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주께 청하였던 한가지 일! (시 27:1-4)

하나님아들 2024. 6. 3. 23:42

지용수목사/주께 청하였던 한가지 일! (시 27:1-4)

 

지혜로운 학생, 머리가 뛰어난 학생은 선생님의 취향과 마음을 잘 읽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 ‘선생님이 강조하시는 것을 보니 이것은 시험에 나오겠구나.’하고 노트에 체크를 합니다. 그리고 시험을 칠 때는 ‘이 선생님은 논리적인 분이니 논문식으로 잘 써야지. 이 선생님은 간단 명료한 것을 좋아하시니 짧게 써야지’하고 시험 답안을 잘 씁니다. 그러나 둔한 학생은 선생님의 마음도 모르고 시험 문제에 대한 감도 없습니다. 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눈이 어떻게 되니?”하고 물으니, “저는 눈 안 파는데요.”라고 대답합니다. 시력이 얼마냐고 묻는 것인데 눈을 팔지 않느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둔한 학생은 선생님의 마음을 읽을 수 없어도 지혜로운 학생은 선생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 지헤로운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남편이 싫어하는 말이나 일을 하지 않고 남편이 기뻐하는 일만 하고 남편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러니 남편의 사랑을 받습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 생활을 특별히 지혜롭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천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아빠의 흰머리를 보았습니다.
“아빠, 왜 흰머리가 생겨?”
“야, 임마! 네 놈이 아빠 속을 썩여서 그런 거야.”
“그래? 휴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야?”
“그래도 아빠의 흰머리는 몇 개 안 되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 머리는 온통 하얗잖아.”
아버지가 당했습니다.
지혜로운 교인은 하나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것만 합니다. 할렐루야!
록펠러의 어머니는 신앙의 천재였습니다. 비록 가난하게 일생을 사셨지만, 영적 천재이어서 ‘하나님께서 이 런 것을 좋아하시는구나.’하고 깨닫고 그 깨달음 열 가지를 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네 오른쪽 호주머니는 십일조 호주머니가 되게 하라. 주일은 반드시 본 교회에서 지켜라. 어떤 일로도 원수 맺지 말아라. 반드시 아침에 하루 일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어 부탁해라. 하루 일을 마치거든 소상히 하나님께 기도로 보고 드려라. 신문을 읽기 전에 성경부터 읽어라. 선한 일을 할 기회가 있을 때 적게 하지 말고 크게 하라. 예배 시간에는 맨 앞자리에 앉아라.’
우리도 이렇게 하면 다 복을 누릴 줄 믿습니다.
다윗도 신앙의 천재입니다. 어릴 때 양을 치면서도 껑충껑충 뛰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아요.”하고 늘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참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러니 하나님께서 도 다윗을 사랑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짤막한 네 절에도 찬송과 기도가 나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서 다윗이 신앙의 천재가 되었지만, 오늘 본문을 준비하고 묵상하면서 느낀 것은 제가 하나님이라도 다윗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9편 1절, 2절에서도 이렇게 찬양합니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우리는 대통령이 오시면 대통령에 걸맞게 예우를 해드려야 되고 시장님이 오시면 시장님에게 걸맞게 예우를 해드려야 됩니다. 그 손님에 따라 걸맞는 예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만왕의 왕 하나님께 맞는 영광을 돌려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꼭 맞는 영광을 돌립니다.

먼저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창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 3절에 보면, 빛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할렐루야!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빛이심을 다윗은 알기 때문에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라.”라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다윗의 앞길을 환히 비춰 주시는 빛이었습니다.
빛이 얼마나 중한지, 만일 지금 교회의 등을 다 끄게 되면 여러분은 저를 보실 수가 없고 저는 여러분을 볼 수가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삼손처럼 됩니다. 삼손이 들릴라와 연애에 깊이 빠졌다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잊어버려 두 눈이 뽑힙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죄를 계속 지으면 우리의 영안이 뽑힙니다. 삼손 그 대 장군도 눈이 뽑히니 앞이 캄캄해져 걸음도 못 걷고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장님과 똑같습니다.
라반은 7년간 라헬을 위해 일한 야곱에게 달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그믐날에 맞추어 라헬과 결혼식을 시키고 신방에는 레아를 밀어 넣었습니다. 야곱은 레아가 라헬인 줄 알고 가슴을 떨며 밤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깨어보니 환한 아침 햇살을 받고 누워 자는 라헬이 아니고 레아입니다. 그 밤이 얼마나 후회스러웠겠습니까?
야곱이 어찌 그렇게 속았습니까? 빛이 없어서입니다. 빛이 없으면 속습니다. 빛이 없으면 넘어집니다. 자동차에 전조등 없으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자동차라도 빛이 없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빛이 없는 장님 같은 삶을 삽니다. 어떻게 살아야 될지,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왜 이렇게 바삐 사는지, 왜 돈을 벌고 공부를 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춰 주십니다. 다윗에게 빛 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도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8장 12절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빛이십니다. 말씀도 빛이십니다.
시편 119편 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빛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환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편의 길이고 아내의 길이고 자녀의 길이고 사람의 길이구나.’하고 알고 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세상에는 부모를 죽이기도 하고 아내나 남편에게 독약을 먹여 죽이고 보험금을 타먹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길을 모르고 살기 살기 때문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을 따라 빛의 복을 먹고 사는 여러분과 저는 늘 감사하며 찬송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빛의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가 빛을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고 하나님도 빛이십니다.
디엘 무디가 늦은 밤에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해 가로등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무디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형제여,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가 무디를 확 밀어 제치며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네 일이나 해. 내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 일이나 잘 해.”
“이게 내 일이요. 나는 무디요. 예수 믿고 전도하는 것이 내 직업이오.”
그러자 그가 무디를 시궁창에 밀어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3개월 후, 그가 무디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어찌 왔소?”
“당신이 내게 그리스도를 믿는냐고 물었던 그 말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내가 예수를 믿지 않고는 못 살 것 같아요.”
그래서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빛 가운데 거했다고 합니다.우리에게는 어두움에 처한 사람을 빛으로 인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빛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작은 빛이 되어서 그들을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다윗은 “나의 구원이시라.”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를 구해 주시고 나를 방패로 보호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동 시절, 이리나 사자의 공격을 많이 받았는데 그 때마다 물맷돌로 이리와 사자를 쳐 죽였습니다. 어린 그가 어떻게 물맷돌로 이리와 사자를 쳐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알고 보니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골리앗과 싸워 이긴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골리앗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고 보호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무엘하 21장에 보면, 다윗이 나이가 많이 들어도 마음은 젊어서 전쟁에 나갑니다. 블렛셋 군대와 싸우다가 이스비브놉이라는 유명한 명장하고 맞붙게 됩니다. 명장이었던 다윗이 처음에는 이스비브놉의 칼을 척척 막지만 나이가 많으니 결국 힘이 부쳐 죽을 지경에 이릅니다. 그때 마침 아비새 장군이 옆에서 보고 이스비브놉을 쳐서 다윗이 살았습니다. 그 때도 역시 하나님께서 아비새를 통해 자신을 살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의 일생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구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21장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하나 더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모든 신하들이 다윗에게 “왕이여, 이제는 몸소 전장에 나오시면 안 되겠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사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다윗처럼 한국의 등불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의 구원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셨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우리를 도우십니다.
제가 이십 몇 년 전 TV를 볼 때 ‘암행어사 박문수’라는 연속극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의롭고 바른 암행어사가 썩어가는 관리들을 찾아가 벌을 주니 그들이 자객을 사서 암행어사를 죽이려 합니다. 하루는 암행어사가 숲속을 지나가다 죽게 되었는데, 그때 대 검객이 천사처럼 나타나서 암행어사를 구하고 적을 죽입니다. 그런데 그 검객이 암행어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서 도와주었습니다. 정말 스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평소에도 우리의 보호자이시지만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는 더 가까이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많이 지났습니다. 사울 왕이 삼천 명 특공대를 풀어서 10년 넘도록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여러분, 몇 사람이 “너를 죽인다.”라고 해도 우리는 두렵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전화해서 “오늘밤에 내가 너를 죽이겠다.”라고 해도 잠자기가 어렵습니다. 한 30명이 서명해서 “우리 30명이 너를 죽일 거야.”라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을 죽이려고 삼천 명 특공대가, 아니 전 나라 군대가 10년 넘도록 따라 다녔으니 다윗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다윗은 금방 잡혀 죽을 것만 같아서  때로는 ‘내가 새라면 날아서 도망갈 건데…….’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건재했습니다. 다윗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 대군을 보내어 사울의 군대가 다윗을 추격하지 못하게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를 구원하셨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험한 처지에서도 구원해 주시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자는 동안에 스쳐가는 위험에서도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 1절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내 자녀들아, 두려워 하라. 무서워 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너와 함께 한다.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겠다. 너를 도와 주겠다.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3장 6절에도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너 그냥 안 둬. 너 그냥 안 둬.”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 가면서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에 들어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식이 다 떨어져 ‘이제 굶었구나.’ 싶어도 하나님께서는 또 먹여 주십니다. 날씨가 가물어져 ‘이제는 다 죽겠구나.’ 싶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단비를 내려주셔서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1853년 미국의 오블린이라는 지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극심한 가뭄이 들어 풀과 곡식이 다 타 죽고 짐승은 물론 심지어 사람들까지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찰스틴 목사님이 오셔서 집회를 하는데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죽게 되니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찰스틴 목사님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비를 주십시오. 비를 주십시오.”
그때 찰스틴 목사님에게 하나님의 감동이 왔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처음 사랑, 처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던 그 열정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요한계시록 2장 4절 말씀대로 “너희의 처음 사랑을 버렸구나.”하며  계속 책망하니, 사람들이 “하나님, 처음 사랑을 잃은 것을 용서하세요.”하며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그 지역이 다 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오래 전, 제가 보스턴에서 연합 집회를 인도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곳에 가뭄이 심하여 잔디가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어떤 부잣집에서는 잔디에 물을 주느라 물세를 3천불씩이나 냈답니다. 그래서 집회 때 우리가 통성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했더니 비가 쏟아져서 보스턴이 해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경제적인 위험이나 어떤 어려움에서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일생 동안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심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은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오? 군대가 일어나 내게 진을 쳐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해도 내가 무서워하지 않겠노라.”라고 합니다.
여러분, 몇 사람이 대적해도 힘이 드는데, 군대가 와도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다윗을 죽일려고 군대가 몇 번이나 왔습니다. 한 나라를 치려고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한 사람을 죽이려고 전쟁을 일으켜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의 능력이시니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의 능력’이시라는 말은  '내 생명이 내 생명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 속에 생명으로 들어와 계신다.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내 안에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쉽습니다. 대장간에서 쇳덩어리를 풀무에 발갛게 달구어 놓았을 때 그 쇠에 종이를 대면 종이가 확 타버립니다. 천을 대면 천이 확 타버립니다. 쇠에 닿인 종이나 천이 왜 탑니까? 그 쇠 안에 불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생명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가 있으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능력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20)라고 하셨습니다.
무섭고도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시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쑥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는 것이니다. 그러니 쇠 안에 불이 들어왔듯이 우리 영혼의 생명에 주의 성령이 들어와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쇠 안의 불은 쇠가 식으면 나갑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그러니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생명인 능력이시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살고 죽는 것은 적이나 병이나 원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렸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큼 이 땅에서 산다.’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런 배짱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조심하고 운동도 하고 살아야 하지만, 결국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잡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건강 검진을 받을 때도 의사 선생님이 조금 오랫동안 진찰하면 ‘혹시나’하고 덜덜 떱니다. 그러다 결과가 건강하게 나오면 “와!”하고 좋아합니다. 다들 이렇게 두려워하는데 사실은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간섭하는데, 하물며 우리의 생명이겠습니까?
요한복음 10장 28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않을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다윗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나님,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니 이 세상의 전쟁이나 천재 지변이나 병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오?”하는 담대함으로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실제로 의사선생님이 “당신은 ○○ 병이요, 곧 죽을 거요.”라고 해도 “아하, 의사선생님이 오진을 하셨구나. 나는 괜찮은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래 삽니다. 믿음의 배짱이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명의 능력이십니다.”라며 찬송하고, 이제 기도하면서 한 가지 소원을 구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냥 좋아서 못 견뎌 다윗을 끌어안아 뽀뽀 해줄 수밖에 없는 기도입니다. 부귀를 달라, 무엇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전에 거하여’라고 합니다. 기가 막히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퀴리 부인은 평소에 자기가 원하던 가죽옷을 남편이 생일 선물로 사주니 아주 기뻤지만 “여보, 이런 옷은 사주지 않아도 돼요. 나는 당신만 내게 있으면 그저 기쁘답니다. 당신의 존재가 내게 가장 큰 선물이에요.”라고 했답니다.
‘당신이 내게 가장 제일 귀한 존재입니다.’라는 이 말에 그 남편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좋아하겠다고, 그 전에서 하나님을 사모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해서 주의 전에 오래 거하고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했습니다. 다른 소원이 없었습니다. 아내가 귀하면 처가집 말뚝도 귀해 보인다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귀하시니 하나님의 집도 귀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평생 소원이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편 23편 1절에서 6절의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는도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나님, 저는 다른 소원이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소원은 하나님의 전에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 소원입니까?
또 시편 122편 1절에는 다윗의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주일 낮이나 밤이나 삼일에 교회에 올 때마다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시편 16편 3절에도 『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에게 있도다』라는 다윗의 고백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귀하니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도 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즐거움이 왕궁에, 왕의 자리에 있지 않고 교회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나중에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사모하고 사랑한 성전은 아름다운 성전이 아니라 천막, 휘장이었습니다. 사무엘하 7장에 보면 그가 나단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아무것도 아닌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내 하나님의 법궤는 휘장 가운데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야겠습니다.”
“왕이여, 좋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단 목사님에게 “나단, 아니야. 다윗은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린 군인이라 내 집을 지을 수가 없다. 그의 아들, 평화의 사람 솔로몬이 내 집을 짓는다. 그러나 내가 다윗의 마음은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함께 하며 너를 존귀케 해주겠다. 네 집이 영원히 내 앞에 있게 하고 네 집이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을 사랑하는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셨겠습니까? 
다윗은 자기가 성전을 짓지 못하게 된 것을 알자 아들이 짓도록 자기 보물과 모든 것을 다 쏟아 준비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아까워하지 않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을 사랑하셔서 얼마나 큰 복을 주셨는지, 역대상 29장 28절에 보면 『저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으매 그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함에 처하다가”
다윗은 부귀와 영화와 존귀를 다 누렸습니다.
찬송을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하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마음도 보십니다. 우리의 찬송을 들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뭐냐? 한 가지만 말해라.”라고 하실 때, 여러분 무어라 하겠습니까?
“우리 아들 대학 붙게 해주세요. 무엇 해주세요. 한 가지로는 안 돼요.”라고 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제 한 가지 기도 제목, 제 한 가지 소원은 하나님의 전에 거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며 있게 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귀한 것을 구한 그에게 그가 구하지 않은 만 가지 천 가지를 다 주셨습니다.
시편 37편 4절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4장 2절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저의 한 가지 소원은 교회 사랑입니다. 저의 한 가지 소원은 교회에서 사는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얼마나 귀한 소원입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찬송하고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려서 다윗처럼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며 나라의 등불, 이 세상의 등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