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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음성의 종류

하나님아들 2012. 7. 31. 22:30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은 어떤 유익이 있을까? 오늘날의 예언의 은사나 직접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부인하거나 직접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부정적인 점만 강조한다.

"기록된 말씀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지 그런 신비 체험 중심으로 하면 위험하다," "예언하는 예수 점쟁이는 무당이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등 등.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영적 현상으로 매도하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것이 없다. 사람이 하는 일치고 완전한 것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잘 모르거나 직접 체험이 없으면 부정적인 면만 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 듣기와 예언의 은사는 유익한 점이 너무나 많다.
필자의 직접적인 경험과 사역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다. 다음 내용은 근간 출판 예정인 필자의 졸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하나님의 음성 듣기 지침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위로한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부동산 중개업자로 일할 때였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부동산 사무실에 다니느라 출퇴근만 해도 무척이나 힘들었다. 기본급이 전혀 없이 수수료에 의지하기 때문에 매매를 초기에 성사시켜도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으면 생기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초보자로서는 드물게 수개월 내에 몇 건을 성사시켰기 때문에 예상 소득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중도에 하나 하나 거래가 깨어졌다. 그날도 마지막으로 남은 큰 건마저 판매자가 구매자가 원하는 하찮은 수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거래가 깨어졌다.
정말 기가 찼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구매자에게 집을 보여 주고, 그 중에서 하나 고른 것에 대해 수 차례에 걸쳐 판매자와의 대화 끝에 계약서에 서명하게 했는데 겨우 몇 백불 밖에 되지 않는 수리비 때문에 거래가 깨어지다니. 내가 받을 수수료에서 수리비를 제하게 해주겠다고 제시했지만 판매자는 그런 식으로 자기 집을 팔고 싶지 않다면서 거래를 거부했다.
"주여, 6개월 동안 시간과 물질 들여 거래를 성사시켰는데 어떻게 하나 하나 다 깨어집니까?" 정말 낙심되고 힘이 나지 않았다. 의욕이 사라져 버렸다. "주여,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매도 없이 또 다시 시작해야 하다니 너무나 끔찍했다. 심신이 피곤하여 방바닥에 엎드려 낙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귀에 뚜렷하게 찬송가가 울려왔다.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 . " 익숙한 가사라 찬송가를 찾아보니 찬송가 135장의 후렴이었다.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았구나. 하나님이 이 찬송으로 나를 위로하신 것이구나." 실의와 좌절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힘을 내어 사업에 열심을 낼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위로하고 강건하게 한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 14:3).
 
하나님의 음성은 낮은 자화상을 회복시킨다. 하나님은 음성을 통해 우리의 낮은 자화상을 회복시키신다. Y의 삶은 요즈음 좌절과 낙심의 연속이다. 젊었을 때 가진 장미 빛 인생관을 이제 퇴색되어 빛을 바랜 지 오래다. 자식들은 성장하여 제각기 짝을 만나 뿔뿔이 헤어지고 가끔 의미 없는 안부 전화만 할뿐이다.
남편과는 교회에 오랫동안 같이 다녔지만 영적인 것이 맞지 않아 여간 고통이 아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렇게 친절하고 온유한 사람인데 Y 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지고 영적인 것에 몰두하자 남편은 이상하고 괴팍스러운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험한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고 "네가 뭔 대 신령한 체 하느냐? 열매로 네 믿음을 보여봐라"면서 사사건건 물어 늘어지니 살맛이 나지 않는다.
최악의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나이 들어 혼자 살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부부간이라도 영적으로 맞지 않으면 힘들다는 말을 이전에도 들어 본 적이 있지만 이처럼 힘든 것인 줄은 예전에 미쳐 몰랐다.
이제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싫어졌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면 겉으로는 동정하는 것 같으면서도 나중에는 자신이 그들의 수다 떨기의 대상이 됨을 알았다.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하나님은 어디 계신다는 말인가?"
그날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소연을 했다. "주님, 저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저에게 갈 길을 보여주옵소서." 그런데 갑자기 "너는 내 것이라"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Y는 깜짝 놀랐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분명히 확신했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Y는 자신의 낮은 자화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며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리시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에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책망하고 훈계한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나에게 직접 또는 아내를 통해서 내가 그런 것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셨다. 직접적인 음성은 아니지만 강한 느낌으로 왔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
그러나 내가 남을 책망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이 책은 본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본인에게 적용하는 것에 치중하기 때문에 음성을 듣고 남에게 사역하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음성을 듣다 보면 나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자연히 다른 사람에 대한 것도 듣는 경우가 생긴다.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남에 대한 하나님의 훈계나 책망을 잘못 전하여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어느 성도 집을 방문한 어느 사역자가 그 집 남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개인적으로 잘 알거나 그에 대한 영적 권위도 없으면서, 그 자리에서 남편을 심하게 훈계하고 책망하여 그 남편의 마음 문을 닫게 한 적이 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오용하고 남용하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런 서투른 행동을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고 구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물론 건덕, 안위, 권면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큰 해가 없다. 그렇더라도 상대방의 허락 없이 그렇게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기 쉽다. 더군다나 훈계나 책망하는 말은 영적 귄위가 없는 사람은 삼가하는 것이 좋다.
또한 영적 권위가 있거나 친분이 있더라도 첫째 그 말을 전해야 할까의 여부나 시기(timing)를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 좋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해도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 하라고 그 말씀을 들려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까지 그 사람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본인에게 직접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한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지 않는데도 자기가 길거리나 어디서 만나는 사람들의 심성―대부분의 경우 나쁜 부분들―을 보여주거나 느끼게 해주어 힘들고 귀찮고 괴로울 때가 많은데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고 질문한다. 나는 그들에게, 주님이 그 사람들의 그런 부분을 보여주신 이유는 당신이 그 사람들의 잘못된 부분이나 연약한 부분에 대해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 주라는 뜻이라고 설명해 준다.
둘째 책망이나 훈계의 말은 사랑의 마음으로 전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음성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부정적인 말씀을 주시는 것도 심판하기보다는 책망하고 훈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많이 기도한 후에 부드럽게 전하는 것이 좋다. 나는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당사자의 허락을 묻는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좋은 것은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되고,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은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채찍으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이 말씀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상대방도 어느 정도 마음 문이 열려 있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받기 때문에 말썽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틀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달하는 말투도 선언적이 아니라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렇게 보여주셨다"고 하면 듣는 사람이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 있고 나중에 틀릴 경우 신빙성을 잃게 된다.
그 대신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는 "저렇게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느낌이 듭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면 나중에 틀리더라도 큰 탈이 없게 된다. 특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는 어투는 삼가야 한다. 이런 것은 구약적인 예언의 말투이지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신약의 예언에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다.
 
또한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온유하신 분이기 때문에 책망하거나 훈계하는 말을 자주 하시지 않는다. 성경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도적질하고 색욕과 탐심을 일삼는 것은 분명히 금지하고 있다.
성경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냥 방치해 두시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면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으니 내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겠지"라면서 자신의 성화를 게을리 하기 쉽다.
이런 생각은 착각이다. 하나님은 모세에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셨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다(출 4:24-26).
많은 사람들은 사역이 번창하고 일이 형통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신 줄 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기록된 성경 말씀이나 신앙의 연륜으로 볼 때 우리가 아는 죄를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속이면서 계속 범죄 하면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죗값을 물으신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1-22).
우리는 "내가 이 정도로 하나님을 잘 섬겼으니 하나님이 이 정도 죄는 간과하시겠지"라면서 마치 하나님이 인생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그 죗값을 치르게 하신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성폭행하고 그의 남편을 죽였을 때 왜 하나님은 다윗을 직접 책망하지 않으셨을까? 그것이 어떠한 죄인가를 알만한 다윗이 스스로 미혹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해주셨다. 다윗은 그래도 깨닫고 회개했으니 망정이지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적 받고도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왜 당신 같은 사람에게 말씀하실까?"라면서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특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항상 시편 139:23-24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나의 죄가 무엇인지 지금 나의 어떤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지 '의도적으로' 물어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주 나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내가 기뻐하는 종이니라"고 하시다가도 내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물어보면 때로는 "이, 더러운 x아 네가 감히 나의 계명을 어기다니"라면서 얼마나 심하게 책망하시는지 모른다.
그럴 때면 나는 의문이 간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다른 두 얼굴을 가지실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이라면 위선자이라도 보통 위선자가 아니다. 조금 전에는 정말 간이라도 빼어줄 듯 다정하고 상냥하게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진노의 잔을 금방이라도 쏟을 듯이 심각하게 책망하시다니.
그렇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다. 철저하게 거룩하시고 철저하게 사랑이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처럼 대충 사랑하시고 대충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철저하게 사랑하시고 철저하게 거룩하신 분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전도에 효과적이다. 능력 전도라는 말을 창시한 존 윔버 목사는「능력전도」에서 비행기 옆 자리에 탄 사람의 이마에 "간음"이라는 글자를 보고 그 사람에게 당장 간음을 중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치신다 는 이야기를 하여 회심케 했다(고전 14:24-25).
실제로 음성 듣기를 하면 이런 일이 가능하다. 언젠가 어떤 사람의 심령에 있는 것이 나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그대로 전했더니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했다. 책망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때로는 위로나 권면의 말로 회심시키기도 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기도 제목을 받는다. 언젠가 기도하는 중에 나도 모르게 유창하게 기도하는데 그 내용이 전혀 내가 생각한 것들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성령이 주장하여 기도하게 하신 것이다. 이런 기도를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엡 6:18; 유 20; 롬 8:26 이하 참조)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기도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심층 기도나 중보기도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기도 제목조차 하나님이 주시는 경우가 있다. 이런 기도를 '예언적 기도'(prophetic prayer) 또는 '예언적 중보기도'(prophetic intercession)라고 부른다. 예언을 해 주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 제목을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적으로 받아서 하는 기도를 말한다. 최근 한국에는 바바라 웬트로블의 [예언적 중보기도]가 번역되었다.
미국 플로리다 주 잭슨빌 시의 평신도 사역자인 돈 블럭은 예언적 기도에 대해 "주님은 금방 일어날 일을 나에게 보여주시면서 그것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나는 하나님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중보기도 사역자로 유명한 '중보기도 장군들' 모임의 신디 제이콥스는 예언적 중보기도란 "성령님이 일반적으로 사전 지식이 별로 없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을 위해 성령님의 강권에 의해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기도한다"고 말했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에게는 기도 제목마저 주셔서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특히 예언적 기도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경감해 주는 중보기도로도 활용된다. 딕 이스트만의「주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한 시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할레스비 교수는 볼레 힌들리라는 이름의 평범한 시골 처녀가 특별한 기도 체험을 통해 수천 명을 주님께 인도한 일에 대해 말했다.
기도 중에 이 자매는 감옥에 갇혀 있는 어떤 남자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그 환상과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이 남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이 남자는 다른 죄인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그를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내가 그를 석방시켜 이방 중에서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리라.'
볼레 힌들레는 하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 몇 달 동안 그녀는 그 죄수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녀는 뉴스의 기사나 회심한 사람들의 간증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 감옥에 있는 동안 회심한 후 이제는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고 간증하는 사람을 찾았다.
마침내 멀리 노르웨이를 여행하던 중, 볼레 힌들리는 이전에 죄인이었다가 이제는 회???어떤 사람이 어느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가진다는 소문을 들었다. 기대감을 가지고 힌들리 자매는 메시지를 기다리면서 교회의 긴 의자에 앉았다.
그날 밤 강사인 라르 올센 스크렙스러드씨가 조그만 강대상 앞으로 걸어나왔다. 볼레 자매의 가슴은 기쁨으로 넘쳤다. 그녀는 즉시 설교할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그녀가 오랫동안 기도해 온 사람이었다."
필자도 어떤 제목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은 그것보다는 자꾸 다른 기도를 시키셨다. 교회의 인원, 장소, 사역의 방향 등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데 자꾸만 "내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구체적인 말씀까지 주셨다.
이후, 내가 정한 기도로 기도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한 데 하나님이 주신 기도 제목을 기도하면 금방 마음에 평강이 임하고 기쁨이 넘침을 경험했다. 하나님이 기도 제목을 주시는 것은 그 일을 이루시려고 주시는 것이다. 예언적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위기를 예방하거나, 전도의 문을 열거나, 새로운 비전 등을 제시하신다.

목회 상담의 통찰력을 제공한다. R 집사 부부 집을 심방할 때였다. 그날 새벽 기도 중에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적었다. 적고 보니 그들에 책망 투성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책망의 내용도 있었다. 책망이 너무나 강하여 나는 주저했다. "혹시 시험들지나 않을까? 전하지 말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그것을 내가 전하리라'는 담대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전해 주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당사자의 허락을 받고 전해주었다.
나는 말을 전하면서도 주님이 왜 그들을 이렇게 심하게 책망하는지 몰랐다. 성도들 중 자신들의 잘못을 상세히 전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 않은가. 받은 말씀을 전하면서도 내 마음에 감동은 별로 오지 않았다. 그런데 4x6판 크기의 노트 장에 적힌 말씀을 2/3 쯤 읽어나갔을 때 R 집사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았는데 지난 2 년간 자기들이 어떤 행동을 저질렀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들을 책망하셨는가를 이야기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목사님을 통해 다시 책망의 말씀을 전해 주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음성 듣기를 통해 R 집사를 간단하게(?) 뒤집어 놓으신 것이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어려운 형편에 있다는 R 집사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집사님, 힘내세요,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라는 위로(?)의 말밖에 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위로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만을 연장시켜 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직접 전하니 비록 그것이 심각한 책망의 말씀이었지만 오히려 악화된 사태를 수습하여 그들이 하나님 가까이 가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정말 신기하고 놀랍다.
이후, 이런 식으로 심방 하거나 상담했다. 이전에는 혹시나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 그들이 듣기를 원하는 말을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그들의 내부에 숨겨진 문제를 드러내고 치유하기 때문에 훨씬 효과적이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인 줄 알면서도 연약하고 믿음이 약하거나 회개가 덜 되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그들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 하시는가에 대한 전망은 가질 수 있었다. 부족하지만 그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적어도 내 앞에서는 가식이나 거드름을 피지 못했다.
자기 속에 감추어진 모든 것을 드러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가식이나 교만이나 위선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하니 교회도 편안하고 뒤에서 받는 염소도 없어져 버렸다. 양 무리를 제대로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목회자들이 정말 이런 은사를 사모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음성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 준다. 중보기도 사역자인 퀸 쉐러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Listen, God Is Speaking to You)에 보면 이런 이야기나 나온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에서 회계학을 강의하는 밥스라는 미혼 자매는 어느 날, 잘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이 전화하여 서부 지방의 샌 안토니오 시로 이사하여 어떤 전도자를 위해 헌신하라고 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좋은 직장을 가졌고 주거환경도 좋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내가 전화를 끊고 서재로 갔을 때 갑자기 내가 이전에 암송했던 성경구절이 생각이 났어요. '보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지 전이라도 너희에게 고하노라'(사 42:9). '새 일 . . . 내가 고하노라'는 말씀이 더욱 강하게 부딪쳤어요. 그래서 나는 그 제안을 새삼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결국 나는 그곳으로 떠났는데 거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미래에 대한 어떤 말씀이나 중대한 결정이나 방향 설정에 대한 말씀들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모저모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인해 주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까지 25년에 걸쳐 무려 7-8회의 말씀을 주셨는데 대부분이 처음에 주신 말씀을 확인, 확대 및 구체화 하는 말씀들이었다.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하거나 어떤 기도 응답은 받았는데 실제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으면 좌절하고 낙심할 때가 있다. 특히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지는 약속에 대해서는 회의와 낙심, 희망과 기대가 교차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이런 때에 이전에 주신 말씀을 다시 '확인하는 말씀'을 주셔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신다.
또한 내가 들은 음성이 과연 하나님의 음성인가 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통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인시켜 주시기도 한다. 또한 때때로 '확인'은 '분변'과도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마음을 시험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이삭이 어떤 아들인가? 아브라함이 100세 때 낳은 아들이 아는가? 요즈음 늦둥이가 유행이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다고 하는데, 100세에 얻은 (언약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니 기가 찰 일이 아닌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칼을 내려치려는 순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이삭을 번제로 죽이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애지중지하는 이삭마저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바칠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을 시험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100세에 얻은 독생자 이삭마저 바칠 만큼,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할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을 '하트 테스트'(heart test)라고 한다(대하 32:31 참조). "사람의 일이 제 눈에는 모두 잘돼 보여도 야훼께서는 속생각을 헤아리신다"(잠 16:2; 한글 킹 제임스). '속생각'이란 마음의 '동기'(motives)를 말한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바칠 결단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하트 테스트에 합격하여(약 2:21), 다시 한 번 열국의 아비가 된다는 약속을 재확인 받았다(16-17절).
대기업의 중역인 K씨에게 회장은 오지라고 할 수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로 전출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K씨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가지 못할 그럴듯한 핑계를 댔다. 그랬더니 회장은 "나는 당신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는데"하면서 아쉬워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어떤 약속을 주실 때 과연 받는 사람이 받을만한 그릇이 되는가, 믿음이 순수한가를 점검하시기 위해 하트 테스트 하시는 경우가 더러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자신을 잘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 마음을 잘 모른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내 영광, 내 축복만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나의 선으로 하나님을 일을 하려는 경우가 많다. 신앙고백이 바르고 전통이 바르기 때문에 이만하면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내가 보기에도 이런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오죽할까? 이들은 마음속에는 시기, 질투, 용서 못함, 교만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눈으로 보이는 행위로는 경건한 체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기가 너무나 두려워서 외적인 행동으로 회칠하는 경우가 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여서 자신의 속을 커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히려 책망만 들을 뿐이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8-29).
스스로 속이지 말라. 자신도 속지 않으면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진노만 쌓을 뿐이다.
하나님은 하트 테스트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서 순수하지 않은 것, 동기가 불순한 것을 하나하나 드러내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거짓되고 부패한 것인가를 절감한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속고 사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업적주의의 환상에 속고 산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많이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잘 한 것에 대한 영광을 자기가 취한다. 이는 우리가 업적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는 업적이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다. 물론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모습도 중요하게 여기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기와 과정도 중요하게 여기신다. 비록 내가 눈에 보이는 열매는 많이 맺지 못했더라도 순수한 동기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은 그것도 기뻐하신다. 그러나 많이 이루었다고 해서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자기 영광을 나타내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가증스러워 하신다.
대표적인 예가 누가복음 18:9-14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리새인은 존경의 대상이다. 표면적인 죄를 짓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계명에도 순종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은혜로 보지 않고 공로로 보았다. 자신이 그런 삶을 사니 당연히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배척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보셨다. 중심을 보니 불법과 위선이 가득했다.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더 대중적인 인기를 끌자 온갖 궤계로 올무에 빠지게 했다.
하나님은 오히려 자신의 낮은 처지, 죄인 된 처지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여 "주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어느 육체라도 행위로 자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발버둥 치는가? 죄인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 자유를 주는 성령으로 시작하여 행위의 멍에를 매는 육체로 끝내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갈 3:3). 믿음으로 구원받아 놓고 행위로 그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특히 고백이 바르고 전통이 바르다고 자부하는 신앙인 들 중에서 자기 의에 찬 위선과 불법을 너무나 많이 목격했다.
우리는 사역의 동기조차 순화시켜야 한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저를 크게 들어 써주시옵소서!(Lord, use me mightily)" 그랬더니 주님이 대답했다. "나는 너를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I don't use you. I love you)"고 말씀하셨다.
아내가 남편에게 "나를 사용하여 애를 낳게 해줘요"라고 강요한다면 남편의 심정이 어떠할까? 자녀는 부부 사랑의 자연스러운 산물이 아닐까?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도 그렇지 않은가?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맺어지는 열매가 아닐까? 물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동기나 과정이 그렇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을 하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지금도 '큰 능력' 받아서 '큰 사역'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보다는 내 제국의 확장을 위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느날 선교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암 케리에게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오지 선교에 나서겠다고 했다. 윌리암 캐리가 "왜 선교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청년은 "죽어가는 영혼이 불쌍해서"라고 대답했다. 윌리암 케리는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제대로 선교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된다"고 말했다.
밥 소르기는 [기도응답의 지연이 주는 축복]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뜨겁게 타오를 때 이 세상의 빛이 된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서 타오를 때 우리 삶 가운데 나타나는 증거를 숨길 수 없게 될 것이다. 내 인생을 맹렬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은 내 마음의 동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신다. 나는 항상 '이 도시의 보다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싶다. 사역을 위해 더 많은 지도자를 훈련시키고 싶다'라고 내 마음의 비전을 피력하곤 했다. 그때 하나님의 불이 내 인생을 통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예수님을 향한 더 크고 뜨거운 사랑을 개발하고 싶다. 예수님을 보다 더 친밀하게 알고 싶다'는 것으로 나의 비전이 바뀌었다.
하나님의 제일 계명(하나님 사랑)이 실제 나의 제일 계명이 되고 제이 계명(이웃 사랑)이 나의 제이 계명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가고 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아무 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불이 되면 하나님과의 그러한 역동적인 관계의 결과 다른 사람의 삶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이 왜 사역자들을 광야에서 기다리게 하는가? 사역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열정이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사역조차 구속(救贖)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만일 하나님이 모세가 애굽의 황태자일 때 들어 쓰셨다면 그는 얼마나 자기 영광과 자기 업적에 도취되어 있었을까? 하나님은 애굽의 모든 학문과 무술을 배운 모세가 "나는 혀가 뻣뻣하고 입이 둔한 자이니이다"(출 4:10)라고 고백했을 때 들어 쓰셨다.
고든 맥도날드는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을 100% 발휘하는 것이 충성스런 지도자의 소명이다. 그러나 이 충성이 잘못되면 자기 의를 나타내는 열심이 되어 화를 부르는 경우가 있다. 자기의 열심이 지나칠 경우 교인들을 '목자처럼 이끄는 것'(leads like a shepherd)이 아니라 '목동처럼 몰아치기 쉽다'(drives like a cowboy)." 자기 의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a driven person)과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a called person)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그는 말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바울은 자기 의를 좇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롬 10:2-3).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후에는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후 11:30; 12:9-10 참조),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전 15:10)라고 고백하는 부름 받은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른 동기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사역하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바탕에서 나오는 사역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인간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동기나 과정을 무시하지만 하나님은 목적은 물론 동기나 과정을 똑같이 중요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역 동기나 과정을 점검하시기 위해 음성 듣기를 통해 하트 테스트를 하신다. 많은 경우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의 구분이 교묘하기 때문에 그 차이를 아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통해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다. 현재 당신의 처지는 어떠한가? 사역에 성공하고 있는가? 물질에 성공하고 있는가? 만사 형통하니 많은 복을 누렸다고 자부하는가? 과연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도 떳떳하다고 할만큼 동기나 과정이 순수한가(고후 5:10).
 
음성 듣기를 통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를 한 번 물어보라. 뜻밖의 말씀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참고로 한국에서 이름나고 대중적인 칭송을 받는 몇몇 목회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를 물어본 적이 있다. 하나님은 생각보다 그들을 높이 평가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정통의 보호막 속에서 사역하고 있다. '진리'를 전파하다 보면 기존 종교인들로부터 핍박 받는 일도 생긴다(마 5:10-12 참조). 예수님, 사도들, 믿음의 많은 선배들이 핍박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전했다. 하나님은 자주 새로운 것으로 역사하셔서 기존 종교인들의 심성을 건드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이름난 많은 지도자들은 정통과 교단의 보호막 속에 안주하여 주로 '사람들이 거역하지 않는 것들'을 주장하기 때문에 핍박을 모르고 사역한다. 기억하라. 기독교가 타락한 것은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부터란 사실을.
그 결과 자신들이 쌓은 사역의 아성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선지자적인 기개가 부족해서인지 이들은 한국 교계의 문제점을 포괄적이고 일반적으로 지적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속한 교파의 구조적이고 조직적이고 고질적인 비리나 병폐들―교권주의, 금전 부정, 각종 임원의 부정 선거, 성직 매매 등―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고 있다.
또한 바깥의 조그마한 죄악에는 서슴지 않고 진검을 휘두르는 '서기관들'―신학자나 신학 교수들―이 내부의 학사 비리나 행정 비리에 대해서는, 자기의 진로나 앞날이 걸려있어서인지, 양처럼 온순하다. 종교 개혁가들의 신학 전통을 전승했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종교 개혁가들같은 기개나 담대함은 왜 닮지 못하는가? 마틴 루터는 서슬이 퍼런 로마 교회의 권세 앞에서도 "성경과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한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없다"면서 당당하게 맞서지 않았는가? 결국 이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고 있는 꼴이다(마 23:24 참조).
둘째 그들은 인간적으로 보기에 '완벽'(?)하다. 신앙의 본을 보인다는 면에서는 좋은 사표가 되겠지만 하나님 나라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이 모두가 아니다. 오히려 실수하고 넘어진 자가 죄의 깊이는 물론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더욱 깨달아서, 귀족적이고 지성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불쌍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와 긍휼을 베풀 수 있다. 그렇다고 일부러 죄를 짓거나 넘어지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보기에 행위적으로 완벽하면 자기 의를 내세우고 교만해지기 쉽다는 말이다.
셋째 그들 중의 일부는 정통을 수호한다는 명목 아래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핍박하고 대적한다. 특히 자기 의에 차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제일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했다. 하나님께 물어만 보았더라도 알만한 그들이 걸핏하면 자기 의에 차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을 대적한다는 사실이다.
릭 조이너는 자신이 본 환상을 기록한 [빛과 어둠의 영적전쟁](The Final Quest)에서 지상에서 만인이 부러워 할만큼 훌륭한 사역을 한 어느 사역자가 천국의 제일 꼴찌 자리에 위치한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사역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지상에 있을 때 보수를 내세우며 영적 운동 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던 사람이다.
"나는 인생 말년에 너무나 교만에 차서 주님이 나를 통하지 않고는 어떤 큰 일도 하실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을 대적하고 주님의 선지자들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했다. 나는 주님이 나의 제자 한 사람을 크게 들어쓰시자 이기적인 자만심에 젖어있었고 주님이 나의 사역과는 상관 없는 사람을 들어쓰실 때는 시기가 가득찼다.
나는, 그들이 잘못한 것은 무엇이든지 찾아내어 사람들에게 폭로했다. 이런 짓을 할 때마다 천국에서 내 위치가 강등된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몰랐다. 나는 이런 짓을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라 내 밑의 사람을 시켜서 다른 사람들을 조사하고 나의 비열한 일을 하게 했다.
나는 지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된 최악의 인간이 되었다. 우리는 진리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교회에 두려움과 분열을 조장했다. 나는 자기 의에 차서 파멸로 직행하고 있었다. 주님은 크신 자비로 내가 병들게 하여 서서히 비굴하게 죽어가게 하셨다.
죽기 바로 직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회개했다. 나는 여기에 있게 된 것만해도 감사하다. 나는 그분의 가장 작은 자중의 한 사람이며 이런 대접도 과분하다."
지금 당신의 마음 상태는 어떠한가? 사역의 동기가 무엇이며 사역의 과정은 어떠한가? 입술로만, 행위로만 하나님을 섬기는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불 타오르고 있는가? 내 속의 '쓴 뿌리'로 인해 입술로, 행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지나 않는가? 나의 제한된 지식이나 경험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대적하거나 그런 사역자들을 핍박하지는 않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 그럴 때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를 너무 싫어하신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자부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사람의 영광을 구했다.
어느 사역자가 집회에서 그 교회의 어느 지도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그 지도자는 처음에는 거드름을 피웠다. 자기가 이 교회의 초창기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헌신했으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드렸는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역자에게 주신 말씀은 칭찬의 말이 아니라 책망의 말씀이었다. 그래서 사역자는 참다 못해 "하나님은 당신이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라고 말했지만 그 지도자는 자기처럼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 회개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 사역자는 그 지도자가 마치 교회를 자기의 사유물인 양 착각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수많은 목사들을 갈아치운 사실을 지적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큰 징계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제야 그는 통곡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사유물화 한 죄, 목사를 임의로 갈아치운 죄, 마치 자기가 주님의 몸된 교회의 주인인 양 착각하여 주님의 영광을 가로챈 죄를 회개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인도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역이나 새로운 사업이나 새로운 비전 설정이나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내가 전임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과정이 그렇다. 출석 교회의 담임목사가 거의 6개월 전에―나에게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을 때―나에게 목사로서의 소명이 있다 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가 어떤 식으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또한 어느 집사도 기도 중에 나에게 소명이 있다고 아내에게 여러 번 말했고 아내도 금식 기도 중에 나에게 소명이 있음을 확인하고 나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때 나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런 공부가 아니고 신학을 해야 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나도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오히려 성경말씀 읽기에 더 치중한 것 같다. 말씀을 보면 글자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내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도 금식기도를 통해 주님이 나를 전임 사역자로 부르셨다고 확신한 후 법과대학원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또 어떤 경우는 성경 말씀을 읽는 중에 감동을 받고 평생의 사역으로 섬긴 사람도 있다. 5만번 기도 응답을 받은 조지 뮐러는 어느 날 성경을 묵상 하던 중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라는 말씀이 그의 마음에 너무나 와 닿았다. 이후 그는 영국에 고아원을 열어서 기도 하나만으로 평생에 걸쳐 수천 명의 고아를 먹여 살리는 사역을 감당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음성을 통해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또는 환경이나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신다. 새로운 사역, 새로운 사업, 새로운 만남으로 인도하신다. ♡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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