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선교사! 목회자란!

[스크랩] (설교)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엡 4:7-11)

하나님아들 2013. 8. 16. 18:53

목사는 어떤 사람인가

 

본문: 4:7-11

요절: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 삼으셨으니

 

 

오늘 우리는 목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자세하게 배웁니다. 목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오늘 본문을 연구해야 합니다.

단락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 교회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 교인 각각은 서로 매우 다를지라도, 각자가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는 지체로서 주님을 섬기므로 교회는 하나이며, 같은 성령님을 받았으므로 하나이고, 모든 교인은 단지 하나님의 영광만 섬기므로 하나입니다. 교회는 자기만족을 위한 곳이 아니며 자기실현을 위한 곳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대부분이 자기실현을 위해, 교회에서 자신을 돋보여서 정신적 만족을 얻거나 교제를 위해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 같습니다. 게다가 거짓 목사가 구원의 확신까지 불어넣어 주니 교회생활을 하며 만족을 얻으니 더욱 좋습니다. 따라서 많은 교회는 영적인 곳이 아니라 사회적인 만남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곳에는 하나님이 계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며, 구속받은 자의 모임이며, 자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일치와 함께 다양성도 허락하셨습니다. 사람이 다양한 것같이 교회에는 다양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성을 통해 오히려 일치가 더욱 강화되도록 하셨습니다. 다양성이 강한 일치를 만드는 입니다.

 

오는 단락인 7-11에서 7절은 다양성을 이야기하면서 8절로 근거를 대고, 9-11절에서 8절을 해석합니다. 설교의 중심은 목사란 무엇인가에 맞추었습니다.

 

7 우리 사람에게 그리스도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 주셨나니

 

단락에서 모든 교인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강조해서 배웠습니다: 1) 2) 성령 3) 소망 4) 주님 5) 믿음 6) 세례 7) 하나님입니다. 이제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각각 특별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선 성도라는 말에 집중하겠습니다. 말은 모든 성도가 예외 없이 은사를 받는다 의미입니다. , 은사를 받지 않은 성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가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를 세워나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알곡과 쭉정이가 동시에 있는데, 쭉정이에게는 은사가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4장의 최후의 심판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모르시는 자들이 교회에서 기적을 베풀고 영광을 받은 것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교인에게 은사를 주므로, 은사만 가지고는 그가 알곡인지 쭉정이인지를 구분할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일치가 깨어지므로, 우리는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한, 은사는 성도에게 주진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성도에게 맞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사용에는 어느 정도 자발성과 기쁨이 따라야 합니다.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교회를 섬기게 해서는 됩니다. 이것은 그도 망치고 교회에도 훼손이 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는 예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자기은사를 자랑하거나 남의 은살르 부러워해서도 됩니다. 은사를 많이 받은 사람과 적게 받은 사람, 조금 귀하게 보이는 은사를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게 보이는 사람과 차별이 있어서도 됩니다. 만약 차별을 둔다면, 교회가 무너질 아니라 은사를 주신 예수님을 무시되는 결과가 됩니다. 고귀한 은사를 받은 지배층과 그렇지 않은 피지배층이 구분되어도 됩니다. 이러한 것은 전부 타락한 교회에서나 있는 것입니다.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68:18 인용합니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시편은 아마도 드보라와 시세라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노래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의미는 하나님께서 적을 쳐부수시고 선물(조공) 받으셨다 것입니다. 그런데 4:8절에서는 68:18 쓰인 것처럼 적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되 다르게 합니다. 그리고 68편에서는 주어가 여호와지만, 이곳에서는 주어가 그리스도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구약을 메시아적으로 해석한다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가서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신 선물은 11절에서 물건이 아니라 사도, 예언자, 복음 전파자, 교사, 하나님 말씀을 전해주는 자와 가르치는 자라고 합니다. 어렵지요? 계속 본문을 보겠습니다.

 

9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 시편에서는 여호와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셨다고 했는데, 사도는 먼저 올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셔서 적을 섬멸하기 전에 먼저 진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깊은 비참함, 죄의 세력에 사로잡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전부 체험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마침 성탄절 주일인데, 기회에 예수님의 이러한 성육신의 은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갈수록 자신의 어둡고 죄악된 모습을 점점 뚜렷하게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의 , 지옥과 같은 나의 내면의 비참함과 좌절, 고통을 모두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고백할 없을 정도로 부끄럽고 더러운 죄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모두 지셨고, 죄를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감추는 자는 죄사함의 은혜를 모르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사람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위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자 아기로 태어나셨다는 것이 성탄절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자신의 죄의 깊이를 모르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실 수가 없으며, 평생 가짜 교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며, 이것은 자신의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분명한 고백 후에 죄사함이 따르며, 그래야지만 깊은 죄인식에 들어갑니다. 거듭난 자는 일생 이러한 부담감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시발이 루터의 95 조항의 핵심이 거듭난 자는 아담을 매일 죽여야 한다입니다. 이미 거듭났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구원파는 가증한 집단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지시며 고통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시다! 우리는 그분 앞에 고개를 숙이며, 모든 신뢰와 사랑을 보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나,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68편의 여호와의 승리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모든 세력을 무찌르시고 만유의 왕이 되셔서 만물을 다시 충만케 하심 말합니다. 이것은 이미 1:20-23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무찌르신 승리자가 되셨으므로, 나는 비록 약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악의 세력의 통치권에서 벗어났습니다. 이것이 에베소서에서 수없이 나오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신비로운 말씀의 의미입니다. 나는 비록 악하고 연약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을 때에 악은 더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다스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승리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하늘의 왕좌에 앉으셨고 만물을 충만케 하시므로, 그분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은사를 주실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사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에는 이렇게 역사(歷史) 과정이 있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기계와 같이 자동적으로 역사가 흘러가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의 희생이라는 엄청난 일을 하셨는데, 이것을 많은 세월을 거쳐서 이루어 나가시며 그의 때가 성숙했을 때에 집행하셨습니다. 성령의 주사 방이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구원에도 역사와 과정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자 같이 단순한 것도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 알고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구원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를 귀하게 여길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는 그분의 성육신과 부활, 승귀라는 과정이 있는 구속사의 성취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한 은사를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훼손하는 자가 됩니다.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 삼으셨으니

 

이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은사를 주셨습니까? 사람을 주셨습니다. ,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파자와 목자와 교사를 은사로 주셨습니다. 이들은 교회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의 임무는 교회를 이끄는 것이며, 12 이하에서와같이 성도가 그들의 임무를 올바로 수행하도록 그들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에 특별한 지도자의 직분을 만드시고 적당한 사람을 세우십니다. 그러나 현실의 교회를 ,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 세운 사람, 스스로 지도자가 사람이 넘쳐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운 질서를 남용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단의 소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직책을 은사로 주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중요한 직책 순서대로 열거했습니다. 첫째로, 사도입니다. 사도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직접 보고 배운 것을 남에게 전달하고 가르쳤으며, 이것이 성경의 내용이 되었다는 점에서, 사도의 직분은 번만 있을 있는 가장 중요한 직책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전권을 받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므로, 그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이요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자이다“( 10:40)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또한 예수님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령님께서 이들에게 계시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6:13). 이러한 가르침과 계시가 모아져서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정확무오한 권위있는 가르침을 있는 사람은 사도 외에는 없으며, 그들 이후의 진리의 근원은 사람이 아니라 성경입니다.

 

교회사 2000년을 통해 자신이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는 이단들이 수없이 나타났습니다. 감히 이렇게까지는 주장을 하지만, 성령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말하는 이단들은 순복음 교회가 누룩이 되어 한국교회를 거의 잠식하였습니다. 복음주의의 기둥인 풀러 신학대학에서 사도직은 계승된다는 신사도 운동이 태동하어 한국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단입니다. 사도는 끝났고 계시도 사도와 함께 끝났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순복음교회가 가르치듯이 말씀하시거나 역사하시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거룩하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저급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죄로 사함을 받을 없는 죄입니다.

 

번째 은사는 신약의 교회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와 예언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곡해되어 있으므로 부분을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우선, 구약의 학개, 스가랴,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약에서는 성령님께서는 자신의 영을 부어주심으로써 선지자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시대에 선지자가 필요했던 이유는 신약성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사도들의 복음전파를 통해 생겨났고, 교회에는 기껏해야 개의 사도들의 서신의 복사본을 보관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성경에서 대답을 찾으면 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들이 참고로 있는 것이 너무나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성령님의 직접적인 방향을 받는 선지자들이 필요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 꿈과 환상, 생각의 형태로 방침을 주시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교회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이요“(고전 14:3). 예언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예언이 교회에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사람들의 죄를 간파한다든가(고전 14:25), 특별한 인도를 하신다든가( 16:6-10), 깨달음을 주시고 행동에 옮기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10:10). 예언은 새로운 가르침을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언을 통해 새로운 것을 가르친다는 사람은 전부 이단입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은 사도들만을 통해 전수됩니다. 가르치는 교사나 목사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거나 해석할 뿐입니다.

 

성령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직접 사람들에게 지시하신 이유는, 그들에게는 신약성경이 없었으므로, 판단하고 결정할 있는 근거가 제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27권이나 되는 신약성경이 있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결정하고 판단할 있는 근거가 충분하므로 성령님의 특별한 나타나심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을 생각나게 하심으로도 충분히 우리가 결정할 수가 있게 것입니다.

 

신약 선지자들에게 특이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여호와)게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작하지 않는 입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자로서 그들의 예언은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들에게는 말씀이 아니라 대부분이 생각이나 환상으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므로 이것은 항상 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언자가 자기가 받은 메시지를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접 말씀을 하신 경우에도 새로운 가르침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필요한 방향을 주시거나 위로를 하실 경우입니다( 18:9-10).

 

스테판도 공회에서 설교를 마치자 그에게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잠시 후에 순교를 당하게 그에게 격려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증오에 자들을 위해 기도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가기 전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3번이나 같은 환상을 보았지만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넬료를 만나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들은 있는 이방인 선교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언은 새로운 가르침으로서의 계시와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가르치신 것을 실행에 옮기도록 예언이라는 방편으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언은 교회에서 그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가르치는 직무를 담당하는 교사와 목자들에 의해 항상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들도 있고, 또한 참된 예언자라고 할지라도 사단의 영향을 받아 예언할 있으므로, 내용과 해석에 있어서 말씀에 능한 교사들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4:29 이하에서 예언자는 항상 이상이 있어서 서로의 예언을 검토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홀로 예언하고 혼자 해석해서 이것을 교회에서 집행하게 하는 그러한 독재적인 예언자는 분명히 예언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경고하는 중의 하나입니다. „성령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일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모독하는 자로서 회개함의 길도 없습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있습니다. 문제는 아무도 진짜 성령님이 말씀하시는지, 아니면 내가 생각을 말하는지를 100% 정확하게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생각을 성령님의 말씀이라고 했다면, 내가 성령님의 위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이 성령님 모독죄입니다.

 

정리하자면, 우선 예언은 새로운 가르침을 주는 권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언자, 선지자도 특별히 권위가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성경 말씀의 권위 밑에 있습니다. 모든 예언은 항상 교사(목사)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를 가르치는 성경이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예언이 필요없게 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예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선지자, 목사를 겸직하며, 자신의 예언을 검증해줄 있는 동료 목사가 없다면, 이는 독재자이며 교회를 망치는 거짓선지자입니다. 꿈이나 환상 자체가 어둡고, 인간은 항상 자기 정욕의 지배를 받을 있는 위험이 있으므로 자기 생각을 예언이라고 있기 때문에 예언이라는 말이 나오면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번째 은사는 복음전파자입니다. 신약에서 복음전파자라는 명칭은 이곳 외에는 단지 나옵니다( 21:8; 딤후 4:5). 빌립 집사와 디모데가 복음전도자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교회에 묶인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러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거나, 연약한 교회에 가서 머물면서 도와주면서 직분자를 세우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딤전 3:1 이하; 5:17 이하).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교회의 기초를 놓으면 교회는 병든 상태에서 기형으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위치가 목사나 교사보다 앞선 이유는 그들이 교회를 세워가면서 목사와 교사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병든 교회가 많은 이유는 복음전파자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고 거짓교사들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자들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번째 은사는 목자와 교사입니다. 목자와 교사는 명칭은 둘이지만 사람을 의미합니다(교사 앞에 관사가 없음). 목자와 교사는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다른 명칭을 갖습니다: 인도하는 ( 13:17), 감독( 1:1; 딤전 3:1), 다스리며 권하는 (살전 5:12), 장로( 1:5). 모든 명칭이 같은 직책을 말한다는 것은, 그들의 직무가 같다는 것에서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바울은 장로들에게 양무리의 목자가 되어 그들을 먹이고 감독하라는 명령을 했습니다(벧전 5:1 이하; 20:28). 장로들은 가르칠 있어야 합니다(딤전 5:17; 3:2에서는 이들을 감독이라고 칭했음). 장로와 감독이 같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20:17, 28에서 그들에게 권고한 것에 나타나며, 딤전 3 디도서 1장에 장로와 감독의 자격조건이 같다는 점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목자와 교사, 장로, 인도자, 감독은 모두 같은 직분임을 있습니다.

 

그들의 임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위해 애쓰며, 교회를 다스리고 교인에게 개별적으로 권고 내지는 경고합니다(살전 5:12). 잘못된 가르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책망합니다( 1:9). 교인들의 영혼을 감시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혼에 대해 교사들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13:17). , 목사가 성도를 잘못 인도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벌을 받게 됩니다. 그는 목자처럼 양을 쳐야 하며, 이들을 이끌고 보호하여 교회를 살지게 해야 합니다( 20:28 이하; 벧전 5:1-2). 그러므로 목사의 직책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가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연 누가 그러한 사람이 있습니까?

 

사도 시대에는 사도들과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이 계속 돌아다니면서 교회를 감시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사도와 선지자, 사도들의 제자인 복음전파자들이 없어서 교회를 제대로 감시할 없습니다. 따라서 교사와 목자만 남았는데, 오늘날에는 목사가 이들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특히 목사의 직책이 과거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들을 감시하는 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하는데, 많은 신학교가 이단의 가르침(성서비평) 복지 복음과 이단적 세계관에 열려있으며, 신학교 3 과정으로는 성경을 제대로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엉터리 신학교도 있습니다. 이미 사도 시대에도 이단적 목자들이 있었고,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죽으면 교회에 양을 잡아먹는 이리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를 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그렇다면 오늘날 같은 시대에 오히려 양들을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우는 이리와 같은 목사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또한 한국사람에게 특별히 어려운 것은, 오천 역사에 목사의 직분에 대등한 개념이 없었으므로, 목사의 직분을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위에서 지배하는 자요 피지배자는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던가, 아니면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지도자가 예수님처럼 섬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약 지도자가 섬긴다면, 예수님처럼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양무리를 키워서 나중에 자신이 영광받기 위한 것입니다. 지도자는 양들을 길러서 자신의 왕국을 키워나갑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키우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사람에 의해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자신의 명예를 위한다면, 이것은 양을 먹는 행위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의미하신 목자는, 자신을 온전히 드려서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이러한 목사를 자주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한국인 문화의 특성은, 홀로 주체적으로 존재하면서도 타인과 공동체를 이루어 대등한 관계 속에서 사회생활을 있을 정도의 개인의식이 발달한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체에 예속되어 소속감을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번째 문제이며, 목사와 성도 간에 유대감을 갖고, 목사가 당신들은 귀한 사람입니다. 모두 천당 갑니다 달래주면 그곳에서 만족감을 얻습니다. 교인은 자신에게 안정감과 충만함을 주는 목사를 필요로 하고, 목사는 자신의 명성을 유지시키고 많은 돈을 있는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로 불행하게도 한국 역사에서 목사라는 개념이 없었고 아직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일본강점기 시대에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분들은 틀림없이 예수님을 닮은 좋은 목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전통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목사의 조건과 임무를 말씀드립니다:

  • 목사는 책망당할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자는 목사 자격이 없습니다(딤전 3:2).
  • 돈을 사랑하면 됩니다. 교회를 통해 부자가 되었거나 자신이 교회 돈을 마음대로 있다면 그는 사단의 자식입니다(딤전 3:3). 목사는 교회 돈에 손을 있는 위치에 있어서는 됩니다. 독일과 같은 부자 나라에서도 목사들은 그렇게 흔한 BMW, 벤츠를 타지 않습니다. 그들은 검소합니다.
  • 가장 중요한 조건은 성경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 목양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헌신해야 하며 목양을 통해 이득을 구해서는 됩니다. 예수님의 양들을 사랑하며, 또한 그들을 꾸중할 있어야 합니다. 동정심이 있는 동시에 또한 정의감이 있어야 합니다.
  • 이단적 사상을 구분할 알아야 합니다.
  • 목사는 지배해서는 됩니다. 목사가 수십 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XX 목사의 못된 관행에서 비롯됩니다. 전국 수백 개의 순복음 교회가 영상으로 XX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보았습니다. 이것을 구원파 교회에서 본받았습니다. 온누리 교회의 지점 만들기와 같은 것은 유비에프와 같은 이단들이 하는 짓입니다. 이들은 지배욕이 넘쳐서 아니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며, 이들에게는 지옥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오늘, 목사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지체를 보호하도록 하기 위해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창세부터 준비하시고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수천 역사를 이끄셨습니다. 교회는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산물이자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러한 귀중한 모임에 목자로서의 역할을 잘하도록 목사를 세웁니다. 목사는 이렇게 지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목사 사람에 따라 교회의 흥망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목사의 직무를 배웠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목사를 보내주도록 기도하며, 또한 목사를 살피고 필요하면 격려해야 하겠습니다.

 

 

출처 : 한국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송다니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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