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은 사람의 사는 목적과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궁구하는 데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다. 여기서는 창세기 2장이 규명하는 인간론에 대해서 감상해 보기로 한다.

<창세기 2장 4~25절의 짜임새>

 
 
 
 
 
 
 
A
B
A
C
B
A
C
A
4
5
6
7
8-9
10-14
15
16-17
18-19
 
내력
연결장치
 
창조
세계
사람
살림
젖은 흙
사람
젖은 흙
생명
에덴
사람
먹을거리
생명나무
선악나무
생명
에덴
사람
살림
지킴
생명나무
선악나무
금령
죽음
사람
남녀
 
 
 
 
 
 
 
 
 


위의 도표를 보면, 창세기 2장의 문단에 동일한 주제나 소재가 반복되는 모양이 눈에 띈다. 같은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면 위의 그림과 같은 연결망이 형성된다.

첫째, 가장 큰 주제는 '창조-세계-에덴-사람-살림-지킴'이라는 주제로서 A로 표시했는데 이것은 2장 전체를 단단히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가장 큰 통주제(overarching theme)다.

둘째, 창 1:2에 제시한 물의 주제가 두 차례 반복되는데 B로 표시했으며(6절, 10-14절) 사람의 창조와 에덴동산의 주제를 앞뒤로 감싸고 있다.

셋째,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주제를 두 차례 반복하는 구절로 C로 표시했으며(8-9절, 16-17절)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며 3장에 펼쳐지는 죄의 주제를 미리 예비한다.

이제부터 위의 세 가지 주제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I. 계속창조-사람-에덴-생명 살림-환경 지킴 : 5, 7, 15, 18-19절

창세기 2장 5절은 사람이 하나님의 동역자로 창조되었다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규명해 준다. 창세기 2장 18-19절은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이유와 그 의미를 논한다. 여기서는 창세기 2장 7절과 15절을 살펴보기로 한다.

인간론 - 사람은 무엇인가?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이 구절에 동사 '야차르'가 쓰였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동사 '바라'와 '아사' 두 가지가 쓰였지만 여기서는 '야차르'가 나온다. 그 뜻은 '조형하다'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다'란 뜻의 동사 '바라'는 말씀의 창조 사역을 가리키고, '행하다/만들다'란 뜻의 동사 '아사'는 말씀을 수행하는 성령의 사역을 가리킨다. 이와는 달리, 2장에서 동사 '야차르'는 구체적인 대상물을 조형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다른 문맥에서 보통 이 동사는 도공이 도자기를 흙으로 빚어 만드는 행위를 가리킨다(사 29:16; 44:9~10, 12; 렘 18:2, 4, 6; 슥 11:13). 우상은 망치로 두드려서 만든다(사 44:12; 합 2:18). 악한 권력자는 법을 이용하여 악행을 꾸민다(짓는다, 시 94:20).

하지만 동사 '야차르'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가리켜서 쓰일 때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창 2:7~8, 19절이다. 동사 '바라'와 '아사'와 함께 사용되어 우주 창조를 가리키거나(사 45:18), 땅 자체를 창조하거나(렘 33:2), 자연 현상을 가리키기도 한다(암 4:13; 시 95:5). 이 동사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기로 마음먹고 있는 경우(왕하 19:25; 사 37:26; 사 46:11; 시 139:16)와 현재의 계획(렘 18:11)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형성하시는 사역을 가리켜 이 동사를 사용하기도 한다(사 43:1, 7, 21; 44:2, 21, 24). 창 2:7에서 이 동사의 동명사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는 도공(陶工)에 비유하는 수사법이다.

7절 상전반절을 음역하면 다음과 같다.

와이체르 야훼 엘로힘 에트-하아담 아파르 민-하아다마
지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  사람을  /   흙으로  /    땅의         

이 문장에서 목적어 '하아담'은 '사람'이란 뜻이다. 사람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때 원문은 '아파르 민-하아다마'인데 이것은 '흙에서 나온 먼지' 내지는 '흙 중에서 가장 고운 흙'을 가리킨다. 이 어구는 '하아담'과 동격을 이룬다. 사람은 '아파르'인데 이것은 흔히 '진토/먼지/dust'라고 번역된다. 앞에는 아무 전치사도 없기 때문에 '아파르'는 '하아담'의 동격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은 본디 흙먼지, 진토(塵土) 내지는 황토였다는 뜻이다. 황토가 흙 중에서도 가장 미세한 입자를 띠기 때문에 '황토'라고 번역해도 좋겠지만, 사람이 덧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다른 성경 구절에서 강조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에 '진토'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개역의 번역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렇게 번역하면 사람이 본디 흙먼지에 불과한 존재였다는 강조점이 다소 약화된다. 사람은 진토에 불과하다는 선언 속에는 사람은 모름지기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들어 있다. 시 104:29이 이 가르침을 노래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루악흐)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아파르)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9)

사람의 육체는 먼지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보는 시편의 노래가 창 2:7을 전제하고 있는 구절이다. 지금까지 사람을 이루고 있는 물질에 대해서 논하였다. 위의 시편 구절에는 '호흡'의 원어가 '루악흐'이다. '루악흐'는 창 1:2에서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창조 사역에서 실행하는 하나님의 힘이요 권능이며 기운이다. 시편 104편의 시인은 창 2:7에 나오는 '니쉬마트' 인간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 그는 '니쉬마트' 대신에 '루악흐'를 사용하였다.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 숨이라는 비물질의 요소가 또한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 '생기'의 원어는 '니쉬마트 하임'인데 '살아있는 숨'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니쉬마트'는 '너샤마'의 연계형이다. '생기'의 원어는 '너샤마'인데 이것은 숨 또는 호흡을 가리킨다.

개역성경은 '생기(生氣)'라고 번역했다. TWOT는 '너샤마'를 '네페쉬'의 동의어로 간주하지만, 내가 보기에, 창 2:7절에는 명백하게 다른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개역성경은 욥 26:4에서 '정신'으로 번역했다(누구의 숨이 너에게서 나오느냐?). 잠 20:27에서 '영혼'으로(야훼의 등불은 사람의 숨이다), 사 2:22에서 '호흡'으로(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사 30:33은 '여호와의 호흡', 삼하 22:16(시 18:15)은 '여호와의 콧김'('미니쉬마트 루악흐 아포', 그의 콧김의 숨결에서부터), 욥 4:9은 '그의 콧김', 욥 37:10은 '하나님의 입김' 등등 다양하게 번역한다. 창 7:22은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콜 아쉘 니쉬마트-루악흐 하임 버아파이브'), 사 57:16은 복수형 '너샤모트'를 사용하는데 '혼'으로 번역하였고 '루악흐'는 '영'으로 번역했다. 수 10:40은 단수형 '하너샤마'를 '호흡'이라 번역했다.

이와 같이 '호흡/입김/콧김/정신/영혼/혼' 등등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다. TWOT도 이 단어를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융통성 있게 번역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한 단어를 너무 다양하게 번역하면 독자들이 개념을 정립할 수 없다. 더구나 '너샤마'는 매우 중요한 인간론의 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 단어를 가능한 일치되도록 번역해 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위의 모든 경우에서 '숨' 내지는 '숨결'이라고 번역해도 의미가 잘 통한다고 본다.

이 단어는 시편 150편 마지막 절에도 나온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너샤마'란 단어가 창 2:7에 쓰인 것은 생명의 원동력은 숨 또는 호흡에 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사람은 본디 흙먼지에 불과한 비천한 존재였으나 그 속에 하나님의 숨이 들어갔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살아나 생명체가 된다. 하나님의 숨을 쉬는 존재, 그가 곧 살아있는 존재이다. 사람은 자신의 숨결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존재이다. 반대로 숨을 쉬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숨을 쉬지 않는 사람은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이다. 창 2:7의 사람 창조의 언급 속에는 생명과 죽음의 개념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 이 정의는 창 2:17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진토로 만드시고 그 코에 자신의 숨을 불어넣었다. 이때 사용된 동사는 '나파크'이다. 이 동사는 어떤 기운을 힘껏 불어넣는 동작을 가리킨다. 풍로로 바람을 불어넣어 불길을 일으키면 솥이나 가마가 끓는다(욥 41:20[히 12]); 렘 1:13). 에너지의 유입으로 생기는 변화를 이 동작은 표현한다. 흙먼지인 사람에게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자 그 존재가 솥이 끓고 가마가 달구어지며 풍로로 불길이 일어나듯 변화를 받는다. 하나님의 숨결이 불자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났다(겔 37:9). '나팍흐' 동사는 하나님의 에너지 운용에 관련되어 사용되는 동사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작은 풍선이나 튜브에 바람을 힘껏 불어넣는 동작을 가리킨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속에 자신의 숨을 힘껏 불어넣으셨다. 하나님의 숨을 빵빵하게 쉬는 사람은 병들지 않고 영생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이 빠져나간 사람은 힘이 들고 병이 들며 일찍 죽고 만다. 이것은 성령과 함께 움직이는 인간의 요소다. 성령이 우주적인 창조의 권능이라면 숨은 인간론에 해당하는 성령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흙이란 물질로 지음을 받았으나 그 속에 있는 숨을 통하여 성령과 함께 공감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몸의 물질을 움직이는 존재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은 성령의 작용으로 생명체가 되었으니 그가 숨을 거두는 날 그는 하늘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이것이 창 2:7의 인간론이다.

흙먼지로 이루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숨이 들어가자 사람은 '생명체'가 되었다. 개역은 '생령', 새번역은 '생명체'라고 번역했는데 히브리어는 '네페쉬 하야'이다. '네페쉬'는 무엇인가? 민 11:6에 이 단어가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나 바란 광야로 나아가서 이제 막 다베라를 지났을 때였다. 이스라엘 중에서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환장하여 불평을 일삼았다. 이스라엘은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덩달아 모세를 원망하며 통곡하였다. 울면서 하는 말이 고기를 먹지 못하여 '우리의 네페쉬가 말랐다'라고 말했다(개역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개역개정-'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새번역-'입맛이 떨어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네페쉬가 사람의 목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말에 목숨이란 말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에 일치한다. '루악흐'는 그리스어로 '프뉴마'로 번역되었고 '네페쉬'는 '프쉬케'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네페쉬는 건강, 생명력, 살아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여기에 형용사 '하야'가 붙어 '살아 있는 목숨'이 되었다. 곧 '생명체'이다.

하나님께서 물에 젖은 흙을 개어서 사람을 조형하셨는데 자신의 모습을 닮도록 지으셨다. 창 2:7은 창 1:27의 '하나님의 형상론'을 전제하고 있다. 비록 문서 가설에 의하면 1장과 2장의 문서가 서로 다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최종 본문의 차원에서 볼 때, 창 2:7은 창 1:27이 없이는 아무래도 불완전해 보인다. 최종 본문을 작성한 오경 저술가는 자료들을 이용하되 그 모든 자료들을 자신의 신학 사상에 맞추어 철저히 개작하였다. 최종 본문을 일관된 작품으로 읽어 보면 다음의 등식이 성립된다.

사람    =    하나님의 형상 =   물+가는 흙+하나님의 숨 =        생령/생명체   
1:26, 아담     창1:26~27         1:2    2:5    1:2=루악흐    1:20, 21, 24 [생물]

이 점을 인식하면서 창 2:7을 사역하자면 아래와 같다.

"야훼 하나님은 사람을 조형하셨다. 본디 사람은 진토였다. 그런데 그분은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힘껏 불어넣으셨다. 그러자 그 사람은 생명체가 되었다."

7절은 6절을 전제하고 있다. 물샘('에드')이 땅에서 솟아 올라와서 흙('아다마')을 적셨고, 그 축축한 흙('아다마')으로 사람이 조형되었다. 사람은 물에 젖은 흙먼지로 빚어졌다. 사람을 구성하는 물질은 흙과 물로 되어 있다는 통찰이 6~7절에 들어 있다. 이것을 진흙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흙먼지와 물로 빚어진 존재에 하나님의 숨결이 없으면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숨결이 사람에게 있어야 살아 있을 수 있다.

물로 사람을 지으신 이유는 성령이 물과 공명하여 물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성령이 물을 움직인다고 규정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사람을 물로 만드신 까닭은 사람이 성령을 따라 성령의 감동으로 살아가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쉬는 숨과 사람의 세포에 들어 있는 물이 모두 성령과 교감하여 움직이는 요소들이다.

따라서 물과 숨결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진 사람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어기며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과 얼마나 원활하게 소통하고 있는지를 일상생활에서 점검하시려고 에덴동산에 금단의 나무 선악과를 나게 하셨다.

7절의 배경에는 5절도 있다. 5절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하나님은 창조를 계속하기 위한 일꾼이 필요하셨다. '땅을 갈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동역자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는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의 뜻에 따라 창조 사역을 계속 진행하는 데 있다. 이러한 인생론은 창 2:15에서 전개된다.

에덴 동산의 의미 I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설하시고'의 히브리어는 '나타'이다. 천막을 친다고 말할 때도 이 동사가 쓰인다. 이 동사는 성경에 70회 사용된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 가장 많이 나온다. 우가릿 문헌에도 나오는데 성경에서는 농사에서 작물을 '심다'라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 그 외에 이 동사는 비유법에 쓰인다.

'에덴의 동산'의 히브리어는 '간-버에덴'이다. '버'는 '~안에'란 뜻의 전치사이다. 명사 '간'은 에덴 지역 안에 있는 정원 또는 동산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 처음 언급되는 경우이기 때문에 정관사가 없다. 직역하자면 '에덴에 있는 한 동산'이 된다. 에덴은 동방의 한 넓은 지역의 명칭이고 동산은 그 에덴 지역에 있는 한 작은 구역이다.

하필 왜 동쪽에 에덴의 동산을 창설했을까? 동쪽에 무슨 특별한 뜻이라도 있는 것일까?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다. 에덴의 동산에 해가 가장 먼저 든다. 하나님은 사람을 동쪽 에덴의 동산에 두셨다. 아담을 이곳에 두는 이유는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 일어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역자로 태어난 인간은 만물 중에서 가장 먼저 깨어나서 피조물을 돌보아야 한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5절은 8절을 전제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다는 15절의 언급은 8절을 반복한 것이다. 6절의 물샘('에드')이 10~14절로 이어진다면, 7~9절의 흐름은 15절로 이어진다. 15절에서 시작된 단락은 17절에서 일단락된다. 18절부터는 여자의 창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개역이 '이끌어 ~ 두셨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는 '라칵흐'와 '누악흐'의 두 가지 동사이다. 이 중에 '누악흐' 동사가 특이하다.

이 동사는 히브리어 성경에 138회 나온다. 이것은 더 이상 공간 이동이 없는 평정 상태를 가리킨다. 방주가 아라랏 산정에 머물렀다(창 8:4). 메뚜기 떼가 날아와 애굽 땅에 머물렀다(출 10:14).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강에 들어가 멈추어 서자 물이 갈라지고 흐름이 멈추어 섰다(수 3:13). 물건을 이동하여 어떤 장소에 안치해 두는 행위를 가리킨다(출 16:34; 민 17:4[히 19]; 신 26:4, 10; 삿 2:23; 삼상 10:25; 사 7:2).

성경은 이 동사를 가지고 네 가지 신학을 펼친다. 죽음의 신학, 영성 신학, 전쟁 신학, 구원 신학이 그것이다. 창 2:15에 사용된 '누악흐'에는 죽어서 평정 상태에 이른다는 죽음의 신학은 없다. 영성 신학으로 보면 욥이 호소했듯이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다/다만 불안만 있는'(욥 3:26) 상태와는 정반대의 상태를 나타낸다. 마음의 평화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자식을 징계하면 그가 부모에게 평안을 안겨다 줄 것이다(잠 29:17). 마음에 고민이 없이 편안한 상태는 구원받은 자의 영성이다(사 14:3, 7; 28:12). 하나님은 영혼의 안식처이시다(시 116:7).

또한 '누악흐' 동사를 사용하여 원수를 무찌르고 승리하여 얻은 평안을 가리키는 전쟁 신학도 표현한다(신 12:10; 수 21:44[히 42]; 삼하 7:1; 민 32:15; 대상 22:9; 에 9:16; 시 125:3 등). 창세기 2장에서는 이러한 전쟁 신학을 펼칠 게재가 못된다.

또한 이 동사를 통해 구원론을 펼친다. 안식일 신학이 이 경우를 대표한다. 창 2:2~3에 '샤바트'가 쓰이지만 출 20:11에는 '누악흐'를 쓴다. 안식일에는 세속의 일을 중단하고(출 31:12~17)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구원의 안식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수 1:13).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참된 안식을 준다(출 33:14). 구원이 곧 참된 안식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참된 안식을 주실 것이다(사 63:14). 창 2:15의 동사 '누악흐'는 에덴동산에 시원의 참된 안식이 있었음을 웅변한다. 사람이 에덴동산에 안착한 것은 곧 모든 안식일의 기원이 되었고 모범이 되었으며 야훼의 날에 이룰 예표가 된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자연스럽게 누리는 것은 마음의 평정과 참된 안식이다. 거기에는 불안, 근심, 초조, 걱정, 고민, 우울, 회의가 사라지고 지극히 화평한 마음으로 누리는 참된 안식이 있을 뿐이다. 15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마음에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셨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서 기필코 에덴동산의 영성 생활을 누리게 된다.

참된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에덴동산에 살면서 흙('아다마')이란 말로 표상되는 창조계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그의 노동력을 흙에 투여해야 한다. '그것을 경작하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러아브다흐'이다. 이 어구는 전치사 '러'와 동사 '아바드'와 인칭대명사 '흐'가 결합된 것이다. 동사 '아바드'는 '섬기다'란 뜻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타자에게 투여하는 그 타자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에 전치사 '러'가 접두에 붙으면 영어의 [to 부정사]가 된다. 여기에 3인칭 여성 대명사 '흐'가 접미사로 붙어 있다. 에덴동산은 중성 내지는 공성 명사이고 흙은 여성 명사다. 그러므로 이 여성 인칭대명사 '흐'는 흙을 가리킨다고 보면 더 좋다. 여성 명사는 '에레츠'(땅)이나 '아다마'(흙)이다. (하지만 공성명사가 여성인칭대명사로 받는 경우도 성서에 많이 나온다.)

위의 2장 5절에서 '아바드 하아다마'란 어구가 나왔기 때문에 15절에서 그 어구를 반복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개역은 5절에서는 '땅을 갈다'라고 번역한 반면, 15절에서는 '그것을 경작하다'라고 번역하여 이 둘 사이의 반복 연관성을 분명하게 표시해 주지 못한다.

동사에 접미사로 붙어 있는 여성 3인칭 대명사는 이어서 나오는 어구 '그것을 지키게 하다'란 어구에도 나온다. 히브리어로 '러샤므라흐'이다. 동사 '샤마르'는 '지키다/보존하다/간직하다/돌보다/유지하다'를 뜻한다. 이 역시 땅을 보존하고 흙을 잘 돌본다는 뜻이다. '샤마르' 동사는 바로 앞에 사용된 '아바드'의 의미를 더욱 보충하며 해설해 주는 역할을 한다.

에덴동산에서 절대 평정의 영성으로 안식을 누리며 생활하면서 사람은 에덴동산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환경을 잘 가꾸고 유지하면서 즐겁게 노동한다.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 노동력은 먹고살려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계를 돌보기 위해서 사용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에 노거수(老巨樹)가 13만 그루 있다고 한다(고규홍). 수령이 500년 된 것이 많다. 이 중에 웅대한 나무들 중에는 사람들이 베어 내지 않고 지키며 가꾸어 온 작품들이 많다. 원시종교에서는 나무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보살피면서 그 나무를 경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 기독교인들이 경제성장을 위하여 자연을 마구 훼손하고 큰 나무들을 베어 내는 일을 자행하였다. 이런 남벌이 자행된다면 기독교는 원시종교보다 더 못한 종교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산업사회가 인간 복지에만 집중하다 보면 자연을 파괴하게 된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패역한 행위가 자행된다.

에덴동산은 국립공원을 잘 보살피는 공원 관리실과 같은 곳이다. 전문가들이 그 관리실에서 근무하면서 공원 전체를 가꾼다. 또 비유하자면 에덴동산은 아파트 단지를 돌보는 관리사무소와 같은 곳이다. 관리사무소에 관리인이 근무하여 고장난 곳을 수리하고 아파트를 쾌적한 공간으로 유지한다. 이 사무실에 하나님께서 그 직원을 위하여 의식주 문제를 풍족하게 해결해 주신다. 에덴동산에 먹기에 좋은 각종 나무들을 나게 하셔서 아담에게 음식을 잔뜩 마련해 주셨다(창 2:9). 이러한 조건으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을 시키신다.

회사가 노동자를 고용하려면 그의 모든 생활을 책임져 주고 그 노동자가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것이 창조론의 근본 취지이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이러한 사상은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로 노동하는 노예들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 복음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현대의 자본주의 문명은 이윤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성경의 창조론을 따르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려면, 우선 기업가가 창조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행보에 열심히 나서야 한다.

일본의 미츠비시 회사가 번창하게 된 배경에는 차별화 마케팅이 있었다는데, 이 회사는 '사원을 가족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다른 회사들과 달리 사장이 모든 사원을 일일이 챙겨주고 가족처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그 결과 회사의 좋은 이미지가 사회에 재고되고 사주는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일반의 통념을 극복하여서 회사를 키우는 유능한 인적 자원이 누적되었다. 미츠비시 회장이 기독인은 아니지만 그는 성경의 말씀에 일치하는 지혜를 소유한 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이랜드라는 기업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사장은 한 유명한 대형교회에서 중진으로 섬기시는 건실한 기독교인이다. 비정규직 정리해고를 단행함으로써 사회의 각계각층으로부터 맹비난을 받았다. 이윤을 위하여 사람을 사용한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다.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하여 회사가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의 생각이다. 회사가 반드시 이윤을 내어 사장의 야망을 채워야한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다.

일하는 사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아야 한다. 에덴동산에 먹을거리를 잔뜩 마련해 주시고 사람에게 일을 시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예배한다.

어느 시인이 묻고 대답하였다. '왜 사냐고 묻거든 웃지요.' 사람이 사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은 모든 생명을 살리고 키우고 보살피며 환경을 보전하는 존재다.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이 생명으로 창조되었다. 왜 사냐고 묻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동역자로 지으셨기에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왜 사느냐고 묻지 않는 이유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사람은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고 말고 할 권리는 사람에게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자살할 권리는 없다. 사람이 사람을 살해할 권리도 없다. 더 나아가 살인자를 사형시킬 권리도 사람에게 없다.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는 독자는 왜 사느냐고 묻지 않는다. 모든 생명의 터전이 되는 흙(=창조계)에 살고 흙(=창조계)에서 일하며 흙(=창조계)을 보존하기 위해 산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의 창조계에서 생명을 번성하게 일구고 키우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존재가 의문시되는 대상이 될 수가 없다.

II. 물과 생명 : 6절, 10-14절

창 1:2에 제시한 물의 주제가 두 차례 반복되는데 B로 표시했으며(6절, 10~14절) 사람의 창조와 에덴동산의 주제를 앞뒤로 감싸고 있다. 사람은 물로 구성되었으며 숨을 통하여 성령과 감응하는 존재다. 이러한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 에덴동산인데 여기서 물이 발원하여 네 줄기 강이 되고 그 강을 따라서 생명체들이 번성하게 된다. 물 주제는 창 1:2의 연속 부분이다.

[창 2:6] 안개만이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안개는 원어가 '에드'다. '에드'는 옛 영역본들에서 mist라고 번역되었지만, 현대의 영역본들이 stream 또는 spring이라고 번역한다. 한글 역본들도 다르다. 개역은 '안개'라고 옮겼고, 새번역은 '땅에서 물이 솟아올라서'라고 옮겼다. 물로 이루어진 사람이 에덴동산에 살면서 생명의 일꾼이 되었다. 이에 에덴동산에서 물이 흘러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물길 따라 생명이 살고, 사람은 물길 따라 생명의 창조 사역을 수행한다. 죄인들은 물을 오염시키지만, 오염된 물에서 생명의 사역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죄의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물을 오염시키지 않는다. 오염된 물을 다시 정화시키는 자가 곧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다.

[창 2:10]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6절은 10절로 잘 통한다. 에덴에서 강이 발원하여 동산을 적셨다는 10절의 진술은 땅에서 물샘('에드')이 터져 올라와 온 흙을 적셨다는 6절의 말을 전제하고 있다. 강('나하르')은 땅 밑에서 올라온 물줄기로 인해서 지표에 흐르게 된 것이다. 태초에는 아직 비가 오지 않았지만(창 2:5), 강이 에덴 지역에서 발원하여 에덴동산을 적셨다. 비는 노아 시대에 가서야 처음으로 내렸다.

10절에 '적시다'는 동사 '샤카'는 6절의 '샤카'를 반복한 것이다. 에덴동산에서부터 강은 네 줄기로 갈라져 온 땅을 적신다. 에덴동산이 네 강들의 발원지이다. 물이 가는 곳마다 수림이 형성되며 황폐한 땅은 사라지고 녹음이 우거진다. 비옥한 땅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 땅에서 모든 생물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강이 흘러나와서 네 근원을 이루었다. 히브리어로는 '아르바아 로쉬임'이다. '아르바아'는 넷이란 뜻이고 '로쉬임'은 머리를 뜻하는 명사 '로쉬'의 복수형이다. 직역하면 '네 개의 머리들’이 된다. 강에는 네 군데의 발원지가 있는데 그 최종 발원지는 에덴이다. 네 강들이 있어서 온 땅의 흙을 적셨다. 이로써 생물이 번성하게 되었다.

흔히들 사대 문명의 발상을 인류 역사의 큰 진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문명의 발상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사대 문명의 발상지에는 큰 강들이 흐르고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네 갈래의 강줄기가 사람과 생물을 번성하며 복되게 살도록 물을 공급했다. 하나님이 주신 강물은 흙에 물을 공급하여 생명이 꽃피어났다. 강은 복의 근원이었다. 복의 근원('로쉬임')은 에덴에서부터 발원하여 사방 네 줄기로 흘러나갔다.

본디 사람이 사는 에덴에서 복이 나오고 사람으로 인해서 생명이 번성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오늘의 타락한 인간이 세계를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상황에서는 상상을 못할 일이다. 사람은 가는 곳마다 자연을 파괴하고 생물을 멸종시키는 무서운 야수로 변신하고 말았다.

[창 2:11~14]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비손강은 하윌라 땅을 휘둘러 감으면서 흘렀다. 하윌라 땅에서 나는 금은 좋았다('토브'). '좋았다'는 말은 그것이 순금이었음을 뜻하기 보다는(개역), 창세기 1장에서 일곱 차례 반복된 '보시기에 좋았다'는 어구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금뿐만이 아니라 베델리엄과 호마노 같은 보석도 났는데 다 보기 좋았다는 말이다.

금은 타락한 사람의 욕심을 자극한다. 금을 지닌 탐욕자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 그러나 하윌라의 금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으며 여기에 어떠한 인간의 탐욕도 배제되어 있다.

첫째 강 비손은 에덴에서 순금과 보석을 실어서 하윌라 땅에 퇴적시켰다. 하나님의 축복이 에덴에서 강물로 흘러서 하윌라 땅을 복되게 만들었다. 하윌라가 어디인지는 모른다. 에덴이 어디인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 이 지명들은 어떤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 기자가 자기 시대를 향하여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사용한 상징이다.

둘째 강 기혼은 구스 온 땅을 둘렀다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구스가 에티오피아를 가리킬 수도 있고, 아니면 미디안 땅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려고 히스기야 왕은 기혼 강에서 물을 끌어 왔다고 보도하는 역대기 저자를 참조하면서(대하 32:30), 창세기 저자는 아마도 예루살렘에 물을 대는 기혼강이 우주적 보편성을 띤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셋째 강 힛데겔은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의 티그리스 강과 비슷하게 일치되는 느낌을 준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원수의 땅이다. 태초에는 피조물들 사이에 적대감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넷째 강 유브라데는 지금의 유프라테스 강을 가리키는 듯하다. 아무튼 이 네 줄기의 강들을 통해서 온 지표에 물이 공급되었음이 강조된다.

이 강들이 흘러가는 곳에 하나님의 계속 창조가 이루어지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상생하는 생명의 세계가 펼쳐진다. 창 2:5에서 땅을 갈 사람이 필요했다는 진술은 생명 문화를 계속 창조과정의 목표로 삼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준다. 영어로 culture는 본디 '땅을 갈다'란 뜻이다. 히브리어로는 '아바드 하아다마'(흙을 섬기다, 창 2:5)인데 이것은 문화를 가리키는 영어와 일치한다. 문화는 피조계인 땅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로 조성해 나가는 생명 운동이다.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네 줄기의 강은 이 땅에 생명의 문화를 꽃피우는 발원지가 되었다. 네 줄기 강들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 문화가 창달하였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상생하는 생명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속 창조의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