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
기독교 인간학은 일반적인 학문이나 신화적. 종교적 세계관에서 말하는 인간 이해와 입장을 달리한다.
일반적인 학문은 존재하고 있는 현상으로부터 출발하기에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는 우월하다고 말하며, 신화적 관점이나 기독교를 제외한 일반적인 종교적 세계관에서는 대부분 인간은 영혼이 천상에서 물질세계로 추방되어 육체에 갇혀 있지만 세계보다 참된 것이라고 보았으며 육체와 이성에 대한 이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 인간학은 하나님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계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신앙으로부터 출발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데 있어서는 세상적인 학문과 기독교적 입장의 차이는 본질부터 다르다.
(1) 이기적인 인간 본성론
홉스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인간 본성론에 관한 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자연 상태를 말하면서 “인간의 자연 상태란 바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다. 그리고 인간이 짐승처럼 이런 투쟁 상태에 빠지는 것은 인간 본성이 바로 ‘이라와 같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홉의 주장은 일상적인 경험에서 인간 모두가 전적으로 이기적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을 이용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홉스는 이러한 이기적 인간의 본성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법을 통한 통제나 규제를 말한다.
(2)경제적인 인간 본성론
공리주의의 인간 본성론은 홉스의 주장과 맥을 같이하면서 경제영역으로부터 이기심을 발휘하는 본성을 말한다.
홉스의 이기적인 인간 본성론은 희소한 것에 대한 욕심과 탐욕을 말한다면 공리주의의 인간 본성론은 경제적인 효용극대화를 위해서 이기적인 본성을 말한다. 아담스미스는 공리주의의 인간본성을 말하면서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본성에 따라 최대한 이기심을 발현할 수 있도록 경쟁을 통해 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한다.
(3)노동을 통한 인간 본성론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홉스와 아담스미스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원래부터 탐욕스럽지도 이기적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인간은 노동의 활동을 통해 창조적이고 인간적인 유대감을 간직한 존재다”라고 하였다. 이는 마르크스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노동’을 근거로 인간 본성을 보았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이다.
루소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같은 맥을 같이하면서 “인간의 본성이 본래부터 선한 것인데 역사 문명과 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대개 자연으로부터 온 것은 반드시 참되고 참될 뿐 아니라 또한 선하다” 또 “자연이 만든 사물은 모두가 다 선하지만 일단 인위를 거치면 악으로 변한다”고 주장하면서, “국민은 다른 사람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서도 안 되며, 자신을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해서도 안 된다”는 말을 했다.
이상에서 마르크스와 루소의 인간 본성론을 살펴보면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창조적이고 인간적인 유대감을 간직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이런 본성이 잘못된 사회제도나 구조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데에 동의 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인간 본성 왜곡을 위해 사회제도와 구조를 바꾸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4)동양의 인간 본성론
동양에서는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면서 선을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의예지로 보았던 것이다.
인간은 선하다고 보기 때문에 가정이나 나라든 모든 사회를 인간이 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선한 면을 도덕적 이성이라고 보았고, 도덕적 이성을 가진 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한다.
반면에 순자는 성악설을 말하면서 인간의 성은 악하다는 것이다. 선할 수 있다는 것은 배워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성악설은 인간이 악하다고 보기 때문에 가정이나 나라를 인간이 이끌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밖에서 국가를 치리할 수 있는 원동력을 찾아내는데, 순자는 이것을 예로 보았고, 한비자는 법과 권력, 묵자는 강자에게 사랑을 요구한다.
(5)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본성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홉스나 아담스미스가 이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인간 본성은 원래 이기적이며 이런 본성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외에도 현대 생물학의 연구 성과에 근거하여 유전자에 의한 인간 본성의 유전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인간 본성은 고정불변이라 단정 짓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와는 다른 관점도 있다. 즉 본성이란 사회와 역사 속에서 형성되거나 지적인 이성의 교육을 통해 변한다는 것이다.
고정불변의 인간 본성이란 없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선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다. 예를 들어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쥐는 넓고 탁 트인 공간에서 생활한 쥐보다 더 사납고 공격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동물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도 환경적인 요인과 교육의 차이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보면 사회적 속성은 후대에 유전되기 보다는 학습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속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것이 과제이다.
인간의 생리적 욕구나 동물적 본능에 근거해 인간 본성을 보면 인간의 본성에서 착하다거나 이타적인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인간 본성을 이성이나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틀려진다. 이 두 가지 관점 중에서 어느 쪽이 맞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관점 모두 틀렸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생리적 욕구나 동물적 본능도, 이성이나 도덕적 감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마음에는 세 가지 속성, 즉 에고(ego:자아-외식적인 요인)와 이드(id:본능-정신생물학적 기질), 그리고 슈퍼에고(superego:초자아-인간의 도덕적 사회적 국면)가 있다고 본 프로이드나 "두 마리의 말과 한 사람의 마부가 있다. “라고 본 플라톤의 주장이 더 맞을 수 있다.
(6)성경의 인간 본성론
프로이드나 플라톤이 말한 대로, 사회나 역사속, 혹은 학습을 통해 사람의 속성이 좌우되는 것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긍정할 수 없다.
성경적 관점은 교육이나 환경, 역사가 본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성이 바뀔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뿐 아니라 인간, 피조물에게 대하여 성선설의 손을 들어 준다. 이에 대하여 반기를 든 존재가 바로 성악설을 조장하기 위해 사악한 일을 했던 사탄 마귀이다. 사실 만물, 하늘과 땅 모두 다 저주 받기 전에는 '좋았더라'는 평을 받았다. 창세기는 세상이 선하게 지어졌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빠진 인간의 실수로 모든 인간과 함께 저주를 받은 모든 만물들까지도 그 때부터 지금까지 탄식하고 있다.
그래서 당연히 성경은 인간이 이 본래의 선함을 어떻게 되찾느냐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사실상 그에 대한 구원의 계획이 그려져 있는 것이 성경이고 그 계획의 가장 핵심이 '그리스도'이다. 사탄에 의해 전적으로 악한 본성이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타락을 했기 때문에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고, 선한 것을 회복할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는 자는 성선설 적용을 되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본성을 "전적인 타락"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회복의 가능성을 구속의 은혜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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