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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3.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고뇌(苦惱)

하나님아들 2012. 8. 9. 22:07

23.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고뇌(苦惱)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26:36-47)

 

마태는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께서 괴로워하며 번뇌하는 기도를 설명하였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만찬 집을 마가의 집으로 기록되었는데, 마가의 본명은 요한이다. 마가의 집은 나사로가 관리해 주는 사도 시몬의 소유 중 (막14:3) 하나라고 한다. 이 집에서 마지막 저녁식사 곧 만찬을 끝내고 항상 즐겨 찾으시던 겟세마네라는 산으로 갔는데(요18:1) 그곳은 나사로의 소유지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기드론 골짜기로 흐르는 냇물은 서쪽으로 예루살렘, 동쪽으로 감람산으로 자연스럽게 갈라놓는다. 예루살렘 도성이 내려다보이는 겟세마네는 어둠속에서 혼자서 기도하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잠들어서 고요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건너편 예루살렘 도성은 밝았고 집집마다 유월절 준비로 사람들이 요란하게 웅성대는 풍경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감람산에서는 인류를 살리려는 기도의 피가 흐르고 있으나(눅22:44), 반대로 예루살렘 도성은 인류를 말살시키려는 피의 음모(눅22:2)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일찍이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났을 때 따르는 백성들과 이 시냇물을 건너면서 울었었다(삼하15:23). 그런데 지금 예수께서 따르는 사도들과 함께 이 시냇물을 건너며 우셨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이제는 헤어지자. 나는 기도하기 위해 저 위로 올라간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가면서 너희들은 여기남아 있어라(마26:36-) 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남겨둔 사도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증오와 공포를 버리고 오직 선생을 위해 기도하라는 당부뿐이었다. 이렇게 부탁하는 예수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기는 심정이었으리라. 그런데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잘 있어라’는 말만 남겨두고 그곳을 떠났다. 그때만 해도 남아있을 사도들은 주님께서 남기신 인사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1. 세 사도와 함께 올라가던 예수께서 

 

예수께서 세 제자를 향하여 걸음을 멈추라고 하신 다음에 기도하는 동안만이라도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마26:37) 하였다. 그러나 잠은 자지 말거라. 나는 너희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라고 부탁하였다. 기도해라! 나를 위해 기도해라! 내가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으니까!(마26:38) 라고 하였다.

 

이 장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한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7-38) 라는 말씀에 베드로가 두 사람을 대신하여, “선생님 안심하십시오. 깨어서 기도하겠습니다. 부르기만 하시면 가겠습니다.”라고 장담하였다.

 

베드로가 주님의 의중을 파악했더라면 그러한 말은 안 했을 것이다.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는 베드로의 말을 들은 예수의 마음은 어떠했으랴! 예수께서 사도들에게로 돌아왔으나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시고 “자고들 있느냐, 한 시간을 깨어 있을 수 없었구나. 나는 너희들의 격려와 기도가 필요한데,”(마26:40a) 라면서 잠자는 제자들을 깨우셨다. 세 사람은 소스라치며 일어나 앉았지만 부끄러웠다. 그들의 변명은 저녁에 먹었던 음식과 포도주가 원인이라고 말한다.

 

포도주와 음식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됐습니다. 그것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큰 소리로 기도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베드로의 장담에 예수께서 “그래라. 기도하며 깨어있어라. 너희를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마26:40b)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시 기도처로 돌아갔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 마음에는 지난날의 추억들이 그림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으리라. 그러나 기도와 더불어 추억과 걱정과 의심과 회한이 다시 몰려왔다.

 

그런 것을 떨쳐버리려고 안간힘을 다해 기도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마귀는 더 미혹했다. 도시와 사람, 이름과 사건들이 눈사태모양으로 와르르 몰려왔으리라. 빠르고 불규칙적인 기도는 복음전파 생활상이 눈앞에 떠오르고, 배반자 유다를 다시 데려오는 고민이 있었기에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눅22:42.) 라고 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오겠지, 그들은 정말 충실하다. 그러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두 형제가 있는 곳으로 빨리 달려 내려갔다. 그런데 그들은 꺼져가는 모닥불 곁에서 더 편안하고 깊이 잠들어 있음을 보고서 비로써 그들이 부름에 대답하지 못했음에 대하여 고개를 끄덕이시고 세 사도를 깨워서 주의를 당부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6장 41-42절이라 한다. 세 사도는 왜 잠들었었는가? 하루 종일 돌아다닌 피로와 포도주로 인해 육신에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형상이라고 변명을 했으리라. 불꽃이 높고 환하게 올라가며 예수의 불쌍한 얼굴을 보고 울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슬픈 얼굴이었다.

 

얼굴의 빛이 극도의 피로 속에 사라질 때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는 고통을 느낀다. 그래서 예수의 영혼이 죽도록 슬펐을 것이다. 말씀을 중단하고 한숨을 쉬시고 기도하던 고뇌의 자리로 갔다. 몸을 땅에 엎드리고 큰 소리로 신음하고 흐느끼면서 하늘의 아버지를 부르셨다. 그리고 “이 잔은 너무 씁니다. 저는 마시지 못합니다. 이것은 제 능력에 지나치는 것입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못하겠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나에게서 치워주십시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렇지만 아버지, 만일 아들의 목소리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청하거든 듣지 마십시오. 그러나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만은 기억하십시오. 아들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마26:39~)

 

사탄이 우리를 몹시 괴롭히는 동안에 그에게는 세상의 모든 죄악으로 짓누르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암흑과 재와 쓸개와 두렵고 무서움을 더하게 한다. 무엇보다 더 두렵게 하는 일은 마귀가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고 충동하는 인간의 약함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괴롭히는 마귀의 미혹은 영혼을 질식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어떤 유대관계가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세상이라는 감옥에 산채로 갇히는 것이다.

 

맹렬한 불이 활활 붙어서 우리에게로 떨어지면 어떠한 기도도 되질 않는다. 그래서 자기의 기도가 자신의 결박이 되고 입이 틀어 막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사탄이 던지는 돌에 맞으면 맞을수록 목소리는 잦아들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고민하는 목소리와 눈길은 하늘 문을 열지 못하고 부딪쳐서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가 싫어지고 기도 없는 삶이 계속되는 동안에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으로부터 고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죄악의 생활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고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될 때 그것이 지옥이다.

 

예수께서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아버지께 간구하는 내용은 하실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옮겨지게 하시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를 빼놓지 않으셨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땀구멍에서 나오는 피는 무서운 임종의 고통이 나타났음을 말한다. 속눈썹과 머리카락과 콧수염과 수염이 피에 젖고 피를 뒤집어 쓴 것은 골고다의 처참한 모습을 앞질러 보여줌이라고 한 것이다.

 

피가 관자놀이에서 흘러나오고 피가 목의 정맥에서 나오고 손에서 피가 방울져 떨어짐은 빌라도의 법정에서의 사건을 시작으로 골고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고통을 알림이라고 할 것이다. 예수께서 비틀거리며 당신의 사랑하는 사도들을 찾아갔지만 그들은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싸늘한 밤공기를 막으려고 겉옷으로 뒤집어쓰고 코골며 자는 그들을 부르시지만 소용이 없었다. 너그럽게 베드로를 흔들어 깨울 때 베드로가 후닥닥 일어나 앉았다.(마26:45) 

 

예수께서 잠든 세 제자들에게 와서 요한의 형 야고보를 흔들어 깨왔다. 그런데 잠꼬대라도 하듯이 야고보는 ‘뭐야? 누가 나를 붙잡는 거야?’라면서 눈을 떴다. 예수님께서 ‘아무도 아니다. 내가 너를 불렀다’라고 하신다. 야고보는 예수님에게 ‘아침이 되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 ‘아니다. 이경이 거의 끝나간다’라고 한 다음에 예수께서 다시 야고보를 흔들어 깨우실 때 야고보는 동생이 부르는 줄로 알고 잠꼬대로, ‘요한아, 그 자들이 선생님을 잡아갔니?’라고 말하였고, 예수께서 잠꼬대를 하는 야고보에게 “아직 아니다. 야고보야, 그러나 이제는 일어들 나서 가자. 나를 배반한 자가 가까이 와 있다. 일어나거라! 사탄과 그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지 않음을 보여주어라”(마26:46) 라고 하였다.

 

그때 가룟 사람 유다를 앞세우고 사탄의 무리들은 예수 앞으로 올라왔다(마26:47,요18:3). 사도들은 비명을 지르며 질서가 무너졌다. 사도들은 선생님이 그토록 장담하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으니 수 억만 마귀들이 몰려올지라도 선생님 혼자서 물리쳐 주실 줄 믿었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물리치기는 고사하고 순순히 결박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선생님은 우리를 저버리셨다’라고 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아니 선생님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아니면, ‘그러니 누가 선생님을 믿을 수 있느냐’는 부정적인 말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라고 기록돼 있다.(마26:56,막14:50)

출처 : churchofpraise
글쓴이 : 장죠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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