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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서적 용서와 심리치료

하나님아들 2014. 1. 22. 13:49

성서적 용서와 심리치료

박종수 교수(강남대학교/성서와 분석심리학)




1. 왜 용서해야 하는가?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우리는 왜 용서해야 하는가? 예수의 말씀처럼 죄를 범한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의미로, 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예수는 천국의 비유를 통해 용서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23-35).




예수는 용서를 빚을 탕감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셨듯이 우리도 형제의 빚을 탕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빚진 자(opheilethes)는 “신세를 진자” 혹은 “은혜를 입은자”란 의미를 내포한다(참조. 롬 1:14).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마땅히 형제의 빚(죄)을 탕감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임금에게 자신의 빚은 탕감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빚을 탕감해주지 못한 것은 악한 사람만의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악한 종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이기적 자아를 대변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은 무제한적인 용서, 즉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초월적인 용서를 의미할 것이다.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과도 일치한다. 기독교의 대명제인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원수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과 동일선상에 있다. 마가복음 역시 무조건적인 용서를 말한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막 11:25).

우리는 불의한 종의 빚을 탕감한 예수의 비유가 “천국에 대한 비유”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제한 적이며 초월적인 용서는 우리가 사는 현실의 몫이 아니라 “천국”의 몫이 아닐까? 그것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원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말과도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는 원수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왜 그럴까? 예수의 명령이기 때문일까? 우리의 이성과 사고는 예수의 명령을 실천해야 됨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그것을 실천할 수 없음을 절감할 때가 많다. 이러한 괴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예수님 역시 이러한 우리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지를 지은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 때 용서는 의외로 쉬워질 수 있다. 예수 역시 용서를 위해 회개의 필요성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 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그렇다면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하는가? 아니면 무제한적인 용서만이 성서적 용서인가? 눅 17:3은 회개가 마치 용서의 전제사항처럼 느끼게 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구절은 가해자에 대한 자비로운 행위로서의 용서를 말하고 있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 17:4).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더욱 박해를 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의 말씀은 가해자에 대한 연민은 가해자의 회개행위와는 별도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가해자의 회개가 용서의 전제사항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화해를 위한 전제사항이지 용서를 위한 필수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용서는 화해과정의 일부이지만, 용서가 반드시 화해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2.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가?

우리는 채무자의 빚을 탕감해 줄 수 있다. 원수의 죄도 어느 정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와 거리가 먼 윤리적, 도덕적, 신앙적 죄일 경우에 해당된다. 이제 좀 더 심각한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친아버지로부터 어릴 때부터 성적인 학대를 당한 아이가 어떻게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남편으로부터 수십 년 동안 이유 없는 폭행을 당하며 죽음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아온 아내가 어떻게 남편을 용서할 수 있을까? 힘이 없어 친구들에게 따돌림과 폭행을 당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아이가 어떻게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가해자가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용서할 수 있을까? 백번 양보하고 가해자를 이해하면서 용서한 후에, 가해자의 이전 행위가 다시 반복될 때 그 때에도 용서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용서하려고해도 용서가 되지 않은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왜 그럴까? 용서한 후에도 분노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인가? 어떤 이들은 그와 같은 용서는 거짓용서이거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용서라고 규정한다.1) 그렇다면 용서하지 못하거나 용서하고 나서도 분노를 제거하지 못한 사람은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것인가? 반대로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려고 한다. 이것은 다분히 “용서는 선택”이라는 책을 쓴 엔라이트의 견해와는 상충된다. 그의 결론은,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용서를 안 할 수도 있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용서하게 되면 용서하는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2) 그런 의미에서 용서는 선택이다. 과연 그럴까? “선택”이라는 단어는 일단 의지의 결단과 관련이 된다. 엔라이트는 용서가 인간의 결단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거나 그 반대가 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복수의 대극인 용서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 사랑이 인간의 의지로 결정되지 않은 초월성을 지닌다면 용서 또한 무의식적이며 초월적인 정신활동이다. 성서 또한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는 용서가 인간의 몫이 아닌 하나님의 몫임을 암시한다(마 18:21-35). 칼 융이 제창한 분석심리학은 용서를 원형적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용서는 그 대극인 복수감정과 함께 다루어질 때 그 성격이 드러난다.

복수감정은 인간의 분노(화)에서 출발한다. 분노는 일단 자신이 부당하게 피해를 보았거나 상처를 입었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자연스런 정동(affects)이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아이”라는 말을 듣고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온갖 학대를 당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는 부모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3) 분노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용서는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용서의 단계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분노의 발생원인과 분노를 해소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분노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반응으로 이어진다.

첫째, 어떤 대상으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을 때 발생하는 분노는 복수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분노와 복수는 가해자에 대한 공격성의 본능적 표현이다. 이런 관점에서 융학파 분석가인 위너(J. Wiener)는 공격성을 “원형적 잠재력”(archetypal potential)으로 규정한다.4) 공격성의 원형적 속성은 양면성이 있다. 긍정적인 공격성은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부정적인 공격성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히게 된다.

분노 역시 공격성과 마찬가지로 원형적 힘(archetypal power)으로서 대극성을 지닌다. 분노의 폭발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같다. 두껍고 무거운 지표를 뚫고 올라온 마그마는 마치 무의식의 억압된 요소가 의식이 약화된 틈을 타서 수면위로 올라오는 것과도 같다. 분노는 부당한 대우에 대한 정당한 항의로 표현된다. 만약 부당한 학대를 당하고도 아무런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생명력 있는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분노는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연발생적이며 원형적인 힘이다.

둘째, 가해자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어떤 사람은 복수를 포기하거나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 있다. 때로는 가해사실을 축소하거나 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가해자에게 대항할 힘이 없거나, 주변의 상황이 복수를 용인할 수 없을 때 이런 현상이 생긴다. 복수를 포기하거나 가해사실을 축소하더라도 무의식의 억압은 가중되어 정신의 어두운 곳에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은 부정적 콤플렉스를 형성하고 열등감을 조장하여 그림자의 억압을 확장시킨다. 어떤 이들은 가해자의 박해를 방어하거나 물리치지 못한 자신을 학대한다. 자아구조가 약한 사람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정당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분노를 외부에 표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존감을 상실한 자아모습에서 드러난다.

셋째, 부당한 공격을 받아 형성된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반드시 흘러갈 곳을 찾는다. 리비도의 흐름은 정신활동의 본질적 성향이다. 어떤 형태로든 가해자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지지 못할 때, 분노의 감정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공격의 대상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종로에서 뺨맞고 을지로에서 분풀이한다”는 우리 속담이 말해주듯이 가해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함으로써 엉뚱한 대상에게 피해를 준다. 남편에게 구박당한 아내는 힘이 약한 자녀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의 상사에게 구박받고 퇴근한 아버지는 아내나 자녀들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다른 대상에게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이 때 주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희생양이 되며,5) 또 다른 분노의 화산이 된다. 이처럼 분노는 부정적 감정을 옮기는 일종의 전염병과도 같다.

넷째, 어떤 이들은 자신의 분노감정을 억제하면서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용서는 분노의 감정이 고조될 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용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이다. 분노의 감정이 해소되지 않은 채 용서를 하게 될 때, 그것은 “거짓용서”이거나 “성숙하지 못한 용서”가 된다. 자신의 도덕적 신념 혹은 신앙관이나 사회적 인격 때문에 내리게 되는 용서는 방어기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예를 들면 분노의 감정이 해소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목회자로서의 사회적 인격(페르소나) 때문에 용서했다면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용서를 택한 셈이 된다. 이것은 진정한 인격의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거짓용서나 미성숙한 용서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행위라면 정신의 건강한 반응이다. 하지만 자아구조가 약한 사람의 부정적인 방어기제는 인격의 성숙을 저해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용서는 가능할까? 티핑(C. Tipping)은 원형의 투사양태를 통해 용서의 정도를 측정한다. 자신을 부당하게 학대했던 가해자를 용서했는데, 그 가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게 한 행위를 반복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혹은 전혀 다른 대상 사이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과 유사한 사건을 발견하게 될 때 과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성폭행으로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당한 후에 가해자를 용서하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 가해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그를 최종적으로 용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제 그 사건을 극복하고 일상생활에 복귀했을 무렵, TV에서 자신이 당한 사건을 보게 될 경우 그는 어떤 감정에 젖어들게 될까? 과연 그런 사건을 관조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와 같은 사건을 보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을 때 그는 아직 분노의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고 용서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티핑의 주장이다.6) 그의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면 용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짧은 시간에 내려지는 결단의 결과도 아니다. 오히려 용서는 일생동안 진행되는 개성화과정과도 같다.7)

우리는 용서의 과정을 살피기 전에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생기는 분노와 그 밖의 유사한 감정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감정들의 양태에 따라 복수와 용서에 대한 방향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분노에 동반되는 정동에는 격분(rage), 증오(hatred), 불만(grievance) 등이 있다. 위너는 분노를 격분(rage)과 구별한다.




분노와 복수는 연결된 정동이지만 정신기능 측면에서 볼 때 서로 다르다. 일반적으로 분노는 일종의 “콤플렉스 감정”으로서 자신이 바라는 목적이 성취되지 않거나 좌절되었을 때 생긴다.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분노는 보통 의식적이며, 자아(ego)와 관련된 인지적 속성을 지님으로써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다. ... 이 때 자아(ego)와 자기(self) 모두가 관여한다. 분노는 반드시 파괴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분노는 종종 정상적이고 건강한 자기애적 성향의 일부이거나 사회적 상호작용을 규정하기 위한 시도이다. ... 분노감정이 만족스럽게 조절되지 못하여 걱정과 분열로 이어질 때, 그 분노는 구조화되지 못하거나 억압되어 격분의 단계로 발전된다.8)




위너에 의하면 분노는 자아(ego)와 자기(self)가 연관된 정동이다. 하지만 격분은 무의식에서 발생한 태고적 정동으로서 몸(body)을 사로잡고 자기를 자극한다. 따라서 격분이야말로 화산폭발과 더욱 가까운 유비를 보여준다. 격분은 상처의 결과이며, 일종의 자기애적 상처로서 종종 수치심과 연결된다. 격분은 분노와는 달리 자아를 초월하여 무의식의 중심인 자기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달리 말하면, 분노는 자아에 의해 어느 정도 통제될 수 있지만, 격분은 무의식적 충동으로서 의식의 범주를 벗어난다. 통제불능 상황으로 이어진 격분상태에서 용서감정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부정적이며 억압적 감정인 격분은 결국 자기(self)에 대항하여 건강한 생명력을 상실케 한다.9)

칼 융 역시 격분을 태고적이며 원형적인 정동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격분으로 인해 이성을 상실할 때, 이미 우리 자신이 아니며 악한 영에 사로잡힌 상태이다.”10) 이런 의미에서 격분은 마치 미친 상태(madness)와도 같다. 따라서 격분은 무의식의 억압이 파괴적 양태로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분노는 복수의 욕구를 가속화시킨다. 비록 의식적 노력으로 복수감정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할지라도, 자아는 어느 정도 복수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격분상태에서의 복수는 대개 현실 속에서 비참한 보복사건으로 이어진다.

연속적인 가해행위는 피해자의 불만(grievance)으로 이어지고, 지속적인 불만은 증오(hatred)를 야기시킨다. 증오는 가해자를 파괴하고,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이 겪은 고통을 경험하게하려고 하며, 가해자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분풀이하려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감정은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무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분노, 격분, 혹은 증오로 인해 발생하는 복수감정은 자아의 통제력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다만 복수를 현실적으로 실행할 것인가 아닌가가 문제될 뿐이다. 현실적인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복수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분노와 격분은 상당부분 무의식의 정동이기 때문이다. 복수의 감정이 원형적 정동이라면 용서 또한 원형적 힘이라고 볼 수 있다. 집단무의식에 있는 원형은 신적인 속성을 지닌다. 원형은 무의식의 중심이자 전체 정신의 중심인 자기(self)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11)

증오는 사랑하는 감정의 다른 표현이다. 사랑하지 않은 대상에게 증오의 감정 또한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증오가 무의식적이라면, 사랑 역시 무의식적이며 초월적이다. 사랑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기보다는 무의식적 욕망에 더 가까이 있다. 무의식적이며, 영적이며, 영혼의 세계에 더욱 가까이 있는 사랑이야말로 자기원형의 대표적인 현현이다. 다음의 성서구절은 사랑이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영역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증오와 사랑은 서로 대극을 이룬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수와 용서 또한 대극을 이루는 원형적 힘이다. 신적인 속성을 지닌 원형은 대극의 합일을 통해 개성화를 인도한다. 증오 없는 사랑이 가능하지 않다면, 복수감정이 없는 용서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동시에 질투(증오)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출 20:3)는 배타적 사랑은 이미 그 안에 질투감정을 포함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질투는 지극히 건강한 정신활동이다. 남녀 간에도 적당한 질투와 적절한 사랑이 조화를 이룰 때 원만한 관계가 형성된다. 자아가 감당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콤플렉스를 양산할 뿐이다. 복수감정 또한 용서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대극의 관계에 있는 복수와 용서는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개성화의 주역이 될 수 있다. 용서는 가해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제로 한다.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고 화해를 청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피해자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랑의 힘이다. 가해자의 지속적인 박해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은 자아(ego)의 결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self)의 통전적이고 원형적인 힘에서 야기된다. 따라서 복수가 원형적인 힘(공격성)이라면, 용서 역시 원형적 잠재력이다. 그것은 의식적 차원에서 설명될 수 없다. 무의식 차원의 사랑은 용서라는 형태로 의식화된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는 의식활동의 결과라기보다는 자아와 자기 축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개성화과정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용서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그것은 자아의 결단 범위를 초월한다. 가해자에 대한 무의식 차원의 분노와 격분, 그리고 증오가 복수감정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경험되어 질 때 비로소 그 대극인 사랑과 용서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피해자의 분노감정은 어떤 형태로든 복수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복수 자체는 원형적 잠재력이며 자신을 지키는 방어기제이다. 분노감정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다.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판단은 철저하게 피해자의 몫이다. 복수감정에 대한 판단은 그 정당성의 유무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피해자의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이며 생명력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복수를 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정신활동을 의식적 차원에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전하고 긍정적인 복수는 우리를 한층 더 성숙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예를 들면, “너는 능력이 없어서 이 일을 할 수 없어”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란 아이는 분노와 복수감정을 가질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복수는 두 가지 양상을 보일 수 있다. 그 하나는 기어이 그 일을 해냄으로써 복수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가해자에 대한 물리적 보복으로 복수하는 길이 있다. 방어기제로서의 승화(sublimation)는 긍정적인 복수형태를 보여준다. 반면에 부정적인 복수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파멸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다. 성서는 여러 곳에서 긍정적인 복수를 보여준다. 이제부터 성서가 증언하는 복수와 용서의 형태를 살펴보자.

성서는 대체로 복수와 용서에 대해 두 가지 양태를 보여준다. 인간 사이의 복수와 용서, 그리고 인간 사이의 문제에 하나님이 개입된 복수와 용서가 있다.

첫째, 인간 사이의 용서는 야곱과 에서이야기에서 드러난다.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야곱에게 장자권을 빼앗긴 에서는 분노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복수를 하려고 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장자권을 막상 빼앗기고 난 에서는 야곱의 교활함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자신의 판단력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생각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발생하는 이성적 사고의 몫이다. 자신의 책임감을 뒤로 한 채 일단 야곱에게 속았다고 느낀 순간 분노의 감정은 발생한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종종 격분(rage)으로 이어진다. 에서의 격분은 야곱에 대한 복수감정으로 이어지고 그를 죽이고자 한다(창 27:41). 리브가의 도움으로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으로 몸을 피신한다. 이때 리브가는 야곱에게, “네 형의 분노가 풀리거든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27: 45)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분노가 풀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분노와 격분은 이성의 통제력을 벗어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야 그 사건을 판단할 여유가 있다. 이점이 분노와 격분, 증오는 무의식의 정동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그것들은 원형적 잠재력으로서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정신활동을 지배하게 된다. 분노와 격분이 발생할 때 일단 사건의 현장에서 멀어지는 것이 치유의 한 방법이다. “주먹(본능적 공격성)은 가깝고 법(이성)은 멀다”는 평범한 진리가 이를 대변한다. 시간이 흘러 야곱은 에서에게 돌아온다. 그 사이 에서의 분노는 누그러지고 야곱과 화해를 하게 된다. 에서가 어떤 과정을 통해 자신의 분노를 다스렸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야곱은 예물을 통해 에서의 분노를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에서가 복수의 감정을 다스린 것은 야곱이 겸손하게 회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에서 앞에서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힌” 야곱을 본 순간 에서의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누그러졌음이 분명하다. 물론 야곱을 만나지 않은 세월동안 동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에서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야곱과 에서의 화해는 야곱의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요셉과 그의 형제 이야기 역시 인간 사이의 용서를 보여준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지나치지 못하고 늘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창 37:2). 일방적으로 당한 형들의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서 증오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여기에 아버지의 편애가 요셉에 대한 증오감정을 배가시킨다. 요셉에 대한 분노는 가해자에 대한 공격성으로 나타난다. 형들은 요셉에게 거친 말로 응수함으로써 보복감정을 드러낸다(37:4). 요셉의 꿈은 형들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야곱의 심기마져 불편하게 한다. 요셉의 자기애적 성향은 상대방의 공격성을 부추겼고 결국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12) 다행히도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된 요셉은 그곳에서 성공하게 된다.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은 형들을 애굽으로 불러들여 화해를 청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요셉은 두려워 떨고 있는 형들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용서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증언하고 있다.13)

요셉의 용서행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요셉에게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없었는가? 분노와 복수의 감정 없이도 용서가 가능하며 화해가 가능한가? 그것은 의식적 차원에서는 불가능하다. 단지 무의식차원의 영적인 용서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시화된다. 요셉은 자신의 자기애적 성향과 형들의 아픈 마음을 이해했을까?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형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상한 심령을 용납하고 공감했을까? 성서는 이와 같은 물음에 함구하고 있다. 오히려 요셉은 자신의 꿈을 기억하면서 애굽에 온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문초하고 있다(창 42:9-15). 나는 요셉 역시 형들의 행위에 대한 분노와 복수감정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동생 베냐민이 애굽에 올 때까지 형들을 옥에 가두고 상전행세를 한 것은 형들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다. 요셉은 그것을 자신의 꿈이 성취된 것으로 여긴다. 요셉의 자기애적 성향은 형들에 대한 용서를 부추긴다. 이것은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사l회적으로 용인되는 안전하고 건강한 방향으로 표출된 일종의 승화이기도 하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게 된 배경에는 형들의 회개가 한 몫을 차지한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못할 짓을 하는 죄를 짓지 말자고 하지 않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값을 치르게 되었다. 그들은 요셉이 통역을 세우고 말하였으므로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요셉이 알아듣는 줄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창 42:22-23). 결국 요셉의 용서 역시 가해자의 회개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요셉은 형들의 회개를 듣기 전에 용서하기로 결심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힘이 강해진 요셉 앞에서 형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그들은 아버지인 야곱이 유언한 것처럼 속여 요셉의 용서를 이끌어낸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창 50;17).14) 형들이 진심으로 회개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가해자의 회개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위한 결단을 용이하게 한다. 요셉이야기는 인간 사이의 용서행위를 보여주면서도 그 용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성서적 견해를 대변한다.

사울과 다윗 사이의 갈등은 분노의 감정이 해소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울의 이유 없는 박해를 피해 다윗은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다. 다윗은 가해자인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의 겉옷자락을 베는 것으로 그친다(삼상 24:4).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점 때문에 그를 죽이지 못하고 겉옷 자락만 벤 것처럼 보인다(24:6).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악인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손에 칼을 대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다(24:13).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윗이 자신의 복수감정을 하나님께 위임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 24:12). 하지만 다윗이 사울에 대한 복수감정을 하나님께 위임했다고는 하나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이미 복수를 한 셈이다. 사울의 옷자락을 벤 행위는 그를 죽이는 것과 동일한 상징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수는 가해자의 행위에 비례하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다른 형태로 표출될 수 있다. 다윗의 행위는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상징적인 보복행위도 분노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분노감정이 해소될 때 용서과정은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요셉 이야기와 다윗이야기는 용서와 복수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복수와 용서는 이처럼 의식적인 결단에서 비롯되기보다는 무의식적이며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둘째, 가해자에 대한 복수와 용서를 하나님이 대신해주는 경우가 있다. 가인과 아벨이야기를 보자. 가인은 자신이 바친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자 분노한다. 가인의 분노는 열등감의 외적 표현으로 보인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자 가인은 열등감으로 가득 찬 자신의 그림자를 동생 아벨에게 투사한 것이다. 가인에게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이유를 살펴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어쩌면 늘 동생에게 뒤떨어진다는 열등감이 제물 사건으로 인해 분노의 감정으로 드러난 것이다.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제물사건은 가인의 그림자를 자극했고, 그동안 축적된 부정적 콤플렉스와 그림자가 연합하여 가인은 순간적으로 격분(rage)한 것이다.15) 분노의 감정에 휩싸인 가인이 아벨에게 무엇인가를 말한 것 같다(창 4:8).16) 그 내용은 분명하지 않지만, 형제가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다. 가인은 아벨을 왜 죽였을까? 단순히 자신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형제 사이에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많은 사건이 있었을까? 아무튼 가인이 아벨을 죽인 시점은 제물이 열납된 시점이 아니라, 형제가 들에 있을 때였고 그 전에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있었음을 성서는 암시하고 있다. 죽은 아벨의 분노는 땅에 흘린 그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전달된다. 하나님은 아벨 대신 가인에게 복수하신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1-12). 가인이 떠돌이 신세가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자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심으로써 살인자인 가인을 용서하신다. 아벨은 가해자인 가인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악인을 심판한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신앙이다. 묵시론자들이 대망했던 종말론적인 구원은 박해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을 기대하는 것이다.17) 피해자가 능력이 없거나 이미 생명력이 사라져 보복할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이 개입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해자의 분노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바울사도 역시 보복이 하나님의 것임을 강조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가인과 아벨 이야기 역시 보복이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진 다음에 용서의 과정이 진행됨을 보여준다. 이제 구약성서에 소개된 탄식시를 통해 분노와 보복 감정의 흐름을 살펴보자.




3. 탄식시에 나타난 분노와 복수, 그리고 용서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1-5).




엔라이트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용서의 과정을 다양하게 설명한다.18) 용서의 과정은 대체로 분노와 복수감정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며, 피해자의 능력과 자아구조, 그리고 피해자의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용서의 과정에 대한 다양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용서는 분노가 해소될 때 발생하며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도 기나긴 여정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탄식시로 알려진 시편 13편은 극심한 박해를 당한 시인의 분노와 복수감정, 그리고 그 해소과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앤더슨에 의하면 탄식시는 대개 다음의 여섯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1)하나님을 부름; 2)불평; 3)신뢰의 고백; 4)탄원; 5)확신의 말; 6)찬양의 서약.19) 그러나 시에 따라 그 구조는 약간씩 다르다. 위의 여섯 가지 요소가 잘 드러나는 시도 있지만 어떤 시는 그 가운데 몇몇 요소만 보여주기도 한다. 시편 13편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탄식시의 전체구조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20)

1-2절은 시인의 절규를 전한다. 언제까지 이 고통을 견디어 내야 하느냐는 것이다. 1절에 두 번, 2절에도 두 번이나 반복된 “언제까지”(how long)라는 의문사는 참기 어려운 고통의 기간이 상당기간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원수가 의기양양하게 악을 행하는데도 시인은 그에 대항할 아무런 힘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시인의 분노를 받아주실 수 있다. 그에게 하나님이 계시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마저도 없다면 그는 고통가운데서 이미 생명력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아직 살아있다.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다해 그는 하나님 앞에서 분노를 폭발한다. 분노의 외적 표현은 일단 건강한 정신활동으로 간주된다.

시인의 분노는 복수감정으로 이어진다. 3-4절에서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가해자의 행위에 대적하고 있는 시인은 하나님의 도움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 “생명의 눈”과 “사망의 잠”으로 대변되는 두 대극은 시인의 심리상태가 얼마나 불안한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원수에 대한 구체적인 복수감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원수가 더욱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그의 복수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 원수를 하나님께서 징벌해달라는 것이다. 같은 유형의 탄식시인 시편 10편은 시인의 보복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13]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15]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없기까지 찾으소서(시 10:12-15).




“원수의 팔을 꺾어 악을 제거해 달라”는 시인의 절규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보복을 하나님을 통해 성취하려는 욕망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통해 가해자에게 보복한 시인은 이제 분노가 해소되어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5절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까지의 불안과 두려움이 해소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찬양은 몸과 마음에 평화가 깃들 때 가능한 일이다. 이 상태는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의식과 무의식이 균형을 이룬 상태이며 개성화를 이룬 상태이다. 불안한 상태의 찬양은 진정한 것이 아니다. 불안을 감추기 위한 찬양은 부정적인 방어기제이며 미성숙한 종교인의 신앙행위에서 드러난다. 온갖 분노를 한꺼번에 쏟아내고 하나님의 복수를 경험한 시인은 이제 가해자에 대한 인간적 차원의 연민을 느낄 것이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복수행위에 대해 찬양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심정을 알고 함께해주신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감사하고 있을까? 분노(증오)와 보복, 감사(사랑)와 용서는 원형적 차원에서 구별되지 않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것은 한 얼굴 안에 있는 두 모습이다. 시인의 마음이 바로 그와 같을 것이다. 시인은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연민, 보복이후에 오는 통쾌함과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절규 등이 뒤범벅이 되어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시인은 보복을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연약한 인간을 안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에서 기인한다.21)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은 동시에 원수를 구원하신다. 아벨을 죽인 가인을 용서하신 하나님을 시인은 알고 있을까? 하나님을 통해 복수를 경험한 시인은 이제 자신도 모르게 용서의 과정으로 들어선다. 개성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용서는 이처럼 무의식 차원에서 진행된다.22)

탄식시에 나타난 보복과 용서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용서를 위한 성서적 상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게 한다. 외부로 표현되지 않은 분노는 통제 불가능한 격분으로 발전할 수 있다.23) 내담자는 우선 당면한 사건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 일에 대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24) 이것은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될 상처의 내용을 규명하는 것과 같다.25) 분노는 건강한 사람의 자연스런 감정이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분노에 공감하면서 내담자로 하여금 분노를 안전하게 표출하도록 배려해야 한다. 공감은 무의식적 차원의 공감이라야 한다. 내담자와 함께 퇴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상담자에게 있어야 한다. 상담자는 내담자와 더불어 분노하고, 함께 복수를 다짐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무의식 차원에서 경험해야 한다. 그 때야 비로소 내담자와 상담자 사이에 치료관계가 형성된다.26) 내담자는 자신의 분노감정을 글로 표현해 볼 수 있다.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분노감정과 가해자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분노의 감정을 시나 이야기, 혹은 음악이나 예술활동을 통해 드러낼 수 있다. 무의식에 억압된 내담자의 분노는 다양한 창작활동이나 놀이를 통해 의식화되어 그 공격성이 약화된다. 목회상담 현장에서는 상담자와 내담자는 시편기자의 탄식에 동참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면서 원수의 비행을 낱낱이 고하는 시편기자의 아픔에 동참할 때 내담자 역시 자신의 아픔을 하나님께 하소연 할 수 있다. 탄식시인은 가해자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시 10: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6]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9]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 저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 강포로 인하여 외로운 자가 넘어지나이다 [11] 저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시 10:3-11).




시인의 분노는 하나님 앞에서 탄식으로 이어지며, 그 탄식은 가해자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순서를 밟고 있다. 시인은 어쩌면 천상법정에 계신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하나님은 재판관이 되어 피해자의 억울함을 듣고 정당한 판결을 하신다.27) 시인이 보기에 가해자에게는 하나님도 없으며, 정의와 진리도 없다. 그는 약한 자를 괴롭히며 은밀한 곳에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둘째, 상담자는 피해자의 복수감정에 공감해야 한다. 복수하려는 감정은 가해행위에 대한 자연스런 감정의 흐름이다. 복수는 건강한 정의감과 높은 수준의 도덕의식,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복수감정은 악한 마음의 발로가 아니다. 오히려 복수는 일종의 생명력이며 자의식이 있는 공격성의 발로이다. 따라서 목회현장을 중시하는 성서적 상담이라고 해서 내담자의 복수감정을 폄하하거나 저지할 필요는 없다. 분노와 마찬가지로 복수감정 역시 무의식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분노와 복수감정은 어느 정도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가해자의 악한 행위가 지속될 때 피해자의 복수감정은 증가한다. 하지만 가해자의 권력에 대항해서 피해자는 복수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감당할 수 없는 박해아래서 생명줄이 끊어짐을 경험하고 있는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다.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안전한 상황에서 복수감정을 드러내도록 도울 수 있다. 탄식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내담자는 복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나열 할 수 있다(시 10: 12-15). 복수의 내용을 기록하는 동안 가해자의 행위에 더욱 분노하거나, 그의 행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어떤 경우는 가해자의 행위를 통해 내담자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복수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의식화과정과도 같다. 그것은 무의식의 콤플렉스들이 의식적 차원에서 구체화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회복하는 치유과정이다.28)

셋째,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통해 복수하도록 격려한다. 이 때 상담자와 하나님은 엔라이트가 말하는 “용서여행의 지지자”가 된다.29) 성서적 상담의 가장 큰 유용성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그리고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하나님께서 중재자로 계신다는 점이다. 세상의 법정은 피해자의 억울한 사연을 모두 수용할 수 없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세상의 법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다. 반대로 약자인 피해자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속의 구조적 악은 피해자의 억압을 가중시켜 심리적 불안을 가속화시키기도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복수한 다음에야 비로소 분노의 감정이 약화된다. 구약성서의 보복법이 인간의 복수감정을 잘 보여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법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동일한 생명으로 지켜진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 외에 아무도 훼손할 수 없다는 신앙이 보복법 안에 스며있다.30) 문제는 보복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인간의 본능적 보복감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보복은 현대인에게 허용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그럴만한 능력이 없을 때 불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법정에 호소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일을 도움으로써 문제해결을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법정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특히 가해자가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혹은 결정적인 이해관계에 있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부모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아온 아이는 증오와 사랑, 복수와 용서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심각한 심리적 불안 속에 있게 된다. 이런 문제를 세상법정이 모두 다룰 수는 없다. 성서적 상담자는 피해자를 하늘법정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재판을 청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내담자는 적극적 상상을 통해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하늘법정에 좌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그려볼 수 있다(사 6:1-8). 하늘법정에는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인 내담자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가해자의 죄상을 따지고 그에 대한 심판의 선고를 내린다. 그것은 내담자의 감정을 담은 생명의 보복법이다. 가해자의 행위에 상응하는 보복을 하나님을 통해 하게 된다. 유대인을 죽이려고 했던 하만에 대한 에스더의 보복은 하나님을 통해 성취되는 환상적 보복과도 같다(에 9:1-10). 이처럼 하나님의 보복은 어디까지나 하늘법정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 세상에서 여러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내담자가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복수를 통한 용서는 “심판을 통한 구원”을 외쳤던 예언자에게서 흔히 나타난다(참조. 사 6:9-13). 원형적 힘인 보복감정은 때로는 의식적 차원보다 무의식 차원에서 안전하게 현실화 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넷째, 상담자는 내담자를 가해자에 대한 연민을 통해 용서의 과정으로 인도한다. 적극적 상상을 통해 내담자는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고 있는 가해자를 상상할 수 있다. 자신이 본 가해자의 고통을 글로 써보거나, 시나 이야기로 표현할 수 있다. 때로는 그림이나 놀이를 통해 상처받은 가해자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것은 실제적이며 심리적인 경험이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 내담자는 어떤 심리적 반응을 보이게 될까? 어떤 사람은 통쾌한 반응을 보일 것이며, 어떤 이들은 그동안 몰랐던 가해자에 대한 면모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바꿔보는 역할극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가해자의 모습으로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내담자의 심정은 어떨까? “세상에 의인은 없다”(롬 3;10)는 바울 사도의 말씀은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 때 경험된다. 모든 실존적 인간은 죄를 짓고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보편적 이해가 내담자로 하여금 용서의 단계로 접어들게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상처는 가해자의 계획적인 의도보다는 우발적이며 충동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상처가 인간에게 보편적 현상임을 보여준다.31)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그것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 차원에서 어느 정도 실현되었을 때 인간 자체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탄식시인들의 분노와 복수감정은 결국 용서로 가는 과정이며 자기실현의 길이다.

다섯째, 상담자는 하나님을 통해 복수를 경험한 피해자로 하여금 이제 가해자와 화해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용서는 반드시 화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용서는 화해과정의 일부이다.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면서 화해를 요청할 때 용서의 과정은 의외로 빨리 진행된다. 그러나 가해자의 시인이 이루어지지 않고 화해요청이 없을 때 용서는 어려워진다. 가해자는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화해를 청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은 주변의 권유에 의해 할 수 없이 화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회개와 화해의 요청이 없을 때 피해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가해자와의 화해는 의식적 차원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가해자가 아무리 진정한 모습으로 회개하고 화해를 요구한다고 해도 피해자가 이를 거절하면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진정한 화해는 자신과의 화해가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자신과의 화해는 무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원형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하나로 묶어 함께 치유의 길을 가게 한다.32) 이것은 융이 말하는 연금술의 과정과도 같다. 원래는 비금속이었던 가해자와 피해자가 무의식 차원에서 연합할 때 그 둘은 고귀한 금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연금술사들이 말하는 “철학자의 돌”이 만들어지는 과정과도 같다.33) 의식적 차원에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가해자의 파괴적 행위는 집단무의식 차원에서 공유될 수 있다. 우리 안에는 모두 파괴자 원형이 있다. 파괴자 원형이 부정적으로 활성화 될 때 주변 사람은 이유 없는 박해에 시달리게 된다. 신적이며 초월적 속성이 있는 원형은 집단무의식 차원에서 공유되어 가해자와 피해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상처받은 두 영혼이 연합할 때 무의식 차원의 공감은 이루어진다. 이 때 피해자는 가해자의 영혼과 화해할 수 있다. 화해는 반드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심리적 현실인 무의식 차원의 화해야 말로 진정한 자신과의 화해이다. 내 안에 있는 파괴적 본능과 야수성은 언제라도 죄 없는 사람을 핍박할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아(ego)와 자기(self)의 극적인 합일이 이루어지며 개성화의 길을 가게 된다. 이것은 분노와 복수, 그리고 용서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루는 신비적 사건이다.34) 탄식하며 하나님께 복수를 요구했던 시인은 이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것은 가해자의 영혼과 피해자의 영혼이 만나는 사건이며, 피해자의 자아(ego)와 자기(self)가 만나는 사건이며,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구원의 순간이다. 이 때 피해자는 가해자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자신을 지켜준 하나님을 향해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시 13:5).




4.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심리치료

엔라이트는 용서가 나를 위한 최선의 길임을 강조한다. 용서하지 않을 때 피해자는 복수의 감정 속에서 살게 되며 그것은 온몸에 독이 퍼져 결국 죽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 독으로 가득 찬 감정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용서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용서는 선택”이라는 것이 엔라이트의 주장이다. “용서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그러나 용서하면 나는 살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메닝거(W. Meninger)가 제시한 다음의 사례를 보자.




스테파니는 대단히 불행한 여성이었다. 마흔일곱의 그녀는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에서 성장한 세 자녀를 낳았고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은 아무 쓸모도 없으며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다고 했다. 그녀의 불행은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30년 전 그녀가 열다섯 살이었을 때 끔찍한 사건과 맞닿아 있었다. 스테파니는 자신의 생애의 초점이 되어버린 이 사건을 그녀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 사건이란 10대 소년 다섯 명에게 윤간을 당한 것이었다. 그녀보다 나이가 어렸던 그 아이들은 가벼운 처벌만 받은 다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갔다 반면에 스테파니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희생물로 여겼다 그녀는 더럽혀졌고 불결했고 추잡했다. 그녀는 아무 잘못도 없이 폭행당했지만 그 일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어떤 형태로는 자신에게 있을지 모를 책임을 찾아냈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인생은 온통 끔찍한 자기혐오와 자기거부감과 열등감으로 채색되었다. 그녀는 여러 해 창녀생활을 하기까지 했다. 자신에게 마땅한 직업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섯 명의 남자 아이들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시종일관 극심한 혐오와 반감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잘못에 대해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심지어 전과기록조차 남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볼 때마다 그녀의 인생은 도살장 같았다. 그녀는 그들이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폭행하고 있으며. 천박한 경별거리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마침내 무슨 대책을 세우지 않고 그대로 있다가는 삶의 발판마저 파괴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누구 하나 심지어 남편도 그녀의 지난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일로 인해 어른이 되어서까지 처신해야 했던 생활방식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비애와 눈물을 쏟으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들이 한 짓과 그들에게 책임이 있는 한평생의 불행이 그들에 대한 내 적개심을 갈수록 격렬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요. 난 영성체하러 나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미사 중에 평화의 입맞춤을 나눌 때면 그것이 순전히 거짓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그래서 아예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지금은 내가 단죄하고 있는 것이 나 자신임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요?”36)




메닝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요?”라는 스테파니의 말에서 이미 용서의 과정이 시작되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그는 스테파니에게 “하느님께 용서하도록 이끌어주시도록 기도하라”고 주문한다.37) 하지만 스테파니가 어떻게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고 용서의 과정으로 들어갔는지 분명하지 않다. 우선 사례에 드러나는 내용을 보면 스테파니는 자신이 살기 위해 가해자를 용서해야하고, 그것은 곧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테파니의 용서행위는 방어기제에서 출발한다. 그녀는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파괴될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녀의 본능적인 생명력이 용서의 길을 가도록 이끌고 있다. 그 용서는 의식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생명을 향한 무의식의 보상기능에서 출발한다.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요?”라고 묻는 그녀는 내가 보기에 아직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복수를 포기하고 있다. 방어기제에서 출발한 용서는 일단 건강한 정신작용이다. 하지만 부정적이거나 지속적인 방어기제는 개성화의 과정을 방해한다. 그녀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그동안 왜 분노했는가? 왜 복수할 방법을 찾지 못했는가?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 내가 복수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용서해야 한다면 왜 용서해야 하는가? 나는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왜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하는가? 이런 물음들이 서서히 응답되기 시작할 때 그녀는 내면의 세계를 보게 될 것이며 진정한 용서와 함께 개성화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분노, 증오, 그리고 복수의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분노와 복수는 방어기제일 뿐만 아니라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개인의 신념과도 관련이 있다. 부당한 학대에 대한 분노는 지극히 건강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가해자에 대한 복수감정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자아구조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따라서 용서가 강한 사람의 몫이라면38) 복수 또한 건강한 사람의 몫이다. 건강한 복수가 진정한 용서를 탄생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의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 그들에게 “용서해야한다”는 어떤 도덕적, 신앙적, 철학적 의무를 지울 수 없다. 용서는 어떤 의미에서 무의식의 선택이며 정신에너지인 리비도의 자연스런 흐름이다. 극심한 박해로부터 자아구조가 약해질 때 무의식은 보상기능을 발휘하여 분노와 복수,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방법을 찾는다. 나는 다음의 임상사례를 통해 융의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심리치료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40대 장교인 우리(Uri)는 여성들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어서 심리치료를 받으러 온 경우이었다. 심리치료 과정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었는가를 깨달았고, 어머니 때문에 가난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 어머니에게 책임을 돌리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노감정은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심한 불안을 느끼고, 관계를 제대로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다. 40대의 장교라기보다는 반항적인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미성숙한 행동들에 빠져 있었다. 그는 임종을 맞이하고 있는 아버지를 용서하면서 장례를 상징적으로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또 부도덕했던 어머니를 용서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불안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Uri)는 용기 있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는 나중에 결혼했고, 어머니를 사랑하고 어머니에게 하지 못한 일들을 하기 시작했고, 궁극적으로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수 있었다.39)




첫째,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가해자의 행위를 구체화하도록 돕는다. 분노와 격정, 그리고 증오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정상적인 판단은 어려워진다. 무의식의 억압이 가중될 때 의식은 제 기능을 담당하지 못함으로써 내담자는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며 구술능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어떤 사람은 분노감정 때문에 말을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이 당한 내용을 글로 표현하게 함으로써 문제를 객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기록한 가해자의 행위에 대해서 그 정당성을 판단할 필요는 없다. 그 판단은 내담자의 몫이다. 내담자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교감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짐으로써 치유과정으로 들어간다. 사례에서 내담자인 우리(Uri)에게 아버지에 대한 증오감정을 구체적으로 적게 할 경우 어떤 반응이 생길까? 우리의 분노가 단순히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외상이 있는 것일까? 상담자는 내담자의 과거를 회상시키면서 조심스럽게 콤플렉스가 드러나게 해야한다. 만약 우리의 분노가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라면, 그것은 곧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아빠가 된 자신이 어린 아들을 두고 일찍 죽는 것을 상상해봄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해소하게 되며 인간실존의 한계성을 경험할 것이다.

둘째,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글로 기록하게 한다. 시편 13편의 탄식시인이 그러했듯이 견딜 수 없는 박해에 시달린 사람이 분노의 감정을 글로 표출할 때 어느 정도 감정이 순화된다. 복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내담자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복수의 결과에 대해서도 예측하게 된다. 글로 표현된 복수의 내용은 심리적 실제로 경험된다. 내담자는 적극적 상상을 통해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미리 경험할 수 있다. 이제는 입장을 바꾸어 피해자가 복수하는 사람이 되고, 가해자는 보복을 당하는 사람이 될 때 내담자는 자신을 객관화하게 되며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다.

셋째, 상담자는 피해자의 콤플렉스 가운데 어떤 요인이 심리적 상처를 주고 있는 가를 규명한다. 가해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피해자의 콤플렉스에 의해 사건이 규명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성기능장애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에게 성적인 모욕을 줄 때 그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심각한 분노를 느낄 것이다. 사례에서 내담자인 우리(Uri)는 분노감정을 드러낸 채 심리치료에 임한 것은 아니다. 이성과의 원만한 교제를 하지 못하게 되자 심리치료사를 찾은 것이다. 치료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내담자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매우 부정적이며, 아직까지도 부모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감정을 지닌 채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증오, 재정적으로 무기력한 엄마에 대한 분노가 개인무의식에 억압되어 부정적인 콤플렉스를 형성하고 있다.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격분(rage)과 달리 서서히 진행되는 분노(anger)와 증오(hatred)는 콤플렉스를 형성하면서 자아구조를 약화시킨다.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이 깨지면서 자아구조가 약화되면 자신감 상실로 이어지며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우리(Uri)의 경우 약화된 자아구조가 일단 이성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자신감 상실의 원인이 된 피해의식은 자신도 모르게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되어 무의식에 축적된다. 무의식에 억압된 분노감정은 우리의 경우처럼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 화산처럼 폭발한다. 분노의 정체가 밝혀질 때 심리적 부담감은 감소한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꿈을 분석하거나, 놀이 혹은 미술치료를 통해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화함으로써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게 할 수 있다.

넷째, 상담자는 내담자에 의해 투사된 내용을 분석한다. 어린 시절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감정은 어린이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어린 아이에게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안전성이다. 어린 아이 우리(Uri)는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고 일찍 죽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느낀다. 집단무의식 안에 있는 고아(orphan) 원형은 우리가 성장하는 동안 잠재해 있다가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 부정적으로 활성화된다.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나 이성간의 교제가 힘들어질 때마다 고아원형은 우리로 하여금 버림받는 상황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대극성을 지닌 고아원형 역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과 연합하고자 하며 공동체생활을 좋아한다. 문제는 고아원형이 부정적으로 활성화될 때 자신과 동일한 실패자의 그룹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40)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원형의 긍정적인 측면을 의식화하도록 도와야 한다.

내담자인 우리(Uri)가 이성관계를 원만하게 하지 못한 데는 엄마와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엄마는 남성의 내적 인격인 아니마 원형의 내용을 최초로 형성하는 동인이 된다. 아들은 결국 아니마 원형을 엄마이미지로부터 경험하게 되고, 그것은 이후 여성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엄마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다른 여성에게 투사되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교제는 그만큼 힘들어진다.41) 우리(Uri)에게 가난은 부정적인 콤플렉스를 형성시켰고 그것은 그림자가 되어 개인무의식의 영역에 축적된다. 가난에 대한 열등감은 그림자가 되어 건강한 이성교제를 방해한다.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 교제에 방해요소가 된다고 느낄 때 그림자의 억압은 가중되고, 그것은 부정적 아니마와 연합하여 심리적 불안으로 이어진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입장이 되고, 내담자는 엄마 입장이 되어 역할극을 해볼 수 있다. 역할극을 통해 내담자는 엄마의 힘들었던 과거를 경험하게 되고 인간의 아픔에 동참함으로써 상처받은 치유자로 변모할 것이다. 이때 분노의 감정은 해소되고 엄마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살아날 것이다.

다섯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용서할 수 없는 내담자에게 상담자는 심리적으로 복수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통한 복수이다. 현실적인 복수를 할 있는 능력이 있든 없든 그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나보다도 더 정의로운 하나님께 복수를 위임하는 행위는 가해자를 용서하려는 사랑을 담보로 한다. 따라서 진정한 복수는 용서의 다른 얼굴이다. 그것은 마치 증오와 사랑이 동전의 양면인 것과 같다. 증오 없이 사랑이 없으며, 사랑이 없다면 증오감정이 없는 것과도 같다. 그것은 모두 무의식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원형적 속성이다. 상담자는 창조적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복수와 증오가 함께 어우러지게 해야 한다. 그동안 분리되었던 복수와 용서, 증오와 사랑이 합일되어 신비한 연합을 이룰 때 진정한 개성화의 과정으로 접어든다. 창조적 공간은 환상과 놀이가 살아있는 공간이며, 그곳은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중간지역이기도 하다.42) 창조적 공간에서 분노와 복수에 대한 부정적 정동은 사랑과 용서를 향한 긍정적 정동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은 의식의 결단으로는 부족하다. 대극의 합일을 추구하는 무의식의 보상기능과 함께 개성화로 인도하는 자기(self)의 생명력이 분노와 복수의 감옥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이들을 용서의 과정으로 인도할 것이다.




5. 결어

용서는 선택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적 노력이나 결단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용서는 분노와 복수감정이 순화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분노(증오)와 복수감정이 원형적 속성이듯이, 사랑과 용서 또한 원형적 힘이다. 특별히 사랑과 용서는 자기원형의 상징적 잠재력이다. 하나님 이미지로 경험되는 자기원형(self archetype)은 용서와 사랑이 의식적 차원에서 현실화되도록 돕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과 용서는 인간이성의 범주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것이 된다. 따라서 용서의 이면인 복수 역시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롬 12:19). 분노와 증오, 그리고 복수감정은 피해자 편에서는 충분히 정당하다. 그 감정은 존중되어야 하고 어느 정도 해소되어야 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감정과 가해자의 감정은 현실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상담이나 심리치료 현장에서는 피해자의 분노를 해소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도록 의식화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피해자는 자신의 콤플렉스와 그림자의 내용을 인식한 순간,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절제되고 사랑과 용서의 과정으로 들어설 용기를 얻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평생동안 진행되는 개성화의 길이다. 그것은 고통을 동반하는 참으로 힘든 과정이며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고난의 길이다. 고난과 인내, 그리고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으로 얻어진 사랑과 용서는 자신과 가해자를 위한 하나님의 값진 선물로 기억될 것이다.







참고문헌

Covitz, Joel. Visions in the Night: Jungian and Ancient Dream Interpretation. Toronto: Inner City Books, 2000.

Enright, Robert D. 용서는 선택이다. 채규만 역. 도서출판 학지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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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운산. “치료, 용서, 길고 화해.” 한국기독교신학논총 35권 2004, 241-277.




박종수 교수 홈페이지: http://hanul2000.net jspark45@kangnam.ac.kr

English Abstract




Biblical Forgiveness and psychotherapy

by Jongsoo Park Ph.D. (Kangnam University)




This article is based on a presupposition that it is almost impossible to forgive in real life. Forgiveness, as an opposite side of vengeance, requires love. If love has a supernatural feature, forgiveness is also a psychic activity of the supernatural and the unconscious. Thus, forgiveness can be understood in relation to its opposite, vengeance. Only when anger, rage or hatred against an injurer is lead to an emotion of vengeance, love and forgiveness can be followed.

The Bible shows two kinds of forgiveness: one is the forgiveness between human beings, and the other is between God and human beings. Both cases imply that without vengeance or punishment, there is no sound forgiveness. Especially Psalm 13, a prayer of lamentation, suggests an example of counseling for forgiveness: 1) Counselors let clients fully express their anger; 2) Counselors should share the feelings of vengeance of the clients, which is counselor's real empathy; 3) Counselors can give chances for the clients to revenge through God; 4) Counselors lead the clients to the process of forgiveness through the realization of reality of human beings, which thrives in all sorts of evil doings; 5) Counselors encourage the clients to reconciliate with the injurers, after experiencing the psychological vengeance.

There should be psychotherapy for those who cannot forgive in any reason. Counselors can help them in the following ways: 1) Clients can objectify their own problems by writing down the wrong doings of injurers; 2)Clients can express their feelings of anger and vengeance by writing; 3) Counselors analyze negative complexes of clients which have become troublesome; 4)Counselors find out projects of clients, which reflect theirs defense mechanisms; 5) Finally, counselors can give clients opportunities to revenge, by appealing to God. Through psychological vengeance, clients can make themselves forgive their injurers.







주제어:

용서, 성서, 복수, 분노, 증오, 격분, 시편, 심리치료, 원형, 분석심리학, forgiveness, Bible, revenge, vengeance, anger, rage, hatred, psalm, psychotherapy, archetype, analytical psych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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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obert D. Enright, 용서는 선택이다, 채규만 역 (도서출판 학지사, 2004), 43.




2) Robert D. Enright, 용서는 선택이다, 61-83.




3) 분노는 자신이 주변상황을 조절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James Hollis, Swamplands of the Soul: New Life in Dismal Places. (Toronto: Inner City Books, 1996), 94.




4) Jan Wiener, "Under the volcane: varieties of anger and their transformation," Journal of Analytical Psychology, 1998, 43: 495.




5) Jan Wiener, "Under the volcane: varieties of anger and their transformation," 500.




6) http://www.iloverulove.com/forgiveness/rfwhywecant.htm




7) 비교. Robert D. Enright, 용서는 선택이다, 23, 98.




8) Jan Wiener, "Under the volcane: varieties of anger and their transformation," 497-98.




9) Jan Wiener, "Under the volcane: varieties of anger and their transformation," 498.




10) C. G. Jung, Collected Works, vol. 8, pars. 627-28.




11) 박종수, 분석심리학에 기초한 이야기 심리치료, (도서출판 학지사, 2005), 130-34.




12) Joel Covitz, Visions in the Night: Jungian and Ancient Dream Interpretation (Toronto: Inner City Books, 2000), 44.




13) 이 구절에는 요셉에 대한 형들의 가혹행위가 오히려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드러냈다는 역설적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Nahum Sarna, Genesis (New York: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89), 309.




14)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나사”는 “죄나 반역행위를 제거하다” 혹은 “용서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BDB, 671).




15) 가인의 우울한 감정은 비합리적이며 공격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N. Sarna, Genesis, 33.




16) “들”은 보통 범죄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신 22:25; 삼하 14:6). LXX를 비롯한 탈굼역, 시리아역과 라틴역은 “자, 들로 가자”라는 말을 추가하고 있다. N. Sarna, Genesis, 33.




17) Leon Morris, 묵시문학, 김점옥 역 (도서출판 은성, 1995), 60.




18) 엔라이트는 용서의 과정을 다음 네 단계로 요약한다: 1단계-분노를 발견하기; 2단계-용서하기로 결심하기; 3단계-용서를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4단계-감정적 감옥에서 해방되기. Robert D. Enright, 용서는 선택이다, 99-100.




19) Bernhard W. Anderson, 시편의 깊은 세계, 노희원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7), 73-74.




20) 크라우스는 시편 13편을 기도시(prayer song)로 간주한다. Hans-Joachim Kraus, Psalms 1-59, (Minneapolis: Augburg Publishing House, 1988), 213.




21) Arthur Weiser, The Psalm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2), 163.




22) 이런 의미에서 손운산 교수는 “치료와 용서와 화해는 어렵고 긴 과정”이라고 말한다. 손운산, "치료, 용서, 길고 화해,“ 한국기독교신학논총 35권 2004, 277.




23) James Hollis, Swamplands of the Soul: New Life in Dismal Places, 94.




24) Fred Luskin, 용서. 장현숙 역 (중앙 M&B, 2003), 117.




25) William A. Meninger, 용서의 과정, 성찬성 역 (도서출판 바오로의 딸, 2002), 65-70.




26) David Sedgwick, Introduction to Jungian Psychotherapy: The Therapeutic Relationship (Brunner Routledge, 2001), 95.




27) 하늘법정에 대한 상징과 변론어투는 제 2 이사야의 신탁에서 두드러진다(참조. 사 41:1-42:9). 박종수, 바빌론 포로기와 이사야-이사야 40-55장 주석 (한들출판사, 2004), 89-93.




28) 마자(Mazza)에 의하면 시는 학대받은 사람들이 격한 분노를 표출하도록 돕는 구조를 제공한다. Nicholas Mazza, 시치료, 김현희 외 공역 (도서출판 학지사, 2004), 163.




29) Robert D. Enright, 용서는 선택이다, 102.




30) 박종수, 구약성서 역사이야기 (한들출판사, 2002), 94.




31) Fred Luskin, 용서, 47.




32) Harry A. Wilmer, Practical Jung: Nuts and Bolts of Jungian Psychotherapy (Illinois: Chiron Publications, 1987), 118-24.




33) 박종수, 분석심리학에 기초한 이야기 심리치료, 303. CW 9i, par, 238.




34) 이런 관점에서 용서는 “신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이기도 하다”는 메닝거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William A. Meninger, 용서의 과정, 28.




35) Robert D. Enright, 용서는 선택이다, 57.




36) William A. Meninger, 용서의 과정, 19-21.




37) William A. Meninger, 용서의 과정, 21.




38) Robert D. Enright, 용서는 선택이다, 19.




39) Robert D. Enright, 용서는 선택이다, 27.




40) Carol S. Pearson, Awakening the Heroes Within (New York: HarperSanFrancisco, 1991), 33.




41) 박종수, 분석심리학에 기초한 이야기 심리치료, 185.




42) Jan Wiener, "Under the volcane: varieties of anger and their transformation," 504.



출처 : 알프스의 눈동자. 데보라의 세계여행
글쓴이 : 알프스의 눈동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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