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신학에서 본 인간이해

하나님아들 2015. 1. 1. 22:07

신학에서 본 인간이해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들은 너무나도 과소평가하고 있다. 다윈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시인 벤은 인간을 “두뇌를 가진 동물”, 신에게 꼼짝달싹할 수 없이 묶여 있는 가련한 두뇌를 가진 개“, 인간은 고상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부터 밝은 곳으로 가려고 애쓰는 종족이 아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우리는 모른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업이란 어두움 속에서 지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두려움 속에서 행하는 것뿐이라” 고 과소평가하였다.

(1)인간은 동물이 아닌 동물이라는 것이다.

에밀 브루너에 의하면 “비록 종래의 인간에 관한 정의가 진리의 요소를 갖추고 있기는 해도 그것은 인간의 인간됨을 회복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브루너에 의한 인간의 이해처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우리들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보다는 더 나은 것이다. 동물도 문명의 시초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문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동물도 이해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동물도 온갖 것을 알고 있으나 학문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동물도 놀기는 하나 예술이 없다. 동물도 무리를 짓지만 공동체가 없다. 동물도 형벌의 두려움을 가지지만 양심이 없다.” 라고 하면서 인간과 동물과의 차이를 두고 있다. 분명히 동물과 사람과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브루너는 “동물은 세계의 주인을 모른다”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동물은 자신의 주인은 알아도 세계의 주인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2)인간은 말씀 안에 거할 때만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으로 벗어나 있는 정도를 비인간성의 정도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란 본래의 인간의 모습을 갖출 때만 인간이란 말이다. 여우는 여우 자체로서 여우이다. 여우는 비 여우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여우는 말씀으로 창조된 완성품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손으로 빚으시고 말씀 안에서 살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이 우리 속에서 메아리 칠 때 바로 그때만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여우는 말씀으로 창조되었지만 인간은 말씀 안에서 창조되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에 순종할 수도 있고, 이를 거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 되거나 비인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3)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을 때 인간이라는 것이다.

대화 철학에서 인간은 교제 속에서만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틴부버가 강조한 대로 “나와 너” 속에서 인간이고, 독백하는 고독 속에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만 인간이 되는 것이다. 로젠츠바이크도 “나는 네 속에서 생긴다.”고 말했다. 대화 사상의 대변자인 에브너도 “인간 정신의 질병은 내가 너를 상실한 데에 있다.”라고 하였다.
내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이면서도 고립적인 영역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고 교제하는 타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내 자신의 이기적인 속성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자신을 비우지 못함으로 이러한 “자아의 독자성”을 깨뜨리지 못하지만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뮐러가 이야기 한대로 인간은 인간의 끊임없는 비움, 그의 개방성, 내용이 없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야스퍼스가 이야기 한대로 “신과 관련된 존재”로서만 인간은 인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 전체의 통일성, 다시 말하면 구약 전체를 관통해서 나타나는 중심 사상을 학자들 간에 서로 다른 이견이 있지만 프리젠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구약신학의 중심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교제로부터 “하나님의 공동체”가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아버지와 자녀, 남편과 아내, 주인과 종, 왕과 백성”등과 같은 관계들 안에서도 표현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

 

출처 : 낙송 사랑방
글쓴이 : 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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