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은 1536년 7월에 제네바로 갔다. 거기서 파렐(Farel)을 통해 칼빈은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며 종교개혁자가 된다. 그는 이곳에서 1536년 9월부터 바울서신을 강의했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개혁교회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했다.
1537년 1월 16일에는 칼빈이 중심이 되어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조항”(Articles Concerning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을 만들었고, 이것은 후일 교회 헌법이 된다. 같은 해에 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교리문답서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1538년 2월, 반대파 지도자들이 실권을 잡게 되자 칼빈의 강력한 지도력은 제네바의 다른 지도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칼빈은 고의적으로 개혁을 반대하는 자들의 공갈로 인해 생활은 점점 힘에 겨웠다. 개혁 반대자들은 칼빈을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두 번째 후예’라는 포스터를 만들어 붙였다. 결국, 의회는 파렐과 칼빈에게 제네바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칼빈은 그동안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하기 위해 바젤로 갔다. 그는 소란스런 제네바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로 하여금 조용히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칼빈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프랑스인 교회의 목사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로부터 18개월 뒤, 스트라스부르그에 도착해 칼빈은 3년 정도 머물며 신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곳에서 성경을 강의하고 목사후보생을 훈련시켰다. 이때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집필하게 된다. 이와 함께 추기경 사도레토(Sadoleto)를 반박하는 글을 썼고, “성만찬에 대한 소논문”(Little Treatise on the Holy Supper of our Lord)도 썼다.
더불어 <기독교강요> 증보판을 발간했다. 또한, 목사로서 피난민 교회에서 500여명의 성도들을 목회했다. 여기서의 경험이 후일 제네바의 목회를 더욱 풍성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교인 훈련, 성만찬, 회중 찬송, 심방, 교회 예배의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미완성 상태의 제네바는 칼빈이 떠난 뒤로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도덕적 타락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제네바 교회는 칼빈을 필요로 했다.
제네바 재입성과 연속되는 고난 1541년 9월 13일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다. 칼빈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열정과 단호한 결단을 갖고 일을 했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오던 날, 그는 교회를 재조직할 것을 요구했다. 위원회에는 교회의식서(Ordonnances Ecclesiastiques)를 작성하여 이를 칼빈이 수정한 후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조직 체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
교회의 네 가지 직분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구분하고 그들의 역할과 사명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개혁교회에는 계급이 없었고 누구나 쉽게 성직자가 되었다. 칼빈은 성직자의 규범과 표준을 세우고 모든 분파의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형성했다. 제네바는 성베드로, 성제르베, 라 마들렌 등 세 교구로 나누고 이를 다섯 명의 목사가 섬겼다. 1542년에 전염병, 부인의 사산아 출산, 외국인인 그를 싫어하는 사람으로 인해 칼빈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547년 2월에는 칼빈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거 의회에 입성했고, 7월에는 그들을 거스르는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칼빈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1549년 3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잠시 낙담했다. 칼빈은 이 밖에도 육체적 고통으로 편두통과 통풍, 발열, 이질, 폐결핵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 설교하러 가는 때가 많았다.
중단될 수 없는 개혁운동 1549년 10월, 의회의 지시에 따라 칼빈은 제네바에서 이틀에 한 번씩 하던 설교를 매일 한 번씩 하게 된다. 자주 설교를 하게 됨으로써 칼빈은 엄청난 양의 설교를 남겼다. 그의 설교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난민 협회’로 알려진 한 단체가 칼빈의 설교 가치를 파악하고 돈을 내어 설교를 받아 쓸 수 있는 비서를 구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늘 고국인 프랑스 교회의 안녕을 걱정했다. 프랑스 교회 역시, 칼빈을 지도자로 생각했다. 이런 목적에 따라 1546년 <기독교 강요>를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프랑스의 그리스도인들을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해 소책자들을 집필했다.
그러나 칼빈의 개혁운동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553년에 세르베투스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스페인 학자 세르베투스는 니케아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 교리와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 그리고 유아세례 교리가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칼빈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비판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관점 차이로 처형시켰다는 오해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기 전,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로 인해 칼빈이 있던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나 제나바 시의회의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 프랑스인으로서 시민권이 없던 칼빈은 종교회의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재판에 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했다. 그리하여 세르베투스는 칼빈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 당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 사건은 이 사건과 관련된 어느 누구도 칭찬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제네바에서 일어난 괴로운 싸움의 절정이었다.
일부는 칼빈에게 노골적인 악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속주의자들에게는 칼빈이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다. 특히, 칼빈을 가장 반대한 자들은 자유사상가들이었다. 도덕 폐기론자들, 방탕한 자들 그리고 부정부패한 자들이 칼빈의 종교개혁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개혁운동은 중단될 수 없었다. 칼빈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이론과 조직을 통해 이끌고 갔다. 힘겹고 괴로운 투쟁의 나날이었으나, 1555년부터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몰락하고 칼빈은 제네바를 그의 이상대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1559년 칼빈의 소원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유럽의 젊은이들을 모아 개혁주의 사상을 가르치는 제네바 아카데미(Academy of Geneva)를 설립한 것이다. 칼빈은 자신이 학장으로 취임할 수도 있지만, 신약성경학자이며 그의 제자인 베자(Theodore Beza)에게 학장의 책임을 맡기고, 자신은 교수로 강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1559년 3월 5일에 아카데미를 열었을 때 불과 162명의 학생이었으나 1565년에는 1600여명으로 열 배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 칼빈 칼빈은 그 당시 가장 훌륭한 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평생 열정적인 학자였다. 성경 지식뿐만 아니라 법학, 언어, 신학, 철학, 역사 등에 능통하였다. 그의 생애 중 27년간 성피어레(St. Pierre) 교회에서 일주일에 5-6회 설교할 정도로 열정적인 설교자이기도 했다. 또한 신학강론, 저술, 토론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의 설교는 속기로 기록되어 출판되었다.
칼빈의 설교집과 주석, <기독교강요>는 속속 번역되어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전역에 칼빈의 사상이 전달되었다. 1564년 2월, ‘천식’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 칼빈은 복음서의 조화에 대한 마지막 설교를 했다. 그는 몇 달 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점점 쇠약해져서 마침내 5월27일 저녁에 임종했다.
그의 유언에서 자기를 소개하기를 “나, 존 칼빈, 하나님의 말씀의 종”(I, John Calvin, minister of the Word of God)이라 고백했다. 우리는 이 고백 속에서 칼빈의 소명과 사명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이것이 그가 설교 사역에 대한 정체성과 소명에 대한 분명한 근거였다.
설교자 칼빈의 과도한 고난 칼빈의 설교에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가톨릭 성직자들의 비행을 더욱 비판하였다. 이런 비판은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으로 기독교는 여러 면으로 개혁되고 갱신되고 있다.
칼빈의 설교에는 또한 봉건 영주들에 대한 비판도 많이 나온다. 칼빈은 근대 민주주의의 아버지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전하자, 칼빈의 설교 가운데 많은 부분이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애석하게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히려 칼빈의 민주주의적 설교를 감사하게 회상하고, 우리 시대에 있어서 더 나은 민주주의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현대인들이 칼빈의 설교에 감동받기 어려운 요소는 그의 삶이 보통 사람들의 삶에 비해 지나치게 연속된 시련의 삶이었다는 점이다. 개혁신앙 때문에 제네바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고,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그의 고통은 대단했다. 온갖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위대한 신앙을 지킨 칼빈을 존경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설교가 깊은 감동으로 다가 오지 않을 수 있다. 공감할 수 없는 삶을 표본으로 삼는 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칼빈의 대적자들 칼빈의 종교개혁은 결코 순단치 않았다. 엄청난 저항과 맞바람을 맞은 결과물이다. 칼빈의 대적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그가 관계를 단절한 로마, 즉 과거의 로마와 트렌트 공의회를 통해 진용을 정비한 로마가 있다. 칼빈은 교황주의자(당시 로마의 신학자)들과 스콜라주의자, 궤변론자인 소피스트라는 용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칼빈이 이러한 로마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오직 성경’에 대한 생각으로 인한 것이었다.
둘째, 재세례파(the Anabaptists)다. 이들을 광신도, 열광주의자, 자유주의자라고 부른다. 셋째, 극단적 인문주의자들(Humanists)이다. 라블레(Rabelais), 돌레(Dolet), 페리에(Périers) 같은 파리의 자유사상가들과 신이교주의를 표방한 에피쿠르소 학파 추종자들이다.
넷째, 제네바에서 개혁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대파들이다. 이처럼 칼빈은 수 없이 많은 적들로부터 공격과 비방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며 더욱더 말씀의 예리한 칼날을 세워 나갔다.
이처럼 삶의 정황에 나타난 시대적 산물들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점점 더 교권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 적실한 적용의 눈을 갖게 한다. 또한 극도의 아픔과 시련은 칼빈을 겸허하게 만들었고, 전적으로 성령께 의탁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칼빈의 대적자들이 있었기에 그의 설교는 날카로운 적용이 있는 설교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칼빈의 삶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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