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통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래 본성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우리는 어둠인데, 어찌 빛과 어둠이 교통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생명이시요 우리는 죽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우리는 악을 품고 있는 자인데 어찌 이 둘의 화합이 가능하겠는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으며(엡 2:12), "자기 무지 속에 갇혀 마음을 굳게 한 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엡 4:18).
지금 이 둘은 뜻이 같지 않으므로 동행할 수 없다(암 3:3).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리 벌어져 있기 때문에 둘 사이에 교제나 교통은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처음 관심을 잃어버렸고, 우리에게는 회복의 가능성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우리가 스스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제거하였듯이, 하나님은 그에게 접근할 그 어떤 길도 계사하여 주지 않으셨고,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죄인은 평강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어떤 일도, 주께서 계시하신 그 어떤 속성도 그러한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그 어떤 작은 빛도 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담대함을 얻고 당당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엡 3:12). 이 담대함과 당당히 나아감은 구약의 성도들에게 낯선 것이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하심과 나타나심에 의해 하나님과 멀리 떨어졌던 간격이 사라졌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과거의 방법을 완전하게 폐하시고 “휘장 곧 그의 육체"(히 10:20)을 통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따로 마련해 주셨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엡 2:18).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 2:13-14). 이 새로운 기초와 토대 위에 서 있는 새롭고 산 길을 따라 죄인들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서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죄인들이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 것은 놀라운 경륜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일반적으로 언급해 보자. 교통은 둘 사이에 맺은 연합 관계에 근거하여 각자의 좋은 것을 기쁘게 나누는 상호 소통이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가 그러했다. 둘은 사랑 안에서 긴밀히 소통했다(삼상 20:17). 사랑의 연합이 둘 관계 속에 있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진정으로 모든 문제를 공유하였다. 사랑은 영적인 것들 안에서 더욱 드러난다. 이러한 교통을 누리는 자들은 그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로 인하여 가장 뛰어난 연합을 지닌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연합은 지극히 소중하고 뛰어나다.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통은 하나님의 자신 안에서의 소통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과 또한 우리가 그분에게 돌아가는 것을 포함하는데, 이는 주께서 요구하시고 받아들이시는 것으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연합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이 교통은 두 가지 면이 있다.
(1) 완벽과 완성: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점과 모든 부분에서 주님을 우리의 최상의 목표로 삼고 그분을 의탁하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모습 그대로 뵐 때의 즐거움이 그러하다.
(2) 시초와 미완성:
우리가 은혜로 받은 완전한 것의 첫 열매 및 첫 부분이 그러하다. 본 글은 후자만 다룰 것이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지극히 거룩하고 영적인 방식을 따라 주고받는 이 상호 소통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예수의 보혈 안에서 확증된 평화의 언약을 근거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반드시 하나님과의 교통에 힘써야 하며, 또한 우리 주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 드려야 한다. 우리 주께서는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우리를 대적의 자리에서 교통과 사귐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셨고,
따라서 말씀을 기록하신 주님과 주의 자비의 말씀을 읽는 자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맛보게 되면서 더욱 주의 구원의 충만함을 사모하게 되고 영광 안에 그분을 더욱 영원히 즐거워하게 된다.
성도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구별된 교통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성부와 구별된 사귐을 맺고, 성자와 구별된 사귐을 맺으며, 성령과 구별된 사귐을 맺는 것이다. 성도들이 각 위격과의 구별된 사귐을 가질 때 각 위격으로부터 특별한 유익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먼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사도는 우리에게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시라"(요일 5:7, 흠정역)는 말씀을 전해준다. 하늘에 계시는 세 위격은 우리에게 증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세 위격이 우리에게 무엇을 증언하실까?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과 그분의 보혈 안에서 신자들의 구원을 증언하시고, 그리고 사도가 그곳에서 다루고 있는 칭의와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피와 물에 관하여 증언하신다. 자, 그들이 그 증언을 어떻게 하실까? 세 위격으로써 각각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 증언하실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주께서 증언하시는 그대로 받아야 한다. 자, 각 위격은 그 증언을 따로 구별하여 하신다. 성부께서 증언하시고, 성자께서 증언하시며, 성령께서 증언하신다. 즉, 그들은 세분의 구별된 증인들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여러 증언들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과 다양하게 교통하게 된다. 이렇게 이러한 증언을 주고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있어서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다.
사도는 신자들에게 분배되는 은사와 은혜를 언급할 때 그 원천이 각 위격과의 구별된 교통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6),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12:11). 이 말씀들은 성령을 언급하고 있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의 말씀은 주 예수님을 언급하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6)의 말씀은 심지어 성부를 언급하고 있다(엡 4:6). 이처럼 은혜와 은사는 각 위격과의 개별 관계에서 부여되고 받아들여진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은혜 및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또한 동일하게 구별된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하나님께 우리가 나아가 (하나님과 우리가 교통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 성취되는데 있어서 세 위격이 구별되어 관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때로 참으로 아버지와 아들만 언급되는 표현도 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여기서 “~와”는 구별하면서도 합치는 접사(접사(接辭)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의 말씀은 그 교통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가 그 영혼과 함께 거하는 것을 뜻한다.
때때로 아들만 언급되는데, 예를 들면,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9),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이다. 때때로 성령만 언급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성도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각 위격과 구별된 교통을 가지는 것은 성경 안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도들의 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하나님과의 교통을 향유하는 방법과 수단은 영적이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정식 예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그 안에서 은혜를 받아 그 영혼이 은혜롭게 표출되는 것이다. 즉, 믿음과 사랑과 신뢰와 기쁨 등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의해 표출되고 그 안에서 성도들은 주와 교통하게 된다. 이제 이것들은 하나님께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어떤 수단이나 방법에 얽매이지 않은 채 외적으로 표출된다.
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에 따른 엄숙한 기도나 찬송을 통해서 흘러나온다. 성경이 이 모든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구별하여 연결시키는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필자는 특별한 경우들을 좀 더 언급하겠다.
1. 하나님과의 교통은 성부와 나누는 교통이다: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과 순종 등을 성부께 특별히 구별하여 드린다. 성부는 그들을 향하여 특별하게 활동하는 식으로 특별하게 드러나신다. 그러면 성도들이 이끌림을 받아 반응하게 된다. 성부께서는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요일 5:9). 이를 증언하실 때 아버지는 신앙의 대상이 되신다. 그가 증거하실 때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해 증거하실 때) 아버지는 그 증거 안에서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다음 구절이 확증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요일 5:10).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은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고, 그것은 아버지의 증언을 신용으로 하여 아버지의 사랑의 모든 목표들이 이루어지도록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당장 아버지를 향해 믿음이 나타난다. 따라서 그 다음 말씀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 즉, 아들에 대해 증언하신 아버지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 된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버지를 믿으라는 것이며, 이에 “또한 나를 믿으라”(요 14:1)고 덧붙이신다. 즉,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최고 진리자”(the prima Veritas)로서 그의 권위 위에, 또한 그 권위로부터 모든 신성한 믿음이 궁극적으로 굳게 서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은 각 위격이 특별하게 표현되는 식으로 위격적으로 고려된 것이 아니라 신성 전체를 포함하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고려되고 있다.
이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증언과 권위가 있고, 우리의 믿음은 뚜렷하게 아버지께 고정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자께서 “또한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덧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성부와의 구별된 교통은 또한 사랑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의 말씀에서 언급된 사랑은 성부에게서 우리에게 오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성부를 향해서 지녀야 할 사랑이다. 성부는 여기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놓여 우리의 애정을 앗아가는 세상과 대비되고 있다. 즉, "아버지의 사랑"은 성부를 향해서 드러내야 할 성도들의 사랑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사랑을 야기하는 작용인(efficient cause)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대상과 객체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는 자기의 ‘영광’이라고 부른다(말 1:6).
좀 더 이 주제를 확장해보자. 이러한 은혜들은 기도와 찬양, 그리고 정식 예배를 통해 특별히 아버지에게 드려진다.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벧전 1:17)의 말씀과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4-15)의 말씀은 아버지를 향해 드려진 것을 뜻한다. 특히 무릎 꿇음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로서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보편적인 자발적 순종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방법이기도 하다. 주님은 "내게"라고 명령하셨고,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사 45:23)고 말씀하신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24-25절에서 주님은 그들이 주를 공의와 힘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선언하신다.
그러하다! 때때로 예배는 온 만물이 질서 정연하게(Orderly)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사도는 예배를 훨씬 더 제약된 의미로 받아들이고 기도로 표현하면서 기도할 때의 가장 분명한 신체적(Bodily)인 무릎 꿇는 자세를 기도로 비유하고 있다. 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무슨 목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하는 것인지 그에 대해 좀 더 큰 의미를 알려준다(엡 3:16-17).
예배의 의무에 있어서 은혜의 영이신 성령의 사역은 모든 신성함과 모든 선함의 원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에게 뚜렷하게 향한다. 사도 바울은 또 다른 곳에서 그의 기도를 드릴 때에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표현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구별하여’ 표현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살전 3:11). 그 앞 부분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송축할 때 성부와 성자를 구분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엡 1:3-4). 신령한 예배에 대한 여러 특별한 구절들이 대단히 많이 있지만, 다 나열할 수 없다. 그 내용들은 뚜렷하게 아버지의 위격을 향해 예배가 드려지는 것을 보여준다.
2. 하나님과의 교통은 또한 성자와 관련된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구별된 나에게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너희는 하나님(성부)을 믿으라"의 말씀은 초자연적인 신성한 믿음이 성부에게 향하는 것을 언급한다. 그러나 "또 나를 믿으라"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서 그가 세상의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내용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를 무시하고 믿지 않던 바리새인들에게 끔찍한 경고가 내려졌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이 말씀에서 믿음은 아들만을 소유하는 의미에서 아들을 즉각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그에 대해 증언하신 대로 그리스도가 아들인 것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그를 믿는 믿음에 있어서 또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요일 5:13; 참조, 요9:36))이다. 그렇다. 그 믿음의 대상으로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뚜렷하게 구별하며 신뢰하며 의뢰한다. 특히 믿음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빈번하게 강조된다. 하나님, 곧 아버지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 곧 아들을 믿는 자는 “멸망치 않는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 아들이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 3:18).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요 3:36).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요 6:29; 참조, 요 6:40; 요일 5:10).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3)는 말씀이 놓여 있다.
사랑에 대해서는 필자는 단지 사도 바울의 엄숙한 축도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 이는 결코 부패하지 않는 신성한 사랑으로 예배의 자세로 사랑하는 사랑으로서 성자에게 드려지고 있다.
좀 더 이 주제를 확장해보자. 온갖 종류의 순종과 규정된 예배에서 작용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특히 성도로부터 마땅히 나와서 특별히 아들에게 향하는데 엄숙한 송영에서 풍성하게 드러난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5-6).
다음은 더 큰 영광을 성자께 드린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5:8).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 아버지와 아들(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은 함께 제시되고 있지만, 두 분이 각각 모든 거룩한 예배 및 존귀를 영원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한 존재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죽어가던 스데반은 그의 믿음과 소망을 특별히 주 예수께 고정시킨 가운데 엄숙한 기도를 드린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60). 이는 또한 스데반이 인자이신 예수께서 죄 사함의 권세를 지닌 것을 알고 있었음을 말한다. 이처럼 사도는 주 예수를 예배하는 것을 성도의 특징으로 삼는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성도들을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고전 1:2)로 말한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이신 우리의 중보자께서 중보자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마땅한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다.
3. 하나님과의 교통은 또한 은혜의 성령과 관련된다.
불신의 큰 죄는 결국 성령을 반대하고 그에게 저항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당신은 성령의 사랑에 대해 구별되어 말하는 내용을 안다(롬 15:30). 사도는 또한 엄수한 축도에서 성령께 직접 간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이러한 축도는 원래 간구이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그분의 이름이 세례를 시행할 때 지정되기 때문에 모든 정규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마 28:19).
이제 지금까지 다룬 것들을 요약하자. 우리의 영혼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구별되게 나아감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은혜를 전혀 얻을 수 없고, 하나님께 신령한 예배를 드릴 수 없으며, 의무와 순종을 행할 수도 없다. 이제 이러한 방법이나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
저자: 존 오웬 (1616-1683)/번역: 최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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