앙의 성숙함으로 통하여 점점 확실하게 보여 진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에 관한 모든 성경의 내용들을 추적하면, 바울의 인생의 여정에 따라 나오는 그의 표현을 근거로 설명합니다.

 

바울이 처음에는 자신도 여러 사도중의 한사람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의 성숙하자 사도중에 맨 마중이라 자신을 겸허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성숙하자 자신은 10달도 못채우고 나온 사람이라 칭할 뿐만 아니라, 선한 것이 업되 하나도 없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성숙하자 자신은 죄인중에 괴수임을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회심이후 순교하기 전까지 수십년동안의 삶 가운데 바울이 쓴 글을 중심으로 발견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성숙해감을 통해 점차적으로 자신의 전적인 타락을 발견해나가는 성숙의 과정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파편들을 정확하게 뽑아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논리(이론)입니다.

 

이것이 맞느냐 틀리냐를 성경에서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이것을 입증할만한 한 개인의 신앙성숙 여정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였느냐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부흥 때마다 사용하신 사람들과 부흥 때 하나님을 반응하고 회개로 나왔던 사람들은 단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옥을 경험하였습니다. 단 한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신앙의 성숙함을 통하여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심으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흥을 통해 하나님이 회복하시고자 하시는 신앙의 모습으로 회복하실 때, 단번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셔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자신이 죄인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반론할 것 같습니다. 부흥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때이기 때문에, 단번에 자기자신의 처지를 인식할 수 있었지, 부흥의 때가 아닐 때는 신앙이 성숙되어 감을 통하여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가 바로 세대주의 논리입니다. 세대주의는 하나님이 각 세대에 다른 일들과 사역들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기적과 이사와 은사들은 성서시대 한번만 일어났고, 지금은 모두 중단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시대의 특수성을 주장하며 합리성의 이성적 근거를 무너뜨리는 신비한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 이러한 성경을 해석을 세대주의라 합니다. 이것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나요? 특수성을 주장하며 부흥 때만 일어나는 일이라 주장한다면, 바로 세대주의 주장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나요?

 

부흥은 하나님이 신앙의 타락이 극에 달하였을 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신앙의 노선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그분만이 중심이 되는 신앙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그 사역과 일은 우리에게 귀중한 표본이 되고, 우리의 샘플이 되고, 우리가 올바른 신앙으로 가도록 가게 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이 2000년동안 한번도 예외없이 동일하게 하셨다면, 그것이 우리의 모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신앙이 성숙됨을 통하여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점진적으로 발견해나간다는 이론은, 성경의 파편들을 모아서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진행해나가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프란시스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를 만지셨을 때 그는 지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 인생가운데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죽을 때까지 확인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더욱 십자가를 붙들고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커져갔습니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삶을 읽어보십시오. 그들은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그것에서부터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성숙을 통해 죽을 때까지 전적인 타락을 점진적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평생 그들은 그것을 확인하고 십자가를 붙잡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한 죠나단 에드워드를 보십시오. 그가 첫 번째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였고, 또 두 번째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할 때, 그는 회개의 진수를 깨달았고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점진적으로 죽을 때까지 더 심오하게 자신의 처지를 확실하게 알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죽을 때까지 확인하고 살았습니다.

 

부흥 때마다 변화된 수많은 역사속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이며,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본 이후, 죽을 때까지 그것을 확인하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상태가 너무나 심각하였기에 십자가가 삶의 실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역사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점진적으로 본 것이 아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게 되면, 십자가가 더욱 크게 보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에 더욱 깊은 체험과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하시는 것은 주권에 속합니다. 어떤 법칙도 없고 어떠한 방법론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적인 주님의 주권입니다. 인간을 너무나 잘 알고 사랑하시고 자신에게 이끄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로 인간을 인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질투)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신앙의 성숙이, 자신의 처지를 보게 하였다는 것은 성경 속에서 파편을 발견하고 이론화시킨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그런 일은 찾아보기 어려운 이론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추종하고 믿고 따른다면,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회개는 언제까지 해야 하나?

 

어떤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언제까지 회개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의 죄 때문에 죽어지는 경험을 어느 때까지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 까지, 우리가 주님을 닮을 때 까지 회개해야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 까지 일 것 같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시작하십니다. 자신이 회개하려고 해도 성서적인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응하지 않으면 또 성서적인 회개로 인도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우리가 반응함으로 함께 이루어가는 합작품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성서적인 회개는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한번 성서적인 회개의 길로 들어서서 수많은 하나님의 다루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개의 모습을 잃어 버릴 수 있습니다.

 

원인은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입니다. 주님의 사역과 일에 너무 바빠서 주님 그분을 찾지 않고 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분주함 때문에 자신이 주님을 잊어버린 것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어느날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돌아서야 되는데, 자신 속에 있는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찾고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 속에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냥 놔두면 하나님을 떠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신앙을 버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전히 신앙가운데 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영적인 자극과 주님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회개와 믿음에 대하여

 

칼빈의 구원론에서는 회개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봅니다. 칼빈에 의하면 믿음 후에 회개가 따라온다고 믿습니다. 회개가 이전의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 것, 마음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져서 삶이 참되게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회개만을 언급한 적도 있고, 믿음만을 언급한 적이 있지만, 회개와 믿음은 같은 뜻을 갖습니다. 즉 불신으로부터 돌이켜야만 믿는 것입니다. 돌이키지 않고 믿을 수가 없으며, 돌이켰는데 믿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과 하지는 믿음이 먼저 일어난다고 말했지만, 박형룡박사와 웨슬레는 회개가 먼저 일어난다고 말하였으며, 크리스소스톰은 믿음과 회개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했고, 존머레이는 회개하는 믿음, 혹은 믿는 회개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고자 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입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회개의 진정한 의미와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 성경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자백에 대한 오해(회개는 한번만 하는 것이고, 자백은 계속 해야 된다는 잘못된 오해)

 

자기중심의 생활양식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으로의 생활양식으로, 삶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자기중심의 사고체계에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체계로의 삶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자기중심의 목적과 목표에서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가 삶의 목적과 목표로 전환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불신자이든 기존 신자이든 모두가 해당됩니다. 신약성경이든 구약성경이든 성경의 대상이 대부분 믿는 자들 이었습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은 서신들이 성경으로 정립되었는데, 편지의 독자가 모두 기존의 교회 공동체들이었습니다. ,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대상이었던 것을 보았을 때, 회개라는 단어의 사용도 모두 이미 믿고 있는 성도와 믿지 않았던 사람들 모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일부 회개와 자백의 의미를 예를 들면서 잘못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는 불신자가 혹은 완전히 회개를 하지 않은 자가 해야 할 것이고, 자백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 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회개는 사전적인 의미에서는 회개는 단 한번 있는 것이라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목숨을 바치지 않으면 어떤 의미 에서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의 중심은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어째든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목숨을 바친 것이 되기 때문에 회개는 단 한번 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백은 말 그대로 죄를 자백 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해도 믿지 마라 천국은 오직 마음에 있느니라 라고 하셨듯이, 자백을 통해서 마음의 천국을 지킬 수 있습니다. 자백은 지은 죄를 고백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양쪽에 죄수 두 명이 형틀에 메여 있었습니다. 왼쪽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 했고 오른쪽 강도는 주여 주님 나라가 가실 때 저를 기억해 달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른쪽 강도는 회개를 한 것이고 자백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단한번의 회개로 예수님과 함께 간 것이라 설명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리가 아니고, 자기의 논리를 가지고 성경의 구절을 끌어들여 설명한 것입니다. 성경은 회개를 불신자 혹은 완전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향해 한번만 하는 것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습관적 회개의 문제점

 

회개의 한 가지 큰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같은 죄를 지으면서 회개하기만 하면 항상 용서받는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반복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회개를 하고, 별로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흔히 그들은 자신들이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반복해서 짓게 된다고 말하면서 계속 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주님의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죄 사하심의 능력과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능력을 교리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가 내세우고 있는 이론에서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자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후회를 거듭 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회한 것을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해 죄 사함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처지를 보고 몸서리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을 가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한 바른 교리는 중요하지만, 회개교리에 대한 확신 자체가, 우리를 회개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실제입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들은 먼저 자신이 회개하고 회개를 외친 사람들입니다

 

성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난 이 천년의 교회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회개를 외치셨습니다.

 

청교도 신앙의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며, 당대의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리처드 백스터는 “회개했는가? 라는 책을 통하여 1600년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회개의 자리로 인도하였습니다.

 

조셉 얼라이언의 “돌이켜 회개하라”라는 책은 회개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책이며, 1600년대에 하나님이 쓰셨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들 두 책은 회개에 대해서 강력하게 외쳤던 기독교 고전입니다.

 

대 각성운동을 일으켰던 조지 휘트필드. 그는 그의 설교에서 언제나 심판에 대해서 지옥에 대해서 경고했습니다. 개신교 최고의 설교가인 스펄젼이 자신의 모델로 삼고 닮기를 원했던 인물이기도 한 그는,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렇게 순회설교를 하다, 그가 늘 고대하였던 하나님을 위해 달아서 없어지고 하였던 그의 소망처럼 죽었습니다.

 

미국의 초기 청교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 중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대부흥이 오기 전 그가 한 설교 본문 전체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는 설교내용을 모두 종이에 가지런히 쓴 후, 단상에 올라가서 설교내용을 읽은 방식으로 설교한 사람입니다. 미국이 낳은 개신교 최고의 설자였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놓여있는 죄인들”이라는 그 설교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 말미암아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의자를 붙잡고 있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바닥에 쓰러져 지옥을 경험하였고 몸서리치는 자신의 죄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게 미국의 부흥은 그 설교를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2차 대각성운동을 이끌었던 찰스피니는, 그의 모든 설교에서 부흥에 대해서 얘기하였습니다. 부흥은 바로 죄와 회개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을 때만 가능하고 하였습니다. 죄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 안에 부흥이 일어난다고 외쳤습니다.

 

개신교 최고의 설교가 찰스 스펄전은, “진리는 귀에 거슬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말은 가슴을 찌른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참지 못하고 경청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결코 훌륭한 성도가 아니다. 우리는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설교자가 필요하지 않다. 대신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죄를 회개하도록 돕는 사람이 필요하다.” 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소개한 이 사람들은 한 때 시대를 변화시켰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가 죄를 드러내고 회개를 외쳤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한 회개가 너무나도 혹독하였고, 하나님 앞에 멸망 받을만한 것이었기에 선명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였고, 또한 그렇게 부흥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실로 회개한 자가 회개를 외치면, 그 외침 속에 자신이 그 죄 가운데 속해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이 있고, 실제적인 삶의 행동양식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정죄의 분위기와 성도들을 치는 설교가 아닌, 사랑으로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뒷받침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죄를 지적하고 죄를 드러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수많은 죄악들을 찾아낼 수 있고, 자신이 먼저 그것에 대하여 흥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신이 선지자인줄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에는 하나님의 뒷받침하지 않습니다. 약간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을 울게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주여 나를 떠나시옵소서, 나는 주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같이 거룩하신 분을 나 같은 죄인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밖에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런 회개가,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꼬?

 

지금까지 제가 회개에 대해 쓴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실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현대의 문제점을 가지고 회개를 다룬 글들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이러한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자신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지 않아서 고민했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회개의 체험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가다 보니 잃어버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이런 경험을 하고 있지만, 말로 옮기는 것이 어려웠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회개가 우리 삶 가운데 실제가 되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우리의 질문일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고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저를 다루실 때, 제일 먼저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의 전환시키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나고 난 후, 매일 십자가의 예수님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베개의 두면을 다 적시고, 다른 배게 로 바꾸기 전까지는 잠을 잘 수 없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신학대학에 들어가서 어느 교수님의 세대주의 신학 강의를 듣고, 더 이상 예수님 때문에 눈물 짖는 삶이 무너지고, 교만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너무나 거세서 저를 막지 못했습니다. 가슴은 차가와 졌고 지식은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신 첫 번째가 이러한 신학적 전제를 버리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들을 보여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기준 앞에 저는 지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저의 인생이 하나님 그분이 유일한 목적이 되는 삶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하나님이 저의 유일한 전부라고 고백하고 생각하였지만,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으로의 전환 이후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하나님이 유일한 목적이 되는 신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저를 회개케 하시고 다루시기 시작하실 때, 1달 동안 매일 울었습니다. 자다가도 울고 아침에 일어나면 눈물자국으로 베개를 적시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울었고, 밥을 먹다가도 울어서, 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였습니다. 인간의 눈물이 그렇게 많이 흘릴 수 있는지,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을 떠났다는 사실 때문에 그렇게 울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저의 인생가운데 깊이 개입하셔서 시작하셨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우리의 반응을 통해 함께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시작은 그분의 주권에 속하고, 우리를 다루실 때 최선의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회개를 하지 못하였다면, 아직도 하나님나라의 제자로 시작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하시고 전도도 하게 하기 위하여 제자를 부르실 때, 제자의 상황은 이러한 회개를 경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부흥 때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회복하시려는 신앙으로 회복하는데, 제일먼저 하신일이 이러한 회개의 역사였습니다. 한번도 예외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본질을 시작하였는지 하지 못하였는지는, 바로 회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능력 있는 설교를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칭송을 받을 지라도, 이러한 회개가 실제가 되지 못하였다면, 아직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제자로 발탁 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신학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많이 연구하고 책을 내고 신학교에서 가르쳤더라도, 이러한 회개가 실제가 되지 못하였다면, 아직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의 연륜이 많고 귀한 직분을 가지고, 수많은 봉사와 선교와 수고를 하였더라도, 이러한 회개가 실제가 되지 못하였다면, 아직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시작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혹독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단지 이론을 실제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이러한 회개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부흥은 이렇게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카페 회원들이 하나님의 기준위에 영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좋은 충고와 가르침이 이 글을 더욱 알차게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발전하고 다듬어 질 것을 소망합니다.

 

 

김바울 선교사 // 다음카페 //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

 

출처 :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글쓴이 : 샤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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