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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늙음과 임종

하나님아들 2024. 9. 1. 21:16

제자의 늙음과 임종

 

1. 늙음과 그늘

우리가 늙어갈 때에 늙음의 그림자가 생깁니다. 그늘. 늙음의 그늘, 늙는다는 것이 왜 슬픈 일 입니까?

 

여섯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육체적 손실. 늙어가게 되면 육체적 손실이 생기지 않습니까? 피부가 변하게 되고 골도 흔들흔들하게 되고 근육도 쭈그러지고 위장, 신장, 동맥, 오관, 특별히 오관 중에서도 청각과 시각이 달라지지요. 희미해지고 드리지도 않고 하는 이 육체적 손실.

 

둘째, 사회적 손실. 육체적 손실과 함께 활동 반경이 좁아 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활동에 있어서 후패가 불가피하게 되지요. 늙게되면 사회적 지위도 잃어버리게 되고, 사회적 활동을 중지하게 되고, 따라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이 늙음의 이유들입니다.

 

셋째, 경제적 안전의 상실. 지극히 적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늙어지면 경제적 안전이 위협 당하게 됩니다. 돈이 없어집니다. 자손들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고 사회적 생활 지위 다 잃어버리게 되었으니까 이제 취미생활 여가를 위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게 되지요. 그것들이 나이 많은 분들에게 슬픔을 더욱 가져다줍니다.

 

넷째, 독립성의 상실. 독립심의 상실은 평생을 스스로 살아오다가 이제는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됩니다. 뭐 돈 때문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병들게 되면 어쩔 수가 없지 않습니까? 환자가 되면 육체적인 의존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청각과 시각이 나빠지게 되면 더욱 의존을 불가피하게 됩니다.

 

다섯째, 일의 보람과 의미의 상실.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중단하게 되고 일이 단절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일이 가져다준 보람과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정서적인 문제들이 생깁니다. 열등감, 소외감, 슬픔, 환경, 배우자의 죽음, 자학, 의심, 자기가 약해지니까 주의 사람들을 의심하게 됩니다. 고독, 고립, 분노, 저항, 회상, 늙으니까 회상하게 되지요.

 

 

2. 늙음의 시간을 의미있게 하는 영적인 요소들.

우리가 노인에게 어떠한 도움을 제공해야 할 것인가? 노인에게 제공해야 할 도움들 일곱 가지로 강조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노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일.

둘째, 이해하는 일,

셋째, 사랑을 표현하는 일,

넷째, 육체적 안전의 확신, 노인들에게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니까 누가 나를 돌볼 것인가? 육체적 안전을 확신시켜 드리는 일. 저희가 곁에 있지 않습니까? 이런 확신을 드리는 일.

다섯째, 생활의 도움이 필요하겠고,

여섯째, 자아성취를 확인해 드릴 것.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때가 있습니다. 아직도 하실 일이 있습니다. 하고 자꾸만 자아성취를 도와 드리는 일,

일곱째, 위해서 기도해 드리는 일

 

3. 임종의 문제와 준비

마지막으로 임종의 문제와 준비. 중요한 문제인데요.

 

첫 번째, 죽음의 불안

임종이 가까이 오면 누구나 죽음의 불안이 있습니다. 죽음의 불안이 인류의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경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불안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불안을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도피할 수도 없는 것이고 이 불안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암같은 회생할 수 없는 병같은 것을 걸리는 교인들을 볼 때마다 제가 느끼고 또 느끼는 것입니다만 서양의 크리스챤하고 한국의 크리스찬하고 대하는 태도가 달라요. 물론 사람마다 다 집착이 있습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왜 없어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서구의 훌륭한 크리스챤을 보면 그것이 강생할 수 없는 선언이라면 그 사실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준비를 해요. 죽을 준비를 주변의 환경에서부터 차곡차곡 해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면 더욱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주 앞에 충성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끝까지 마지막까지 살려고 발버둥쳐요.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시지 않는다 의심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있다가 끝에 가서 회개하면서 어렵게 돌아가시는 것을 제가 봅니다. 우리가 죽음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라면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할 것 같아요. 받아들이는 훈련. 쉬운 일은 아니지요. 폴.푸르니에라는 존경받는 크리스챤 의사가 자기 누이와 죽음 직전에 나눈 대화를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 누님이 훌륭한 크리스챤이지만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자기 동생에게 다 하기 때문에 “나 성도이지만 죽음이 두렵다”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죽음이 두렵다면 성도가 아니지요. 그러나 푸르니에는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나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나도 죽음이 두렵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생의 확신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를 같이 이야기하면서 그 마음이 안정되고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지막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손길이 임하는 것을 바라보도록 하는 아주 감동적인 고백이 나옵니다. 받아들여야지요.

 

두 번째. 죽음에 대한 대화.

교인들이 죽는다는 대화를 꺼낼 때. 나 어떻게 죽는다 하고 반응하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런 소리는 결코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게 제일 나뿐 소리입니다. 노인들이 죽는다는 소리를 말하면 아이 어머니 그렇게 약한 소리하지 마세요 아주 좋지 않은 대화입니다. 또 하나 좋지 않은 대화가 있습니다. “백살까지 사셔야지요.” 상상이지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에 대한 또 하나는 “아니예요. 꼭 회복될 것이에요.” 이런 말도 좋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노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났고 싶어서 그런 이야기를 할 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혹은 죽는다는 이야기는 안해도 이 집은 앞으로 네가 살아라. 또 내가 죽거든 이사를 해라. 하는 대화를 통해서 죽음에 대한 토로를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어머니 인생이 자꾸 짧아진다는 그런 기쁨을 느끼시는 가보죠” 그러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실 거예요. 혹은 그밖에 다른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없으신 가요? 그런 기회를 통해서 이야기하실 수 있지 않아요? 무척 외로우시죠? 요즘 심정이 어떤지요? 그럴 때 “왜 그런지 죽는 것이 두렵구나!” 하는 솔직한 이야기도 하시게 되고 또 나는 병원에서 보다 집에서 죽고 싶다. 어머니의 그런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진실한 마음을 죽음 후에 사후처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혹은 나는 어젯밤에 응급실에 실려가는 꿈을 꾸었단다. 그런 이야기도 하실 수 있지 않아요? 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혹시 그런 생각을 하시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꾸시게 된 것은 아닌가요? 그래서 자구 어머님과 대화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지요.

한번은 저희 할머님이 그런 소리를 하셔요. 할아버지가 와서 잡아가는 꿈을 꾸었다고, 그래서 보통 때는 제가 그냥 흘리려고 하다가 “요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시는가 보지요 할머니?” 하니 “그렇다”고 눈물이 핑 돌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셔요. 그러면서 처음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 죽으면 어디 묻을 거냐? 그래요. 그래서 제가 교회 묘지도 있고 또 제가 땅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하니까 그러지 말고 할아버지도 화장했으니까 화장하는 것이 어떠냐?“하고 물어요. 나는 할아버지가 화장되었기 때문에 할머니도 화장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하고 되물었어요. 사실 그렇다. 그럼 예수 믿는 사람들이 화장하면 어떻게 되느냐? 고 물으셔요. 그래서 물론 무덤을 쓰는 것이 정상이고, 부활을 믿기 때문에 그렇지만 할머니 소원이 그렇다면 화장을 해 드릴 수도 있어요. 주님이 다 아시기 때문에 정말 주님을 영접하신 것이 확실하시면 할머니는 부활할 수 있어요. 그래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그 때 할머님이 하셨어요. 만일 그 때 제가 할머니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셔요. 백살까지 사셔야지요. 그랬으면 절대로 그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못하십니다. 이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죽음에 대한 대화 잘 기억해 두시고

 

세 번째, 임종의 장소.

어디에서 죽을 것인가? 어떤 분들은 병원에서 죽지 않고 집에서 돌아가시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들집이냐? 자기 집이냐? 집이 다르면 그런 문제도 미리 해결해 두어야 합니다.

 

네 번째, 장례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순서도 어디에서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것이 필요합니다.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죽을 것이 확실하고 기정 사실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부딪쳐야 하시지 않겠습니까?

 

다섯 번째 묘지문제, 묘지는 어디에 둘 것인가?

 

여섯 번째, 유언문제.

신앙적인 유언. 자손들에게 신앙적으로 부탁하고 싶으신 말씀 재산의 유언. 또 그 재산이 아니더라도 소중히 여기는 어떤 것들. 책 같은 것. 예를 들면 저의 경우라면 이 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밖에 다른 것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을 미리 유언에 다 기록해 남겨 둘 것.

 

일곱 번째, 죽음의 시간.

마지막으로 죽음의 시간입니다. 죽음 이전에 죽음을 예견하면서 모든 준비를 하는 것은 중요하지요. 저는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암이라는 것이 죽음을 예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또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 되지요. 또 돌아가신 분들이 주기 전에 한 5분 10분 정도 정신이 맑아지는 시간이 있다고 그러지요. 그럴 때 나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런 생각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의 모든 죽음은 다 영광스러운 것이지요. 우리가 성도가 불행한 비극적인 죽음을 죽었다고 해서 비웃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벨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순교자 아벨. 의인 아벨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기 형한테 맞아 죽은 것인데 그 뭐 영광스러운 죽음이 아니지요. 비극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그러나 모든 죽음은 영광스럽습니다. 성도의 모든 죽음은 귀한 것입니다. 결국 죽음이 시간으로부터 영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교량이라면 그리스도인의 모든 죽음은 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는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보십니다. 제가 마음속으로 깊이 터치가 되었던 한 사람의 죽음이 있습니다. 이 죽음은 고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참 감동적입니다. 유니온 신학교에 세미나리 학장이었던 헨리 벤 듀센이라는 분의 마지막 죽음의 장면입니다. 위대한 신학자였고 설교자 였고 세계적인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이 분의 죽음은 죽은 후에 많은 신학적인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소개를 합니다. 그 분이 72세 였을 때 부인은 75세로 부인이 나이가 더 많았어요. 그는 온 몸이 마비되기 시작했어요. 또 말을 못하게 되었어요. 자기의 부인은 두 번의 수술을 받고 관절염으로 심한 통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생하시다가 벤 듀센 박사가 77세가 되고 그리고 부인이 80세가 되었을 때에 1975년 겨울에 이 두 분은 죽음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남긴 편지 기록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아직 정신 상태가 건강할 때 내가 책임있게 삶을 청산한다는 것을 누가 나에게 시비하겠는가? 우리는 급속도로 연약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해서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이 양로원에서 죽기를 원하는가? 삶의 아름다움과 의미와 능력이 다 사라진 후에도 삶을 굳이 계속해야 될 의무가 있다는 말인가? 이것을 나는 다시 고민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 끝에 대답은 그럴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듬해 3월에 그들은 자살함으로서 그들의 생활을 마쳤습니다. 그것이 그 주변에 있는 교수들에게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그 주변에 있는 교수님들에게 많은 논쟁을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분의 죽음이 남긴 사건을 통해서 중요한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책임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정신입니다. 자기의 삶을 끝가지 책임있게 살고 싶어했다는 점입니다. 죽음이 기정 사실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앞에 두고 나머지 애 생애 마지막 순간들을 어떻게 보내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위해서 나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이 믿음의 사람들이 마지막 최후의 죽음을 죽었을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죽었다. 그러나 이 선언은 한 가지 전제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는 믿음으로 결코 죽을 수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날마다 살고 평생을 산 사람만이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죽을 수가 있습니다. 가장 감동적인 죽음은 야곱의 죽음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인간적인 간사함을 통해서 꾀를 부리며 살았습니까? 그런데 야곱의 마지막 죽음은 참 감동적이에요.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죽을 힘으로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죽었다. 그의 마지막 죽음은 예배로 끝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존귀와 감사를 통해서 마지막 생애를 드리고 있는 이 감동적인 아름다운 장면을 성경에서 봅니다.

자연사를 통해서 죽든 혹은 돌발적인 사고를 통해서 죽든 나는 죽음을 어떻게 죽어야 하는 것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번은 자기의 생애를 통해서 정직하고 가장 중대하게 물어야할 질문이 이것입니다. 아벨의 죽음은 그런 의미에서 돌발적인 사고입니다. 므두셀라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입니다. 게바는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가장 존귀하게 받아 주셨습니다.

1956년 1월에 엘콰도르 쟝글에서 일어난 사건이 세계 그리스도 인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습니다. 소위 미국의 아이비리그 출신의 지성인 5명의 학생들이 주님의 복음 사업에 헌신하고 엘콰도르의 쟝글에 들어갔습니다. 오카족이라는 민족의 선교를 위해서 쟝글로 들어갔을 때 그 쟝글에 최초의 부락을 발견하고 복음을 전하려고 접근하고 있었을 때 활을 가진 인디안들이 등장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많은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 옆구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자나 맹수들 밀림의 짐승들에게 지키기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권총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을 들고 나타나 있어요. 그들이 많은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어떤 한 사람도 권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인디안들의 창에 맞아서 죽었습니다. 목숨을 버렸습니다. 생각했겠지요. 왜 우리가 여기에 왔는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는 구원받았고 천국에 대한 그 소망이 확실하다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저 사람들에게 제 2의 기회를 주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오카의 그들에 의해서 젊은 그들의 피를 뿌리고 엘콰도르 강가에 젊은 그들의 목숨을 파묻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미에서 칠레를 제외하고 남미에 복음이 들어가서 가장 역사하고 있는 나라가 엘콰도르입니다. 다섯 명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번 세미나를 끝나면서 다시 한 번 이런 생각을 하십시다.

나는 어떻게 주님 안에서 이 주님을 바라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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