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18~21절 / 마지막 분부와 은혜
“내가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할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18-21)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듣고 될 일들을 본 장본인으로서 계시록의 집필을 마무리 짓는 내용이다. 이 단원에서 ‘내가’라는 단어가 두 번 있다. 첫 번째 ‘내가(ἐϒὼ)’로 되었고, 두 번째 ‘내가’는 없고 다만 이것들을 증거 하신이가 가라사대 ‘진실로 속히 가리라(Ναί,ἔρχομαι ταχύ)’로 되었는데 그분은 예언의 말씀을 주신 예수님이다. 요한은 집필을 끝내면서 전능자시요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에서 만물을 주관하시는 예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에 가감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사람들은 이 단원이 누구의 말이냐를 묻기도 한다. 이것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로 볼 때, ‘20절은 예수님의 말씀이고, 18-19절과 21절은 요한의 말로 보인다.’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처음부터 요한 사도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예언을 받아서 집필하였기 때문에 제목을 요한계시록으로 붙였으므로 전체를 집필한 사람은 요한이다. 그러나 말씀을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따라서 이 단원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계시를 요한이 끝맺음을 하였을 뿐이므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사람들이 18-19절은 예수님의 말이냐 요한의 말이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려할까? 그만한 심리적인 이유가 있으리라 본다. 그것은 ‘더하거나 제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결과’에 따르는 부담감 때문이다. 예언의 말씀에 더하는 경우도 문제이지만, 제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심리적인 작용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말이냐 요한의 말이냐 하는 것은, 요한의 말이라면 심판이 없을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이면 심판이라는 심리적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가감하지 말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18a)
요한은 예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는 중에서 먼저 내가(ἔϒὼ)가 알리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예언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드리는가를 암시하는 말이다. 가감하지 말라는 뜻은 이 책에 기록된 내용에서 어느 한 자나 한 획도 중요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이 모시는 높으신 분이 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때 가감할 수 있을까? 구두로 전달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문서에 기록된 지시사항을 주면서 전달하라 할 때에, 전달자가 내용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그 문서의 내용을 가감할 수 없는 이치와 같으므로 예수님께서 성문화 시켜놓은 이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 가감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말씀을 듣는 각인;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대상을 누구인가부터 설명하였다. 그 대상은 앞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1:3)이라 하셨고,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22:15)라 하셨으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듣는 대상이 된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증거’ 한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듣는 대상자들은 이방종교가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이유는 불교나 유교 힌두교 등, 이방종교 지도자들은 요한계시록을 읽지도 아니할뿐더러 가르치지도 아니한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은 예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의 목사들이요, 신자들을 인도 하는 선생으로부터 ‘듣는 각인은’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로부터 모든 신자들에게까지 포함됨으로 교회가 들어야 할 대상이다.
증거 하노니; 요한은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증거 한다고 하였는데 ‘말투리온(μαρτυρών)’은 ‘증거’ ‘증언’ ‘선언’ ‘선포’등이므로 목격자의 입장에서는 증거가 된다. 다른 면은 예수님께서 요한의 손을 사용하여 이 예언의 말씀을 일곱 교회에 전하라 할 때 ‘쓰라(ϒράψον)’하신 이의 입장에서는 ‘선포’에 더 가깝다. 증거 곧 선포의 내용을 가감하지 말라는 경고시다.
더하면, 더하리라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18b)
더하는(ἐπιθῇ-에피데)사람; 가감문제에서 먼저는 ‘더하는’ 내용이다. 더하지 말라는 경고는 더하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고통으로 더하기 때문이다. 그 고통에는 육신의 고통과 영의 고통으로 나누이게 된다. 먼저는 육신이 대 환난에 남겨져서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다음은 예수를 믿었던 자이기에 음부로 보내지 아니하고 ‘연단장(βήμα)’인 바깥 어두운 데로 보내져서 이를 갊이 있는 고통을 당하게 되므로 더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더하는 범위를 어떻게 규정짓느냐? 해석상에서 표현을 잘못하거나 또는 명칭이나 지명 등에서 표현상의 오류는 고의가 아니라 실수이므로 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더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를 말 하는가? 더한다는 ‘에피데세이(ἐπιθήσει)’는 ‘습격이나 도전하는 자’라는 뜻이므로 예언의 말씀에 고의적으로 도전한다는 뜻이다. 예로서 예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은,
1.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17:10-11)하셨는데도 666표는 상징이므로 받아도 좋다는 말은 예언의 말씀에 대한 도전이므로 더하는 것이다.
2. 또 다른 유형은 예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요한에게 주실 때, 인간으로서 설명하지 못할 말씀을 주신일이 없는데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상징이라고 표현하면서 ‘계시록의 대부분이 상징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예언의 말씀에 대항하는 공격이다.
3.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묘사는 고도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도 예언에 기록된 실상을 허상으로 바꾸기 때문에 전능자의 은총에 고의적으로 도전하는 행위이므로 ‘더하는(ἐπιθῇ)’것이다.
제하면, 제하리라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19)
제하는(ἀφέλῃ-아페레)사람; 가감문제에서 두 번째는 ‘제하는’ 내용이다. 제하지 말라는 경고는 제하는 사람에게는 육신적으로 대 환난에 남겨져서 육신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를 믿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영은 바깥 어두운 데로 표현되는 연단장(βήμα)에 보내져서 이를 가는 영적인 고통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새 예루실렘 성에 들어가는 자격이 박탈되기 때문에 제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 제하는 범위를 어떻게 규정짓느냐? 해석상에서 표현을 잘못하거나 또는 명칭이나 지명 등에서 표현의 오류는 고의가 아니므로 제 하는 범주에 들어가지 아니한다. 그러면 제하는 범주 안에 들어가는 경우는 어떤 것인가? ‘아피헤미(ἀφίημι)’는 포기하다, 버리다, 등이고 ‘아페레(ἀφέλῃ)’는 반역하고, 멀리하다, 끊어버리다, 등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제한다는 뜻은 예언의 말씀에 반역하며, 기록된 예언이 전달되지 못하게 끊어놓으려고 읽지 않고, 듣지 못하게 가르치지 아니했고, 지키지 못했음은 듣지 못한 탓이다. 이러한 경우는 이유야 어떠하던 현대교회에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제하는 유형은;
1. 계시록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이고,
2. 어떤 부문은 수용하고 어떤 부문은 수용하지 않는 경위고,
3. 가장 많은 경우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보내어 지시하셨는데도 종들은 읽지 않고 전하지 않아서 성도들로 하여금 듣지 못하게 한 행위가 제함이다.
그런데도 읽지 않았고 가르치지 않은 것은 곧 예언서 자체를 폐기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완전히 제하여버린’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언의 말씀을 포기한 행위다. 따라서 예언의 경고를 끊어버리고 전달되지 못하게 반역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듣지 못하여 지키지 못한 것도 예언의 경고가 전달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성도들로 하여금 계시록을 멀리하게 만들어 놓은 행위이므로 ‘제하는(ἀφέλη)’것이다.
생명나무에 못간다;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한다는 경고는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다. 영생을 얻게 되는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없다면 더하고 제하는 무리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결과를 깨닫지 못하는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계시는 이가 이 예언의 말씀을 요한을 통하여 모든 지도자와 신자들에게 주셨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다’ 경고 하였다.
그런데 전능자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보내어 지시(σημαἱνω)하셨다.” 지시는 곧 명령(תוֹמ-메치)이다. 예수님께서 주의 종들에게 읽으라고 지시한 ‘세마이누(σημαἱνω)’는 아담에게 먹지 말라는 ‘아마라(תוֹאָ)’와 함께 동사(動詞)로서 명령으로 쓰인다. 그럼에도 명령에 불순종하고 읽지도 아니하고 가르치지도 아니한 것은 이 예언의 말씀을 주신이에게 반항이라는 도전이 곧 더한다(ἐπιθῇ)는 사실을 깨달아야 된다.
따라서 읽지 않았고 가르치지 않으므로 인하여 듣지 못하고 지키지 모한 탓으로 대환난에 남겨진다면, 이유야 어떻던 결과적으로는 더하고 제하여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심으로’ 인하여 대환난의 고통이 그들에게 더하여진다.
앞에서 지적되는 부류는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에 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생명나무에 나아간다는 의미는 불완전한 인간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은 되었을지라도 각인의 미흡한 점을 하늘나라 생명강가에 있는 생명나무로 가서 그 실과를 먹어야 영생하게 된다. 그리고 나뭇잎을 먹어야 완전한 거룩함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생명나무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경고는 큰 충격이다. 예수를 믿었었고, 목사 장로 집사 권사 교사 등, 여러 직임으로 봉사하였다 할지라도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더[공격] 하거나 제[반역] 하는 자라면 당연히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회개될 때까지 연단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에 참여하지 못한다; 거룩한 성은 셋째하늘 나라에 있는 새예루살렘 도성을 말한다. 더하고 제함에 해당되는 부류는 새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가는 축복도 함께 박탈당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 곧 모든 성도인 전체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로 이 성에 들어간다고 고집한다. 그런데 요한은 “누구든지”에 해당되면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하고 또한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였다. 그럼에도 아니라고 고집하겠는가? 계속 고집한다면 그도 더하거나 제하는 무리에 속하지 아니하리라고 누구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셋째하늘나라 새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축복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가감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앞의 말씀을 가감하는 부류에 속한다면 연단장소는 피하지 못한다 따라서 1,2층 하늘나라에 까지는 들어갈 수 없고 3층천 시온의 새예루살렘성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예수 믿는 신자들이 다 새예루살렘에 들어가고, 모두가 어린양의 신부가 된다고 가르쳤고 그렇게 배운 사람들은 가르침대로 살다가 대환난에 남겨진다면, 결과적으로는 더하고 제하여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함으로” 인하여 대환난에 남겨진 것이다.
따라서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할 부류는 바깥 어두운 곳(βήμα)에 가게 될 것이고,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류는 교정(παιδεύω-파이데우)을 받기 위해 1층천 낙원(παράδεισο?)으로 가게 되는 것은 대환난이라는 징계를 통하여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계시록을 읽지 아니하는 선생이나, 신자들에게 계시록을 가르치지 아니하는 선생들은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과 신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해야 된다.
속히 오리라, 아멘
“이것들을 증거 하신이가 가라사대.”(20a)
이것들을 증거 하신이(μαρτυρών-말투룬); 예수님에 대하여 이것들을 증거 하신이라 하였다. 이것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계시록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은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하였으므로 처음부터 전체를 예수님께서 전하시려는 내용이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것들은 첫째는 이 예언의 말씀에 더하는 행위와 다음은 제하는 행위 때문에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축복과 새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축복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가 이것들이 된다.
증거 하신이가 가라사대;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렇다면 18절에서 ‘내가’ 하는 이는 예수님이어야 된다. 그분이 이것들을 증거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한은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문제와 성에 들어가는 자격에 관하여 결정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18-19절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요한이 말했다고 하는데, 문맥상으로나 권한 등으로 보아도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내가(ἐϒὼ)는 예수님이시요 그분이 증거 하신이시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b)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분부하시는 말씀에서 우리 성경에는 ‘내가 속히 오리라’로 표기되었으나 원전에서는 ‘내가’는 없고 ‘속히 가리라’로 표기되어 있다. ‘타추(ταχύ)’는 ‘빨리’ ‘갑자기’ ‘당장’ ‘곧’ ‘속히 ’이고, ‘엘초마이(ἔρχομαι)’는 ‘오다’ ‘가다’ ‘이르다’ ‘나타나다’ 등이다. 그러므로 오실 예수님께서 ‘내가(ἔϒὼ)’ 하시면서 미래형 명령으로 말씀하셨기에 ‘내가 속히 오리라’ 보다는 ‘내가 속히 가리라’로 발음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에 대하여 ‘진실(Ναί-나이)’로 확고한 약속을 주신다. 그러므로 속히 오리라는 뜻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사도신경에서 확인시킨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어소 오시옵소서(ἔρχου-엘초우)는 ‘가리라(ἔρχομαι-엘초마이)’의 미래에 지상에서 성도들의 소원이므로 현재형으로 바꾸어서 ‘엘초우(ἔρχου)’로 표기되었다. 그러므로 앞에서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속히 가리라’ 되어져야 하겠으나, 오실 주님을 갈망하는 성도의 간구는 ‘어서 오시옵소서’이다. 한 가지 알아둘 점은 우리말로 ‘어서 오시옵소서’를 ‘마라나타(μαράαθα)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헬라어가 아니라 아람 발음으로 ‘오시옵소서’이다. 따라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라면 이러한 심령으로 날마다의 삶에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ού)’ 하는 마음의 삶이 되어야 될 것이다.
주 예수의 은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21)
주 예수의 은혜(Ἡχάρι? τού κυρίου); 요한은 예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오실 주님의 은혜가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입혀지기를 간구하는 심정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주 예수의 은혜’를 바라는 심령이 되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구하는 요한의 입장은 자신이 한 두 차례도 아니고 수십 차례로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직접 보고 들은 내용들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자(πάντων-판토운)에게, 아멘; 요한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대상에 대하여 특정인을 정하지 아니하고 ‘모든 자’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자들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기독교 전체가 된다. 바울 사도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는 믿음으로 삶을 살아야 된다. 그러한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은혜(Ἠχάρι? τού κύρίο)’가 있게 된다. 따라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예수를 사랑하는 자라면 당연히 오실 주님을 향하여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ἔρχου κύριε Ἰησώύ )’로 기다리는 심령이 되어야한다.
끝맺음; 대부분의 주의 종들이 ‘믿기만 하면 다 구원되고, 다 어린양의 신부가 되고, 다 새예루살렘 성에 들어간다.’고 하였었다. 그리고 대환난에 남겨진 무리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교인들과 이방종교인들이라고 해석해 왔었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는 여기에서 정답을 가리게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1. 예수님께서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사자를 보냈다 하셨다(δείξαι)”(1:1) 그리고 유대교와 이방인들의 지도자들은 예수의 종들이 아니다.
2. 요한에게, “써서 일곱 교회(ὲπτὰ ἐκκλησίαι?)에 보내라”(1:11) 하셨지, 이방인과 유대교에도 보내라 하시지 않으셨다.
3.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ἐπτὰ ἐκκλησίαι?)에 편지하노니”(1:4)하였지, 이방인들과 유대교에 편지한다는 기록은 없었다.
4. 예수님은, “나 예수는 교회들(ἐκκλησίαι?)을 위하여(ἐπί)”(22:16) 증거한다 하셨지, 유대교나 이방종교를 위한다는 말씀은 한 번도 없으셨다.
5. 성령께서도,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ἐκκλησίαι?)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하셨지, 유대교나 이방인들은 들으라고 말씀하신적은 한 번도 없으셨다.(2:7,11,17,29, 3:6,13,22)
그렇다면 지금까지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은 다 들림 받고 대환난에 남겨지지 않는다고 가르친 사실이 잘못이었던 것이 들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환난에 남겨진 무리들 모두가 이방종교를 신봉하는 자들과 유대교인들이란 해석은 완전히 틀린 해석으로 들어났다. 그리고 더하거나 제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하고 또한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으므로 대환난에 남겨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거룩한 성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하는 무리들도 있게 된다.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다 구원되고, 다 어린양의 신부가 되고, 모두 새예루살렘 성에 들어간다고 가르친 것은 잘못 해석하고 잘못 가르친 것이다.
1. 예수님께서 18-19절에서 ‘이것들 외에 더하거나 제하지 말라’하시고 더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게 하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대환난이라는 재앙에 남겨지게 된 것은 이유 야 어떠하던 결과적으로는 ‘대환난이라는 재앙들을 그들에게 더하신’ 범주 안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환난에 남겨지게 된 원인이다.
2. 이 예언의 말씀을 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한다.’ 하시고, 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대난에 남겨져서 지구정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후에 연단장소로 가는 것은 ‘생명나무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신’ 범주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3. 예언의 말씀을 더함은 계시록에 도전하는 경우이고(※더하면 더하고 참조), 제함은 반역하는 경우인데(※제하면 제하고 참조), 이는 계시록을 읽지않고 전하지 않아서 듣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계시록 자체를 완전히 폐기시킨 죄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경고대로 더하고 제하는 죄로 인하여 계시록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였기 때문에 환난에 남겨지는 것이다.
4. 구원받고 1층천 낙원(παράδεισοS)의 교육장에 가서 교정(παιδεύω)을 받은 후에 낙원이나 2층 하늘나라에서 백성으로 끝나기 때문에 3층천 새예루살렘 도성에는 들어가는 자격이 박탈되는 결과다.
5. 이렇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속히 될 일을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천사를 보내어 지시” (1:1) 하셨는데 그리스도의 종인 목자들이 계시록을 읽지 않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완전히 폐기시킨 불순종이 된다. 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1:3)는 반대의 결과를 자최하게 된것이다.
그런데 가르치지 아니했고, 듣지 못해서 지키지 못한 이유야 어찌되었던 이 예언의 말씀을 더하고 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들에게 내리셨기 때문에 환난에 남겨진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진정한 사람이라면 날마다 삶에서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하여 요한을 통하여 주신 계시록을 열심히 읽고 듣고 지켜서 생명나무에 나아가고 거룩한 성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려야 된다.
― 주 예 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강해 끝―
2009년 7월 25일부터 2012년 5월 24일까지 3년이라는 긴 시간으로 요한계시록 22장까지 끝맺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3년동안 찾아주시고 읽어주시고 격려로 힘을 주신 모든 분들에 감사를 드리면서 이제 좀 쉬기 위해 펜를 놓겠습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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