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과 언약!!

[스크랩]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

하나님아들 2013. 1. 4. 19:22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1)


목 차

Ⅰ. 먼저 하고 싶은 말

1. 이 책이 왜 중요한가? …………………………………………………
1) 신앙이 성숙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2) 신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2. 대개 어떻게 알고 있는가? ……………………………………………
1) 율법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알아본다.
2) 죄관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을 알아본다.
3) 은혜에 대한 통속적인 개념을 알아본다.


Ⅱ. 율법과 죄

1. 율법과 관계없는 죄……………………………………………………
1) 타락 이전에 악이 있었다. /
2) 율법 이전에 죄가 있었다. /
2. 율법과 관계있는 죄……………………………………………………
1) 금과법 아래서의 죄이다. /
2) 율법 아래서의 죄이다. /
3. 율법과 죄와의 관계……………………………………………………
1) 율법은 죄가 죄되는 줄 알게 한다. /
2) 율법은 죄인되게하여 죽게 한다. /
Ⅲ. 죄와 은혜

1. 죄와 관계없는 은혜……………………………………………………
1) 창세 전에 베푸신 은혜이다. /
2) 타락 전에 베푸신 은혜이다. /
3) 율법 전에 베푸신 은혜이다. /
2. 죄와 관계있는 은혜……………………………………………………
1) 율법 아래서 베푸시는 은혜이다. /
2) 대속을 통해 베푸시는 은혜이다. /
3) 선하게 살게 하시는 은혜이다. /
3. 죄와 은혜와의 관계……………………………………………………
1) 죄는 죽게 하고 은혜는 살게 한다. /
2) 죄는 때리지만 은혜는 싸매신다. /
3) 죄는 종 삼고 은혜는 아들 삼는다. /

Ⅳ. 율법과 죄와 은혜

1. 율법의 근본적인 용도…………………………………………………
1) 죄로 심히 죄되게 한다. /
2) 죄로 인간을 죽게 한다. /
2. 죄의 궁극적인 필요성…………………………………………………
1) 은혜로 살게하는데 있다. /
2) 은혜를 알게하는데 있다. /
3. 은혜의 궁극적인 목적…………………………………………………
1) 하나님 영광에 대한 찬송이다. /
2) 하나님 영광에 대한 계시이다. /



Ⅰ. 먼저 하고 싶은 말

1. 이 책이 왜 중요한가?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라는 주제(主題)로 글을 쓰게 된 데에는 아주 커다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주제가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중요성(重要性) 때문이다. 주제 안에서 다루려는 율법이나 죄 또는 은혜라는 용어들은 기독교 신앙(信仰)에 있어서 아주 민감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내용들이다. 2000년 교회사의 흐름과 함께 온갖 교리나 신앙 형태의 변화 내지는 변질의 원인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본 주제에서 취급하려는 내용이 직접적인 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본 주제의 중요성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겠으나, 그 중 몇가지 중요한 측면만을 거론(擧論)해 보기로 하겠다.

1) 신앙이 성숙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율법이라든가 죄라든가 은혜라는 말들은 신앙인들에게 아주 예민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가장 흔하게 자극을 주고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들이다.
율법은 신자들의 행동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 시도 등한히 할 수 없는 규범적(規範的)인 내용이다. 대개의 신자들은 “율법”하면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는 신적(神的)인 법규(法規)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자기 행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죄의식(罪意識)과 함께 가지기 마련이다. 이같은 현상은 항상 행동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에서 계시해 주고 있는 율법적인 교훈들은 실제로 보통 사람으로는 행하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성경이 말하는 율법대로 행하며 살아가려면 때로는 직장생활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하던 사업도 그만 두어야 하는 경우도 있으며, 극단적으로는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살아야만 가능한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자들은 신자가 술장사나 담배장사 또는 투기 사업이나 부도덕(不道德)한 여러 퇴패영업(頹敗營業)등을 경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죄의식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금전의 헌납 행위로 무마(撫摩)해 보려는 엉뚱한 자들도 없지 않다. 반면에, 더러는 예수께서 율법을 다 이루셨는데 율법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생각하면서 온갖 부도덕한 행동을 행하면서도 아무런 자책(自責)도 하지 않는 자들도 있다.
신자에게 있어서, 율법(律法)에 대한 올바른 지식(知識)을 터득하고 율법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은 신앙이 건전하게 자라나는데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신자(信者)의 건전한 신앙 성숙의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죄는 신자들의 구원에 대한 확신생활(確信生活)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의 영혼 구원에 대하여는 회의적(懷疑的)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고는 하지만 이에 대한 확실한 증표(證標)가 애매(曖昧)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죄중에서 출생하여 죄중에서 자라며, 죄중에서 살고 있다.(시51:5) 그러므로 인간은 어차피 앞서 말한 율법대로 살지 못할 죄인일 수 밖에 없다. 죄악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이 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신자 역시 이같은 상태에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영원한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회의적(懷疑的)인 생각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죄 용서에 대한 확신이나 구원의 확신을 위해 체험적(體驗的)인 확증을 얻어 보려고 노력을 하기도 하고 어떤 자들은 죄 용서의 확증을 위한 형식적(形式的)인 제도를 만들기도 하며 물질적인 헌납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수 없이 많이 있는 실정이다.
죄 용서의 불확실(不確實)에 따르는 구원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은 신자들의 신앙이 자라나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어떤 자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은 신자로 하여금 태만을 불러 일으킨다고 하여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면서, 구원은 훗 날 천국에 들어가 보아야만이 확실해 진다고 가르치며 신자들의 열심을 억지로 강요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신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죄 용서에 대한 확신(確信)은 신앙생활에 커다란 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신자의 신앙성숙에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은혜는 신자들의 평안한 감사생활(感謝生活)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성숙한 신앙인은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마련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가 충만하다고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는 없거나 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없거나 모자라는 은혜를 채워 충만(充滿)하게 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어떤 자들은 소위 은혜가 풍성히 내린다고 생각하는 부흥회를 자주 참석하여 은혜를 구하는 자들도 있도,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조용한 기도원(祈禱院)을 찾아가 금식하며 기도하거나 밤을 지새우며 목청을 다해 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매일 새벽마다 예배당에 나아가 울며 은혜 받기를 위해 기도하는 자들은 너무도 많이 있다.
신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믿어지는 것 같이 즐겁고 감사한 일은 없다.
신자들의 생활에 있어서 은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은혜에 충만한 감사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선행(先行)되어야 할 문제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풀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제임이 틀림없다.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신자들의 윤리적(倫理的) 생활과 관련이 있고, 죄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구원의 확신생활(確信生活)과 관련이 있으며, 은혜에 대한 바른 이해는 평안한 감사생활(感謝生活)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라는 주제의 내용은 신자들의 신앙 성숙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써 그 중요성이 매우 큰 것이다.

2) 신학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본서에서 취급하고자 하는 율법과 죄와 은혜에 대한 내용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전해진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개혁파(改革派)신학이 안고 있는 난제(難題)들의 초점이 모아진 것들이다.
종교개혁 직후, 구라파를 변혁시키고 이어서 영국을 비롯해서 미국의 화려한 역사를 주도해 왔던 개혁파 신학의 오늘의 현실은 어찌 되었는가? 애석하게도 구라파 일대에서는 이미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울 정도가 되어 버렸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지역들에서는 몰락(沒落) 직전에 놓여 있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시들어져 가고 있는 실정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어두운 그림자는 한국을 위시한 동양 아시아지역을 덮어가고 있어서 개혁파 신학의 임종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실정에 놓여 있다. 그 근본원인은 그동안 개혁파 신학이 안고 있는 난제들에 대한 연구의 부진(不振)과 함께 현재 세계를 뒤덮고 있는 좌경신학(左傾神學)의 모체인 인본주의(人本主義) 신학의 도전을 막아내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개혁파(改革派) 신학은 신학적으로 아주 예민한 부분에 가서는 해답을 주지 못하고 모두 하나님의 비밀로 돌려 버리고 만다. 이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본서의 내용이다.

율법은 개혁파 윤리학(倫理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개혁파 윤리학은 너무도 소극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철학(行動哲學)만을 제시해 줄 뿐이었다. 세상살이가 단순하고 평이한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성경이 제시해 주는 전 포괄적이고 심도 깊은 행동신학, 즉 기독교 윤리학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아주 단편적이고 소극적인 율법에 의한 계율(戒律)의 교훈만을 제시해 줄 뿐이었다. 이와 같은 무딘 무기로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신학자들의 도전을 막기는 역부족(力不足)이었다.
확실한 윤리학에 의한 윤리관(倫理觀) 제시가 없는 이론적 학문은 실제로 무력한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의 행동이란 구체적인 논리적 체계에서 나오는 생각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불확실(不確實)한 이론체계는 생각의 혼미를 가져다 주고, 혼돈된 생각은 혼란한 무질서(無秩序)의 행동을 초래하게 된다.
전통적인 개혁파 윤리학에서는 인본주의 신학에서나 일바 철학에서 제시하는 윤리적 이론 체계를 크게 뛰어 넘지 못했다.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규범과 인간이 행하고 싶어하는 본능(本能)사이의 갈등을 개혁파 신학이 성경에 의하여 풀어주지 못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인간 본능의 자유를 최고선(最高善)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윤리의 기초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서 성경에 구체적으로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은 멀어져 가다 못해 사라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 신학은 율법을 규범으로 하는 소극적이고 단편적인 윤리가 아닌, 성경전체를 통한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를 바탕으로 한 전 포괄적인 윤리관을 제시해 주어야 할 책무(責務)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 신학에서나 철학이 제시하는 윤리적 이론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우월한 윤리체계의 이론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윤리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죄에 대한 문제는 기독교 신학의 신론(神論)과 인죄론(人罪論)이 안고 있는 난제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고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론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난제들은 너무도 많이 있다.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섭리영역(攝理領域)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영역 밖에 있는 것인가? 만일 죄가 하나님의 섭리영역 밖에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게서 죄를 섭리하신다는 것인가? 무슨 이유로 죄를 섭리하신다는 말인가? 그리고 섭리하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심판하시는 것일까? 그와는 반대로 죄가 하나님의 섭리영역(攝理領域) 밖에 있는 것이라면,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할 것을 전연 알지 못하셨다는 말인가? 아니면 절대자이신 하나님 외에 하나님과 대등(對等)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능가(凌駕)하는 다른 어떤 세력이 있어서 인간을 타락하도록 유도(誘導)했다는 것인가? 그것이 어쩌면 에덴동산의 뱀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하필이면 에덴동산 중앙에 나게 하셨고 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열매가 열리도록 하셨을까? 하나님께 대한 의문은 멈추지를 않는다.
기독교 교의신학(敎義神學)의 인죄론에 있어서도 역시 죄문제(罪問題)로 인한 난제(難題)들이 신론과 함께 연결되어 꼬리를 물고 제기된다. 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죄의 기원(起源)은 어떠한 것이며, 인간이 과일 한개를 따먹은 것이 그렇게도 커다란 죄가 된다는 말인가? 그 죄로 인한 세상의 저주도 물론이지만, 그보다 더 지옥(地獄)의 형벌은 너무 가중(苛重)한 것이 아닌가? 아담 한 사람의 범죄를 그 후손인 온 인류에게 덮어 씌우는 것은 너무 무리(無理)한 일이 아닌가? 하는 등의 질문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신론과 인죄론은 전체 신학의 흐름과 방향을 좌우(左右)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많은 난제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오늘에까지 전해 내려오는 기존의 모든 신학체계(神學體系)는 근본적인 재검토(再檢討)를 받아야 하며, 정확무오(正確無誤)한 성경계시에 기초한 신론과 인죄론의 이론 체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론과 인죄론의 난제들의 초점이 되고 있는 죄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이해가 앞서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은혜 교리는 기독론(基督論)과 구원론(救援論)에 대한 바른 정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교리(敎理)이다. 기독론과 구원론은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신학의 내용으로 볼 때, 그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기독론에 있어서나 구원론에 있어서 아직도 풀려야 할 난제들이 너무도 많이 쌓여 있다.
기독론에 있어서, 근본(根本) 성자(聖子) 하나님이신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고 피를 흘리셔서 대속(代贖)해 주신 섭리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섭리 내용을 은혜의 섭리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난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인간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인가? 아니면 타락 이후에 응급대책(應急對策)으로 작정하셔서 섭리하신 일인가? 만일 타락 이전에 작정하신 섭리라면,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담의 타락을 작정하셨다는 말인가? 타락하게 하시고 구속해 주시는 것이 은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고 인간이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응급대책으로 예수의 대속 사역을 작정하신 것이라면, 그러한 섭리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 어울리는 섭리라고 믿어지는가? 하나님께서 피조계(被造界)의 되어지는 상황에 따라 섭리하시는 분이실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죄의 권세를 멸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죄 없으신 독생자를 왜 십자가에 죽게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권세를 멸하실 능력이 모자라서일까? 죄 없으신 예수를 죽이는 것보다는 죄의 원흉(元兇)인 죄의 권세를 처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섭리가 아닐까? 아담이 선악을 알게하는 과일 하나를 따먹은 죄의 대가로 꼭 죄 없으신 예수가 죽으셔야만 하는가? 다른 방법은 없으셨을까?
구원론(救援論)에 있어서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膳物)이라고 해서 구원론과 은혜교리와의 관계를 밀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도 허다한 의문이 도사리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는 많은 과정(過程)이 있는데,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일까? 아니면 어느 정도 부분만일까? 만일 모두가 거저 주시는 은혜라면 인간은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는 말인가? 인간이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주신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지 않으시는가? 그렇치 않다면, 어느 정도는 인간이 노력(노력)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인가? 그 어느 정도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분량을 뜻하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면서 왜 인간의 협력이나 노력을 요구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러실까? 인간의 능력이나 충성도(忠誠度)를 시험하시기 위해서일까? 계속해서 제기되는 의문은 끝이 없다.
이상과 같은 허다한 난제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구원에 관한 진리체계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난제들을 포함하는 기독교의 구원론은 신자들에게 구원의 은총이나 은혜에 대한 감격을 감소(減少)시키고 또는 느끼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 준다.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특히 기독론이나 구원론을 정립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선결(先決)과제인가를 확인했다. 이와 같이 신학정립(神學定立)에 있어서의 중요성 때문에 은혜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위해 연구노력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진리가 확증이 되려면 의문의 여지(餘地)가 없어야 한다. 의문이 있는 한, 진리에 대한 회의(懷疑)는 있기 마련이다. 기독교 신학이 진리로 확증이 되려면 반드시 모든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구체적인 논리가 요구되는 것이다. 총체적(總體的)이고 전포괄적(全包括的)인 논리가 없는, 부분적이고 단편적(斷片的)인 주장은 한낱 고집에 불과한 것이다.
흔히 교회 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자세히 진리에 대하여, 즉 신학적인 내용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 적당히 알고 믿으라든가 또는 무조건 믿으라는 말로 답하는 교사들을 보게 된다. 믿음은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고 어느 학자가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진리를 사수(死守)하고 전하는 진정한 교사라면 이같은 무책임(無責任)한 말을 해서는 안된다. 마땅히 확실한 답을 얻기 위해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고 답을 찾아서 알려 주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대개 어떻게 알고 있는가?

이 책에서 주로 취급될 율법이라든가 죄라든가 은혜라는 주제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는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이나 교사들 또는 신자들은 이들 주제들에 대하여 성경과는 거리가 조금은 먼 의미로 알고 있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더러는 성경과는 아주 판이(判異)한 정반대(正反對)의 의미로 알고 있는 자들도 상당한 수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교파마다 교리가 다르고 주장하는 바가 엄청나게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고, 같은 성경을 인정하면서도 아주 판이한 교훈이나 의식제도(儀式制度)를 가지고 있는 교파들도 있다.

1) 율법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알아 본다.

기독교 초기인 예수님 당시부터 사도시대나 교부시대(敎父時代)는 물론 중세시대와 종교개혁시대(宗敎改革時代)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율법에 대한 논쟁은 멎을 날이 없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이 복음서에 많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사도시대에도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책망과 경계(警戒)를 위한 내용들이 바울의 서신 내용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후, 교부시대를 지나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시대에 이르러 율법에 대한 교리적인 구체적 정립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로마 카톨릭교회 신학의 대가로 알려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율법에 대한 교리를 도덕법(道德法)과 의식법(儀式法), 그리고 재판법(裁判法) 등으로 구분했다. 그 가운데 도덕법은 십계명이라는 뜻으로 설명하면서 나머지 의식법과 재판법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기(廢棄)되었으나 도덕법(십계명)만은 남아 있기 때문에 신자가 영구히 지켜야 한다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율법에 대하여 이같이 주장한 데는 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교회 교리는 구원론에 있어서 철저히 공로주의(功勞主義)를 기본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구원을 얻으려면 믿음만 가지고는 부족하고 선한 일을 많이 행하여 공덕(功德)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법인 십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는 이론을 만들어내기 위한 인위적(人爲的)인 방법의 산물이었다. 이같은 이론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전연 찾을 수가 없는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 죤 칼빈(John Calvin)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율법에 대한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대부분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오(過誤)를 범하고 말았다. 칼빈 역시, 율법을 의식법과 도덕법으로 나누면서 의식법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豫表)로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전히 폐기(廢棄)되었으나, 도덕법으로서의 십계명만 완전히 폐기된 것이 아니고 저주만 폐기되었으며 그것의 규범적(規範的)인 구속력(拘束力)만은 영구히 남아 있어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그리고 그는 율법의 세 가지 용도를 밝히는데 첫째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절망감을 갖게 하며, 둘째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의 사슬이 되게 하며, 셋째는 신자들에게 복종할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기독교 강요 2권 7:1∼4 참고)
종교개혁(宗敎改革) 이후, 개혁파 신학자들 역시 율법에 대한 칼빈의 견해(見解)나 주장을 전연 벗어나지 못한 채, 도리어 칼빈이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없는 국가법(로마 카톨릭 신학에서 는 재판법으로 표현함)을 하나 더 설정(設定)해 놓고 율법은 도덕적 율법, 의식적 율법, 국가적 율법 등으로 나누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의식적 율법과 국가적 율법은 폐기되었는데, 의식적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성취하시고 더 좋은 것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외면적으로 폐기되었고, 국가적 율법은 구약시대 히브리 사람들의 특이한 상활에 적응(適應)하도록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경륜(經綸)이 지나간 오늘에는 구속(球束)하기를 중지하시고 폐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율법만은 예외(例外)가 되는데, 도덕적 율법의 요약인 십계명은 영구히 폐기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로마 카톨릭교회 주장과 방불(彷佛)한 이론을 전개했다.(박형룡박사 저, 교의 신학 3권 6장 참고)

이상과 같은 율법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들은 허다한 의문(疑問)을 가지게 한다. 우선은 율법을 도덕적 율법, 의식적 율법, 국가적 율법 등으로 분류하는 성경적인 뚜렷한 근거(根據)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말 율법을 정확하게 세 부분으로 분류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솔직한 개혁파 신학자 가운데 혹자는 그렇게 분류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도덕적 율법만은 완전 폐기(廢棄)된 것이 아니고 저주(詛呪)만이 폐기되고 행동 규범으로서의 구속력(拘束力)은 그대로 남아 있어 신자들의 생활 규범이 되고 있다는 논리 역시 성경적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내용으로 이루어진 구약의 율법 중에서 유독(惟獨) 십계명만을 도덕법으로 규정하는 기준 자체도 애매모호(曖昧模糊)하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러한 계명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아직도 지킬 의무(義務)로 남아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같은 문제 역시 솔직한 개혁파 신학자라면 판정하기 어렵다고 대답할 것이다.
율법의 세가지 용도(用途)에 있어서도 그 첫번째 용도인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절망감(絶望感)을 갖게 한다는 것과 세번째 용도인 신자들에게 복종(服從)할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서로가 모순(矛盾)이 있다. 이에 대해서 첫번째 용도는 믿기 이전의 용도이고 세번째 용도는 믿은 이후의 용도라고 변호(辯護)를 하겠으나, 하나님께서 믿어 구원얻게 하시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율법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저주(詛呪)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 살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에 전연 합당(合當)하지 않는 변호가 되는 것이다.
종합적(綜合的)으로 평가(評價)해 볼 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율법에 대한 견해들은 첫째 성경과 부합(符合)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고 전체적으로 논리적인 일관성(一貫性)이 결여(缺如)되어 있다는 것이다.

2) 죄관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을 알아 본다.

죄관에 대한 철학적(哲學的)인 이론은 아주 다양하다.
헬라철학에 있어서의 이원론적(二元論的) 죄관은 죄를 육체적인 고악(苦惡)으로 보고 인간의 영이 물질적인 신체(身體)와 연합하기 때문에 당하는 영적인 오손(汚損)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의 유한론(有限論)에 의한 죄관은 반 기독교적 이론인데, 절대적실체(絶對的實體)로서의 최고선(最高善)이신 하나님보다 적은 것, 선보다 적은 것, 또는 부정(否定)이나 제한(制限)이 악(evil) 혹은 죄(sin)라는 이론이다.
철학자 라이프닛츠(Leibnitz)의 결핍론(缺乏論)에 있어서의 죄관은, 현재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이지만 이 안에 죄의 존재는 반드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죄는 하나님과는 무관한 단순한 결핍 혹은 공무(privation or negation)라고 한다. 즉 모자라거나 없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죄를 인간의 착각(錯覺)으로 보는 스피노자(Spinoza)의 죄관은, 하나님 안에는 악의 사상이 없기 때문에 만일 죄가 어떤 실재(實在)라면 그것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선악에 관한 보통 관념은 잘못된 것이며 다만 인간이 사물을 비교할 때에 일어나는 관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지고 있는 필연적 대립론(必然的對立論)에 의한 죄관은, 악을 선에 필요한 조건으로 보고 세계의 모든 사물이 서로 대립의 필연적 법칙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을 보아서 죄는 덕(德)의 존재에 필연적인 조건이라고 한다.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의 자아의식론(自我意識論)에 의한 죄관은, 인간의 죄의식을 하나님 의식에 의존하는 것으로 보고, 사람 안에 하나님 의식이 일어나게 되면 반면(反面)에 인간 자신의 열등의식(劣等意識)을 느끼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죄와 죄책(罪責)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철학자 리츌(Ritschl)이나 슐라이어막허가 주장하는 죄론(罪論) 중에는 불신뢰 반신국론(不信賴 反神國論)이 있다. 이 죄관은 죄를 하나님께 대한 신뢰(信賴)의 결핍(缺乏)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반항이라고 보는 주장이다. 그리고 죄는 그리스도인의 의식(意識)의 입장에서만 이해된다고 한다.
진화론적 이론(進化論的 理論)에 의한 죄관은 죄의 근원을 사람의 동물성에서 찾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죄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인간의 도덕적 의식에 대한 열등성(劣等性) 습관에 의한 반항으로 구성(構成)되는 것이라고 한다.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일어난 종교심리학에서 주장하는 심리론(心理論)에 의한 죄관에는 몇가지 학설이 있다. 그 하나가 병적 상태설(病的 狀態說)인데 죄를 일종의 병적 상태라 하여 이것을 생리학적 문제로 취급한다. 또 하나는 정신 불건전설(精神不健康說)이 있는데 이 설은 죄를 병든 영혼, 혹은 불건전한 정신의 부르짖음이나 또는 일종의 병적인 고민으로 인정한다. 그 다음은 성적 발작설(性的 發作說)인데 죄의식을 기초로 한 회심(回心)이 대다수 청소년기에 있다하여 성욕의 발동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기주의론(利己主義論)에 의한 죄관에서는 죄를 이기주의로 구성된 것으로 주장한다. 이같은 견해를 가진 자들 중에는 이기주의를 단순히 자선(慈善)의 반대개념(反對槪念)으로 인식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의 최고 대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있고, 혹은 이 두 개의 설을 종합해서 죄를 정의하는 자도 있다.
일반적으로 철학에서는 죄를 고악(苦惡)의 한 부분으로 정의(定義)하는데, 고악(evil)이란, 사람에게 선의 관념 혹은 당위(oughtness)의 감성이 있어서 무엇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느낄 때 대조적으로 무엇이 당연히 있지 않을 것(ought not to be)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죄관에 대한 신학적(神學的)인 이론 역시 다양하다.
신학적인 죄관에 대한 이론 중에 하나인 펠라기우스파의 죄관은 기초(基礎)를 사람의 자연적 재능에 둔다.「내가 당연히 할 것은 내가 능히 한다」(If I ought, I can.)라는 격언에 이 죄관의 전 체계(體系)가 담겨져 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한 일을 행할 것을 명령하셨으니 사람은 필연적(必然的)으로 그것을 행할 재능(才能)을 가졌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재능의 척도(尺度)는 책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도덕이나 거룩한 생활의 원칙을 말할 때에 인생의 능력을 확인하여 그 성취할 수 있는 바를 지시하는 것을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고유(固有)한 힘을 인식하지 않고 또 이 힘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지 않으면 같은 비례로 방종하여지며 덕에 진행함이 더디고 느즈러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책임은 재능의 척도라고 말하는 반면에 재능은 책임을 제한(制限)한다고 하여 무엇이든지 행할만한 완전한 재능을 가지지 못한 것은 그것을 행할 책임이 사람에게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람이 행위할 수 있는 것보다 이상의 것을 요구(要求)하실 수 없다고 하였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선을 행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사람이 자연적(自然的) 재능으로서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自由意志)는 선이나 악, 또는 성(聖)이나 속(俗)을 선택하여 성취하는 완전한 능력이라고 한다. 따라서 죄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기 때문에 죄의 유전(遺傳)은 없는 것이며 성령의 도움이 없이 무죄(無罪)의 생활이 가능하다고 본다.

신학적인 죄관에 대한 이론 중에 또 하나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죄관이다. 로마 카톨릭교회 죄관은 아주 불투명(不透明)하고 애매모호(曖昧模糊)하여 진술하기가 어려우나 몇가지 특이한 주장들이 있어서 이들 내용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 중 하나는 의지(意志)의 의식적인 행동만을 진정한 죄로 인정을 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성향(性向)이나 습관은 죄악스런 성격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들을 엄밀한 의미에서 죄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욕(selfish desire)은 형벌을 받을 만한 죄, 혹은 죄책(罪責)으로 인정되기 불능하고 오직 죄의 기회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 있는 죄악성은 소극적 상태 뿐으로써 당연히 임재할 무엇의 흠결, 또는 인생 성질의 본질이 아닌 원의(原義)의 흠결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또 하나는, 원죄(原罪)는 세례에 의하여 제거되는데 세례는 죄를 씻어버리고 원의(原義)를 회복하는 방편이며 인간 안에 사욕이 남아 있는 것은 인생 성질의 원시적 소질에 고유하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 죄관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인간의 의지에 의한 의식적인 행동만을 죄로 인정하고 내면적인 악성(惡性)들은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학적인 죄관 중에 또 하나는 알미니안파의 죄관이 있다. 이 죄관 역시 로마 카톨릭교회의 죄관과 견해를 같이 한다. 웨슬레는 알고 있는 율법에 대한 자발적(自發的)인 위범(違犯)을 죄라고 칭하고,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율법을 자발적이 아닌 상태에서 위범(違犯)한 것은 죄가 아니라고 구별하여 말한다. 그리고 자발적이 아닌 위범은 인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무식(無識)과 과오(過誤)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결과라고 한다.
결국, 죄란 알고 있는 율법에 대한 위범(違犯)이기 때문에 인간 개개인의 위범으로서의 행동이며, 이같은 죄인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위범이 없는 곳에는 죄인도 없다는 주장을 한다.

신학적 죄관 가운데 마지막으로 개혁파의 죄관이 있다.
종교 개혁시대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교회들은 루터파나 개혁파 모두가 죄는 하나님의 율법에 위범 또는 일치하지 못한 것이라는 견해(見解)에 의견을 같이 한다.
개혁파 죄관에 있어서의 죄의 성격은 첫째로, 특종적(特種的) 고악이라는 주장이다. 고악(苦惡)은 질고와 재난과 같은 물질적인 것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범과 같은 도덕적인 것이 있는데, 죄는 후자인 도덕적인 고악이라는 점에서 특종적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죄는 절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윤리계(倫理界)에 있어서 선과 악의 대립은 절대적이요 두 사이에 중성상태(中性狀態)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악하게 된다는 것은 선을 감소시켜 적게하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급격한 질적 변화에 의해 죄에 전향하므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죄는 선의 저급(低級)이 아니라 적극적 악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죄는 의지 박약, 감각성, 유한성, 무지(無知) 같은 결핍을 본질로 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하는 적극적인 일 즉 하나님께 침범하여 반역하는 사언행(思言行)이라고 한다.
넷째로, 하나님의 율법이나 성질에 관계가 있는 것이 죄라고 한다. 죄의 구성에 표준이 되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니까 인간 양심의 도덕적 책임감(責任感)은 순종을 요구하는 도덕적 표준인 율법과 함께 그 율법의 제정자이시며 도덕적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도덕생활을 명령하고 책임을 지우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니까 죄는 형벌로써 자기의 율법을 옹호하시는 인격적 입법주(立法主), 도덕적 통치주에게 반항하여 침해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의 의지 표현인 율법의 위범이지만 하나님의 의지의 배면(背面)에는 그의 거룩한 성질이 기초되어 있기 때문에 죄는 궁극적으로 그 거룩한 신적 성질의 표현에 대한 위범이다고 한다.
다섯째로, 죄는 죄책(罪責)과 오염(汚染)을 겸하는데, 죄책은 죄에 대한 형벌을 받을 책임을 뜻하는 것으로서 범죄의 객관적인 결과를 말하며 오염은 사람마다 세상에 태어날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생득적 부패(生得的腐敗)인데 개개인의 생활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범죄의 주관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섯째로, 죄는 마음(heart) 혹은 영혼의 중심 기관인 심정(心情)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죄가 행동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죄악한 습관과 영혼의 죄악한 상태로도 구성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개혁파의 죄관은 정의하기를「죄의 성질은 사람의 행동, 성향 혹 상태가 신적 율법과 부조화함이다」라고 하였다(박형룡 박사 저, 교의신학 3권 3장 참고)


3) 은혜에 대한 통속적인 개념을 알아 본다.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은혜에 대한 교리는 2,000년 교회사와 함께 시대마다 견해를 달리하는 통속적(通俗的)인 주장들을 가지고 있었다.
은혜 교리가 주후 4,5세기 이전의 교부시대에는 펠라기우스(Pelagius)와 어거스틴(Augustine)의 주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종교개혁 이전 중세시대에는 스콜라 신학(Scholastics)을 중심으로 주장이 이루어져 있으며 종교 개혁시대에는 개혁 초기와 후기를 달리하여 칼빈(Calvin)과 알미니우스(Arminius)의 대표적인 이론으로 압축이 되어진다.
이들 대부분의 은혜교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나 구원과 관계해서 주장되는 통속적인 이론들이었다.

교부시대(敎父時代)의 은혜교리(恩惠敎理)는 펠라기우스의 견해와 어거스틴의 견해가 서로 정반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펠라기우스의 은혜교리에 대한 견해는 인간이 악에서 선으로 돌이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Grace)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한다. 물론 그 은혜의 사역이 인간 생활에 유익을 주며 악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이같은 관계의 은혜는 내면(內面)에서 역사하시는 신적 능력(Divine energy), 즉 성령의 역사로서 인간의 의지를 바꾸어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적 성질이라든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模範)과 같은 외적인 은사와 자연적 은혜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특별은혜가 아닌 일반은혜에 속한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은혜는 ① 자연의 선(善), 즉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자유의지(自由意志) ② 복음의 설교 또는 그리스도의 모본(模本)이 요소가 되어 구성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① 자연의 은혜(자유의지)는 보편적이며 절대적으로 본질적이며 필연적이라고 하며, ② 복음의 은혜는 보편적인 것이나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다만 인간이 구원을 얻는데 쉽게 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어거스틴의 은혜교리에 대한 견해는 인간은 하나님의 신적 은혜의 사역(a work of divine grace)에 의해서만 의지의 갱신(renewal)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① 준비적 은혜(prevenient grace) ② 공작적 은혜(operative grace) ③ 협력적 은혜(co-operative grace)로 구분하였다. ① 준비적 은혜(準備的 恩惠)는 성령께서 율법을 사용하여 죄와 죄책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것이고 ② 공작적 은혜(工作的 恩惠)는 성령께서 복음을 사용하여 믿고 의롭게 하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이루는 것이며 ③ 협력적 은혜(協力的 恩惠)는 인간의 성화된 의지로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은혜가 복음과 세례와 용사(容赦) 등으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죄인은 내적이며 영적인 은혜 곧 성령의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감화를 받아서 마음이 변하고 성결해지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예정의 열매인 이 은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선에 따라 아무 대가(代價)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교부시대는 은혜교리에 대한 견해가 펠라기우스의 인간의 자유의지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주권(主權)에 대한 기초로부터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대립의 시기였다.

중세시대의 은혜교리에 대한 견햬는 스콜라 신학의 이론이 그 중심을 이룬다. 물론 스콜라 신학자들 사이에서 은혜교리에 대한 의견에 일치가 없기는 했으나, 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견해로는 어거스틴주의와 완전히 일치는 아니지만 상당한 부분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펠라기우스주의나 반펠라기우스주의와는 비교적 거리가 먼 편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의 은혜교리에 대한 견해는, 하나님의 충족한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창시(創始)하고 증진(增進)시키고 계속 자라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견해를 같이하는 롬바드 사람 피터(Peter the Lombard)의 견해는 은혜의 성질(性質)을 정의하기를, 사람안에서 역사하는 초자연적 특질(特質)이거나 혹은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은혜를 독력적 은혜(獨力的 恩惠)와 협력적 은혜(協力的 恩惠)로 구분했는데, 독력적 은혜(a gratia operans)는 인간으로 하여금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단독적인 은혜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순수하게 거저 주시는 자비의 은사를 말하고, 협력적 은혜(a gratia co-operans)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와 협력하여 원하는 결과를 맺게 하는 신인합력적(神人合力的) 은혜로서 인간의 의지으 적극적인 찬동과 협력에 좌우되는 은혜를 말한다.
스콜라 신학자 헤일스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는 롬바드 사람 피터와 은혜교리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견해를 같이했으나 스콜라 신학의 특징인 또 하나의 견해를 펼쳤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상(無償)으로 주시는 은혜와 무상으로 주신 은혜, 그리고 은혜롭게 하는 은혜 등으로 구분했는데, 무상으로 주시는 은혜(gratia gratis dans)는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거저 주시는 은혜를 말하고, 무상으로 주신 은혜(gratia gratis data)는 하나님께서 이미 인간에게 주신 모든 실제적인 은혜와 덕(德)을 말하며, 또 은혜롭게 하는 은혜(gratia gratum faciens)는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혼의 영원한 특질로서의 은혜를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헤일스의 알렉산더가 은혜를 분류(分類)하면서 사용한 용어들에 대한 의미를 다르게 부여했다. 그는「무상으로 주신 은혜」라는 말을, 은혜를 받은자 자신의 선보다는 다른 사람의 선을 목적으로 하는 무상의 은사라는 의미로 국한을 시켰고,「은혜롭게 하는 은혜」라는 말은, 은혜를 받은 자 자신의 성화(聖化)를 위하여 의도된 모든 초자연적 도움을 지시하는 말로 사용하면서, 인간의 의지를 갱신(更新)시키는 준비적 혹은 사역적 은혜(prevenient or operating grace)와 인간의 의지를 도와서 사역하게 하는 계기적 혹은 협력적 은혜(subsequent or co-operating grace)로 구분했다. 전자는 충족한 은혜(sufficient)로 불리어지고 후자는 유효적 은혜(efficacious)라고 불리어진다. 그의 이같은 은혜교리에 대한 주장과 견해가 후대에 결정이 되어 사용이 되었다.

종교개혁시대의 은혜교리에 대한 견해는 개혁 초기의 칼빈(Calvin)의 견해와 개혁 후기의 알미니우스(Arminius)의 견해로 대두되어 나타난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은혜교리는 기독교 초기 교부시대의 터툴리안(Tertullian)이나 어거스틴(Augustine), 그리고 안셈(Anselm)과 같은 교부들의 견해를 대부분 동의했다.
교부들은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문자적(文字的)으로 또는 실재적(實在的)으로 범죄하였다는 실재설(the realistic theory)을 주장하는 반면에, 칼빈은 모든 인류의 자연적인 머리이며 언약적 머리로서의 아담은 후손들의 법적인 대표자로서 범죄했다는 언약설(the covenant idea)에 의해 아담의 죄와 그 후손의 죄와의 관계를 더 명백하게 정의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전적인 부패 교리가 더욱 강조됨에 따라서 인간의 구원이나 갱신은 어디까지나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인간의 의지의 부자유(不自由) 교리를 말하게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통은혜(普通恩惠)와 특별은혜(特別恩惠)로 구분하는데, 보통은혜로 중생하지 못한 인간이 세속적인 의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특별은혜로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면 인간으로서는 거역을 할 수 없고 받을 수밖에 없다는 불가항력적 은혜(不可抗力的 恩惠)교리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하나님의 특별은혜에 대한 칼빈의 신학적인 배경은 칼빈주의(Calvinism) 오대교리(五大敎理)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① 인간의 전적부패(Total Depravity) ②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궁극적 구원과 보호(Perseverance and Preservation of Saints) 등의 다섯 개의 조항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서 아무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절대적인 능력에 의한 은혜로 아무런 조건없이 인간을 선택해서 그들의 죄만을 용서해 주시므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은혜이며,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보호하시는 은혜라는 뜻이 담겨진 교리이다.

종교개혁 후기의 알미니우스는 칼빈과는 대조적인 은혜교리를 주장한 자이다. 그가 주장하는 교리에 동조(同助)하는 알미니안파의 은혜교리(恩惠敎理)는 하나님의 은혜를 셋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 하나는 예비적 은혜 혹은 보통 은혜(Prevenient or common grace), 다음은 복음적 순종의 은혜(The grace of evangelical obedience), 그 다음은 인내의 은혜(The grace of perseverance) 등이다. 그들이 말하는 예비적 은혜 혹은 보통 은혜는 성령께서 모든 인류에게 날 때부터 선천적(先天的)으로 부여받은 부패성을 제압(制壓)할 만한 충분한 은혜는 물론, 하나님과 협력해서 중생을 할 수 있도록 주신 은혜를 말한다. 그리고 복음적 순종의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주어진 보통은혜(普通恩惠)에 의하여 복음에 순종하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협력(協力)하는 은혜를 말한다. 마지막 견인(堅忍)의 은혜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므로 끝까지 견디어 구원에 도달하는 은혜를 말한다.
알미니안파의 은혜교리에 대한 신학적인 배경은 알미니우스의 오대교리(五大敎理)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 내용은 ① 인간의 부분적 부패(部分的 腐敗) ② 조건적 선택(條件的 選擇) ③ 무제한 속죄(無制限 贖罪) ④ 가항력 은혜(可抗力 恩惠) ⑤ 구원의 불확실(救援 不確實) 등의 조항이다. 이 내용은 인간이 타락해서 부패했으나 완전히 부패한 것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남아 있는 조건을 전제로 선택하시고 모든 인간에게 제한없이 사죄의 은혜를 베푸시며, 그 은혜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 거부될 수도 있기 때문에 구원은 확신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부패성을 제압하고 중생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지와 협력할 수 있는 은혜를 충분히 주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충족은혜의 이론(theory of sufficient grace)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이 받거나 또는 받지 못하거나 하는 책임을 인간에게 돌리는 인간 책임의 교리(the doctrine of human responsibility)를 옹호하는 이론이다. 즉 아담 한사람이 범한 원죄가 모든 인간에게 전가(轉嫁)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능은혜(可能恩惠)를 주시지 않고는 인간에게 신앙을 요구하실 수가 없으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적인 무능(無能)을 제거하실 어떤 은혜를 인간에게 주신다면 하나님께서도 역시 인간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완전한 권리를 가지시게 된다. 그런데 만약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은혜를 무시해 버리고 이 은혜와 협력하기를 거절한다면, 인간은 필연적(必然的)으로 자신이 중생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론이다(루이스 뻘코프 저 기독교교리사 제 5, 6, 7장 참고)

지금까지 은혜교리(恩惠敎理)에 대한 견해들을 역사적(歷史的)인 순서(順序)에 따라 차례로 대략 열거해 보았다. 이들 견해들은 대부분 크게 달라지거나 보완(補完)되지 아니한 채, 현대 교회안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살펴본대로 교회역사상 은혜교리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신학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일반 성도들은 아무런 비판없이 무조건 수납(受納)하는 경향(傾向)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구체적(具體的)인 이론 체계도 없는 막연(漠然)한 은헤만을 추구해 왔고, 또 그러한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해 온 나머지 대부분의 일반 성도들은 은혜 아닌 은혜를 받으려는 열심으로 가득차 있는 실정이다. 과연 현대 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이 받으려고 노력하는 그 막연한 은혜가 참으로 기독교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진정한 은혜일까?

출처 : 시 온 성
글쓴이 : Hul 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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