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 의 참 뜻
목회자는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하늘에서 세상사를 내려다보는 초월의 길을 안다
삼일절 저녁, 라디오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를 들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에 한국사회에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평가한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다고 한다. 또 지난 문민정부의 시절보다 민주주의가 일층 퇴보하였다고도 평가한다.
그러나 부를 상류사회에 집중시켜서 그 힘으로 국제사회의 경쟁 마당에서 승리하려는 전략이 이명박 정부에게 있다면 어떻게 논평하시겠습니까? 국제적 교류에서 상위를 점하고 있는 상류사회를 한국사회에서도 형성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번영을 확고히 하려는 국가발전의 전략을 암암리에 세우고 있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서구사회의 세습귀족가문과 같은 명문가들을 많이 일으켜서 세계를 지배하는 상층귀족연대에 합류하려는 여망이 국가정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면 어떻게 평가하시렵니까?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교회의 양극화도 덩달아 심화된다. 세상이 변함에 따라 교회도 덩달아 변한다. 세상이 교회의 중심부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면, 교회는 세상이 휘두르는 대로 좌우로 흔들리기 십상이다. 목회자가 세상과 짝하여 살면 교회는 세속주의로 변질한다. 장로가 세상의 사람 그대로 걸어 들어오면 당회가 세속화하고 교회가 세속주의로 변질한다. 교회가 세상을 구원할 힘을 잃고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끌고 가게 된다. 근자에 경북대에서 일하시는 어떤 장로님이 책을 냈는데 그 제목이 ‘세상 속에 있는 교회, 교회 안에 있는 세상’이다. 재작년에 목회자신문 ‘토라로 세상읽기’ 칼럼에서 내가 내놓은 제목과 꼭 일치한다. 동일한 깨달음이 지역의 한 장로님의 입을 터뜨리고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난 주일 새벽에 김홍도 목사의 설교가 방영되었다. 김홍도 목사의 설교는 기개가 넘치고 확신에 가득 차서 성도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는 조갑제씨를 즐겨 만난다고 했다. 조갑제씨는 현재 우리나라의 사상계에서 우익을 대변하는 분이다. 상류사회를 더 굳고 튼튼하게 하여야 국가번영을 도모할 수 있고 반공정신을 더 강화하여야 승공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 분이다. 과거의 민주화운동은 모두 좌익 운동으로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였다고 폄하하는 분이 조갑제다. 그는 우리사회의 우익 주에서도 극우파를 대변한다. 김홍도 목사님의 설교를 따보았다.
김정일만 만나면 사람이 ‘헷까닥’변하니 아예 만나지 말라. 김정일은 마귀이니 마귀를 만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을 만나야지 마귀를 왜 만나느냐? 북한의 공산정권이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성도들을 얼마나 핍박했느냐? 북한에 아무 것도 갖다 주지 말아야 한다. 사탄은 살인자를 부추기는데 스탈린과 모택동이 죽인 사람만 해도 수천만 명을 넘는다. 이로 보아도 공산주의자는 사탄임에 틀림없다. 공산주의 좌파는 거짓말만 만들어낸다. 사회에 혼란만 일으킨다. 지난 군사정권 때 사회에 혼란을 일으켜서 좌파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더 혼란이 왔다. 주변에서 적당히 지내도 김홍도 목사정도면 더욱 인기를 누리며 살 수 있는데 왜 자꾸 모나게 사느냐고 한다. 세상에서 인기를 얻어서 뭘 해? 복음에는 중도가 없는 법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실천은 구원과 무관하다. 구원받고 계속 성화되고 마침내 영화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성도는 심판받지 않는다. 오로지 상급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나는 인본주의를 배격하고 신본주의를 확신한다. 이상이 김홍도 목사님의 설교 요지이다.
이와는 반대의 뜻으로 설교하는 교회도 많다. 소위 진보진영에 속하는 교회들이 그들이다. 민중운동을 표방하는 교회들도 많이 있다. 삼일절이 되면 이들 교회에서는 진보진영의 선언서를 함께 낭독한다. 정의의 실천을 강조한다. 반이명박전선을 확고하게 천명한다. 예배에서 친일잔재의 청산을 요구하는 성명을 채택한다. 올해에 발표한 성명서들을 보니 진보연대의 성명서와 거의 일치한다. 채만식·서정주를 친일분자로 확실하게 정죄할 것, 일본왕의 방한을 저지할 것,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하려는 건국절 제정을 규탄할 것, 친일부역언론을 심판할 것, 역사교과서 왜곡 기도를 중단할 것, 3·1정신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평화와 통일을 이룰 것, 시민의 참여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것.
뿐만 아니라 어느 신학자가 작성한 경제정의에 대한 문건을 보면 이 또한 변형윤 선생이 지도하는 서울경제포럼과 같은 진보진영의 경제학자들의 견해와 같이한다. 반이명박 전선과 민족주의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서 교회가 앞장 서야 한다고 강조하며 그것을 신앙의 실천이라고 천명한다. 이들이 교회 안에 있는 좌익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성경말씀에 대한 깊은 명상이 빠져 있어 아쉽다. 이들에게서 화해와 평화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눅1:79; 2:14).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면서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고 탄하셨다(눅19:42). 평화를 지금 여기서 당장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즉시 살아내는 것,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지금 믿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신앙의 양극화 현상이 교회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복음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받고 성화의 길을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 김홍도 목사는 복음에서 실천을 배제하고 있지만 실천 없는 곳에 구원도 없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산상설교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마7:21).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칭의론(의인론)을 펼친 바울의 설교는 실천궁행을 강조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노모스’(율법)는 바리새파가 해석한 미쉬나를 가리킨다. 할례 규정과 안식일 규정을 가지고 강고한 유대민족주의를 확립하고 편협한 인종주의를 정당화한 바리새주의는 구약성경의 법문을 인간중심의 율법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메시야 대망도 유대나라 다윗왕국의 재건을 위한 것으로 곡해해 버렸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파하신 이유도 하나님을 오해하는 유대지도자들을 바로 잡으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복음을 올바로 설교하셨기에 상류사회에게 체포되어서 처형당하셨다.
하나님은 보통명사로서 ‘엘로힘’이다. 여기에 정관사 ‘하’가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저절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어 있다. 무신론자에게 조차도 하나님은 있다. 저마다 자기의 하나님에게 이름을 붙여 불렀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에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신 후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여호와=야훼"라고 분명하게 밝혀주셨다(출3:14~15). 야훼는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히브리인들을 탈출시키신 하나님이시다(출20:2). 유대교는 야훼를 국가를 재건하여 줄 하나님으로 왜곡시켜서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재료로 삼았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을 섬기도록 율법의 뜻을 왜곡시켜 놓았다. 바울은 이 왜곡한 것을 율법(노모스)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이름 “야훼”를 왜곡한 곳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성호로 자신을 알려주셨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야훼”란 이름은 “예수”란 이름으로 새롭게 표현되어야 할 필연성이 있었다.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을 인간의 여망에 맞추어 인간의 종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이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이 있다는 말씀은 구약성서의 야훼에게로 돌아가라는 부름이다. 신약성서의 ‘오직 예수’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의 가장 적확한 현시이다. 좌익과 우익이 저마다 하나님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맞추어 변경하는 지금 ‘오직 예수!’의 신학이 더 절실하게 요청된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이 아닌 모든 것은 거짓되다. 좌익이나 우익이나 저들이 서로 대결하고 싸우는 한 ‘오직 예수’의 복음은 아니다.
삼일절을 맞아 대통령이 모든 종교가 화합하여 ‘기미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였다고 평하였다. 이 선언서를 다시 찾아 곰곰이 정독하였더니 거기에 성경의 뜻이 구구절절 베어 나와 있다. 우리네 33인 조상들은 일본제국의 군국주의자들에게 사랑과 화해, 상생과 평화, 생명살림의 길을 제안하였고 만방에 선포하였다. 이것을 대통령이 세종시 수정안에 갖다 붙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자기고집도, 무장투쟁도, 원수 살상의 의지도 없었다. 목회자의 길은 좌익도 우익도 아니다. 그렇다고 ‘중도(중용지도)’도 될 수 없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하늘에서 세상사를 내려다보는 초월의 길을 간다. 그 길은 당장 자기를 내려놓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미래에서부터 현재를 이끌어주는 사랑의 길이다. 대한민국을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게 밀어주는 힘이 곧 성령이다.
이영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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