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마라나타!!!

[스크랩] 사상적 배경

하나님아들 2013. 3. 16. 17:21

사상적 배경

이단은 사도시대에 이르러 교회가 형성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각기 자신들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추종함으로서 야기됨을 볼 수 있다(고전 1:10~12). 특히 유대 지도자들 중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은 유대주의 전통에서 탈피하기 어려웠고, 희랍이나 로마 철학의 영향을 받은 개종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관념론적인 철학의 범주 안에서 해석하고 끌어넣으려고 시도했다. 결국 유대주의 크리스천들은 구약성경을 중시하는 유대교적 입장에서, 헬라출신 크리스천들은 철학적 사상에 기초한 반유대교적 입장에서 복음을 오해했다(행 15:1~2, 고전 1:22). 따라서 히브리서로부터 유다서에 이르는 ‘유대주의에 대한 경계’와 ‘세속주의에 대한 배격’ 그리고 ‘적그리스도에 대한 대적’이라는 구도는 요한계시록에서 투쟁의 대상이며 이로부터 교회의 승리에 대해 계시하시는 내용이다. 따라서 교회의 주적(主敵)의 사상에 대해 유대인의 입장과 이방인의 입장으로 구분하여 알아본다.

 

① 유대인 입장에서의 복음의 오해

기독교는 내외적인 위험들로부터 교회의 존재의 정당성과 교리의 순수성을 지켜야 했다. 뿐만 아니라 국가 세력으로부터도 끊임없는 박해의 위협을 받았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지식은 경건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토라를 꾸준히 읽으면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이 뒤 따른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좋은 행위와 좋은 생각이 반복되어 습관을 이루고, 좋은 습관은 좋은 성품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여 에스라 이후 유대인의 모임에 있어서 토라 읽기는 중요한 요소가 됐다. 로마 당국이 로마 당국이 소위 율법적 조항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에 참예된다는 기독교를 유대의 한 종파로 로마 당국은 이해하여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라는 특성을 가지고 로마의 우상숭배, 제국의 황제숭배 등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하자 차별화에 나선 순유대인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교회를 위협하는 것은 내부적으로 복음을 오해하는 여러 형태의 출현이었다. 당시에는 많은 메시야 사상과 운동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이 나와서 다윗의 왕조를 일으킬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또 어떤 자들은 묵시 문학적인 인자가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내려와서 사탄의 세력을 무찌르고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메시야 사상은 예언자와 다니엘서에서 발전됐다고 할 수 있다. 메시야 대망의 사상은 헤롯당이 가장 강했고 사두개인이 가장 약했는데 사두개인들도 인정은 했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에세네파의 메시아관은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것이었고, 바리새파는 민중과 생각을 같이하여 메시야만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이상으로만 생각했다. 이와 같이 당시 유대나라에는 민족주의적인 운동이 팽배했으며,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구약에서 언약된 대로 세례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복음전도가 전개됐다(마 3:1~17).

특별히 유대인 기독교인 가운데는 유대교적 입장에서 복음을 오해한 나사렛파와 에비온파 그리고 엘크사이드파인 세 개의 유파로 구분된다. 제베르크(Erich Seeberg, 1888-1944)는 그 가운데 나사렛파를 진정한 유대교파로 보았고 에비온파와 엘크사이드파는 다만 기독교적 유대인이라 구분했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첫째, 기독교 교의를 받아들인 나사렛파(Nasaraei)이다

나사렛파(Nasaraei)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있는 종파로서 유대교 나사렛파와 그리스도교 나사렛파가 있다. 유대교 나사렛파를 나사라이오라고, 그리스도교 나사렛파를 나조라이오니라고 한다. 유대교 나사렛파는 유대교의 이단종파로 규정되었는데, 유대교의 절기와 안식일, 할례 등은 지켰지만, 모세오경을 위조문서로 취급했고 고기를 먹는 것과 희생 제사를 거부했다.

그리스도교 나사렛파는 구약과 신약을 모두 사용했으며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읽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며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다. 그들은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인정하면서 신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켰으나 이방인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았다. 4세기 초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제롬은 베들레헴에 거주하면서 헬라어 성경이 아닌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비교적 팔레스타인의 정보에 정통했을 제롬은 나사렛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들은 교회가 받아들이는 것처럼 예수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믿었으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사렛파를 저주했다. 제롬에 따르면 그들은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유대인이 비록 이전의 위치를 박탈당했으나 교회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유대교의 할라카를 거부하고 예수를 인정함으로서 동족 유대인으로부터 거부당했다.

그러나 나사렛파는 언제나 유대인들이 전통을 포기하고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유대인이 미님이라 부르는 이들은 유대인과 같은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자연스럽게 접촉하곤 했다. 주후 132년 바르 코크바 반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은 원하지만 바르 코크바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문제에 유대인 공동체와 동의할 수 없었다. 이러한 논쟁은 결국 미님이 유대교와 완전히 결별해야 함을 의미했다. 오리겐에 의하면 5대에 걸친 미님은 15만 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예수를 받아들였던 이 미님은 그 이후에는 어떠한 자료에도 등장하지 않은 채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져갔다.

 

둘째, 율법주의적인 이단인 에비온파(Ebionism)이다

이들은 사도 바울을 유대교적 입장에서 계속 반대한 진정한 바리새파형의 단체였다. 그들은 바울을 율법의 배신자로 여겨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기독교에 속하면서도 유대교의 강조점을 보존하고 과장했다. 에비온파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이레나이우스의 저술들(185경)에서 처음 발견되며, 그들은 4세기에도 여전히 존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분명히 팔레스타인을 떠나서 요르단 건너편과 시리아에 정착했으며, 뒤에 소아시아·이집트·로마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레나이우스에 의하면, 에비온파는 창조주인 유일신을 믿었고,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를 메시아라고 가르쳤으며, 마태복음만 사용했고,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집으로 공경했다. 후기 저술가들에 따르면, 어떤 에비온에 의해 설립된 이 종파는 예수가 유대교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메시아가 됐다고 믿었다. 그들 중 일부는 결국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말씀(Logos)의 선재성을 부인했고 3, 4세기경까지 예수를 ‘사람의 아들’과 신명기 18장 15절에 언급된 진정한 ‘예언자’로 지칭했다. 이들은 채식주의, 청빈, 빈번한 정결의식을 포함한 자신들의 교훈을 지키기 위하여 삽입된 것으로 여겨지는 구약성서 구절들을 삭제했고 희생 제사와 유대 성전을 거부했다. 에비온파 교리의 특징은 대부분 사해 사본에 나타난 대로 초기 쿰란 종파의 교훈에 이미 예시되어 있다. 에비온 운동은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 발생했고, 얼마간 유대계 기독교와 관련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이 바울을 배척한 것은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교회의 예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들은 마태복음서조차도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해 「에비온파 복음서」와 「나사렛 복음서」를 포함해 그들 나름대로의 문서를 만들었다.

이들은 예수를 신격화된 인간으로 보아 “예수가 율법을 완전히 지켰으므로 그리스도가 됐다.”라는 바리새적인 기독교도들이었다. A.D. 5세기경에 완전히 소멸되었으나 율법을 중시하고 그리스도를 경시하였다. 에비온파라고 한 것은 창시자가 에비온이라는 설과 히브리어 ‘가난’에 해당되는 ‘아베온’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① 생애: 노바투스 장로의 시기를 받아 교회분열 겪음. 데시우스 황제 박해시 사막으로 피신, 편지로 교회를 지도. 박해 후 재조직

② 저서: 251년 ‘교회의 일치’ 저술...노바티안파의 분열에 대한 반론,바렐리안의 박해시 순교(258)

③ 신학: 바울교리 배척(마태복음만 사용). 율법고수, 할례, 안식일 준수, 금식,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 동정녀 탄생 부인. 인성만 주장. 수세시 직분받음을 거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

④ 비판: 예루살렘 교회의 정죄받음. 정통파 유대교도 배신자로 정죄

 

셋째, 신비주의적인 엘크사이드파이다

100년경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근처에서 일어난 유대교 종파인 엘크사이드파가 있다. 엘크사이드파(The Elkesaites 또는 Elkasaites)는 엘케사이라는 환상 지도자나 그의 이름으로 된 묵시록 제목을 딴 이 종파로서 신지학적 사색(Theosophic Speculation)과 엄격한 금욕주의(asceticism)로 특징지어지는 유대적 기독교 형태를 나타내는 단체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고 예수를 고상한 영 또는 천사라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이상적 아담이 육신을 입은 것으로 보았고 최고의 천사장이라 불렀다. 그들은 도의상 할례받는 일과 안식일 지키는 일을 하였다. 또 마술과 점성술을 하였으며 율법을 지키는데 관한 신비로운 비밀교리가 있었다. 이 운동은 그 시대에 있었던 혼합주의적 흐름에다 자기들의 사상을 적용함으로서 유대적 기독교를 위한 일반적 인정을 받으려는 노력을 했다. 유대교 율법 대부분을 따랐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완전히 물에 잠기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세례 의식을 시행했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다. 빵과 소금으로 일종의 성찬식을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사해(死海) 지역에 살던 유대교의 에세네파와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계 기독교도들 중에서 추종자들을 끌어 모았다. 그 후 220년경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기독교도들을 끌어 모으려는 시도로 그리스도론을 모방한 교리를 받아들였으나, 결국 400년경에 사라졌다.

현재 유대인이면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이들은 스스로를 '예후딤 메시히임'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Messianic Jew’로 번역되는데 그들은 크리스천이라는 단어가 주는 서양 종교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시키면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로 ‘메시아닉 쥬’를 사용한다. 이것은 유대인이면서 예수가 그들의 메시아임을 믿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유대인은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유대인은 민족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개념이다. 만일 어떤 유대인이 자신은 예수를 믿는다고 밝힌다면 유대인 공동체는 그를 유대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기독교로부터 많은 박해를 당해왔다. 물론 그 배후에는 예수라는 인물이 있다. 이렇게 상처받은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란 당연히 혐오스러운 종교로 여겨질 뿐이다(행 9:21). 먼 과거를 들먹이지 않고 가까운 과거만 돌아봐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는 이에 동조하고 침묵을 지킨 서방 교회가 있었다. 이러한 아픈 과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기란 쉽지 않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메시아닉 쥬)이 약 5천여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각 교회는 목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장로가 설교와 예배를 인도한다. 유대인 교회는 우월감을 표시하는 서방 선교사에 대하여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카타콤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였듯이 숨어서 예배를 드리는 형편이다. 이러한 현상으로 미루어 볼 때 이스라엘 교회가 세워질 때 심한 박해를 예상할 수 있다(계 12:1~9).

이러한 유대교 입장에서 복음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랜 유대교의 전통 때문이다(요 6:52~59).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에 교회가 유대주의에 경계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교의 정통적인 종파도 파악돼야 한다. 유대교(Judaism)에는 신정주의로서 크게 세 종파로 되어 있다. 1세기의 팔레스틴 인구는 150~200만 정도였으며, 유대인이 약3/1정도(50~60만) 됐다. 그러나 요세프스(Josephus)에 의하면 유월절 때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유대인의 숫자가 무려 270만이나 되어 당시 예루살렘의 모습이 어떠함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바리새파로서 초자연주의자들이다. 당시 바리새파의 수는 6천명이 약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바리새파의 기원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마카비 전쟁 전후 일어났던 하시디안 ,즉 경건주의자들로 보이며 그것이 바리새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135~105 B.C.)이다. 그 뜻은 (파르쉬 ; 분리하다)란 뜻으로 그들의 배타적 성격을 볼 수 있다. 둘째는 사두개파로서 자연주의자이다. 숫자로는 바리새파보다 소수이나 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이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그 시작은 다윗 당시의 사독(왕상1:32, 34, 38, 45)에게서 부터이며 A.D.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됐다. 셋째는 엣세네파(Essenes)이다. 엣세네파는 예수 생존시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실재하고 있던 유대인 공동체 명칭이다. 어원은 희랍어의 거룩한, 평등주의와 히브리어의 경건한(하시도) 선견자(하지) 예배자(하죤)와 아람어의 경건한(하센, 하싸야)으로도 풀이된다. 이렇게 보면 엣세네파는 하시딤파들 사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이방인들과의 분리주의를 택했다. 이들은 재산의 공유 제도를 실행했고 결혼을 회피하는 등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택했다. 이들은 교리적인 이단이기 보다는 지나치게 금욕생활을 강조하고, 율법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이단시되었으나 학자에 따라서 그 견해가 다르다.

 

-유대교와 기독교, 동방철학사상의 혼합종교

① 경전: 엘카이라는 유대인이 페르샤에서 천사로부터 받았다는 ‘엘 케사이서’

② 신학: 그리스도는 여러 번 육체를 입고 나타났으며 그 처음이 아담이었다. 자기들 교리 믿고 세례받으면 구원. 할레, 안식일 준수, 금식, 예루살렘 향해 기도 등 율법 고수

③ 엘 케사이: 최후 최대 예언자. 유대교와 기독교 완성

④ 영향: 후일 모하멧교 발생에 크게 기여

② 이방인 입장에서의 복음의 오해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군주를 신의 아들로 여겨 숭배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동부 제국가들을 통과하여 승리의 행군을 하게 되자 희랍인 들은 신국이라는 동양적 사상에 접하여 황제를 신으로 여기게 됐다. 군주에 대한 숭배는 우선 예배적인 형태로 표현된 정치적 충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군주 숭배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분리되자 기독교인들은 회당에 참여하지 못 하였고 이로 인하여 황제 숭배를 강요받았고 로마인과 계속 충돌하였으며 콘스탄틴 황제 밑에서 시이저가 그리스도에게 굴복하기 까지 교회는 박해와 고난을 받아야 했다.

이방인 신자를 미혹했던 사상으로는 헬레니즘에 영향을 받은 이원론 사상을 이끈 플라톤주의를 무시할 수 없다. 플라톤주의는 주전 4세기에 살았던 플라톤(Platon)에서 연유된 사상적 체계를 말한다. 그는 쏘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로서 이원론적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 즉 세상의 물질세계는 보이지 않는 이데아(Idea)의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함으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이데아의 세계라고 했다. 따라서 이 변하는 비실재(非實在)의 세계에서 참으로 실재(實在)하는 세계에 이르기 위하여 반성(reflection)과 명상(meditation)과 고행(asceticism)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지식은 구원이며 죄는 무지(無知)라고 했다.

플라톤주의는 新約 聖經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이원론(Dualism)은 1세기에 일어났던 영지주의(Gnosticism)와 3세기 플로티누스(Plotinus)에 의하여 소개된 신플라톤주의에 의해서 반영되고 있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고 본다. 그들에 의하면 구원이란 감각에 의존하는 모든 육적 욕망을 제거하고 영의 생활을 하는데 있으며 그것은 죽을 때 이루어진다고 했다. 신플라톤주의가 플라톤주의와 다른 점은 영적 생활이 지적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자(The Infinte)와의 신비적 연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본 점이다. 그런데 영지주의와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의 성육신(Incarnation) 교리와 조화할 수가 없다. 그것은 육체는 악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오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 세속운동으로의 영지주의(Gnosticism)이다

영지주의는 2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두드러졌던 철학적·종교적 운동으로서 여러 전통 종교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었다. 초대 그리스도교에 가장 심오한 영향을 미쳐 교회법·신조·주교조직이 생겨나게 했다. 영지주의라는 명칭은 그리스어 ‘그노스티코스’(‘그노시스’, 즉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서 유래했다. 영지주의 사상에 반대한 교부들(185년경 이레나이우스, 230년경 히폴리투스, 375년경 에피파니우스)의 글과 영지주의 저작들 자체에 소개되어 있는 영지주의 현상은 신학·윤리학·의식 등과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엄격히 분류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영지주의 분파들은 교육이나 경험적 관찰이 아닌 신적 계시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스런 지식의 구속능력을 공통적으로 강조한 듯 하다.

학자들은 영지주의 세계관의 기원을 이란의 종교적 이원론, 중기 플라톤 철학자들의 알레고리적 이원론, 특정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의 묵시적 사상에서 찾는다. 이집트인들과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사상에서 기원을 찾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적 종교혼합주의가 충분히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스도교가 등장하고 난 다음이었다. 최초의 영지주의자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몬 마구스이다. 그는 악이 신성의 내적 분열에서 생겼다는 영지주의의 근본 개념을 소개한 1세기 유대교 이단자였다. 그러나 시몬의 '그노시스'는 〈신약성서〉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영지주의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유대교와 유일신교에 머물러 있었다. 이원론적인 관점은 영지주의가 널리 보급된 이후 헬레니즘 세계에서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확립되었으며,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하위의 신 데미우르고스(조물주)가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주장을 빌려왔다. 이러한 주장은 「요한의 외경 Apocryphon of John」(2세기초), 1940년대에 상(上)이집트 나지 함마디 근처에서 발견된 다른 문서들(통속적인 ‘영지’를 다루었음), 3세기 콥트어 영지주의 저서 「신앙의 지혜 Pistis Sophia」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렌티누스, 바실리데스와 이들 학파가 제시한 지적인 ‘영지’론은 통속적인 '영지'를 전제로 삼았지만, 그것은 철저히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로 채색되었으며, 때로는 중기 플라톤주의의 견해에 매우 가까웠다. 동방의 영지주의는 조금 다른 과정을 겪었다. 전통적인 이란 종교의 영향을 받은 반(半)영지주의적인 마니교는 영혼과 물질의 절대적인 우주적 이원론을 발전시켰다.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의 무의식적 자아는 신성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행히도 타락했기 때문에 진정한 본질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에 던져졌다.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계시를 통해서 자신의 기원·본질·초월적인 운명을 알게 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이성의 힘을 가지고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철학적 계몽과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교 계시와도 구분되어야 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며, 성서에 의해서 전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의 신비에 대한 직관이다. 영지주의자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이름이나 설명을 초월하는 심연과 침묵이고, 절대자이며, '플레로마', 즉 빛의 영역을 형성하는 선한 영들의 원천이다. 2세기 영지주의 분파들은 히브리와 그리스도교 종교 저서들을 사용하면서도, 영지주의의 의미들을 그것들과 구분하기 위해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영지주의 집단은 학파를 구성하여 권위 있는 가르침들을 전수하고, 해석하며 비밀을 보존한 듯하다. 의식도 분파에 따라 달랐다.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은 대체로 영지주의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조를 작성하고,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확정하고, 주교(감독)의 권위를 강조한 것은 영지주의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신학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사상체계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체계화되도록 자극했다. 그 외에도 그들은 자유·구속·은총 등 그리스도교 저자들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중요한 주제들을 활성화시켰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은 그가 초기에 마니교도로서 경험한 것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영지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아 제시된 이론인 가현설(假顯說, Docetism)을 보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있을 때 유령 같은 존재였을 뿐 실제로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신약성경 중 요한복음(요 4:1~3, 7) 등에서 가현설의 초기형태가 나타나지만 가현설이 더욱 발전한 것은 영지주의의 중요한 교리적 입장으로서이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발생한 이원론적 종교체계로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며, 구원은 비의적 지식, 즉 영지(靈智 Gnosis)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이단은 물질은 불완전하고 본질적으로 불순하다는 사상에서 출발했다. 철저한 가현설 신봉자들은 그리스도가 물질(육체) 없이 태어났으며, 생전에 그가 겪은 고통, 십자가 수난은 모두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부정했다. 온건한 가현설 신봉자들은 그리스도가 공기(에테르) 같고 천상의 몸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리스도가 실제로 육체로 살고 수난 당했는가 하는 문제에서만 정통신앙과 의견을 달리한다. 이 가현설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범죄를 용인하여 교회 속에 육욕과 방종을 끌어 들여 성적 불륜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부패와 타락을 끌어들였다(유1:4). 가현설은 모든 영지주의 적대자들, 특히 2세기 안티오크의 주교 이그나티우스의 공격을 받았다.

영지주의는 150년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었으나 점차 그 정도가 약화됐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악과 하느님 사이에는 전면적인 대립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구원이란 무능하고도 악한 세력들에서 파생된 피조세계의 혼돈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즉 선택받은 사람들이 소외된 수인(囚人)들처럼 살아가는 이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원의 방법은 선택받은 사람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영혼이 지복(至福)의 본향으로 올라가는 것을 가로막는 적대적인 세력들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를 터득하는 것이었다. 영지주의는 하느님이 역사에 나타났다는 개념을 파괴했다. 영지주의의 염세주의와 이원론(물질은 악한 것, 정신은 선한 것으로 생각)은 도덕적인 일관성 없이 금욕주의와 자유방임주의 경향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영지주의는 반이성적(反理性的)인 종교사상으로서 완전히 초월적인 계시만을 주장하여 창조된 세계 안에 자연적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게 하였으며, 개인의 책임이 설 자리를 없애버렸다. 정통파 신학자들과 3세기의 이교(異敎) 철학자 플로티노스는 영지주의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짓되고 위험한 미신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배척했다.

정통신앙은 사도들에게 근거를 둔 교회들이 확인해준 전승을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단자들은 이 주장에 맞서 열광적인 예언에 호소함으로써 훨씬 더 위험한 대응했다. AD 172년경 몬타누스와 2명의 여성 예언자들이 프리기아에서 일어난 준오순절(準五旬節)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은 세계종말의 임박성을 거듭 주장하였고, 몬타누스는 성부의 시대(구약시대), 성자의 시대(신약시대), 예언자 몬타누스가 예고하는 성령의 시대가 있다고 가르쳤다. 몬타누스주의로 개종한 중요한 인물은 카르타고의 라틴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이다. 〈신약성서〉를 보완해야 한다는 몬타누스파의 주장은 전교회적으로 거부됐다.

영지주의에 대한 기원은 순교자 저스틴(Justin)에 따르면 시몬은 사마리아의 깃타(Gitta) 출신으로서 애굽에 건너가 철학과 마술을 배웠던 사람이다. 그래서 시몬에게 '마술사'를 의미하는 ‘마구스’(Magus)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또한 ‘이레니우스’(Irenaeus)의 주장에 따르면 시몬은 ‘영지주의’(Gnosticism)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또 외경 ‘베드로행전’에서는 시몬이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거짓된 가르침으로 타락시킨 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적으로 고증될 수 없지만 시몬이 초대 교회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영지주의(Gnosticism)란 이름 그대로 헬라어의 지식을 뜻하는 그노시스(γνωσισ)란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신비, 초자연적인 지식을 뜻한다. 당시 유행하는 신비주의 점성술, 마술, 철학, 페르시아의 이원론적 우주론의 혼합주의에 기독교 교리를 혼합해서 종교철학을 구성하려고 했다. 지식적 귀족주의로 기독교를 경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난, 부활을 부인했다. 구약성서의 유대교적인 것을 배격하고 금욕주의를 강조하고 방랑생활을 했다. 이는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왜 죄가 있으며 재난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어떻게 해야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구약과 신약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최고의 神(Diety)은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여 차선의 신을 만들고 또 차선의 신은 그 다음을 만들고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과 은총은 점점 줄어들어서 최하급 神(Demiurge)이 악한 물질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물질은 악하므로 물질적 인간은 다 멸망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 인간을 가진 인간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예수는 인간이 되지 않고 영적으로만 이 세상에 왔다가 갔다하는 소위 가현설(Docetism_을 주장했다. 구원은 물질의 속박을 벗어나 최고의 神께 돌아가는 것이고 이는 신비한 지식의 소유나 영적 고통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사상에 대해 바울은 골로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적하고 있다(골2:821).

영지주의는 사색적 운동이며 혼합주의운동이며 더불어 통속적인 세속운동이다. 세속주의를 배격해야 할 교회의 투쟁의 대상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상직적인 의식이나, 신비로운 행사, 마술적 신조를 가르치는 등의 특별한 교제를 통해서 일반적인 우주론을 보급하려고 했다. 이런 교제들이 처음 시작됐을 때는 이상한 신조나 의식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들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대항하여 필요하고 효과적인 보호책이 되며, 내세에 받을 축복에 접근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그들의 소개는 복음을 종교철학과 신비적 지혜로 변형하려는 한 시도였다. 드러나 영지주의는 그 성격에 있어서 성도라고 주장했다. 할 수만 있으면 어느 때든지 예수의 말씀을 비유적으로 해석했으며, 사도시대로부터 전승돼 온 신비적 전설에 마음이 끌렸다. 많은 사람들은 그 교훈을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라고 하여 받아들였다.

① 이원론: 세계는 물질계(악한, 조물주가 다스림)+영계(선한, 하나님이 다스림)

② 가현설(Docetism): 예수의 육체탄생 부인, 단지 육체를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

③ 유출설: 이 세상은 최고 존재인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하급 Aeon에 의해 만들어짐

④ 반유대주의: 유대교는 사탄의 종교이다.

⑤ 영지주의: 구원은 믿음올 받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하여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간다.

⑥ 금욕주의, 구약 부인, 알레고리 해석

 

둘째, 니골라를 추종하던 무리인 니골라당(Nicolaitans)이 있다

Nicolaitans란 헬라어 ‘니카오’(지배하다)라는 말과 ‘라오스’(평범한 사람)이라는 말이 결합된 말로서 ‘백성들을 지배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가톨릭처럼 성직자와 평신도 계급을 나누어 성직자가 평신도를 지배하는 교권주의를 말한다. 대부분 인정을 받는대로 교부 이레나이우스는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집사 니골라가 이 당을 창설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에베소교회에 있었고 ‘니콜라스’를 추종했는데 무절제하고 방종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이미 예수께서 책망하신 미워하는 행위를 하는 자들이다(마 23:).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들의 교훈은 이스라엘로 우상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한 발람의 교훈과 비슷했다. 당시 버가모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는데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고 또 행음하게” 한 것처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했다(계 2:14)

 

셋째, 시몬 마구스(Simon Magus)에 의한 ‘사마리아인’이 있다

시몬은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이다. 마구니(magus)’란 마술사라는 뜻인데,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기 직전의 사마리아에서 마술을 잘하여 민중을 매혹시켰다. 그러나 필립보가 복음을 전하러 들어오자, 그 세력을 잃고 스스로 필립보에게 찾아와 세례를 받았다. 그는 요한과 베드로에게, 세례를 주는 일과 성령(聖靈)의 능력을 돈으로 살 수 없겠는가고 물었다가 거절당했다(행 8:9~24). 이 일로 연유해 성직매매(聖職賣買)를 의미하는 ‘시모니(Simony)’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 후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41~54) 밑에서 스스로 인간 형태를 가진 신이라고 주장하여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작품에 등장하는데 그가 후에 ‘사마리아인들’이라는 단체를 세웠다고 한다. 이 시몬파(派)는 그노시스주의라는 이단적 종파로 발전하여 4세기까지 존속했다.

 

넷째, 정신적 쾌락을 강조한 에피큐리안주의(Epicureanism)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던 또 다른 철학자는 에피큐러스 (Epicurus, B.C. 342-270경)였다. 에피큐르는 향학이라는 것을 인간이 참된 지혜를 얻어 모든 생활 속에서 옳은 것을 찾아 행할 수 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인간적인 건전함의 상태로 이해됐다. 에피큐르는 신의 존재는 부인하지 않았으나 신들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므로 인간이 신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에피큐르 철학자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때문에 세상에서의 향락적 쾌락을 추구했다. 퀴니크의 철학자들은 에피큐르 철학자와 달리 삶의 쾌락을 경멸했다.

따라서 에피큐리안주의란 B.C. 341-270에 살았던 에피큐러스란 사람의 사상적 체계를 말한다. 에피큐러스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작품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에피큐러스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계는 원자가 유한히 결합되어진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에피큐러스의 우주관은 현대의 무신론적 물질주의 진화론과 유사하다. 그에 의하면 이 세계는 목적도 절대선도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최고의 선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쾌락"이라고 불렀다. 그가 말한 "쾌락"은 감각적 혹은 개인적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고린도 교회에 일부 부류가 "먹고 마시자"고 했는데, 이것은 에피큐리오 철학(Epicurean philosophy), 곧 쾌락주의 철학의 표어(標語)이다(사 22:13 , 고전 15:32). 에피큐리안주의에 대해서 바울이 아래오바고에서 설교할 때 언급했다(행 17:18).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1세기 특히 중기 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은 무서운 죽음의 회오리바람을 연상케 한다. 로마 市의 대화재는 그 防火의 주범을 알 수 없는 채 화살이 기독교인들에게 돌려졌다. 극히 정신병적인 증세를 보인 네로 황제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방화의 책임을 돌리려 하자 역(逆)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참혹한 대박해를 인하여 종말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또한 유대전쟁(주후 66-70년)으로 인하여 베스바시안 황제의 특명을 받은 아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포위하여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굶어 죽게 만들었고,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상황에서 또 한번의 죽음의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은 간절히 주의 재림을 고대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필요한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원하게 됐다.

 

다섯째, 이성 중심적인 스토아 철학(Stoicism)이다

사도행전에서 에피큐리안주의와 함께 ‘스도이고’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스토아 철학이다(행 17:18). 이 스토아 철학은 지중해 동부에 있는 키프러스의 제노(340~265 B.C)에 의해 기초가 세워졌다. 그는 인격적 신(神)을 인정치 않았으나 우주가 절대이성(Absolut Reason)에 의해 지배된다고 했다. 그는 이성에 일치된 생활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하면서 개인적 감정은 실체가 없는 해로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감정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완전한 자기 절제를 목적으로 내세웠다.

스토아 철학자들 역시 쾌락추구의 삶을 거부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인생의 과제를 배워 알게 하는 스토아 윤리의 실제적 방향은 퀴니크 학파의 이론과 관련을 맺고 있다. 스토아 사상은 헬라주의적 유대교에서도 받아 들여졌다. 이외에도 고대 후기의 정신적 생활에 영향을 끼친 다를 철학 학파에 피타고라스 철학파와 플라톤의 세계관이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금욕적인 생활을 견지하며 회개를 촉구했다. 플라톤의 세계관 중 신론은 유대인에게 성서 텍스트로 채택됐다.

이 스토아 철학은 고상하기는 하지만 기독교와는 다르다. 여기엔 자유의지나 악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모든 악은 선의 일부에 불과함으로 그들에게는 개혁이나 변화가 배재된다. 그들의 신(神)은 비인격적(非人格的) 존재임으로 인간의 일에 인격적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윤리관이 많은 점에서 기독교의 윤리관과 유사하지만 그들의 전제와 실천은 서로 다르다.

 

여섯째, 냉소주의(Cynicism)와 회의주의(Scepticism)이다

냉소주의(冷笑主義)는 플라톤의 철학과 같이 쏘크라테스의 가르침에서 나왔다. 쏘크라테스는 단순한 욕구를 가진 사람만이 어려운 역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냉소주의자들은 최고의 덕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욕망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들은 모든 표준과 법을 포기하고 완전히 개인주의자가 된다.

최초의 회의주의자는 엘리스의 피로(Pyrrho of Elis, B.C. 365~295)이다. 그들은 경험에 의지하기 때문에 궁극적 표준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경험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모든 판단은 상대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 가벼운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겁게 느끼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회의주의자들의 논리적 면은 완전한 지적 마비로 끝난다. 아무튼 냉소주의나 회의주의는 표준을 포기하는데서 시작한다. 전자는 윤리를 다루었고 후자는 지성(知性)을 다루었다. 기독교가 이들과 크게 다른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절대적 표준이라고 믿는 점이다.

 

일곱째, 이성 중심적인 말시온(Marcion)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메네스가 13년 임기를 채운 뒤 마르쿠스(Marcus)가 감독이 되어 10년 동안 활동하다가 사망했고 그 후 셀라딘(Celadin)이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다스리게 됐다. 마르쿠스라는 이단자는 흑해 남쪽 본도 출신으로서 마술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구원에 관심이 많았는데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순복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믿음으로 인간은 구원을 얻는데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것이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에 나타나 있다고 주장했다. 자기의 사상을 구축하기 위하여 유대적 요소를 제거하고 재편집했다. 구약의 악신은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과 같지 않다. 구약의 신은 피흘리는 것을 좋아하는 신, 전쟁의 신, 복수의 신, 무자비한 율법의 신이다. 진정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데,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현(Docetism)적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마르쿠스는 초대교회의 문서편집자였다. 바울서신을 수집하고 누가복음을 첨가하여 순복음(Primitive Gospel)이라고 했다. 문서수집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특징으로는 물체소유 일체 부인하고 부부생활로 인한 자녀생산이 곧 물질생산임으로 금지했다. 순결과 독신주의 강조하고 순교를 강조했다. 148년에 교회로부터 축출당하고 5세기 말까지 존재하다가 없어졌다.

이레니우스가 『이단을 반박함』 제 1권에서 셀라딘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셀라딘은 시몬의 추종자들로부터 선동을 받은 사람으로서 히기누스가 로마교회의 제 9대 감독으로 있을 때, 얼마동안 로마에 머물렀다. 그는 율법과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후자는 계시되어졌으나 전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전자는 義로웠으나 후자는 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셀라딘의 뒤를 계승한 폰투스(Pontus) 출신의 말시온(Marcion)은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여 자신의 무리를 확장했다.

① 말시온이 로마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와(144)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

② 영지주의 영향받음: 물질죄악시, 금욕주의적, 구약 부인

③ 사도 바울 존경: 이신득의. 철학, 율법배격, 복음만 주장

④ 신구약 대립, 반유대주의 사상, 정경형성(바울서신 10+누가복음)

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강조, 성육신, 육체적 죽음 의심, 영적 구원만 강조

 

여덟째, 신비주의적인 몬타누스(Montanus)이다

브리기아의 미시 안에 아르다바(Ardaba)라고 불리는 마을에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새로 개종했다. 그는 영적으로 선두에 서고 싶은 과도한 욕망에 그만 영적인 황홀경에 들어갔고, 점차 광적이며 불규칙한 엑스타시에 들어가 헛소리를 하고 이상한 일들을 이야기 하며, 초대시대부터 보존되어 전해진바 교회 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관례와는 반대되는 것들을 전파했다.

이를 듣던 어떤 이들은 몹시 분노하여 그가 악마와 미혹의 영을 받았으며 사람들을 동요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꾸짖었다. 이들 중 어떤 추종자들은 마치 성령과 은사를 받아 기쁨이 충만한 듯이 행동하였으며 주님이 주신 교훈을 망각하고서 이 교활하고, 아첨하며 유혹하는 영에 도전하다가 자기들이 오히려 그의 유혹에 넘어가 “더 이상 침묵하도록” 제지하지 못하게 됐다.

이레니우스는 몬타누스와 그의 두 여인들 즉, 프리스킬라와 막시밀라의 시대로부터 지껄이기 시작한 이들 중에 악인들에게 박해받아 죽은 자가 없다고 한다. 이 새로운 교사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결혼을 취소하라고 가르치며, 금식하는 법률을 부과하였고, 온 세상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브리기아의 작은 마을 페푸쟈(Pepuza)을 예루살렘이라고 불렀다. 그는 돈을 징수하는 사람을 임명했으며 제물이라는 미명하에 선물을 확보하기 위한 술책을 강구했다.

그는 자기의 교리를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급료를 지불하여 그 교리를 더욱 튼튼하게 성장시켰다. 결국 몬타누스와 막시밀라는 스스로 목매어 유다 같은 죽음으로 生을 마쳤다고 한다. 데오도투스(Theodotus)는 그들의 예언에 현혹된 최초의 인물이며 그 망상의 후견인이 되어 자신이 언젠가 하늘로 들려 올려 가리라고 생각하였고, 또 황홀경에 빠져 자신을 미혹의 영에 내어주었던 그는 허공에 내어던져 비참하게 죽었다.

① 기원: 156년 브루기아의 몬타누스에 의해서 시작. 몬타누스는 시벌레의 신비종교 사제였으나 기독교로 전향, 성령으로 자처, 성령의 체험적 은사 강조

② 교리: 구교와 일치함(성서는 전부 정경이다)

③ 목적: 원시 기독교의 부흥

④ 주장

ⓐ 예언, 방언고조

ⓑ 신앙보다 지식을 강조하는 사상을 반대(그노시스주의 반대)

ⓒ 엄격한 규율실시, 천년왕국설

ⓓ 교회의 계급제도 반대, 만인제사주의

ⓔ 금욕주의, 금식, 고행 장려, 재혼 금지

ⓕ 세례 후 범죄는 무서운 것이라고 강조

⑤ 역사적 의의(평가)

ⓐ 합리주의, 신앙중심주의를 부르짖어 오늘날 신비주의 운동에 유사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 종말을 예언, 신자가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함은 좋은 일이다.

ⓒ 이 운동 번창을 우려하여 소아시아 감독들이 여러 번 모여 행동 통일하여 논박한 사실로 교회의의 최초 모임이 이루어졌다.

ⓓ 역대 시비주의 운동의 표제가 되었으며 현대 신비주의운동을 진단하는 자료가 된다.

ⓔ 방언, 예언을 중히 여김으로 정경 결정을 촉구하고 성경 권위에 대한 자극제가 되었다.

ⓕ 금욕주의, 비타협주의는 후대 분파주의를 조성, 수도원 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 독단주의는 결국 몰락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출처 : 메타-성경신학연구회
글쓴이 : 펄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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