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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韓景職牧師說敎全集(10)

하나님아들 2013. 2. 9. 16:41

韓景職牧師說敎全集(10)



목 차
................................................................................................................. 三
................................................................................................................ 五
Ⅹ-1.....................................................................................................一一
Ⅹ-2............................................................................................二0
Ⅹ-3 ...............................................................................................................三0
Ⅹ-4 ........................................................................................................三九
Ⅹ-5...............................................................................................................四九
Ⅹ-6................................................................................................五九
Ⅹ-7.........................................................................................................六八
Ⅹ-9..........................................................................................八五
Ⅹ-10 ....................................................................................九四
Ⅹ-11 ....................................................................................................一0四
Ⅹ-12 ..................................................................................一一一
Ⅹ-13...................................................................................一二0
Ⅹ-14 ...................................................................................一二九
Ⅹ-15..............................................................................一三七
Ⅹ-16 ...........................................................................................一四六
Ⅹ-17.......................................................................................一五四
Ⅹ-18....................................................................................一六三
Ⅹ-19 (八福 ②)..........................................................................一七四
Ⅹ-20 (八福 ③)..............................................................................一八三
Ⅹ-21 (八福 ④)....................................................................一九三
Ⅹ-22 (八福 ⑤)................................................................一九八
Ⅹ-23 (八福 ⑥)................................................................二0九
Ⅹ-24 八福 ⑦)....................................................................二一九
Ⅹ-25 八福 ⑧)................................................................二二九
Ⅹ-26八福 ⑨)...............................................................................................二三九
Ⅹ-27 (십계명 ①).........................................................................................二四九
Ⅹ-28 (십계명 ②).........................................................................................二五九
Ⅹ-29 (십계명 ③)..........................................................................................二六八
Ⅹ-30 (십계명 ④)..........................................................................................二七八
Ⅹ-31 (십계명 ⑤)..........................................................................................二八八
Ⅹ-32 (십계명 ⑥)..........................................................................................二九八
(십계명 ⑦)..........................................................................................三0九
(십계명 ⑧)..........................................................................................三一四
......................................................................................三二三
(십계명 ⑩)..........................................................................................三三三
(주기도문 ①).........................................................三四一
Ⅹ-39 (주기도문 ③)......................................................................三六三
(주기도문 ④)....................................................................三七三
..................................................................................三八三
(주기도문 ⑥).................................................三九二
(주기도문 ⑦).....................................................四0三
(사도신경 ①)............................................................四一三
(사도신경 ②).........................................四二四
도신경 ③)..........................................................................四三三
도신경 ④)..................................................................................四四三
(사도신경 ⑤)..................................................................................四五一
(사도신경 ⑥)..................................................................................四六一
(사도신경 ⑦)..................................................................................四七一
..................................................四八二

Ⅹ-1 자족의 비결 (빌립보서 四장 十一-十三절)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이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비천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四·十一-十三)

이 몇 절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스스로 말한 자기 생활에 대한 간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을 배웠다고, 그래서 비천(卑賤)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
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간증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족의 비결을 배우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자족이란 말에 반대되는 말은 불만 불평 혹은 원망 이런 말들일 것입니다. 불만과 불평도 어떤 경우에는 필요합니다. 가령 무식한 이가 그 무식한데 대한 불만이 있을 때에 공부할 의욕이 생길 것입니다.
혹은 극빈한 가정이 그 빈곤에 대한 불만이 있을 때에 가정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 좀 더 노력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불의, 부정 부패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있을 때에 사회정의를 위해서 그 국민들이 좀 더 투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범사에 개선할 것은 개선해야 되고 향상할 것은 향상하도록 노력을 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때로는 내 자신이 고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경우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불치의 병, 불구의 몸, 피할 수 없는 짐, 부득이 저야 할 내 십자가, 부득이 당하여야할 고난, 부득이 당해야할 환경 혹은 역경.
이런 때에 계속해서 불만, 불평, 원망만 한다고 하는 것은 백해(百害)무익(無益)입니다. 백 번 해가 있을지언정 한 푼의 이는 없습니다. 우선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원망한다고 짐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쓴잔이 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이 적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환경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 자신에게만 악영향을 줄 겁니다.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라도 더 생기게 되고 머리에 흰머리가락 하나라도 더하게 됩니다.
원망이 많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이에게도 악영향을 줍니다. 가정에 이런 불만과 원망을 하는 가족이 하나만 있어도 온 가족이 불안해집니다. 가정의 주부가 이런 여자라고 하면 남편의 마음이 불안하여 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도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싫어하게 됩니다. 집이 넉넉하나 안 하나 간에 가족의 비결을 배워야 가정이 화평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범한 죄 가운데 하나는 이 원망의 죄올시다. 그들은 부득이 광야를 지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가나안 복지를 들어가려면 광야를 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물론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불만과 불평을 계속했습니다. 애굽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좋은 것 아닌가 ? 아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고기가마 옆에서 살았는데 먹을 것이 없다. 마실 물이 없다. 모세를 원망하고 계속해서 원망했습니다. 결과는 그들의 대부분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신앙 생활이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 세상에서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가 가족의 비결을 배워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의 비결을 어디서 배울 수 있습니까 ?
우리 동양의 성현도 이 가족에 대한 교훈을 많이 했습니다. 가령 경행록 이란 책에 보면 지족가락이요 무탐즉우(知足可樂 無貪卽憂)라는 말이 있습니다. 족한 것을 알면 가히 즐거워할 수 있고 탐하기를 힘쓰면 근심만 더한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혹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지족(知足)자는 비천하여도 영락이요 부지족자는 부귀라도 역운(逆運)이라. 족한 줄을 아는 사람은 빈천하여도 또한 즐겁게 살고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부귀한 자리에서도 늘 근심만 한다.
또 이런 말도 했어요. 지족상족이면 종신불욕하고 족할 줄을 알아서 항상 족하게 여기면 종신(終身)토록 몸에 욕됨이 없고 지지상지면 종신불치라 그칠 때를 알아서 항상 그칠 줄을 알면 그는 종신(終身)토록 몸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자족을 배우라고 권면 했습니다.
여기 서양의 철학자들을 보면 동양의 철학자들 보다 더 강조해서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헬라의 철학 가운데 스토익파 에서는 자족이란 말, 바로 이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우타, 아우타케이아 란 말인데 자족이란 마음 즉 스스로 족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아주 강조해서 가르쳤습니다. 사실 스토익파 윤리의 최고 목적은 자족에 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란 어떤 물건이나 어떤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자족을 배우려면 먼저 네 욕망을 제거해 버려라.
둘째는 네 감정을 제거해 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욕망을 제거해 버리라. 자족이란 물질을 많이 소요하는 데 있지 않고 욕망을 주리는 데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인 줄 압니다.『가장 부한 이가 누구입니까.』하고 어떤 이가 소크라테스에게 물으니 그 노인이 얼른 대답하는 말이『가장 적은 것에 자족하는 사람이니라.』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전에 디오게네스라고 하는 스토익 파에 위대한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생토록 몸에는 짧은 바지 하나만 걸치고 살았고 자기 집도 없이 밤에는 산기슭에 가서 나무통 속에서 잤다고 합니다. 한 번은 헬라의 왕이 이 성자를 찾아보려고 왔습니다. 성자의 형편을 본 왕은『당신이 무엇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대로 내가 다시 올릴 터인데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오』하고 말하니 이분이 하는 말이『나는 원하는 게 하나도 없소. 거저 왕께서 지금 내 앞에 서 계시니까 햇빛이 좀 가리워 지니 다만 좀 비켜 서 주시오』라고만 대답했답니다.
『욕망을 죽이라』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을 좀 더 아주 극단으로 나가면서 모든 감정을 제거해 버리라고 할 뿐 아니라 애정의 감정까지도 제거해 버리라. 자기의 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무관심하게 되기까지 모든 감정을 없애 버리라고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스토익 철학의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에픽페터스란 사람은 이렇게 예를 들어서 가르쳤습니다.
가령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쓰는 그릇이나 컵이 하나 깨어진다고 하자.「그러면 그까짓 것 깨어지면 뭘 하나 나는 거기에 관심이 없노라고 얘기하라」그러다가 가령 우리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가 죽거든「그까짓 것 죽어도 난 관심 안 해.」그러다가 네 다리가 부러지든지 팔이 상해도「아, 그까짓 것 뭘 하나 나 상관 안 해.」마지막에는 심지어 자기의 가장 가까운 이가 불행하게 되어도 심지어 세상을 떠나도「난 상관없어, 난 무관심이야.」「이렇게 될 때까지 무관심 상태에 들어가라 그러면 자족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목석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사실 그런 까닭으로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의지력으로 또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또 감정을 제거하는 소극적 방법으로 자족의 마음을 성취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왜? 인간의 의지는 약합니다. 인간은 감정이 없는 목석이 아닙니다. 나무나 돌이 아닙니다. 인간은 욕망이 있는 존재요 인간은 감정이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바울이 어디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는가? 바울이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는가를 여러분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바울의 생활 환경이 어떠했는가를 잠시 들어보세요. 고린도 전서 四장 十一절 이하에 바울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하며 후욕( 辱)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에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이런 환경에서도 그는 자족의 생활을 했습니다.
또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 고린도 후서 十一장 24절 이하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인에게 四十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笞杖)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에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런 환경 가운데 어떻게 자족의 생활을 바울이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어디 있었습니까 ?
그것은 여러분이 이미 들었습니다. 빌립보서 四장 十三절에 그는 기록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그는 그에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환경에 그가 처해 있든지 간단없이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二장 二十절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그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셨습니다.
혹은 골로새서 一장 二十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그리스도께서 비밀히 그의 마음속에 계셔서 언제나 영광스러운 소망을 공급한 것입니다.
피난 때에 제주도에 가서 구경하신 분이 많은 줄 생각합니다. 제가 제주도 한림이라는 데를 한 주일 가 있어 보았는데 그 곳에 가보면 물을 길러 어디로 가는고 하니 다른 데로 가지 않고 바다로 나갑니다. 물이 들어오면 바다뿐인데 밀물만 나가면 바다 속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 속에는 생수가 콸콸 나와서 곧 우물에 가득 찹니다. 그래서 바다 속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길어다가 먹습니다.
바울이 사는 환경은 이와 같은 역경이지마는 그의 속에는 주님께서 계셔서 언제나 간단없이 생수가 솟아 나왔습니다. 여기에 그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늙고 감옥에 앉았고 몸에는 언제나 찌르는 가시가 있었고 장래의 전망은 네로의 칼날뿐이었으나 그는『주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 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안에 생수가 솟아났습니다.
며칠 전 저녁에 루우마니아 사람인 법부란트 목사께서 자기의 신앙 간증을 우리교회에서 했지요. 그가 공산당 감옥에 들어가서도, 그런 무서운 속에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기쁨으로 지낸 생생한 간증을 우리가 다 들었습니다.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비천함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하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우리 주님은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우리가 늘 가난하게 살려고 애쓸 것은 아니지마는 기억할 것은 불 의한 재물로 호화롭게 사는 것보다는 가난하게 사나 옳게 사는데 참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비천할 때에 어떻게 처해야 되는 지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옛날 아합 왕 같은 이는 일 국의 왕으로서 모든 소유가 있었건마는 자기 집 옆의 나봇의 포도동산을 탐내서 자족을 모르고 남의 포도 동산을 탐내다가 큰 죄를 범하고 마지막에는 그 가족이 멸망을 당한 얘기를 우리가 성경에서 읽어봅니다.
「거 아무개는 만족을 몰라.」이란 말을 우리가 간혹 듣습니다. 만족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한 가정의 남편도 만족을 좀 알고 살아야 합니다. 아내도 만족을 좀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 전서 六장 六절에『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족할 줄 아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敬虔)의 큰 이익이 온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히브리서 十三장 五절에는『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사실 불평과 원망은 내 심령상태가 고갈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영접하세요. 그리스도와 동행하세요. 그리스도로 생명의 양식을 삼으시고 생명수로 삼으세요. 그리하면 어떠한 환경에서나 어떠한 십자가를 지거나 기쁘고 감사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이것이 자족한 생활의 비결입니다. (一九七0년 八월 九일)

Ⅸ-2 바울의 설교와 벨릭스 (사도행전 二十四장 二十一-二十七절)
(로마서 十三장 十一-十四절)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행 24·25)

사도 바울은 죄인으로서 유대인의 암살 계획을 피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까지 압송이 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그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 벨릭스가 주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행정과 사법이 나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종 벨렉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가 자기 아내인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같이 예수 믿는 도를 듣고자 하여 바울을 자기 집으로 청한 것입니다. 그리해서 사도 바울은 그 앞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설교의 대지가 二十五절에 있습니다.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이 그 것입니다.
벨릭스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도 다소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바울에게서 까지도 혹 돈을 받을까 해서 자주 청했다고 하는 구절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고대의 역사가 죠세퍼스나 태시터스를 통해서 우리는 좀 더 그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본래 로마 황제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첨과 간교한 사교술로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고 나중에는 유대총독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가 태시터스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그는 종의 정신으로 포학(暴虐)과 욕심으로 통치하였습니다. 또 그 아내라고 하는 두루실라는 본래 다른 사람의 아내였는데 그를 꾀어 내어 자기 아내를 삼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런 이들 앞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몰론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매우 적절한 교훈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매우 적절한 교훈이올시다. 특별히 현대인에게는 더욱 그러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이 시간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의에 대하여 강론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이 예루살렘 공회(公會)에 잡혀가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을 받을 때에 사도행전 四장 十九절을 읽어보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베드로와 요한 은 무엇을 하든지「옳은가」「하나님 앞에서 그 일이 옳은가」를 판단하여 항상 옳게 살려고 힘을 쓴 이들입니다. 인간 행동의 기준은 이해(利害)가 아닙니다. 득실(得失)도 아닙니다. 편 불편(便不便)도 아닙니다. 쾌 불쾌(快不快)도 아닙니다. 인간 행동의 기본적인 기준은 그것이 옳으냐 옳지 아니하냐, 의(義냐) 불의(不義)냐에 있는 것입니다.
시편 一一九편 一三七절에『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정직하시니이다.』
시편 九七편 二절에『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의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도 산상보훈(山上寶訓)에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義)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먼저 하나님과 옳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성호를 찬양하며 그에게 감사와 기도로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마땅히 할 일입니다. 그의 뜻에 순복(順服)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의 뜻의 표현인 자연의 법칙과 도덕의 법칙에 순복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의 맡기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신인간에 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서로 옳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의가 있어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옳은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불륜의 행동은 이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때의 벨릭스의 가정은 불의의 가정이었습니다. 부모와 자녀간에도 이 의가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은 의입니다. 옳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권면(勸勉)합니다.『자녀들아 주안에서 네 부모를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곧 의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잡지를 보니 어느 나라에서는 자녀들이 부모를 가르치려고 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혹 그런 면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원칙은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요새 어떤 학생들은 스승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말이 혹 들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칙은 아닙니다. 스승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원칙입니다.
요새 어떤 이들은 의와 불의, 정과 부정, 순결과 불결, 선과 악의 영원한 도덕의 법칙을 무시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손해는 내가 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자연 법칙을 무시하고 살려면 당분간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아야 할 것은 손해도 내가 본다는 사실입니다. 사람 사이의 의를 거절하면 손해도 내가 봅니다. 더욱이 상거래에 있어서 의가 있어야 합니다.
가격만큼의 상품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상품만큼의 가격만 받아야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든지 같이 받아야 할 것입니다.
노사 관계에도 의가 있어야 합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이 빈부의 격차가 심하여 지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노사 관계에 의가 결여되는 까닭입니다. 그것은 불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까닭입니다.
일반 행정은 물론 특별히 사법 재판에 있어서 의가 있어야 합니다. 부정 부패는 의가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설교는 벨릭스 뿐이 아니고 오늘의 우리 법관들 내지는 모든 우리 국민 하나 하나에게 필요 적절한 교훈입니다. 먼저 그는 의를 강론했습니다.
둘째는 절제에 대해서 강론했습니다. 절제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인간의 이성과 양심과 또 하나님의 법에 의지해서 규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능은 본래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욕망도 본래 그러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 욕망 그대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짐승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제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고 양심을 주셨고 또 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들을 제어하면서 사는 생활을 절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네 자신을 알라.」는 권면은 매우 좋은 권면입니다. 특별히 자신의 약점을 아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부족합니다. 자신을 제어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을 이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극기라는 것을 아주 귀한 덕으로 인정하여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도『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절제가 필요하나 특별히 먹는데 입는데 그리고 일반 생활에도 절제가 아주 필요합니다. 필요한 거만 먹고 먹으리 만큼 먹는 것이 절제입니다. 입으리 만큼 입는 것이 절제입니다. 너무 많이 입는 것은 무절제입니다. 반면에 너무 덜 입는 것도 무절제입니다. 어떤 여자들은 너무 덜 입는 것 같습니다.
수입에 맞추어서 생활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월급은 한 달에 5만 원 밖에 못 받는데 부인이 매달 七만 원씩을 쓴다고 하면 그 가정은 결국 파탄이 나고 말 것입니다. 수입에 맞게 사는 것이 절제입니다. 그런데 옛날부터 인간들은 필요한 음식 이외에 다른 것도 많이 먹기 시작했습니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어떤 사람은 아편도 먹습니다. 요즘 서양의 젊은이들 가운데는 소위 환각제라고 하는「엘 에스 디(lsd)」「마리화나」니 하는 것들을 먹는다는 보도를 우리는 읽고 있습니다.
대학생들 가운데 하기 농촌 계몽대로 나갔다 와서 보고하는 글을 읽어보니 농촌에는 한국의 三대 악이 있는데 그 첫째는 과음, 즉 술 많이 먹는 것이고 둘째는 도박 즉 노름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실 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三대 악이 있다면 그것은 과음과 부정 부패와 음란일 것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아랍 사람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한 번은 악한 마귀가 어떤 아랍 사람에게 와서『당신에게 앞으로 큰 화가 올 것입니다. 그 액을 피하려면 내가 말하는 세 가자 가운데 한 가지는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그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마귀가 대답합니다.『하나는 당신의 종 가운데 하나를 죽이든지 또 하나는 당신의 아내를 때리든지 나머지 하나는 큰 술병을 가지고 와서 한 병 다 먹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죄 없는 종을 죽일 수도 없고 살림 잘하는 부인을 때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그 술이나 먹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술병을 받아 잔뜩 먹고 취하자 공연히 트집을 잡아 가지고 살림 잘하는 아내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종이 보다 못해 너무 기가 막혀서『죄 없는 부인을 왜 때립니까?』하며 권면하니까 그만『네 놈이 무엇이기에 나에게 대들어?』하며 때리니까 매를 맞고 그만 죽었습니다. 그러니 술 한 병 받아먹고서는 아내도 때리고 종까지 죽인 셈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술의 영향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술은 일만 죄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술 먹고 협잡합니다. 술 먹고 음란한 일 합니다. 술 먹고 부정 부패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전에 알렉산더 대제가 서른 세살 났을 때에 온 세계를 정복하리라 하고 그 다음엔 더 정복할 나라가 없어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삶이 하루저녁은 친구를 모아놓고 요새 말로 대포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밤새도록 마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주독으로 말미암아 쓰러져 죽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는 천하는 정복했으나 자기자신을 이기지를 못했습니다.
절제와 극기의 덕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절제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중국 사람들은 술을 더러 먹어도 술 주정하는 것을 못 봅니다. 제가 세계 여러 도시를 많이 다녀 보았지만 다 술 먹는 사람들일 텐 데도 우리 한국처럼 술 먹고 거리를 비틀거리며 다니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서울 거리를 다녀 보세요. 특별히 저녁거리가 어떤가 다녀 보세요. 문화인이라고 할 수 없는 광경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들의 이 약점을 잘 알았기에 초대 선교사들과 선배 목사님들은 우리 교회 안에서는 특별히 금주 단연(斷煙)을 엄격히 실행하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신교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은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금주 단연의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맑은 새 물결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에는 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전통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몸은 성령의 전이올시다. 성령의 전을 불필요한 것들로 더럽혀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셋째로 사도 바울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하여 강론하였습니다. 고린도 전서 四장 三절 이하를 읽으면 거기 사도 바울이 세 가지 심판 또는 판단을 말합니다.
첫째, 사람의 심판이 있습니다. 곧 인간의 법정이 있습니다. 둘째로 마음의 심판이 있습니다. 곧 양심의 법정이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법정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항상 이 세 법정 아래에서 심판을 받으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 첫째 법정인 인간의 법정은 제일 부정확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외모는 보고 속을 보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법정은 양심인데 양심의 법정도 언제나 정확한 것은 못됩니다. 양심이 부패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정확한 법정은 하나님의 법정입니다. 우리는 이 법정 아래서 산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심판이요 또 하나는 미래의 심판입니다. 현재에도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역사적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맷돌이 천천히 돌아가나 매우 보드랍게 갈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심판은 미래의 심판, 장차 오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선포한 말씀과 같이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의미합니다.
현재는 다 섞여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양과 면양을 갈라 세울 날이 옵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분별할 날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들어 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二十장 十一절 이하를 읽어보세요. 장차 오는 심판이 기록돼 있습니다.
자 그런데 사도 바울의 설교가 여기까지 이르니 벨릭스가 두려워서 지금은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내가 틈이 있으면 장차 너를 또 부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설교를 중단시켰습니다. 이것은 큰 유감이올시다. 벨릭스가 조금만 참았으면『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하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강론했을 텐데 그만 중단을 시켜서 결론을 못 듣고 말았습니다. 설교는 끝까지 잘 들어야 합니다. 벨릭스는 이렇게 설교를 연기시킴으로써 회개의 기회를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런데 벨릭스는 만날 만한 때에 찾지를 못했습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리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의 설교를 들었지만 회개하지를 못했고 악한 법관으로서 역사에 남았습니다. 그의 육과 영은 영원한 멸망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셔야 됩니다. 지금이 은혜 주실 때요 오늘이 구원의 날입니다. 회개를 내일로 연기해서는 안 됩니다.『네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우리는 내일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릅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교회 출입은 하지만 아직까지 온전히 회개하고 주님을 내 구주로 온전히 영접하지 못한 분이 계시면 이 시간에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인간 생활에는 의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 생활에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늘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로마서 十三장 十二절 이하에, 일찍이 어거스틴을 깨우친 구절을 다시 읽을 때에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하게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라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一九七0년 八월 二十三일)

Ⅹ-3 빈집의 위험 (마태복음 十二장 三十八-四十五절)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삶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5)

우리 주님의 간단한 말씀이올시다. 그러나 의미는 심장(深長)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한 번은 나갔습니다. 물 없는 곳으로 헤매지만 쉴 곳을 찾지 못하니『내가 나 있던 집으로 다시 가리라.』이렇게 결정했습니다. 여기 집이란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와보니 집이 비었습니다. 소제도 하고 수리도 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귀신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그 마음의 집에 거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참혹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올시다.
빈집은 위험합니다. 속담에 빈집에 도둑이 든다고 했습니다. 집을 오래 비어 두면 도둑만이 아닙니다. 쥐도 들어오고 뱀도 들어오고 거미도 들어오고 온갖 벌레가 다 들어옵니다.
자연의 법칙은 진공 상태를 오래 두지 않습니다. 누구나 빈 병이란 말을 쓰지만 사실은 빈 병이란 없습니다. 빈 병 속에도 공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물을 넣어 보면 꼴록 꼴록 하는 소리가 납니다. 이것은 병 속에 있던 공기가 나오는 소리입니다.
빈 것은 채워지고야 맙니다. 기억할 것은 좋은 것으로 채우지 않으면 나쁜 것으로 채워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밭에 곡식을 심지 아니하면 잡초가 납니다. 동산에 꽃을 심지 아니하면 역시 잡초가 무성해집니다. 빈집에는 도둑이 들어올 위험이 있습니다. 빈 밭에는 잡초가 날 위험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빈집의 위험」이란 제목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인간의 마음은 한 집이라는 사실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내 집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를 예수 님께서 일찍이 지적하셨습니다. 마태복음 十五장 十九절을 읽어보세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 등 한마디로 더러운 귀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회개의 첫 단계는 이 악귀를 내어쫓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부족합니다. 이것이 나간 다음에 집을 쓸고 그냥 비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곧 새 주인을 영접해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二장 二十절에『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그리스도를 영접했음을 의미하는 말이올시다.
참 회개는 악귀에 속하는 더러운 생각들 대신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각 진리,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충만히 언제나 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러운 귀신이 재침할 염려가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어올 염려가 있습니다. 믿다가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예를 때때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빈 영혼은 위험합니다. 온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 진리와 관련해서 기억할 것은 소극적 신앙 생활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적극적 신앙생활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악한 생각을 교정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선한 습관을 양성해야 합니다. 금주(禁酒) 단연(斷煙)만은 부족합니다.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음탕한 노래를 피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경건한 노래, 특별히 찬송을 배워야 합니다. 불결한 책들을 멀리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유익한 책을 읽어야 합니다. 특별히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죄로 이끄는 오락의 장소를 멀리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경건한 집회에, 특별히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유혹으로 이끄는 옛 친구를 피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선한 신앙의 새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야 합니다. 도적 질 이나 협잡을 안 하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음란한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내 아내 내 남편을 참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악을 피하는 길은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악한 생각을 제하는 길은 선한 생각을 품는데 있습니다.
인도의 한 철학자가 자기 제자들을 모아 놓고 우리가 이제 한 시간 동안 눈을 감고 마음을 비워 놓고 아무 생각도 말고 앉아 있자 고 선언했습니다. 인도는 원숭이가 많은 나라입니다. 원숭이가 뛰어 들어도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앉았다가 눈을 뜨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가를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는 대답이었습니다.「무슨 생각을 했는가?」「원숭이 생각을 했습니다.」몽키콘셔스니스(Monkey Consciousness)라고, 원숭이 의식으로 가득 찼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소극적 노력은 언제나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옛날 바리세인의 실패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결국은 외식과 위선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一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그뿐 아니라『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이런 적극적인 면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십니다.『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여기까지는 소극적인 이야기입니다. 다음 계속해서『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세우는 사람과 같다.』고 산상보훈의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소극적 신자가 되지 말고 적극적인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봉사를 해야 합니다. 전도를 해야 됩니다. 교육 사업과 모든 다른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서도 각 방면에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해서 사회 정화 운동이나, 사회정의 확립운동이나, 사상 선도나, 정치 안정, 경제 발전, 간첩 방지, 국방을 위한 모든 활동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선봉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일이나 사회 일이나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꼭 기억할 것은 이것입니다. 특별히 청소년 시대에 독실한 신앙, 고상한 이상, 철저한 윤리 사상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들 없는 마음은 빈집이올시다. 무엇이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히피 사상도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유물론 무신론 허무주의 무정부주의 성 개방주의, 공산주의 등 무엇이 못 들어오겠습니까?
빈집에는 아무 것이나 들어옵니다. 거리에 지나가는 많은 청년들을 볼 때에 들어오는 한 가지 의문은 저들의 머리 속에 무엇이 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염려는 대체로 빈집이 많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갖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을까. 그러므로 맹목적으로 유행만 따라 가는 것이 아닌가. 일곱 귀신같은 악한 사상들에 감염될 위험이 있지 않은가.
양구 다방에서 소란을 피우다가 자살한 한 불쌍한 청년의 이야기를 여러분께서 눈물로 다 읽으신 줄 압니다. 그 청년의 정신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문자 그대로 비었습니다. 공허감, 인생에 대한 허탈감, 어떤 이는 인간 상실의 적신호라고도 합니다. 사실입니다.
현대인의 정신 상태 가운데 하나는 이 허탈감입니다. 인생의 뜻을 모르고 삽니다. 만일 이 청년이 일찍이 그 머리 속에 독실한 신앙, 고상한 이상, 철저한 윤리 사상이 들었던들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현대 한국의 청년들은 옛날 유교의 삼강오륜을 초개처럼 버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치할 새 윤리를 찾았는가, 그것은 없습니다. 빈집이올시다. 그러므로 오늘의 도덕적인 혼란 상태를 우리는 목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야말로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 윤리를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교육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교회 교육, 기독교 학교 교육, 기독교 사회 교육이 필요합니다. 현대 국가 교육은 지식과 기술은 가르치지마는 빈 영혼을 채워 줄 수 있는 진리는 가르치지 못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사명이올시다. 청년들은 독실한 신앙, 고상한 이상, 철저한 그리스도의 윤리를 일찍부터 내 영혼 속에 깊이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넷째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한가한 생활, 무위의 생활, 아무 것도 안 하는 생활, 게으른 생활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왜? 빈집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언제나 반격의 기회를 찾습니다. 한가한 여자들, 소위 유한 마담 가운데 유혹에 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일들은 별로 할 것이 없으니까 계나 하려 다니고 다방에나 가고 극장에나 가고, 어떤 이들은 댄스홀에 가고, 이러는 동안에 언제 집안을 망치게 되는지 모릅니다.
성경에는『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섧기라.』고 했습니다.『아들아 포도 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한국농촌에는 손이 부족하여 밭이 놀아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골 청년들이 서울로 몰려 와서 실직자 노릇 하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만일 그런 청년이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오늘 저녁을 당 신네 농촌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돌아가서 내 농촌을 건설해야 합니다. 서울에서 공연히 빙빙 돌아다니다가 죄에 빠지지 말고 가서 일을 해야 합니다. 놀면 서는 예수를 바로 믿지를 못합니다. 일을 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게으른 크리스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원리와 관련해서 이것을 정치적 견지에서 생각해 봅시다. 6·25 사변이 왜 일어났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빈집에 도적이 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뜻인지 알 것입니다. 一九四八년에 이 서울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국방경비대라고 하는 약간의 군대가 있었지만 국방 적 견지에서 볼 때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것입니다. 탱크라는 것도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은 다 철수해서 미국에 돌아갔습니다. 빈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귀신같은 북괴가 남한을 침노해서 내려온 것입니다. 만일 그 때 미군이 그냥 주둔해 있었던들 6·25 사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생한 역사의 교훈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왜 지금도 우리는 국군의 현대화를 주장하고 미군의 철수를 반대합니까? 이 나라가 다시 빈집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월남이 저 모양입니까? 거기도 빈집에 도적이 든 것입니다. 동남아시아가 빈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정치가라도 이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이런 때네 미국의 정치가들이 이 진리를 꼭 배웠으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빈집에 도둑이 드는 법입니다.
지난 8·15 이후로 한국에서 통일 문제를 굉장히 많이 토론하는 모양입니다.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통일은 승공(勝共) 통일뿐입니다. 밖에 다른 종류의 통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우선 남한을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모든 방면에 북한보다 월등하게 우위에 서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국제적 여건이나 그 밖에 다른 방면으로 통일의 기회를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한이 빈집이 되지 아니하도록 모두 아름답고 굳센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 방면이올시다. 영적 견지에서 우리 한국을 볼 때 이 한국의 혼란은 말하자면 빈집을 뜻합니다. 재래의 종교 전통 윤리 사상들은 그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빈집입니다.
남한 인구의 八할은 무종교입니다. 빈집입니다. 그러므로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시급한 사명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빈집을 기독교 진리로 채워주지 않으면 무엇이 들어올지 모릅니다. 더 악한 일곱 귀신같은 유물론 무신론 허무주의 무엇이 못 들어오겠습니까? 이 빈집을 그리스도의 진리로 채워야 우리 민족은 금생(今生)과 내생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십자군의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군들은 이런 때에 일어나야 합니다. 복음 전선에 나서야 합니다. 내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내 영혼의 형편이 어떤가. 내 영혼에 빈집은 없습니까? 한 분이라도 그런 영혼이 있으면 이 시간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빈집은 위험합니다. (一九七0년 九월 六일)
Ⅹ-4 두 문 두 길 (마태복음 七장 七-二十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七·十三-十四)

이 말씀 가운데 두 문과 두 길, 두 종류의 사람들, 두 다른 사람들의 종말과 종국(終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간증 주일에 각 사람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두 문을 보세요.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습니다. 인생의 앞에는 이렇게 두 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로 들어가려면 두 문 가운데 좁은 문을 택해서 그 문을 통과해야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회개의 문이올시다. 회개는 좁은 문이올시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제일 먼저 외친 말씀이『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였고 제일 먼저 외친 말씀이『천국이 임하였느니라』입니다.
좁은 문은 짐을 지고는 못 들어갑니다. 죄의 짐을 지고는 못 들어갑니다. 교만, 허위, 음란, 방탕 등 온갖 죄를 회개하고야 생명의 길에 들어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그리스도인들, 생명 길로 들어선 이들은 신앙 생활을 시작할 때에 이 좁은 회개의 문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의 불 경건한 생활을 끊어버리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용기가 필요합니다. 단호한 결심으로써만 이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우리는 다 이 좁은 문을 지났습니다.
또 이 문은 좁아서 하나씩 하나씩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혹 어떤 경우에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경우를 우리가 봅니다. 대단히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예배당 문은 같이 들어 올 수 있지마는 이 회개의 좁은 분은 각각 하나씩 하나씩 통과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회개해야 되고, 아들은 아들로서 회개해야 되고, 딸은 딸로서 각각 따로 회개해야 생명 길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제가 베들레헴에 갔을 때에 거기 예수 님의 탄생을 기념해서 지은 큰 예배당을 보았습니다. 예배당은 큰데 예배당에 들어가는 문은 작아서 문자 그대로 좁은 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 예배당에 들어가려면 머리를 겸손히 숙여야 하고 짐을 벗어 놓고 하나씩만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회개의 문이 이와 비슷합니다.
반면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다고 하였습니다. 넓습니다. 전에 평양에 살던 사람들은 넓으면 대동문통 같다고들 말했습니다. 아마 옛날에 서울 살던 사람들은 아마 남대문통 처럼 넓다고 이야기했을 거예요.
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습니다. 교만 그대로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벌에 대한 교만 돈으로서의 교만 혹은 지위에서의 교만 모든 교만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짐을 벗을 필요가 없습니다. 죄 짐을 지고도 그냥 들어갑니다. 들어가도 거치는 것이 없습니다. 홍콩세관 비슷한 지도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경고합니다. 이 문은 결국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고.
둘째로 두 길을 보세요. 주께서 좁은 길 넓은 길을 지적했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다고. 그런고로 좁은 길로 가라고 권고하십니다. 이런 권면이 우리 동양 사람에게는 얼른 납득이 안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 동양사람들은 군자는 대로 행(君子大路行)이란 말을 했습니다. 군자는 넓은 길로 걸어다닙니다.
자 그런데 이거 좁은 길로 가라니… 이런 좁은 길은 현대인에게도 맞지 아니합니다. 왜? 소위 근대화 작업 가운데 하나는 길을 넓히는 작업이올시다. 신작로니 고속도로니 다 넓은 길을 의미합니다. 자 그런 시대에 좁은 길로 가라고? 말하자면 시대 감각에 역행된 교훈 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지금도 영적 윤리적 차원에서는 이 말씀이 진리입니다. 거저 쉽게 말하면 좁은 길이란 어려운 길을 의미합니다. 넓은 길이란 쉬운 길을 의미합니다.
지금 가을이라 도처에 체육대회가 많은 것 같은데 가령 여기 운동 선수가 되려는 젊은이가 둘 있다고 합시다. 운동 선수 앞에도 두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이 있고 넓은 길이 있습니다. 한 청년은 운동 선수가 되기 위해서 음식도 절제합니다. 잠도 꼭 잘 만큼 잡니다. 규칙적 생활을 합니다. 때때로 연습합니다. 매일 연습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한 청년은 같은 목적을 가지기는 가졌지마는 이대로 하지 아니합니다. 음식도 마음대로 먹고 자는 것도 마음대로 자고 연습도 규칙대로 안 하고 생각 날 때는 하고 생각 안 날 때는 그만 두고 넓은 길로 갑니다.
어느 청년이 장래에 위대한 선수가 될 것입니까.
좁은 길로 가는 청년이 위대한 순수가 될 것입니다.
지금도 좋은 성가대의 음악을 들었지마는 음악가의 앞에도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좁은 길이고 하나는 넓은 길입니다.
여기 음악가가 되려는 두 학생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연습을 합니다. 규칙적으로 연습을 합니다. 매일 연습합니다. 꼭 선생의 지도를 받아서 연습을 계속합니다. 그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한 학생은 같은 목적을 가지기는 가졌지마는 그대로 하지를 않습니다. 생각나면 연습하고 잊어버리지 않으면, 분주하지 않으면 공부하고 놀러갈 대가 있으면 놀러 가고, 연습할 때만 열심히 하고 연습 안 할 때는 몇 주간이고 안 합니다. 이건 넓은 길입니다.
여러분, 어느 학생이 장래에 위대한 음악가로 성공할 것입니까.
좁은 길로 가야 성공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모든 학문이 그렇습니다.
과학을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은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책을 읽습니다. 내용을 깊이 묵상합니다. 모든 것을 자세히 관찰합니다. 이것을 실험해 봅니다. 실험실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떠나지 아니하고 확실한 결과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 실험을 계속합니다. 이것은 좁은 길입니다.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학생은 과학자가 되기를 원하면서도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생각나면 책보고 생각나면 공부하고 실험도 대강하고 잘 안되면 그만 두고, 넓은 길입니다. 어느 학생이 앞으로 위대한 과학자가 될 겁니까.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유명한 과학자 에디슨의 말이 있습니다. 천재란 별 게 아니고 一할만 영감이요, 영감은 즉 인스피레이션입니다. 실상 九할은 땀을 흘려야 된다고, 즉 펄스피레이션이 다라고 했습니다.
천재가 되는 길도 좁은 길입니다.
운동 선수 음악가 과학자가 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누구에게나 다 필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성공해야 합니다. 실패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대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에 말한 대로 좁은 문을 통과함으로써 회개의 문을 통과함으로써 시작이 됩니다.
그 다음에 걷는 길은 어떠한가. 그 다음에 걷는 길도 좁은 길입니다. 넓은 길이 아닙니다. 왜?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일정한 목표가 있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성품, 그리스도의 생활을 따르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그곳까지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바울의 말씀대로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다름 질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이런 분명한 목표가 있는 생활은 쉬운 생활은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좁은 길입니다. 이런 것이 없는 생활은 물론 쉽지요. 넓은 길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법안에서 사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지으시고 자연계에 법칙을 주셨습니다.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이 마땅히 지킬 도덕의 법칙을 주셨습니다.
이 도덕의 법칙을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 나타난 십계명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계시되었습니다. 그런데 법대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좁은 길입니다. 이 법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넓은 길입니다. 무법의 길은 넓은 길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의 길은 자연히 극기와 절제를 의미합니다. 이상과 같은 생활을 하려고 하면 먼저 나를 이겨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본능, 내 속에 일어나는 욕심을 이겨야 합니다. 또 범사에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데까지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좁은 길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간단없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옳게 하려고 하면 매일 매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매일 기도를 드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힘써야 됩니다. 거저는 안 됩니다.
주일을 거룩 히 지키는 것도 힘써야 합니다.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책임을 정직하게 완수하는 것도 힘을 써야 합니다. 거저는 안 됩니다.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길만이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참된 즐거움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물론 넓은 길로 가는데는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잡초는 심고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무성합니다. 도둑질은 배우지 않아도 잘 들 합니다.
넓은 길엔 물론 노력이 없지요. 쉽지요. 그러나 넓은 길은 분명히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큰 셋째를 생각해 보세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종류는 넓은 길로 가는 사람 또 한 가지 종류는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께서는 지적하십니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은 많습니다. 왜? 쉬우니까.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왜? 그건 어렵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흔히 대다수를 따라가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은, 영적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는 대다수라고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옳은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언제나 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언제나 선을 따라가야 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남이 다하니 나도 하자. 흔히 이런 맹목적으로 대다수를 따라가는데서 부정과 부패와 온갖 타락이 옵니다.
남들이 뇌물을 받으면 나도 뇌물을 받자. 남들이 많이 협잡을 하니 나도 협잡하자. 남들이 모두 술을 마시니 나도 마시자. 남들이 나를 속이니 나도 좀 속여 보자.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는 사람의 수가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다수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바른 사고 방식이 무엇인지 압니까? 남들이 많이 협잡하니 나는 협잡을 말아야 하겠다. 남들이 많이 뇌물을 받으니 나는 안 받아야 하겠다. 남들이 음란한 짓을 하니 나는 안 해야겠다. 남들이 많이 넓은 길로 가니 나는 좁은 길로 가야 되겠다.
이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다수라고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마십시다. 특히 여러 처년들 유행이라고 맹목적으로. 속담에「소경 말 노량 소리 듣고 따라간다.」는 말처럼 그렇게 하지 맙시다.
넷째로 이 두 길의 종말을 보세요. 좁은 길의 종말은 생명입니다. 넓은 길의 종말은 멸망입니다. 인생 행로에는 두 가지 종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생이요 하나는 멸망입니다. 하나는 축복이요 행복이요 하나는 화입니다.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 천당과 지옥 이것은 가장 엄숙한 인생의 진리입니다. 인생 행로의 마지막은 두 가지 다른 종말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四十년 동안을 자기 백성을 인도하다가 마지막에 나이 많아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웠습니다. 임종을 하기 얼마 전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간곡히 부탁하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으리라 내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으니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누구 앞에나 이 생명과 사망의 두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길을 분명히 다 택하셨습니까? 누구든지 이 생명의 길을 분명히 택하지 아니한 분이 꼭 기억할 것은 그는 현재에도 넓은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로 가는 사람이올시다.
인생의 행로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두 길 밖에 없습니다. 중간 노선은 없습니다. 내가 생명의 길로 가지 않으면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올시다. 두 길 밖에 없습니다.
또 인생 행로는 일방 통로입니다. 한 번 가고는 돌아오지 못합니다.
한 번 만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길을 한 번 잘못 들면 망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인생 길은 꼭 바로 찾아야 합니다. 특별히 젊었을 때에 인생의 길을 똑 바로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먼저 온전한 회개로서 순전한 생명의 길로 들어가야 합니다.
소위 정 여인 살해사건이라고, 오빠에게 죽은 어떤 여인의 사건이 신문에 났던 것을 여러분이 다 읽었을 줄 압니다. 난 자세히 읽어는 안 보았지마는 그 여인이 아마 굉장히 넓은 길을 걸었던 모양이지요.
넓은 길을 걷는 이는 조만간 이런 종국에 임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一九七0년 간증 주일을 당해서 주님의 말씀을 읽고, 좁은 길 좁은 문과 넓은 길 넓은 문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은 좁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나는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님이 곧 우리의 길입니다. 예수 님이 곧 우리의 생명입니다. 예수 님의 길은 처음에는 아주 좁아 보입니다. 그러나 따라 갈수록 이 길 가운데는 실상의 행복이 있습니다.
오늘 이 뜻깊은 간증 주일 아침에 주님을 온전히 영접해서 생명의 길을 우리 모두가 걸으십시다. (一九七0년 九월 二十일)

Ⅹ-5 파종과 추수 (마태복음 十三장 一-九, 十八-二十三절)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 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23)

우리 주님께서는 아주 평범한 얘기를 통해서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얘기들은 흔히 비유라고 말합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말씀은 예수 님의 교훈 하신 비유 가운데 하나를 읽었습니다. 씨를 뿌리는 비유, 혹은 파종과 추수의 비유올시다.
이 비유는 농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있는 비유입니다. 나는 실상은 농촌에서 자라났는데 내가 어렸을 때에 보던 그대로입니다.
씨를 뿌리다 보면 어떤 때에는 길가에도 떨어지고 가시덤불에도 떨어지고 돌밭에도 떨어지고 대부분은 물론 좋은 밭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땅이 굳으니 그냥 그대로 남아있는 수밖에 없다가는 들새들이 와서 주워 먹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오기는 나오지마는 흙이 얕아서 해가 내리쬐면 결국은 얼마 있다가 말라 죽어버리게 됩니다.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고 자랍니다. 얼마동안 은 잘 자랍니다. 그러나 결국은 가시덤불에게 덮여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좋은 땅, 옥토에 떨어진 씨는 혹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비유를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비유 가운데서 네 가지 종류의 마음 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와 같습니다. 종자와 같습니다. 듣는 이의 마음은 밭과 같습니다.
그런데 네 가지 종류의 마음 밭이 있습니다.
첫째는 길가와 같은 마음 밭입니다. 길은 본래 부드러운 흙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녀서 굳어진 땅입니다. 본래는 어질고 부드러운 마음이었지마는 세상의 그릇된 사상 풍속 습관에 굳어져서 새 진리가 들어 갈 수 없는 굳은 마음이 된 것입니다.
진리의 씨가 겉에서 돌다가 결국은 새가 와서 주워 먹는 것처럼 사탄에게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굳은 마음이 있습니다.
둘째는 흙이 옅은 돌짝밭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속에는 바위가 있고 겉에만 엷은 흙이 덮인 밭이 있습니다. 이런 밭에는 씨가 싹은 트지만 뿌리가 없어서 얼마 있다가 말라 버립니다. 이런 옅은 마음이 있습니다.
감정에 휩쓸려서 얼른 새 진리를 받아들이지만 속에 깊은 깨달음이 없으니 진리로 말미암아 조금이라도 환난이나 핍박이 오게 되면 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이런 믿음을「쟁개비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불 땔 때에는 오르르 하고 끓다가 불이 척 죽으면 식어져 버립니다. 이런 마음의 밭이 있습니다. 시작은 잘 하지만 마치지 못하는 믿음이올시다. 입학은 하지만 졸업은 못하는 믿음이올시다. 마라톤 경주 장에서 달리기는 시작했지만 조금 달리다가 쓰러지는 믿음입니다. 이런 마음 밭이 있습니다.
셋째는 가시밭 같은 마음 밭이 있습니다. 흙은 부드러운 좋은 흙이지마는 가시 뿌리가 많이 섞인 밭입니다. 그곳에 진리의 씨가 떨어지면 물론 그 진리의 씨가 자라납니다. 그러나 가시도 역시 자랍니다. 그런데 가시는 더 빨리 자랍니다. 결국은 곧 씨가 가시덤불에 쌓여서 열매는 맺지 못하는 땅을 의미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가시뿌리가 섞인 험한 마음, 가시덤불에 덮인 열매 맺지 못하는 마음 밭이 있습니다. 믿기는 믿으나 주님께서 지적하신 그대로 재산의 염려, 육의 유혹, 세상의 향락이 같이 성하여 오히려 우세하게 되어 결실을 못합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런 이들을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두 말을 한꺼번에 타려고 하는 자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자들입니다. 한 발은 천국에 한 발은 지옥에 딛고 재간을 피우려는 이들입니다. 어떤 때에는 지길 박사입니다. 다른 때에는 하이드가 되는데 흔히 이런 이들은 마지막에는 하이드 박사로 끝을 맺고 맙니다. 십 년, 이십 년 교회 출입은 하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넷째로 옥토가 있습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이올시다. 열린 마음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깨닫는 마음이올시다. 진리를 깊이 깨닫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이올시다. 진리대로 삽니다. 행합니다. 꾸준한 마음입니다. 계속하여 진리의 생활을 하는 마음이올시다. 일편단심의 마음이올시다.
오직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앞만 바라보고 옆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 밭에서야 결실이 꼭 됩니다. 백 배 육십 배 혹은 삼십 배.
이런 교훈을 생각할 때에 자연히 우리는 내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내 마음 밭이 어떠한가? 내 마음 밭에는 결실이 있는가?
내가 믿기는, 우리 가운데 대부분의 마음 밭에서는 결실이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혹 결실 치 못하는 마음 밭이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깊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이 없는가. 돌짝밭 같은 마음 밭이 없는가 가시 밭 같은 마음 밭이 없는가.
성경에 보면 밭을 깊이 갈고 씨를 뿌리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길가와 같은 밭이라도 깊이 갈면 옥토가 될 수 있습니다. 깊은 참회, 참 회개를 통해서 옥토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석산(石山)에 가보면 큰 바위라도 다이너마이트로 깨트려 버립니다. 성경을 보면 복음은 「하나님의 뚜나미스」라는 말을 썼습니다. 곧 다이너마이트란 말입니다. 아무리 마음속에 있는 바위가 굳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깨뜨려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불이라 했습니다. 아무리 가시밭이 성하였지마는 성령의 불이 살라버립니다. 뿌리까지 캐어서 살라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회개와 신앙이 있으면 설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떤 마음이든지 부드러운 옥토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마음 밭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둘째는 씨뿌리는 일을 보세요. 이 비유에 씨 뿌리는 이는 누군가? 물론 예수 님이올시다. 그러나 예수 님만 씨를 뿌리신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도 계속해서 씨를 뿌렸습니다. 많은 사도들과 믿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씨를 뿌린 것이올시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는 인간은 다 씨를 뿌리는 이들입니다. 인간의 생활은 매일같이 씨를 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루의 나의 생각, 하루 동안의 나의 말, 하루 동안의 나의 행동은 다 씨를 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대한 추수가 따릅니다. 거둘 때가 옵니다. 내 성품에서 거둡니다. 내 가정에서 거둡니다. 내 사회에서 거둡니다. 내 사업에서 거둡니다. 내 교회 내 국가에서 거둡니다.
오늘에 뿌리는 씨를 내일에 거두고 현재에 뿌리는 씨를 미래에 거두고, 청년에 뿌리는 씨를 노년에 거두고, 부모가 뿌린 씨를 자손들이 거두고, 이 세대가 뿌린 씨를 다음세대가 거둡니다. 금생(今生)에 뿌린 씨를 내생에 거두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씨는 종류대로 거둡니다. 성경에 보게 되면 여러 가지 씨가 있지마는 간략히 말하면 두 가지 종류밖에 없습니다.
육체에 속하는 씨와 성령에 속하는 씨입니다. 갈라디아서 六장에 보면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여 줍니다.
육체를 좇아 씨를 뿌리는 자는 섞어질 것을 거두고야 맙니다. 정욕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은 음란과 부정으로 거둘 수밖에…악으로 뿌리는 자는 악으로 거두고, 불의로 뿌리는 자는 불의로 거두고, 마음으로 뿌리는 자는 마음으로 거두고, 거짓으로 뿌리는 자는 거짓으로 거두고 무자비로 뿌리는 자는 무자비로 거두고, 포학(暴虐)으로 뿌리는 자는 포학으로 거둡니다.
거둘 때는 더 많은 것으로 거둡니다. 전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더니 자기가 그 후에 자기 아들에게 속았습니다. 요셉이 죽었다고 오래 아들들에게 속으며 눈물 흘렸습니다.
전에 악한 여자 이사벨이 무고한 나봇의 피를 흘리더니 결국은 자기의 피가 흘림을 입어서 개들에게 핥기 우는 바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천대하면 자기가 천대를 받습니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자기 가슴이 아픔을 당합니다. 속담에「남잽이 제잽이」란 말이 꼭 맞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대로 반호출호이자 반호이자라고, 네게서 나온 것이 네게로 돌아간다는 것이 꼭 옳습니다.
반면에 성령으로 심으면 반듯이 영생으로 거둡니다. 선으로 심으면 선으로 거둡니다. 덕으로 심으면 덕으로 거둡니다. 의로 씨를 뿌리면 의의 씨를 거둡니다. 사랑의 씨를 심으면 사랑으로 거둡니다. 친절로 씨를 뿌리면 친절로 거둡니다. 자비로 씨를 뿌리면 자비로 거둡니다. 화평으로 씨를 뿌리면 화평으로 거둡니다. 진리로 씨를 뿌리면 진리로 거둡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떡을 물위로 던져라 오랜 후에 도로 찾으리라.』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6·25 직전에 어떤 의사가 한 가난한 과부의 아이를 돈이 없으니까 돈을 못 냈어도 거저 잘 고쳐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6·25가 생겼습니다. 의사가 공산당들한테 잡혀갔습니다. 꼭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어떤 젊은이가 오더니『이 사람은 아주 좋은 의사인데 이런 사람은 죽이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더랍니다. 이이도 공산당은 공산당이란 말이오. 그래서 살아났는데 그후에 알아보니까 그 어떤 때 아이를 고쳐준 과부, 실은 과부인 줄 알았더니 과부가 아니었지만 그 가난한 여인의 남편이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어떤 외지를 보니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나치스 독일 때에 유대사람을 거저 학살을 할 때 어떤 비행장에서 독일의 어느 비행사가 자기 비행기에 연습하려고 올라타려는데 어떤 사람이 뛰어오더니『여보 날 좀 살려주시오. 난 유대사람인데 나치스들이 나를 죽이려고 따라옵니다.』보니까 사실 먼발치로 나치스가 따라온단 말입니다. 그래 불쌍히 여겨 얼른 자기 비행기에 태우곤 공중으로 날아가 독일 국경을 넘어 폴란드까지 가서 이 사람을 살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얼마 뒤에 세계二차 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이 독일 비행사는 독일 사람이지만 나치스의 하는 일이 너무 못마땅해서 자기 비행기를 타고 도망해서 영국으로 갔습니다. 영국의 비행사가 되어서 오히려 독일하고 싸우게 됐는데 전투 중에 중상을 입고 머리를 상해서 뇌를 상하는 중상을 입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때에 런던에는 유명한 외과의사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뇌수술을 잘해서 회복이 됐어요. 처음에는 의식이 물론 없었는데 점점 회복이 되어서 눈을 뜨고 자기를 간호하는 의사의 얼굴을 가만히 보니 아, 이상합니다. 의사의 낯이 익은데 어디서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의사는 여러 해 전에 나치스에 쫓기던 유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의사였습니다. 죽을 청년 하나를 살려 주었더니 그 청년이 자기를 살려 주었어요.
그래서 우리 동양에 옛날부터 유은덕이 필유양보(有隱德而 必有陽報), 숨은 덕이 있으면 반드시 양보가 있다고.
적선지가에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을 쌓는 집에 경사로운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심어야 합니다.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진리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어디서나 사랑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오랜 후에라도 반드시 거둘 때가 옵니다.
그리고 이 파종과 추수의 원리를 생각할 때에 시편 一二六편 五절과 六절을 우리가 같이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눈물을 흘리며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 울며 씨를 뿌리려 나아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눈물의 파종이 있으면 기쁨의 추수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리로 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제나 선으로 씨를 뿌리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희생을 의미합니다. 인내를 의미합니다. 고통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낙심치 아니하고 꾸준히 성령을 따라 씨를 뿌리면 기쁨의 추수를 할 때가 온다는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요셉의 생활을 다 기억하시지요.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멀리 팔려갑니다. 남의 집에 종살이를 합니다. 그런 가운데도 요셉은 같이 미움으로 씨를 뿌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디서나 성령으로 씨를 뿌렸습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씨를 뿌렸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어도 진리로 씨를 뿌렸습니다. 눈물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기쁨으로 추수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사실 이러한 악한 세상에서 옳은 신앙 생활을 하며 진리의 씨를 뿌린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생활을 잠시 돌아보세요. 그가 진리의 씨를 뿌리는 중에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얼마나 핍박을 받았으며 얼마나 많은 환난에 봉착했는가. 결국은 순교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이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물론 순교자들의 생활이 그러하였습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옳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진리를 전파하다가 순교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터툴리안의 말과 같이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종자입니다. 교회의 씨입니다. 많은 추수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내가 확실히 믿는 것은 앞으로 남북이 통일 될 때에는 북한의 교회는 문자 그대로 우후 죽순과 같이 일어나서 곧 재건 될 것이요 통일된 한국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나라로 될 줄 기대합니다.
왜? 이 땅에 많은 눈물의 씨, 곧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까닭입니다. 지금도 북한 성도들은 문자 그대로 눈물의 씨를 뿌리는 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의의 하나님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올 자유의 한국을 반드시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특히 학습 받고 세례 받는 여러 교우들은 깊이 생각하십시다.
참 회개와 신앙으로 옥토의 마음 밭에 복음을 먼저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후에는 내가 진리의 씨를 뿌리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씨를 뿌리고 복음의 씨를 뿌리기를 바랍니다. 뿌리되 낙심하지 말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진리의 씨를 뿌리는 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눈물로 씨를 뿌리나 결국은 기쁨으로 단을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으로도 그렇고 가정으로도 그렇고 국가로도 역시 그런 것입니다. (一九七0년 十월 四일)

Ⅹ-6 전화위복의 하나님 (창세기 五十장 十五-二十一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려 하셨나니.』(창 五十·二十)

요셉의 야기는 우리가 잘 압니다. 요셉은 어릴 때부터 착실한 아이로서 아버지에게 특별히 총애를 입었습니다. 또 이상한 꿈도 꾸었다고 합니다. 가령 자기가 묶은 단은 일어서고 형들이 묶은 단은 그 단에게 와서 절을 한다. 혹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많은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신 바와 같이 형들은 이복 형들입니다.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 형들에게 갔다가 그만 형들에게 붙잡혀서 죽을 뻔하고 죽이지는 아니했으나 돈을 받고 멀리 애굽으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일조에 외국의 손 노릇을 하게 되었고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착실히 종노릇을 했습니다. 신용을 얻어서 그 가정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아주 무서운 시험, 청년들에게 있을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시험, 정욕을 통해서 유혹이 들어왔습니다. 주인집 마누라를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그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그 간악한 여자 보디발의 처에게 그만 휘어 잡혀서 오히려 요셉이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쓰고 애굽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길게 얘기할 것 없이 이런 재난, 화를 당하게 되었지마는 여기 요셉이 말한 대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지마는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선으로 바꾸어서 오늘날처럼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이올시다.
사람은 요셉을 해하려고 했고 큰 화가 미쳤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선으로 바꾸어서 오늘날처럼 오히려 내가 그런 화를 입으므로 말미암아 많은 생명을 구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 생활에는 불운 혹은 재난, 화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옛날 사람들에게도 있었고 현대인들에게도 있습니다.
교통사고 같은 것은 기계 문명이 발달된 오늘날에 더 많이 있습니다. 이 재난과 화의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가령, 자연적 원인에 기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천재 지변이라고 합니다. 지진 혹은 풍수나 풍재(風災) 이런 것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은 우주의 필요 불가결한 자연 법칙의 한 부산물로서 이따금 일어납니다. 그러나 재난의 대부분은 인간 자체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사람의 무지, 욕심, 실수, 무관심, 부주의, 죄, 이런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요셉의 경우는 형들의 질투와 보디발의 아내의 정욕, 이런 죄가 요셉에게 큰 재난을 가져왔습니다. 여기 아파트 도괴(倒壞)사건 같은 것도 인간의 죄악입니다. 욕심이 그런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교통사고는 대부분 인간의 부주의와 실수에서 옵니다. 음식 중독 사건 같은 것은 인간의 무지에서 일어나는 재난입니다. 다른 여러 가지 질병도 인간의 무지와 부주의에서 오는 재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밖에 우리 인간이 그 원인을 모르는 재난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믿는 사람들이 경계할 것은 재난의 원인은 덮어놓고 하나님께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덮어놓고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그래서 어떤 이는 이런 생각에서 무슨 불행한 일이나 슬픈 일을 당한 후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생기게 했나, 왜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데려갔나?
이런 것은 건전한 사고 방식이 아닙니다. 그릇된 생각입니다. 가령, 모산 에서 일어난 교통 사고가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마태복음 十八장 十四절을 읽어보세요. 거기 예수 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이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인간의 실수입니다. 부주의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종으로 팔아먹은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을 쓸 때에 조심해서 재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도록 우리 믿는 사람이 주의해야 합니다.
재난은 대부분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요셉의 이 말을 들어보세요.『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재난의 원인은 당신들 즉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사』하나님의 하신 일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사, 선으로 바꾸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어떠한 원인으로 재난이 인간에게 미쳤든지 하나님은 선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복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재난이나 화가 미쳤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전화위복이 되게 하십니다.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형들의 죄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팔려 가는 재난을 입었습니다. 화를 입었습니다. 감옥에까지 들어가는 화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신 일이 무엇이지요. 하나님은 이런 모든 형편을 선으로 바꾸어서 마지막에는 오히려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요셉이 자기 민족을 건지는 축복으로 변하게 했습니다. 자기 일족만 아니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까지 건지는 큰 축복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이 재난에 대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전화위복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요셉의 생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의 생활이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사람들의 핍박을 받아서 오래 로마 감옥에서 고생한 것은 복이 아닙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죄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매 오히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므로 말미암아 자기를 수비하는 수비대 군인들에게 전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가이사 궁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항상 여러 지방으로 전속이 되니까 이렇게 되어서 군인 사이에 그리고 전 세계로 복음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고 옥중에 있는 동안에 사도 바울은 많은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오고 오는 세대에 큰 축복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화가 바울에게 미쳤지마는 하나님은 이것들을 바꾸어서 전화위복이 되게 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 의 생활도 생각해 봅시다. 말년에 나이 많은 요한 이 로마 관헌에게 핍박을 받아서 자기 교회에서 쫓겨나고 멀리 불모의 섬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여 굴속에 홀로 외로이 있게 된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큰 재난입니다. 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었습니다. 육신의 눈은 점점 어두워 오는 요한 은 오히려 심령의 눈은 더 밝아졌습니다. 육의 귀는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의 신령한 귀는 더 밝아져서 하늘의 영광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어서 그 결과가 오늘날까지 남은 요한계시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으로 말미암아 미치는 화를 복이 되게 하십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바리세인들, 제사장, 서기관들의 시기, 증오, 모략, 가룟 유다의 배신, 빌라도의 무책임한 공판, 이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적 견지에서 보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부활이 있게 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통해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큰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올시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당하는 슬픔이나 고통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재난이라도 언제나 선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전화위복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 같은 이는 부잣집의 아들로서 처음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건 재난이요 큰 화올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었습니다. 병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성 프란시스가 되었습니다.
여기 천주교를 부흥케 한 로열라 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기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방면으로 공부합니다.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만 전쟁터에서 큰 부상을 다했습니다. 왼쪽다리를 전혀 못쓰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치료하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사모하게 되면서 온전히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온전히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기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필 목사님을 기억하시지요. 그의 간증을 들으신 분이 많을 거예요.
우리 교회 홍순영 권사 님의 주인이올시다.
우상필 목사는 원래 일제 시대에 일본에서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오래 있던 분입니다. 자기의 말대로 은행에 있으면서 오래 방탕한 생활을 했던 분이 예요. 그러다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폐결핵에 걸려 여러 해를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갚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 후에 목사가 되어 여러 해 복음을 전파한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올시다.
이것과 결부해서 우리가 꼭 생각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권능이 계신데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해요. 다시 말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요셉이 만일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서 종으로 들어갈 때 불평하고 낙심하고 자포자기했던들 요셉이 어떻게 됐겠어요. 일평생 종노릇이나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아무리 종으로 팔려가서 남의 집에서 종노릇을 하면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신앙을 굳게 잡고 깨끗이 살았습니다. 자기 맡은 일은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하나님의 선으로 바꾸는 역사에 믿음을 가지고 협력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우리가 아는 요셉이 된 것입니다.
여기 찬송가에「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 오.」란 구절이 있지요. 어떤 재난을 당하든지 어려운 일을 당하든지 내 주 안에 있는 긍휼을 의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그 재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으로 바꾸어서 전화위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뿐이 아니 예요. 모든 성도의 생활이 다 그래요. 바울의 생활이 그래요. 바울이 감옥에서 수고했지만 그는 신앙을 지켰고 요한 이 밧모섬에서 유배를 당해서 수고를 했지만 그는 신앙이 있었어요.
모든 성도의 생활이 다 그래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전화위복의 역사에는 인간적 조건이 있어요. 그것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당해야 이런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진리를 가르치는 유명한 성경구절, 로마서 八장 二十八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거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재난이나 화가와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여기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큰 슬픔, 어떤 큰 실패, 어떤 큰 환난, 어떤 큰 화를 당할 때에 두 가지 길이 우리에게 있어요.
하나는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을 꾸준히 믿고 의지하고 요셉과 같이 꾸준히 나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런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어서 전화위복을 가져옵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 일을 당했다고 실망하고 불평하고 자포 자기하면 그 재난으로 말미암아 아주 파멸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다만 시간 문제입니다. 어떤 때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기는 하나 마지막에는 전화위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三八선은 개인적으로 보나 민족적으로 보나 분명히 재난입니다. 화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실수와 죄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연합국 측으로 보면 실수입니다. 부주의입니다. 공산당 측으로 보면 그들의 야욕입니다. 곧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런 죄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믿음으로 이를 당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정녕 선으로 바꾸어서 우리 민족 장래에 전화위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전도가 필요합니다. 남한 뿐 아니라 북한 동포들에게 전도가 필요합니다.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갈 뿐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우리 하나니은 그 지혜와 사랑으로 반드시 전화위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三八선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땅에는 실로 재난이 너무나 많습니다. 불의의 재난이 너무나 많습니다. 무슨 모산 사건 무슨 충돌 사건 식중독 사건 등 이런 모든 것의 대부분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부정, 무관심, 질서, 냉담, 이런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군 관 민 모두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정신을 바로 차리고 바로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아무래도 이 세상은 재난이 없을 수는 없어요. 앞으로도 있을 거예요. 사실 여기 앉은 우리도 언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릅니다. 꼭 기억할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아무리 인간의 실수로 내게 화가 미쳤을 지라도 그 자리에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자포 자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로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어서 전화위복이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재난의 세상에서 이와 같은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一九七0년 十월 十八일)

Ⅹ-7 새해에 새 마음 (빌립보서 二장 二-十一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一九七一년 새해 첫 아침에 신도들이 같이 모여 이해를 맞을 수 있는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우리 온 교회, 우리 교우 가정 가정마다에 그리고 개인 개인마다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만이 아니고 한국교회 전체와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 전체 위에 그리고 북한에 있는 동포들에게까지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자비하심이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이 새해를 당해서 온 세계 교회 전체 위에와 온 세계 모든 나라, 각 민족, 모든 인류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내려서 금년이 과연 자유와 평화와 번영의 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크신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들이 준비가 부족한 데 있습니다. 크신 축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항상 잘 준비되어 있지 못한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금년 새 해에 우리가 다 새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다른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입니다.『너희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 새해 첫 날부터 품을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하신 축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예수 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온 신약성서가 다 예수 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지만 특별히 가르쳐 주는 구절이 몇 개 있습니다. 복음 가운데는 마태복음 十一장 二十八절 이하에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그러면서 계속해서『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거 치른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합니다. 자만심이 없습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읽은 말씀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예수 님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니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상을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등이십니다. 영광과 권능과 지위와 모든 것이 같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등 될 것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것을 모두 취할 수 있지마는 그것을 취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조금 잘 못하면 내 지위나 내 권리 이상으로 취하려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마땅히 자기에게 속한 것이지만 그것을 그대로 취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오히려 자기를 비었다는 것입니다. 비운다는 말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내어 쏟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물이 가득한 병을 들어 물을 쏟으면 병이 빕니다.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권능과 모든 것이 가득했지만 그것을 다 쏟아 버렸습니다. 비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조금 잘못하면 더 채우려고만 힘쓰기 쉽습니다. 물질이나 권력이나 무엇이나 더 채우려고만 힘쓰기 쉽다는 것입니다. 예수 님의 마음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비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모든 것 즉 자기에게 속한 모든 권능과 영광을 내어버리시고 종의 형체 곧 사람의 형상을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낮추어서 종이 되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이미 나타나신 다음에는 사람으로서도 역시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인간 가운데서도 자기를 높이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자기 몸을 희생하시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성경은 우리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권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쫓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려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얻으려고 하느니보다는 양보가 필요하고 항상 자기를 낮추는 것과 봉사와 복종과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당할 때마다 우리는 간절히 새해 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금년 새해를 당해서 제 일생 중 가장 간절하게 하나님께 드릴 기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보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곳에 성자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깨끗하고 덕이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천사들까지도 이 성자의 생활에 감동을 받아서 땅으로 그를 찾아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활을 모두 살펴보니 과연 성자였습니다. 천사들은 그에게 은혜를 더 주려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이렇게 신앙생활을 잘 하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그대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슨 병이나 다 낫고 죽은 자라도 살릴 수 있는 권세를 드리려고 합니다.』그러자 성자는 잠시 생각하더니『감사합니다마는 저는 그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까 『인간의 병은 다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셔야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는 그 은혜를 사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다시 물었습니다.『그럼 그대가 말만 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권세를 드리려는데 이것은 어떻습니까?』성자는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저는 그 은혜도 받을 수 없습니다.』『왜 그러시오?』『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니 성령께서 하셔야 할 일이지 어찌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천사들은『그렇다면 그대는 무슨 은혜를 원하시오?』라고 물었습니다. 성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예 한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떻든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얼마나 겸손한 마음입니까? 아무리 우리가 좋은 일을 하되 그 일을 내가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무래도 거기에는 개운치 않은 무엇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게 맺어집니다. 즉 천사들은 의논 끝에 그 성자에게 그의 그림자가 뒤로 비칠 때 그 그림자에 들어가는 모든 병자와 죄인들이 고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여러 가지 은혜를 다 사모해야 합니다. 꼭 받을 능력도 다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일 귀한 것은 예수 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에 받는 일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 마음을 받는 일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가 모인 가정은 언제나 화평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들이 모인 단체는 언제나 한 마음 한 뜻으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온 교회가 이와 같은 은혜를 받으면 언제나 한 마음 한 뜻으로 화평한 가운데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온 민족이 이와 같은 마음을 품게 되면 우리 나라의 모든 일은 한 마음 한 뜻으로 화평한 가운데 이루어 질 것입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이 있습니다. 집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 화평(和平)의 근본적 요소가 무엇입니까? 누구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품는 일입니다.
이 새해에 구할 것이 많이 있지만 특별히 이 첫 날 이러한 은혜를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一九七一년 一월 一일)

Ⅹ-8 새해에 밝은 눈 (마태복음 六장 十九-二十二절, 三十三-三十四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 6·22)

인간의 오관 중 가장 보배인 것은 눈입니다. 보면 제일 분명히 압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대에 와서는 특별히 시각 교육에 치중합니다. 또 누구나 라디오보다는 TV를 더 좋아합니다. 한국말에는 다른 감각에도 본다고 하는 말을 덧붙여서 씁니다. 가령, 맛보다, 만져본다, 맡아본다, 들어본다 등 보아야 더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귀합니다. 눈은 밝아야 합니다. 옛 시인은「내 눈을 열어 주옵소서」(시 一一九·十八)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하였습니다.(엡 二·十八)
그러므로 이 새해 첫 주일에「밝은 눈」혹은「밝은 비전」이란 제목으로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 생활은 그 시력 여하에 큰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볼 줄을 알아야 바른 선택을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와는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도 해서 따먹었다고 했습니다. 외양만 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창세기 十三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성이 있는 요단들을 보니 물이 많고 푸른 들이 많으므로 그리로 갔다고 했습니다. 푸른 풀만 보고 소돔사람들의 죄악이 얼마나 크다고 하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큰 낭패를 본 것입니다.
에서는 붉은 팥죽만 보고 장자의 명분의 가치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은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서아프리카 해안을 가보니까 흑인들이 조개를 까먹으면서 구술 같은 것을 휙휙 집어 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주였습니다. 그는 장난감 하나를 주고 진주를 한 주머니 얻어다가 큰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간이 여리고 성에서 의복과 금은을 감추었다가 자신과 온 가족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의복만 보고 금은만 보고 죄의 값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눈이 어두웠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 역시 은 삼십 량만 보고 만민의 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못 보는 것, 눈이 흐리고 밝은 것은 일생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밝아야 합니다. 신령한 눈이 밝아야 합니다. 영혼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의 말씀대로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四장 十八절에는『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건은 영원한 것이니라.』라는 의미 심장한 교훈이 있습니다.
물질 중에도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물 한 잔을 거저 보면 아주 맑습니다. 깨끗해 보입니다. 그 물 한 방울을 현미경으로 보면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세균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안 보이는 것을 보기 시작한 때부터 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많은 병을 고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즈음 많이 듣는 원자니, 핵이니, 양자니, 전자니 하는 것들은 다 우리 육신의 눈에는 안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인간이 보기 시작한 때부터 원자력을 이용하게 된 것입니다. 전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게된 때부터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까운데 있는 것은 보이나 먼 데 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먼 곳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발 뿌리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남한만 보면 안 됩니다. 북한도 보아야 합니다. 멀리 미국도 보고 영국도 보아야 합니다. 지구만 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주 시대인 지금은 달도 볼 줄 알고, 해도 볼 줄 알고, 멀리 있는 별들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대원군은 이조 말엽의 한 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멀리 보지를 못했습니다. 당시의 세계대세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쇄국주의로만 정치를 하다가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미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도오죠오(東條)는 미국 구경을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결국은 실패하고 망했습니다.
국내만 보면 안 됩니다. 먼 곳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온 세계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겉은 보이나 속은 안 보입니다. 그러나 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빛 좋은 개살구」란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독사 알을 새 알로 잘못 알고 가져다가 아랫목에 두었더니 며칠 후에 독사 새끼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겉만 보아서는 모릅니다. 사람을 보는데도 겉만 보면 안 됩니다. 매국노 이완용은 아주 잘 생긴 미남이었다고 합니다. 결혼할 때에도 겉만 보지 마십시오 영어 속담에「미인은 가죽만큼 두텁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만 보고 결혼했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는 보이나 장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래를 미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갈릴리 어부에게서 장차 삶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을 내다 보셨습니다. 한 천한 여자에게서 장차 경건한 하나님의 딸 막달라 마리아를 보셨습니다. 한 탐관 오리, 부정 부패한 관리에게서 귀한 그리스도의 제자 삭개오를 미리 보셨습니다. 사람을 볼 때, 특히 청년들을 볼 때 그의 미래를 볼 줄 아는 밝은 눈이 필요합니다.
사회 정세를 볼 때에도 미래를 앞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二차 대전 때에 일본이 필리핀까지 점령하게 되자 한국인들 중에는 이젠 일본 천하가 다 되었다고 일본말만 하고 일본 옷만 입고 다닌 일이 있었습니다. 현재만 보고 미래를 못 본 이들입니다.
자유당 말기에 三·一五부정 선거로 승리를 거둔 이들이 크게 개가를 불렀습니다. 한 달 후에 올 四·一九를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선거에 있어서는 항상 현재보다 장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정치가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장래의 역사가가 어떻게 볼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물질적 존재는 보이지만 영적 존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 존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도 겉 사람은 보이나 속 사람 곧 그 영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기억하게 됩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보이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주의 통치자인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 나라는 보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엘리사가 도탄성에 있을 때 아랍 군대가 와서 포위를 했습니다. 그의 종이 아침에 일어나 보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엘리사는 그 종의 눈을 열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눈이 열리자 불 말과 불 수레가 도탄 성을 에워싼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권세만 보지 말고 진리의 세계의 권세가 얼마나 힘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현세는 보이나 내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을 미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대 심판도 미리 보아야 합니다.「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이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주 여호와 나를 도와주시네.」산을 볼 때에 나무와 돌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천지를 지으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면「내가 보니…」「내가 보니…」라는 말이 많습니다. 에스겔서를 보아도 역시 그런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다 신령한 눈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신령한 눈이 열려서 신령한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남의 허물만 보고 내 허물을 보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예수 님의 말씀대로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책임을 감당치 않는 것은 잘 보면서도 내가 맡은 책임을 내가 잘 감당치 않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는 각각 내 허물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 책임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 자신의 성찰에 대한 눈이 밝아야 합니다.
금년에 우리는 각각 내 책임을 바로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눈이 밝아질까? 혹은 흐린 눈을 밝힐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면입니다. 먼저 눈을 가리우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눈을 가리우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욕심이 그것입니다. 정욕, 물욕, 권세욕, 명예욕 등 온갖 욕심은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게 될 때에 우리는 올바르게 보지를 못합니다. 때로는 친구도 못 봅니다. 친척도 못 봅니다. 민족도 못 봅니다. 나라도 못 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도 못 봅니다. 이리하여 죄를 짓습니다.
둘째로 편견, 선입(先入)주견(主見) 따위로 언제나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커스의 지동설을 주장할 때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소위 문화인들의 편견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임스 심슨이라는 분이 크로로포름을 마취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당시 의학계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는 이야기도 유명한 사실입니다. 편견이 당시의 의학자들의 눈을 가리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새로운 사실이나 진리에 당면할 때 내가 그것을 무슨 이유로 반대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진리에 입각해서 반대하는가 아니면 편견 때문에 반대하는가 말입니다.
셋째로 시기나 미움 같은 감정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 눈을 가립니다. 그래서 요한 一서 二장 十一절에는『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시기나 미움에 사로잡히면 사리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바른 판단을 못합니다.
넷째로 자만심 혹은 교만이 언제나 눈을 가립니다. 바리세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바로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교만이 그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시기나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면 아무도 바로 보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반대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눈을 밝힐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 복음 三장 三절에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심으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 새 세계, 새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五장 八절에 주님께서 팔 복을 말씀하실 때『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새 마음을 가져야만 하나님을 봅니다.
다시 말하면 참 회개를 통하여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五장 十七절에는『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것이 참으로 주안에 있을 때에는 새로워집니다. 그 때에는 눈까지 밝아집니다.
그리고 바른 위치에서 보아야 바로 봅니다. 이사야 四十장 九절에『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고 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야 시야가 넓어져서 모든 것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새가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눈으로 그린 것을 조감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볼 수 있어야 바른 시야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상한 영적 수준에서라야 곧 그리스도의 높은 인격적인 도덕적인 수준에서라야 만사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은 산상보훈 결론에서『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의 견지에서 볼 때에만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결(聖潔), 의, 진리, 양심, 광명 정대(正大)의 견지에서 만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정직과 양심보다는 돈의 견지에서 무엇을 보게 되면 그의 눈은 벌써 어두워진 것입니다.
성결과 고상한 인격의 견지에서보다도 정욕의 견지에서 무엇을 보게 되면 그의 눈은 벌써 어두워진 것입니다. 의리와 신의와 절개보다는 어떤 지위와 권리를 얻는 견지에서 무엇을 보게 되면 벌써 그의 눈은 어두워진 것입니다.
셋째로 영적 망원경을 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히브리 十一장 一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보지 못하는 것을 확실히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고 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참아 이겼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보이지 않는 가나안 복지를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믿음으로라야 멀리 천국과 내세를 볼 수가 있습니다. 믿음으로라야 모든 것을 바로 보고 멀리 보고 깊이 보고 밝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시이불견(視而不見) 즉,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밝은 눈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이 七十년대가 그러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현대는 물질만 보고 영원한 세계는 보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이 가장 많은 때입니다. 기계와 이익만 보고 사람을 보지 못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상실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눈이 어두웠습니다. 이런 시대일 수록 우리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 인간의 가치를 밝히 보아야 할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결론을 말씀 드린다면 우선 나의 책임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고, 직장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고, 교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고, 나라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습니다. 내 책임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교회 적으로 분명히 볼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신 전도의 큰문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이북에 대해서는 전도의 문이 좁습니다. 그러나 이북 전도에 대한 책임도 분명히 보아야 할 때가 온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언제나 후배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교육을 위해 교육관 건축을 하여 경영하고 있습니다. 일반 교육을 위해서 영락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경영하고 있습니다. 신학 교육을 위해서 성림여자신학교를 건축 중에 있습니다. 이 모든 책임을 분명히 교회로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봉사에 있어서도 우리가 분명히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보린 원과 경로 원과 모자원을 이미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 없고 가난한 이들이 병날 때에 우리가 좀더 잘 치료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교회도 의료를 통한 봉사에 대한 책임을 좀더 분명히 볼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적으로도 우리가 분명히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금년은 문자 그대로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는 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금년에는 선거가 있습니다. 금년의 선거는 꼭 공명 선거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는지 추측 할 수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미리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또 우리 나라는 경제적으로 발전 도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소외된 계층이 있습니다. 노동자 농민들의 처지를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그들에 대한 적극적인 시책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는 남북통일에 대한 준비의 필요성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각 방면으로 우리 한국을 잘 건설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우리가 분명히 볼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핵 시대에 처해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평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더 기억할 것은 자유가 있는 평화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는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자유뿐이 아닙니다. 사회 정의가 있는 평화의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인류애가 움직이는 세계를 건설해야 합니다. 평화, 자유, 정의, 사랑의 세계에 대한 공헌을 할 수 있어야 될 것입니다.
한 소경이 예수 님께 와서 무엇을 청했습니다. 예수 님은『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소경은『주여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 아침에 우리도 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주여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一九七一년 一월 三일)
Ⅹ-9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 (갈라디아서 六장 一-十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이는 자명(自明)의 진리입니다. 또 이것은 자연계의 한 법칙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 도덕적 세계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둡니다.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둡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마찬가지로 육체로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성령으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둡니다. 이것은 도덕의 법칙입니다. 이렇게 자연계에는 자연 법칙에 따라서 만상이 운행됩니다. 영계에는 도덕적 법칙이 있어서 만인의 운명을 지배합니다.
이 법칙 우주에 사는 인간이 그 일생을 바로 살려면 이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이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에 대하여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이 우주에 이런 법칙이 있다는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연의 법칙이 있고 도덕의 법칙이 있는 줄을 알고 하나하나 이 법칙을 찾아냄으로써 모든 것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가령 인력(引力) 혹은 중력(重力)의 법칙은 옛날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뉴우톤이 이것을 분명히 발견한 데서부터 과학이 크게 발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법칙을 알지 못하고는 건축가가 될 수 없습니다. 비행기나 우주선의 고안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조정사가 될 수도 없습니다. 현대 문명의 모든 새로운 발명품들, 전신이나 전화를 비롯해서 라디오나 텔레비전이나 전자 계산기에 이르기까지 자연 법칙을 분명히 알고 그 원칙에 의지해서 제작이 되었고 그 법칙에 의지해서 운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법칙을 잘 알고 그대로 사는 이가 과연 문화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인이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세계에도 역시 도덕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도 물론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양심에 계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법칙들을 좀 더 분명히 발견해서 가르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우리 동양에서는 흔히 성현이라고 불렀습니다. 공자(孔子)나 맹자(孟子)같은 이가 그러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동양에 있어서 이 도덕의 법칙을 먼저 깨닫고 오고 오는 세대에 가르친 사람들입니다.
옛날 서양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흔히 철학자라고 불렀습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들이 다 그런 이들입니다. 이들은 서양에서 이런 법칙을 누구보다도 먼저 분명히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특별히 유대 나라 사회에 있어서는 이런 일들을 선지자들이 하였습니다. 가령 모세나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내신 도덕의 법칙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의 견지에서 이 도덕의 법칙을 깨달은 대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은 못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부분적으로 발견하고 부분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 법칙을 가장 완전히 나타내시고 가르치신 이가 있습니다.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을 비롯한 그 모든 교훈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도덕의 법칙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활을 통해서 가장 완전한 도덕적 생활을 직접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선 도덕의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또 이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옳게 생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도덕의 법칙을 알아야 하고 또 그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현대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우리의 생활 모습이 큰 변혁을 일으킨 것이 사실입니다. 교통이나 통신이나 생산의 수단을 비롯해서 주택이나 의복에 이르기까지 큰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이 무조건 다 변화하는 줄로 오해하는 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이 세상에서는 변한다는 것 이외에는 다 변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관찰입니다.
아침과 저녁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치 아니합니다. 밤과 낮도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치 아니합니다. 춘하추동 사계의 순환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 법칙은 변치 않습니다. 꼭 마찬가지로 도덕의 법칙도 옛날이나 오늘이나 변치 아니합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육체를 따라 심으면 육체로 말미암아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정욕으로 심으면 음란과 가정의 파탄으로 거둘 것입니다. 악을 심으면 악으로, 불의를 심으면 불의로, 미움을 심으면 미움으로, 거짓을 심으면 거짓으로 거두고야 말 것입니다. 전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더니 그 후 자기 아들에게 자신도 속았습니다. 전에 이세벨이 무고한 나붓의 피를 흘리더니 그 후 자기의 피가 또한 흘림을 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으로 심으면 반드시 영생으로 거둡니다. 선으로 심으면 선으로 거둡니다. 덕으로 심으면 덕으로, 의로 심으면 의로, 사랑으로 심으면 사랑으로, 진실로 심으면 진실로 거둘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전에 요셉이 어디를 가나 덕으로 심더니 결국은 덕으로 거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동양에도 유음덕이면 필유양보(有陰德必有讓步)란 말이 있습니다. 숨은 덕이 있는 곳에 양보가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적선지가에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란 말도 있습니다. 선을 쌓는 집에 여경이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연의 법칙이나 도덕의 법칙은 시대가 변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생활 양식이 변한다고 해도 절대로 변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릇된 시대 사조에 미혹되지 아니해야 합니다.
셋째로 반드시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에 순복해야 합니다. 그대로 준행(遵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내가 나를 스스로 속이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작년에 일어난 와우 아파트 사건을 지금도 뼈저리게 기억합니다. 시멘트가 온전히 돌로 굳어지는데는 일정한 자연의 법칙이 있습니다. 시멘트와 모래와 자갈과 물의 배합이 꼭 이 자연 법칙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자연 법칙을 순종치 않은 결과로 큰 참화를 우리 동포에게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 법칙을 속이지 못합니다. 자연 법칙을 속이려고 하면 결국 내게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끔찍한 교통 사고가 너무나 빈번히 일어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남영호 사건을 잠시 생각해 봅시다. 이런 참혹한 사건도 결국은 인간이 자연 법칙을 무시한 데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배마다 정원 제도가 잇는 것은 일정한 톤 수의 배는 일정한 인원밖에 안전히 운행할 수 없다는 자연 법칙에 의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무관심, 부주의로 이 법칙을 무시하여 결국은 이러한 참화를 빚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자연 법칙을 어기는 것은 결국 자기가 손해를 받고 자기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수항의 질자호 사건, 혹은 충남에서 인천으로 오던 신흥호 사건 등을 보면 우리 국민이 아직도 이 자연 법칙을 순복해야 한다고 하는 인식이 얼마나 부족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배들이 모두 승객의 정원을 초과해서 태웠습니다. 신흥호는 정원 三十명의 배인데 八十명을 태우고 오다가 기계 고장이 생겨서 다섯 시간이나 표류하면서 해안경비대에 구호를 청하지 못했습니다. 정원 초과가 탄로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여 줍니까? 국법이 무서운 것만 알고 자연 법칙을 어기는 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산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연 법칙이 무서운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국법보다 이것이 더 무서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런 사고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도덕 법칙 역시 그러합니다. 인간은 도덕 법칙을 속이지 못합니다. 도덕의 법칙을 속일 줄 알고 순복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기가 자기를 속인 것을 깨닫게 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의 일생을 인간 항로라고도 합니다. 인간 생활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바닷길을 바로 건너려고 하면 인생이라고 하는 배에 부여된 도덕의 법칙을 꼭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 법칙을 지키지 않으므로 인생 항로에서 파선된 인간의 비참한 파편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서대문 교도소에는 수천 명의 죄수가 앉았습니다. 이들은 다 도덕의 법칙과 국법을 속일 수 있을 줄 알고 여러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들을 속인 것뿐입니다.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은 절대로 속이지 못합니다. 여기에 순종치 않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한가지 기억할 것은 이 법칙들과 자유와의 관계입니다.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만 하는 것은 방종입니다. 자유는 마땅히 행동해야 할 그대로 하는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이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을 온전히 순종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 법칙들을 거스르는 자유는 결국 자신들을 파괴할 것입니다. 가령 어떤 이가 높은 건물에서 내려오려고 하면 두 가지 길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자연 법칙을 순종해서 계단을 걸어 내려오든지 혹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로는 자연 법칙을 거슬러서 곧장 뛰어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물론 자유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 사람의 다리는 부러질 것입니다.
자유는 언제나 법 아래에서의 자유입니다. 국민의 자유는 국법 아래에서 자유입니다. 기차는 언제나 레일이라고 하는 궤도 위에서만 최대의 자유가 있습니다. 자동차는 언제나 큰 길 위에서만 최대의 자유가 있습니다. 법을 떠나서 자유를 사용하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파괴할 뿐입니다.
공의는 정치의 대 법칙입니다. 공의를 떠나서 정치를 하면 결국은 그 자신이 파괴를 당할 것입니다. 순결은 가정의 대 법칙입니다. 이 법칙을 떠나서 살면 그 가정은 결국은 파괴될 것입니다. 신의는 상업을 비롯한 모든 인간 관계의 대 법칙입니다. 이 신의를 떠나서 살면 결국은 자신이 파괴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립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뜻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농락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롱할 수 없고 하나님을 비웃을 수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시고 그 가운데 자연 법칙을 두어서 운행케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이 인간을 지으시고 도덕의 법칙을 두어서 그 아래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이 법칙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조롱하는 결과가 됩니다.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조롱할 수 가 있겠습니까?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스스로를 조롱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맙니다. 결국 내 자신에게 파괴와 멸망이 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을 순종해서 살아야 내게도 행복이 오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새해에 이 진리를 분명히 깨달아서 이대로 삶으로써 금년 새해가 우리 개인과 모든 국민에게 행복과 번영과 장성과 열매 맺는 축복의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법칙의 우주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의미에서 다 씨를 뿌리는 농부들입니다. 이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이 움직이는 대우주 안에 살면서 씨를 뿌리는 농부들입니다. 매일의 생활은 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언행(思言行)은 다 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거둘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내 성품에서 거두게 됩니다. 내 가정에서도 거두게 됩니다. 내 교회에서도 거두게 됩니다. 내가 사는 사회에서, 내가 하는 사업에서, 내가 사는 국가에서, 여기에 대하여 거둘 때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 심는 것을 내일 거둡니다. 현재에 심는 것을 미래에 거둡니다. 젊어서 심는 것을 노령에 거둡니다. 부모가 심은 것을 자손들이 거둡니다. 근세에 심는 것을 내세에 거둡니다. 반드시 거둡니다. 씨는 두 가지 종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뿌리는 씨요 또 하나는 육체를 중심해서 뿌리는 씨입니다. 성령의 씨를 뿌리려면 먼저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계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임재(臨在)하여 계십니까? 우리는 이 새해를 당해서 어떠한 일 년을 살 것입니까? 모든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의 열매가 충만할 때에, 이것이 우리의 사언행으로 나타날 때에 우리는 가는 곳마다 금년 일 년 동안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씨를 뿌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같이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一九七一년 一월 十일)

Ⅹ-10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十三장 一-八절)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히브리 十三장에는 몇 가지 실제적인 권면이 있습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여라,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여라, 가정을 깨끗이 지켜라, 돈을 사랑하지 말라, 믿음으로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라는 등의 실제적인 권면들이 있습니다. 이 사간은 특별히 三절의 말씀을 생각하고 합니다. 학대받는 자들을 생각하라.
인간의 불행한 역사 중에 하나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학대하는 일입니다. 옛날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였습니다. 세기를 통해서 강대 민족이 약소 민족을 학대하였으며, 권력층이 권력 없는 이들을 학대하였으며, 재산 계급이 가난한 이들을 학대하였으며, 남자들이 여자들을 학대하였으며,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학대하였습니다.
요새는 사람들이 자연을 학대해서 소위 공기 오염이니 강수 오염이니 하는 공해가 세계 문제로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학대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냈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사야서에 있는 대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하며 마음 상한 자들을 고쳐주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을 전파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님께서는 모든 학대받는 자들을 도와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본문에 특별히「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들을 생각하라.」고 한 것은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갇히거나 학대를 받는 이들이 많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예수를 믿음으로 갇히기도 하고 학대를 받은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마 우리가 사는 이 이십 세기처럼 기독교인들이 갇히고 죽고 학대를 받은 시대는 과거에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시대에 학대받는 이들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6·25를 계기로 해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 신도들이 학대를 받고 학살당했던 것을 지금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대는 三八이북 또는 모든 철의 장막 배후에 있는 국가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범브란트 목사가「갇혔을 때에 돌아보았는가?」라는 제목의 책자를 출판하였습니다. 영어 제목은「그가 만일 그리스도라면 당신의 담요를 드리겠는가?」입니다.
이 목사는 이미 들으신 대로 일찍이 루마니아에서 十四년 동안 공산당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나왔습니다. 또 작년에 우리 한국을 방문했고 바로 이 영락교회 강단에서도 그의 체험을 간증한 일이 있습니다. 이 책 가운데는 그가 최근에 수집한 철의 장막 배후에서 갇히고 학대받는 많은 소식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 몇 가지만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一九六九년 八월 十九일부 소련에서 발행되는 프라우다라고 하는 신문지에 다음과 같은 지하교회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그들은 두 침실밖에 없는 작은 집에서 비밀히 모여 모두 울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원수도 사랑하여야 한다고 설교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소련의 한 여자는 여름 성경학교를 몰래 열고 어린이 十二명을 가르친 죄로 멀리 시베리아 수용소에 추방되어 갔다.」또「시베리아 아주 북쪽 깊숙한 곳에서 기독교인들만 모여 사는 한 촌락이 발견되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자유로이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하여 보통은 너무 추워서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에 따로 살았던 모양인데 이것마저 발각된 모양입니다.
소련의 게치크라고 하는 분은 비밀 기도회에 참여한 죄로 두 달 봉급의 벌금을 물었다고 합니다. 또 소련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종교 교육을 하였다고 수 백 기독교 가정에서 어린이들을 빼앗아다가 멀리 딴 곳에 수용해서 부모와 자식이 격리되어 전혀 소식을 모른 채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어린이수용소에서 새어 나온 소식 중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선생이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우주 비행사가 공중에 올라가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하나님을 못보고 내려왔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어린이 하나가「『그 비행사들의 마음이 깨끗하지 못했나 보죠? 마음만 깨끗하면 하나님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데요.』이렇게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또 한 번은 선생이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가르쳤더니 한 어린이가 이런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모든 사람의 조상이 다 원숭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히 공산당의 조상은 원숭이라는 말이 맞을 거여요.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에게 이렇게도 포악하고 잔인하게 굴 수가 있겠어요?』
공산 국가 특히 소련 불력에 속해 있는 국가에는 두 가지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인된 교회입니다. 말하자면 공공연히 나타난 교회입니다. 소련에 공식으로 나타나 있는 헬라정교의 교인 수는 세계 기독교 협의회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약 오 천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공인되지 않은 비밀교회, 소위 지하교회들이 있는데 이 지하교회의 교인 수가 약 四천 五백만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한편 공인된 교회는 물론 공식으로 모일 수는 있지만 역시 여러 면으로 정부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동구 위성 국가 중 가장 자유화되어 있는 나라가 루마니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루마니아에 있는 교회가 어떤 간섭을 받는지 아십니까? 여기서는 목사가 안수를 받을 때에도 먼저 정부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설교도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세례도 일일이 정부의 허가가 있어야 받을 수 있는데 가령 한 二十명 세례를 주겠다고 명단을 제출하면 보통 그중 四분의 一정도만 허락이 내린다고 합니다. 결국 二十명 중 五명만 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목사는 비밀히 세례를 주는 수가 있는데 만약 이 일이 발각되면 목사는 물론 세례 받은 사람들도 징역을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하 교인들 중에는 심지어 자신이 스스로의 머리에 물을 뿌리며『내가 내게 세례를 주노라.』하고 혼자 세례를 베푸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소련의 지하교회의 어떤 성직자들은 정부의 부당한 요구를 승낙할 수가 없어서 다시 말하면 공인된 교회에서 정식으로 안수를 받을 때에 정부로부터 부과되는 여러 요구를 승낙할 수가 없어서 이미 순교한 주교의 무덤에 가서 그 무덤의 비석 위에 손을 얹고 신조에 대한 고백을 한 후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가지 더 한다고 합니다.『나는 매질과 투옥과 고문과 비난과 십자가와 불행과 환난과 세계의 모든 고난을 달게 받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구주와 거룩한 사도 교회가 감수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나도 비록 무가치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나 이 모든 고난을 죽는 날까지 감수할 것을 서약합니다.』이런 고백 후에 스스로 순교한 주교의 무덤 앞에서 안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현재 중공에는 공인된 교회는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소위 문화 혁명 후에는 나타나게 모이는 형태의 교회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중공내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기독교인의 수가 약 四만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그중 팡 체이라고 하는 목사의 일화가 어떻게 새어 나왔습니다. 이 목사가 오래 수감 중에 있다가 한 번은 심문을 받기 위해 심문 관 실에 나갔다고 합니다. 나가 보니까 방구석에 누더기 더미가 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누더기가 아니고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여인인데 자세히 보니 수년 전 함께 체포당했던 자신의 어머니였습니다. 옥고를 겪다 못해 백발이 되고 모양도 변해서 겨우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양의 어머니를 옆에 놓고 심문을 하던 자가 나중에는 『열 가지 계명을 아는 데로 좀 가르쳐 주시오.』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팡 첸 목사는 이런 자에게 십계명을 가르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고 생각하다가 공산당에게 계명을 가르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열 가지 계명을 하나씩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차례로 내려가다가 다섯 째 계명에 이르렀습니다.『부모를 공경하라.』심문 관은 여기서 목사의 말을 멈추게 하더니 물었습니다.『당신 이 다섯째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까?』『아 물론 잘 지켜야지요.』목사가 대답하자 심문 관은 옆에 쓰러져 있는 목사의 노모를 내려다보더니 말했습니다.『당신이 지금 내게 당신의 신앙 동지들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기만 한다면 당신의 어머니는 즉시 석방이 될 것이오. 어떻게 하겠소?』목사는 한참 생각을 하다가 누워있는 어머니에게『어머니 어떻게 할 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누운 채로나마 정색을 하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네가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를 사랑하라고 가르쳐 온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당하는 고생은 조금도 염려 말고 주님과 그의 자녀 너희 형제들에게 끝까지 신의를 지켜라. 만약 네가 너의 신앙 동지를 배반한다고 하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그 후에 이 아들과 어머니는 다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옥에서 세상을 떠났음이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에서 一九六九년 있었던 일이 역시 책에 실려 있습니다. 북한에는 공인된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하교회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북한 노동자에게는 휴일이라고 하는 것이 도무지 없다고 합니다. 그저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일을 해야 하는데 심지어 그네들의 혁명 기념일 따위의 날에도 생산 증가라고 하는 명목아래 일하면서 기념식만 지낸다고 합니다. 다만 병들게 되면 집에서 치료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 四만 명이 일하는 어떤 탄광에서 매일 일요일이면 약 천二백 명의 환자가 발생되는 사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평일에도 물론 환자가 있지만 일요일마다 환자 수가 특별히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당들은 조사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물론 환자들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몇 사람씩 모여서 어느 집에서 혹은 어느 산골짜기에서 예배하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찬송도 부르지를 못하고 조용히 읽기만 하였고 또 성경을 조용히 읽고 몇 마디 한 후 기도도 조용히 한 다음 헤어질 때에도 일제히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흔적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나씩 하나씩 가만히 헤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여간 공산당들은 이것을 찾아내고 이 때문에 四十五명이 처형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三八선 이북에 철의 장막 배후에 지하교회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킵니다. 방금 이 시간도 북한과 철의 장막 배후에는 갇힌 신도들도 많고 학대를 받는 이들도 많은데 이들은 다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들과 같이 고난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울 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여기에 나라고 하는 말은 주님의 교회라고 하는 뜻입니다.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이십세기에는 그리스도의 지체 가운데 많은 부분이 말할 수 없는 학대를 받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체라고 하는 것은 같이 고통을 받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같은 지체가 된 우리로서는 이 사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자유 진영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할 일은 무엇이며 정신적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우선 성경말씀과 같이 이 갇힌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이들을 생각하고 이들을 위하여 좀 더 간절히 기도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들은 골방에서 혹은 숲에서도 우리 남한에 있는 동포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수난 중에 있는 북한 동포를 위하여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니『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갇힌 것처럼 생각을 하고 내 몸이 학대를 받는 것처럼 생각을 하라. 다시 말하면 이들이 받는 그 학대에 마음으로라도 동참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소련의 많은 신도들은 속내위 안에다 작은 쇠사슬을 달고 다닌다고 합니다.
학대받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마음으로라도 쇠사슬을 달고 언제든지 이 학대받는 신도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겠습니다.
왜 이 공산당들이 이렇게 포악합니다. 같은 인간들로서 왜 저런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로 그들은 유물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볼 때 육신만 보고 영혼은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르게 보이질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물질 우주만 보이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금세만 보고 내세를 알지 못합니다.
지하교회 교인들은 울면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원수를 사랑하자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이런 일들을 하니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깨닫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모든 방법으로 복음을 알려 줘야 되겠습니다. 방송을 통해서 또는 기독교 문서를 비밀 방법으로 보내서 이들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줘야 되겠습니다.
이 七十년대를 당해서 한국 교회가 이 북한 전도를 새롭게 인식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이 때야말로 믿는 이들이 자다가 깰 때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말씀 그대로 이 때야말로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때입니다. 철의 장막 배후에 있는 기독신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소련 어떤 곳에서는 교인 몇 사람이 허락 없이 심방을 했다고 한 달씩 구속을 당했다고 하는 보도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심방을 합니다. 집회에 참여했다가 벌금을 내면서도 집회에 참여를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성찬식을 한 번 거행하고 다 검거되었는데 그 이유인즉 포도즙을 한 잔으로 돌려가며 마셨으니 위생법에 어그러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성찬에 참여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예배에 참여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비밀히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자유 진영에서 자유로이 예배할 수 있고 자유로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고 자유로이 전도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특별히 남한에 있는 신도들은 우리 나라를 과연 평화와 자유가 있는 나라로 건설하기 위해서도, 또는 북한에 자유와 평화의 물결을 일으키기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복음을 전파할 때입니다.
한 번은 부활절에 시베리아에 잇는 수용소에서 여자 죄수들 중 몇몇 믿는 사람이 모여서 부활절 축하 예배를 보았다고 그 추운 곳에서 맨 발로 얼음 위에서 오래 벌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신앙을 지킵니다.
갇힌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一九七一년 一월 十七일)


Ⅹ-11 노래하는 마음 (에베소서 五장 八-二十一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여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오늘 아침 읽은 말씀 가운데는 몇 가지 실제적인 권면이 있습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세월을 아끼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범사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 피차에 복종하라 그리고 十九절에는 특별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입술로만 아니고 마음으로도 주께 노래를 하라고 가르칩니다.
고린도 전서 十四장 十四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시편 一0三편의 저자는 첫 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이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내 속에 있는 것들아 하는 말은「마음속에 있는 것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옛 성도들은 입술로 찬송을 부를 뿐더러 그 마음으로 또한 찬송을 불렀습니다. 입술로 만의 찬송은 부족합니다. 마음속에 항상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노래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입술로는 찬송을 잘 부를 수 없는 이들도 우리 가운데 많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 마음으로는 누구든지 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 마음속에 찬송이 충만해야 합니다. 또 언제나 노래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아침은 특별히 이「노래하는 마음」이란 제목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노래하는 마음은 우선 건강에 유익합니다. 잠언 十七장 二十二절에는『즐거운 마음은 양약(良藥)이로되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노래하는 마음은 건강에 좋은 약입니다. 노래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소화도 잘 되고 혈액 순환도 잘 되고 신경의 긴장을 풀어 줍니다. 현대 의학계에서 주장하는 말을 들으면 질병의 六할 내지 七할이 심리적 원인이라고 합니다. 노래하는 마음을 가진 이에게는 우선 병이 그 만큼 줄어드는 것입니다.
바로 지난 주간의 타임 잡지를 보면 미국 죤 홉킨즈 대학의 교수 죠지 W 홉스탁 박사가 그의 대학이 있는 매릴렌드 주 워싱턴 군에 모든 주민들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에 매일 출석하는 신자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건강을 비교해서 연구한 결과가 발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것은 잘 믿는 이들에게는 심장병, 간 경화증, 결핵, 목의 암, 만성 기관지염, 자동차 사고, 자살 등이 매우 적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잘 믿는 이들이 오래 산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매주일 꼭 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이들 중에는 동맥경화증이나 심장병으로 죽는 이가 매 十만 명에 五백 명 가량인데 그렇지 않은 이들 가운데는 매 十만 명에 九백 명이 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믿는 이들 중에 기관지염이 적은 이유는 늘 예배당에 가서 찬송을 부르는 까닭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는 말이었습니다.
하여간 노래하는 기쁜 마음이 건강에 유익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노래하는 마음은 일이 잘 되게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학생이 공부를 하면 기억도 잘 되고, 이런 마음으로 시험을 치르게 되면 시험도 잘 치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다 이런 노래하는 마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 교수도 매우 잘 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청소를 하면 청소도 잘 되고, 바느질을 하면 바느질도 잘 되고, 그릇을 닦으면 그릇도 깨뜨리지 않고 깨끗이 할 것입니다. 이런 노래하는 마음을 가지고 직공이 제품을 만들면 좋은 제품을 생산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모든 운전 수들이 자동차를 운전하면 교통 사고가 적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공무원들이 사무를 보면 국민들에게 퍽 친절해 질 것입니다. 온 가족이 이런 마음을 가지면 그런 가정은 화평할 것입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장사를 하면 장사도 잘 될 줄 압니다. 이런 마음은 언제나 그 얼굴에 반영이 됩니다. 화평한 얼굴을 가진 이가 물건도 더 잘 팝니다. 언제나 이런 마음을 지니게 되면 모든 일이 잘 됩니다.
사실 노래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게 되면 서울의 거리가 더욱 명랑해질 것입니다. 서울의 상점들도 좀 더 명랑해 질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노래하는 마음은 모든 유혹과 시험을 물리칩니다. 주를 노래하는 마음에 남을 미워하는 생각이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더러운 생각이 이런 마음에는 침노하지를 못합니다. 원한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노래하는 마음에 세상에 속하는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이 침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헬라 신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헬라 나라는 섬들이 많은 나라입니다. 이 여러 섬들 가운데 한 섬에는 싸이렌 이라고 하는 여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선 부(船夫)들이 배를 타고 그 섬 옆을 지나가노라면 그 여자들이 바닷가에 나와서 노래를 불러 선 부들을 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래를 듣고 섬에 내렸다가는 가졌던 돈을 다 빼앗기고 마지막에는 거지가 되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선 부들은 언제나 그 섬 옆을 지나가게 되면 너무 무서워서 절대로 섬에 내리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는 밧줄로 몸뚱이를 배에다 단단히 붙들어 매고 그 섬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나가도 정작 바닷가에 이 여자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광경을 보고 듣게 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매었던 밧줄을 풀고 또 내려서는 홀딱 망하는 수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당시 헬라의 유명한 음악가 올훼오스라고 하는 사람이 배에 같이 타고 그 섬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올훼오스라는 음악가가 거문고를 한 손에 들고 타면서 노래를 부르니까 배에 타고 있던 선 부들이 모두 그 노래에 도취가 되어서 그 섬 옆을 지나면서도 이 여자들이 부르는 노래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사히 잘 지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에 시온의 노래가 있을 때에 세상의 음탕한 노래가 아무리 크게 들려와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왜 교회에 이따금 출석하면서도 퇴폐 한 유행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까? 그 마음속에 시온의 노래가 없는 까닭입니다. 왜 빠나 댄스홀 같은 곳을 기웃거리게 됩니까. 그 속에 거룩한 노래가 없는 까닭입니다.
주의 노래로 가득 찬 마음을 유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노래하는 마음은 담대합니다. 이사야 十二장 二절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 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노래하는 마음에는 모든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불안도 없어집니다. 근심과 걱정이 사라집니다. 오직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용감한 그리스도의 정병이 됩니다. 선한 싸움을 싸웁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고야 맙니다. 믿음을 끝까지 지킵니다. 마음의 노래는 그리스도인 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마음의 노래를 하는 십자군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노래하는 마음은 담대해 집니다. 그러므로 노래하는 마음은 모든 봉사를 잘 하게 합니다. 교회의 봉사도 잘하게 합니다. 어떤 책임이든지 기쁨으로 감당하게 합니다. 이런 노래하는 마음을 가진 권찰(勸察)들이 심방을 잘 합니다. 이런 노래하는 마음을 가진 교인들이 심방을 받기도 잘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잘 가르칩니다. 사실 이런 마음을 가진 성가대원들이 찬양을 할 때에 그 찬양이 높은 하늘 보좌에 상달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와 감화를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 나가면 역시 잘 합니다. 어떤 면에서든지 수고를 아끼지 아니합니다. 이런 마음은 자연히 다른 이들을 주님께로 이끕니다. 전도도 잘 합니다. 노래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은 마치 장미꽃이나 백합화와 같이 어디서나 그 향시를 뿜게 됩니다.
초대교회가 그러한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파한 것은 그들의 마음에는 주님의 노래가 언제나 같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교부 터툴리안이 기록한 바와 같이 그들은 들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밭을 갈았고 또 바다에서도 노래를 부르면서 배의 노를 저은 것입니다.
노래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로 가득 찬 교회는 자연 부흥됩니다. 사실 노래하는 마음에는 천국이 이미 임한 것입니다. 천국이 그 마음에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은 이미 그 마음에 천국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높은 산이나 거친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가 문제 아닙니다. 늘 노래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은 이미 천국의 거리를 걷는 분들입니다. 온 가족이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 가정에는 이미 천국이 임하였습니다. 온 교우가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 교회에는 이미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당에 모여서만 찬송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합니다. 이 찬송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계속되어야 합니다. 길을 가면서도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일할 때에도 노래를 부르고 쉴 때에도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평안할 때만 아닙니다. 괴로울 때에도 이 노래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건강할 때만 아닙니다. 약할 때에도 이 노래를 계속하여야 합니다. 깰 때만이 아닙니다. 잘 때에도 이 노래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 인생 행로를 걸어가며 노래하는 이야말로 가장 기쁘고 가장 행복 된 분입니다.
여러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고 노래하는 마음으로 인생 길을 걷고 노래하는 마음으로 이다음에 요단강을 건너십시오. 그러면 노래로 충만한 하늘 나라에서 천군 천사들과 이미 구원을 받은 천 천만 성도들과 함께 영원히 시온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드립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온전히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내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셔요. 모든 근심과 염려를 주께 맡기셔요.『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와 동행하셔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이 목적으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이 노래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一九七一년 一월 二十四일)


Ⅹ-12 변화산상의 그리스도 (누가복음 九장 二十八-三十六절)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 9·29)

부활 주일 전 약 四十일간을 옛날부터 렌트 혹은 사순절이라고 해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에 있어서의 최후 약 四十일간의 고난의 생애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적 생활에서 특별히 중요한 몇 가지 사건을 기억합니다.
초기에 있어서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 에게 세례 받으신 일은 특별히 기억할만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일도 특별히 기억할 일입니다.
그리고 말기에 있어서는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일은 특별히 기억할 만한 일입니다.
그리고 변화산상에서 된 일입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에는 변화산상에서 된 일을 잠깐 동안 생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높은 산에 올라갔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 높은 산이 어느 산이라고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학자간의 의견도 각각 다른 것입니다.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서 성지에 가면 안내자가 으레 갈릴리 지방에서 제일 높은 산인 다볼산이라는 산으로 데리고 올라갑니다.
이 산은 일찍이 사사 시대의 유명한 여 사사 드보라 라고 하는 분이 바락과 함께 그 때의 가나안 왕 야간의 장군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한 유명한 산입니다. 그 산에 올라가 보면 그리스도의 변형을 기념하는 기념 예배당이 지금도 서있습니다. 그 벽에는 그리스도의 변형된 빛나는 모습의 그림과 또 좌 우편에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황홀하게 도취된 세 제자의 모습도 보입니다.
주후 약 四세기부터 이 다볼산이 그리스도가 변화한 산이라는 전설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성서학자들은 이 전설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유대 나라에서 제일 높은 헐몬산, 마치 우리 한국의 백두산과 같이 높은 산꼭대기에는 흰 눈이 늘 덮이어 있는데 그 산의 한 봉우리가 아닐까 합니다.
그 이유로는 이 산이 베드로가 예수 님께 메시야라고 고백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볼산 위에는 그 때 산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볼산 보다도 헐몬산 어떤 봉우리에 예수 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 과 야고보를 데리고 어느 날 저녁에 올라가신 것으로 대개의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산상에 올라가신 목적이 무엇인가. 누가는 이 점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려 올라 가셨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의 신앙 고백으로 예수 님께서 메시야 라는 것이 비로써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또한 이 메시야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야 와는 달리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가 되어 죽음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말하기를『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미치지 아니 하리 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려고 하는 예수 님의 견지에서나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진 제자들의 형편으로 보아도 꼭 기도는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조용한 곳, 높은 산봉우리를 향하여 가장 사랑하는 세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간 것입니다.
산에서 된 일은 어떠한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밤에 기도하는 중에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졸던 세 제자에게는 크게 놀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황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이 받은 인상은 일생 동안 잊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오랜 후에 베드로 후서 一장 十六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工巧)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 이러한 소리가 크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尊貴)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야고보는 물론 일찍이 순교를 했으므로 문헌을 남긴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 은 그의 경험이 그가 기록한 요한 복음 一장 十四절에 반영이 된 줄로 생각합니다.
요한 복음 一장 十四절을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공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리스도는 빛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그 때에 예수의 변형된 육체보다도 그 정체인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목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예수는 과연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더욱 확실히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곧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그들은 장차 예수 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할 것을 말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살아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시내산 꼭대기에서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위대한 율법의 수여 자입니다.
엘리야는 가멜산에서 불로 기도에 응답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여 준 가장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요 엘리야는 구약 모든 선지자들의 대표자입니다. 이 두 분이 산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씀의 제목은 예수 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문제였습니다.
여기에 별세라고 번역된 헬라 말은「엑소더스」입니다. 곧 나간다고 하는 뜻입니다. 지금도 구약의 출애굽기를 엑소더스라는 헬라말 그대로 영어로 부릅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갔고 마지막에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것입니다.
곧 예수 님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는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천하 만민을 죄악에서 떠나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와 엘리야가 다 같이 메시야는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만인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완성임을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은 변화산상에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하여 만민의 구주가 됨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주님께 말씀했습니다.『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 이다.』
이 말을 할 때에 홀연히 빛나는 구름이 와서 덮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오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제자들은 엎드려서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
구약에 보면 빛나는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臨在)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모세가 지은 성막(聖幕)위에도 빛나는 구름이 머물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에도 구름이 임재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빛나는 구름 가운데서 음성이 들렸다고 하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 음성의 내용을 보면 다음 두 가지 진리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첫째는 이는「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곧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인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는「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곧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들었습니다. 엘리야의 말을 들었습니다. 랍비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예수 님의 말씀만 들을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종교적 진리의 최고 진리 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자요 진리의 선포 자입니다. 그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오직 그를 통하여 우주와 인생의 깊은 진리를 바로 깨닫고 그의 교훈을 통하여 인생의 바른 길을 가고,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의 사함을 받고 그의 부활을 통하여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더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오직 예수 님만 보였습니다. 오직 예수 님만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만민의 구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 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오직 이 예수를 믿고 따름으로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누구로 생각하십니까? 옛날 사람들과 같이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다만 세례 요한, 혹은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 님을 한 종교적 천재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혹은 예수 님을 한 위대한 종교가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상한 도덕가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 님은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위대한 종교가입니다. 고상한 도덕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알아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이 변화 산에서 본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빛나는, 독생자의 정체를 보아야 합니다.
햇빛보다도 더 밝은 그 영광을 신령한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주는 과연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둘째로는 이러한 그리스도는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모습을 신령한 눈으로 밝히 보아야 합니다.
수난의 메시야, 고난을 받으신 메시야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이어 주기 위하여 그는 그의 생명을 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신 메시야를 우리는 분명히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또한 보아야 합니다. 영원히 살아 계셔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와 동거동락(同居同樂) 하시는 주님을 보고 이러한 주님을 마음속에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이만한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만 더 말씀 드립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만 들어야 합니다. 어떤 종교가의 말을 들을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자들의 말을 따른 것도 아닙니다. 더욱 어떤 광신주의자들의 외치는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님의 말씀만 들을 것입니다. 그 명령에만 순종할 것입니다. 그대로 행할 것입니다. 그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 절기에 이 변화산상의 그리스도를 신령한 눈으로 보고 그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의 빛나는 얼굴을 앙망(仰望)하는 자마다 그의 얼굴도 빛날 것입니다. 주의 빛이 그 얼굴에 반영이 될 것입니다. 그의 생활에 역시 반영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 같이 제자들과 같이 신령한 눈을 들어서 변화산상의 주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다 같이 변화산상의 빛나는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一九七一년 二월 二十八일)

Ⅹ-13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 (요한 복음 十二장 二十-三十三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지금은 사순절 기간으로서 특별히 주님의 최후 주간의 말씀을 하나 생각하고자 합니다.
명절에 예배하려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 님의 제자 빌립에게 가서 예수를 좀 뵈옵기를 청하였습니다.
빌립이 안드레에게 이 말을 하고 같이 예수 님께 나아가 이 사실을 고하였습니다.
『헬라 사람 몇 사람이 와서 주님을 뵙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신 주님은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였습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님은 흔히 평범한 사실에서 깊은 인생의 진리를 찾아내어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에는 땅에 떨어지는 밀 하나를 통하여 자기가 장차 거르려는 길을 말씀하시며 우리가 또한 꼭 배워야 할 진리를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몇 사람, 헬라 사람을 통해서 장차 자기에게 몰려올 수다한 이방 사람을 미리 보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기가 먼저 십자가에서 만민을 대속하기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을 미리 보신 것입니다.
이 시간 땅에 떨어지는 밀 하나의 원리를 잠깐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자연계와 이 원리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농부가 아닐 지라도 이 원리는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밀 하나가 그냥 있으면 언제나 하나 그대로 있습니다.
애굽 금자탑 속에서 밀 알 몇을 발견한 일이 있는데 五 천 여 년간이나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밀을 땅에 심었더니 많은 수확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흙에 묻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속에서 새 싹이 나고 자랍니다. 열매를 맺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밀은 땅에 떨어짐으로서 많은 결실을 합니다.
이것은 밀만이 아닙니다. 모든 곡식이 그러합니다. 벼가 그러하고 콩이 그러하고 팥이 그러하고 옥수수가 그러하고 모든 곡식이 그러한 것입니다.
곡식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나무와 식물들도 그렇습니다.
도토리가 그대 있으면 그대 한 알 그대로 언제나 남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떨어져서 땅에 묻히면 썩어 싹이 나고 큰 나무로 자랄 뿐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도 그러하고 복숭아나무도 그러하고 백과가 다 그러한 것입니다.
가을날 황금 물결이 뒤치는 곡식 밭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땅에 묻힌 이 밀 알 한 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밀 한 알들의 무덤 위에 그렇게 많은 결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 년 보는 평범한 사실들입니다. 그러나 또한 뜻 깊은 진리가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다음에 그리스도의 생활과 이 원리를 계속해서 생각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평범한 사실에서 생활의 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이 되기를 결심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을 통하여도 그는 위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의 위대한 인격의 감화, 그의 진리의 교훈, 그의 크신 이적, 그의 사랑과 모든 행동은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유대 나라 안에 거의 국한되어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후에 오순절이 이르렀고 三천 명이 하루에 회개하게 되었고 그 수가 며칠 안 되어 五천 명으로 증가되었고 그뿐 아니라 사마리아와 수리아, 안디옥과 전 로마 제국과 아니 전 세계에 복음이 확포(擴布)되어 많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문자 그대로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이었습니다. 이렇게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는 이 원리 그대로 살으시고 그대로 죽으시므로 이 원리 그대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단순하고도 확실한 보편적인 진리 한 가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곧 많은 결실의 비결은 희생에 있습니다.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희생하여야 합니다. 오직 희생만이 많은 결실의 비결입니다.
지난주간 제가 부산에 있을 때 오후에 집회를 마치고 여관에 돌아왔는데 어떤 중년 부인한 분이 찾아와서 꼭 만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들어오라고 하였더니 그는 작은 선물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면서 자기의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그는 6·25때에 남편을 잃고 일곱 살과 다섯 살 되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없어 허덕이던 중에 마침 부산에 다비다 모자원이 생겨 그 곳에 들어와서 十여 년 있으면서 두 아들을 길렀는데 그 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지마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은 맏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였고, 지금은 둘째 아들도 거의 대학을 졸업하게 되어 이제는 아무 염려가 없노라고 하면서 이렇게 모자원을 부산에 세워주셔서 너무 감사해 잠깐 만나 뵈려 왔노라 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 어머니의 말을 들을 때에 족히 과거 二十년간 그가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고독과 빈궁과 눈물과 희생의 생활을 회상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어머니는 두 아들을 위해서 청춘과, 향락과, 사치와 허영 등 모든 것을 희생한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이었습니다.
땅에 떨어진 밀 하나의 정신을 가진 어머니가 있는 가정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있는 가정은 귀한 자녀를 옳게 길러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크게 공헌을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어머니, 이런 정신을 가진 아버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가정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기관이 그렇습니다. 가령, 남한에 근 五백에 달하는 고아원이 있는 줄 압니다. 이런 사회사업 기관에서 많은 불행한 어린이들이 지금 자라고 있습니다. 대체로 외원(外援)단체와 국고 보조로 최소한도의 식생활은 문제가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컨대 문제는 이 아이들을 바로 기를 만한 원장들과 보모들이 잇느냐 거기에 있습니다.
곧 땅에 떨어지는 정신을 가진, 다시 말하면 이 어린이들을 위해서 희생하려는 직원들이 얼마나 되는가 요컨대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기르기는 과히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람으로 키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희생적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에는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사회사업가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회 시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학원이 역시 그러합니다. 지금 남한에 공립 사립학교가 많이 있습니다. 국민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중·고등학교 대학교가 무수히 있습니다. 물론 학교를 경영하는데는 재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학교는 지식과 기술만 가르치는 곳은 아닙니다. 학교는 옳은 사람을 만드는 곳입니다. 이런 교육 기관이 되려면 지식과 기술이 많은 교사로만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참으로 학생을 위하여 자기의 전 생명을 바치려는, 다시 말하면 땅에 떨어지는 정신을 가진 교육자가 필요합니다. 수많은 남한의 학교에서도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교육가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교육 기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또한 그렇습니다.
일찍이 교부 터툴리안은「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종자」라고 말했습니다. 순교자의 피 흘린 위에 교회는 성장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순교는 한 번에 피를 쏟아 주님의 제단에 바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말했습니다.『나는 매일 죽노라.』곧 매일의 순교가 있습니다. 매일 매일 땅에 떨어지는 정신을 가지고 교회를 봉사하는 교역자, 장로, 권사, 집사, 교회를 봉사하는 청년들이 많은 교회는 자연히 열매를 맺습니다. 부흥합니다. 발전합니다. 일하는 교회가 됩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 부산에서 고속도로로 자동차를 타고 오면서 남한에는 웬만한 부락에는 거의 교회가 있음을 보고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되는 것은 이 교회마다 땅에 떨어진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며 농촌을 지도하는 교역자가 있으면 우리한국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겠는가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국의 농촌과 농촌교회는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일꾼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특별히 청년들은 깊이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뿐이 아닙니다. 우리 국가도 역시 땅에 떨어진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진 일꾼들을 부릅니다.
사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남한에서 이만큼이라도 자유가 확보되고 경제가 발전되며 평화로운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땅에 떨어진 밀 한 알들의 희생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 6·25 동란을 회상하여 보세요. 이 땅에 자유를 확보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이 되었습니까? 한국의 청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유 우방 十六개국의 많은 청년들의 곧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 알들의 무덤 위에, 말하자면 이 자유의 꽃이 지금 피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영국에서 신교 자유에 대한 큰 핍박이 있을 때에 그 때의 영국의 감독으로 있던 레틴머 라고 하는 분이 화형 장에 끌려나가면서 같이 순교하려 나가는 교우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형제 리들리여,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오늘의 영국에서 영원히 끌 수 없는 촛불에 불을 붙입니다.』
자기는 화형 장에서 불로 사라질 것을 생각하면서 이것은 영원히 끌 수 없는 자유의 불길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 촛불은 자유의 촛불입니다. 이러한 희생, 이러한 순교 곧 땅에 떨어지는 밀 하나를 통하여 신교 자유의 촛불은 지금까지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곳에 면류관이 없습니다. 희생이 없는 곳에 열매가 없습니다. 오직 땅에 떨어지는 묘지 위에만 진리, 자유, 평화, 번영 그리고 앞으로 올 국토 통일의 열매도 맺힐 것입니다.
사실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 의 정신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직장에서 무슨 책임을 맡든지 이 정신을 가지고 일을 할 것입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자기 생명을 주를 위하여 의를 위하여 잃는 자는 얻을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히 보존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관청도 이런 정신을 가진 공무원들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회사들도 이런 정신을 가진 사무원들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공장들도 이런 정신을 가진 직공들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군대가 이런 정신을 가진 군인을 요구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사회사업 기관들도, 우리의 학교들도,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정신을 가진 일꾼들을 요구합니다.
이런 일꾼들을 통해서만 열매를 맺힐 수 있는 것입니다. 금년에 졸업하는 졸업생들은 특별히 명심해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달이 바로 반공 방첩의 달입니다.
지난 一월 二十三일 속초에서 서울로 오던 비행기를 납치하려던 괴한을 덮쳐서, 말하자면 六十여 명의 승객의 납북을 저지한 전 명세 기장 같은 이는 문자 그대로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 알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슨 직분을 맡았든지 이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내 책임을 다하면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하나 하나가 다 이러한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정신을 가지고 살면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고 이 땅에 자유와 번영과 평화와 통일의 큰 결실이 맺힐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을 당해서 주님의 생활 원리인 이 십자가의 원리 곧 땅에 떨어지는 밀 한 알의 정신을 배워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어디서나 이 정신으로 살고 이 정신으로 죽어야 하겠습니다. (一九七一년 三월 七일)

Ⅹ-14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 (요한 복음 十三장 一-十五절)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요 13·5)

사순절을 당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최후 교훈과 그 행하신 일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아침 읽은 말씀은 마지막 저녁에 된 일입니다. 이 발을 씻겨 주신 일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 사랑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유대 땅에는 손님이 오면 발을 씻어주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더운 나라에서 대체로 발을 벗고 다니거나 슬리퍼 같은 것만 신고 다니기 때문에 발에 먼지가 많이 묻는 까닭입니다. 옛날 잘 사는 집에서도 물론 종들이 손님에게 이런 봉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종이 없는 경우에는 그 주인이 친히 발을 씻긴 것입니다. 또 예수 님과 그 제자들은 서로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녁에는 제자들 가운데는 아무도 자진하여 이 일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 二十二장 二十四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마지막 저녁에 대한 기사에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다시 말하면 제자들 사이에 이런 다툼이 났으니 누구든지 종의 역할인 발을 씻는 일을 자원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일찍이 야고보와 요한 이 주님께 조용히 나와서『앞으로 주님께서 영광으로 오실 때에 우리 가운데 하나는 주님 좌편에 또 하나는 주님 우편에 앉게 하여 주시옵소서.』하고 부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말이 제자들 사이에 들리게 될 때 그들은 야고보와 요한 에 대해서 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때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좋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을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하는 자는 먼저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도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오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런데 이 마지막 저녁 주님께서는 친히 종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그들에게 실물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남 섬기는 도를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주님께서 다시 앉아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저녁은 주님의 지상 생활의 마지막 저녁으로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의 고난을 앞두고 그의 마음은 심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침착한 태도로 제자들로 하여금 참 위대한 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돌아가면서 발을 씻겨 주시는 주님의 그 장중한 모습과, 위기를 당하여서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감정에 휩쓸려 누가 크나 하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실로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은 그 날 그 저녁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통하여 지 교회나 노회(老會)나 총회에서 종종 반복되어 온 것입니다. 중대한 문제를 앞에 놓고도 이 누가 크냐 하는 다툼 때문에 방해를 받은 적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내 허리를 먼저 굽히고 내 머리를 먼저 숙여 다른 이의 발을 씻어 주려고 하는 정신이 얼마나 아쉽습니까? 이 마지막 저녁에 우리 주님은 겸손과 봉사의 정신을 우리 믿는 사람들이 꼭 배우라고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실물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에 신령한 눈을 들어 발을 씻어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분명히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학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식보다는 이 정신을 먼저 배워야 하겠습니다. 지혜가 귀합니다. 그러나 지혜보다도 먼저 남의 발을 씻겨 주는 정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런 정신을 가진 교우들이 모인 교회는 언제나 화평합니다. 이런 정신을 가진 이들이 모인 회합은 언제나 화기애애한 가운데서 모든 문제가 처리됩니다. 모든 일이 윤활하게 이루어집니다. 언제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발을 씻겨 주시는 주님의 마음과 태도를 우리는 꼭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가정에서 우리 직장에서 공장이나 상점이나 관청이나 군대나 학교나 어디서든지 또 우리 교회 안의 모든 모임에서 이 정신을 꼭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주님께서는 성경에 기록한 대로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 이와 같은 일을 하신 것입니다. 곧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작은 권세를 얻어도 교만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권세를 받으셨고 아버지께로 오셨다가 아버지께로 가셔서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것을 아시면 서도 그의 하신 일은 가장 낮은 종의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많은 권세가 맡겨질수록 더욱 겸손하여 졌습니다. 더욱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 허리를 굽히셨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 제자 중 하나가 장차 자기를 잡아줄 자임을 아시면 서도 그의 발까지 씻겨 주셨습니다. 곧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겨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하여 그의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슬프게도 가룟 유다는 이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 악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반역자의 발까지 씻겨 주시는 그의 마음 그의 사랑 그의 자비 그의 겸손 그의 간절한 정성을 살펴보면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주님의 이 행동은 모든 종들을 높이시고 모든 천한 행동을 고귀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 동양에는 불행하게도 재래로 육체 노동을 천시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 님은 이 행동으로 모든 노동은 신성하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이 일뿐 아닙니다. 사실 예수 님은 친히 목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곧 육체 노동을 하셨습니다. 예수 님이 자라나신 나사렛에 가보면 지금도「마리아의 우물」이란 우물이 있습니다. 예수 님이 자라났다고 하는 움막집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 님은 언제나 어머니를 위해서 물을 기르셨다고 합니다. 한국 풍속으로 말하면 물지게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 님의 생활은 분명히 모든 노동은 신성하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청소를 하는 것이나 빨래를 하는 것이나 리어카를 끄는 것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나 밭에서 농사하는 것이나 다시 말하면 인간 생활에 필요한 모든 육체 노동은 정신 노동과 꼭 같이 신성합니다. 일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다 귀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노동이라고 해서 임금을 합당하게 지불치 않아서도 안 됩니다. 바로 지난 三월 十일 우리는「근로의 날」로 지켰습니다. 우리 주님은 근로의 날의 정신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곧 모든 노동은 신성하고 근로자의 권리를 존중히 여겨야 하며 특별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농민에게 같은 혜택을 부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로 주님은 발을 씻겨주는 행동을 통하여 참 위대(偉大)의 표준이 무엇임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참 위대는 학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권세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요컨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얼마나 많이 봉사하였는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종노릇을 잘 하였는가 여기에 있습니다. 위대한 정치가가 누구인지 하는 것은 그 정략이 얼마나 능한가 혹은 그 정권을 얼마나 오래 유지하였는가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그 정치가가 민중의 발을 씻었는가?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실업자들 불행한 이들에게 얼마나 봉사하였는가? 그들이 살 수 있는 나라를 과연 만드는가 거기에 있습니다.
정치 방면만 아닙니다. 실업 방면 예술 방면 문화 방면 어떤 방면이나 그러합니다. 사실 위대한 이는 그 방면에서 얼마나 많이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주는가, 다시 말하면 얼마나 많이 봉사하는가 거기에 참 위대의 표준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위대한 크리스천인가, 그것은 물어 볼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많이 가장 겸손히 다른 이들의 발을 씻겨 주는 그 분입니다. 그런 이가 사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 들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참 위대의 표준은 겸손과 봉사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한 가지 더 배워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 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함이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분명히 주님께서 발을 씻겨 주시는 일을 통하여 이보다 더 중한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저 하신 것입니다. 곧 영적으로 씻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중요한 목적은 모든 인류를 영적으로 씻어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곧 죄로 더럽혀진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목적으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혹은「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라고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온전히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곧 영적 목욕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참 회개와 신앙으로만 가능합니다. 과거의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적으로 목욕을 한 이들도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매일 발씻음을 받음이 또한 필요합니다. 그것은 더러운 길에서 우리 발에 먼지가 묻은 것처럼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살 때에 우리 믿는 사람들도 항상 더러워지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주님께 회개의 기도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주석 가 윌리암 바클레이 박사는 이 발 씻는 것을 세례 받는 것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세례라고 하는 말은 발을 씻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전에 유대 나라에서 어떤 이나 어떤 귀한 분에게 초청을 받으면 먼저 자기 집에서 목욕을 합니다. 그 다음엔 새 옷을 가라 입고 초청을 받은 그 집으로 갑니다. 그 집에 들어 갈 때에는 발 씻기를 다시 받고야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바클레이 박사의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어 천국에 들어가려면 먼저 참 회개와 신앙의 영적 목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천국의 상징인 교회에 들어갈 때에는 세례 곧 씻는 예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이가 세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세례를 고의로 받지 아니하면 그것은 그 마음속에 있는 교만의 탓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분은 그 교만으로 인해서 결국은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바클레이 박사는 단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기회만 있으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면 서도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오순절 무리들이 베드로에게 와서『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물어볼 때『회개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죄 사함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발을 씻으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허리를 굽혀 겸손히 남의 발을 씻는 정신을 꼭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큰 권세와 영광을 의식하면서도 발을 씻는 천한 일을 하신 주님의 봉사의 정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적 목욕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다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이런 경험이 없으면 이 시간 온전히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셔야 하겠습니다.
이 영적 목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영적 목욕을 한 이는 또한 발을 씻기는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곧 기회가 있을 때에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Ⅹ-15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마태복음 二十六장 三十六-四十六절)

『조금 나아 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사순절을 당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최후 지상 생활의 장면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지난 주일은 마지막 저녁에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장면을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은 바로 그날 저녁 깊은 밤이 된 일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곧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앙망(仰望)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성지 예루살렘에 가보면 감람산 남녘에 겟세마네 동산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지금도 아주 오랜 감람나무 여덟 그루가 있고 그 중 한 나무는「애통의 나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그 나무 아래서 주님께서 기도를 드렸다는 전설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작은 예배당 하나가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면 큰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가 곧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바위라는 전설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날 저녁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같이 저녁을 잡수시고 모든 교훈과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주시고 성찬 예식을 거행하신 후에 요한 복음 十七장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같이 드리고 찬미를 부르고 나아가서 기드른 시내를 건너 감란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곧 겟세마네 동산에 오신 것입니다. 때는 깊은 밤입니다. 십자가를 다음 아침에 바라보면서 주님은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 홀로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 가장 엄숙하며 비장하고 장엄한 광경을 봅니다. 곧 그의 기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한대로 주님은 동산 어구까지 오셔서 여덟 제자를 그곳에 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 과 야고보만 데리시고 동산에 들어가신 후에 그들로 하여금 머물러서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시고 자기는 돌을 던질 만큼 조금 더 나아가서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세 제자들에게는 같이 걸어가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그 때 주님은 큰 고민과 슬픔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큰 고민과 슬픔 곧 애통을 체험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온전한 인간성을 입으셨습니다. 육신을 쓴 인간으로서 죽음을 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서른 세 살의 청년으로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물며 십자가의 죽음을 자원할 리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큰 고난에 고민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가 사랑하던 제자 중 하나가 배신할 것을 아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실 것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험하신 큰 애통과 고민은 이것들만은 아닌 줄 생각이 됩니다. 그것은 곧 만민이 지은 모든 죄를 홀로 질 수밖에 없는 그 큰 죄의 짐과 관련된 줄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날 저녁 우리 주님은 죄로 말미암아 오는 인간의 모든 고민과 애통을 스스로 체험하신 것입니다. 세상 죄를 홀로 지신 어린양의 고민과 애통을 우리는 여기서 봅니다. 이 큰 고민과 애통 중에 그는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이 때에 주님의 그 고독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 제자를 데리고 들어가시면서 자기가 기도하는 동안 그들에게도 깨어 있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라고 간절히 부탁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인간의 동정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 피곤한 가운데 깨어 있지 못하고 베드로 자신도 정신 모르고 잤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에게『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안타가운 음성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큰 애통 중에서 홀로 다만 혼자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하 만민의 모든 애통, 모든 고민의 짐을 홀로 지신 것입니다. 이사야 六十三장 三절에 기록한 대로 그는 홀로 포도주 틀을 밟았습니다. 그를 도운 인간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그 날 밤 이렇게 큰 애통을 경험하고 또 이 애통을 홀로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간의 애통을 아시고 인간을 동정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고독을 또한 아시고 가장 외로운 이와 동거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장 어려운 일을 홀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큰 시험을 당할 때에도 홀로 당하는 것입니다. 무슨 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을 때에도 결국 홀로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당할 죽음도 홀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큰 인간의 싸움은 누구나 홀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독을 아시는 그리스도만이 이러한 때에 인간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반드시 다시 오겠다.』또『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고독을 친히 체험하신 주님은 모든 고독한 인간을 그 고독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한 걸음 나아가서 그 기도의 내용을 엿보십시다.『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잔이란 말은 곧 고난의 잔을 의미합니다. 곧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먼저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인간성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피하고 만민 구원의 큰 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는 이 잔이 지나가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그의 소원을 먼저 솔직히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기도하였습니다. 곧『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그는 인간의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이 비록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결코 쉬운 기도가 아닙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가장 어려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는 이런 구절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곧 이 기도는 피 땀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五장 七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懇求)와 소원을 올렸다.』그는 이 기도에서 인간의 뜻을 누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승리 적 기도를 바라봅니다. 여기에서「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달라」는 기도는 말하자면 아무래도 할 수 없으니 부득이 해서 그렇게 되게 하여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는 속으로는 불평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말도 아닙니다. 주님의 태도는 이 잔이 아무리 쓰나 이것이 그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이므로 이것이 최선인 줄 믿고 또한 현재는 모든 것을 미리 깨닫지 못하나 하나님의 선한 뜻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우리 인간도 작은 의미에서 어떤 때에는 겟세마네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실패의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을 때가 혹 있습니다. 큰 슬픔을 당할 수밖에 없을 때가 혹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세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할 수 있나 그저 모든 것이 운명이지 팔자지.」하는 절망의 태도입니다.
또 하나는「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땅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며,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반항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한편 신앙의 태도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오든지 이것은 사랑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되는 줄을 믿고 지금은 다 이해하지 못하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이런 이는 이러한 일을 당할 때에도「우리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이들은 주님께서 그 날 저녁에 받은 은혜를 역시 받는 것입니다. 곧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능력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 이런 기도를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와서 외치십니다.「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곧 주님은 이 도를 통하여 새 힘을 얻어 평화로운 마음으로 자기를 잡으러 오는 원수들을 향해서 마중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 앞에 바로 서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 겟세마네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기도를 통하여 큰 승리를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부탁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간단히 말하면「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 기도하라, 그래야 시험에 들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이 간절한 부탁을 받고도 깨어 있지 못하였습니다. 기도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위기가 올 때에 다 시험에 들었습니다. 예수 님께서 악한 무리들에게 붙잡히시게 될 때에 그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자신도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까. 깨어 있어야 사방을 살필 수 있습니다. 원수가 오는 것을 미리 볼 수가 있습니다. 자는 집에 도둑이 듭니다. 또 원수는 자지 않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야경이 졸므로 도둑맞은 집이 많습니다. 보초병이 졸므로 패전한 군대도 많습니다. 조는 경관들 때문에 어떤 때는 비행기도 납치를 당합니다. 신영호 침몰 사건을 여러분은 지금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무전 사는 에스 오 에스를 쳤지만 일본 해안 경비대에서는 들었는데 우리 한국 경비대에서는 듣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졸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깊은 밤이었습니다.
바로 이 달은 방첩의 달이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여러분은 북괴에서 하는 일을 신문에서 보신 줄 압니다. 二十五개국에서 온 二천여 폭도를 훈련해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온 세계를 상대로 해서 이런 사람들을 훈련하거늘 하물며 남한에 대해서는 더 얼마나 침범하려는 야욕을 가졌겠습니까. 지금은 문자 그대로 국가적으로 보나 개인 적으로 보나 깨어 있을 때입니다. 원수는 호시 탐탐 남한을 노리고 있습니다. 원수는 호시탐탐 우리 믿는 자의 영혼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에 들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또한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깨어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곧 기도를 통하여 새 힘을 얻어서 정신 무장을 해야 합니다. 사방을 바로 살피는 이는, 곧 위기를 바로 아는 이는 그 눈을 위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는 일찍이 제二차 대전 때에 연합군이 불란서에 상륙하는 그 날밤 밤새도록 자지 않고 일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도 한산도에서 대 격전이 있을 때에 배 위에서 하늘을 향해 기도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깨어 있는 이는 또한 기도합니다. 사방을 둘러보는 눈, 곧 깨어 있는 눈, 그리고 위를 향하는 눈 곧 기도하는 눈, 이상 두 가지만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나 또는 어떤 시점에서나 승리 적 생활이 가능합니다. 시험에 들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기도를 통하여 담대히 십자가를 향하여 나갈 수 있었고 따라서 만민을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시는 대사업을 결국은 이루신 것입니다.
인간이 일생을 사노라고 하면 누구나 겟세마네와 비슷한 애통, 고독, 혹은 환난을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이 기도를 배워서 기도를 통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체험할 수 잇는 모든 고민과 애통과 환난과 재앙을 그 이상으로 다 체험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 있을 때에라도 우리를 이해하시고 동정하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갈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도 같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 기도의 비결을 배우셔야 합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
모든 성화 중 제일 유명한 성화는 호프만의「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이라는 성화일 것입니다. 그 성화의 한 폭이 바로 우리 기념관 상층 기도 실에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에 기도 실을 좀 자주 방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로부터 기도의 비밀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신 무장을 바로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一九七一년 三월 二十一일)

Ⅹ-16 종려주일의 깊은 뜻 (마태복음 二十一장 一-十一절)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5)

다음 주일은 부활 주일로 지키고 오늘은 종려 주일로 지킵니다. 이 주간은 수난 주간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의미 깊은 주간인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주님의 최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오셨습니다. 많은 다른 유대인들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 왔습니다. 여리고를 지나 베다니 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 일행이 점점 많아 졌습니다. 벳바게에서부터는 주님께서 나귀를 타셨습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길 위에 펴고 무리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호산나라고 하는 말은「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승리와 축하를 의미합니다.
주전 약 二00년에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에게서 구원한 쥬다스 매카비우스 라는 유명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을 이렇게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왕으로 영접하는 예입니다.
오늘 주목할만한 것은 주님의 태도입니다. 이 때까지 늘 우리 주님은 자기를 숨기려는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주신 후에도 다른 이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흔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번은 많은 무리가 와서 그를 억지로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그는 그들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날에는 주님의 태도가 그와는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을 시켜서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겉옷을 얹으니까 주님께서 그 나귀를 타셨습니다. 무리들이 즐거이 부르는 호산나와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바리세인 하나가 이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해서 제자들을 책망하려고 할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만일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주님의 이런 태도에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 극적인 행동으로 깊은 진리를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입으로만 가르치지 않고 어떤 때에는 행동을 통해서 가르치기도 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장차 자기 백성이 바벨론에 예속될 것을 경고할 때에 멍에를 자기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곧 실물 교훈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런 행동의 깊은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그는 지금까지 그 자신을 그 교훈과 생활과 이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곧 예언자로서의 메시야로 그 자신을 계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왕으로서의 메시야임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에 예언한 그대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스가랴 九장 九절 이하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이처럼 왕으로서의 영접을 친히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중에 주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서게 되셨을 때 빌라도 는 우리 주님께 직접 물었습니다.『네가 왕이냐』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이렇게 생각하여 볼 때에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도 우연은 아니었습니다. 말하자면 왕으로 그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조롱의 의미였지만 홍포(紅袍)를 입으신 것이나, 갈대 홀을 손에 드신 것이나, 가시 면류관을 쓰신 것이나,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란 방패를 붙인 것도 다 우연은 아닙니다. 왕의 모습을 나타내신 사실입니다. 곧 종려주일은 예수는 참으로 왕이시라는 사실을 선포한 날인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로 어떠한 왕이십니까.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고 하였습니다. 말은 전쟁 때에 쓰는 짐승입니다. 나귀는 평화로울 때에 사용하는 짐승입니다. 왕이 나귀를 타고 오면 그것은 언제나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곧 주님은 온유(溫柔)와 겸손과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그를 호송한 이들은 창과 검을 든 군인들이 아니고 농민들, 부녀들,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한 평화의 왕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무력으로 사람을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모하메드처럼 칼로 포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정치력, 경제력 따위의 권력이나 어떤 폭력으로 인간을 다스리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은 오직 온유와 겸손과 인내와 사랑으로 인간의 마음을 끄시고 또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동양에 내려오는 말 가운데도 이력복인(以力服人)이란 말이 있고, 이심복인(以心服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힘으로 사람을 복종케 하는 사람과, 마음으로 사람을 복종케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폭군이나 독재자가 아니십니다. 오직 사랑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역사를 통하여 누가 제일 많은 사람들을 다스렸으며 또 지금까지 다스리시고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동양으로 말하면 진시황(秦始皇)입니까. 징기스칸입니까. 서양으로 말하면 알렉산더입니까, 혹은 나폴레옹입니까.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실 많은 사람을 중심으로 다스리는 이는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참으로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십니다. 오직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이 만이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일세의 영웅 나폴레옹이 말년에 세인트 헤레나 섬에 외롭게 유배가 되어서 탄식한 말 하 마디를 지금도 기억합니다.『나는 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오직 사랑으로 세계만민을 정복하셨다.』사실입니다.
셋째로 이 종려 주일에 되어진 일을 계속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十九장 四十一절에는 이런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가까이 오 사 성을 보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네 가운데 있는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이 눈물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二十三장 三十七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도 기록되어 있습니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과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함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림을 받으리라.』여기에서 우리는 애통의 왕, 눈물의 왕, 통곡의 왕, 탄식의 왕의 모습을 봅니다.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로 인하여 그의 가슴은 터졌고 그는 피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죄인에 대한 그의 긍휼, 그의 자비, 그의 사랑, 그의 애통은 결국 그를 골고다로 인도한 것입니다. 결국 그로 하여금 십자가로 향하여 돌진하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그 피의 마지막 방울까지 흘리게 하실 것입니다. 평화의 왕, 사랑의 왕인 그리스도는 결국 대속의 왕이 되셨습니다. 만민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쓰신 가시 면류관은 영원한 왕의 상징이 되었고 만민의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결국은 만민을 정복하고 만민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보좌는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종려주일의 깊은 뜻을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또한 장차 나타날 사실의 예언이 되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 六장 十二절에『내가 이에 보니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十七장 十四절 이하에는『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 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저와 함께 있는 자를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十九장 十一절 이하에는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鐵杖)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은 평화의 왕이시오, 눈물의 왕이시오, 대속의 왕이실 뿐더러 승리의 왕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곧 만 왕의 왕이십니다. 이 종려주일은 장차 주님께서 승리의 왕으로 만 왕의 왕으로 나타나실 것을 예언으로 보여 주신 날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의 왕권이 오직 부분적으로만 나타납니다. 곧 천국의 백성들에게만 나타납니다. 그 심령 속에만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왕권이 온 천하 만민에게 강권으로 나타나실 때가 오는 것입니다. 계시록 十二장 十五절에 기록된 대로『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한 그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철장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다고 하였습니다.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곧 대 심판의 왕으로 임할 것을 우리에게 예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만민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십니다. 그러나 그 뿐만은 아닙니다.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 뿐만도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 뿐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승리의 왕이시오, 만 왕의 왕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의 손에 부여되었습니다. 그가 사실 우주를 다스리시고 인간의 역사를 다스리시는 만 왕의 왕이십니다.
아직은 오직 평화와 사랑의 왕으로 나타나시나 그의 전 능력이 나타날 때가 조만간 다가옵니다.
유명한 아프리카의 개척 선교사 리빙스턴이 깊은 정글 속에서 홀로 기도하다가 죽었습니다. 죽기 며칠 전 그는 그의 일기장에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내 예수, 내 왕, 내 생명, 내 전부시여, 나는 다시 오늘 나의 전체를 당신께 드리나이다.』그는 예수를 내 왕, 내 생명, 내 전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께서 과연 내 왕이 십니까? 내가 과연 예수 님을 내 왕으로 영접하십니까? 과연 예수 님께서 나를 다스립니까? 과연 주님이 내 마음을 다스립니까? 내 말을 다스립니까? 내 생활을 다스립니까? 내 재산을 다스립니까? 내가 과연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그에게 왕에게 합당한 존경을 드려야 하겠고 순복(順服)해야 하겠습니다. 전부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회개하고 복음을 믿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우리가 과연 예수 님의 멍에를 메었습니까? 예수를 배우는 중입니까?『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라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우리가 이 계명에 순복 합니까?『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과연 우리가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갑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최후로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합니까? 그리스도는 만 왕의 왕이십니다. 만주의 주이십니다. (一九七一년 四월 四일)

Ⅹ-17 사명감에 불타는 인물 (사도행전 二十장 十七-二十八절)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예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신 말씀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그는 아무리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으나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 즉 복음을 증거하기 위 하여는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一장 十四절에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다 내가 빚진 자로다.』 이 말씀도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의미합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이 사명감에 불타는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사명감에 불타는 인물 혹은 일꾼에 대하여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일꾼 가운데는 사실 두 가지 종류의 일꾼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명감이 있는 일꾼이요, 또 하나는 사명감이 없는 일꾼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예배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여러 석수들이 뜰에서 돌을 깎고 있습니다. 한 번은 그 교회목사가 일터를 구경하다가 돌을 깎기에 수고하는 한 석수에게 인사의 말을 하였습니다.『뜨거운데 매우 수고하십니다.』그 때 석수가 대답했습니다.『배운 재간이 이것밖에 없으니 할 수 있소?』 목사는 옆에 있는 다른 석수를 만나서 역시 수고한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석수는 조용히 대답합니다.『돌 깎는 재주를 배웠다가 이 번에는 성전을 짓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똑같이 돌을 깎는 일을 하지만 한 사람은 사명감에서 일을 하고 또 한 사람은 사명감이 없이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석수뿐이 아닌 줄 압니다. 어떤 직장에나 이렇게 두 가지 종류의 일꾼들이 있는 줄 압니다. 가령 공장의 직공들도 그렇습니다. 어떤 직공들은『나는 한국의 산업을 건설하는 사명이 있다. 한국의 여러 가지 상품이 세계 시장으로 나가게 되는데 나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쓸만하고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겠다.』라고 하는 사명감에서 부지런히 일을 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아무 사명감 없이 단순히 삯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직공들도 있을 것입니다.
관청에서 일하는 공무원 가운데도 그런 두 가지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한 공무원은『나는 대한민국을 옳게 봉사하겠다.』라고 하는 사명감에서 일을 합니다.『나는 내 나라가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고 친절하고 명랑한 나라가 되게 하겠다.』는 사명감에서 매일 일하는 공무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단지 삯을 위해서 일하는 공무원도 없지 않습니다. 민원 서류를 청구 받고도 청구서를 서랍 속에 잠재워 두었다가 돈 몇 푼이라도 집어줘야 마지못해서 주는 유의 공무원들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공무원뿐이 아니 줄 압니다. 가정에서 살림하는 주부 가운데도 두 가지 종류의 주부들이 있는 줄 압니다. 한 가지 종류의 주부는『나는 과연 이상적 가정을 만들겠다. 후세에 국민이 될 자녀를 바로 길러서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바치겠다.』고 하는 사명감에서 살림을 합니다. 이런 주부는 가정에서 가정 제단을 쌓습니다. 살림도 깨끗이 할 것입니다. 자녀들을 잘 가르치고 돌아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아무런 사명감도 느끼지 못하는 주부들도 있을 것입니다. 살림은 크게 하고 여러 가지 책임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경거리 있으면 따라가고 계 같은 것 잘 쫓아다니고 유행 따위는 마라톤 경주하듯 뒤쫓고, 심지어 춤바람까지 나는 주부들도 없지 않아 있는 모양입니다.
교통 순경 가운데도 두 가지 종류의 순경이 있는 줄 압니다.『나는 교통 정리를 바로 해서 사고를 방지하고 가장 귀한 국민의 생명을 건지고 보호하겠다.』고 하는 사명감에서 교통 정리를 하는 순경들이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아무 사명감 없이 삯을 위해서 일하는 순경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오늘 저녁 술값을 마련하려면 아무래도 몇 놈은 잡아야겠는데… 』하는 생각으로 운전 수만 노려보는 교통 순경들도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마치 물고기 잡는 어부가 낚시를 던져 놓고 고기가 무나 안 무나 보는 것 같은 그런 순경입니다.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 가운데도 두 가지 종류의 청소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종류의 청소부는 『우리 나라의 수도 서울을 깨끗이 보존하는 큰 사명이 내게 있다. 나는 이 서울을 세계에서도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수도로 만들겠다.』이런 사명감에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참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사명감에서 일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반면에 삯을 위해서 눈가림이나 하고 감독하는 사람이 보지 않으면 쓰레기를 쓸어서 모두 하수도 구멍으로 몰아넣는 따위의 청소부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골로세서 三장 二十三절에 보면『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꾼으로서 가질 태도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 재능에 따라서 할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을 위해서 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옳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맡은 책임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해야겠고 옳게 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무슨 일에 있어서나 하나님과 동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三장 九절에「우리는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과 동역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바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만 우리의 하는 일이 헛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룹니다. 우리는 다 일터에서 일하는 자들인데 나는 어떠한 일꾼인가를 스스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명감을 지닌 일꾼인가, 아니면 삯꾼에 불과한가. 사명감에 불타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사명감을 지닌 이들 가운데도 역시 두 가지 종류의 일꾼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사명감이 희미한 일꾼입니다. 사명감이 있기는 있는데 그것이 아주 박약한 일꾼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명감에 불타는 일꾼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감에 불타는 일꾼이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九장 十六절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내가 복음을 전할 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사도행전 二十一장 十三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며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그는 사명감에 불타는 인물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二十장 九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 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그의 골수에는 불이 있었습니다. 타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심령 속에 불타는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도 비행기가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도 우주선이 하늘을 향하여 치솟는 것도 그 속에 불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불타는 사명감이 있어야 무슨 일이나 성취합니다. 성공합니다.
제가 일찍이 정주 오산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가르침을 받은 그 학교의 설립자 남강(南岡) 이승훈 선생과 당시 교장으로 수고하던 고당(古堂) 조만식 선생 등은 그 심령 속에 민족을 중흥시킬 국민들을 교육하는 불이 있었습니다. 조 만식 선생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셔서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 체조를 하고 함께 경주를 하고, 가을에는 거리가 십 리나 되는 체석산이라는 산에 가서 학생들과 같이 오리나무를 베고 그것을 학교로 지고 와 손수 장작을 패어 불을 지피기도 했습니다. 그 속에는 불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교육가가 지금도 필요합니다.
같은 공무원, 장관, 사장, 국장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을 거입니다. 나라를 바로 건설하려는 불타는 사명감 아래서 그 책임을 하는 장관이나 사장이나 국장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그 반면에 삯꾼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들도 역시 두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구역장, 권찰, 반사 중에는 사명감에 불타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님이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은 불의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성령은 곧 불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믿는 사람의 심령 위에는 옛날 갈멜산의 엘리야의 제단과 같이 불이 붙어야 합니다.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내 책임을 감당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을 통해서만 우리 민족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명감에 불타는 일꾼과 사명감이 없거나 미지근한 이들을 대조해서 생각해 봅시다. 사명감에 불타는 이들은 언제나 일을 하면서 기쁨과 감사로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일을 합니다. 일하지 말라고 해도 일을 합니다. 부지런히 합니다. 양심적으로 합니다. 어떤 고난이 있어도 합니다. 자기 것을 희생하면서 합니다. 그러면서도 일하는 것을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불평도 없습니다. 중퇴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충성합니다. 그러나 사명감이 없는 이들은 일을 하기는 하되 그저 마지못해서 합니다. 그러니까 힘이 듭니다. 자기에게도 고역이 됩니다. 쉬 피곤해집니다. 능률이 나지 않습니다. 실수합니다. 이런 유의 직공들이 흔히 사고를 냅니다. 오후만 되면 얼른 돌아가려고 시계만 쳐다봅니다. 불평만 합니다. 실로 불쌍한 존재입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를 그의 크신 경륜에 따라서 각각 일터에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서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어디 있든지 모범적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일해야 됩니다. 창의적으로 일할 줄 알아야 됩니다. 협동해서 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공통한 사명을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천국 건설의 사명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첫째 사명입니다.『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라.』주님의 최후 명령입니다. 우리도 다 복음을 전파하여야 되겠습니다. 교회를 봉사해서 천국을 확포(擴布)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명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이 사명을 바로 하려면 우리 하나 하나가 복음을 전도하여야 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면에서 나의 재능과 나의 시간과 나의 물질을 바쳐 교회를 봉사하여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직분이나 책임을 맡은이는 그 책임을 불타는 사명감 가운데서 감당하여야 되겠습니다. 성령의 불이 그 심령에서 타올라야 되겠습니다. 금년 오월은 특별히 전도의 달로 우리 교역자 회의에서 작정하였습니다. 작년에는 특별 집회를 통해서 특별 반을 조직했지만 금년에도 우리 교회 자체가 특별히 오월을 중심해서 복음을 전파해서 새로운 특별 신입 반을 조직하려고 합니다. 은밀히 기도로 준비했다가 이 대열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 나라 건설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한민국을 자유와 정의와 번영이 있는 깨끗하고 명랑한 나라로 완성하며 또한 이북 동포까지 해방시켜서 통일국가를 건설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명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각기 직장에서 힘을 써야 하며 국가를 봉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금번 선거를 바로 하는데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금번 선거도 반드시 공명 선거가 되어야 합니다. 조용하고 안정된 분위기 중에서 진행되도록 각기 힘을 써야 합니다. 국민 하나 하나가 양심적으로 투표를 해야 합니다. 혈연 혹은 지연 다시 말하면 자기 중심으로 말고 꼭 국가 중심으로 인물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살피고 바로 판단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되며 경제적으로 계속 발전되며 사회 정의를 구현하며 부정 부패를 일소하여 명랑한 사회를 건설하기에 가장 적임자를 선출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투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로 투표하기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하고 모든 국민이 바로 투표하기 위해서도 역시 많은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 좋은 영도자를 세워 주시도록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북괴는 항상 우리 남한을 노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혼란한 때를 틈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냉철한 이성으로 지혜 있는 국민이 되어서 이 선거를 바로 치러서 우리가 이상 하는 나라를 건설하고 신생 국가로서의 민주 국가의 본을 온 세계에 보여 줄 수 있도록 이 선거를 옳게 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평화로운 세계 건설의 사명이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가 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지구상의 전 인류는 공동의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국에도 평화가 옵니다. 세계에서 자유와 저의가 승리하여야 한국에서도 자유가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 인류와 서로 제휴하여 평화로운 세계를 이룩하는데 불타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또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불타는 사명감의 일꾼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 우리 국가와 세계를 건설하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역 하여야 되겠습니다. (一九六三년 四월 二十五일)

Ⅹ-18 새 해에 새 복(八복①) ―마음이 가난한 자― (마태복음 五장 一-十二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어느덧 1960년, 이 새해 첫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많은 희망을 가지고 피차에 복을 비는 풍속이 있습니다. 건강을 빌고, 행복을 빌고, 남북 통일을 비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서는 흔히 복을 빌 때에 수부귀다남자(壽富貴多男子)하소서. 이렇게 복을 빌어 왔습니다. 오래 살고 부해서 돈 많이 모으고 귀하여 지며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고 또 그 다음에는 아들을 많이 얻으라는, 이런 복을 흔히 빌어 왔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이 복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복입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것들은 혹 복이 될 수도 있고 혹 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오래 사는 것을 우리가 흔히 복이라고 하지마는 오래 산다고 반드시 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부터 수즉다욕(壽卽多辱)이란 말이 있습니다. 오래 살면 욕되는 일을 많이 보기 쉽습니다.
물론 부하여지는 것을 다 복으로 생각하지마는 이것도 복이 되는 수도 있고 복이 되지 못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하여 짐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허영과 부패함에 빠지게 되어서 오히려 복이 변해서 화가 되는 가정을 종종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귀하게 된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 줄 압니다.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는 것이 보통으로 볼 때는 좋아 보이지만 그 자리에서 조금 잘못하면 오히려 그런 자리에 올라가지 않았던 것만 못한 것입니다. 히틀러 같은 사람은 높은 자리에서 큰 세력을 가졌었습니다. 무솔리니 같은 사람도 역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서 큰 권세를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일생을 통해서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그들에게 복이 된 것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자기 자신들의 참화를 가져 온 것뿐입니다.
물론 아들들을 많이 두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역시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못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많이 두면 혹 못된 아들이 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그러한 아들로 말미암아서 좋은 가문이 참혹한 일을 당하는 예가 옛날이나 오늘이나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와 같은 축복은 복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되지 못하는 수도 있으며 또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잠깐 동안 이 세상에 있어서의 복이요, 잠깐 동안 이 세상에 있어서도 오래 갈는지 또한 의문인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 성경에도 복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이런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본문대로 좀 더 가깝게 번역하면 二절에 복이라고 하는 말이 제일 먼저 있습니다.『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이렇게 지적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복이라고 하는 말은 본래 헬라 말로「막카리오스」라고 하는 말을 그대로 썼는데 이 말의 뜻은 즐거움이라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헬라 말에 즐거움이라고 하는 말은 딴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즐거움 가운데도 거룩하고 신성한 즐거움을 가르친 것이요, 또한 이 즐거움은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즐거움을 가르친 것입니다.
『거룩하고 영원한 즐거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고 이와 같은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고』예수 님께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서북 편 가버나움 근처에 가보면, 전설적으로 예수 님께서 친히 올라가서 이 여덟 가지 복을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하는 팔복(八福)산이 있습니다. 그 팔복산에 올라서서 남쪽을 내려다보면 갈릴리 바다 가 눈앞에 문자 그대로 푸른 옥과 같이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그렇게 큰 바다가 아니어서 동편에서 서편까지 다 눈 아래 볼 수 있도록 나타납니다. 그 팔 복산 위에는 언제 지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지만 팔복정(八福亭)을 지었습니다. 팔복 예배당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팔복 예배당은 여덟모가 나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 안에 들어가 보면 높은 천장이 여덟 모로 놓였는데 한 면마다 여덟 가지 복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당에 들어가 보게 되면 마치 여덟 가지 복 사이에 서 있는 거와 같은 그런 느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여기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여덟 가지 복을 다 받을 수가 있다고 하면 더 이상의 큰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복을 받을 만한 분은 어떠한 분이라고 가르쳤습니까?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 둘째는 애통하는 자, 셋째는 온유한 자, 넷째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 다섯째는 긍휼히 여기는 자, 여섯째는 마음이 청결한 자, 일곱째는 화평하게 하는 자, 여덟째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과연 거룩하고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즐거움의 축복을 받겠다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여덟 가지 복에 대한 교훈을 일찍이 야곱이 벧엘에서 자다가 꿈 가운데 본 하늘에 닿은 사다리에 비유하여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여덟 가지 복의 사다리를 하나 둘 올라가면 그야 말로 문자 그대로 온전히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여덟 가지 복을 음악의 여덟 가지 음계에 비유해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음악이 온전한 음악이 되려고 할 것이면 여덟 가지 음이 다 나야 됩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여덟 가지 음이 다 나야 완전한 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여덟 가지 복을 다 받아야만 믿는 사람의 생활이 음악적으로 표시된 때에 완전히 화음 된 하모니가 된 생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새해 첫 아침에 우리가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복을 충만히 받는다고 하면 이에서 더 큰복이 없을 줄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이 짧은 시간에 여덟 가지를 다 설명할 수는 없는 까닭으로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첫 계단이 되는, 첫 음계가 되는 교훈만 잠깐 동안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오.』
심령이 가난한 자, 거기서부터 복의 사다리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모든 복을 받는 첫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죄를 애통할 줄도 알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성품이 온후하여 지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남을 긍휼히 여김을 알게 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마음이 맑아 질 수 있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화평케 할 수도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어야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고 참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령이 가난한 것은 모든 다른 축복의 첫 계단이 되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가리켰습니까? 우리가 먼저 이 복을 받아야 되겠는데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님께서 비유를 베풀어서 가르치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세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세인은 성전에 들어 와서 얼굴을 들고, 아마도 두 손까지 들고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 하옵기는 나는 토색(討索)도 한 일이 없고 불의한 일을 하는 일도 없고 간음을 한 일도 없고 또한 저기 앉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한 사람이올시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드렸고 모든 얻은 바의 십일조를 다 드렸습니다.』이렇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세리는 성전에 들어 왔지만 감히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오직 가슴을 두드리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를『오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이런 말로 부르짖었습니다.
예수 님은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바리세인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죄인의 기도,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부하다고 하는 뜻을 짐작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이 바리세인의 마음은 부하였습니다. 나는 불의한 일이 없고 나는 토색한 일도 없고 나는 저 세리와 같은 그런 일을 한 일이 없고 나는 율법에 가르쳐서 하라고 하는 대로 다 하였습니다. 마음이 부했습니다. 자연히 마음 가운데는 자만이 가득 찼고 교만이 가득 찼고 독선이 가득 찼습니다. 마음이 부했습니다. 자연히 이런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이 세리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압니다. 토색한 줄 압니다. 불의한 일을 한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세리는 자기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말을 감히 얼굴을 들 수도 없고 오직 가슴을 두드리면서 그저『하나님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이 세리는 죄인이지마는 그 심령이 가난했습니다. 그 심령이 겸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어서 그 심령을 부흥케 하여 주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심령이 겸손한 자를 의미할 줄 생각합니다. 반면에 마음이 부한 자는 교만한 자를 의미할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교만의 죄를 짓지 않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사람마다 저 잘난 재미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나 너나 할 것 없이 다 교만한 마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 교만을 없이 하여 참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만 간단히 생각하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하나는 우리 기독교 인생관의 근본 이념이 되는 청지기의 관념을 철저히 깨닫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 뜻은 성경에 교훈으로 보면 하나님은 이 우주의 창조 자시오 우주의 소유자십니다.
우리 인간은 잠깐 동안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에 한 번 왔다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께로부터 잠깐 동안 무엇을 대부 받는 청지기뿐이올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있어서 무엇이 내 것이다, 내 소유라, 이렇게 말하지만 실상은 내 소유는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인데 내가 하나님의 소유를 대신 맡아서 청지기로서 세상에 살 때에 쓰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청지기인 까닭으로 항상 이것을 맡아 있을 것이 아니고 맡은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때가 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입니다. 남의 것을 맡은 사람은 반드시 마지막에 회개할 때가 있는 것과 같이 내가 맡은 바에 대하여 어떻게 하였는지를 장차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四장 七절에는 이 진리를 단적으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
여러분에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재주가 있어서 그 재주를 자랑합니까? 그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학식이 있어서 그 학식을 자랑합니까? 그 학식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께 무슨 재물이 있어서 그 재물을 자랑합니까? 그 재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지위가 있어서 그 지위를 자랑합니까? 그 지위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다 내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다 심판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이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 가졌다고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그것을 대신 사용하는 청지기뿐이지 어찌하여 이것이 내 것인 줄 알고 있다고 교만하고 자랑합니까? 이 진리를 깨달을 수록 지식 있는 사람이면 지식이 있으므로 겸손해 집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쓸 사명이 내게 있는 것입니다. 내게 물질이 있지만 이 물질 때문에 내 마음이 더 겸손해 집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물질을 내게 맡긴 것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쓰라고 이것을 맡겼은즉 이 앞에 심판 받을 것을 깨달을 때에 더욱 황송하고 겸손할 수밖에 다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재주도 그렇고 지위도 그렇고 인간이 가졌다고 하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주인이시오, 나는 청지기라고 하는 이 근본 원리가 마음 가운데에 있을 때에 내게 무엇이 있든지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어깨가 무거워지고 머리가 숙여지며 겸손해질 수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진리를 모르고 이것이 내 것 같아서, 내가 잘나서 얻은 것 같아서, 이렇게 할 때에 교만이 생기고 자만이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는 누구든지 다 문자 그대로 거지입니다. 우리는 벗은 몸으로 세상에 왔습니다. 문자 그대로 무엇을 가졌든지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 거지입니다. 누구나 다 만 량쯤 빚진 하나님에 대하여는 부채 자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언제나 잊지 말고 내게 어떠한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셨든지 겸손하게 그 은혜를 사용할 뿐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가서 내 자신을 깊이 알아야 됩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네 자신을 알라 하였지만 그 말에 의지해서 내 마음을 좀 더 깊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왜 겸손해야 하느냐 하면 내게 있는 게 없으니까 겸손해야 됩니다.
둘째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더러는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겸손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게 무엇인지 압니까? 예수 님께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손 안 씻고 잡수신다고 하니까 예수 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이 이 사람들이 은과 주발과 입는 것을 깨끗이 씻을 줄 알지 만은 네 속에 더러운 것을 씻을 줄은 모른다고 하시면서 예수 님께서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다고 말씀했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밝은 눈은 엑스광선 같아서 우리의 속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십니다. 예수 님의 눈에 비추일 때에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허물이 있는 대로 다 들어 납니다.
마태복음 十五장 十九절에『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여러분 지금은 텔레비전 시설이 잘 되어서 텔레비전을 봅니다. 만일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생각이 얼른 텔레비전처럼 이마에 나타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 이마를 가지고서 거리에 잘 나다닐 수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 가운데 생각하는 그대로 우리 이마에 나타난다면 아마 피차에 얼굴을 대하기가 대단히 민망할 것입니다.
피차는 말할 것 없이 내가 내 거울보기에도 민망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속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더러운 죄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더럽습니다. 더러운 죄악이 우리 사람의 속에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약합니다. 이렇게 더럽고 약하지만 더러운 줄도 모르고, 악한 줄도 모르고, 교만한 생각만 있습니다. 미련합니다. 그저 간단히 말하면 중생하지 아니한 인간의 속에 잇는 것은 더러운 것, 약한 것, 미련한 것, 이 세 가지밖에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스스로 살필 때 사도 바울과 같이『나는 죄인이올시다 죄인 가운데도 괴수올시다.』이렇게 누구든지 자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에 우리가 세리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통회하면서 자복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단테가 버질의 인도를 받아서 연옥을 구경할 때에 한 층계에서 위 층계로 올라가려고 하니까 그 층계가 높고 발이 무거워서 올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에 천사가 날개를 치며 날아오더니 자기 이마에 있는 교만의 표를 날개로 쳐서 떨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발이 가벼워져서 얼른 위 계단으로 올라가는데『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는 천사들의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교만은 만 악의 근본이며 겸손은 만복의 근원입니다. (一九六0년 一월 三일)

Ⅹ-19 애통하는 자와 그 복 (八복②) (이사야 十六장 一-十一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지난주일 여덟 가지 복을 생각하면서 특별히 첫째 복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산상보훈 가운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 가운데 둘째 되는 축복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을 읽을 때에 자세히 듣기만 하시기를 바랍니다.『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얼른 들을 때에는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순이 없습니다. 이것 역시 이른 바 역리적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애통(哀痛)이 무슨 복이 될 수 있겠느냐고, 이렇게 얼른 생각이 됩니다. 물론 애통 자체는 우리가 복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가난한 자에 있어서는 애통도 복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눈물에도 사명이 있습니다. 전도서 七장 四절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愚昧)자의 마음은 열락(悅樂)하는 자의 집에 있느니라.』
먼저 애통을 통하여 인생과 우주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천로역정」을 기록한 영국 청교도 지도자들 가운데 유명한 존 번연 이라고 하는 이가 젊었을 때에 군대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 저녁은 어떤 주요한 곳에 보초로 그 곳을 지킬 책임을 맡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잠깐 볼일이 있어서 존 번연은 자기 친구에게 잠깐 동안만 그 곳을 대신 지켜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깐 동안 어디 갔다 와서 보니 자기 대신 그 자리에 보초로 섰던 자기의 가까운 친구는 원수에게 저격을 당해서 이미 세상을 떠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 친구는 자기의 생명을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크게 통곡을 하였습니다. 이 번연 이라고 하는 청년은 이 큰 애통을 통해서 인생의 깊은 뜻을 더욱 탐구하게 되었고 따라서 깊은 신앙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도 혹은 사랑하는 남편을, 혹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먼저 보내는 큰 애통 가운데서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닫고 믿음으로 하늘의 위로를 받은 이가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프랜시스 같은 이도 부자 집에서 호화롭게 자라나던 청년이었지만 한 번은 중병에 걸려서 죽음에 직면하였을 때에 인생 문제를 다시 한 번 탐색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 탐구는 그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게 했고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몸을 바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도 살아 있지만 일본의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목사는 지금부터 삼십 년 전에 우리가 학생 시절 때 유명한 소설 하나를 썼습니다. 그 소설 이름이「사선을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사실 애통을 통해서 사선을 넘게 될 때에 인간은 인간의 깊은 뜻을 찾게 되고, 인간이란 단순히 육체가 아니오 그 속에 불멸의 영혼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낮에는 밝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멀리는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해가 지고 캄캄한 밤이 될 때에 하늘 멀리 우주 끝에 있는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들으니 미국의 월슨 천문대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렌즈인 이 백 인치나 되는 망원경이 있다고 합니다. 이 큰 렌즈를 통해서 전에 자세히 보지 못하던 여러 별들을 더 자세히 볼 수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실 가장 신령한 나라, 가장 신비한 나라인 하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만든 렌즈를 통해서 볼 수 없고 이상하게도 눈물의 렌즈를 통하여야만 이 하늘 나라의 신비를 더 자세히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애통해서 인생과 우주의 깊은 진리를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애통도 그러하거니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특별히 자기의 죄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애통은 죄 사함을 가져옵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애통히 회개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를 둘려 서있는 여러 스랍들의 창화(唱和)하는 소리를 역시 들었습니다.『거룩하다 거룩하다 만 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사야가 그 영광스럽고 거룩한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에 직각 적으로 깨달은 것은 자기의 더러운 죄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부르짖기를『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오 입술이 부정한 사람 중에 거하면서 만 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보았음이로다.』이렇게 탄식하며 애곡(哀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이 애통이 심할 때에 스랍 하나가 핀 숯을 제단에서 취하여 그 입술에 대어 주면서 말하였습니다.『네 악이 제하여 졌고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애통이 있는 곳에 죄 사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에 자기를 따라 오면서 우는 여러 여인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감히 눈을 우러러 위를 보지 못하고 다만 굽으려 가슴을 치면서『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부르짖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그렇게 예수를 사랑하고, 그렇게 담대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지만 정작 주님께서 악한 무리에게 붙잡히어 끌려갈 때 뒤로 천천히 그를 따라 가서 대제사장 뜰에 들어갔지만, 실상은 그 환경 가운데서『너도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너도 예수를 따르던 사람이 아니냐?』고 물을 때에 그만 용기가 다 줄어져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마지막에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와 심히 통곡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애통이 비록 시몬 베드로가 자기의 선생을 부인하는 중한 죄를 지었지만 죄 사함을 가져 왔고 새로운 은혜를 받아서 모든 사람들에게 담대히 오순절에 전도를 한 사도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三十四편 十八절에『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 하시도다.』시편 五十一편 十七절에『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 하시리이다.』하나님께서 구하시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올시다.
예수 님께서는 한 번 바리세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저녁을 잡수실 때에 그 동리에서 가장 추하게 알려진 어떤 여자가 뒤를 따라 왔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께 대해서 그 발 위에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막에는 자기의 머리를 풀어서 발을 씻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시몬 바리새인은 그 여자를 멸시하고 오히려 예수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그 시몬에게 옳은 대로 가르쳐 주시고 그 여자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애통은 죄 사함을 가져옵니다. 구원 얻는 유일(唯一)의 길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이 여자와 같이 예수 님 앞에서 내 자신을 살펴서 내 더러운 온갖 죄악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으로 회개하는, 이 길만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유 일의 길입니다. 또한 이것만이 교회가 부흥될 수 있는 유 일의 길입니다. 온 교우 하나 하나가 주님 앞에서 겸손히 이 여자와 같이 내 자신을 살려서 내 허물과 내 죄를 깨닫고 원통히 회개할 때에 과연 교회는 부흥하겠고 교회 가운데 은혜가 충만하여 질 것입니다. 죄를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남의 애통에 같이 애통할 줄 아는 사람은 복이 잇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따르다가 울고 여러 여인들이 눈물을 흘릴 때에 예수 님도 역시 눈물을 흘리시면서 같이 울었다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여러 교우들에게 간절히 여러 가지로 권면하고 부탁할 때에도 우는 자와 같이 울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보신 줄 압니다.
제가 몇 주일 전에 시내 어떤 신문에「상품에 부치노라」하는 난이 있기에 며칠 동안 계속해 보니 그 난에는 6·25 때에 자기 자녀를 잃고 자기의 잃은 자녀를 찾는 부모들의 눈물어린 편지, 또는 6·25 때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있는 불쌍한 아이들이 부모를 찾는 눈물의 편지들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편지를 다 신문에 싣자고 한다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조용히 귀를 기울여서 우리 사회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울음소리,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울음소리, 남편을 잃은 여러 아내의 울음소리, 실업자의 울음소리, 고학생들의 울음소리, 순진한 여성들이 악당의 유혹을 받아서 일생을 그르친 가련한 여성들의 울음소리, 이 울음 소리를 듣고 같이 애통하는 자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됩니까? 이 애통하는 울음소리가 문자 그대로 삼천리 강산에 사무치건만 이 울음 소리를 듣고 같이 애통하는 참된 정치가, 참된 실업가, 참된 공무원, 참된 사회사업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됩니까? 이렇게 볼 때에 우리 사회는 눈물 없는 사회가 아닌가, 이렇게도 탄식할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애통할 줄 모르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가 복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남의 애통을 알아서 같이 나누고 수고를 나눌 줄 아는 민족이 오직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남의 눈물을 내 눈물로 알고 남의 설움을 내 설움으로 알아서 같이 십자가를 질 줄 아는 민족만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의 죄를 애통하는 자에게 더욱 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감람산 에서 예루살렘을 보시고『오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이 내가 너희들을 모으려 한 적이 몇 번이었는가.』고 탄식하면서 통곡하셨습니다. 자기의 사랑하는 민족들이 죄로 말미암아서 멸망할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 주님은 가슴이 메어지는 아프셔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으로 들어가는 인생을 구원하시려는 그 간절한 애통의 심정에서 하늘의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인간의 죄를 자기의 죄로 지시고 애통하는 심정의 역사적 표현인 것입니다.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오는 모든 인간의 애통을 자기의 애통으로 삼으신 주님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를 향해서 너희도 각각 자기를 이기고 십자가를 지고 곧 다른 사람의 죄와 십자가를 대신 지고 나를 따르라고 외치십니다. 남의 죄를 애통하는 자, 이런 이가 참 전도자가 되고 참 권사가 되고, 참 목사가 되고,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남의 죄를 위하여 애통할 줄 아는 그 사람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올시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기독교는 불교와 다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애통을 피합니다. 인간의 애통과 고난을 도피합니다. 그리하여 산으로 들어갑니다. 우리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애통을 같이 나눕니다. 십자가를 같이 집니다. 그리고 고아를 돌아보고 모든 노인들을 돌아보며 가련한 동포들을 봉사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입니다.
애통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눈물의 사자가 이따금 우리의 가슴, 우리의 가정을 방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자도 주님 안에서 맞으면 복을 남기고 가는 것입니다. 애통을 통하여 인생과 우주의 깊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애통을 통하여 죄 씻음을 받습니다. 남의 애통에 참여함으로써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 참된 하나님의 일군이 됩니다. 이런 이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위로를 더 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위로라고 하는 말을 영어로는 콤포오트(Comfort)라고 합니다. 본래 라틴말에서 온 말인데「힘을 준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런 이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힘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 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이런 이들을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읽으신 이사야 六十一장 一절로 三절까지, 예수 님의 오신 목적을 제가 다시 한 번 읽을 때에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 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喜樂)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께서는 이 목적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애통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습니다.
(一九六0년 一월 十일)

Ⅹ-20 온유한 자와 그 복 (八복③) (마태복음 十二장 六-二十一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오늘의 말씀은 산상보훈(山上寶訓) 중 셋째 되는 축복이올시다. 오늘 이 여덟 가지 복 가운데 셋째로 말씀하신 온유한 자와 그들의 받을 축복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 말씀도 얼른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대로 말한다고 하면 『강포(强暴)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세계를 정복할 것임이요.』아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꼭 같은 말씀을 시편 三十四편 十一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和平)으로 즐기리로다.』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온유(溫柔)는 성신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하나로서 갈라디아서 五장에 역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온유한 자의 축복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온유한 자는 어떠한 분들인가,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는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가장 온유하신 분이라 하는 생각입니다. 마태복음 十一장에 보면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四十二장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습을 예언한 가운데 마태복음 十二장에도 여러분이 지금 읽으신 대로 장차 오실 분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 혹은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하신 성품을 가르치신 것인 줄 생각합니다.
이사야 五十三장에 보면 또한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며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모습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예수를 어린양에 비유하였습니다. 역시 온유하신 성품을 가르치신 것인 줄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二장에 이렇게 주님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그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란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한 모습과 십자가의 수난을 기록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 님께서 한 번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마리아의 어떤 동리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동리에 들어가니 그들은 유대 사람인 줄 알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요한 과 야고보 두 형제가 매우 격노해서 이런 사람들을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전멸시키자고 하는 진언을 주님께 한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두 제자를 책망하시고 아무 말도 없이 다른 동리로 가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성품과 온유하신 생활을 문자 그대로 보여 준 사실이올시다.
온유한 자들은 어떠한 이들인가. 먼저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합니다. 얼른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 대하여 누가 겸손하지 아니하리 오 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 많고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하지 않게 행동하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섭리 가운데서 어떠한 불행이 나에게 미치고, 어떠한 재난이 나에게 미치고, 어떠한 실패가 나에게 오고, 어떠한 슬픔이 내 가슴에 스며 온다 할지라도 온유한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는가. 반항하지 아니합니다. 자포자기하지 아니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어떠한 환경을 당하든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바이면 조용히 참고 견디는 것이 온유한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면 또한 순종합니다. 전에 요셉이 그렇게 형들에게 팔리어서 애굽에 가서 고생하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한 환경 가운데 있었지마는 요셉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곳에서 순종하고 자기의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욥 같은 사람은 자기의 책임이 아니지만 전혀 알지 목하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 갑자기 모든 재산이 없어지고 심지어 자기 사랑하는 자식까지 없어진 때에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다만『여호와 주시고 여호와 거두시니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그 말밖에 남긴 것이 없습니다.
온유한 심령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평하지 아니하고 반항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직 참고 견디며 범사에 순복(順服)합니다.
몇 주일 전에 칼빈 선생의 생활을 말할 때에도 이미 말했지마는 그이가 이태리에서 스트라스버어그 라고 하는 곳에 가기 위해서 하루 밤 쉬기 위하여 제네바에 들렸습니다. 그 때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을 시작하기 전부터 알던 친구 윌리암 파렐이 찾아 와서 지금 제네바에 당신이 필요하니 스트라스버어그로 갈 것 없이 여기서 같이 손잡고 일하자고 강권하였습니다. 칼빈 선생은 그 때에 학구 생활을 원했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영구하고 공부해서 책을 쓰기를 원했습니다. 활동하는 그런 자리는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강경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윌리암 파렐 이 강권할 때에 칼빈 선생은「혹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나서 겸손하게 순복 하였습니다. 그 후에 된 일을 보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三년 동안 제네바에서 자기 딴엔 열심히, 양심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서민은 오히려 불평을 품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시 회의에서 칼빈과 파렐을 추방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공손히 당신 네 들이 그러면 우리가 떠나겠습니다―하고 그 곳을 떠나서 오래 가기를 원하던 스트라스버어그로 간 것입니다. 三년 후에 다시 제발 오라고 사람이 와서 간청할 때에도 또 온유한 마음으로 그저 당신이 정 원하면 또 가지요―다시 제네바로 왔습니다.
칼빈은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강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마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하려고 하는 온유한 근본적인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하였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합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역시 사람에 대해서도 온유합니다. 삶에게 대하여는 어떻게 이것이 나타나느냐, 우선 글자의 뜻대로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나는 줄 압니다. 성경 말씀에도 유수한 대답이 분노를 쉬게 한다고 그랬습니다. 우리 동양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도「툭해서 다르고 탁해서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같은 눈으로 보지만 다정한 눈길로 볼 수도 있고 혹은 눈에서 칼날이 나오게 볼 수도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에게 대하여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날 줄 생각합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은 자연히 사람에게 대하여 온유합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것처럼 태도를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온유와 겸손은 한 쌍둥이 같아서 온유한 사람에게는 역시 겸손(謙遜)이 따라다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온유는 사람에게 대하여 인내로 나타납니다. 성날만한 일이 있어도 참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참고, 나를 중상하는 사건이 생겨도 참고, 나를 여러 가지로 모략하고 괴롭게 굴지라도 온유한 사람은 곧 반항하거나 원수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잘 참아서 견딥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의 성품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유한 사람은 사람에게 대하여 어려운 것을 잘 참을 뿐더러 용서하여 줍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 했을지라도 그 사람이 알지 못해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으로 여기고 원수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용서해 줍니다. 일곱 번씩 용서해 줄 뿐더러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질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유한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선으로 갚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기록한 바와 같이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오히려 자기를 해롭게 하는 원수에게 대해서도 오히려 복을 빌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는 태도요, 이것이 온유한 사람이 사람에게 대해서 가지는 태도입니다. 이 모든 온유하신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성품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꼭 이와 같이 나타난 것입니다. 온유한 이는 이러한 분입니다.
그 다음에는 온유한 자의 축복을 생각하고자 합니다.『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입니다.』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흔히 강한 자가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서도 유능승강(柔能勝强)이란 말이 있습니다. 유한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는 뜻입니다. 옛날 동양성현 가운데도 이력복인과 이심복인(以力服人 以心服人) 즉 사람이 힘으로서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과 마음으로 복종시키는 것, 이 두 가지를 비교해서 말할 때에 이력복인은 잠깐이요, 이심복인은 영구하다고 하는 진리를 깨달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기 아이들이 읽기 좋아하는 옛날 우화 가운데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신 줄 압니다. 강한 바람과 햇빛이 한 번은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네가 더 힘이 잇느냐, 내가 힘이 더 잇느냐, 그래서 내기를 했는데 어떤 점잖은 사람이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람과 햇빛은 누가 저 삶의 모자와 외투를 벗길 수 있는가, 누가 힘이 더 있는가, 내기를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이「내가 힘이 더 있지. 내가 먼저 벗길 테니 보라.」고 하고는 바람을 갑자기 일으켜서 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가다가 「이거 바람이 분다.」하고는 모자를 꽉 내려씁니다. 그래도 그래도 바람이 자꾸 부니까 하나만 채웠던 외투 단추 세 개를 다 채웁니다. 그래도 바람이 부니까「바람도 참 심하다.」고 하면서 두 손으로 모자를 꽉 부여잡고 걸어갑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모자를 벗지 않고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외투를 벗지 않습니다. 결국 강한 바람은 사람의 모자와 외투를 못 벗겼습니다.
햇빛은「그게 무슨 힘이냐? 내가 벗길 테니 보라.」바람이 잔잔하고 조용해 졌습니다. 햇빛이 따뜻하게 쨍쨍 비칩니다. 이 사람은 길을 가다가「아이고, 날도 대단히 덥군」그 다음도 그냥 햇빛이 비치니까「이거야 더워서 견딜 수 있나.」하고 모자를 훌떡 벗었습니다. 그래도 햇빛이 비추므로「오늘은 외투가 쓸데없구먼.」하고는 외투를 벗었습니다. 그래서 강한 바람 보다 따뜻한 햇빛이 이겼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 유럽을 석권하던 나폴레온이 마지막에 센트 헤레나라고 하는 작은 섬에 정배(定配)가서 마지막을 마칠 그 시각에 몇 마디 남긴 말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마디 말은『나는 칼로서 온 유럽을 정복하였지만 결국은 실패하였노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사랑으로서 온 인류를 정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생물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물계에는 강한 것만이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니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니 자연도태(自然淘汰)니 생물계에는 강한 것이라야 산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해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 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지질역사를 연구해 보면 우리 사람이 지구에 나기 전에 큰 짐승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파충류에 속하는 맘모스와 공룡 같은 큰 짐승들이 지구 위에서 많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무섭고 강한 그런 짐승들이 지금은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멸종되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혹 뼈만 남은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뉴욕 박물관에 가 보면 옛날의 큰 공룡의 뼈를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룡은 볼 수 없습니다. 강한 짐승들은 다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약하게 보이던 짐승들은 이 땅 위에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이리와 개는 같은 종류에 속합니다. 사실 이리와 개를 보면 같이 생겼습니다. 본래 똑같은 종류였습니다. 그런데 이리 가운데서 어떠한 종류가 성질이 변한 것입니다. 온순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 놈은 개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포악한 이리는 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혹 동물원에 가야 더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질이 변해서 온유하게 된 개는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다 찾아 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고 하는 말이 얼른 듣기에는 마음 가운데 들어오지 않지만 깊이 생각하면 그 원리를 우리는 어느 방면에서든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리와 같은 히틀러, 이리와 같은 무솔리니, 이리와 같은 스탈린이 온 세계를 거저 점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가 결국은 세계를 얻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땅이 어디냐고 물어 본다면 아마 북미 대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통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이상한 것은 그 북미 대륙은 누가 차지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근 삼백여 년 전, 저 영국에서 자기네의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아 그 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되어 화란으로 갔었으나, 거기서도 한 이년 동안 살아볼래 야 살 수 없어서 다시 화란을 떠나 작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一六二0년에 폴리마우드 라는 바닷가 바위에 내린 청교도 一二0명과 그들의 자손이 지금 제일 아름다운 대륙을 기업으로 받아 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실 온유한 사람은 물질이 적거나 많거나, 이 세상에서도 참된 축복을 받습니다. 의인의 적은 물질이 악인의 많은 물질보다 복이 됩니다. 의인의 오막살이가 악인의 대궐보다 복이 됩니다, 의인의 나물밥이 악인의 송아지를 잡은 진미보다 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온유한 심령 곧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심령에게는 온 세계가 아버지의 집입니다.「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은 세계가 내 아버지의 세계요, 주님의 세계입니다. 온유한 자가 복을 받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질 날이 있을 줄 압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 이 땅은 언제든지 죄로 말미암아 불로 멸망 받을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오직 온유한 사람만이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온유한 마음과 성품을 우리가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여러분, 산상보훈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복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먼저 내 자신을 바로 알아서 마음이 가난해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내 허물과 내 죄를 깨달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애통하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연히 온유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또 언제든지 가장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의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울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실지로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화평(和平)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一九六0년 一월 十七일)

Ⅹ-21 의에 기갈한 자와 그 복 (八복④) (이사야 十一장 十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본문의 말씀은 산상보훈 중 넷째 되는 축복의 말씀이올시다.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축복, 둘째는 애통하는 자의 축복, 셋째는 온유한 자의 축복이었습니다. 이상 세 가지 축복은 소극적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고 오늘 아침 생각하고자 하는 이 넷째 되는 축복 즉,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의 축복은 적극적인 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의라고 하는 뜻은 무슨 신학적 의미보다도 실제적인 뜻으로 옳은 것, 올바른 것, 옳은 사람, 올바른 생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도 옳은 생활, 사람에 대하여도 옳은 생활, 사회에도 의가 행하여지도록 생활하는 것이 의의 참 뜻인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는 뜻은 적극적인 성품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이 두 가지는 우리육신의 가장 큰 욕망 욕구, 혹은 갈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리는 것, 대단히 급한 일입니다. 목마른 것도 또한 대단히 급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겸하면 얼마나 갈급(渴急)하겠습니까? 이것은 인간 심령의 가장 강력한 욕망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욕망이 있습니다. 지식의 욕망, 물질의 욕망, 우정의 욕망, 사랑의 욕망, 권세의 욕망, 명예의 욕망, 영광의 욕망 등 여러 가지 욕망이 있습니다. 이 모든 욕망 외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의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옳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 의로운 생활을 하면 좋겠다, 누구나 이런 욕망이 이따금씩 우리 마음속에 생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악하기로 유명한 네로도 사형 허락에 대한 첫 번 사인을 할 때에 차라리 글을 안 배웠더라면―하고 탄식했습니다. 독재자 히틀러도 때때로 나는 이 정치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한가히 그림이나 그리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홀로 앉아 있는 시간이면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런 악하고 인류를 공포로 몰아 넣는 사람들도 의에 대한 욕망은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에 대한 옳은 생활에 대한 욕망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욕망이 얼마나 강렬한가, 얼마나 계속되느냐 하는 것이 악하고 선한 사람으로 갈라놓는 것입니다. 주린 사람이 음식물을 찾는 것처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이 위에 대해 얼마나 갈급 해 합니까?
돈에 대하여 혈안이 되어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하여 갈급 한 이도 또한 많이 있습니다. 지식에 대하여 갈급 한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지위 권세에 대하여 갈급 한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종로와 을지로에 나가 보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만 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과연 몇 사람이나 의에 목말라 헤매면서 의를 찾습니까? 그리고 우리 자신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의,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오직 의, 사회에서도 오직 의만이 실현되기 위하여 주린 사람이 음식을 찾듯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이 갈급 해 하는 이가 우리 사회에 몇이나 됩니까?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둘째로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갈급 한 이에 대한 욕망만 있어도 복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짖지는 못했으나 지을 마음은 간절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마음에 간절히 부르짖기를―나는 아직도 죄를 계속하여 짓습니다. 그러나 꼭 이 죄를 끊기를 원합니다. 오 주여, 이 죄를 꼭 끊게 하여 주세요. 오 주여, 나는 아직도 죄의 악한 습관을 한 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나쁜 버릇을 못 고칩니다. 그러나 꼭 고치고 싶습니다. 오 주여 생각에도 말에도 행동에도 꿈에도 죄 짖지 않게 해 주세요. 우리 가족이 다 감화되지 못하였습니다. 어떻든지 금년에는 감화되게 해 주세요. 우리 사회에 얼마나 불의가 많습니까? 좀더 옳은 사회 깨끗한 사회 좀더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게 해 주세요.
이상과 같은 간절한 소원이 있으면 그는 벌써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왜? 그런 사람의 심령 속에는 새 생명이 싹트고 또 움직이며 장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의 새 생명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첫째 바른 판단, 바른 욕망입니다. 팥죽 한 그릇 보다도 장자의 명분이 귀한 줄을 아는 바른 욕망 돈 명예 권세보다도 의에 목말라 할 줄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른 선택입니다. 모세와 같이 애굽의 향락보다도 양심의 편한 편을 선택하는 바른 선택이 새 생명의 증거입니다. 모세는 의 아닌 물질, 의 아닌 지식, 의 아닌 명예, 의 아닌 사랑은 쓸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셋째로 이처럼 의에 기갈(飢渴)한 이는 사실 다른 욕망이 그렇게 크게 시험하지 못합니다. 이 큰 욕망에 다른 것들은 점점 적어집니다. 아론의 지팡이처럼 다른 작은 뱀들을 잡아먹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는 벌써 성신의 역사가 있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의에 주리는 사람에게는 셋째로 배부름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주리는 자에게 의의 양식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 六장 三十五절에『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七장 三十七절부터 三十八절에는『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예수께 나아와 그를 믿음으로써 외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의의 배부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간절히 의를 사모하던 바울도 주께 나아와서 의를 얻은 것을 우리는 다 잘 압니다.
빌립보서 三장 九절에『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바울 사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성 어거스틴도 루터도 주께 나와서 그를 옷 입듯 함으로써 의에 배부름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서만 점점 의로운 데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에 갈급 한 이는 그리스도께 나옵니다. 온전히 그를 생명의 주로 삼습니다. 의의 욕망이 미지근하여 주께 나오는 발걸음이 더디지만, 그러나 나오는 자마다 의의 배부름을 얻는 것입니다.『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미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一장 十七절의 말씀입니다.
의인 열 사랑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망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가정은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나라는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一九六0년 一월 二十四일)

Ⅹ-22 긍휼히 여기는 자와 그 복 (八복⑤) (잠언 三장 一-二十六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산상보훈의 여덟 가지 축복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마음이 가난한 자가 축복을 받고, 그러한 이는 또한 자기의 죄를 애통함으로 애통하는 자가 되어서 축복을 받게 되고, 그러한 이는 또한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 온유한 자가 되어서 또한 축복을 받게 되며 그러한 이는 또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로는 그와 같은 긍휼(矜恤)히 여기는 자가 되어서 또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라는 말 다음에 긍휼이 오는 것은 뜻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의에 긍휼이 없으면 냉정한 혹은 무자비한 의가 되기 쉽습니다. 반면 긍휼에 의가 없으면 무분별한 죄의 용납을 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와 긍휼은 영원히 나누일 수 없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다섯째 축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 각 사람 머리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긍휼 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우리가 다 짐작하실 줄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비, 인자, 혹은 인애(仁愛), 민망(憫 ), 그저 쉽게 말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올시다. 따라서 긍휼 이라고 하는 말의 반대되는 말은 무자비, 잔인, 포악, 무정, 냉정(冷情), 혹은 무시, 이런 말이 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 뜻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 불우한 경우에 있는 이들, 불쌍한 경우에 있는 이들, 혹은 범죄자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행과 불우(不遇)와 범죄자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한 마디로 말하면 긍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만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한 긍휼의 하나님이올시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올시다.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一0三편 七절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여기 인자라고 하는 말은 역시 긍휼 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시편 一0八편 四절을 읽어보면『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穹蒼)에 미치나이다.』이와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애가 三장 二十二절에 보면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殄滅)되지 아니함이다.』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것을 찬송한 거입니다. 디도에게 편지한 사도 바울은 디도서 三장 五절에 이런 말로 기록하였습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시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쫓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
우리 기독교는 긍휼의 종교입니다. 물론 불교에서는 자비를 말합니다. 유교에서도 맹자 같은 이는 특별히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고 하는 말을 써서 사람에게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면서 이 자비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불교나 유교뿐만 아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철학자들과 도덕가들이 자비와 긍휼을 강조해서 가르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진리는 한 자연 계시에 속하는 것으로써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이미 나타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특수한 것은 하나님이 이 긍휼 하신 성품을 단순히 가르쳐 주신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 하심이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긍휼 하심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깊이 우리에게 나타내시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긍휼에 대한 진리는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는 특수한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로든 나타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자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셔서 여러 촌으로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들과 약한 자들을 고쳐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비하신 주님의 마음, 하나님의 성품이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슬픈 자를 위로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며 병든 자, 손 마른 자, 눈 못 보는 자, 다리를 저는 자, 말을 못하는 자, 문둥이들을 고치시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려 주신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하나님의 긍휼 하심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 때에 바리세인들 혹은 서기관들은 비난하였지마는 세리 장 삭개오의 집에 친히 들어가 몸을 쉬면서 그의 심령을 구원한 사실,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고 다른 사람의 질시를 받으면서도 세리와 죄인을 가까이 하고 많은 죄를 지었지마는 눈물로 발을 적시며 머리털로 그 발을 씻는 죄 많은 여자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모든 사실, 심지어 간음하다 붙잡혀 온 불쌍하고 가련한 여자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놓아주신 그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긍휼 하신 주님의 자비하신 그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신 긍휼의 역사인 것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위해서까지도『아버지여 이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이들이 하는 것을 무엇인지 알지 못함이니이다.』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까지 용서하신 그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긍휼을 그대로 우리 인간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긍휼, 그 아들의 자비하신 성품을 배우라고 권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의해서 들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잠언 三장 三절에『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인자는 긍휼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六장 六절과 八절에 이런 말씀으로 우리에게 교훈 하셨습니다.『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여 인자를 사랑하며(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누가복음 六장 三十六절에『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이렇게 권면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四장 三十二절에『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이와 같이 권면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긍휼히 여기는 자의 모습은 어떠한가? 잠깐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자비한 자의 모습은 어떠한 분인가? 먼저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비한 눈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아프리카 대륙은 흑인 대륙으로 유명합니다. 사하라 사막 남쪽에 있는 부분은 오랫동안 다른 세계와 교통이 없었습니다. 十七세기 이후부터 백인들이 점점 그 지방에 많이 여행하게 되었는데 진주를 구하기 위하여 가는 사람들, 금강석을 구하기 위해서 가는 사람들,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고 그런 지방에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흑인 대륙에 가 보니 얼굴이 새까만 흑인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야만인들이 어디 있나, 뭐 이런 사람들은 아주 사람이라고 할 것 없고 그저 짐승보다 좀 나을 것밖에 무엇이 있는가, 이것들은 종으로밖엔 쓸데가 없겠군. 그래서는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뭘 조금씩 주고 얼려서 데려 오다가 그 다음엔 강제로 잡아다가 배를 태워 유럽에 오고 혹은 미국에 와서 검둥이를 전부 종으로 흑노(黑奴)로 매매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十七세기와 十八세기에 흑노 무역 사업이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눈은 잔인하고, 멸시하는 눈으로 이 흑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멀리 자기의 고향을 떠나서 대서양을 건너 남아프리카를 향해 간 리빙스턴이나 그 밖에 모든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눈으로 흑인들을 보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이 사람들은 얼마나 모르는가, 이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열대 지방의 병으로 고생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을까. 그는 자비한 눈으로 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병원을 설립하고 병을 고쳐 주고 학교를 설립하고 가르쳐 주고 교회를 설립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흑인 대륙 이곳 저곳에 흑인 독립국이 우후죽순과 같이 일어납니다. 이 독립국을 위해서, 독립 운동을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모든 지도자들은 모두 이 선교학교에서 배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비의 눈으로 흑인들을 보았습니다. 흑인들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에 두 가지 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멸시의 눈 혹은 자비의 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해방 이후 또는 6·25를 통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이북에서 밀물처럼 서울에 오고 남한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피난민을 향해서 본래 남한에 계시던 분 가운데서는 두 가지 눈으로 본 줄 압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자비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집과 모든 것을 다 잃고 오는 이런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을까. 저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자비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멸시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자비의 눈을 가졌습니다. 비록 죄를 범한 사람도 죄를 미워하는 것보다도 저 사람의 저런 죄를 짖는 것은 필연 그의 마음 가운데 어떤 병이 있든지 그의 환경 가운데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이다―그 범죄자까지도 불쌍히 보고 자비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먼저 자비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비한 귀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님께서 여리고로 가까이 오실 때에 어떤 소경이 멀리서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는 것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시끄럽다고 잠잠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주님의 귀는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소경을 오라고 해서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과 같이 험악합니다. 따라서 이 인생이 험악한 길에서 불한당을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부르짖는 소리가 많습니다. 약자의 부르짖음, 병자의 부르짖음, 고독한 자의 부르짖음, 가난한 사람들의 부르짖음, 여러 가지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많이 있습니다. 자비한 귀를 가진 사람들만 이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냉정한 귀를 가진 사람은 이런 부르짖음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비한 귀를 가진 사람은 심지어 다른 사람의 어떤 허물이든지, 다른 사람의 어떤 죄에 대해서 들을 때에 곧 그 말대로 듣지 아니하고 그 말을 얼른 듣고 속단하지 아니하고 자비한 이론과 자비한 판단을 가지고 듣습니다. 여기 공자 님께서 자기의 생활을 돌아보며 한 말 가운데 육십에 이순 (六十耳順)이란 말을 하였습니다. 나이 육십이 되니 귀가 순해졌다―아마 그 뜻은 이런 말 같습니다. 비록 반항을 한다든 가 성을 낸다 든 가 하지 않고 그런 모든 것도 깊이 생각해서 자비로운 심정으로 듣는 말을 다 자비롭게, 긍휼 한 심정을 가지고 판단한다고 하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긍휼 한 입, 혹은 혀를 가졌습니다. 칼로서만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혀로써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칼로만 사람을 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혀로도 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해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잔인한 혀도 많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그 혀가 인자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十장 十二절의 말씀을 보면『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롭다.』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의 입의 말은 대단히 은혜 스럽습니다. 이사야 五十장 九절을 읽어보면『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困乏)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하게 여길 줄 아는 그 혀는 어떻게 곤고(困苦)한 사람을 말로 도와줄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四장 六절을 보면 너의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한 거와 같이 고른 말을 하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긍휼 한 자의 혀는 자비한 혀입니다.
그리고 긍휼 한 자는 자비한 손을 가졌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아무리 문둥이가 더럽지마는 친히 어루만지면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아이들 머리 위에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친히 떡을 떼어 오 천 명을 먹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손은 자비한 손입니다. 저는 항상 이렇게 생각합니다. 의사의 손이나 간호원의 손은 보통 다른 사람의 손들 보다 자비한 손처럼 보입니다. 그 까닭은 의사의 손, 간호원의 손은 언제든지 병난 사람을 어루만지고 상처를 싸매 주고 피를 씻어 주고 고름을 짜 주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데 그 손을 씁니다. 우리가 다 의사가 아니고 우리가 다 간호원이 아니지만 우리의 손이 신령한 방면으로 여러 가지 방면으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자비한 손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주님의 손바닥에는 못 자국이 있었습니다. 이 못 자국은 모든 사람의 죄를 속량해 주시기 위해서 친히 못 박힌 못 자국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손바닥에도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어떻든지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이끌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손 가운데도 못 자국이 있어야 될 줄 생각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자비한 발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로의 집에서 설교할 때에 예수 님께 대하여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발로 두루 다니면서 착한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두루 다니기는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착한 일을 합니까? 우리가 일생을 산다고 하면 아마 여러 만 리를 걸어 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몇 만 리 가운데 참으로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걸어 다닌 마일 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 이 긍휼 한 마음은 모든 착한 일, 모든 자선 사업, 모든 인도주의 운동, 모든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 사업의 근본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 하러 어찌하여 나이팅게일 같은 여자가 자기의 고향을 떠나서 저 멀리 싸움터 크레미아 전쟁터까지 친히 가서 여러 군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그들을 도와주기를 힘썼습니까? 그와 겉은 봉사로 말미암아 적십자사 운동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의 마음속에 전쟁에서 상처를 입어 피 흘리며 넘어지는 여러 군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결국은 그 여자로 하여금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아브라함 링컨 같은 사람이 남부전쟁의 위험을 앞에 보면서 까지도 흑로를 해방하는 선포를 하고 흑로를 해방시켜 주었습니까? 모든 검둥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그 마음이 결국은 그로 하여금 그와 같은 일을 할 수밖에 없이 만든 것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전 세계에, 이 세기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이 혹은 아프리카로 혹은 아시아 사람이 별로 가보지 못한 데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도하려 갑니까? 죄를 짓고 이 세상에서도 형벌을 받고 영원한 멸망을 받을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 한 그 마음이 결국은 자선가를 만들고, 위대한 선교사를 만들고, 성자를 만들고,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회의 도움을 받을 불쌍한 사람이 많고 많지만 그저 무심히 지나고 그저 냉정히 지나는 것은 결국은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의 마음이 부족한 까닭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또한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에게도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오는 세상에서까지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공산당에서는 소위 무자비한 투쟁을 장려합니다. 사람의 가슴에서 이 자비가 떠나면 그는 벌써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긍휼이 없는 무자비한 생활은 사탄의 생활입니다. 긍휼이 풍성한, 자비한 생활은 하나님의 생활입니다. 산양과 면양의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오른쪽에 있는 의인들을 향해서 인자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 나와 창세(創世)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너희 가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나를 찾아보았느니라. 의인들이 하는 말이 주여 언제 우리가 그런 일을 하였습니까? 인자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이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나라를 상속해서 영원한 축복을 주었습니다.
(一九六0년 一월 三十일)

Ⅹ-23 마음이 청결한 자와 그 복 (八복⑥) (디모데 전서 一장 十七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오늘 아침은 주님의 산상보훈 가운데서 8복을 계속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오늘 아침에 생각하고자 하는 말씀은 여섯째 복이올시다. 마음이 청결한 자와 그런 이가 받을 복이 무엇인지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청결한 것을 좋아합니다. 공기도 맑은 공기, 물도 맑은 물, 육체도 깨끗한 육체, 깨끗한 방, 깨끗한 뜰, 또는 깨끗한 거리를 누구나 좋아합니다. 사실 청결(淸潔)은 건강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깨끗이 해야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청결을 잘 하여야 전염병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청결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문명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문명한 사람일 수록 깨끗이 살고 모든 것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야만인일수록 더럽게 살고 더럽게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작게는 의복이나 주택을 비롯해서 도회 시설에 미치기까지 과연 어떤 민족이 얼마나 깨끗이 사느냐 하는 것은 그 민족의 문화의 정도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은 우리 인간의 외부 생활을 깨끗이 하는데 여러 가지 공헌을 하여 준 것이 사실입니다. 상수도가 생기고 하수도 설비가 생기고 여러 가지로 소독하는 약품과 기계가 발명되고 여러 가지로 주택을 개량하고 여러 가지 계획과 시설을 새롭게 하는 이런 모든 것을 오늘날 과학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전보다 더 깨끗이 살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와 같이 외부적으로 깨끗이 생활하는 것도 좋지만 언제든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겉만 깨끗해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외부 생활만 깨끗해서는 부족합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이십세기 모든 인간들의 생활을 보면 과학의 발전과 문화의 진보로 말미암아 이들의 외적 생활은 전보다 더 깨끗하여 졌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까지 전과 같이 부정에서 여러 가지 불행과 여러 가지 비참(悲慘)과 여러 가지 재해가 우리 가정에 오고, 우리 사회에 오고, 우리 나라에 오고, 온 세계에 온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옛날, 유대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외부 생활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정결케 하는 규례(規例)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음식을 먹어도 깨끗한 음식만 먹고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았습니다. 물고기 가운데서도 먹을 수 있는 정한 물고기가 있었고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물고기가 있었습니다. 짐승 가운데도 먹을 수 있는 정한 짐승도 있었고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옷도 될 수 있는 대로 깨끗이 입기를 힘썼고 조금이라도 전염병 혹은 문둥병 앓는 사람 곁에 갔으면 옷을 깨끗이 빨아야 되고 사람이 죽은 초상집에 갔다 오면 반드시 그 옷을 갈아입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밖에 나갔다 오면 손을 씻되 팔 굽까지 씻어야 했고, 밖에 나갔다 오면 발도 꼭 씻어야 방에 들어가고,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으며 여러 가지 주발과 그릇들을 깨끗이 하도록 힘썼습니다.
어느 날 예수 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바리세인들이 비난하였습니다. 어찌해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습니까―그 때에 예수의 대답하신 말씀을 간단히 말하면, 너희 말은 그와 같은 외부적으로 청결케 하는 것에는 힘쓰지만 너희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줄 모르니 이것이 큰 일이 아니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마태복음 十五장 十九절에 기록된 대로『너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오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외부의 생활을 깨끗이 하기를 힘썼지만 자기의 속을, 자기의 마음을 깨끗이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님께서는 바리세인들과 당시의 서기관들을 책망하실 때에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 같다―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옛날 무덤 가운데 회를 칠하는 풍속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밖에는 회를 칠했으니 아주 정하고, 희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에는 더러운 뼈와 송장이 그대로 잇는 것처럼 너희들의 얼굴은 깨끗하고, 너희들의 의복은 깨끗하고, 너희들의 외모는 깨끗해 보이지만 네 속에는 송장과 같은 더러운 마른 뼈들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어느 면으로 볼 때에 이십세기의 물질문명은 회칠한 무덤 같은 문명입니다. 사람의 겉은 깨끗하게 하여 주지만 사람의 속은 그냥 더러운 그대로 있는 것이 현대의 현상이올시다.
예수 님께서는 언제든지 먼저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뿐만이 아닙니다. 온 성경이 그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 때의 예루살렘을 향해서 『오 예루살렘아 너희 속을 깨끗이 하라 너희 속마음에 있는 생각을 깨끗이 하라.』고 했고 야고보는 그 때의 모든 사람을 향해서 부르기를『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구뇨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그래야 거룩한 산에 오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마음을 청결케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결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섞이지 않을 것이 섞이면 불결해 집니다. 불결한 공기란 공기 가운데 연기가 섞이든지 먼지가 섞이든지 섞이지 않아야 될 것이 섞일 때에 그 공기는 불결한 공기가 됩니다. 흐린 물이란 맑지 못하고 그 가운데 먼지든지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섞일 때에 그 물이 흐리다고 합니다. 더러운 옷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옷에 여러 가지 먼지가 묻는다든지 더러운 것이 묻을 때에 그것을 더럽다고 합니다. 더러운 마음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그 본 마음 외에 여러 가지 다른 것이 그 속에 섞일 때에 그 마음을 더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 많지만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보통 일곱 가지로 생각합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을 더럽게 하는 것으로 흔히 일곱 가지 죄악을 열거합니다.
첫째는 음욕, 둘째는 탐심, 셋째는 시기, 넷째는 교만, 다섯째는 미워하는 것, 여섯째는 혈기, 그 다음에 거짓된 것, 이와 같은 죄악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으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졌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썩어졌습니다. 이런 죄악들이 얽히고 얽혀서, 이런 죄악들이 점점 장성해서, 이런 죄악들이 여러 가지 악한 것을 도모해서,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지고 냄새가 나고 이런 마음이 입으로 나올 때에 더러운 말이 되고 행동으로 나올 때에 더러운 마음이, 행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마음을 어떻게 씻을 수가 있습니까? 더러운 옷처럼 우리가 한강수에 나가서 빨 수 있겠습니까? 이 더러운 마음을 어디 가서 빨 수 있겠습니까? 요한 복음 十三장을 읽어보면 거기 예수 님께서 친히 대야에 물을 담그시고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겸손히 씻어 주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 베드로의 차례가 왔습니다. 베드로는 선생님 제 발은 씻지 못하실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 님은 지금은 그 뜻을 네가 알지 못하나 이 앞으로 알리라―하고 어서 발을 씻으라고 권면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절대로 사양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의미 심장한 말씀을 했습니다.『내가 너를 씻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여러분, 그 때에 예수 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단순히 모범만 보여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보여 주시려니와 한 걸음 들어가서 예수 님만이 우리를 깨끗이 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진리를 이 발을 씻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 一서 一장 七절에 사도 요한 은 이와 같이 기록하였습니다.『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히브리서 九장 十三절과 十四절에는 이와 같이 말씀했습니다.『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베드로 사도는 一장 十八절과 十九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씻음을 받아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씻는 것은 그리스도만 씻을 수 있는데 그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씻어서 깨끗하게 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는 축복에 대해서는 먼저 말씀한 것도 아니고 두 번째로 말씀한 것도 아니고 여섯 번째에야 말씀했습니다. 먼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 것을 깨달은 다음에는 자기의 죄를 깨달아서 애통하는 그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 온유한 성품을 가지게 될 때에 더욱 복된 자리로 들어갑니다. 의를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간절히 사모합니다. 긍휼 함으로써 모든 사람까지 회개하게 합니다. 그 다음에야 마음이 청결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이 청결한 축복을 그저 갑자기 일조(一朝)일석(一夕)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나의 모든 죄를 온전히 알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애통하며 자복하며 회개하고 그리고 그리스도께로부터 모든 위로를 받고 은혜를 받는 가운데 결국에는 그의 마음까지 깨끗하여 질 수 있는 이와 같은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가에서도 항상 부르기를「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가운데서 죄 사함을 받고 그 신앙 가운데서 한 걸음 나아갈 때에 우리의 마음이 점점 깨끗하여 질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실 때에 한 번은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대 그는 불과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오순절에 이 말씀이 응하게 될 때에 불같은 혀로서 나타난 것은 또한 의미가 있는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은 태웁니다. 불은 사르므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 들어 와서 점점 하나님과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신으로 우리 마음속에 점점 풍부한 은혜를 받게 될 때 그 뜨거운 성신은 우리 마음속의 여러 가지 더러운 생각을 지워 버리고 점점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거룩하고 깨끗한 자리에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깨끗한 마음은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이와 같이 주님의 은혜로서 주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을 얻게 될 때에 그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부정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에게도 계십니다. 그러나 눈이 밝은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아무 생각도 없이 자고 있었지만 꿈을 통해서 사다리를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다음에야 아 나는 몰랐더니 이 곳이 하늘의 문이요 하나님의 집이었구나―하고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고 궁창이 그 손으로 만드신 것을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할 때에 깨끗한 눈으로 일월 성신과 산천 초목과 자연계를 바라 볼 때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을 자연계에서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인간의 역사를 볼 때에도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무의미한 반복이 아닙니다. 역사 가운데는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납니다.「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지만 매우 보드랍게 간다.」고 하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공기의 맷돌의 움직임을 역사 가운데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놓고 성경을 읽을 때 이 성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꾼을 볼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부정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는 까닭으로 성경을 읽지마는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마음이 청결해질 때에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그리스도의 얼굴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함으로써 하나님의 집, 이 예배당으로 나올 때에 옛날 이사야와 같이 이 예배당에서도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스랍 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부정함으로써 예배당에 나오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가련한 외로운 심령으로 그냥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고 하나님과 가까운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을 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지상의 축복이올시다. 여기에 참된 기쁨, 참된 평화, 참된 행복, 하늘 나라의 경험을 이 가운데서 미리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대하게 되는 것은 이 다음 하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얼굴을 대면할 예표(豫表)가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경고의 말씀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 다음에 하나님의 얼굴을 대할 때가 한 번만 있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할 때에는 그 하나님의 얼굴은 소멸하는 분입니다.『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러분, 할 수 있는 대로 깨끗한 마음을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을 피하는 게 좋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럽게 하는 서적을 피하세요. 음악을 피하세요. 사진을 피하세요. 우리의 마음을 더럽게 하는 모든 오락을 피하세요. 우리를 더러운 데로 인도하는 여러 친구가 있으면 끊어 버리세요. 우리를 더러운 곳으로 인도하는 어떤 곳이 있으면 그 곳을 멀리하셔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항상 깨끗이 보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 두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의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강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성신의 충만한 은혜를 받아서 우리 마음속에 뜨거운 성신의 불이 언제나 붙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그 간절한 정열,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그 간절한 정열, 거룩한 불이 우리 심령 속에 언제나 붙을 때에 우리의 마음이 자연히 거룩하고 깨끗한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一九六0년 二월 七일)

Ⅹ-24 화평케 하는 자와 그 복 (八복⑦) (골로새서 三장 五-十七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이 말씀은 여러분께서 기억하시는 대로 예수 님께서 산상에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축복가운데 일곱 째되는 축복이올시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원어에는 같은 말이지만 우리 한국 성경의 번역에는 여러 가지 말로 경우에 따라서 조금 다른 말을 썼습니다. 혹은 화평 혹은 평강 혹은 평안 혹은 화목 이렇게 여러 가지 말로 썼지만 근본 뜻은 다 하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화 평을 간단하게 말하면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입니다.
둘째는 사람의 마음속의 화평입니다.
셋째는 믿는 형제간의 화평입니다.
넷째는 모든 사람과의 사이에도 화평을 가르친 것입니다.
로마서 五장 一절에는『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말합니다.
고린도 후서 五장 十九절에는『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들의 죄를 저희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이것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가르친 것입니다.
첫째는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화목(和睦)제(祭)가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평이 성립되어야 될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마음속의 화평을 가르쳤습니다.『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이런 말씀은 여러 번 나타납니다. 마음속의 평화를 가르친 것입니다.『모든 지각에 뛰어나는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이것도 역시 마음속의 평안을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의 평안을 유산으로 주신 것입니다.
셋째로는 믿는 형제간의 화평을 말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도『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음이 생각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형제간에 화평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넷째는 에베소서 四장에『너희가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화평의 매는 줄로)성령의 하나님께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믿는 사람들이 신앙의 형제간의 화평을 지킬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이런 말을 가르치셨습니다.
로마서 十二장 十八절에『할 수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히브리서 十二장 十四절에는『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고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성경은 네 가지 종류의 화평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면 화평하게 하는 자란 어떤 분입니까? 영어로는「화평은 만드는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피이스 메이커(Peace maker)라고 번역했습니다. 화평을 만드는 자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화평을 만드는 자가 되려면 이 네 가지 화평이 다 그 삶에게 우선 있어야 될 것입니다. 먼저 그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이 성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화평을 가지려고 하면 여덟 가지 복 가운데 첫째 마음이 가난한 복을 받고, 둘째로 애통하는 축복을 받아서 모든 죄를 원통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룩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사람은 마음의 화평이 또한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그 다음에 셋째 축복이 되는 마음이 온유하여 집니다. 넷째 그 사람은 의를 주리고 목마른 것 같이 사모하게 됩니다. 다섯째 그 사람은 긍휼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은 정결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섯째 축복인 청결의 축복까지 받게 될 때에 그 사람의 마음은 화평한 축복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의 불안이나 근심과 염려나 서로 싸우는 정욕이 없는, 내면 투쟁과 분열과 번민(煩悶)이 없는 안정한 마음, 조용한 마음, 잔잔한 갈릴리 바다와 같은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악한 사람의 마음은 이것과 다릅니다. 마치 바다 물결이 요동하여 솟구쳐서 여러 가지 진흙과 더러운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악한 사람의 마음은 정함이 없고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섯 가지 축복을 이미 받은 사람의 마음에는 조용하고 잔잔한 화평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사람들은 믿는 형제간에도 화평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신앙의 권속간에 화평한 살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저자가 읊은 말씀과 같이『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을 적심 같으며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이와 같이 온전한 화평을 얻은 사람들이 주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화평한 가운데 사는 믿는 사람들의 모습, 이와 같은 사람들이 모인 그 교회야말로 은혜 스럽고 영광스럽고 볼만하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축복을 받을 수 잇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한 거름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과도 가급적 화평의 생활을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신 거와 같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합니다.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합니다. 모든 사람을 대하여 착함을 좇습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해서 이를 좇으라.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주릴 때에 먹이고 목마를 때에 마시옵니다. 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할 것은 없지만 나로서는 모든 사람을 대하여 화평의 생활을 하고 화평의 성품을 가지고 화평의 모든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평하게 하는 자요 화평을 만드는 자의 모습이요 성품이요 생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화평하게 하는 자가 언제든지 특별히 힘쓰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언제든지 이런 사람은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서 한없는 노력을 아끼지 아니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사람 새에 화평을 가져오기 위해서 화평의 복음을 부지런히 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화의 근본은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가 된 까닭입니다.
모든 불화와 분쟁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죄악입니다. 마음의 불화도 이 죄에서 오고 가정의 불화도 이 죄에서 오고 사회의 불화도 그렇고 국가간의 불화와 전쟁도 역시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까닭으로 우리 마음속에는 화평이 없고 우리 가정과 사회의 화평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 지정한 화평이 성립 될 때에 우리의 마음에도 화평이 오고, 우리 가정에도 화평이 오고, 우리 사회와 국가와 국제간에도 화평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세계의 평화 운동입니다. 복음을 아직까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은 세계적인 평화 운동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와 같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의 축복을 받는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 사이에도 평화를 가져오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우선 적극적으로 이런 사람은 싸움을 붙이지 않으려고 말을 조심합니다. 잠언에 말쟁이가 있으면 다툼이 그치지 아니한다.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속담의 말대로 불붙는 집에 키질도 안 합니다. 어떤 이들은 보통 때에는 가만있다가도 무슨 분쟁이 생기면 갑자기 분주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하던 심방도 하고 안 하던 지방 순회도 열심히 합니다. 조무래기 한 놈이 한강 물을 흐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분쟁을 가져오지 않기 위해서 조심합니다. 평화한 가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조심합니다. 평화로운 교회를 흔들지 않기 위해서 조심합니다.
그러나 그 뿐만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서 성신이 하나 되게 하여 주신 화평의 매인 줄을 끊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가르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성도의 교제를 끊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기 위하여 가진 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또한 정치가이면 국제간에도 언제든지 평화를 수립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시간을 허비합니다. 어디에 가나 화평의 말을 합니다. 화평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가진 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0이것이 화평하게 하는 자의 간단없는 노력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가 마지막으로 어떠한 축복을 받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누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란 일컬음을 받는단 말입니까. 사람에게? 혹 사람에게도 이런 말을 받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사람에게는 손해를 받을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근본 뜻은, 또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 뜻인 줄 생각합니다.
여기 어떤 이가 있어서 과연 하나님과 화평을 맺고 그 마음속에 화평이 있고 모든 믿는 사람과 화평한 생활을 하고 모든 다른 사람과도 화평한 생활을 하며 화평의 복음을 전파하고 화평을 가져오기 위하여 가진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대해서는 아, 귀엽다 과연 너는 내 아들이다 과연 너는 내 딸이다 ―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 님께서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실 때에 하늘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거와 같이 우리도 화평의 축복을 받아서, 화평의 생활을 하여, 하나님께로부터 과연 너는 내가 기뻐하는 자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사랑하는 딸이다 ― 라는 말씀을 듣게 되면 이에게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축복을 받은 사람이야말로 하늘의 유산을 받을 것입니다.
하늘이 어떠한 곳입니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모인 곳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二十세기는 기독교 역사상으로 볼 때에는 특별히「평화 운동의 세게」라고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사실 역사를 가만히 거슬려 생각해 보면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에 있는 진리를 우리 인간에게 특별히 계시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十六세기와 十七세기에는 마틴 루터 같은 종교 개혁자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우리 신교 개혁의 진리를 분명히 하나님께서 새롭게 계시한 세계입니다.
그 다음에 十八세기와 十九세게는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 온 천하라고 하는 그 명령을 특별히 새겨듣고 유럽이나 미국에 있는 교회가 온 세계에 가서 선교를 해서 말하자면 세계 선교 운동의 세기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二十세기는 어떤 세기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는 다 주안에서 하나가 되었은즉 온 세계 어느 곳에나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은즉 어떻든지 믿는 사람들과 믿는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서 화평한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라고, 사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 신교의 공헌이 많이 있지 우리 신교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너무 여러 갈래로 갈라진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나라에는 이백여 교파, 근 삼 백 교파가 된다고 하는 말을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더 분열해서는 안 되며 어떻든지 서로 화평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연합할 수 있으면 연합해서 다른 교파에서 우리를 열 교라고 비웃는 그런 말을 듣지 인하도록 협조하고 화평합시다. 二十세기에는 이 진리를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세계의 사람들에게 새롭게 계시하는 때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유감스럽게도 일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지마는 이것이 우리가 요새 좀 자주 듣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근본 정신입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같이 살 때에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가 서로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다 하는 말이 너나 나나 우리 둘 사이에는 싸움하지 말자. 네가 동편으로 가려면 내가 서편으로 가겠고 네가 서편으로 가려면 내가 동편으로 가겠다. 싸움하지 말자. 그러면서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 땅에는 가나안 사람과 부리스 사람도 있다. 유대 사람만이 아니다. 가나안 사람과 부리스 사람이 우리를 멸시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동지지간에 싸움하지 말자.
오늘날 한국 교회가 싸움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허다하게 많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운데 하나는, 이 땅과 세계에는 가나안 사람과 같은 공산당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항상 한국 교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우리를 열 교로 비웃습니다. 부리스 사람 같은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든지 주안에서 화평해서 하나가 되는 것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신학자도 필요하고 별의 별 사람이 다 필요하지만 우리 보기에 제일 필요한 인물이 누구입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목사들, 화평하게 하는 장로들, 화평하게 하는 집사들과 모든 평신도들, 특별히 우리 한국교회는 이 화평을 배워야 되겠습니다.
화평하는 자가 되려고 하면 하나님과 내가 화평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까지도 하나님과 화평이 성립되지 못한 이는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너 어디 좋지 못한 곳에 가는데 가지 말라 하지만 그냥 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너 이따금 먹는 술 먹지 말라 하는데 그냥 먹는 사람은 없습니까? 회개하기 전에 어거스틴은 하나님이시여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방금은 마시옵소서―하였다는데 그런 사람은 없습니까? 연보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싸움하고 하는데 삼십만원 밖에 못하겠어요―하고 싸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먼저 화평해야 됩니다.
먼저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평이 성립되면 내 마음속에 화평이 옵니다. 그 화평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화평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화평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화평의 운동을 할 수 가 있습니다. 성신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을 맺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에는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나니라.』
화평을 심어서 의의 열매를 거두십시다. (一九六0년 二월 十四일)

Ⅹ-25 의로 핍박받는 자와 그 복 (八복⑧) (마태복음 五장 一-十二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2)

오늘 이 시간은 여덟 가지 복 가운데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축복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 말씀도 얼른 들을 때에는 좀 이상하게 생각이 됩니다. 핍박을 받는 것이 무슨 축복이 될 수 있을까? 또는 의를 위하는 이가 온전히 의로운 길로 가서 의를 행하는데 왜 핍박을 받을 것인가. 이와 같은 생각이 우리 머리에 자연히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깊이 생각하면 이 말씀은 진리요 또한 사실이올시다. 의의 길을 걷는 이가 핍박을 세상에서 받습니다. 흑인나라에 백인이 처음으로 가니까 그 모든 사람들이 그 백인을 가리켜서 이것은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흑인나라 사람들은 그때까지 사람이란 얼굴이 새까만 것이 사람이지 얼굴 흰 것도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하였던 때문인 줄 생각합니다.
까마귀 청에 백로(白鷺)가 갔더니 이것은 새가 아니라고 검은 까마귀들이 내어쫓았다고 하는 옛날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의인이 핍박을 받는가. 이 세상이 보통은 검은데 여기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축복을 받는 이들은 너무 흰 까닭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필요로 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참된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이 사는 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 등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운 가운데 있던 여러 가지 추한 것이 자연히 들어 납니다. 따라서 어두운 생활을 하는 이들에 불안감을 자연히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패한 관청에 모든 것을 꼭 바르게 하는, 의를 행하는 공무원 하나가 있으면 다른 여러 부패한 공무원들에게 불안감을 줍니다. 이 사람이 가만히 있어서 무슨 말을 하지는 않지만 스스로 책망하는 듯한 느낌을 다른 사람들이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을 싫어하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비난하고 마지막에는 모함까지 할 수 있습니다.
어찌해서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그 때에 파사 왕조에서 다니엘이라고 하는 사람의 생활은 너무 결백하고 의로운 까닭이었습니다.
의를 행함으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왜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까지 팔려 가게 되었고, 마지막에 억울하게 감옥에 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어두운 세상에서 요셉이 너무 밝았던 까닭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가인이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까? 성경에 있는 대로 자기의 행실은 악하고 아벨의 하는 모든 일은 의로운 까닭으로 아벨을 싫어하고 시기해서 마지막에 이와 같은 흉악한 범죄까지 행하는데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예수를 시기하고 여러 가지로 비난하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까지 못박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생활은 너무나 의로운 까닭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양의 동서를 물론하고, 때의 고금을 물론하고 언제나 있는 사실입니다.
인간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의복은 변했고 그 사람들의 주택은 변했으나 인간성 본질은 아직도 변치를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오늘날도 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이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부패한 학생 중에 의로운 학생이 몇 사람 있으면 이 의로운 학생들은 반드시 핍박들 받는 것입니다.
부패하고 죄악 가운데 사는 많은 군인들 가운데서 오직 결백하게 살고 깨끗이 사는 군인 몇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들도 반드시 다른 많은 군인들에게 핍박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죄악 가운데 묻혀서 있는 많은 노동자들 가운데 온전히 모든 일을 바르게 하고 정직히 하는 결백한 노동자가 몇 사람만 있으면 이 사람들은 반드시 핍박을 받는 법입니다.
사무원 가운데도 그러하고, 상계(商界)에서도 그러하고, 회사에서도 그러하고, 모든 사회에서 다 그러한 것입니다. 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오히려 이와 같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아무 핍박을 받지 않고 산다고 하면 그 사람은 하늘 나라에 속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속한 증거입니다.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셋이 있었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합니다. 중앙에는 일체의 흠이 없고 일 점의 불결한 점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셨습니다. 그 좌우에는 흉악한 죄를 범한 살인 강도들이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결백한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흉악한 두 죄인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상스럽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이 사실도 이 현세에서 되는 보통 현상의 한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부패한 세상에서는 이와 같이 의로운 이가 불 의한 이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지자와 추악한 죄인이 같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진정한 애국자와 살인강도가 같이 감옥에서 썩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한 사람은 너무 의로 와서 핍박을 받고 다른 사람은 너무 악해서 이 형벌을 받는 것이 현세의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온전히 그의 발자취를 따라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 때에 욕하고 여러 가지로 거짓으로 말하며 여러 가지로 핍박을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꼭 신앙 생활을 바로 하려고 하면 이 세상에서는 아무래도 핍박을 각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미리 우리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제 사십 년 동안에 우리 민족 가운데 누가 압박을 받지 아니하였으리 오 마는 그 가운데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제일 많은 핍박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해방을 당한 이후 북한에 공산당들이 들어오고 또 6·25 때에 공산당들이 남한에 침노할 때에 어느 사람들이 핍박과 환난 을 당하지 아니하였으리 오 마는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제일 많은 핍박과 학살을 당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님께서 이 사실을 스스로 내다보면서 핍박을 받으라고 예언을 하면서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이런 핍박을 받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당할 때에 이상히 생각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부탁하셨습니다. 왜?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 이와 같이 핍박을 받았느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당할 때에 낙심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되겠습니까.
첫째는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옛날 선지자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을 잠깐 생각해 본다면 다 핍박을 받았습니다.『선지자들의 왕』이라고 불리 우는 엘리야는 그 당시 바알 우상을 섬기는 일이 성하던 때에 오직 참 신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담대히 싸우다가 아합과 이세벨에게 많은 핍박을 받은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도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 사회정의를 부르짖다가 모든 권력층에게 얼마나 많은 비난과 핍박을 받았다는 것도 역시 기억하는 바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생활을 잠깐 회고하여 볼지라도 당시의 음란과 사치와 불의 한 관헌들을 향해서 담대히 그 죄를 책망하고 모든 특권 계급을 향해서 죄를 회개하라고 부르짖다가 여러 가지로 핍박을 당하였으며, 전설에 의하면 마지막에 톱으로 켬을 당해서 순교를 하였다고 하는 말씀도 우리가 기억하는 바입니다. 또는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이의 생활을 회고해 볼 때에도 그는 당시의 죄악을 책망하며 모든 자기의 민족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눈물로 부르짖었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반발적으로 나가고 그를 핍박해서 혹은 우물 속에 잡아넣기도 하고, 혹은 결박해서 감옥 속에 넣기도 하고, 가진 구박과 모욕과 핍박을 한 사실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선지자들의 생활을 돌아보면 그들은 의를 행하다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죄악 많은 세상에서 옳게 살려고 하다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어떤 때에는 실직을 하고 여러 가지로 괴로운 일을 당한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작은 의미에서 우리가 선지자의 후예가 된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사실이올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런 일을 당할 때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받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된 증거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이 이들에게 속합니다. 이들은 천국에 속합니다. 이미 천국에 속한 까닭에 이 세상에 살기에는 꼭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핍박을 받아서 십자가에 달려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된 집사 스데반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어떻게 처음으로 순교자가 된 사실을 우리는 사도생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 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고보가 악한 왕 해롯의 칼날에 이슬이 된 것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나라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 가는 곳마다 구박을 받고 가는 곳마다 핍박을 당한 사실도 우리는 기억하고, 마침내 순교한 모든 전설도 우리는 또한 아는 바입니다.
로마 시에 가면 물론 옛날부터 내려오는 유명한 예배당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러 예배당 가운데 제일 유명한 예배당은 둘인 줄 생각합니다. 하나는 베드로 예배당이요, 하나는 성 바울 예배당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당이 둘 다 그들이 순교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성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자리에 성 베드로 예배당이 건축되었고, 성 바울 예배당은 성 바울이 칼에 맞아서 피를 쏟은 그 자리에 성 방울 기념 예배당이 건축된 것을 우리는 오늘날까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많은 참된 그리스도의 종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때로는 생명까지 희생하였습니다. 또는 폴리갑이나 익나디오, 쩌스틴을 비롯해서 세기를 통하여 많은 종들, 十五세기의 요한 헛쓰, 우리 한국의 주 기철 목사에 이르기까지 수 없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받고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바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때 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받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계통을 잇는 것임을 생각하여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는 핍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핍박이 있으면 우리는 기도도 더 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북한에 계실 때에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까? 六·二五를 당할 때에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까? 성경도 열심(熱心)으로 공부하게 됩니다. 주를 더 튼튼히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핍박이 있을 때에는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죄악의 앙금이 가 앉을 사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더 깨끗해집니다. 심령이 더 결백해 집니다. 소망이 더 빛나게 됩니다. 어느 때에 스테반이 하늘나라를 잊었으리 오 마는 스테반이 돌에 맞아서 생명이 떠나려는 그 순간에 그의 신령한 눈은 열려져서 하늘 나라의 영광을 볼 수가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능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소망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五장 三절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이와 같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예수 님께서 한 말씀 더 하시기를 하늘의 상이 있겠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十九장 二十九절에는 주님께서 직접 이런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田土)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예수 님께서 부활하신 그 몸으로 사도 요한 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이런 말씀으로 요한 계시록 二장 十절에 말씀하셨습니다.『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사실 우리 가운데도 일제 시대 또는 해방된 후 공산당 아래에서 욕되고 핍박받고 거짓으로 거슬려서 악하다고 하는 말을 들었을 뿐더러 문자 그대로 여기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집을 잃은 이도 있고, 고향을 잃은 이도 있고 부모를 잃은 이도 있고 자매를 잃고 전토를 잃을 뿐더러 혹은 옥에서 가진 악형을 당하고 심지어 총에 맞고 구사 일생으로 살아난 이들도 우리 가운데 여러분 있을 줄 압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리라 이전에 있던 선지자들이 이와 같은 핍박을 받았느니라.』주님께서 이와 같은 의인을 위해서 핍박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이 말씀으로 위로하여 주십니다.
이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이 과거 교회 역사 이천 년을 통해서 모든 참된 성도들이 하여 온 신앙 생활이올시다.
사도들이 예수 님의 이름을 전파하다가 공회(公會)에 가서 채찍으로 많이 맞고 나옵니다. 그렇지마는 사도행전에 기록한 것을 보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있어서도 밤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과 함께 큰 이적이 나타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와 같이 권면 했습니다.『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움을 두려워 말며 소동하지 말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
(一九六0년 二월 二十一일)

Ⅹ-26 소금과 빛 (八福 ⑨) (마태복음 五장 十三-二十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 5·1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루에서 불러서 장차 보이실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실 때에 두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장차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삼고 네 이름을 창대(昌大)하게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네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되리라. 이렇게 두 가지로 약속을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두 가지 약속이 다 이루어진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와 온전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고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되면 우리에게도 두 가지 축복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첫째는 먼저 우리 자신이 복을 받습니다. 산상보훈(山上寶訓에서 주님께서 여덟 가지 축복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과 같이 마음이 가난함으로 천국을 얻게 되고, 애통함으로 위로를 받게 되고, 온유함으로 땅을 차지하게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배부름을 얻게 되고, 긍휼히 여김으로 긍휼 함을 받게 되고, 마음이 청결함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며,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음으로 온전히 천국을 소유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둘째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은 자신의 축복을 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복의 근원이 되어서 이런 사람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상 사람들이 또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에 여러분과 같이 잠깐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이 둘째 종류의 축복이올시다. 이렇게 먼저 자신이 복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까지 복을 주시는지 이 점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이 시간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님께서 교훈 하시는 방법은 가장 평범하고 자연계에 있는 단순한 사실을 가지고 깊은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 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두 가지 실물을 들어 우리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곧 소금과 빛이올시다. 곧 주님 앞에 나와서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축복을 받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는 소급과 빛이 되어서 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통하여 역시 복을 받게 되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주님 앞에 온전히 나와서 구원받은 사람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이와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제일 먼저 우리의 염두에 들어오는 생각은, 이 두 가지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 있어서 매일 있어야 할 없어서는 살 수 없는 물건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소금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소금이 없으면 어떻게 우리 음식의 맛을 고르게 할 수 있으며, 소금이 없으면 어떻게 우리가 김장을 담을 수 있으며 소금이 없으면 어떻게 우리가 생선 같은 음식을 보존할 수 있으며, 소금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시실 제가 듣건대 우리 육체라고 하는 것은 이 혈액 속에 소금이 있어야지 사람의 몸에 소금이 없으면 맥이 없어져서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소금은 인간 생활에 있어서 매일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올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참된 구원을 얻은 참된 신자는 이 세상에서 이만큼 필요하다고 하는 뜻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꼭 있어야 할 필수품이올시다.
빛도 역시 그렇습니다. 빛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태양의 빛이 없으면 어떻게 이 지구 위에 사람들이 살 수 있습니까? 사람은 고사하고 어떻게 벌레가 살 수 있으며, 어떻게 날 짐승이 살 수 있으며, 어떻게 기는 짐승들이 살 수 있습니까? 햇빛이 없으면 어떻게 풀이 자라며, 어떻게 꽃이 피며, 어떻게 곡식이 장성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어떻게 나무가 꽃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빛이 없으면 금수 초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인생들까지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캄캄한 밤에 전등불이 없으면 작은 촛불이라도 켜야지 도무지 캄캄한 밤에 불 없이 어떻게 살수가 있겠습니까? 빛은 이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올시다. 마찬가지로 이 캄캄한 세상에 있어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을 얻은 사람은 이만큼 필요합니다. 필수품이올시다. 보배올시다. 지극한 보화입니다.
소금과 빛!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귀한 이름입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이렇게 생각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니 이것이 꼭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의 존재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야말로 이 사회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자중 자애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두려워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려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깊은 각오와 결심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중대한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소금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간단하게 생각하면 두 가지로 이 진리를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하나는 소금은 조미제(調味劑)로 씁니다. 맛이 있게 하는 데 사용합니다. 아무리 고량 진미와 산해 진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소금이 없다고 한다면 그 음식은 맛을 내지 못합니다. 소금이 들어가야 음식의 맛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도 철학이 있고, 문학이 있고, 과학이 있고, 예술이 있고, 모든 문화가 있다고 할지라도 여기에 소금과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으면 이 곳에 참된 행복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참된 평화와 참된 기쁨과 참된 감사의 생활을 알지도 못합니다.
어거스틴이 스스로 고백한 대로『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심령이 당신 안에 돌아와서 안정을 얻을 때까지는 안정을 얻을 수 없었나이다.』라는 말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참된 행복을 얻을 때까지는 이 세상의 무엇을 가지고도 탕자가 되지가 먹는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하는 이러한 생활이 무엇인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 불신자들의 생활이야말로 겉으로는 호화로운 것 같고 겉으로는 윤택한 것 같지마는 실지로는 무미하고 건조하고 참된 환희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시적 육체의 향락과 오락에 사는 것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소금과 같은 복음이 필요하고 복음으로 사는 참된 신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소금을 제일 중요하게 쓰는 것은 방부제(防腐劑)로 씁니다. 썩는 것을 막는 데 씁니다. 더욱이 우리 한국보다 더운 성지 유대 나라로 말하면 이 소금 없이는 음식을 보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어떤 나라에서나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썩는 것을 막습니다. 음식이 썩을 때에 소금으로 막는 것처럼 이 세상이 썩을 때에 막을 자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임종하게 될 때 그 때의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兵車)와 이스라엘의 마병(馬兵)이 되시는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짖으면서 통곡을 하였습니다. 어떤 국민이나 나라 혹은 문화가 망하게 되는 것은 외적의 침입이 있기 전에 먼저 안에서 그 사회가 도덕적으로 부패하므로 말미암아 결국은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0
의인 열 사람이 있었다면 소돔 성을 구할 수 있었겠다고 하는 말도 역시 이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썩는 것을 막습니다. 이 사회에 참 신자가 있는 것은 썩은 생선에 소금을 뿌린 것과 같습니다. 짠 소금이면 자연히 썩을 것을 막게 됩니다. 참된 신자의 은연(隱然)한 영적 도덕적 감화력이 이와 같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썩는 사회를 구하는데는 소금과 같은 참된 신자 아니고는 다른 데서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이 말씀을 하시면서 한 가지 경고의 구절을 더 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면『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어찌 다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쓸 데 없어 밖에 버려 사람의 밟힘이 되리라.』이와 같이 경고하셨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자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돈에 사는 어떤 장사하는 사람이 폭리를 얻기 위해서 구브로라고 하는 섬에 가서 많은 소금을 밀수해서 산 속에다 갑자기 곡간을 짓고 그 곡간에다 잘 저축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 목적은 소금 값이 오르게 될 때 내어 팔 목적으로 그렇게 비밀히 간직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급히 곡간을 지었기 때문에 잘 짓지 못하고 또 바닥에 마루도 깔지 않고 땅 위에다 그 소금을 많이 쌓아 두었더니 마침 그 골짜기가 대단히 습해서 그 소금이 다 녹아 버렸다고 합니다. 그 때 소금은 지금처럼 정제한 소금이 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잡것이 많이 섞였는데 그 잡것 섞인 것만 남고 실지 짠맛은 다 없어 졌다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이 장사꾼이 크게 실패하고 쓸데없어서 길밖에 버려서 길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되었다는 그런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쓸데없습니다.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접촉하면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는 사람의 감화력에 의지해서 믿지 않는 사람의 썩는 생활을 막든지, 그렇지 않으면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의 감화력을 받아서 함께 썩든지, 믿는 사람의 감화력으로 안 믿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로운 사람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안 믿는 사람의 감화를 받아서 함께 죄를 짓든지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슨 쓸데가 잇겠습니까. 밖에 버려서 사람의 밟힘밖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같은 좌라도 예수를 믿던 사람이 그 죄를 지으면 얼마나 사회에서도 희롱거리가 되고 모욕을 당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특별히 신문지사이에서도 더 떠듭니다. 맛 잃은 소금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한국 교회가 얼마나 많은 훼방을 받습니까? 소금이 되는 것은 좋습니다. 그렇지마는 맛을 잃을까 조심해야 도겠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은 갑자기 앓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잃어 갑니다. 혹은 기도가 게을러집니다. 혹은 주일날 예배당 출석이 게을러집니다. 혹은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점점 잘 하지 않습니다. 점점 세상과는 가까워지고 교회와는 멀어집니다. 마지막엔 맛을 잃고 맙니다. 맛을 잃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라고 예수 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그 다음 예수 님께서 너희는「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을 밝힙니다. 빛은 어두운 것을 헤칩니다. 방안에 불을 켜 놓으면 방안에 어둡던 것이 사라집니다. 쫓겨갑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신자가 한 사람 일어나게 되면 그를 통해서 복음의 빛이 발할 때 어두운 미신, 어두운 풍속, 어두운 사상, 어두운 습관, 어두운 생활이 점점 밝아집니다.
빛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고 빛나게 합니다. 아침 햇빛이 동방에 솟아 오르게되면 하늘이 빛나고 아름다워 집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빛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참된 신자가 있어서 복음의 빛을 발하게 되면 그 사람이 사는 사회는 풍속이 아름다워지고 생활이 아름다워지고 명랑하여 집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빛은 사실대로 나타냅니다. 흰 것은 희게 나타나고 검은 것은 검게 나타납니다. 먼지는 먼지대로 나타나고 쓰레기는 쓰레기로 나타냅니다. 바른 것은 바른 것으로 나타내고 찌그러진 것은 찌그러진 것으로 나타냅니다.
사람의 얼굴도 빛을 보면 반반한 얼굴은 반반하게 나타나고 얽은 얼굴은 얽은 얼굴로 나타납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나타나고 추한 것은 추하게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신자가 여기 있어서 복음의 빛을 비칠 때에는 의는 의로, 그러나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그러나 악은 악으로, 정결(淨潔)은 정결로, 그러나 불결은 불결로, 복음의 빛이 있으므로 검은 염소와 흰 면양이 갈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좋은 빛을 가지고, 촛불을 가지고 방안에 켜 놓았다가 그 위에다 말을 갔다가 덮어놓았습니다. 자, 덮어놓으면 그런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아마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불을 켜 놓은 목적은 방안을 밝히기 위해서 불을 켜 놓았는데 그걸 말로 덮어 씌워? 저런 정신나간 사람이 어디 있노―아마 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실제로 신앙 세계에 있어서는 자기의 빛을 말로 덮은 사람이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빛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빛을 나타내기를 부끄러워합니다. 마땅히 생명의 빛, 사랑의 빛을 나타내야 하겠건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진리의 빛을 깨달았건만 이것을 마땅히 말해야 할 때에 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산 위에 세운 성이 숨기우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신자를 이 세상에 둔 것은 산 위에 세운 성처럼 다른 사람이 다 바라보기 위해서 신자를 이 세상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를 사람 앞에서 아노라 하면 나도 이다음 하나님 앞에 가서 그를 아노라 할 것이오 나를 사람 앞에서 알지 못하노라 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 가서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예수 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비춰야 됩니다. 빛은 나타내야 됩니다. 아름다운 진리의 빛, 아름다운 생활의 빛을 나타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참으로 이 여덟 가지 축복을 받으면 나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온 사회, 온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서 그들도 같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一九六0년 二월 二十八일)

Ⅹ-27 제일 계명 (십계명 ①) (출애굽기 二十장 一-十七절)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 20·1-2)

마가복음 十一장 二十二절에는『하나님을 믿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十二장 六절에는『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하나니 대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 지니라.』
사도신경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하나님을 믿는 것은 신앙의 제 일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믿습니다. 그것은 다만 이론적 근거에 의지함이 아니고 성령의 감화에 의지해서 직각 적으로 알게 되는 까닭입니다.
서반아의 유명한 철학자 우나무노의 말과 같이『나는 내 친구를 믿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그의 사랑의 순결을 느끼고 그의 보이지 않는 만질 수 없는 손이 나를 이끌어 인도하고 붙들어 주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공통된 체험이올시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이니 만치 우리는 이따금 우리 신앙의 이론적 근거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특별히 현대는 무신론, 유물론적 사상이 세계적으로 팽배한 때입니다. 우리 남한에도 무신론적 실존주의, 인본주의를 교묘하게 소설로 혹은 영화를 통해서 선전하는 때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이론적 견지에서 하나님을 믿는가, 이런 문제는 종교 철학, 조직 신학의 부문에 속하지만 보통 믿는 사람들도 간단히 성경대로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로마서 一장 十九절에 보면『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이를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다음절에는『창세(創世)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저희 속에 곧 인간의 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 주셨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둘째는 만드신 만물 곧 대자연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 주셨다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먼저「저희 속에」곧 인간의 존재 속에 하나님을 어떻게 보여 주셨는지를 잠깐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인간의 도덕성 곧 양심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잘 기억하는 바와 같이 요한 복음 八장에는 예수 님께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와서 질문을 던진 이야기를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 님께 질문하기를 모세의 율법대로 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선생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하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곧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계셨고 그들은 속히 대답을 하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잠시 후에 예수 님은 조용히 머리를 드시고 그들을 향해서『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는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자에게 던져라.』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숙이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슨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그 동안에 하나씩 하나씩 그 성전 뜰에 모였던 이들이 그 곳을 떠나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내어쫓았습니까. 양심이올시다. 양심의 가책으로 그들은 그렇게 떠난 것입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하여 줍니다. 옳은 짓을 하여라, 옳지 않은 것은 하지 말라고 명령까지 합니다. 또는 어떤 것은 우리에게 잘했다, 어떤 것은 잘하지 못했다고 책망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이 음성은 우리 자신에게 들려 오는데 이 음성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누가 이 말을 합니까,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양심을 통하여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유명한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습니까.『하늘에 별이 있고 인간의 속에는 도덕적 뜻이 있고 양심이 있다.』 이 양심의 명령은 지상 명령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철학적 합리적 이론으로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 확실히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이 실제적 도덕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음성을 거부할 수 없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양심은 첫째로 하나님의 계시오, 둘째로 이 하나님은 도덕적 하나님 곧 공의의 하나님인 것을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또한 둘째로 우리 인간의 속에 어떤 면이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어디를 가나 종교가 있습니다. 다만 짐승의 세계에서만 종교가 없습니다. 중앙 아메리카에 유명한 잉카 문명이 있었습니다. 잉카 문명을 연구하여 보아도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들은 굉장히 큰절을 지었던 것입니다. 문명과 야만의 정도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마는 인간 사회에는 종교가 있습니다.
어떤 인류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인간은 불치병 적으로 종교적이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인간에게는 종교적 본능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험할 때에 부르짖습니다. 누구에게 부르짖습니까? 우리 인간의 깊은 속에는 영원에 대한 관념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인간은 영생에 대한 깊은 동정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디서 왔습니까? 인간에게는 영적인 기갈이 있습니다.
여러분, 짐승은 그저 잘 먹고 누울 자리만 있으면 거기에서 최대의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의식주가 넉넉하다고 할 지라도 거기에서 최대의 만족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여기 유물론자들은 그저 경제 문제만 해결하면 인간에게는 최대의 행복이 있으리라고 선전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역사를 보세요.
석가여래가 의식주가 부족해서 호화로운 궁중에서 뛰어나와 고행을 했습니까. 성 프랜시스가 큰 부자의 아들로서 평안히 살수가 있었는데 왜 집을 뛰쳐나와 고행을 했습니까. 젊은 톨스토이는 유명한 문학가요 귀족의 아들로서 의식주에 아무런 부족이 없었는데 왜 영적인 고민을 느껴야 했습니까.
여러분, 인간에게는 이 종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만족이 없으면 최대의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인간의 본능에는 그 본능을 만족시켜 줄만한 대상이 꼭 있습니다. 어린 아기가 모태에서 나와서 입을 벌리고 웁니다. 젖 빠는 본능이 아기에게는 있습니다. 왜 입을 벌립니까. 어머니의 젖꼭지가 기다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식욕이 있으면 식욕을 만족시킬 만한 음식물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성욕이 있으면 성욕을 만족시킬 만한 성의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본능에는 대상이 있는데 이 종교적 본능에 대해서만 대상이 없을 것입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계십니다. 왜 풀이 위를 향하여 자라납니까? 태양이 있는 까닭입니다. 밀물이 왜 올라옵니까? 달이 있는 까닭입니다.
플라톤은 일찍이 말하기를「무신론은 영적 질병」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신론자는 사실 영적 환자입니다. 병들게 되면 식욕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여러분, 하나님의 존재를 그 만드신 만물에서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물론 길게 생각할 수도 있고 깊이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평범한 것 두 가지만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소위 우주론적 논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과의 법칙에 의지한 논증입니다. 누구나 다 인과의 법칙을 믿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부인할 이가 어디 있습니까. 자연 과학도 이 법칙 위에서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습니다. 우주는 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원인이 있습니다. 이 제일 원인은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음으로 우주가 있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처음 움직이신 이가 반드시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엄숙한 선언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부인하려고 하면 우주가 영원하다고 주장할 수밖에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과학적으로도 사실이 아닙니다. 우주학적으로도 사실이 아닙니다. 우주학적으로도 지구나 천체가 영원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역사적 시기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구의 연령을 추측해 보지 않습니까. 지구의연령은 대략 三十三억 五천만년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우주의 연령은 약 一백억 년으로 추정을 하는 것입니다.
지질학적으로 생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생물이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간도 영원히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三장 四절의 말씀과 같이『집마다 반드시 세운 자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의심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신의 배후에도 원인이 있겠다― 는 이론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 천만입니다. 만일 우주의 배후에 무엇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역시 신일 것입니다. 만일 신의 배후에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역시 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은 무한 절대인 까닭입니다.
수학을 공부해 본 사람은 소위「무한대의 관념」을 알 것입니다. 하나를 하나로 제하면 그것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를 영으로 제하면 그것은 무한대라고 합니다. 이 무한대는 하나를 영으로 제하나, 백을 영으로 제하나, 천을 영으로 제하나 마찬가지입니다. 무한대는 언제나 무한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절대의 무한대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주를 생각할 때에 흔히 이런 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적론적 논거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질서와 고안을 볼 때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우주는 일정한 목적에 의해서 고안된 것은 분명합니다. 천체에는 조직과 질서가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태양계나 북극계나 가만히 살펴보면 꼭 이렇게 조직이 되었습니다. 유성들이 자전을 하면서 공전을 합니다. 우리 지구도 유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정한 궤도를 일정한 속도에 의지해서 돌고 있는 것입니다.
천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질 자체도 그렇습니다. 물질을 분자로 분석합니다. 분자는 또 원자로 분석합니다. 또 원자를 쪼개어 보면 그 가운데는 전자가 있어서 말하자면 작은 원자 가운데도 우주와 같이 핵을 중심으로 해서 뱅뱅 도는 양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자연계에서도 우리는 고안과 조직을 발견합니다. 꽃 한 송이가 있으면 거기에 나비가 날아옵니다. 왜 꽃이 있는 곳에 나비가 날아옵니까. 꽃 속에 꿀이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면 꽃은 거저 나비에게 꿀만 제공합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꿀을 제공하는 대신에 나비가 펄펄 날아다니면서 그 웅(雄)에의 꽃가루를 자(雌)에의 꽃술에 섞어 주어서 꽃이 열매를 맺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꽃과 나비는 서로 협동하여 살도록 만들어진 것이 자연계입니다.
동물과 식물도 역시 그렇습니다. 식물의 잉여가 동물의 먹을 것이 됩니다 동물의 배설물이 또는 동물이 내어주는 탄산가스는 식물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물이 어떻게 순환하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물은 수증기가 되어서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그것이 찬바람을 만나서 비가 되면 다시 땅으로 내려옵니다. 강이 되어서 내려갑니다. 마지막에는 바닷물이 되기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러는 동안에 비가 가늘게 내려서 공기를 맑게 해 줍니다. 가는 비가 내려서 모든 풀과 곡식이 잘 자라고 열매를 맺게 만듭니다. 이 비가 사방에 다 내려서는 산도 깨끗이 씻어주고 모든 것을 씻어 줍니다. 이렇게 더러운 모든 것을 강물이 씻어서 바다로 가져가는데 바닷물을 여러분이 다 맛보셨죠? 아주 짭니다. 왜 바닷물이 짠지 아십니까? 그래야 더러운 것이 소독이 됩니다. 다음에는 바닷물이 다시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올라가서 이 지구를 돕니다. 순환을 합니다.
이렇게 고안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자연계를 만드신 후에 더럽게 내어버려 두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깨끗이 씻는 제도를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 고안은 고안한 자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고안한 자가 반드시 있어요. 우주의 고안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하면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우연히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무슨 이론과 같은가 하면 돌과 나무와 기와를 그저 내어 던졌더니 이 예배당이 거저 지어졌다는 이론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성이 있는 인간으로서는 이런 미련한 이야기를 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우주에 대해서는 이런 미련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기억하세요. 시편 十九편 一절의 말씀과 같이『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穹蒼)은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양심의 하나님이올시다. 사랑의 하나님이올시다. 다 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올시다. 이 하나님이 인간도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스스로 속지 마세요.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여러 가지 죄가 많지만 그 중에 제일 큰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신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순천 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順天者興 逆天者亡)고 옛날 성현들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십니다. 신령한 눈이 어둡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히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인간의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만드신 만물에서 또한 하나님의 계심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핑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열 가지 계명 가운데서 첫째 계명은 우리 신앙의 제 일조입니다.
우리는 이 신앙을 굳게 지켜서 내 스스로가 구원을 받고 이 신앙을 전파해서 민족과 동포의 심령을 구원할 것입니다. (一九六七년 一월 八일)

Ⅹ-28 제이 계명 (십계명 ②) (출애굽기 二十장 四-六절, 요한복음 四장 二十四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 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이 시간은 십계명 가운데 제 이 계명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 십 계명을 분할하는 방법에 관해서 교파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 좋겠습니다.
천주교와 루터 교에서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합하고, 열째 계명을 둘로 나누어서 열 계명을 만듭니다. 그 열째 계명 첫째를 아홉째의 이웃을 탐내지 말라는 것으로 하고, 열째를 그 아래 것으로 합니다.
옛날 어거스틴도 이전 방법으로 열 가지 계명을 나누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 교회 곧 장로교회와 헬라교회는 우리가 지금 나눈 것과 같이 나눕니다. 이것은 옛날의 학자 오래곤, 유대교의 학자 조세포스나 화일로 같은 분들도 다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은 첫째계명과 둘째 계명의 내용이 같지 않습니다. 첫 계명에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너희 앞에 있게 하지 말라― 곧 다신론에 관한 교훈입니다. 즉 한 하나님만 사랑하고 공경하고, 섬기라고 하는 것이 첫째 계명의 중요한 교훈입니다.
이 둘째 계명은 근본적으로 우상 숭배에 대한 교훈입니다. 문제는 이 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겠느냐, 예배의 양식은 어떠하여야 하겠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되 다른 백성처럼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둘째 계명을 읽어보면『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곳에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계속해서『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째 계명은 예배의 방법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제 이 계명을 세 가지 방면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첫째는 이 계명이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배에 대해서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는 이 계명이 가르치는 적극적인 교훈이 무엇인가.
셋째는 이 교훈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무슨 경고를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이 계명이 예배하는 이들에게 특별히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종교적 예술,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조각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을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도 구리 뱀을 만들어서 높은 장대 끝에 매어 달아 그것을 보고 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을 보고하여 낫게 한 것입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지은 기사를 읽어보면 여러 가지 화초와 열매와 사자 같은 그림으로 성전을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또 지성소 안에도 날개 있는 그룹을 만들어서 법궤(法櫃)위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이 모든 종교적 예술을 금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이 종교적 예술을 예배할 때에 사용하는 것을 금한 것도 아닙니다. 성전에서도 예배할 때에 이런 모든 예술품을 그대로 두고서 예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둘째 계명이 사실상 금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신령한 하나님을 물질적 형상으로 만드는 것을 금지한 것입니다. 가령, 아론이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있는 중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무슨 뜻으로 만들었습니까. 곧 여호와라고, 여호와를 금송아지로 만든 것입니다. 여로보암 왕이 따로 사마리아에서 나라를 세워 놓고 역시 벧엘과 단이란 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여호와라고 섬긴 것입니다.
이 계명은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시청각 교육이라고 해서 굉장히들 힘을 씁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모든 백성들은 신을 섬기는데 보이는 신을 섬겼습니다. 곧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분명히 가르쳐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을 물질적 형상으로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오해하여 인간은 여러 가지 미신에 타락합니다.
여러보암 왕 때에 하나님을 송아지로 만들어 섬기게 되니 그 후에는 바알 우상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우상을 겸하여 섬기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 계명과 아울러 생각할 것은 종교적 예술이나 상징을 사용할 때에 매우 주의해야 할 점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화나 성상이나 십자가를 가정이나 교회 안에도 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상화되면 안 됩니다. 성화나 성상 앞에서 절을 하거나 여기에다 기도를 하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현대까지도 어떤 교회에서는 이런 일들을 합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화나 성상이나 십자가를 향해서 기도를 드린다면 이는 분명히 제二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째로 이 계명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이는 예수 님께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는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형상이 없습니다. 만질 수 없습니다. 볼 수도 없습니다.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 이가 없다―고 요한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소 부재(無所不在)하십니다. 아시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존재이시므로 하나님을 어떤 물질적 형상으로 표시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이는 곧 신령으로만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중심으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예배당 안에 다 들어와 앉았지만 마음으로는 예배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설교는 듣지만 실상은 예배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영과 진정으로, 진리로, 참으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말로 경고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지마는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지마는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 떠났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또한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은 진리올시다.『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통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중생하지 않으면 사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지 못하며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도 주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도 주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진리의 예배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이것도 예수 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신 것이올시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구약 시대에는 양과 소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오신 이후에는 예배의 양식이 아주 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몸으로 산 제사를 들리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더욱 거룩한 생활, 매일의 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할 때에도 참으로 영적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듣고 설교를 들으며 또 헌금을 하고 성례를 거행해서 진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최고의 의무는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예배가 있기에 인간이 짐승과 다릅니다. 이 예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매일 드릴 개인의 예배가 있습니다. 가정의 예배가 있습니다. 매 주일 드릴 교회의 예배가 있습니다. 이 모든 예배를 우리는 신령과 진리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이 계명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계의 말씀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의 계명을 읽어보면『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이란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 사실은 비슷하나 뜻이 다른 두 말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기, 또 하나는 질투란 말입니다. 시기는 엔비(Envy)라고 영어로 말하고 질투는 젤러시(Jealousy)란 말을 씁니다. 여기 시기는 승기자염(勝己者廉)이라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시기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사랑의 단일성의 표현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부부의 사랑은 단일한데 다른 어떤 대상이 그 속에 들어오게 되면 질투의 감정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번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며 교회는 신부라고. 우리 믿는 사람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는 다른 무엇이 끼울 수는 없습니다. 우상이 용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오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여기의 뜻은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종교적 대상, 곧 세상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가령 우리가 하나님보다도 돈을 더 사랑하면 그 돈이 곧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보다도 어떤 권력을 더 사랑하게 되면 그 권력이 우상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은 우리 신앙 생활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을 더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십니다.
왜?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갑 되 삼사 대까지 하겠다. 이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인간은 피차에 연결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횡적으로도 연결이 되었습니다. 종적으로도 연결이 되었습니다. 조상과 우리와도 지난 세대와 우리와도 다 연결이 되었습니다. 이 인류의 연대성이란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나 혼자에게만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사회에 악한 영향을 끼칩니다. 왜냐하면 횡적으로 연결된 사회에 사는 까닭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후손에게도 악한 영향을 끼칩니다. 종적으로도 연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죽으나 악은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악은 살아 있습니다. 이렇게 한 세대가 심고 다른 세대가 거둡니다.
가라 지를 심고 가는 이가 많으면 다른 시대에 많은 가라 지를 거둡니다. 유전의 법칙, 한 가문의 족보, 세계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 보세요. 아버지 죄가 三, 四 대까지 이른다고 하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내 죄로 말미암아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 영향을 받게 되는 까닭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선도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순종하는 이에게는 수천 대까지 복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이것도 사실입니다.
선도 횡적으로도 연결되고 종적으로도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는 사실은 꼭 역사적으로 나타납니다.
요나단 에드워드의 족보를 연구한 이들, 또는 당시의 쭉스란 나쁜 이의 족보를 연구한 이들은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거 해 줍니다. 스스로 속지 맙시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좋은 것으로 심으면 좋은 열매를 거둡니다. 내 후대에라도 반드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八장 十二절을 읽어보면 거기에 에스겔이 본 환상 가운데 담에 큰 구멍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담의 구멍을 좀더 넓게 헐고 보니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을 열어 보니 큰방이 하나 있습니다. 방안을 보니 사면에 온갖 곤충들과 짐승들과 우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고 당시의 지도자 七十여 명이 그 앞에서, 이런 우상 앞에서 분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다른 사람에게는 겉으로 보였으나 실상은 그 속에 다른 우상을 섬긴 사실을 보여 준 환상입니다.
이 사람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겼지만 속으로 우상을 섬겼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 자신만이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자손들과 모든 후대의 사람들까지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나왔지만 교회에 더러 출석을 하였지만 사실로 하나님을 섬겼는가.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는가를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사람은 혹 속일 수가 있습니다. 자신도 혹 속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여러분,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우상은 없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습니까. 만일 있다고 한다면 이 시간 우상을 깨뜨려 버리세요.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예배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 드리십시다.
(一九六七년 一월 十五일)

Ⅹ-29 제삼 계명 (십계명 ③) (마태복음 六장 五-十五절)

『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첫째 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있게 말 찌니라. 이것은 일신론(一神論)에 대한 계명이올시다. 제二계명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계명이올시다. 제三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계명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가질 자세는 경외의 자세인 것입니다.
현대인은 이름을 지을 때에 별로 그 뜻을 생각지 않는 것 같습니다. 흔히 항렬을 따라서 이름을 짓곤 합니다.
그러나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달랐습니다. 이름마다 반드시 뜻이 있었습니다. 가령, 아브라함 하면「큰 이버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삭은「웃는다」는 뜻입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고친 것은 그 뜻이「승리자」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몬의 이름을 고쳐 베드로라고 한 것은「반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 님의 이름도 뜻이 있습니다.『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이는 그 백성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기슭에서 자기를 여호와로 나타내실 때에 뜻이 있었습니다. 그 뜻은 「영원 자존자(自存者)」였습니다. 옛날에 있어서 이름은 본인을 대표할 뿐더러 그의 성품과 생활 전부를 이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요리문답 제五十四문에『셋째 계명의 명하는 것이 무엇이뇨?』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제 삼 계명의 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와 속성과 규례(規例)와 말씀과 행사를 거룩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간략한 셋째 계명의 뜻입니다. 이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산상보훈에서 예수 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실 때에『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하였습니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제일 먼저 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달라고 할 것입니다. 성경은 교훈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처음으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곳에 경외가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경험 가운데도 그가 여리고성 가까이 했을 때에 길가에서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났다는데 그 때에 하시는 말씀이『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발의 신을 벗어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는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공경하는 마음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四장 四절에는『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 찌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찌어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 모든 거민(居民)은 그를 경외할 찌어다.』(시 三十五·八)『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嚴威)하시오며 둘러있는 모든 지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심이라.』(시 八十九·七)
우리가 제 삼 계명을 바로 지키려고 하면 명심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항상 존경해서 경하게 사용하지 말 것입니다.
거룩하신 이름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한국에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그러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존경할 것이겠습니까?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감히 읽을 수가 없어서 항상「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다만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백성을 위해 기도할 때에만「여호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현재도 이렇게 할 것은 아니나 그 정신만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서양인들 중에 이야기하다가 성나는 일이 있으면 공연히 아무 뜻 없이 하나님의 이름이나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그런 풍속이 없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헛되이 불러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거룩한 이름을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옛 사람들이 맹세할 때에는 흔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자기의 진실을 표현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너무 흔해서 예수 님께서는 맹세치 말라고 했습니다. 하늘로도 맹세치 말고 땅으로도 말고 네 머리로도 맹세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면 예 아니면 아니 요라고 하라.』하였습니다.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신약시대에 와서도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약속하는 일은 있습니다. 가령 목사나 장로 집사가 안수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약속합니다. 결혼식 할 때에 신랑 신부가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약속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약속은 꼭 지켜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 뿐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경외의 자세로 대하라는 교훈입니다. 가령 예배하는 이 집을 성전이라 할 때 그것은 이 집이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아래 있는 집입니다. 전도서 五장에『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 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愚昧者)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고 했고 하박국 二장 二十절에는『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찌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전에 들어설 때에 우리의 발을 삼가 합니까? 예배당에 늦게 들어오면서도 거리에서처럼 발을 쾅쾅하면서 걷는 이는 없습니까? 예배당에서 말을 삼가 합니까? 예배당에서 거리에 앉은 것처럼 떠드는 이는 없습니까? 우리는 가정에서 아이들을 지도할 때에도 경외하는 태도를 갖도록 지도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구내와 성전 안은 항상 깨끗하고 정돈되어야 합니다. 함부로 종이조각을 버리지 맙시다. 하물며 주보를 내어 던져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속한 모든 것에 우리는 경외의 자세를 가지고 대할 것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집입니다. 찬송도 경외의 태도로 불러야 합니다. 찬송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따금 듣는 대로는 어떤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한편에서는 설교하고 다름 한편에서는 찬송을 벼락 같이 불러서 설교를 방해한다고 합니다. 찬송을 싸우는 도구로 사용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입술은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학생 시절에 대동강 둑에 나가보니 젊은 청년들이 만취하여 부르는 노래가 찬송인 것을 들었습니다. 타락한 청년들의 소행임이 분명했습니다. 기도도 경외의 태도로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자세에 있어서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혹은 서서 혹은 앉아서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언제나 경외의 태도가 따라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기지개를 하면서 기도하는 이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언제든지 진실이 없이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은 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에 경외가 따라야 합니다.
헌금에도 경외가 따라야 합니다.『성물(聖物)을 더럽히지 말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민 十八·三十二) 성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의미합니다. 말라기 一장 十三절에 보면『만 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煩弊)스러운고 하며 코웃음을 하고 토색(討索)한 물건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 같이 헌물(獻物)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안 받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옛 사람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때에는 소나 양을 드리되 흠 없고 깨끗한 놈을 골라서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 사람들은 타락해서 병든 짐승 등을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실 리 만무했습니다.
우리는 헌금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데 얼마마한 경외를 갖고 드립니까. 미안한 말씀이지만 얼마 전 어떤 수금 집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그저 헌금 주머니 열어 보면 지금도 십 원 짜리 가 가득합니다.』(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헌금은 내 생활의 형편에 따라 정성을 다 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그런데 이 십 원 짜리 가운데 보면 노닥노닥 다 해어지고 꼬기 꼬기 꾸겨진 것이 너무 많아서 이것을 하나하나 펴서 넣느라고 시간이 많이 걸려 큰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헌금은 누구에게 드립니까? 만 왕의 왕 되신 하나님의 손에 가져다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축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드리는 것이 헌금이올시다.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얼마마한 정성으로 헌금을 드립니까? 헌금을 갖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대부분이 찬송과 성경을 가지고 오신 줄 압니다. 이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올시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성경 속에 여러 번 기록되었습니다. 이 책을 소중히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약 二년 전에 편지를 받았는데 어떤 청년이 분개해서 제게 보낸 것입니다. 편지가 아주 두툼해요. 그래서 열어 보니까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목사님, 동봉해 보내는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어떤 친구와 함께 산으로 놀러 가기 위해서 과자 한 봉지를 사 갖고 가서 뜯어먹다가 그 친구가 과자 봉지를 자세히 보더니 이거 성경책이로구나. 어떤 사람이 성경책 팔아서 과자 봉지로 만들었군.』하고 말한 때 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듯 했습니다.
성경이나 신문이나 잡지나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인쇄된 것이므로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경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한 가지 더 분명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인이라고 말합니다.「크리스천」그리스도 인이란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는 예수 님의 칭호올시다. 예수 님의 이름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겐 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님의 거룩한 이름을 우리 등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내 자신에 대해 경외(敬畏)히 여김이 필요합니다.
영어에 self-respect 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존경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내 자신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부름을 받는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산 그리스도에 속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는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귀중한 자신을 죄로 향하게 할 수 없습니다. 더럽힐 수 없습니다.
내 자신만 더럽힐 뿐만 아니라 거룩한 주님의 이름까지도 더럽히게 하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에스겔 三十六장 二十三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열국(列國)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거룩하게 할지라.』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열국 가운데 살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많이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힘을 입었습니다.
오늘날은 이런 일이 없습니까? 오늘날 이 시대, 이 사회 가운데서 예수 님의 이름으로 불리 우는 그 거룩한, 존경해야 될 만한 그 자신을 갖고 바로 처신하지 못하고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는 없습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나의 사교 생활을 조심해야 합니다. 직장 생활에도 조심해야 합니다. 장사 생활에도 조심해야 합니다.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잘못 하면 하나님의 이름, 우리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시면서 마지막으로 첨가한 경고의 말씀을 들어봅시다.『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니 아니하리라.』『면죄하지 아니하리라.』무슨 말인가 하면 자기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반드시 형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二장 二절에는『만 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 복을 저주하리라.』신명기 二十八장 五十八절에는『네가 이 율법에서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재앙과 너희 자손의 재앙을 극멸하게 하시리라.』고 경고했습니다.
레위기 二十四장을 보면 아버지는 애굽 사람이요 어머니인 젊은 사람이 누구와 싸움을 하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했습니다. 그 때에 그 사람을 돌로 쳐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레위기 二十四장 十六절에는『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는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모세의 율법이요 또한 우리가 지금 이대로 실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면 형벌이 따라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몇 가지 기억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으로 어디나 계시고 무엇이나 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못 보나 하나님은 다 보십니다.
또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올시다.『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라고 하는 말은 죄를 벌한다는 뜻입니다. 빛의 하나님이올시다. 그에겐 어두움이 없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가서 예배하다가 이와 같은 하나님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스랍 들의 찬송을 들었습니다. 이 찬송을 들을 때에 이사야는 화로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이 때에 제단으로부터 숯불이 스랍의 손을 통하여 왔습니다. 그리하여 입술을 지지고 죄 사함을 받은 기록을 우리는 읽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직면하게 될 때에 우리는 다 이사야와 같이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그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사함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실이 깨끗하게 될 때에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一九六七년 一월 十二일)

Ⅹ-30 제사 계명 (십계명 ④) (마태복음 十二장 九-二十一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 히 지켜라.』(출 20·8)

우리의 시간 중 七분의 一을 성별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안식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물질은 十분의 一을 드리라는 원리를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간에 대해서도 七분의 一을 드리라고 하는 원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읽을 때 감사함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안식의 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즐겁게 안식할 날을 주셨던 것입니다. 七일 중 하루는 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피곤한 세계 인류에게 이와 같이 안식일을 준 종교입니다. 유교에 이런 계명이 없습니다. 불교에도 이런 계명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독교에만 있고 기독교의 감화를 통해서 이제는 전 세계에 이와 같은 안식의 축복이 미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기독교는 안식의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심신은 때때로 안식을 필요로 합니다. 쉬는 가운데 피로가 회복이 됩니다. 병도 낫습니다. 새로운 정력이 축적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면서 일하는 이들이 실상은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입니다. 또 모든 일을 바로 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의 내용을 보면 주일만 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과 딸에게도 안식을 주라고 하셨고 또 자녀에게만 안식을 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남종이나 여종들 지금의 말로 표현하면 너희 집에서 일하는 점원이나 직공이나 식모나 그 밖에 모든 고용된 사람들에게도 안식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 에 있는 짐승들까지도 안식을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크신 긍휼(矜恤)과 자비를 육축(六畜)에까지 베풀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식일은 심령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육신 생활을 위해서 엿새 동안 힘써서 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육신 생활로 인해서 우리의 심령이 침몰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신령한 세계를 앙모하는 날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은 전기가 있어서 그것으로 하지만 옛날 전기가 없을 때에는 탄광에서 석탄을 캐낼 때에 흔히 노새를 사용했습니다. 그건 노새가 흔한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새를 부릴 때에도 한 주일의 하루를 바깥에 매어두고 쉬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안 하고 계속해서 어두운 가운데서 노새를 부려보니 눈이 어두워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도 눈이 어두워지지 않기 위해서는 안식일이 필요하고 푸른 하늘 위를 바라보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과 접속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안식일을 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四 계명을 생각하면서 꼭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안식일은 어느 날에 지켜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 하면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요리 문답 五十九문에 있습니다. 세상의 시초부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七일 중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명하셨고 (이레 중 일곱째 날은 토요일입니다.) 그 후로부터 세상 끝날 때까지는 七일 중 첫 날로 명 하셨나니 그 첫 날은 일요일 곧 주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七일 중 첫째 날인 일요일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구약 전체의 제일 큰 일은 천지 창조의 일입니다. 인간까지 합쳐 이 우주의 창조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구약 시대에 있어서는 천지 창조를 엿새 동안에 다 마치시고 이래 중 마지막 날을 안식일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가장 큰 일은 무엇입니까? 죄악 가운데 빠졌던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는 일입니다. 이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 구속의 사업을 어느 날에 마쳤습니까? 예수 님이 부활하신 날에 마쳤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구속 사업을 다 마치신 그날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 시대에는 토요일을 지키지만 신약의 은혜의 시대에 와서는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지킴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을「주의 날」곧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 신약 시대에 와서는 특별히 이날을 축복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부활하시고 열 한 제자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실 때에도 이 七일 중 첫 날에 꼭 나타나셨습니다. 성령을 이래 중 첫 날인 오순절 날에 보내 주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보면 이래 중 첫 날에 예배하러 모였든 것이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二十장 七절을 보면『안식 후 첫 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모였더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안식 후 첫 날이란 말은 일요일 곧 주일이올시다. 고린도 전서 十六장 二절에는『매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란 글귀가 있습니다.
매주일 첫 날은 일요일 곧 주일입니다. 그 때에 모여서 예배도 하고 헌금도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계시록 一장 一절을 보면 사도 요한 이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계시를 받고 계시록을 쓰게 되었습니다. 칠일 중 첫 날은 그리스도 내지 그리스도인 들의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요리 문답 六十문에 세 가지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첫째는『다른 날에 합당한 여러 가지 세상 알과 오락까지 중단하고 모든 세상일은 쉬는 날입니다.』둘째는 『그 시간을 공사예배에 사용할 것입니다.』 쉰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노는 날이 아닙니다. 공적 예배 또 사사로이 예배하는 날입니다.
셋째는『사세 부득이한 일이나 선한 사업에 사용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마태복음 十二장을 읽었지만 이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그 때 유대 사람들과 주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 님의 제자가 밀 이삭을 비벼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비난이 타인의 것을 먹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 배고플 때 먹는 것은 모세의 율법도 허락했습니다. 비난의 참 이유는 비빈다는 그 자체가 곧 타작하는 일이라 하는데 있었습니다. 예수 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것이 일이라고 예수 님을 비난했습니다. 안식일을 범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 님께서는 분명히 인자는「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안식일은 예수 님의 뜻대로 지켜야 합니다. 예수 님의 해석대로 받아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잇는 것이 아니니 안식일을 사람에게 유익하게 지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안식일이 쉬는 날이지만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그것을 들어내지 않겠느냐, 이런 것을 부득이 한 일이니 괜찮다고 했습니다. 즉 선한 일, 복음을 전파하는 일, 병 고쳐 주는 일, 다른 사람을 돕는 그런 일은 해도 괜찮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천 년을 지낸 오늘날에 와서는 여러 사회 형세가 변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도로 발전된 과학 문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 처에서 공장이 돌아가는 산업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여야 오늘날 이 상황 속에서 안식일을 바로 지킬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원칙은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는 내 스스로 신앙의 양심과 성령의 지도에 따라 작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없는 것은 이 원칙에 의지해서 그때 그때의 경우를 따라서 작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런 문제는 자연히 사람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꼭 같이 이날을 지키지 않는다고 옛날 바리새 사람처럼 비난을 하거나 정죄(定罪)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양심과 같이 다른 사람의 양심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기억할 것은 이 하루는 하나님을 위해서, 내 심령을 위해서, 봉사를 위해서 살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주의 날을 마귀의 날로 삼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죄를 짓는 날로 삼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이 날을 안 믿는 사람처럼 공일로 삼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날을 공일이라 불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일이올시다. 안 믿는 사람들은 공일이라고 해서 행사도 하고 놀기도 하고 별에 별 일을 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기에 추종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기 특별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분주한 가운데 안식일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구경 가느라고 잊어버릴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공부하느라고 잊어버릴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아무리 분주해도 이 날을 기억하여 바로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 벽에 걸어놓은 시계는 한 주일에 한 번씩 꼭 틀어 주어야 시간이 맞습니다. 우리의 심령 생활도 매주일 한 주씩은 온전히 구별해서 지킬 줄 알아야 새로운 힘을 얻어서 인생 길을 바로 걸어 갈 수 있습니다.
주일은 마치 메마른 광야 길 같은 인생 행로에 잇는 오아시스와 같은 것입니다. 샘물과 같습니다. 매주일 생명수를 마셔야 우리의 생명이 삽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안식일의 복락(福樂)은 이 다음 하늘 나라에 가서 영원히 누릴 하늘의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이 중요합니다. 이 날을 성별해서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육신에 관한 일을 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불쌍한 이들을 돕는 봉사가 제四 계명의 정신이올시다.
지금도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것을 성경에서 읽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선한 일을 할 것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 믿는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일 한 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께서도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一월 마지막 날은「나병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一九五四년부터 불란서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구미 각국에서도 세계 나병의 날로 정하고 이 날은 여러 가지 행사도 있고 특별히 나환자를 돕는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 한국은 올해부터 이 날을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 님께서 얼마나 나환자를 불쌍히 여기셨는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문둥병자가 예수 님을 찾아 와서 꿇어 엎드려 간절히 빕니다.『주님이시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 캐 하실 수 있겠습니다.』예수 님께서 나환자에게 손을 내미시면서『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문둥이를 만져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는 자진해서 손을 내밀어 만져주고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잇길로 지나가실 때에 문둥이 열 사람이 감히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멀리서『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 님은 그 열 사람 모두를 고쳐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볼 것 같으면 예수 님의 이 정신을 계승하여 언제든지 우리 주를 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나환자를 불쌍히 여겼고 이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수고를 많이 하였습니다.
제가 청년 시대에 성 프랜시스 전기를 보고 놀란 것은 이 프랜시스가 온전히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길을 걸어가다가 한 문둥병자가 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자기 옷을 벗어 그 문둥병 자에게 주고 그 문둥병자가 입었던 옷을 자기가 바꿔 입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성 프란시스는 전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문둥병 자를 치료해 주는데 많은 시간을 바쳤습니다.
근대에 와서도 성 다미엔은 하와이 몰로카이란 섬에 가서 문둥병 자를 위하여 봉사하고 전도하다가 자기까지 문둥병자가 되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을 위하여 병원을 먼저 설립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들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정부가 이런 일을 착안하기 전에 먼저 나병자를 위하여 병원을 설립한 것이 선교사들입니다. 대구에도, 전주에도, 여수에도 나병자를 위하여 병원을 설립한 것은 선교사들입니다. 유명한 순교자 손 양원 목사 같은 이도 일생토록 여수 나병원에서 봉사도 하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우리 장로교회에서 세 사람의 선교사를 태국에 보냈는데 두 사람은 목사고 한 사람은 의사입니다. 의사 송 예근 박사는 방금 태국 챔마이라는 곳에 있는, 태국에서 제일 큰 나병원에서 천여 명이나 되는 나병자들을 고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에는 나병환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통계에 의하면 약 八만 명이 된다고 합니다. 큰일입니다. 그 가운데 국립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이가 八천 五백 명, 기독교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이가 一천 八백 명, 자기 집에서 치료받고 있는 이가 一만 四천 七백 명, 치료받고 나은 음성환자가 정착해 있는 곳이 六十五개소인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약 一천 명, 이렇게 해서 八만 명 중 三만 五천 명은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四만 五천 명은 아직까지 치료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이들 가운데 주를 믿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잘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록도에 가보아도 그렇고, 병원에 가 보아도 그들의 진실 된 신앙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병원 조사는 없으나 정착자 일만 명 중 기독교인이 八천 七백 五十명이라고 합니다. 또 그 중에서도 장로교인이 제일 많습니다. 五천 六백 명입니다. 세계의 나환자 수는 一천 一백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시아가 가장 많습니다. 六백 五十만 명입니다.
여러분, 이 나병환자에 대해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은 나병도 치료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약들이 많이 발견되어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병은 불치의 병도 아닙니다. 나병은 유전도 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재래로 나병과 나병환자를 두려워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관념을 온전히 버려야 되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병환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유를 충분히 받으며 다른 질병 환자와 똑같이 치료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정부도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특히 이들을 위해 조직된 대한나병협회는 이들에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피얼스 박사도 기독교 선명회를 통해 고아만 도와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병자를 치료해 주는 병원만 세운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나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서울에 따로 병원을 세웠습니다.
어떻든지 이「세계 나병의 날」을 당해서 비록 우리가 이 날에 대해 관심이 부족했더라도 앞으로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들을 도와주고 어떻든 이들도 다른 동포와 똑같이 살 수 있도록 육신과 영혼을 구원해 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데 한 가지 요구되는 방법은 대한나병협회에 많이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돕는데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이것이 넷째 계명입니다. 이날을 성별 하여 모든 세상일을 쉬고 하나님께 예배를 정성껏 드립시다. 그리고 모든 불쌍한 이들을 돕도록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一九六七년 一월 二十九일)

Ⅹ-31 제 오 계명 (십계명 ⑤) (에베소서 六장 一-四절, 十-二十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오늘은 총회 적으로「청년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아마 이 계명이 청년들에게 적절할까 해서 제五 계명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요사이 신문을 보면 우리 이웃에 있는 중공에서는「문화 혁명」이란 이름 밑에서 청소년들을 모아 홍위대(紅衛隊)를 조직하여 도처에서 난동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몇 주일 전에 신문을 보니 산둥성에 수천 년 동안 보존되어 온 공자묘까지 다 파헤쳤다고 하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공자는 옛 봉건 시대의 도덕을 가르쳤으니 새 시대에는 필요가 없다고 타파한 모양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 여러 천년 전에 주신 계명이 이런 시대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하면 시대가 이런 까닭에 오히려 이 계명을 분명히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여러 가지가 변합니다. 인정이 변합니다. 인심이 변합니다. 생활양식이 변합니다. 풍속이 변합니다. 얼굴 단장하는 모양도 변합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도 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 때나 지금이나 물은 섭씨 영 도가 되어야 얼음이 되고 백 도가 되어야 끓습니다. 이건 변치 않습니다. 봄이 되어야 꽃이 피고 가을에는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이건 변치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 법칙은 변치 않습니다. 똑같이 도덕의 법칙도 변치 않습니다. 이 계명은 도덕의 법칙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계명은 도덕 법칙의 제일 조입니다. 우리 인간이 세상에 나서 제일 먼저 맺는 관계가 부모와 자녀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면 형제를 만나기 전에 자매를 만나기 전에 친구를 만나기 전에 부모를 제일 먼저 만납니다. 먼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옳게 가져야 다른 사람과도 옳은 관계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보면 제一 계명에서 넷째 계명까지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의무를 가르쳤고 그 다음에 우리 인간 사이에 도덕의 법칙을 가르쳤는데 먼저 부모와의 관계 즉 네 부모를 공경하라―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경의 교훈이나 동양 성현들의 교훈이나 어느 나라의 교훈이든지 꼭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동양의 도덕을 간추려 말하면 삼강 오륜이라고 합니다. 삼강(三綱)에 제일 먼저 부의 자강(父爲子綱)이라 하여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위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오륜(五倫)에서도 제일 먼저 부자 유친(父子有親)이라 하여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친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야 다른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즉 군신 유의(君臣有義) 부부 유별(夫婦有別), 장유 유서(長幼有序), 붕우 유신(朋友有信)의 오륜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효도는 도덕 법칙의 제일 조입니다. 모든 도덕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둘째로 이 계명은 사회 질서의 기초입니다. 이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나 범위는 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비롯해서 모든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리 문답 六十四문을 보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제 五 계명에 명하는 것이 무엇이뇨?』대답을 보면『제 五 계명에 명하는 것은 각 사람에 속한 지위와 인륜 관계 즉 상하와 평등을 따라 높일 자를 높이고 행할 일을 하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그 부모를 존경하고 순복(順服)할 때에 질서가 섭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의 말을 순복하고 공경할 때에 그 학교의 질서가 잡힙니다. 회사에서 사원과 직공들이 사장을 공경하고 그 명령에 순복할 때에 그 회사와 공장에 질서가 섭니다. 관청에서 공무원들이 상관을 존경하고 그 명령에 순복할 때에 관청의 질서가 잡힙니다.
모든 국민들이 국법을 존중히 여기고 법을 순복할 때에 국가의 안녕 질서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복하는 자녀가 학교에 가면 선생을 존경하고 순복하는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면 사장을 존경하고 순복하는 좋은 직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관청에 들어가면 상관의 명령을 잘 준수하는 좋은 공무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사회에 나오면 좋은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가정에서 부모의 말을 순복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학교에 가서 선생을 순복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회사에 들어가면 사장을 순복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관청에 들어가면 상관을 순복치 않고 존경치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국민 가운데 많을 때 그 국가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이 계명은 사회 질서의 기초가 되는 계명입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우리 동양의 말 가운데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 질서는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복하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에는 부모를 거역하고 부모를 멸시하는 자는 돌로 쳐죽이라는 엄한 벌이 기록되었습니다.
셋째 이 계명은 영적 견지에서 볼 때 첫째 계명, 둘째 계명, 셋째 계명, 넷째 계명을 잘 지키는 신앙의 사람은 다섯째 계명도 말할 필요 없이 잘 지킵니다. 왜?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고 하나님에게 순복할 줄 아는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순복할 줄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거역하는 사람은 부모도 순복치 않고 공경하지 않습니다. 신효일체(信孝一體)입니다. 신앙과 효도가 한 몸입니다. 효도는 신앙의 첫 열매입니다. 참 신앙은 먼저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보이는 부모를 존경치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순복하고 존경하겠습니까? 절대 불가능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있습니까? 먼저 부모를 잘 섬기는 것으로 신앙을 보이십시오. 예수 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그 때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행하는 옳은 일들이 서기관과 바리세인들보다 더 낫지 아니하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오늘날 한국 청년들에게 말씀한다고 한다면 너희 의가 옛날 유교도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으로 경고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이 사회가 어떻습니까? 종종 아들이 아버지를 때렸다는 기사가 나고 심지어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기사까지 나는 험악한 최악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극단의 예이지만 이런 얘기가 종종 들립니다.『그 아무 할머니가 요사이 얼굴이 말이 아니더군.』『그것을 모르십니까. 그 할머니가 요사이 딸 때문에 너무 속을 상해 그렇습니다.』 이 가운데 아들이나 딸 때문에 속썩는 아버지 어머니가 혹 계십니까?
여러 청년들, 깊이 생각해 보세요. 내가 내 아버지 어머니를 기쁘게는 못해 줄망정 속을 썩히지는 않았는지, 나 때문에 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홀로 눈물이나 흘리지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세요. 물론 이런 이들은 드물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이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부모를 등한히 여기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고의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주한 가운데 등한히 여기기 쉽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들이나 딸을 독일이나 미국 기타 외국에 유학 보내신 이가 많을 줄 아는데 자녀들을 외국에 보내 놓고 그 부모들이 항상 기다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편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편지 잘 하는 아들과 딸들이 많이 있습니까? 별로 없을 줄 압니다.
여러분 중에 집이 시골에 있고 서울에 와서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꼭 기억하세요. 부모가 항상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편지 오기만 기다립니다. 편지 좀 자주 왔으면 하는 것입니다. 고의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무슨 구경을 가게 되면 부부끼리만 준비하고 나서는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쉽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아이들을 잘 보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잘 본다고 어머니를 아이 보는 유모로 알지 마십시오. 아이 보는 보모가 아닙니다. 부모님의 속마음도 좀 알아주십시오. 뭐 젊어서는 사업도 하고 교제도 하고 자연 용돈도 많이 쓰게 되고 외식도 많이 하게 되지만 나이 많아 은퇴하게 되면 뭐 용돈도 과히 많이 필요치는 않지요. 그러니까 어떤 자녀들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부모야 뭐 용돈 필요 있나 예배당에 가는데 십 원만 드렸으면 다 된 거지―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노인들도 혹 용돈 쓸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아들이나 딸이라 할지라도 용돈을 요구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런 사정을 아십니까? 그러기에 우리 한국 속담에「아들 주머니에 있는 돈이 내 주머니 돈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꼭 쓸데가 있어서 말하기 전에 넉넉히 드리세요. 요사이 해방된 후 온 세상이 한 집처럼 교통하니까 해방 전에는 먹지 못하던 음식도 많이 먹습니다. 코카콜라 같은 것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 부모들은 옛날 사람이 되어서 이런 것은 잡술 줄 모를 거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이들은 잘 먹이면서 부모들에게는 사드릴 생각조차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부모님을 보고『이것 잡숫겠습니까?』하고 물어 보면『얘 너희나 먹어라 우리는 먹을 줄 모른다.』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걸 곧이 들으니 탈입니다. 여러분, 나이 많아도 입맛은 변치 않습니다. 자꾸 제가 잔소리를 하는데 저로서는 많이 생각하고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여기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이런 얘기는 목사나 대신 해주셔야지 다른 사람은 얘기해 줄 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심정인 것 같습니다. 등한히 여기지 마십시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부모를 높인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 부모를 어떻게 보든지 우리 자녀들은 자기 부모를 높입시다. 어떤 분은 자기 아버지를 가리켜「우리 집 영감」이니「우리 집 늙은이」니 하고 부릅니다. 그것은 겸손(謙遜)이 아닙니다. 어떤 얘기 가운데서라도 우리 부모를 내가 높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물론 효도의 제일 첩경은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부모가 기대하는 사람이 되고, 부모가 기대하는 사업을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가정에서 부모를 잘 순복하는 아들이 되었더니 그 후 불행하게도 멀리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지만 거기서도 종으로서 잘 순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불행하게도 교도소에 들어갔지만 교도소에서도 잘 순복하는 죄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총리대신이 되어 자기 아버지를 수십 년만에 다시 맞아 들여 그를 크게 기쁘게 하고 영광을 돌린 사실을 우리가 창세기에서 읽어봅니다.
여기 구약을 읽어보면 룻기가 있는데 룻은 모압 여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천대하는 모압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압 여자의 얘기가 성경에 들어갔습니까? 비록 룻은 이방 여자이지만 외롭게 된 시어머니를 긍휼히 여기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위로해 주고, 고독하게 홀로 보내기가 애처로워서 멀리 베들레헴까지 오고, 먹을 것이 없을 때 곡식 이삭을 주워 봉양해 드렸습니다. 절세(絶世)의 효부올시다. 그래서 그 얘기가 성경에 들어왔고, 룻은 축복을 받아서 그 유명한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부모를 잘 공경하라는 말을 들을 때에 혹 마음속으로 고민하시는 분아 계시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젊은 부부가 제게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제 아버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올시다. 고집이 옹고집입니다.』또 몇 주일 전에는 어떤 지방의 고등학교 여선생으로부터 이런 편지를 받았습니다.『저는 홀 어머님 밑에서 잘 자라서 공부를 다하고 이제는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는데 우리 어머님 성질이 어찌나 이상한지 우리 둘이 마주 앉아 얘기하는 것도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사실 제가 이 젊은 부부들이 부모님께 당하는 문제들을 충분히 알고 양해합니다. 사실 그런 부모가 계시면 좀 고치십시오. 그러나 이 시간에는 제가 부모님들에게 설교를 안 합니다. 자녀들에게 합니다. 좀 바꿔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부모가 우리를 잘 길러 이만큼 살게 되었는데 우리들이 아이 때 나무랄 데 없는 좋은 아이들이었다고 확신합니까? 제가 전에 미국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이런 우스운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떤 젊은 부부가 첫 아기를 낳아서 안고 와서 아기 좀 보세요―하고 자랑삼아서 자기 앞에 내놓더랍니다. 그런데 그 아기를 처음 보니까 아기가 못 생겼드래요. 그러니 못생긴 것을 잘 생겼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고, 또 못생긴 것을 못생겼다고 하면 섭섭해하겠고 해서 그저 한다는 말이, 아 거참 베이비로군―했답니다. 베이비란 말은 아기란 뜻입니다. 사실 그대로지요. 아기야 아기지 뭐 다른 것 될 것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그 아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잘 못생겨 보였으나 어머님에게는 잘 생겨 보였단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왜 그런고 하니 어머니는 그 아기에 대해서 사랑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 사랑의 눈으로 볼 때에 그 아기가 잘생겨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속담에「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반질 반질 하다.」고 한다지 않습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곱게 보였단 말입니다. 성질이 별난 아이도 있고 말 안 듣는 아이도 있고 별에 별 아이가 다 있지만 그래도 부모는 기쁨으로 모든 것을 참으면서 잘 길러 주어 우리가 다 청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장성하고 부모가 늙으면 그것이 다 바꾸어집니다. 부모가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고 잘 길러 주었으니 이제는 우리도 부모들에게 부족한 것이 보여도 사랑의 눈으로 보아서 부모를 잘 공경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고「모든 허물을 가리운다」고 했습니다. 해방 후 대학이 많이 생겨서 대학생도 많이 있고 또 대학을 졸업한 학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 사람들끼리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다른 것은 괜찮은데 너무 무식해서 탈이야. 사실 이력서를 보면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거든요. 시대가 변한 것은 알지도 못하고 아버지께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 그대로 다 할 재간이 있어야지?
여러분, 학교 교육만이 교육이 아닙니다. 사회의 교육이 있습니다. 실제 사회에 나가서 십 년을 바로 살면 그 십 년간의 사회 교육은 대학 사 년간의 교육보다 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경험을 통해 산지식을 얻습니다. 더욱 예수 믿는 부모님들은 예수를 십 년만 믿으면 예수 안 믿는 대학 졸업생보다 다 낫습니다. 왜? 교회 교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 교육이 좀 부족해도 부모님의 말씀을 순복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비록 자기 잘못을 고치지 못하더라도 자식에게만은 좋은 교훈을 합니다. 부모의 명령을 거스릴 수밖에 없는 오직 한 가지 경우가 있는 줄 압니다. 그것은 우리 부모가 예수를 믿지 못하고 하나님도 몰라서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되는 명령을 내릴 때입니다. 그 때는 부득이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외에는 부모님의 말씀을 존중함이 마땅합니다.
여러분, 홍수 후에 노아가 큰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 포도주를 너무 많이 먹고 취해서 벌거벗고 잤습니다. 아들 함이 그걸 보고 그냥 나갔습니다. 동생에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샘과 야벳이 옷을 갖고 뒷걸음쳐 가서 하체를 보지 않고 아버지를 덮어 주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함은 저주를 받고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부모가 좀 부족해도 효도를 극진히 하는 이가 축복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기억하십시오. 이 계명은 시간적인 제한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부모들은 항상 살아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건강하게 보여도 나이 많으면 언제 세상을 떠날는지 모릅니다. 세상 떠난 후 후회하지 말고 살아 계실 때 모든 정성을 다하기 바랍니다. (一九六七년 二월 五일)

Ⅹ-32 제 육 계명 (십계명 ⑥) (마태복음 五장 十七-二十六절)

『살인하지 말찌니라.』(출 20·13)

오늘 아침엔 제六 계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제一 계명에서 제四 계명까지는 우리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가르친 것이올시다. 이 계명들은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하는 계명으로 통일될 수 있는 거십니다. 다섯째 계명으로부터 열째 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한 바른 관계를 교훈 하는 계명들이올시다.
이 계명은『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하는 한 계명으로 또한 통일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웃에 대한 계명은 제일 먼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거기에 이어서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하는 여섯째 계명은『죽이지 말 찌니라.』라는 교훈이올시다.
생명의 존귀성에 관한 교훈이올시다 이 우주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진주가 아닙니다. 금강석이 아닙니다. 생명이올시다. 생명은 신기합니다. 그 근원 그 형태를 우리 인간이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이 그 신비의 문을 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작은 씨에서 새싹이 나오는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걀 속에서 병아리가 나오는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생명은 신선합니다. 존엄합니다.
이 여섯째 계명은 이와 같이 귀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계명이올시다. 인도교나 불교에서 불 살생(不殺生)의 교훈이 잇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0세기에 있어서 위대한 선교사인 슈바이처 같은 이의 사상은「생명에 대한 경외(敬畏)」입니다. 거기에 그의 철학 사상의 근거를 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이 이 여섯째 계명의 근본 정신이올시다. 그러므로 꽃 한 송이라도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동물의 생명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섯째 계명은『살인하지 말라.』고 교훈 합니다.
물론 이런 계명을 읽을 때 누가 살인죄를 범하겠느냐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은 살인 가운데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직접 살인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그래서 직접 살인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감 된 것은 이 시대 우리 사회에도 가인의 후손이 상당히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문을 보면 살인 사건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일가족 몰살이라는 끔찍한 사건이 이따금 보도가 됩니다. 해방 후 남한에서도 아주 불행한 정치적 암살 사건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공산 치하의 숙청 사건을 생각해 볼 때 아직까지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세계에 어떻게 살는지 통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부주의한 차량의 불비(不備)나 부주의한 운전으로 말미암아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도처에서 살인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금은 가족 계획 시대라는 미명하에 의사나 가정 부인들이 계명을 범하기 쉬운 때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이 계명을 범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경우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세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국법에 의거한 사형입니다. 옛날부터 살인자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법에 의거한 사형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이들이 많습니다.
다음에는 정의에 입각한 전쟁 수행 중에 일어난 살인입니다. 침략 전쟁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불의 한 전쟁에 가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어하기 위해 정의에 입각한 전쟁에서 부득이한 살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정당 방위로 인정되는 부득이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여간 우리 믿는 사람들은 국법으로 사형이 필요 없는 사회, 전쟁 없는 평화의 세계를 위해 노력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접 살인에 간접 살인이 많습니다. 신문에 이따금씩 보도되는 대로 어떤 집에서 음식을 해 놓았는데 그 음식을 먹고 중독이 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건 같은 것은 간접 살인의 경우입니다. 부정한 음식은 간접 살인의 원인이 됩니다. 하물며 부정한 약품 전염병을 숨겨서 남에게 전해 주는 일 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침 한 번 잘못 뱉어서 간접 살인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말했지만 차량의 부 정비(不整備)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사건들과 술이나 마약이나 심지어 담배까지도 간접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무지와 미신으로 말미암아 병을 기르고 잘못해서 간접 살인의 원인을 만드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위정자의 실정이 낳는 부정과 부패로 말미암아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거도 간접 살인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도에 넘치는 과외 공부도 간접 살인의 원인이 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옛날 모세의 율법을 보면 어떤 사람이 떠받는 소가 있는데 그런 줄 알면서도 그 소를 잘못 단속해서 사람을 받아 죽였으면 그 임자를 사형에 처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간접 살인의 원인이 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참여하지 않으려면 나의 생활과 나의 의무와 나의 사업과 나의 일상 생활에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부인들은 음식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위생의 법칙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공중 위생을 존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간접 살인에 참여하지 마십시다.
그리고 셋째로 심리적 살인이 있습니다. 예수 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시기를『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형제에게 대해 노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 사도 요한 의 말씀과 같이 형제에게 대하여 노하는 자나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자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할 때 노할 수 있지만 이것을 오래 품으면 형제를 미워하는 감정으로 변하기가 쉽습니다. 그 속에 미워하는 마음이 일면 실상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리적 살인을 경계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분노나 증오심이나 원한이나 복수를 우리 마음 가운데 품는 것은 벌써 살인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잉태되면 실제로 살인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범하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물론 웃는 얘기로 하지만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저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심리입니까. 마음으로 벌써 살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바로 다스리며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살인죄를 범하였습니다.
또 구설(口舌)적 살임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입과 혀로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은 산상보훈에서 계속해서『형제를 향하여 라가라 하는 사람은 공회에 잡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라가라」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욕할 때 쓰는 말인데 아마 한국말로 하면 바보란 말인 것 같습니다. 또 형제를 향해 미련하다고 하는 놈은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인격을 존중해서 살인 안 할 것은 물론이요 말로도 멸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말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꼭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학생들 간에 혹은 청년들 간에 농으로 하는 얘기라도 지독한 말을 이따금씩 쓰는 것을 들을 때에 아주 섭섭합니다.
가령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자식 죽여 버린다. 꼭 살인하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말은 아주 독한 말입니다.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기 심지어 어떤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욕할 때 보면 참 두렵습니다.『어서 죽어라 썩어져라.』꼭 그 뜻이 아닌 줄 압니다마는 죽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시편 一四0편 三절에『뱀과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뱀처럼 날카로운 말이 있습니다. 독사의 독과 똑같은 독이 말속에 잠겨 있습니다.
하물며 거짓된 입술, 혹은 붓끝을 함부로 놀려서 다른 사람의 명예를 손상하고 거짓 선전으로 다른 사람을 매장한다고 하는 것은 입술과 붓끝으로 사람을 죽이는 정신적 살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조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로써 다른 사람을 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영적 살인이 있습니다. 인간의 명예도 귀합니다. 그러나 아주 귀한 것은 인간의 영혼이올시다. 남을 유혹해서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은 그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영적 살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린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친히 말씀하시기를『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다 달아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더 낳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물론 내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지만 또한 다른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살인의 종류가 있습니다. 자살은 살인이올시다. 내가 나의 생명을 좌우할 권리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내가 내 생명을 끊는 것도 살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자살한 사람이 다섯 명 있습니다. 그들은 다 신앙에서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사울 왕, 그 병기든 사람, 아히도벨 이라고 하는 다윗을 배반한 간신, 시모리 라고 하는 아주 악한 왕 그리고 주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 이와 같이 다섯 사람의 자살자를 찾아 볼 수 있으며 그들은 다 신앙의 타락자입니다. 자살은 절망한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하나님도 안 믿고, 내세도 안 믿고, 내세의 심판도 안 믿는 사람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자살에 대한 반기는 오직 참된 신앙을 소유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계명을 바로 지킬 것인가. 첫째 바른 인간관을 가져야 합니다. 二十세기는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가 되었습니다. 二차 대전에 많은 생명이 희생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치스 정권 아래 무죄한 유대인들 육 백 만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또 중공의 혁명과 소련의 혁명이 일어날 때 몇 천만이 생명을 잃었는지 알 수 없는 이런 시대입니다.
왜 二十세기가 이렇게 무서운 시기가 되었습니까? 그 근본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이십 세기에 들어와서 유물론적 사상이 대두하였습니다. 유물론적 견지에서 인간을 봅니다. 이런 견지에서 인간을 보면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짐승이란 필요하면 먹여 살리고 필요 없으면 죽어버려도 괜찮습니다. 유물론적 윤리관을 가져온 결과 이러한 살인 사건이 많은 무섭고도 참혹한 세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물리적 육체를 가졌지마는 물질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이 그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 생명에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적 인간관의 회복만이 이 험악한 사회를 변화시켜 살만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들의 감정을 극기하고 자제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누구나 일시적으로 성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오래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날 때 자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물론 위대한 왕이지만 술좌석에서 자기 부장가운데 한 사람이 갑자기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하였다고 성을 내어 그 자리에서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자기의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는 기록하기를『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는 다스릴 줄 알았지만 자기 자신은 다스릴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감정 생활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감정을 자제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 님 말씀 그대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란 하나님의 사랑을 좀도 배워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살인, 다시 말하면 간접살인과 자살의 원인이 되는 사회악 즉 부정부패, 빈궁 이런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옳은 정치를 하고 옳은 경제 재건을 하고 사회 봉사를 해서 우리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되겠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인간의 생명이 완전한가 하는 것이 문명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안전하게 해 줍니까? 인간의 생명이 안전한 평화의 사회를 이루어야 할텐데 이런 사회는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만 잘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위에 정신적 배경이 있습니다. 강력한 종교의 뒷받침이 없이는 이런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잘 지키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사회에 복음을 전파해서 이 사회 자체가 기독교의 감화를 받도록 우리는 최대의 노력을 해야만 되겠습니다.
(一九六七년 二월 十二일)

Ⅹ-33 제 칠 계명 (십계명 ⑦) (고린도 전서 六장 九-二十절)

『간음하지 말 찌니라.』(출 20·14)

제七 계명이올시다. 여섯째 계명은 신성한 인간의 생명을 보존키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째 계명은 신성한 가정을 보존키 위하여 주신 계명이올시다.
먼저 가정의 성격과 중요성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인간을 지을 때에 일남 일녀를 창조하시고 가정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륜에 속합니다. 그러기에 가정은 신성합니다. 인간 사회의 사랑의 표현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피차간에 전적으로 신임하고 전적으로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사는 생활이 곧 가정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거룩한 관계를 부부의 관계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요 교회는 신부라고 불렀습니다. 가정은 이처럼 신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통하여 우리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단란한 가정의 행복은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귀한 인간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 가정을 통하여 인간이 태어납니다. 자녀가 나서 장성합니다. 민족의 대대손손이 가정을 통해서 계승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참된 신앙과 종교도 역시 가정을 통하여 대대로 계승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기본 단위올시다. 사회 질서의 기초입니다. 가정이 문란하여 파괴되면 그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떤 문화나 민족이나 국가의 흥망 성쇠는 가정 도덕의 타락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 있어서 가장 음란하기로 이름 높던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의 형벌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이렇게 귀하고 신성한 가정을 잘 보존하려면 남편이나 아내가 꼭 같이 정조를 지킬 줄 알며 깨끗이 보존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정 파탄의 제일 원인이 바로 여기에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을 보존키 위하여 일곱째 계명에『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자연히 형벌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모세의 율법 시대에는 이 계명을 범하는 자들을 극형에 처했습니다. 레위기 二十장 十절에는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 찌니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현대에는 이와 같은 율법을 가진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이 도덕적 법을 어기는 자를 벌할 것입니다. 음란한 생활을 하는 이에게는 특수한 질병이 따릅니다. 그것은 화류병(花柳病)입니다. 이런 질병이 가정에 들어오게 되면 보통은 자녀를 낳을 수가 없으며, 혹 낳는다 하더라도 대개는 불구아인 것입니다. 이런 병균이 뇌 세포에 침입하게 되면 정신 이상이 발작합니다. 이 병은 불치의 병입니다. 이런 병이 가정에 침입하면 자신만이 아니라 후대에까지 화를 미치게 하여 가정은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은 그의 영혼까지 멸망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를 소위「성적 방랑 시대」라 부릅니다. 성의 제삼 혁명 운운하여 어떤 나라에서는 십대 소년들이 난윤(亂淪)의 생활을 자행한다는 신문 보도를 가끔 보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소위 상황윤리(Situation Ethics)라 해서 형편에 따라서는 음행까지도 용납하고 합리화하려고 듭니다. 이들에 대하여 성서는 경고합니다.『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니 사람이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육신을 좇아 심는 자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는 자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거두리라.』(갈 六·七-八)
이 계명을 잘 지켜야 내 자신 내 가정 내 자녀 내 후손 내 민족 국가 그리고 나의 영혼이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산상보훈에서 예수 님은『옛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벌써 마음에 간음을 행하였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마음을 깨끗이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누구에게나 불결한 생각이 마음을 스쳐 지나 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음욕을 마음속에 계속해서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가 많이 날아다니는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은 할 수 없으나 새가 머리 위에 앉아 둥지까지 만들게는 하지 말라고 하는 말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보존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이 보존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맡은 책임에 충실하여 언제나 부지런히 일하며 분주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게으른 이에게 불길한 생각이 찾아 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한 생각으로 채우는 길입니다. 깨끗한 생각을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하기를『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에는 보고 듣고 읽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영화 텔레비전이라고 다 볼 것은 못됩니다. 라디오라고 다 들을 것은 못됩니다. 신문 잡지 소설 만화 등 다 읽을 것은 못됩니다. 음악이라고 다 들을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해이하게 하는 좋지 못한 음악 그림 및 글이나 말이 매스컴을 타고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네 눈이 너로 범죄 캐 하거든 빼어 벌이라 한 눈 가지고 천당에 가는 것이 두 눈 가지고 지옥 불 에 들어가는 것 보다 나으니 라.』듣고 읽는 것을 주의하십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녀 교제를 조심할 것입니다. 경건한 장소에서 경건한 교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의심나는 곳에서 교제를 하지 맙시다.
신문을 통해서 읽는 대로 소위 삼각 연애 사건이니 실연 자살 사건이니 치정 살인극이니 하는 등 갖가지 추문이 이 교제를 삼가지 못하는 데에서 일어납니다. 의혹을 사도록 교제를 해서는 안 됩니다. 풍문 중에는 근거 없는 것도 있는 것이 사실이나 속담대로「불때지 않은 굴뚝에서 연기 날리 없다.」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의심스럽게 남에게 의혹을 살만큼 교제를 해서는 안 됩니다. 깨끗한 교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약혼한 남녀들은 분명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약혼은 결혼이 아닙니다. 다방출입도 삼가야 합니다. 하물며 댄스홀에 갈 수 있습니까? 옛부터 성현들은 특별히 남녀 교제에 관하여 경이원지(敬而遠之)하라고 했습니다. 즉「존경하나 멀리하라.」는 뜻입니다. 옛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무시하지 맙시다. 멀리 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또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내 몸을 깨끗이 보존하여 정조를 지 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정조는 생명같이 귀합니다.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이 정조입니다. 왜? 정조가 깨어지면 생명이 파멸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자만이 아닙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사회 환경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세 가지 사실은 변치 않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첫째, 결혼하기 전에 정조를 지키지 못하는 남녀는 깨끗한 결혼을 할 수 없고 깨끗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둘째, 결혼한 후에 남녀간에 정조를 지키지 못하면 깨끗한 가정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이런 가정에서는 좋은 자녀가 날 수 없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 몸을 깨끗이 지키는 것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조를 빼앗기면 내 일생을 망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꼭 기억하십시다. 이혼은 큰 죄입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이미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이유 외에는 나눌 수가 없습니다. 말라기 二장 十六절에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이혼하는 자를 미워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미워하는 바가 되지 맙시다. 그리고 최후로 말씀 드립니다. 우리 가정에 정신적 기초가 있는데 이 정신적 기초가 언제나 튼튼해야 합니다.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신앙이올시다. 요셉이 애굽에서 젊은 몸으로 종노릇 하다가 그 집 안주인의 아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을 때에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정결을 지키게 하였습니까. 창세기를 읽어보면『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 악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하고 말씀했습니다. 요셉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읽은 고린도 전서 六장에 보면, 우리 믿는 자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체는 한 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전을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모든 죄가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 하는 죄는 몸 안에 있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성령께서 계시는 전(殿)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면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 안에는 언제든지 제단 위에 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 제단에 불이 꺼지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 제단에 불이 밝게 붙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제단이 있습니까?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같이 성경을 읽으며 찬송을 합니까? 이것은 아주 필요합니다. 우리 가정을 깨끗이 하려고 하면 이 가정 제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 한 분이라도 이 계명을 범하는 이가 있습니까?
요한 복음 八장에 예수 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용서하십니다. (一九六七년 二월 十九일)

Ⅹ-34 제팔 계명 (십계명 ⑧) (에베소서 四장 十七-三十二절)

『도적질하지 말 찌니라.』 (출 20·15)

이 계명은 물질에 대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남의 재산을 존중히 여기라는 계명입니다. 남의 생명을 존중히 여길 줄 알고 남의 재산을 또한 존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간접적으로 사유재산 제도를 인정하는 계명입니다. 어디나 도적은 있습니다. 어는 시대나 도적은 있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제일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 계명을 범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교도소에 가보면 대부분이 절도와 강도죄입니다. 도적은 교도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도소밖에 더 많이 있습니다. 도처에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배당에도 도적질하러 오는 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점점 한국에도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오게 되는데 생각하면 심히 민망한 일들이 있습니다. 이는 국가적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계명을 범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물론 그것은 본래부터 우리 민족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닌 줄 압니다. 이렇게 된 배후에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이유가 있는 줄 압니다. 공산주의 사상의 악영향과 六·二五 동란의 악영향, 전쟁 후의 혼란과 빈곤의 원인 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국가의 교육이 도의 면에 결함을 가진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근본적인 것은 인간 속에 있는 욕심, 나태, 일확천금의 야심 등의 죄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책이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면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래도 정부에서는 엄격한 법을 시행해서 우선 우리 나라의 치안을 확보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양민이 평안히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개인 집에 철조망을 두르고 사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 나라 뿐인가 봅니다. 변두리에서는 마음놓고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합니다. 바로 어제 신문에도 권총 강도를 잡고 보니 현직 순경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의 근본 기강이 서지를 못합니다. 한국의 맹성(猛省)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법으로만은 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사회적으로 새로운 도덕적 기풍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도덕적 분위기가 향상되어야겠습니다. 이것은 정부의 책임만은 절대로 아닙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의 지도자들에게 책임이 있는 각성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이들의 각성이 필요하고, 모든 방면에서 빛과 소금의 직책을 다할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파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이 새로운 변혁을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가정과 학교에서 좀 더 철저한 도의 교육이 요청됩니다. 그리하여 양민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는 명랑한 사회를 어서 속히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경제를 떠나서 육신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범죄 중에도 물질에 관한 범죄가 많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에 있어서 우리가 이 계명을 바로 지키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몇 가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음에는 몇 가지 조심해야 할 것과 힘써야 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이 몇 가지를 생각코자 합니다.
도적질 중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물론 직접적인 도적질이 있습니다. 절도 강도 사기 횡령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멀리 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간접적인 도적의 행위가 있습니다. 신명기 二十五장 十三잘에 보면『너는 주머니에 같지 않은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 네 집에 같지 않은 되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두지 말 것이며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와 되를 둘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도 장사하는 사람들 중에 저울추를 둘을 두고 말을 두 가지 사용한 이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정직한 상행위를 통해서 부당한 이익을 얻는 것은 다 이 계명을 범하는 도적 행위입니다. 말을 속여서 파는 것, 자를 속여서 천을 파는 것, 상품의 품질을 속여서 파는 것, 허위 광고 허위 약품 허위치료 등을 통해서 얻은 모든 이익은 다 도적 행위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남에게 무슨 일을 맡겼으면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야고보 五장 四절에 당시인(當時人)에 대한 이런 경고의 말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보라 너희 밭의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소리가 만 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그 당시의 밭의 일을 시키고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노동의 대가인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것은 결국 도적질인 것입니다.
반면에 남의 일을 맡아서 하면서 임금만큼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역시 도적질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하면서 당시 일하는 이들에게 말하였습니다.『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 하게 하라.』남의 일을 하면서 떼어먹는 이들이 있습니다. 임금에 해당되는 만큼의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또한 도적질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에도 산업이 발전해 가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즉 자본 경영 및 노동의 조건이 있어야 산업이 발달합니다. 이 세 가지가 저마다 그 기능을 발휘하고 합당한 보수를 받게 되어야 사회가 건전하고 생산이 잘 되는 것입니다. 산업을 경영할 때에 이 도덕의 법칙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정당한 수입은 대개가 이 계명을 범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一장 二十三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네 방백들은 패역(悖逆)하여 도적과 짝하니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심문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 도다.』옛날 그 나라 방백들 가운데는 도적놈들과 결탁한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뇌물을 받고 일을 하며 사례금부터 받고 청원 건을 처리한 모양입니다.
저도 무던히 외국을 여행하는 이 중에 한 사람인 줄 압니다. 외국에 가면 자연히 살피게 되는데 그 중에도 제일 먼저 눈에 먼저 띄는 것은 도로입니다. 부끄러운 일 입니다마는 서울의 도로처럼 만신창이의 길은 보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포장을 하지 않아서 입니까? 아니올시다. 언제나 포장하고 고치기에 수고하고 있습니다. 일 년 혹은 이 년도 채 못되어서 여기 저기 구멍이 납니다. 그것이 기술 부족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 공무원 가운데 부정직한 청부업자와 결탁을 해서 일을 거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데 있습니다. 뇌물을 받고 공직인 일을 정당하게 하지 않는 것은 국민의 혈세(血稅)를 도적질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얻는 데에는 간략히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직하게 일해서 받는 보수요, 다른 하나는 선의에서의 선물로 받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 이외에는 보통으로 이 여덟째 계명을 범해서 들어오는 재물인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물질적 재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 재산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이의 명예는 정신적 재산입니다. 시편 一二0편 二절『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궤사(詭詐)한 혀에서 내 생명을 건지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거짓말을 함부로 해서 다른 이의 명예를 함부로 손상시키면 그는 남의 정신적 재산을 도적질하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남의 정조는 얼마나 귀한 재산입니까. 간교한 교제와 음란한 행동으로서 남의 정조를 빼앗으면 남의 영적인 재산을 탈취한 악질적 도적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말합니다.『사람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려니와 하나님의 것도 도적질하지 말라.』또『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리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현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나니라.』(말 三·八) 영국의 유명한 목사 스펄존 씨는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면 서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하였습니다.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내가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은 것도 도적질이요, 일곱 날 중 하루는 주님의 날인데 그렇게 사용 못 함은 주님의 날 도적놈이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예배 도적놈이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드리지 않고 내가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이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서 조심할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히 검소할 줄 알아야 하고 절약할 줄 알아야 하며 특별히 관혼상제 등의 문제에 있어서 분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주부 자매 님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여러분의 남편이 한 달에 만원을 받는데 살림에 쓰기는 만 이천 원을 쓰면 그 살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월급 받으면 생활 필수품부터 사야겠는데 五천 원 짜리 치마감부터 사게 되면 그 생활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흔히 그런 부인 가진 남편 치고 큰 시험에 빠지지 않는 이들이 없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되면 남의 물건을 축내기 쉽습니다. 다음은 돈 꾸는 것도 조심해야 될 줄 압니다. 외상 거래도 조심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분에 맞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외상 거래나 돈 빌리는 것 등은 삼가 할 것입니다. 또 부득이 해서 빌리거나 외상 진 것 있으면 갚는 것도 잊지 맙시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제가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내용의 편지를 받는데 그 중에는『아무개는 당 신네 교회에 다니는 분으로서 돈 빌리고 갚을 줄을 모르니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는 거요.』하고 질문해 오기도 합니다. 기억하십시다. 돈 꾸어준 사람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또 어떤 이는 연보 적어 놓고 잊어버리는 이도 있는 모양입니다. 하나님도 잊지 않고 계시는 줄 아십시오. 우리 동양의 말 중에 재상 분명이 시군자(財商分明是君子)라 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는 졸업생들에게 목회 학 교수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꼭 부탁하는 말 두 가지가 있습니다.『첫째 남녀 교제를 주의하여라. 둘째 재정 거래를 분명히 하여라.』목사들 중에도 이 두 가지에 걸려서 넘어지는 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목사 부인이 살림 잘 못 해서 목사가 배척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조심할 것은 과도한 욕망을 항상 삼갈 것입니다. 우리가 다 욕망이 있지마는 도에 넘치는 욕망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돈을 너무 쉽게 벌 생각 마십시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벌 생각도 맙시다. 일확천금의 꿈을 버립시다. 이런 생각 때문에 투기 사업에 관계하다가 실패한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조심하고 노력해도 혹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들으셔요. 실패하더라도 정직하게 실패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 중에 한 분이신 고환규 장로님이 제게 한 말이 있습니다. 그분이 사업하다가 큰 손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인천에서 쌀을 사서 진남포로 갖고 가다가 풍랑으로 배 두 척이 침몰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장로님은 그 때 정직하게 청산했습니다. 자본주들이 자본을 다시 모아 주어서 장사하여 三, 四년 내에 다 갚았다고 합니다. 신의주에서 오신 분들은 신의주 제이 교회의 김기범 장로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장로님이 자기의 경험담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일생을 사업하노라고 했는데 두 번 대 실패를 맛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정직하게 청산했고 지금 세 번째 성공하여 이만큼 살고 있다고 실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업에는 실패가 따릅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사업은 실패하더라도 신용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돈은 미찌되 사람까지 미쪄서는 안 됩니다.
다음으로 힘쓸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청년들 자세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자작 자급 자립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마라.』(살후 三·十) 내가 일해서 살고 내 손으로 벌어서 살겠다고 하는 자립 정신이 필요합니다. 성년이 되면 부모에게 의지하지 맙시다.
둘째는 선한 생업을 할 것입니다. 취직도 선한 사업체에 할 것입니다. 의심스런 사업은 맙시다.『선한 생업을 하라.』(엡 四·二八)고 했습니다. 법에 어긋나는 사업을 하지 맙시다. 사회에 해독을 주는 상품을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는 다음 세 가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근면 정직 인내 이 세 가지만 있으면 한 푼 없이도 남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없이 살아가는 것을 나는 목회 경험을 통해서 보아 왔습니다.
넷째는 사업을 하되 도와주는 정신으로 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살아야 하되 나만 잘 살아서는 안 됩니다. 수전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남을 도우려는 정신을 갖고 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다섯째는 내게 영광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 하는 행위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아는 중에 혹은 모르는 중에 우리는 이 계명을 범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것이 많되 먼저는 물질에 관한 죄를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 님을 만나 회개한 다음에 내가 토색(討索)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내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참 회개는 보상이 따르는 법입니다. 물론 보상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만 있으면 보상해야 할 것입니다.
전에 평양 장댓재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을 때에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죄를 자복 했습니다. 그 중에도 이 물질에 관하여 자복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해묵은 여러 가지를 다 갚아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고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아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므로 봉사의 빛을 크게 드러냈던 것입니다. 참 회개하는 이는 물질에 대한 보상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이 간단한 계명이 우리 생활과 큰 관계가 있으므로 우리는 깨달을 것을 깨닫고 조심하며 힘써서 물질적으로 범한 것이 있으면 참으로 회개하는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七년 三월 十二일)

Ⅹ-35 제구 계명 (십계명 ⑨) (야고보서 三장 一-十二절)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 증거하지 말 찌니라.』(출 20·16)

이는 제九 계명이올시다. 오늘 아침 계속해서 십계명을 생각합니다.『그 이웃을 쳐서 거짓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잠 二十五·八十) 이 계명은 어느 계명보다도 제일 많이 범하는 계명이라고 합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흔히 말을 많이 하고 남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탓입니다. 큰마음을 가진 이들은 흔히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보통 마음을 가진 이들은 흔히 시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작은 마음을 가진 이들은 흔히 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은 마음이 크게 발전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이 계명을 범하는 이들은 계명을 범하고도 죄책(罪責)을 느끼는 이가 적다고 합니다.
어떤 경험 많은 목사의 말에 의하면 자기 인생에 여러 가지 죄를 자복하는 가운데 다른 계명을 범한 것을 자복하는 이들은 많으나 이 계명을 범했다고 자복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九 계명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증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적 증거요, 다른 하나는 사적 증거입니다.
첫째로 공적 증거에 있어서 거짓 증거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국가의 법정에서 증거 할 경우에 그러합니다. 이런 경우에 감정이나, 악의로 혹은 뇌물을 받고 거짓 증거를 함으로써 이웃을 해친 예가 옛날이나 오늘이나 공통으로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일찍이 애굽에 있는 시위대 장관 보디발의 아내가 거짓 증거로서 죄를 지우려다가 오히려 요셉을 무고함으로 무죄한 청년이 감옥에서 고생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 동산을 빼앗기 위하여 거짓증인 두 사람을 세워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하여 나봇을 돌로 쳐죽이고 포도 동산을 빼앗은 예도 있습니다. 인간적 견지에서 볼 때에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거짓 증거에 의해 정죄(定罪)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것도 역시 거짓 증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법정에서 위증을 하는 것은 인간 당사자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됩니다. 법정은 실은 하나님의 공의를 인간 사회에서 대행하는 기관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언 十九장 九절에는『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날 아덴에서는 위증(僞證)자들에게는 시민권을 박탈했던 것입니다.
옛날 로마의 원시 사회에서는 위증 자를 낭떠러지에 데리고 가서 밀쳐 떨어져 죽게 하였던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위증 자는 코와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위증 자는 벌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적 증거에 있어서 진실히 증거 해야 공정한 재판을 할 수가 있고, 국가에서도 공정한 재판을 해야 국가의 질서와 기강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국가 법정에 증인으로 서는 이들은 많지가 않습니다.
반면에 사적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이웃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는 내가 증인의 대(臺)에 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여론의 법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에 대한 여론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통해서 조성이 되는데 그 판결은 국가 법정의 판결에 못지 않게 그의 명예 신분 가정 및 행복에 크나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너무 분하여 심지어는 자살에까지 이르는 예도 이따금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담 석상에서 남에 대하여 중상을 하거나 외곡 선전을 하거나 악평을 하거나 시비를 하는 것 등은 다 이 九계명을 범하는 일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침묵이 거짓 증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아닌 풍설이 돌아가는데 자기는 그것이 사실이 아닌 줄을 알면서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면 간접으로 아홉째 계명을 범하는 일임을 또한 기억할 것입니다. 이 사적 거짓 증거로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실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읽은 본문 가운데서 야고보 장로는 무엇보다도 혀를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경건(敬虔)이 헛것이라.』(약 一·二十六) 『혀를 재갈 먹일 줄 알라.』고 했습니다.『혀는 곧 불이요 불의 세계라.』(약 三·六)고 했습니다. 지옥의 불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혀가 얼마나 위험하다는 사실에 대한 경고입니다. 헬라 속담에「혀는 뼈다귀 하나 없고 아주 약하고 작으나 많은 사람을 찌르고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터키인의 속담에는「혀는 검보다 실상은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파사 인의 속담에는「혀가 길어지면 생명이 짧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라비아인의 속담에는「네 혀가 네 목을 베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칼은 쓸수록 더 무디어지나 혀는 쓸수록 더 날카로워진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진찰 받으러 가면 의사들의 혀를 보자고 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혀를 보고 여러 가지 병을 알아내는 모양입니다. 이따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혀를 내어 밀고 혀의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우리의 혀가 어떠합니까.
몇 주일 전 영국의 호픈 목사께서 이곳에서 설교하실 때에 자기의 나라 예복을 입고 목에 줄을 드리우고 선 모습을 여러분께서 보신 줄 압니다. 같은 교파의 어느 목사가 그런 예복 차림으로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친 다음 강당을 내려올 때 어떤 부인이 가위를 들고 와서는 『목사님, 그 목에 드리운 줄이 너무 길어서 보기 흉하니 좀 잘라 봅시다.』하는 것이었습니다.『꼭 잘라야겠습니까?』『그렇다면 자르세요.』드디어 그 여인은 잘랐습니다. 그 때에 목사가 넌지시 하는 말이『내가 자매 님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는데 자매 님도 저의 소원을 하나 이루어 주시지요.』하고는 호픈 목사는『자매 님의 혀를 좀 내어 미시오 그 혀가 너무 길어 보이니 좀 잘라봅시다.』하고 말했습니다. 혀가 너무 길어서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면 너무 곤란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도 귀는 둘을 만들고 입은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보니 말을 적게 하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석(私席)에서도 말을 많이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말은 적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 실수가 적습니다. 특별히 풍설을 전하지 말 것입니다.『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출 二十三·一)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는 무족언이 천리행(無足言 千里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풍설은 눈 공과 같아서 굴러 갈 수록 커집니다.
거짓 화제를 만드는 사람도 나쁘며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도 나쁩니다. 지난 一九二四년 동경에 대진재가 있을 때에 한국 교포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습니까. 어떤 사람이 한국인이 불을 놓았다고 풍설을 돌렸습니다. 허무(虛無)맹랑(孟浪)한 풍설을 함부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유언비어를 함부로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특별히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산상보훈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너희 눈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의 눈의 티를 빼고자 하느냐 먼저 네 눈의 들보를 빼어 놓고 밝히 보면서 다른 형제들의 티를 뽑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다른 이의 허물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사도 바울은『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들어 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六·一) 고 하였습니다. 가령 어떤 이의 분명한 잘못이 들어 났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다른 이에게 옮기지 말고 조용히 그이와 마주 앉아서 바로 잡아주고 자신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권면 입니다. 남의 결점을 말하는 배후에는 흔히 열등감이 있고 시기심이 있고 교만이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남의 허물을 말하는 경우에는 먼저 세 가지 질문을 하고 통과를 할 때에만 허물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이 이야기가 사실이냐? 둘째, 내가 이 이야기를 타인에게 하는 것이 친절하냐? 셋째, 이 이야기를 꼭 해야겠느냐? 이 세 가지의 문을 통과하기 전에는 다른 이의 허물을 말하지 말 것입니다. 또 남의 허물을 열심히 듣기 좋아하는 것도 이 계명의 공범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물건을 도적 하는 것도 큰 죄이려니와 그런 물건을 사는 이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때로는 좋다가도 어느 누구 가 나의 추문을 말하면 정신을 가다듬고 듣기가 쉽습니다. 전에 어거스틴이 주재하던 수도원 식당에는 다음과 같은 표어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남의 허물을 이야기하는 자는 이 상(床)은 환영하지 않는다.」 이 식당에서는 먹으면서 남의 허물을 이야기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친구와 더불어 저녁 잘 먹고 남의 허물을 말하기가 쉽습니다. 심지어는 친구끼리 모여 닭, 소 잡아먹다가 나중에는 친구까지 잡아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에 노아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년에 한 번 실수를 크게 했습니다. 포도주를 많이 먹고 취해서 벗은 몸으로 잠을 자고 있었는데 함이라는 아들이 그 광경을 보고 동생들에게 그 사실을 일렀습니다. 셈과 야벳은 그 말을 들은 다음에 곧 홑이불을 갖고 가서 뒷걸음으로 벗은 아버지의 몸을 덮어 주었습니다. 누가 복을 받았습니까? 함은 저주를, 셈과 애벳은 축복을 받았던 거입니다. 언제나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은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남의 허물을 전하는 이는 저주를 면치 못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믿는 이들은 언제나 진실하고 정확한 말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엡 四·二十五)고 권합니다. 에베소서 四장 一一五절에는『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 곧 그리스도니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것을 하기에 앞서 말부터 옳아야 할 것입니다.『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눈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 十二·十九)『하나님은 진실 무망하시니라.』(신 三十·二十四)『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요 八·四十四)고 하였습니다.
신약 교회 시대에 가장 엄한 벌이 누구에게 내렸습니까? 사도행전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처에게 내렸습니다. 그들의 죄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가산을 팔아 절반만 갖고 와서는 판 값의 전부라고 했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형벌이 너무 극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뜻이 이는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짓말을 미워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벌인 줄 압니다. 이 경고는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무서운 경고가 될 것입니다.
계시록 二十一장 八절을 들으시기 바랍니다.『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行淫)자들과 술객(術客)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거짓말이 결코 적은 죄가 아닙니다.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심판하실 뿐더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지 말에 대해서도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말은 한번 뱉으면 다시 담을 수가 없습니다. 중고 시대에는 죄를 지으면 목사에게 자복하고 그 대가로 중노동을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가 목사에게 와서 자복하기를『제가 아무에게 대하여 무슨 일이 있는 것으로 여러 사람에게 말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거짓말이었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목사가 그이의 호주머니에 닭털을 가득히 넣어 주면서『거짓말을 옮긴 집집마다 대문간에 이 닭털 하나씩을 놓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대로 하였습니다. 그 때에 목사는 한 가지 더 하도록 했습니다. 빈 주머니를 하나 내어 주면서 흩어 놓은 털을 다시 주어오라고 명했습니다. 그 때에 그는『오늘 아침 바람이 불어서 닭털이 다 날아갔겠는데 어디서 주어 옵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목사는『말이라는 것은 한 번 뱉은 다음에는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말을 조심하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이 계명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특별히 말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필요합니다. 교회에는 교역자들, 권사들, 구역 장들, 권찰 들, 여러 집에 돌아다니는 이들 특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심방 중 혹 어느 가정의 비밀을 들었다고 해서 함부로 이 집 저 집 다니며 말을 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말을 조심하지 않는 이들로 인하여 교회가 손해를 입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또 직업 가운데는 신문기자들 언론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잘 못 기사 화함으로써 명예 훼손을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침소봉대(針小棒大)해서 남의 허물을 보도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이 선거 때에 과장하여 외곡 선전을 하게 되면 자신을 손상하는 일일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손해인 것입니다. 국민은 현명합니다. 이러한 반면에서 일하는 이들은 특별히 조심할 것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때에 거룩한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랍 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노래를 부릅니다. 이때에 이사야는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자기의 입술이 더러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화 있을 진저 나는 입술이 더러운 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에 천사 하나가 계단에서 펄펄 붙는 숯불을 가져다가 입술에 대어 주면서 네 죄가 씻음을 받았나니라 고 하였습니다.
입술이 성령의 불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입술이 거듭나야 합니다. 입술이 청결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이 정결해지면 상한 마음을 고쳐 줄 수가 있고, 약한 사람을 튼튼하게 할 수가 있으며, 슬픈 자를 위로해 줄 수 있으며, 축복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파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이 성령의 불로 세례를 받아서 깨끗해지는 은혜를 받아야겠습니다.
(一九六七년 四월 二일)

Ⅹ-36 제 십 계명 (십계명 ⑩) (골로새서 三장 五-十七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 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 찌니라.』(출 二十·十七)

마지막 계명이올시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여섯째, 일곱째, 여덟째 계명은 다 행동에 관한 계명입니다.
아홉째 계명은 말에 대한 계명이올시다. 이 열째 계명은 탐내지 말라는 즉 마음에 관한 계명이올시다.『네 마음을 지 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四·二十三) 마음은 행동과 말의 근원이올시다. 이 마지막 계명은 그 근원을 다스리는 계명이올시다. 탐심이라고 하는 말은 보통 말하는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욕망은 우리가 다 갖고 있는 것입니다.
탐심이라고 하는 말은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욕심을 의미합니다. 탐심이라고 하는 헬라 원어의 뜻은「더 움켜쥔다.」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더 움켜쥐려고 하는 생각을 버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시간 열째 계명을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친히 말씀하시기를 마랍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읽을 때 제일 먼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는 느낌은 이 죄가 매우 흔하고 보편적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천진 난만한 어린이들 가운데에도 탐심이 움직이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자기에게 배당된 사과를 한 손에 쥐고도 다른 아이 손에 든 사과를 움켜쥐려고 합니다.
탐심이 어린이들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속담 중에「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탐심이 친척 가운데도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탐심이 업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회 각계 각층 어떤 곳에 가나 이 탐심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옛날 솔로몬은 젊은 사람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그 때는 재판권까지 주장했습니다. 어떤 젊은 여자 둘이 아기 하나를 데리고 와서 저마다 자기 아기임을 주장합니다. 알고 보니 두 계집은 창기들로서 한방에서 사는데 하루는 한 여자가 아기를 낳고 사흘 후에는 또 다른 여자가 아기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한 여인의 말이『저 여인이 낳은 아기는 자다가 깔아 죽이고 내가자는 틈에 산 내 아이를 데려가고 죽은 아이를 내게 넘겨 놓았으니 내 아기를 찾아 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여인은 그와 반대로 말합니다. 저 여자가 자기 아기를 죽이고 내 아기를 가져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참 어머니입니까? 여러분, 기억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은 그 말들을 듣고 옆에 선 신하에게 명하여 큰칼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칼을 가져 왔습니다.『아기는 하나이니 칼로 잘라서 절반씩 나누어주어라.』 이 때 한 여인은 양보하면서 죽이지 말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여인은 어서 갈라 주기를 청했습니다. 솔로몬은 그 아기는 죽이지 말라는 여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몇 달 전 신문에서 여러분도 보신 줄 압니다. 두 어머니가 병원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가 바꿔졌다는 소동이 났습니다. 그 신문을 읽고 병원에서 아기도 마음놓고 낳지 못할 세대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왜 그러한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어린애에 대한 탐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나 남에게 주는 것을 내 것으로 움켜쥐려고 하는 탐심 때문에 여러 가지 죄악이 세상에서 일어납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탐심은「만 악의 어머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탐심 때문에 거짓말도 합니다. 도적질도 랍니다. 간음도 합니다. 싸움도 합니다. 탐심 때문에 심지어는 살인도 합니다. 전에 다윗이 남의 아내를 탐해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그 결과 가정과 국가에 큰 재난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지금도 남의 아내를 탐해서 혹은 남의 남편을 탐해서 간음을 하는 일, 축첩을 하는 일, 이혼을 하는 일, 심지어는 치정 살인까지 하는 경우를 신문지상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탐심은 큰 죄입니다. 남의 아내나 남편을 탐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물질을 탐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옛날 여호수아 때에 아간 이라고 하는 사람은 은과 금을 탐해서 도적질을 했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역시 은과 의복을 탐해서 거짓말하고 나만에게 선물을 받았다가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전에 아합 왕과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 동산을 탐해서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빼앗았습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처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유다 역시 돈을 탐해서 은 三十 량에 자기의 선생을 팔고 마지막에는 자살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했지만 아나니아의 부처 역시 탐심 때문에 거짓말하다가 엄벌을 받았던 거입니다. 현 사회의 범죄의 대부분이 이 물질을 탐하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절도, 강도, 수뢰(受賂), 횡령(橫領), 사기 및 살인 강도 등은 다 탐심에서 오는 범죄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지위와 명예를 탐해서 많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모세 때에 고라 라는 사람과 그를 따르던 二백 五十 명은 모세의 지위를 탐해서 반란을 일으키다가 성경의 기록대로 땅이 갈라져서 삼 키운 바 되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의 왕위를 탐해서 반란을 일으켜 흉악한 일을 꾀하고 도망치다가 상투가 나뭇가지에 걸려 참혹한 피살을 당했습니다.
한국의 이조 오 백년의 역사를 보십시오. 단종 애사를 비롯하여 사색 당파의 파쟁(派爭)사를 읽어보면 얼마나 지위 및 권세에 대한 탐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피가 서울을 비롯해서 이 땅에 흘렀는가 말입니다. 미안한 말씀입니다 마는 오늘의 정계를 보더라도 아무래도 대통령 후보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큰 나라에서도 여당 야당 각기 한 명씩 세우고 투표하는데 이 작은 나라에 대통령 후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수가 있습니까. 대통령 후보 과잉이라고나 할까요? 외국에 수출이나 좀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 뿐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도 탐심으로 인하여 망한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살아 본 이는 다 압니다.
일제 시대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분이 들에 나가보니 조그만 뱀이 큰 두꺼비를 물고는 삼키지를 못해서 입이 찢어져 죽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형사에게 잡혀가서 죽도록 고생을 하고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본이 하던 것입니다. 조그마한 일본이 한국을 삼키고 만주와 중국을 삼키기는 했으나 두꺼비가 너무 커서 결국은 일본 제국이 죽었습니다. 탐심이 결국은 망쳤습니다. 무솔리니의 이태리아가 이렇게 망했고, 히틀러의 독일이 이렇게 망하였고, 오늘의 월맹이 이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개인이나 나라나 이 탐심에 끌려가다가는 망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사는 것이 재산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니라.』
(눅 十二·十五) 四복음을 보면 여러 사람이 예수 님께 와서 무엇을 구했습니다. 모든 구하는 것을 예수 님은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요구만은 냉정히 거절했습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찾아 와서『선생님 우리 형님을 권면해서 그 재산을 좀 내게 나눠주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하신 말씀이『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고 하셨습니다. 계속해서『누가 나로 하여금 재판장과 재산 나누는 사람을 만들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농사를 잘 하여 곡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창고를 늘이고 곡식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는 만족하여 스스로『내 영혼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여러 해 쓸 곡식을 가득 쌓아 놓았으니 평안히 먹고 지내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 미련한 자여 오늘 저녁 내가 네 영혼을 불러 가면 너의 쌓아둔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님의 비유입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 치 못한 자가 다 이와 같이 미련하다고 말씀했습니다.
톨스토이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가난한 농부에게 하루는 큰 부자가 와서『당신 지금부터 힘껏 뛰어서 내 농장을 돌고 오면 그 전부를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했습니다. 농부는 되도록 넓게 돌아서 해질 무렵에야 출발점에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쳐 죽고 말았습니다. 장사하면서 무덤 파는 이들이 둘러서서 하는 말이『이 사람에게는 땅 반 평이면 넉넉하구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탐심을 경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나라에 내려오는 말 가운데「욕심이 땅보다 두껍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나이 많은 분들 분명히 들으십시오. 나이가 많아질 수록 욕심도 커간다고 합니다. 동양의 성현들도 나이 많은 다음에 계지 재득(戒之財得)하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특별히 얻은 일에 대하여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옛날 다윗 때부터 내려오던 훌륭한 피리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이 피리의 소리를 듣는 많은 예배 자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 피리를 건사하는 이가 그것을 보다 잘 보존키 위해 전부 금으로 도금을 했던 거입니다. 그 후부터는 그 아름답던 소리가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분명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가슴에도 조금 잘못하면 이 탐심이 들어오기가 쉽습니다. 이 탐심이 들어오게 되면 하늘의 영광스러운 음악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동양 옛말에 황금흑사심(黃金黑邪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계명을 잘 지킬 수 있겠습니까. 도움될 만한 말씀 한 마디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탐심은 곧 우상이라.』(골 三·五)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탐하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속에 탐심이 움직이게 될 때에는 벌써 우리가 첫째와 둘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그대로 탐심을 따라가면 그 탐심 때문에 다른 나머지 계명들도 다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탐심이 무서운 죄인 것을 미리 깨닫자는 말씀이올시다.
둘째,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씀입니다.『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라.』(딤전 六·六-八) 사도 바울은 빌립보 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는 자족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풍부한데 처할 줄도 알고 빈곤한데 처할 줄도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전에 피사에 사디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너무 가난하여 신을 살수가 없어서 맨발로 거리에 나갔습니다. 그 때 마치 두 발이 없이 두 손만으로 무릎을 의지하여 기어가는 이를 보고는 마음에 있던 불편한 생각을 없앴다고 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생활의 향상을 위해서 경제 자립을 위한 노력을 중지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노력하되 믿는 이도 남의 것에 대하여 움켜쥐려고 하는 탐심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믿는 이는 어떤 환경에 있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가운데서 언제나 감사의 생활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기억합시다.
탐심은 근본적으로 자기 중심의 생활, 즉 이기주의에서 일어납니다. 탐심이 들어오게 되면 이것은 참된 신앙 생활은 아닙니다. 참된 신앙 생활은 나를 십자가에 못박고 살아 계신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해서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게 하시고 내 생활을 다스리게 할 때에 참된 생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만한 신앙 생활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고 주님의 사랑이 가득 차게 되면 탐심은 봄바람에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욕심 많은 사람도 자기의 아들이나 딸의 것을 탐하는 이는 없습니다. 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 가운데 영접해서 그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충만해지면 모든 사람을 한 가족과 같이 사랑하게 되고 탐심을 갖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만한 사랑을 가지고 주를 영접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一九六七년 四월 九일)

Ⅹ-37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 ①) (마태복음 五장 五-十五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 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六·九)

이 시간은 예수 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친히 우리에게 주신 교훈을 산상보훈에 기록된 대로 읽었습니다. 여기 보면 주님께서 특별히 주의하시는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 같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고의적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뜻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할 수 있는 대로 은밀한 곳을 찾아 기도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기도에 관한 교훈을 살펴볼 때에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들으라고 기도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가질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털어놓는 것보다 미사려구(美辭麗句)로 아름답게 꾸미자고 하는 경향을 혹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수사학 선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언제나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처럼 중언 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번 뜻 없이 말하지 말라고 우리들은 같은 말을 그냥 무심코 반복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최면술에 빠지게 하는 그런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중언 부언하지 말고 간단하고 솔직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거기에서 모범적인 기도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종종 외우는 주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주 기도를 전체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이 주기도문은 매우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어린아이들도 잘 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깊고 아주 고귀한 모범적인 기도입니다. 우선 우리가 주의해 볼 것은 그 간구(懇求)의 순서가 어떠한가 하는 점입니다.『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세 가지 간구가 있습니다.『이름이 거룩 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 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 지이다.』제일 처음에 드린 세 가지 간구는 전부 다 하나님께 드린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간구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인간 중심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중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가 자기 중심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몸 내 집 내 딸 내 아들만을 위하는 지나치게 자기 중심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가 이기주의적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내 뜻에 굽히도록 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굽히도록 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고 제일 큰 축복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 인간의 실제 생활에 필요한 간구가 세 가지 있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부터 구원받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여기 일용할 양식이란 것은 현재 매일 매일에 필요한 기도입니다. 죄 사해 달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상처를 회복해 달라고 하는 과거에 대한 기도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부터 구원해 달라고 하는 기도는 미래에 대한 기도입니다. 또 일용할 양식은 모든 것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성부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입니다.
죄 사해 달라고 하는 기도는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代贖)해 주신 성자 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장래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는 우리를 항상 인도해 주시는 성신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비록 이 기도가 간단하다고 하지만 육체에 필요한 모든 것, 심령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신 되시는 삼위 일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간단하나 모든 것을 포괄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이런 기도를 가르쳐 주셨으니 우리도 기도할 때 특별히 공중 기도를 인도할 때에 모든 것을 포괄하나 간단하게 기도하도록 힘을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주기도의 첫 마디를 오늘 아침에 묵상하고자 합니다.『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렇게 하나님을 찾으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실 깊이 생각해 볼 때에 이 말씀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 가장 간단한 결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께 대해 세 가지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시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시고,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기도는 아버지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에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보편적인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고 창조자이시므로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六十四장 八절에는『그러나 주는 우리 아버지 시니 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 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라.』말라기 二장 十절에는『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 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제사를 행하여 우리 열 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여기에서 이른 바 사해동포주의 (四海同胞主義)사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고 하는 사상이 여기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연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고 이런 의미에서 과연 우리 모든 인류는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인 의미 외에 특수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중생 한 이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뜻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 八장 四十二절 이하를 읽으면 예수 님께서 그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더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서 나서 왔음이니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 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그리고 바로 그 밑에 계속해서 이런 말씀이 잇습니다.『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여기에 보면 영적 견지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마귀의 아들이 구별됩니다. 요한 복음 일장 十二절에는『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 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서 난 자들이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중생의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회개하여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고 모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주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말은 어떤 뜻으로 말씀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둘째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참 자녀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이 틀림없지만 여기에「아버지」라고 하는 뜻은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녀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 기도는 참된 신앙의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였을까? 거기엔 여러 가지 깊은 뜻이 있겠지만 우리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분명히 인격적인 신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큰 원리가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무슨 큰 진리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같이 자아 의식과 지· 정·의(知情意)의 모든 인격적인 내용을 갖추신 인격적인 분이심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을 친히 아시고 우리 인간들의 기도 소리를 듣고 응답해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월성만 가지신 것이 아니고 내재성을 아울러 가진 분명히 인격적인 신이심을 예수 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기슭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즉 영원 자존자(永遠自存者)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잇고 기도를 드릴 수 잇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사상 배후에는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 풍부하신 아버지의 심성을 가지셨다고 하는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시 一0三편 八절 이하를 읽어보면 이 뜻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잇습니다.『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시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 않으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나』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도 영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을 지라도 돌아오는 탕자를 기다리시다 두 팔을 벌려 영접하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고 모든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아버지」라고 하라는 배후엔 섭리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쓸것을 미리 아시고 준비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여호와이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준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버지 되시는 분은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신령한 자녀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도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넷째, 하나님을「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배후의 사상은 아버지는 여러 자녀들 가운데도 특별히 약한 자녀들을 더 불쌍히 여기시고 더 사랑하시고 더 돌아보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아들이 병중에 있으면 그 아들을 더욱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아들과 과부들과 나그네들과 병자들과 갓난아이들과 불우한 환경 속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새로 믿는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이들도 사랑하십니다. 시험에 든 자도 불쌍히 여기십니다.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떠한 환경에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실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우리를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떠한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특별히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저 공중에 가만히 앉아 계시다는 뜻입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공간이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가까이 계십니다. 숨결보다 더 가깝고 수족보다 더 가깝습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존엄성과 초월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올시다. 온 우주를 다스리는 아버지올시다. 온전하신 아버지올시다.
인간의 아버지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온전하신 아버지올시다 사랑에도 온전하십니다. 지혜에도 온전하십니다. 권능(權能)에도 온전하십니다. 그러므로 자녀 된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언제나 경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께 순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순복하는 마음을 기르고 배워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에 더할 것은「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특별히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이시고 또한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 아버지가 아니고 우리의 아버지란 뜻입니다.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올시다. 이것은 믿는 자들의 형제 성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한 하나님 아버지 한 우주의 혈통을 통하여 새로 난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교파가 다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비록 신학 사상이 달라도 다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한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인종이 다르고 방언이 다르고 얼굴의 색 갈이 다를지라도 다 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모든 일이 협력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에큐메니칼(Ecumenical) 정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넓은 의미로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류의 아버지요 모든 인류가 우리 형제요 자매인 것을 이해하는 사상도 잊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늘 부르는 찬송가에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본래 영어로 된 찬송에는 참 아름다워라 아버지의 세계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를 볼 때 아버지의 세계로 보입니다. 이 우주는 아버지의 우주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우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깨달을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우주의 배후에는 우리 아버지가 계셔서 이 우주를 다스리니 우리는 두려울 것도 낙심할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아직도 참된 하나님을 찾지 못한 고아로 있지나 않은가. 내가 과연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었는가. 우리 가운데 아직도 여기에 관해 확신이 없는 자는 이 시간 성령께서 은총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내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예수 님을 온전히 구주로 영접하고 내 몸과 영혼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는 되었어도 탕자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영혼은 없습니까. 일찍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는 되었지만 아버지를 떠나 있는 자는 없습니까. 이 시간 돌아오셔서 온전히 아버지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一九六七년 二월 十八일)

Ⅹ-38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주기도문 ②) (누가복음 十一장 一- 十三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 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눅 十一·二)

지난 주일부터 주기도문에 대한 뜻을 생각하는 중에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주기도문의 첫마디가 되는「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구에 대한 뜻을 생각하였습니다.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 먼저 하나님께 대한 것을 간구(懇求)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먼저 하나님께 대한 간구가 세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도 첫째 되는 간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아침 이 기도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이스라엘 시대의 이름에 대한 관념은 오늘날 우리의 이름에 대한 관념과는 좀 다릅니다. 현대 우리 한국에 있어서는 아름의 뜻에 대해 별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저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인가를 지적하는 데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또 보통 부르기 좋으면 좋은 이름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이름은 흔히 세 글자로 되는데, 처음 글자가 성이요 다음 두 글자가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 두 글자 중에서도 실상 하나는 항렬입니다. 가령 한 경직이라는 제 이름을 보면 직(職)자는 항렬입니다. 제 사촌 육촌들이 모두 직 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제 이름은 경(景)자 하나 뿐입니다. 이렇게 저는 세 가지 이름을 갖고 있는데 제 아버지께서 이런 이름을 주실 때에 특별히 뜻을 생각하고 주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부리기가 좋은 것이니까 그렇게 지어주신 것 같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흔히 이름 석자를 쓰는데 성을 마지막에 쓰는 것이 우리와는 다르고 가운데 이름자는 보통 어머니의 성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이름은 하나로서 제일 처음에 있습니다. 이것은「크리스천 네임」이라 해서 성경에 잇는 이름을 흔히 씁니다. 요한 이니 야곱이니 마리아니 이렇게 씁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에서도 옛날에는 이름을 지을 때 뜻을 많이 생각한 것 같습니다. 특별히 여자에게는 이름을 주지 않았고 어렸을 적에 아명이라고 해서 아이들의 이름을 주었는데 그 때에 흔히 뜻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가령 어떠한 애들은 확실이 라고 불렀단 말입니다. 또 계집애가 나면 흔히「작은 머리」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얘기를 낳았는데 딸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곱단 이 라고 지었습니다. 예쁘다고 곱단 이 라고 한 것입니다. 얼마 후 얘기를 또 낳았는데 또 딸을 낳았습니다. 이번엔 이름을 무던 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딸을 낳으니 이번에는 얘기 이름을 서운 이라고 지었습니다. 좀 섭섭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또 얘기를 낳았는데 역시 딸이었습니다. 그만 이번에는 이름을 밉단 이라고 지었습니다. 여러 모매(母妹)님 가운데 혹 넷째 딸로 나신 분이 계신다면 용서하시고 들으십시오. 꼭 다 미운 것은 아닙니다. 하여간 이와 비슷하게 옛날 유대 사람들도 이름을 지을 때에 특별히 그 뜻을 생각하면서 지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본래 성이 없었습니다. 항렬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 나오는 이름을 보면 시몬이면 시몬, 야곱이면 야곱이라고 했지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이렇게 이름이 하나 밖에 없었지만 그 이름은 그 사람의 성질과 그 사람의 생활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가령 에서라는 이름을 볼 것 같으면「붉다」라는 뜻입니다. 붉은 털이 있다는 뜻이거나 혹은 붉은 팥죽을 먹은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야곱은「밀쳐내고 대신 들어앉은 자」란 뜻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해서 이긴 투사에는 이스라엘 즉, 승리자란 이름을 받았습니다.
아브람이란 이름은「아버지」란 뜻인데 나중에 아주 유명해진 후에는 아브라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건 큰 아버지 즉 할아버지란 뜻입니다. 여호수아는「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옛날 유대 사회에서는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과 생활 전체의 대표가 그 이름이었습니다.
같은 관념을 가지고 생각할 것 같으면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신성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九편 十절을 보면『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 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의 이름을 안다고 하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아무개의 이름을 안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 신지 아는 사람은 그를 의지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시편 二十편 七절을 보면『혹은 병거(兵車)를 의지하고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이런 글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의 권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十七장 六절에 보면 예수 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그저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어떠한 분이 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히 생각한 것입니다.
레위기 二十四장 十六절을 볼 것 같으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이라는 모세의 율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셋째 계명을 다 기억하실 줄 압니다.『여호와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우리가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의 거룩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의 뜻을 계속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 거룩이란 말은 본래 히브리말로 카돗이란 말의 번역인데 이 뜻은 무엇을 벤다는 말입니다. 칼로 무엇을 벤다는 뜻입니다. 베면 둘로 갈라집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구별, 즉 성별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한 것은 많은 백성 가운데서 갈라내어 하나님이 백성을 삼았다는 뜻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라고 한 것은 많은 나라 가운데서 갈라내어서 하나님께 속한 나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예배하는 집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집 가운데서 특별히 갈라내어 하나님께 바쳤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직분 가운데 목사의 직분을 특별히 성직이라고 하는 것은 많은 직분 가운데서 특별히 갈라내어 하나님께 속한 직분을 맡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갈라내어 하나님께 속한 자녀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하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적이고 세상 적인 것에서 성별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성, 하나님의 존엄성,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초월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六장을 볼 것 같으면 이사야가 본 환상 가운데 스랍들이『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말에는 성별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별이라고 하는 말에는 윤리적 의미도 포함됩니다. 그것은 성별과 무악과 흠이 없는 의와 사랑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진 선 미의 총체를 거룩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온전하신 우리의 아버지올시다. 하니 님께서는 이런 의미에서『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성결하고 의로우니 너희도 성결하고 의 로우라는 뜻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시편 二十四편에 보면『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자 누군 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정결하며 뜻을 허탄(虛誕)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거룩하다는 말은 윤리적 의미에서 씌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성별 되신 하나님이요, 인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은 윤리적 의미에서 온전하신 성품을 가진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면「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하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이미 거룩합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을 더 거룩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달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성경의 번역대로 읽는 것이 더 분명합니다. 그 이름이 거룩 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다시 말하면 인간 사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 히 여김을 받게 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곧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존경과 경외와 찬송이 이 땅에서도 다시 말해서 인간의 역사적 과정에서도 실현되게 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물론 거룩하지만 이 땅 위에서 반드시 거룩 히 여김을 받는 것은 아닌 까닭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 히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어떤 것이 요구됩니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十一장 六절 말씀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시는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 찌니라.』
현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땅 위에는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믿지 무신론자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불가지론(不可知論)자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회의주의자들도 많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거룩한 이름이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는 여러분은 다 잘 아십니다. 성경을 읽어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구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존재는 자명(自明)의 이치인 까닭입니다. 스스로 분명한 이치입니다. 또 이 성경을 쓴 이들은 하나님을 직접 체험해서 스스로 아는 이들이었습니다.
수학을 공부해보면, 특히 기하를 공부한 사람들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공리(公理) 혼은 정리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무엇인고 하니 증명할 필요 없이 스스로 분명한 이치라는 말입니다. 가령, 두 점 사이에 가장 가까운 거리는 직선이다―라는 공리는 증명할 필요 없이 자명의 이치입니다. 가령, 두 평행선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공리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자명의 이치라고 해서 정리 곧 공리라고 합니다.
성경에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의 존재는 정리입니다. 스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명한 얘기를 여러분도 다 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길을 가다가 길가에서 조그마한 회중시계를 얻었습니다. 이 분은 시계란 말을 전에 듣지는 못하고 시계를 보지도 못한 분입니다. 길가에서 얻은 시계를 보니 둥글게 되어 있는데 그 속엔 글자가 적혀 있고 분침과 초침이 있어서 하나는 천천히 돌아가고 하나는 빨리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은 시계를 가만히 드려다 보다가 이것이 어떻게 생겼을까―하고 말하지 않고 이것을 누가 만들었을까―하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렇게 질서가 있고 조직이 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니고 반드시 만든 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보면 시계와도 비슷합니다. 아침에는 동편에서 해가 떠서 점점 공중을 지나 저녁이 되면 서편으로 해가 집니다. 다음날 아침에 보면 그 해가 동편에서 또 올라옵니다. 그리고 다시 서편으로 집니다. 뱅뱅 돌아갑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또 봄이 오고 춘하추동 사시절이 뱅뱅 돕니다. 꼭 시계와도 같습니다. 이렇게 질서가 있고 조직이 있는 것은 만드신 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견지에서 보면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명의 이치올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가 분명한 것을 인간들이 부인하는 것은 큰 죄악인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입니다. 사람이 악하므로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생활을 보면 패괴 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겠습니까. 거룩하게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죄에 묻히고 무지에 묻힌 사람들에게 자명의 이치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을 알려 주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를 통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둘째로 신을 믿기는 하지만 신을 잘못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신을 바로 믿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월 성신 산천 초목 등 자연의 대상을 신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어 놓고 신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신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천황을 신으로 믿었습니다. 물질 우주와 창조주 하나님을 구별할 줄 모르는 범신론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소위 자연신론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만들기는 하였으나 자연 법칙에 맡겨 놓고 전혀 관계하지 않는 다고 하는 그릇된 사상을 가진 자도 많이 있습니다. 요사이 신학자들 가운데는 극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사신론(死神論)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도 혹 있는 거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바로 나타내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길이요 질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인간들에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바로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깨달아야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잇는 것입니다.
요리문답 제四 문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거기에 보면『하나님은 무엇이요?』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성서적 견지에서 해답해 놓은 대답을 읽을 때 들어보세요.『하나님은 신이 신데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이 무궁하시며 불변하시니라.』
우리가 숭배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이와 같은 신이올시다. 하나님을 바로 믿어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종종 모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 님께서는『너희들은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시면서 또한『내가 너희에게 분부하여 준 것을 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육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교육이 필요합니다. 옳은 종교 사상을 가르쳐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아주 중요한 거입니다. 우리 주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바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이 옳아야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거룩하게 여김을 받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합니다. 거룩한 무리라고 합니다. 그 말은 거룩 히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생활은 성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이름을 이 땅 위에서 거룩 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二장 六-七절을 읽을 때에 들어보세요.『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 위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들어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결된 백성들이었습니다.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불의를 행하고 음란을 행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힘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형벌 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二장 二十四절을 들어보세요.『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에게 모독을 받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는 백성으로서 그 생활이 추하고 아름답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엔 이런 일들이 없습니까?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별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조심하지 아니하고 실수하여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일은 없습니까? 깊이 자성할 문제입니다. 기억합시다.
안 믿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그것은 그 개인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저렇다고 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저런 것을 한다고 해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기독교의 논리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三장 二절에는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기록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편지가 되는 믿는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보고 그리스도를 판단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생활이 하나님을 모르고 주를 모르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르게 아릴 수 있도록 대변합니까? 우리는 어떠한 편지 구실을 합니까? 스스로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일거 일동 일거수 일투족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성결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희생과 봉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화평하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주는데 사랑으로 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예루살렘에 유명한 시릴 이란 목사가 주기도문에 관한 설교를 할 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가 본래 거룩하시다. 기도의 뜻은 본래 거룩치 못해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할 때에 우리 자신이 거룩해지고 우리가 거룩한 일을 할 때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는 까닭이다.』
옛날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사이프리안 목사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이 기도의 뜻은 그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여지게 하여 달라는 뜻입니다.』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말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 행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항상 여러 가지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할 기도는『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제일 자랑해야 합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달라. (一九六七년 二월 二十五일)

Ⅹ-39 나라이 임하옵시며 (주기도문 ③) (마태복음 十三장 二十四-三十五절)

『나라이 임하옵기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마 六
· 十)
오늘 아침도 계속해서 주님 가르친 기도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하나님의 이름이 거룩 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란 첫째 간구를 생각했습니다. 오늘 아침엔「나라이 임하옵시며」란 둘째 간구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여기「나라이 임하옵소서.」란 말은 당신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란 뜻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천국」이란 말로 늘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란 말로 나타납니다.
이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란 똑 같은 뜻입니다. 다만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 나라로 사용한 것은 유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를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하나님의 나라」를「하늘 나라」즉 「천국」으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一장 十四절에 보면『요한 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상보훈에 보면 마태복음 六장 三十四절에『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十三장을 비롯하여 二十五장과 그 밖에 주님의 여러 비유를 공부해보면 천국이 그 주제가 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나라라고 하는 말의 뜻을 우리가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의 나라라고 하면 흔히 그 나라의 땅 지리 혹은 국경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령 대한민국 하면 우리는 먼저 삼천리 강산을 연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뜻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나라라고 함은 지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통치 곧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온전히 다스리면 우리 마음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꼭 행하는 가정이 되면 그 가정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생활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다스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과 함께 천국은 임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님은 천국의 사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전파할 때에『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한 말씀은 예수 님을 통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임하였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과 또는 일반 사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서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가 속히 임하여 달라고 또한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교훈 하신 가운데 천국에 관한 교훈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만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로 천국은 어떠한 나라인가 주님께서 가르치신 본질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신령한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는 아닙니다. 예수 님께서 친히 빌라도에게 말씀하실 때에『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에 유대 사람들은 천국을 정치적인 혹은 경제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세상 적인 나라의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또 무리들이 예수 님을 붙잡아 왕으로 삼고자 할 때에 예수 님은 그 곳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 님은 세상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오신 분은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천국은 외적인 것이 아니고 내적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十七장 十七절과 二十一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였습니다.『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말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까지나 윤리적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十四장 十七절에 사도 바울은 기록하였습니다.『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지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十一장 八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인종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 천국은 어떻게 확대되고 어떻게 장성하는가에 대해서도 예수 님께서는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마태복음 十三장에는 여러 가지 천국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씨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씨를 뿌리면 땅에 묻혔다가 점점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가 맺힌다고 하였습니다.
혹은 겨자씨 한 알의 비유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지만 이것을 심으면 점점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이게 되는데 천국은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천국은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섞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누룩이 점점 부플 게 하여 온 덩이에 퍼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 거에서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확대될 것을 가르쳤습니다. 혁명적이 아닙니다. 진화적입니다. 급진적이 아닙니다. 점진적입니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입니다. 누룩이 가루 속에서 퍼지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 온 사회에 퍼질 때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인 인간 사회는 어떤 관계가 있겠습니까. 천국이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임하게 될 때에 점점 그 사회의 정치·경제·문화 각 방면에 영향을 끼칠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회를 점점 순화시킬 것이며, 점점 성화(聖化)시킬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온 사회를 도덕적으로 중생 시킬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악의 세력과 충돌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때로는 환난과 핍박도 의미합니다.
여러분께서는 한국 교회의 역사를 잘 압니다. 세계 교회의 역사도 잘 압니다. 종종 환난과 핍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고 하셨으며,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세상 나라에만 전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서도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전신(全身)갑주(甲胄)를 입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강하고 담대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신령한 전쟁에서도 때때로 부상자도 생기고 전사자도 많이 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자를 순교자라고 합니다. 스데반이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가 그러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마지막엔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十九장의 몇 절을 읽을 때 들어보세요. 十九장 十一절입니다.『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를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리 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鐵杖)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또 그 옷과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최후의 승리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다니엘이 일찍이 환상 가운데서 본 다니엘 七장 十三절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될 것입니다.『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 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또 그 때에는 계시록 十一장 十五절에서 사도 요한 이 본 그대로 실현될 것입니다.『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의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며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
최후 승리는 하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였습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천국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니라.』
그리고 아주 중요한 교훈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천국에는 어떠한 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을 어떠한 자인가. 간단 간단하게 제목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마음이 가난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산상보훈 첫 마디를 기억하십니까?『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마음이 겸손해서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산상보훈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八복 마지막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잘 믿으려고 할 때 핍박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핍박을 이기고 끝까지 믿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三장 三절에 보면 예수 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다시 말하면 온전히 죄를 회개하고 새로 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잇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十八장 三절을 보면『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들이 천진난만한 순진성 또는 부모를 절대로 의존하고 부모의 말이면 믿고 부모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린이의 의존성과 참된 믿음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인 줄 압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천국의 가치를 알고 천국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가져야 들어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마태복음 十三장에 나오는 천국의 비유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밭에서 큰 보화를 발견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다시 묻어 놓고 다른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혹은 이런 말씀으로도 비유했습니다.『천국은 어떤 장사하는 사람이 큰 진주를 발견하고 다른 모든 것을 팔아 이 진주를 산 거와 같다.』다시 말하면 천국은 가장 귀한 보배와 같이 귀중한 줄 알고 천국은 가장 큰 진주처럼 귀한 줄 알아서 이 천국을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희생하려고 하는 각오가 있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七장 二十一절은『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마지막 일곱째는 남의 죄를 용서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마태복음 十八장 二十三절을 볼 것 같으면「천국은 이와 같으니」라는 말씀으로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주인이 종에게 빚 일만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이 종은 갚을 것이 없습니다. 갚을 것이 없으니 용서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주인은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탕감을 받고 나온 종이 자기에게 일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친구를 만나서 자기의 빚을 갚으라고 목을 잡고서 강요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빚을 다 갚기까지 감옥에 다 집어넣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안 주인은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던 것을 취소하고 말았습니다.
형제들이 우리에게 더러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백 데나리온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일만 달란트와 같은 죄입니다. 이와 같은 죄를 용서받았으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땅 위에는 여러 나라가 있습니다. 一백여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견지에서 보면 나라는 둘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요 또 하나는 사탄의 나라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어느 나라에 속하는가, 이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어떤 나라에 속하는 가, 이 두 나라 사이에는 끊임없는 싸움이 있습니다.
나는 이 우주적 투쟁에 있어서 어느 편에 서서 싸우는 자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 대한민국의 시민권이 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부족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미 말씀하였지만 마음이 가난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겸손히 내 죄를 깨닫고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내 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으로서의 생활이 반드시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으로서의 생활은 참 기쁘고 행복 된 생활입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의 즐거움을 너희에게 주노라 나의 주는 즐거움은 뺏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옥에 있어서도『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이십세기와 우리가 사는 이 땅을 보세여. 얼마나 죄악이 많고 재난이 많고 고통이 많고 눈물이 많고 피 흘림이 많고 온갖 전쟁과 비극이 이렇게 많습니까? 왜 이런 세상이 되었습니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고 그 뜻을 떠나서 자기의 욕심 자기의 사욕 자기의 정욕 자기의 물욕 자기의 권세에 움직여서 사는 까닭에 결국 이런 세상이 된 것이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우리 인류가 구원을 받으려면 온 인류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에 준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서 속히 이 땅 위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이 기도를 드린 다음에는 이 기도가 속히 응답되기 위해서 행동으로도 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의 복음을 전파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一九六七년 三월 三일)
Ⅹ-40 뜻이 이루어지이다 (주기도문 ④) (누가복음 二十二장 三十九-五十三절)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六·十)
오늘 아침 주기도문을 계속해서 생각하기로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 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까지 생각했습니다. 오늘 아침 계속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이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뜻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그런 말입니다. 이 기도는 아주 고귀한 기도입니다. 또 깊은 기도입니다. 그리고 배우기 어려운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기도를 바로 배워서 이 기도대로 행하면 과연 우리에게 큰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기도와 주님과의 관계를 기억하십시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또 친히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성경 봉독(奉讀)할 때 다 들으셨겠지만 예수 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고는 계속해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또 요한 복음 六장 三八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하늘로서 내려옴은 내 뜻대로 행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자기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오신 목적 그리고 생활의 원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요한 복음 四장 三十四절에는 이렇게도 말하였습니다.『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하나님의 뜻을 해하는 것이 그에게는 양식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아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참된 만족과 즐거움을 얻는다고 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가 나의 자매요 나의 형제요 나의 모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주님의 가족,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여러 기도 중에서 가장 중심 되는 간구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먼저 이 간구의 뜻을 분명히 파악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말 가운데「하늘」이란 무슨 뜻일까요? 어떤 분은 말하기를 하늘이란 일월 성신을 포함한 이 대우주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대우주가 이렇게 크지만 이 모든 천체가 하나님께서 내신 자연 법칙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이 지구는 자전하고 우리는 아침마다 동쪽으로 뜨는 아침 햇빛을 보며 저녁에는 서쪽으로 지는 저녁 햇빛을 봅니다. 혹은 태양도 공전을 쉬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옵니다. 이렇게 대자연계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엔 그런 뜻이 아닌 줄 압니다. 여기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계를 의미하지 않고 하늘 나라를 의미하는 줄 압니다. 쉽게 말하면 천당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 나라에서는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 졌습니다. 하늘에 있는 천군 이나 천사들이나 스랍 들이나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합니다. 그리하여 거기는 언제나 생명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찬송이 있습니다. 무궁한 안식이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땅은 어떠합니까. 땅에는 고통이 많습니다. 눈물이 많습니다. 공포와 싸움이 많습니다. 질병이 많습니다. 사망이 있습니다. 왜? 땅에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사는 인간들은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려 주셨지만 그 양심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그 율법을 좀 더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지만 그 뜻을 알고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오늘날 보는 거와 같이 이 비참하고도 패역 하고 음란한 세대가 된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이런 인간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여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만민을 구속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행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너희들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기도를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의 그 땅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 먼저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기도해야 될 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는 먼저 내 자신에게서도 이루어 주시옵소서―이렇게 해야 될 줄 압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四장 三절을 보면『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하므로 자기 아내를 취할 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과 같이 색욕(色慾)을 좇지 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결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내었습니다. 이 음란한 세상 가운데서 성결하게 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도답게 살기 위하여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내 자신을 성결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전서 五장 十六절-十八을 여러분도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무슨 말이 있는지 아십니까?「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자신이 거룩할 뿐더러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한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거룩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사람의 생활은 우울한 생활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에 쌓인 생활이 아닙니다.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생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중고 시대의 성자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들의 생활은 거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에는 기쁘고 감사한 열이 부족한 것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신약 시대를 보든지 一, 二세기의 신자들을 보면 그들은 거룩한 생활을 할 뿐더러 언제나 기쁘고 즐겁고 감사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한 생활을 하는 것을 우리도 우리 생활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산상보훈을 다 잘 아십니다.『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한 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이 세상도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은 바와 같이 우리도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옳게 찾아서 하나님의 뜻 그대로 꼭 순종하는 것을 우리 생활의 원리로 삼으면서 이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 기도를 어떻게 드릴까『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이 땅은 온 땅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전 세계를 의미하는 줄 압니다. 물론 먼저 내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 되도록 시작할 것이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가정 내 동리에서도 내 나라에서도 아니 온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힘쓸 것입니다.
특별히「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란 말의 뜻을 생각해 보세요. 하늘 나라에는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 있는 성도는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말의 뜻은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도 빠짐 없이 다 구원을 받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마태복음 十八장 十四절을 보면『이 소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고 이 모든 인류를 구속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고 이 기도가 이루기 위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의 사정을 잘 몰라서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늘에서는 모든 방면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없는 줄 압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땅에서도 어떤 방면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방면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방면, 경제적 방면, 사회적 방면, 문화적 방면, 그 밖에 국제적인 면 등 그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만 되면 우리 정계에서도 부정과 부패가 물러 갈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과연 우리 사회에는 정의와 평화를 이룰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만 온 세계에 평화가 이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의 각 방면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온전히 모든 방면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이 땅이 하늘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목적을 위해서 항상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그리고「이 땅에서도」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우리 인류에게만 그치는 말은 아닌 줄 압니다. 로마서 八장 二十一절 二十二절을 보면 이런 이상한 말이 있습니다.『피조물 즉 우리 인간 이외의 자연물인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을 받는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모든 피조물까지도 섞어지고 종이 되는 데서 해방을 받아서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까지 이르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자연계까지도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았습니다. 사실 가만히 보면 자연계에도 여러 가지 모순이 많습니다. 지진이 있습니다. 화산이 폭발됩니다. 폭풍우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는 천재 지변이 많습니다. 생물계를 보면 다윈이 지적한대로 그야말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비참한 생존 경쟁이 있고 적자 생존 자연 도태의 현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三장 十六절에『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였는데 그저 세상이라고 하는 말은 세계라는 뜻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셨지만 사람만 사랑한 것이 아니고 세계까지도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있는 대로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온전히 이룬 것 같이 이 땅의 인간 세계에서도 온전히 이룰뿐더러 마지막에는 모든 피조물에게까지도 이루어져서 만물을 새롭게 해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게 해 달라는 깊은 뜻이 이 기도 가운데 있는 줄 압니다. 바로 금년 여름에 스웨덴 웁살라 에서 모인 세계 기독교 협의회의 주제가「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 제목으로 성경을 연구하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가 여기에 포함된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셋째로『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기도에서 뜻이라고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입니다.『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내 뜻도 아니고 다른 인간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우리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른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인간은 흔히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때가 많습니다. 또 내 뜻이 이루어져야 참 행복이 올 줄로 그릇 생각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보다 높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인간의 뜻보다 낫습니다. 우리 인간은 현재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래도 보십니다. 우리 인간은 외계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속까지 보십니다. 우리 인간은 현실 세계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세계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무슨 일이든지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제로 이와 같은 기도가 항상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실패를 당면할 때도 있습니다. 큰 환난을 당면할 때도 있습니다. 역경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큰 슬픔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때에 이 잔이 떠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과 같이 어떤 자리에서든지『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하는 이 말을 다시 첨가할 줄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때에 최종적인 축복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줄을 아는 이에게 참된 심령의 평화가 오는 것이요 최종의 큰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신 후에는 조용히 담대하게 십자가를 대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八장 二十八절을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모든 일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굳게 믿고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최종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시인 가운데 힛키어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유명한 시 가운데「영원한 선(eternal goodness)」이라고 하는 시가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나는 모르노라 어디 그의 섬들이 솟았는지 그 넓은 종려나무 가지가 공중에 퍼졌는지 다만 내가 알기로는 그의 사랑과 보호 밖으로 내가 표류할 수 없으리라.』인간은 작은 배를 타고 망망한 대해에 떠다닙니다. 어디에 섬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디에 넓은 종려나무 가지가 나타날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저 표류해 갑니다. 그러나 신앙 있는 사람은 분명히 아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의 범위를 떠나서 표류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고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신앙 가운데서 우리는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내 뜻보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이다.」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중고 시대의 유명한 성자 가운데 토마스 아 켐피스 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런 기도문이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읽을 때 들어보십시오.『오 주여, 주께서 더 나은 길을 아십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이나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원하시는 것만큼 또 주께서 원하실 때에 주시옵소서. 꼭 주님의 존귀를 위하여 나에게 행하시옵소서. 주께서 보내시고 싶은 곳에 나를 보내시고 만사에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나는 주의 손에 있사오니 바퀴처럼 마음대로 돌리옵소서. 나는 주님의 종이올시다. 무엇이나 명령대로 하겠나이다. 나는 나를 위하여 살기를 원치 않나이다. 주님만을 위하여 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이시여, 오 주님이시여, 오직 온전히 가치 있는 주의 종만 되게 하여 주옵소서.』 (一九六七년 三월 十七일)

Ⅹ-41 일용할 양식 (주기도문 ⑤) (마가복음 八장 一-十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六·十一)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생각합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제일 먼저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세 가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위한 기도, 그의 나라를 위한 기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달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 인간 생활에 있어서 아주 필요한 것 세 가지에 대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 중 첫째가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먼저 여기서 양식이란 말을 무슨 뜻으로 쓰셨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될 줄 믿습니다. 양식이란 말의 원어는 직역하면 떡이란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이나 서양 사람들은 매일 떡을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양 사람들은 매일 밥을 먹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양식이라고 번역한 줄 압니다.
그러면 양식 즉 떡을 주시옵소서 라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어떤 학자들은 이 양식을 신령한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매일 먹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더 깊이 들어가서 양식이란 것은 신령한 의미로 그리스도가 자신을 가르치신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사실 요한 복음 六장 三十五절을 보면『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 님과 접촉해야 산다는 것입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은 성찬의 떡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의미에서 성찬의 떡을 매일 먹어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령한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또 그 진리가 다 사실입니다.
과연 예수 님은 우리의 생명의 떡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과연 생명의 양식이요 또 성찬도 과연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쳤을 때에는 그런 뜻 같지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는 그런 신령한 의미보다 사실 물질의 양식을 의미한 줄 생각합니다. 다만 육신을 위한 양식을 달라는 기도인 줄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철학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을 물질이라고 해서 천대시하는 초대 교회의 노스틱 사상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상을 가진 자는 육신을 괴롭혀야 한다는 생각에서 고행주의를 강조했던 사실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근본 교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육신을 존중히 여겼습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것처럼 많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시고 민망히 여겨 떡 일곱 덩이를 가지고 사천 명을 먹이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또 떡 다섯 덩이를 가지고 오 천 명을 먹이신 이적도 행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육신이 병든 자를 불쌍히 여겨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물질인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 육신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만인의 죄악을 대속(代贖)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님께서는 물론 우리의 영혼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지만 영혼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육체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내가 온 것은 너희가 생명을 얻어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라.』하신 것은 그것을 의미하는 줄 압니다.
또 육신의 부활에 대한 교리도 우리 인격 전체가 구원을 얻을 날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줄 압니다. 육신을 이렇게 귀중히 여기신다고 하면 육신이 살아가는데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래서 육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이것이야 사람이 노력하면 먹을 수 있는데 기도가 무슨 필요가 있나?』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 이 원인만 알고 제일 원인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채소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곡식 종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곡 백과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주어서 곡식을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고 성숙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시면 시편 一二七편 三절의 말씀처럼―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고 수고의 떡을 먹는 것이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일용할 양식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육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 둘째로「오늘날」이라고 했습니다.「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했는데 특별히「오늘날」이라고 강조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오늘의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는 그런 뜻이올시다. 오늘 살기에 꼭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을 주시는 방법은 한꺼번에 주시는 것이 아니고 매일 그날에 필요한 것을 계속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올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어떻게 주셨습니까? 매일 매일 주신 것입니다. 그 날 먹을 만큼 주신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의 경륜인 줄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이 매일 하나님을 앙망(仰望)하게 된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매일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새 날을 주시는 하나님은 매일 새 양식을 주시고 새 힘을 주시고 그날에 필요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올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였습니다.『내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이것은 장래를 위한 염려나 준비를 전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닌 줄 압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은 개미만도 못하고 벌래 만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은 내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올시다. 오늘의 염려는 오늘에 제한 할 것입니다. 내일은 하나님께 맡길 것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뿐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주님이올시다. 내일도 변치 않으실 것입니다. 이 주님을 의지하고 먼저 오늘의 양식을 위해 구할 것입니다.
또「일용할 양식」이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꼭 필요한 양식 혹은 족한 양식이란 의미인 줄 생각합니다. 잠언 三十장 八절을 보면『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란 기도가 있습니다. 산해 진미 만반(萬飯) 진찬(珍饌)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족한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화려하고 사치한 의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입을 만한 소박한 옷을 구하는 것입니다. 고루 거간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살만한 아담한 집을 구하는 것입니다. 도에 넘치는 욕심을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항상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이 기도 가운데 기억해야 할 만한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씀입니까?『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내게」가 아니고「우리에게」입니다. 개인 기도가 아닙니다. 사회적 기도입니다. 나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전 인류의 하나로 생각해서 같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0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현대에서 경제적이란 말이 많이 쓰입니다. 생존 경쟁이란 말도 이따금씩 듣습니다. 심지어 약육강식이란 말도 듣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치 사나운 이리가 큰 고기 덩이를 물고 굶주리는 다른 짐승을 흘겨보면서 혼자 먹는 현상도 이따금 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먹을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 발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올바른 경제분배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의 결함이 흔히 여기에 있습니다. 최근 여러분께서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한국 경제 상태를 평가하는 교수단의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한국 경제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富)가 편재되어서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형편에 있은 즉 앞으로는 이 부의 분배에 대해서 역점을 두라고 한 것입니다. 아주 적절한 충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노동자의 임금도 높여야 합니다. 장차 노동자에게도 주(株)권을 나누어 줄 때가 와야 할 것입니다. 농민 정책을 바로 해서 일반 농민들에게도 경제 발전의 혜택이 균점(均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경제에 관한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재산의 관한 훌륭한 교훈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물론 공산주의를 인정한 데가 없습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임시로 인간이 위탁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인간은 청지기입니다. 모든 재산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간에게 재산을 맡긴 것은 공동 사회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유익하게 사용하라고 맡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으로 쓸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비록 재산을 자기의 노력으로 벌었다고 해도 이기적으로 쌓아둘 권리는 없습니다. 예수 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서 이런 죄를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자선이 아닙니다. 정의입니다. 공의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이런 얘기를 흔히 했습니다.『배고픈 사람이 무엇을 달라 하면 언제나 주라. 그 사람이 남의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 것을 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 식물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신 것이다. 여기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거기 보면 부자가 특별히 악한 일을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을 보면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양식을 같이 나누어 먹지 않음으로써 불의를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이 부족한 때문이 아닙니다. 넉넉합니다. 분배가 바로 되지 않는 때문이올시다. 공산주의를 막는 유일한 길은 이 기독교의 원칙을 실행해서 개인 생활에 적용하고 경제 생활을 개혁해서 모든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같이 먹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기도와 인간의 의무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모든 기도와 같이 이 기도에도 의무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물론 만나는 그저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매일 아침 나가서 하루 먹을 것을 거두어 와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종자를 주었습니다. 오곡 백과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주어서 성장케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종자를 심고 김매고 가꾸고 거두어야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부모가 서너 살 난 아이에게 밥 먹여 주는 거와 같이 입벌리고 숟가락으로 퍼 먹여 주듯 먹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여야 하지만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기도는 죽은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일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정직히 힘써 일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 또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부정한 수단으로 먹을 것을 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까닭 없이 구걸하고나 남의 양식을 먹어서도 안 됩니다. 사회의 기생충 생활을 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욱이 우리 모든 인간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이들은 나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동포가 굶주리지 않도록 경제를 발전시키며 균등하게 분배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투쟁할 것입니다. 고층 건물이 이곳 저곳에 올라가는 것은 대단히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저 산등성에 혹은 뒷골목에 있는 오막살이들을 볼 때 실로 기가 찹니다. 우리 한국에는 아직도 배고픈 동포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해 지방의 동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의 젊은 몸을 인육 시장에 파는 소위 윤락 여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실직하고 일할 곳이 없고 먹을 수 없어서 심지어 한 가족이 집단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슬픔 가운데 배고픈 슬픔이 제일 슬프다는 얘기를 제가 어렸을 때에 우리 아버지에게 들었는데, 언제나 이 말이 기억됩니다. 배고픈 슬픔이 아주 큰 슬픔입니다. 우리는 내 스스로 굶주림에서 면할 뿐만 아니라 우리 동포가 다 같이 굶주림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이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이렇게 충심으로 기도할 것 같으면 우선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봉사 주일입니다. 왜 이런 주일을 특별히 정했습니까? 할 수 있는 대로 굶주린 동포들과 같이 나누어 먹기 위해서입니다. 몇 번이나 이 주일에 협력하였습니까? 또 직장에서나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이런 사회 이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분투하고 투쟁해야 하겠습니다. (一九六八년 三월 二十四일)


Ⅹ-42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기도문 ⑥) (마태복음 十八장 二十一-三十五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六 ·十二)
주님의 기도를 우리가 생각하는 중입니다. 먼저 세 가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배웠습니다.『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기도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첫째는『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지난 주일에 생각하여 보았고 이 시간에는 둘째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를 생각하여 보고자 합니다.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육신이 살기 위하여서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영혼이 살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먼저 죄라고 하는 말의 뜻을 분명히 파악할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여기 죄라고 하는 헬라어 원어「호페일레마」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빛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직역할 것 같으면『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옵소서.』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빚이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할 의무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에『나는 헬라 사람이나 유대 사람에게나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로라.』이런 말씀을 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책임 의식을 표현한 것입니다. 초대 교리에 있어서 유명한 주석 자 오리겐 이란 학자는 세 가지 면으로 분석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우리는 가족에 대해 빚이 있습니다. 이웃에 대해 빚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대해 빚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대해 빚이 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지킬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마땅히 행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오리겐은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빚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육체에 대해서도 빚이 있습니다. 우리 육체를 건강하게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육체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 우리 마음에 대해서도 빚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생각하고 판단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영혼에 대해서도 빚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영혼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고 우리 영혼을 성결하고 경건하고 존절히 지켜야 할 책임이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빚이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의 맘과 뜻과 성품과 정성을 다하여 섬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주님께 대해서도 빚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기 위하여 피로 값을 주시고 우리를 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헌신할 의무가 있습니다. 봉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희생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도 빚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모든 지도에 우리는 순종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해석을 들을 때에 주목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하는 것이 물론 죄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하지 않는 것도 역시 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빚진 자요 우리는 다 죄인이올시다. 누가복음 十一장 四절에도 주기도가 있는데 여기에도『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어를 읽어보면 죄란 말을 딴 글자로 썼습니다.「하말티아」라고 하는 일반적인 죄를 표시하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물론 헬라 말이 아니고 그 당시 유대인들이 쓰던 아랍어를 쓰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태가 헬라 말로 복음을 기록할 때에는 유대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빚」이란 말로 번역했고, 누가는 헬라 사람들이 얼른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 하말티아 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말티아 라고 하는 말의 근본 뜻은「과녁을 맞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활을 쏠 때에는 화살로 그 과녁 중심을 맞추어야 하는데 과녁을 맞추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 죄라고 헬라 사람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바로 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인간으로써 마땅히 되어야 할 옳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인생으로써 목표를 바로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할 때 우리는 다 죄인이올시다. 우리는 과녁을 똑바로 맞추지 못한 죄를 범한 사람들이올시다. 사도 요한 은 요한 일서 三장 四절에 죄가 어떠한 것인가를 가장 간명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말티아 란 말을 쓰면서 죄는 곧 불법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에 법이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모세의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지으시고 그 속에 자연 법칙을 둔 것입니다. 이 자연 법칙을 어기면 우리가 손해를 받습니다. 형벌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시고 또 우리 인간이 마땅히 해야할 도덕의 법칙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행하지 아니하는 것은 죄입니다. 요리문답을 보면 제十四문에『죄가 무엇이뇨.』『죄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또는 어기는 것이라』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꼭 지키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 말씀에로『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시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 은 요한 일서 一장 八절에『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죄가 없다고 하면 그는 스스로자기를 속이는 것뿐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성경을 보면 가장 성결하게 생활한 사람일 수록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나는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 님 앞에 절을 하면서『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 때에 죄를 많이 짓고 행한 바리세인들은 자기들은 죄가 없는 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바리세인은 성전에 가서 기도하기를『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합니다. 난 호색도 불의도 행치 아니 하였습니다. 나는 세리와도 같지 아니합니다.』라고 하면서 죄 없는 줄 생각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가장 큰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말이란 것을. 또 한 가지 기억합시다. 우리가 누구에게든지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녀요 하나님께 속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 사람에게도 용서함을 받으려니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죄를 사하여 주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죄에는 값이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올시다. 죄 사함을 받아야 죄인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양심의 평안과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죽어도 살 수 있는 영생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권면 하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영혼이 사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님께서는 죄 사함을 우리 인간에게 주실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도 우리로 하여금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세리와 같이『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이렇게 나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 기도를 드리는 이들이 꼭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님께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주 기도를 가르친 후에 마지막에 이런 해석을 또 하셨습니다.『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우리 주님께서는 이 진리를 여기만 아니고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령 여덟 가지 복을 가르쳐 주실 때『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는데 그 말속에는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긍휼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七장 二절에는『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도 헤아림을 받으리라는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十八장에는 그 유명한 一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一만 달란트나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지금으로 말하면 큰돈입니다. 이것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종은 임금 앞에서 이렇게 빌었습니다.『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참아 주옵소서.』그 임금은 불쌍히 여겨서 그렇게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나오다가 동관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동관은 그 사람에게 일 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그 일 백 데나리온은 아주 적은 돈입니다. 한 一백원쯤 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빚진 동관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관은 현재 갚을 길이 없으니 조금만 참아주면 앞으로 갚겠다고 했지만 당장 내라고 하면서 목을 쥐고 야단을 하다가 마지막엔 그 빚 때문에 옥에 가두었습니다. 다른 동관이 그것을 민망히 여겨 임금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임금이 그 말을 듣더니 노해서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던 그 종을 불러다가『내가 너를 불쌍히 여겨서 이렇게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다면 너도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하면서 탕감해 주었던 빚을 취소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시고 나서 예수 님께서는『너희가 네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 가운데 예수 님께서는 두 가지 진리를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는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一만 달란트 만큼 많고 사람이 내게 짓는 죄는 一백 데나리온 만큼 적은 죄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중에 혹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성경에 다른 곳을 보면 죄만 회개하고 주만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다고 했는데 왜 여기서는 예수 님께서 꼭 남의 죄까지 용서해 주어야 죄 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쳤는가? 이것은 너무 심하지 않는가?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자기 죄를 깨닫고 참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내 스스로 구원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서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그런 심령을 가진 이가 있다고 하면 내게 잘못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실상은 자기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지 깨닫지 못하고 회개치 못한 사람이올시다.
그러므로 자연히 자기의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一만 달란트나 되는 나의 죄를 깊이 깨닫고 참으로 회개하였습니까? 내가 갚을 수 없는 줄을 알아서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 믿고 십자가만 의지합니까? 그런 이들은 다른 죄인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용서해 줄 것입니다.
영국의 요한 웨슬레란 목사가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 원수 된 사람과 서로 화해하라고 간절히 권면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도무지 그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놈의 죄는 내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고집을 합니다. 그러자 요한 웨슬레가 하는 말이『그렇다면 당신은 절대로 죄를 안 지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절대로 죄를 안 지을 수 잇겠습니까? 우리는 다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용서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개의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용서하십시오. 그래야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내 죄의 사함을 받게 됩니다.
지금은 사순절이올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얼굴을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손에 못을 박는 그 악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기도의 가장 심각한 면을 한 마디 더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우리가 우리의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시고.』여기 마태복음에서는 과거사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사로도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원어대로 보면『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거와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영어 성경엔 이렇게 번역한 것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그 정도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뜻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형제의 죄를 사하여 주지 않으면서 이 기도를 드린다면 내 죄도 사하여 주지 마옵소서란 뜻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기도는 드리기 힘들다고 합니다. 함부로 드리기 어려운 기도라고 주석 가들은 지적을 합니다. 마틴 루터는 시편 一0九편 七절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시편 一0九편 七절을 보면『저거 판단을 받을 때 죄를 짓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이란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이 기도를 드리면 내게 죄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문학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란 사람은 문학가이지만 매우 경건한 사람이올시다. 매일 아침 자기 집에서 가정예배를 보고 마지막에 주기도로 끝을 맺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온 가족이 모여서 가정 예배를 보다가 주 기도를 할 시간이 되니까 갑자기 일어나서 딴 방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이 스티븐슨은 몸이 항상 약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인은 갑자기 몸이 아픈가 염려해서 기도를 마치고 옆방으로 달려가서『어디 몸이 불편합니까?』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이가 천천히 대답하기를『아니요. 내 몸은 불편하지 않아요. 내 마음이 불편해서 내가 주기도문을 드릴 수가 없군요.』분한 마음,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이 주 기도를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면서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분을 품은 이가 있습니까? 어떤 분에 대해 분을 품은 이가 있습니까?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 사함을 받아야 영혼이 삽니다. 구원을 얻습니다. 죄 사함을 우리가 받았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습니까? 내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줄 알아서 십자가를 붙듭니까? 형제의 죄를 사하시면서 기도를 하십시오. 이사야 一장 十八절에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리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우리는 다 붉은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 회개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습니다.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이 사죄의 축복입니다. 최대의 기쁨도 이 사죄의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찬송 다 잘 부르시지요.「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 하도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천국의 축복을 세상에서 받기를 원하십니까?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내 죄를 회개하고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하면서『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一九六八년 三월 三十一일)
Ⅹ-43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주기도문 ⑦) (마태복음 六장 五-十五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六·十三)

그 동안 특별한 주일 외에는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계속해서 생각하여 왔습니다. 지금까지 여섯 가지 간구(懇求)를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 대한 간구가 세 가지입니다.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달라는 것과, 나라가 임하게 하여 달라는 것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간구 세 가지를 가르쳐 주었는데 첫째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요, 둘째는 죄 사함을 얻게 하여 달라는 기도요, 셋째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매일 매일 필요한 기도입니다.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 필요한 기도입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여 달라고 하는 기도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드리는 간구입니다. 오늘 이 시간『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마지막 간구를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가는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험악합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문자 그대로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이러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잇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근신하여라.』『깨어 있으라.』『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깨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여기 시험이라고 하는 말의 뜻을 분명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으나 간단하게 말하면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련이란 뜻이 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누구나 시험을 칩니다. 시험을 치는 목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학생의 실력을 알아보자는 데 있고 또 하나는 이런 시험을 통하여 학생으로 하여금 더 공부하도록 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의미의 우리 신앙 생활하는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창세기 十二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독자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산에 올라가서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은 시련의 의미올시다. 베드로 전서 一장 六절과 七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이와 같이 시련의 의미의 시험이 있습니다.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一장 二절에『내 형제들아 너희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또 一장 十二절에 이렇게 말합니다.『시험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함은 받은 후에야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니라.』이것은 다 시련의 의미올시다. 욥과 같은 사람은 이런 의미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험을 이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을 시험하십니다. 시련을 주기 위해서 인간을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시험이라고 하는 꼭 같은「페이라스모스」란 말을 했지만 의미가 다른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혹이란 의미의 시험입니다. 유혹, 다시 말하면 죄에 빠지도록 이끄는 시험이 있습니다. 가령, 에덴 동산에서 악한 마귀가 뱀을 통하여 해와를 시험했습니다. 이것은 유혹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속이면 서 유혹을 했습니다. 혹은 광야에서 악한 마귀가 예수 님을 세 가지로 시험했습니다. 이것도 유혹이올시다.『돌로 떡을 만들어라.』『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세상 영광을 보이면서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노라.』이것은 유혹입니다.
혹은 바리세인들이 종종 예수 님을 책잡기 위해서 시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유혹입니다.『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이런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런 의미의 모든 시험을 이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의미의 시험을 인간에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악한 마귀가 하는 시험이올시다.
그러면『시험에 들지 말게 하여 주옵시고.』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시험을 아주 없게 해 달라는 뜻은 아니 줄 압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뜻은 글자대로 시험에 들지 않게 빠지지 않게 곧 시험을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요한 복음 十七장 十五절에 보면 예수 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내가 뵈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게 함이 아니오 오직 악에 빠지지 않고 보전하기 위함이니이다.』시련을 당할 때에도 여러 가지 환난과 재난을 당할 때에도 욥과 같이 담대히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유혹을 당할 때에도 주님과 같이 요셉과 같이 담대히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련이나 유혹이나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시험을 통해서 새 힘과 새 은혜를 받는 것도 또한 사실인 것입니다. 시험을 통해서 새 힘과 새 은혜를 받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의 글귀를 또 하나 넣었습니다. 시험을 이기면 자연 악에서 구함을 받습니다. 여기에서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여기에서 번역된 대로『악에서 구하소서.』다시 말하면 나로 하여금 악한 일을 행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디모데 후서 四장 十八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주께서 모든 악한 일에서 나를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시리니.』그러나 우리가 다른 의미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악한 자에게서 구하소서」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탄을 의미하게 됩니다. 곧「악한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 주옵소서.」하는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이 세상에는 각계 각층의 악이 세력이 있습니다. 정치나 경제나 사회나 문화나 사상계나 국제간에나 어디를 막론하고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이 사탄의 세력에서 구원을 얻어 피해를 입지 않고 승리하게 해 달라는 뜻일 것입니다. 실상 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 우리의 육체, 우리의 명예, 우리의 재산, 우리의 자손을 악의 세력에서 건져 주시고 악한 길에서도 건져 주어서 옳은 길을 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약한 것을 기억하고 세상이 얼마나 안한 것을 생각할 때에 이 기도가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매일 매일 드려야 하며 아니 매시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실 이 기도를 정성껏 드린다고 하면 이 기도에 따르는 우리의 할 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말하였지만 우리가 이런 기도를 간절히 드리면 성경에 있는 말씀처럼 범사에 근신하고 깨어서 조심성 있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시험에 빠지기 쉬운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은 마치 자기 손가락을 불에 넣고 있으면서 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시험이 어디서 오는 것을 미리 알고 항상 근신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여러 가지 길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말해서 보통 세 가지 길을 통해 우리를 시험합니다. 첫째는 물질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롯이 푸른 풀을 찾아 소돔과 고모라 지방에 갔다가 큰 낭패를 본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아간 이란 사람이 은 금을 탐해서 도적질을 했다가 큰 참화를 입은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유다란 제자가 은 삼십 량에 예수 님을 팔았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탐심을 통해서 항상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탐심을 금해야 합니다. 물질을 어떻게 얻으며 물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의 뜻대로 하도록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돈을 버는 데에도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데에도 시험이 있습니다. 옳은 길을 택하여야 될 것이고 써야할 때는 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은 돈이 필요하지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근본이 된다고 경고합니다.
둘째로 항상 악한 마귀는 남녀 관계를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지혜 있는 왕이었지만 정욕으로 말미암아 마지막엔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정욕을 통한 시험으로 말미암아 쓰러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세상의 영광 명예 권세 지위 이런 것들 때문에 시험에 드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 님께 와서『주님께서 영광으로 오실 때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하시고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옵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보통 생각 같지만 잘못 기울어지게 되면 큰 시험에 빠지고야 맙니다. 자기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리라고 언제나 악한 마귀는 우리 귀에 속삭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위에 오르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면 올라야 하지요. 그러나 마귀에게 절하면서까지 이런 지위에 오르려고 하면 언제나 큰 시험에 뜰 수밖에 없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어느 때에 시험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알아서 미리 조심해야 합니다. 분주한 때보다 한가한 때 시험이 더 많습니다. 다윗이 한가할 때 시험을 받아 큰 죄를 지은 이야기를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어떤 잡지를 보니까 미국 사람들이 점점 한가해진답니다. 一주일에 四十 시간 즉 닷새밖에 일하지 않습니다. 이틀을 쉽니다. 노는 시간이 많아지니 범죄가 많아진다고 합니다. 집에 있을 때보다 집을 떠날 때 유혹이 더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객지에 있을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청년들은 군대에 나갔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농촌에 있을 때보다 도회에 와서 유혹이 더 많습니다. 농촌을 떠나 도회에 오는 소녀 소년들은 특히 조심하지 않으면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일생을 두고 보면 어느 시대보다 청년 시대에 유혹이 많습니다. 일 년을 두고 보면 어느 때보다 봄철에 많습니다. 이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배가 고플 때에도 유혹이 많고 배가 좀 부를 때에도 유혹이 많습니다. 화낼 때 성낼 때 유혹이 많습니다.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어느 때나 악한 마귀가 시험하는 것을 미리 알아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의사는 사람의 사정을 잘 압니다. 어떤 사람은 폐가 약하고 어떤 사람은 위장이 약하고 어떤 사람은 간이 약하다는 것을 미리 알아서 거기를 잘 보호해야 합니다. 악한 마귀는 언제나 약한 데를 찌릅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에 특히 약합니다. 솔로몬이 그런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먹는 데 약합니다. 에서가 그런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 방면에 약합니다. 아간 이 그런 사람입니다.
플라톤의 제자 가운데 푸로풀러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뱃놀이를 특별히 좋아했습니다. 한 번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큰 풍랑을 만나서 죽을 뻔하였다가 살아났습니다. 이젠 다시 뱃놀이를 안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였는지 아십니까? 자기 집이 바닷가에 있었는데 그 바닷가를 향하는 창문 마저 아주 없애 버렸습니다. 어떤 친구가 와서 왜 그렇게 하였느냐고 물어보았더니『그 창문을 통하여 자꾸 바다 가 보이는데 따뜻한 봄날 잔잔한 바다를 보면 나가고 싶어 견딜 수 없소. 그래서 이 유혹의 창을 막아 버린 것이오.』 사람마다 유혹의 창이 있습니다. 유혹의 창이 내게는 무엇인가를 알아 가지고 그 놈을 막아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해도 시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 님께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세상 사람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고 하니 여러 사람이 보고했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물으실 때 베드로가 담대히 고백했습니다.『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예수 님께서는 거듭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서기관들과 여러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십자가에 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선생님 그것은 멀리 하세요 그런 일이 선생님께 올 수가 없습니다.』그 때에 예수 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 압니까?『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만 생각하는 구나.』그렇게 사랑하는 제자의 말이지만 그 말은 예수 님을 유혹하는 말입니다. 사탄의 음성입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전격 전을 했습니다. 곧 물리쳤습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예수 님께서는 성품이 온순하고 겸손하십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는 언제나 단호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기에『네 눈 가운데 하나가 죄를 범한다면 그 눈을 뽑아 버리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눈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네 손 가운데 하나가 죄를 범하면 그 손을 찍어 버리라 한 손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낳을 것이다.』라고 하여 죄에 대해서나 시험에 대해서나 단호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것이 귀합니다.
인생 행로를 걸어가노라면 좌우 편에 쓰러진 송장들이 많이 있습니다. 六十년을 지내 온 인생 길을 돌아볼 때에 이런 사람을 많이 봅니다. 그 사람들이 이상과 포부가 없어서 그렇게 된 거입니까? 재주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시험에 들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의 힘 만으론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지 않으면 누구나 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몸이 약할 때에는 만병이 침노합니다. 건전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매일 해야 합니다. 아니 항상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합니다. 한가하게 예수를 믿는다면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일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교회도 봉사하고 사회도 봉사하고 전도도 하고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면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 님께서는『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보물 잇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가『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一九六八년 五월 五일)

Ⅹ-44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사도신경 ①) (히브리서 十一장 一-七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찌니라.』(히 十一·六)

우리 믿는 사람들이 압송할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신경, 둘째는 주기도문, 셋째는 십계명입니다.
주기도문은 주님께서 기도의 표준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열 가지 계명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행동의 기준이올시다. 어떤 것은 하고 어떤 것은 하지 않을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우리 믿는 사람의 신앙의 내용을 간추려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들의 신앙 고백서 라고 하는 뜻입니다. 혹은 사도들의 신조라고 하는 뜻입니다. 물론 오늘날 여러 교파가 있고 교파마다 자기네 신앙 고백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신·구교를 막론하고 온 교회가 다 같이 갖는 한 신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배할 때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이 올 시다.
이 사도신경은 신조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신조입니다. 또 모든 신조의 기초가 되는 신조입니다. 주후 四세기에 루피너스 라고 하는 학자가 사도신경에 대한 주석을 썼습니다.
그 서문을 보면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전도를 하다가 주님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순복하기 위해서 온 천하 사방으로 흩어지기 전에 이 신경을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전설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이 사도신경은 주후 一백년쯤 될 때에 온 교회에서 다 신조로 채용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조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신조입니다.
또 이 신조가 사도들의 신앙 그대로를 표현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도신경이 내용은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신앙의 표징이 되는 것도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내용을 하나씩 차례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기본 되는 신앙의 조목으로서 마땅히 잘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제가 바라기는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첫 조목부터 마지막 조목까지 꼭 계속해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제일 조가 무엇입니까? 오늘 아침 우리가 외웠습니다.『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옵나이다.』이것이 사도신경의 제일 조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말씀 가운데에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신앙의 기초가 되는 신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이 별로 없는 줄 압니다.
첫째로 이런 것은 자명(自明)의 진리입니다. 스스로 나타나는 진리입니다. 또 이 성경이 쓰인 그 때는 혹 예외도 있겠습니다만 거의 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때입니다. 그래서 시편 十四편 一절을 볼 것 같으면『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는 도다.』라는 구절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문자 그대로 말세올시다. 이런 어리석은 자가 많아졌습니다. 무신론자도 많아졌습니다. 소위 사신론(死神論)이라고 참람(僭濫)된 말을 하는 자도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야말로 악이 팽창한 시대입니다. 사탄이 남은 날이 많지 못한 것을 알고 극단으로 난동을 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어찌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하는 점을 종종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짐승과 달리 특별히 소유한 세 가지 보배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이성입니다. 둘째는 양심입니다. 셋째는 우리 속에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견지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인간에는 이성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사색합니다. 연구합니다. 그래서 발명도 하고 발견도 합니다. 창조적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됩니다. 문화가 창조됩니다. 모두 이성을 통한 활동입니다. 이런 이성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대우주를 바라보세요.
해는 매일 아침 동편에서 솟아올라서 매일 저녁 서산으로 넘어갑니다. 아침에는 언제나 날이 밝아지고 저녁이면 날이 어두워집니다. 달은 언제나 음력 보름이면 만월이 됩니다. 음력 초순에는 초생달로서 작은 달이 됩니다. 조수는 언제나 간조와 만조가 있습니다.
지금은 뜨거운 여름입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서늘한 가을이 올 것입니다. 그 후에는 추운 겨울이 올 것입니다. 다음에는 따스한 봄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다시 뜨거운 여름이 올 것입니다. 춘하추동 사계가 변치 않고 순환하여 돌아 갈 것입니다. 천문학자의 말을 듣지 않고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대우주에는 질서와 고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팔레이라고 하는 영국인의 유명한 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분이 들에 산보를 갔습니다. 길가에서 무엇이 발에 부딪힙니다. 그것은 회중 시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계를 처음 보았습니다. 아주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둥글 합니다. 장침 단 침이 뱅뱅 돌아갑니다. 그는 속을 뜯어보았습니다. 바퀴가 있어서 서로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 때 이 사람이 처음 한 말이 무엇입니까?『이것이 어떻게 생겨났을까?』이렇게 말했습니까? 아닙니다.『이것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하고 말했습니다. 시계와 같이 질서와 고안이 있는 물건을 보며 그것을 만든 이가 있음을 즉각적으로 압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우주는 한 큰 시계입니다. 돌아갑니다. 유성이 항성을 싸고 돌아갑니다. 이 큰 시계를 만드신 이가 없겠습니까? 성경은 창세기 一장 一절에『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시계를 만드신 분은 필연코 권능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一장 二十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창세(創世)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 곧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하느니라.』이성이 있는 인간으로서 이런 우주를 만드신 이가 없다고 혹은 모르겠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그 말입니다.
둘째로 우리 인간이 짐승과 다른 또 한 가지는 인간의 가슴속에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라, 무엇을 하지 말라, 무엇은 꼭 해야 한다, 무엇은 꼭 안 해야 한다, 이렇게 지시하는 칸트의 말대로 지상 명령인 무엇이 있습니다. 현대인들 가운데는 이 양심을 후천적 원인으로써, 혹은 사회적 문화적 요인으로서 혹은 환경 교양 같은 것으로 설명해 보려고 애쓴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 실패했습니다. 다소 후천적인 요소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양심은 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유명한 스토익 철학자 에픽테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사람이 날 때에 선천적으로 음악이나 기하학의 지식을 가지고 나는 이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도덕적 의식은 다 가지고 난다.』그것은 사실입니다. 이 양심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하늘에는 별이 있고 내 속에는 도덕적인 율법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갖게 한다.』양심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양심을「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양심은 우리 속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배후에 있는 대 양심이올시다. 하나님은 우주의 도덕적인 대 주재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그가 계시는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도덕적 주재자임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셋째는 인간에게는 짐승과 아주 다른 영혼이 있습니다. 불멸의 영혼이 있습니다. 제가 지난 토요일날 수유리에 가보니까 서커스단이 와 있었습니다. 천막 앞에 큰 코끼리 한 마리를 매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 유학 학생시절에 서커스단을 구경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나 짐승들이 재주를 잘 부리는지 정말 놀랐습니다. 짐승들도 재주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짐승들이 자기네끼리 어디서 예배당 짓는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물론 못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아무리 야만이라고 해도 아무리 미개한 아프리카나 남양의 어떤 오지의 미개한 사회라고 해도 그들이 살집 만 지은 것이 아닙니다. 신전을 세웠습니다. 또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의 다른 점입니다. 왜 그런 일을 합니까? 인간이란 그 속에 영혼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이 종교적 동물이란 사실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도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전에 믿지 않는 어떤 분과 만나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三八선을 몰래 넘어 오다가 소련 녀석들을 만났을 때 나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흔히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종교성이 있습니다. 종교적 본능이 잇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속에 그런 본능이 있으므로 반드시 본능을 만족시킬 만한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고프면 먹고자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어린애에게 젖을 빠는 본능이 있기에 어머님의 젖꼭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사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혼자 살기를 싫어합니다. 여러 사람과 사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들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점점 자라서 십 칠팔 세쯤 되면 전에 없던 번민(煩悶)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적 본능입니다. 그 성적 본능도 만족시킬 만한 이성이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본능이 있으면 그 본능을 만족시킬 만한 대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종교적 본능이 있는데 이 종교적 본능에 대해서만 이것을 만족시킬 대상이 없겠습니까?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 대상이 곧 하나님입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계시니까 우리 인간에게 이런 본능이 생긴 것입니다.
햇빛이 위에 있으니까 풀과 나무가 위로 향하고 자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런 본능이 생긴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에 영적 기갈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까닭입니다. 짐승은 먹을 것이나 잘 먹고 편안히 누울 자리만 있으면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찾고, 집 없을 때 집을 찾지만 의식주가 아무리 넉넉하더라도 거기에서 우리 인간의 심령이 참 만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시편의 한 저자와 같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渴急)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합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다른 모든 것에 만족을 느끼더라도 하나님을 찾기 전에는 참 만족은 없고 마음 한구석엔 허무감이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모릅니다.
왜 이렇게 부르짖습니까? 그것은 영혼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 영혼의 부르짖음이 곧 하나님께서 계심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전에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무신론자는 영적 환자」라고 지적했습니다. 영적으로는 병난 자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태양이 혁혁하고 밝지만 눈먼 소경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서 우주를 통해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인간을 통해서 여러 성도들을 통해서 나타내지만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릅니까? 그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눈이 가리워 졌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적인 관념이올시다. 우리의 관념 가운데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부정적 관념과 긍정적 관념입니다. 가령, 밝다고 하면 이것은 긍정적 관념인 것입니다. 어둡다고 하는 것은 밝은 것을 부정하는 부정적 관념인 것입니다. 참되다고 하는 것은 긍정적인 관념입니다. 거짓 되다고 하는 것은 부정적인 관념입니다. 그러면 이 부정적 관념이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긍정적 관념이 있기에 부정적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즉 부정적 관념이란 긍정적 관념의 부산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빛이 있기에 어두운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참이 있기에 거짓이란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무신론의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이란 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輕蔑)히 여기리라.』어떤 때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스스로 속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우리 동양의 성현도『순천 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옳게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 죄가 많지만 모든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불신의 죄 즉 믿지 않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왜? 아무리 죄가 많을 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그 죄를 회개하면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사 누가 죄가 적다고 할 지라도 믿지 않으면 그 죄는 용서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하지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있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공산당 외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대개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 속에 관념만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슨 쓸데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감사하지도 않고 영화롭게도 안 하고 그 명령을 지키지도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에게는 진노가 잇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명령을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에『나의 의뢰하는 자를 내가 알고…』라고 썼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을 내가 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이 하나님을 정말 압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압니까? 그렇다면 마땅히 그를 공경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무신론자에게 부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사실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외쳤습니다.『여호와는 나의 빛이 시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울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공포심이 사라졌습니까? 우리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를 안다고 한다면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의 한 저자와 같이『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고 의존합니까? 그렇다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자는 용감히 살 것입니다. 무슨 알을 당하든지 낙심치 않을 것입니다. 모든 근심과 염려를 극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존하는 사람은 승리 적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하나님을 분명히 믿고 의지하십니까?『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니…』정말 내가 믿습니다 라고 고백합니까? 우리 가운데 이 문제에 관해 확실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 분은 없으십니까? 이 시간에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一九六八년 七월 十四일)

Ⅹ-45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도신경 ②) (요한 복음 三장 十六-二十一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三·十六)

이 구절은 제가 어릴 때 암송하고 있던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여러분께서도 이 구절만은 암송하고 있는 줄 생각합니다. 이 구절이 비록 간단하지만 이 성경 구절 안에 우리 기독교의 중심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과 사랑과 독생자와 믿음과 영광 등의 위대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의 둘째 조목은 그 외아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올시다. 오늘 아침에도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만 그 사도신경에 나타난 구절을 읽어보면『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려 오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신조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어떤 분이신 가를 우리는 알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우리 믿는 이들이 꼭 기억해야할 열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본래「기름 부음을 받으셨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과 온 천하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보내겠다고 여러 백년 전부터 예언자를 통하여 예언을 했는데 그 예언했던 분이 곧 예수라는 말씀이 올 시다. 메시야는 헬라어로 곧 그리스도입니다.
둘째는 예수는「그 외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 복음 三장 十六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의 독생자란 뜻이 올 시다. 성경에 아들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대략 세 가지 뜻으로 썼습니다. 넓은 의미로는「창조」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좁은 의미로는「구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오직 구원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좁은 의미로는「아들」이란 말을 쓴 데가 있습니다. 그것은「본체」라는 의미올시다. 예수 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四장 六절을 보면『그는 본래 하나님과 본체였으나 그 몸을 비어 사람의 몸을 입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오직 예수 님 한 분밖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의 신성을 의미합니다.
셋째는「우리 주」가 되십니다. 그 글자의 근본 뜻이「주인」또는「소유자」이지만 옛날부터 신(神)을 주로 불렀습니다. 성경을 보면 여호와를 항상 주로 불렀습니다. 우리 주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 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첫째는『성령으로 잉태하사』란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잉태함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의 신성(神性)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 말씀하였습니다. 곧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육신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예수의 인간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말씀이 육신을 입으사』라고 했는데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방법으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너무나 신기해서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깨달아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린애가 모태에서 잉태되어 사람이 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신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실 때 동정녀 탄생은 가장 적합한 길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예수는 참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교훈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여러 모로 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이외의 보다 중요한 두 가지를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가르쳐 줍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 제국의 총독이었습니다. 여기에 세상의 역사와 구속의 역사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가장 추악한 죄인을 처형하는 형틀이었습니다. 종들이나 식민지 백성만 이런 극형에 처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 되시는 주님께서 이 고난을 친히 당하시고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가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시고 인간과 같이 죽으시고 인간과 같이 무덤에 묻힌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모습 곧「대속의 구주」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죽으시지만 않았습니다.『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의 모습,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얼굴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설명해 보려고 하는 것처럼 이것은 영적 부활의 의미가 아닙니다. 죽으신 그 몸이 친히 부활해서 변화된 모습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갇힌 문도 지나갈 수 있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사십일 간 나타나시면서 확실히 부활의 증거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심으로써 그가 영원히 살아 계시는 것과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하늘에 오르사』곧 승천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一장을 보면 구름 가운데로 오르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구름 기둥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구름이 성막(聖幕)위에 항상 임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올시다. 구름 가운데로 올라 가셨다는 말은 곧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로 들어 가셨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육신을 입으시고 역사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이제는 영광 가운데로 들어 가셔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 말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그 광경을 친히 보고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기를『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선 것을 내가 보노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또는 서서 계신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지극한 존귀의 자리로 오르셨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셔서 비록 숨어 계시나 우주를 다스리고 인간의 역사를 다스린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 믿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를 지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믿는 사람 하나 하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있을 곳도 준비하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신조는『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림과 심판의 주를 뵙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장래에 될 일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오래 지연됨에 따라서 여기에 대한 믿음이 식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이 꼭 기억할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친히 여러 번 말씀하였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세요. 항상 깨어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데 지연되는 줄 생각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생각해 볼 때에도 예수 님께서 첫 번째에 오셨으니까 으레 히 두 번째로 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왜? 이 세상이 재림을 요구합니다. 오셔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겠습니까? 제일 먼저 심판을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꼭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영 벌을 받을 사람과 영생을 받을 사람의 분별이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에는 요한 계시록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달 초순에 웁살라에서 모인 세계기독교 연합회 총회의 주제가「만물을 새롭게」라고 합니다마는 주님께서 임재 하실 때 만물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온전히 임재 하실 때 온 우주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계시록 十一장 十五절에 기록된 대로『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서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라.』는 말씀이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십니까? 예수가 이런 분이올시다.
사도신경에서는 예수가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해 꼭 필요한 열 가지를 가르쳐 주었지만 우리가 성경을 보면 여러 가지 다른 말로도 예수가 어떤 분이신 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다른 칭호 다른 상징 다른 말씀으로 예수가 어떤 분이신 가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혹은「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이는 죽어도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나는 생명수」라고도 말씀하였습니다.「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와서 마시라.」고도 하였습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라고도 했습니다. 영적으로 주린 자는 내가 먹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영의 문」이라「나는 세상의 빛」이며「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이렇게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 은 예수 님을 보고『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스도는 만민의 죄를 속죄하신 대제사장이올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신 말씀이요 대 선지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도 숨어서 일하고 계시지만 만 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최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벽 별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의 영원한 소망은 우리 주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또 다시 어디 있겠습니까? 과거 현재 미래 아니 천상 천하(天上天下)에 이러한 분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주님이 세상에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 이사야 예언자는 일찍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영적 포로와 온갖 방면의 포로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마음 상한 자들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해서 슬픔 대신에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입니다. 무서운 죄의 짐을 벗겨 주시고 평안한 마음을 주시는 이는 예수 한 분뿐입니다. 험난한 인생항로에『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스러질 때』에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무서운 유혹과 닥쳐오는 시험을 이겨서 옳은 길을 가게 하시는 이는 예수 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괴로운 인생 길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픈 눈물을 흘릴 때 우리의 눈물을 씻기시고 위로해 주고 소망을 주시는 이는 우리 주 예수 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속하십니다. 우리 약한 인간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아니 생명과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 이름을 노래 할 수밖에 없습니다.『천지에 있는 이름 중 귀하고 높은 것은 나시기 전에 지은 것 구주의 이름 예수.』우리는 찬송을 드립니다.『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 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여 음성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
아주 중요한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이 예수가 내 예수가 되었습니까?『예수, 예수 내 주』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예수, 예수 내 주 예수 곧 가까이 오셔서 쉬 떠나지 마시고 부형같이 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옵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영원히 그를 노래하십시다.
(一九六八년 七월 二十一일)

Ⅹ-46 성신을 믿사오며 (사도신경 ③) (고린도 후서 十三장 五-十三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찌어다.』(고후 十三·十三)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다 쓴 다음 마지막에 이 기도를 마쳤습니다. 이 간단한 기도가 오고 오는 시대에 온 교회에서 예배가 끝날 때마다 반복될 줄은 사도 바울 자신도 아마 몰랐을 것입니다.
왜 이 기도가 축복 기도의 규범이 되었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인 줄 압니다. 이 기도가 비록 간단하지만 삼위 일체의 축복이 있는 까닭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도신경을 생각하는데 사도신경의 신앙의 제일 조는『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니』입니다. 제이 조는『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제삼 조는 무엇인지 아십니까?『성신을 믿사오니』곧 성신을 믿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신 삼위 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본체는 하나이지만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먼저 이 시간에 삼위 일체의 신관에 관해 간단히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 삼위 일체의 신관은 기독교의 중심 진리올시다. 솔직히 말해서 이 삼위 일체의 깊은 뜻을 우리 인간으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인간의 생각 곧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이 인간에게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너무 멀어도 못보고 너무 가까워도 못 봅니다. 청력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너무 작은 소리도 못 듣고 사실 너무 큰 소리도 못 듣습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너무 커서 못 듣는 답니다. 마찬가지로 이성도 제한이 있습니다. 수학에는 무한대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가까운 친구를 아무리 잘 안다고 할지라도 그 친구에 대해서 다 알지는 못합니다. 특별히 그 속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 속담에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어느 만큼 아느냐 하면 그 친구가 자기의 생각이 어떠하다고 우리에게 나타내 주는 것만큼 압니다. 우리 친구에 대해서도 그렇거든 하나님께 대해서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얼마만큼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것만큼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얼마만큼 제시해 주었습니까? 역사와 성경과 우리의 체험을 통하여 보면 삼위 일체의 하나님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했습니다. 성자 성신 성부 이렇게 삼위입니다. 영어로는 퍼어슨(Person)이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혹 인격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위(位)는 셋입니다. 그러나 본체는 하나입니다. 삼위 일체의 하나님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시를 신앙으로 받아서 그 만큼 알고 믿을 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였습니다. 삼위 일체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었습니다.
이 삼위 일체의 신관을 믿는데 특별히 조심할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삼위라 해서 세 분이라는 것을 너무 강조하면 소위 삼신론(Tritheism)이 되고 맙니다. 신은 하나인데 세 신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그릇된 사상입니다.
반면에 일체가 한 분이라고 너무 강조하게 되면 일신론 (Uniterianism)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성자와 성신의 신성은 부인하고 성부의 신성만 믿는 그릇된 사상에 빠지고 맙니다.
사실 이런 사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 성서적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성경 그대로 삼위 일체의 하나님을 믿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전하지만 삼위 일체의 신을 태양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태양을 보면 태양 자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에서 발사하는 관선이 있습니다. 또 태양에서 발산하는 열이 잇습니다. 어떤 분은 설명하기를 태양 자체는 성부가 되시고 태양의 광선은 성자가 되시고 태양의 열은 성신과 비슷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완전한 비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우리가 기억하기로는 삼위의 역사는 다소간 다릅니다. 가령 성부는 창조와 섭리를 주로 하시고 성자는 구속의 일, 즉 속죄 구령의 일을 주로 하십니다. 성신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셔서 중생과 인도하시는 일을 주로 하십니다.
또 우리가 성경을 보면 대체로 세 가지 시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흔히 구약시대는 성부의 시대라고 합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일하던 시대는 성자의 시대라고 합니다. 오순절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성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삼위 일체에 관해서는 이것으로 그치고 다음에는 성신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령 혹은 성신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똑같은 뜻이므로 오해 할 것은 없습니다. 구역엔 성신, 신 역엔 성령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같은 말이니까 같은 말로 알아들으면 되겠습니다.
성령께서 믿는 사람을 위해서 하시는 일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간단하게 네 가지로 추려서 말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중생의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죄를 회계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를 구주를 깨달아 믿을 마음을 생기게 하고 믿게 하는 것도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만들어서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인 쳐주시는 것도 다 성신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三장 五절을 보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중생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둘째 역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자녀를 지도해 주는 것도 역시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를 진리로 바로 깨닫게 해줍니다. 성령을『지혜의 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를 인도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도록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가 핍박을 받아 어떤 사람 앞에 가서 말하게 될 때에도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말 할 것을 다 마련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지도해 주신다는 그 말씀입니다. 전도에 대해서도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항상 지도를 해 주었습니다. 빌립 이라고 하는 집사가 구스 내시라는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것은 자기 뜻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지도로 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것도 특별한 성령의 지도로 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택하여 외국에 선교사로 파송한 것도 분명히 성령의 지도로 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개인도 지도해 주시고 교회에 있어서나 교회생활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게 해 주시는 것도 언제나 성령의 역사입니다. 셋째로 이렇게 지도해 주시는 일을 할 수 있게 능력을 주시는 분도 성령입니다.『오직 성형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얻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전도의 능력을 주시고 봉사의 능력을 주시고 모든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큰 능력으로 하루에 삼천 명을 회개시켰던 것입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자기 재산을 아끼지 않고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며 유무 상통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돈 있다고 다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그 마음에 있을 때 안에서 솟아나는 시험, 밖에서 불어오는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 성령을 보혜사(保惠師)라고 하였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의 뜻은 남을 위로해 준 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같이 계셔서 능력을 주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넷째로 갈라디아 五장에 있는 말씀대로 성령의 역사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 우리의 성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귀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상징을 살펴보면 좋을 것입니다. 성령의 상징 가운데 하나는 바람이올시다. 사실 히브리어로『루악』이란 말이나 헬라어로 『푸뉴바』란 말의 근본 뜻은 바람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바람은 들리지 않는 신기한 가운데 움직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신비한 역사를 의미합니다. 바람은 부드러워도 능력이 많습니다. 성령의 위대한 능력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경을 보면 성령을 기름으로 표시한 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상처에 기름을 바르면 고통이 적어집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입은 상처나 괴로움을 위로해줄 자는 성령뿐입니다.
또 옛날 사람들이 제사장을 세울 때나 선지자들은 세울 때 그리고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부어 성별해서 사명을 맡겼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불러서 사명을 맡기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떤 때는 성령이 불로 나타납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열심을 의미합니다. 사랑을 의미합니다. 불은 깨끗케 합니다. 청결을 의미합니다. 그 반면에 성령이 물로 나타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물은 새롭게 합니다. 물은 시원케 합니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물입니다. 한가지 상징만 더 말하면, 성령은 비둘기로 나타난 때가 있습니다. 비둘기는 어떤 새입니까? 온유 겸손 평화의 상징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 우리마음은 온유 겸손 순결 평화의 마음으로 변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몸이『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는 까닭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신즉 우리는 성령에 대해 얼마나 감사해야 될는지 모릅니다. 성령께 얼마나 찬송을 드려야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성령의 명령에 순복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령을 항상 존경하고 높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시건만 자칫 잘못하면 이 성령을 푸대접하기 쉽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성령에 대한 죄를 짓지 말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四장 三十절을 보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감화가 있지만 그 감화를 받지 않습니다. 성령의 지도가 있지만 얼른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능력을 주셨건만 그 능력을 바로 쓰지 않습니다. 그런 때에는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는 분은 없습니까. 사도행전 七장 五十절을 보면 성령을 거스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지도를 거스르지 않습니까. 가라고 하는 데 가지 않고 가지 말라고 하는데 가고 하라고 하는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일은 하고 이렇게 성령을 거스르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十장 二十九절은 보면 성령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멸시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명령을 여러 번 거스르는 것은 결국 성령을 멸시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경멸(輕蔑)히 여기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합시다. 성령을 명시해서는 안 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五장 十九절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여러 번 거슬리고 멸시하면 결국 성령을 소멸하게 됩니다. 불이 아주 꺼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소망이 없어지게 됩니다.
예수 님께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 성령의 감화를 소멸시키면 회개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바리새인 중에 이런 죄에 빠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오늘날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마을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권면 했습니다. 성령의 명령을 잊을 때 마음은 강퍅하게 됩니다.
그의 음성을 듣고서 순종합시다. 지금 우리 가운데 성령의 음성을 듣고 거슬리려는 사람은 없습니까? 예수 님께서는『빛이 있을 때 빛 가운데로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빛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있을 때에 빛으로 걸어가십시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먼저 마음 가운데 거리끼는 죄를 완전히 회개하여야 합니다. 세례 안 받은 사람은 꼭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아주 중요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성령께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화 성령의 지도에 순복해야 합니다. 존 번연히 지은『천로역정』이란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러한 얘기가 있습니다. 한 기독교도가 어떤 방에 들어가 보니 방 옆에서 불이 펄펄 붙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불을 끄려고 물을 퍼붓고 있으나 불은 꺼지지 않고 그냥 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저 불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가 이상해서 가보니 어떤 점잖은 분이 병에다 기름을 가득 담아 가지고 그 뒤에서 계속해서 그것을 부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이 안 꺼집니다. 이 악하고 음란하고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의 강한 신앙의 불길과 우리 교회의 성령의 불길이 꺼지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속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성령께서 계셔서 은혜를 충만히 부어주기 때문입니다. 『성신을 믿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성신을 믿어야 합니다. 성신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언제나 성신 님께 숙복해야 합니다. 오늘 이 은혜가 우리 교회 위에 교회 안에 그리고 우리 하나 하나의 마음속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 하시기를 바랍니다.
(一九六八년 七월 二十八일)

Ⅹ-47 거룩한 공회 (사도신경 ④) (마태복음 十六장 十三-二十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十六·十八)

이 간단한 말씀 가운데서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에 대한 세 가지 진리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내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합니다.
둘째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과 같은 믿음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뜻입니다.
셋째는『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교회에 돌아올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제 일조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 신조가 무엇입니까?「거룩한 공회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오늘 아침에도 이 구절을 다 외웠지만 그 뜻을 분명히 모르는 분이 혹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번역이 그리 썩 잘 된 것 같지가 않습니다.「거룩한 공 교회와」이렇게 번역했더라면 좋을 번했습니다. 본래는「거룩한 카톨릭교회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교란 뜻은 아닙니다.
이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우리는 공적인 교회를 믿습니다.」,「우리는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라는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거룩하다」는 것은 본래「하기우스」란 말입니다. 이 근본 뜻은「갈라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 히 구별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교회는 거룩하게 구별된 교회입니다. 우리가 성전을「거룩한 집」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집을 지은 재료가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집은 거룩 히 구별해서 하나님께 바친 까닭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성일 이라고 합니다. 날이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날을 특별히 구별해서 하나님께 바친 까닭으로 성일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이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은 특별히 구별해서 하나님께 속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거룩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다고 하는 말인데 이것은 세상과 상관이 없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우선 교회는 세상에서 죄인을 불러서 구원해 내는 기관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봉사합니다. 자선 사업, 교육 사업, 의료 사업 등 각 방면을 통하여 사회를 봉사합니다. 또한 교회는 자유와 질서와 평화와 번영이 있고 명랑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각 방면으로 협력을 합니다. 특별히 이런 일을 이룰만한 많은 지도자를 양성해서 사회에 내보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사회의 천국 화」를 도모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세상에 침투해 들어가지만 교회는 절대로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안 됩니다. 요사이 세속화란 말을 쓰지만 이런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언제나 성별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의 생활은 언제나 세상의 안 믿는 사람의 생활과 구별되는 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하는 말을 이와 같이 성별 된 교회를 믿는다고 하는 말은 이와 같이 성별 된 교회를 우리가 항상 지켜야 된다고 하는 그 뜻입니다.
둘째는 공회(公會)라고 했는데 이 말은 공회를 믿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먼저 역사적 연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 교회 하나가 설립되었습니다. 교회 이름은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그 다음엔 수리아 안디옥에 교회가 또 하나 설립되어 그 이름을 안디옥교회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빌립보에 교회가 설립되어 이 이름을 빌립보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여러 지방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 교회를 다 합쳐서 부를 수 잇는 이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체 교회를 카톨릭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일반적 혹은 세계적 교회, 곧 교회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카톨릭이라고 하는 것은 그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구교를 흔히 카톨릭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교회 역사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一세기부터 十一세기까지는 온 세계 교회가 이 카톨릭 교회 안에서 내려왔습니다. 전체적인 교회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각 교회에서 대표를 보내어 의논을 했는데 그 회의 이름을 에큐메니칼 회의라고 했습니다. 지금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그 때부터 내려오는 말입니다. 그것도 역시 세계적이란 뜻입니다. 그렇게 十一세기까지 잘 내려오다가 불행하게도 교회가 동서로 분별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중동 지역에 잇는 교회와 이탈리아 로마를 중심 한 서방 교회가 동서 교회로 분열이 된 것입니다.
근동 일대에 있는 교회를 헬라 전통 교회라고 불렀고 서방의 로마를 중심 한 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라 불렀습니다. 十六세기에 내려와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또 분열이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분열이 되니까 로마를 중심 한 구 교회는 그대로 로마 카톨릭 교회라 불렀고 영국에서는 앵글리칸 카톨릭 교회라 이름하였으며 그 밖에 여러 신 교파는 루터교회 혹은 개혁 교회, 장로 교회, 감리교회 등 여러 교파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二十세기에 와서 새로운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一九四九년에 여러 교파의 대표자들이 모여서 소위 세계 기독교협의회라고 하는 WCC를 조직했습니다. 지난 7월 스웨덴의 웁살라에서 제四회 총회가 열렸는데 이 四회 총회에는 신교 교파의 대부분이 다 대표를 보냈고 헬라 정통 교회에서도 물론 가입을 하였으며 또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도 十五명의 옵서버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二十세기에 와서 카톨릭 교회 즉 전체 교회의 한 상징인 세계 기독교협의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공 교회를 믿는 다고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전체 교회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곧 전체 교회는 하나인데「하나인 교회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四장 四절을 보면 몸은 하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영락교회에 모였습니다. 이 영락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전체 교회 즉 공 교회 혹은 사도신경대로 공 회의 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한국 기독교도들은 이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체 교회의 성질은 범위가 세계적입니다. 성질이 포괄적입니다. 갈라디아서 三장 二十八절을 보면『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교회입니다. 다시 말하면 민족이나 국가나 남녀나 빈부나 귀천이나 여야의 차별이 없이 다 이 공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아프리카에서는「앗팔데이드」라고 해서 흑백을 완전히 갈라놓고 따로 예배를 봅니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 공 교회는 현재 보이는 교회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에서 믿다가 구원받은 하늘에 있는 보이지 않는 교회까지 다 포함된 전체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에 속합니다. 이 하나인 교회를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교회란 말은 헬라어로「에클레시아」라고 합니다. 그것은 「부름을 받은 이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이 아닙니다.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영락교회 하면 이 예배당이 아니라 여기 앉은 여러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모인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합니다. 성경은 교회의 본성을 여러 가지 칭호로서 우리에게 설명했습니다. 사도행전 二十장 二十八절과 베드로 전서 五장 二절에 보면 교회를「하나님의 양 무리」혹은「하나님의 양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고,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 교회가 유지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둘째는 베드로 전서 二장 五절을 보면「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성전을 구성한 하나 하나의 산 돌입니다. 이 거룩한 모퉁이 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더욱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셋째로 에베소서 二장 十九절을 보면 교회를「하나님의 권속」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곧「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 모든 믿는 사람은 형제와 자매가 된다는 깊은 뜻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十一장 二十二절과 요한 계시록 十九장 七절에는「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반면에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순결과 충성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갈라디아서 三장 二十九절과 六장 十六절을 보면「교회는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죄를 범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맺은 약속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누구나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본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받게 될 새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그 뜻입니다.
여섯째로 로마서 十二장 四절과 고린도 전서 十二장 十二절을 보면 교회는「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일치성과 통일성을 우리에게 설명하여 줍니다. 고린도 전서 十二장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우리의 몸은 하나이지만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이(耳), 목(目), 구(口), 비(鼻), 사지(四肢)등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모여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일치성을 유지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조금씩 다 다릅니다. 얼굴이 다른 것처럼 생각도 다릅니다. 믿음도 교회 제도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통일성은 소위 획일성이나 동일성을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꼭 같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의 일치성이란 말은 다양성 가운데서 일치성이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각각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고 하는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가대원이 많이 있고 각각 四음으로 불렀으나 한 곡조로 불러 가장 완전한 음악을 이루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각각 다르지만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데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일찍이 요한 웨슬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당신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은가. 그러면 우리는 손을 잡자.』이렇게 교회의 일치성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조를 생각할 때 깊이 깨달을 것은 이 신조는 특별히 교회의 화평을 강조해서 지키라고 하는 점입니다. 구별된 교회는 할 수 있는 대로 화평하고 합동하도록 힘을 쓸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생각할 것은 기구 적인 합동보다도 화평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합동을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싸움을 일으키고 분규를 일으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제나 화평 운동과 합동 운동은『전체 교회는 하나』라고 하는 사도신경의 정신을 가지고 합동 운동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세계 기독교 연합회하고는 상관 말고 국내에서 연합해서 사업하는 한국 기독교 연합회도 상관 말고 우리끼리만 합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 사도신경의 정신에 위배되는 사상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이 사도신경의 정신 아래에서 피차에 관용할 줄을 알고 하나를 이루도록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관용이라고 해서 되는대로 내버려두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무관심입니다.
실상 관용은 깊은 관심을 가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에 제한이 있는 것을 깨닫고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 할 지라도 진리의 전체를 혼자는 다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서 겸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소 의견이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충성을 다하는 분이면 피차에 양해를 하고 피차에 화평을 유지하는 태도가 이 신경을 지키는데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믿음의 반석 위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계시록에 교회를 일곱 금 촛대에 비했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등대입니다. 암흑한 세상에 진리의 광채를 비추어 주는 것은 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노아의 방주와도 비슷합니다. 이 죄악의 바다에서 죄악에 침몰된 가련한 영혼을 구원해내는 구원 선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와도 비슷합니다. 이 메마른 건조 무미한 세상 가운데서 생명수를 흘려서 사방에 퍼지게 하는 기관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방송국에 비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복음을 온 세계에 방송하는 기통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를 관해서 사회를 봉사하고 사회를 정화하고 교회 안에서 성도가 나고 성도가 자라고 성도가 살다가 마지막에 교회 안에서 영원한 나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우리의 첫째의 충성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한 분자입니다. 여러분, 오순절 날 많은 사람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와서『우리가 어찌할꼬.』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너희가 각각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도 그 한 말 중에 다른 말이 없습니다. 이 길만이 우리가 이 거룩한 공 교회의 한 분자가 되어서 금생(今生)과 내생의 영원한 생명의 길을 걷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一九六八년 八월 四일)

Ⅹ-48 성도의 교통 (사도신경 ⑤) (사도행전 二장 四十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행 二·四十二)

이 간단한 구절 가운데서 초대 교회의 성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서로 교제하며」란 이 문구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사도신경 대로 첫째는「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둘째는「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셋째로는「성신을 믿습니다.」넷째는「거룩한 공회 곧 교회를 믿습니다.」그리고 다섯째는「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성도의 교통을 믿습니다. 교통이란 말은 교제 즉 사귄다는 뜻입니다. 이 신조를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성도의 교통」이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서로」라고 하는 말은 원문에 없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해석이올시다.
성도의 교통은 성도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습니다. 요한 一서 一장 三절에는『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니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혹은 고린도 후서 十三장 十三절에는「성령의 교통」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곧 성부 성자 성신 삼위 일체와 교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도 상호간에 교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미 세상을 떠나 하늘에 있는 성도와도 어떤 의미에서 교통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十二장 一절에는『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신앙의 경주를 마친 하늘에 있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고 하는 권면을 찾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조의 중요한 뜻은 물론 성도 상호 간에 교통을 의미하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번역하는 것도 무방한 줄 생각합니다. 이 교통이란 말의 원어는 헬라 말로「코이노니아」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번역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데는「교제」라고 번역하고, 어떤 데는「교통」이라고 번역했고, 어떤 데는「참여」라고 번역했고, 어떤 데는「동참」, 어떤 데는「나누어준다」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뜻이 다 있습니다. 피차에 유익과 선을 위하여 교제하고 협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신조의 뜻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도는 서로 교통해야 함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즉 고립적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물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 그리고 내 이웃의 삼각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님께서 제일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을 받으실 때에『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선지자와 율법의 대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무 가지는 여럿입니다. 그러나 한 나무에 붙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지와 가지가 연결이 됩니다.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몸에 붙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체끼리 관련이 있습니다.
신앙의 생활은 서로 사귀는 면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귀기를 힘쓰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동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항상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독창을 들을 때 감화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다 합해서 합창을 할 때에 더 큰 은혜가 잇는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부족합니다. 모여서 기도하는 데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홀로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고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같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더욱 큰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작 한 가치를 불피우려고 해 보았습니까?
불이 잘 안 붙습니다. 여러 가지를 함께 놓고 붙이면 피우기 쉽고 큰 불길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가 필요합니다. 교통이 필요합니다.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어떻든지 성도의 교제를 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이 신조는「성도의 화평과 일치의 생활을 믿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모이는 것이 귀합니다. 이렇게 성도의 사교가 귀합니다. 그러나 모여서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사실 문제입니다. 옛날 고린도 교회는 모이기를 잘 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모여서는 나는 바울에게 속한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한다, 나는 게바에게 속한다, 나는 그리스도 파다, 이렇게 당파를 지어 서로 분쟁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도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서 모이기를 잘 하는 교회 중의 하나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여서 어떻게 합니까? 종종 분쟁이 생깁니다. 분열이 생깁니다. 싸움이 생깁니다.
사도행전 二장 四十六절 이하를 읽겠습니다. 여러분, 초대 교회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들으시기를 바랍니다.『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도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함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 하시리라.』성도의 화평과 일치의 생활은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교회가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을 때에 교회는 날마다 그 수가 더해서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四장 一절 이하에『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기독교 윤리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예수 님께 나와서『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일곱 번까지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예수 님께서는 즉시『일곱 번뿐이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의 화평과 일치의 생활이 가장 귀합니다. 그러므로 관용의 덕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도를 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말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둘째는 그 사람의 행실의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행실이 거룩하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행실의 뒷받침이 없는 말만의 전도는 효과가 없습니다. 그 밖에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성도의 교제의 생활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 이렇게 깨끗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사는가? 과연 화평과 일치와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대 교회에 기쁨과 화평이 충만하고 서로 일치된 생활은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았고 또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게 됩니다. 아름다운 꽃밭이 있으면 별과 나비는 저절로 찾아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가화만사성」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집이 화목하면 만사가 이룬다는 뜻입니다.「교회만사성(敎會萬事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화목하면 만사가 다 이루어집니다. 성도의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하는 신조는 나는 이와 같은 교회 생활을 믿고 이대로 힘쓰겠습니다―하는 뜻입니다. 셋째로 이 신조에는 성도의 상부 상조하는 생활을 믿는 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코이노니아」란 말은 근본적으로 참여한다, 동참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나누어준다고 하는 뜻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一장 九절에는 『나 요한 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동참이「코이노니아」입니다. 로마서 十二장 十三절에는『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했습니다. 공급은「코이노니아」입니다. 히브리서 十三장 十六절에는『오직 선을 행하며 서로 나누어주기를 있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누어준다는 것은 역시「코이노니아」란 말입니다. 교통이라 하는 뜻입니다.
성도의 교통하는 것을 믿는 다는 말은 성도들이 같이 참여하고 같이 있는 것을 나누고, 동고 동락(同居同樂)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생활을 믿는 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읽었지만 초대교회 성도의 교통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은혜 받은 다음에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했습니다. 유무를 상통했습니다. 물질의 교통, 물질의 동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나누어주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의 발 앞에 두니 사도들이 그것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바나바가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의 발 앞에 두니 사도들이 그것을 극빈한 자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봉사 주일에 쌀을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극빈자를 위해서 멀리 있는 안디옥교회가 헌금을 해서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세운 이방 교회들이 빌립보교회 고린도교회 들이 다 헌금을 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구호했다고 하는 일을 사도행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물질적으로도 상부 상조의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생활을 믿고 힘쓰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물질 면만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방면에 상부 상조하였습니다. 우선 기도로 서로 도왔습니다. 지난 주 대천에 피서 가서 북 장로교 여 선교사를 한 분 만났습니다. 그는 다리 한 쪽이 없습니다. 암이 생겨 부득이 잘랐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슬퍼했고 몹시도 괴로웠으나 많은 성도들이 위해서 기도함으로 그 어려운 수술을 하고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한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기도해 주는 가운데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병도 낫습니다. 환난 중에도 상부 상조하였습니다. 핍박 중에도 상부 상조했습니다. 여러 가지 슬픔 가운데서도 특별히 상조한 것입니다. 로마서 十五장 一절에『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하자.』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지식으로도 도와 주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로마서 十二장 十五절에는『즐거워하는 자로 즐거워하고 우는 자로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동고동락을 하는 생활을 하자고 하는 권면 입니다. 모든 생활에 동참하는 것이 성도의 교제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이 신조대로 살려고 하면 교회 생활에 있어서 상부 상조를 해야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은 우리 교회도 이런 면에 좀 더 충실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교회 안에 고아원, 양로원, 모자원 같은 기관을 설립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업에 얼마나 동참합니까? 누구나 참여해서 도울 수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란 말은 이런 일에 동참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신조를 생각할 때 한국 교회가 의료 사업 봉사 사업에 아직까지도 우리의 책임을 다 하고 있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고독하고 병들고 정신 잃고 말할 수 없이 불쌍한 가운데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의 고통에 얼마나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직업 알선이나 생계 면에도 도와 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 교육 문제나 결혼 문제 그 밖에 여러 가정 문제에 있어서도 피차에 도와주는 데 힘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질병이나 환난이나 슬픔 가운데 있는 우리의 교우를 피차에 위로하고 동참하는 이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장례식 때도 많이 모여서 위로하는 교회가 언제나 은혜 받는 교회입니다. 그것은 슬픔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의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얼마나 필요한 것을 느낍니다. 심방을 통해서 피차의 사정을 알게 되고 사정을 알게 될 때에 피차에 도와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조와 관련해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성찬식은 성도의 교통의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한 예식입니다. 성찬식의 깊은 뜻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 성찬식을 통해서 위로는 하나님과 교통하고 또 전후 좌우로는 모든 성도들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떡 한 개를 나누어 먹는 것도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작은 잔으로 마시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한 잔인 그리스도의 잔입니다. 주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찬식을 영어로는「콤뮤니온」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교제 혹은 교통이란 뜻입니다.
또 우리가 사는 시대를 새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 문명이 발전되는 산업 시대라고 합니다. 시대가 이렇게 변할수록 과학 문명이 발전될 수록 인간은 더욱 고독하여 집니다. 이상합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도시 생활일 수록 고독한 사람이 더욱 많아집니다. 문화가 발전 할 수록 그 사회에 독신자도 더 많아지고 괴로운 사람이 더 많아집니다. 한국 사회에도 지금부터 삼십 년 전보다 오늘날 외로운 사람이 더 많아 졌습니다. 미국 사회는 한국보다 고독한 사람이 더욱 많습니다.
산업화 할 수록 근대화 할 수록 고독한 사람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므로 이 성도의 교통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고독하지 않습니다. 왜? 성도의 교제가 있는 까닭입니다. 참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고독하지 않습니다. 살 때에도 고독하지 않고 죽을 때에도 고독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같이 하십니다. 죽은 다음에도 고독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이미 구원받은 천만 성도들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더욱 성도의 교통을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어떤 문제로 말미암아 성도의 교통에 있어서 상처를 입은 이가 있으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피차에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 주고 성도의 교제를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다시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성도의 교통을 힘쓸 것입니다.
다른 이가 내게 와서 친구가 되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먼저 그에게 가서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혹 고독한 이가 계십니까? 당신보다도 더 고독한 이가 많이 있습니다. 먼저 찾아가서 친구가 되고 그들을 위로해 주세요. 그러면 내 고독은 자연히 없어집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인사하기를 기다리기 전에 내가 먼저 가서 인사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슬픔을 당한 가정을 위로하고 피차에 동참해야 될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에 힘을 써서 합니다. 공부하는데 참여해서 피차 교제하고 구역 예배에도 참석하고 다른 단체에도 참여하여 같이 일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봉사를 해야 합니다. 성가대, 주일 학교, 심방 같은 교회 일에 봉사해야 성도의 교제가 생깁니다. 현대인 가운데는 그 심령 깊은 속에 고독감이 도사리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우주의 한 고아」라고. 그 심령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사람은 언제나 그 마음속에 허무감 고독감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 분이라도 이런 가운데서 헤매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세요.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에 들어가세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교제하고 모든 성도들과 교제를 할 때 우리의 생활은 원만하고 화평하고 풍부한 생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동양의 성현도 덕불고 필유인(德不孤必有隣)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외롭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웃이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를 믿고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一九六八년 八월 十一일)

Ⅹ-49 회개와 사죄 (사도신경 ⑥) (요한 一서 一장 一-十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 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一·九)

우리들의 신앙의 줄거리인 사도 신경의 첫째 조목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신을 믿는 것입니다. 넷째는 거룩한 공 회를 믿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성도가 교통하는 것을 다 믿습니다. 그리고 여섯째는 무엇입니까? 오늘 아침 여러분께서 다 외운 것처럼「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입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오늘 이 신조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는 이 신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나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신조는 내가 죄인인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잇는 것입니다. 죄의 관념이 너무 피상적이요 천박해서 그저 교도소에만 가지 않으면 죄인이 아닌 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그릇된 사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가령 공산당들은 그릇된 유물론적 윤리 사상에 사로잡힌 바 있어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고 도적질하고 심지어는 살인을 하는 것까지도 죄가 아닌 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현대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상황윤리라고 해서 죄를 합리화하고 죄를 죄 아닌 것으로 생각해 보려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은 분명합니다.『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뿐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를 뜻하는 낱말이 여러 가지 있지만 제일 많이 쓰이는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하말티아라」고 하는 말이고, 또 하나는「아노미아」라고 하는 말입니다.
하말티아라 고 하는 말의 근본 뜻은 과녁을 바로 맞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녁을 바로 맞추지 못하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바로 하지 못하는 것은 죄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할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죄요, 마땅히 될 대로 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아버지가 되어서 아버지 노릇을 바로 하지 못할 때에 죄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되어서 어머니 노릇을 바로 하지 못할 때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四장 七절에 보면 야고보 장로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또 죄는 아노미아 라고 도 하였습니다. 불법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요한 일서 三장 四절을 보면 죄는 곧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법을 무시하고 어기는 것이 죄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를 내시고 이 자연계가 질서 있게 운영되기 위해서 그 속에 자연 법칙을 두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내시고 인간 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도덕의 법칙을 주신 것입니다. 이 도덕의 법칙 곧 영원 불변한 법칙을 범하는 것이 곧 죄입니다.
요리문답 十四문을 보면『죄가 무엇이뇨?』라고 물어 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거기 대해서 『죄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또는 어기는 것이라.』고 분명히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들은 다 죄인들입니다. 성경 말씀에도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 가운데 하늘 나라를 가 보았습니다. 하늘 나라에 가보니 천사가 큰 책을 그의 앞에 갔다 놓았습니다.『이것이 무슨 책이냐?』고 물어 보니까 『그 책 가운데는 당신이 세상에 있을 때 행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첫 장을 들추니까 잔 글자로 가득 쓰여 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의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당신이 세상에 살 때 행동으로 지은 모든 죄입니다. 그 다음 둘째 장을 들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첫 장보다 더 잔글씨로 쓰여져 있었습니다.『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어보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이것은 당신이 세상에 살 때 말로 지은 죄들입니다.』라고 합니다. 말로 지은 죄는 행동으로 지은 죄보다 더 많은 모양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 장을 드려다 보니까 둘째 장보다 더 잔글씨로 더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으니까 천사의 대답이『이것은 당신이 마음 가운데서 생각으로 지은 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는 더 많습니다. 그리고 한 장을 또 들추어보니 이것은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고 새까맣습니다.『이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까『이것은 당신의 마음입니다.」하는 것이 천사의 대답이었습니다. 예레미야 十七장 九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마태복음 十五장 十九절에『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성이 부패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일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성이 부패하므로 인간의 지성이 어두워 졌습니다. 인간의 정서와 감정 생활도 더러워 졌습니다. 인간의 의지도 부패하고 약하여 졌습니다.
누구나 인간은 죄인이올시다. 죤 칼빈 같은 이를 그 당시 사람들은 성자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서의 첫 머리에 보면『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 고백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하였습니까? 이 신조는 첫째「나는 죄인이 올 시다.」라고 고백하는 신조입니다.
둘째로 그러나 이 신조는 죄의 고백만은 아닙니다.「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죄인이라도 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하는 것이 이 신조의 골자입니다.
오늘 아침 예배를 시작할 때에도 읽었습니다만 시편 一0三편을 제가 몇 절을 다시 읽을 터이니 들어보십시오.『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면서 그 모든 은택(恩澤)을 잊지 말지어다.』그 다음에 무슨 말이 있는지 아십니까?『저가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심이라 내 모든 병을 고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그 아래 十절을 보면『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습니다.』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올시다. 인간이 이렇게 새까만 죄인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一장 十八절을 보면「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을 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리요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붉은 죄라도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시고, 흰 눈과 같이 그리고 흰 양털과 같이 만드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五장 十七절에『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 계시록 二十一장 五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죄를 사해주고 만물을 새롭게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인간의 힘으로는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 구약 시대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지키는 대 속죄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날에는 대제사장이 특별히 염소 두 마리를 취해서 한 염소의 머리에는 자기 민족의 죄를 다 고백하고 속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염소의 머리에는 안수하면서 모든 자기 민족의 죄를 다 자복을 한 후에 이것을「아사셀 염소」라고 해서 멀리 광야로 내어 보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멀리 옮겨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류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하나님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렸던 더러운 여자라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깨끗한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방탕한 청년이라도 성 어거스틴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우리의 체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나는 죄가 너무 많아서 소망이 없다―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사가 더욱 큽니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말 것입니다. 아무리 탕자라도 아버지 앞에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해 주시고 두 팔을 벌려 환영해 주실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마지막으로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는 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검은 죄인이 죄 사함을 받고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이 있고 또 우리 인간이 할 일이 있습니다.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합시다. 마태복음 一장 二十一절을 보면 꿈 가운데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정혼한 마리아를 의심치 말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예수 님께서 나타나시니까 그를 향하여『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께서도 친히『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오셔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깊은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생활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곧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렸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 은『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들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만에 다시 부활 하셨느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님 자신도『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오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지금까지「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라고 우리들은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 생명을 버렸습니다. 이것이 때때로 참여하는 성찬의 뜻입니다. 예수 님께서 잔을 드시고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편에서 이런 놀라운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갈 뿐입니다. 탕자와 같이 돌이켜 아버지의 집으로 갈 뿐입니다. 회개란 말은「마음을 고쳐 돌아선다.」고 하는 뜻입니다.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와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뿐입니다.
천로역정(天路歷程)을 읽어보면 기독교도가 천성을 향해가다가 십자가가 환하게 높이 선 것을 바라볼 때에 등에 지고 다니던 죄의 짐이 떨어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와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의 죄의 짐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습니다. 새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에는 죄를 경히 여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저 교도소애만 안 가면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죄에는 삯이 있다고 합니다. 삯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물어야 합니다. 교도소에 안 간다 하더라도 벌은 그냥 받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우선 양심 속에 벌을 받습니다. 가책을 받습니다. 여러 가지 심리적 질환으로 벌을 받습니다. 공포심과 온갖 변태적 심리로 벌을 받습니다. 심리적 질환뿐만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여러 질환이 나타나서 형벌을 받습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나만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죄가 삼사 대까지 미칩니다. 자손에게까지 미칩니다. 어떤 청년이 군대에 나가서 외국에 주둔을 했답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에 가지 않을 곳을 한두 번 갔다고 합니다. 물론 감쪽같이 남은 모릅니다. 몇 해 후에 자기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일년 후에 딸을 하나 낳았습니다. 아주 예쁘게 생긴 딸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맹아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잘 조사해 보니 아버지의 피 속에 매독 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죄는 자손에까지 영향을 줍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단언합니다. 영원한 세계에까지도 형벌을 받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민족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세계 인류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二十세기는 가장 과학이 발달된 세게라고 자랑을 합니다. 우주 시대에 산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二十세기를 한 번 살펴보면 인간 역사상 가장 두렵고 무서운 피 비린내 나는 세기인 것이 또한 확실합니다. 일차 대전의 참상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치스의 모든 만행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공산 혁명과 그에 따른 숙청과 학살의 피 비린내를 우리는 지금도 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차 대전의 참화를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 땅에도 6·25 동란이 벌어졌고 월남 사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체코에서는 야만적인 행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류가 이렇게 계속 나가다가는 결국 인류전체가 자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선 것을 우리는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는 값이 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살길은 오직 회개하는 길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고 온 세계가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리라.』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말을 들을 때야 회개하기는 하겠지만 좀 천천히 하면 어떤가―이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로 연기하지 맙시다. 내일이 있다는 것을 보장합니까? 내일을 우리는 모릅니다. 성경 말씀과 같이 오늘이 구원의 날이요 지금이 은혜를 받을 때입니다.
(一九六八년 八월 二十五일)

Ⅹ-50 부활과 영생 (사도신경 ⑦) (요한 복음 十一장 十二-二十七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十一·二十五-二十六)

이 시간도 사도신경을 계속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 신조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를 내가 믿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신을 믿습니다. 넷째는 거룩한 공 회를 믿습니다. 다섯째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여섯째는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일곱째는 무엇입니까?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인간 생활에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일은 단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생(生)이요, 또 하나는 사(死)입니다. 곧 삶과 죽음이올시다. 생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 크게 관심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장차 우리가 다 당할 일입니다. 누구나 의 당면 문제입니다. 현실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마지막 숨결을 거둘 때에 우리는 머리 숙여서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 후에 장사를 지내고 사랑하는 이를 무덤에 묻고 무덤 가에서 돌아서게 될 때에 우리의 머리 속에는 인생의 깊은 문제가 떠오릅니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요한 복음 十四장 十四절에 있는 말씀처럼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겠는가.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마지막 신조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 문제에 대한 해답이올시다. 몸이 영원히 다시 살리라는 해답입니다.
먼저 몸이 다시 사는 이 부활의 문제에 관해 잠깐 생각하십시다. 물론 이런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해결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서만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가. 먼저 구약을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二十六장 十九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다니엘 十二장 二절에는『땅에 티끌 가운데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羞辱)을 받아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는 자들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부활이 가능한가. 사람의 힘으로는 물론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다 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가운데서 우리 몸을 지으셨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부활도 하나님께서는 가능합니다. 신약을 보면 예수 님께서는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한 복음 五장 二十八절과 二十九절에『이를 기이(奇異)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님 당시 유대교에는 두 교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리세파요 하나는 사두개파였습니다. 바리세파는 지금으로 말하면 정통 보수파요 사두개파는 지금으로 말하면 자유주의 신 신학 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구약 가운데서도 모세 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고 다른 모든 책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세 오경은 부활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 믿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예수 님께 나와서 부활을 비웃으려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가지고 질문한 것을 여러분들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부활을 믿으신다고 하는데 부활 때에 가령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결혼하여 얼마 살다가 죽으니까 유대 사람들의 풍습대로 그의 동생이 형수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이 또 죽었습니다. 형수는 그 다음 동생과 살았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그 여자는 일곱 형제와 같이 살다가 죽었는데 그러면 이 다음 부활할 그 여자는 누구와 같이 살겠습니까?』굉장히 묘한 질문입니다. 그 때 예수 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도 모르는구나 이 다음 부활하게 되면 천사와 같이 될 텐데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소리가 다 무슨 소리냐 왜 그런 어리석은 얘기를 하느냐.』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들은 모세 오경에 부활이 없다고 했는데 출애굽기 가운데 가시덤불에 관한 글이 있지 않느냐 가시덤불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했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오 산 자의 하나님이다.』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나 다 살아나는 것이다.
사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끼리 하는 말이다. 우리가 죽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영혼이 살아납니다. 예수 님의 이적 가운데 부활의 이적도 있습니다. 물론 일시적 부활 입니다마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이런 이적도 행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마지막에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무든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여 주었습니다. 죽은 후에도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님의 부활은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시고 이 다음에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고린도 전서 十五장 五十一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죽은 자들이 다시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알고 우리도 변화하리라.』한 가지 분명히 기억합시다.
이 부활한 몸은 물론 이 몸을 기초로 해서 변화하겠지만 이 몸과 같은 몸은 아닙니다. 고린도 전서 十五장 十二절 이하를 읽을 때 잘 들어보세요.『이 섞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고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리라.』그래서 빌립보서 三장 二十一절에는『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부활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한 영광된 몸과 같은 몸을 우리가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 몸이 다시 산다고 하는 신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 영혼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몸까지 다시 말해서 인격 전체를 구원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영혼만이 아닙니다. 육체만이 아닙니다. 육체와 영혼이 합한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 전체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에서 여기 내세와 영생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영생과 내세에 관한 관념은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만 동서 고금을 물론하고 어떤 종교 가운데서든지 찾아 볼 수 있는 사상입니다. 우리 동양에서도 죽으면 황천에 간다고 하는 희미한 사상이 있습니다. 옛날 애굽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저 나라로 간다고 해서 유명한 왕능(王陵)같은 데는 묘실(墓室)옆에 큰방을 만들어 놓고 배를 만들어 넣고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사람을 묻기 전에 시체의 입에다 돈을 한 입 넣어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역시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강을 건너서 딴 세계에 간다는 사상아래 뱃사공의 뱃삯을 주라고 하는 의미의 풍습이었습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나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시세로 같은 이는 철학적 견지에서 영혼은 불멸하며 반드시 살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지금에 있어서도 극단의 유물론자 외에는 대체로 내세와 영생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왜 인생들이 내세와 영생을 믿는가.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이성적 견지에서 볼 때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이성적 우주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치에 맞는 우주라는 말입니다. 무리한 우주가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이 있고 모든 것에 지혜가 잇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견지에서 보면 인간이 이 세상에 잠깐 살기는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상과 큰 포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상과 포부를 이 세상에 살 때에 이루고 간 사람이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인간의 생활만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많은 철학자들은 아무래도 인간은 내세가 있고 내세에 이것을 이룰 기회가 있는 것이라고 간증을 하게 된 것입니다. 또 특별히 과학이 발달되면서 무슨 원칙을 믿게 되었느냐 하면 소위 물질 불멸의 원리란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물질이란 것이 그 형태는 변하나 물질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법칙입니다. 가령 솥에 물을 넣고 끓이면 물이 없어진 것 같지만 실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이 수증기로 변화했을 뿐입니다. 초에 불을 켜면 초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초에 탄소와 공기 중의 산소가 결합하여 탄산가스로 변했을 뿐입니다. 화학적(化學的)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육으로 된 이 몸은 죽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무덤에 묻혀서 썩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썩어진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화학적 변화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죽은 다음에도 육체도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냥 잇다는 말입니다. 물질은 그냥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부분인 영혼은 죽을 때 아주 없어지겠습니까?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낮은 것까지 보존하는 이 우주에 있어서 가장 귀한 인간의 영혼만이 없어지도록 만들어 졌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내세와 영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선한 자에겐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겐 형벌을 하시는 하나님이올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이 그대로 실현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죽입니다. 핍박합니다. 지금 체코의 사태를 보세요. 이런 것을 미루어 볼 때 권선징악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내세가 반드시 있는 증거입니다. 이 세상 인간 세계에서는 이것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 인간은 이 세상에서만 살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 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람이 내세와 영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은 꽃다운 청년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죽는 이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기나 어린 청년이 비록 먼저 이 세상은 떠나지만 생명은 계속되나 오는 세상에서 다 장성하고 발전할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란 그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이론으로만 확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 확증하기가 어렵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서만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런 문제를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은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도다.』하나님에게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선언했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산다는 영생의 뜻은 무엇입니까? 물론 오래 산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만은 아닙니다. 이 우주에서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사시는 이는 한 분밖에 안 게십니다. 누구인지 아십니까? 하나님뿐입니다.
영생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길이 살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같은 참된 생명을 우리도 얻는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생이란 죽을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 때 이것을 얻어야 죽어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거듭나게 된 사람은 그 때에 이미 영생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요한 복음 五장 二十四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믿고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과거사입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음이라.』이미 옮겼다고 했습니다.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도 그 뜻입니다. 이 영생을 얻은 사람은 죽음이 관계가 없습니다. 죽음이란 것은 이 세상과 모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죽음이라 하더라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인 이 영생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믿고 영생을 얻은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영생을 얻은 사람은 영원한 하늘 나라에 가서 계속해서 장성하고 발전하고 온전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리에 이르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마지막 신조는 우리 믿는 사람이 이미 영생은 얻었으므로 우리가 육신을 떠나는 그 즉시로 영원한 나라에 살게 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예수 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날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 그대로 우리 믿는 사람들도 육신을 떠날 때에 곧 예수 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어떻게 됩니까? 당분간 하나님이 허락하는 그 시간까지 무덤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마지막 날에 이 육체까지도 부활해서 영혼과 육체를 합한 인격 전체가 구원을 얻어서 온전한 인간이 되고 하늘 나라에서 장성하고 또 온전케 되어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 무궁한 축복의 생활을 한다고 가르칩니다.
주후 六세기에 기독교가 영국에 처음 전파될 때에 영국은 조그마한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노덤부리아란 조그마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에 에델벍스란 왕이 있었는데 그 왕에게 어떤 전도자가 가서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사는 축복을 받는다고 전도를 했습니다. 이 왕이 전도를 받고 믿을까 말까 작정하기가 어려워서 하루 저녁엔 여러 대신들을 모아놓고 이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이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산다고 말하는데 우리가 예수를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당신 네 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에 여러 신하들은 아마 이렇게도 저렇게도 이야기를 했겠지요. 밤은 깊어만 갑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아주 캄캄합니다. 방안은 불을 환하게 켜 놓고 여름이라서 문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 갑자기 참새 한 마리가 방안으로 날아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빙 한 바퀴 돌더니 도로 그 캄캄한 밖으로 날아갔습니다. 그것을 본 늙은 재상은 『이제 그 참새를 보니까 캄캄한 밤에 이 밝은 방에 잠깐 들어 왔다가 다시 그 캄캄한 밖으로 날아갔습니다. 우리 인생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 저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캄캄한 가운데서 이 광명한 세상으로 잠깐 와서 얼마 있다가 어두운 데로 가고 맙니다. 그런데 만일 이 새로이 전파되는 종교가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장차 어디로 가는지 이 깊은 진리를 우리에게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종교는 반드시 믿어야 될 것입니다.』그러자 이 왕과 다른 신하들이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그 때부터 이 나라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제일 먼저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로 한 나라가 이 노덤부리아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우리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종교입니다.
여러분, 야곱과 요셉의 얘기를 아실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아들들에게 보냈는데 아들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멀리 애굽으로 팔아먹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자기 아버지한테 가서는 피 묻은 옷을 보이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꼭 죽은 줄 알았습니다. 여러 해 동안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 흉년이 들어서 쌀을 사러 애굽에 갔다 온 아들들이『요셉이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하고 보고를 했습니다. 야곱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믿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은 요셉이 야곱을 모셔 가기 위해서 황금마차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야곱은 반신반의하며 마차를 타고 애굽에 가보았습니다. 과연 요셉은 살아 있었습니다. 기쁨의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에도 먼저 아들을 이 세상에서 보내신 분이 혹 있을 것입니다. 혹 딸을 먼저 이 세상에서 보내신 이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아들과 우리 딸이 어떻게 된 것일까 하고 눈물을 많이 흘릴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앞으로 어떤 날엔 가는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황금 마차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그 황금 마차를 타고 하늘 나라에 가면 없어졌다고 슬퍼하던 그 아들, 그 딸을 다시 만나 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 마지막 신조의 뜻입니다. 그 때에 우리 인간의 모든 눈물은 거두어 질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사람들은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구원을 받아서 주님과 같이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는 잠깐 있다가 이 세상을 떠나지만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가 올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꼭 기억합시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하는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금생과 내세를 돌아봅시다. (一九六八년 九월 一일)

Ⅹ-51 영광의 죽음 (故 박덕모 長老 告別禮拜 설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十四·十三)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二·十)

여기 읽은 계시록 十四장 十三절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말씀이올시다.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보통으로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복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실 죽음이라고 다 복된 것은 아닙니다. 주 밖에서의 죽음은 사실 복이 아니고 화(禍)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안 믿는 자들과 성도의 죽음 사이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본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의 일생에 있어서 마지막의 죽음은 가장 귀중한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또한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의 생활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와 같이 매일 매일의 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시간과 정력과 물질과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제사로 바치는 그것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시간이 올 때 우리의 생명 전체를 온전히 주님의 제단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가장 귀중하고 그러므로 주님은 성도의 죽음을 가장 소중하게 보시고 주안에서 죽는 자들에게 크신 축복을 더하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간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우리가 잘 알고 평소에 존경하던 박 덕모 장로님께서 요 며칠 전 문자 그대로 갑자기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이 장로님의 일생을 우리가 이 자리에서 돌이켜 볼 때에 참으로 그의 일생은 하나님께 드린 제사였고 그의 마지막 죽음은 하나님의 진리의 제단에 자기의 생명을 문자 그대로 마지막 핏방울까지 부어서 바친 거룩한 제사인 것입니다.
박 장로님은 평신도로 교회를 봉사하셨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여기 약력에도 나옵니다마는 신학교를 졸업하신 분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신 후에도 자기의 교양을 더욱 높이기 위하여 숭실대학을 또한 졸업하신 분입니다.
이 분의 신앙은 계속해서 전진하는 신앙이었습니다. 평신도로 교회를 봉사하되 최선을 다 해서 가장 준비를 잘 해서 옳게 봉사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교양을 쌓고 공부를 하신 이러한 장로님이올시다. 박 장로님의 성품을 제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적인 온유와 겸손의 성품을 가지신 어른입니다.
그 동안 교회의 장로로써 주일학교의 부장으로써 단체의 회장으로써 여러 가지 면으로 교회를 봉사하셨지만 자기를 나타내시지는 않는 분입니다. 조용히 봉사하는 분입니다. 그의 성품 자체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은연중에 풍기게 하는 그런 고귀하고 성숙한 신앙을 가진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그 아들을 축복해 주셔서 온 가정도 꼭 같은 신앙 가운데서 봉사하는 기독교 가정으로 축복해 주시고 또 제가 설명할 필요가 없이 세상을 떠나는 그 시간까지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우리 교회학교 초등부를 위해서 수고하시고 직원회를 열어 봉사하시다가 문자 그대로 순직하신 장로님이올시다.
작년에도 제가 아는 대로 목사 두 분이 강단에서 설교를 마치고 쓰러졌습니다. 한 분은 곧 세상을 떠나고 한 분은 지금까지 누워서 고생을 하십니다. 금년에도 우리 장로교 목사 두 분이 강단에서 쓰러져서 두 분이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실 이렇게 목사 가운데는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시다가 최후를 마치는 순직하는 분이 많지마는 아마 장로로서 교회를 봉사하시다가 이렇게 예배당에서 쓰러져서 최후의 산 제사를 드린 분은 제 기억에는 이 박 장로님뿐이올시다. 참으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피차에 떠나는 슬픔이 없으리 오 마는 참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온전히 최후의 마지막 피 방울까지 진리의 제단에 바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고 가신 어른이올시다.
성경에 보면 아벨은 죽었으나 지금까지 말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박 장로님의 유해는 이 자리에 고요히 누워 있습니다. 그 입술에 음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요히 누워 계신 장로님께서는 고요히 무언의 말씀을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은 시종이 여일 한 참된 신앙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교회를 옮겨 봉사하려면 어떻게 계속해서 연구를 하고 말씀을 사랑해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인가. 기독교 가정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맡은 바 책임을 충성을 다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어디까지 충성을 다 해야 하는가.
여기 요한 계시록 二장에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박 장로님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 죽도록 충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약속 그대로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먼저 가신 선배 먼저 가신 선친에 대해서 우리가 계속해서 경의를 표시하는 유일한 길은 박 장로님이 남기고 가신 신앙과 그 행적을 본 받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가셨으나 이렇게 귀한 행적을 그 가정에 남기시고 우리 교회에 남기셨습니다. 하나님께 이 가정과 우리 교회를 축복하여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무언중에 조용한 가운데 조용한 그의 봉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사실 장로님 중에서 구내에서 세상을 떠나신 분이 박 장로님이 세 번째입니다. 제일 먼저 고 필웅 장로님께서 구내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고 장로님은 교회의 시무 장로로 계시면서 교회 일을 여러 방면으로 맡아보시다가 이 구내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여기 비석이 서 있습니다마는 인민군에게 매를 맞고 총살을 당해서 온전히 희생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번 이 박 장로님은 최후까지 충성을 다 하다가 이렇게 마지막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락교회 구내를 생각할 때 참으로 이 거룩한 땅 내가 이 땅을 걸을 때에 조심해서 걸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장로님의 그 신앙 그 봉사 그 최후까지의 충성 이것을 우리 현재에 봉사하는 모든 장로님들, 모든 집사 님들, 모든 반사 님들, 그리고 모든 교우가 본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우리 교회를 더욱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一九七一년 七월 二十일)
<한경직 목사 설교집 제10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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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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