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청교도 신학 개요(강의안)

하나님아들 2013. 10. 12. 23:49

 

청교도신학개요2.hwp

 

청교도연구회 독서목록1(수정4) //blog.daum.net/kds2012 청교도의길

( 2013-08-20 ) //cafe.daum.net/psc-k 청교도연구회

 

저 자

책 명

 

저자

책 명

1

로이드 존스

청교도신앙그기원과계승자들

27

윌리엄 퍼킨스

설교기술,목사의소명

2

에룰 헐스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28

아이작

암브로스

예수를바라보라1,2

3

에드워드 힌슨

청교도 신학

29

스테판 차녹

하나님을아는지식1,2

거듭남의 본질

4

박영호

청교도 실천신학

30

루이스 베일리

경건의 연습

5

제임스 패커

청교도 사상

31

매튜 미드

유사 그리스도인

6

조엘 비키

청교도를만나다

개혁주의청교도영성

칼빈주의

32

존 오웬

내안의 죄죽이기

그리스도의 영광

영의생각,육신의생각

성령론

7

리랜드 라이큰

청교도-이세상의성자들

33

존 번연

천로역정

죄인괴수에게넘치는은혜

8

돈 키슬러

청교도를읽어야하는10이유

34

새뮤얼러더퍼드

서한집

9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1,2,3

부흥

로마서강해1,2,3권

에베소서강해1,2권

산상설교(상하)

십자가와구속

35

토마스 왓슨

하나님을경외함

팔복해설

십계명해설

주기도문해설

신학의 체계

10

이안 머리

로이드 존스 평전

1,2.3

36

리차드 십스

상한갈대와꺼져가는심지

영광스러운 부르심

11

조나단에드워즈

신앙감정론/전집1

부흥론/전집7

구속사/전집4

고전13장,사랑

37

토마스 굿윈

그리스도인의 성장

어둠속을걷는빛의자녀들

38

리차드 백스터

회심

참된 목자

성도의영원한안식

12

양낙홍

조나단에드워즈생애와사상

39

토마스 브룩스

확신지상에서누리는천국

13

존 라일

거룩

18세기영국의영적거성들

거듭났는가

구원의확신

신앙강좌시리즈(10)

40

존 플라벨

하나님의섭리

은혜의방식

41

제임스 뷰케넌

회심과 부흥

42

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14

스펄전

전기

회심을위한불같은외침

부흥 열망

목회자들을위하여

목회자후보생들에게

43

토마스 빈센트

성경소요리문답해설

44

조셉 얼라인

돌이켜회개하라

45

존 폭스

기독교 순교사화

15

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고백록

46

토마스 보스톤

내몫에태인십자가

16

마틴 루터

로마서주석

47

존 프레스톤

황금홀

기도의영성

17

칼빈

기독교강요

요한복음주석1,2

48

메튜 헨리

주석 21권

메튜헨리의기도

18

조지 휫트필드

일기

49

메이첸

기독교와자유주의

19

엔드루 보나

로버트 멕체인

회고록

50

프란시스 쉐퍼

이성에서의도피

기독교와현대사상

20

존 에인절 제임스

간절목회

51

마이클 호튼

세상의 포로된교회

그리스도없는 기독교

21

켈리 카픽

청교도고전으로의 초대

52

행크헤네그라프

바벨탑에갇힌복음

빈야드와신사도의가짜부흥운동

22

브루스 비클

복음과 청교도설교

53

레이 윤겐

신비주의와손잡은기독교

23

피터 루이스

청교도 목회와 설교

54

옥성호

심리학에물든기독교

마케팅에물든기독교

24

피터 툰

청교도와칼빈주의

55

박순용

오직 하나님께 영광

25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56

이태복

영성 이렇게형성하라

26

존 파이퍼

하나님의 열심

57

 

 

 

1. 에드워드 힌슨, 『청교도 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청교도들의 신학 작품들은 너무 오랫동안 현대의 신학자들에 의해 소홀히 여겨졌다. 청교도들의 작품의 신학적 내용에 관한 관심이 되살아난 것은 다만 최근의 일이다. 그리고 그것에 고무되어져서 이 책이 편집되게 되었다. 이 책의 목적은 신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조직신학의 몇 가지 주제들에 관한 주요한 내용을 설명하며 또 여러 청교도 저자들과 친숙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수록된 논문 선택의 기준은 신학에 대한 일관성 있는 설명 이 아니라 다양한 문제들에 관한 기본적인 청교도적 가르침을 제시하는 데 있다. 이 책에 포함된 저자들은 영국 국교회,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그리고 비국교회 등에 걸쳐 폭넓게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관하여 최고의 권위자임을 알 수 있다.

 

머리말

서문/제임스 패커

제 l 장 청교도들에 대한소개

제 2 장 자연신학/존 프레스톤

제 3 장 성경/존 주웰

제 4 장 하나님/스티픈 차녹

제 5 장 인간과 죄/토마스 맨톤

제 6 장 그리스도/제임스 어셔

제 7 창 구원 : 서론/윌리암 퍼킨스

제 8 창 구속/존 오웬

제 9 장 중생과 회심/사무엘 홉킨스

제 10 장 칭의/조지 다우넴

제 11 장 성화/존 번연

제 12 장 교회/리차드박스터

제 13 장 종말론/조나단 에드워드

 

 

 

 

 

 

 

 

 

 

 

 

 

 

1-1 청교도 신앙

 

현대신학의 발생으로 인하여 신학적 연구는 다시 복잡하고 난해한 일이 되어버렸다(폴 틸리히의 조직신학 3권을 보라). 절대적 진리의 상실은 절대적 도덕의 상실로 끝나고 말았다. 신학의 중요성은 실존주의에 의해 극히 줄어들어 왔다. 현대 신학자들에게 진리로서의 진리란 더이상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게 되고, 불행하게도 이러한 태도는 현대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교리가 타락하게 되면, 복음주의의 방법과 행동의 원칙까지도 역시 타락하게 된다.

 

밀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청교도란 과거 역사가들이 오랜 동안 생각해온 것같이 수척한 몸매에, 검은 모자를 쓰고 머리는 길다랗게 늘어뜨린, 흥이나 깨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우머 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하나님께 대한 영적 헌신의 깊은 지각을 소유한 다채로운 사람들이었다. 17세기 청교도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한 사람이 청교도들을 묘사하기를, 그들은 누구에게보다도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고, 또한 가장 좋은 기독교인이란 가장 좋은 남편과 아내, 부모, 자녀, 주인, 그리고 종이 되어야 하며, 그 결과 하나님께 대한 교리가 모욕을 당하지 않고,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초기 청교도인 윌리암 퍼킨스(Wiliam Perkins)는 케임브릿지 대학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다(그런데 예정과 파멸에 대한 교리를 다룬 그의 ‘금사슬 이론’(Golden Chain)은 이 책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국 ‘결의론적 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윌리암 암즈(William Ames)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퍼킨스의 강의를 들은 그의 경험을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퍼킨스는 학생들을 진리 안에서 건전하게 교육하였고, 그들에겐 경건함을 추구하도록 잘 이끌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하에 있는 진정한 종교와,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증진시키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영국 국교회의 완전한 정화에 대한 희망이 희미해지자, 청교도들은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신학자들이 되었다. 케반은 “그들은 설교를 베풀었고 기독교회의 개혁이 성경적 원칙들에 대한 충분한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영국에 있어서 영적인 일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창조하려는 과업을 수행하였다”고 하였다. 국교회의 약점은 종교개혁 자체의 약점 때문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원칙들을 충분히 따르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근본주의는 청교도주의의 소산이며, 또한 순수한 교리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거의 모든 근본주의자들은 그들이 매우 많은 영향을 받은 영국 개혁가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고, 더 나아가서 아예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조차 못한다.

 

청교도 신학자들의 특징은 그들은 첫째로는 설교자들이었고, 둘째로는 신학 저술가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저서들은 주로 그들의 설교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교리를 기독교인의 생활에 적용하는 것을 강조한 것 때문에, 그들의 저서들은 자연히 실천적 신학으로 되어졌다. 청교도들은 상아탑 신학자들이 아니라, 인간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설교자였다.

 

청교도(Puritan)라는 명칭은 청교도들은 속이 좁은 위선자들이라고 간주했던 국교회 고교회파교도들(High Church Anglicans)에 의해서 청교도 운동에 경멸적으로 주어진 이름이었다(이는 마치 오늘날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근본주의자라는 말이 가끔 적용되는 것과 마찬 가지이다).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은 때때로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 그들을 정죄하는 것보다 더 빨리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들을 정죄해 버린다.

 

청교도의 헌신은 기독교 신앙의 표본이다. 청교도들은 교리의 순수성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청교도 성직자들은 그들의 양떼들을 다정하게 이끌어주고 기독교인들을 사단의 간계로부터 벗어나게 인도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예수 안에서 안식을 얻으라고 권고하는 데 항상 관심을 갖고 있었다. 리차드 그린햄과 그의 사위 존 도드는 복음을 가장 무지한 영혼들에게도 그들 자신들의 어휘와 표현들로써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실로 유명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과 진리를 사랑하였다. 그들은 결코 바리새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과격론자들과 광신자들을 탄핵하였다. 그들의 영적 신앙은 신실하였는데, 그것은 성경적 교리를 실행한 결과였다.

 

청교도의 헌신에 대한 열쇠는 훈련이었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운명에 내어 맡기는 생활이 아니라 훈련된 생활이다. 너무 많은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이 원칙을 완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 교회들이 진리는 놓치고 거짓들을 붙잡는 것이다.

 

청교도의 마음 중심에는 절대적으로 권위있는 성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단련시켰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변혁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직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종교개혁도 중단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인생들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에 의하여 변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토마스 크랜머는 “… 이 책은 가장 값비싼 진주요, 지구상에 남아있는 가장 거룩한 유물,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썼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청교도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강조점을 포함하였다. 도덕적 율법은 단련된 신자들에게서 그 권위를 발휘하며, 또한 그것은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그들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유용한 것이다. 케반은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율법의 권위는 기독교인의 생활에 대한 청교도의 관념에 있어서 가장 중심되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스도에게 대한 진정한 헌신은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에 대한 복종을 포함한다. 청교도들은 결코 이러한 복종이 구원에 대한 기준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 마음의 피할 수 없는 결과요,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이 되어질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율법의 실제적 적용을 강조하였다 : 즉 죄를 견제하고,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며, 신자들의 행위를 이끌어 주는 것 등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칼빈의 가르침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율법은 죄인이 그의 커다란 실패와 궁핍을 깨닫도록 하며, 또한 신자가 거룩함과 정직함을 얻기 위해 싸워 나가는 것을 격려하기 위해서 설교되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청교도들은 소위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과 같이 될 수 있으면 세상적으로 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경건되이 살려고 하였다. 크랜머“진정한 신앙은 언제나 선한 행위를 수반한다”고 기술하였다. 단지 진정한 의로움만이 인간의 신앙과 회개의 진실함을 증거해 준다. 에드윈 샌디즈는 “또한 우리가 그에게 빚지고 있는 의무는 우리가 그를 계속적으로 섬기는 생활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있다”고 기술하였다.

 

20세기의 교회는 설교와 신학에 대한 기독교의 힘있는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 이 진리를 회복하고 재강조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샌디즈는 다시 기술하기를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우리의 마음에 심어진다면, … 우리들은 그렇게 무관심한 방심 속에서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복음은 우리 안에서 보다 좋은 효과를 나타낼 것이며, 또한 보다 많은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마침내 불신앙과 세상적인 욕망을 내어 던져버리고, 건전하고 정당하며 경건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성직자들은 양떼들을 먹이기에 더욱더 부지런하게 될 것이며, 성도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준비를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성화는 신자의 생활 가운데 일어나는 성령의 즉각적인 역사이지만, 그 완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단련의 과정을 수반한다. 존 주웰(John Jewel)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며, 영원한 왕국의 상속자들이다. 우리들은 기독교인이며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록한 복음의 선생들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 거룩한 삶에 대한 이런 열렬한 헌신은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과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도리를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청교도 신앙은 가톨릭 신앙과 크게 대조되었다. 신플라톤주의를 기초로 한 후자는 기독교인의 생활가운데 정죄(淨罪), 조명, 연합 세 가지 단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청교도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기독교인의 생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와같이 “모든 영적인 생활과 거룩함은 그리스도의 충만함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지고, 그와의 연합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가운데 은혜를 간직하는 처음 과업이다”. 다시 말하지만, 만약 우리가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를 최소로 하려는 에큐메니즘의 홍수를 견디어내려 한다면, 오늘낱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이 진리들을 다시 붙잡아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의 진리에 충실하는 것은 청교도 신앙의 진정한 특성들이었다. (pp 16-22)

 

 

1-2 청교도 교리

 

청교도주의의 위대성진실한 교리와 올바른 실행의 유일한 출처로서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충실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신조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전인격을 통합시키는 생활철학이었다. 이와같이 청교도들은 과학, 논리학, 철학을 두려 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각 분야와 연관시켜 통합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학문적 추구의 분야에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성경이 이성과 학문으로 더불어 조화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단순한 이성주의가 하나님의 말씀을 파기하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을 모든 분별있는 진리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였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의 관계에서 실체를 분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거의 모든 현대 신학자들이 하는 것과는 달리 자연신학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만이 인간의 필요에 대한 유일한 분별있는 대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타락한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한 그들의 강렬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은 그들 자신이 죄인들에게 그들의 불신앙의 비합리성을 보여주어야 하며, 성령께서 그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조명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해 버릴 때 그는 또한 법, 정의, 교육, 그리고 철학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기초마저 버리게 된다고 믿었다. 그는 단지 공허하고 무의미한 우주에 남게 되며, 그의 유일한 선택권은 자기보존과 자아만족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말하기를 20세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개혁자들이 매우 잘 파악하였던 진리, 즉 「신앙과 이성」은 하나라는 사실을 통해서라고 하였다.「하나님의 진리」는 단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에만 비합리적이다. 현대 인간의 절망에 대한 기독교의 해결책은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에 복종하게 된다면, 통합되고 합리적인 진리가 유효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교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청교도들은 칼빈주의자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들의 생활에 대한 견해는 하나님 중심적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인도되어지고 지배되어졌다. 성경의 해석이란 철저하게 연구되어지고, 주의깊게 다루어져야만 될 심오한 기술이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퀘이커의 광신적 방법론들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런데 퀘이커는 신앙과 이성을 정열과 감정에게 종속시켰다. 존 코튼은 “열정이 없는 지식은 더이상 지식이 아니긴 하지만, 지식이 없는 열정은 성난 불길과 같다”고 기술하였다.

 

청교도주의는 「정통신앙과 열정적인 헌신의 건전한 결합」이었다. 이 두 요소는 후대에 청교도주의의 두 파생 교단 즉 유니테리안파와 신앙부흥운동으로 분리되어졌다. 유니테리안들은 그들의 권위와 완전히 세속화된 종교로서 성경의 진리에 이성만을 대치시켜 버렸다. 한편 신앙부흥운동가들은 감정을 너무 강조했었다. 1740년대에 있었던 대각성운동은 아직까지는 본질적으로 청교도운동이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있었던 신앙부흥운동은 단련된 성직의 개념까지 포함하여 청교도주의의 거의 대부분의 자취들을 포기해 버렸다.

 

청교도들은 영감에 의한, 그리고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히 맡겨졌다. 그들은 인간이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며 인간이란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따라서 그 자신을 구원시킬 수 없으며, 그 결과 그는 구세주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그의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의 죄없는 피를 인간에게 흘려주셨고, 그를 죄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다. 구원은 완전한 은혜의 산물이며, 인간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그것을 얻거나 완성시킬 수 없다. 인간은 그를 대신한 하나님의 독립적인 역사로 구원함을 받은 것이다.

 

청교도들은 추상적인 신학자들이 아니라 설교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고 철저하게 연구하였으며, 그리고나서는 그 진리를 그들의 청중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들은 능력있는 설교자들이었다. 윌리암 틴데일은 은혜에 대해서 말하기를, “올바른 신앙은 인간의 환상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그러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들에게 자유로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순수한 선물이다. 우리는 받을만한 자격도 없고 정말 그것을 찾지도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은사와 은혜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청교도들을 연구하는 것이 오늘날 어떻게 복음주의 교회에게 유익을 주는가? 그것은 우리가 우리들의 설교에 있어서 성경의 교리들을 다시 받아들이도록 용기를 북돋워준다. 우리는 청교도 신학의 모든 세목을 다 설명할 필요는 없으나, 그들 중 몇 가지 점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로,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과 그 본질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들은 그들의 죄로부터 돌아서기 위해서 진지하게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들을 행하여야만 한다”고 설교하였다(행26:20). 죄인은 그의 죄와 그 자신의 의와 사탄,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그러한 회개는 세상을 부러워하거나 그것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들이기를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진정한 그리스도가 죄인들에게 나타내져야 한다. 우리의 열정은 숫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들의 깨어진 마음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적극적인 설교를 게을리해 왔다.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 생애가 드러나 있는 복음들과, 그의 본성과 속죄사역이 나타나있는 기독론으로부터 설교되어져야 한다. 죠셉 알레인은 “불완전한 개종은 그리스도를 반만 받아들인다. 구원의 그리스도는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성화에 대한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완전한 개종은 그리스도 전체를 받아들인다. 그는 그를 아무런 예외도, 한계도, 보류도 없이 모든 계획과 목적에 있어서 받아들인다”고 기술하였다.

 

매우 건전한 교리와 열의있는 성도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이며 지욱으로 가는 문들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pp 22-28)

 

 

 

 

 

 

 

 

 

2. 에룰 헐스,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이중수역, 목회자료사, 2001

 

청교도를 알면 2천 년 교회사에서 종교개혁 다음으로 중요한 영적 운동을 알게 되는 셈이다. 청교도가 개신교에 끼친 영향을 모르고 오늘날 교회의 전통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이 놀라운 역사적인 갱신 운동과 새 삶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우리의 영적 시야를 넓혀 줄 것이다.

 

이 책은 청교도를 입체적인 편집으로 간명하고, 정확하며, 쉽게 설명하였다. 1부에서는 청교도 이야기를 통해 청교도의 기원과 흥망을 당시의 역사를 중심으로 설명하였고, 2부에서는 청교도들의 생애를 인물 중심으로 3세대까지 포함시켰으며, 3부에서는 청교도들에게서 받 는 도움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교리와 실천 생활에서 조명했으며, 부록으로는 6개의 관련 주제를 별도로 뽑아서 선명한 해설을 하였다.

 

본서를 읽고 나면 청교도에 대한 확실한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청교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서 한 눈에 들어오도록 본서보다 더 쉽고 명쾌하게 소개한 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청교도의 삶과 정신, 그들의 신학과 설교, 그리고 그들의 문제와 투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필독서가 되길 희망한다.

 

역사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경험 많은 여행자와 같다는 말이 있다. 그런 여행자는 지방 풍습의 부정적인 현상들에 시선이 묶이지 않고 멀리 내다볼 수 있듯이,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은 당시의 지혜에 따라 발생된 여러 사건들에 의해 쉽사리 속임을 당하지 않는다. 이것은 크리스천들에게는 더욱 사실이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역사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전시하고 자신의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하기를 즐겨 하시는 주된 영역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자기 교회를 건설하신다. 이 교회는 시공간을 점철하는 신실한 남녀들의 집단이다. 이 집단의 지체가 됐다고 말하는 자들이라면 그들이 이 교회 속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하나님이 행해 오신 일들에 관해서 무지해서는 안 된다.

 

그럼 교회사의 어떤 시대를 공부해야 할까?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3천 년대로 들어서는 크리스천들에게 더 풍성한 교훈을 주는 시대들이 있다. 청교도 시대가 그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시대는 믿음을 위해 투옥되고 죽음을 당한 남녀 성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와 함께 그러한 믿음의 생동력과 활력을 역사의 페이지 속에 담고 있다. 이제 이들의 이야기는 소책자, 논문, 설교, 일기, 기도, 교훈집 등과 같은 유산으로 남겨져 있다. 우리는 감히 청교도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실성을 확고하게 붙잡았고, 그러한 진리들을 지역 교회의 문맥 속에서 적용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성을 위하여 그리스도 중심의 열정을 가졌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적지 않다.

 

청교도들의 문서들을 검토해 보면 너무도 많은 분량의 황금을 발견하게 되어 마치 남아프리카 개척 당시의 금광 시굴자가 느꼈던 것과 같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다량의 보화들이 청교도들의 문서들에 보존되어 있다.

 

2-1 순교 사가(史家) 존 폭스의 결정적 사역

 

에드워드 5세의 짧은 통치 동안(1547-1553) 개신교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1553-1558)이 사망할 즈음에 잉글랜드는 사실상 로마와 다시 손을 잡은 상태였다. ‘피의 메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 여왕이 다스리는 기간에 270명 이상의 개신교도들이 화형대에서 순교하였다. 자신들의 믿음 때문에 순교한 이들 중에는 기술자들과 일반 평민들과 유명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명한 지도급의 인물로서는 존 브래드포드가 있었고, 감독들로서는 존 후퍼, 휴 라티머, 니콜라스 라이들리, 그리고 캔터버리의 대주교였던 토마스 크랜머가 있었다.

 

그리하여 메리 여왕 치하에서 잉글랜드의 가장 탁월한 인물들이 생명을 잃었다. 산 사람을 화형주에 묶어 태우는 끔찍한 장면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러한 사건은 1558년에서 1662년까지와 그 이상을 넘어가는 후속 청교도들의 정신을 형성하는데 하나의 주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잔인한 박해는 백성들을 로마 가톨릭주의에서 개신교주의로 전향시키는 효과를 일으켰다. 이러한 결과가 낳은 영향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다. 메리 여왕의 통치 때에는 그녀가 잉글랜드에 있는 로마의 최대 자산

이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사후부터는 그녀에 대한 백성들의 부정적인 기억 때문에 메리 여왕은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이 세력을 유지하는데 가장 큰 저해 요인이 되었다.

 

순교자들의 증언은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들의 영향은 존 폭스(John Foxe)의 성실한 글들을 통해 크게 증가되었다. 폭스는 1517년 랜커셔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가 석사 학위를 받을 즈음에 회심하였다. 그는 개신교의 확신 때문에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의 학자들은 가정 교사가 되어 주는 조건으로 숙식 제공을 해 줄 수 있는 부유한 후원자들에게 의존하였다. 폭스는 런던에서 그런 후원자를 찾을 수 없어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 하루는 성 바울 대성당 정원에 처량하게 앉아 있을 때였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그의 손에 후한 자선금을 쥐어 주었다. 그는 사흘 뒤에 라이게이트에 있는 써레이의 백작 집에 취직이 되어 백작의 자녀들을 가르쳤다.

 

메리 여왕이 왕위에 앉자 폭스는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서 프랑크푸르트와 바슬을 차례로 다니며 잉글랜드 망명자들과 합류하였다. 그는 순교사(史)를 집필하기 위해서 벌써부터 자료 수집을 시작해 오던 중이었다. 그의 자료는 사도들의 시대부터 메리 여왕의 통치하에서 박해를 당한 사람들까지 포함하였다. 나중에 폭스의 순교 자료는 1,700쪽으로 늘어났다. 그는 원래 문장가였는데 세부 사항까지 면밀한 서술을 하였다. 그의 진술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반증되지는 못하였다. 드디어 1570년에 방대한 『순교자들의 책』 (Book of Martyers)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대성당들과 교구 교회들과 공공 회사들의 강단에 진열되었다.

 

과거에는 이런 규모의 영향을 끼친 책이 영어로 출판된 적이 없었다. 더구나 그처럼 중요한시기에 이런 책을 능가할 서적이 없었다. 다니엘 닐은 이렇게 평하였다. “이 책만큼 교황 권에 치명타를 준 책이 없었다. 폭스의 순교사는 여왕에게 헌정하였다. 이 책은 너무도 평판이 좋아서 교회들마다 다투어 주문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는 그처럼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린 종교에 대해 경악과 혐오를 느끼게 되었다. 폭스의 순교사는 성경과 함께 많은 가정에서 가족용 필독서로 사용되었다.

 

폭스의 행적과 기념비들(그의 방대한 순교사에 대한 공식 타이틀)은 잉글랜드를 개신교로 전향시키는데 사용된 실제적이고 주된 방편이었다. 혹독한 죽음을 당한 마리안(Marian) 순교자들에 대한 감동적 증언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런 믿음을 일어나게 한 원인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 또한 폭스의 글은 청교도들에게 크리스천 영웅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새겨 주었다.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에 대해 신실한 중인이 되는 것이었다. 순교자들이 마지막 원수인 무서운 죽음까지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은 청교도들에게 영광스런 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잘 죽어야 한다는 것이 청교도들의 정신에 박히게 되었다. 우리는 번연(Bunyan)의 『천로역정』에서 여러 종류의 인물들이 죽음의 강을 건너려고 나오는 장면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미스터 낙담을 기억하는가? 그의 마지막 말은 ‘밤이여 안녕, 낮이여 어서 오라!’였다.

 

폭스는 순교자들의 마지막 임종의 말들을 적어 불멸의 교훈이 되게 하였다. 예로써, 함께 화형주에 달렸던 휴 라티머 감독이 라이들리 감독에게 한 말을 들 수 있다. “라이들리 감독이여 염려하지 말고 담대하시오. 우리는 오늘 잉글랜드에 하나님의 은혜로 누구도 끌 수 없는 촛불을 붙이게 될 것이라고 믿소. 지금도 옥스퍼드에 이들을 태웠던 화형주가 세워졌던 장소에 하나의 기념비가 서 있다.

 

존 폭스는 잉글랜드가 선택된 국가면서, 성별된 국민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특별히 부름을 받은 백성이라는 사상을 고취시켰다. (pp 41-45)

 

 

2-2 청교도들의 유산이 현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청교도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 존 오웬의 경우에는 깊이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신학의 형성이었고, 리처드 백스터에게는 열정적인 전도와 목회였으며, 존 번연에게는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 있는 설교였다. 그런데 이들이 얼마나 서로 달랐는지를 생각해 보라. 이것은 청교도의 주류가 오늘날의 우리 교회들과는 달리 다른 입장들에 대해서 대체로 관용적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청교도 신학과 헌신의 유산은 때때로 비범한 설교자들과 지도자들을 산출시켰다. 스펄전은 청교도들의 후계자로 불리운다.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다. 청교도의 또 다른 후계자는 로이드 존스이다 그는 청교도 서적들을 추천하였고 청교도 신학과 그들의 강해 설교 스타일을 따랐다. 그는 목회자들의 지도자로서 리처드 그린햄, 존 도드, 로렌스 채더턴과 같은 청교도 선구자들을 닮았다. 로이드 존스의 강단 사역은 다른 지도적인 청교도들의 경우처럼 저술의 바탕이 되었는데 그의 강해서는 아직도 전세계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청교도의 경건과 건전한 교리는 21세기에 들어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필요하다. 잉글랜드 청교도는 잉글랜드에 크리스천 가정과 주일을 주었다. 그들은 균형 잡힌 칼뱅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건전한 교리의 모범을 남겨 주었다.

 

또한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완전히 잃어갈 위기에 처한 성경적인 죄론을 그들의 저술들을 통해 보존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그들은 도덕법의 유효성을 인정하였다. 도덕법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한 사람이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행위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청교도는 우리에게 깊은 기도와 헌신된 삶을 촉구한다. 그들은 부지런히 마음을 지키는 일과 영적 전쟁의 실체와 깨어 있어야 하는 일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교회 성장에 대한 청교도의 소망은 하나님 중심이었고 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였다. 종말에 관한 청교도의 교리는 간절한 기도를 하게 하였고, 수고의 동기를 부여했으며, 인내를 일으켜 오래 참게 하였다.

 

청교도주의는 교리와 체험과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 매우 성경적이며 균형적이다. 그래서 청교도는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다. 앞으로 청교도가 이 세상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는지 누가 알겠는가?

 

만약 청교도의 주류가 미래를 낙관한 것이 옳았다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합2:14)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지식으로 채워질 것이다. 말래기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1:11). (pp 79-81)

 

 

2-3 칭의의 복음은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 자산이다

 

칭의란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들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다. 만약 어떤 종류의 선행이라도 칭의를 받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덧붙여지면 이것은 칭의 교리를 즉시 무효화한다. 바울은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칭의는 성화와 혼동되면 아무 효력이 없다. 칭의를 실제로 의롭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효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현재까지 로마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다. 존 오웬은 로마가톨릭의 가르침이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어느 정도로 밀어내었는지 지적하였다 “거저 받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를 옮겨 받는 칭의가 완전히 패배당하였다”. 영생의 확 신은 나중에 연옥불로 완성된다는 불확실한 과정에 의존하는 것으로써 제거되었다. 성경적 칭의는 너무도 깊은 확신을 심어 주기에 로마서 8장에서 모든 반대를 물리친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롬8:33-34).

 

존 오웬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다른 모든 방법과 수단들을 진정으로 내던지는 것을 포함한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행한 희생보다 더 큰 희생은 있을 수 없다. 이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선물은 완전한 선물이었으며 그의 희생은 완전한 희생이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아버지의 지혜로 아들이 우리의 의(칭의)와 거룩(성화)과 구속이 되었다(고전1:21).

 

우리가 이 희생을 붙잡고 희생물이 되신 아들의 의를 받으면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한 다른 모든 방법들을 버리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장하였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렘23:6). 시편 기자도 선포한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시71 :16). 이 의에 비해서 모든 자기 의(義)는 인정될 수 없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64:6).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적과 징조와 표적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복음 안에서 계시하신다. 바울은 이 복음을 가리켜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복음 설교에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다(현재 시제)고 하였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교회는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자산을 소유한다. (pp 176-180)

 

 

2-4 그리스도를 택하기로 결단만 하면 되는가?

 

알미니안주의의 오류가 지난 1백여 년 동안 서구 기독교에 퍼졌다. 이러한 오류들은 불가피하게 선교지로 묻혀 갔다. 청교도들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균형 잡힌 교리이다. 청교도의 안정된 교리는 그릇된 결론이나 오도된 행위를 막는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반드시 병립되어야 한다. 그릇된 결론은복음의 진리를 쉽사리 흔들어 버린다.

자유 의지는 종교개혁의 한 중심 이슈였다. 마르틴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주는 답변으로 『의지의 속박』(The Bondage of the Will)이라는 책을 썼다. 여기서 루터는 자유 의지는 구원의 근원에 대한 논쟁의 돌쩌귀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패커(J. I. Packer)는 의지의 속박에 대해 종교개혁의 투쟁이 무엇에 대한 것이었는지를 드러내는 고전적 설명이라고 하였다. 워필드(B. B. Warfield)는 이 책은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 개혁 선언서라고 하였다. 알미니안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아닌,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분명히 말한다(엡2:8-9).

우리의 첫 부모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타락 가능성도 함께 있었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 이것이 현재 인간 의지의 상태이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는 인간의 마음이 지닌 죄악된 성향에 의해 지배된다. 중생과 회심으로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갖게 된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신앙고백서들은 신자 속에서 계속되는 투쟁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로마서 7장을 인용한다. 자유 의지를 다룬 장의 다섯 번째 문단은 이렇게 선언한다. “인간은 영광의 상태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오직 선한 것만 행하는 의지의 자유를 완전하고 불변하게 가질 수 없다”.

패커와 존스턴은 1957년에 루터의 『의지의 속박』을 새로 번역하면서 서문을 썼다. “루터가 의지의 속박에서 변호한 원칙들을 수용하면 현대의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정신적, 영적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설교와 전도에 급격한 변화를 줄 것이며 대부분의 신학 분야와 목회 사역에도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사고는 오늘날 인기가 없다. 이것을 회복하려면 많은 문제들을 대하는 관점에 코페르니쿠스적인 혁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릇된 교리가 그릇된 행위를 낳는다. 구원 문제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옳고 그름에 따라 복음 설교의 방법과 교회에서의 행위들의 옳고 그름이 결정 된다. 인간 전체에 덮인 죄의 실체와 그 급진적 영향을 간과하면,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택하기로 결정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결단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것은 ‘천박한 신앙’으로 회개가 제쳐져 있다. 결단을 한 자에게는 구원받았다는 선언을 해 준다. 이런 식의 접근은 그릇된 결신자를 산출시킨다. 육적 교인의 이론은 결단을 하고서도 거듭난 표시가 없는 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켄트 필풋이 쓴 『당신은 정말 거듭났는가?』라는 책은 죄에 관한 온전치 못한 인간론에서 비롯된 오도된 방법 때문에 해를 입은 많은 실례들을 예시하면서 설명한다. 이 책은 매우 힘있게 이 문제를 다룬 현 시대의 강론이다. 결신자를 강단 앞으로 부르는 것은 결단을 유도하기 위해서 심리적인 압력을 가하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 결과는 어떤 교회들의 경우에서 보면 뒷문이 앞문만큼 넓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결단을 하지만 변화되거나 거듭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망하고 뒷문으로 빠져 나간다는 뜻이다. (pp 181-185)

 

 

2-5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잘못된 생각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혼란된 생각은 숙명주의, 거저 주는 복음,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첫째, 숙명주의를 청교도들은 우리가 ‘은혜의 수단들’(the means of grace)이라고 부르는 것에 집중해 대처하였다. 구원하는 믿음의 주제에서 신앙고백서들은 이것이 설교를 통해서 성령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사도들과 신자들의 활동적인 노력으로 자라고 퍼졌음을 잘 예시한다. 조직된 전도와 선교 사역은 모든 교회의 책임이다. 이러한 노력이 없으면 교회 성장이 없다. 주권적인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활동을 통해서 목적하신 일을 성취하신다.

그런데 여기에는 죄인들의 책임도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지 회개하라고 명하신다(행17:30).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요일 3:23). 윌리엄 그린힐은 ‘회심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설교에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책임을 서술하였다. 그는 겔18:32을 본문으로 잡았다.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회심하지 않은 자들은 능력 있는 사역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의 음성을 듣거나 크리스천들의 삶에 복음이 끼친 영향을 주목할 수 있다. 그린힐은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말씀의 영향권으로 들어올 수 있는 이와 같은 제안을 한 뒤에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촉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 그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써야 한다.

 

둘째, 거저 주는 복음에 대해서 청교도들은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주저하지 않았다. 예로써 리처드 백스터의 『불신자에게 주는 초청』과 조셉 얼라인의 『불신자를 향한 경고』가 있다. 청교도들은 모든 설교를 전도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물론 다루는 주제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청교도의 설교에는 항상 복음 전도의 측면이 담겨 있다.

청교도 전통을 이어받은 조지 휫필드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잘 드러내었다. 그는 상실된 죄인들을 속절없는 상태에 놓고 회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상실된 죄인들은 노예이다. 그들은 회개할 수 없다. 그럼에도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할 수 없다. 그래도 해야 한다. 죄인들의 유일한 강구책은 자신들에게서 눈을 돌려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죄인들의 탈출구는 모두 끊겼다. 지신들 속에는 아무 도움이 없다. 유일한 희망은 오직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비의 하나님이 믿음으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내쫓지 않으신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문제이다. 만약 하나님이 선택받은 사람들만 사랑하고 선택받치 못한 사람들은 증오하신다면 죄인들이 하나님께 눈을 돌리고 믿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무엇인가? 리처드 백스터는 『불신자에게 주는 초청』에서 주권자로서의 주님이 사용하신 겔33:11의 말씀으로 강력하게 변증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셨다(눅6:35). 가장 악독한 죄인들까지 포함해서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청교도인 존 하우는 역설하였다. (pp 186-188)

 

 

2-6 쇠태하는 기독교의 회복은 주일의 회복에 있다

 

주일을 위한 투쟁은 엘리자베스 통치 말년에 시작되어 17세기 초반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청교도들은 잉글랜드에 일요일을 주었다. 하루 전체를 예배와 교제를 위해 쓰도록 한 것은 엄청난 유익이었다.

 

무디(D. L. Moody)는 청교도 전통을 따른 사람이 아니지만 오늘날 주일 문제의 실제적인 중요성을 예시하기 위해 그의 말을 인용한다. “내게 안식일을 내던진 나라를 보여 주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부패의 씨앗을 품은 나라를 보여 주겠소.” 복음의 원수인 볼테르(Voltaire)는 “기독교를 죽이고 싶으면 일요일을 폐지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쇠퇴하는 기독교의 회복은 주일의 회 복과 동일 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패트릭 콜린슨(Patrick Collinson)의 주장이다. “초기 청교도 안식일주의의 핵심은 넷째 계명이 창조에서 기원한 도덕법이며 모세법보다 먼저 시작됐다는 확신이었다. 일요일을 기독교 안식일로 보는 것은 교회의 전통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해 정한 것이라고 변호되었다. 또한 안식일주의는 하루가 노동이나 게으름 혹은 레크리에이션에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온전히 공사(公私)간의 종교 활동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확신을 낳았다.

 

니콜라스 바운드(Nicholas Bownde)는 쉬라는 명령은 도덕적이고 영구적으로 준수해야 할 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주일날에 공부, 세상 비즈니스, 사격, 매(鳥) 놀이, 테니스, 펜싱, 볼링 등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자들은 손에 활과 화살을 쥐고 교회에 와서는 안 된다.”

 

존 웰즈(John Wells)는 1668년에 낸 책, <실제적 안식일주의자>에서 주장한다. 주일날의 스포츠나 레크리에이션은 성경 말씀의 단맛을 앗아가고 영적 자비들을 천박하게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자연의 법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배정되고 성별된 시간에는 갖가지 노동과 쾌락에서 완전히 떠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주일의 핵심은 다른 날과 성별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날짜를 정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 날을 정하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날을 준비해야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십자가에 마지막까지 있었고 주님의 무덤에 제일 먼저 가지 않았는가? 웰스는 주일의 즐거움을 이렇게 강조하였다. “성도들만큼 기쁨을 누리기에 적합한 자가 없고, 안식일만큼 더 기쁜 날도 없다”(267쪽). 이 말을 지지하기 위해서 그는 시편 118장 24절을 인용한다. “이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그는 아침과 저녁 예배 사이에 ‘달고 거룩한 말씀’에 열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주일 준수에 관한 전형적인 권면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기도와 묵상으로 주의 날을 준비하라. 스윈녹(Swinnock)은 말한다. “당신이 토요일 밤에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맡겨 두면 주일 아침에 주님에게서 도로 찾게 될 것이다”.

“정시에 자고 주일에 졸지 않도록하라”.

2. 가장들은 자기 가족들을 주일 아침에 늦지 않게 모으고 하루 종일 영적 교훈을 모두 충족하게 받도록 준비시키라.

3. 가장들은 설교 말씀을 가족들이 기억하도록 하라. 그리고 식사 때 자유로운 토론을 하게 격려하고 설교의 대지들을 반복하게 하라.

4. 주일날에 받은 가르침과 은혜들을 주중에도 지니도록 하라.

 

청교도 주일 교육의 장점은 주일에 대한 즐거움과 열정의 표현들에서 드러난다. 주일을 잘 보내는 데서 오는 유익은 매우 크다. 토마스 왓슨은 이것을 ’영혼의 장날’ 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다음 인용에서 왓슨이 주일에 대해 가졌던 열정을 읽을 수 있다.

 

“안식일은 영혼의 장날이며 최선의 시간이다. 이날에 주님이 무덤에서 일어나셨고 성령이 땅에 강림하셨다. 주일은 향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기도의 달콤한 향수로 뿌려진다. 이날에 천사들의 음식인 만나가 떨어진다. 이날은 영혼의 축제일이다. 이날에 은혜가 작용한다. 다른 날들은 땅에 대한 날이고 이날은 하늘에 대한 날이다. 주중에는 짚을 거두고 주일에는 진주를 거둔다. 그리스도는 이날에 영혼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변모의 영광을 보여 주신다. 이날에 주님은 자기의 신부를 데리고 포도주 저장실로 가서 그의 사랑의 기치를 세워주신다. 그리고 신부에게 최상품의 포도주와 석류 주스를 따라 주신다(아2:4,8:2). 주님은 주로 자신을 주일에 더 많이 계시하신다.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었다(계1:10). 그는 이날에 하늘로 이끌려 갔다. 신자들은 이날에 영혼이 고조된다. 하나님과 함께 걷고 하늘의 교제를 맛본다(요일1:3). 이날에 거룩한 사랑이 깨어나고 은혜의 잔고가 올라가며 부패가 줄어들고 사탄이 말씀의 능력 앞에서 번개처럼 떨어진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에 대부분의 기적을 행하셨다. 이러한 기적은 지금도 일어난다. 죽은 영혼들이 일어나고 돌과 같은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그렇다면 이날을 우리가 얼마나 존중해야하겠는가! 이날은 루비보다 더 귀중하다. 하나님은 주일을 다른 날 위에 올려놓으시고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셨다. 안식일에 우리는 천사들의 일을 한다. 우리의 혀는 하나님의 찬송에 맞추어진다. 지상의 안식일은 우리가 하늘에서 체험케 될 것으로 소망하는 영광스런 안식과 영원한 안식에 대한 예표이다. 이날에는 하나님이 성전이 되시고 어린양이 그 성전의 빛이 될 것이다(계21:22-23).”

(pp 190-195)

 

 

2-7 성경이 우리의 권위인가? 영적 체험이 우리의 권위인가?

 

1960년대의 마약과 성의 혁명 뒤에는 체험하고 싶어하는 강렬한 욕망이 깔려 있다. 세속의 정신이 교회 속으로 홍수처럼 밀려왔다. 이 세속 사상은 사람들의 느낌을 가장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이다. 느낌이 좋으면 옳다는 것이다! 1970년부터 카리스마 운동이 가속되었다. 199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토론토 축복(Toronto Blessing)이라는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오순절 교회들을 포함해서 여러 교회들이 토론토 축복을 광신적이고 비성경적인 체험으로 배격하였다. 토론토 축복은 온갖 종류의 괴상한 행동들을 드러내었다. 의사들은 이런 극단들을 진단하고 그들을 전염성 히스테리라고 설명했다.

오늘날 영적 체험은 전세계적으로 복음주의가 생각하는 첫 번째 주제이다. 선명히 선을 그을 수 있는 두 종류의 진영이 있다. 한 쪽에서는 모든 영적 체험들이 성경으로 시험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체험을 최우선시하면서 성경의 시험을 저지한다. 성경 말씀이 우리의 권위인가 아니면 영적 체험이 우리의 권위 인가?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가슴의 체험으로 아는 문제에서 강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든 것을 성경으로 시험하였다. 우리도 이들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체험이란 무엇인가? 체험은 내 영혼이 느끼는 것이다. 체험은 나의 감정 생활과 관계된 것이다 기독교는 지성과 가슴과 실천의 종교이다. 체험은 정당한 자리가 있다. 기독교는 ‘느끼는’ 종교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라고 하였다. 오순절은 깊은 영적 체험의 시간이었다. 제자들은 성령으로 채워졌다. 그들의 마음과 정신이 큰 능력을 받았다.

청교도들은 체험을 비상한 경우에 한정시키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영적 체험을 성령 세례 라고 부르는 제이의 의무적 체험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영적 체험을 시편의 여러 체험들의 문맥에서 이해하였다. 시편은 산정과 계곡, 영혼의 희열과 절박한 침체를 모두 포함하는 전반적인 체험들을 기술한다.

 

청교도의 전통을 따른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 종교는 대부분 거룩한 체험으로 짜여졌다”고 하였다. 참 종교는 마음의 체험, 즉 느끼는 종교라는 의미이다. 청교도 저지들은 기쁨, 사랑, 침체, 버림 받음, 환난, 투쟁, 자족, 징계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영적 체험들을 언급하였다. 모든 체험의 받침대는 신자가 하나님과 갖는 연합과 교제의 체험이다. 존 오웬은 교제는 하나님의 성삼위와 각각 갖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도가 아버지와 갖는 주된 교제의 길은 사랑이다. 즉 자유롭고 아낌없는 영원한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탁월함은 계시 되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의 체험을 심화시켜야 한다. 오웬은 우리가 성령과 갖는 교제의 방법들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매우 실제적이다. 성삼위와의 뜻 깊고 풍성한 교제에 대한 주제는 청교도들의 강해에서 멀리 떨어진 적이 없다.

체험의 주제는 구원의 확신과 밀착된 것이다. 토마스 브룩스는 말한다. “확신이 당신에게 천국을 소유케 한다. 확신이 있는 신자는 낙원에서 살고, 낙원에서 걸으며, 낙원에서 일하고, 낙원에서 안식한다. 그는 자기 속에 천국을 가지고 있다. 또한 천국이 그의 둘레와 그의 머리 위에 있다”. (pp 201-205)

 

 

2-8 믿음의 권한과 믿음의 방편

 

믿음의 권한은 모든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회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크나큰희생으로 마련한 것만 믿으라고 하는 명령에 근원을 둔다. 청교도들이나 그 어떤 영적인 성경 강해자들의 글을 읽어도 믿음의 방편을 사용하라는 권면의 말씀이 자주 나온다. 예컨대 설교를 듣고, 교인들과 사귀고, 성경을 읽고, 찾아질 수 있는 동안에 주님을 찾으며, 가까이 계신 동안에 주님을 부르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믿음의 방편에 해당한다. 그러나 믿음의 권한에 속하지는 않는다,

 

빌립보의 간수가 괴로워하며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16:30)라고 외쳤을 때 가장 짧고 분명한 최선의 답변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4)는 것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간수에게 ‘가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으라 그러면 그가 구원의 길을 보여 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믿음의 길에 대해서나 혹은 구원하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언은 항상 믿음의 권한에 비추어 해주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언 제나 죄인들이 즉시 믿도록 하시고 또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인격체와 사역 안에서 그들에게 제공한 것만을 신뢰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의 권한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나 행위에 권한을 주는 것’이다. 경찰관이 법을 위반한 사람을 체포하려면 자신의 행위에 권한을 주는 영장이 필요하다. 믿음의 경우에서 볼 때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권한은 무엇이겠는가? 그 대답은 요한일서 3장 23절이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권한은 우리를 보고서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의 어떤 행위나 느낌이 믿음의 권한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믿을 권한이 없다. 우리 자신의 어떤 공로나 선행이 우리에게 믿음의 권한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죄로 가득 채워진 존재라는 사실이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한다.

 

믿음의 방편은 무엇인가? 믿음에는 명칭만의 믿음도 있고 죄인을 진실로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믿음도 있다. 이 후자의 믿음이 구원하는 참 믿음이다. 단순한 지적 동의에 불과한 믿음이 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감정적 호소에 기반한 이른바 ‘쉬운 믿음주의’ (easy-believism)에 의해서 거짓된 확신을 갖는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고 있다. 물론 성경 은 우리가 모든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들에게 신실하려면 먼저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그들의 필요가 얼마나 큰 것인지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는 지름길이나 지나친 단순 공식으로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방편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

 

믿음의 방편은 사실상 구원하는 믿음의 수단이다. 이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수단이다(롬10:14),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주의해서 들으라고 권해야 한다. 이사야 55장에 나오는 값없이 받으라는 복음의 초대에는 듣고, 찾고, 부르고, 돌아서라는 권면이 들어있다. 듣고, 찾고. 부르고, 돌아서는 것은 모두 믿음의 길이다. 그러나 이 방편 자체는 결코 믿음의 권한이 될 수 없다. 예수를 믿는다고 결단을 하는 것과 죄인을 그리스도와 영원히 연합시키는 것은 별개의 일일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을 가르칠 때 신중해야 하고 기도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청교도들이나 혹은 다른 설교자들이 우리가 ‘은혜의 수단들’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사용하라고 권고했을 때에는 그것들이 믿을 권한을 주는 자격으로 간주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러한 수단들을 공로로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었다. 교회 출석, 설교 듣기, 새로운 삶, 십계명에 비추어 보는 자기 반성, 다가 오는 대심판날에 대한 묵상 등은 그리스도를 신뢰케 하는 믿음의 길과 상관된 것들이었다. 그런데 청교도 설교에는 믿음의 길에 대 한 가르침과 함께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즉각적인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는 내용이 항상 나온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름 자체가 믿음의 권한이다.

 

믿음의 방편(믿음이 들음으로써 온다는 사실)과 믿음의 권한(즉각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긴급한 명령이 항상 있다는 사실) 사이에 모순을 느낄 필요가 없다. 아직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구원하는 믿음에 이르지 않은 자들이나 믿는다고는 하지만 전혀 성령의 열매가 없고 따라서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자들에게 은혜의 수단들은 더욱 중요하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진리의 조명과 확신을 심어 주는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라고 지적해 주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의 긴급성과 필요성을 강조하며 즉각적인 구원을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권면을 고수한다면 이 양편 사이에 아무런 혼란이 없다. 믿음의 방편과 즉각적인 구원을 받는 믿음의 권한은 모순이 아니고 상호 보완적이다.

 

1646년의 제1차 런던 신앙고백 25조에는 믿음의 권한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님을 명시하였다.

“죄인들의 회심을 위한 복음에는 값이 없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격이나 준비나 율법의 두려움이나 율법의 예비적 사역이 전혀 요구되지 않는다. 복음이 요구하는 것은 오직 벌거벗은 영혼인 불경스런 죄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뿐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죄인들의 왕이시며 구주가 되셨다. 죄인들은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pp 219-228)

 

2-9 설교의 우위성과 기도와 영혼 돌봄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 설교를 교회 생활에서 중시하지 않고 아랫자리로 끌어 내리려는 경향이 많다. 이런 압력을 받는 때 청교도들에게서 우리는 좋은 모범을 본받을 수 있다. 그들은 설교의 우위성을 항상 유지하였다. 청교도설교의 기본원칙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설교의 독특한 위치는 회심과 양육과 지속이다

 

아서 힐더샘(Arthur Hildersam)의 말은 이 특징을 잘 대변한다.

“설교는 목자장이신 그리스도가 보냄을 받고 행하신 주된 사역이었다(눅 4:18,43). 주님의 사역 중에서 그 어떤 일도 설교만큼 더 열심히 많이 행해진 일이 없다.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였다(고전1:17) 우리는 이 복음 전파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복음 설교의 모든 기회를 기쁘게 받아 들여야 한다.”

 

청교도들은 모범적인 설교자들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들은 설교가 그들의 일차적인 소명이라고 믿고 설교의 우위성을 견지하였다. 지성, 감정, 양심, 의지를 포함하는 인격체 전체에 설교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은혜의 수단은 없다. 설교처럼 성령 하나님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왔던 세례 요한은 설교로써 자신의 사역을 마쳤고 인자 자신도 설교를 하기 위해 오셨다. 세례 요한은 바윗돌이 그의 강대상이었고 하늘이 그의 마이크였다. 그의 설교는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먼 거리에서 모여들었다. 청중 들이 왔을 때 요한은 그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들로 아첨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그들의 양심에 대고 말하였다. 그는 청중들이 도움을 받아야 할 잃어버린 죄인들이라고 지적하였다.

 

오늘날 설교의 우위성을 부정하려는 무거운 압력이 점증되고 있다. 특히 미국 교회에서는 설교를 찬양 예배와 기타 음악 프로그램으로 대치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떤 교회들에서는 강해 설교는 고사하고 짤막하기 그지없는 설교가 겨우 끝자리 순서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형편이다. 이런 교회들의 주된 순서는 치유, 표적, 자극적인 간증들이다. 바울은 유태인들이 기적적인 표적을 요구한다고 지적하면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전1:22-23)고 대답하였다.

 

설교자의 삶에서 설교의 우선권이 흔히 프로그램들에 의해서 빼앗긴다. 설교자의 에너지와 시간이 행정 업무로 소진된다. 이것은 효과적인 설교 사역을 막아 버린다. 돈 카슨은 미국에 있는 효과적인 강해 설교자치고 기도와 성경 공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였다(행6:4), 미국에는 강해 설교를 통해서 세워진 초대형 교회들이 있다.

 

성령이 직접 통화를 하고 설교의 영감을 주기 때문에 설교문을 작성하거나 잘 준비된 아웃라인을 따라가는 것은 비성경적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성령은 충만한 기도와 헌신된 노력을 인정해 준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효과적인 강해 설교는 지성과 마음의 엄청난 단련을 요구한다. 설교자가 강해 시리즈를 하려고 시도한다면 이것은 뜨거운 기도와 묵상이 있은 다음에 도달할 수 있는 큰 작업이다. 설교의 우위성을 은근히 잠식시키는 또 하나의 현상은 토의 모임이 설교보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더 낫다는 생각이다. 설교자가 문맥을 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에게 영적 능력으로 적용하면 토의 모임과는 달리 회중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격려를 받으며 심령이 새로워진다.

 

2. 설교자의 삶은 자신이 설교하는 실체를 드러내야 한다

 

회중들 특히 방문자들이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을 때 마음속에 먼저 일어나는 질문이 있다. ‘이 설교자는 자기가 설교하는 대로 살고 있을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였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16). 리처드 백스터는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자신이 은혜 가운데 있다고 만족하지 말라. 당신의 은혜가 적극적이고 생동적인 실천 속에서 지켜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자신이 공부하고 준비한 설교들을 스스로에게 먼저 설교하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활 방식을 디모데에게 권하였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딤후3:10). 설교자의 거룩한 삶과 그의 설교를 듣는 양떼 사이의 밀착된 관계는 백스터의 다음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내려놓으면 회중의 사랑을 끌어올릴 수 없다. 우리가 오류나 무익한 논쟁으로 불량 음식을 먹으면 우리의 청중이 그 찌끼를 먹게 된다. 반면 우리가 믿음과 사랑과 열성이 넘치면 이와 동일한 은혜들이 어찌 회중에게 신선한 은혜로 흘러 들어가지 않겠는가!” 위선을 피하려면 설교자는 자신의 삶에서 자기가 설교하는 메시지를 드러내야 한다.

 

3. 기도와 깊은 성경 공부가 효과적인 설교의 기반이다

 

사도들은 갈등과 비난에 직면하고서 자신들의 우선권이 기도와 말씀이라고 주장하였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리라”(행6:2-4).

 

목회자치고 비난의 대상이 안 되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우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다 들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일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힘써야 한다. 그럼 어떻게 비난에 대처해야 할까? 그 대답은 기도이다. 우리는 모순을 초월한 자들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청중들에게 목회자들에 대한 비판을 해 달라고 격려해야 한다. 목회자가 진정으로 겸비해지려고 한다는 것을 회중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영적 자세는 기도의 삶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청교도 목사들은 설교의 우위성을 견지하는 데 가장 철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균형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영혼의 의사로서 조언의 책임과 신자들을 격려하는 역할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청교도 시대와 다른 종류의 압력을 받으면서 산다. 그래도 역시 청교도들의 모범에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예로써, 서머셋에 있는 멜즈라는 작은 마을에 리처드 페어클러프(Richard Fairclough)라는 목사가 있었다. 그는 1682년에 61세로 사망했는데 존 하우가 그의 장례식 설교를 맡았다. 이 설교에서 존 하우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페어클러프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먼 길을 왔는지 언급하였다. “오, 그의 가장 효과적인 사역 아래에서 회중들의 심령이 녹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의 기도와 설교와 다른 목회 활동에는 가슴을 뭉클케 하고 생기를 주는 어떤 신비한 능력과 권위가 있었다. 또 어떤 때에는 부드러움과 온화함과 호소력이 있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영력을 저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의 사역의 효과로 회중은 커다란 깨우침을 받고, 말씀을 알게 되고, 분별력이 생 기며, 갱신된 신자들로 바뀌었다. 그의 봉사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마음이 온통 사역에 쏟아져 있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을 때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새벽 3시에 일어났다.”

 

이 실례는 청교도들이 사역에 성공한 원인이 기본 원칙에 철저했기 때문임을 잘 예시해 준다. 우리도 기도와 설교 사역과 영혼을 돌보는 일에서 그들처럼 균형을 유지하면 좋은 사역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기본 원칙에 대한 유추로 음악이나 스포츠를 들 수 있다. 음악가는 기본 기술을 습득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음악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일은 기본 기술을 습득한 뒤에 가능하다. 스포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골프와 같은 게임도 기본기를 완전히 터득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사역의 부름은 영적인 부름이다. 사역자는 경건과 거룩한 삶에 있어 다른 사람들을 앞서야 한다. 이것은 기본이다. 그 다음에 기도와 중보 사역올 해야 하고 동시에 설교 준비를 위한 말씀 공부와 묵상을 통해 머리를 항상 단련시켜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역자는 자신의 소명을 생각해야 하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적용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을 품어 준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12:23). 우리는 사람들의 삶과 필요를 염두에 두고 설교해야 한다. - 에룰 헐스, 『청교도들은 누구인가?』, pp 229-236

 

 

 

 

 

 

 

 

3. 조엘 비키·랜들 페더슨, 청교도를 만나다(청교도인물&명저 백과사전), 부흥과 개혁사, 2010.

 

서문에서

 

조지 휫필드, “청교도들은 빛 가운데 불타오르는 빛의 사람들이었다. 검은 성 바돌로뮤의 날의 조치 때문에 쫓겨나 대로와 울타리와 헛간과 들에서조차 설교할 권리를 박탈당했을 때, 청교도들은 여전히 말씀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로서 특별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설교했다. 지금은 그들 모두가 이 세상에 없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글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 시간에도 특별한 기름부으심이 그들을 따라다니고 있다.

-- 현대의 경향과 그 작품들의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기교 혹은 책략은 소멸될 것이다.

-- 반대로 청교도와 그 작품들은 살아남아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조지 휫필드가 예측한대로 “훌륭한 옛 청교도 문헌들”에 대한 요청은 19세기까지 세대를 이어 강한 경향으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19세기의 마지막 즈음에 전혀 다른 사상적 흐름이 대서양의 양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청교도들의 칼빈주의는 낡은 체계로 여겨졌으며, 청교도주의의 심장이자 핵인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두는 시각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사실상 전적인 불신앙이고 배교인 자신들의 정체를 위장한 채, 기독교가 보다 학문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고 외쳤다.

 

“훌륭한 옛 청교도의 작품들”에 대한 요청은 잦아들어 갔고, 북미와 영국의 출판사에서 청교도 작품들에 대한 출판은 멈추었다. 청교도 작품들이 쓰레기통에 버려지거나 폐기물 수집을 위해 팔리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청교도 작품들은 그 영향력이 쇠퇴하여 읽히지 않아 도서관 서재에 꽂혀져 방치되었고, 중고 서점과 진열대에서 헐값으로도 팔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때에 하나님의 손길로, 런던에서 로이드 존스 박사의 사역이 청교도 작품들에 대한 필요를 재생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수시로 자신의 설교에서 청교도 작품들을 언급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내용의 출처를 궁금해 하도록 했다. 로이드 존스는 그들을 에반젤리컬 도서관(런던 소재)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청교도 작품의 재인쇄본이 발간될 때까지 1950년부터 콘퍼런스를 열어 이를 수년 간 주재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청교도 작품들을 더욱 많이 접할 수 있는 나날을 열망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 진리의 깃발사가 선두에 서서 청교도 작품의 새로운 재인쇄본을 내놓으며 상황은 극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훌륭한 옛 청교도의 작품들”의 새로운 판본에 대한 요구는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청교도 문헌의 발간은 확대되기 시작해서 이들의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거의 누구나 이미 재출판본을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청교도주의의 정의

 

청교도라는 용어는 1560년대의 영국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처음 유래되었다. 이들은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아래에서의 개혁이 불완전하다고 판단하고 더 심화된 ‘정화’를 요구한 사람들이었다. 이 용어에 대한 부정적 어감의 기원은 그 단어의 유래가 중세의 이단적 사상인 카타리파를 연상시키는 명칭인 라틴어 카타루스 혹은 카타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종종 “청교도주의 아버지 혹은 원조”라고 불리는 윌리엄 파킨스에게 있어서 청교도는 완전주의적 성향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잘못된 ‘사악한 용어’였다.

 

레너드 트린테루드, “16세기 내내 이 용어는 내용을 담은 명사라기보다는 경멸적 형용사로 훨씬 많이 사용되었으며, 어떤 방면으로 그 용어가 적용되어 쓰이든 모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청교도들의 다섯 가지 주요 관심사

 

1 청교도주의는 성경을 탐구해서 그 내용을 삶의 전 영역에 적용하는 데 핵심이 있다. 그들은 신앙고백적이고 신학적인 삶을 살기를 원했으며 기독교적 학문 연구의 노력과 헌신에 크게 힘을 기울였다.

 

2 청교도들은 신학을 삼위일체적 특징에 그 주안점을 두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그리고 죄인의 삶에 역사하는 성령의 적용적 사역을 선포하는 데 일관된 노력을 쏟았다. 그리스도인의 체험과 관련된 청교도들의 깊은 관심과 매혹은, 결코 체험 자체에 관심을 지나치게 두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온전히 돌릴 수 있도록, 자신 들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3 종교개혁자들과 공통적으로 청교도들은 교회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믿었다. 교회의 예배가 성경적 믿음을 신실하게 구현한 것인 동시에 세심한 작업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울러 간명하고 진지한 설교와 예전적 개혁과 영적인 사랑과 유대감에 중점을 둔 운동이었다.

 

4 국가를 향한 의무와 힘, 왕의 권리와 의회, 시민과 신하 정부의 관계 등의 지침을 얻기 위해 성경에서 그 답을 구하였다.

 

5 청교도들은 각 사람의 총체적 회심에 주요 관심을 두었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복음을 설교하는 데 탁월했으며, 양심을 탐구하고, 죄인을 일깨우며, 그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에 이르도록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애썼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 측면의 내적 생활을 함에 있어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며, 이생에 있어서 가정 생활과 교회, 일터와 사회 등, 관계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찾아내 세심하게 기술했다.

제임스 패커는 청교도주의를 이렇게 요약했다. “청교도주의는 국가적 및 개인적인 영적 갱신에 대한 비전의 실행을 추구하는 복음적인 성화 운동이었는데, 이 운동은 교회와 국가, 가정의 범주, 교육, 복음 전도, 경제적 영역, 개인의 제자됨, 헌신, 목회적 돌봄과 역량이 모두 포함된다.”

 

피터 루이스는 청교도주의가 다음의 세 가지 필요성에 의해 성장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1) 성경적 설교와 정통적 개혁주의 교리의 가르침에 대한 필요성

2) 믿음과 신자의 삶에 있어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성경적이고 개인적인 경건의 필요성

3) 그분의 말씀에 기술된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도록

예전과 의상 및 교회 정치 체제를 성경적 단순성에 맞게 회복시켜야 할 필요성.

 

이러한 필요성들이 바탕이 되어 교리적 측면에서 청교도주의는 강력한 칼빈주의를 표방했다. 경험적 측면에서는 따뜻하고 커다란 교화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복음적 측면에서는 힘을 가졌지만 여전히 부드러웠고 교회론적 측면에서는 하나님 중심적이며 예배를 최우선시했다. 정치적으로는 왕과 의회와 국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성경적이고 균형 잡힌 양심에 구속되는 삶의 태도를 표방했다.

 

청교도들의 작품을 읽음을 통해 어떤 유익을 얻을 것인가

 

청교도의 작품들은 성령의 복주심과 더불어 기독교인의 삶의 풍성함으로 여러분을 인도할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평안을 제공하고 그분을 닮는 길로 인도하며, 구원의 충만한 확신을 가져다 줄 것이다. 청교도 문헌의 여섯 가지 특징을 기술한다.

 

1 청교도들은 성경으로 삶을 형성했다.

그들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으로 살며 호흡하면서 말씀에 수반되는 성령의 능력을 향유했다. 그들은 성경 66권을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진 성령의 서제로 생각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청교도들에게 아버지로서 말씀하시고, 그들이 영원토록 신뢰할 수 있는 진리를 주시는 보고(寶庫)로 성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성경을 자신들의 마음과 지성을 새롭게 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권능의 숨결이 담겨 있는 존재로 이해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들으며 노래하면서 다른 모든 사람도 그렇게 살도록 격려했다. 청교도 리처드 그린햄은 성경을 읽는 여덟 가지 방법으로 부지런함, 지혜, 준비, 숙고, 협의와 나눔, 믿음, 실천 그리고 기도를 제시했다. 토머스 왓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에 대한 지침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했다. “거룩한 소욕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갈 것, 주의를 기울이며 말씀 아래 앉을 것,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을 것, 믿음과 말씀을 화합시킬 것, 말씀을 담은 채로 그것을 놓고 기도할 것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말씀에 대해 전할 것”.

 

청교도들은 신자들이 자신의 믿음과 실천에 있어 말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리처드 백스터의 <그리스도인의 지침>은 청교도들이 어떻게 성경을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 신뢰할 만한 안내서로 삼았는지를 보여 준다. 헨리 스미스는 말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엄수해야 할 규칙처럼 놓아 두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오직 신뢰함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이 규정하는 것만을 사랑해야 하며, 성경이 금지하는 것만을 미워하고 성경이 명하는 것만을 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청교도들의 글을 규칙적으로 읽는다면, 그들의 성경을 향한 관심과 집중에 곧 영향을 받아 동일한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청교도들의 성경 주석은 성경의 메시지에 어떻게 전심으로 충실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존 플라벨, “성경은 우리에게 삶에 있어서 최선의 방식과 고난을 대처하는 가장 고상한 길과 죽음을 맞는 가장 평안한 방법을 가르쳐 준다.”

 

2 청교도들은 교리와 실천을 완벽히 결합시켰다.

그들은 지성에 대해 설명하고, 양심의 소리에 직면하도록 이끌며, 마음에 호소함을 통해 그렇게 했다.

 

* 지성에 대해 설명함. 청교도들은 지성과 마음을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여기는 구조를 거부하고, 지식은 성령이 중생의 씨앗을 심는 토양이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지성을 신앙이 머무는 전당으로 이해했다. 존 프레스턴은 말했다. “회심에 있어서 이성은 고양되기 마련이다.” 코튼 매더도 말했다. “무지함은 경건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단의 어머니일 뿐이다.”

 

청교도들은 지성이 없는 기독교는 뼈가 없는 연체동물과 같다고 생각했다. 반지성적인 복음은 빠른 속도로 필요를 채우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는 텅 빈 혹은 형태 없는 복음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안타깝고도 비극적인 사실은 지성에 대해 신자와 불신자간에 차이가 없다면 그들의 삶에 있어서도 거의 차이가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청교도 문헌은 이런 문제점들에 대한 훌륭한 해결책이다.

 

* 양심의 소리에 직면함. 청교도들은 구체적인 죄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 즉 죄에 대한 각성을 일으키는 질문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탁월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 막대기를 들고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죄인이 숨어 있는 덤불을 치고 헤쳐 나아가 그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고 서도록 해야 한다.”

 

경건 서적을 읽는 것은 이런 죄에 대한 직면을 이끌어 내는 것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위로와 평안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양심에 찔림을 받아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영적인 성장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담과 같이 수풀 속에 숨으려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불려 나아가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기”(히4:13) 위해서는 매일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도 청교도들만큼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없다.

 

* 마음의 문제를 다룸. 오늘날 우리에게 청교도들이 그렇게 해주는 것만큼 견고한 성경적 본질과 지성의 양식을 공급하며 정서적 따뜻함으로 마음을 감동시키는 책을 찾는 것은 거의 어렵다. 청교도들은 지성으로 논증을 전개해 나아갔고, 양심의 소리에 직면토록 해주었으며, 마음의 작용에 호소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 그리고 독자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에 기초해서 글을 썼다. 아울러 이들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사랑스러움 안에서 설명했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기를 열망하며 전적으로 그분을 위한 삶을 살도록 결심하고 나아가도록 이끌었다.

 

3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에 집중적 관심을 두었다.

토마스 에담스, “그리스도는 성경 전체에서 예언되고 예표되었으며 예시되고 보여졌으며 입증된 요점이자 모든 것이다. 성경의 거의 모든 장과 절은 어린 예수의 강보와 같은 것이다.” 아이작 암브로스, “그리스도를 성경 전체의 본질이자 정수이며 영혼인 동시에 목적으로 여기라,”

 

청교도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그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글을 남겼다. 새뮤얼 러더퍼드, “낙원의 수많은 나라들과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을 모아 그분에게 돌리라. 모든 나무와 꽃들과 향기와 색깔과 풍미와 기쁨과 사랑스러움과 달콤함을 하나로 모으라. 오, 그러할지라도 그것들이 과연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겠는가? 그것들은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가장 사랑받으실 그리스도에 비하면 바다 전체와 강과 호수들 그리고 샘에 내리는 비 한 방울에 불과한 것이다.” 토마스 굿윈, “만일 그리스도가 없다면 천국은 내게 지옥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더욱 잘 알고 그분을 더욱 충만히 사랑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청교도 문헌을 읽는 일에 당신 자신을 깊이 몰입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신 길을 따라 그 일들이 당신의 성화에 기여하도록 성령님께 구하라.

 

4 청교도들은 시련과 시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우리는 청교도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가 스스로 겸손해지도록 만들기 위해(신8:2), 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습1:12)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오도록 이끌기 위해(호5:15) 시련을 허락하신다고 배웠다. 로버트 레이튼, “환란과 고통은 천국이 그 보석을 닦아서 빛나도록 다듬기 위한 다이아몬드 가루다.” 청교도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와 거룩의 참여자가 되도록 이끌기 위해 그분의 시련의 막대기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어떻게 더욱 온전하게 새기는 수단이 되는지를 보여준다(히12:10-11).

 

만일 당신이 현재 시련을 겪고 있다면, 윌리엄 브리지의 <침체된 자를 위한 격려>와 토머스 브룩스의 <고통 속에서도 잠잠히 있는 그리스도인> 및 리처드 십스의 <꺼져가는 심지와 상한 갈대의 회복>을 읽도록 하라. 이 작품들은 각 시련들이 어떻게 당신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믿음으로 걷게 하며 이 세상에서 초연할 수 있도록 하는지를 보여 준다. 제러마이어 버로스의 <그리스도인의 자족의 커다란 가치>는 시련을 통해서 자족함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5 청교도들은 두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리처드 백스터의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천국을 향한 소망이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통제하며 에너지를 불어넣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상당한 분량(영어로 800쪽이 넘는)에도 불구하고 이 고전은 청교도들의 가정에서 온 가족의 필독서가 되었다. 한편 우화적인 기법으로 동일한 진리를 담고 있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인기 면에서 유일하게 백스터의 책을 앞질렀다.

 

청교도들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순례의 길에서 시종일관 “우리의 눈 속에” 천국을 지녀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대한 동시적 관점, 즉 신약 성경이 말하는 ‘지금(이미)/아직’의 동력적 구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이 땅에서 우리의 지성이 삶을 안내하고 형성하기 이전에 먼저 천국을 향한 “영광의 소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영원을 향한 빛 가운데 사는 삶은 철저한 자기부인을 요청한다. 청교도들은 이런 천국의 기쁨을 아는 것이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이 땅에서 사는 가운데 견뎌야 할 어떠한 손실과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도 훗날 보상받을 근거가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또한 청교도들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데 있어 첫 단계라고 가르쳤다.

 

6 청교도들은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 성경적 복음 전도, 교회의 개혁, 율법의 영적인 면, 내재하는 죄에 대한 영적 투쟁, 하나님을 향한 자녀로서의 경외, 묵상의 기술 그리고 지옥의 무서움과 천국의 영광에 대해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므로 경건을 목적으로 청교도 문헌을 읽고 그들의 영성을 따르며 배울 수 있도록 기도하라.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보자. 우리는 과연 청교도들처럼 삼위 하나님을 영화로이 높이기를 갈망하는가? 우리는 과연 성경적 진리와 그 안에 담긴 뜨거운 불길에 의해 범사에 동기부여를 받고 있는가? 우리도 회심의 필수성과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 옷 입는 것에 대한 청교도들의 견해를 온전히 지니고 있는가? 청교도들이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

 

이 책은 1956년부터 2005년까지의 반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재인쇄되고 출판된 청교도 작품들을 모두 다룬다. 이를 모두 합하면 75개의 출판사에서 낸 7백권에 이르는 작품과 150여명의 청교도들의 전기를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청교도들의 수천 권의 작품이 1950년대 이후 재인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책에 소개되지 못했다.

 

여러분이 청교도들의 삶과 그들의 책을 숙독해 나아감에 따라, 다음과 같은 제임스 패커의 평가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이상과 비전이 약해지고 실패하며 참 가치가 부패해 버린 때에, 청교도들은 우리로 하여금 두 요소에 대해 철저한 헌신과 행동을 쏟아내게 한 소망의 등대이자 횃불같은 존재들이었다.”

 

J. C. 라일,

 

청교도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절대 다수는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졸업생들이었다. 청교도들의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지식과 설교자이자 주석가로, 작가와 비평가로서의 능력은 당대 최고였다. 청교도들의 작품은 잘 구비된 모든 신학 도서관의 서가에서 여전히 말씀을 전하고 있다. 그들의 주석과 강해와 실천적, 결의론적 그리고 경험적 신학에 대한 논문들을 17세기 당시 논적들의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고 뛰어나다.

 

청교도들은 역사상 존재했던 어느 계층의 영국인들보다도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전 국가적인 특징을 고양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들은 시민적 자유를 사랑했고 그것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죽음을 불사했다. 의회에서는 강하고 단호했으며 투쟁과 갈등의 장 속에서도 그러했다. 청교도들은 영국 내에서도 연합된 불굴의 공동체였으며 유럽 전역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토록 경외하되 사람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아울러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조국으로부터 받아야만 할 영예를 결코 받아 누렸던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영국 청교도의 간략한 역사 중에서

 

거의 2천 명의 목사들(전체 목사 가운데 1/5)이 166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뮤의 날에 <통일령>의 요구에 대한 수용을 거부하고 주교 제도 아래서 받게된 자신의 교구를 거절했다. 1664년에는 집 밖에서 설교하거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금지하는 <비밀집회 금지령>이 시행되었고, 1665년에는 <5마일 퇴거령>을 시행하여 거절한 목사들이 과거의 교구나 어느 도시 또는 지역의 5마일 이내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비록 청교도들이 강단이나 대학에서 설교하는 것은 금지당했다고 해도, 억압 정책이 청교도들의 펜을 침묵시킬 수는 없었다. 1662년 이후로 박해의 그늘 아래에서도 청교도들은 참으로 주옥같은 경건서와 신학 책을 출판했다. 슬프게도 대다수 청교도 지도자들이 1689년 <관용령>이 시행되기 전, 윌리엄 왕과 메리 여왕 통치 아래에서 박해 때문에 죽었다. 존 번연, 토머스 굿윈, 존 오웬 등을 비롯한 수많은 청교도가 죽은 뒤에도 교회 경내의 뜰에 장사되지 못하고, 런던의 번힐 필드에 있는 비국교도 특별 묘지에 장사되었다. 1600년대 말엽, 영국 교회를 개혁하려는 수많은 청교도들의 열정에 굴복하여 영국 정부는 국교를 반대하는 비국교도 교파들의 존재를 합법적으로 인정했다.

 

 

 

 

 

 

 

 

 

 

 

 

 

 

 

4. 돈 키슬러, 『청교도 작품을 읽어야 하는 10가지 이유』, 부흥과개혁사

 

1. 청교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생각을 높이 고양시켜 준다.

 

청교도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까지 높여주며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받기에 진실로 합당한 분이심을 보여 준다. 제레미아 버로스는 <복음적 예배>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적당히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약간의 경고를 해야 할 것 같다. 여러분이 청교도를 읽기 시작하면 ‘영적인 의미에서’ 다소 고독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은 읽고 느끼면서 흥분하기 시작하겠지만,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알아 들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참으로 고립될 수 있다. 여러분이 이사야서 6장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았던 것과 동일한 비전을 보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실체는 여러분의 지성으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무한히 벗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여러분은 보통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생각하는 차원의 깊이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이처럼 빈약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책을 거의 읽지 않게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생각하도록 만들어 준다. 우리는 지금 글자문화 대신에 시각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사진, 비디오, 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사고 작용이 이미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굳이 개념들과 씨름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사진 속에 있는 내용을 해석해 준다. 청교도 시대에는 사상들이 책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책 속에 있는 사상들과 씨름해야 했다.

 

현대 작가 닐 포스트맨은 <스스로를 속여서 죽음까지 몰고가기>에서 이 내용을 폭넓게 다루었다. 포스트맨은 독서와 사고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 준다. 청교도는 무엇보다 위대한 사상가들이었다. 또한 청교도는 위대한 독서가들이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2. 청교도는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다.

 

청교도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토머스 굿윈, “만일 내가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가 거기 계시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면, 나는 즉시 떠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없는 천국은 내게 지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을 천국답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더함, “만일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면 그리스도밖에 다른 모든 것은 전적으로 혐오스럽다.” 우리는 그리스도도 조금, 다른 많은 것들도 조금 원한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는 그리스도를 원하며, 그리스도밖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목사였던 새뮤얼 러더포드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의 달콤함은 내게 우주만큼 크다네. 오, 영혼이 가장 높은 하늘만큼 넓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담아 낼 수만 있다면! 수십조 개의 세상과 그만큼 많은 하늘이 있고 그곳이 사람들과 천사들로 가득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부족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일세. 그리스도는 생명의 샘이시네. 저 아름답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그리스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네.”

 

3. 청교도는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만 인생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심리학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리스도가 만유시고 만유 안에 계시다면, 우리가 어떻게 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제레미아 버로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분이심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다른 어떤 영혼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분임이 확실하다!” 버로스는 마치 그리스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듯이 인생의 운명에 대해 한탄하느라 온종일 시간을 허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데에는 충분하지만 당신을 만족시키기는 데에는 불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신성모독인가!”라고 말한다. 프로이드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이미 한 청교도가 현대의 심리적 혼란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

 

4. 청교도는 삶과 경건에 있어 성경의 충족성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성경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알려 주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우리에게 삶과 경건에 관련된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여러분은 오늘날 사람들이 “나는 자존감을 찾는다” 혹은 “나는 그저 나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싶다”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을 들어왔다. 그러나 자존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에 대해 좋게 생각해야 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발견한 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았다. 이사야는 자신이 발견한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과 같이 창조되었다면 어떻게 자존감을 결여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생명을 위해 일대일로 자기의 생명을 교환하신 것이다. 이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가치이다!

 

청교도는 성경에 기초한 참된 상담자였다. 그들은 최고의 상담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해석되고 적용될 때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했다.

 

300여년전 아이작 엠브로즈는 <그리스도인 군사>에서 성경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에게 조언을 받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상처 때문에 위로를 얻고자 하는 영혼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의사도 아닌 불신자에게 당신의 질병을 보여준단 말인가? 모든 질병을 고치는 하나님께로 가시라. 하나님은 진정으로 당신을 인도하신다. 바울이 성령에 의해 회심했을 때,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즉시로 하나님께 순종했다. 혈육과 의논하지 마시라.”

 

하나님은 영혼을 창조하시고 영혼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셨기에 영혼을 다루는 법을 가장 잘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과 가장 친숙한 사람들이야말로 영혼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람들이다. 사실상 청교도는 ‘영혼의 의사’로 불린다. 토머스 왓슨은 <죄는 영혼의 질병이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의사다>라는 논문을 썼다.

 

5. 청교도는 죄의 본성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를 가르쳐 준다.

 

죄 교리는 신학이라는 전체 스웨터를 풀어줄 실마리이다. 죄 교리에서 벗어나면 다른 모든 교리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죄가 고통보다 더 나쁘지만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반면 죄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버로스는 죄가 지옥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죄가 지옥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한다. 우리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죄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데, 이러한 은밀한 죄는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사악하고 지독하다. 조나단 에드워즈, “모든 죄는 무한한 속성을 갖지만, 범죄한 사람의 양심에 따라 죄가 더 가증스럽게 혹은 덜 가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시므로 죄는 무한히 악하다.”

 

6. 청교도는 실제적인 삶에서 우리를 도와준다.

 

팀 켈러는 리처드 백스터의 <성도의 생활 지침서>를 ‘이제껏 만들어진 성경적인 상담안내서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패커는 이 책을 기독교 서적 중에서 성경 다음으로 훌륭한 책이라고 평했다. 이 책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켰던 사람의 천재성을 보여 준다. 죄악된 영혼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던 심리학이라는 용어가 차츰 병든 마음을 고치는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심리학은 영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목사들의 손에서 불신자가 대부분인 상담가들의 손으로 옮겨졌다.

 

루이스 베일리의 <경건의 연습>은 청교도의 경건생활의 안내서의 모델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의 기본 생각은 한 사람의 하루와 인생을 성경을 기준으로 규정해 보자는 것이다. 존 거스트너 박사는 이 책이 청교도 운동을 낳았다고 했다. 나다나엘 래뉴의 <고독, 경건한 묵상으로 향상시키기>는 영적인 묵상에 관한 청교도 작품 중에서 고전으로 손꼽힌다. “여러분이 홀로 있는 시간조차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묵상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선하게 사용함으로써 그 시간을 향상시킬 수 있다.” 청교도에게 제11계명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지니라“일 것이다.

 

7. 청교도는 성경적인 복음전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늘날의 복음 전도는 대체로 인간중심적이다. 그러나 청교도의 복음전도는 하나님 중심적이었다. 오늘날 거의 상실된 하나의 교리가 청교도에게 있었는데 그것은 ‘구도’ 혹은 ‘구원을 위한 준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수단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이와 같은 수단들을 사용해야만 한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면 나는 누군가가 그리스도에 관한 정통교리를 설교하는 것을 들어야만 한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고자 하신다면 하나님의 정상적인 수단은 그 복음 설교일 것이다.

 

그가 구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는 않지만(왜냐하면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 구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한 적대감을 다소 누그러뜨릴 수는 있을 것이다. 청교도는 “만일 여러분이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면, 올바른 마음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구도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을 찾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구도로서 구원을 얻지는 않지만 구도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8. 청교도는 올바른 삶의 우선순위를 가지도록 도와준다.

 

고후5:9,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어떤 청교도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미소는 나의 가장 큰 상급이요, 하나님의 찡그리심은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사람들과 비슷해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청교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영원에 대한 투자가 될 것이다. 제레미아 버로스의 <복음 경외>는 올바른 우선순위에 관한 책으로서, 이사야 66:2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일곱 편의 설교를 담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9. 청교도는 하나님과 올바르게 관계 맺는 법을 가르쳐 준다.

 

솔로몬 스토다드의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의 의로 나타나는 것은 든든함> 은 전가된 의에 관한 책이다. 전가된 의와 주입된 의 사이의 영원한 차이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갖는 사람이 별로 없는 오늘날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둘의 입장 차이는 로마와 제네바의 문제가 아니라 천국과 지옥의 문제이다.

 

10. 청교도는 성경 말씀의 권위를 높여 준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작성한 청교도 거장들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의 권위는 반드시 믿어야 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서, 인간이나 교회의 증언에 의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진리이시고 모든 권위의 원인이신 하나님께만 온전히 의지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마28:18-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설교자들이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고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2:15). 우리는 신실한 사역자가 바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린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순종하라고 주신 것이다. 토마스 테일러,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위엄과 권위가 영원히 보존되도록 전달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대사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때는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듯이 말해야 한다. 말씀의 권위에 저항하거나 그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무서운 죄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꾼들이 거절 당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실 것이다.”

 

신명기 30:20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동일시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청교도들이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성경에 대한 경외심에서 왔다. 만일 우리가 청교도들이 하나님을 알던 것처럼 하나님을 알려면, 우리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이 사랑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지런하고도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교도를 읽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다. 사실상 청교도를 읽는 것은 교회 역사상 가장 훌륭한 지성인들이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비슷해질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청교도를 읽는 것은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다. 오, 우리가 청교도와 같이 가장 높이 경배하고 찬양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5. 제임스 패커, 『청교도사상(Among God's Giants)』, CLC, 2001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 나무(둘레가 18미터, 키가 108미터, 수백년 천년 이상)는 나로 하여금 영국의 청교도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 새롭게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한 또 하나의 거인족이다. 1550년에서 1700년 사이에 그들은 꿋꿋한 삶을 살았다. 위대한 청교도들의 성숙된 경건함과 연단된 꿋꿋함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의 영적 능력을 능가하는 하나의 횃불로 우리 앞에 비취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지나간 세대의 풍요가 우리 모두를 난쟁이와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서 청교도 거인들의 교훈과 모범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우리에게 청교도가 필요한 이유

 

1. 성숙한 그리스도인

 

청교도들은 원칙적인 사람들이고 헌신적이고 단호하고 훈련적인 사람들이며, 가정의 미덕에 있어 특히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나 어떤 중요한 일을 말할 때 말씀에 의존하였다.

 

청교도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그들의 성숙 때문이다. 성숙은 지혜와 선의와 쾌활과 창조성의 복합이다. 우리는 영적 난장이라면 그들은 거인들이다. 그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영혼들이었다. 맑은 머리의 열정과 따뜻한 가슴의 동정이 결합되어 있었다.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이며, 목표 지향적이며 조직적인 그들은 위대한 신자들이었고, 위대한 소망자들이었고, 위대한 행위자들이었고, 위대한 고난자들이었다. 영국에서는 권력자들에게서 고난을 당했고, 뉴잉글랜드에서는 자연으로부터 고난을 당했다. 그 고난이 그들의 성숙을 이루었다.

 

우리의 풍요와 안일과 사치는 성숙을 이루지 못한다. 이 영적 전투가 전형적인 청교도를 만들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대장이며, 그의 무기는 기도와 눈물이었다. 십자가는 그의 군기이며, 그의 문장은 “고난받는 자가 승리한다”였다.

 

청교도들은 대개 모든 공적 전투에서 졌다. 영국에서는 영국교회를 원하는 만큼 변화시키지 못했고, 소수파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대서양을 건너가서는 뉴잉글랜드에 새 예루살렘을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처음 50년 동안 청교도의 작은 이민들은 겨우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속적인 압박과 좌절들 아래에서 청교도들이 계속 즐겁고, 평화롭고, 인내하고 소망에 차 있음으로 쟁취한 도덕적 승리와 영적 승리는 히브리서 11장의 제 일석을 차지한 신자들의 명예와 자리 중의 높은 영광의 자리를 그들에게 주었다.

 

휘트필드는 말했다. “시련 아래 있을 때 성직자들은 가장 휼륭하게 저술하고 설교한다. 그리스도와 영광의 왕이 그 때에 그들에게 거하시는 것이다. 청교도들을 그처럼 찬란하게 비추이는 빛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이유였던 것이다. 1662년의 검은 바돌로매 법령에 의해 쫓김을 당하여 헛간과 밭과 도로와 울타리에서도 설교할 수 없는 자리로 내몰림을 당하였으나, 그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권위있는 사람들처럼 저술하고 설교했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저술로 말했다. 바로 이때에 독특한 감동을 주는 열정이 그들을 따랐다”

 

그들의 감동을 주는 열정은 계속되고 있고, 그 권위도 계속 느껴지며, 성숙한 지혜는 여전히 놀라움을 주고 있다. 이 문헌의 역사를 통해 청교도들은 그들이 알고 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성숙으로 나아가도록 오늘날의 우리를 도울 수 있다.

 

2. 일상생활의 통합

 

1) 그들의 일상 생활의 통합에 우리를 위한 교훈이 있다. 그들은 사람을 전체로 보았기 때문에 묵상을 행동과 통합하였고, 예배를 일과 통합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자기사랑과 통합하였고, 개인의 정체성을 사회의 정체성과 통합하였고, 넓은 범위의 관계적인 책임들을 철저하게 양심적이고 주도 면밀한 방법으로 관계적 책임들과 통합하였다.

 

2) 그들의 영적 경험의 특성에 우리를 위한 교훈이 있다. 청교도의 하나님과의 교제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고 성경이 가장 중요했다. 성경 진리의 전체 범위를 스스로에게 적용시키기 위해 광범위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묵상을 했다. 묵상 가운데 자기 심령을 탐색하고 도전하고,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감정을 분발시키고, 하나님의 약속들로 자신을 격려하고자 했다. 이 이성적이고 단호하고 열정적인 경건은 강박됨이 없이 신중하였고, 율법주의에 빠짐이 없이 율법 지향적이었고, 수치스러운 방종의 경향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표현하였다. 성경은 변할 수 없는 거룩한 법칙이었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 심령의 부정직성과 기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변치 않는 마음가짐으로 겸손과 자기 불신을 교화하였고 영적으로 보이지 않는 흠들과 숨어있는 마음 속의 악들을 찾기 위하여 정규적으로 자신을 검사했다. 그러면서도 병적으로 되지 않았고, 성경에 의한 자기성찰이었다.

 

3) 효과적인 활동에 대한 그들의 열정에 우리를 위한 교훈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타인들에게 맡기는 게으르고 수동적인 사람의 나태가 없었다. 그들은 조금도 자기 자신에게 의지함이 없이 개혁 운동에 참여하는 순수한 개혁 정신을 소유한 행동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자신들이 행한 일에 있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은 무엇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일꾼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갖고 있는 능력들을 사용하시되 자신들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시기를 열심히 기도하는 은사의 사람들이었다.

 

교회나 국가에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는 죄에서 거룩함으로 변화가 요구되는 곳에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위해 효과적인 동인이 되기를 갈망했다. 크롬웰과 그의 군대는 전투에 앞서 길고 강력한 기도를 드렸고, 설교자들은 강단으로 감히 나아가기에 앞서 길고 강력한 기도를 드렸고, 평신도들은 모든 중요한 문제, 즉 결혼, 사업 거래, 중요한 구매 등 무엇이나를 처리하기에 앞서 길고 강력한 기도를 드렸다.

 

4) 가정의 안정을 위한 그들의 프로그램에 우리를 위한 교훈이 있다. 청교도의 결혼 윤리는 당장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배우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친구로 견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배우자를 찾음으로 후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데로 나아갔다. 청교도의 자녀 양육 원리는 그들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로 자녀들을 훈련시키고, 자녀들의 육체와 영혼을 함께 돌보며, 근실하고 경건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성인의 삶을 위해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청교도의 가정 생활 윤리는 질서와 예의와 가정 예배를 유지함이 기초가 되었다. 친절과 인내와 언행 일치와 격려의 태도는 가정에서 필수의 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가정을 요새로 삼아 모든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정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가장 큰 칭송을 받을 만하다. 청교도들은 가정에서의 어려움과 실망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어려움과 실망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도 풀이 꺾이거나 마음이 상하지 않는 성숙의 모범을 보였다. 게리, “그는 자신의 가정을 교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자기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중생하도록 하기 위해 힘썼다.”

 

5) 청교도의 인간 가치 의식에 배워야 할 교훈들이 있다. 그들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도덕적 문제들과 영원과 인간 영혼이 중대하다는 것을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 인간 개개인들에 대한 경이감을 그들은 예민하게 느꼈다. 죄는 아무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 중세기의 영향을 받아 비록 그들이 분명히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언제나 존경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친구로 만들어진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가치관은 강력하였는데, 특별히 인간의 아름답고 고귀한 거룩성에 대한 의식이 강했다.

 

6) 청교도의 교회 갱신에 대한 이상에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박스터의 <개혁된 목사>는 칼빈주의를 유세하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자와 교사와 교리 문답자와 직무의 귀감으로서 그 자신이 ‘부흥된’ ‘갱신된’ 사람이다. 개혁의 본질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풍부한 이해, 하나님을 향한 애정의 분발, 헌신에 대한 열심의 증가 그리고 자신의 소명과 개인적인 삶에 있어 확고한 기독교적 목적과, 더 많은 사랑과 기쁨이었다. 이와 조화하여 교회를 위한 이상은 곧 ‘개혁된’ 성직자를 통해 각 회중의 모든 것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선구자인 리차드 그린햄은 1570년에서 1590년까지 캠브리지 부근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자신의 양떼가 일터로 흩어지기 전에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월, 화, 수, 금요일에 새벽 설교를 했다. 주일에 두 번 설교를 했고, 매주일 저녁과 목요일 아침에 교구의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하였다. 그는 아침에는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병자들을 심방하거나, 또는 쟁기를 잡고 일하는 이웃들과 협의하기 위해 밭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너무 열렬했고 비상한 노력을 하였으므로 모든 그의 와이셔츠는 물에 흠뻑 담근 것같이 땀으로 젖곤 했다. 그는 강단에서 내려오자 마자 다시 올라갈 정도로 과로를 했다.

 

그는 보기 드문 목회 상담자였다. 그는 괴로워하는 양심들을 위로하고 안도하게 해주는 큰 경험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원근 도처에서 영적 고통과 유혹들로 번민하는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이 신령한 의사의 명성은 널리 퍼져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부름을 받았다. 주님께서 그의 수고를 축복해 주시기를 기뻐하셨으므로 그의 지식과 경험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위로의 회복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경건함과 통찰력과, 복음적인 메시지와 근면한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회는 사실상 열매가 없었다. 그는 그의 후임자에게 ‘나는 한 가정 외에는 아무에게도 나의 목회로 이루어진 유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린햄은 푸른 초장을 갖고 있었으나 양떼는 야위어 있었다.’

 

리차드 페어클로프는 1647년에서 1662년까지 한 촌락에서 목회했다. 그의 친구인 존 하우이가 그의 장례식 설교에서, ‘그에게는 항상 많은 성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병든 사람들을 심방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책임 안에 있는 모든 가정들을 위해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개인적으로 그리고 따로따로 대화를 나눔으로 그들 영혼의 현재 상태를 알기 위해 노력하였고 게다가 또 교훈과 책망과 권고와 훈육과 격려 가운데 자신을 적절하게 그들에게 사용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힘들어하지 않고 즐겁게 그리고 철저하게 행했다. 그의 마음 전체는 자신의 일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해 동안 매일 그는 새벽 세 시에, 또는 더 일찍 일어나 다른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이것은 그가 진실로 기뻐하는 일이었다)’

 

이 생활 방식은 그린햄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였으나 이제 추수기가 이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리차드 박스터의 사역이다. 그는 1641년부터 1660년까지 키더민스터에서 사역하였다. 키더민스터는 성인 2천명 정도의 촌락인데 그들 대부분이 그의 목회에 의해 회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들을 “대부분 무지하고 교양없고 술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로-- 그들은 생명있는 진실한 설교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목회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내가 그곳에 처음에 왔을 때에는 한 거리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은 한 가정이었으나 내가 그곳을 떠날 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가정은 여러 거리에 몇 가정밖에 안되었다. 내가 개인 면담과 그들을 교리문답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 마을 전체에서 오기를 거절한 가족은 매우 적었다(박스터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지 않거나 표면상으로 경건한 삶에 대해 진지한 약속을 하지 않고 나와 헤어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서 박스터가 말하는 바는 <개혁된 목사>에서 그가 묘사하고 추천하는 실행이며 또한 우리가 하우이에게서 들었고 페어클로프도 따랐던 실행으로, 곧 개인적인 영적 교제를 위해 조직적으로 가족들을 면담하는 것이다. 박스터는 한 주에 이틀을 할애하여 매일 7,8가정 비율로 이런 방법으로 가족들과 만나 매년 교구의 8백 가정들과 모두 관계를 가졌다. ‘나는 먼저 그들이 교리문답의 내용을 암송하는 것을 듣는다(그가 사용한 교리문답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었다)’. 그 다음에는 그 의미에 대해 구두시험을 보고, 마지막으로는 가능한 한 모든 마음을 끌 수 있는 이유와 열심을 가지고 책임있는 사랑과 실천을 그들에게 강권한다. 나는 한 가족에 약 한 시간을 사용했다. 그 실행의 가치에 대한 그의 간증은 강조적이다. ‘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흑암의 왕국을 분쇄하는 가장 바른 진로를 전혀 택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한 나의 모든 공적 설교보다 더 뚜렷한 성공의 표적들을 알고 있다.’ ‘진실한 경건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겸손한 정신과 태도의 소유자들이었다.’

 

이제 공백 기간이 지나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추수 때가 온 것이었다. 나의 마지막 논평은 이것이 바로 부흥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과거에 목회자들이 중요한 역할들과 거룩한 삶을 담당하며 영혼들의 유익을 목타게 구했고, 완전히 자신을 헌신하고 자신들의 시간과 힘과 재산을 바치며 고통이나 희생을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곳에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경건으로 돌아왔다.

 

청교도주의는 부흥운동이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휘필드는 1767년에 썼다. ‘지난 30여년 동안 나는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보다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이 부흥하면 할수록 더 많은 훌륭한 과거의 청교도 저술들이 요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620년대에 앤트림에서 있었던 부흥만큼 극적인 사건은 청교도의 영국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에 열광적인 제임스 글랜디닝은 복음을 설교하는 법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설교하여 로버트 블래어와 그 밖의 사람들이 그를 대신하여 설교를 했는데 로버트 플래밍은 이 일을 ‘복음의 밝고 뜨거운 태양의 명멸’이라고 칭했다.

 

또한 청교도의 영국에는 1631년 월요일 커크 오 쇼츠에 있었던 일같이 압도적인 사건도 없었다. 그때에 수줍은 존 리빙스턴은 그 전에나 그 후에 두 번 다시 설교를 하지 않았는데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설교를 했고 그 설교 후에 500명이 그의 설교에 수반된 능력에 의해 회심을 했다거나 또는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변화했다고 간증했다.

 

1620년대 언제쯤인가 유명한 존 로저스가 청중들에게 성경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질타했던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입장으로 말했다. “그래, 나는 너희에게 오랫동안 나의 성경을 맡겼다. 그런데 그 성경이 아무아무 집들에서 먼지와 거미줄에 완전히 덮혀 있다. 너희는 성경을 듣는 것에 관심이 없다. 너희가 내 성경을 그렇게 사용하느냐? 좋다. 너는 내 성경을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의자에서 성경을 집어들고 마치 그것을 그들에게서 가져가 버리는 것같이 보이게 했다. 그러나 곧 그는 역을 바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역할을 취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극히 진지하게 소리지르며 간청했다. “주여,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셔도 좋지만 당신의 성경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지 마소서, 우리 자녀를 죽이시고 우리 집을 불태우시고 우리 재산을 멸하소서. 그러나 우리에게서 당신의 성경만은 남겨두시고 당신의 성경은 가져가지 마소서.” 그 다음에 그는 다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역할을 취했다. “너희가 그렇게 말하느냐? 좋다. 잠시 동안만 너희를 시험해 보도록 하겠다. 자. 너희를 위한 성경이 여기 있다. 나는 너희가 어떻게 그것을 사용하는지 볼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더 말하고 더 실행하고 더욱 그에 따라 사는지 볼 것이다.

 

이 말은 그곳에 있었던 토마스 구드윈존 하우이에게 이야기해 준 것이다. 그는 교회에 가득한 사람들이 눈물에 젖었고 구드윈 자신도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며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는 밖으로 나갔을 때 말에 올라탈 힘이 없어 15분 동안 말 목에 매달려 있었다. 그처럼 비범한 영감이 그에게 임했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대체적으로 임하여 성경에 대한 태만을 고치도록 충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청교도의 부흥은 비교적 조용하고 질서적인 역사였던 것 같다. 예외가 있다면 부흥이 절정에 달했던 1640년대와 1650년동안 지나치게 끓어올랐던 광신을 들 수 있다.

 

1570년 ‘애정깊고 실제적인’ 목회자들과 저술가들의 아브라함이 자신의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갔으니 그의 이름은 리차드 그린햄이었다. 그는 자기 도시에서 약 7마일쯤 떨어진 드라이 드레이턴의 목사가 되기 위해 켐브리지의 펨브로크 문학회의 특별 회원의 지위를 사임하였다. 그는 박스터 유형의 선구자적 개혁된 목회자였으며 진정한 사도적 방법으로 영국 농촌에 복음을 뿌리내리는 과제에 도전한 첫 번째의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목회 상담자. 또는 영적 의원으로서의 큰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다음 세대의 목회자들을 훈련시켰다. 성직 수임 후보자들이 사실상 견습생으로 그의 집에서 생활하며 그와 함께 공부했다. 지역의 목회자들과 먼 곳으로부터의 방문자들이 항상 그와 점심식사를 했다. 이렇게 그린햄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봉사와 목회 사역에 많은 경건하고 학식있는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양성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요, 수단이었다.”고 홀란드는 말한다.

 

그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대학에 계속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캠브리지의 장로교 선동자들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했다. 그들의 방침은 “기초를 세우기 전에 지붕을 덮는 것과 같다.” “자신을 개혁할 줄도 모르는 자들이 교회를 개혁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떤 자들은 교회 기율에 바빠서 자신의 사적인 타락을 보지 못한다.“. 캠브리지에서의 그의 모든 영향력은 인격적인 신앙과 교회의 평화를 조장하고 죄와 교회의 분립을 막는 데 기울어졌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평화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나 심지어 자신이 공감하는 견해들까지도 유감으로 생각하고 반대하였다. 그가 요청한 모든 것은 자기 양심에 순종하고 자기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유였다. 그는 영적 암흑으로부터 지역을 인도해낼 청교도 목회자들의 새세대의 전형이었다.

 

다른 반 세기 이상에 걸쳐 캠브리지는 그린햄 형의 많은 영적 의원들을 만들어냈다. 최초의 그들의 양성소는 그리스도의 대학이었다. 로렌스 체덜턴은 캠브리지의 재학생 시절에 신교도가 되었고 1584년 임마누엘 대학의 초대 교장이 되기 전에 20년의 가장 좋은 기간 동안 캠브리지에서 특별 연구원으로 있었다. 채덜턴은 50년 동안 성 클레멘트 교회에서 한 주에 한 번 ‘강의’(설교)를 했다. 그리고 82세에 설교를 그만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40명의 성직자들에게서 설교를 그만두지 말기를 간청받으며 자신들이 그의 사역의 덕택으로 회심을 하였다고 증거하는 서신들을 받았다. 풀러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채덜턴은 언젠가 두 시간 동안 설교를 한 것에 대해 사과의 말을 하자 청중들이 “하나님을 위해 계속해 주십시오, 계속해 주십시오”라는 눈물의 외침을 들었다고 한다.

 

1574년부터 웨드스필드에서 목회를 한 ‘또 한 명의 그린햄’, 리차드 로저스윌리암 구쥐존 프레스턴의 선도자이며 아쉬비델라 주크에서 40년 동안 설교했던 아더 힐더샘도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었다. 재학생 시절에 회심하여 1584년 특별 연구원이 된 채덜턴의 제자 윌리암 퍼킨스도 그러했다. 퍼킨스가 1602년 사망했을 때 뒤를 이어 성 안드레 대교회에서 매주 강의했던 또 한 명의 그리스도의 사람 폴 베이네스리차드 십스를 설교로 회심하게 했고, 리차드 십스는 존 코턴을 설교로 회심시켰고, 존 코턴은 존 프레스턴을 설교로 회심시켰다. 구드윈이 1613년에 20세의 나이로 그리스도의 대학에 왔을 때 청교도로 칭해지는 여섯 명의 특별 연구원 교수들을 자랑하고 있었다. 교장인 메인브릿지가 한 회개에 대한 설교는 곧 구드윈 자신을 회심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채덜턴, 로저스, 힐더샘, 퍼킨스, 구쥐, 베이네스, 십스, 코턴, 프레스턴 그리고 구드윈 모두는 ‘애정깊고 실제적인’ 목회자와 복음 전도자들 중에 모범적인 역할을 하는 지위를 얻었다. 이렇게 캠브리지 운동은 항상 영적 깊이를 유지하며 또한 숫적인 힘을 모으면서 진행되었다.

 

놀라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슬픈 사실은 이 존경할 만한 인물들에게서 본을 받은 젊은이들이 목회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몇몇 캠브리지 대학생이 1586년 의회에 낸 탄원은 이 문제에 있어 행동을 요구한다.

현재 우리 대학에는 이 땅의 대부분에 있어 해결되어야 하는 공통 과제인 무지한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위해 충분한 은사를 갖춘 유능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 중에 공정하고 동등한 조건으로 이 직무에 부름을 받는 자는 거의 없다. 무식한 목회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 쓰레기인 자들은 수천의 영혼들의 파멸과 하나님의 교회의 수치와 학문의 완전한 멸망을 오히려 좋아한다. 우리 자신이 책임을 맡는 어떤 수단들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성직 임명자들의 탐욕이 이처럼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성직 매매, 거짓 서약, 나아가 거의 명백한 동냥의 방법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일꾼이 크게 부족한 가운데 우리는 하루 종일 시장에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우리의 수고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우리 교회의 상태는 이처럼 탄식할 수 밖에 없다.

 

아무런 공적 행동이 취해지지 않았으나 이 젊은 청교도들에게 설교직을 주기 위해 많은 교구들에 강사직이 생겼다. 그리하여 엘리자베스, 제임스 그리고 찰스 시대에 영국 도처에 복음의 누룩이 퍼져나갔다.

 

두 세대에 걸친 청교도 서적들의 영향력은 그린햄의 드라이 드레이턴 목회와 박스터의 키더민스터 목회를 비교해 봄으로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린햄은 20년 동안 수고하였으나(1570-1590) 사실상 열매가 없었다. 박스터는 14년 동안(1641-1642,1647-1660) ‘그때까지 생명력있고 진지한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사역하여 약 8백 가정과 2천여명의 건강한 성인들이 살고 있는 그 지방의 대부분에서 “나는 얼마나 가치없는 벌레와 같은 존재인가--나의 어린 시절의 존경하는 목회자들이 한 곳에서 50년 동안 수고하고도 자신들의 교구에서 한 두명의 회심자를 얻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풍성하게 나를 격려해 주시다니!”라는 의미심장한 고백을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경우에 있어 사용된 방법은 근본적으로 동일했다. 박스터도 강단에서나 개개인들과의 교제에서 ‘나 자신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하며’ 평생을 보냈다고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세대의 청교도 설교와 경건한 저술들에 발효된 박스터의 영국은 그린햄의 영국과는 다른 곳이었다. 묵은 땅이 파헤쳐져 수십 년 동안 충실하게 씨가 뿌려져서 이제 추수기가 이른 것이었다. 그린햄과 로저스와 같은 사람들을 목회로 인도했던 회심된 공동체라는 박스터의 목회 비전이 결국 그 성취를 보게 된 것이다.

 

공화국 시기 동안 영국의 많은 지역에 추수의 태양이 밝게 비추었으나 곧 폭풍의 구름이 다시 몰려와 ‘애정깊고 실제적인 영국 작가들’의 역사는 행복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어두운 그림자에 덮혀 끝이 난다. 1640년대에 정권을 잡은 청교도들은 개인적인 신앙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일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일치하지 못했다(이것이 크롬웰이 그 자신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던 바와는 반대로 마음 내키지 않는 독재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였다).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함에 일치하였으나 교회 종류에 있어서는 일치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괴한 행동들과 광신이 들어와 청교도의 계획을 망쳐 버렸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양심이 지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나 이제 평신도 지도자들은 성경을 인용하여 내적인 빛의 인도들을 확인했다. 목회자들은 영원의 빛 가운데 땅에서 사는 기술을 가르쳐 왔으나 이제 열심파들은 17세기에 영국에 이루어지는 천국을 보는 꿈을 꾸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선포하는 설교자의 직분을 높여 왔으나 이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영감을 받는 대로 자기 생각을 담대하고 무제한적으로 공공연하게 발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설교자들은 성령이 없는 학문은 성경의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고 설명해 왔으나 이제 교육을 통해 부적격자도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 교육을 받고 신학적으로 학문을 갖춘 청교도 목회자들이 이 경향들에 대해 반박하자 퀘이커교도들, 광적인 설교자들, 머글레토니안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자들은 청교도 목회자들이 성령을 소멸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박스터는 이 모든 내용을 망라하고 있는 인쇄물들의 활동에 무엇인가 마귀적인 것이 있다고 보았다. 1653년에 “나는 최근 인쇄물의 방종하고 사치한 범람은 전에 사람들에게 읽혔던 분별력있고 경건하고 뛰어난 저술들을 매장시키고 압도해 버리려는 대적의 계획이라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고 하였다.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혼란과 불안이 만연하고 있었다. 청교도 부흥은 스스로의 힘을 소모하고 있었다. 크롬웰이 죽자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같이 보였다. 왕정과 영국 국교회의 의 복고는 필연적인 반동으로 1660년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목회자들에게 있어 이 결과는 재난이었다. 무시무시한 클래런던법이 그들을 몰아내고 억압하였다. 그들이 영국 국교회 밖에서 지속하던 사역은 불법이 되어 그들을 한꺼번에 감옥으로 밀어넣어졌다. 존 오웬, 토마스 구드윈, 존 하우이, 리차드 박스터, 스티븐 차녹과 같은 위대한 목회 신학자들은 이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많은 저술을 했고 번연의 훌륭한 우화들도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영국 교회에 전혀 동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학들은 그들과, 또한 그들과 함께 하는 젊은 비국교주의자들에게 문을 잠그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의 동류를 효율적으로 재생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빛을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던 조직화된 비국교주의는 자유가 도래했으나(1689) 그들의 선구자였던 청교도 사상의 장성함에 이르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1705년 마지막 거인인 존 하우이가 죽었을 때 청교도 운동도 끝이 났다.

 

 

 

 

 

 

6. 로이드 존스, 『청교도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생명의 말씀사

 

6-1, 1971년 청교도주의와 그 기원

 

로이드 존스가 청교도 신학에 젖어든 과정;

그는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스트 교회에서 자랐다. 그들의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청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책을 대단히 열심히 탐독했다.

그들은 청교도들의 책을 인용했고, 때로는 그들의 설교를 뽑아 도용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진정한 관심은 1925년 우연히 리처드 백스터의 전기를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때부터 청교도와 그들의 저작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생생한 호기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사역 전체가 이것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이런 관심을 더욱더 부추긴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발견한 일이었다.

그분의 책을 읽으면 누구든지 그와 동일한 자료들을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청교도주의처럼 참된 말씀 사역을 격려하는 것은 없다.

그들은 그 면에서 뛰어난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청교도주의는 1524년 윌리엄 틴데일에게서 최초로 모습을 내러냈다고 주장한다.

내픈의 <튜더왕조 시대의 청교도주의>에 동조한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일종의 사고의 형태이다.

청교도주의는 태도요 정신이다. 틴데일은 감독들의 승인이나 재가를 받지 않고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했다. 이것은 당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청교도주의가 쏜 첫 사격이었다.

그는 또 왕의 승낙 없이 영국을 떠났다. 이것 역시 비상한 행동이었고 당국자들의 눈에는 지극히 비난 받을 만한 일이었다.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고 싶은 열망에서 한 일이었다. 그는 독일로 가 루터 등의 도움을 얻어 위대한 일을 마무리했다.

 

이 두 행동들은 당국의 태도에 대한 청교도의 전형적인 자세로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전통이나 권위의 문제보다 진리를 앞세우는 것을 의미했다.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고집하는 것이었다.

 

틴데일 시대로부터 이 정신, 이 자세, 이 사조가 계속 드러났다. 헨리 8세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을 쏟았는데, 그 일이란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할 길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황과 그 권위를 제거하고 자기 자신이 영국 국교회의 머리가 되기를 원했다. 헨리 8세의 카톨릭 형식으로 돌아가려는 변덕스런 여러 가지 조치들은 전형적인 청교도적 자세를 다시 한번 자극하여 드러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신앙 진리를 확신했던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일었다. 크랜머 등은 잉글랜드에 머물면서 그 모든 조치에 복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조치에 불복하여 영국을 떠나 대륙으로 건너가야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일스 커버데일(성경 번역으로 유명한 사람)과 존 후퍼, 힐스 등이었다. 이 사람들은 대륙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들은 불링거의 영향을 받았고, 취리히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츠빙글리와 제네바의 존 칼빈 등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츠빙글리는 매우 급진적인 개혁자였다. 그는 의식 문제나 성직자의 복장 문제에 있어서 아주 결연한 자세를 보여 그것을 다 바꾸어 버렸다. 이 잉글랜드 사람들은 이러한 영향을 크게 받아 로마 카톨릭 교리에 반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이 가르치는 교훈의 오류에 눈을 떴고 그것을 반대하고 배격했다. 그러나 이제 이 대륙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종교적인 의식주의를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교 개혁이 불완전하며, 단순히 교리를 바꾸고 거짓된 로마 카톨릭 교훈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실제 차원에서도 이행되어야 하며,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종교 개혁이 불완전하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청교도주의의 핵심적이고 가장 특징적인 요점이다.

그들은 누가복음 9:62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자주 인용했다. 쟁기를 손에 잡은 자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일을 완성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강조한 데서 그들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를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잠시 후 영국에 돌아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헨리8세가 즉위하고 있는 동안 내내 큰 핍박을 받았으므로 대륙으로 오고가는 일이 많았다.

 

이 사람들의 영향력과 그 가르침이 보다 더 개방적으로 나타난 것은 에드워드 시대였다.

에드워드 통치 시기에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교회 정치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 국교회주의의 관점은 진보적인 관점이요 발전적인 관점이요 전형적인 “카톨릭적” 관점이다. 반면에 청교도의 관점은 이러한 것들은 신약성경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정적 관점이다. 국교회에서는 언제나 이 점진적이고 진보적인 사상, 즉 교회는 그 체험과 지혜로 계속 발전해 나가고 성경의 교훈을 새롭게 인식해 나간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개념은 교회 정치와 의식의 문제에 있어서 발전과 첨가를 가져온다. 반면에 청교도들은 “아닙니다. 가르침은 신약성경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한 의견 충돌은 필연적으로 특히 감독에 대한 관점에 차이를 가져왔다.

감독은 지금까지 행해 온 방식대로 계속 통치할 권한을 갖고 있는가? 청교도는 이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대륙의 교회 통치 형태를 선호했다.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사람들이 대륙에 갔었느냐 가지 않았었느냐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크렌머도 리들리도 래티머도 잉글랜드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메리 여왕 시대로 오면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녀는 1553년부터 1558년까지 통치했는데, 참된 프로테스탄트들은 대륙으로 도망쳤고, 잉글랜드에 남아 있던 래티머 리들리 크랜머 같은 사람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윌리엄 휘팅엄(William Whittingham)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잉글랜드 교회를 위한 예배 모범을 작성했다. 그는 연도(Litany, 일련의 탄원기도로 사제 성가대 등이 선창하고 신자들이 응답하는 형태임)를 빼고, 예배시에 중백의를 입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이 교회에 입교하려면 먼저 믿음을 고백하도록 한 하나의 훈련 체계를 도입했다. 그는 목회자나 감독, 설교자, 장로, 집사들을 임명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추방자의 교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집되었고 출석하는 거의 모든 예배자들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리처드 콕스였다. 휘팅엄은 이 계획서를 작성하였고 존 녹스는 이 교회의 목회자로 지명되었다. 문제는 콕스와 녹스 두 인물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콕스는 강한 사람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반대하면서 “저들은 영국에서 행한 것같이 행한다. 저들은 영국 교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존 녹스는 “주께서 그 교회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얼굴을 가지도록 허락했다.”고 했다. 여기서 영국 교회 대 그리스도의 교회, 여기서 국교도와 청교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한다.

결국 존 녹스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어 제네바로 갔는데, 칼빈이 그를 받아들이고 인정했다. 그곳에서 그는 후에 스코트랜드 교회에서 꽃을 피우게 된 많은 교훈을 배웠다.

 

영국에서는 주목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보편적으로 성직자 계층 밖에 있는 사람들이 런던에서 작은 교회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런던은 특히 16-17세기에 매우 큰 도시였으며, 메리 여왕 때는 독립파 교회들이 일어났다. 이 교회들은 후에 미국으로 건너간 필그림 파더(Pilgrim Father) 중 한 사람인 윌리엄 브래드쇼(William Bradshaw)에 의해서 자주 언급되었다. 그는 뉴잉글랜드에서 하던 일은 메리 여왕 시대에 영국에서 있었던 일의 연속이라고 지적했다.

 

1558년 여왕 엘리자베스가 즉위했다. 새 여왕은 이복 자매인 메리 여왕과는 달리 참된 프로테스탄트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곧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곧 자기 주장을 하며, 자기는 영국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이며 감독 지명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초기에 반대했던 의식들을 그대로 보존시킬 것을 주장했다.

 

대륙에 함께 있었던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전형적인 국교도인 파커 대주교 리처드 콕스. 에드먼드 린달, 존 주웰 등은 그들이 만일 공직을 거부한다면 엘리자베스는 그들 대신 로마 카톨릭을 취할 것이라고 했다. 자신들은 복음을 전파할 자유가 있고 교리도 바르므로 만일 이러한 의식들에 대한 태도 때문에 교회 내에 있는 공직들을 거부한다면, 자기들의 영역을 카톨릭교도들에게 넘겨주는 격이 되고 교회 전체는 참된 프로테스탄티즘을 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들의 견해는 달랐다. 토머스 샘슨, 마일스 커버데일, 존 폭스, 로렌드 험프리, 레버 등은 여왕을 반대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이겨내자”는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도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수동적인 저항 자세를 취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은 잘못된 자세라고 생각했다. 의식들과 다른 문제들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계속 투쟁해 나갔다.

 

1563년에 유명하고 중차대한 “성직자 회의”가 있었다. 청교도들의 주장은, 교회 예배 의식에서 제네바식 가운을 사용하고, 대신 중백의를 벗자는 것이었다. 중백의는 카톨릭의 유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반대한 것이다. 성찬식 때 무릎을 꿇는 것도 폐지하자고 했다. “성자의 날”도 폐지하고 세례받을 때에 십자가 표시를 하는 것도 폐지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한 표 차이로 이 견해는 지고 말았다. 58:59로. 청교도들은 이 회의에서 정말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큰 패배를 맛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싸움을 하였다. 예복에 대해서 계속 투쟁했다. 그래서 1563년부터 1567년 사이에 예복 분쟁이 있었다. 이때부터 청교도(퓨리탄)이란 이름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까다로운 사람들(Precisians)이라고 불렀었다.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는데, 청교들은 “이러한 문제와 영역에 대해 세속 권세가 권위를 갖는 것이 옳은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의 주장의 두 번째 논리적 단계였다. 교회의 일들은 누가 결정해야 하는가? “중립적인 일의 영역에 대한 공권력의 한계는 무엇인가?” 이것이 이제 대원리와 논쟁의 골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1563년부터 1570년까지 이 문제는 갈수록 더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패트릭 콜슨은 아주 재미있는 말로 국교회주의는 일종의 “개혁 카톨릭교로서 온건과 중용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했다. 그들은 가능한 최선을 주장했다. 그러나 분명히 청교도들은 그렇지 않았다. 대륙의 제세례파로부터 들어온 영향들의 조짐이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일부 청교도들로 하여금 극단에 빠지게 했던 것이다.

 

그 어려운 메리 여왕과 핍박의 시대에 그처럼 우정을 나누고 친구 사이가 되어 함께 동조했던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분열이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직책을 맡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거절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투쟁했다. 여왕은 감독들에게 이 사람들을 제어하라고 했다. 직책은 이들의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 직책을 맡는 것은 언제나 위험천만한 일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하는 것이 마음의 첫 자리에 오기 쉽다. 그들은 점점 안주하기 시작했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매우 부자가 되었다. 감독들은 그때 부유했고 이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망명자로서 함께 대륙에 있을 때 보여주었던 놀라운 의견일치를 망각하고 말았다. 규율이 최고가 되었다. 규율을 지키고 질서를 지켜야 했다.

 

1570년에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케임브리지의 토머스 카트라이트와 관련된 일이다. 그는 사도행전의 처음 몇 장을 강론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전체를 제기했고, 이렇게 함으로써 영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시작한 셈이다.

 

분리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사람들은 국가 교회 개념 자체를 완전히 불식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왕과 정부 관련자들을 염두에 두고 “무엇을 위해서도 지체하지 않는 개혁”을 말하고 또 글을 썼다. 보다 근본적이고 참된 청교도주의가 장로회주의와 분리주의로 나누어졌다. 전자는 여전히 영국 국교회는 장로교회로 개혁될 수 있다고 믿었고, 후자는 영국 국교회를 포기했다.

 

1570년대말과 1580년에 들어와서 그러한 방법으로는 도저히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1590년대에는 더욱더 명백해졌다. 1593년에 존 페리와 헨리 바로우 등의 사람들이 분리주의적인 가르침과 행위 때문에 사형에 처해졌다.

 

드디어 1603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스코트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제임스 1세 왕이 된다. “일천 명의 탄원서”라는 대단한 탄원서를 작성하여 그에게 올렸지만 여지없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엘리자베스보다 더 나빴다. 가련한 청교도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네델란드로 갔고, 1620년에 미국에 건너간 사람들은 필그림 파더가 되었다.

 

영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계속 영적이고 도덕적인 교훈과 설교를 해나갔는데, 이는 리처드 십스, 존 프레스턴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저작집에서 볼 수 있다.

 

다음 왕인 찰스 1세는 순전히 영적인 싸움과 열정에 정치적인 요소를 개입시켜 청교도들로 하여금 다시 어떤 소망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이 싸움은 1640년까지 계속 되었다. 왕과 청교도들 사이에 공공연한 전쟁이 벌어졌다. 이것은 공화정치와 크롬웰의 통치 시기를 불러왔고, 이때 국교회 제도는 폐지되었고, 잠시 동안 장로교회가 공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주춤하던 회중교회가 다시 서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1662년에 대추방이 일어난다. 이것으로 인해 국교도적 청교도주의는 종식을 고하게 된다. 존 오웬은 독립파가 옳다고 확신하고 그 전해인 1661년에 떠났다. 1640년대에 토머스 굿윈은 독립파를 지지하고 나섰다.

 

대추방으로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생활 터전에서 추방되는 일을 당하게 된다. 이제 공식적인 비국교도가 생겨난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영국 국교회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영국 국교회 속에 청교도주의를 심으려는 시도는 결국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문제가 실제적으로 결론 지어진 것은 1663년이었다.

 

그동안 필그림 파더들은 지금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회중교회를 형성했다. 새로운 잉글랜드 방식을 세우는데 합의했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언제나 장로교회나 독립교회로 발전되어 나갔다.

 

요약하면, 청교도의 특징은 무엇인가? 국교도와 청교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들은 다 프로테스탄트였으며 16세기 말엽까지는 사실상 모두 칼빈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들은 모두 프로테스탄트였고 칼빈주의자였으며 국가 교회를 믿었다. 이것은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그러면 차이는 무엇인가? 참된 차이는 그들은 모두 프로테스탄트였지만 국교도들은 언제나 “카톨릭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차이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의 포괄적인 교회, 하나의 국가적인 연관을 가진 교회를 믿었다.

 

국교도와 청교도의 차이의 핵심

 

청교도와 국교도의 차이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관심의 문제였다. 그것은 완전하고 철저한 개혁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것은 의식들과 예복들을 반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으나 교회의 교리 전체로 발전되어 나갔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했다.

 

청교도와 국교도 사이의 차이는 국제적인 시각과 한 국가적인 시각의 차이라 할 수 있다.

녹스와 청교도들은 국제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국교도들은 국내에만 있어서 국내적인 사고방식만 갖고 있었다. 리처드 콕스가 일차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영국 교회의 얼굴”이었다. 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으로 돌아가기 원했다. 국교도는 역시 전통과 관습과 계속성에 관심이 있었다. 언제나 계속성을 강조했다. 영국 국교회는 “중간 교회”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기들은 개혁교회일 뿐만 아니라 카톨릭 교회라고 언제나 주장해 왔다. 계속성과 전통!

청교도는 모든 것을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한 반면, 국교도는 이성을 끌어들였다.

청교도들은 복음적인 관점만이 유일한 관점이라고 하는 반면에, 국교도는 복음주의는 하나의 관점이요 하나의 강조점이요 하나의 태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강조점을 선포할 자유만 얻는다면, 포괄적인 교회의 부분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는 이렇게 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차이이다.

 

실제 영역에 있어서의 차이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청교도는 예배의 신령성을 강조한다. 국교도는 예배의 형식적인 면을 강조한다. 예배의 구성에 더 관심이 있다. 청교도는 교제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국교도는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다. 모인 교회라는 개념은 청교도 사상에 있어서 핵심과도 같다. 그러나 국교도는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다. 청교도는 죄를 색출해 내어버리는 것이나 엄격한 교회 훈육을 믿었다. 국교도는 외면적 일치에 만족하는 경향을 보인다.

 

1662년 이후 300년의 역사는 로마 카톨릭의 잔재로 여겨졌던 것에 복종하는 일보다 차라리 추방당하는 것을 택했던 사람들이 옳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준다.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신 구조요 하나의 정신이다.

 

참된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장로회주의 안에서 발견된다고 저는 주장한다. 특히 존 녹스에게서 말이다. 토머스 카트라이트에게서도 발견된다. 분리주의적인 관점을 취했던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며, 뉴잉글랜드 교회들에서도 발견된다. 또 비국교도와 독립파, 침례교도들 중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토머스 굿윈이나 존 오웬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청교도 정신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와 교회론을 중심적 위치에 두었기 때문이다. 스펄전에게서도 같은 방법의 본질적 청교도 정신을 보게 된다. 그는 청교도적 사고 방식의 완벽한 실례이다.

 

오늘날 국교회적 사고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침례교 연맹, 영국 회중교회, 메소디즘과 청교도주의를 기원으로 하는 기타 교회들이다. 그들은 청교도가 아니라 국교도로서 생각함으로써 자신들의 기원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청교도는 일차적으로 순전한 교회, 진실로 개혁된 교회에 관심이 있다. 은혜의 교리를 크게 강조하고 목회 신학에 강조점을 두며 청교도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존경할지라도, 첫 번째 관심이 순전한 교회,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에 관심이 없다면 자신을 청교도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청교도주의는 철저한 개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교회의 교리 전체로 나아간다. 우리는 청교도주의의 다른 면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그들이 교훈의 위대한 자료들이 되었던 것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만일 우리가 교회의 교리를 중심에 놓지 못하면 참된 청교도의 자세, 청교도의 사고방식, 청교도의 정신, 청교도의 이해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6-2, 1972년 존 녹스- 청교도의 창시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부터 타락하고 변질되기 시작하였다.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성경적인 기독교로 많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 종교개혁은 불완전하고 충분하지를 못했다.그래서 일어선 사람들이 바로 청교도들이다.거기서 더 나아가 종교개혁을 부인하고 극단적으로 간 사람들이 제세례파들이다. 그들은 결국 이단의 그룹이 되고 말았다. ** 청교도주의는 1524년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에게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1) 청교도주의는 믿음의 태도요 정신이다.그는 일반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불타는 소원을 갖고 있었다.그가 청교도였음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만난 장애들을 극복하는 방법이다.그는 감독들의 승인이나 재가를 받지 않고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했다.이것은 청교도주의가 쏜 첫 사격이었다. 그 당시에는 감독들의 승인과 허락을 받지 않고 그러한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청교도주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행동은 왕의 승낙 없이 영국을 떠난 것이었다. 성경을 번역하고 싶은 열망에서 그는 그렇게 했다.독일로 가서 루터 등의 도움을 받아 위대한 일을 마무리 지었다.이 두 행동들은 당국에 대한 전형적인 청교도의 자세로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전통이나 권위의 문제보다 진리를 앞세우는 것을 의미했다.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고집하는 것이었다.2) 미국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끌어가는 두 정신이 있다고 한다.하나는 청교도 정신이요, 다른 하나는 개척정신이라고 한다.그러나 사실은 개척정신도 청교도에게서 나왔다.그렇게 보면 지금의 미국을 이끌어가는 정신은 청교도정신이다.3) ‘체험과 부흥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을 쓴 양낙홍 교수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우리 시대는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나 체험이 없는 피상적 복음주의가 교회들을 지배하고 있다. 무언가 좀더 강력하고 전반적이며 효과적인 수단이 필요하다. 성령님이 강한 역사를 통해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교회사에서 특별히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있던 민족들에게 나타났던 대각성 혹은 참된 부흥이 절실히 요청된다.교회사상 가장 신앙 좋은 사람들은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어린아이처럼 성경을 믿었고 하나님을 경외했고 진지하게 구원을 추구했으며 헌신적이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겼다. 청교도시대는, 과거 역사속에서 기독교가 가장 순수하고 깊었고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했던 시대였다. 그리고 가장 능력있고 열매가 풍성했던 시대였다.청교도들의 영적 각성의 결과, 19세기의 부흥과 세계 선교의 원동력이 마련되었고 그 덕에 유라시아의 변두리에 살고 있는 우리도 오늘 예수를 믿고 있다. 17-18세기 대영제국의 국력과 19-20세기 미국 문화의 원천이 바로 청교도신앙이다.모든 문명의 근저에는 정신적 사상적 근거, 종교적 신앙이 자리잡고 있다.막스 웨버도 서구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은 기독교정신이었다고 한다.그 기독교정신의 원천이 바로 청교도 신앙이다.4) 교회를 소생시키고 기독교를 새롭게 부흥시키려면 청교도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교회를 소생시키고 기독교를 부흥시키자면 이전 시대 그런 역사가 일어났던 시대로 돌아가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었는지를 우리는 연구하고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던 역사를 통해 도전과 격려, 영감을 얻어야 한다. 기독교가 청교도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외침이 울려 퍼지고 있다.5) 청교도들의 특징은 교회가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개혁되기를 원하였다.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청교도들이 미국에 건너가 필그림 파더들이 된 것은 1620년이었다. 영국의 제임스 1세(1603년 즉위)의 핍박을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간 사람들이 필그림 파더들이다.수많은 청교도들이 이민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네델란드로 갔다.(제임스 1세는 킹제임스 버전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다. 그러면서 그는 청교도 핍박자였다)** 청교도의 창시자는 존 녹스이다.1) 청교도의 창시자 존 녹스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서 청교도의 정신을 배우고자 한다.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자라났고 사제가 되었다. 한때 그는 존 녹스 경으로 알려졌다.존 녹스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선조들 중에 귀족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없었고 또한 그를 추천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다. 1503년, 1504년, 1513년, 1515년?그가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뛰어난 천부적 재능 때문이었고 특히 그의 회심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초기에 비추어진 대단한 빛을 통해 놀라운 방법으로 회심했다. 그는 대단한 변화를 경험했고, 로마 카톨릭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프랑스 사람들이 세인트 앤드류를 점령하고 여러 사람들을 붙잡아 갔을 때, 존 녹스도 붙잡혀가 거의 2년 동안 프랑스 군함에서 노예로 일을 했다. 이것은 가장 참기 힘든 체험이었는데, 그는 이 고통을 받으면서 그러한 삶의 가혹성과 지독한 잔인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전생애에 흔적을 남겼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건강을 해쳤고, 건강 때문에 끊임없이 고생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는 에드워드 6세가 통치할 때에 궁정 설교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에드워드 6세가 16세의 나이로 죽자 “피의 여왕” 메리 여왕이 영국 왕이 된다. 녹스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제네바의 존 칼빈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메리 여왕이 죽고 1558년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다음 해에 스코틀렌드에서 위대한 일을 시작했고 1572년 그곳에서 죽기까지 계속 거기서 사역했다. 존 녹스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대감을 받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성품 속에는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칼빈보다 더 있었던 것 같다. 교회가 카톨릭으로 하나가 되어 있던 당시 존 녹스와 같은 사람은 신랄한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2)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키가 작은 사람들과 작은 민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현대의 표준으로 보면 외모적으로 특출한 데가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강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육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를 추천할 만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한 가지 뛰어난 것이 있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눈에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의 능력이었다. 칼빈은 학자였지만 그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서로 다른 것들을 분별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그의 또 다른 특징은 그의 놀라운 정력이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군사 지도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데모스테네스가 웅변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행동, 행동, 행동”이라고 했다.3) 녹스는 겁이 많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여러 번 스코틀렌드에서 도망쳐 잉글랜드나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핍박과 큰 위협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지혜와 주도 면밀함의 원리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자신이 스코틀렌드에 있었으면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질 것임을 그는 알았다. 조지 위샤트와 패트릭 해밀턴 등 자기보다 앞선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는 그같이 사형에 처해져 희생당하는 것은 일을 진척시키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도망쳤다. 때로는 머물러 있다가 순교자가 되는 것보다 도망치는 데 더 큰 용기를 필요할 수 있다.4) 그는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거의 매 단계에서, 자신이 얼마나 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 이상은 결코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었다.5) 그의 용기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그는 혼자 되는 것, 혼자 서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의 영웅적인 성품을 녹스에게서도 발견한다. 그는 죽으면서 “나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6) 녹스는 매우 능력있는 설교자였다.설교자로서 그의 위대한 특징은 열열함이었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을 느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메리 여왕은 녹스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많은 잉글렌드 군대보다도 녹스의 기도와 설교를 더 무서워했다. 신하요 대사였던 랜돌프는 녹스와 그의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 한사람이 한 시간 동안 하는 말은 500개의 트럼펫이 계속 귀에 불어대는 것보다 더 많은 생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녹스가 한 설교로 전체 상황이 변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영주들과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모든 사람들이 굴복할 준비가 되었을 때, 녹스는 설교단에 올라가 설교를 하여 전체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 칼 라일은 존 녹스를 “청교도주의의 대제사장이요 창시자”라고 했다.1) 녹스는 그의 사상의 독창성과 독립성에 있어서 청교도주의의 창시자였다. 정의상 청교도란 독립적인 사람,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한 사람이다. 청교도는 결코 “기성인”이 아니다. “종교의 기성화”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모든 면의 기성화에 대해서도 그것을 뜻한다.“기성화된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떠한 삶의 영역에 대해서도 언제나 권위자들의 편에 서며, 이제까지 이루어진 일과 상태 편에 선다. 그들의 최고의 관심은 과거를 고수하는 것이다.청교도는 그 본질과 정신에 있어서 결코 “기성화된 사람”이 아니다. 독립성과 독창성, 스스로 성경을 읽는 자세,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과 관계없이,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열망 때문이다.2) 녹스는 청교도주의의 주도원리들을 명백하게 제시했기 때문에 “청교도주의의 창시자”이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최고 권위의 주도 원리로 삼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와 그 전통 및 성경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우선한다. 청교도들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 권위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녹스의 주도 원리이다. 만일 성경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않았고, 그것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3) 두 번째 주도원리는 “철저한”(뿌리와 가지) 개혁을 믿었다는 것이다.교리의 개혁에만 멈추지 않고 개혁이 실제의 영역에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약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새로운 교회(“새로운 형성”)를 만드는 것이었다. 존 녹스는 말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특히 성례를 집행할 때 성경에 명시된 규율을 가감 없이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종교 의식들을 고안하거나 그것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종교를 만들거나 고안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종교를 가감 없이 보존하고 지켜야 합니다”“신약의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사도들이 행했던 대로 집행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덧붙여서도 빼서도 안 됩니다. 또 미사는 가증한 우상숭배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요 주의 성찬을 사악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4) 녹스는 이 원리들을 적용했다. 이론적 또는 학문적인 청교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청교도주의를 하나의 사상으로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가르침들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청교도주의를 배반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은 참된 청교도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녹스가 존 후퍼보다 탁월했던 부분이 이것이다. 후퍼는 자기가 믿는 것에 등을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후퍼는 감독으로 임명받아야 할 때, 자신은 관례적인 예복을 입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히게 되자 굴복하고 예복을 입었다. 행동이 말보다 중요하다. 녹스는 그 당시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공기도서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것에 관심을 가지라고 요청하지도 않았고 게시판에 발표하거나 자기는 기도서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5) 녹스는 신약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믿는 교회의 본질과 규례 및 의식을 양심적으로 적용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뛰어났다. 중요한 사항 한 가지는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관습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수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 지배하에서 해온 관행이었고 개혁된 국교도들도 지킨 관행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앉은 자세로 성찬을 받으라고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존 녹스였다. 이렇게 가르쳤을 뿐 아니라 실행에도 옮겼다. 이것이 실제의 청교도주의이다. 이것은 대단한 혁신이었다. 존 녹스가 지도력을 발휘하여 행한 또 다른 혁신은 성찬 때 쓰는 면병 대신 빵을 사용한 것이다. 녹스는 그러한 일을 한 최초의 사람이었다.6) 잉글랜드 청교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되었다. 토머스 칼라힐은 녹스가 미국 청교도주의의 창시자라고 한다. 녹스는 1776년의 미국의 독립전쟁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문을 열어놓은 사람이었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16세기의 스코틀렌드나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는 유순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강한 사람, 엄격한 사람, 용기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이 바로 존 녹스이다. 마르틴 루터도 같은 기질의 사람이었다. 그 시대는 영웅적이고 거센 성격의 소유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일으키셨다. 7) 존 녹스의 마지막 임종을 그의 딸이 이렇게 기록했다. 정오쯤 되어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고린도전서 15장을 큰소리로 읽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과 혼과 몸을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세 손가락으로 영과 혼과 몸을 표시했습니다. 오후 5시쯤 되었을 때 ‘내 처음 닻을 내렸던 곳을 찾아서 읽으시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요한복음 17장을 읽었습니다. 10시쯤에 저녁 기도문을 읽었을 때 의사가 기도문을 들을 수 있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당신과 모든 사람이 내가 그 기도문을 듣는 것처럼 듣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아뢰겠습니다 저 하늘의 소리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짧게 ‘이제 때가 왔다’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들어갈 때, 이 위대한 하나님의 용사가 들어가 그의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았을 때 하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음에 틀림없습니다.

 

 

6-3, 1976년 조나단 에드워즈와 부흥의 중요성

 

오늘날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감동적이고 열정적이며 능력있는 설교이다. 설교는 “뜨거워야”하고 “진지해야”한다. 때로 에드워즈는 자신의 설교 원고를 다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회중들에게 읽어주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다. 때로 그는 설교 요점만 적어서 설교했다.

 

그는 설교할 때 복음주의 원리를 언제나 기초로 했으며, 영혼의 영원한 구속에 대한 강론을 다섯 차례나 했다. 그는 유능한 신학자였다.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여러 주제에 대해서 무엇인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에드워즈의 글들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그 교리가 기술되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크게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요, 체험 신학자요, 어떤 사람의 말대로 “마음의 신학자”였다. 거성, 이 능력있는 지성인에 관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인간- 중생한 사람과 중생하지 못한 사람 모두- 의 마음 작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종교, 심리학, 회심, 부흥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싶으면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에드워즈의 전집을 읽어보면 유명하다는 사람들(윌리엄 제임스, 스타벅, 사잔트)이 단순한 초심자로서 그저 대양의 해변에서 노닥거리는 사람들이라면, 에드워즈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물주와 만나도록 깊은 곳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말하면서 반지성주의라는 어휘를 쓸 수 없다. 그 정반대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성령으로 불타고 성령으로 충만한 지성을 발견한다. 우리 모두 그래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참된 부흥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싶다면 에드워즈에게 문의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그의 지식,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심리학은 정말 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에드워즈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부흥의 필요성을 깨우쳐 준다. 부흥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전도 운동과 부흥 사이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서로 비교해서는 안 된다. 부흥시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결신을 요청하는 것은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흥에 대한 에드워즈의 글을 읽어 보십시오. 그가 늘 사용하는 어휘는 “성령의 부어주심”이다. 오늘날 우리는 “쇄신”(renewal)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오고 있다. 그들은 부흥이라는 어휘를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쇄신”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그들이 이 말을 통해서 나타내려는 의도는 우리 모두 중생시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이미 가졌음을 깨닫고 그것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부흥이 아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대로 해보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부흥을 얻을 수는 없다.

 

부흥이란 성령의 부어주심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자각할 따름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부흥의 진정한 뜻을 상기시켜 준다.

 

여러분은 신학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붙는 신학이어야 한다. 빛 뿐만 아니라 뜨거움과 열도 있어야 한다. 에드워즈에게는 이런 것들이 이상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위대한 교리들이 성령의 불로 뜨거워져 있다.

 

“오늘날 이런 지식의 소유자가 얼마나 많은가? 논리의 힘과 침투력, 학식의 정도, 명확한 분별력, 바른 문체, 표현의 명확함 들이 이처럼 빼어난 세대가 언제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죄를 이처럼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천국을 사모하는 일, 그리고 삶의 거룩함이 이처럼 빈약했던 적이 언제 있었는가? 현재 우리 교인들은 머리에 많은 것을 축적시켜야 하는 필요보다는 마음이 감동받을 필요가 더 급하다. 그들은 이런 일을 할 훌륭한 성향을 가진 설교를 가장 크게 필요로 하고 있다.”(Works,1권,391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으십시오. 그렇게 결심하십시오. 그의 설교문들을 읽어보십시오. 그의 실천적 연구문들을 읽어보십시오. 그 다음, 신학적 주제에 대한 위대한 강론을 계속 읽어보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설교자이든 청중이든 우리 모두는 이 사람의 글을 읽고 나서 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포착하도록 합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어떤 유익을 얻었다고 거기서 머물지 마십시오. 또한 최고의 체험을 누렸다고 해서 거기서 머물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더 알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이것은 언제나 참된 체험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주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외경심과 경이감을 느낄 필요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 내에 기이함과 놀라움이 있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언제나 전달해 주고 일으키는 인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일들이 가장 미천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사역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일들이 그들 모두에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충고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보십시오. 이제 그 많은 집회에 다니는 것을 중단하시고, 오늘날 복음주의 집단에서 유행하는 여러 형태의 오락 즐기기를 멈추십시오. 집에 머무는 법을 배우십시오. 다시 읽는 법을 배우십시오. 현대인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만 읽지 마십시오. 견고하고, 사실적인 것들로 돌아가십시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두 권과 같은 책을 읽은 결과로 부흥이 시작된 적이 자주 있었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신학대학 시절 친구에게서 소개 받은 책의 한 부분에서 에드워즈를 만났다고

한다. 더 깊이 그를 알고 싶었지만,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약 2년후 아주 우연하게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두 권을 만나게 되어 5실링을 주고 샀다.

“저는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의 비유 속에 나오는 자와 같았습니다. 그 두 권이 제게 끼친 영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역사가인 페리 밀러는 “아직까지는 에드워즈가 미국을 빛낸 가장 위대한 철학자겸 신학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에드워즈는 교회가 생명 없는 상태로 오랫동안 있을 때 나타난 사람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의 우리의 시대도 교회가 성령의 불이 꺼진지 오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분명한 특징들>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서문을 당시 목회자였던 쿠퍼라는 분이 썼다. 거기에 위대한 부흥이 있기 전 교회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모든 개혁교회들이 그동안 얼마나 죽어 있었고, 얼마나 메마른 상태에 있었습니까?

황금의 소나기가 멈추어졌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은 탁월한 성공을 전혀 거두지 못했습니다. 회심도 드물었고 정말 그러한 일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도 그 전처럼 깨어 있거나 뜨겁거나 새로워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년동안 이 나라에 사는 우리들의 서글픈 상태입니다. (때때로 긍휼의 소나기가 내렸던 특이한 한두 장소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신실한 교역자들과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슬퍼했던 것과 같이 영적 분별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생명 없는 상태를 지속하던 교회들에 이제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가뭄 후에 소나기가 쏟아진 것이다. 생명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 100년 동안, 아니 실제로는 오늘날까지 미국인들에게 영향을 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에드워즈의 생애에서 뛰어난 사실은 그의 노샘프턴 사역시 일어난 놀라운 부흥이었다.

그것은 1734년말부터 1735년 사이에 일어났다. 그 후로는 1740년 초 조지 휘트필드 일행의 방문과 함께 일어난 대각성 운동에 참여한 일이다.

 

에드워즈는 1703년에 태어나서 1758년에 죽었다. 천연두 예방접종 후에 죽었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제공되는 교육을 받았다. 그런 다음에 예일대학에 입학했다.

1727년 그는 메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 외조부 솔로몬 스타다드의 보조목회자로 안수를 받았다. 1년쯤후 외조부가 돌아가시자 에드워즈는 혼자 목회를 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1750년 교회에서 쫓겨날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그는 정말 빼어난 천재이며 능력있는 설교자로서 대부흥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1750년 투표 결과 230대 23으로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특정인의 자녀에게 세례를 주지 않으려 했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행동 기준을 주장했다. 학습 준비 교육을 전혀 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주장이다.

“기독교 세계의 모든 것을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사람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은 어떤 위대한 신적 감화를, 단번에 엄청난 변화를 받음으로써 얻는 것이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행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점진적 변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력과, 갑작스럽고 극적인 회심을 믿었다.

에드워즈를 통해서 청교도주의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청교도적인 정신과 삶이 그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청교도주의가 그의 삶과 사역에서 만발했다.

 

노샘프턴 교회에서 추방당한 그는 당시 변경 지역으로 인디언들이 사는 곳인 스톡브리지로 갔다. 그가 그곳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는 그곳에 있는 동안 가장 위대한 걸작들을 몇 권 썼다. 존 번연이 12년동안 베드포드 감옥에 갇혀 있음으로써 명저를 남기게 된 것과 같다.

 

그곳에 있다가 뉴저지 대학의 학장으로 초빙되었는데,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이다.

거기서 얼마 후에 그는 천연두 접종을 받고 그 부작용으로 죽었다.

 

로이드 존스는 말한다.

“청교도들을 알프스에 비유하고, 루터나 칼빈을 히말라야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산에 비유하고 싶은 유혹을 받곤 합니다. 제게 있어서 그는 언제나 사도 바울을

가장 닮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조나단 에드워즈야말로 사람들 중에서 아주 빼어납니다. 당시의 영적인 산소는 매우 희박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거룩이 더욱 찬란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대한 그의 강조도 두드러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로 치솟은 이 큰 봉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도 왜소한 등산가에 지나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누구나 그의 전집을 사서 읽도록 설득하는 것이 나의 목표일 뿐입니다.

 

에드워즈는 한마디로 거성이었다. 그는 미개발된 나라에서 자라났다.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는 놀라운 지성을 발휘했고 명석한 상상력과 놀라운 독창성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직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뛰어난 점은 그의 모든 빛나는 재능들과 함께 겸손과 온유 그리고 탁월한 영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체험적인 신앙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알았다. 그는 마음을 크게 강조했다. 그를 볼 때 두드러진 사실은 완벽성과 균형이다.

 

그는 유능한 신학자였고 동시에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다.

사도 바울처럼 이 사람은 신학자이기도 하면서 전도자였다.

그는 위대한 목사였으며, 영혼들과 그 영혼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회심에 대한 대단한 옹호자였다.

어린아이들에게 그들이 단독으로 모이는 집회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는 진정 모든 것을 갖추고 완벽한 균형을 이룬 사람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이다.

“유효한 은혜 안에서는 우리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는 하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또한 우리가 모든 것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산출하시고 우리 또한 모든 것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산출하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주체시오 근원이십니다. 우리는 다만 합당한 행동자들입니다. 전적으로 수동적이면서도 전적으로 능동적인 것입니다.

 

그는 열정적인 경건과, 심오하고 통합된 지성을 조화시킨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적인 것이 언제나 지적인 것을 통제했다. 그는 자신의 빼어난 지성과 독창성과 철학을 성경에 굴복시켰고 그것들을 단순한 종으로 여겼다. 그 어떤 지식도 성경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지배하는 사람이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은 “오늘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살아 있는 만남이 신앙이었다. 그의 유명한 체험의 글이다.

 

“1737년 어느 날, 건강을 위해 나는 말을 타고 숲 속으로 들어가 호젓한 곳에 내렸습니다.

경건한 묵상과 기도하며 걷는 것이 흔히 하는 나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내게는 특이한 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성자의 영광과 그의 놀랍고, 크며, 충만하고 순결하며, 감미로운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낮아지심이었습니다. 그토록 고요하고 감미롭게 나타난 이 은혜는 하늘보다 높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사상과 개념을 삼켜 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광경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소리쳐 울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혼의 열심이 텅 비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티끌 속에 앉아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지고 싶고, 거룩하고 순순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뢰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고 싶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싶었습니다.

나는 이 외에도 몇 차례 이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들도 역시 동일한 효과를 내게 미쳤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 성삼위 되시는 성령의 영광을 감지했고, 거룩하게 하시는 그의 직무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룩하신 역사를 통해서, 영혼에 하나님의 빛과 생명을 전달하시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서, 신적 영광과 상쾌함의 무한한 샘으로 나타나셨고, 충만하시며, 내 영혼을 채우고 만족하게 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교통을 통해서 자신을 부어 주셨고,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태양처럼, 생명과 빛을 달콤하고 즐겁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이며, 생명의 빛이며, 달콤하고 탁월하며 생명을 주는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함을 감지했습니다. 그때는 말씀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이 생겼고,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풍성하게 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뒤따랐습니다.

 

진정한 덕이나 거룩은 본질적으로 머리보다는 마음에 좌정하고 있습니다. 신앙에 관한 것은 마음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지식을 심어주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에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감정에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고양된 감정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진정한 신앙과 거룩이, 영혼 속에서 큰 역사를 하도록 허용을 해야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주로 마음의 일이다. 머리에서 어떤 일을 한다 해도 마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에서 나오는 뜨거움과 감정을 강조했다.

 

“설교를 통해서 얻은 주요한 유익은, 설교 당시 마음속에 생긴 인상이지,

전달받은 것을 후에 기억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탁월한 부흥 신학자요, 체험 신학자요, “마음의 신학자”였다.

에드워즈만큼 인간의 마음 작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이다.

회심, 부흥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싶으면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서 성령으로 불타고, 성령으로 충만한 지성을 발견한다.

“놀라운 회심에 대한 진술”이라는 그의 책은 가장 흥미롭고 가장 감격적인 책이다.

이 책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을 것이라고 존스는 말한다.

 

에드워즈는 부흥의 한 복판에 있으면서도, 쉽사리 속아 넘어가는 사람도 아니었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비평가도 아니었다. 1740년대의 부흥기에 있었던, 주목할 만하고 비상한 현상들을 변호하면서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지도 말고, 육체를 통해 사탄에게 기만당하지도 말라고 했다.

 

그는 휘트필드에게 경고하기 까지 했다. 휘트필드는 “충동”에 복종하고 순응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휘트필드를 감히 비평했고 가능한 위험들을 경고해 주었다.

 

 

6-4 1968년 윌리엄 윌리엄스와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즘

 

메소디즘의 잉글랜드에서의 진정한 기원과 시작은 찰스 웨슬리가 주창하여 옥스퍼드대학에서 설립한 홀리 클럽에서 찾아야 한다. 메소디즘의 진정한 시작은, 1736년 휘트필드가 겪은 강력한 체험과 1738년에 웨슬리 형제가 겪었던 체험 속에서 찾아야 한다. 웨일즈에서는 메소디즘이 아주 독립적이고 자생적이었다. 잉글랜드보다 앞선 1735년에 하웰 해리스와 다니엘 로랜드의 회심으로 출발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하나였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칼빈주의 메소디즘과 알미니안주의 메소디즘으로 갈라졌다.

 

메소디즘이란 본질적으로 체험적인 실천적 신앙이요 생활방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구원의 확신과 사죄의 확신은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새생명에 대한 간절한 열망도 공통점이었다. 휘트필드는 부단히 중생에 대해서 설교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다. 그들 모두 “감정”을 강조했다. 그들은 정통 교리, 바른 믿음만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느끼기” 원했다. 윌리암스의 찬송시를 보면 위대한 시성과 완벽한 신학이 놀랍게 어우려져 있다.

 

윌리암스는 <간증 집회에 이르는 길>이라는 책에서 가르쳤다. “그들의 증거의 명확성을 시험해야 합니다. 또 어떻게 그들이 처음 증거를 받았는지, 그 증거를 지금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상실했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당신 자신의 영이 가진 이 증거가 성령의 증거로 인해 두 배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말씀에 대한 윌리엄스의 관점이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었고 그들 자신의 체험이었다. 다니엘 로랜드의 경우에도 예배 중에 기도문을 읽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임하여 “두 배의” 확신을 주었다. 그때부터 그의 놀라운 방법과 놀라운 능력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하웰 해리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이것을 가르쳤고 이것을 기대하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소그룹이나 작은 단위로 모였는데 그들이 행한 주요한 일은 서로 자기들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시험하며, 체험들을 서로 논의하는 것이었다. 메소디즘을 특징짓는 것은 이 영적인 요소였다. 그들은 믿는 것을 넘어서 그들의 삶 속에서 성령의 권능을 느끼고 체험하기를 열망했다. 또한 전도에 열심인 것이 메소디스트들의 공통점이었다.

 

*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즘의 특징

 

무엇보다 위대한 설교가 있었다. 칼빈주의는 언제나 위대한 설교를 유발한다. 삶뿐만 아니라 위대한 설교의 특징은 뜨거운 열정과 기쁨이었다. 또 다른 특징은 찬송이었다.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이들은 “아멘” “할렐루야”라고 외치기도 했고, 흥분한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했다 기쁨과 즐거움과 찬송과 확신이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즘의 큰 특징이었다.

 

그들은 연속적인 부흥을 경험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전도집회처럼 부흥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고 조직한 모임에 불과하다. 부흥은 “지존하신 분이 찾아오시는 것”이요 성령의 부으심이다. 18세기에 있었던 그 위대한 부흥 가운데 하나는 1763년에 윌리엄 윌리암스가 새로운 찬송시를 출판한 결과 발생했다. 사람들이 그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새로운 부흥의 폭발을 가져왔다. 사람들이 그 위대한 신학의 표현을 노래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 부흥이 터져 나왔다. 윌리암스의 찬송은 신학과 체험을 함께 묶은 것이다. 그는 찬송시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사람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신약의 여러 교리들을 익히게 되었다. 이러한 “부흥”의 요소는 내가 강조하고 싶어하는 바이다. 이것이 칼빈주의 메소디즘의 독특한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들은 청교도들의 서적을 대단히 많이 읽었다. 그것들을 섭렵했다. 성경 다음 가는 양식이었다. 그들은 책에서 대단히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청교도들의 계승은 아니다.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었다. 감정, 부흥, 확신에 관한 것과 특징으로 묘사했던 것들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라고 불러야 한다고 감히 나는 제안한다.

 

* 메소디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메소디즘이란 용어에서 “경직화”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 오늘날 메소디스트라 하면 알미니안 또는 존 웨슬리와 그 추종자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참된 메소디즘이다. 알미니안주의 메소디즘은 여러 면에서 일관성을 상실했다. 그들은 은혜를 크게 강조했다가 다시 자유 의지와 인간이 감당하는 역할과 행위를 끌어들였다. 중생을 강조하고서는 그 중생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부정해 나간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메소디즘이 신비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들은 교리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감정에 강조점을 두어 “느껴진” 측면을 강조하면 신비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으며, 잘못된 환각주의나 일종의 “몽환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교리와 “느껴진” 요소 두 가지가 완전히 조화된 형태이다. 그것은 교리적으로 바른 자리를 지키게 보증해 줄 뿐 아니라 체험의 영역 자체 속에서도 많은 오류를 막아주어 일종의 신령주의로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메소디즘이야말로 진정한 메소디즘이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참된 칼빈주의라고 나는 주장한다. 메소디스트가 아닌 칼빈주의는 세심히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메소디즘이 아닌 칼빈주의는 지적이고 스콜라적인 데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우리를 붙잡아 주는 진리”에 대해서보다 “우리가 주장하는 진리”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 메소디즘이 아닌 칼빈주의가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위험은 신앙고백을 “부수적인 표준”으로 삼지 않고 최상 최고의 표준으로 삼아 신앙고백을 성경의 위치에 놓은 위험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순서를 거꾸로 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칼빈주의가 메소디즘으로 교정되지 않으면 생길 수 있는 경향의 위험은 기도할 마음을 막는 성향이다.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들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교회들은 기도가 특징이었다. 그 기도회는 뜨겁고 감동적인 기도 모임으로 때로는 몇 시간씩 계속되었고 그곳에서 큰 체험을 하게 되었다. 결국 메소디즘이 없는 칼빈주의는, 거칠고 냉랭한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기쁨이 없고 딱딱한 신앙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주지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옛 칼빈주의자들은 부단히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주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는지, 주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말씀하셨는지를 언제나 말하였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물러가심”에 대해서도 말했다. 필연적으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활동을 강조하게 된다. 모든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일에 주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강한 손이 우리를 붙잡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칼빈주의는 체험으로 유도되고 체험을 크게 강조하게 된다. 그런데 현대 칼빈주의자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령이 찾아오심과 물러가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칼빈주의는 칼빈주의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칼빈주의라 하는 것을 나는 반대한다. 참된 칼빈주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가도록 자극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발전되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참된 칼빈주의는 부흥과 하나님의 역사가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강조하게 되어 있다. 칼빈주의가 강력해질수록 영적인 부흥과 재각성의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것은 교리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이다. 그리고 칼빈주의처럼 기도하게 하는 것은 없다. 기도하지 않는 칼빈주의는 칼빈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칼빈주의는 부흥에 관심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의 관심거리이다. 세상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하나님이 계신데 세상이 어째서 이처럼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의 영광! 칼빈주의자들의 모든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갈망하며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졸라대고,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어주시고 일어나셔서 주님의 원수들을 흩으시고, 원수들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며, 주님의 전능하신 팔의 힘을 보여 달라고 간청한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이다.

 

 

6-5, 1962년 청교도의 난제들-

1640년부터 1662년이 주는 교훈들

 

“청교도의 양심!” 그들에게 이보다 더 특징적인 것은 없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 정확히 알기 위해 면밀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단순히 이론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진리를 이행하고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청교도들은 항상 적용을 크게 강조하였다.

 

우리 모두는 참된 신앙의 부흥과, 우리 가운데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나심, “마른 뼈”들이 움직이고 서로 상합함,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부흥보다 어떤 유의 개혁이 앞선다. 부흥에는 어떤 조건들이 있다. 역사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먼저 그 사람들이나 개인을 준비시키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라오디게아 사람들과 같이 타락하거나 배도한 교회가 회개라는 선결 조건의 수행 없이 큰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662년의 이 큰 사건은 영국 종교사에 있어서 중차대한 사건이라는 데 모든 사람들이 찬동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사건은 300여년간 영국의 종교사와 신앙의 패턴을 결정하다시피한 전환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1640년부터 1662년의 기간은 종교 개혁과 거의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영국 국교회의 본질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영국의 종교개혁 시기부터 1662년까지 청교도들이 영국 교회의 상태에 만족했던 시기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종교 개혁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다.

1662년의 결정은 반동적 종교개혁의 특징을 띠고 있다. 청교도들의 소망은 끝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그들의 완전한 실패였고 모든 갈망하는 것이 무산되어 버린 사건이었다.

 

청교도들의 실패 원인

 

로드의 분명한 패배가 승리로 바뀌어 버린 이 엄청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로드는 고소당하여 사형 판결을 받았고 그 편에 속한 모든 것들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찰스 1세가 처형되었을 때는 특히 그랬다. 완전히 패퇴할 것같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62년에 그 사람들이 승리했다. 거의 완전히 멸절당한 것 같이 보이던 로드파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고 대단한 승리를 축하했다. 이 기간 동안 내내 상승세를 타고 있었던 청교도들은 특별히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는가?

 

1) 종교와 정치의 혼합이다. 이것이야말로 청교도 역사에서 가장 마귀적인 것이다. 공동의 적을 이기기 위해 서로 타협하게 되었다. 교회 내의 종교를 정치와 혼합시키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1640년부터 1662년까지의 기간이 주는 교훈을 배워 그처럼 세상에 휘말리는 일에서 벗어나기 바란다. 우리는 영적 무기를 가지고 주님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

 

2) 훨씬 더 비극적인데, 그것은 청교도들 사이에 일어난 불행하고 후회스러운 분쟁이다.

청교도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다. 장로교파, 독립교회파, 제5왕정파, 퀘이커파, 개간파, 평등주의파, --. 영국 국교회의 정책은 이들을 “분열시켜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공적이었다. 그 결과 1662년의 재난이 도래하게 되었다. 청교도들이 사분 오열되어 싸우고 있는 동안, 거의 대부분이 대륙으로 도피했던 로드파 사람들은 자기편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모의했다.

 

3) 장로교도들도 국교회 사람들만큼 의회의 법령과 국가의 권세를 이용해 자기들의 특별한 교회관에 복종하도록 대중들을 억눌러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1644년에 그들은 국가의 권력과 의회의 입법 조치를 통해 자기들의 관점을 강요했다. 이러한 관점은, 궁극적으로 문제는 변덕스러운 대중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 결과 크롬웰을 내세웠던 런던의 대중들이 1660년에는 찰스 2세가 돌아오는 것을 환영했다. 똑같은 사람들이 말이다. 법을 제정하는 권세와 교리를 강요하는 권세를 국가에게 주면 언제나 이러한 결과가 따라온다.

 

그들은 “엄격한 종교적 행동”을 의회의 법률 조항에 의해서 강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스포츠나 오락 및 기타의 것들에 대해서 법 조항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공화정 기간 동안 주어진 방법대로 살도록 강요받았던 런던 대중들은 그것들을 믿은 적도 없고 또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매우 지치고 진력이 나게 되었다. 이것이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어, 왕정제로 다시 바뀌어 왕을 데려와야 한다고 하며, 삶을 망치는 청교도들을 제거해야겠다고 말하게 되었다. 도덕적, 영적 설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회의 법률 조항을 통하는 식으로 도덕을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에 대한 반작용을 낳게 되는 것 같다.

 

만일 이 모든 분파와 파당이 놀라운 기회를 맞았을 때 보조를 같이 하기만 했다면, 특히 찰스 2세의 복귀 때 그랬더라면- 그들이 보편적인 종교적 관용에 대해 보조를 같이 하기만 했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장로교도들은 그 일에 동조하지 않았다. 반드시 장로교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청교도들이 어떤 한 체제보다는 보편적으로 종교적 관용을 위해서 함께 연합했다면, 그 당시와 그후 300년 동안의 역사는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너무 늦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존 오웬이나 토머스 굿윈 등 다른 많은 사람들이 취했던 입장이 진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해를 많이 받았고 영광스러운 가능성과 기회가 지나가 버린 때였다.

 

이 기간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

 

1) 개혁적이고 청교도적인 관점에 따르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기도 한 구원의 복음이다. 분명히 우리가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주장하고 선포하며 변증해야 하는 것은 이 순전한 복음, 이 순전한 복음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

 

2) 믿음의 핵심에 대한 관점이 정반대되는 사람들이 같은 교회에 함께 있는 것을 관용해야 옳은가? 우리가 고수하는 거의 모든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교회로 부르며 한 부류 속에 있는 것이 옳은가?

 

3) 영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육신적인 무기를 통해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반(半)정치적이고 반교회적인 자세를 가지고 싸우는 순간 우리는 파당 정신을 발전시켜 파당 이익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핵심적인 것들에 대해서 우리와 진실로 일치하는 사람들을 원수처럼 취급하기 시작하며, 반대로 대의는 이미 잃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그 좁은 파당 정신에 빠져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순결 및 번영보다 자기 편의 관점이 승리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 자세를 취하지 않게 지켜 주소서!

 

이 기간을 통하여 배워야 할 실제적인 교훈

 

사람들의 교활함과 간교함과 악의에 속아 덫에 걸리는 위험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교도의 행동하는 양심은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그 너머까지 내다 본다. 청교도 지도자들에게 어떤 특혜를 부여함으로써 청교도들을 분열시키려는 수작들을 부렸지만, 그러나 그것은 엄격하고 단호하며 양심적으로 거절되었고 거부되었다.

이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타협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양심을 팔 수 없었다. 그들은 차라리 광야로 나가 무섭게 따라오는 고난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청교도의 행동하는 양심이다. 면밀함, 주의 깊음, 특히 바른 관점을 가질 뿐만 아니라 껼과가 어떻게 되든지 바른 견해에 따라서 행동하려는 면밀함, 이것이 바로 행동하는 청교도의 양심이다.

 

이 기간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궁극적인 교훈은 이것이다. “육체의 병기는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린다. 여러분은 자신을 믿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와 그 힘의 능력”을 미덩야 한다. 우리는 “주 안에서 강하고 그 힘의 권능으로 강해져야” 한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10:4)는 것을 진실로 인식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면, 그것을 붙잡고 그것을 위해서 싸우며 모든 타협을 거절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든 유혹, 모든 제안, 모든 아첨, 명예를 주겠다는 속임수를 모두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여 사용되는 간계들을 간파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어떤 직책을 주겠다든지, 어떤 명예로운 지위를 주겠다든지, 승진을 시켜 주겠다든지, 우리 교단의 어떤 자리를 주겠다든지,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준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야 믿음과 교회의 순결성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싸울 수 있다. 그들의 입장을 알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입장에 입각하여 행동했던 이 사람들을 기념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에게 이들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출처 : 청교도의 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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