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사랑의 불덩이가 되라
중국 지하교회 집회 중에 있었던 눈물의 <귀주 목양론>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무렵에 쓴 목양일지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몇개월 전 중화 신학원에서 수업하던 학생들이 공안에게 잡히고, 선교사들도 외국으로 피신하게 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안전상의 문제 때문에 집회를 연기하도록 제안했으나 선교사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집회를 강행했다. --- 집회 장소는 상해에서 비행기로 3시간, 기차로 20시간 가량 소요되는 귀주성의 한 도시였다. 집회 중에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이미 수년간 교제하던 사역자들이어서 눈빛으로 말하며 서로 은혜를 체험했다. 특히 마지막 날 저녁에 가졌던 ‘목양론’은 강의는 마치 하나님께서 내 자신에게 주신 음성처럼 느껴졌다. 졸업생들 모두에게도 큰 도전의 시간이었다. 목양론의 본질은 양떼를 돌보는 일이요, 그 절정은 목숨을 버리는데 있다. 죽음에 이르도록양떼를 돌아보는 희생이 있을 때 목양론은 활짝 꽃을 피우리라!!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주님의 일을 하는지 점검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의 영광인지, 주님의 영광인지! 곁에서 통역하는 사이에 회개의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강의를 듣는 지도자들도 눈빛이 달라지더니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렸다. 이번 집회에서 ‘귀주 목양론’으로 엄청난 도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런 식으로 나의 사역을 눈물로 돌아보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적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울며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금식으로 육신을 정복해보려고 많은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뜨거운 사랑을 더욱 뜨겁게 불태우지 못한 것이 한(恨)스러운거지요. 십자가의 사랑이 왜 그렇게 쉽게 식어졌을까요? 십자가의 사랑이 그토록 냉냉해졌을까요?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이, ‘사랑은 기술’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다듬고 계발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십자가의 사랑도 한번 깨닫고 그쳐서는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십자가의 사랑이 이어지도록 하나님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그 은혜가 평생 유지되는 것이 아니지요. 나 역시 내 심장에 타오르는 뜨거운 불을 계속 이어가지 못한 겁니다. 뜨거운 사랑에 불을 계속해서 붙여야 하는데 그렇지못했습니다. 더 깊은 사랑은 계발하지 못한 셈이지요. 신앙은 끊임없이 도전받고, 은혜를 받아야 성숙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랑의 불을 댕기는 불쏘시게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래서 늘 기도에 힘쓰고, 말씀의 끈을 놓쳐서는 안되는 겁니다. 결국 말씀을 떠나면 가슴이 식어집니다. 기도가 사라져도 영이 메마르게 됩니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요,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당신의 심장에 불을 질러줄만한 불의 사람을 한분 더 소개하겠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부흥을 일으켰던 조지 휘트필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영혼 사랑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뜨겁게 타오르자 그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에게 영혼을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 영혼을 거둬가십시요!”
휘트필드는 그렇게 뜨거운 정신으로 일생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고 잠시도 쉴 틈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사역에 매진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그에게 적당한 휴식을 취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때 휘트필드는 이런 응수했습니다.
“내 존재가 녹이 슬어서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욱 행복합니다.”
심지어 그는 죽기 전까지도 영혼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설교를 강행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의 일에는 단 한 번도 지쳐본 적이 없습니다. 주의 일에 싫증을 느껴본 적 또한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아직 갈 길을 다 가지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들판에 서서 주님의 복음을 말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새 생명으로 탄생시키게 하옵소서. 그 다음에 육신을 떠나 내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다음 최후의 설교를 마친 후 휘트필드는 잠자리에 들어 본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휘트필드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영혼 사랑에 불타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쉴 사이없이 기도와 말씀의 불쏘시게로 그 심장에 불을 지피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사역을 준비하면서 철저한 금식과 기도로 젊음을 불태웠습니다. 때로는 9시간씩 기도했고, 일주일에 두차례씩 금식하기도 했습니다. 새벽마다 무릎을 굻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설교를 준비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목사 안수를 받으라고 권면하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확인하기 위하여 수천번씩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다고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휘트필드는 당대 최고의 배우가 찾아와 연기를 배우려고할 정도로 탁월한 설교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도시대 이후 가장 탁월한 설교자’라는 영광스러운 호칭도 주어졌습니다. 로이드 존스 같은 거장조차도 “그의 설교를 들으면 나는 한 번도 진정한 설교를 해보지 못한 것같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가 얼마나 탁월한 설교의 거장이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렇게 쓰임받았던 휘트필드의 심장에 불을 질렀던 불씨는 기도와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기도와 말씀의 불씨로 지피운 영혼 사랑의 불덩이로 18세기를 붙태웠습니다.
휘트필드처럼 십자가의 사랑에 불타면 영혼 사랑의 불덩이가 될 겁니다. 그래서 교회의 중심에 십자가를 세워야 합니다. 어떤 것보다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야 하며, 십자가의 사랑을 불태우는데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합니다. 직장이나 가정에서도 먼저 십자가의 사랑을 불태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영혼을 잉태하는 산모입니다. 당신의 가슴에 십자가의 사랑의 불을 지피우십시오. 그러면 영혼 사랑의 열정이 타오를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작품
십자가형이 로마 시대의 처형 방법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역사의 산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이 우발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작품입니다. 주님은 우연히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갈보리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청년 예수를 처형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뜻이었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처음으로 설교할 때 말한 것에서 입증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2-24).
베드로는 설교에서 몇가지 사실을 명백하게 말합니다. 첫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바로 너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였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그 일이 그렇게 되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주관하셨다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미리 아시고 정하신 듯에 따라 된 일이라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것은 영원 전에 이미 작정된 일이라는 겁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구원의 열매가 맺어질 수 없습니다.
한 섬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일이 되면 교회가 없는 네군데의 섬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 목사님에게는 그렇게 설교하는 일처럼 즐거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에 설교를 위해서 첫 번째 섬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안개가 가득끼어 첫 번째 섬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안개가 많이 끼어 있으니 사고가 날지도 몰라. 아마 교인들도 충분히 이해할거야---”
그런 생각 끝에 첫 번째 섬으로 가는 일을 포기하고 두 번째 섬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목사님은 두 번째 섬을 향해 갔습니다. 그런데 섬이 보일 무렵 깜짝 놀랐습니다. 두 번째 섬을 향해 열심히 왔는데 도착해 보니 그곳은 첫 번째 섬이었습니다. 첫 번째 섬의 교인들이 뜨거운 환영을 받으며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는 안개 때문에 이곳을 포기했는데, 아버지께서는 이곳을 포기하지 않으셨군요. 어리석은 죄인을 용서하소서 ---”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이루어진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베드로거 말합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3:20)
십자가가 사건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우발적으로 만든 일이 아니라는거지요. 그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사도들이 관원들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을 때 온 교회가 드렸던 기도에도 그런 사상이 드러납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27-28).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그 일을 정하신 것은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원래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그 잔혹한 참상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닥칠지도 모를 화가 두려워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일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 말씀 뿐만 아니라 그는 설교할 때마다 자신있게 십자가의 신비를 증거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항상 십자가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오순절 때 임한 성령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6:13)
그렇습니다! 성령은 깨닫게 해주시는 영이십니다! 베드로가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자신의 지혜나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비밀은 아무나 깨닫지 못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여덟차례나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진리를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육적으로 판단한 것이지요. 주님은 하늘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지만 제자들은 땅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십자가, 하나님의 나라, 성령, 부활 등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들어왔지만 깨닫지 못한 겁니다. 심지어 이적과 기사를 3년간 목격했지만 영적인 진리를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형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지요.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도망쳐버린가 하면, 베드로는 세 번이나 맹세하면서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입니다.
성령을 의지하라!
그런 현상은 제자들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 날의 교회도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함으로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을 의지하고 복음을 전기보다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포장해서 전하다보니까 이제는 사람들의 입맛이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의 입맛을 돋구기 위해 예배의 분위기를 바꾸기도 하고, 청중의 기호를 충족시켜 주기에 급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치 설교가 입담 좋은 연사들의 명강연으로 전락된 느낌이기도 합니다. 칼빈에 의하면, 분명 “설교는 교회의 힘줄인 동시에 그 영혼”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를 살리려면 설교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힘줄에 생기가 공급될 것입니다.
나 역시 성령의 도우심보다 다양한 설교의 기법과 다듬어진 설교문, 그리고 교인들에게 감동을 줄만한 재료 등에 마음을 쏟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성령께서 일하심이 없는 설교는 교인들을 변화시킨 수 없습니다. 교회를 살려내지도 못합니다. 마치 제자들이 성령을 알지도 못하고 성공을 위해 예수님을 쫓아다니다가 십자가 앞에서 도망쳤던 것처럼, 성령의 역사가 없는 설교는 냉냉한 지식 전달에 불과한 겁니다. 교인들의 봉사와 섬김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봉사는 자선 활동에 불과합니다. 성령 없는 섬김은 종교적인 서비스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설교자나 교인을 막론하고 교회는 가장 우선적으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칼빈은 “성령의 효력 없이는 복음전파가 아무 쓸데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전파에 앞서 우선시 되어야할 것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도 알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우심이전체가 그렇지요. 삼위일체의 비밀, 동정녀 탄생, 주님의 부활과 재림 등 어느 하나도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믿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우리의 상식과 이성으로 납득할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으로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어떤 말씀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성령은 말씀과 결합한다”고 했던 겁니다. 말씀 속에 담긴 비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역으로, 진리의 말씀이 바로 증거되면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칼빈의 발견한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이요, 역사 속에서 입증된 바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만 전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어떤 포장도 없었습니다. 순수한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니까 성령이 강하게 역사했습니다.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선포한 십자가의 복음에 성령이 역사하니 다이나마이트가 폭발하듯이 세상을 진동시켰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령께 철저히 순종하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성령이 역사할 겁니다. 지금도 철저하게 성령을 의지하면서 성령의 사역에 몰두한 교회들은 역동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교회들이 그 증거들입니다.
설교자와 교인들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가면, 교회에 생기가 쏟아지고, 성령도 강력하게 일하실 겁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보다 성령을 더 의지해야하며, 교인들은 자신의 봉사능력보다 성령을 더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고 십자가의 복음을 붙든다면 교회의 힘줄에 생기가 공급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도 오순절 때 성령이 임하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생각의 벽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그제야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은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강해설교의 왕자라고 일컫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 1,863-1,945)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자만이 십자가를 전파할 수 있다.
몰간이 사역하던 영국의 상황도 오늘 날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스펄전이 이룬 뜨거운 부흥의 열기가 식어지자 곧바로 영국 교회에 냉기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의 혼란이 계속되었고, 교회의 강단도 급속도록 퇴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지성인들은 과학과 철학에 매료되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사조의 물결에 따라서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라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몰간은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그의 메시지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는 청교도 설교자 윌리엄 퍼킨스가 제시한대로 “성경 자체”를 말하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진화론의 위협과 거친 자유주의의 물결은 몰간 자신에게도 큰 도전이었습니다. 다른 지성인들처럼 몰간에게도 성경에 대한 의심이 생긴거예요. 과학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의 강연과 저서들이 그의 지성을 흔들어놨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몰간은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갈등에 빠졌습니다. 위기에 빠진 몰간은 모든 설교 예약을 취소하고, 자신이 즐겨 읽던 모든 책들을 벽장에 내던져놓고 문을 잠궈 버렸습니다. 그리고나서 성경책을 새로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성경에 관해서 가르쳐 준 것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이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고, 내가 편견을 갖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면, 성경은 분명하게 내 영혼에 확신을 심어다 줄 것이다.”
한 동안 그는 밤낮으로 성경을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다가 어느 날 성경에서 진리의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성령의 빛이 그의 영혼을 환하게 비춰주었습니다. 그 순간 갈보리 십자가가 보였습니다.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지성을 압도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복음을 찾아낸 후 그는 소리쳤습니다.
“아~~~! 드디어 찾았다. 위대한 보화를!”
1883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몰간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신하면서 말씀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 속에서 발견한 십자가의 복음이 그를 일생 동안 십자가를 설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후 50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강단에서 십자가의 복음, 순수한 말씀만을 증거하면서 영국 교회의 부흥을 주도했습니다.
신구약에 세워진 십자가
제자들처럼 바울 역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되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보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할 할 때 영원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세워졌다고 한 겁니다(1장). 하나님께서 이미 십자가의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이지요. 디도에게 편지하면서도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을 언급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생의 축복이 “영원 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딛1:2)이라는 겁니다. 이는 십자가가 영원 전부터 미리 약속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에 십자가의 피가 예시되어 있어요. 구약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있었던 겁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종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언했습니다. 종으로 오실 메시야의 고난을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질 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시편 22편도 십자가에서 당하실 일들이 뚜렷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죽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하나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
너무나 정확한 예언입니다. 수천년 전에 기록된 말씀 속에 이미 십자가의 고통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예언대로 주님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유월절 어린양의 피도 십자가의 피를 예언한 겁니다. 레위기의 제사도 어린양의 죽음을 예표합니다. 민수기에 기록된 광야의 뱀도 주님의 십자가를 예표한 겁니다. 주님은 그 예언이 자신에게서 성취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4-15).
구약 성경은 곳곳에서 십자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종종 구역에서 예언된 십자가를 언급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에서 드려질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역을 그림을 그리듯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흘림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고 증거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한 구속의 선물을 선사했다는 겁니다. 요한 역시 그의 편지에서 성육신을 강조하면서, 그것은 속죄와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아들은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보내신 분이며, 그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분이라고 밝혔습니다(요일1:7; 4:9; 4:10).
계시록에서도 요한은 어린 양의 피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자유롭게 했다고 증거했습니다(계1:5-6). 십자가는 하늘에 속한 백성들을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더러움이 깨끗케 된다는 것도 선포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부터 그의 서신서를 시작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구속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값으로 이루어졌다고 선언했습니다(벧전1:18-19). 그는 이어서 그리스도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증거했습니다(벧전2:24).
이처럼 십자가는 너무나 정확하게 성경에 예언되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성취되는 방식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중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의 꽃입니다. 지혜의 절정입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에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가 굳게 세워져 있습니다. 신구약에서 십자가를 그렇게 중시했다면 그것은 가장 심오하고 깊은 진리임에 틀림없습니다.
초대 교회와 사도들이 십자가를 그렇게 사랑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이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했다면 그것은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제쳐놓고 십자가에 시선을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가치를 인하여 값진 투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위해서 어떤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감춰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 외에도 셀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들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을 향한 영원한 사랑이 거기에 있습니다. 당신에 대한 자비와 긍휼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거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도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용서와 화목도 있으며, 영원한 생명도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언제나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를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 이레니우스는 평생 동안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죽음도 불사했습니다. 대적자들은 그를 죽이려고 기회를 보다가 한 가지를 제안하면서 위협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오. 우상에게 절하든지, 십자가 위에서 처형을 당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시오.”
그러자 이레니우스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처럼 십자가 위에서 처형을 당하겠소. 그것처럼 영광스러운 죽음이 또 어디있겠소.
이 말을 남기고 이레니우스는 십자가 위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그처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참제자였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 십자가를 체험한 사람들 □ ③ 평신도요, 나약한 가정 주부 제씨 펜 루이스 제씨 펜 루이스는 1861년 영국 웨일즈의 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0살 때부터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19살 때에는 시 정부의 감사직을 맡고 있는 펜 루이스를 만나 결혼하여 주일에 교회를 다잘 정도의 일상적인 종교인이었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녀는 평범한 주부였다. 그러나 1882년 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던 중에 거듭남을 체험했다. 그로부터 2년 뒤 귀용부인의 저서를 통해서 처음으로 ‘십자가의 도’를 체험하고 자신을 주님 앞에 전적으로 헌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식사를 위해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예상치도 못하게 성령 충만을 받았다. 즉시 그녀는 ‘십자가의 도’를 증거하기 시작했고, 그 말씀을 들은 많은 영혼들이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후 그녀가 전한 십자가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영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웨일즈 부흥 운동을 이루게 되었다. 그 기간에 영국에서 7만 5천명의 성도들이 성령 충만을 체험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제씨 펜 루이스는 신학을 공부한 것도, 목사나 전도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능력이 그녀의 영혼을 변화시켜서 역사적인 부흥을 주도했다. 그녀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영적 부흥을 위해서는 십자가 주변으로 모이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간곡하게 당부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올바른 관점과 균형을 잃어버리고 ‘막다른 골목에서’ 헤매는 이유는 바로 이 십자가의 구심점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하여 진리의 유일한 구심점인 십자가 주변으로 모여야만 한다. 그렇게할 때 성령님은 이 십자가라는 구심점을 통해 신앙 생활과 관련된 다른 깊은 진리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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