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3대 원리(엡 2:8-9)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수도사 였던 마틴 루터가 비덴베르그 성당 대문에 카톨릭의 부패에 관해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부착한 것을 기화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 중에도 직접적인 발단이 된 것은 면죄부 판매 때문입니다. 당시 도미니크 종단의 사제 테첼이 간교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선동하여 이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고통에서 면제된다고 유혹했습니다. 면죄부를 판돈은 교황 레오 10세가 성베드로 성당 증축에 사용된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 수익의 절반은 호헨쫄레른 가문의 브란텐 부르그의 알베르트가 모인츠의 대주교직을 사는데 소용된 빛을 갚는데 쓰여졌던 것입니다.
여기에 분노한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고 (Sola Fide) 외치면서 95개조항의 항의문을 내걸었던 것입니다. 1517년 10월31일 정오 루터는 성 교회 정문 앞에 나갔습니다. 라틴어로 쓰여진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나무로 만든 교회 문 앞에 못질하여 붙였습니다. 드디어 2주만에 전 독일을 불질렀고 4주만에 전 구라파를 불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루터 종교개혁의 봉화였습니다. 루터의 항의문 중심내용이 무엇입니까? 면죄부가 어찌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있느냐? 면죄부가 어떻게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회개한 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을 받았다는 중요한 교리를 발표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한 길 뿐입니다. 면죄부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습니다.
그 여파가 즈윙글리와 칼빈의 믿음과 지력과 함께 유럽을 휩쓸었고 존 녹스로 하여금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하게 했고 요한웨슬리로 하여금 영국 감리교회를 창시하게 했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원동력은 로마서 1:17의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이 성경구절을 로마 여행 중에 깨달았습니다. 1510년 11월부터 1511년 4월까지 수도사들이 순례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 코스 중에 하나가 성 계단 성당(Scala Santa) 내부에 "빌라도의 계단", 또는 "거룩한 계단"이라는 이름의 28계단이 있습니다. 이 돌계단은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러 밟고 올라가신 계단! 죄악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수치와 모욕과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 그 계단을 로마로 옮겨와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예배당을 지어 보존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중세의 신자들은 이 계단을 무릎으로 한 계단씩 올라가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기하면서 기도하며 올라가는 계단이었습니다. 특별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인지 그 계단에는 유리 조각을 깔아 놓고 무릎으로 기어올라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무릎으로 기어올라갔다 무릎으로 기어 내려와야 하는 계단! 그렇게 함으로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구원받고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순례객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지한 행동일 뿐입니다. 우리 개신 교인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루터가 성 로마 순례 중 이곳에 이르러 층계를 무릎으로 기어올라 가다가 그 마음에 봉독한 롬1:17말씀이 번개처럼 떠올랐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는 가슴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기어올랐던 그 계단을 걸어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그 때까지도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을 통해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 구원을 얻은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515년 11월 빗덴베르그 대학에서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던 중, 이 구절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기록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만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는 그런 의미인 줄로 생각했다....나는 주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의(예수=복음)를 의미하는 것이요, 또 우리가 그 의(복음)를 믿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사람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음! 곧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의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한다......내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으며 천국 문이 내 앞에 활짝 열려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것을 비텐베르그의 어거스틴 수도원 탑 안에서 발견하였고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탑의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들은 크게는 셋입니다.
① 신학적 차원에서 이행득구 주의의 개혁이요.
② 도덕적 차원에서 교황청과 교회 부패의 개혁이며,
③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각성의 개혁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우선 천주교의 마리아 숭배입니다. 마리아는 죄 없는 몸으로 잉태했고 때문에 기도의 중보자이고 또 그가 사망 후에 무덤가운데서 부활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와 같은 죄인이고 그는 결혼해서 자녀를 두었으며 결코 무덤에서 부활한 일이 없습니다.
또 천주교의 성경관을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성경의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교회가 성경 위에 있고 또 교회가 성경을 인정해야 성경의 권위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동일시하고 성경 외에 가경을 성경으로 믿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성경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교황의 칙령이나 가경이나 전통의 모래 위에 세우고 있으니 어찌 참 기독교라고 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교황무오설을 주장합니다. 그들은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믿고 그의 한 마디, 한 마디 입에서 나오는 말은 오류가 없다고 교황무오설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임명하신 초대교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비 성경적입니다. 마16:23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실 적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셨습니다. 사단이 되기도 했던 베드로에게 어찌 교황무오설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고해성사를 들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영세 후에 범한 모든 죄를 신부에게 그대로 고하고 신부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부는 어떤 죄를 범했던 그 죄를 용서하되 죄인에게 고행을 당부합니다. 가령 금식하라, 고행하라, 면죄부를 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지나친 비 성경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이 죄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바울의 절규를 기억해야 합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내랴"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의 죄를 씻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결코 신부가 아닙니다. 예수의 피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우상숭배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상숭배가 있습니다. 마리아 상을 위시한 성인들의 상을 조각하고 그것을 신성시하고 경배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유골숭배도 있습니다. 죽은 성자들의 유골에 입맞추고 절하고 경배합니다. 천사숭배도 있습니다. 천주교에는 천사에게 드리는 기도와 숭배의 예식까지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유물로 신자들을 미혹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 중에는 진짜 십자가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달리셨다고 믿는 십자가인데 천주교의 전통적인 유물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박힌 못, 예수님께서 입에 대신 해융,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자색 옷,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면류관, 최후 만찬에 사용한 잔, 마리아의 머리카락, 마리아의 신발, 요셉의 목수의 도구들, 가룟 유다의 돈주머니, 빌라도의 세수대야, 예수님께서 타셨다는 어린 나귀의 뼈 등 많은 유물을 미신적 행위로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천주교를 향해 어찌 마틴 루터 한 사람만으로 족할 수 있으리요. 오늘에 와서도 천주교 안에서 수많은 루터가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네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입니다. 둘째는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셋째는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넷째는 만인 제사장(Priesthood of all believers)입니다.
1. 오직 성경입니다.
당시의 로마 카톨릭은 신앙과 행위의 기본을 성경에서 찾은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루터는 이것을 가슴아프게 깨닫고 오직 성경을 외쳤습니다. '오직 성경' 라틴어로는 '솔라 스크립투라'인데 이 말은 성경은 성령의 완전 영감 된 것으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뜻이요, 또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에 기본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로마 카도릭 교회는 교황이 성경위에 있습니다. 교황이 성경을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할 만큼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카도릭에서는 정경 외에 다른 성경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위에 어떤 권위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교황도 왕도 성경의 권위 앞에 절대 복종해야합니다.
우리 개혁교단 헌법에도 보면 교리신조 제1조에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정답을 주고 있습니다. 가령 딤후3:16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 당시의 성경은 만인이 읽는 성경이 아닙니다. 라틴어로만 되어 평신도는 읽을 수 없고 신부만 읽게 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의 말이면 일점 일획도 틀림없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했습니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들은 저마다 교황의 옷자락에 입맞추는 것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카톨리시즘에서는 권위의 통로로서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라는 두 가지를 주장하고, 성서의 해석도 교회의 전통에 따라 규정되므로 결국 교회가 성서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프로테스탄티즘은 권위의 통로를 성서에만 한정합니다. 교회는 성서보다 우위에 있지 않고 오히려 성서에 기초하여 존재합니다. 또한 성서의 정경화(正經化)는 교회로 인하여 이루어졌으나 성서를 진실로 정경화한 것은 성서 자체의 힘이며, 교회는 그것을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Back to the Bible)고 역설했습니다. 교황의 권위도 성경의 권위보다 앞설 수 없고 성경 외에 그 어떤 사람의 사상이나 문헌도 우리 신앙의 표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표준이며 신앙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과 신앙과 생활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권고는 성서에 명확히 적혀있거나 아니면 선하고 필요한 결과에 의해서 성서로부터 추론될 수 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성서에는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인간들의 전승에 의해서든 아무 것도 추가 될 수 없다"(1장 6절1,2항)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모든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표준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야 합니다.
2. 오직 믿음입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죄인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믿음이고 하나님의 자녀 된 것도 믿음이고 구원을 얻는 것도 믿음이니라"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라틴어로는 '솔라 피데'를 외친 것입니다. 루터가 외치기 전에 성경에서 바울이 외쳤습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여기 물을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신부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또 구원의 이르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결코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고행도 아닙니다. 오직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이제 면죄부를 살 필요가 없고, 마리아를 숭배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부에게 고해성사 할 필요도 없고, 십자가 등에 종군하고 성지 순례 하면서 고행할 것도 없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자선사업을 많이 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성경에도 선한 일에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될 의무요, 사명이지 결코 구원의 조건일수는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했고 2장 9절에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은혜"도 값없이 거져 받는다는 뜻이요 "믿음"도 행위로 받지 않는다는 뜻이요 "선물"도 값을 내지 않고 거져 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고 고행의 대가로 받는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이룩하신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11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3. 오직 은혜입니다
천주교는 구원에 있어서 '이행득구주의' 입니다. 구원은 행함으로 얻는다 곧 '공덕 축척설'을 주장합니다. 루터는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비 진리인 것을 깨닫고 오직 은혜를 외쳤습니다. '오직 은혜' 라틴어로 '솔라 그라티아'인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에게 무값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저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인생입니다. 인생 스스로는 어떻게 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은혜로 죄인들이 죄 씻음을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요5:24이 무엇입니까?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루터는 도둑질한 일이 없고, 간음한 일이 없고, 살인한 죄를 범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수도원에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 세리처럼 고민하였지만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마침내 성경에서 답을 찾은 것입니다. 요1:29이 무엇입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롬3:24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 엡1:7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그렇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은혜의 종교입니다. 고후9:8인데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은혜가 아니고는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꼭 필요한 모든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한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받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노라"한 말씀대로 우리가 죄사함 받은 것도 영생을 얻은 것도 천국에 가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우리의 고행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4. 만인제사장설입니다
카톨리시즘에서는 설교보다도 전례(典禮)가 중요하며, 이것은 담당하는 사제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권위는 사도 베드로에게서 전승된 것으로 되어 있다(使徒傳承). 사제는 명예와 부와 권세를 가진 특별한 위치에 두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전례보다도 설교가 중시되어 교직제(敎職制)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직자는 제사라는 성격보다도 설교자·목회자(牧會者)의 성격을 갖습니다. 물론 교회의 권위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말씀의 권위와 성례전을 집행하는 권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점에서는 만인이 동등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직분을 가졌습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산 제물로 바쳐 드려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인 제사장설입니다. 만인 제사장이라고 해서 목회자나 평신도가 동등하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추하고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오늘 종교 개혁 483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종교 개혁의 정신으로 돌아 가야 하겠습니다. 교권주의 자들이 물러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종류의 면죄부가 생겨 나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금식, 기도, 헌금,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집안에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목회자들은 가끔 공갈을 칩니다. 네가 하나님을 잘 못믿어서 그렇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레서 두려움 가운데 헌금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는 것은 은혜로 해야 합니다. 물론 헌금을 은헤로 하라고 하면 헌금을 잘 안 합니다. 은혜로 봉사하고 헌신하라고 해도 헌신을 잘 안합니다. 그러나 너 헌금 바치지 않으면 네 아들 시험 잘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비록 믿어지지 않을지라도 헌금을 하지 않고는 못 베깁니다. 헌신과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라고 하면 하지 않습니다. 공갈을 치고 겁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 개혁의 원리에 어긋난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만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이 안되고, 헌금이 걷히지 안아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참으로 어렵게 합니다. 한 영혼이 성령안에서 믿음이 생기고 성령안에서 자발적으로 봉사하도록 기다립니다. 어쩌면 강제를 하는 것이 본인들에게도 더 좋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할 경우에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 놓은 결과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조직체를 키우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을 하다 보면 그런 생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성경의 원리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한국의 교회는 종교 개혁의 원리대로 설교하는 사람이 많지않습니다. 성공지상주의 설교를 해야 먹혀 들어 갑니다. 목회자들은 섬기는 종으로 섬기기 보다는 군림하고 교권, 돈, 명예가 교역자들의 흠모의 대상이 됩니다. 그레서 목회자 세습 문제가 크게 문제시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이어서 대 교회를 맡게 되면 그것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자동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로서는 섬기는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교회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성경보다 다른 것으로 대체 되는 문제(찬양, 간증)도 심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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