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

[스크랩] 십자가 영성을 회복하라(원본)- 제2장 십자가, 하나님의 마음 1

하나님아들 2012. 7. 31. 22:36

제2장 십자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고뇌에 찬 아픈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십자가의 진정한 이해이다. - 지다구라 -

광야 학교에 머무르고 있을 때 출근 중에 차 안에서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매일 절박한 상황이어서 길이든, 차안에서든, 어느 곳에서든지 틈만나면 부르짖던 때였습니다. 나는 두 손으로 핸들을 꼭 잡은 채 신음하듯이 "아버지 ~~~!"를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아버지"를 외치는데 고통과 아픔이 몰려왔습니다. 10여년간 목양길에 서 있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것 같다는 자책 때문이었습니다. 그 순간 부끄럽고 죄송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목자상은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양떼들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돌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졌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한참 동안 눈물로 부르짖다가 잠시 차를 세운 채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핸드폰을 들고 울먹이며 아내에게 고백했습니다.

"여보, 난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목양했던 것 같아 --- "

"이제 아버지의 마음을 더 깊이 알아야겠어"

그 날부터 나는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예수님의 기도가 떠올랐습니다.

"아빠, 아버지여"(막14:38)

당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셨다는 것은 획기적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직접 부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의 아버지"(렘31:9)라고 한 적은 있으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적은 없습니다. 이사야서의 기도에서 "주는 우리의 아버지"라고 칭하긴 했지만 그 칭호는 부권(fathership)을 의미한 것이었지 백성들이 부르던 일반적인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한 피맺힌 소원

구약 시대에는 아무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죄값으로 인해 하나님의 만날 수도, 이름을 부를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은 획기적이었지요. 마가복음서를 기록한 마가에게도 충격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는 "아빠 아버지"의 호칭을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아마 그렇게 기록했다가는 유대인들에게 몰매를 맞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순교적인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그의 영적 아버지 베드로(벧전5:13)에게 들었던 것을 가감없이 기록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빠"(abba)라는 말은 아버지의 아람어입니다. 당시 문화 가운데서 "아빠"(abba)라는 말에는 세가지 용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주로 가족용어로 사용했습니다. 마치 우리 나라에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아빠"라고 부르듯이 당시에도 가족들 중에서 아버지를 부를 때는 "아빠"(abba)라고 불렀던 겁니다. 가족 외에는 거의 "아빠"(abba)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던거지요. 둘째는 두사람 사이의 친근한 관계를 보여주는 용어였습니다.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아빠"(abba)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셋째는 두 사람과 친밀한 교제가 있을 때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친근한 가족관계로써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계속 해오셨던 겁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준 것이지요. 그러면 “아빠”의 호칭과 교제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카리스토스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과 교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시작된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다는 것은 부자간의 친밀한 교제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라는 신학자는 예수님의 아빠 호칭이야말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의 진수”였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빠라는 호칭을 통해서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친밀하고 다정하게 부르신 겁니다. 동시에 확신에 찬 믿음으로 부르셨으며, 존경과 순종의 마음으로 부르신 겁니다.

다윗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곳곳에 그 증거들이 역력합니다. 가령, 시편 3편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 소식을 듣고 도망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시3:1-8).

단 8절로된 짧은 시에서 다윗은 여호와, 주를 10번이나 부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삶의 습관이 되었던 것입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다보니까 위기의 순간에 저절로 하나님이 입에서 나온거예요. 다윗은 입만 열면 하나님의 이름이 터져나왔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니까 어느 때든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나누셨던 교제, 곧 기도를 가장 정밀하게 소개한 복음서 저자는 누가입니다. 누가는 복음서 저자 중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기도하시는 분으로 묘사했습니다. 예를 들면,

눅3:21에서는 사역을 시작하실 때 기도하셨습니다. 5:16에서는 엄청난 유혹이 몰려올 때 기도하셨습니다. 6:12에서는 제자들을 뽑을 때 기도하셨습니다. 9:18에서는 베드로가 신앙 고백을 하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9:28에서는 변화산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11:1에서는 주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22:44에서는 겟세마네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과 친밀하고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교제를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던거지요. 거기다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도 전부터 이미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계셨다는 증거들도 확연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계셨던 겁니다.

한 번은 유월절 때 열두살 되신 예수님이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왔다가 실수로 성전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부모는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 꾸짖었습니다. 어린 예수가 선생들 중에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2:41-50).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았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세상을 사랑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고,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에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에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셨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지요. 어려서부터 시작된 하나님과의 교제가 성인이 되어서는 더 성숙하고 깊은 교제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다보까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들어가라

일반적으로, 교제란 상호간의 친밀함을 가져다주는 통로가 되는 법입니다. 부부 사이도 그렇습니다. 부부간에 상호 깊은 교제가 있어야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겁니다.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도 그렇습니다. 친밀한 대화를 주고받고, 상호 교통이 있어야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법이지요. 그러나 나는 부부간이나 교인들간에 그런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데 실패한 것같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깊은 대화를 주고받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랬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매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교제를 지속해야 하는데 그 일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냥 교제의 흉내만 냈던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데 실패한 겁니다. 십자가를 잃어린 이유도 그런 식으로 교제를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아버지의 마음 한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가지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신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과 매일 대화를 나누시기 원하시고, 음성도 들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말씀으로 만나고, 기도로 만나서 하나님과 교제를 이어가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던 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입니다(대상14장). 매일 하나님을 만나서 그 마음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에 푹 빠져 보십시오.

그렇게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면 사랑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용서와 화평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놀라운 능력이 펑펑 쏟아져 나오는 샘터입니다. 은혜가 생수가 흘러넘치는 옹달샘이며, 기적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한 중심에는 잃어버린 영혼이 있습니다. 죄로 죽었던 영혼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죄인을 향한 애절한 마음이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안에 뜨거운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담긴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준비하신 겁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자 하나님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피맺힌 소원을 따라서 주저없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꿰뚫어 아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가 아버지의 마음인 것을 명확하게 아셨습니다. 죄로 죽은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계획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환하게 읽고 있으니까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형벌의 길인 줄 알면서도 그 길을 가신 겁니다. 그래서 3년의 공생애 동안에 가르치셨던 말씀에는 늘 십자가의 도가 넘쳐흘렀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항상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답변을 들으시고 난 후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3-18).

이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사역에 획을 그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말씀하신 시점이 바로 그 사건부터였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듣고 난 후 주님은 곧바로 자기가 죽으실 것을 가르쳤습니다. 십자가의 도와 수난의 길을 친히 가르쳤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의 형벌로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예언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당하실 자신의 고난과 죽음까지 예견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계획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수 없다고 우겨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세 번씩이나 가르쳐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여덟차례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직접 간접적으로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님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가르쳐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어떤 구실로도 십자가를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계획이였기에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그 길이 죽음의 길이지만 묵묵히 가고자 했습니다. 저주의 길임을 알았지만 복종하려고 다짐했습니다. 버려진 영혼을 구원하는 길이 그 길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심령들을 회복시키는 방법이 자신의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후에 가르쳐 주신 첫 번째 수난 예고의 말씀은 마16:21-23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는 조금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신 겁니다. 그런데 잠시 후 곧바로 사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막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탄은 늘 하나님을 거슬립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은혜를 받았지만 곧장 사탄의 도구가 된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생활에는 중단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긴장해야 합니다.

나는 신앙과 사역의 긴장을 위해서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후 내가 공적으로 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할 횟수를 계산해보니 1040번이었습니다. 그 숫자는 앞으로 20년간 드려야할 주일예배의 횟수입니다. 나는 사역의 긴장을 위해서 그 횟수를 매주 주보에 써넣기로 했습니다. 가령, 1-10(1030), 1-11(1029) 등으로 표기하면서 매 주일마다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이지요. 주보를 만들면서 그 숫자를 써넣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나는 1029번만 예배 드리면 목회 현장을 떠나게 된다 ---.' 앞으로 남은 목회 기간을 분으로 환산해보니 천만분정도 되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친 후 사역의 긴장을 위해서 이런 시를 지어봤습니다.

천만분 남은 동안

때묻지 않은 새벽 길목에서

알알이 맺힌 이슬 방울 쳐다보며

몇번이고 다짐했던 목양일념,

그 다짐 흐려질 땐 나 주님 눈빛 다시보리!

 

어둠의 그림자 사라져가는 아침녁에

막 피오르는 정금 빛 태양 아래서

수없이 결심했던 영혼사랑,

그 결심 식어질 땐 나 주님 심장 그려보리!

 

코를 찌르는 세상의 악취에도

흔들림없이 각오했던 오직기도,

그 각오 흔들릴 땐 나 주님 무릎 따라가리!

 

뜨겁게 타오르는 한낮의 햇살 아래

분초마다 약속했던 교회사랑,

그 약속 잊혀질 땐 나 주님 마음 회복하리!

 

석양의 순간 이르러 빛바랜 강단목 보기까지

한줌 부끄럼 없도록 천만분 남은 동안

나 주께 나아가리! 오직 주와 함께 걸어가리!

십자가는 순종의 극치

어느 날 제자들 사이에서 누구 큰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 다툼 가운데서 사탄이 틈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셨다는 말은 원어로 보면 계속 기도해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사탄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처음부터 기도해 오셨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종종 사단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마귀는 틈만나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발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5:8-9)

그후 두 번째로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주님의 입술로 친히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갈릴리를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니라"(막9:31).

이는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하신 바를 순종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의 길이지만 능히 그 길을 걸어가겠다는 뜻입니다. 기쁨으로 수난을 감당하겠다는 겁니다. 감사함으로 죽음의 길을 가겠다는 겁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처음부터 십자가의 길을 아셨고, 그 길을 기꺼히 가려고 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세 번째 예고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 제서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뱉으며 채찍질하며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니라 하시니라(막10:32-34).

이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능욕을 달게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채찍질을 당하는 것과 죽임 당하는 일이 앞에 놓여 있지만 당당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 형벌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기까지 복종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털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말없이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묵묵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렇지요! 십자가는 순종의 극치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습니다. 자아를 쳐 복종시키지 않고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포기하는 것이요, 버리는 것입니다. 그 길은 땅바닥까지 엎드려야만 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무릎으로 기어가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죽는 순간에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렇게 죽는 것을 체험해야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놓쳐버린 이유는 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늘 내가 살아있으니까 십자가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육신이 살게되니 십자가를 잃어버린 겁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순식간에 혈기가 충만해집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신중함이 없습니다. 참지 못합니다. 정욕대로 살아갑니다. 음란한 생각이 영을 흐리게 만듭니다. 쾌락을 탐하게 됩니다. 탐심을 즐기게 됩니다. 모두 십자가가 없는 육의 모습들입니다. 나는 목양길에 서 있었지만 내 심령에 십자가가 사라지고나니 그렇게 변질되었습니다. 육신의 목회자가 되고만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주님이 살고, 내가 꺾어지면 십자가가 세워집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십자가 없는 종교인이 되고 말았던 겁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글쓴이 : 擔任牧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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