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Frank Crusemann, Bewahrung der Freiheit. 53ff.
안식일 계명은 앞쪽의 하나님과 관련된 계약들과 뒷 부분의 사람들 간의 계약들 그 사이 중 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자리 매김에서 이 안식일 계명은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일까? 십계명이 나오는 두 본문(출 201-17, 신 5,1-21)에서 안식일 계명은 설명과 보충문들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 중앙의 위치를 강조하고 있다. 분명 이런 구조는 포 로기와 그 이후 이 제도를 경험했던 많은 의미들과 관련되어 있다(주1).
여기서 현재 우 리가 갖고 있는 십계명의 두 본문이 생성되고 자라난 것들에 대해 편집사적인 재구성을 하 려는 시도는 가능하지 않다. 그런 시도가 어떤 결과를 주던지 간에 그 모두 아주 심한 가 설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 계명들에 대한 전승사적 문제제기 역시 인정되어질 수 없다. 이 계명(출 20,8 / 신 5,12a) 자체가 유일하게 전문술어(terminus technicus)를 쓰고 있다. 만약 이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만 있다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본문은 분 명하게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매 칠일 마다 정기적으로 일을 하지 말라 는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전체 설명속에 이 제도에 대한 제의적이거나 또는 특별히 종교 적 표현이란 단지 '거룩'이란 말밖에 없다. 또한 예배행위가 필수적이지도 않고, 분명히 그 것이 조건부로 나타나 있지도 않다. 이는 매 칠일마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 날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이다. 분명 십계명 보다 더 오래된 계약법전과 그리고 정기적으로 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출 34장에서는 '안식일'이라는 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주2) "6일간 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제 칠일째는 너는 그만두어야 한다(sbt). 그래야 너의 소와 나귀가 쉬고, 너의 여종의 아들과 나그네가 숨을 돌린다"(출 23,12). "6일간 너는 일해 야 한다, 그러나 제칠일째는 그만 두어야 한다(sbt). 밭갈이 하는때에와 거두어 들이는 때 에 너는 그만 두어야 한다"(sbt; 출 34,21). 이미 십계명에서 말하고 있는 것 그 이전에 이런 정기적인 쉬는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를 유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쉰다는 히브 리어 sbt는 구약성서에서 매우 일상적으로 '그만 두다', '끝내다'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주3 ). 여기서 짧게나마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이 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점은 칠일간의 주기가 달의 주기에 따른 현 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이는 단 하나뿐인 독특한 것이었다. 이를 그 런 주기로 보려는 것(주4)은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지만, 이것이 매우 큰 차이점이다.
비록 오래전에 제기된 것이지만, 명사로 쓰인 '안식일'은 포로기 이전으로 확실시 보이는 본문들에서는 자주 '새달'이라는 단 어와 함께 쓰이고 있고, '안식일'이 들어 있는 그 달은 가장 이른 보름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분명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중요한 제의의 날이라는 것이다(암 8,5; 호 2,13' 사 1,13' 왕하 4,23)(주5). 왕하 16,17절 이하에서 '안식일'은 특히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되어 쓰이고 있 다. 이런 모순된 견해들에 대해서 내 생각으로는 무엇보다도 Gnana Robinson이 설득력있는 이론을 제시 했다고 본다(주6).
그의 주장을 짧게 요약하자면, 매 칠일마다 쉬는 날과 당 시 보름 '안식일'이 포로기때에 하나로 합해졌고, 이 첫 번째 매 칠일마다 쉰다는 제도가 '안 식일'이라는 두 번째의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안식일'은 매 주말의 쉬는 날 로써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기적으로 일하지 않는 날이 이 때에 정착되었 다고는 거의 보기 힘들다(주7). Robinson의 이론을 따르든 그렇지 않던간에, 십계명 스스로 정기적인 쉬는 날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만약 그 이론이 옳다면, 이 계명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앞서 논 의되어 왔던 십계명의 생성시기보다는 더 후대의 것이라는 결론을 받아들여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인 그 내용은 많이 다루어지지 못했다. 위에서 밝혔듯이 십계명내 안식일 계명은 정기적으로 쉬는 날을 명시하고 있다는 것과 아울러 제의 축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것은 못 박아 둘 필요가 있다. 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모든 집안일이 다 관련된다. 종들, 나그네 그리고 가축들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 다. 당시 기술 및 경제적 삶의 상황과 이에 따른 '삶의 표준'이 무엇이었으며, 그리고 이를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었는지를 가능한한 분명하게 그려보아야 한다. 출 34,21은 묘 종과 파종시 농가들이 지킬 계명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계명이 근본적으론 바로 이 시기와 관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전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안식일은 여하튼 수입의 한 부분을 포기해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십계명이나 구약성서 곳곳에 나오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이 생기게 된 것은 분명 이 차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본래적인 의미는 기껏해야 더듬어 만져보는 정도가 될 것이다. Robinson(주8)과 몇 몇 다른 이들은 이에 대해 종교적 휴경의 맥락으로 계약법전 에서 매 칠년마다 요구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6년 동안 너의 땅에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 두어 들여라. 그러나 칠년이 되는 해엔 너는 그것들을 그대로 놔두고 이를 걱정해서는 안 된다. 네 백성중 가난한 자들이 이를 먹게 해야 한다. 거기서 남은 것들은 들짐승들이 먹도 록 해야 한다. 너는 너의 포도원과 올리브 밭도 꼭 그렇게 해야한다"(출 23,10f.). 주마다 쉬는 날을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본문들에서와 마찬 가지로, 여기서도 역시 그것이 어 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기껏해야 윤곽만을 짐작할 뿐이다. 여기 쓰인 동사 smt는 아주 일상적인 것으로 '내버려 두다'의 뜻이다(주9). 이와 매우 유사한 sbt '그만 두 다'와 마찬가지로 그 (사건의)전말이 되고 있는 것,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은 여기 제시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양식을 위한 사회적 장치들은 이미 계약법 전안에 모아진 후기 층의 하나라고 본다. 우선 땅을 제공하는 야웨와 관련된 종교적 형태 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다(주10).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은 매 칠일 그리고 칠년마다 정기적으로 놀려져야만 한다. 하나님은 따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이는 매우 애매해 보이지만, 그 하나 하나가 이런 모든 것들을 넘어 신중히 고려된 것이다.
안식일과 안 식년의 역사에 대한 이러한 사고들은 아직 생태계에 대한 신학적 입장(theo-okologischer Natur)이 정리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가장 오래된 문서로 된 법전들 이전에 구전속에 있는 어떤 한 기폭제 보다 한 술 더 뜬 그 무엇도 이것이 정식화 될 수는 없다. 이는 단지 그 윤곽속에서만 인지될 수 있다. 그를 생성시킨 사회적 원인들은 바로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속에서 그리고 역사의 조명속에서 비춰질 것이다. "너는 6일 동안 일을 해야 한다..." (출 20,9)는 어느 경우에 있어서든지 간에 십계명 전체에 서나, 이 안식일 계명에 있어서나 또는 그밖에 어디에서고 서론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게 아 니다. 여기 '일하다'의 동사 'bd는 노동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동사는 바로 십계명 처음에 나오는 '종살이 하던 집'(Sklavenhaus)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울러 열번째 마지막 계명은 바로 종/노예들에 대해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노예들 뿐 아 니라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런 자농민들까지도 일을 해야한다(mussen und sollen) (출 20,9). 물론 이 말을 긍정적인 직업윤리라든가(루터식의) 그와 비슷한 어떤 식으로도 읽어 서는 안된다. 당시 팔레스틴 농사일이라는건 매우 힘들고 수고와 육체적 고통과 땀을 내야 하는 것들이었다. 낙원 추방 설화는 당시 사람들, 특히 농부들이 했던 일둘이 어떠했었는지 를 가름잡게 한다. 창 3,17이하를 보면 땅/농토는 저주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너는 네 평 생 수고를 해야 그(땅)에게서로부터 (나온 것을) 먹을 수 있다. 그(땅)는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며, 너는 들의 푸성귀를 먹고,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을 것이 다.....(주11). 이상은 농사꾼들의 하루 일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노동이 노예들 이 하는 일과 서로 별개의 것으로 구분되어지지 않는다. 십계명 서론에 있는 종살이 하던 집에서의 해방은 저주 받은 땅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으로 부터의 해방을 말하는게 아니다. 주마다 쉬는 날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이 해방에 속하는 것이다. 쉬라고 요구하는 것은 노예들의 일에 대해 실질적인 반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계명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며, 이는 십계명 서론에서부터 읽어야 한 다. 이 서론은 그 청중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고, 이는 야웨가 선물한 자유의 본 모습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가에 대한 지침과 좋은 본보기를 보여준다. 주마다 쉬는 날엔 자유의 지침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서론에 그 청중으로 나오는 해방된 이들에 대해서는 같은 방식으로 말해 지고 있진 않다. 십계명의 조건부에 해당하는 야웨의 해방의 능력은 여기서 본보기적으로 그리고 스케치 하듯이 이를 실천하고 있지 않는 자들에 게 까지 전체적으로 미치고 있다. 신명기 5장이 바로 서론에 나온 것을 함께 이와 관련지 어 더욱 강조하고 있다는 것(15절)은 매우 주목해야만 한다. 십계명 서론으로부터 그리고 그 테마에 까지 안식일이 그저 우연으로 중심을 차지 하고 있 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연히 긍정적으로 그 틀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비록 언어의 형 식이 마지막에 결정적적일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미 앞에 있는(그리고 뒤에 따라 나오는 다른 방식들에 있어서도) 계명들은 보장된 자유를 보존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안식일 계 명에 와서는 그것들의 실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안식일'에 대한 학문적 논의들을 개략적으로 알아 보려면, G.Robinson의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the Old Testament Sabbath. A Comprehensive Exegetical Approach, Diss. ev.- theol. Hamburg 1975, 6ff, 그리고 N.-E.A. Andreasen, The Old Testamnet Sabbath. A Tradition-Historical Investigation, SBLDS 7, 1972, 1-16을 참고하라. 여기서 거론된 몇몇 참고 문헌들을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Ch.R. Biggs, Exposition and Adoption of the Sabbath Commandment in the Old Testament, ABR 23, 1975, 13-23; F. Golz, Vom biblischen Sinn des Sabbat, Theologische Beitrage 9, 1978, 243-256; W.W. Hallo, New Moons and Sabbaths: A Casestudy in the Contrastive Approach, HUCA 48, 1977, 1-18; Ch. Levin, Der Sturz der Konigin Athaja, SBS 105, 1982 (Exkurs: Der Sabbat, 39-42); N. Lohfink, Freizeit. Arbeitswoche und Sabbat im Alten Testament, in: ders., Unsere großen Worter. Das Alte Testament zu Themen dieser Jahre, Freiburg 1977, 190-208; G.Robinson, The Idea of Rest in the Old Testament and the Search for the Basic Character of Sabbath, ZAW 92, 1980, 32-42; J.H. Tigay, Notes on the Development of the Jewish Week, in: H.L.Ginsberg Volume, EI 14, Jerusalem 1978, 111-121.
2 A. Lemaire의 영향력 있는 논문 'Le Sabbat a l'epoque royale israelite', RB 80, 1973, 161-185임에도 유감스럽게 단지 명사만을 추적함으로 이 본문들에 대해서는 다루어지지 않 았다. Levin (위의 책 41)은 이 본문들을 후기 신명기에 영향을 받은 층으로 본다. 이에 대해서는 J. Halbe, Das Privilegrecht Jahwes Ex 34,10ß26. Gestalt und Wesen. Herkunft und Wirkung in vordeuteronomischer Zeit, FRLANT 114, 1975을 참고하라. 그 본문들에 대해서는 특히 Robinson의 The Origin and Development, 147이하를 참고하라.
3 F. Stolz, Art. sbt aufhoren, ruhen, THAT II, 1976, Sp. 863-869와 Robinson의 The Idea of Rest를 참고하라.
4 특히 W.W. Hallo의 New Moons and Sabbaths를 참고하라. 5 이와 관련해서는 J. Meinhold, Sabbat und Woche im Alten Testament, FRLANT
5, Gottingen 1905과 그밖에 Lemaire의 위의 책과 특히 Robinson의 The Origin and Development 29이하를 참고 하라. Robinson은 왕하 11장에서 이를 14일씩의 주기로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77이하).
6 The Origin and Development, 특히 314이하
7 어려운 점은 Lemaire와 Levin 그리고 다른 이들이 정기적 쉬는 날이 생기게 된 것을 포 로기 또는 그 이후로 잡고 있는 것은 너무 빨리 간과해 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그 연대를 후기로 잡을 만한 물증을 갖고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8 The Origin and Development, 113이하
9 렘 17,4; 삼하 6,6; 신 15,3등을 비교해 보라.
10 이에 대해서는 Robinson의 The Origin and Development, 특히 128 이하를 참고하라.
11 번역 O.H. Steck, Die Paradieserzahlung. Eine Auslegung von Genesis 2,4b-3,24, BSt 60, 1970, 18.
안식일 계명은 앞쪽의 하나님과 관련된 계약들과 뒷 부분의 사람들 간의 계약들 그 사이 중 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자리 매김에서 이 안식일 계명은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일까? 십계명이 나오는 두 본문(출 201-17, 신 5,1-21)에서 안식일 계명은 설명과 보충문들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 중앙의 위치를 강조하고 있다. 분명 이런 구조는 포 로기와 그 이후 이 제도를 경험했던 많은 의미들과 관련되어 있다(주1).
여기서 현재 우 리가 갖고 있는 십계명의 두 본문이 생성되고 자라난 것들에 대해 편집사적인 재구성을 하 려는 시도는 가능하지 않다. 그런 시도가 어떤 결과를 주던지 간에 그 모두 아주 심한 가 설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 계명들에 대한 전승사적 문제제기 역시 인정되어질 수 없다. 이 계명(출 20,8 / 신 5,12a) 자체가 유일하게 전문술어(terminus technicus)를 쓰고 있다. 만약 이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만 있다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본문은 분 명하게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매 칠일 마다 정기적으로 일을 하지 말라 는 것이다. 안식일 계명의 전체 설명속에 이 제도에 대한 제의적이거나 또는 특별히 종교 적 표현이란 단지 '거룩'이란 말밖에 없다. 또한 예배행위가 필수적이지도 않고, 분명히 그 것이 조건부로 나타나 있지도 않다. 이는 매 칠일마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그 날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이다. 분명 십계명 보다 더 오래된 계약법전과 그리고 정기적으로 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출 34장에서는 '안식일'이라는 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주2) "6일간 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제 칠일째는 너는 그만두어야 한다(sbt). 그래야 너의 소와 나귀가 쉬고, 너의 여종의 아들과 나그네가 숨을 돌린다"(출 23,12). "6일간 너는 일해 야 한다, 그러나 제칠일째는 그만 두어야 한다(sbt). 밭갈이 하는때에와 거두어 들이는 때 에 너는 그만 두어야 한다"(sbt; 출 34,21). 이미 십계명에서 말하고 있는 것 그 이전에 이런 정기적인 쉬는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를 유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쉰다는 히브 리어 sbt는 구약성서에서 매우 일상적으로 '그만 두다', '끝내다'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주3 ). 여기서 짧게나마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이 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점은 칠일간의 주기가 달의 주기에 따른 현 상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이는 단 하나뿐인 독특한 것이었다. 이를 그 런 주기로 보려는 것(주4)은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지만, 이것이 매우 큰 차이점이다.
비록 오래전에 제기된 것이지만, 명사로 쓰인 '안식일'은 포로기 이전으로 확실시 보이는 본문들에서는 자주 '새달'이라는 단 어와 함께 쓰이고 있고, '안식일'이 들어 있는 그 달은 가장 이른 보름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분명 정기적으로 돌아오는 중요한 제의의 날이라는 것이다(암 8,5; 호 2,13' 사 1,13' 왕하 4,23)(주5). 왕하 16,17절 이하에서 '안식일'은 특히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되어 쓰이고 있 다. 이런 모순된 견해들에 대해서 내 생각으로는 무엇보다도 Gnana Robinson이 설득력있는 이론을 제시 했다고 본다(주6).
그의 주장을 짧게 요약하자면, 매 칠일마다 쉬는 날과 당 시 보름 '안식일'이 포로기때에 하나로 합해졌고, 이 첫 번째 매 칠일마다 쉰다는 제도가 '안 식일'이라는 두 번째의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안식일'은 매 주말의 쉬는 날 로써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기적으로 일하지 않는 날이 이 때에 정착되었 다고는 거의 보기 힘들다(주7). Robinson의 이론을 따르든 그렇지 않던간에, 십계명 스스로 정기적인 쉬는 날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만약 그 이론이 옳다면, 이 계명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앞서 논 의되어 왔던 십계명의 생성시기보다는 더 후대의 것이라는 결론을 받아들여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인 그 내용은 많이 다루어지지 못했다. 위에서 밝혔듯이 십계명내 안식일 계명은 정기적으로 쉬는 날을 명시하고 있다는 것과 아울러 제의 축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것은 못 박아 둘 필요가 있다. 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모든 집안일이 다 관련된다. 종들, 나그네 그리고 가축들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 다. 당시 기술 및 경제적 삶의 상황과 이에 따른 '삶의 표준'이 무엇이었으며, 그리고 이를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었는지를 가능한한 분명하게 그려보아야 한다. 출 34,21은 묘 종과 파종시 농가들이 지킬 계명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계명이 근본적으론 바로 이 시기와 관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전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안식일은 여하튼 수입의 한 부분을 포기해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십계명이나 구약성서 곳곳에 나오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이 생기게 된 것은 분명 이 차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본래적인 의미는 기껏해야 더듬어 만져보는 정도가 될 것이다. Robinson(주8)과 몇 몇 다른 이들은 이에 대해 종교적 휴경의 맥락으로 계약법전 에서 매 칠년마다 요구되었던 것으로 보았다: "6년 동안 너의 땅에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 두어 들여라. 그러나 칠년이 되는 해엔 너는 그것들을 그대로 놔두고 이를 걱정해서는 안 된다. 네 백성중 가난한 자들이 이를 먹게 해야 한다. 거기서 남은 것들은 들짐승들이 먹도 록 해야 한다. 너는 너의 포도원과 올리브 밭도 꼭 그렇게 해야한다"(출 23,10f.). 주마다 쉬는 날을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본문들에서와 마찬 가지로, 여기서도 역시 그것이 어 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기껏해야 윤곽만을 짐작할 뿐이다. 여기 쓰인 동사 smt는 아주 일상적인 것으로 '내버려 두다'의 뜻이다(주9). 이와 매우 유사한 sbt '그만 두 다'와 마찬가지로 그 (사건의)전말이 되고 있는 것,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은 여기 제시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의 양식을 위한 사회적 장치들은 이미 계약법 전안에 모아진 후기 층의 하나라고 본다. 우선 땅을 제공하는 야웨와 관련된 종교적 형태 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거의 없다(주10).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은 매 칠일 그리고 칠년마다 정기적으로 놀려져야만 한다. 하나님은 따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이는 매우 애매해 보이지만, 그 하나 하나가 이런 모든 것들을 넘어 신중히 고려된 것이다.
안식일과 안 식년의 역사에 대한 이러한 사고들은 아직 생태계에 대한 신학적 입장(theo-okologischer Natur)이 정리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가장 오래된 문서로 된 법전들 이전에 구전속에 있는 어떤 한 기폭제 보다 한 술 더 뜬 그 무엇도 이것이 정식화 될 수는 없다. 이는 단지 그 윤곽속에서만 인지될 수 있다. 그를 생성시킨 사회적 원인들은 바로 본문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속에서 그리고 역사의 조명속에서 비춰질 것이다. "너는 6일 동안 일을 해야 한다..." (출 20,9)는 어느 경우에 있어서든지 간에 십계명 전체에 서나, 이 안식일 계명에 있어서나 또는 그밖에 어디에서고 서론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게 아 니다. 여기 '일하다'의 동사 'bd는 노동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동사는 바로 십계명 처음에 나오는 '종살이 하던 집'(Sklavenhaus)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아울러 열번째 마지막 계명은 바로 종/노예들에 대해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노예들 뿐 아 니라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런 자농민들까지도 일을 해야한다(mussen und sollen) (출 20,9). 물론 이 말을 긍정적인 직업윤리라든가(루터식의) 그와 비슷한 어떤 식으로도 읽어 서는 안된다. 당시 팔레스틴 농사일이라는건 매우 힘들고 수고와 육체적 고통과 땀을 내야 하는 것들이었다. 낙원 추방 설화는 당시 사람들, 특히 농부들이 했던 일둘이 어떠했었는지 를 가름잡게 한다. 창 3,17이하를 보면 땅/농토는 저주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너는 네 평 생 수고를 해야 그(땅)에게서로부터 (나온 것을) 먹을 수 있다. 그(땅)는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며, 너는 들의 푸성귀를 먹고,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을 것이 다.....(주11). 이상은 농사꾼들의 하루 일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노동이 노예들 이 하는 일과 서로 별개의 것으로 구분되어지지 않는다. 십계명 서론에 있는 종살이 하던 집에서의 해방은 저주 받은 땅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으로 부터의 해방을 말하는게 아니다. 주마다 쉬는 날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이 해방에 속하는 것이다. 쉬라고 요구하는 것은 노예들의 일에 대해 실질적인 반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계명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며, 이는 십계명 서론에서부터 읽어야 한 다. 이 서론은 그 청중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고, 이는 야웨가 선물한 자유의 본 모습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 가에 대한 지침과 좋은 본보기를 보여준다. 주마다 쉬는 날엔 자유의 지침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서론에 그 청중으로 나오는 해방된 이들에 대해서는 같은 방식으로 말해 지고 있진 않다. 십계명의 조건부에 해당하는 야웨의 해방의 능력은 여기서 본보기적으로 그리고 스케치 하듯이 이를 실천하고 있지 않는 자들에 게 까지 전체적으로 미치고 있다. 신명기 5장이 바로 서론에 나온 것을 함께 이와 관련지 어 더욱 강조하고 있다는 것(15절)은 매우 주목해야만 한다. 십계명 서론으로부터 그리고 그 테마에 까지 안식일이 그저 우연으로 중심을 차지 하고 있 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연히 긍정적으로 그 틀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비록 언어의 형 식이 마지막에 결정적적일 수 없다고 할지라도). 이미 앞에 있는(그리고 뒤에 따라 나오는 다른 방식들에 있어서도) 계명들은 보장된 자유를 보존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안식일 계 명에 와서는 그것들의 실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 '안식일'에 대한 학문적 논의들을 개략적으로 알아 보려면, G.Robinson의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the Old Testament Sabbath. A Comprehensive Exegetical Approach, Diss. ev.- theol. Hamburg 1975, 6ff, 그리고 N.-E.A. Andreasen, The Old Testamnet Sabbath. A Tradition-Historical Investigation, SBLDS 7, 1972, 1-16을 참고하라. 여기서 거론된 몇몇 참고 문헌들을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Ch.R. Biggs, Exposition and Adoption of the Sabbath Commandment in the Old Testament, ABR 23, 1975, 13-23; F. Golz, Vom biblischen Sinn des Sabbat, Theologische Beitrage 9, 1978, 243-256; W.W. Hallo, New Moons and Sabbaths: A Casestudy in the Contrastive Approach, HUCA 48, 1977, 1-18; Ch. Levin, Der Sturz der Konigin Athaja, SBS 105, 1982 (Exkurs: Der Sabbat, 39-42); N. Lohfink, Freizeit. Arbeitswoche und Sabbat im Alten Testament, in: ders., Unsere großen Worter. Das Alte Testament zu Themen dieser Jahre, Freiburg 1977, 190-208; G.Robinson, The Idea of Rest in the Old Testament and the Search for the Basic Character of Sabbath, ZAW 92, 1980, 32-42; J.H. Tigay, Notes on the Development of the Jewish Week, in: H.L.Ginsberg Volume, EI 14, Jerusalem 1978, 111-121.
2 A. Lemaire의 영향력 있는 논문 'Le Sabbat a l'epoque royale israelite', RB 80, 1973, 161-185임에도 유감스럽게 단지 명사만을 추적함으로 이 본문들에 대해서는 다루어지지 않 았다. Levin (위의 책 41)은 이 본문들을 후기 신명기에 영향을 받은 층으로 본다. 이에 대해서는 J. Halbe, Das Privilegrecht Jahwes Ex 34,10ß26. Gestalt und Wesen. Herkunft und Wirkung in vordeuteronomischer Zeit, FRLANT 114, 1975을 참고하라. 그 본문들에 대해서는 특히 Robinson의 The Origin and Development, 147이하를 참고하라.
3 F. Stolz, Art. sbt aufhoren, ruhen, THAT II, 1976, Sp. 863-869와 Robinson의 The Idea of Rest를 참고하라.
4 특히 W.W. Hallo의 New Moons and Sabbaths를 참고하라. 5 이와 관련해서는 J. Meinhold, Sabbat und Woche im Alten Testament, FRLANT
5, Gottingen 1905과 그밖에 Lemaire의 위의 책과 특히 Robinson의 The Origin and Development 29이하를 참고 하라. Robinson은 왕하 11장에서 이를 14일씩의 주기로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77이하).
6 The Origin and Development, 특히 314이하
7 어려운 점은 Lemaire와 Levin 그리고 다른 이들이 정기적 쉬는 날이 생기게 된 것을 포 로기 또는 그 이후로 잡고 있는 것은 너무 빨리 간과해 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그 연대를 후기로 잡을 만한 물증을 갖고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8 The Origin and Development, 113이하
9 렘 17,4; 삼하 6,6; 신 15,3등을 비교해 보라.
10 이에 대해서는 Robinson의 The Origin and Development, 특히 128 이하를 참고하라.
11 번역 O.H. Steck, Die Paradieserzahlung. Eine Auslegung von Genesis 2,4b-3,24, BSt 60, 1970, 18.
출처 : ※★☆보물1호☆★※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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