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는 대부분 칼빈의 교리를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장로교도 분파마다 혹은 목회자마다 차이가 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이 주장하고 있는 구원관과 예정설을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칼빈의 구원관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어거스틴의 은총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에 의지하게 됨으로 인간이 구원에 있어서 기여할 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말했던 것처럼 은총은 어느정도 강제적으로 다가 오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원을 결정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칼빈은 여기에서 그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에 대하여서는 언급하고 있으나, 대체로 칼빈주의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 측면에서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을 강조하게 되고 이에 따라 '이중 예정설'이 나옵니다. 측 은총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또 '폭력적'(어거스틴은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으로 다가오므로 이미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자를 예정해 놓으셨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칼빈의 이중예정설입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를 제외하고는 이 '이중예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하나님께로 100% 나오는 은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웨슬리의 신학을 따르고 있으나, 구원관에 있어서 오늘날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웨슬리의 사상을 해석하는 데에서 나름의 차이를 보이고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칼빈처럼 은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에게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의지로 그것을 거부할 경우에는 그 은총의 혜택을 얻을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칼빈과는 달리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졌으며 누구든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의 사상도 사람의 행함이 구원에 어떤 공로가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을 사람이 자유의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오늘날 감리교 신학자들은 이가 마치 인간의 행함이 구원에 어떠한 공로가 있는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는 경향이 생겼고, '성화'를 강조하면서 인간이 행함으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부류가 생겼지요. 성결교단은 이 '성화'를 '성결'과 구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성결교 신학은 배우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감리교 신학보다는 인간을 덜 강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예정에 관하여서는 좀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목회자나 선교사들과 같은 사역자들에 관해여서만은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라는 '부분 예정'을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알미니우스 논쟁에 대하여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칼빈주의자로 시작했지만, 신실할 크리스천이었던 알미니우스는 칼빈주의 5대강령은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알고 약간은 폭력적인 '견인적 은총' 사상과 '이중예정'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것이 크게 논쟁으로 번져서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을 발효하면서 알미니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도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칼빈주의 5대강령에 반대하였고 여기에 알미니우스는 말하지 않았던 한가지를 더 추가했는데 그것이 바로 '견인적 은총'에 반대되는 '구원의 상실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알미니우스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의 추종자들 즉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은 칼빈주의 5대강령에 각 항목에 반대되는 강령을 만들어 내면서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사상에 동화되었고, 오늘날 스스로 알미니우스 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 사상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알미니우스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감리교 신학자들이 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구원 받은 이후의 행실에 따라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라고 단언하기 때문입니다.
알미니안 주의대로라면 구원받을 사람은 단 한명도 없으며, 모두가 구원을 잃었다가 얻었다가를 반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알미니우스 사상을 일부 수용했던 웨슬리도 구원을 상실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으며 그의 주옥과 같은 여러 설교는 오히려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역설하고 있습니다.
제가 발견한 웨슬리의 문제점은 그의 종말론에서만 발견되고 있으며, 그 외에는 그는 칼빈보다도 훨씬 훌륭한 목회자며 설교가였습니다. 웨슬리는 신학자가 아니었지요. ^^ 저의 구원관은 웨슬리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저는 침례교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일방적인 은총은 인간이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한 번 얻은 구원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고 성경대로 믿습니다.
행함은 결코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예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창세전 부터 예정하셨다는 것을 성경대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멸망받기로 예정한 영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그러한 은총을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은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멸망하기로 예정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누가 그 분의 은총을 거절할 것인지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들 '예지예정'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절대로 하나님은 한 영혼도 멸망하기로 예정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출처 : '장로교, 감리교및 성결교, 침례교의 구원관및 예정설 부분을 비교해서 알려주세요.' - 네이버 지식iN)
아르미니안의 5개조 전제
1. 하나님이 예지(豫知)하신 바에 따라, 사람의 믿는 여부를 조건으로 한 선택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창세 전 에 작정하심.(조건적인 선택. Conditonal Election)
2.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 이것을 제한시키는 것은 각 사림의 믿는 여부임.[보편적 속죄. Universal Atone-ment]
3. 타락한 상태의 자연적인 인간은 스스로 선하게 될 수 도 없고 새로워질 수도 없다.
의지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무력하고 무능함.
[자연적인 무력함. Natueao Inability]
4.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先行)됨이 없이는 이간의 구원은 시작될 수도 없고, 진행될 수도 보존될 수 도없다. 선행적(先行的)은총 . Prevenie-nt Geace)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 역사(役事)하시는 방식에 인간이 악한 의지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음[저항이 가능한은헤 , Resis-tible Geace]
5.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 주지만, 인간의 나태(懶怠)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 성경에 의하여 증명되지 않음(487)(아래 각주) [조건적인 견인(堅忍), Condi-tional Perseverance]
487. A. W. Harrison, The Beginnings of Arminianism(1926), 150, 151.
칼빈의 오대강령.
1.사람의 어떠함이나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창세전에 작정하신 바꿀 수 없는 예정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각각 정해짐[二重豫定]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예정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의 속죄를 위한 것임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3.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실제로 중생은 회심보다 우선함. [전적인 타락. Total Depravity
4.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역사 하시지만 , 저주가 예정된 자들에게는 이 은혜가 주어지지 아니함.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5.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은 결코 상실되지 않으며 끝까지 보존됨, (488,아래각주)[궁극적인 견인. Final Persev-erance]
488. 이상의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오늘날 장로교회 신조의 근간을 이루는 것인데, 영어 표현의 머리 글자만을 따서 “튤립”(Tulip)으로 친하기도 한다.
①전적인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③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④불가항력적 은혜(Urresistible Grace), ⑤성도의 견인[보 존](Perseverence of Saints)등이다 라보도 편저.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서울: 성공 문화사, =1981), 217,218.
칼빈주의 예정론의 허실(虛實)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바를 제한 받지 않고 집행하시는 주권 을 가지신 분으로 가르친다,1) 그러나 칼빈이 종교개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절대 권위를 주장하는 중세 교황 권에 맞서기 위해, 어차피 강조한 하나님의 의지 행사 곧 주권(主權)이 그것과 “관련이 없는 신학 구조에서도 전체 체계를 지배하는 기본 원리의 위치를 차지하게”2) 된 것은 분명히 잘못된 신학적 위상(位相)이라고 생각한다.
칼빈이 잘못 적용한 하나님의 주권은 결국 그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목적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시고 타락을 허용하기로 [창조 전에] 예정하”3) 셨다는 타락전 예정설까지 등장시켜, 본의는 아니였을 지라도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오해시킨 것은 중대한 신학적인 과오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무조건적인 예정과 선택에 무리하게 결부시킴으로써 범죄로 손상되었을 지라도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시하여, 책임 있게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워 버리고 말았다. 웨슬레의 말처럼, 인산의 이성과 의지가 죄로 인하여 비록 어두워지고 약화되어, 스스로 선을 택하고 의를 행하기에는 무력하게 되었지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선행적(先行的)인 은총(恩寵)이 임할 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예정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그의 안에서 자녀가 되고 후사가 되어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도록 청세전에 예정하셨다고 성경은 가르친다.(엡1:4-2 ; 고전 2:7 ; 롬8: 29; 행4: 27, 28),
그런데 위의 성경 본문에 나타난 “예정하다” 또는 “미리 정하다”라는 표현은 모두 어느 개인의 구원이 하나님에 의하여 무조건 미리 작정되었다는 개인 예정의 문맥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타락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이에 대처하여 청조 전에 세워 놓은 신 구원의 계획이 역사적으로 성취되었음을 강조하는 역사적 예정의 문맥에서 쓰여졌음을 주목해야 한다.
위의 네 성경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 창세전에 예정된 것이 어느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누구든지 “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예정하셨음이 자명해진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나 택하신 자들의 행사(行事)가 모두 하나님의 “미리 아심”(헬라어Prognosis, 동사는proginosko) 곧 예지(豫知)라는 전제에서 이루어 졌음이 다음의 성경 말씀에서도 분명해진다.(롬8:29, 11:2; 벧전1:2, 20; 행2:23)
모순된 이중 예정과 제한 속죄
따라서 누가 구원받고 누가 멸망을 받는 여부가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하여 무조건 미리 작정되어 있어 하나님 공의와 자비를 드러내도록 예정되었다는 무조건적인 이중예정은 성경에도 어긋날 뿐더러 하나님의 속성에도 조화되지 않는다(딤전2:4 딛2:11; 벧후3:9; 요3:16).
칼빈의 예정론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기계적인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모순에 빠져 버린다.
5) 또한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기를 원하시는 길을 예증된 대로 당연히 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은 성경에 전적으로 어긋난다.(겔33:11; 벧후 3:9; 약1:13; 요일1:5), 이상의 여러 성경에 입각한 논증을 종합해 볼 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하신 자들만을 위하여 돌아가셨다”6)는 칼빈주의 제한 속죄론(制限贖罪論)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크게 왜곡하는 중대한 과오이다.
필립샤프도,“제한된 속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론(推論)한다7)고 지적한 뒤에 “그들은 요한 복음3장 16절 요한 일서 2장2절, 디모데전서2장4절, 베드로후서 3장9절 등의 성경 말씀에 대하여 만족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8)고 진실을 밝혔다. 최근 일부 칼빈주의 학자들이 이상의 두 세 성경 본문을 예정론의 배경에서 설명하려 하지만 모두 무리한 시도임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인간의 책임과 심판의 당위성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행2:23; 갈6:7-10; 렘6:19; 마12:36,37; 약2:12,13; 계22:12), 행동은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선택은 의지를 행사한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거듭하여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알리시고 순종함으로 생명을 선택하도록 촉구하신 사실은 사람이 가진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바르게 행사하라는 요청인 것이다(신30:19; 수24:15; 사1:16, 20; 계22:17).
불의한 이 세상에서도 선택에 필요한 자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정신병자나 어린아이 등 선택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법에 의한 책벌을 받지 않는다. 하물며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미리 작정해 놓으신 결과에 따라 행동한 것에 대해 어떻게 공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실 수 있는가? 그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당위성(當爲性)을 훼손하는 위험한 가르침이다.(전12:14; 마25:31-46; 행17:30,31).
이러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딤전2:4)기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원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베푸시는 은혜를 거역하지 말고, 의지를 바르게 행사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을 행함에 의한 자력 구원(自力救援)을 시도하는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9) 성경에 어긋나는 크게 잘못된 일이다.
상실할 수도 있는 구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렸던 사람도 불순종이나 나태(懶怠)함으로 잃어버린 바 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고전 9:27; 갈5:4; 빌2:12; 히10:26-29), 성경에 기록된 많은 실례들은 인간이 불신과 반역, 고의적인 불경(不敬)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성령의 역사가 거절되거나 소멸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10) 하나님의 은혜는 거절될 수 없다는 칼빈의 가르침도 어거스틴에게서 물려받은 사상이다.11) 칼빈이 물려받은 바, 선택받은 은혜의 보존 여부에 대한 어거스틴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어찌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두 은총에 순종하지 않는가?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예정의 교리를 가지고 답변하였다.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형벌을 받도록 예정되었다. 이처럼 예정된 자들의 수는 고정되어 있고 변경시킬 수 없으며, 또한 서로 교체될 수도 없다.”12)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거나 받아들이는 근거마저도 예정에 돌림으로써, 입증되지 아니한 논증을 다른 논리의 근거로 삼는 순환논법(循環論法)의 모순까지 범하고 있다.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은 논리에도 어긋난다.
사명과 역할을 위한 선택
성경에는 언뜻 무조건적인 선택이나 절대적인 예정으로 생각되는 표현이나 실례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칼빈의 예정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로마서 9장에서 그렇게 보이는 실례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열거한 바,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인 선택과 포기의 실례들처럼 보이는 야곱과 에서, 애굽왕 바로, 이스라엘 민족, 진흙과 토기장이의 실례들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강조하는 문맥에 나타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멸망 받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개인 예정의 문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신 절대적인 구원의 계획을 이르는데 필요한 사람들의 역할과 사명을 설명하는 문맥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남보다 의롭거나 순해서가 아니라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主權)행사에 의한 것이었다(신7:7, 8; 9:11, 16). 이러한 선택의 목적은 그들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오해한 바 치명적인 잘못된 선민사상 이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조건 없이 선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도구와 통로로 쓰셔서 창세전에 예정하신 대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절대적인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함이었다.(창12:2,3; 18:18; 22:18; 행3:25,26; 갈3:8). 곧 “아브라함의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얻” 게 하려 하신 것이었다(창22:18; 갈3:16)
그러나 그들이 사명을 수행하고 약속된 구원을 받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믿음과 순종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바로 이 조건을 이루지 못한 채 불신하고 불순종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을 당한 것이다(롬9:30-32; 히4:1-3; 3:19; 신7:9-11).
이처럼 잘못된 선민 사상과 비 성경 적인 예정에 의한 선택을 믿는 결과가 모두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잘못이 될 수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을 거울삼아 깨달아야 할 것이다.(롬9:19-24)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불가결(不可缺)한 사명 때문이었지 그들의 구원을 불가결(不可缺)하게 하신 것이 아니었음이 이미 역사에서 분명해졌다(사49:6; 42:6; 롬9:4-; 히3:7-19; 4:1-11)
내용출처 : 성경만이 판단의 기준이다. 김경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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