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 !!! 구원사!!!

[스크랩] 칼빈과 웨슬레의 구원론 비교(펌) (무지 중요함)

하나님아들 2014. 3. 10. 00:35

<김용호전도사> 칼빈과 웨슬레의 구원론 비교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난제임과 동시에 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데에 가장 지름길을 제공합니다. 즉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성경해석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성경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돌은 기독교 교리가 정리되기 시작하는 4세기 경부터 시작된 충돌이고 지금껏 해결되지 않은 충돌입니다. 이 충돌의 성격적 맥락을 잘 살펴보시고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으시는 귀한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논문은 침례교 측의 입장에서 정리한 글입니다.

 

참고로 두 계열의 대표적인 인물들의 생존연대를 올립니다. (물론 단순화한 분류입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캐톨릭뿐만 아니라 웨슬레에게로도 이어지는 부분이 대부분입니다.)

 

1. 예정론(하나님의 주권) : 장로교

        어거스틴(A.D. 354-430) - 칼빈(1509-1564)

                                         

2. 만인구원론(신인협동설) : 장로교를 제외한 모든 교단 (감리교,성결교,침례교,순복음 등등)

        펠라기우스(354-420) - 알미니우스(1560-1609) - 웨슬레(1703-1791)




“웨슬레와 칼빈의 구원론 비교연구” (침례교 측 입장)

 

목      차


Ⅰ. 서      론                                                                             

Ⅱ. 웨슬레와 칼빈의 신학적 특징                                                

   1. 신학 형성의 배경                                                                

       (1) 요한 웨슬레의 신학 형성 배경                                        

       (2) 요한 칼빈의 신학 형성 배경                                          

    2. 신학적 특징                                                             

       (1) 요한 웨슬레의 신학적 특징                                           

       (2) 요한 칼빈의 신학적 특징                                             

Ⅲ. 웨슬레와 칼빈의 구원관과 주요 개념                                         

    1. 웨슬레의 구원이해                                                        

       (1) 선행의 은총                                                          

       (2) 확신의 은총                                                          

       (3) 칭의의 은총                                                          

       (4) 의인이 됨                                                            

       (5) 신생                                                                 

       (6) 믿는 자의 회개                                                     

       (7) 성령충만과 성화                                                    

    2. 칼빈의 구원이해                                                        

       (1) 하나님의 절대 주권                                                 

       (2)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3) 의인과 성화                                                  

Ⅳ. 웨슬레와 칼빈의 공통점과 차이점                                          

    1. 공통점                                                              

   2. 차이점                                                                 

       (1) 인간의 무익함을 주장하는 순서                                       

       (2) 성화의 시기                                                        

       (3)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이해                                      

    3. 독특한 사상                                                            

      (1) 웨슬레의 아르미니우스적 만인대속설                                

       (2) 칼빈주의의 예정론                                                  

Ⅴ. 결론                                                               

 


Ⅰ. 서론

 

한국 개신교 1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 개신교는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적 장로교와 아르미니안 웨슬레주의적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 교회, 나사렛, 구세군 등등으로 계보를 나눌 수 있다. 그 중 장로교와 감리교는 개신교 선교 시작인 1885년 한국에 찾아온 두 선교사, Horace Grant Underwood목사(미국 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한국 최초의 선교목사로 임명받고 왔음)와 Henry Gerhart Appenzelldr 목사(감리교회 외국 선교회에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의 신학적 전통을 이어 받은 교단으로 한국 개신교 교세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는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으로 신학의 근원을 밝히거나 신학적 논쟁을 하는 일이 금기시되어 오고 있으며 신학이 전체 신자, 모든 교회를 위한 것이 되지 못하고 신학자들만의 독점물인 듯 한 데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신학이란 과제를 교회 혹은 목회와 관련시켜 다루지 않고 별개의 것으로 다루거나 외면하는 데 문제가 있다.

 

목회,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청중에게 관심을 기울이지만 신학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전통과 그 시대를 함께 생각한다. 따라서 신학자는 목회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넓고 깊은 각도에서 살펴야 한다. 목회와 신학은 다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신학자에게 자기의 설교 내용이 신학적으로 정당한가 아닌가를 항상 물어야 하고, 신학자는 항상 설교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증거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서 제공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자는 목회하는 설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목회자요, 설교자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침례교회 목회를 준비하는 목회자로서 웨슬레안 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성결교회 등의 입장이 마치 교단의 신학과 반대되는 입장인 듯 한 오해를 가지고 칼빈주의 신학전통 중에서 침례교의 신학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려는 그런 입장에 대해서 경계하고 싶다. 또한 칼빈신학과 웨슬레 신학의 출발점과 신학적 기초에 있어서 상당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 점은 상호보완적인 요소로서 목회 현장에서 연구되고 선포되어져야 할 중요한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양대 신학의 출발점은 내용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높이고, 신학 방법론에 있어서는 철학적 사변을 배제하고 성서중심이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외에도 주로 웨슬레안 계통에 속한 학자와 목회자들 및 여타 교단 소속의 학자들이 칼빈과 웨슬레 신학의 연계성에 대해 살펴보고 “일치라고는 하나 혼합은 아니다. 구별이기는 하나 분리는 아니다.”라는 칼빈신학의 형식 구성원리의 표제의 원칙에 따라 칼빈의 구원론과 웨슬레의 구원론의 조화되는 면과 독특하게 구별되는 면, 이 양면의 창의적 종합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고 나아가 침례교 신학의 정립을 위한 유연한 탐구의 자세로 이러한 노력들이 계속되어야 함을 말하면서 이 논문을 쓰기로 한다.

 

연구의 방법에 있어서 웨슬레의 신학 중에 구원론의 전체적이고 일반적인 특성을 살피고 그 다음에는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특징이 칼빈의 것과 어떻게 다른가 또 무엇이 공통적인가를 연구하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한국의 목회적, 신학적 현장이해에 있어서 웨슬레와 칼빈의 구원론 비교연구의 중요성과 방법 및 범위를 살피고 두 신학의 형성에 있어 배경과 신학적 특징, 중심개념들을 살피고 나아가 두 관점을 상호 비교하여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살피고 기독교 양대 신학의 종합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또한 이 연구 비교를 통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학에 대한 반론으로서 종교개혁자인 칼빈의 구원론을 이해하고, 개혁신앙의 기초위에서 실천적인 삶으로서의 성화를 웨슬레를 통하여 정립하므로 개신교파가 가진 복음주의 신학 일반과 성결의 교리가 지닌 독특성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Ⅱ. 웨슬레와 칼빈의 신학적 특징


1. 신학 형성의 배경


(1) 요한 웨슬레의 신학 형성 배경


1) 시대적인 배경


웨슬레는 일생동안 구원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추구하였다. 웨슬레의 신학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그의 신학이 신앙체험을 통해 얻어진 확신에 기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시대적으로 웨슬레의 부흥운동은 18세기 지적인 기풍을 이루고 있는 합리주의와 자연신론을 대항하여 복음적인 그리스도교의 적극적 주장으로서 출연하게 되었다. 당시 편만해 있던 계몽주의 정신이 종교에도 영향을 미쳐 종교적 합리주의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 영국 종교사상은 합리적 초자연주의(Rational. Supernaturalism), 자연신론(Christian Deism), 반기독교 자연신론(Christian Deism)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웨슬레는 이러한 자연신론과 이성주의에 대항하여 지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진리가 성서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는 것으로써 자연신론자들을 끌어오려 노력하였다. 그의 신앙부흥운동의 시대적 배경을 특징짓는 두 번째 요소는 18세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부도덕과 부패의 경향에 맛서는 도덕갱신 운동으로서 등장했다는 것이다. 당시 하층 계급의 영적 상태는 거의 파멸의 지경이었다. 대중들의 오락은 야비하고, 문맹은 만연되고 법률 집행은 야만적이요, 감옥은 질병과 죄악의 소굴이요, 음주는 영국 사상 최고도에 이르렀다. 새로운 정치 경제적 동향은 정치가와 학자들로 하여금 서슴지 않고 추태와 외설을 감행하도록 만들었다. 결혼서약은 벌써 신성한 것이 되지 못하였고, 상류사회는 회의주의에 빠져 종교를 조소하고 있었다.


2) 영국 국교회의 신학적 영향


영국의 고교회(High Church)의 영향을 받아서 의식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체득했다. 그 후 수도원적인 신앙생활이 깊어지면서도 내면세계의 불안과 번민 때문에 괴로워했다. 특히 18세기 말의 영국 국교회의 신학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즉 이 신학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치적 음모와 군사적 세력에 대항하여 고투하는 가운데서 성장하였고 내분의 결과로서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신학은 다시금 영국 국민의 종교적 이념과 지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는데, “신앙에 의한 의인”이라는 바울의 개념을 해석할 때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게 된다”는 야고보서의 교훈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웨슬레 시대에 있어서 영국 국교회의 구원의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무를 하나님의 체계로 묶어 보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3) 가정적 배경


웨슬레는 모친 수산나의 열성적인 자녀교육으로 인하여 “이지와 경건”의 종교교육에 어려서부터 가르쳐졌는데, 그 모친 수산나는 영국 알미니우스주의 학파로서, 만인구원설을 믿으며,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속박하시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의 구원이나 멸망을 강요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즉 칼빈주의의 무조건적 예정을 말하는 이중예정론을 반대하였다. 웨슬레의 부모가 영국 국교회로 전향하여 그 신앙을 고수하였지만, 그들이 청교도의 전통속에서 자라왔으며 도한 어렸을 적부터 모두 청교도적 신학과 교육을 받은 분들이었기에 그들의 자녀교육에는 청교도적 양육의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 따라서 웨슬레는 “성공회의 제도 및 권위와 청교도의 두려움 없는 창의성과 금욕주의의 영향을” 부모를 통해 받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점에서 웨슬레는 그의 부모를 통하여 영국 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이어받았으며, 영국교회의 고교회주의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4) Aldersgate Street 에서의 회심의 영향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 저녁 9시 15분 모라비안 교도들의 기도회에서 홀연히 마음이 뜨거워지는 이상한 체험을 했다. 여기서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개신교의 핵심되는 진리가 확연해졌다. 과거에는 믿음을 선행 또는 의식에 예속시켰으나 회심 후에는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의뢰하고 마침내 그리스도에게 접붙임되는 것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웨슬레는 여기서 과거의 믿음을 “지적 동의”로 보았던 견해를 바꾸어 “신뢰”로 수정했다. 이런 신앙관의 변화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왔으며 종합적으로 그의 구원론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2) 요한 칼빈의 신학 형성 배경


1) 시대적인 배경


칼빈이 출생하기 전 그 당시의 세계는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하는 역사적 전환점의 문턱에 이르러 있었다. 당시 교회 안에는 각종 추악한 부정부패의 사례가 있었으며 교리적 탈선이 만연되어 있었다. 각종 신조들은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으며, 로마교회의 미사나 예배의식과는 공존할 수 없는 성격을 띠고 있기에 더 이상 카톨릭이라 부를 수 없는 신조들이 합법화되어 있었다. 또한 상업도시들은 성직자와 결탁 일반의 원성이 높아졌으며 경제적 불안 상태에 바진 농민들은 지방교직에 의하여 거두어진 십일조, 사례금 따위도 반발이 심하였다. 이러한 불안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난 신자들의 종교적 각성의 열정은 깊은 공포의식과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시대적인 위기 상황을 배경으로 칼빈의 종교개혁은 발생하게 되었다.


2) 생애와 회심의 영향


1509년 7월 10일 파리 북동부 피카르디 지방 노용(Noyon)에서 제랄 코반(Gerald Cauvin)의 아들로 태어난 죤 칼빈은 그 지역 인사였던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 법률학을 포함하여 폭넓은 교육을 받았다. 복음주의 신학에 관한 한, 칼빈은 이를 독학을 읽혔으며, 그가 루터의 사상과 친숙하게 된 것도 주로 그의 저작들을 통해서였다.


1531년 부친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그의 생애에 큰 전환기가 되었다. 칼빈은 1532년 봄 세네카 주석을 낸 후로 1534년 초까지에 별안간의 회심을 경험했다. 원래 자신에 간하여 말하지 않는 칼빈은 그의 회심에 관한 사유를 “돌연한 회심”이라고 간단히 표현하였다.


그의 시편 주석에 “내가 아직 교황권이란 미신을 가지고 있을 때 ‘돌연한 회심’으로 나를 부르셨다.”고 하였는데 그의 체험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요점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자기에게 말씀하였다’ 함과 ‘하나님의 뜻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 함이다. 회심 후 칼빈의 사고에 있어서 종교가 최우선이었다.


그의 회심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회심은 종교적 진리탐구의 정점이었으며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격렬한 연구의 결실이었다고 볼 수 있다. 회심을 심리적 면으로 보면 그것은 구원에 대한 질의요 루터의 경우와 같이 교회에서 되는 참회와 공적이 구원을 가져오겠는가 하는 의문에서 해방 받은 것이 된다. 그러나 루터는 회심으로 말미암아 고뇌하던 양심에 평화를 얻었으나 칼빈은 반대로 마음이 복음주의 신앙의 소식을 들음으로 도리어 불안하여졌다는 점에서 다르다. 회심에서 칼빈은 구속의 확신이란 평화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려는 결의와 주님의 영광을 바라는 마음, 자기 안에 만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을 좋은 의미의 불안을 겪었다.


3) 사상적 배경


칼빈은 1559년 기독교강요의 결정판을 출판했다. 여기에 나온 소위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은 바울에게서 그것들에 대한 영감을 얻어낸 어거스틴에 의해 은연중 형성되었다. 그래서 근대에 와서 칼빈은 그 바탕이 어거스틴주의자라고 하는 평가를 받는다. 즉 어거스틴의 예정론과 기타 구원사상은 칼빈에게 전승되어져서 칼빈의 구원관의 주요개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칼빈의 교의들은 어거스틴 사상의 부흥이라는 후대의 평가는 이런 점에서 올바른 평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2. 신학적 특징


(1) 요한 웨슬레의 신학적 특징


웨슬레신학은 구원론이 중심이며 자신과 신자들의 신앙경험을 바탕을 모든 성도의 신앙목표가 되는 성결, 완전에 강조점을 둔다.

 

구원에 대한 정의를 내려본다면 여러 관점이 있겠으나, 개신교 안에서도 구원이란 개인의 영혼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남이라는 복음주의적 정의와 사회의 구조악인 정치적 경제적 양심의 부자유와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라는 해방신학 민중신학의 주장이 있어 양극화 현상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웨슬레는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정의하였는가? 웨슬레는 구원이란 첫째로 법적인 차원으로서 형벌에서 사면을 받는 일이라 했다. 그 둘째로는 의학적 차원으로서 질병 즉 죄성에서의 치유함을 받는 일이라고 보았다. 이제 이러한 구원론적 신학을 형성한 웨슬레 신학의 제반 특징들을 개괄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1) 웨슬레 신학은 복음적이다.


웨슬레의 복음주의 원리 세 가지는 첫째, 모든 선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며,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인간의 천부적 자유와 모든 능력을 전적 부인하며, 셋째, 인간의 모든 공로, 하나님의 은혜로 소유하거나 행한 것까지도 공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체험을 통해 확신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는 루터, 칼빈과 함께 믿음으로 구원 받음에 있어서 하나님이 전부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복음주의를 확고히 한다. 웨슬레는 그의 신앙이 복음적이요, 사상과 전도가 복음적이었다.


2) 웨슬레 신학은 경험적이다.


일반적으로 웨슬레의 기독교관은 경험의 신학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특색은 신자의 경험을 긍정한 데 있다. 하퍼는 웨슬레신학이 체험을 근거로 하므로 상아탑 신학에 결여되기 쉬운 신빙성이 있는 즉 시험을 거치고 그 결과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진 신학이라 하였다.


웨슬레가 말하는 경험은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직감하는 것으로 이성적 지각과 같으며, 잡다한 현상계의 낮은 차원의 감각적 경험이 아니라 성령이 마음속에 직접 증거하시는 초월적 경험이다. 즉 그의 신학연구 방법은 경험주의이며, 그것은 그의 신학이 경험주의 신학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웨슬레 신학은 창의적 종합이다.


웨슬레는 성서와 함께 기독교 전승을 중요시하였고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신약성서의 중요요소들도 강조하고 각 학파의 장점들을 창의적으로 종합했다. 그 종합은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에 잘 나타났는데, 이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충분히 취급, 강조하지 못한 채 간과한 것을 웨슬레가 재발견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이 교리를 웨슬레는 하나님께서 메도디스트들에게 위탁한 위대한 유산이라 믿었으며, 이를 전파하도록 감리교도를 일으키셨다고 확신했다.


즉 완전의 개념을 기초로 하는 웨슬레 신학은 초대교회의 전통에 뿌리를 박았고 자기부정과 훈련을 통한 완전에의 노력으로 나타나는 로마 카톨릭의 강조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를 강조를 보강하고 동시에 알미니안주의와 실제적인 신비주의적 요소를 지닌 영국국교회적인 것과 칼빈적이며 경건주의와 모라비안주의의 형식으로 나타난 루터적 특색을 창의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4) 웨슬레 신학은 실제적이다.


웨슬레 신학은 신학을 위한 신학이 아니고 인간 구원과 신자의 신앙 향상을 목표로 한 실제적 신학이다. 웨슬레는 이 구원의 도리를 난해한 신학용어나 사상이 아니라 평범한 언어로 모두가 듣도록 증거하였다.


5) 웨슬레 신학은 개혁적이다.


웨슬레는 자기와 신학적 대적인 자연신론자에게 이기는 길은 논쟁으로서가 아니라 생활에서 성서의 진리를 실천하는데 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인권회복, 노예제도폐지, 빈곤의 타파 등이며, 이는 그의 부흥운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으니 웨슬레의 구원론은 사회정화라는 결정적 결과를 초래했다.


6) 웨슬레 신학은 중용적, 화해적이다.


영국국교회가 카톨릭과 개신교의 중도적 위치에 있음 같이 웨슬레의 구원론도 중용의 길을 걷고 있음이 특징이다. 이는 그의 설교 “관용정신(Catholic Spirit)”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신학 사상이 창의적으로 종합됨은 사랑의 화해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참 사랑의 실천, 원수에 대한 용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까지도 쏟는 구령적 사랑 이것이 웨슬레 구원론의 특징이다.

 

(2) 요한 칼빈의 신학적 특징

1) 칼빈신학은 창조적이기보다 공식적이다.


칼빈은 종교개혁운동에서 루터, 즈빙글리를 잇는 제2세대에 속하는 개혁자이다. 칼빈은 두 선배가 새워놓은 개혁의 기초를 이룬 사상적 기초를 체계 있게 조직한 것이다. 칼빈은 새로운 종교사상의 체계를 개혁하는 면에서는 독창적 인물은 아니다. 그는 대체로 어거스틴, 루터, 기타 여러 사람들의 관념을 이어받았다. 이런 입장에서 칼빈은 개혁에서 선구자들의 교리적 근거를 조직, 확립하여 새로운 세계에 확장시키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칼빈은 법과 질서와 훈련에 관심이 집중되었으며 개혁에서 산출된 교리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조직적으로 질서정연하게 기독교 강요에서 전술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신학과 칼빈의 사상구조는 창조적이기 보다 오히려 공식적이며 조직적이다.


2) 칼빈신학은 성서주의이다.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칼빈주의는 성경전체의 사상이며 바울, 어거스틴이나 동시대의 개혁자들과 일치하는 사랑을 성격교훈을 조직적으로 해설한 것으로 인간의 사색된 철학, 종교가 아닌 참된 복음과 하나님의 법을 성서 그대로 강조하는 것이다. 칼빈의 신학체계 수립의 근거는 성서였다. 성서는 그에게 기독교 진리의 유일한 근원이며 규범이었다. 칼빈신학의 특징은 “전체로서의 성서”의 이해와 실제적 동기에서 촉진된 것이다. 그는 성서에서 이해되는 하나님, 말씀, 은총, 거룩을 보고 계시의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서를 읽으려 했다. 기독교 강요를 쓴 의도를 칼빈은 제 3판 서문에서, 성서의 내용을 요약하여 읽는 자에게 성서의 안내서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3) 칼빈신학은 경험적이다.


칼빈신학의 근본을 이해하려면 그가 기독교 강요를 쓴 내적 필연성과 그 목적한 바를 알아야 한다. 칼빈이 강요 초판에서 전하고자한 외적 동기는 당시 개신교를 박해하는 프랑스왕 프란시스에게 개신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함이었으나 실제 의도는 어떤 사상이나 주의가 아니고 자기의 변화된 생명이 출발한 처음에 있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시하려는 것이었다. 칼빈은 하나님과 만난 경험을 통해 은총을 체험한 것이 성서의 주제와 일치하였다. 이것이 칼빈신학이 지닌 논리를 초월한 숨겨진 정의이다. 칼빈신학의 출발점은 회심이 가져온 하나님 체험이었다.

 


Ⅲ. 웨슬레와 칼빈의 구원관과 주요 개념


1. 웨슬레의 구원이해


웨슬레의 구원론은 간단하게 구원의 순서에 따라서 진술하도록 하겠다.


(1) 선행의 은총


웨슬레는 칭의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하는 은혜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칭의 받는 믿음은 사람의 노력의 산물이거나 은혜에 대한 사람의 응답이라고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같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이다.


여기에서 딜레마가 생긴다. 그럼 인간은 칭의 받는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믿음이 칭의의 은혜를 주게 한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믿음을 주시지 않는가?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칼빈의 예정론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위의 질문에 대해 다른 대답을 내린다. 즉 믿음을 받기 위해 인간이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 믿음의 선물을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의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능동적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능력을 웨슬리는 선행의 은총 또는 모든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라고 표현한다. 이 은총은 모든 능동적 응답의 근원이며 선한 욕망, 즉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려하는 욕망이 이것으로부터 나온다. 또한 이 선행의 은총은 받기를 기다릴 필요 없이 모든 자연인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응답의 능력이다. 그래서 웨슬레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성취함에 있어서”라는 설교에서 하나님이 먼저 활동하시니 인간도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이유는 인간편의 책임인 것이다.


이 선행의 은총으로 인간은 믿음을 주시기에 앞서서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주시는 회개의 촉구를 받아들이고 회개의 합당한 행위를 하려고 노력한다. 先行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진 인간의 마음이 감각적이 되고, 둔감해 있던 마음이 민감하게 열리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활동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의 경우에는 하나님은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여기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자연인은 전적으로 부패해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선행적 은총을 주어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웨슬리가 이해하는 인간의 실존이다.


그런데 믿음이 생기기에 앞서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으로 회개의 촉구를 하신다. 웨슬리에게 있어서는 믿음이 생기기 전에 회개를 해야 한다. 선행의 은총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왜 인간은 믿음을 받아들이기에 앞서서 회개해야 하는가? 웨슬리는 그의 인간관에서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래로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었다고 한다.


웨슬레의 구원론은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죄인으로서의 상태에 관한 그 자신의 이해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의 인간의 상태는 세 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첫째는 자연적인 인간의 상태이고, 둘째는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이고, 셋째는 은총 아래에 있는 인간의 상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특별히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에 대한 진술은 인상적이다. 웨슬레는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은 자신의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의 인간이라고 진술하였다. 자연인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태는 다른 말로 원죄 즉 죄의 세력에 사로 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원죄로 인해서 사람은 교만하여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며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우선되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이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 자기사랑하여 육체의 정욕대로 움직여 세상의 것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즉 칭찬받고 싶어 한다. 또한 우상 숭배(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존중하고 필요로 하며 영광을 돌림)의 죄를 저지른다.33) 이로써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죄의 결과로 인간은 심판의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자연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웨슬레에게 의하면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방치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 속에서 선행적인 은총으로 역사하여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을 율법의 심판 아래로 이끌어 들임으로서 타락의 조건을 인식하게 한다. 선행의 은총으로 인간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사실 그 양심으로 죄책감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선행의 은총을 양심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죄인임을 깨달음으로 구원은 시작되는 것이다.


(2) 확신의 은총


선행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욕망이 있게 되며 어느 정도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 즉 율법으로 회개의 촉구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자각을 한 인간에게 구원은 “확신적 은총”에 의해서 수행된다. 확신적 은총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죄의 문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인식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자각을 일으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확신의 은총으로 인간은 스스로를 전적으로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인간은 아담 이후로 타락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즉 아담 이후로 인간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확신의 은총으로 이제 인간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받기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확신의 은총으로 죄인임을 깨달아 인정하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기를 포기한다면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이렇게 죄인임을 인정하고 포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회개이다. 이 회개는 이제 선행의 은총으로 아는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믿음은 회개 이후에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죄인인 인간을 참회로 이끄시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웨슬레는 자신만의 독특한 특징을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참회 또는 죄의 확신을 신앙보다 앞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웨슬레의 구원론은 초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이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초기 종교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참회는 신앙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이후에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참회에 따르는 업적의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마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처럼 기회가 없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하여 참회의 신앙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업적을 이루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참회의 업적이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업적은 참회의 신앙의 열매로서 의인을 위하여 간접적으로 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계속적인 역사의 조건으로 참회의 신앙에 따르는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응답의 수준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서 그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 인간의 측면에서의 참회의 신앙에 따른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으로서의 열매가 갖는 성격은 다만 하나님의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을 받을만한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로서의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앙의 업적은 참회의 신앙의 열매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된다. 도덕적 의미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인의 신앙을 용납하도록 허용한다는 인간의 입장에서의 표시에 불과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3) 칭의의 은총


확신의 은총으로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때 하나님은 복음으로 역사하신다. 그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칭의에 있어서 유일한 조건이 되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믿음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에 대한 동의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보혈에 전적으로 자신을 의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공로를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사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죄인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러므로 생명이 되신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셔서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확고히 의뢰하는 믿음이다. 한마디로 고난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4) 의인이 됨


1) 의인의 조건


웨슬레에 의하면 의인, 곧 칭의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오직 ‘믿음’ 밖에는 없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웨슬레에 의하면, 하나님의 先行하시는 은총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죄를 인식하고 뉘우쳐 참회하게 되는데, 참회의 열매는 ‘믿음’을 간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제 참회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믿음’인 것이고 이를 근거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그 사람을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 따라서 의인의 조건은 오로지 믿음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은 칭의받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되는 동시에 반드시 회개, 곧 참회의 과정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웨슬레는 이때의 참회를 인간 자신의 극복할 수 없는 죄성, 무력감을 깨달아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믿음은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믿음이 아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시어서 내적 변화를 일으키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확고히 의뢰하는 믿음이다.      


2) 의인의 내용


그렇다면 “의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속죄, 곧 죄의 용서이다. 사망선고를 받은 죄인을 생명으로 옮겨놓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선포로 이루어진 구원받은 상태이다. 그럼 이 믿음으로 칭의받아 얻는 구원은 무엇인가?


첫째 현재의 구원이다. 둘째 모든 죄(원죄,자범죄)에서의 구원이다. 셋째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이다. 현재의 구원이란 현제 이 땅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모든 죄에서 구원이란 이제 더 이상 죄를 짓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습관적인 죄나 고의적인 죄 그리고 죄된 욕망에서부터 나온 죄를 짓지 않는다. 죄책으로의 구원은 율법으로 부터의 구원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고 정죄한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죄책에 대해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인 받은 사람의 실제 생활이 사실에 있어서도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거나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죄가 없어서 하나님이 의롭게 여겨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죄로 인정하시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을 유죄로 선고하시지 않는 것을 뜻한다.


(5) 신생


웨슬레의 구원론에 따르면 의인의 사건에 동반되어 일어나는 사건으로 “거듭남”이라고도 말하는 “신생”의 사건이 설명된다. 이 신생의 사건은 의인과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굳이 순서를 논한다면 논리적인 순서가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인간의 영혼 속에 역사하신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이 동일한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상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의인이 상대적인 변화를 뜻한다면 신생은 진정한 실제적인 변화를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의롭다고 여기심으로서 인간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시지만 인간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심으로서 인간 안에서 일하신다. 따라서 의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외적인 관계성을 변화시킴으로서 원수의 관계였던 것을 자녀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인간의 내적 영혼을 변화시킴으로서 죄인을 성자가 되게 한다. 그리고 의인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위치로 회복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의인은 죄책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신생은 죄의 세력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상이한 것이다.


1) 신생의 본질


사람을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신생은 자연적인 출생과 흡사하여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고, 그래서 은총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무감각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다.


2) 신생의 증거


신생은 신생하는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큰 변화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영혼을 살리실 때, 혹은 인간의 영혼을 죄로 인한 죽음의 상태에서 義의 생명의 삶으로 일으키실 때에 인간의 속에서 역사하여 외양으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된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한 신생의 증거는 무엇인가?


첫째는 “화평”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화가 그의 마음을 주장(골3:15)”하는 것이며 “흑암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이 상태는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세력에 의해서도 칭의의 상태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상태이다.


둘째는 ‘소망’이다. 이것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빌1:23)”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는 죽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희망은 “빛나는 형상” 즉 마지막 심판주로 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자신의 영혼이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완전히 새로워지는 일” 즉 신령한 것으로 다시 지음 받은 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생을 받는 것이다. 희망은 “영광의 면류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분깃”을 기다리는 것이다


셋째는 ‘기쁨’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속죄함을 받아 죄과의 용서를 받아서 기뻐한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영과 함께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해 주시는 것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희망을 가지고(롬5:2) 크게 기뻐한다”


네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부은바 되었습니다.(롬5:5)”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들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가 보고자 하는 대상이었고 마음의 기쁨이었으며 시간과 영원에서의 그의 분깃(영생)”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먼저 사랑을 확신시키시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행위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현재 믿는 바의 구원을 하나님이 구속하실 것을 소망하는 것이다.


(6) 믿는 자의 회개


신생한 사람에게도 죄가 있는가? 아니면 이들에게는 죄가 전혀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 웨슬레는 바울의 주장을 따라서 육체의 정욕에 의한 악한 성질이 신생한 자에게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그의 ‘신자 안에 있는 죄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 그는 갈5: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믿는 자도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함을 말한다.


그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성서의 말은 무엇인가? 신자 안에 아직 싸워야 할 죄의 세력이 남아 있다면 신자는 부분적으로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바울의 말을 우리는 분명히 해석해야 한다. 이 말은 믿음으로 신자는 과거의 죄책에서 완전히 새로워졌다. 즉 과거의 죄책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웨슬리는 이렇게 이 악한 정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는 세력으로 신생한 자의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신자가 성령을 따를 때에는 항상 우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웨슬레의 생각은 신자에게는 죄가 없고, 육체에 속한 정욕도 없고, 타락의 경향성도 없다는 생각과는 반대되는 생각이다.


따라서 신생한 자도 그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성 곧 교만,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 우상숭배, 불신 등을 항상 느끼며 산다면 신자가 칭의와 신생함을 받은 후에도 회개가 계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웨슬레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해서 말하는데, 웨슬레가 이 때 말하는 회개는 신생한 자의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고집과 우상숭배의 경향성, 곧 불신앙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향성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과거의 죄책으로 죽게 되었던 것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마지막으로 우리 스스로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신자와 신생한 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웨슬리는 신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다. 이에 비하여 신생한 자는 죄에 순종하여 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신생한 사람은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죄에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신생한 자도 죄의 세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죄의 지배 아래에 있지는 않다. 그래서 죄의 세력과 맞서서 있는데, 그 맞선 상태는 대항해서 싸우는 상태인 것이다.


(7) 성령충만과 성화


1) 성화의 기준


신생한 자는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모든 성품” 즉 “격정과 교만, 육욕과 허영, 야심과 탐욕”에서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에서 초연하다(요일2:16)”고 한다. 신생한 자는 삶에서 말로서 죄짓는 일들 즉 “거짓말, 허위, 사기, 궤사, 정의나 자비에 어긋나는 말, 비방”을 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고의로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했다.


2) 성령 충만과 은혜의 수단


우리의 칭의와 성화가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되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물주심”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물주심”은 성령 충만이다. 이것을 받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의 정하신 모든 의식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정해진 수로를 계속 지키는 것” 즉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 때에 성령 충만을 받는다.


웨슬레는 구체적으로 ‘은혜의 수단’이라고 말한다. 종교의미로는 예배와 찬송 ,기도이며 도덕적 의미로는 선행, 구제 등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초대기독교의 구원받은 개인들은 “단순히 악을 행하는 일을 그만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초대기독교들의 영혼은 “선을 행하는 일을 갈망”했다. “단순히 악을 행하는 일을 그만둔 것”은 소극적인 것 겸손, 인내 등이다. “선을 행하는 일을 갈망”은 적극적인 것으로 구제하는 것 등이다.


3) 점진적이며 순간적인 성화


웨슬레의 이 성화론은 몇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특징은 점진적인 성장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칭의를 포함하는 초기의 성화의 단계로부터 완전한 성화의 단계로 점차 성장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거듭난 이후에도 그 사람의 신앙은 계속하여 성장한다는 것이다. 웨슬레가 이처럼 점진적인 발전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 성화의 시작은 신생이었다. 신생의 순간적인 경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내적인 새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부은 바 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 성화의 발전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해서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을 향하여는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둘째 특징은 성화의 이 점진적인 과정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인하여 어느 순간에 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끌려 올려지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웨슬레가 이처럼 성화의 과정에서의 순간적인 발전의 단계가 있다고 보았던 것은 ‘성화’는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그 자신의 이해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4) 웨슬레의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의 특징


첫째, 웨슬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기독교의 진수였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얻을 수 있는 것으로서의 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이기도 하였다. 웨슬레는 이 목표로서의 기독교인들의 완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것은 의도의 순수성이요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것은 온갖 더러움과 모든 내적. 외적 불결을 탈피하는 마음의 할례이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특징은 동기와 사랑 안에서의 완전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음에는 사랑과 반대되는 그릇된 성정(性情)이 전혀 없고 생각과 행동의 전부가 순수한 사랑에 의하여 지배되는 상태의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완전한 사람들의 생활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된다.


세 번째의 특징은 순간순간 주를 의지함으로 유지되는 완전이었다. 이것은 웨슬레의 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특징이다. 웨슬레는 죄를 이중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는 율법을 의식적으로 범하는 죄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을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죄였다. 그리고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가운데에서 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는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연약성으로 인하여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결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순간순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웨슬레가 말하는 완전은 순간순간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가능한 완전인 것이다.


네번째의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전도와 봉사의 원동력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성결은 윤리적 또는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웨슬레에 의하면 사랑의 행동이 나타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행동은 복음 전파와 사랑의 봉사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해야 되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살리고자 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은 사랑이어야 한다. 즉 복음 전파와 사랑의 봉사의 생활로 이루어지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어두운 세상을 밝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론은 복음 전파와 사회봉사의 동기와 기초를 제공하는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2. 칼빈의 구원 이해


(1) 하나님의 절대 주권


칼빈신학을 특징짓는 것은 신관에 있어서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과 장엄한 주권적 의지의 사상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의 사상은 칼빈 신학을 관철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만물의 절대적 소유자 도는 궁극적 지배자가 되신다. 그는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 창조하신 세계를 실제로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은 보편적이요 절대적이지만 단순히 맹목적인 힘의 주권이 아니고 무한한 예지와 성결 및 사랑이 결합된 주권이다.


칼빈은 ‘섭리 교리에 대한 올바른 적용’을 언급하면서 세상에서 발생하는 제반사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 포함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나님은 “영원, 영원부터서 그 자신의 지혜로 그가 하시고자 한 바를 작정하셨고, 그리고 지금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 그가 작정하신 바를 실행하시는 만물의 중재자이시오 통치자이시다. 그러기에 하늘과 땅과 무생물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생각과 뜻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통치되어 그들은 그들의 정해진 목적에로 정확하게 인도되며, 따라서 어떤 것도 우연하게 우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서는 천사도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심부름꾼이며 마귀가지도 하나님의 권능아래서 하나님의 의지를 수행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 분을 섬기는 자이다.


칼빈은 구원의 문제에서도 선택과 유기(遺棄)에 관한 일체를 하나님의 자유롭고 절대적인 주권에 돌리고 있다. 선택문제에 있어서 칼빈은, “신자들이 구원은 하나님 자신의 무상의 선한 뜻 외에 어떤 원인이나 이유도 고려될 수가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유기의 근거는 죄라고 주장한다. “불경건한 자의 부패와 약함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이유와 기회를 준다.”고 보며 “경건한 자들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자보다 더 높은 어떤 것도 생각되어서는 안 되며, 유기자의 영벌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의로운 엄정보다 더 높은 어떤 것이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사법권이 유기의 개념에 들어 있음을 뜻하며 칼빈은 이 용어가 뜻하는 바의 진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에 있어서 그의 신학 체계의 대부분의 논의의 대상인 구원 문제에 있어서 “조건과 제한을 다 기각하고, 예정의 근거를 하나님의 주권에 두며 이 하나님은 공평과 공의의 신이시기에 그의 주권 행사에는 어떠한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 신학의 전체를 일관하여 흐르는 주된 특성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사상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칼빈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전하여지지도 않고 그것을 들은 사람들에게 독같이 용납되지도 않는 경험적 사실을 지적하면서 예정론을 말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예정론에 대한 그릇된 사상과 반대가 폭주하였고 이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발전되어 명확성을 띄게 되어서 결국 칼빈 특유의 교리 형태에까지 형성되게 되었다.


개혁자들이 이 교리를 중요시하게 된 이유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고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행할 힘이 없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로마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무시하고 자기 의와 공적을 믿어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므로 이에 대립하여 그 은총을 올바르게 인식하려는 노력에서, 구속과 영원한 진리의 유일 절대한 교사인 성서의 가르침에 돌아가려는 의도에서 되어진 것이라 하였다.


즉 개혁자들에게 예정론을 논리적인 문제에서가 아니라 복음의 중심 사실에서 당연하게 귀결된 것이었다. 다음은 예정론의 특징적인 면이다.


1) 이중예정


칼빈은 성경이 예정론의 교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아래 예정의 교리를 실제적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담대히 가르쳤으며 또한 로마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구원론’에 가서야 이 교리를 서술하고 있다.


칼빈의 예정(豫定, Predestination)이란 “하나님께서 인류 각 개인의 형성에서 그 원하시는 바를 결정할 때 근거하는 그의 영원한 칙령이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운명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어떤 사람은 영원한 저주에 미리 작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이 둘 중에 하나를 목표하여 창조되었다. 곧, 생명에나 사망에 예정되어 있다.”고 하였다.


칼빈 자신의 말 속에서 이중 예정이란 표현은 찾아볼 수 없으나, 그는 예정론에 대한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는 가운데서 이중예정의 교리를 요약 설명하며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칼빈이 선택과 유기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불멸한 계획과 섭리에 다른 행위로써 간주하고 있음을 지적하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칼빈은 하나님께서 선택할 자와 아울러 버리실 자를 이중적으로 선택하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유기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이중적인 예정교리가 부각된 것은, 하나님의 의지의 절대성의 주장에 대하여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의 행위에 의하지도 않고 ‘영원한 포기’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칼빈은 ‘영원한 포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변호하는 한 장을 기술하여 이중예정론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칼빈은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의사의 절대성을 아무 보류도 없이 긍정하였다. 즉, 구원의 확실성에 관한 인식은 사람에 근거하지 않는 바 우리가 신의 자녀임을 아는 것은 신이 그의 영을 통해서 우리를 값없이 신의 자녀의 위치에 용납하셨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셨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확실한 담보를 믿음으로서 붙들고 있다는 사실에만 근거한다.


이러한 예정론에 대하여 은총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하므로 신의 영광을 높이며,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고 칼빈은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한다고 칼빈주의자들은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구원의 확실성은 선택의 확실성 안에서의 현실적인 확실성인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여진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돌보아 주신다고 말한다. 또한 ‘영원한 포기’도 함께 하시는 신의를 변호하는데, 인간은 이미 타락하고 부패된 상태에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지 못한다고 하여 여러모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주장 근거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원리에 모순되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회개하기를 참고 기다리신다는 성서내용에 배치되며 로마서 9장 13절 같은 표준적인 구절에 ‘강퍅하게 할 자를 강퍅하게 한다’고는 있어도 멸망시킬 자를 멸망에 정한다고 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대에 대하여 칼빈은, 선택이란 것은 기각을 전제하는 말이며 하나님의 의지가 절대하다면 당연히 기각도 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이중의 예정을 변호하였다. 이와 같이 이중예정의 교리에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주권이 강조되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이유는 전혀 허용되고 있지 않다. 하나님 주권에 대한 극단적인 강조라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칼빈의 예정론은 운명론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2) 제한적 선택


칼빈은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는 로마서 9장 13절의 바울의 말을 빌어 제한된 선택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영생의 계약을 맺으셔서 어떤 민족을 자신에게 부르실 때에는, 무차별적인 은혜로 모든 사람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방법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구원의 약속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고, 믿음만 있으면 죄인들 사이에 구별이 없다. 그러나 선택된 자들은 이 약속을 받아들이지만, 악인들은 보편적인 약속에 의해서도 죄의 속박을 피할 수 없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구별 짓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 즉 하나님의 조명이다. 이 조명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의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약속의 보편성으로도 하나님의 제한된 선택을 넘어 설 수 없다. 회심도 마찬가지이다. 즉 모든 사람에게 회심을 통한 선택의 길이 열려 있지만 자신 안에서는 회심할 수 없다. 회심도 영원한 선택에 의해 선택된 자에게 제한적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이 “모든 사람”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칼빈은 이것은 인간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기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선택하시는 자유를 말할 뿐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을 불러야 한다는 어떤 고정된 법을 만들어 스스로를 구속하시지 않는 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모든 민족 중에서 매이지 않고 부르시는 자유를 가지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이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한다는 제한된 선택은 지켜질 수밖에 없다.


(3) 의인과 성화


1) 의인


의인의 교리는 개신교 신학의 출발점이었다. 칼빈은 의인 또는 칭의가 이루지는 방법에 있어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째로, 전적으로 완전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요. 둘째로, 그가 그리스도의 의로 자신을 장식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인이라는 것은 하나의 의화가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신의 심판적 행동이다. 의인의 과정은 최고 재판자로 말미암은 은혜스러운 용서에서 된다. 오직 신이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히심으로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아니하시고 인간을 무죄석방하신다. 신은 “사실은 그렇지 않으나”인간을 의롭다고 선고하신다. 이처럼 칼빈은 중생 교리뿐만 아니라 의인 교리에 있어서도 계시 신학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그의 의인 교리에서 두 가지 큰 점이 생각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첫째는 이 교리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무상의 칭의만이 가련한 죄인에게 양심의 평화, 안위, 안정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2) 성화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는 “주께 성별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주께 바친 바 되어서 그에게 속한다는 성별은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되는 데 “참으로 정결한 생활”을 하는 일과 율법을 마음속으로부터 순종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주게 성별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반대되는 모든 것” 곧 “세상을 버리며 세상에서 구별된다는 것과 동의어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신자의 성화문제를 논할 때에 부득이 세상 욕망을 문제 삼게 되고, 세상 욕망을 끊는 제일 좋은 방법으로 내세의 명상을 내세웠던 것이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의 교리는 회개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가 말하는 회개는 상당히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바, 회개는 진실하고 겸허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데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생명이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히 돌아서는 것이다. 회개는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데 있는 바 이것을 중생이라 한다. 왜냐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중생이라는 말은 참회, 새로워 짐, 성화, 회심과 같이 쓰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의 회개의 정의로 세 가지 점을 들어서 설명하였다. 첫째로, 생명 자체를 하나님께 향하는 회심임, 여기는 전 정신과 목적의 변화가 나타나나다. 둘째로, 참 회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데서 난다. 셋째로, 육과 남은 자아를 죽이며, 영이 소생하는데서 나타난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이 중생은 순간의 사업이 아니고 죄와의 투쟁에 있어서 우리의 지상 생활 중 계속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의인이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을 말한다면 성화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엉망이 되고 거의 말살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즉 완전한 신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우리도 닮게 되며, 따라서 참 경건과 의와 순결과 인식에 의해서 신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 이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부활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칼빈은 이 신생교리에서도 엄격히 계시 신학을 추구한다.


칼빈은 물론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발전적인 성화의 생활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실족하고 ,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무능을 날로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능력 한도 내에서 조금씩이라도 전진하라고 권면하였다. 지상에서의 성화의 성취에 부정적인 칼빈은 루터처럼 의인과 동시에 죄인이라고 주장하며, 성화의 개념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3) 의인과 성화의 구별과 일체성


칼빈은 칭의는 받아들여지는 첫 순간부터 완전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칭의는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을 수 있는 인간의 신분을 가리키며 성화는 인격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칭의와 성화는 구별된다. 즉, 칭의는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에 기초하고 있으며 성화는 그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만약 칭의가 순수하다면 그것은 외적으로 효력이 있는 성화에로 연장된다”는 점에서 두 가지 은총 즉 의인과 성화는 분리될 수 없다 주장하여 통일을 이루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신앙은 행위와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성화를 칭의의 신앙에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것으로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일체성을 가지며 공존하는 것이다.

 


Ⅳ. 웨슬레와 칼빈의 공통점과 차이점


1. 공통점


웨슬레와 칼빈은 1)칭의의 근거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같다.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2)또한 신자가 그 안에 죄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과 지속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3)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자신이 온전히 죄인이라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려 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4)구원을 받기 위해 복음인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을 복음의 역사로 알게 되어 복음이 내 안에서 역사하기를 요청한다. 성화의 입장에도 공통점을 보였는데, 5)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이것은 성화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2. 차이점


(1) 인간의 무익함을 주장하는 순서


웨슬리는 선행의 은총으로 시작해서 확신의 은총으로 회개하며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과 모든 것이 구원을 이루기에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만 칼빈은 신앙이 생긴 다음에 이런 역사가 나타난다고 말을 한다.


(2) 성화의 시기


칼빈은 세상에서는 완전해질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3)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이해


칼빈이나 웨슬레 두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에서 비롯된 체험이 그들의 신학형성에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체험의 신학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보여주게 되었다.


칼빈은 갑작스런 회심의 경험대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능력으로 이뤄진 순간적인 구원을 논리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기에 칼빈은 믿음, 회개, 중생, 칭의, 성화는 동시적 사건으로 보았으며 시간적 순서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의 신앙고백은 예정사상에 근거한 결과론적인 특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웨슬레 역시 올더스게이트 체험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였지만 그는 구원의 과정을 시간적 순서로 전개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칼빈은 구원론에 있어서 칭의 교리가 강조되었으며 웨슬레는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성화(성결)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 독특한 사상


웨슬레는 구원에 관해서는 칼빈의 반대 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과 함께 구원의 보편성을 내세워 칼빈주의 예정론을 반대하였다. 특히  다음은 예정론의 입장에서 웨슬레와 칼빈이 보인 독특한 사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웨슬레의 아르미니우스적 만인대속설


웨슬레는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에서 칼빈주의적 교리들을 배격하고 있다. 웨슬레는 사람이 구원을 받고 못 받음은 인간이 그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임에 달렸다고 하여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해 아르미니우스적 만인대속설을 주장하였다. 웨슬레가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아르미니우스에 대하여 반대적 입장을 취한 부분은 대략 다음 네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 바, 첫째 타락은 육체의 부분적 취약성이 아니라 전적인 도덕적 타락이라는 것, 둘째 타락의 상태에 있는 인간은 신의 은총에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 셋째 아담에 의해서 사람에게 초래된 죄책감은 그리스도의 의에 의하여 제거되었다는 것, 넷째 인간에게 성령의 역사에 협력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은 타락된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편적 영향력에 속한 것 등이다. 이와 같은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웨슬레와 아르미니우스를 동일 선상의 신학적 입장으로 본다면 커다란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웨슬레는 사색적이나 철학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실제적이었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와 공의보다 구원과 직접 관련이 깊은 사랑에 역점을 두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에게 골고루 미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칼빈주의의 예정론과 선택의 도리에 적극 반대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죄에 빠진 인간의 구원에 지대한 관심과 열의를 가지신다고 그는 믿었다. 칼빈주의의 예정론은 웨슬레의 실제적인 삶에서 또는 전도의 현장에서 오히려 해를 끼쳤다. 웨슬레에게 있어 그의 신학형성은 성경, 이성, 경험의 세규범으로 늘 조명하며 새롭게 형성해 나갔다.


칼빈의 이중예정론은 논리적으로 정연하나 실제적인 신앙생활과 전도활동에 산 신학이 못되자 웨슬레는 아르미니우스의 설의 일부를 차용하여 만인의 대속설을 주장하였다. 웨슬레에 의하면 예수의 대속은 만인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은총관은 윤리나 사회책임에 대한 신자의 태도를 명확히 해 루터의 유신론 속에 다분히 내포되어 있는 율법무용론적 요소를 배제함과 동시에, 모라비안의 신비주의적 정지의 신앙을 바로 잡아 놓았다.


(2) 칼빈주의의 예정론


칼빈은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한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아니다. 칼빈은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서 사람을 구원한다면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믿음을 주지 못해서 실패한 것이라는 논리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 구원할 사람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칼빈주의에 따르면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단 일회적인 결정에 의하여 어떤 이들은 구원으로 정해졌고 어떤 이들은 멸망으로 정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속은 오로지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만 위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속”의 은총을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에게만 유익한 것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칼빈주의의 예정론은 두 가지 근거 아래 예정론을 전개하였다. 첫째는 하나님의 행동의 절대자유에서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크건 작건 간에 모두가 하나님의 정하신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서도 유기로 예정된 자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둘째는 대다수의 인간이 하나님이 지시한 구원의 선포에 대하여 반응이 없이 냉담하다는 실존적인 현실을 경험하고 이 경험에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의 교리를 전개하여 나갔다.

 


Ⅴ. 결론


인간이해에 있어 칼빈은 아담의 범죄, 즉 원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을 주장하여 전 인류가 파멸케 되었음을 밝혔다. 자연인에 대한 웨슬레의 이해 역시 칼빈을 포함한 종교개혁자와 이후의 정통주의자와 동일한 것이다. 웨슬레 역시 아담이 타락한 결과로 온 인류가 타락되었음을 주장한다. 이 둘은 모두 원죄론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웨슬레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류의 타락을 믿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타락한 인간을 위하여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웨슬레는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웨슬레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 강조했으며 이 선행은총이 있기 까닭에 구원에 있어 인간의 책임성이 요구됨을 밝힌 점이 특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과 구원의 보편성에 기초한 만인대속설(Universal Atonement)을 주장하였으나 칼빈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운명으로 창조되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어떤 사람은 영원한 저주에 미리 작정되어 있음을 말하고 이를 예정(Predestination)의 교리로 설명하였다. 칼빈의 이해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제한된 선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행동의 절대자유라는 근거와 복음의 선포시에 영접과 무반응의 실존적인 현실을 경험하고 이를 근거하여 하나님의 선택과 버림을 전개하였으나 웨슬레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인간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열의를 근거로 해서 만인대속설을 주장하였다. 칼빈보다 후대에 살았던 웨슬레는 칼빈신학의 예정론이 실제적인 삶에서나 전도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신학으로서 어려움이 있음을 경험하였다.


칼빈은 구원론에 있어서 칭의 교리가 강조되고 있으며 웨슬레는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성화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웨슬레는 초기성화(신생)에서 온전한 성화로 나아가야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칼빈과 웨슬레의 구원관에 있어 공통점이 많으나 차이점도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칼빈주의들과 웨슬레안 사이에 야기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웨슬레도 칼빈도 그들의 신학을 성서에서 출발했던 것처럼 다시 “성서만으로”의 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논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신학은 인간적 편견의 오류를 가져올 수 있고 인간의 오류는 기독교 신앙의 성경적 확신을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값싼 복음으로 믿음의 질적인 성숙이 요구되어 성화의 교리를, 한국교회의 성숙을 요청하는 현실적 상황에서 칼빈의 정적 개념에 덧붙여 역동적인 웨슬레의 개념이 조화 될 때에 지체와 몸으로서 한국교회와 신자 모두가 구원의 감격과 함께 구원받은 백성의 윤리를 지닐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사회의 선한 누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칼빈과 웨슬레는 개신교 역사 속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성경의 보화들을 캐내어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이 귀한 유산들을 신학적 논쟁으로 인한 일방적인 대립이나 비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새롭게 상호보완적으로 조화시켜 가는 자세가 요청된다.


이러한 노력을 비춰볼 때 침례교회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 자기의 신학을 고수하고자 아집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기 위해서는 성경에의 보다 많은 탐구와 전도현장에서의 살아있는 신학으로의 태동을 꿈꾸며 침례교회, 아니 기독교의 미래를 위한 보다 견고한 신학적 정립은 반드시 필요한 21세기 선교 한국을 위한 초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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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은혜로운 주제별 성경요절
글쓴이 : 김용호전도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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