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 !!! 구원사!!!

[스크랩] 은혜로 구원받다 1 / 존 번연

하나님아들 2014. 5. 30. 21:43

은혜로 구원받다 1 (존 번연)

글쓴이 : 뿌리깊은 나무 (175.208.36.***) 날짜 : 2013-05-26

 

 

Ⅰ.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죄의 대가로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징벌 같은 것이 있음을 전제한다. 구원한다는 사실은 구원받을 사람이 현재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상실된 존재가 아닌 그 사람에 대해서 구원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구원은 그 자체로서도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구원하다, 속죄하다, 해방시키다, 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같은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우리 모두가 속박과 고통의 상태 속에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사도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로 “구원받다”라는 말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그 참상은 모든 참상들 중에서 가장 처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참상들은 곧 죄, 하나님의 저주 그리고 지옥의 영원한 불꽃같은 것이다. 죄보다 지긋 지긋한 것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그 무엇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참기 어려우랴? 지옥의 무저갱보다 더 두려운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악마와 그의 사자들에 의하여 그 곳에서 영원히 괴로움을 받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무엇인가? 그런데 구원하는 것(내가 본 본문에 의한다면)은 이것들과 거기에 부수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구출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죄인들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이와 같은 세 가지 두려운 사실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시험적으로 알지 못한 사람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 있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말해야만 하겠다. 그것은 명백하다.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구원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이들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라고 한 것처럼 구원을 가장 큰 관심사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만약 “구원받다”라는 이 말이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면 자기의 의식 속에서 죄의 고통 아래 신음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구원됨의 뜻을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 그가 구원받기 위하여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전심을 다하여 외치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행 2:37). 아무런 쓰라린 상처의 아픔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약의 가치를 알 수 없으며 (그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약을 써서 치유된 경험이 있는 사람처럼 약의 귀중함을 높이 평가할 수도 존중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고약을 성한 몸에 발라 보라. 그러면 그것은 약의 효용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몸에 바른 그 사람도 그 처방에 의한 그것의 가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죄인들이여(죄의 짐 때문에 가책 받고 억눌려서 상처 받아 본 일이 없는 당신을 말한다), 내가 거듭 말하지만 이런 무감각한 상태에서는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내가 말한 “구원받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놀라 떨어 본 사람은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행 16:29).
더 나아가 “구원받다”라는 이 말은 죽음과 지옥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의 슬픔을 느껴보지 못했거나 지옥의 고통으로 근심해 보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시편 기자는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나를 사로잡았도다. 나는 고통과 슬픔을 보는 도다. 그리하여 내가 주의 이름을 불렀도다(이 구절에 주의하라). 오! 주님, 주께 간구 하옵나니 내 영혼을 구원하소서.”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보듯이 “나의 고통 속에서” 곧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때 그는 부르짖었는데, 왜냐하면 바로 그때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시 18:4,5; 시 116:3,4).
나는 오직 이런 사람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 나머지 사람들이 구원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또한 저주에 대해서도 아무런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구원을 갈구하며 애타게 소망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다가올 진노를 두려워하여 구원을 향하여 뛰어오르는 자가 어디 있는가? 라고 말한다.
슬프도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경히 여기고 있지 않은가? 죄에 관한한 그들이 얼마나 사랑하며 품속에 안고 기뻐하는가? 그들이 그것을 입 안에 감추어두고 혀 밑에 숨겨 두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는 그들이 그것을 느끼지도 않고 있으며 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지옥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의 관심이 있다 해도 그것은 아주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버렸고, 그들의 의문을 무신론에 의해 해결해 버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구원받는다는 것은 전체적인 혹은 부분적인 혹은 양자 모두의 구원을 말한다. 이 책에서 나는 양자 즉 완성되어 가는 구원과 완성되어진 구원 모두를 생각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구원하는 일은 많은 단계를 거치는 일이기 때문이며,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창조 이전에 시작되었고 종말 이전에 완성될 일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창조 이전에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고 사도는 말한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시작에 의하면 모든 것이 서로 일치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도하신 그의 영원한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러한 구원의 사역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의 복된 완성을 위하여 효과적인 수단을 만들기로 작정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택함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분은 그 택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은혜를 주셨다. 그렇다. 성경은 이를 아주 충분하게 입증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3-4)
 
둘째로, 창세전에 하나님의 섭리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부름받기 이전에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은 “부름받는 것”보다 앞선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다음 우리를 부르셨다. 그분은 우리를 부르시고 나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부르시기 전에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호되었고 그다음 부르심을 받았다고 거듭 말할 수 있다. 그는 부르시고 난후에 보호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유 1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듭 말씀하셨다. “내가 나의 남긴 자들을 사할 것임이니라.”(렘 50:20) 즉 바울이 설명하는 것처럼 “내가 택하여 남겨둔 자들”(롬 11:4,5)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인내로 인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수 택하신 자들에게 그들의 회개를 위하여 정한 시간이 될 때까지 그들의 거듭나지 못한 모든 기간을 참아주신다. 회심 이전에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합당한 심판이 만약 우리에게 집행되었다면 우리는 지금 거룩한 부르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생존해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죄에 따르는 심판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거두어졌고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니 곧, 오랫동안 경건치 못하고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전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과 많은 지옥으로부터 구원되었다.
그리고 회심하기까지 선택된 자들에게 긴 삶이 허락되어지는 이유, 즉 다시 말해서 그들이 지은 모든 죄와 그들이 받아 마땅한 모든 형벌조차도 그들이 회심하기 이전에는 이 세상 밖으로 추방시켜버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신이 알고 있듯이, 므낫세는 엄청난 죄인이었고 그가 범한 죄 때문에 그는 고향에서 쫓겨나 바벨론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비록 그의 죄가 천 번 죽어 마땅한 것이었어도 그들은 그를 죽일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아직 부름받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선택하시고, 므낫세가 죽기 전에 그가 받아야 할 풍성한 은혜를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므낫세는 필연적으로 권면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마가복음 5장에서도 군대 귀신이 어떤 사람을 사로잡고 있었으나 그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많은 죄를 범했지만 회개하기 전에는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그 불쌍한 인간이 그의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악마에 의하여 얼마나 많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겠는가? 그러나 그의 거처가 바닷가 근처였는데도 마귀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물론 마귀는 그를 물속에 빠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바닷가 옆에 있던 그 산보다 더 멀리 그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 그 마귀들은 그로 하여금 종종 고랑과 쇠사슬을 부수게 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또한 미쳐서 발광케 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그로 하여금 사람들로부터 격리되도록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으며, 돌로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장차 부름받기로 되어 있었다. 마침내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전되었고 부름 받았다. 마가복음 9:22에서도, 그 젊은이는 그를 죽이려는 마귀에 의하여 종종 불에도 던져지고 물속에도 던져졌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바로 이와 같은 식으로 마귀는 다른 많은 사람을 사로잡았지만 그러나 그들도 부름을 받을 때까지 그 생명이 보존되어야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회개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사망의 위경에서 구출함을 받고 그곳에서부터 그들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강 속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우물 속에 빠진 이들도 있었고 또 바다 속에 빠진 이들도 있었으며, 악한 사람의 손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으나, 과연 이 모든 사람은 십자가상의 강도와 똑같이 비난과 심판을 받았었다. 그러나 회개하여 돌아설 때까지 그들은 죽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었으며 곧 부름을 받았다.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의 죄가 몇 번이나 당신을 앓아눕게 하여 당신 자신과 다른 이들로 하여금 무덤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음을 생각하게 했던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살아라, 왜냐하면 아직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 부름받기 전에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주의하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엡 2:4,5) 그리스도 안에서 보전하시고 부르셨도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은 6가지의 원인들로부터 일어난다.
(1)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택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뜻을 돌이키시지 않는다(살전 5:9).
(2)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주셨다. 그리고 그의 부르심뿐만 아니라 그의 은사에도 그분은 후회하심이 없으시다(롬 11:29; 요 6:37).
(3)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롬 5:8).
(4) 하나님께서 그들이 회심하기 전에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엡 1:3,4)
(5) 회심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은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함을 입었으니, 이는 부르심을 입고 의롭다 하심을 입게 하실 뿐 아니라 영화롭게 하심을 입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모든 일이 기필코 그들에게 이루어져야 한다(롬 8:29,30).
(6) 이모든 것을 위하여 그분은 또한 창세전에 그들이 받을 은혜의 몫과 분량을 정하셨다. 그러므로 이 특권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은 구원을 받고 부르심을 입게 된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보전되고 부름받은 것이다.
 
셋째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믿음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 이르는 것이며 그를 붙들도록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1) 그들은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렇다. 그분에게까지 이끌려야 한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기”(요 6:44) 때문이다. 인간은 선택된 자들까지도 하늘로부터의 도움이 없다면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데 있어 적합지 못할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초대받은 일은 무효가 될 것이다.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그 선지자들로부터 멀리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줄로 이끄셨다.(호 11:2,4)
(2)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께 이르러야만 하는 것처럼 그들은 또한 그분을 붙들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것은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인하여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거듭하여 “그분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셨던 ……그” 강한 권능의 역사하심을 따라 우리가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골 2:12; 엡 1:18-20). 이제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듣는다. 왜냐하면 생명을 얻기 위하여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감히 그분께 나아가며 그리스도를 옷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분으로 하여금 죄인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주시는 그 생명은 그분의 살과 피의 공로이다. 이 살과 피를 믿음 안에서 먹고 마시는 자는 그 피와 살이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에 충분한 공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그렇다. 그것은 영원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그 흠향(歆饗)의 희생이 드려졌던 그날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씌워주시고, 그 의로 말미암아 인간은 의롭다 함을 얻게 되며, 그가 마땅히 받아야할 심판 곧 율법의 공의로운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요 5:26, 6:53-57; 엡 4:32, 5:2; 롬 4:23-25).
“믿음으로 구원받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시작되고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우리의 구원에 관계없는 것은 아니다. 믿음 자체에 어떤 공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 믿음에 의하여 그들은 그리스도를 품고 또 그분을 옷 입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그들은 틀림없이 구원받는다.
이와 같이 볼 때 이러한 믿음은 저주받을 사람과 구원받을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렇기에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믿는 자들은 자녀로 부름을 받고 상속자로 택함을 받게 되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받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약속된 것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갈 3:6-9, 26; 롬 4:13,14).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은 조심스럽게 칭의의 공로적인 원인과 도구적인 원인을 분별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이 행하셨고 겪으신 일들로 인해 우리의 칭의의 공로적인 원인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이 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고전 1:30; 롬 5:9,10). 왜냐하면 우리의 속죄의 대가가 바로 그의 생명과 피 이기 때문이다. “은이나 금같이 썩어질 것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값진 피로써니라.”(베드로는 율법으로서의 속전을 암시하면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말했듯이) 그리스도 예수를 칭의를 향한 당신의 믿음의 목표로 삼으라. 왜냐하면 그의 의로 말미암아 당신의 죄악은 율법의 공의의 시선으로부터 가리워질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행 16:31; 마 1:21).
 
넷째로, 구원을 받는 것은 끝까지 믿음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서 인내는 우연적인 일이 아니며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3-5).
그러나 인내는 온전한 영혼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그 상태가 결여된 사람은 온전한 구원의 상태에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에 갈 목적으로 배를 탄 사람이 만약 중도에서 익사하고 만다면 그는 스페인에 갈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내는 영혼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따라서 우리의 완전한 구원한 구원에 이것까지 포함되어 말해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사 45:17) 여기서 인내는 영혼의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데 절대적인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내가 말했던 것처럼 구원을 향한 인내도 역시 인간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선하신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힘에 달려있다.(빌 1:6)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이 부분은 위대한 것이며, 생각 있는 사람들이 쉽게 수긍할 수 있듯이 우리로 하여금 인내를 가능케 해주는 하나님의 권능을 요청한다.
(1) 악마와 지옥의 모든 권세와 책략과 악의와 분노가 우리와 맞서 있다. 이 사실을 이해한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는 일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악마는 귀신으로, 왕자로, 포효하는 사자로 불리어진다. 그가 죽음과 그 권세를 쥐고 있다고 말들을 한다. 육체에 속한 우리의 불쌍한 피조물이 표연 귀신, 왕자, 포효하는 사자, 죽음의 권세 등에 대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인내는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다. 지옥의 문은 하나님의 권능을 결코 이길 수 없다.
(2) 모든 세상은 구원받을 사람과 맞서 있다. 온 세상에 비하여 볼 때 하나의 약한 피조물이 얼마나 무기력한가? 특별히 공포, 두려움, 주권, 권력, 법률, 감옥, 교수형, 화형, 익사, 아사, 추방 그리고 수많은 죽음의 모습들을 생각해 보라(요일 5:4,5; 요 16:33).
(3) 덧붙여서 우리의 육체 속에 있는 모든 타락의 요소들도 우리와 맞서 있다. 그리고 그들의 특성과 존재 속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은 우리를 거스려서 욕망을 일으키고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의 포로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와 대항해서 싸움을 벌인다(갈 5:17; 벧전 2:11; 롬 7:23).
(4) 세상의 모든 미혹하는 것이 구원받을 사람들과 맞서 있다. 이러한 미혹하는 것은 모두 묘하게 짜여져 있고 그럴듯하게 조작되어 있으며 성경이나 이성으로 잘 채색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된 자들이 미혹함에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선택받은 자들이 아니라면,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넘어지지 않도록 당신의 능력으로 붙드시거나 혹은 그들이 넘어졌을 때에 당신의 은혜로 그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로 약속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미혹에 빠지고야 말 것이다(마 24:24; 엡 4:14; 롬 3:10).
(5) 구원받은 자들의 모든 타락이 그의 영혼의 구원에 맞서 있다. 그러나 일단 타락한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신 힘의 도움이 없이는 회복될 수 없다.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호 13:9, 14:1; 시 37:23). 그리스도인이여, 만약 당신들이 깨어 있다면 지옥의 모든 권세에 침노 당했어도 정복자가 된 사람을 보고 놀라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자신은 벌레만도 못한 초라한 피조물이(욥 4:19) 모든 악마, 세상, 그의 모든 정욕과 타락에 대적하여 끝내는 승리하는 것을 보고서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혹은 만약 그가 타락하여 악마와 죄악이 그를 뒤덮어버릴 때에라도 일어나 다시 그의 발로 딛고 서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고 종국에는 복음에 대한 믿음과 그 복음의 경건 속에서 인내해 나가는 것을 볼 때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은 놀라게 된다. 유혹을 아는 사람도 놀란다. 또한 타락과 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도 역시 놀라게 된다. 진실로 인내는 놀라운 것인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조종되어진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이기 때문이다(유 24절).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거기까지 갈 수 있었는가?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해준다. “마치 독수리가 ……그것을 업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 하셨고 ……”(신 32:11,12). 계속하여 그가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다”(사 63:9). 그리고 다윗도 역시 그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그를 따를 것이니, 그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시편 23:6).
 
다섯째로, 구원받는 일은 이 모든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 세상이 그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때 하늘에 이르는 안전 통행권을 소유한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구원을 충만하게 누릴 곳이기 때문이다. 이 하늘이 우리 믿음의 목적지라고 말을 하는데 그것은 베드로가 말하는 것처럼 너의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희망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벧전 1:9). 그리고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이다 (히 10:39). 때문에 하늘은 (내가 말했듯이) 구원받은 자가 이 땅에서는 성취할 수 없는 완전한 즐거움으로 그들의 구원을 즐기는 곳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영광을 소망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결국, 즉 우리 영혼의 구원을 즐기게 된다. 그곳에는 최초의 총회이자 교회인 하늘의 예루살렘 시온 산이 있다. 수없는 천사들이 거기 있으며 온전하게 된 의로운 사람의 영혼들이 있다. 만인의 심판자 하나님께서 계시고 새 언약의 화해자 예수께서 계신다. 그곳에서 우리의 영혼은 쉬임 없이, 가능한 한 최대의 하늘 영광을 즐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실질적인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들리워질 불쌍한 피조물에게 이생은 순간의 생애일 뿐이다. 그러나 높음과 깊음이 있어 가로막고 있으니 어떻게 이곳에 갈수 있을까? (롬 8:38,39).
어떤 불쌍한 그리스도인이 지금 병상에 누워서 수많은 공포와 그 병의 종말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여 있음을 상상해 보라! 병상의 공포! 그것은 무시무시하다. 40년간의 죄에 대한 회상에 의하여 생겨지는 공포들, 마귀에 대한 무서운 연상, 죽음과 무덤의 모습 그리고 지옥 그 자체의 모습 등이 빚어낸 두려움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떠나심과 침묵 그리고 마귀 자신의 현현(顯現)등에 의하여 생겨나는 두려움! 이러한 두려움 중에 몇 가지가 다윗으로 하여금 이렇게 외치게 했다.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도다.”(시 1163)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이런 것들이 바로 경건한 사람이 그들의 죽음에서 가지는 그런 것들이며,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재앙이라고 말한다. 저희는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시 73:5). 그러나 이제 이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주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죄도 두려움도 마귀도 막지 못할 것이며 무덤도 지옥도 좌절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되어져야만 하는가? 그야 물론 당신들이 하늘에 이르는 안전 통행권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 호위는 천사들이 맡는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14)
그러므로 천사들은 구원받은 자들을 저버릴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위임에 따라 구원받은 자들을 위한 사역을 행하기 위하여 그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고 책임져서 아브라함의 품까지 안전하게 인도해야 한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우리의 비천함이나 믿음의 유약함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앓고 있는 질병의 지겨움이 그 고귀한 영을 약하게 하여 이러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것이 진실임을 알았다. 그 부유한 탐식가에게 그토록 경멸을 받아 그의 집 문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허락받지 못했던 거지 나사로, 고통과 역겨운 부패로 가득했던 거지 나사로, 그러나 보라. 그가 죽었을 때는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서 그를 데려갔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눅 16:22).
사실 병상의 유혹은 이따금씩 가장 강열하다. 왜냐하면 그때가 바로 마귀가 최후의 게임을 벌일 때이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우리를 침노하지 않는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입성하는 것이 좀 더 편안할수록 구원의 종소리는 더욱 세차게 울리도록 허락하신다. 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안내자가 되셔서 그의 천사들로 우리를 인도하여 안전하게 영광에 이르게 하시니,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구원 받는다는 것은 진실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모든 환난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다른 환난에서 구원을 얻게 될 뿐 아니라 병상의 고통으로부터도(시 25:22, 34:6, 48:14) 구원을 얻을 것이다.
 
여섯째로, 구원얻는 것, 완전하게 구원을 받는 것은 위에서 말한 모든 것 이상을 요구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이 하늘에 붙잡힌바 되었을 때에도 완전히 구원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들의 영혼은 완전한 구원을 얻었고 하늘의 것들을 현재로서 소유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인간은 이것 중 어느 한 부분만이 하늘에 속해 있는 한 온전한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몸은 영혼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의 값이다. 그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몸과 살과 뼈의 각 지체는 곧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기까지는 온전한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전 6:13,15,19; 엡 5:30).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그는 현재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게 하던 모든 것들로부터 몸을 구원하실 것이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구원받다”라는 이 말 속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선하심이 어찌 그리 크신지! 우리는 주 예수께서 오셔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때까지 “구원받다”라는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선하심은 모두 알지는 못할 것이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요일 3:2). 장래에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구원받다”라는 말씀의 깊은 속까지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보증인을 모시고 있으니 곧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것이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엡 1:14).
그 얻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몸이다. 그것은 피의 값이기 때문에 값 주고 사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값 주고 사신 바 된 것을 구속하시는 것은 그 몸을 무덤으로부터 일으키시는 것이다. 그 일으키심은 우리의 몸의 구속이라 부른다(빌 3:21). 그리고 이 비천한 몸이 그리스도의 존귀한 몸을 입을 때 그리하여 이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속한 것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면에서 구원받게 될 것이다.
이 몸이 구원받아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
(1) 우리의 몸 안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어 그 아래서 줄곧 진정으로 탄식하고 있는 그런 죄 된 음탕한 마음과 추함이 있다(고후 5:1-3).
(2) 우리를 늙게 하고 아프게 하고, 고통과 쓰라림을 당하게 하며 질병을 앓게 하고 급기야는 죽음을 몰고 오는 운명이 있다.
(3) 그리고 무덤과 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파괴해야 할 최후의 것이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4).
이 일이 일어날 그때 우리는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때 구원은 우리의 영광 안에서 그것의 모든 부분이 만나게 될 것이고, 비로소 우리는 모든 점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에 의하여 구원받으며, 인내에 의하여 구원되고, 영혼이 구원되며, 하늘나라 안에서 육체와 영혼이 함께 완전하고 영원하며 영광스럽게 구원을 받는다.
내가 첫째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을 결말짓기 전에, 미래에 우리가 구원의 복된 상태를 누릴 때 입게 될 하늘나라에서의 우리의 몸과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잠깐 설명해야 하겠다.
 
첫째, 영혼에 대하여 : 그때 영혼은 허락되는 한 최대의 행복과 영광으로 충만하게 채워질 것이다.
(1) 그때 이해하는 것은 지식 안에서 완숙해질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지만.” 우리는 하나님, 그리스도, 천국 그리고 영광에 대하여 알고 있기는 하지만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10). 그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그에 대한 훌륭한 생각이 종종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를 흡족하게 하여,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을 자아내는 축복받은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완전하고도 영원한 비전을 갖게 될 것이다.
(2) 그때 우리의 의지와 사랑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 속에서 계속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사랑은 굴곡이 심하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사랑이 이 땅에서는 누릴 수 없는 그런 온전함으로 완전해질 것이다.
(3) 그곳에서 우리의 양심은 인간 혹은 천사의 혀나 펜으로 형용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얻을 것이다.
(4) 그곳에서 우리의 기억은 이 땅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포용할 만큼 커질 것이다. 그래서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사단의 모든 악의,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인간의 모든 분노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모든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는가 등에 대하여 기억해낼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영원히 기뻐하게 될 것이다.
 
둘째, 우리의 몸에 대하여 : 그것은 능력과 썩지 아니할 것으로 곧 신령한 몸으로 일으킴을 받을 것이며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15:44).
그 영광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1) 그것은 궁창의 빛남과 영원한 별의 빛남에 비교된다(단 12:3; 고전 15:41,42).
(2) 그것은 해의 빛남에 비교된다.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43)
(3) 그들의 상태는 천사들의 영광과 동등한 것이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눅 20:35, 36).
(4) 우리의 이 비천한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처럼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빌 3:20,21; 요일 3:2,3).
(5) 그리고 이제 몸과 영혼이 이렇게 결합할 때 그 둘이 취할 영광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것들은 이제 조금도 분리됨이 없이 환성과 감사로써 그리고 그들의 머리에 씌워진 영원한 기쁨의 면류관으로써 주님께 예배드릴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장차 하늘에서 나타나게 될 몸과 영혼의 조화와 하나됨이 나타날 수 없다. 이 땅에서 종종 몸은 영혼에 거역하여 죄를 범하고, 영혼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하여 두려워하며 우려함으로써 몸을 초조하게 하고 당황케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의 몸과 영혼은 서로 반대의 방향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하늘에서 그들은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완전한 결합을 이룬다. 그곳에서는 몸의 영광이 영혼의 영광에 잘 어울리고 이 둘은 모두 하늘나라의 상황에 어울려서 그 광경은 말과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다.
 
셋째, 이제 구원된 몸과 영혼이 거할 그 장소에 대하여 말해 보자.
(1) 그곳은 도성이다 (히 11:16; 엡 2:19).
(2) 하늘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 10:34).
(3) 하나님의 집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요 14:1-3).
(4) 나라라고 불리 운다 (눅 12:32).
(5) 영광이라고 불리 운다 (골 3:3; 히 2:10).
(6) 낙원이라고 불리 운다 (계 2:7).
(7) 영원한 처소라고 불리 운다 (눅 16:9).
 
넷째, 그들과 같이 할 자들에 대하여 말해 보자.
(1) 만인의 심판자이신 영광스런 하나님 앞에 서서 살아갈 것이다 (히 12:23).
(2) 그들은 어린양 즉 주 예수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3) 천만 천사가 그들과 같이 할 것이다 (히 12:22).
(4) 그들은 하늘나라 안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든 예언자와 같이 할 것이다(눅 3:28).

다섯째, 하늘나라의 의복에 대하여 말해 보자.
(1) 그것은 구원이다. 그들은 구원의 옷을 입을 것이다(시 132:16, 149:4; 사 61:10).
(2) 이 옷은 하늘에서의 그들의 순결하고 결백한 상태를 의미하는 흰 옷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사 57:2; 계 3:4, 19:8).
(3) 그것은 영광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 3:4).
(4) 그들은 영원한 기쁨과 영광인 의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사 35:10; 딤후 4:8; 벧전 5:4).
 
여섯째, 그들의 이러한 상태가 지속될 기간에 대하여 말해 보자.
(1) 그것은 세세토록 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계 22:4,5)
(2) 그것은 영원하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요 6:40,47).
(3) 그것은 영생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요 10:27,28).
(4) 그것은 끝이 없는 세상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사 45:17)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구원받는 것을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당신은 간절히 원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마음은 구원받는 것에 대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있지 않은가? 자, 그렇다면 오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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