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하나님 말씀 !!

[스크랩] 성경의 영감과 원본·사본·역본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아들 2013. 1. 30. 17:44

- 성경의 참된 권위 확립을 위한 기초 이론 - / 나 채 운 (장신대 교수/신약학)

 

서 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여기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 첫째로는 성경의 내용 즉 메시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리키며, 다음으로는 성경 자체에 대한 바른 이해, 즉 성경이 무엇이며, 어떻게 기록되고 전수되어 왔는가 하는 등에 대한 바른 이해, 곧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본문 해석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본문 형성에 관한 것이다. 필자가 본고에서 논하고자하는 것은 후자에 관한 것이며, 오늘날의 본문 비평학(textual criticism)도 그 가운데의 한 면이다.

 

.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

디모데후서 3:15-17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 본문 가운데에서 성경 자체에 관하여 가장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 본문은 성경의 유일성(唯一性)에 대한 논급으로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15절의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는 성경의 유일한 특질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직 성경 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둘째, 16절 전반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는 말씀은 성경의 기원에 관한 것으로서 성경만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것이다.

셋째, 16절 후반의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는 성경의 유일한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경 만이 인간의 죄를 책망하고, 잘못된 것을 옳게(의로) 바로 잡아주는 책이라는 것이다.

넷째, 17절의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성경의 목적을 가리키는 말씀으로서 성경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한편, 대한예수교장로회의 12신조는 그 첫 항에서 성경에 관하여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다.”라고 규정하여 올바른 성경관을 제시하고 있다. 그 본문이 담고 있는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이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본문 가운데의 말이 실제적으로 누구의 말이든지 간에 그것이 성경에 기록될 때는 저자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관하여 정확 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적극적인 의미와 소극적인 의미가 있다. 적극적인 의미로는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해서만 정확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이요, 소극적인 의미로는 성경이 신앙과 행위 이외에서는 정확무오한 말씀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 가운데에는 역사도 있고 문학도 있고 과학(당시)도 있으나, 성경은 결코 역사책이나, 문학책이나, 과학책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 안에 기록된 역사나 과학에는 일부 오류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경의 오류가 될 수 없다. 성경은 본래적으로 역사를 가르치거나 과학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해서만 정확무오한 말씀인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셋째, ‘유일한 규범이라는 의미는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헤가 있게 하는 데정확무오한 규범이라는 것으로서, 성경의 절대성을 나타낸다.

 

. 영감에 대한 바른 이해

영감을 의미하는 헬라어 테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는 데오스(theos 하나님) 와 프네오(pneo 숨쉰다)의 합성어이며, 디모데후서 3:16에만 한번 나오는 낱말(소위 hapakslegomena)로서, 하나님께서 성경(원본)을 기록하는 사람에게 기록자가 인간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하나님)의 영적인 통제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영감으로 쓰여졌다고 할 때, 그 표현은 기록에 보다도 기록자(성경의 원저자)에게 초점을 두는 것이다(벧후1:21).

이제 이 영감의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영감의 성질, 영감의 방법, 영감의 범위들로 나누어 고찰해보자.

첫째, 성경의 영감은 그 성질에 있어서 기계적 영감(mechanical inspiration)이 아니고,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이다. 극단적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는 기계적 영감설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는 성령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아 그들 자신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성령이 지시하는 대로만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데 사용된 기계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기적 영감설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시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개인적인 지식이나 경험,사상이나 개성 등을 그대로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메시지를 기록하도록 성령으로 감동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그 기록자의 개인적인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즐겨 쓰는 용어나 문체까지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볼 때, 성경의 내용이 밝혀주는 진실은 기계적 영감이 아니고 유기적 영감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4복음서 각각에 저자의 개인적인 요소(마태는 구약을 많이 인용하고, 누가는 소외된 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으며, 요한은 빛·생명·사랑·진리의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가 나타나 있으나, 이러한 개인적 요소가 추호도 하나님의 영감을 제한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둘째, 성경의 영감은 그 방법에 있어서 축자적 영감(verbal inspiration)이 아니고, 개념적 영감(conceptual inspiration)이다.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어휘의 선택이나 자구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지배하여 조금도 다름이나 틀림이 없도록 하였다는 것이 축자적 영감설인 데 반해, 개념적 영감설은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내용을 개념(의미)상으로만 바로 기록하도록 영감하시고 어휘의 선택이나 표현의 기술 방법 등은 저자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실제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컨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4복음서가 문자적으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이사랴 빌립보의 베드로 고백도 공관복음이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synopsis 참고). 그러나 이처럼 복음서 마다 다르게 기록되었지만, 그 내용, 즉 성경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공통되고 상치되거나 결여된 것이 없다.

셋째, 성경의 영감은 그 범위에 있어서는 부분적 영감이 아니고, 전체적 영감이다. 성경의 저자에 대한 영감은 그 내용이 역사적이거나 교리적인 것이나, 문학적인 쟝르에 있어서도 산문이거나 시이거나, 예언이거나 묵시이거나, 말의 주체가 하나님이거나 사람이거나 심지어 마귀이거나 간에 성경의 내용의 전범위에 미치는 것이다.

넷째, 성경의 영감이란 얼밀히 말하면, 원본의 저자에 대한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영감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영감을 받은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당연한 결과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은 파피루스·양피지 사본을 합쳐서 대문자 사본·소문자 사본·성서일과표 등 모두 5,500개도 넘는데 그 중의 단 둘도 완전히 동일한 것이 없으며, 바로 이 사실이 사본의 필사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감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성경학자들이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언급할 때, 사본이나 역본의 영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사본이나 역본의 필사자나 역자에게 영감이 없었다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 언급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명한 보수주의 신학자인 루이 벌코프(L.Berkhof)도 자신의 책 성경해석학(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에서 동일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위 번역서 44).

 

. 사본에 대한 바른 이해

맨 처음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이나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의 원본은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한편 그 없어진 원본을 보고 베껴 쓴 사본은 수천 개나 남아 있어 없어진 원본의 내용을 알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사본의 필사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보존하고자 하는 열정과 그 말씀을 널리 보급하려는 사명감으로 심혈을 기울여 원본을 필사하였으나, 인간이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지라, 사본이 수백 년 동안 필사를 해오는 과정에서 얼마간의 착오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한 착오의 구체적인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본다.

첫째, 필사자의 비고의적인 착오로 본문이 잘못 베껴진 것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경우가 있다.

1. 필사자가 잘못 보아서 생긴 착오로서, 서로 비슷한 헬라어 글자(모양이나, 붙여쓰기, 띄어쓰기를 잘못함으로써)를 잘못 구별하여 착오를 일으킨 경우(딤전 3:16, 벧후 2:13, 6:5 )가 있는가 하면, 필사하는 대본의 두 행이 같은 낱말이나 음절로 끝났을 때, 필사자가 그 두번째 행을 빠뜨리고 베낌으로 착오를 일으키는 경우(10:32, 고전 9:2 ) 등이 있다.

2.. 필사자가 잘못 들음으로서 생긴 착오로써, 이것은 받아쓰기를 하는 경우에 생길 수 있는 사례이다(5:1echomen<가지자>echomen<가진다>의 경우와 마태복음 11:16heterois<다른 것들>hetairois<동료,친구>의 경우).

3. 잘못된 기억 때문에 생긴 착오로써 동의어가 혼동되어 쓰이거나(apoek), 낱말들이나 한 낱말 안의 글자의 자리가 바뀌어 필사되는 경우이다(1:5, 14:65).

4. 필사자가 자신의 간단한 주해를 본문 사이에 끼워 둔 것을 그 다음 필사자가 그것을 본문으로 잘못 판단해서 본문으로 베껴 씀으로써 생기는 경우이다(5:3-4, 고후8:4 ).

둘째, 필사자들이 그 전 필사본의 어떤 부분이 문맥적으로나 내용상으로 잘못된 것으로 알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로 첨가하는 경우이다(11:2-4과 마 6:9-13에 나오는 주기도 등 ̶ 더 자세한 설명은 메츠거의 신약의 원문, 그 전수와 오류 그리고 회복(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Its Transmission,Corruption and Restoration )을 참고 바람).

이러한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 달라진 성경의 사본들을 세밀히 비교 대조하여 없어진 원본의 본문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노력이 본문비평이다. 이 작업은 실로 어려운 작업이기에 성경 연구가들은 원본의 본문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1)쉬운 본문 보다 어려운 본문이 2)긴 본문 보다 짧은 본문이 3)조화가 잘된 본문 보다 얼마간 불일치한 본문형태가 더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보며, 4)사본의 본문이 저자의 일반적 용어나 문학적 양식에 맞지 않거나, 전체 문맥에 어울리지 않을 때는 잘못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을 비평하고 사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어 가지 곡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사본에 있어서의 영감의 문제는 사본 필사자에 대한 영감의 문제라는 점이다. 즉 사본 필사자에게 영감이 없었다고 해서 사본의 내용이 영감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둘째, 사본의 내용이 영감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사본이 원본을 정확하게 필사하여 보존하는 범위 안에서는 그 내용에 있어 영감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원본이 영감된 것이기 때문이다.

 

. 역본에 대한 바른 이해

오늘날 대다수의 성경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은 각기 자기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다. 원본은 없어졌지만, 그 말씀은 사본을 통하여 전승되고, 우리는 그 사본을 우리의 말로 번역을 해서 읽게 된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번역본은 1993년 말 현재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보고에 따르면 2,062개 언어에 이른다.

그러면 성경의 번역에는 문제가 없는가? 우리는 위에서 성경의 사본에 관한 몇 가지 문제점을 보았거니와 성경의 번역에는 실로 그 이상의 문제가 있다. 사본에 있어서는 사본의 필사자가 영감된, 정확무오한 원본을 정확하게만 베껴 썼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지만, 번역에 있어서는 제한된 능력을 가진 인간인 번역자가 성경 원문, 특히 어려운 원문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각기 다른 이해에서 달리 번역할 수도 있고, 그 중에는 오역의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번역될 때 마다 많은 사람들의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각기 저마다의 원문 이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예컨대 그렇게 훌륭한 번역이라고 인정되었던 킹제임스 역본(King James Version - 1611)1758년 요한 웨슬레에 의해 신약만 무려 12,000 여 곳이 수정되었을 정도이다.

성경의 번역에 있어서는 무엇 보다도 대본(text)을 잘 선정해야 하는데, 현재 구약으로는 Biblia Hebraica Kittel(BHK)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BHS)가 있고, 신약으로는 네슬.알란트의 Novum Testamentum Graece(NTG)와 세계성서공회연합회(the United Bible Societies)The Greek New Testament(GNT)가 있다. 위의 각각 두 가지의 구약과 신약의 원문 성경이 달리한 것은 주로 본문 비평장치(난하주)이며, 본문은 거의 동일하다.

성경의 번역이 잘못된 경우는 예컨대 원문을 잘못 번역하는 경우(독생자의 번역 문제), 번역의 대본(text)을 원문(히브리어나 헬라어)으로 하지 않고, 기존의 권위있는 번역본(불가타 등)으로 하는 경우, 또는 번역자가 인칭대명사를 의도적으로 달리 번역하는 경우, 원어에 해당하는 번역어(수용어)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21:15-17의 사랑에 대한 번역) 경우 등이 있다.

번역에는 이처럼 어려운 문제들이 있으므로 학자들에 의해 몇 가지 번역 이론이 주장되어 왔는데, 거기에는 직역과 의역, 문자역과 자유역, 형식적 일치의 번역과 역동적 동등성의 번역 등의 대립적 원칙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번역 원칙 중 어떤 것이 적용되느냐는 원어와 번역어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 맹목적 보수신앙의 모순성과 위험성

우리는 성경의 영감과 원본·사본·역본 등에 관한 중요한 점들을 고찰해 보았거니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그 어떤 신학 이론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신학이론도 성경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에 기초하여 신학 이론을 세우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들 나름대로 어떤 신학 이론이나 교리를 정립해 놓고 그것에다 성경의 본문을 적용시키는 exegesis가 아니라, eisegesis를 하는 과오를 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한 가지 실례가 성경의 영감과 원본·사본·역본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그리하여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도 무조건 성경의 영감을 철저하게만 주장하면 그것이 마치 가장 좋은 신앙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영감은 필사자에게도 나아가서 성경 번역자에게도 되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사본 필사자나 번역자에게까지도 영감이 되고,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항에 대한 척도가 되며 문자적으로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야 말로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원본에도 서로 불일치한 점이 있으며, 사본의 필사자나 번역자에게는 영감이 없으므로 사본간의 불일치가 있고 번역상의 오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이나 역본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라는 데에 진정으로 성경의 권위가 바로 세워지고 성경이 바로 이해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이지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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