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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Ⅰ , 영혼을 살리는 설교자

하나님아들 2013. 9. 14. 15:32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Ⅰ
영혼을 살리는 설교자 14
2009년 03월 20일 (금) 07:25:55 권영삼 032kwon@naver.com


이 땅에서 목회자, 아니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면 칼빈(John Calvin, 1509.7.10-1564.5.27)이란 이름과 너무 친숙하다. 요한(존) 칼빈 또는 쟝 깔뱅, 장 칼뱅 등 다양하게 불리는 이름만큼이나 칼빈은 여러 사람에게 회자된다. 칼빈은 ‘장로교의 창시자’이다. 더욱이 올해는 칼빈 탄생 500주년 되는 뜻 깊은 해를 맞고 있다. 이를 기념해 올해 신학계 및 단체, 장로교단에서는 교회의 본질 회복, 한국신학의 세계화,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다양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원장: 서창원 목사)는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하고, 개혁주의성경연구소도 ‘칼빈주의와 자본주의, 민주주의 정신’을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한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 김성영 목사)도 올해 진행되는 두 차례의 정기논문 발표회를 ‘칼빈과 교회개혁 및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신학적 과제’를 주제로 정했다.

지난해 10월 조직된 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회(대표: 이종윤 목사)는 한국장로교총연합회와 연합해 오는 6월에 ‘칼빈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서울교회에서 감사예배 및 기념음악회,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이와 함께 교회연합과 일치를 위한 ‘장로교 지도자 간담회’도 가질 예정이다. 또한, 이 사업회는 칼빈의 흉상 제작, 우표발행, 칼빈 길 만들기 등의 기념행사도 마련했다.

국외적으로도 많은 행사가 계획되어 있다. 오는 5월 29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는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장로교대회가 열리고, 5월 31일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전세계 장로교회가 함께하는 기념예배가 열려 칼빈의 업적을 기릴 예정이다. 세계개혁교회연맹(WARC)과 스위스개신교연합(FSPC)도 오는 11월 2일 제네바의 종교개혁 벽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러나 칼빈이 끼친 신학적, 사상적 연구가 이처럼 활발한 데 비해 칼빈의 설교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첫째, 칼빈의 자료와 칼빈에 관해 연구된 자료가 너무나 방대하기에 그 자료를 다 섭렵해야 한다는 부담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둘째, 인지도가 높은 인물인 칼빈에 대하여 학문적 예봉을 세우며 참신하고 창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셋째, 칼빈에 대한 선이해가 설교자라기보다는 신학자나 주석가 또는 교의학자로 널리 알려졌다는 점이다.

넷째, 무엇보다 우리와 동시대 인물이 아니기에 지금과 같이 동영상과 음성 등을 통해서 전인격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오직 남겨진 문서로만 설교 전반에 관한 것을 이해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방대한 설교문과 주석 등이 자료로 남아 있어 ‘거룩한 상상력(?)’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활용한다면 오히려 풍부한 그의 설교 사상과 언어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칼빈은 스스로를 ‘말씀의 사역자’로 불리길 원했다. 한 시대를 살면서 주를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을 지금부터 만나보자.

설교자 칼빈의 출생과 시대적 배경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의 북서쪽에 위치한 노용(Noyon)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게라드 칼뱅(Gerard Cauvin)은 자수성가한 사람으로서, 노용 감독의 비서 겸 법률 고문직에 올랐고 노용의 상당한 귀족 가문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개혁자들 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귀족들과 접촉이 많은 덕으로 말미암아 교회 계통의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14세 때 로마 가톨릭 장학금으로 파리 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연구했다. 여기서 종교개혁에 호의적인 길라우메 콥(Guilaume Cop)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다. 그와 함께 공부하던 친척 올리베탄(R. Olivetan)은 뛰어난 히브리어 학자로서 칼빈이 성경을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칼빈에게 큰 영향을 끼친 교수는 언어학자 꼬르디(Mathurin Cordier, 1479-1564)다. 그는 독특한 문체로 유명했는데 칼빈에게 효과적이면서 유용한 공부습관을 길들여 주었다. 그리고 칼빈에게 종교개혁 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칼빈의 아버지는 본래 그에게 신학을 공부시키려 했으나 1527년 그가 노용의 고위 성직자들과 다툰 후에 법률학을 공부하게 했다. 그리하여 칼빈은 법률 공부를 위해 유명한 법률학 피에르 레스똘레(Pierre de l'Estoile) 교수가 있는 오를레앙(Orleans)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1년 동안 공부했다. 여기서 칼빈은 종교개혁에 대한 호감을 가진 헬라어 권위자 볼마르(Melchio Wolmar) 교수 아래서 배웠다. 1529년 볼마르 교수가 보르께스 대학으로 초빙되자, 칼빈도 학교를 옮겨갔다. 그는 거기서 유명한 법학교수 알시아티(A. Alciati)를 만난다. 위의 두 교수들은 장차 칼빈이 종교개혁자가 되도록 훈련시킨 중요한 인물이다.

확실히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1527-1528년경 부르주에서 칼빈의 설교 역사가 시작된다. 그의 초기 설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칼빈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인 베자(Beza)와 콜라돈(Colladon)이 칼빈이 두 마을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1529년이나 1530년 즈음에 설교를 시작한 것으로 사료된다. 칼빈은 1529년 6월에서 1534년 5월까지 퐁레베크에서 성직을 수행했다. 따라서 베자의 진술이 정확하다면, 그는 이곳에서 설교를 했을 것이다(T. H .L. Parker, <하나님의 대언자: T. H. L.파커가 전하는 칼빈의 설교이론>).

1532년 5월, 칼빈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법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부루즈를 떠나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1년이 못 되어 그의 첫 저서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 주석>을 출판했다. <세네카의 관용론>은 로마 황제 네로(Nero)가 무자비하게 기독교를 박해한 것에 대하여 스토익주의자로서 동정심을 금할 수 없어 네로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칼빈 역시, 당시 프랑소와 I세가 프랑스의 개신교도에 대한 무자비하게 박해를 보고 인문주의자로서의 분개를 금할 수 없어 프랑스 왕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썼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글에서 칼빈은 교회의 평화는 칼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있음을 강조했다. 현재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순교 당하는 개신신교도들은 소크라테스보다도 더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하며, 그들을 죽이거나 박해하지 말라는 글을 썼다.

칼빈의 회심과 <기독교 강요> 출판
칼빈이 언제 회심을 경험했는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다. 자신의 회심 내용을 그 어디에도 분명히 밝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자(Beza)는 칼빈이 1528년에 이런 경험을 했을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1533-34년으로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회심을 말할 때에 그날이나 상황보다 회심을 통하여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가에 관점을 두고 기록했다. 칼빈은 자신의 회심이 ‘갑작스런 회심’(subita conversio)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보았습니다. 마치 빛이 내 위에 막 쏟아져 비취는 것 같이 나는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과오의 돼지우리에서 뒹굴고 있었는가를. 그리고 내가 얼마나 부정하고 더러웠는가를 밝히 보았습니다. 내가 빠져 떨어진 그 비참한 상태에 대한 나의 두렵고 떨리는 심정, 영원한 죽음의 절망에 대한 무서운 위협, 이런 것 때문에 나는 한 시간도 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즉시로 나는 당신의 지시하시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많은 통곡과 눈물로 나의 과거를 저주하면서 나는 떠났습니다.”

칼빈은 <시편주석 서설>(1557)에서도 ‘갑작스런 회심’(subito conversio)에 대하여 언급했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섭리에 의해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이렇게 되었다”라고 표현했다.

칼빈은 회심에 대한 기록은 이처럼 간단하게 말하고 있지만, 소명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칼빈이 1533년 파리대학 학장인 니콜라스 코프(N. Cop)의 취임연설문 초안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으로 작성해 주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 코프의 연설이 파문을 일으켰다. 로마교회 지도자들과 법률가들은 이 연설문에서 파리 성직자들의 잘못을 지적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코프를 이단자로 선포하고 체포하려 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 코프는 청년들과 학생들이 도와 체포될 무렵, 1시간 후에 바젤을 향하는 도상에 있게 되었다.

그러자 칼빈도 파리에 더 머물 수 없게 되어 고향 노용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안굴렘성당 수석신부인 친구 틸레 (Lonis de Tillet)의 집에서 1534년 4월까지 머물면서 <기독교 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저술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도 불안하여 1534년 10월 스위스로 향했다. 프랑스 개신교도 망명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스트라스부르그를 방문한 후 바젤로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조국의 복음주의자들을 변호하기 위해 『기독교 강요』의 탈고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1535년 8월까지 탈고하고 같은 달 23일 이 책의 서문으로 프랑스 개신교에 대하여 관용과 이해를 청원하는 국왕 프랑소아 1세에게 드리는 편지를 씀으로써 저술을 끝마쳤다.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이었다. 이 책은 다음해인 1536년 3월 바젤에 있는 토마스 플라터(Thomas Platter)출판사에서 출판했다. 520쪽이나 되는 적지 않은 책이었다.

신앙의 명백성을 드러낸 <기독교 강요>
<기독교 강요>는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 교회의 네 가지 측면에서 교회의 진리 전체를 계통적으로 서술함으로써 기독교의 진리를 시민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이해시키기 위한 일종의 기독교 교육서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강요>가 기독교 역사에 이룬 업적은 엄청나다. 모든 인간이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통치와 권위를 중세교회는 기계주의의 육안으로 보게 하려했지만 그것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칼빈은 이 책을 사도신경의 순서에 따라서 신앙의 본질을 설명해 나가며 저술했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저술한 목적은 개신교도들이 믿는 신앙을 명백하게 설명함으로써 동료들의 오명을 벗기고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개혁주의 편에 서게 하기 위함이었다. <기독교 강요>는 종교개혁 이후에 나온 가장 위대한 기독교 교리의 해석서로 평가받고 있다(Williston Walker,<기독교회사>, p.128).

<기독교 강요>를 발행한 칼빈은 휴양차 틸레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 페라라(Ferrara)에 있는 에콜 공비, 르네(Renee) 왕녀를 방문했다. 왕녀 르네는 루이 11세의 딸로서 본래 개혁 정신에 찬동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불행한 운명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피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칼빈은 여기서 개혁운동을 계속할 수 있기를 원했지만, 법황의 압력으로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유랑의 길을 떠나 잠깐 바젤로 갔다가 파리로 돌아갔다. 거기서 가사를 정리한 후 동생들을 데리고 스트라스부르그로 가서 평온한 가운데 연구생활에 전념할 생각으로 1536년 6월 파리를 떠났다. 이 일은 칼빈이 파리와 영영 이별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우연하게도 프랑스 왕 프랑소와 1세와 독일 왕 찰스 5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그에 이르는 도로가 막혀버렸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남쪽으로 우회하여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생각으로 제네바에 들렀다.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Ⅱ
영혼을 살리는 설교자 14
2009년 04월 05일 (일) 21:42:02 권영삼 032kwon@naver.com


칼빈은 1536년 7월에 제네바로 갔다. 거기서 파렐(Farel)을 통해 칼빈은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며 종교개혁자가 된다. 그는 이곳에서 1536년 9월부터 바울서신을 강의했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개혁교회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했다.

1537년 1월 16일에는 칼빈이 중심이 되어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Articles Concerning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을 만들었고, 이것은 후일 교회 헌법이 된다. 같은 해에 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리문답서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1538년 2월, 반대파 지도자들이 실권을 잡게 되자 칼빈의 강력한 지도력은 제네바의 다른 지도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칼빈은 고의적으로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의 공갈로 인해 생활은 점점 힘에 겨웠다. 개혁 반대자들은 칼빈을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두 번째 후예’라는 포스터를 만들어 붙였다. 결국, 의회는 파렐과 칼빈에게 제네바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칼빈은 그동안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바젤로 갔다. 그는 소란스런 제네바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로 하여금 조용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칼빈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인 교회의 목사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18개월 뒤,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해 칼빈은 3년 정도 머물며 신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곳에서 성경을 강의하고 목사후보생을 훈련시켰다. 이때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집필하게 된다. 이와 함께 추기경 사도레토(Sadoleto)를 반박하는 글을 썼고, “성만찬에 대한 소논문”(Little Treatise on the Holy Supper of our Lord)도 썼다.

더불어 <기독교강요> 증보판을 발간했다. 또한, 목사로서 피난민 교회에서 500여명의 성도들을 목회했다. 여기서의 경험이 후일 제네바의 목회를 더욱 풍성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교인 훈련, 성만찬, 회중 찬송, 심방, 교회 예배의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미완성 상태의 제네바는 칼빈이 떠난 뒤로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제네바 교회는 칼빈을 필요로 했다.

제네바 재입성과 연속되는 고난
1541년 9월 13일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다. 칼빈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열정과 단호한 결단을 갖고 일을 했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오던 날, 그는 교회를 재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위원회에는 교회의식서(Ordonnances Ecclesiastiques)를 작성하여 이를 칼빈이 수정한 후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조직 체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교회의 네 가지 직분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구분하고 그들의 역할과 사명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개혁교회에는 계급이 없었고 누구나 쉽게 성직자가 되었다. 칼빈은 성직자의 규범과 표준을 세우고 모든 분파의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형성했다. 제네바는 성베드로, 성제르베, 라 마들렌 등 세 교구로 나누고 이를 다섯 명의 목사가 섬겼다. 1542년에 전염병, 부인의 사산아 출산, 외국인인 그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인해 칼빈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547년 2월에는 칼빈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거 의회에 입성했고, 7월에는 그들을 거스르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칼빈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1549년 3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잠시 낙담했다. 칼빈은 이 밖에도 육체적 고통으로 편두통과 통풍, 발열, 이질, 폐결핵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설교하러 가는 때가 많았다.

중단될 수 없는 개혁운동
1549년 10월, 의회의 지시에 따라 칼빈은 제네바에서 이틀에 한 번씩 하던 설교를 매일 한 번씩 하게 된다. 자주 설교를 하게 됨으로써 칼빈은 엄청난 양의 설교를 남겼다. 그의 설교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난민 협회’로 알려진 한 단체가 칼빈의 설교 가치를 파악하고 돈을 내어 설교를 받아 쓸 수 있는 비서를 구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늘 고국인 프랑스 교회의 안녕을 걱정했다. 프랑스 교회 역시, 칼빈을 지도자로 생각했다. 이런 목적에 따라 1546년 <기독교 강요>를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프랑스의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해 소책자들을 집필했다.

그러나 칼빈의 개혁운동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553년에 세르베투스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스페인 학자 세르베투스는 니케아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 교리와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 그리고 유아세례 교리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칼빈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관점 차이로 처형시켰다는 오해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기 전,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로 인해 칼빈이 있던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나 제나바 시의회의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 프랑스인으로서 시민권이 없던 칼빈은 종교회의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재판에 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했다. 그리하여 세르베투스는 칼빈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 당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 사건은 이 사건과 관련된 어느 누구도 칭찬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제네바에서 일어난 괴로운 싸움의 절정이었다.

일부는 칼빈에게 노골적인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칼빈이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칼빈을 가장 반대한 자들은 자유사상가들이었다. 도덕 폐기론자들, 방탕한 자들 그리고 부정부패한 자들이 칼빈의 종교개혁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개혁운동은 중단될 수 없었다. 칼빈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이론과 조직을 통해 이끌고 갔다. 힘겹고 괴로운 투쟁의 나날이었으나, 1555년부터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몰락하고 칼빈은 제네바를 그의 이상대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1559년 칼빈의 소원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유럽의 젊은이들을 모아 개혁주의 사상을 가르치는 제네바 아카데미(Academy of Geneva)를 설립한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학장으로 취임할 수도 있지만, 신약성경학자이며 그의 제자인 베자(Theodore Beza)에게 학장의 책임을 맡기고, 자신은 교수로 강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1559년 3월 5일에 아카데미를 열었을 때 불과 162명의 학생이었으나 1565년에는 1600여명으로 열 배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 칼빈
칼빈은 그 당시 가장 훌륭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평생 열정적인 학자였다. 성경 지식뿐만 아니라 법학, 언어, 신학, 철학, 역사 등에 능통하였다. 그의 생애 중 27년간 성피어레(St. Pierre) 교회에서 일주일에 5-6회 설교할 정도로 열정적인 설교자이기도 했다. 또한 신학강론, 저술, 토론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설교는 속기로 기록되어 출판되었다.

칼빈의 설교집과 주석, <기독교강요>는 속속 번역되어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전역에 칼빈의 사상이 전달되었다. 1564년 2월, ‘천식’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칼빈은 복음서의 조화에 대한 마지막 설교를 했다. 그는 몇 달 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점점 쇠약해져서 마침내 5월27일 저녁에 임종했다.

그의 유언에서 자기를 소개하기를 “나, 존 칼빈, 하나님의 말씀의 종”(I, John Calvin, minister of the Word of God)이라 고백했다. 우리는 이 고백 속에서 칼빈의 소명과 사명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이것이 그가 설교 사역에 대한 정체성과 소명에 대한 분명한 근거였다.

설교자 칼빈의 과도한 고난
칼빈의 설교에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가톨릭 성직자들의 비행을 더욱 비판하였다. 이런 비판은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으로 기독교는 여러 면으로 개혁되고 갱신되고 있다.

칼빈의 설교에는 또한 봉건 영주들에 대한 비판도 많이 나온다. 칼빈은 근대 민주주의의 아버지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전하자, 칼빈의 설교 가운데 많은 부분이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애석하게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칼빈의 민주주의적 설교를 감사하게 회상하고, 우리 시대에 있어서 더 나은 민주주의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대인들이 칼빈의 설교에 감동받기 어려운 요소는 그의 삶이 보통 사람들의 삶에 비해 지나치게 연속된 시련의 삶이었다는 점이다. 개혁신앙 때문에 제네바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고,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의 고통은 대단했다. 온갖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위대한 신앙을 지킨 칼빈을 존경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설교가 깊은 감동으로 다가 오지 않을 수 있다. 공감할 수 없는 삶을 표본으로 삼는 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칼빈의 대적자들
칼빈의 종교개혁은 결코 순단치 않았다. 엄청난 저항과 맞바람을 맞은 결과물이다. 칼빈의 대적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그가 관계를 단절한 로마, 즉 과거의 로마와 트렌트 공의회를 통해 진용을 정비한 로마가 있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당시 로마의 신학자)들과 스콜라주의자, 궤변론자인 소피스트라는 용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칼빈이 이러한 로마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오직 성경’에 대한 생각으로 인한 것이었다.

둘째, 재세례파(the Anabaptists)다. 이들을 광신도, 열광주의자, 자유주의자라고 부른다. 셋째, 극단적 인문주의자들(Humanists)이다. 라블레(Rabelais), 돌레(Dolet), 페리에(Périers) 같은 파리의 자유사상가들과 신이교주의를 표방한 에피쿠르소 학파 추종자들이다.

넷째, 제네바에서 개혁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대파들이다. 이처럼 칼빈은 수 없이 많은 적들로부터 공격과 비방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며 더욱더 말씀의 예리한 칼날을 세워 나갔다.

이처럼 삶의 정황에 나타난 시대적 산물들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점점 더 교권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 적실한 적용의 눈을 갖게 한다. 또한 극도의 아픔과 시련은 칼빈을 겸허하게 만들었고, 전적으로 성령께 의탁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칼빈의 대적자들이 있었기에 그의 설교는 날카로운 적용이 있는 설교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칼빈의 삶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셨다.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Ⅲ
영혼을 살리는 설교자 14
2009년 05월 06일 (수) 07:33:17 권영삼 032kwon@naver.com

 
설교자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칼빈은 목사 또는 설교자를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했다. 그것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사역을 말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세 가지 측면이 항상 양호했던 것만은 아니다. 제사장과 선지자의 관계에 있어서 역동적인 긴장이 엿보인다. 선지자와 왕의 관계에 있어서도 갈등이 많았다. 특히, 사무엘 선지자와 사울 왕이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설교자의 제사장 역할로는 중보자와 의식 집행이 있다. 이는 현대적인 개념으로 치유와 용서의 사역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제사장은 병든 자나 고뇌하는 사람,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 그들을 위해 중보한다. 선지자는 미래적인 예언보다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평화, 의, 죄에 대하여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역할은 설교자가 현재 상황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가능한 사역이다. 가장 근대적 개념인 매니저로서의 왕의 역할은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설교자의 다스림, 곧 조직을 관리하는 사역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역할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그리스도의 개념 아래서 통일된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로 오셔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사역을 완성하셨다. 칼빈은 오늘날의 설교자 또는 목사의 개념을 그리스도의 사신이요, 증인으로서 이러한 세 가지 사역을 함께 통일하는 사역자이어야 한다고 정의했다. 만약, 한 방면에 소홀히 하면 자연히 사역의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제사장적인 위로와 용서만을 강조하면 선지자적인 메시지로서의 회개, 의,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설교자들이 지나치게 청중들을 의식하다보면 선지자적 메시지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반면, 선지자적 메시지에 치우쳐 의를 선포하고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선포하는 말씀에만 집중하면 백성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보호하고 치료하는 사역들이 전혀 등한시 될 수 있다.

칼빈에게 설교자로서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칼빈은 다양한 표현으로 설교자의 사명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 말씀을 맡은 전권대사
칼빈은 설교자야말로 하나님의 대리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전권대사임을 강조한다(Richard Stauffer,<칼빈의 설교학>, pp.124-136). 그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교회론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의 권위를 정의함에 있어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다스리시는 유일한 권위라고 말했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를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그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고 전제했다. 계속해서 그는 “눈에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은 그의 이 권위를 사람들의 봉사를 통해 이루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마 26:11) 사람들의 봉사를 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말로 명백하게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Ⅳ. 3, 1).

“선지자가 단순히 자신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에 반역하는 자들을 정죄하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변명도 갖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것임을 압시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는 자신의 직분에서 돌이키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에게 맡겨진 그대로 그 직분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John Calvin, Calvin's Sermons on The Book of Jeremiah, 박건택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257).

사도의 계승자
칼빈은 “현대의 교사들(오늘날의 주일학교 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맡은 사람으로서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세운 직분 또는 신학교 교수를 지칭한다)은 고대의 선지자(듣지 못한 새로운 복음을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목사(기존 신자들에게 제자훈련과 성례를 집행하며 경고와 권면하는 일을 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직분)는 사도에 해당한다”고 했다.

‘사도’라는 말은 본래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칼빈은 주께서 자신의 사자로 파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12사도와는 구별되는 직분(듣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전하는 사명에 있어서)이라고 했다.

목사가 사도적인 책임을 맡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주님이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 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는데 목사들이 이와 동일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바울이 자신에 대해 한 말이 오늘날의 목사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16-17). 사도는 전 세계를 위해 활동했지만 목사는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 해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사도와 동일한 직분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10:16)라는 말씀을 목사의 말씀 사역에 대한 사명으로 이해했다. 목사에 대한 이런 고등한 관점이 그를 말씀 사역에 더욱 정진토록 했다.

제자 됨의 도리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를 졸업한 후 세미나 또는 연장교육에 참여하여 자신을 새롭게 충전하려고 노력한다. 이 때 새롭게 깨우친 진리를 가지고 돌아가면서 목사는 일생 동안 배워야 한다는 말의 중요성을 서로 나누곤 한다. 그러나 설교에서 만큼은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말씀의 사역자 칼빈의 자세는 도리어 그 반대다.

설교에 임하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 먼저 제자요, 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교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지혜나 지식을 전달하거나 남을 깨우치려고 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큰 오해라는 것이다(김재성, “존 칼빈의 생애와 시대”, p.73). 칼빈에 따르면, 설교란 설교자의 생각을 강론하여 추종자로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설교자와 회중을 함께 해석하도록 둘 때 여기서 자유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목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제자로 부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한 입으로 공통된 교훈을 받도록 하셨다고 칼빈은 강조한다. 이 일을 통해 교회를 한 끈으로 묶어 연합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자기 자신에게 유보해 두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랑거리가 될 만한 모든 것을 치워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일을 통해서만, 세상이 하나님과 함께 무엇인가를 공유하려는 헛된 생각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John Calvin, <에베소서 설교 상>, 김동현 역, 솔로몬출판사, p.252).

신성한 말씀의 일꾼
칼빈은 “목사란 ‘신성한 말씀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목사에게 부여된 직무들은 설교와 비교해 볼 때 부차적인 것이다. 그는 성례의 시행, 조직과 권징보다 신성한 말씀의 설교를 늘 앞세웠다. 칼빈은 만일 목사가 설교할 수 없다면 당연히 목사가 아니라고 까지 말했다(T. H. L. Parker, <칼빈과 설교>, 김남준 역, 솔로몬, p.5).

칼빈의 설교 예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복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하나님 말씀 전달)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 연장을 쓰는 것과 같다”(<기독교 강요>, Ⅳ. 3. 11).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입’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그래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라고 강조했다.

 

 

 

 

 

 

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 Ⅳ
영혼을 살리는 설교자 14
2009년 06월 15일 (월) 00:45:36 권영삼 032kwon@naver.com


칼빈의 저서를 살펴보면 자주 마주치는 단어가 ‘가르침’이다. 칼빈은 ‘가르침’을 ‘설교’와 동의어로 여기고 매우 빈번하게 사용한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 선포(Kerygma)와 가르침(Didache)의 엄격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는 칼빈이 설교자를 바라본 시대적 정황이 16세기 유럽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때의 청중은 대부분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설교자의 소임은 단순히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재교육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 행해지든지 본질적으로 가르침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설교자의 부담은 무엇인가? ‘가르침’ 보다는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 쪽에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이로 인해 그 가치가 얼마나 많이 희석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칼빈의 설교관은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설교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설교’에 대한 인식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논의는, 성찬 논쟁과 같이 루터와 츠빙글리가 양극단을 달렸다. 칼빈은 중간 입장에 있으면서 두 견해와 관련은 있지만 균형 잡힌 독특한 견해를 선보인다.

영적 광신자들은 열렬하게 말씀과 성례와 관계없이 임한다고 선언했다. 반면에, 루터는 “성령은 오직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만 임한다”고 가르쳤다.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하게 생각한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 로마교회의 근본 오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칼빈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주도권을 두었다. 설교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설교자가 성경에서 발견한 복음을 선포할 때 그의 말은 하나님 말씀이 된다.

츠빙글리파는 중도적인 자세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광신주의자들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칼빈은 설교자의 분명한 정체성과 더불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설교관은 무엇일까?

성경 주해와 해석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지혜 앞에 잠잠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새로운 것을 선포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기로 하신 비밀을 설교자가 그의 말씀에서 깨달으며, 설교자가 깨닫는 것은 우리와 관계가 있거나 우리를 유익하게 할 것으로 예견한 모든 것”(『기독교 강요』Ⅲ. 21, 1)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면, 설교는 성경을 해명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직 이 해명을 통해서만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이에 따라 칼빈은 설교자는 설교에서 성경본문의 지배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청중들은 다만,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갈망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정성구, “칼빈의 설교 연구”,『신학지남』, 통권 제183호, p.57). 칼빈은 그 누구보다 성경 본래의 의미를 찾아, 간결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한 설교자였다.

하나님의 임재
칼빈의 설교관은 설교가 하나님 임재의 표징임을 보여준다. 칼빈 설교에서는 특기할 만한 것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성경 말씀이 설교되는 곳이다.
둘째, 설교에서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엄선된 수사학적 도구를 차용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가지고 청중 편에서 일깨워 주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설교가 하나님 임재 앞에서의 행위임을 의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설교란 ‘신적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
칼빈에게 설교란 ‘그리스도에게 듣는다’는 확신이다. 설교란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으로 행해진다는 인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교회의 ‘유일한 선생’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는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야 한다(『기독교 강요』, Ⅳ. 8. 1).

칼빈에게 설교는, 무엇보다 성도의 마음속에 심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수단이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이곳(설교)에 계시고, 그의 왕적 보좌를 그곳에 두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사탄이 주인 노릇을 함으로써 타락했다. 이에 따라 죄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형시켜 주심으로써 복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복음으로 반역자에서 하늘나라 시민으로 바꿔 놓으신 것이다. 칼빈은 복음이 설교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지배의 세력 아래에 두기 위함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설교는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주장하는 것이다.

구원과 심판의 이중 음성
칼빈에 따르면, 설교에는 ‘두 가지 목소리’(Duplex)가 있어야 한다.
첫째는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바른 길로 인도하는 온유한 음성이다.
둘째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노성(怒聲)이다. 칼빈은 이사야 55:11 주석에서 “말씀이 신자들을 구원하는 데 효과적이라면, 마찬가지로 그것은 사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데도 충분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구약성경주석』이사야Ⅳ, p.177).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증거할 때 죄인들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도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는 구원과 심판의 양면 효과를 나타내는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고전 2:15-16).

실제로 칼빈은 수많은 비난과 반대자들을 극복해야 했다. 베자(Beza)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제네바 사람 중 어떤 이는 자신이 기르는 개를 ‘칼빈’이라고 부름으로써 개혁자에 대한 경멸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혹자는 칼빈(Calvin)의 이름을 줄여 가인(Cain)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리고 적잖은 사람들이 칼빈에 대한 증오심을 핑계 삼아 성찬 참여를 중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칼빈은 “선하고 진실된 목자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덕을 전하기 위하여 진지하고 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는 어려움이 많아도 진실해야 됨을 가르친다. 무엇이 선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일 뿐 아니라,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된다”고 주장했다(Stauffer, Calvin et Sermon, p.71-78).

성령의 능력의 현현
칼빈은 성령의 역사를 제외한 설교는 사람의 말잔치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설교자 자신뿐 아니라 청중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을 성령의 감화와 조명 그리고 효과적인 간섭과 역사하심으로 보았다. 결코 설교자의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 아님을 확실히 했다. 칼빈은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역사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청중이 설교를 믿음으로 받을 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약속된 구원을 받는다고 보았다. 말씀이 믿는 자의 속에서 역사한다는 것이다(살전 2:13). 칼빈에게 있어 설교는 기계적으로 효력을 발(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 효력을 발(發)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감동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어떤 설교도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는 성령의 내적 증거란 복음을 깨닫도록 마음에 빛을 비추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하지만, 죄로 어두워져서 무지하고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다. 성령은 닫힌 귀를 뚫어서 말씀을 듣게 하시고, 마음을 조명하여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성령은 믿음을 일으켜서 말씀의 신적 기원을 믿게 하시고, 그 말씀을 인정하고 순종하게 하신다(Parker, Calvin's Preaching, p.72). 칼빈은 회심의 역사, 구속과 영생의 기쁨도 성령의 권능의 결과라고 말했다. 이렇게 칼빈은 성령의 감동을 설교의 효력에 결정적 요인으로 말했다.

효력 있는 은혜의 수단
칼빈은 설교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크게 느꼈다. 이 때문에, 비록 말씀이 연약한 인간에 의해 나왔다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은 항상 명령과 약속 이행으로서의 전능한 힘을 지녔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증거자의 입술을 통하여 용서를 베푸실 때,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는 자는 진실로 그들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으며 이는 선포된 말씀이 효력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효력 있는 말씀의 능력이 칼빈이 말하는 설교관이다.

칼빈의 설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성경, 특히 인간 구원을 위해 주신 은총의 선물로서의 성경관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성례전의 신비와 동일한 신비
칼빈은 성례전에서 주님의 은총이 임하듯,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고 보았다. 성례전의 떡과 포도즙은 객관적 실체다. 그것은 떡과 포도즙 그대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아무 효력이 없다. 그러나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주님이 약속하신 실재(예수님의 피와 살)를 먹게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참예하는 자에게 효력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성례에 참예하는 자들이 설교를 듣는 청중이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은총을 받는다고 했다. 칼빈은 성례와 설교가 기록된 말씀에 의존해야 함과 동시에, 둘 다 성령의 은혜로운 임재로 채워질 때에만 실재적인 은혜의 방편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중심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보다 26살 어린 칼빈은 성경 자체의 해석자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설교에 있어서는 다르다. 루터는 주로 구원이라는 이슈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칭의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에 초점을 맞추었다.

칼빈의 설교는 항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섭리를 확신하는 가운데 전달되었다. 하나님은 설교자를 위한 권위요 동기일 뿐 아니라, 모든 설교의 자원과 대상이다. 모든 설교의 중심적인 요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삼위적인 충만함 속에서도 하나님은 매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신다. 그는 신명(神名)을 칭할 때 ‘하나님’이라는 포괄적인 칭호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였다.

이에 비해 루터는 매우 의도적으로 성경을 강해할 때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았다. 루터가 그리스도를 가르치려는 목적으로 설교한 반면, 칼빈은 성삼위 구속주 하나님을 보다 더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설교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칼빈은 복음을 제시할 때 하나님 중심적으로 복음을 제시했다.

칼빈은 교회를 중심에 삼고 있는 로마교회 체계와 사람을 중심으로 삼는 자유사상가들의 철학을 배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성삼위의 제2격 위나 제3격 위에만 초점을 맞추어 강조하려는 종파들의 잘못된 경향을 논박할 의도도 갖고 있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모든 영광스러운 충만함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자신은 모든 설교안의 근원이요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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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사역자 존 칼빈Ⅴ
영혼을 살리는 설교자 14
2009년 07월 10일 (금) 07:21:31 권영삼 032kwon@naver.com

시중에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설교학 서적들 가운데 청중의 자세와 의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칼빈은 설교자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청중의 자세에 관해서도 많이 이야기한다. 칼빈은 청중이 설교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 어떤 정신으로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말씀을 들을 때 설교자로서 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이 세상에는 자기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므로, 설교를 듣지 않아도 될 만큼 장성했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Parker, Calvin: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80). 다만, 설교 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순종이 요구될 뿐이다. 칼빈은 설교를 듣는 청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청중으로서의 설교자
칼빈은 설교자가 하나님의 대변자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강조했다. 욥기 33:1-7절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에서 그는, 목사와 청중의 임무를 보여주는 ‘구별 됨’(Distinction)과 ‘동일시’(Identification)의 방법을 선보인다. 설교의 대상으로서 설교자 자신이 청중이 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말이다(정성구,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설교 패턴과 특징들”, <그말씀>(1997. 10), p.82).

설교자 칼빈은 어느 한 명에게 자신의 설교를 집중시켰다. 그것은 다른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청중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지표로서 그는 “우리가”, “우리를”이란 말과 “당신”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음에서 알 수 있다. 칼빈이 전한 메시지와 적용은 설교자인 자신과 청중 모두에게 균등하게 부과되었다.

맹목적이지 않은 청중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칼빈은 청중들에게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순종을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설교를 비판적으로 들으면서 하나님 말씀과 말씀이 아닌 것을 분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분별할 수 있을까? 칼빈은 성경으로 진실성을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Parker, Calvin's Preaching, p.82).

그렇다면, 절대적인 권위를 설교에 부여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견제장치는 무엇인가? 악의적이고 오만하며 악용의 소지가 분명히 있기에 충분한 견제장치가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목사직은 중세시대의 사제보다 100배나 더 악용될 것이 뻔하다.

그것은 첫째로, 설교자에 대한 칼빈의 인식에서 살펴본 것처럼 설교자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선포하신 것만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파견된 대사이지 주권자(the Sovereign)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능동적인 참여자
설교에서 흔히, 설교자는 메시지를 주고 청중은 그 메시지를 받는다. 그러나 받는다는 것이, 곧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칼빈은 듣는 것을 ‘능동적인 참여’라고 규정하고, 들음은 믿음의 행위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청중은 온전한 정신자세를 가지고,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자신이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말씀을 들려주시기를 열망하면서 예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럴 때 청중은 설교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게 되고, 설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의 지적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왜 설교를 들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한, 설교자를 통해 교회에 왜 이러한 명령을 주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칼빈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권자로 모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양떼임을 기억할 것을 권고한다.

하나님은 설교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다스리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한 목자로서 친히 그 양떼를 가르치신다. 방관자나 참여자 또는 구경꾼으로 전락해 버리기 쉬운 현대교회의 청중에게 귀중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가르침의 책임
칼빈은 설교자와 마찬가지로 청중은 성령의 메시지가 강단에서 선포될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친다. 청중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메시지를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 시간에 이러저러한 잡다한 공상에 의한 질문으로, 설교자의 사역을 고달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설교자와 청중이 공유하는 목적은 교육, 곧 ‘하나님의 전’으로 지어져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청중의 모든 구성원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거나 하나님 말씀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이상주의적 믿음을 결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진술한 대로, 청중은 부르심과 가르침을 따라 무관심과 오만, 일생에 걸친 쉼 없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설교자와 마찬가지로 청중은 쉬지 않고 “오소서 성령이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Parker, Calvin's Preaching, 82).

칼빈의 설교 테크닉
칼빈의 설교에서 본문의 길이는 내용에 따라서 결정된다. 구약성경 역사서나 신약의 복음서는 보통 10-12 구절이다. 그러나 서신서나 교훈을 목적으로 설교할 때는 보통 3-5절 정도의 짧은 본문을 선택했다.

칼빈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었기 때문에 반드시 성경을 낭독하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본문 한 절 한 절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를 좋아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설교 형식은 짧은 구절이나 한 문장에 대해서 설명하고, 그 해석한 말씀을 청중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때로는 즉각적인 상황을 판단하여 설교한다. 그러나 설교를 산만하게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칼빈은 언제나 말해야 할 요점을 잘 파악하여 문제를 핵심적인 구절로 이끄는 방법을 알고 설교를 진행했다.

설교의 구조
칼빈의 설교에는 엄격한 형식적인 배열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고유한 형식이 있다. 그의 전형적인 설교 구성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1. 기도
2. 이전 설교의 요약
3. ① 첫 번째 절의 설명과 주해
② 이것의 적용, 복종이나 의무에 대한 권면
4. ① 두 번째 절의 설명과 주해
② 이것의 적용, 복종이나 의무에 대한 권면
5. 설교 후 기도- 기도에는 설교의 요약이 담겨 있다(O. C. Edwards Jr. A History of Preaching, p.316).

칼빈은 설교의 뼈와 살을 두 요소에서 취했다. 하나는 본문 자체를 담고 있는 직접적이고 궁극적인 문맥이고, 다른 하나는 청중들의 영적인 필요였다(Calvin , Sermon from Job, p.22). 이 형식은 설교를 성경에 밀접하게 연결시켰다는 데 가치가 있다.

칼빈의 설교 형식을 사용하면, 설교자는 본문과 동떨어진 종교적인 연설을 하기가 불가능하다. 기독교의 보편적이지 않은 개념을 억지로 갖다 붙이려면, 상당한 재간이 필요하다. 또 이러한 형식으로 말미암아 칼빈은 복음을 사람들에게 연결할 수 있는 상당히 자유로운 여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형식에는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있다. 칼빈의 강론은 본문에 나타나는 두서너 개 또는 그 이상의 개념 때문에 통일성이 떨어진다. 특히, 전문적으로 사고훈련을 받지 않은 평범한 청중이라면 칼빈의 이런 설교를 기억하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설교의 주제가 서로 비슷하다보니 쉽게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다.

 

 

 

 

 

출처 : 무학교회 청년사역 셀 G12 제자훈련
글쓴이 : 이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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