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이란? 목회 상담!!!

[스크랩] 영성과 목회상담

하나님아들 2013. 3. 15. 01:12

영성과 목회상담

                                           
                                                              -상담자의 영성을 중심으로-
 
 
                                                                                                                                                김현수,임태집,한병수
 
 
   서론
 
마태복음 9장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이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고 말씀하신다. “천국에서 누가 크(마18:1)”고 묻는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마18:4)”라 말씀하신다. 복음서에는 상식을 훌쩍 뛰어 넘는 동문서답이 대화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인간 편에서 생각하는 문제의 핵심과 하나님의 영원한 관점과 맥락에서 보시는 문제의 본질은 하늘과 땅, 동과 서가 만나지 못함과 같다. 이사야는 이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상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사55:8-9)”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발표를 통해 인간의 성장과정을 따라 나타나는 독특한 문제와 그 처방에 대하여 함께 고민해 왔다. 인간이 느끼는 필요와 그에 따른 해결책은,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인간의 진정한 필요와 목마름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모스는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평가가 어떻게 다른 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인간은 기근이 있을 때, 양식 없는 주림이요 물 없는 갈함으로 이해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평가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가장 근원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의 발달 단계별로 나타나는 문제에 관하여도, 심리학자들의 깊고 섬세한 탐구가 비록 무익한 것은 아니나 문제의 근원을 밝히지는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결국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영성)을 아는 것이 유일한 처방이라는 결론이 불가피하다.
 
영성의 기원과 문자적 의미는 이미 시대적 정황에 묻혀 전혀 새로운 옷을 입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기원과 자구적 의미를 떠난 상황 중심의 접근은 사고의 뱡향을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본 논고에서는 영성의 정의와 기원을 간략하게 다루고 그것이 목회상담과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 살펴 보고자 한다. 포스트 모던시대의 영향은 영성의 개념규정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준과 한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시대의 이방인을 자초하는 일이라 여겨질 정도다. 그러나 수많은 영성의 정의가 난립하는 추세를 싸잡아 무시할 수는 없기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영성은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 면에서 너무도 크기 때문에 건전하고 다양한 모든 정의를 다 합하여도 다 말할 수 없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돌 맞지 않을 정도의 의미부여라 생각한다. 그리고 목회상담에 대한 개념도 단순히 가까운 거리, 고립된 공간, 그리고 비밀유지라는 조건에 제한하지 않고 폭넓은 개념을 사용하려고 한다. 즉 목회자의 성도를 향한 모든 활동이 포괄적인 목회상담이라 규정하려고 한다. 그래서 영성과 목회상담의 새로운 정의 위에 두 개념의 만남을 진술하고 이를 위한 실천적 방안을 몇 가지 제안하는 것으로 소략한 일필을 거두려 한다.
 
본론
 
1. 영성의 정의
 
영성의 정의가 얼마나 다양한 지 보고 믿는 약자를 위해 열거하자면, “기독교 영성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양성되어 가는 과정에 관한 것)”,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존 맥쿼리는 영성을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는 것, 인간행위를 유발하는 어떤 태도나 정신으로서, 구체화된 종교적 윤리적 가치의 총칭”“하나의 거룩하고 근본적인 존재를 향한 방향성” “주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 가운데서 경험하는 삶의 변화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 “하느님의 음성을 나의 생각과 느낌, 나의 고통과 질병들 안에서 듣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참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느님께로 가져 가는 것”“하나님의 은덕을 알도록 일깨워 주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묶어진 경외”“우리들에게 신앙을 선택하게 하고, 가치 있는 일에 전념하게 하며,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신앙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 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것”“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또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존중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반응”등이 있다.
 
영성(靈性, 영: spirituality, 독: Spiritualität, 화: spiritualiteit)이란 말은 원래 불어spiritualité에서 온 것으로 카톨릭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의 ‘영성’과 비슷한 용어로 중세에 ‘헌신(devotio)’이라는 단어가, 종교 개혁자들은 ‘경건(pietas)’으로 대체하였다. 이는 대단히 실천적인 개념으로, 야고보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θρησκεια, pietas, worship)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약1:27)”이란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 경건의 정의이다. 필자는 종교 개혁자들의 경건(pietas) 개념을 영성과 동일시 하여,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인데, 즉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 영성의 기준과 범위
 
결론부터 말하면 영성의 기준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며, 경건의 범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다. 즉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까이 하는 것이며, 영성은 성경을 비롯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통해 추구되어야 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전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까이(성화의 개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키면 비록 손의 방향을 의지해야 하지만 우리는 손가락 넘어에 태양을 보는 자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과 만물은 그것이 지시하는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보아야 하지만 그 자체에 머물면 오류와 왜곡이 불가피해 진다. 물론 성경과 만물 그 자체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되면 세상과 성도들의 칭찬과 존경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지시하는 태양, 만물이 향하여 있는 그 태양을 보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만 발견되는 은밀한 우상 숭배자가 되고 말 것이다.
 
1) 성경이 가리키는 영성
 
성경의 핵심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유익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요5:39)”이라고 하였으며, 구체적으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눅24:44)”이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것임을 재확인하고 있다. 나아가 성경 전체를 언약과 성취의 구조로 이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약 전체는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할 언약의 기록임을 말하시고,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은 구약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이 바로 신약의 내용임을 알게 하는 설명이다(눅24:44-47). 이상에서 살펴본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신 성경(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경의 궁극적인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놓치거나 부정하는 자들은, 성경의 역사적 배경과, 문법적인 맥락과, 저자와, 자작년도와 의도를 알게 되면 성경이 더 명확해 진다고 생각하여 고고학과 이성적 탐구에 과도한 집착을 보인다. 이것은 과거 카톨릭이 범한 기독교의 치명적인 오류인데, 인간의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룩한 이성이라 할 수 있는 교회가 성경을 정경화 하는 것은 정당하며, 이에 성경의 권위는 교회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성의 활동이 성령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은혜보다 선호되는 현상은 모든 시대마다 교회의 일관된 위협으로 나타났던 일이다. 특별히 독일의 루터주의는 하나님이 유대인을 버렸기 때문에, 거듭난 이성의 산물인 바이마르 헌법이 유대인의 율법인 구약보다 우월하다고 하여 성경을 파괴하는 일을 하였고,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침묵으로 동조하였다. 이런 역사적 사건은 성경의 바른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 우리를 깨우쳐 주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확인해야 할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요14:6)”다는 것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요14:9)”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며, 자신을 증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하시기 위해 오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손가락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으면 그분이 지시하는 태양을 스스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를 가리키고 있는 특별계시, 성경 전체를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믿어야 할 것이다.
 
2) 만물이 가리키는 영성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롬1:20)” 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롬11:36)” 간다는 만물의 존재 이유와 방식과 목적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물과 사건과 사상을 건드려도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며, 오류와 거짓만 토해낸 것과 같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 만일 그것이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요21:25). 만물과 인류의 전역사가 크고 넓어 보여도 예수 그리스도에 비해서는 그의 육체로 있을 때 행하신 일도 다 담을 수 없을만큼 작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는 “모든 충만(골1:19)”,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골2:3)”, “신성의 모든 충만(골2:9)” “모든 정사와 권세(골2:10)”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셨다. 즉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골1:16)”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28:18)”가 그에게 주어졌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엡1:10)”셨으며, 이로써 바울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6)”라고 찬송하고 있다.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물이고, 그 안에 있으며, 그를 향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원래 가치를 회복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만물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가치-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를 발견하고 정복하고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롬8:19)”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만물이 가리키는 태양을 보지 않고 볼 수도 없는 사람들은 만물 자체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생의 전부를 썩어 없어질 것에 투자한다. 믿는 자들은 불평과 원망과 상처와 시기와 비교와 정죄와 배반과 행악에 빠지게 되는 것이며,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체질이 녹아 없어질 만물 자체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우상 숭배자가 된다. 특별히 과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들은 실존이 탐구의 대상이며, 실존 그 자체에서 목적과 가치를 찾고 만족한다. 아마 역사가 종결되는 때에, 일반 학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상식이 최고의 가치요 신비라는 것만 규명하게 될 것이며, 이것이 일반 학문의 유일한 기여가 될 것이다.
 
신약이나 구약이나 만물이나 하늘에 속한 보이지 않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존재하지도 않고 설명되지도 않고 아무런 가치와 목적과 의미도 찾지 못한다. 주님은 한분이신데, 그분은 너무도 크신 분이시며, 우리의 언어로 다 말하거나 담을 수 없는 분이시다. 수많은 장르와 학문과 시대와 상황과 인물과 만물이 다 동원되어도 그분을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창15:1)”이 되시려고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으며, 자신의 영을 보내사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게 하셨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하늘과 땅의 권세와 만물을 소유하게 되고 타락 전의 상태와 비교할 수 없는 차원으로 초청된 것이다. 이것을 알고 소유하고 누리는 자가 참된 영성을 가진 하나님의 기뻐하고 사랑하시는 자다. 그런 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에 그분이 그 안에 거하는 자만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이되는 것이다. 목회자는 이런 영성의 소유자로 모든 목회활동을 해야 한다.
 
3. 목회상담에 대한 정의
 
목회상담의 일반적인 정의는 대개 다음과 같다. “목회상담은 이렇듯 인문과학 특히 심리학 혹은 정신의학과의 접맥을 통해 인간 내면을 이해하고 효과적인 상담 기법을 수용, 발전, 적용하여 고통받는 인간으로 하여금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변화가 일어나도록 도우며 더 나아가 그의 영적 영역의 아픔까지 통찰하여 궁극적 치유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도록 촉매작용을 하기위한 생명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대개 학자의 신학에 대한 편파적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의 정의를 내린 사람의 신학을 살펴보면, “신학이 '이론'에 그치는 상아탑의 말장난에 그쳐서는 안되며 이 세상에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을 향하여 힘이 되어줄 역군을 배출해 내는, 생명의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서 보듯이 아는 것과 믿는 것을 분리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신학에 사변에 치우쳤다는 것은 신학의 개념을 올바르게 정립해야 하는 문제이지, 신학과 실천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는 빌미로 삼아서는 안된다.
 
목회상담은 대개 목회를 위한 성도 개개인과의 만남과 대화라고 칭하는 학자가 많은데, 이는 일반 심리학이 규정한 개념의 틀 속으로 아무런 검증도 없이 들어가는 위험한 일이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상담의 사전적 개념인 것은 사실이나, 대화의 수단을 언어로 제한하거나 둘만의 언어교환으로 이해하게 되면 일반심리학의 개념을 수용한 것이며, 일반심리학의 원리와 기법을 따라 한 인격을 기계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불가피해 진다는 말이다. 그럼 기독교의 목회상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독교 목회상담은 목회자의 성도에 대한 전인적 활동 전체를 의미한다. 외적인 삶과 내면의 세계가 다 동원되고, 직접적인 영향과 간접적인 영향을 다 포함하는 목회자의 존재 자체가 목회상담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향기와 성령의 열매가 성도의 정체성을 말해 준다는 것과 일반이다. 나무를 열매로 알 듯이, 목회자도 목회자다움을 그의 열매와 향기로 아는 것이며, 이는 조작과 은폐가 불가능한 부분이다. 필자가 규정한 상담의 개념은 이처럼 목회자의 전인격이 영성으로 장악되어야 할 것을 요청한다. 목회자는 죽고 그리스도만 살아야 하고, 목회자는 무익한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는 전인적인 삶이 내담자에게 주는 최상의 답변이다. 내담자의 모든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만물 안에서, 사람 사이에, 자기 자신에게서 발생한 것이다. 영성의 기준과 범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성경과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를 가리키고 있다고 하였다. 하늘과 땅에 있는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빛과 열매를 드러내면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명하셨다. 우리를 초청한 것은 온전함을 위한 것인데, 그 온전함의 수준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함이다. 철저히 죽고 그리스도만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빌1:21)”이라고 고백한다.
 
4. 여러 가지 실천적인 방법
 
성경은 능히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실천의 최고봉이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지상요청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라고 하였다. 그런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온전함을 추구한 발자취는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있는데, 역사 속에 큰 모델이 되었던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하고 필자의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1) 성 베네딕트 수도원
베네딕트의 규칙은 신약성서 전체를 인용하면서 그밖에 성 카시아노, 성 바지리오, 성 어거스틴, 성 파코미우스 등의 규칙을 참조하고 있다 하나님께 봉사하는 학교 개념의 베네딕트 수도원은 겸손을 완덕의 어머니요 참된 애덕(애덕)의 꽃으로 삼고 있다. 이는 은혜의 준비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 완전한 마음가짐이 겸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겸손이 하늘 높이까지 오를 수 있는 이들의 비법은, 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 ② 제고집을 억제하는 것, ③ 윗 어른의 모든 명령에 복종할 것, ④ 아무리 괴롭고 모욕을 당해도 인내하고 피하지 않는 것, ⑤ 마음 속에 떠오르는 나쁜 생각, 은밀한 행위를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 ⑥ 모든 사람의 머습이 되어 비천한 일도 순종하는 것, ⑦ 입으로 말고 마음 속으로 자기는 가장 부족하고 비천한 자라 확신하는 것, ⑧ 자기 수도원 회칙 밖에 다른 것은 하지 않는 것, ⑨ 다른 사람이 물을 때까지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 ⑩ 말할 때 쉽게 웃지 않는 것(웃음이 헤프지 않는 일), ⑪ 말할 때 냉정하고 큰 목소리나 웃음소리 내지 않고 말이 적으나 위엄 있고 이상적으로 말하는 것, ⑫ 마음의 겸손을 그 생황의 모본으로 남에게 나타낼 것 등이다.
 
2)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영성에는 세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① 부지런한 활동적 생활, 즉 전도, 설교, 자선사업 같은 봉사생활, ② 지극히 고용한 관상생활, ③ 청빈의 영성, 즉 예수님의 가난을 지극히 사모하는 것 등이다. 여기에 추가할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이 있다면 복음을 완전무결하게 생활화 하는 것인데, 즉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께서 성인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하나님에게 반대되는 모든 이기적인 경향, “육의 정신”을 버리고 주님의 정신대로 사는 것이다.
 
3)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이냐시오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위한 본질적인 길은 긴 시간의 기도라고 한다. 그의 기도는 관상기도인데, 관상기도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청원이나 추리작용, 상상력을 멈춘 채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본질과 만나는 무념적 방법이다. 그러나 이냐시오의 유념적 관상기도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애의 사건들을 상상력을 통하여 내면화시켜 복음서의 이미지가 살아있는 사건으로 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수련방법의 뛰어난 점은 신인접촉의 매개체로 성경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유념적 관상기도의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 본문을 선택한다. 그리고 본문을 거듭 읽는다. 그때 마음에 깊은 느낌이 오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코자 침묵하면서 내면을 평정한다. 그리고 준비 기도를 한다. ① 길잡이 상념: 지금 관상코자 하는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생각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고 있는 장소와 모습을 기려본다. 사도를 파송하는 데 내가 바라는 은총을 기도한다. ② 관상의 깊이: 처음에는 구경꾼 입장에서 점차 나도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됨으로써 그때 현장에 접촉케 한다. 보통은 한 시간 정도로 끝내면 좋지만 관상의 깊은 경지, 즉 수동적 기도가 되면 긴 시간 기도에 파묻힌다. 그것이 주부적 관상(infused contemplation)이다. 관상기도에 중요한 것은 기도가 끝난 후에 반추하는 일이다(기도의 흐름, 성경의 영감, 메시지, 무엇이 문제인가, 기도의 목적과 효과 등).
 
4) 케네스 리치
리치는 신약의 서신서에서 3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발견하는데, ① 크리스찬의 영적 성숙은 사회적 행위이며, 크리스찬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에 뿌리 내려져 있다는 것, ②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성장과 진부를 포함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 ③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옷 입는 것이고, 그 본성에 참예하는 것 등이다. 영적 성숙을 위한 방법은 씨름하기, 숙고하기, 제초하기로 구분한다.
 
첫째 씨름하기는 야곱과 하나님의 씨름에서 발견한 아이디어다. 씨름의 특징은, 탈진상태에 처하게 되는 그 씨름의 말미에도 야곱은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 것(창32:29)과, 씨름의 결과 야곱은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영적 성숙이란 상처가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 안의 딜레마와 혼란들 사이의 대결에 있어서 평탄한 질의응답의 과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죽는 결말이 요구되는 싸움이 바로 야곱의 씨름이었음을 기억하자. 이것이 씨름의 한 국면이다. 그러나 리치는 씨름의 또다른 국면을 소개하면서 ‘영적 성장의 과정은 전쟁과 폭동들, 실업과 파업들, 인종차별과 억압, 부와 빈곤의 세상 안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씨름에 있어서 하나는 말씀과 나와의 싸움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이 세상 안에 있는, 우리의 이웃들 안에 있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적 주제들과의 싸움이다. 우리를 뒤흔드는 질문들이 무시하면 사라져 버리고, 억누르면 잊혀질 것이라는 가정은 착각이다. 씨름을 정당화 하기 위해 리치가 택한 원리는, 성육신의 진리,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체를 취하셨다는 진리는 물질적이고 지상적이고 육체적인 영성과 그 영성에 토대를 둔 세상 한복판에서 행동하는 헌신이 바로 그것이다. 성육신은 ‘은혜의 세속성(carnality of grace)’, 영적 실재의 물질적 토대, 모든 육체 안에의 그리스도의 현존, 인간이라는 사실의 존엄성과 인간 안에 깃든 잠재적인 영광을 강조한다. 가난한 사람들, 지친 사람들, 무시당하고 파산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며 섬기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은 바로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된 진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체를 무시하고, 인간의 열정과 성욕과 열심을 두려워 하며, 정치의 세계를 치사하고 전염되기 쉬운 것으로 간주하여 단호하게 회피하는 영성을 선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성육신이다.
 
두 번째는 숙고하기(brooding)이다. 숙고하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 되어 우리를 변형시킬 때까지 우리가 그 말씀을 맛보고, 소화시키고, 흡수하는 것을 말한다. 사막의 교부들이 추한 숙고의 방법은 침묵이었다. 그것은 내적인 각성(vigilance), 주의집중의 상태, 하나님을 기다리는 상태, 중단되지 않는 깊은 기도이 상태를 의미한다. 리치는 침묵과 고독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 침묵과 고독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필요한 첫 번째 단계인 자기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길이다. ② 침묵과 고독은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 안에서 기도하도록 허용함으로써 묵상기도의 삶을 더욱 깊게 해 준다. ③ 목회적 돌봄과 영성 지도에서 듣는 능력은 묵상과 고요와 내적 침묵 안에서 그 자양분을 공급 받는다. 동방의 교부들은 종종 ‘신성한 어두움(divine darkness)’과 ‘불가지(unknowing, agnosia)’를 통한 앎을 언급하고 있다. 기도는 점점 우리의 활동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활동이 되어 간다. 우리는 통제권을 잃고, 때때로 붕괴 직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어두움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보다 분명하게 보게 되며, 보다 치열하게 사랑하게 되고, 보다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
 
세 번째는 제초하기(weeding)이다. 이것은 성경을 이념적(ideological) 의심과 석의적(exegetical) 의심을 가지고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문화적 요소의 영향으로 발생한 말씀의 왜곡된 해석이 발견되고 이를 적극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닌데, 이는 우리가 모두 우리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세가지 영적 성장의 방법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 리치는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한다.
① 씨름하는 센터, 성경적 통찰의 빛 아래 오늘날의 위기들에 관한 열린 토론과 논쟁이 확보되는 공개토론회,
② 개인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창조적 숙고와 기도의 마음으로 성경을 읽기 위해 요구되어 지는 고독과 공간이 확보되는 조용한 장소, ③ 복음의 진리가 정결케 되고 명백하게 되기 위한 계속적인 제초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시설들 등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대안
 
1) 예언자적 목회자
 
현대 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필요한 목회자의 참모습은 영리한 경영자적 리더십이 아니라, 선한 예언자적 목자의 모습이다. 그는
① 강력한 비전과 분명한 인식과 통찰, 그것이 바로 그들의 선포로 연결되는 사람이며,
② 깊이 있는 기도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 하나로 통합된 사람이다.
③ 또한 그들은 꾸준히 땅에 귀를 기울이며,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 부지런히 살펴 정확하고 분명한 현실인식을 가지고, ④ 역사의 한 시점에서 발생한 오늘의 사건들을 영원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들이다.
⑤ 때로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행(奇行)을 보인다. 이사야는 삼년 동안 벌거벗은 채 맨발로 걸어 다녔고, 에스겔은 양식을 인분 불에 구워 먹었고, 예레미야는 쇄사슬로 몸을 두르고 성읍을 걸어 다녔다. 그러나 이색적이고 미친 것처럼 보이는 이런 기행은 우리가 상식과 합리성으로 깨닫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깊은 것을 알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비와 만나며, 거룩함이 제정신을 위협할 수 있는 의식의 경계선들을 잡아당기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⑥ 그러나 이들은 대단히 인격적인 사람이다. 종교법의 껍질을 혐오하고 형식이 가리키는 인류의 우주적인 도덕 관념에 호소하는 자들이다. 정의와 자비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도 견딜 수 없어 하시는 것임을 이들은 고백한다.
 
2) 예언자적 목회방향
 
예언자적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겐 교회의 구조와 목회방향을 성경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목회의 방향은 그 백성 한사람 한사람의 영적 성장이라는 개념의 재정립을 요구한다는 말이다. 이런 목회는 신학을 목회의 중심으로 삼는 관점과, 신학은 본질적으로 기도와 묵상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관점을 동시에 수반한다. 목회 사역의 우선순위도 이런 방향을 따라 재편성 되어야 한다. 이런 우선순위의 역전을 위해 필요한 실질적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① 먼저 신학교나 목회자 훈련 프로그램에서 영성 훈련의 틀을 형성하여, 기도의 삶 속에서의 성장과 영성신학이 그 프로그램의 중심에 자리잡게 해야 한다. 즉 기도의 훈련, 침묵과 묵상의 훈련, 하나님의 임재의 인식을 더욱 깊게 하는 것, 사람들이 영적 성장의 원리들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 모든 신학적 활동을 예배와 기도의 영역 안에 자리잡게 하는 것 등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② 그리고 우리는 전문가적, 경영자적, 조직가적 역할보다 성례적, 은사적, 신학적, 예언자적 역할에 강조점을 두는 목회의 관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③ 또한 우리는 다수 복리주의(multitudinism)와 교회성장을 수적 통계로 판단하는 것을 거부하고 남은 자들을 일으켜 세워 양육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④ 나아가 우리는 이웃 교회들 간의 연결망과 영적 지도력과 영적 자양분의 배치도를 만들어야 한다.
 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영성훈련의 환경적 틀, 즉 영의 생태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목회의 방향전환이 없다면, 교회성장은 아마도 피상적인 덩치 불리기와 그것을 위한 교회의 질적 타락만 가져올 것이다.
 
결론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유아들, 아동들, 청소년들, 청년들, 중년들, 노년들-에게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연령층이 가지는 다양한 문제가 있으며 있을 수밖에 없다는 목회자의 통찰이 필요하다. 심지어 동년배 속에서도 대단히 다양한 문제가 발견된다. 또래의 문제도 다양하고, 세대간의 문제도 다양하고, 민족마다 다양하고, 시대마다 다양한 문제가 교회의 존립을 위협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제도와 운영방식의 변화에서 찾을 수 없다. ‘이 시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눅16:8)’롭다는 주님의 지적을 받아 들인다면, 외적인 조작으로 임기웅변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영원을 사는 그리스도인보다 더 지혜롭게 처신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가 많고 다양하고 심각하다는 것은 문제 자체를 바라볼 때는 암담하지만, 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면, 도대체 주님은 얼마나 크시며 얼마나 세미하시면서도 크신가를 역설하고 있다는 사실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주님을 가까이 하여 주님만 그 안에 살게 되어, 우리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는 고백이 합당한 그런 목회자라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오히려 문제가 심각하고 중할수록 그런 목회자에겐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영광이 드러날 것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건과 설명을 통하여 거듭 확증하고 있다. 이에 바울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롬8:38-39)’다고 확신한다. 이사야는 세상에서 구원을 기대하는 자들에게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 하며 풀 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 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 버렸느냐(사51:6-13)’고 호통을 쳤다.
 
호세아의 절규처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시95:3-6).’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 곧 예수님의 영생에 대한 정의다. 이 영생에 대한 바울의 정의는 거룩의 완성(롬6:22)이라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모든 더러운 것과 흠과 티와 병든 것과 어그러진 것이 전혀 없는 거룩의 완성이 영생인데, 이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나의 모든 존재로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여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사는 온전한 앎을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치유다. 목회상담의 목표는 바로 이것이어야 한다. 세상이 임기웅변 식의 거짓된 처방을 본받아 하나님의 교회를 기업이나 조직의 원리로 목회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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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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