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자료]]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 아펜젤러
-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는 미국 펜실베니아 주 서더튼에서 메노파 교도의 가정에서 1858년에 태어나 철저한 성서교육을 받고 성장하였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78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졸업하고 드루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아펜젤러는 성서를 번역하였으며(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감리교 인쇄 출판소를 확장하여 각종 선교잡지를 발행하기도 했고, 1885년 8월 3일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선교에 힘쓰는 한편 1895년 정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정동교회에서는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 주시경, 이상재, 남궁억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 지회가 결성되었는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의 모략으로 독립협회는 해체되고 중요한 인물들이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을 순례하며 구호와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이때 이승만, 이상재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서울, 평야, 인천, 수원, 공주, 대구, 전주 등지로 여행하며 전도활동을 수행하였다. 한국에서의 아펜젤러의 사역은 그의 사역기간 5년동안 체중이 180파운드에서 131파운드로 줄어들었을 정도로 정열적인 것이었다. 1902년 6월 11일 밤 10시경 , 아펜젤러와 그의 조수겸 비서 조한규, 서울에 있던 장로교학생으로서 집으로 돌아가던 한 여학생 등과 함께 목포로 항해하는 오사카 선박회사의 쿠마가와 마루호에 승선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항해하던 배가 어청도 부근을 지나던 중 키소가와로 이름 붙여진 다른 선박과 일행이 타고 있던 배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비서 조한규가 미처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그를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선실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배는 아펜젤러를 비롯한 23명과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펜젤러의 장례식은 1902년 6월 29일 주일에 치뤄졌는데 장례식에서는 이 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 구원을 위한 애국 애족활동을 기리기 위해 애국가가 불려졌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아펜젤러의 장남은 배재학교 교장으로, 장녀는 이화학당 교장으로 봉직하다 한국 땅에 묻혔으며 막내 또한 이화학당의교수로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1935년에는 아펜젤러 기념비가 정동교회에 세워졌고, 1989년에는 배재학교 총동창회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추모비가 세워 졌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 아직 어둠에 잠겨 있던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의 빛으로 밝히기 위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사르던 선교사 아펜젤러는 결국 이 나라의 한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의 죽음은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은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오늘 이 땅에는 1200만이라는 열매가 맺혀졌다. 이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로부터 얻은 빚을 갚을 때이다. 그 빚을 갚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죽음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룬 아펜젤러, 하나님께서는 그를 우편에 앉히시고 그의 머리에 생명의 면류관을 씌우셨을 것이 분명하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교회 목사 박찬희--------------------------------------------------------------------------------아펜젤러의 초기 선교활동과 '한국 감리교회'의 설립1. 머리말 - '한국 교회' 한국 교회의 시작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국기독교사에서 오랫동안 숙제로 남겨져 왔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교회마다 다를 수 있으나, 물음은 감리교·장로교 등 모든 교파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한국 교회의 경우, 각기 다른 기준에 의해 제시되어 자기 교회의 설립 상한선을 높이려는 작의성(作意性)으로 종종 나타났다. 우선 교회란 어떻게 정의되며 교회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할 수 있는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 공동체가 체계적인 조직을 갖출 수도 있고 미처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그 공동체가 일정한 회집 장소나 건물을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교회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따라서, 외적 조건들의 갖추어짐에 관계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를 지속시켜 나간다고 할 때 이미 교회는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 말은 '믿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이 곧 교회 성립의 제일 요건이라는 뜻이다.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공동체를 이룩할 구성원, 곧 일정한 신급(信級 : 자격)을 갖춘 교인이 있어야 한다. 구성원이 있다는 것과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것은 공동체적 의식(행위)에 의해 확인된다. 곧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회집과 예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상징(세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증거(성찬)를 통해 확인될 수 있다.이러한 공동체적 행위는 공시(共時)적 혹은 교호(交互)적으로 이루어 질 수도 있고, 지속적 혹은 간헐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공동체적 행위들이 동시에 이뤄진다면, 그것은 교회가 이뤄졌다는 명백한 증거로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교적인 불신사회에 복음이 전파될 때, 그러한 공동체적인 행위들이 동시에 이뤄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이런 점을 전제로 할 때, 교회의 시작(성립)의 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앞서 열거한 공동체적인 의식이 지속적 혹은 교호적으로 이뤄질 때 교회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다.여기서 문제를 더 심화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 교회의 시작(성립)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만주에서 수세(受洗)한 한국인들이 거기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와 전도한 결과 이루어진 신앙공동체(교회)를 거론할 경우, 서간도의 한인촌교회[金靑松]와 서울교회[徐相崙], 의주교회[白鴻俊], 그리고 소래교회[徐景祚] 등이 거론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1885년경에 설립되었을 황해도 소래교회를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만주를 통해 들여온 성경에 의해 이룩했을 신앙공동체에 대하여는 필자가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그것은 한국 감리교회의 설립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또 이 글이 의도하는 바도 아니므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이 글에서 목표로 하는 것은 선교사를 통하여 이루어진 한국 교회 특히 한국 감리교회의 경우,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져 갔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한말에 입국한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이 이룩했을 신앙공동체는 1885년 6월 28일 저녁에 한국에서 가진 최초의 종교적 집회와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날 저녁 8시에 헤론 부부와 알렌 부부, 그리고 스크랜튼 대부인이 모여 '공식 주일예배'를 드렸다. 늦어도 1년 반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외국인들의 집회에 한국인도 합석하여 예배를 드린 것 같다. 1887년 2월 27일(주일), 아펜젤러가 인도한 예배에는 50여 명의 외국인들이 참여하여 방이 꽉 찼으며 "한국인들이 우리 예배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 데서 어렴풋이 엿보인다. 문제는 외국인들만이 모였거나 외국인들이 주체가 되어 이룩한 공동체를 '한국 교회'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는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졌던 신앙공동체를 한국 교회사의 한 영역으로 수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을 한국인이 주체가 된 '한국 교회'로 인식할 수 있겠는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 공동체는 한국에서 세워졌지만 아직 한국인과 접맥되지 않았거나, 공동체의 형성과정과 운영에서 한국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한국에 있는 교회라기보다는 한국인이 그 공동체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감당한 교회를 가리킨다. 초기에 외국인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한국 교회'라기보다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 교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1885년에 시작된, 외국인들만으로 이룩된 신앙공동체는 '한국 교회'의 출발로 보기는 곤란하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첫째, 한국인이 주체가 된 초기 '한국 감리교회'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되어 갔는가 하는 질문을 전제로, 둘째, 한국 감리교회 성립에 초석이 된 미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역할은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그 해답에 대한 실마리로 아펜젤러의 초기 선교활동에서 신앙공동체 성립의 중요한 요건인 구도자 훈련과 세례, 공중예배와 성찬 등의 공동체 의식(행위)이 언제부터 나타나게 되었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는 것이 된다. 여기에 사족을 달자면, 한국 감리교회의 요람이라 할 정동제일교회의 설립을 1885년 10월로 잡았던 결정에 대하여 새로운 검토를 요청하는 뜻도 없지 않다. 아펜젤러는 미 북장로회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한 최초의 미 감리회 선교사 가운데 한 분이다. 아펜젤러에 관해서는 이미 전기와 논문들, 자료들이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일기와 다른 여러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국 선교 초기의 실상과 한국 교회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을 밝히는 것은 아직 연구를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아펜젤러의 기록은 한국 선교 초기에 관한 자료로서는 그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데도 그 자료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그리피스(WM. E. Griffis)의 '아펜젤러 전기'(A MODERN PIONEER IN KOREA :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를 번역하고 그의 초기 교육·선교 활동을 중심으로 몇 편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그 글 가운데서 배재학당의 설립 경위와, 교육의 이념과 제도, 신앙 훈련과 학생활동 등 그의 교육·선교 활동은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교육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그의 복음전도 활동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이 글은 복음전도 활동에 관해 이미 발표했던 글을 새로 보완하고 수정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문제를 다시 논의하는 이유는 앞서의 글이 소략하게 다루어진 면도 있지만, 그의 초기 복음전도 활동을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의 초점이 한국 감리교회의 성립과정에 있는 만큼, 그 시기도 아펜젤러의 입국 이후 3년간(1885∼1888)의 활동에 국한하였다. 이 기간에 구도자 훈련과 세례, 예배와 성찬 등의 신앙공동체의 의식(행위)이 모두 나타나고 있는데, 이 점은 바로 신앙공동체인 한국 감리교회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글에 사용된 자료는 '아펜젤러 문서'(H. G. APPENZELLER PAPERS) 중에서도 주로 '아펜젤러 일기' 부분이다. 그는 매일 일기를 쓰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그답게 띄엄띄엄, 그러나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아펜젤러 일기'에는 중간 중간에 '최초의 세례식', '최초의 감리교인' 등 그가 개척적인 선교사로서 중요한 기록과 평가를 남겨 놓아, 한국의 초대 교회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 자료를 이용하면서, 첫 선교사의 분주한 일상생활 중에서도 자신의 기록을 남긴 아펜젤러 목사께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2. 초기의 전도활동 - 외국인아펜젤러의 전기를 쓴 그리피스는 아펜젤러의 신앙과 선교활동과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한국에서 나의 사랑하는 교회의 초석을 놓는 데에 내 평생을 기꺼이 바치겠다. 아직 건물을 바라보지 말라. 실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건물을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감리교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꽃 피게 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야망이란 이 나라 전...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박병훈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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