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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하나님아들 2013. 3. 16. 17:44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교회시대의 인맞은 종들)

 

1.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에 대한 기초적 견해  __  81

1)  이긴자 에 대한 어원

2)  이기는 자 를  이긴자 라고 하는 이유

3) 영적 싸움의 대상

(1) 마귀  (2) 세상   (3) 거칠고 사나운 환경  

 

2.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

1)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__  96

(1) 성전의 기둥이 됨  

(2)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 주심  

(3)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해 주심

 【중요사항 1】 시온산에 대한 견해  

 【중요사항 2】 세 종류의 익은 열매  

 

2)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__  104

(1)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심  

(2) 새벽별을 주심  

 【중요사항】 신약성경에 나온 네 종류의 만국  

 

3)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__  107

(1) 보좌에 앉게 하심  

 【참고사항 124장로에 대한 성경적 견해  

 【참고사항 2】 천년왕국에 대한 성경적 견해

 

4)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__  116

(1) 생명과를 먹게 하심

 【중요사항 1】 하나님의 낙원에 대한 견해  

 【중요사항 2】 생명과에 대한 견해    

 【중요사항 3】 로마서 7장과 8장 해설  

 【중요사항 4】 성경에 나온 생명과를 먹은 성도들에 대한 다른 표현들

 

5)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__  138

(1) 흰옷을 입혀 주심  

(2)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으심

 【중요사항 1】 계시록에 나온 흰옷에 대한 말씀들

 【중요사항 2】 계시록에 나온 세 가지 옷에 대한 견해

 

6)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__  154

(1) 감추었던 만나를 주심  

(2) 새 이름이 기록된 흰돌을 주심

 

7)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__  156

(1)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심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 광야의 길을 통과하면서 연단을 받고 정결하게 된 성도들, 즉 익은 열매가 된 성도들은 대환난을 면제받고 휴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성도들을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서는  이기는 자들 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구약시대나 대환난 때의 성도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것이므로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이라고 한 것이다.

 

  이 과목에서는 이러한 성도들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먼저 이긴자들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얻기 위하여 성경적 어원을 알아보고,  이기는 자 를  이긴자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알아본다. 특히 모형적 진리를 통하여 광야에서 여러 차례의 연단을 받고 이긴자가 되는 과정에 대해 연구한다. 또한 이긴자들은 영적으로 무엇과 싸워서 이겼는지 성경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다음으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온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분석해 본다. 이 과목을 통해서 우리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싸워 이겨야 할 대상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해함으로써 영적 생활의 목표와 방향을 정립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영적인 축복에 대하여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을  교회시대의 인맞은 종들 이라고 한 것은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온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을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네 천사가 바람을 붙잡고 있는 기간  즉  교회시대  동안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종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진리에 대해서는 『교회시대의 이긴자들』과 『요한계시록 강해』를 연구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1.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에 대한 기초적 견해

 

1)  이긴자 에 대한 어원

 

  창세기 27장부터 32장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긴자 에 대한 성경적 유래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야곱이 이긴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야곱은 형 에서가 가지고 있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빼앗았고, 그 후에 아버지 이삭을 속여가면서 장자가 받아야 할 축복기도를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야곱은 에서와 심각한 갈등이 생겼고 결국 집을 떠나 밧단아람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광야를 통과하는 중에 야곱은 벧엘이라는 곳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야곱은 땅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까지 연결된 사닥다리를 보았고 그곳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신비체험을 통하여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외삼촌댁에서 지내는 가운데도 언제나 신앙을 잃지 않고 생활하게 되었다.

또한 야곱은 수많은 시험과 고통을 받으면서 열한 아들과 많은 육축과 재물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외삼촌의 집에서 살아온지 20년이 되었을 때 그동안 수고하여 얻은 가족들과 재물과 육축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떠나게 되었다. 도중에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쫓겨 매우 위급한 형편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얍복강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때 20년 전부터 원한을 품고 있었던 형 에서가 400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야곱은 두려움과 공포심 때문에 가족들로 하여금 모든 소유를 가지고 먼저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혼자만 남아서 필사적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그때 시험하기 위하여 갑자기 나타난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면서 천사를 이기고 얻게 된 새 이름이 이스라엘이다. 여기에서 야곱의 새 이름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시험을 이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비로소 이긴자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은 벧엘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받았을 때가 아니라 20년 동안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한 후라는 것이다. 따라서 야곱이 받은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은 이긴자라는 말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목에서 알아보고자 하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기록된  이기는 자 도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을 때 이긴자가 되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또한 그 편지들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말씀의 전후에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이 말씀은 일곱 교회 중의 한 교회나 일곱 교회에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 이라는 것을 볼 때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권면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교회시대 란 교회가 처음 생긴 때 즉 성령강림하신 날부터 예수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시는 날까지를 가리켜 말한다. 그러므로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익은 열매가 되는 성도들은  이긴자 라고 부를 수도 없고,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가운데 들어갈 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교회시대에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기는 자가 된다면 일곱 통의 편지 가운데 약속한 모든 축복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만 한다.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은 편지마다 그 내용이 각각 다르지만 이긴자가 되면 누구든지 일곱 통의 편지에 약속하신 것들을 모두 받게 된다.

또한 대부분의 요한계시록 해석자들은 성도들이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는 이긴자가 될 수 없고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긴자들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들이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정확하게 분석해 보면 교회시대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이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부분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요한계시록 3:1-7에 나오는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주님께서 사데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 중에서 몇 명의 성도들에게만 흰옷을 입고 동행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사데 교회 안에 있는 몇 명의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 즉 흰옷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3:18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이기는 자가 되어 부끄러운 행실을 보이지 않도록 흰옷을 입고 사역을 하라고 권면하신 내용이다. 다시 말하자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흰옷을 입으라고 권면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받을 수 있다.

 

1.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에 대한 기초적 견해(2)

2)  이기는 자 를  이긴자 라고 하는 이유

이제부터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긴자 를  이기는 자 라고 하신 이유에 대하여 설명해 보도록 한다.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것은 교회시대의 초기에 하신 말씀으로서 교회시대가 끝날 때까지 이긴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시대에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만약 이긴자가 된다면 약속하신 말씀과 같이 축복하시겠다는 뜻으로  이기는 자  혹은  이기는 그에게 라고 권면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광야의 길을 통과할 때 수많은 영적 싸움에서 마귀와 세상과 육신을 이기고 정결케 되었다면  이긴자 가 된 것이며,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틀림없이 받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를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9:24-25을 보면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경주자로 비유하면서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달음박질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성도들은 마라톤에 출전한 선수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믿음의 경주를 해야만 하는데 이 경주에서 우승을 하여 상을 받는 성도를 이긴자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형적 진리를 살펴보면 이와 같은 개념을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핵심진리 입문』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모든 성도들 중에서 교회시대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광야연단을 다 받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케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을 휴거되는 성도들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난 모형적 진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에 40년 광야의 길을 통과하면서 이방민족의 군대들 즉 바로 군대, 아말렉 군대, 아모리와 바산과 미디안 군대들과 싸움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도들이 출애굽 즉 구원받은 때부터 세 차례의 큰 연단과정을 통과하여 가나안 땅 즉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모형적으로 보여준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우게 되었던 이방민족의 군대들은 성도들이 싸워서 이겨야하는 악령들의 모형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악령들을 예비해 놓으시고 성도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세 차례의 큰 연단과정을 통과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정결하게 될 수 있도록 섭리하신다.

바로 군대의 추격을 받는 과정을 첫 번째 연단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군대에게 일방적으로 쫓기기만 하고 싸우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면서 정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첫 번째 연단과정을 통과하는 성도들은 초보적인 믿음과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악령들을 대항하여 싸우기보다는 쫓기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군대의 추격을 받으면서도 멸망하지 않은 것처럼 성도들도 다양한 방법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때문에 환난과 핍박이 많아도 첫 번째 연단과정을 잘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 군대와 싸울 때 비록 오합지졸같이 보잘것없는 군대였지만 일방적으로 패배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가서 싸워 이기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승리하고  여호와 닛시 라는 제단을 쌓게 되었다. 이와 같이 두 번째 연단과정을 통과하는 성도들도 환난과 핍박을 일으켜 범죄하도록 유혹을 하고 공격하는 마귀들에게 때로는 이기기도 하고 때로는 패하기도 하면서 영적으로 점점 성장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연단과정을 통과하는 성도들은 초보적인 단계를 통과하고 어느 정도 성장하였기 때문에 악령들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리와 바산과 미디안 군대들과 싸우는 과정을 세 번째 연단과정이라고 하는데 싸울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세 번째 연단과정을 통과하는 성도들은 악령들과 싸우는 가운데 계속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면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케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12,000명의 용사들이 미디안 지역의 군대들과의 싸움에서 완전무결하게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광야의 마지막 연단과정에서 성도들은 마귀들의 공격을 크게 받을지라도 패배하지 않고 흠 없는 빛의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써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완전무결한 승리의 생활을 한다는 것은 성도들이 세 번째 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가나안 땅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정결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모형적 진리를 통하여 알게 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군대의 추격을 받을 때보다 아말렉 군대와 싸울 때 더욱 강해졌고, 아말렉 군대와 싸울 때보다는 아모리와 바산과 미디안 군대들과 싸울 때 훨씬 더 강해졌기 때문에 온전한 승리를 하게 되었고, 그 후에 비로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첫 번째 연단과정을 통과했을 때보다 두 번째 연단과정에서 더욱 큰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되고, 세 번째 연단과정에서는 훨씬 더 큰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되면서 온전히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악령들과 싸워야 하는 세 차례의 큰 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정결케 된 성도들을 이긴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세 차례의 큰 연단과정을 통과하고 정결케 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즉 생명수가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성도들이다. 이러한 성도들은 광야의 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마귀들과 영적 싸움을 하는 가운데 승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이기 때문에  이긴자들 이라고 한다. 그리고 교회시대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이긴자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기는 자 라고 부르면서 권면하신 이유는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며,  이기는 자 에게 약속하신 것들은  이긴자 가 받을 축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긴자가 된 성도들을 요한 웨슬리는 성결은총(聖潔恩寵) 즉 완전성화은총(完全聖化恩寵)을 받은 성도들이라고 하였다. 또한 존 번연은 그의 저서 『천로역정』에서 전신갑주(全身甲冑)를 입은 성도들이라고 하였으며, 대부분의 성자들은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에 들어간 성도들이라고 하였다.

 

1.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에 대한 기초적 견해(3)

3) 영적 싸움의 대상

 이긴자들 은 싸워야 할 모든 대상들을 이겼다고 인정받은 성도들을 가리켜 말한다. 이러한 이긴자들과 같이 되기 위하여 모든 성도들은 항상 영적 싸움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정결케 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제부터 성경을 중심으로 성도들이 영적으로 싸워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1) 마귀

요한계시록 12:11을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성도들이 싸워 이긴  저 는 문맥을 살펴볼 때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붉은 용을 가리켜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마귀라는 것이다. 이제부터 싸워 이겼다는 말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이 세상에는 마귀 들린 사람들이 많은데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명령했을 때 마귀가 떠나가면 이긴 것이고 떠나가지 않으면 패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마귀를 이겼다는 것은 마귀 들린 사람의 심령 속에 있는 마귀를 추방했다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마귀와 싸울 때 마귀가 어떤 방법으로 성도들을 공격하는지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면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성도들이 마귀와 싸워서 이긴 경험과 패배한 경험에 대한 실례를 들어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예화 1) 마귀와 싸워 패배한 중에 가장 중요한 실례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경험이다. 하와는 마귀가 은밀하게 나타나 유혹할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느껴지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마귀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된 것이 마귀에게 패배한 것이다. 이러한 불순종의 결과로 온 인류는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는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죄와 불행 가운데 살게 된 것이다.

 

(예화 2) 마귀와 싸워 이긴 가장 중요한 실례는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시고 마귀에게 세 차례의 유혹을 받았던 사건을 들 수 있다. 40일 금식 후 예수님의 몸은 매우 지치고 허약하신 상태였으므로 작은 유혹이나 마귀의 공격을 받아도 패배하기 쉬운 상황이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시면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므로 이기셨다. 또한 마귀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을 때나 내게 엎드려 절하기만 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마귀를 이기셨다.

앞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는 말씀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는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면 마귀를 이기는 생활이라고 하며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패배하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화 3) 성도들이 식사할 때 자기 식성에 맞지 않는 음식이 들어왔거나 반찬이 심하게 맵거나 짜거나 싱겁다고 하여 짜증을 낸다던가 음식을 타박하면서 불평하고 퉁명스러운 말을 했다면 그순간 마귀에게 패배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때 밥상을 들어 엎기도 하고 음식상을 가져온 사람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하는데 이러한 행실은 마귀에게 크게 패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범죄한 것이다.

 

(예화 4) 어떤 목사님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배고픔이 심하게 느껴져서 집에 들어갔는데 사모님이 전화로 잡담을 하면서 오랫동안 식사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목사님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되었다. 그분은 처음에  참아야지 또 참아야지 하면서 한동안 잘 견디다가 결국 끓어오르는 분노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성난 얼굴로 비방하고 책망을 하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그순간 마귀에게 패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화 5) 어떤 목사님이 여러 가지 복잡한 일과 억울한 일 그리고 잘 풀리지 않는 일들 때문에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이었으나 식사한 후에 심방가려고 사택에 들어갔다. 그런데 사모님이 심방가실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다고 “밝은 빛에 대한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님이 시간 약속도 지키지 못하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비평하면서 무시하였다. 그때 목사님은 밖에서 큰 괴로움과 답답한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위로를 받아야 될 형편인데 오히려 무시하고 비평하는 사모님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참아야지 만약 화를 내면 큰 일이다 라고 생각하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계속 눌러 참았다. 그러다가 그만두라고 하는데도 사모님이 계속 비평하고 무시하는 말을 하자 목사님은 흥분된 어조로 비방을 하였고 나중에는 들고 있던 머리빗을 방바닥에 던지면서 화를 내었다. 목사님은 그것 때문에 더 큰 양심의 가책과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주일예배를 인도하면서 “저는 이렇게 부덕스러운 목사입니다”라고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설교하였는데 이때 교인들은 빛을 따라 사는 생활에 대하여 깨닫게 되고 성령의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목사님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순간적이나마 행실로 나타낸 것은 마귀에게 패배한 모습이다

 

(예화 6) 부모님들은 한결같이 자녀들의 학교성적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부모가 자녀의 학교성적이 떨어진 성적표를 보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퉁명스런 말이나 욕설이나 짜증을 내면서 책망을 했다면 마귀에게 패배한 것이다.

(예화 7) 깊은 산중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한 수도자가 어느 날 갑자기 세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그 수도자의 마음을 강하게 자극시켰던 것은 과거 세속에 살 때 애인과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던 기억들과 음란한 쾌락을 즐겼던 일들이었다. 그런 생각들로 유혹을 강하게 받은 그 수도자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세속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세속을 향하여 산길을 내려오던 수도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뱀이 앞을 가로막게 하셨는데, 그 수도자는 크게 놀라면서 수도원으로 돌아가 수도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 수도자의 경우 세상쾌락과 정욕에 사로잡혀 수도원에서 나가려고 했던 것은 마귀에게 순간적으로 패배한 것이며 세속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크게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것은 마귀에게 이긴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때로는 마귀에게 이기는 생활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패배하는 생활을 하면서 점진적으로 성화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은혜가 충만할 때는 마귀에게 이기는 생활을 하다가도 범죄하기 쉬운 기회가 생기면 악심과 부끄러운 행실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마귀에게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은 범죄하기 쉬운 기회가 생겼을 때 예수님을 본받아 순간순간 마귀와 싸워 승리하는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다.

 

1.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에 대한 기초적 견해(4)

3) 영적 싸움의 대상(2)

(2) 세상

요한일서 5:4을 보면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였다. 즉 세상은 성도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요한일서 2:16을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세상과 싸운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과 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성도들이 세상에 졌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지배를 받으면서 부끄러운 행실이 나타난 것을 가리켜 말한다.

이와 같이 세상과 싸우는 성도들의 생활모습에 대하여 예를 들어서 알아보자. 우선  육신의 정욕 은 육신이 좋아하고 만족하며 쾌락을 즐기고 집착하는 것들을 향한 정과 욕심들을 가리켜 말한다.  안목의 정욕 은 안목(眼目) 즉 눈으로 보면서 느끼게 되는 모든 애정들과 욕망들을 가리켜 말한다. 그리고  이생의 자랑 은 자기의 소유들 즉 재산이나 학벌, 용모, 재능, 건강, 가족, 좋은 직장, 화려한 주택, 신령한 체험들, 입신체험, 설교를 잘하는 것, 기도 많이 하는 것, 병 고치는 은사, 귀신 쫓는 은사 그리고 신앙적인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것 등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예화 1)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볼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느꼈던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으므로 세상에게 졌다고 하는 것이다.

 

(예화 2) 돈궤짝이나 돈지갑 속에 있는 돈을 볼 때 욕심이 생겨 슬쩍 훔쳤다면 안목의 정욕 즉 세상에게 진 것이다. 음란한 영화나 음란한 비디오를 보고 싶은 마음 즉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혀 실제로 보았다면 세상에게 패배한 것이다. 또한 좋은 음식을 먹고 싶었는데 식성에 맞지 않은 음식을 가져왔다고 하며 화를 내는 것도 육신의 정욕 즉 세상에게 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값진 의복이나 값진 시계, 보석, 좋은 책 등 좋은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 가운데 탐욕을 품게 된다면 안목의 정욕 즉 세상에게 패배한 것이다. 그리고 사순절이나 대강절에 좋은 음식을 먹지 않고 철저하게 절제하기로 결심했다가 맛있는 음식을 보고 순간적으로 정욕적인 말이나 행동을 나타냈다면 역시 세상에게 진 것이다.

 

(예화 3) 어떤 교회의 성도들이 다른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은 후에 자기가 다니고 있는 교회의 목사님 앞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 목사님은 참으로 신령하고 설교를 아주 잘하시더라고 하였을 때 담임목사님이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잘한다는 다른 목사님에 대하여 험담을 하거나 다른 곳에 가서 은혜를 받으려고 하다가 이단에 빠질 수도 있다고 하면서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충고하는 말을 했다면 세상에게 패배한 것이다.

 

(예화 4) 대학입시를 위해 함께 공부했던 친구가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고 자기는 낙방했을 때 합격한 친구를 질투하면서 은근히 헐뜯고 비방하고 싫어하게 되는 행실은 세상에게 패배한 것이다.

 

(예화 5) 자기의 아이들이 나가서 놀다가 나이가 어리거나 허약한 다른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울면서 들어왔을 때 어떤 부모님들은 왜 그런 아이들한테 얻어맞고 울고 다니느냐고 화를 내면서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또 어떤 부모님들은 다른 아이들한테 얻어맞고 들어온 자기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누가 때렸느냐고 분노하면서 고함을 치기도 한다. 반대로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들어왔을 때 잘했다고 칭찬하거나 마음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부모님들의 마음과 행실은 자기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욕망 때문에 아집성과 포악성과 교만성의 지배를 받은 것이므로 세상에게 진 것이다.

 

 

1.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에 대한 기초적 견해(5)

3) 영적 싸움의 대상(3)

(3) 거칠고 사나운 환경

로마서 8:35-37을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 중에서  환난 은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스러운 모든 일들을 가리켜 말한다.  곤고 (困苦)는 마귀와 세상과 역경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피곤하고 괴로운 마음상태를 가리켜 말한다.  핍박 은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수모를 당하고 욕설을 듣고 매를 맞고 온갖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말하며,  기근 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적신 (赤身)은 모든 소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벌거숭이 같이 되어 고난받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위험이나 칼 은 성도들이 용감하게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고 몸에 큰 상처를 받으면서 순교를 하게 될 때의 고통스러운 환경들을 가리켜 말한다.

성도들은 이러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하게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는 성도들은 거칠고 사나운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승리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특히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은  넉넉히 이긴다 는 말씀과 같이 거칠고 사나운 환경 속에서도 밝은 빛의 열매를 맺으며 잘 이기는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이 순간순간 환경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날마다 자아가 죽는 순교적인 생활을 하면서 거칠고 사나운 환경을 이긴다는 것이다.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라고 한 말씀은 양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 반항을 하지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온순하게 따라가는 모습과 같이 성도들도 거칠고 사나운 환경 중에서 온유와 겸손과 인내와 사랑 등을 실천하면서 온전하게 이기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위에서 말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예화를 들어 설명해보자.

(예화 1) 어떤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는 몇 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하면서 많은 고통 중에 악전고투하는 가운데, 결국 그 질병을 고침 받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퇴원한 후에 그는 건강한 몸으로 생활하면서 항상 “나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질병을 이겼습니다”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인을 통해서 치료하는 동안에 있었던 생활내용에 대하여 들어보면 과연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승리의 생활을 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그 부인에게 남편의 회복을 축하하면서 “간호하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질병을 이기고 건강을 회복했으니 참 좋으시겠습니다”라고 하자, 그 부인은 “아이고 말도 마세요. 내가 그 병원에서 간호하는 동안 얼마나 지긋지긋했는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비록 몸에 고통이 있다지만 얼마나 원망이나 불평, 짜증을 많이 내고 화를 내는지 그걸 다 받아 주면서 참고 견디느라고 죽을 지경이었습니다”라고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러한 사실을 분석해보면 비록 질병은 고쳐져서 건강은 회복되었을지라도 영적으로는 거칠고 사나운 환경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어떠한 역경 중에서라도 주님의 빛을 따라 온전하게 이기는 생활을 하기 원하신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비록 거칠고 사나운 환경을 통과하였을지라도 그 성도의 생활전체를 살펴볼 때 순간순간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은 행실들이 나타났다면 영적으로 넉넉히 이기는 생활을 하였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순간순간 원망이나 짜증이나 불평 혹은 신경질이나 교만이나 아집적인 행실이 없는 가운데 온전한 사랑과 인내와 겸손과 온유를 실천하면서 거칠고 사나운 환경을 이기는 생활을 해야만 비로소 이긴자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화 2)  제2의 성경 이라고 불리우는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복음주의와 청교도 신앙을 지키면서 수많은 시험풍파 속에서도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 분이다. 그는 영국의 국교회로부터 수많은 박해를 당하면서 여러 차례 감옥에 들어가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가 감옥에서 당한 고난에 대하여는 필설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존 번연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충성하는 가운데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을 많이 겪었다. 그는 이러한 거칠고 사나운 환경 중에도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참된 인내와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완덕(完德)에 도달한 분이다.

 

(예화 3) 1380년에 네델란드의 시담이라는 도시에서 탄생한 리드비나는 15살 때에 얼음지치기를 하다가 얼음 위에 미끄러져서 늑골이 부러지는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때부터 리드비나는 병상에 눕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농흉병에 걸려 온몸에서 피고름이 흘러나오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부모님은 처음에 리드비나를 푹신푹신한 요에 눕혔으나 요가 상처에 달라붙게 되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나무판자 위에 눕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7년간은 머리와 왼팔만 움직일 뿐 온몸이 굳어져 천정만 보면서 살게 되었다. 리드비나가 당한 고생과 핍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리드비나는 이와 같이 비참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넘쳤고 괴롭게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과 인내의 덕을 실천하면서 예수님과 일치되는 경지에 이르렀고 그 후에는 완덕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리드비나의 삶에 대해서는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 가운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리드비나 성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날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참된 제자로서 잘 참고 견디는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영적인 목표를 바라보면서 마귀와 세상과 역경을 이기고 완덕에 도달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2.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축복

예수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는 그 교회의 목회자 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과 여러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과 또한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다. 각 편지 중에는 목회자를 칭찬하는 말씀도 있고 책망하는 말씀도 있으며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권면의 말씀도 있다. 그리고 그 편지들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이 과목에서는 그 편지들 중에서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에 대해서만 연구하는데 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순서대로 하지 않고 먼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부터 시작하여 두아디라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에베소 교회, 사데 교회, 버가모 교회 그리고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의 순서대로 연구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를 먼저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과 요한계시록 전체를 쉽게 해석하고 정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을 몇 명이나 예정하셨는지 알게 되면 모든 성도들이 다 이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깨닫게 됨으로써 계시록 전체를 질서정연하게 해석하는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각 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낸 편지별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한다.

 

 

1)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3:12).

 

(1) 성전의 기둥이 됨

이긴자들은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했는데 성전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며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성전이라고 하면 교회의 건물을 가리켜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에 나온 성전은 천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2:20-22을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라는 것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을 만드는 건축재료들인데 모든 건축재료들이 연결되어야만 성전이 완성되는 것처럼 구원받게 될 성도들의 수가 충만히 채워져야만 천국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들어지고 있는 성전은 곧 준비되고 있는 천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 14:1-3을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때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성도들이 영원히 살아야 될 처소 즉 천국을 만드신다는 계획을 보여주신 것이다. 여기에서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은 성전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성전은 천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긴자들을 성전 즉 천국의 기둥이 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건물에는 여러 가지 재료가 사용되는데 그 재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둥이다. 기둥이 튼튼하면 그 집이 튼튼한 것이고 기둥이 약하면 집도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한다는 것은 천국에서 기둥과 같이 중요한 성도가 된다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그런데 천국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행한 대로 상급을 받아 영생하는 곳이므로 천국에서 기둥 같은 성도가 된다는 것은 이 땅에서 기둥 같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충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긴자들은 교회시대 동안 천국건설사업을 위하여 기둥과 같은 하나님의 사역자들로 충성했기 때문에 그 상급에 따라 천국에 들어가서도 기둥 같은 성도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어 주신다.

그리고 이긴자들은 교회시대 동안 즉 성령강림하신 때부터 주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까지 시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또 각 분야별로 하나님께서 기둥같이 세워 충성하게 하였던 성도들이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교부들 그리고 성인들은 모두가 천국건설 사업을 위하여 기둥 역할을 하였던 성도들이며 이긴자들이었다. 이렇게 위대한 성도들에 대해서는 E. S. 모이어가 쓴 『인물중심의 교회사』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성도들의 업적을 살펴보면 이단자들이 나타나서 성도들을 미혹할 때 바른 신앙과 교리를 확립하여 교회를 지켰고 교회를 개척하거나 복음을 증거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큰 사랑을 불태우며 희생적으로 봉사하였고 교회가 부패해졌을 때는 밝은 빛을 증거하고 실천하면서 소생시키는 일에 기둥 같은 일꾼으로 충성하였다.

본서 중에 있는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 『영적 성장론』 『마태복음 13장 비유해설』 등을 통해서 자세히 알게 되겠지만 교회시대 이긴자들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몇 사람을 소개해 본다. 열두 사도를 비롯한 사도 바울, 디모데, 누가복음을 쓴 누가, 마가복음을 쓴 마가, 서머나 교회의 순교자 폴리캅,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 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교부 오리겐, 라틴학파의 교부 터툴리안, 씨프리안,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교부 아다나시우스, 크리소스톰, 힙포의 감독 어거스틴, 최초의 수도자 안토니, 주상성자 시메온, 히브리어를 연구하여 벌게이트 성경을 출판한 제롬, 수도원규칙을 제정하고 수도원제도를 발전시킨 베네딕또, 그레고리 1, 독일선교의 선구자 보니페이스, 가장 위대한 성자 아씨시의 프랜시스와 그의 12제자, 도미니코, 클레이보의 버나드, 중세 카톨릭의 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쓴 토마스 아 켐피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칼빈, 예수회의 창설자 익나티우스 로욜라, 갈멜수도회를 개혁한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천국과 연옥과 지옥을 경험하고 『신곡』을 쓴 단테, 38년간 병상생활을 하며 복음을 증거한 리드비나, 결혼을 하고서도 동정을 지킨 구네군다 황후, 『실락원』 『복락원』을 쓴 존 밀턴,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모라비아교단을 창설한 진젠돌프 백작, 『경건한 삶을 위하여』를 쓴 윌리암 로우, 『천국과 지옥』을 쓴 스웨덴 보르그,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 중국의 성자 워치만 니, 『사선을 넘어서』를 쓴 하천풍언, 내촌감삼, 중국내륙선교회의 창시자 허드슨 테일러, 인도의 성자 썬다 싱, 기도의 용사 조지 뮬러, 역경을 극복한 헬렌 켈러, 사랑의 선교회의 마더 테레사, 한국의 이용도 목사, 주기철 목사, 이성봉 목사 등이 천국건설사업에 기둥 같이 쓰임 받았던 성도들이다.

그리고 이긴자들에게는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고 했는데 이것은 이긴자들이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정결케 되어 생명의 땅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이므로 완전한 구원을 보장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웨슬리 신학에서는 이긴자들을 완전성화은총 즉 완전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라고 말한다.

 

(2)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주심

이긴자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해준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22:14에서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세를 주신다는 뜻이다. 두루마기를 빨았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세를 주신다는 것은 이긴자들이 교회시대 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며 두루마기 즉 자기행실을 빨아 정결하게 되었으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뜻이다.

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견해가 정확하지 못하다면 요한계시록을 체계적으로 질서정연하게 해석할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을 천국의 전체인 줄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천국 전체가 아니고 천국의 수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형적 진리에서 보면 가나안 땅의 수도 예루살렘은 천국의 수도 새 예루살렘의 모형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보면 신천지 즉 천국은 새 예루살렘과 만국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수도이고 만국은 천국의 지방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진리에 대하여 3층으로 된 천국을 보고 온 영계체험자들이 증거한 내용과 비교해보면, 3층천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으므로 새 예루살렘에 해당하고 1층천과 2층천은 만국 곧 지방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천국의 모형인 성막 즉 성전의 구조를 볼 때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는 천국의 수도 새 예루살렘을 상징하고, 성소는 천국의 지방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천국 전체가 아니고 천국의 수도이며 지성소라고도 하고 3층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태양되시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며 천국에서 가장 밝은 빛으로 충만하고 가장 축복받은 도성이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받은 이긴자들은 가장 밝은 빛 가운데서 생활한 성도들이기 때문에 가장 큰 상급을 받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해주심

이긴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해준다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5:6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고 기록된 바와 같이 요한계시록 5장부터 22장까지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새 이름을 어린양이라고 부르고 있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새 이름을 어린양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께서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혀 희생당하신 속죄주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해준다는 것은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므로 이긴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기록해준다고 한 것이다. 이제부터 어린양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 이긴자들의 수가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요한계시록 14:1을 보면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144,000명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볼 때 144,000명은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해 주겠다고 약속받은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144,000명이 시온산에 서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과 시온산에 대한 견해를 자세히 알아본다.

 

【중요사항 1】 시온산에 대한 견해

이 시온산은 이 세상에 있는 장소가 아니고 영계의 천국에 있는 장소이다. 요한계시록 14:3을 보면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144,000명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볼 때 144,000명이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시온산은 이 세상의 이스라엘 땅에 있는 시온성이 아니고 천상낙원의 시온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형적 진리에 비추어 보면 솔로몬왕 시대의 가나안 땅은 완성된 천국 곧 영원한 천국의 모형이고, 예루살렘성은 완성된 천국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의 모형이다.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성을 만들기 전에는 가나안 땅의 수도를 시온산성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천국의 수도인 시온산은 천년왕국시대가 끝나고 신천지시대가 되면 새 예루살렘성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천상낙원에 있는 시온산은 천년왕국시대가 끝날 때까지만 부르게 될 이름이다. 그러므로 시온산이나 새 예루살렘은 동일한 장소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14:1에서는 144,000명이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다고 한 것이다.

앞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이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과연 요한계시록 가운데 그들이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있는지 확인해 본다. 먼저 요한계시록은 시대적 순서를 따라 계시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20장은 천년왕국시대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고, 21:9부터 22:5까지는 신천지의 수도 새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시대가 끝난 다음에 영원한 신천지와 새 예루살렘 시대가 열리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1:24을 보면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고 하였다. 여기에 나온 땅의 왕들은 천년왕국시대의 왕들을 가리켜 말하는데, 계시록 20장을 통해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천년왕국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그곳에서 통치하던  왕들이  자기 영광 을 가지고 영생하기 위하여  그리로  즉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땅의 왕들은 과연 어떤 성도들인가? 이들은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중에 약속한 바와 같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세를 받은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이다.

 

【중요사항 2】 세 종류의 익은 열매

요한계시록 14:4에서는 시온산에 예수님과 함께 서 있는 144,000명을  처음 익은 열매들 이라고 하였는데 수많은 성도들 중에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144,000명만을 처음 익은 열매로 추수하게 된다면 나머지 성도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앞에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익은 열매가 된 성도들을 추수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마태복음 13:39에 나온  세상 끝 이라는 말씀도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추수하시는 때를 가리켜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4:4을 보면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에 처음 익은 열매 즉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만을 추수하여 곳간 즉 천상낙원의 시온산성에 담으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러나 144,000명 이외의 성도들은 주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까지 완전히 익지 못한 열매들이기 때문에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환난 때 흰구름 위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순교자들을 추수하시는데 이들도 익은 열매가 되어야만 추수하신다(14:14-16). 이러한 순교자들을 가리켜 두 번째 익은 열매들이라고 한다. 또한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익은 열매가 된 성도들은 지상재림하실 때 추수되어 천년지상낙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러한 성도들을 세 번째 익은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4을 보면 대환난이 끝나고 천년왕국시대가 시작되는데 천년왕국에 들어갈 성도들을 세 종류로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3:30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곳간으로 비유하였는데 천년왕국도 하나님의 나라 즉 곳간이므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세 종류의 성도들은 세 종류의 익은 열매들임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연구할 때 설명할 것이다.

여기에서 익은 열매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출애굽한 성도들이 믿음으로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점진적으로 정결케 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광야에서 마귀와 세상과 역경과 싸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는 훈련을 다 받게 되면 익은 열매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2)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2:26-28).

 

(1)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심

이긴자들에게는 만국(萬國)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나오는 만국은 어느 시대의 만국인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먼저 신약성경에 나오는 여러 시대의 만국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중요사항】 신약성경에 나온 네 종류의 만국

) 교회시대의 만국 : 마가복음 13:10을 보면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만국은 구원받은 이방인의 수가 충만하게 채워지도록 하기 위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교회시대의 만국을 의미한다.

) 적그리스도시대의 만국 : 요한계시록 18:3을 보면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라고 하였는데, 이 무너진 만국은 대환난 때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후 삼년 반 환난기의 만국이다.

) 천년지상낙원의 만국 : 요한계시록 21:26을 보면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만국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세를 받은 이긴자들이 천년왕국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을 볼 때 천년왕국시대의 만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신천지의 만국 : 요한계시록 21:24을 보면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빛 가운데 다닌다고 한 것을 볼 때 영원한 신천지의 만국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네 종류의 만국 중에서 이긴자들이 다스릴 만국은 천년왕국시대의 만국이다. 이긴자들에게 천년왕국시대의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는 말씀에 대하여 자세히 알기 위해 누가복음 19:11-27에 나온 므나 비유를 분석해 보자.

“…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

이 말씀에서 어떤 귀인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며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기 위해 먼 나라로 간다는 것은 장차 만왕의 왕으로서 큰 권세를 가지고 재림하시기 위하여 승천하신 사건을 상징한다. 그때 그 종 열을 불러 한 사람에게 한 므나씩 주시고 장사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복음과 성령을 나눠주시면서 열매 맺는 생활을 하라고 하신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귀인이 왕위를 갖고 돌아와서 종들을 불러 장사하여 이익을 남긴 대로 몇 고을씩 다스릴 권세를 주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실 때 이긴자들에게 상급의 정도에 따라 천년왕국에서 몇 고을씩 다스릴 권세 즉 분봉왕 권세를 주시는 것에 대하여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긴자들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은 천년왕국시대의 만국에서 다스릴 권세 즉 분봉왕 권세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고 하셨는데 이것은 이긴자들에게 주시는 분봉왕 권세가 철장 즉 쇠지팡이로 가장 약한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과 같이 강력한 권세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으로 재림하실 때 철장권세를 가지고 아마겟돈에 모인 세상의 왕들과 군대들을 심판하시게 된다. 또한 이긴자들도 철장권세를 가지고 주님과 함께 아마겟돈 심판에 동참하게 되며, 천년왕국시대의 만국을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2) 새벽별을 주심

새벽별은 샛별이라고도 하는데 어두운 밤을 밝은 낮으로 인도하는 별이며 수많은 별들 중에서 가장 밝은 별이다. 요한계시록 22:16을 보면 “…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광명한 새벽별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한다. 또한 요한복음 14:6을 보면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셨다. 따라서 새벽별은 생명되시는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에게 새벽별을 주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예수님의 생명을 영 속에 내주합일되게 하신다는 뜻이다. 생명이 영 속에 내주합일된다는 진리에 대해서는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긴자들에게 생명과를 주어 먹게 하신다는 진리를 해설할 때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3)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

 

(1) 보좌에 앉게 하심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마귀와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5:5; 16:33)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귀와 세상과 역경을 싸워 이긴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도 보좌에 앉도록 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보좌는 높은 권세 즉 왕권을 받은 분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이므로 보좌에 앉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은 왕 노릇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시대의 이긴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같이 보좌에 앉게 해 주신다는 것을 볼 때 이 말씀에 나오는 보좌는 현재 이 세상에 있는 왕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긴자들이 왕 노릇할 곳은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년왕국과 신천지라는 것이다.

계시록 21:1-22:5을 보면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이 천국의 수도인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있고 그곳에서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이긴자들이 천국에서 영원토록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4:4을 보면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20:4을 보면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4:4에 나오는 24장로는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참고사항에서 자세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0:4에서 심판권을 받고 보좌에 앉은 성도들은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이기 때문에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약속하신 바와 같이 천년왕국에서 왕권을 받게 될 성도들이다.

 

【참고사항 124장로에 대한 성경적 견해

요한계시록 4:4에 나온 24장로들은 “…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24장로들은 어떤 분들인가?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24장로들은 신약시대의 12사도와 구약시대의 12족장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입신하여 천상낙원에 들어갔을 때 24장로들은 이미 보좌에 앉아 있었고, 사도 요한은 그 장로들의 보좌들 가운데 앉아 있지 않고 그 24장로들의 보좌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12사도는 24장로들 중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4장로들은 천사들이 아니고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장로(長老)라는 호칭은 사람들에게만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24장로들이 면류관을 쓴 것을 보더라도 천사가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천사가 면류관을 쓰고 있다는 증거가 없고 또 면류관은 마귀와 세상과 역경을 이기고 쓰게 되는 것이므로 이 세상이 아닌 영계에서 활동하는 천사들은 면류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24장로들은 이미 보좌에 앉아 있었고, 사도 요한을 비롯한 12사도는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이기 때문에 24장로들은 교회시대가 시작되기 전 즉 구약시대의 성도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보좌에 앉아 있음을 볼 때 24장로들은 이긴자들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24장로들은 교회시대가 시작되기 전 즉 성령강림하시기 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가장 충성스러웠던 이긴자들 24명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24장로들은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성도들로서 교회시대를 열기 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큰 사역자들이다. 이분들은 할례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세례 요한까지 24명의 이긴자들인데 그 이름을 열거해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 사무엘, 다윗,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호세아 그리고 세례 요한 등 17분이며 그 외의 분들은 성경을 통하여 정확히 확인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24장로들을 아브라함부터 세례 요한까지 24명의 이긴자들이라고 해석하며 아브라함 이전의 노아나 에녹 같은 분들이 24장로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출애굽한 성도가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여 마음과 행실을 정결케 하고 가나안 땅 입구에서 영적 할례를 받은 후 가나안 땅 즉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이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파라다이스 방문기』 (엘우드 스코트 저, 서달석 역, 보이스사 1986)라는 책의 47, 73면을 보면 영계 체험자인 세네카 소디가 처음 낙원에 들어갔을 때 영접한 분이 여호수아였는데 장로라고 불려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 다윗, 엘리야, 이사야, 모세 등 모두가 장로들로 불려진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세네카 소디에게 아브라함이 설명해주기를 24장로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함께 부활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7:50-53 참조).

 

【참고사항 2】 천년왕국에 대한 성경적 견해

 가) 천년왕국에 들어갈 세 종류의 성도들

 ㈎ 심판권을 받고 보좌에 앉은 성도들(20:4)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20:4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세 종류의 성도들이 모두 천년왕국에서 왕 노릇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 약속하신 바와 같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즉 천년왕국시대의 분봉왕 권세는 교회시대의 이긴자들만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 종류의 성도들 모두가 천년왕국시대에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심판권을 받고 보좌에 앉은 성도들 즉 교회시대의 이긴자들만이 천년왕국시대에 왕 노릇하는 것이다. 또한 천년왕국은 제정일치시대이므로 이긴자들이 왕권과 함께 제사장 직분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은 공중강림하실 때에 휴거되었다가 주님께서 지상재림하실 때 함께 내려와서 철장권세로 죄악세상을 심판하고 천년왕국시대에 만국을 다스리는 왕들이 될 것이다. 이 심판권을 받고 보좌에 앉은 성도들의 몸은 죽어야 할 육체가 아니고 부활된 몸 곧 신령한 몸이다. 그러므로 결혼하여 부부생활을 하거나 자녀를 낳지 않을 것이며 의식주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영계에 있는 천국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땅의 사방 어디든지 자유자재로 다니면서 활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144,000명 전부가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왕권과 제사장 직분을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 순교자들(20:4)

요한계시록 6:9-11을 보면 대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순교한 성도들과 대환난을 통과하는 중에 순교한 성도들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순교자들은 심판권을 받고 보좌에 앉은 성도들 즉 천년왕국시대의 왕들을 보필하게 되는데 정치적으로는 장관이나 도지사 같은 권세를 받게 되고 종교적으로는 담임목회자를 보필하는 장로, 권사, 집사 같은 직분을 받고 봉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순교자들은 예수님께서 지상재림하실 때 144,000명과 함께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아마겟돈 심판이 끝난 직후 즉 대환난이 끝난 직후에 부활된 몸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긴자들이 순교했을 경우에는 144,000명의 반열에 포함되었으므로 순교자들의 반열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나온 순교자들은 광야에서 연단받는 중에 순교한 성도들을 가리켜 말한다. 따라서 순교자들은 이긴자들보다 상급이 적은 성도들이다.

 

㈐ 살아남은 성도들(20:4)

살아남은 성도들은 휴거되지 못하고 대환난을 통과하는 중에 순교당하지도 않고 질병이나 배고픔, 천재지변 등으로 죽임을 당하지도 않고 살아남아서 육체를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이긴자들이나 순교자들과 같이 부활된 몸으로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죽어야될 육체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또한 살아남은 성도들은 천년왕국에서 땅을 분배받아 여러 가지 생업에 종사할 것이며 정상적인 본능 즉 정욕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혼생활을 하면서 자녀를 낳게 될 것이다. 이 성도들로 말미암아 천년왕국 백성들은 번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심판권을 받고 보좌에 앉은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통치와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 천년왕국에 들어갈 세 종류의 성도들에 대한 모형적 진리

요한계시록 20:4에서 천년왕국에 들어갈 성도들이 세 종류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부터 모형적 진리를 통하여 세 종류의 성도들에 대한 진리를 정돈해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국백성들의 모형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여정을 마치고 천국의 모형인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세 종류의 신분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천년왕국이나 영계의 천국에 들어가는 세 종류의 성도들에 대한 모형적 진리이다.

민수기 2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마칠 때쯤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백성들을 계수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에 모세는 12지파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땅을 분배받게 될 60만 명 정도가 채워진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을 12지파의 60만 명 가운데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땅을 분배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땅을 분배받은 백성들과 레위인들은 구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민수기 3:1-10을 보면 아론과 아들들과 그 자손들이 기름을 발리우고 거룩히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받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레위 지파 중에서 아론의 아들들과 그 자손들은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구별하고 있는 말씀 즉 민수기 3:9을 보면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돌리운 자니라”고 하였다. 제사장들을 레위인들이 보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레위인들은 제사장들의 명령을 따라 시종하며 온 회중을 위한 일을 맡아 수행하면서 성막의 여러 기구를 돌보고 제사드리는 일에 봉사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 종류로 구분하셨다. 첫째는 제사장들, 둘째는 레위인들 그리고 셋째는 땅을 분배받은 백성들이다. 이렇게 구별한 것은 천년왕국이나 영계의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세 종류로 구분되는 것에 대한 모형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아론과 아론의 자손들 즉 제사장들은 천년왕국에서 심판권을 받고 보좌에 앉은 성도들의 모형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을 보필하는 레위인들은 심판권을 받고 보좌에 앉은 성도들을 보필하는 순교자들의 모형이다. 또한 땅을 분배받은 12지파 60만 명은 육체를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갈 살아남은 성도들의 모형이다.

그러면 땅을 분배받은 백성들은 목축이나 농업을 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소득을 얻었지만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기업은 무엇인가? 그것은 땅을 분배받은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를 레위인들의 기업이 되게 하였고, 레위인들이 드린 십일조를 제사장들의 기업이 되게 한 것이다.

 

) 천년왕국의 이모저모(65:17-25, 11:6-9)

이사야 65:17에 나온  새 하늘과 새 땅 은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천년왕국을 의미한다. 그곳은 농사를 지으며 집을 건축하고 자녀를 낳고 나무의 수한 같이 장수하는 세상이므로 영원천국과 같이 신령한 세계가 아니고 이 땅 위에 세워지는 천년지상낙원을 가리켜 말한다.

부활된 몸으로 천년왕국에 들어간 교회시대의 이긴자들과 순교자들은 천년이 찰 때까지 백성들을 통치하며 봉사하다가 신천지로 들어가겠지만, 육체를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간 성도들은 자손을 낳으며 얼마동안 살다가 육체를 떠나서 더 좋은 천상낙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천년왕국에서 출생한 사람들은 비록 낙원에서 출생했을지라도 전부가 신천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니다.

천년왕국시대가 끝난 직후 무저갱에서 풀려 나온 마귀들에게 사로잡혀 지옥에 들어갈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20:7-10). 천국은 누구나 반드시 마귀가 역사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믿음으로 연단받은 의지와 부활된 몸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영원히 사는 곳이다.

 

) 천년왕국시대가 끝난 후에 성도들이 마귀의 시험을 통하여 연단받은 의지를 가지고 들어가는 신천지

천년왕국 즉 지상낙원에서 출생한 사람들은 모두 천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인가? 천년왕국에서 출생한 사람들은 비록 지상낙원에서 살았다 할지라도 천년왕국시대가 끝난 후에 나타나는 마귀의 미혹을 이기고 영원한 신천지로 들어갈 사람들도 있고, 마귀에게 사로잡혀 범죄하고 지옥에 들어갈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천년왕국에서 출생한 백성들 전부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천년왕국이 시작될 때 들어간 세 종류의 성도들은 모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한 성도들이다. 위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천년왕국에 들어간 성도들은 세 종류인데, 그중에 부활된 몸을 가지고 들어간 이긴자들과 순교자들은 백성들을 통치하다가 천년왕국시대가 끝날 때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또한 대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은 육체를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갔으므로 자녀를 낳고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육체를 벗어버리고 영계의 천국 즉 천상낙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살아남아서 천년왕국에 들어갈 성도들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 모두가 천년왕국시대가 끝날 때까지 이 땅 위에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니고 백 년이나 이 백 년 혹은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육체를 벗어버리고 영혼만 천상낙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천년왕국에 들어간 성도들은 이미 광야연단과정을 마치고 영적 할례를 받았으므로 천년왕국시대가 끝난 후에 나타날 마귀의 시험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들은 광야연단과정을 통하여 연단받은 자유의지로 단장을 했기 때문에 환난과 핍박을 받거나 미혹을 받게 될지라도 강하게 저항하면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순종하게 된다.

그러나 천년왕국에서 출생한 사람들은 마귀와 죄와 불행이 없는 지상낙원에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연단받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에서 출생한 사람들은 천년왕국시대가 끝난 후에 무저갱에서 풀려 나온 마귀에게 미혹을 당하면서 연단받은 의지와 정결한 행실로 단장을 하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로 하여금 연단받은 의지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만세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마귀와 죄와 불행을 많이 경험하는 가운데 연단을 받아야 자원하는 의지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며 봉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마귀와 죄의 미혹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물리치며 하나님 이외의 것들은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며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루시퍼 천사장을 따라 타락한 천사들은 타락하기 전에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며 죄 때문에 당하는 형벌과 불행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몰랐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을 따라 배반하였는데,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악마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천사들 즉 마귀들은 영원히 회개하고 돌이켜 회복될 수가 없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타락한 천사들처럼 타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연단받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계획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낙원 중앙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후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마귀의 유혹을 받을 때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 결과 타락한 인간은 에덴낙원에서 추방되었고 심령 속에 죄성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 죄성으로 말미암아 범죄하게 되었고 형벌과 불행한 일들을 당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타락하여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모형적 진리를 통하여 알게 된 바와 같이 성도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연단받은 의지와 정결한 행실을 가지고 가나안 땅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시대가 끝날 때 천년왕국에서 출생한 모든 사람들도 연단받은 의지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고자 무저갱 속에 있는 마귀를 풀어놓아 미혹하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은 반드시 믿음으로 연단받은 의지를 가지고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연단받은 의지는 마귀와 죄와 형벌과 불행을 많이 경험하면서 점진적으로 온전해지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원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도록 미혹하는 모든 것들을 물리치는 의지를 가리켜 말한다. 그리고 이상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 즉 아담을 창조하신 때부터 천년왕국시대가 끝날 때까지 인류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연단받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신천지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준비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4)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2:7).

 

(1) 생명과를 먹게 하심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과를 먹게 하리라 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낙원과 생명과에 대해서 알아보자.

 

【중요사항 1】 하나님의 낙원에 대한 견해

하나님의 낙원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고 마귀와 죄가 없으며 형벌과 불행과 무질서가 없는 곳이다. 또한 하나님의 낙원은 사랑과 공의 그리고 평강과 복락이 언제나 풍성한 장소이고 하나님의 법도가 있으며 성도들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드리는 곳이다. 하나님의 낙원을 크게 분류하면 네 종류이다. 이제부터 성경에 나오는 네 종류의 낙원에 대하여 알아보자.

 

) 에덴낙원 : 창세기 2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을 창조하시고, 이 아담을 위하여 창설하신 곳이 에덴낙원이다. 에덴낙원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고 다른 나무들도 있었으며 짐승들과 새들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한 배필로서 하와를 창조해 주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여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그 후에 에덴낙원은 이 세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천상낙원 : 영계 체험자들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영계에 있는 하나님의 낙원을 가리켜 말한다. 또한 성도들의 영혼이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들어가서 빛과 생명수를 공급받으면서 행복을 누리고 영생하게 될 나라이다. 이 천상낙원은 고린도후서 12:2-4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 하였는데 이 말씀과 같이 사도 바울이 경험한 셋째 하늘 즉 3층천이 있는 낙원을 가리켜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1-3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천상낙원은 성도들이 영생할 처소가 준비되는 장소이다. 이 천상낙원에도 생명나무와 생명과가 있다. 천상낙원에 대해서는 다음에 나오는 『영계의 구조와 실상』이라는 과목에서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 천년왕국 :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신 후 이 땅 위에 건설하시게 될 곳이며 천년 동안 마귀와 죄와 불행이 없는 낙원이다. 천년왕국 즉 천년지상낙원에 들어가는 세 종류의 성도들 즉 심판하는 권세를 받고 보좌에 앉은 이긴자들과 순교자들과 대환난을 통과하고 살아남은 성도들은 영계에 있는 천상낙원에서 공급해 주시는 생명과를 먹으며 살게 된다. 그러므로 네 종류의 낙원 중에서 천년왕국에는 생명과를 먹고 사는 성도들은 있지만 생명나무는 없는 곳이다. 따라서 천년왕국에서 출생한 사람들은 생명과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 신천지 : 이 신천지(新天地)는 요한계시록 21:1-22:5에 나온 바와 같이 완성된 천국을 가리켜 말한다. 요한계시록 22:2을 보면 “…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이 신천지에도 생명나무와 생명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신천지와 천상낙원은 서로 구별되지만 동일한 장소이다. 다시 말해서 천상낙원은 천년왕국시대가 끝날 때까지 부르게 될 이름이고 신천지는 천년왕국시대가 끝난 후에 부르는 이름이다. 신천지는 모든 성도들이 단 한 명도 빠짐 없이 부활된 몸으로 사는 영원천국을 가리켜 말한다.

 

【중요사항 2】 생명과에 대한 견해  

생명과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가리켜 말한다. 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요한복음 14:6에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생명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에덴낙원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과 즉 하나님의 생명을 먹고 영생복락을 누리는 낙원으로 만들어 주시고자 계획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사단에게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고 결국 에덴낙원에서 추방되었다. 이와 같이 아담과 하와가 추방된 후에 에덴낙원은 화염검을 가진 그룹천사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인간은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마귀의 지배를 받아 불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는 온갖 불행한 일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심령과 육체 속에 마귀의 성질 즉 죄성이 들어와 마귀의 자녀가 되고 말았다(8:44; 6:16 참조).

이와 같이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사랑하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때부터 믿음과 은총으로 구원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미 알게 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낙원 즉 생명과를 먹을 수 있는 천국의 모형으로 정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도록 하셨다가 모세의 인도를 받아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과정을,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모형으로 정하셨다.

중요한 것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준비과정이 광야연단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광야에서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연단을 받으며 정결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철저히 순종하는 훈련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갖춰지는 것처럼 성도들은 구원받은 때부터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하는 생활을 계속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마음과 행실이 정결케 되어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중요사항 12를 통해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생명과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켜 말하는데 성도들은 광야를 통과하면서 성령의 도움으로 심령과 행실이 정결하게 되어 가나안 땅 즉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가 에덴낙원에서 잃어버렸던 생명과를 먹게 된다.

그러면 실제로 생명과를 먹은 경험은 어떤 것인가? 이제부터 생명과를 먹은 성도와 먹지 못한 성도의 경험에 대해서 로마서 7장과 8장을 통하여 확인해 보자.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광야를 통과하는 성도들과 생명과를 먹을 수 있는 가나안 땅 즉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간 성도들의 경험적 차이점을 깨닫게 하는 진리가 로마서 7장과 8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로마서 7장과 8장에는 바울 사도께서 경험하고 깨달은 진리가 담겨져 있다. 여기서 생명과를 먹은 성도들은 영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된 성도들을 가리켜 말한다. 따라서 영 속에 생명과를 먹는 체험과 마음속에 성령으로 충만한 경험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요사항 3】 로마서 7장과 8장 해설

) 로마서 7: 광야를 통과하는 성도들의 경험

로마서 7:19을 보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라고 하였다. 출애굽한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죄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초보적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자범죄를 한꺼번에 통회자복하고 용서를 받았을지라도 죄에 대한 문제가 온전하게 해결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출애굽한 성도들은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점진적으로 선과 악에 대하여 넓고 깊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에 대하여 경험적으로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범죄하기 쉬운 기회가 생길 때마다 빛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로마서 7장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라는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께서도 선을 행하려고 철저하게 노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데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온전한 사랑과 온전한 겸손과 온전한 온유를 비롯하여 흠과 티가 없는 충성과 절제와 인내를 실천하고자 하는데 범죄할 수밖에 없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마음속에 악심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한 로마서 7:15에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고자 하는 바울 사도가 범죄하기 쉬운 기회와 환경이 생길 때마다 마음속에 나타나는 죄악 때문에 고민하는 말씀이다.

 

㈎ 표면적인 죄와 내면적인 죄

로마서 7:19과 로마서 7:15 말씀은 표면적인 죄 때문이 아니고 내면적인 죄 때문에 고민하는 장면이다. 표면적인 죄란 행실을 통하여 나타난 죄를 말하는데 말이나 표정이나 행동을 통하여 범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표면적인 죄는 사람이 선한 교육을 받고 양심을 따라 살고자 최선을 다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나타나지 않도록 할 수는 있다. 예를 들면 공자나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등을 비롯한 덕망이 높은 분들의 생활 인격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표면적인 죄 때문이 아니고 마음속에 나타난 죄 즉 내면적인 죄 때문에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면적인 죄는 표면적으로 즉 행실로 범죄한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나타난 죄 즉 분노, 미움, 화냄, 원망, 시기, 질투, 음욕 등의 악심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면적인 죄는 어느 때에 나타나는가? 성도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천대받을 때, 애매한 욕을 먹을 때,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침 뱉음을 당하고 중상모함을 받게 될 경우 또한 음란한 잡지나 영화나 비디오를 볼 때 마음속에 원망이나 분노나 음욕 등의 악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계획한 일이 형통하고 필요한 것들이 풍성하게 채워질 때는 악한 마음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범죄하기 쉬운 환경과 기회가 생길 때마다 마음속에 악심이 나타나기 때문에 고민하게 되는 것을 로마서 7:8-24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7:8을 보면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죄는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난 자범죄 즉 표면적인 죄가 아니며 마음속에 나타난 내면적인 죄도 아니고 영과 육체 가운데 뿌리 박혀 있는 죄성을 가리켜 말한다. 이 죄성(罪性)은 조상들로부터 유전되고 있는 원죄(原罪)이다.

모든 사람들의 영과 육체에는 죄성이 뿌리박혀 있지만 범죄하기 쉬운 환경이 없거나 편하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은 마음과 행실 가운데 죄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갑자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큰 손해를 본다거나 좋은 옷이나 음식이나 집이나 물건들을 보거나 음욕이 자극될 수 있는 환경이 생긴다면 선한 마음만 가지기를 원하는 성도의 마음속에 분노나 미움이나 탐욕이나 음욕 같은 악심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경험을 죄가 기회를 타서 내 속에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말씀 중에서  기회 란 범죄하기 쉬운 환경과 조건이 생긴 때를 가리켜 말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영과 육체에 뿌리 박혀 있는 죄성 즉 원죄는 범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마음과 행실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죄를 죄성과 내면적인 죄와 표면적인 죄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계명은 십계명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빛에 대한 말씀을 가리켜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계명이 성도들의 양심 가운데 새겨지면 이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계명대로 온전하게 살고자 할 때 죄성이 자극되어 마음속에 각양 각색의 악심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28의 말씀대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라고 깨달은 성도가 음란 비디오나 음란한 영화나 잡지에 나타난 음란한 장면들을 볼 때 음욕을 품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음란성과 성욕이 자극을 받아서 음욕을 품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을 가리켜 말한다.

 

㈏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로마서 7:9을 보면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법 은 성도들에게 지키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한 말씀 즉 계명을 가리켜 말하며  나는 죽었도다 에서  나 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성도들의 선한 의지를 가리켜 말한다. 그리고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라는 것은 순간적인 마음 상태를 설명한 것인데 이 말씀은 범죄할 기회가 생겼을 때 영과 육체 가운데 뿌리 박힌 죄성이 자극되어 마음 가운데 악심이 나타나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 즉 선한 의지가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린 경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범죄하지 않으려고 다짐하고 노력하던 선한 마음 즉 선한 의지가 범죄하기 쉬운 환경이 나타나자 순식간에 없어져 버리고 오히려 미움이나 분노, 음욕 같은 악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성도들의 마음을 점령해 버리는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한 마음만 가지고 싶어하던 의지가 악심에 사로잡히는 순간 죽은 것처럼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순간이 지나가면 성도들은  내가 왜 그랬던가 라고 하면서 후회하게 된다. 이처럼 순간적 경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로마서 7:10을 보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해석해 보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계속적으로 실천해야만 생명을 얻게 되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쓰다가 범죄할 기회가 나타나면 도리어 죄성이 자극되어 순간적으로 악심이 마음을 점령함으로써 선한 의지는 죽은 상태가 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계명이 없을 때 즉 양심에 하나님의 빛된 말씀이 없을 때는 계명을 지키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고민할 필요도 없었으며 죄성의 자극도 받지 않았다. 그런데 계명을 알고 난 후에는 즉 양심 가운데 하나님의 빛된 말씀이 들어온 후에는 범죄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 계명을 잘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죄성이 자극되어 악심이 더욱 잘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죽이는 계명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로마서 7:11을 보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범죄하기 쉬운 기회가 생겼을 때 죄성이 자극되고 마음속에는 악심이 들어와 선한 의지가 없어져 버리는 순간적 경험을 가리켜 말한다.

 

㈐ 죄의 법(죄성의 법칙)

로마서 7:18을 보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 자신이 경험한 것을 로마서 7:8-17에 기록한 바와 같이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순간순간 마음속에 나타나는 죄의 세력 때문에 계속 고민하다가 깨달은 결론인데 바울 사도 자신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평상시에 선한 생활을 잘하여도 범죄하기 쉬운 환경이 나타나면 죄성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그순간에는 마음속에 나타난 죄의 세력을 이기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을 행할 능력은 내면적인 생명의 능력을 의미하며 이긴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로마서 8:2의 해설을 통하여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로마서 7:20을 보면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바울 사도께서 아직 생명과를 먹지 못했을 때 자신의 심령 속에 원죄 즉 죄성의 뿌리가 박혀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과를 먹지 못한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험이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에서 나 즉 선한 의지와 죄 즉 죄성을 분리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심령 속에 거하는 죄 때문에 수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으나 이러한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유교의 교조(敎祖) 공자는 예의범절이 뛰어난 성현군자였다. 공자는 70여세 때 세상을 떠나셨는데 임종시에 탄식하면서 남긴 말씀을 보면 “내가 70평생 도를 닦으며 예절을 실천하고 가르쳤는데도 마음속에 나타나는 탐심을 없게 하지 못하고 죽는구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아무리 위대한 종교가이며 성현군자일지라도 마음속에 순간순간 나타나는 악심을 정결케 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신령한 복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로마서 7:21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한 법 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7:8-20까지의 모든 말씀에서 범죄하기 쉬운 환경이 나타났을 때 마음속에 나타나는 죄 때문에 계속하여 탄식하고 고민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는 가운데 하나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발견한  한 법 을 헌법이나 계명 같은 것이라고 잘못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서 7:21에 나온  한 법 은 로마서 7:23, 25에 나오는 죄의 법을 가리켜 말한다.

죄의 법은 죄성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범죄하기 쉬운 기회만 주어지면 상습적으로 마음속에 분노나 미움이나 질투나 신경질이나 탐욕이나 이기심이나 음욕이나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과 같은 악심들이 나타나게 되는 상태를 가리켜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악심들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써도 거듭거듭 강한 죄의 능력으로 마음속에 침투하는 현상을 가리켜서 죄의 법 즉 죄성의 법칙이라고 한 것이다. 법칙이란 예외 없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원리를 가리켜 말한다.

이 죄의 법칙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만의 법칙, 자랑하는 법칙, 남을 무시하고 천대하고 경시하는 법칙, 자고하는 법칙, 포악의 법칙, 분노의 법칙, 미움의 법칙, 짜증내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법칙, 혈기의 법칙, 신경질내는 법칙, 성냄의 법칙, 욕설하는 법칙, 비방하는 법칙, 음욕의 법칙, 호색의 법칙, 태만의 법칙, 질투의 법칙, 시기의 법칙, 아집의 법칙, 이기주의의 법칙, 억지부리고 고집부리는 법칙, 거짓의 법칙, 기만의 법칙, 중상모략의 법칙 등등 다양하다.

이러한 죄성의 법칙은 사람마다 다양하고 강하거나 약한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질투하는 성질이 강한 사람은 남들이 자기보다 잘되거나 은혜를 많이 받았다거나 설교나 기도를 더 잘한다거나 성적이 훨씬 좋아졌다거나 좋은 주택이나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거나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 직접 손해를 주지 않았는데도 마음속에 질투심 즉 질투의 법칙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교만성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소유 즉 용모나 가문이나 주택이나 학벌 또는 성적이나 실력 등등이 자기 소유보다 부족하고 적을 경우 또 자기보다 설교를 못하거나 기도를 많이 못한다거나 찬송을 잘못 부른다거나 은혜체험이 적다거나 신앙년조가 짧다거나 나이가 어리다거나 하면 마음속에 무시하거나 자랑하거나 자고하는 죄의 법칙이 잘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죄의 법칙이 마음속에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자면 자기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했다든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든지, 혹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거나 일확천금을 하였거나 고대하던 아들을 낳았을 때 마음속에 큰 기쁨과 만족과 감격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러한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무시하고 중상모함하고 비방, 욕설을 한다해도 일시적으로는 마음속에 분노의 법칙이나 원망이나 성냄의 법칙이 잘 나타나지 않게 된다.

또한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기적으로 고침을 받거나 성령충만을 받고 갈급하게 사모하던 은사체험을 했을 때, 마음속에는 기쁨과 만족감이 가득하기 때문에 비방이나 욕을 먹고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얼마 동안은 악심 즉 죄의 법칙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그러한 기쁨이나 감격은 사라지고 또 다시 마음속에 죄의 법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7:24을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로마서 7:8-23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성도가 선한 마음만 가지고 빛된 생활을 하고자 하여 죄의 법칙이 마음속에 나타나지 않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해 보았으나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적인 탄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절규한 것도 사람의 방법과 노력으로써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법칙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가졌다고 탄식하며 절망한 것이다.

이제는 죄의 법으로 말미암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에 대하여 알아본다. 로마서 7:25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죄의 법 때문에 극심하게 고민하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죄의 법칙에서 해방되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증거한 복음이다. 웨슬리 신학에서 말하는 완전성화 즉 성결은총은 바로 이러한 경험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죄의 법에서 해방되는 경험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 로마서 8: 생명과를 먹은 성도들의 경험

로마서 8:1-2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정죄(定罪)받지 않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범죄하고 회개하면 용서받기 때문에 정죄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 7:8-24에서 성도들이 고민하던 죄의 법에서 해방되어 범죄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더 이상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마서 8:2은 대단히 중요한 복음진리이다. 이 복음진리를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죄와 사망의 법 을 죄의 법칙과 사망의 법칙으로 나누어 본다. 여기에서 사망의 법이란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로마서 7:24과 같이 몸 가운데는 죄성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마음속에 죄의 법칙이 나타나므로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가졌다는 뜻이다.

 

㈎ 죄의 법에서 해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로마서 8:2에 나온 바와 같이 죄의 법칙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생명의 성령의 법칙이 나타나야만 된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성령의 법칙이 성도들의 마음에 나타나야만 죄의 법칙 때문에 고민하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죄의 법칙이 능력의 법칙인 것처럼 생명의 법칙도 능력의 법칙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생명의 법칙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초인간적인 내세의 능력이다.

이 생명의 법칙은 성령의 열매 즉 선행의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의 법칙이다. 생명의 법칙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사랑의 법칙, 희락의 법칙, 화평의 법칙, 오래 참음의 법칙, 자비의 법칙, 양선의 법칙, 충성의 법칙, 온유의 법칙, 절제의 법칙, 겸손의 법칙, 용기의 법칙 그리고 정직의 법칙 등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도들의 마음속에 생명의 법칙이 나타나게 되는가? 그것은 계시록 2:7에서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과 같이 생명과를 먹음으로써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과를 먹었다는 것은 이긴자들의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內住合一)된 경험을 가리켜 말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생명이 영 속에 내주합일된 이긴자들은 그 마음속에 생명의 법칙 즉 내세의 능력이 나타나므로 죄의 법칙에서 해방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썬다 싱을 비롯한 기독교의 많은 성자들과 성녀들은 이러한 경험을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서 7:8-24까지의 말씀들은 광야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나타나는 경험이고, 로마서 8:2은 성도들이 생명의 땅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경험을 분명히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하고 마음속에 생명의 법칙이 나타나 죄의 법칙에서 해방된 성도들은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대환난을 면제받고 휴거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성도들은 로마서 7장과 8장에 대한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휴거에 대한 진리를 잘못 알고 있다. 어떤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으면 누구든지 휴거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으며 또 어떤 성도들은 성령 충만이나 방언, 신유, 예언, 통변, 영 분별, , 환상, 입신, 성령의 불 등의 은사체험을 하면 휴거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기도 하다. 또 어떤 성도들은 자정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많이 하거나 늘 깨어서 생활한다고 하면서 낮에는 자고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는 가운데 휴거될 것으로 믿는 믿음만 있으면 무조건 휴거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1983년 여름철 어느 날 큰 교회에 다니고 있는 이쫛쫛 권사님이 오셨는데 이분은 그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공로가 많은 분이었다. 이 권사님이 휴거되는 성도에 대한 진리 즉 로마서 7장과 8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깨달으신 후에 하시는 말씀이 자기 교회의 담임 목사님은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은혜가 풍성하고 성령이 충만하기 때문에 대부분 휴거될 것입니다.”라고 강력하게 설교하였다고 한다. 그때 이 권사님은  큰 일 났구나. 우리 교회 목사님은 자신이 휴거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도들이 휴거될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너무나 잘못된 말이구나. 라고 하면서 큰 걱정을 하였다. 그래서 걱정하는 이유를 물어보았는데 그 권사님은 설명하시기를 그 교회의 목사님은 얼마 전에 나온 자신을 매장하기 위하여 이단시하는 책을 읽어보는 순간 자신과 함께 일했던 교역자들이 자신에 대하여 애매하게 헐뜯고 중상모함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크게 격노하면서 저주하는 말을 하였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항의를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격분했던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기를 “자신을 헐뜯고 중상모함한 교역자들과 다시 화목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목사님은 이러한 경험을 주일에 모든 성도들 앞에서 설교 중에 간증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때 그 목사님은 자신을 이단시하고 비방, 중상모함하는 사람들이라도 사랑하겠다고 하면서 전체 교인들에게도 그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자고 설교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그 교회의 모든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이 최고로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마친 다음에 이 권사님은 그 목사님이 간증한 내용을 분석해 보면서 비록 기적과 은사를 많이 나타내는 분일지라도 순간적이나마 흥분하고 격노했던 것을 볼 때 아직까지 죄의 법칙에서 해방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휴거될 준비가 되지 못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걱정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많은 교역자들이 휴거에 대한 진리를 잘못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휴거되는 성도들은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케 되고 생명과를 먹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로서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뿐인 것이다.

 

【중요사항 4】 성경에 나온 생명과를 먹은 성도들에 대한 다른 표현들

)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들

에베소서 6:11을 보면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冑)를 입었다는 것은 성도들의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된 것을 가리켜 말한다. 성도들의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되면 성도들의 영체에는 전신갑주를 입은 것처럼 신비로운 생명의 능력이 감각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순간적인 경험이 아니고 계속적인 경험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면 마음속에 생명의 법칙이 나타나므로 마치 사람이 전신갑주를 입었을 때 적의 화살이나 칼이나 창이 몸을 찌르지 못하는 것처럼 마귀의 화살 즉 죄의 법칙이 결코 심령 속에 침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어 영 속에 있던 죄성이 제거된 성도들 즉 이긴자들이라도 육체 가운데는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육체 가운데 남아 있는 죄성의 법칙이 마음을 지배하려고 하지만 이긴자들은 생명의 전신갑주를 입었기 때문에 죄성의 법칙이 마음속에 침투하지 못하는 것이다.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경험을 하였다.

또한 『천로역정』(天路)의 저자 존 번연도 장망성(將亡城)을 출발할 때 전신갑주를 입은 것이 아니고 간난산(艱難山) 꼭대기에 있는 미궁(美宮)에 들어갔을 때 전신갑주를 입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어거스틴도 하나님의 생명이 영 속에 내주합일되면 온 몸에 신비로운 생명의 감각이 계속적으로 나타난다고 증거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은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들이다.

 

) 인맞은 종들

요한계시록 7:1-4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7장에는  네 천사가 바람을 붙잡고 있는 기간  즉  교회시대  동안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1-4절을 보면 교회시대에 하나님께서 144,000명의 인맞은 종들을 만드시는 계획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교회시대 동안 144,000명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는 일을 끝내신 후에 7년 대환난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침을 받았다 는 것은 온전하게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가장 충성스럽고 착한 사역자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증표이다. 이와 같이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성도들이다.

 

) 처음 익은 열매들

요한계시록 14:4-5을 보면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은 처음 익은 열매들이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추수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 교회시대의 전체 성도들 중에서 이긴자들 144,000명만 처음 익은 열매로 추수하시는 것이다.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익은 열매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계시록 14장을 보면 두 번째 익은 열매로 순교자들을 추수하시고 계시록 20:1-4을 보면 세 번째 익은 열매로 대환난을 통과하고 살아남은 성도들을 추수하신다고 하였다.

 

)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들

로마서 8:23을 보면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하였다.

로마서 8:23에 나오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와 계시록 14:4에 나오는 처음 익은 열매와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계시록 14:4의  처음 익은 열매 는 교회시대의 이긴자들로서 교회시대에 이 땅에 살면서 광야연단과정을 마치고 익은 열매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공중강림하실 때 처음으로 추수되어 곳간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을 가리켜 말한다. 로마서 8:23에 나온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라는 말씀을 볼 때 성령께서도 성도들의 신앙이 점진적으로 익는 것 같이 익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성령의 익은 열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한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이 출애굽할 때부터 성도들의 신앙을 인도하기 시작하신다. 성도들이 광야의 길을 통과하면서 신앙이 성장할 때 즉 익어갈 때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과 행실을 점진적으로 깊고 넓고 온전하게 지배하시면서 정결케 하시는데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을 가리켜 성령이 익어간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성도가 광야연단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성령께서도 익은 열매가 되시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성도의 심령을 온전히 주장하시게 된 것을 가리켜 말한다.

앞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성령의 익은 열매를 받았다는 것은 생명과를 먹었다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들은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이다. 그리고 성령의 두 번째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들은 두 번째로 추수되는 순교자들이고, 성령의 세 번째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들은 세 번째로 추수되는 성도들이다.

 

) 생명에 들어간 성도들

마태복음 7:13-14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분석해 보면 생명을 얻은 후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좁은 문과 좁은 길을 다 통과해야만 생명을 얻는 장소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성도들은 처음 믿을 때부터 생명을 받은 것으로 즉 하나님의 생명이 영 속에 내주합일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 8:2의 경험에 들어간 줄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출애굽할 때 생명과를 먹고 광야의 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생명과를 먹을 수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좁고 협착한 길 즉 광야의 길에서 마귀와 세상과 역경을 싸워 이겨야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9:16-22을 보면 “…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한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생명을 얻은 다음에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것은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좁은 문과 좁은 길을 통과해야 된다는 마태복음 7:14과 같은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고 하신 말씀에 대해 그 부자 청년은 모든 계명들을 지켰다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고 하셨다. 여기에서 보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께서  생명에 들어가려면 이라고 하신 말씀을 볼 때 보화는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화를 얻기 위하여 소유를 버리라는 것은 물질적인 소유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애정과 욕망을 가지고 추구하는 모든 것들을 버려야만 보화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이 광야의 길을 통과할 때 정욕에 속한 모든 소유들을 버리고 정결한 마음과 행실을 가져야만 생명을 얻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 신의 성품에 참예한 성도들

베드로후서 1:4을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분석해 보면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축복 가운데 가장 보배롭고 큰 축복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도들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기 위하여 준비해야 될 조건은 세상에서 썩어질 것 즉 정욕적인 것들을 철저히 버리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광야의 길을 통과하면서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는 마음과 행실을 정결케 한 후에라야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의 성질이 마귀의 영 속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으므로 성도들의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되면 신의 성품은 자동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된 경험을 가리켜 신의 성품에 참예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큰 은사 즉 사랑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

고린도전서 12:30-31을 보면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빛의 열매와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을 나타내 주신다. 성령의 은사들은 고린도전서 12:8-11에 기록한 바와 같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각종 방언, 방언 통역 등 아홉 가지와 그외 성령 충만, 입신, 불 체험, , 환상, 영음, 영서, 귀신 쫓음, 진동, 부상, 투시 등 다양하다. 이러한 은사들은 모든 성도들이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직분이나 성격이나 재능, 지식 또는 봉사하는 환경 등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성도들은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므로 각 지체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각양 은사들을 나타내셔서 열심히 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성화되게 하시며 빛의 열매를 많이 맺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도들에게는 방언이나 통변이나 예언의 은사를 주시고 어떤 성도들에게는 입신, 환상, 꿈 등을 체험하게 하시고 또 어떤 성도들에게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주시는 등 다양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성도들은 여러 가지 은사들을 받기도 하고 어떤 성도들은 한두 가지 은사를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31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앞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은사들보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큰 은사는 간구 하기만 하면 즉시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사모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큰 은사는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가?

바울 사도께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 후에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말씀을 기록한 것을 볼 때 더욱 큰 은사는 사랑의 은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랑의 은사는 오래 참고 온유하고 투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거나 성내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등 완전한 덕행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은사이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랑의 은사는 베드로후서 1:4에 나오는 신의 성품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의 성품은 하나님의 생명이 성도의 영 안에 내주합일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랑의 은사는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마음과 행실을 정결케 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 즉 이긴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병 고치고 귀신 쫓고 영 분별, 입신, , 환상, 방언, 통변, 예언 등의 은사들은 성도들이 광야에서 신앙생활 하는 동안에 필요를 따라 언제든지 체험할 수 있지만 더욱 큰 은사 즉 사랑의 은사는 이긴자들과 같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에게만 경험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큰 은사 즉 사랑의 은사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받은 줄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어떤 성도가 불신자 시절에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동정하고 구제하는 생활을 하다가 교회에 들어와서 성령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마음이 뜨거워져 더욱 많은 구제와 긍휼을 베풀게 되었다. 이러한 생활 모습을 보면서 사랑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잘못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이긴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더욱 큰 은사 즉 사랑의 은사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로마서 5:3-5을 보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하였는데 이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진다는 것이다. 이 소망은 쉽게 설명하면 완전한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란 말씀은 성도들이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은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된 경험을 하게 됨으로써 천국에 대하여 완전한 소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큰 은사는 이긴자들에게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랑이 마음에 부어지는 경험을 가리켜 말한다.

 

) 열두 사도들의 경험

요한복음 13:8-10을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는 공생애가 거의 끝나가는 최후의 만찬 때였으며, 사도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받았던 제자훈련과정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때 베드로가 완강하게 사양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고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옵소서 라고 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고 하셨다.

이상과 같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내용을 분석해 보면 사도들은 공생애 3년 동안 행실이 정결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온 몸은 깨끗하나 발을 조금 더 씻어야 된다고 하신 것은 제자들의 광야연단과정이 완전히 끝나지 않고 거의 끝나갈 무렵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20에서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서  그날 은 오순절 성령강림하신 날을 가리켜 말하며 그때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또한 요한복음 15:3-4을 보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고 하셨다. 이것은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실천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되는 경험을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들을 모두 종합해 보면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그때까지 제자훈련과정 즉 광야연단과정을 통하여 마음과 행실이 정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해 주셨고 오순절날 성령강림하실 때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고 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생명이 제자들의 영 속에 내주합일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사도들이 제자훈련을 받는 동안에는 결코 성령체험이나 은사체험들을 하지 못했고, 오순절날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처음으로 성령을 체험한 줄로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도들이 제자훈련과정에서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변화산 체험을 하거나 진리를 깨닫게 된 경험들은 모두 성령의 역사로 체험했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5)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

(1) 흰옷을 입혀 주심

요한계시록 3:5을 보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흰옷을 입는다는 것보다  이와 같이 라는 말씀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흰옷은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라면 누구든지 즉 이긴자들이 아닌 성도들일지라도 입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라는 말씀은 요한계시록 3:4에 나오는 내용을 가리켜 말하는데 그것은 사데 교회의 많은 성도들 중에서 그 옷 즉 자기 행실을 빨아 정결케 되었기 때문에 땅에 살면서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몇 명의 성도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몇 명의 성도들은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행실이 정결해진 성도들이므로 땅에 살면서도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이긴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긴자들은 사데 교회의 몇 명의 성도들처럼 교회시대 동안 땅에 살면서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흰옷이란 과연 무엇인가?

 

【중요사항 1】 계시록에 나온 흰옷에 대한 말씀들

요한계시록 3:4을 보면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하였다.

사데는 소아시아 즉 현재 터어키의 서부지역에 있는 큰 도시였는데 그곳에 세워진 사데 교회는 매우 큰 교회로서 교인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데 교회의 목회자는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즉 행위가 온전하지 못한 자라고 책망을 받은 것을 볼 때 흰옷을 입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교회의 많은 성도들 중에서 몇 명 즉 극소수의 성도들은 자기 옷을 깨끗하게 빨았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사데 교회의 몇 명 즉 극소수의 성도들은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더러운 자기 행실을 정결하게 빨았기 때문에 합당한 자라는 주님의 인정을 받았으며 머지않아 이 땅에 사는 동안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데 교회의 극소수 성도들은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7:9-14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14절 말씀과 같이 큰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큰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도 흰옷을 입고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 앞 즉 천국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만 흰옷을 입는 것이 아니고 큰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도 흰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중요시해야 할 것은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은 교회시대 동안 이 땅에 살면서 흰옷을 입은 성도들이고, 큰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은 큰 환난을 통과하면서  그 옷  즉 자기 행실을 빨아 정결케 한 후에 흰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흰옷은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입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3:18을 보면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였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회자는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멀었고 벌거벗은 상태이기 때문에 흰옷을 입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주님께서 권면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회자와 사데 교회의 목회자를 성령체험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착각하지만 일곱 별을 잡고 일하시는 주님의 손에 붙잡혀 일하는 사역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목회하는 분들이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사데 교회의 목회자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회자가 흰옷을 입지 못한 것을 볼 때 흰옷은 출애굽 즉 구원받을 때나 광야연단을 받는 도중에 입는 옷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성령체험을 했거나 은사체험을 했다고 하여 흰옷을 입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성도들이 꿈이나 환상을 볼 때 흰옷을 입은 모습이 나타났다고 하여 그것을 계시록에서 말하는 흰옷을 입은 것으로 착각해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흰옷은 이긴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아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옷이다. 의인은 의롭다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모든 죄 문제가 해결된 성도를 가리켜 말한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구원을 확보한 성도들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8:10을 보면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로마서 8:2을 체험한 성도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영 속에 내주합일된 성도들은 의롭다하심을 받음 즉 흰옷을 입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성도들은 이러한 진리를 잘못 깨닫고 초보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흰옷을 입은 줄로 착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죄를 범하기 쉬운 환경이 생겼을 때 죄성의 지배를 받아 분노나 미움이나 음욕이나 시기, 질투, 교만 그리고 고집 등을 마음과 행실로 나타내면서도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경험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진리를 잘못 알고 대부분의 성도들이 초보적 신앙을 가진 때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만약 성령을 체험하고 초보적 믿음을 가진 사람도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한다면 사데 교회의 사자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도 흰옷을 입지 못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시대 동안 땅에 살면서 흰옷을 입고 사는 성도들은 이긴자들 144,000명밖에 없는 것이다.

 

【중요사항 2】 계시록에 나온 세 가지 옷에 대한 견해

이제부터 계시록에 나온 세 종류의 옷 즉 자기 옷과 세마포와 흰옷에 대하여 알아본다.

 

) 자기 옷

㈎ 자기 옷에 대한 성경적 견해

자기 옷은 자기의 행실을 상징하는 말씀이다. 요한계시록 16:15을 보면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자기 옷 즉 자기의 행실을 지켜 벌거벗은 부끄러움 즉 죄성과 정욕이 자기의 행실을 통하여 나타나지 않도록 하고 선한 행실을 보이라고 권면하시는 말씀이다. 이때는 아마겟돈 전쟁이 시작되는 때이므로 지상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 즉 행실을 정결케 하라고 경고하는 말씀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7:14을 보면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말씀은 그 옷 즉 성도들의 행실이 보혈의 은총을 힘입어 대환난 중에 연단을 받으면서 빨아졌기 때문에 정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14을 보면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라고 하였다.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면 그 두루마기 즉 자기 행실을 빨아서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상의 말씀들을 통하여 알게 된 바와 같이 계시록 16:15에 나오는  자기 옷 을 계시록 3:47:14에서는  그 옷 이라고 하였고 계시록 22:14에서는  그 두루마기 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자기 옷은 더러워지기도 하고 깨끗해지기도 하는 옷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자기 옷을 빨아 정결케 해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자기 옷이 더럽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아 범죄하므로 행실이 더럽다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그러나 흰옷과 세마포 옷은 결코 때가 묻어 더럽혀질 수 없는 옷이다. 자기 옷은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할 때 빨아지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가나안 땅 곧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의 행실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해야만 되는 것이다.

 

㈏ 자기 옷을 빨 때 꼭 필요한 조건들

㉮ 어린양의 피(7:14)

요한계시록 7:14을 보면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큰 환난은 7년 대환난을 가리켜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흰옷을 입은 큰 무리는 대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인데 이들은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어린양의 피에 그 옷 즉 자기 행실을 빨아서 정결케 하였다는 것이다.

대환난은 성도들이 연단받을 수 있는 환경 즉 범죄하기 쉬운 환경이 많을 때이므로 성도들은 이때 크고 작은 죄를 많이 범하게 되지만 철저히 회개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보혈의 은총으로 용서받는 생활을 계속하면서 행실이 점진적으로 정결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마다 보혈의 은총을 의지하여 회개함으로써 용서받은 평안과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또다시 새롭게 되고자 하는 생활을 반복하면서 자기 행실이 점진적으로 정결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들의 행실이 정결해지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보혈은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된다.

이제는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연단받게 될 성도들에게 어떻게 보혈의 은총이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아본다. 성도들은 큰 죄만 회개해서는 안되며 작은 죄라도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철저하게 참회해야만 한다. 그리고 항상 보혈의 은총으로 용서를 받으며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 제가 오늘 또 짜증을 내었습니다. 주여 제가 또 넘어졌습니다. 보혈의 은총을 믿사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또 다시 그런 환경이 생긴다면 실패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정진할 때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게 된다. 만일 용서받은 확신과 평안이 없다면 양심의 가책에 짓눌려 좌절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받은 평안을 가지고 거듭거듭 용기를 내면서 정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오직 보혈의 은총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거듭거듭 회개하고 용서받으며 새롭게 되려고 정진할 때 성도들의 행실은 점진적으로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 연단받을 수 있는 환경(12:10)

다니엘 12:10을 보면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고 하였다.

다니엘서 12장은 대환난에 대한 말씀인데 그 중에서도 10절 말씀은 많은 성도들이 후 삼년 반 환난 동안 연단을 받으면서 행실이 정결하게 되고 희게 된다는 것이다. 대환난 동안 행실이 희게 된다는 것은 앞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어린양의 피로 자기 행실을 빨아 희게 한다는 것인데 자기 행실을 정결하게 한다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행실을 정결케 하고 희게 하기 위해서는 연단을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행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연단받을 수 있는 환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단받을 수 있는 환경은 장애물이나 방해하는 조건이 많은 거칠고 사나운 환경들을 가리켜 말한다. 이러한 환경들은 범죄하기 쉬운 기회와 조건들인데 로마서 7장과 같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범죄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범죄하게 되면 회개하고 보혈의 은총으로 거듭거듭 용서를 받으면서 점진적으로 마음과 행실이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환난 때는 범죄하기 쉬운 환경이 많기 때문에 종종 범죄하게 되고 자기의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참회하면서 회개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거칠고 사나운 환경 즉 범죄하기 쉬운 환경 속에서 작은 죄라도 범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연단받을 수 있는 거칠고 사나운 환경이 없고 평안하며 형통하기만 하다면 범죄하지도 않을 것이고 회개하지도 않을 것이며 예수님의 보혈도 필요하지 않게 되므로 성도들의 마음과 행실은 정결케 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연단을 받게 하는 것은 성도들이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가나안 땅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광야연단과정을 통하여 자기 행실이 정결해지는 것과 같이 성도들은 광야와 같은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자기 행실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 맑은 물(36:25)

에스겔 36:24-25을 보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세상 만국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마지막 때에 다시 본토 즉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 대환난을 통과하는 동안 정결하게 한다는 예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환난을 통과할 때 회개할 내용은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을 섬김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모든 더러운 것 은 죄성의 지배를 받을 때 나타나는 행실들을 가리켜 말하고  우상을 섬긴다 는 것은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맑은 물을 뿌린다고 하였다.

 맑은 물 은 생수와 같은 성령을 가리켜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과 행실이 정결케 된다는 것이다. 어린양의 보혈은총이 풍성할지라도 성령께서 빛에 대한 진리와 회개하는 마음과 선한 의욕과 뜨거운 감동과 신령한 은사들을 나타내 주시지 않는다면 정결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행실이 정결케 되려면 성령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 빛에 대한 말씀(15:3, 17:17; 5:26)

요한복음 15:3을 보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가 끝날 무렵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시면서 가르쳐 주신 빛에 대한 말씀 즉 교훈적인 말씀들을 통하여 제자들의 행실이 정결케 되었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의 행실이 정결케 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보혈과 연단받을 수 있는 환경과 맑은 물 즉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될 뿐만 아니라 빛에 대한 말씀도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빛에 대한 말씀 즉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성도들이 목표와 방향을 정확하게 알게 되므로 행실이 정결해질 수 있는 것이다.

 

㉲ 순종하는 의지(벧전1:22)

베드로전서 1:22을 보면 “너희가 진리를 순종하므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마음과 행실을 정결하게 한다는 말인데 이와 같이 되려면 진리를 철저하게 순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억지로 행할 때에는 정결해질 수 없는 것이고 자원하여 열심히 순종할 때만 온전히 정결케 되는 것이다. 성도들이 빛에 대한 진리를 순종하고자 할 때 마귀는 방해하려고 성도들의 생활환경 배후에서 온갖 시험풍파를 일으킨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에게는 연단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칠고 사나운 환경 속에서 죄를 범할 때마다 어린양의 보혈로 용서를 받으면서 새롭게 되고자 계속적으로 정진하는 가운데 마음과 행실이 정결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더러워진 자기 옷 즉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는 자기 행실이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보혈과 연단받을 수 있는 환경과 맑은 물과 빛에 대한 지식과 순종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조건들 중에서 단 한 가지만 빠져도 성도들의 행실은 정결하게 될 수 없다.

 

) 세마포

요한계시록 19:8을 보면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성도들의 선한 행실이 세마포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정확하게 해석한다면 세마포는 성도들의 선한 행실 자체가 아니고 성도들의 선한 행실에 따라 상급으로 만들어지는 옷이다.

어떤 여 전도사님이 입신하여 천국에 들어갔을 때 세마포를 만드는 장소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천사 한 분이 세상으로부터 올라오더니 세마포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천사에게 “지금 A라는 성도가 이러이러한 선행을 하였습니다”라고 하자, 그 천사는 즉시 실을 가지고 가서 A라는 성도의 세마포를 그 선행에 해당되는 만큼 짜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세마포는 이와 같이 성도들이 선행의 열매를 맺음에 따라 조금씩 만들어지는 옷이다. 그리고 세마포는 천국에서 영원토록 입고 살게 되는 옷으로서 상급에 따라 빛을 나타내는 옷이다. 상급을 많이 받은 성도들은 빛이 밝은 세마포를 입게 되고, 상급을 적게 받은 성도들은 빛이 덜 밝은 세마포를 입게 되는 것이다.

 

) 흰옷

㈎ 흰옷에 대한 성경적 견해

요한계시록 3:4-5을 보면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였다.

흰옷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은 성도들이 입는 옷이다. 다시 말해서 흰옷은 의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옷이다. 흰옷을 입은 성도들은 영혼 가운데 죄성이 없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 되었으며 타락하기 전 에덴낙원에 있을 때와 같이 의롭고 거룩하고 무죄한 상태라는 것이다. 또한 흰옷은 더럽혀질 수 없는 옷이며 세마포 옷과 같이 성도들의 행실에 따라 만들어지는 옷이 아니고 예수님의 보혈로 만들어진 은총의 옷이다.

흰옷은 자기 행실 즉 자기 옷이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정결하게 빨아진 다음에 가나안 땅 입구 즉 하나님의 낙원 입구에서 받아 입게 된다. 이와 같은 흰옷을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은 땅에서 사는 동안 입고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다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고, 큰 환난을 통과하는 성도들 즉 교회시대 동안 땅에 살면서 광야연단을 다 받지 못한 성도들은 천년왕국 입구에서나 영계의 낙원 입구에서 흰옷을 입고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은 누구든지 보혈은총으로 하나님께서 흰옷을 예비해 놓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의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기 전에는 흰옷을 입지 못한다.

 

㈏ 흰옷과 인침과 할례와의 관계

지금까지 알게 된 바와 같이 교회시대 이긴자들의 수는 144,000명이라고 하였는데 요한계시록 7:3-4을 보면 144,000명을 교회시대 동안 땅에서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종들이라고 하였다. 이 인침을 받는 경험과 할례와의 관계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경험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로마서 4:9-11을 보면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75세 때 부르심을 받아 출애굽하는 경험을 하였고, 85세가 되었을 때 후사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겨주신 경험 즉 칭의(稱義) 경험을 하였으며, 99세가 되었을 때 할례를 받고 약속받은 후사로 이삭을 잉태하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99세 때 할례받은 것은 로마서 4:11에 나온 바와 같이 아브라함이 85세 때 믿음으로 인정받은 의 즉 칭의받은 것을 인친 것이다. 여기서 인침받았다는 말은 도장을 찍음으로써 완전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할례는 성도들이 의롭다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경험을 득의(得義) 경험이라고도 말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75세 때 구원을 받으면서부터 99세 때까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점점 정결해진 것이다. 즉 광야연단과정을 24년 동안 통과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99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의롭다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표로 육체의 할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99세 때 할례받은 것은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과 같이 인침을 받고 이긴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할례 즉 인침받는 경험은 의롭다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은 것을 상징하므로 아브라함은 99세에 흰옷을 입게 된 것이다. 따라서 흰옷 입는 경험이나 인침받는 경험이나 할례받는 경험은 동일한 경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할례산과 영적 할례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보여주신 모형적 진리 중에서 할례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를 알아보기로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노정을 마치고 여호수아의 영도를 받으며 요단강을 건넌 직후 할례산이라는 장소에서 할례를 받게 되었다. 할례(割禮)는 남자들의 양피를 베어 버리는 의식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의 길을 통과하는 동안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가나안 땅 입구 즉 길갈 지역에 있는 할례산에서 모든 백성들이 한꺼번에 할례를 받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산에서 할례를 받게 된 것은 천국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나안 땅이 할례받은 백성들만 들어가서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례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의롭다하심을 받은 성도들의 모형이다. 즉 흰옷 입은 성도들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여호수아 5:8-9을 보면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는 할례산에서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라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여기에서  애굽의 수치 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굽은 이 세상을 상징하는데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수치스러운 것이 무엇일까? 학벌이 부족하거나 지식이 모자라거나 가난하거나 가문이 나쁘거나 못생겼거나 질병에 걸렸거나 세상적인 행복의 조건들이 없기 때문에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의 심령과 육체 속에 뿌리 박힌 죄성 때문에 부끄럽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3:18을 보면 “…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고 하셨는데 이것은 죄성의 지배를 받을 때 나타나는 행실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6:15에도 보면 “…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부끄러움은 죄성을 가리켜 말하는데 부끄러움을 보이지 말라는 것은 죄성이 행실로 나타나지 않도록 늘 깨어서 철저하게 빛된 생활을 하라는 권면의 말씀이다. 이와 같이 죄성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느껴야 할 가장 부끄러운 것이다. 애굽의 수치 즉 죄성은 영혼 가운데 뿌리 박혀 있는 죄 덩어리이므로 용서받아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뿌리를 뽑는 것과 같이 제거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산에서 받은 할례는 하나님의 낙원 즉 하나님의 나라 입구에서 성도들의 영혼 가운데 뿌리 박힌 죄성이 굴러 떨어지는 경험에 대한 모형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여 행실이 정결해진 다음 하나님의 낙원 입구에서 비로소 죄성의 뿌리가 뽑히는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죄성이 굴러 떨어지는 경험을 영적 할례 즉 영혼의 할례라고 말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영적 할례은총을 받게 되는 할례산이 출애굽하던 장소나 시내산이나 광야의 어떤 장소에도 없었으며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 입구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광야연단과정을 다 통과하고 가나안 땅 입구에 있는 할례산을 통과할 때 비로소 영적 할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99세 때 이와 같은 영혼의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상징적인 증표로 육체의 할례를 받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75세 때부터 24년 동안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한 것이고 99세 때 비로소 할례산을 통과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던 이스마엘을 비롯한 많은 남자들도 할례를 받았지만 아브라함과 같이 영적 할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 또한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되는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도 영적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서 2:28-29을 보면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고 하였는데 이 말씀 중에서 마음의 할례라는 말은 영적 할례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골로새서 2:11을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말도 곧 영적 할례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할례은총은 사람의 능력이나 선행으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순수한 하나님의 은총 즉 보혈은총으로만 받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게 된 바와 같이 성도들은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마음과 행실을 정결하게 한 후에, 할례산에서 실업자와 같이 된 죄성이 굴러 떨어지게 되는 영적 할례의 은총을 받고 의인이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할례를 받는 경험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는 경험 즉 흰옷 입는 경험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은 땅에서 사는 동안 가나안 땅의 입구 즉 할례산을 통과할 때 영적 할례를 받고 가나안 땅에서 생명과를 먹으며 살고 있는 성도들이다. 또한 땅에서 사는 동안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다가 공중강림하실 때 휴거되는 성도들이다. 그리고 144,000명 이외의 성도들은 큰 환난을 통과할 때 자기 옷 즉 자기행실을 정결하게 한 후에 천년왕국 입구에서 흰옷을 입게 되고, 지상재림 전에 죽어서 영계로 들어간 성도들은 낙원 입구에서 흰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2)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으심

요한계시록 3:5을 보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였는데,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라는 말씀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어도 흐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성도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때는 출애굽할 때이다.

그리고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반드시 흐리지 않는다는 말씀은 이긴자들에게 완전한 구원을 보장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가 지워진 사람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히 버림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출애굽기 32:32-33을 보면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고 하였다.

또 히브리서 6:4-6을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  즉 성령을 훼방한 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가도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가 지워진 사람들의 실례를 들어보면 가룟 유다, 몰몬교의 교주 요셉 스미스, 통일교의 문선명, 천부교의 박태선, 승리제단의 조희성, 팔령산 기도원의 전병도, 하나님의 교회의 안상홍, 기독교 복음선교회의 정명석 등등의 이단교주들과 신앙생활을 일시적으로 잘하다가 타락한 사람들이다.

 

 

 

 

6)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2:17).

 

(1) 감추었던 만나를 주심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고 했는데 감추인 만나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던 것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셔서 항아리에 넣어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밑에 있는 법궤 속에 보관하라고 하셨다(16:31-34). 그러므로 만나가 감추어진 장소는 지성소의 법궤 속이다.

요한복음 6:48-51을 보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볼 때 만나는 떡이라고 하였고 떡은 또한 예수님의 살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떡을 먹으면 생명이 있고 떡을 먹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만나는 곧 생명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 6:53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속죄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구원받을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살과 피를 주셨으므로 속죄은총을 받아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성도 즉 의롭다하심을 받은 성도가 되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속죄은총으로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면 생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살과 피로 말미암아 준비된 속죄은총을 힘입어 자범죄와 원죄가 완전히 해결되면 하나님의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감추인 만나에 대한 해석을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아래의 법궤 속에 있는 만나와 싹난 지팡이와 돌비에 대하여 알아본다. 앞에서 알게 된 바와 같이 만나는 하나님의 생명 즉 그리스도의 생명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나가 하나님의 보좌 아래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공급해야 될 생명의 원천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십계명이 기록된 돌비가 하나님의 보좌 아래에 있다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실천해야 될 선한 말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모든 말씀의 원천이 되신다는 것이다. 또한 싹난 지팡이가 하나님의 보좌 아래에 있다는 것은 부활의 능력 즉 모든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생명과 말씀과 능력의 원천이 되시므로 이긴자들에게 감추인 만나를 주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생명이 이긴자들의 영 안에 내주합일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에게는 땅에 사는 동안 감추인 만나 즉 하나님의 생명이 영의 지성소에 내주하게 되고, 천국의 성소 즉 지방으로 들어가는 성도들은 영적 할례를 받은 후 영의 성소에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하시게 된다. 따라서 천국의 지성소는 새 예루살렘 즉 3층천이므로 영의 지성소에 생명이 내주한 성도들 곧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은 영적 질서에 따라 새 예루살렘 즉 천국의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2)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주심

성경에는 생명되신 예수님을 산돌 혹은 머릿돌, 모퉁이 돌, 뜨인 돌이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돌이란 예수 그리스도 즉 생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흰 돌이란 예수님의 의로운 생명을 가리켜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의로운 생명을 받았다는 것보다 천국에서 영원히 부르게 될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긴자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새 이름을 꼭 알고 생활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가나안 땅의 기업 즉 천국의 처소가 확보된 분들이기 때문에 천국에서 영생할 때 사용하게 될 이름을 정해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이긴자들의 경지에 들어갈 때에 새 이름을 받은 대표적 성도들이다. 즉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야곱은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

 

 

7)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1).

 

(1)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심

둘째 사망이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20:14-15을 보면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둘째 사망은 불못 즉 영원한 지옥을 가리켜 말한다. 그리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가 둘째 사망 즉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어떤 성도들은 이 둘째 사망이라고 부르는 지옥이 천년왕국시대와 백보좌 심판이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생기는 줄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 당시에나 현재에도 불못 즉 지옥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 19:20을 보면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보면 후 삼년 반 환난 동안 성도들과 온 세상을 미혹하고 박해하던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후 삼년 반 환난의 마지막 순간에 즉 지상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께서 아마겟돈 심판을 하실 때 산채로 불과 유황못 즉 지옥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불못에 들어가는 때는 7년 대환난이 끝나는 때이며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직전이므로 둘째 사망 즉 불못은 천년왕국과 백보좌 심판이 끝나기 전에도 영계에 실재하고 있으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불신자들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유황불 붙는 못 즉 지옥을 무저갱이라고도 부른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0:2-3을 보면 “용을 잡으니 곧 옛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잠깐 놓이리라 는 말씀은 마귀가 잠시 풀려났다가 다시 무저갱에 갇힌다는 말이다. 이 말씀대로 요한계시록 20:7-8을 보면 천년왕국시대가 끝난 후에 마귀가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천년왕국 백성들을 미혹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 옥 은 지옥 즉 마귀가 일천 년 동안 갇혀있던 무저갱을 가리켜 말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10을 보면 천년왕국 백성들을 미혹하던 마귀가 다시 유황불 붙는 못 즉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있어 세세토록 고통당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것을 볼 때 유황불 붙는 지옥은 마귀가 다시 들어간 무저갱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 준다.

또한 마태복음 25:41에도 보면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신 것을 볼 때 분명히 무저갱은 불신자들과 마귀들이 들어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지옥 즉 유황불 붙는 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긴자들에게 약속하신 바와 같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해주신다는 말씀은 둘째 사망 즉 유황불못에 들어가지 않게 하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저갱으로부터 나오는 해롭힘까지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긴자들의 반열에 들어가지 못한 성도들은 지옥형벌은 받지 않으나 둘째 사망으로부터 나오는 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계시록 9:4-6을 보면 큰 환난 즉 7년 대환난을 통과하는 성도들은 무저갱 속에서 나오는 황충같은 악령들에게 해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저갱이 열리는 때는 7년 대환난의 전 삼년 반 중반기에 다섯째 나팔재앙이 시작될 때이며, 그때 지옥에 있던 수많은 황충들 즉 악령들이 풀려나와 사람들을 해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인맞은 종들 144,000명은 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대환난 직전에 휴거되었기 때문에 해롭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출처 : 우매자가 본 하늘과 땅
글쓴이 : 우매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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