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요한 계시록!!

[스크랩] 요한계시록 강해-1 / 예수는 누구이신가?

하나님아들 2014. 4. 18. 16:02

예수는 누구이신가? / 요한계시록 강해-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다.” (1:1~3)


오랫동안에,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설교하는 것을 보았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정황이나, 권면문은 빼 버리고 결과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매주 금요일 밤은 요한계시록 강해를 하게 됩니다. 성경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의 내성이 셋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사건의 정황설명, 옳바른 행위를 요구하는 권면, 결과에서 상과 벌이라는 공의로 나눕니다. 설교는 이 셋에서 어느 한 부분이 빠지면 안 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설교는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책망바르게 함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니라.(후3:16~17)


설교는 사람의 취향이나 인기몰이가 아니라 교훈이라고 하였습니다. 설교는 잘못에 대한 책망이 들어가 합니다. 설교는 생각과 행위가 바르게 하는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다. 설교는 의로워 지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설교는 온전한 사람이 되라는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다. 설교는 선한 일을 행하라는 내용이 들어가야 합니다. 이 여섯은 없고 결과만을 전하는 메시지는 영혼을 살리지 못합니다. 오늘부터 전달되는 요한계시록은 아무데서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영원성에 관한 예수님의 본질이 첫 번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속사와 다시 오실 심판주의 강림에 관한 내용입니다. 때로는 계시록의 첫 부분을 소홀하게 다룰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함은 첫 부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기대하기로는 세상에 대환난이 언제 있으며 주님의 공중강림은 언제 있는가? 하는데 초점을 두고서 여기에 관해서는 관심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첫 부분인 예수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그냥 넘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첫 부분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사람이 집을 지을 때 기초가 튼튼해야 하듯이 계시록을 이해하려 할 때 계시의 말씀을 주신분에 관하여 알아야 됨으로 첫 부분이 중요합니다. 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1. 예수의 본질에 대하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


예수님의 본질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형태도, 소리도, 시작도, 마침도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온갖 신비가 무한히 어울려지고, 절대적이고 무한한 빛줄기가 흐르는 곳, 때문에 오묘함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출3:14에서 알려줍니다.


오묘함이란 온갖 이해를 초월한 신비이며, 삼라만상의 근원으로 그 이상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자체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진리를 내포하는 가려짐이 없는 빛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무한한 사랑은 스스로 흘러넘쳐서 자신을 주며 또 주지 않을 수 없는 구원에 생기롭고 활발하게 움직임 자체입니다. 무한의 지혜는 한전ㅁ의 가려짐도 없고, 영원히 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서 하나님은 보십니다. 형태도, 소리도, 시작도, 마침도, 없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야훼의 지혜가 지어낸 야훼자신을 영원한 닮고 진실을 닮은 아들을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야훼의 마음을 한없이 기쁘게 해주는 외아들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때 야훼 안에서 무한한 사랑이 흘러넘쳐서 아들을 포근히 감쌌습니다. 무한한 불꽃, 수천수만의 불꽃이 일어났습니다. 그다음 순간 일어났던 불꽃이 다시 하나로 뭉쳐진 새롭고 무한한 숨길을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요1:4)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시작되는 영원한 숨길을 생명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두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을 설교할 때,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의 본질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이사야 11장2절에서 예수님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총명의 신이요, 묘략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임하시리니”


예수님께는 아버지의 성품, 지혜로움, 총명함, 묘략이 있고 재능이 있으며, 그의 지식은 야훼를 경외하는 성품, 일곱 가지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계시를 주시던 그때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영광의 보좌에 다시 앉으시고,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이 세상이 되어져가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을 알려주기 위해 “이제도 계신다.”라고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태복음 24장 36절과 마가복음 13장 32절, 두 곳의 말씀을 여기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장차 심판하러 오시는 심판주가 당신의 강림날을 모르겠습니까? 모른 다면 큰 문제가 일어납니다. 물론 성경에는 자신의 때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때는 땅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므로 위의 두 곳은 바꾸어 해석하여야 될 것이며, 아무도 “모르나니(οἱδεα)”라고 말씀하실 때 원어에서 이해가 되어야 된다.


오이덴(οἱδεν)은 말씀하실 때 희구법(optative mood) 현재완료 단수 3인칭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희구법은 강한우연성 또는 가능성을 나타내며, 확정적인 실현성을 조금도 예상하지 아니하고 다만 상상할 뿐입니다. 가정법보다 더 가상적인 것을 나타내며, 현재와 미래에 상반성을 나타낼 때 쓰이는 문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보좌에 앉아계시는 지금은 당신의 강림하실 때를 알고 계신다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전에도 계시고,”(1:4)


창조이전부터 예수님이 계셨다는 말씀이라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요1:1)


“장차 오실 이와,”(1:4)


장차 오심은 강림을 시점으로 하여서 이 땅에 재림하시고, 천년왕국과 심판이 끝날지라도 예수님은 영원까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셋을 합해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인 알파와 오메가라고 예수님의 본질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8절에서 ‘전능’이란 말씀 속에 그 뜻이 담겨있습니다. 전능은 한 아들이 낳는데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하신 말씀이 예수님은 누구라는 분임을 알려줍니다.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ל?-)이시고, 영존 하시는 아버지(אָב-아브)라고 알려주십니다.(사9:6)


2. 예언의 경로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1:1)


1절의 말씀은 예언이 어디로부터 왔다는 경로와 계시의 내용이 무엇이며, 예언이 말해주는 축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일을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과, 계획을 성취하시는 성자 하나님과, 모든 일을 교회들에게 알리시는 성령하나님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알 때에 자신의 영원문제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자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자신의 영원문제를 준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에다 쌓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에 관하여 바른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 사도에게 이 말씀을 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예언이 전달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아버지 품속에 계셨던 성자에게 성령을 통하여 그의 뜻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버지 품속에 계셨던 성자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1:1)


요한계시록을 상고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첫째는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계시록에 와서 끝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끝내려면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둘째는 유대인의 12지파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문자적이냐 아니냐가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옳음과 그름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계시록을 주신 목적과 계시를 받아야 될 대상을 아는 것이 순서입니다. 1장에서 예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하여 계시록을 주신 ⓐ목적과 ⓑ받아야 될 대상을 알리셨습니다.


3. 예언을 주신 목적


“종들(δούλοιs)에게 보이시려고,”(1:1)


종들은 그리스도의 자녀인 성도들을 가르치며 인도하라는 목자들입니다. 따라서 목자들은 보라고 주신 계시록을 읽어야 합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복음을 배척하므로 그들은 예수의 종이 아닙니다.


“지시(σημαίνω)하신 것이라.”(1:1)


지시라는 세마이노(σημαίνω)는 아담에게 먹지 말라는(창2:16) 챠와(ה??)와 함께 명령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창2:16). 아담이 먹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치 않음으로서 죄가 되었다면 읽으라는 계시록을 읽지 않는 목사도 아담과 동일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를 기독교지도자들에게 읽으라고 지시하셨지 유대교 랍비나 이방종교 지도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을 해석할 때 유대인 문제를 거론하면 안 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자들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22:7)


지키라는 뜻은 기록된 말씀을 읽는 목자들은 성도들을 가르쳐서 듣게 하고, 성도들은 대로 준행하게 함이 ‘지킴’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도 요한을 통하여 계시록을 주신 목적과 받아야 될 대상을 알리셨습니다. 때로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대 환난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해당되고, 기독교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관한 말을 하게 되면 잘못된 신앙인이거나, 또는 종말론자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과연 성경은 그할게 비방하는 사상을 허용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명령으로 보라고 지시하셨습니까? 따라서 읽지 않으면 역시 불순종의 죄가 됩니다. 이것이 대환난에 남겨지는 첫 번째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1) 읽는 자에게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1:3)

      빌립집사를 만났던 에디오피아 내시를 예로 볼 수 있다.(행8:30~)

(2) 듣는 자에게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1:3)

      가이사라 고넬료 가정을 예로 볼 수 있다.(행10:30~)

(3) 행하는 자에게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1:3)

      초대교회 성도들의 행함에서 예로 볼 수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기 때문에 행위가

      나타나야 된다.(행2:44~)

그리하지 아니하면 예언의 말씀을 제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22:19)


제한다는 아파레이’는 ‘반역하고, 멀리하고, 끊어버린다’입니다. 계시록을 읽지 않고 가르치지 않은 것은 지시하신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다. 따라서 목자들이 계시록을 읽지 아니하고 가르치지 아니하는 것은 예언이 전달되지 못하게 끊어놓는 행위가 제함이다. ‘아페레이는 ‘빼앗아 가고, 없애 버리고, 가져가 버린다’는 뜻입니다. 목사는 읽지 않았고 가르치지 않아서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권리를 빼앗김, 성도들은 듣지 못해서 행하지 않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권리가 ‘박탈’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환난에 남겨지는 두 번째 원인입니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케 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2)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더라.”(겔47:12b)


약재료를 데라페이아와 치료라는 미라클은 온전치 못했던 부분을 회복시켜서 낙원이상의 하늘나라에 들어갈 권리를 얻게 함을 말합니다.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하면 허물의 씻음을 받아야 될 은총이 박탈되고, 성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디로 가게 됩니까?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3)


불법이라는 ‘아노미아’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 곧 명령을 따르지 않음이 불법이다. 모든 내용들은 여기에 해당됩니다.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자와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13:41. 18:7)


넘어지게 한다는 ‘사칸다논’은 ‘걸림돌, 함정, 올무, 유혹, 실족의 원인, 죄짓게 하는 것’ 등입니다. 여기에는 주로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실족시킴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말라”(약3:1) 했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5:30. 눅17:10)


무익이라는 ‘아츠레이오스’는 ‘쓸데없고, 가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지상에서 주를 위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는 쓸데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주의 이름은 부르면서 자신을 위해 살았고 주님을 위해 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벌거벗은 자’의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22:13. 계3:18)


굼노테스는 그의 영이 알몸이라는 말인데, 행위의 온전함이 없으므로 영의 옷인 세마포를 입지 못함을 말한다. 벗은 자라는 뜻은 거듭나지 못한 자라는 말이다. 벌거벗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재림 때를 알 수 없다(계3:3).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사후는 바깥 어두운라는 연단장에 가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βήματι) 앞에 서리라.”(롬14:10. 고후5:10)


판단이라는 키리노는 가장 교만한 사람이 남을 벌하는 위험한 판단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판단할 권세를 주시지 않으셨다. 남을 판단하는 행위 중에서 가장 많은 단어가 ‘αἵρεσι?’이란 단어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사상이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이단’이란 딱지를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사람은 성령훼방 죄로 심판받을 받게 된다.


음부(ᾃδήs-해데스)는 불신자들이 가는 곳이고, 연단장(βήμα-베마)은 믿는 자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아서 가는 곳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었으나 하나님 나라 1,2,3,층에 들어가지 못하면 여기에 가게 된다. 이곳으로 가는 사람들은 큰 문으로 들어간 사람들이요, 넓은 길로 간 사람들이다(마7:13). 그리고 모래위에 집을 지은 사람들이다.(마7:26~2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


하찮은 말, 또는 지나가는 말이었을지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덕이 되지못하고 해가 되었거나 자기가 생각 없이 하는 말이라도 심판의 대상이 된다(마12:36). 주님의 오심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는 악한 자들에게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마24:51,21:41)라고 하셨다.


카코스(κακό?)’는 ‘나쁘고, 부패하고, 해롭고, 위험’이라는 뜻이다. 악하다 앞에 ‘주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가르치지 아니하는 종들’을 말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종들은 부패하고 나쁜 사람이다. 이들도 바깥 어두운 βήμα로 쫓겨나서 연단을 받게 된다. 이사야는 이러한 종들을 “파수꾼이 아니라 소경이요, 무지하며,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요, 몰지각한 목자”(사56:9~11)라고 하였다.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니라.”(마24:51)


외식이라는 뜻은 겉으로만 흉내를 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람이 위선자(僞善者)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기독교인들이 제일 많다고 한다. 교회는 많으나 교회다운 교회는 찾기 어렵고, 목사는 많으나 목사다운 목사는 찾기 어렵고, 교인은 많으나 성도다운 교인은 찾기 어렵다면 모두가 위선자일 수밖에 없다. 하늘나라 도성에 참여함을 제한다는 뜻은 바깥 어두운데로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연단(βήμα)을 받게 됨을 말한다.


그것은 읽으라고 지시한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한 죄 때문이다. 그러나 그전에 환난에 남겨지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①환난에 남겨지지 아니하고, ②바깥 어두운데에 쫓겨나지 아니하고, ③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갈 권리를 얻으려면 문들을 통과해야 되는데, 두 곳에서 설명된다. 이사야 62장 4절에서 ‘쁄라(ה?וּב?)’로 기록되었고, 다음은 요한계시록 22장 2절에서 ‘퓨론(πύλών)’으로 기록되어 있다.


쁄라(ה?וּב?)는 1층천하늘나라에서 시작하여 3층천 시온까지 올라갈 성결의 구분을 나타낸다. 이것은 지역을 암시하고, 퓨론(πύλών)은 새 예루살렘 도성의 문들이다. 문들을 통과한다는 뜻은 자신의 성결이 한 단계씩 12단계로 올라감이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갈 권리를 얻는 유일한 길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야 영생하게 되고, 나뭇잎을 먹어야 허물이 씻김을 받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박탈당함이 제함(ἀφέλῃ)이다. 성에 들어가지 못함에 대하여 성경에 일렀으되,


“임금이 사환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더라”(마22:13,8:12,13:42,25:30, 눅13;28)


비교급으로 쓰이는 에초테로스는 ‘더 바깥에, 더 먼데, 가장먼 곳에’ 등이다. 스코토스는 ‘어두움, 흑암’등이다. 이를 갊이란 ‘브루그모스’는 ‘이를 악물다, 이를 갈다’ 등이다. 그러므로 바깥 어두운 곳은 바울 사도가 경고한 베마를 말한다.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은 어느 곳이나 밝음 뿐이며 어두운 곳은 없고, 기쁨과 희락만 있을 뿐이지 슬피 울며 이갊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은 유대교와 이방종교 인들에게 해당되고 기독교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과연 성경은 그런 이설을 허용하는가?


2. 예언을 받을 대상


“일곱 교회(ἑπτὰ ἐκκλησίαι?)에 편지하노니,”(1:4)


※ 일곱 교회는 2-3장에서 각 교회별로 설명된다.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ἑπτὰ ἐκκλησίαι?)에 보내라 하시기로,”(1: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ἐκκλησίαι?)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2: 7,11, 17,29, 3:6,13,22)

나 예수는 교회들(ἐκκκησίαι?)을 위하여(ἐπί)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였노라.” (22:16)


예언을 받아야 될 대상을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때로는 계시록에 명시된 대 환난은 유대인 또는 이방인들에게 해당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요한과 성령,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대 환난에 남겨지는 대상이 유대인이거나 이방인들이 아니라, ‘교회들(ἐκκλησίαι?)’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하셨다는 점이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시면서 열두 사도들을 교회의 기초로 삼으셨다(마16:18).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으면 성도가 될 수 없고, 그러한 집단은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대 환난에 남겨질 대상을 이방종교와 유대인들로 보는 견해는 옳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상고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대 환난이전에 모두 다 들림 받고, 대 환난에 남겨지는 대상은 유대교인들과 이방종교인들과 불신자들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피로 세워진 교회들을 위하여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는 경고를 오해하면 안 된다. 따라서 믿기만 하면 다 구원되고, 다 휴거되고, 다 어린양의 신부가 되고, 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간다는 고정관념에서 깨어나야 된다.



출처 : churchofpraise
글쓴이 : 장죠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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