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요한목사님의 < 요한일서 >설교
17 온전한 상을 얻기 위하여
제목- 온전한 상을 얻기 위하여
본문- 요한이서 1: 7- 13
한 주간 동안 제6차 필리핀 선교여행을 호산나축구선교회와 더불어 은혜 가운데 다녀오게 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특별히 이를 위하여 기도와 선교용품으로 후원해 주신 호산나 서포터즈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20일에 폐막된 제85회 전국 동계체육대회에서는 MVP로 충남대표인 강민혁선수가 선정되었습니다. 한 개도 따기 어려운 금메달을 스키 부분에서 무려 4개나 목에 걸었습니다. 2위는 쇼트트랙에 2관왕을 차지한 김동성선수였는데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들은 인터뷰하면서 "다음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다"고 소망을 피력하였는데 모르긴 해도 아시안게임을 정복하고 나면 당연히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에서 금메달 따는 것이 목표가 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향하여 욕심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운동선수에게 있어서 더 높은 이상과 꿈은 오히려 모두에게 격려와 갈채를 받아 마땅한것일 뿐 아니라 함께 나누어야할 공동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요한은 상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헬라어로 "미스도스"라고 하는 이 상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어야 할 '봉사의 상급'이라는 의미가 강조되는 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이제 부르심에 응답한 모든 충성된 일꾼들에게 "미스도스"를 허락하시므로 주님 앞에 서는 날 부끄럽지 않은 성도의 기쁨을 예비하라는 말씀인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시는 는 구원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성도는 또한 하나님께로 부터 받아야 할 상급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충성된 봉사자에게 허락하시는 "미스도스"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만,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결단하긴 했지만 주님을 위하여 충성되이 살지못하고 오히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세상일은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학생이 대학 입학 시험을 보았는데 원하는 대학에 갈만한 점수가 나오지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원서를 내었습니다. 얼나 후 통지를 받았는데 예비후보 몇 번이라고 하는 결과였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학생은 그 대학에 가고 싶은 열망이 있어 기다리던 중 다행히 등록을 포기함으로써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예비후보에게 등록을 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비록 예비후보로 입학을 했지만 1학기부터 매학기마다 열심을 다해 공부를 하여 그는 수석을 차지하며 졸업을 하였습니다. 부끄러움이 변하여 자랑이 된 것입니다. 세상의 학문은 꼴찌로 들어갔어도 열심히 하면 1등을 만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상급없이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 제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지요. 다시 한번 지구에서 상급 있는 인생을 살고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마치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를 부러워했던 부자가 간청하여 자신의 5 형제만이라도 믿음으로 살도록 나사로에게 부탁하고자 했으나 , 오히려 그곳에는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맡기라는 충고만 듣게 된 누가복음 16: 19-31의 말씀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인생은 연습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을 주셨을 때, 우리에게 든든한 건강 주셨을 때, 우리에게 다영한 재능과 풍성한 물질을 허락하셨을 때 힘을 다하여 충성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스도스가 있어야지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봉사에 대한 상급이 있어야 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봉사에 대한 상급은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줄 수가 없는 일이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과거에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시죠? 라고 하면 종종 이런 대답을 듣곤 했었습니다. 우리 마누라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집사인데 천국갈 때 마누라 치맛자락 붙잡고 가면 안된겠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구원의 은혜와 봉사에 대한 상급은 아내가 헌신했다고 해서 나누어 지는 것도 아니고, 가족중에 누군가가 순교했다고 해서 덤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과 같이 각각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자신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선언합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을 향해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실제는 오늘날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실감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거짓교사들, 즉 적그리스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들은 우리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합니다. 성경대학, 무슨 신학교 무료로 오세요. 초등학교를 안 나와도 좋습니다. 무료로 오십시오. 학교 오기가 힘듭니까? 통신으로 좋습니다. 그런 식으로 어리석은 이들을 유혹하여 잘못된 사상과 이론을 주입시킵니다.
오늘 거짓교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7절은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여러 신학적 이론이 있지만, 당시 초대교회를 가장 어지럽혔던 적그리스도의 대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심은 인정하지만,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와 더불어서 요한이서에서도 이 부분은 계속적으로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미혹되지 않기를 요청하고 있는데, 10절과 11절에 보면 얼마나 강조를 하고 있는지 그 내용은 경고의 수준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은 자, 곧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에 오신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는 다른 교훈을 가진 자들이 너희들을 방문할 때 너희 집을 들이지도 말 것이며, 그들과 인사하며 교제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21세기에 가장 대표적인 영지주의자, 적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간간히 여러분 집을 방문하면 여러분들 중에는 그들을 문을 열어놓고 그들을 환대합니다. 음료수도 대접하고, 쇼파에도 앉게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목사님, 걱정 마세요. 우리는 분명합니다. 우리 신앙은 확실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스스로 꽤 멋있는 사람처럼 도취된 듯 말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요한사도는 지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집에 들이지도 말라. 인색해서 그런 것입니까?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여러분, 요한사도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처음 주님의 우뢰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지을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불의를 참지 못했던 그런 사도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주님 부활하신 이후에 복음 증거자로써 살아가면서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은 제일 먼저 사랑이 생각납니다. 그도 늘 복음을 증거하면서 복음의 내용이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목숨을 주신 것 같이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그를 위해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는 오직 사랑의 복음만 전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사도가 초대교회 성도를 향해서 말씀합니다. 적그리스도가 너희 집에 들이지도 말라. 인사도 하지 말라.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진리를 떠나서 공동체를 박차고 나간 사람들입니다. 공동체는 나갔지만, 서로 얼굴은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자기의 집을 방문합니다. 초대교회는 순회전도자, 순회 설교자들이 많았습니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가정 가정을 방문하면 주변의 성도들을 모아서 말씀을 듣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는 했었습니다. 거짓교사들이 적그리스도가 성도의 가정을 방문하면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 말을 듣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예를 들면 어느 권사님이 잘못된 교훈, 잘못된 신앙을 가져 교회를 더났지만 성도기리는 서로 알고 있는 사이입니다. 그가 우리집에 온다고 할 때 집에 들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지요.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지요. 당신과 당신의 공동체가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냉정하게 행동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현대 한국 교회 무엇이 문제입니까? 진리를 말하고, 복음 안에서 산다고 하면 뒤떨어진 사람처럼 이야기 합니다. 가슴 아픈 것은 신학교 안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감신에서 그런 일 때문에 일부 목회자들과 염려하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이야기하면 굉장히 앞서가는 그런 사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만, 기도생활을 강조하고 성령충만을 이야기하고 ,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 어처구니없게도 시대에 뒤떨어진 그런 사람으로 왕따를 당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가?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희 집에 방문을 하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너희가 그들과 인사하고 교제하는 것은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일거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교회의 방향을 흐리거나 신실한 성도의 길을 흐리는 일을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은 주를 위해서 목숨을 드리기까지 온전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지키고, 그 사랑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때때로 냉정하고 분명한 성도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편지를 통해서 요한일서를 보내고, 요한이서를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기를 원하노라.
그렇지요? 우리가 편지로 하는 것도 중요하고 요즘 같으면 전화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직접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전도사님들에게도 늘 권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화로 하지 마세요. 전화로 상대방의 안위를 묻는 것은 아주 불가피할 경우이지만, 어떤 경우라도 직장이라도 낮에 안 되면, 밤에라도 찾아가세요. 얼굴과 얼굴을 보면서 심방하세요.
그것 아니면 다 의미가 없습니다. 편지와 전화, 이런 부분들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한계가 분명한 사역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러므로 이제 내가 여러분들을 직접 만나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더 분명한 말씀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사역으로 떠오른 것이 상담사역입니다.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보면 들었던 것과 너무나도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만나도 여러 사람을,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어디에 가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도를 섬기고, 성도를 양육하는 일에도 이런 방법을 가져야합니다. 사도요한은 그들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성도들을 책망하고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바른 길로 가게 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성도로써 바른 길을 가는 기쁨을 확신시켜 주기를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 자녀들이 곧 성도들을 향한 사도요한의 간절한 말씀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온전한 상을 얻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상, 특별히 구원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 주신 은혜를 가지고 봉사의 상급이 있기 위해서 우리는 온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땅에 묻고서 그것을 잃을까봐 주님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땅에서 한 달란트를 꺼내서 주인에게 드렸지만 주인은 간수를 잘 하였노라고 칭찬하기 보다는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한 달란트마저 내가 빼앗아서 헌신적인 다른 사람에게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두 달란트, 혹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갑절을 남겼지만 주님의 칭찬은 똑같습니다.
여러분,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가끔씩 불평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느낍니다. 신문을 보면, 어떤 사람은 평생에 장관을 한 번만 해도, 판사 한 번만 해도, 평생 판사 집안이라고 영광을 누릴텐데, 어떤 분은 3번 4번씩 장관을 하는 분들이 있어요. 너무 불공평하지 않느냐고 그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겼던지, 두 달란트로 두 달란트를 남겼던지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의 내용은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 바라보면서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소중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맡은 자로서 충성을 다함으로 상급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너희는 삼가 우리의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성도들을 향한 주의 종의 권면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구원의 기쁨을 간직할 뿐 아니라 봉사의 삶을 통하여 미스더스, 주님 주시는 상급을 온전히 유지하고, 누릴 수 있는 충성된 청지기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6 진리안에서 행하는 기쁨
본문- 요한이서 1: 1- 6
제목-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
오늘 말씀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이라는 제목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불렀던 찬송도 우리가 주안에서의 기쁨을 고백한 찬송입니다만은 주님과 함께 신앙의 길을 가는 여러분들의 그 길이 언제나 평안하거나 형통하지는 않을지라도 내게 기쁨이 여전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확신 때문인줄로 믿습니다.
요한일서에 이은 요한이서는 내용과 배경이 요한일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중 한 장으로 되어있는 아주 짧지만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 담겨져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단 사상이나 부도덕한 생활을 경계하지않고 방종으로 이끌어가는 적그리스도의 미혹을 막기 위하여 이 서신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발신자가 장로요, 수신자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라" 그런데 발신자인 장로가 누구일까 하는 부분은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전통적인 해석은 사도요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해석을 지지합니다.
뿐만아니라 '장로'라는 명칭의 의미와 역할에 있어서는 지금 시대의 장로와는 의미와 범위가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같으면 목사와 장로의 사역과 권위를 통합한 대단히 폭넓은 의미에서의 직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편지를 받는 사람을 분명하게 지칭하면서 1절에서 3절까지 인사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인사말 속에는 전형적인 사도요한의 언어가 담겨져 있는데 이것은 그의 인격과 생활, 그리고 목회적 삶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들도 편지를 쓰실때면 나름대로의 틀, 어떤 형식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편지를 쓸때면 나름대로의 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경원집사님에게 제가 편지를 쓴다면 이렇게 시작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동역자 된 나경원집사님께..." 편지의 첫 인사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제입니다. 첫마디 문장만 보아도 마음이 푸근해져 기분이 상승하거나 혹은 다운될 수도 있음은 인사말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언어 속에는 그가 평소 잘 사용하는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 진리, 지식, 거함.... 이런 단어들은 전형적인 사도요한의 언어들입니다. 이런 언어들을 통해서 사도요한은 교회 일치에 대한 깊은 확신을 전달하려고 힘쓰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속성이나 인격 혹은 그 사람의 지식의 수준이나 신앙적인 관심까지도 잘 대변해 주기 때문입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다고합니다. ‘저 분은 오늘 아침에 싸우고 나왔구나...’ ‘저 분은 예배를 통하여 큰 은혜를 받고 싶은 기대와 감격 속에 나왔구나...’ ‘저 사람은 오늘 별로 오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체면상 눈도장 찍으러 나왔구나....’ 얼굴 속에 마음의 생각이 담겨져 있으니 얼나나 재미있습니까? 다 담겨져 있어요!
슬픔과 기쁨이 표현되고 기대와 실망이 표현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과 지루함도 표현이 됩니다. 더구나 얼굴 속에는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눈이 있어 더욱 분명히 그 사람의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 볼 수 있기에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 시간만 되면 성경을 읽습니다. 설교와 성경읽기, 이는 굉장히 가까운 일 같은데 사실은 천국과 지옥처럼 거리가 먼 상황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할 시간에 설교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책"에 눈길을 주는 행위는 마치 "당신은 떠들어라. 나는 관심없다"는 메세지와 다를바 없는 것입니다. 예배에서의 태도란 바로 내 마음을 하나님께 진솔히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말씀은 사모하는데 눈은 성경을 본다는 말은 억지일 뿐입니다.
우리의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마음의 상태, 신앙의 상태,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가름하기에 언어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척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사도요한의 언어를 보면, 그의 언어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되는 일을 위해서 그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지식을 이야기하고 예수 안에 거해야 함을 이야기 하는 줄로 믿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의 키워드는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6절 가운데서 "진리"라는 단어를 우리가 잘 붙들어야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이 성경말씀의 의도가 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주님은 바른 이해를 위하여 자주 비유를 들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적인 단어는 진리입니다. 2절과 4절에서 사도요한은 진리에 대한 그 의미를 잘 구별해 놓았습니다. 먼저 2절을 보면 진리의 2가지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할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진리가 바로 우리와 함께 할 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일지라도 그것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성령이 능력이요 권세라고 한들 그 성령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이란, 나의 배우자의 충만함이요, 교회 공동체의 충만함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충만함이 될 때 비로소 주님과 하나됨을 맛 볼 줄로 믿습니다.
진리는 또 다시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진리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혹은 환경이 달라짐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예를 들어서 73년도 대학입학시험의 국사문제에서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는 언제인가? 라는 문제가 나왔다면 ① 3만년전 ② 4만년전 ③ 5만년전 ④ 6만년전 이라는 문항중에 3만년전이라는 항을 선택해야 컴퓨터는 맞다고 응답을 합니다. 그것이 73년도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에 새로운 뉴스를 들었습니다. 지난 12일에 충청북도 진천면 송두리라고 하는 마을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중에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는데, 주먹도끼, 주먹대패와 같은 유물을 무려 80여점이나 발견을 했다고 문화재청에서 발표하면서, 출토지층을 조사한 결과 5만년 전 구석기 시대 유물이라며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의 연대를 새로 써야한다며 흥분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제까지 알고있던 우리나라의 구석기 시대의 연대가 수정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내년도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은 이번에 발표된 것을 근거로 해서 답을 써야 됩니다. 이는 학문이란 새로운 발견과 발명에 의해서 가치나 기준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빌라도에게 고소를 당해서 빌라도 법정에 서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직접 심문합니다. ‘니가 유대인의 왕이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빌라도가 묻습니다. ‘사람들이 니가 진리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진리란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입니다. 당시에 헬라철학을 그대로 인수한 로마제국, 로마제국에서 로마의 군사, 특히 로마의 장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최고의 학문을 겸비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진리를 모를 까닭이 없습니다. 주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철학적 관심 때문이 아니지요.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지금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학문적 관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지요.
지금 빌라도 머릿속에 진리라고 하는 개념은 지금 시대가 로마제국시대가 아니냐? 다시 말하면 로마제국처럼 힘을 가지고 지배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냐? 그런데 지금 네가 나한테 고소당해서 죄인의 몸으로 내게 와 있는 주제에 무슨 진리 타령이냐? 그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를 향해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얼마나 당당하신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대적인 진리는 세월이 변해도 우리의 환경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인 줄 믿습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는 과거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진리에 대한 확신은 이래야 합니다. 그 진리를 알 뿐만 아니라 이제 그 진리를 행한다 함을 들으니 내가 기쁘도다.
목회자의 기쁨은 이것입니다.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살 때,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살 때,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과 제도 속에서도 주의 자녀로써, 그리스도의 자녀로써 살려고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볼 때 기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6절에서는 진리에 대한 기쁨을 실천하고 있는 성도들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수신자인 택하심을 입은 부녀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정의를 하시면서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는 이 계명을 쫓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지요? 대답합니다.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결국 계명과 사랑이란 하나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일이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요,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은 예수의 계명 안에서 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행하는 것, 주님이 모델이 되고, 주님이 모범이 되어서 그 주님을 따라서 사는 것, 그것이 사랑이요, 그것이 사랑을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스바냐서는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기쁨을 이기지를 못하신다. 왜?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견디기 힘든 환경 속에서, 견디기 어려운 시련 속에서 주님의 말씀,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생명을 거는 이들을 보면서 주님은 그 기쁨을 이기지 못 하신다. 찬송합니다. 고백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사랑하는 성도의 삶이 언제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 안에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의 기쁨 되기 위해서 어떤 삶의 환경과 조건이 여러분들에게 다가와도 주님을 향한 그 삶,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여러분의 삶의 목표와 그 의지가 꺾이지 아니하고, 진리 안에서의 기쁨의 삶이 늘 여러분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증거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세상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진리이신 주님이 변할 수 없듯이 우리 역시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 안에서 행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위하여 오늘도 주님의 자녀로써, 주님의 계명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행하기를 원합니다. 실천적인 삶, 구체적으로 행하는 평안의 성도들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5 우리로 알게하신 그리스도
본문- 요한일서 5: 18- 21
제목- 우리로 알게 하신 그리스도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앎’입니다. 이 '안다'라고 하는 말은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부가 몇 십년을 함께 살면서도 종종 하는 이야기가 ‘저사람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라든지, 오래된 친구인데도 어느 날 엉뚱한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 친구 알다가도 모르겠어...’ 라고 황당해 할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사이가 좀 떨어져 있는 관계라면 안다는 의미는 거의 피상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치루었던 지방 과정 및 자격심사에서 진급중에 있는 장로님들이 마지막날 자격심사를 받기위해 한 사람씩 들어오면서 자기 소개를 하였는데,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부천남지방 평안의구역 평안의교회 장로 아무개입니다" 라는 형식을 갖추어서 인사를 해야 하는데, 자격심사위원 목사님들 앞에 서서 하려니까 떨려서 중간에 빼먹기도 하고, 갑자기 자기교회 이름도 생각이 안나 절절메는 모습을 보면서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론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됨을 보았습니다.
‘교회 다니십니까?’ 라고 물으면 ‘예, 교회 다닙니다’ 라고 대답하지요. 그러면 그 다음 물어보는 수순은 "어느 교회 다니십니까?"이지요. ‘평안의교회 다닙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간단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이름을 몰라서 뭐더라? 하면서 머뭇거린다면 솔직히 그 다음은 볼 것도 없는 것이지요. 소속이 분명치 않다면 내용은 더욱 분명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9절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라는 말씀에서 느끼듯이, 우리가 주님을 아는 첫 번째 의미는 소속에 대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금요일을 중심으로 모이는 셀 그룹을 속회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속할 속자, 모일 회자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속회라고 모여서 고스톱 치고, 2부순서에 맥주 마시면 그것은 속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들의 모임에는 분명한 특징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말씀과 찬양이 있고, 거기에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구제헌금의 손길이 있고, 거기에는 성도와 성도가 예수 안에서 갖는 사귐의 시간들이 있는 거예요.
여러분, 누가 여러분들을 보고 지방회나 사경회와 같은 모임에 갔다가 어느 교회냐고 물어본다면 '평안의 교회'라고 하는 말을 하기가 부끄럽습니까? 아니면 자랑스럽습니까? 자랑스럽지요? 저도 젊은 시절부터 평안의 교회 같은 좋은교회를 다녔다면 얼마나 좋을 뻔 했겠습니까? 할렐루야!
60년대에 아버님께서 약대교회에 처음 부임하신 후 지방 사경회를 가면 꼭 어른들이 물어봅니다. ‘넌 어느 교회에서 왔니?’ 그러면 저는 대답을 안 했습니다. 또 물어봅니다. ‘너 어느 교회에서 왔냐니까?’ ‘부천에서 왔어요...’ 그 때는 부평과 부천의 7개지방이 인천동지방이라는 이름으로 한 지방일 때였습니다.
교회 이름을 대기가 왜 싫었느냐 하면, 소문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중부연회 안에서 잘 싸우는 교회, 목회하기 힘든 교회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지요. 30명 밖에 안 되는 교회가 절반으로 나뉘어 가지고, 한 패는 11시에 드리고 또 한 패는 2시에 드려요. 서로 얼굴도 안 보겠다는 거예요. 교세도 지방 교회 중에 꼴찌에서 첫째나 잘 해야 둘째이었으니 어린 저에게도 창피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에 교회 이름을 알려주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헌데 ‘부천에서 왔어요’ 하면 그냥 넘어가 주면 좋은데, ‘야, 부천이 다 너희 교회냐?’ 그러는 거예요. 결국은 약대교회라고 대답 하지만 참으로 민망하기 짝이 없었지요. ‘어, 약-대-교-회 !’ 그 말 속에는 ‘싸움질 잘 하는 교회,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고 있구나?’ 하는 비아냥이 가득 담겨있었기에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어린 마음에도 큰 상처를 입곤 했었습니다.
아버님께서 그런 곳에 부임하셔서 우선 둘로 나뉘어진 교회를 화해시키는데 거의 1년 이상 걸렸어요. 회개의 삶을 이루고 난뒤 교회 공동체가 일치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다시 전도의 문이 열려 새로운 가족들이 동참하기 시작한 줄로 믿습니다. 70년대에는 '약대교회' 하면 선교 많이 하는 교회, 부흥 많이 하는 교회, 특별히 청년들이 많은 교회로 굉장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누가 좀 물어보지 않나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어린 아이도 말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창피해서 말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을 만큼 소속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원하건데, 평안의 모든 성도들도 평생토록 이 교회가 건강한 교회, 모든 목회자가 오고 싶어하는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리며 주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교회로 지속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교회는 연합된 지체이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손가락 끝이 썩기 시작하거나, 곪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강해야 합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은혜로 충만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속해 있다면, 건강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자부심도 생기고, 다른 사람도 주께로 인도하는 일에도 담대함으로 새 힘을 얻을 줄로 믿습니다.
한 100년 전에 러시아가 좀 어렵다는 이유로 알래스카를 미국에 팔았어요. 720만불을 받고 팔았는데, 그 때는 그거 받으면서도 속으로 너무너무 좋아했어요. 저 미국 바보 같은 녀석들, 저 얼은 땅, 저 쓸모 없는 땅을 720만불이나 주고 사다니, 코만 컸지 저 멍청한 것들이야!’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러시아가 가지고 있을 때의 그 땅은 쓸모없는 땅이었어요.
그런데 그 알래스카가 미국땅이 되고, 미국의 소속이 되고 나서 알고 보니까 그 땅은 석유가 가득합니다. 알고 보니까 그 땅은 군사적인 요충지였어요. 환경적으로도 환경의 보고입니다. 지금은 그들이 아무리 후회하지만, 이제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어디에 소속되어 불행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어요.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로 참 된 자, 곧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하시는 것, 20절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좀 알아도 바로 알고, 깊이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껍데기만 알고서 아는 척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요한사도는 특별히 어느 부분을 알기를 원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당시에 적그리스도라고 표현되었던 대표적인 영지주의자들, 그들은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노스틱의 영향을 받아서 가현설을 주장했어요. 그것은 보이지만, 그것은 영적인 존재이지, 육체로 오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초대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그리고 사도요한의 많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순수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그 신앙으로 살아가던 그 초대교회 공동체 속에 이런 적그리스도들이, 거짓교사들이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교인들 중에 일부는 잘 못된 길로 따라가게 되고, 결국은 그 안에서 잘못된 그룹이 형성될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아예 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집단을 만들었어요.
그들은 윤리적으로 물질을 기피하고,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부부간에 결혼도 아이만 하나 낳으면 그걸로 그만이예요.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가정생활도 없습니다. 계명도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명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 영적인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은 세상적인 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한동안 우리나라에도 권신찬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구원파가 생기고, 무교회주의가 생기고 그러면서 그들은 세상적인 법을 어기고 살았어요. 그러면서도 부끄러워 하거나 하나님 앞에 죄스러워 하는 마음이 아니예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영적인 자유함을 얻은 사람은 육적인 생활은 상관이 없다는 거지요. 그런 논리를 가지고 그들은 성도들을 어지럽히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사도요한은 그들에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 그리고 그런 적그리스도들이 성도들을 많이 해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그는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신 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심에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보호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언제나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곧 20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한 것도 중요하고,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걸음 나아가서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치의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앎의 단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잣집에 불이 났습니다. 소동이 일었습니다.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데, 다행히도 주인은 외출했다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소동이 이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집이 불타고 있었어요. 이 여주인은 용기를 내서 결심합니다. 불이 붙은 집에 뛰어들어갑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저가 무슨 특별한 결심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흙더미 속에서 무언가를 안고 나옵니다. 보니까 보석함입니다. 여주인은 안도의 숨을 쉬면서 이 보석함만 있으면 저런 집을 또 지을 수 있지. 그러면서 안도해요. 그러는데 그 순간에 위층에서 아이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아이를 구출하기는 너무 늦었어요. 결국 아이는 불에 타서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재물보다 너희의 생명이 중하지 아니하냐. 이 사람은 그 급박하고 중요한 상황에서 제일 먼저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 때에 그는 보석함을 들고 나왔어요. 여러분의 생명보다 물질이 소중해서 물질을 안고 불더미에서 뛰어 나오며 목숨을 거는 그런 삶을 여러분들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최선을 다해서 여러분의 모습이, 시간을 다하고, 육체의 온갖 정성을 다해서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들의 삶이 그 보석함을 건지려는 그런 열정은 아닙니까? 더 중요한 생명이 불에 타고 있는데, 그것은 생각도 나지 않지요? 나중에 깨달아봐야 소용없는 일인데......
우리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창고를 또 짓고, 또 지으면서 행복해하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불러가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도 주님의 음성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귓전을 때립니다. 바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남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기지요? 여자들은 어떨까? 여자들은 두 귀로 듣고, 한 입으로 쏟아낸답니다. 생명의 말씀, 꿈에도 잊어서는 안 될 말씀, 재물보다 생명이 귀하고, 그 생명을 얻는 일에 생명을 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알고 나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서 하나의 삶을 살며 그 때는 그 분을 위해서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주님이 무슨 소원을 가지고 계시는지 아무쪼록 한 영혼이라도 진리를 아는데 이르며 구원받기를 소원하시느니라. 디모데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소원을 말씀하셨어요.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데 이르고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구나. 그래,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자.
그래서 전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도는 교회를 키우고, 작은 교회가 큰 교회가 되는 게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세미나에 가보면 주로 개척교회 목사님만 와요. 참 안타까워요. 그리고 저 보고 왜 왔냐고 그래요. 목사님 대교횐데, 뭐 대교회라고 하는 말은 그들 볼 때 대교회지, 사실은 우리교회는 중간 정도의 교회지요. 그런데 대교회 목사님이 왜 왔냐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소리입니까? 아니, 그만하면 됐지. 목사님 또 무슨 욕심이 있어가지고 전도 하는 거 배우러 왔냐는 거지요.
여러분 전도하세요, 전도하세요 그러면 목사가 욕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교회가 만명이 되면 지금 사례비를 열배를 더 주나요? 정신 차리세요. 우리는 21년 전에도 2말 먹었구요. 지금도 2말 밖에는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작은 교회가 큰 교회되면 수단과 방법이 전도라. 그래서 전도해서 웬만큼 크면 그 다음에는 안 해요. 왜? 이제 컸는 걸 뭐.
한국 교회의 병, 한국 교회의 문제가 여기에 있어요. 아니잖아요. 우리가 작던지, 크던지 전도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요, 주님의 소원이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런 동기가 분명치 않으면 우리는 전도에 대한 확고한 자세가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 주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성도의 순결하고, 정말 하나님 중심으로 재물보다 생명의 소중함을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받을 수 있어요. 여러분 사람은 편지를 쓰면 마지막 결론이 참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요한사도도, 베드로사도도 마지막 결론은 참 중요합니다. 오늘 요한일서를 마무리하는 요한사도의 결론을 보니까 우리가 21절에서 보듯이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어요. 그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지금 사도요한의 머리 속에 초대 성도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 마무리해서 또 한 번 하고 싶은 말, 그것이 바로 우상에서 멀리 하는 삶, 우상이라고 하면 보이는 것도 우상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많아요.
특별히 물질의 우상은, 탐욕의 우상은 언제나 경계해야 할 우리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은 엘리사의 치료사건이 나옵니다. 이웃나라에서 나아만이라고 하는 군대장관이 문둥병에 걸렸어요. 그에게는 권력도 있고, 부귀영화도 있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몸이 썩어가고 있는데, 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지만 치료되지 않습니다. 어느날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그래서 자기 집에 아내의 몸종으로 데려온 계집아이가 말합니다. 우리나라에 가면 엘리사라고 하는 목사님한테 기도 받으면 나을 수 있는데.....
절박하지 않으면 그런 이야기는 귓전에 들리지도 않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나아만은 절박합니다. 군대장관이라고 하는 권세가 무슨 유익이 있고, 부귀영화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자기 몸이 썩어져 들어가는데..... 그 아이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먼저 보내서 기별을 했어요. 군대 장관은 예를 갖춥니다. 수레에 각종 귀한 가득 답례품으로 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대가 그를 호위했습니다.
엘리사 있는 곳에 다다라서 엘리사를 찾았지만 엘리사는 나타나지 않고, 제자를 보내서 오다가 요단강이라고 하는 곳에 일곱 번 목욕하고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굉장히 분노했지요. 한 나라의 군대장관인데, 나를 좀 대우해 줄줄 알았는데, 제자를 보내서 가다가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이나 하고 가라고 하니까 굉장히 열을 받았어요. 씩씩거리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주변에 참모들이 이야기 하지요. ‘장관이여,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이 병 고치러 온 것 아닙니까?’
사람이 잘 못 판단할 때 중요한 것은 주변사람들입니다. 주변사람들이 더 잘 못된 길로 가도록 그렇게 부추길 수도 있고요. 혹 내가 잘 못된 판단을 해도 주변 사람들의 바른 권면 때문에 바른 길을 갈 수도 있는 줄 믿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여러분들은 잘 사귀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도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지요? 그러면 교회 안에 나쁜 사람들도 있느냐? 있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덜 된 사람. 덜 변한 사람. 아직도 예수님을 닮기가 아직도 십리나 남은 사람들이 있지요. 교회 안에 있지만 아직도 육체의 소욕에서 헤메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런 사람이 모델이 되면 진짜 곤란합니다. 주님을 닮은 사람을 가까이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 내가 부족해도 그런 사람 때문에 다른 길을 갈 수 있어요.
지금 나아만 장군은 자기는 자신의 지위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웠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그를 바로 권면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권면을 받아들여서 일곱 번 목욕을 하면서 성경에 보니까 어린 아이 피부처럼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 치료한 줄 믿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서 나아만에게 두 가지를 테스트 하신 거예요. 하나는 그의 교만을 꺾어버리신 것입니다. 주님 앞에 교만을 꺾을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 부자는 참 겸손하기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지위를 가진 사람들은 교만해서 겸손해 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했겠습니까? 주님은 나아만의 교만을 먼저 꺾는 것이 치료보다 급선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육신의 질병보다 심령의 질병이 더 급하다 그 말이예요.
두 번째는 순종할 수 있는가를 물어보신 거예요. 순종은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예요.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한 후에야 나아만은 치료된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고맙겠어요? 그래서 그 선물을 다 드리려고 하니까 엘리사는 손사래를 치면서 그냥 가져가세요. 할 수 없이 돌아가는데 그 장면을 목격한 엘리사의 제자 게하시가 마음 속에 갑자기 탐욕이 생겼습니다. 욕심이 생겼어요. 그들이 모퉁이로 돌아간 다음에 엘리사 몰래 쫓아갔어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실은 우리 선생님이 가르치는 그 제자들 중에 두 소년이 너무나 어렵고 너무나 힘듭니다. 그 두 소년을 위해서 은 한 달란트와 의복 두 벌만 주시면 좋겠습니다’
탐욕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대의명분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는 것을 많이 쓰지요. 다 드리려고 가져왔던 나아만이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예요. 그러면 두 사람이요? 그럼 은 달란트를 둘 드릴 테니까 그리고 옷도 두 벌을 가지고 가세요. 그것을 게하시가 받았습니다. 돌아왔는데 엘리사가 게하시를 보면서 어디 갔다 오냐고 물었어요. 별 거 아니라고 둘러 댔지만,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너에 대한 것을 알게 하셨느니라.
지금 저 나아만 장군이 버리고 간 문둥병이 네게 들어올 것이다. 들어와도 영원토록 너와 함께 있으리라. 저주를 받았어요. 여러분, 믿음의 생활에도 탐욕이라고 하는 우상이 우리를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이 우상에서 해방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멀리 해야 합니다. 이 탐욕, 끊임없이 도전하는 이 탐욕, 그것 때문에 목회를 망치고,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망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요한사도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면 우리는 그 분이 원하는 걸 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그 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아서 그 분의 기뻐하심과 그 분의 원하시는 삶들을 맞추어가는,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내어놓는 그러한 성도들의 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요한사도는 고백합니다. 내가 그런 삶을 통해서 이제 내가 예수를 알았노라. 내가 그러한 삶을 통해서 이제는 내가 예수 안에 있노라. 요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육신으로 임하신 예수, 그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임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심으로 나는 그 예수를 보았고, 그 예수를 주목하였고, 그 예수를 만졌노라. 예수 안에서 하나되는 이 분명한 고백이 오늘 평안의 성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로 알게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자녀로서의 분명한 소속감을 가지고, 세상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자녀됨을 기뻐하고,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어서 주님과 연합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늘 그 뜻대로 살아가는 지혜로운 주의 자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4 그를 향하여 담대하자
본문- 요한일서 5: 13-17
제목- 그를 향하여 담대하자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해를 주신지 한 달이 지난 2월의 첫 날입니다. 토요일 저녁, 1월31일을 보내면서 한 달이 이렇게 빨리 갔구나 하는 아쉬움으로 한 동안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습니다. 새해의 첫 달을 보내신 여러분들은 감회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흔히 나이에 따라서 세월의 속도가 다르다고 하는데, 20세에는 20Km로 , 30대는 30Km로 가다가도 50대에는 50Km의 속도로 세월이 달려가는 것이 느껴져 한 해가 너무나 빨리 감을 느끼게 되는데, 70 -80대의 어른들께서는 유수와 같은 세월의 속도감을 얼마나 강하게 느끼실지, 아마도 어지러울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일서 5장 13절은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알게 하기 위해 쓰셨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도 같은 서신의 저자인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 또한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고 요한복음을 기록 목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한사도는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은 다르지만,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같음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의지와 그 영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에 이기셨고, 세상을 이기셨던 그 이김이 바로 물과 피로 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이신줄로 믿습니다. 물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거듭나며,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옛 사람은 죽고 주님과 함께 새롭게 거듭나는 줄 믿습니다.
매월 첫 주일 거행하는 성찬식에서의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미하며 떡은 그의 몸을 의미합니다. 결국 세례와 성찬이란 거룩한 성례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옛사람은 장사 지낸다는 것을 의미함이요, 우리가 그와 함께 새사람을 입어 천국의 소망, 곧 부활의 소망을 갖는다는 의미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 분의 몸을 먹고, 그 분의 피를 마시는 이 성례전에 참여하는 성도의 행위는 곧 예수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신앙고백적인 결단과 다름없는 헌신의 행위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그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새롭게 기억하셔서 옛사람은 십자가 아래에 못 박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영생의 소망으로 거듭난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4절은 우리에게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는 요한 사도의 권면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 분은 아시고, 우리의 구한 바를 응답하셔서 열매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라는 강력한 구함의 기도를 요구하셨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할 말슴입니다. 우리에게 얻게 하시고, 찾게 하시고, 그리고 열리게 하신다는 응답의 약속은 지금도 유효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전제가 있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으실 뿐 아니라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기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뮐러는 수없이 많은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기도할 때마다 응답을 받는 것을 보면서 신기해 했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100% 확신을 가지고 구합니다’
이상한 말같이 들리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의 확신을 갖지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죠지물러는 권면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 뒤 몇 분이 지나서도 여전히 당신에게 확신이 남아있다면 그 기도는 응답될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도하고 일어난 뒤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그 기도에 대하여 자신이 없는 거지요. 과연 기도한 일들이 응답 될 것인가?
오늘 요한사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한일서의 독자들을 향해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라고 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는 말인데, 두려운 말씀이지요. 그렇다고 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하는 16절 중반에 이 표현은 도대체 무슨 말일까? 죄를 지어도 용서 받을 죄가 있고, 용서받지 못 할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요한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저는 2가지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먼저 2장 18절에서 19절에 말씀입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용서 받지 못 할 죄에 첫 번째 요한사도의 지적은 초대교회의 은혜의 공동체에서 떠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에 일치를 깨뜨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속회 공동체, 여러분의 선교회 공동체를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죄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 다시 한 번 인식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일치됨을, 하나됨을 깨뜨린다는 것이 용서받기 어려운 죄라고 사람을 죽인 것보다, 간통질을 하고, 도둑질을 한 것보다 이것을 하나님은 더 큰 죄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 하나됨을 깨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를 않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 공동체, 거기에 많은 셀 그룹들이 있습니다. 작은 소그룹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소그룹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일치를 깨뜨리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입니까? 4장 2절에서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약을 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 이것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라. 여호와 증인의 대표적인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예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우리를 위해서 그 고난을 받으신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대표적인 두 모습을 요한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요한 사도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그들에 대해서는 구하라. 기도하라라고 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중보의 기도가 가능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성도, 우리의 연약한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는 중보의 기도가 필요한데, 요한사도는 이 두 가지의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중보기도를 하라고 내가 권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이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구원의 희망을 주시지만, 그러나 분명한 신앙고백적인 고백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가 우리를 대속케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이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우리의 고백을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리지 못 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없을 줄로 믿습니다.
마틴 루터는 사망에 이르는 죄의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한 두 번 꾸중을 받은 후에 마음이 굳어져 버린 이단들의 죄라고 그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성도의 관계에 있어서 잘못 된 것을 권면하고, 책망하여 바로 잡기를 원하지만 그 사역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것이라면, 잘못된 부분을 권면받아 돌이킬 수 있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고백적인 부분에 있어서 잘못된 삶을 사는 이들은 그런 권면을 받을 때마다 더 마음이 굳어진다는 것입니다. 디도는 3장 10절에서 "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고 하면서 이러한 자들은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역시 그런 사람들은 "한두 번 권면을 해도 결국은 마음이 굳어져 돌이킬 수 없는 이단의 죄를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주의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여 교회가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교황제도는 정치와 종교를 통합하여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고, 이는 교회의 부패로 이어져 성직을 매매하고 말씀보다는 인간의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기에 이르러 초대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자, 결국 카토릭의 사제이며 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오직 예수, 오직 말씀"을 외치며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이들이 중심이 된 교회 공동체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외식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것들을 버리고 오직 말씀 중심,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좋은 뜻을 가지고 출발한 것입니다만, 그 중에 한가지 약화된 기능이 있는데 바로 회개입니다.
카톨릭은 성도들이 잘못된 삶을 살았을 때 신부를 찾아와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고해성사라고 합니다. 그러면 신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선언하지요.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항상 중보자를 통하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피흘리시던 날,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은 갈라졌고, 그 이후로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드려졌던 우리의 기도는 비로소 직고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된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인줄로 믿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스스로의 죄의 문제를 담임목사에게 가져올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놀라운 성경적인 특권을 누리게 된 반면에 회개하는 삶의 훈련이 약해졌어요. 왜냐하면 성도들 스스로가 회개의 주체가 되어야하는데 신실하고 성실한 자세로 회개하지 못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바로 하지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회개의 기능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건강하여 성장하는 교회일수록 십자가의 도를 강조하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일부 교회는 아직도 십자가의 도가 온전히 선포되지 못하고 윤지적, 정치적 이야기들이 중심이 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십자가라는 말 한마디 없이, 회개와 성결된 성도의 삶을 촉구하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좋은 아침, 좋은 세상임을 의미없이 외치는 경우도 있음을 부그러워합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극심하던 어느 주일 아침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억울하게 희생되던 날 아침에도 ‘할렐루야! 좋은 아침입니다’ 라며 설교를 시작한 몰지각한 대형교회 목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과 보혈의 선포 없이,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할 회개의 철저한 검증이 없이 그냥 좋게 좋게 지나가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 배경에는 성도들의 책임도 크겠지만, 아울러 교회 지도자들의 목회 철학 속에 회개에 대한 철저한 삶의 고백을 촉구하는 사역의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역사의식도 없고, 거기에는 회개에 대한 철저한 자기 반성도 없기에 십자가의 능력도 따라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요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 하는 중보기도의 부분입니다.
요한서신의 가장 중요한 어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노라고 이 글의 쓴 목적을 밝히면서, 동시에 이 글을 받아야 할 대상까지 정해 주고 있습니다. 이 글을 받아야 할 대상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개념은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첫째로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입니다. 나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하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고백은 나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두 번째 개념은 현재 실현된 특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세 번째 특징은 존재론적인 실재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자로써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에게 속하지 아니하는 자니 곧 적그리스도, 곧 사단의 자녀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냐, 아니면 내가 사단의 자녀냐 하는 실재적인 고백이 자녀의 개념 속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개념은 사귐의 특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특권이 있어요. 이제는 종이 아니라 자녀이기에 자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자녀의 특권을 가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수직적 신앙의 관계가 원만해졌다면 이제는 수평적 관계가 요청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사귐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온전한 사람은 자녀와의 사귐도 온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김복동집사님은 기도생활은 잘 하는데... 성도들과 너무 자주 싸운다" 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를 좋은 신앙의 사람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귐을 온전히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귐의 특권은 하나님과의 사귐뿐 아니라 이웃과의 사귐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에서도 함께 동반되어야 할 부분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됨, 이것은 분명 특권이요 하나님의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요한사도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기도하라" 이러한 이들을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할 이웃들이, 우리의 중보기도가 필요한 형제 자매들이 2004년 한 해는 우리의 중보의 기도를 통하여 온전해지며 더불어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부족함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귀하여 우리는 그 은혜를 선물로 받을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신 아버지, 오늘 사랑하는 성도들이 자녀의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게 하옵소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으시는 줄 알기에 이제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 구하기를 원하오니 구하는 것마다 응답의 역사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3 세상을 이긴 믿음
본문- 요한일서 5: 1- 12
제목- 세상을 이긴 믿음
즐거운 설 명절이 되셨는지요? 먼 길을 다녀오시느라 수고하신 성도 여러분들께도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지난 한 주간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놀라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몇가지 부문에서 한국과 세계의 기록을 경신하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몸으로 느끼셨던 사건은 단연 추위였습니다. 기상청이 이번 추위를 71년만이라고 발표할 만큼 그 위력은 대단했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난생 처음 겪는 추위에 많이 놀랐으리라 생각됩니다. 서울시내만 상수도 동파신고가 10.750건 이나 되었다니, 서울보다 더 추웠던 지방과 시골을 합친다면 이번 설 추위로 대한민국 전체가 얼어터진 경험을 한 셈입니다. 심지어는 바다에서 양식하던 숭어 60만 마리가 바다가 얼어서 동사했고, 눈 길에 차량 약 600 여대가 충돌하는 사고들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기록은 영화 ‘실미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명절이 끝나는 날인 금요일 오후에 아내와 함께 온 장안을 휘저어놓고 있다는 영화 "실미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때문에 늘 고전하던 우리 영화들이 어느새 경쟁력을 단단히 갖추고 의젓한 모습으로 국민들을 손짓하는 모습이 참으로 기분 좋았습니다.
늘 수준 낮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애국심에만 호소하며 국민들을 불편케 했던 시절은 이제 지나간 듯 보입니다. 극의 탄탄한 구성이나 등장 배역들의 중후한 연기, 그리고 스펙터클한 장면들은 국산 영화를 외면했던 관객들을 다시 불러모우기에 충분했습니다. 상영 한 달 만에 무려 700만명 돌파라는 기록은, 820만명의 관객을 모았던"친구"를 곧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습니다. 한 달 정도만 더 상영한다면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리라 생각됩니다.
세 번째 기록갱신은 아주 흐뭇한 내용이었는데, 맥도날드 창립자의 미망인인 조앤 B, 크룩 여사가 구세군에 15억달러의 상속받은 유산을 기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15억 달러라면 우리돈으로 1조7천 6백억원이라고 하는 대단히 큰 액수인데, 아마 여러분들은 실감이 안 나실 거예요. 한 1천만원 기증했다고 하면 ‘와...’ 그랬을텐데 말입니다. 이 액수는 단일 기증액으로는 세계 최고라고 외신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도 2000년도 부터 "자녀에게 유산 상속하지 않기 운동"을 교회적 운동으로 벌이고 있습니다. "화장하기 운동"과 함께 두 가지 사회문화 개혁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미 성도들의 절반 이상이 화장하기로 서약을 하셨고, 안구 기증은 거의 대부분이, 시신과 장기는 1/3정도가 서약을 한 상태입니다. 여러분들의 유산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준비된 오병이어 장학회나 구제위원회, 장례위원회 등에 기증하신다면 더욱 뜻깊은 모습으로 인생의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세상을 이긴 믿음’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 특별히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에게 증거가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재판에서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두 가지 증거가 필요한데, 첫째는 마음으로부터 오는 증거 즉 심증이고, 둘째는 눈에 보이는 증거, 물증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두 가지 증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첫 째는 "하나님을 사랑한 증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과 실천적인 생활 속에 심증과 물증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심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 물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에게 이 증거가 분명하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340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고백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그렇습니다.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증거가 없으면 증인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서는 이 증거에 대해서 말씀 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에 첫째는 그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라고 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계명하면 십계명을 생각하겠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은 두 가지인데, 그것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어요. 무엇입니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 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나야 사랑하고 있지. 하나님 사랑하고 있고, 이웃 사랑하고 있지, 그런데 이 사랑을 좀 더 생각해 보면 추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입술의 사랑일 경우가 많습니다. 요한 사도는 너희가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으로 사랑하라 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 어렵지 않습니다. 북한 정권과 김정일을 위해 기도하는 일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불가능할까요? 그 분은 과거에 조금 다녔다고는 방송에서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도 조금 다니고, 불교도 조금 다니고, 기독교도 조금 다니고.... 다분히 정치적인 대답이어서 그런 분을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를 위해 기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과 우리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일수록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시는 아파트를 사랑하십니까? 빌라를 사랑하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머리가 조금씩 아파오지요? 반상회 때마다 골치 아프게 말 많은 그 여자, 늘 시비거는 그 남자, 그래서 마음소으로 그 사람들 언제나 이사가나....하고 있는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니까 머리가 아플 수 밖에요.
구체적이 될 수록, 부담이 될 수록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책임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많이 낳지 않는 이유도 경제적 책임감이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녀 한 명을 바르게 양육하려면 약 1억원의 재정이 따라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그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강조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두 번째 증거는 우리의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 사도는 첫 번째 형제라고 하는 개념을 멀리 보지 않고, 믿음의 형제들로 생각을 했어요. 여러분 평안의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나요? 사랑할 수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평안의 성도들에게 여러분들 마음이 잘 맞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속회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저 사람은 싫어’ ‘왜 저런 사람이 우리 지역에 왔어?’ 그렇게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경제적으로 맞지 않거나, 지적으로 맞지 않거나, 어떤 문화적인 격심한 차이가 있거나 그럴때에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이 여러분의 공동체에 편입하는 것에 대해서 부담감을 느끼는 거예요.
여러분들의 지역이나 선교회나 어떤 공동체에서 열심히 일을 잘 하지만, 제가 좀더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일 잘 한다고 하는 것이 한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무슨 이야기예요? 끼리끼리 잘 한다는 거예요. 그 선교회가 열심히 잘 하지만, 잘 하는 몇 사람들끼리만 잘 하고 다른 사람은 거기에 편입되지를 못해요. 또래 집단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끔씩 저에게도 원망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그 사람들 끼리 놀아서 그들 속에 못 들어가겠어요" 끼워주지를 않는 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말을 알려면 함께 가야 하는 거예요. 빨리 하는 것도 좋지만, 함께 하는 일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써 형제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이웃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불가능하게 생각하는 주님의 말씀, 원수도 사랑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원수를 사랑하겠다고 덤비지 마세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찌 원수를 사랑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가까운 분들부터 사랑을 하세요. 평안의 성도들부터 사랑하세요. 그 사랑이 익숙해 지기 시작하면, 이웃들도 사랑할 수 있고, 원수들도 사랑할 수 있고, 때되면 김정일도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는 단계가 되는 거예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김정일 사랑하고, 세계평화 운운한다고 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예요.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 분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그 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보여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 예수님이 원하시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에 대한 증거가 참 된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한일서에 클라이막스와 같은 말씀입니다. 6절에 보면 ‘예수그리스도 그 분은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적그리스도의 상징적인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인성, 예수님의 몸으로 오심을 부정했습니다. 그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분명하게 증거하고 확증하는 것 중에 하나가 물과 피의 증거입니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을 의미하고, 피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물과 피의 증거들을 우리는 늘 체험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떡과 잔을 마시면서 우리는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고,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고 있다고 있지 않습니까? 이 물과 피의 증거는 예수께서 인성을 가지신,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예요. 지금 요한사도는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주장들을 염두해 두면서 당시 성도들에게 물과 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거예요.
그에 대한 증거는 성령과 물과 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오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세계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입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십자가에서 주는 메시지는 그것입니다.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씀으로도 하셨지만, 최종적으로도 십자가의 피 흘리시면서, 생명을 주시면서,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메시지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의 메시지를 우리가 들으면서 이제는 주님을 소유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믿고, 그 믿음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생명의 은혜가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허락하시는 생명, 그 생명이 오늘 여러분들을 새롭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그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줄 믿습니다.
세상은 이 생명이 없어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이야기 하지만, 그 생명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승리하시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긴 믿음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4절에서 선포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생명이라고 하는 은혜를 선물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두려움이 사라질 줄 믿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를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평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를 통한 기쁨, 그리고 영생에 대한 확신 이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강하게 만드는 거예요. 담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지에서 오는 담대함이 아니라 생명을 통한 확신에서 오는 담대함이 오늘 우리를 예수의 증인으로 삼고, 세상을 향해서, 모든 족속을 향해서 나아가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 믿음, 소유하셔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때 원수도 사랑할 줄 믿습니다. 이 사랑의 실천, 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 자들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주의 뜻 이룰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주님의 장 중에 붙잡으셔서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 주신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2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제목-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본문- 요한일서 4: 7- 21
20, 30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였는데, 그 중 1위가 바로 ‘넌 할 수 있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부모님이나 친구로부터 긍정적인 말, 할수 있다는 격려의 말을 가장 목말라 하고 있음이 확인된 셈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그의 어머니의 격려가 그를 세계적 발명왕으로 우뚝 서게 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바보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황당한 일로 어이없게 만들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조롱했지만, 그 때마다 에디슨의 어머니는 늘 이런 말로 그를 위로 했다고 합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엄마는 널 믿는다....."
가장 존귀한 인격으로 지금까지 모든 인류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슈바이처는 음악, 철학, 신학, 의학 등 박사만도 헤아릴 수 없었을 만큼 학문적 깊이와 명예의 다양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문명 사회를 등지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섬기기 위하여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슈바이처를 그렇게 만든 주인공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늘 슈바이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단다....."
교육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페스탈로치는 아이들이 맨발로 뛰노는 마을을 지날 때면 유리 조각들을 말없이 주워 주머니에 넣고 간 것으로 유명합니다. 모든 교육자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는 자랄 때 늘 어머니께서 이렇게 그를 축복했다고 합니다. "애야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단다..." 기도의 어머니 덕분에 페스탈로치는 교육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 한 마디가 생명을 살리는 줄로 믿습니다. 신명기 6장 6- 7절은 말씀합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그렇습니다. 부지런히 가르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자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6장 4절에서는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훈계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훈계를 흔히 잔소리라고 그럽니다. 요즘은 그것을 설교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왜 잔소리를 설교에 빗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설교가 잔소리로 들린다면 큰 일이지요? 훈계를 못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도둑놈도 자기 자식은 나랏님처럼 되라고 훈계한다지요? 훈계를 못해서 자식이 잘 못 되는 법은 없습니다.
문제는 교양입니다. 주의 교양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젊은이가 반듯하게 자랐으면 우리가 뭐라고 칭찬합니까? "야, 그 친구 참 교양이 있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대는 뭐라고 그래요? 호남 사투리로는 "싸가지가 없다"고 그러지요. 그런 사람을 만나 기분이 별로 안좋을 때 우리 권사님 중에 잘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 어째 기분이 껄쩍지근 허구먼...."
성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자라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가르치되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치라는 거예요. 그런데 입으로 가르치는 훈계는 10%면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교양인데 자녀들의 인격과 신앙에 90% 이상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활신앙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주일날만 되면 예쁜 옷 입히고, 예쁜 모자 씌우고, 예쁜 신발 신기면 아이들이 물어보지요. ‘엄마 어딜 가는데...?’ ‘예수님 만나러 교회 가는 거야’ 그 아이들 머릿속엔 교회 가는 날은 깨끗한 옷 입고 머리 땋고 최고의 모습으로 주님 만나는 날로 각인이 되겠지요. 그렇게 훈련이 되야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도 주일날 예배를 참석할 때는 정장을 입을거 아니겠어요?
주일날도 시장 갈 때 입는 옷과 별 다를 바가 없다면 그것은 큰 문제 아닙니까? 아이들은 교회와서 떠들고 노는 것 같아도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를 출입하면서 배울 것은 다 배우는 줄로 믿습니다. 어릴 때 그 마음속에 주어졌던 도전들이 그 아이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의 교양입니다. 생활신앙을 통하여 믿음의 부모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간혹 부모가 싸울수 있지요. 어떤 부모는 결혼 40주년이 되도록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면서 자랑삼아 말하는데, 상담심리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지요. 어느 신혼부부가 결혼 후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자신의 농장에서 말을 타고 공원을 산책하다가 말이 말을 잘 안 들으니까 하는 말이 "하나" 하더랍니다. 그렇게 세 번째가 되니까 말없이 말에서 내리더니 총을 꺼내 머리를 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신부는 그 날 이후, 한번도 남편에게 대들지 못했답니다. 말 다툼 하기 시작하면 남편은 "하나" 하고 경고를 주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더 싸우겠습니까? ‘아이쿠 이 남자하고 살다가는 총에 맞게 생겼구나’ 그들 부부는 몇 십년을 살았지만 부부싸움 한번 안 했다는 것이지요. 결국 부인에게 심각한 심리적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겹쳐 상담가를 찾아 심리 치료를 받아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부가 살면서 싸우는 것이 정상입니다. 문제는 자식들 앞에서 어떻게 그 문제를 원만하고 지혜롭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해요. 그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싸울 수 있지만, 엄마, 아빠가 어떤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화해하는가를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료 목사님들이 가끔씩 저보고 목회를 잘 한다고 그래요. 저는 그 평가가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때마다 곰곰이 생각을 해봅니다. 왜 동역자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자주 할까? 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찾았습니다. 바로 아버님께서 42년동안 목회하시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자랐기에 충분한 목회실습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교인들과 교인들과의 문제가 발생할 땐 어떻게 중재하고, 목회자와 성도들이 갈등을 겪을 땐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 가를 몸으로 체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글 "미학"에서 이런 말합니다. "예술이란 모방에서 시작한다" 그렇습니다. 창조는 그 다음입니다. 지금 미술대학에 가보면 17- 18세기 때의 인물화 데생하는 것도 벅차하지요. , 중세에 하던 것 흉내내는 것도 큰 실력이라고 그것 가지고 대학 입학 시험보지 않습니까? 하지만 모방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옛 선현들은 좋은 것은 흉내라도 내라고 했답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사랑과 용기와 실천적인 것인 줄 믿습니다. 그것을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의 교양으로 가르쳐라.
젊은이들에게 또 물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을 존경하십니까? 놀랍게도 대부분이 존경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고맙게는 생각하지요. 키워주었지요. 등록금 대 주지요. 먹여주지요. 때마다 옷 사 주고 휴대폰 사 주니 고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하지는 않는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같이 살아보니까 부모의 삶이 본받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식에게 부모가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 부모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성공한 셈이지요. 다른 사람한테 인정 받을려고 그러지 마세요. 자식들이 부모를 존경해야 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정말 존경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인생의 모델입니다’ 라는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본문에서 계속된 반복어를 사용하는 것이 두 개 있습니다. 그 하나가 바로 "서로"라는 단어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이 7절, 11절, 12절 등에서 반복되는 이유는 사랑의 상호성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랑할 만 해야 사랑하지요.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있지요" 그럴 듯한 말 같은데요. 사실 그런 사랑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고 있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라고 할 때 "서로"는 이해관계에 얽혀있는 관계로서의 서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께부터 준비하여 어제 종일토록 사회봉사부 구제위원회와 여선교회가 서로 협력하여 설을 맞이한 지역의 불우가정과 장애가정 90여 가정을 참기름 한 병과 떡국 떡 한봉지씩 담아 집에 까지 방문하여 나누어 드렸는데 얼나나 감사한지요. 특히 장애우들이 사시는 곳은 이곳 소사구와는 상관없는 원미구에서도 오정구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곳이어서 우리 교회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지역이지요. 다시말하면 교회나오라는 부담스러운 메세지가 담겨진 사랑이 아니라 그냥 전하는 사랑이기에 더욱 좋았습니다.
사랑을 베풀되 조건없이, 이해관계없이 나누는 것보다 기분좋은 일은 더 없는 줄로 믿습니다. 밤 9시가 넘어서 끝난 배달 사역후 집으로 돌아가시는 선교회장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제 집으로 가는데 너무나 기분이 좋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피곤으로 가득할 터인데 말입니다. 사랑을 전하고 돌아설 때의 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거지요. 사랑할 만 해야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사랑할 때 진정한 사랑의 실천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째 강조하신 말씀이 있어요. 19절에 보면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입니까? "먼저"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오면 보답으로 사랑을 하지 말고 너희가 먼저 하라는 거예요. 사랑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설에도 결단코 사랑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사랑하세요.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야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가진 사람에게 18절에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은 어디서 생깁니까? 불순종에서 생깁니다. 불순종하고 나면 우리에게 두려움이 생기지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나서 수풀에 숨어 버렸어요. 하나님이 찾습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우리가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음으로 두려워 숨었나이다’ 왜 자꾸만 숨습니까? 두려우니까 숨지요. 그 두려움을 누가 주는 것입니까? 주님이 주시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우리를 죄의 길, 불순종의 길로 가게 만들고 나서는 죄를 얻게 한 후에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해 숨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장엘 가도, 멀리서 목사님을 보면 반가워 쫓아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주칠까봐 슈퍼로 도망치듯 들어가 버리는 사람이 있지요. 저는 짖꿏게 쫓아갑니다. ‘아이구, 집사님 시장 나오셨어요?’ 도망갈 길이 없지요. 담배를 피우다가 저를 보고 얼른 담배를 잡은 손을 빼서 뒤에 돌렸는데, 계속 붙들고 인사하니까 담배가 점점 꽁초가 되어 손을 뜨겁게 달구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면 두려움이 생겨요. 두려움이 생기면 더 멀어집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멀어진 사람은 이유가 있어요.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는 거예요. 사단은 우리에게 미움을 주고, 사단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유혹을 주고, 그리고 죄 속에 빠지게 만들어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20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 라고 하십니다. 미움은 사단이 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우리에게 준 것이 미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마지막 절에서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느니라’
최근 "트로피 허즈밴드"라는 말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보았더니, 미국에서 생긴 신조어인데, 요즘은 남편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자기 일이 있기에, 과거 같으면 남편이 직장가면 아내는 집안 청소하고, 설거지 하고, 음식준비하다가 남편이 퇴근하면 조간 석간 다 준비해 놓았다가 "신문" 그러면 신문 딱 갖다 바치고 " 담배" 그러면 재떨이까지 갖다 바치는 것이당연한 모습이었다면,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이런 생활을 꿈꾸는 남자가 있다면 그는 화성으로 가야 합니다.
최근 '듀오'라고 하는 결혼전문업체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젊은이의 80%가 맞벌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단순히 맞벌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맞벌이를 할 경우에 아내를 위해서 가사나 육아를 책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맞벌이가 아니라 실제적인 맞벌이 부부의 형태를 갖겠다는 것입니다.아내가 사회적인 지위로 인한 활동으로 인하여 늦게 귀가 할 수도 있고, 밤을 샐 수도 있지만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아이도 돌보아주고 설거지와 청소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들의 생각은 아직까지 이중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결혼한 아들집에 갔더니 아들이 앞치마를 하고 열심히 부엌일을 하는 것이 맘에 걸리는 것입니다. ‘아휴 저게 얼마나 못났으면 남자가 부억일을 다 하나’ 그러면서 며느리가 원망스럽지요. 반대로 시집간 딸네 집에 갔더니 사위가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일을 돕는데 너무나 이뻐 보이는 것이지요. 아들이 그러면 꼴불견이고, 사위가 그러면 이뻐 보이는 것이 쉰 세대의 심정 아닙니까?
운동 경기를 하면 우승팀에게 트로피를 주듯이, 아내들의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희생하고 협력한 공로로 남편들이 상을 받을만 하다는 의미에서 생긴 말이 "트로피 남편"인 셈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기대를 가졌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의 남편들은 모두가 트로피 남편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은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영향있는 여성 사업가 50인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 30%가 트로피남편의 도움으로 가능했다고 그녀들의 성공 이유를 설명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제는 협력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디 가서 무슨 사랑을 하겟습니까? 부부가 사랑하지 못 하면서 성탄절에 종 치고 있으면 뭐해요? 적어도 우리 가정에서 사랑의 주도권은 내가 갖는다는 심정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선교회의 사랑의 주도권은 내가 갖는다든지, 우리 교회에서의 사랑의 주도권은 우리 지역이 맡는다든지 하는 아름다운 결심들이 새해에는 쏟아져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는 교회가 된다면 오늘날 교회는 다시금 세상을 향한 영적 주도권을 회복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이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고, 피 흘리셨고, 우리를 위해서 대속하신 줄 믿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되 먼저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사랑 실천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사랑 할 만 해서 한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먼저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머뭇거린다면 언제 사랑하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먼저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기억하며 주님, 이 한 해에도 사랑의 주도권을 가진 성도요, 교회요,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1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본문- 요한일서 4: 1-6
제목-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오늘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라는 주제를 통해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요한사도는 1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을 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영들을 시험하라’ 테스트 해보라는 것이지요. 마치 리트머스 종이를 가지고 시험하듯이, 영들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바울 사도나 요한 사도를 통하여 영과 혼과 육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흠없이 보존되기를 사모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교회안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본문 1절의 말씀과 같이,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거짓선지자이면서도 문제는 자기들은 성령에 의지해서 왔고, 성령의 응답과 도우심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헷갈리는 것입니다.
당시 성도들은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영이 오리라 한 말을 들었지만, 벌써 너희 가운데 들어와 있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지적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적그리스도가 도처에서 이미 횡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만 해도 다락방으로, 베뢰아로, 무료성경연구원으로, 이름도 생소한 신흥집단들이 그 세력을 과시하며 얼마나 도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1부 예배 마치고 2부 예배 사이에 새가족들을 양육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약 30분정도 되는 이 시간에 제가 새가족들을 섬기고 있는데, 오늘은 교회론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교회는 누가 세우셨는가? 이 교회는 어떻게 세움을 받았는가? 나는 왜 이 교회로 부름을 받았는가? 등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연혁은 인터넷 홈페이지 교회연혁란에 보면 상세히 알 수 있는데, 맨 처음 연혁은 다름아닌 "1983년 3월 13일 황요한 전도사 부부에 의하여 평안의교회가 창립되다"라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내용 속에는 이미 의미상으로 생략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황요한 전도사를 부르셔서 준비 시키신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말할 때,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는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시기에 내가 이 교회에 먼저 왔노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위세를 떨며 텃줏대감 노릇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오래 믿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만큼 주님을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러한 부분들이 통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캐릭터가 뭐예요? 사랑이잖아요. 주님의 가장 강력한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섬김이잖아요. 그러면 1년 믿었을 때보다 5년쯤 믿으면 사랑과 섬김에 있어서 그만큼 더 구체적인 실천의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사님 때보다 권사님 때가, 권사님때 보다 장로님 때가 훨씬 더 사랑과 섬김이 분명하고 넘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적이고 당연한 모습을 거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처음엔 주님의 사랑의 실천과 섬김을 성실히 감당해가다가 시간이 갈수록 교만해 져서 점점 더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상대방에게 부담을 안겨주는 언행을 서슴치 않고, 희생하기 보다는 기득권을 주장하기에 바쁜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도 때론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모습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요한일서는 주님의 사랑에 대하여 강조하다가 4장에 와서 갑자기 기독론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왜 그분이 십자가를 지셨는가? 하는 부분을 강조하며 사랑의 실천을 파괴하는 거짓 영에 속한 자들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 영이 들어오면서사랑의 공동체 안에 미움이 싹트기 시작하고, 겸손의 공동체 안에 교만이 싹트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위기의식을 느낀 사도 요한은 ‘그러므로 너희들은 영들을 시험하라’ 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경시하고 신령한 지식에 대한 사랑만을 주장하는 영지주의가 당시 가장 대표적인 거짓선지자의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온갖 육적인 것을 부정하고, 주님의 인성을 부인함으로서 성육신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동정녀탄생이 부정되고, 주님의 공생애 사역이 부정되고, 죄인을 위하여 피흘리신 십자가의 주님이 부정되었습니다. 결국 육체의 죽음을 부정하기에 주님의 부활하심도 부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이 대표적인 영지주의자들이지요. 당시와 똑같지는 않지만 너무나도 많은 부분이 흡사한 이 시대의 대표적 적그리스도인줄로 믿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부분에 있어서 단언합니다."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선언함으로써 하나님께 속한 자와 속하지 않은 자의 구별을 기독론을 통하여 분명히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거짓선지자들, 거짓 영들이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통일교, 남녀호랭개교, 몰몬교, 안식교, 수없이 많은 이단 종파들이 우리 주위에서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세상 속에 살기에 그들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의 유혹에 우리는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기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무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무대를 떠날 수가 없지요. 마치 연극배우가 무대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거하라.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우리의 소속은 하늘이라.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분명히 말합니다. ‘저희는 세상에 속하였는고로’ 저희는 누구입니까? 거짓 선지자에 미혹된 적그리스도의 그룹을 말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였는고로 세상이 저희의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소속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거예요. 여러분 옛날 생각을 해 보세요. 이 교회에 처음 등록할 때 등록하기 전과 등록한 후에 여러분의 태도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가짐은 어때요? 등록하지 않을 때는요. 손님입니다. 구경꾼입니다. 무슨 광고를 해도 내게 깊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헌신과 희생을 이야기 하면 부담스럽습니다.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말하는 거예요. 실천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 사랑이라고 하면 거창한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랑은 작은 것부터 실천가능해야 합니다.
어제 여러분들도 감동적인 뉴스를 보셨을 거예요. 사십대 택시기사가 강도를 당했는데, 3만원밖에 빼앗기지 않았지만, 너무 속상하고 억울해서 범인을 꼭 잡아야 하겠다며 생업을 제쳐두고 형사와 잠복근무한 끝에 범인을 잡아보니 20대도 안 된 학생이었습니다. 그 집을 가보니까 누나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옥탑방에서 이 추운 겨울에 보일러는 커녕 연탄도 못 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름이불을 덮고 사는 그들을 보고서 오히려 10만원을 건내주면서 이불과 라면까지 사 주며 격려하였다는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작은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름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 실천될 때 우리는 그 사랑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사랑의 주도권'을 뺏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서 교회가 혼란스럽고 주의 종이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지라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해, 배우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어머니의 이미지가 잘 어울린다고 평가를 받던 손숙씨가 장관으로 입각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일이라며 언론과 보수 정객들이 난리를 피고 있을 무렵, 그는 장관이 되기 전에 러시아의 한 공연기획사와의 약속이라며 '어머니'라는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러시아로 떠났었습니다.
신문에서는 여성이 장관이 되었네, 배우출신이 장관이 되었네 하며 말들이 많았던 참에 그의 이러한 행동은 더욱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였지요. 러시아에서 약속한 공연을 잘 끝내고 나오던 손숙장관이 홀에서 내려오다가 층계에서 넘어져 그만 팔이 금이 가는 불상사를 당했습니다. 깁스를 하면 몇 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귀국하면 그렇지 않아도 온갖 지상에서 시비를 당하고 있는 참이라 조용히 넘겨보려고 그냥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은채 비행기에서 견디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는 부목을 풀고 다친 손을 다른 손으로 받치고 기자회견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 신문에 자신의 기자회견 모습을 담은 내용이 나오는데 이렇게 기사를 썼드랍니다. "손숙이 장관이 되더니 이쁘게 보이려고 손을 받치고 다닌다" 그분은 그 기사를 보고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더랍니다. 아마 지금도 그 기사만 읽고 본인의 설명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들로 시험에 들고, 그리고 더구나 진리의 길에서 미혹당해서 거짓의 영으로, 적그리스도로 속하는 이들도 있음을 기억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통일교에서 방황을 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방황을 합니까?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보고 뭐라고 그러는지 아십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만 찾아다니면서 전도한다고 그래서 왜 전도하려면 안 믿는 사람을 해야지요.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은 안전하대요. 그러면 믿는 사람들은 뭐가 불안하냐. 믿는 사람은 강둑에 서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너무 위험해서 빨리 믿는 사람들부터 전도를 해야 한대요. 어처구니가 없어요.
미혹의 영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런 착각 속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이야기들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1세기의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회를 혼란시켜서 결국은 요한 사도도 공동체 안에 이러한 도전을 줍니다. ‘영들을 시험하라. 영들을 분별해라. 영들을 테스트해라’
여러분들은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의 영에 속해 있는지, 아니면 미혹의 영에 속해서 진실과 거리가 먼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저는 목회자로써 늘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린 모습으로 목회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진리의 영에 의해서 목회를 하는지, 아니면 미혹의 영 거짓 선지자의 영을 따라서 목회를 하는지, 오늘날 뉴스에 우리는 많은 지도자들이 진리의 영과는 미혹의 영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깨달으면서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늘 깨어서, 기도로 깨어있고, 말씀으로 깨어있고, 성령으로 깨어 있어서,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과학만능의 사상이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는 그것을 신뢰하는 사상이 우리 주변에 가득차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영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인정하고, 그 분의 성육신과 그 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그 분의 부활하심을 고백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성이 절대시되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요한 사도의 고백처럼 이제 분명히 소속을 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랑의 길을 가던지, 아니면 미혹의 영에 속해 세상에 속한 사람의 길에 가던지, 우리는 분명한 길을 가야합니다. 새해 벽두에 우리에게 다시금 주신 이 거룩하고 복된 한 해를 진리의 영과 함께 하나님에게 속한 자로써의 길을 감당하게 걸어가는 평안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로 다가오시고, 사랑으로 다가오시고, 섬김의 모습으로 겸손으로 다가오실 때, 주님의 그 사랑, 그 겸손, 그 은혜를 충만하게 소유하고, 이제는 그 사랑 나누는 그 겸손과 그 주님의 은혜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진정한 섬김의 삶을 실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의 소속이 분명하기를 원합니다. 진리의 영에 속해 있는 자로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0 그의 계명은 이것입니다
본문- 요한일서 3: 17- 24
제목- 그의 계명은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에 서 있는 산을 바라보고 이렇게 외쳤답니다. ‘산아, 내게로 오라...’ 아주 위엄있게 외쳤는데도 산이 끄덕하지 않더랍니다. 그러자 그는 서슴치 않고 ‘네가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겠다’ 며 산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2004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사명이 있습니다. 기도의 사명, 봉사와 구제의 사명, 친교와 섬김의 사명 등 , 여러 가지가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의 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존재하는 줄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 전도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땅 끝까지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산을 향해서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사명이요, 작게는 성도의 사명입니다. 영혼구원을 위하여 교회학교에서는 어린이들을 열심히 가르칩니다. 영혼구원을 위하여 각 성가대는 하나님을 송축하고 성도들의 가라앉은 영혼을 새롭게 일으켜줍니다.
목회자는 말씀을 통하여 여러 섬김의 자리에 있는 분들이 성령의 열매를 잘 거둘 수 있도록 조화를 위해 힘씁니다. 고전 9: 19- 22에서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여러 모양이 된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라며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될 수 있는 선교적 마음과 이해를 가져야 할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위대한 선교명령이라고 하는 마태 28: 19절에 보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교회는 주님의 이 명령에 순종해서 올 한해도 힘써 달려가기를 소원합니다. 한 눈 팔아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기도하면서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흩어져 찾아갔던 선교지는 '땅 끝'이었습니다. 전도란 산이 와 줄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산을 향해서 가는 결단이요 행동입니다. 가도 어슬렁 어슬렁 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푯대를 행하여 다리되 분명한 룰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 함께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88는 평생을 살면서 하나의 룰이 있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규칙대로.."이었습니다. 메도디스트 라는 감리교회의 이름도 거기서 비롯되었답니다.
사람들이 사울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심히 자기의 시간도 쓰고, 물질도 쓰면서 희생하고 봉사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주님과 상관이 없이 자기 중심, 자기 도취에 빠져 일한 경우입니다. 마치 사울처럼 말입니다. 그는 고백합니다.‘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내 마음이 특심하였거늘.....’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 26: 14)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내가 주님을 위하여 열심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네가 지금 착각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의 열심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자기만족에 빠져 일하지 않았는지 뒤돌아 보야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변함없는 한 가지 규칙, 곧 하나님의 방법대로 라는 삶의 기준이 결코 흔들리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L.A 국제 마라톤에서 러시아의 '나데쯔 일야다나'가 여성부에서 당당히 1위로 골인을 했습니다. 세계 대회에서 1위를 했기에 그녀는 당연히 러시아의 영웅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세계적 방송매체들이 집중적으로 인터뷰를 요청하는 영광을 누리며 박수 갈채를 받고 있을 때,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습니다. ‘당신은 실격입니다’
사연을 알아보니까 이 여성은 마라톤 도중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코스 옆에 있는 주유소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볼 일을 본 후에 다시금 마라톤 코스를 향해서 앞으로 가로질러 갔습니다. 최선을 다해 42.195Km를 뛰었다고 생각했고 결승점에서 우승 테이프까지 끊었는데, 그녀의 주행을 체크하던 심판관이 목적지를 도착하여 그녀의 실격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유는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면 다시 들어올 때 방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가로질러 뛰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자동차에 기름을 넣기위해 주유소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처럼 뛴 것입니다. "20m를 덜 뛰었기에 실격입니다"
법대로 해야 합니다. 목숨 걸고 42.195K를 뛰었지만 실격이예요. 주의 방법대로, 주가 원하시는 대로 충성하기를 축원합니다. 내 멋대로 해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 멋대로 하고 나서 실격 당하면 더 허탈하잖아요. 더 속상하잖아요.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23절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가지를 요청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믿음, 변함없는 믿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 믿음 소유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그 믿음을 가졌으면 계명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추상적인 계명으로 생각하는데, 사랑은 어떤 종류의 감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결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가인의 이야기가 우리의 귀에 들려옵니다. 사랑이 결핍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의 자리에는 살인이라고 하는 엄청난 결과가 그 자리를 메꾸게 됩니다.
이 가인의 이야기들이 방송을 통해서, 신문을 통해서 끊임없이 이 세상에 사랑의 굶주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들려옵니다. 사랑이 굶주린 이들이 결국은 미움을 통해서, 견디기 어려운 삶으로 전락하고 마는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왜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왜 그렇게 빠지지 않고 10년을 하실 수 있습니까?’ 왜 그렇게 헌신하십니까? 목사를 위해서 하시나요? 여러분의 경력을 위해서 하시나요? 아니지요. 여러분의 대답은 오직 하나여야만 합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 사랑 때문에 변함없이 10년을 하루 같이, 20년을 하루 같이, 아니 평생을 주님과 동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지 왜 기도하시나요? 왜 섬기시나요? 왜 전도를 하시나요? 사랑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빚진 자라’ 성도 여러분, 빚진 사람의 마음이 어떤가요? 늘 빚을 갚으려고 하는 마음으로 부담이 되지요. 백 만원을 빚지면서 약속했을 것이빈다. "한 달 후에 갚겠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다가옵니다. 이상하게도 꾼 사람은 한 달이 빨리 오는데 돈을 꿔 준 사람은 한 달이 너무나 더디 오지요?
‘오늘 약속 날인데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아유, 미안합니다. 한 달만 연기 합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 달 후에 약속 거의 안 지킵니다. 그리고 1년 가고 몇 년 갑니다. 나중에는 빚 진 사람이 오히려 큰 소리 칩니다. "그 까짓 것 백만원 가지고 사람 성가시게 군다"고 말입니다. 이게 도둑놈 심보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꾸었으면 어떻게 해서라고 그 빚을 갚으려고 절약하면서 덜 먹고, 덜 입으면서 단 10만원이라도 만들어 가지고 와서 ‘내가 최선을 다 했는데 이것밖에 못 준비했노라"고 하면 아무리 구두쇠라도 감동이 되어서 ‘그냥 내가 도와드린 걸로 할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열심히 사세요’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런데 꿔 준 사람보다 꿔 간 사람이 더 잘 먹고 살아요. 더 좋은 옷 입고 다닙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서 속이 뒤집어 지는 거예요.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빚졌는데, 어떻게 뻔뻔하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 빚진 하나님의 사랑을 갚으려고 몸부림을 쳐야지요. 전도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섬김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을까? 몸부림을 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것을 요구합니까? 하나님은 2달란트 받은 사람이 4달란트 남긴 것이나, 5달란트 받은 사람이 10달란트 남긴 것이나 성경을 보세요. 한 자도 안 틀리고 똑같이 축복하고 칭찬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사랑의 빚진 자로 그 빚을 갚으려고 하는 열정만 있다면 그 몸부림만으로도 칭찬받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삶이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모습은 오늘 18절 말씀처럼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2가지를 요구하는 거예요. 구체적인 사랑의 방법은 행함과 진실성에 있습니다.
야고보사도는 1장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야고보 2장 14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절에 가서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사랑이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난 성탄절 여러분의 정성어린 사랑의 선물은 소사동에 있는 노숙자들과 식사를 하지 못하는 분들을 섬기는 "이웃사람공동체'에 성탄선물로 전달이 됐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성탄절 선물로 초코파이 한 상자씩이라도 예쁘게 포장해서 준비합시다" 라고 광고드렸으니 이 강단 앞에 산더미처럼 쌓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바보입니까? 하지만 결과는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작은 수의 가정들이 동참을 하였답니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바르게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 역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진실함으로 하자"
올해 평안의 교회는 28억이라는 큰 예산을 세웠습니다. 8억은 경상비이고, 20억은 복지센타 대지 1.000평을 구입하기 위한 비용입니다. 이제는 우리 지역 주민들을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제대로 섬겨보려고 작정을 한 것이지요. 이 지역을 온전히 주님의 사랑으로 사로잡으려고 작정을 한 거예요. 이 일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몫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새해에는 우리 주변에 난무하는 가인의 이야기는 그만 들리게 해야 합니다. 미움 때문에 상상도 못 하는 결과가 나오는 그런 사랑의 결핍의 이야기는 이제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십자가에서 우리를 값없이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야기만 가득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올해도 변함없이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이 말씀 붙잡고 올 한 해도 온전한 헌신과 섬김으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이제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결단코 사랑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 주신 능력 가지고 세상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게 하셔서, 수 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땅끝선교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그 사명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9 미움에서 사랑으로
본문- 요한일서 3: 13- 16
제목- 미움에서 사랑으로
세상을 살다보면 사랑하는 일과 미워하는 일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교차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만 해도 사실은 시간이 모자란다고 하는 어느 시인의 싯귀처럼, 우리의 일상사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이웃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그럴 경우 사랑의 실천에 헌신적이어야할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가져다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미워할 틈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에게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랑에 그만큼 공간이 생겼다는 이야기지요. 사랑만으로 가득차 있어야할 우리의 심령에 미움이 자리함으로 그만큼 공간이 비워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고린도후서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렇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능력이란 바로 주님으로 말미암는데, 그 주님의 능력이 다름아닌 강권하시는 사랑이라는 고백입니다. 기도할 수 있음도 사랑때문이요, 전도할 수 있음도 사랑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다른 사람에 의해서 미움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예고의 성격을 갖는 이 말씀 속에는 세상으로 부터 미움을 받을 수 있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당당함을 가지고 대처하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까? 요한복음 15장은 이 부분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로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 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리라’ 이 말씀 속에 해답이 다 들어있는 줄 믿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첫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전에는 그들과 같이 죄를 지었습니다. 같이 술 마시러 다녔고, 2차, 3차 가지 말아야 할 곳까지 스스럼없이 다녔어도 그저 재미있고 즐거웠지요. "우리끼리는 비밀로 하자" 하면서 죄 가운데 파묻혀 살았으나 인생이 즐겁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서로 의기가 투합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주님을 알고나서 주님의 자녀로 거듭난 삶을 결단했을 때, 세상에 속하였던 내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소속을 바꾼 이후에 세상은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미움을 받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다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호형호제 하면서 오히려 재미있게 지낼수 있겠지요.
주님께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다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터인데...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었기에 너희는 이제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주님도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미움을 받지 않기위해 다시금 세상을 사랑하며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거룩한 백성의 삶을 버리고 사단의 종노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에게 '성숙하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경우 대부분은 세상의 미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히 믿음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성숙한 반응을 보이며 대처하는 모습이지요. 이제 내가 미움을 받는 것은 정상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세상의 불의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의와 불의가 어찌 함께 하겠느뇨!..."
두 번째는 15절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나는 다른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 라고 자위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는 마음으로 살인을 하는 경우가 있음을 인정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고 하신 것처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 5:21- 22)
세상법으로 보면 살인이 아니지만, 주님의 법으로는 이미 살인을 한 것이지요. 살인의 경우, 다른 사람을 죽이는 타살만 살인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자살도 심각한 살인입니다. 오늘 성경은 뭐라고 하십니까?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천국의 소망이 없기에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살인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도 살인이지만, 자기 스스로 생명을 빼앗는 것도 심각한 살인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그룹의 정몽헌 회장이 예수를 믿고 천국의 소망을 확신했다면, 결코 그는 옥상에서 투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억만장자였지만 그거이 무슨 소용이 있었습니까? 수십 만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대기업의 회장이 무슨 도움이 되었습니까? 사람들은 자살한 이에 대하여 동정적이지만 사실은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저질렀음을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왜 능력이 됩니까? 16절 중반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까지 갈 수 있는 것이구나...." 어디까지 입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군병들까지 용서할 수 있는 힘이요 능력인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사랑의 능력에 붙잡혀야 합니다.
우리 옆 사람과 손을 잡고 인사 하십시다. ‘전에는 가끔씩 미워했었는데, 이제는 사랑하기 원합니다’ 부부도 미워할 수 있지요. 형제 당연히 미워할 수 있습니다. 부부나 형제나 미워할 수 있다면, 이웃과 우리와의 관계 얼마든지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그 미움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데 미움이 생겨요. 그래서 우리말이 있어요. 달라는 거 없이 밉다. 아니, 나에게 달라는 것이 없는데, 요구하는 게 없는데 밉다는 거지요. 우리에게 부담을 주지 않지만 그냥 미운 사람이 있어요.
우리의 마음의 미움은 무엇과 이웃사촌이냐 하면, 교만과 이웃사촌입니다. 교만과 미움, 시기는 서로 아주 좋아하는 이웃 사촌입니다. 당회가 끝나고 나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요. 어느 목사님 교회에 당회가 끝났는데, 소문이 났어요. 어느 집사님이 꿈에 천국을 갔다 왔다는 거예요. 목사님이 ‘야, 나도 못 가 본 천국을 집사님은 갖다 오셨구나’ 심방을 갔답니다. ‘집사님 천국 갔다 왔다면서요?’ ‘아유 꿈에요’ “그래도 그렇지 나도 그런 꿈 꿨으면 좋겠다. 천국 갔다온 이야기 좀 해봐요” ‘아유 뭐 그런 거 가지고요’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해봐. 얼마나 좋을까? 집사님?”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하는 얘기가 ‘목사님 천국에 갔더니요. 제 문패가 있대요’ “그래요? 뭐라고 써있습디까?” ‘권사라고 써있습디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천국에서는 나를 권사로 알아주는데, 목사 당신은 아직 집사로 여기느냐 이거예요. 기가 막힌 이야기지요. 꿈이야기 갔다가 목사를 죽사발 만드는 집사들이예요. 그 얘기를 교인들에게 해 보세요. 내가 천국을 갔다왔는데 문패가 있습디다. 아유, 집사님 무슨 문패요? 권사라고 되어 있습디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교인들 어떤 생각이 들었겠어요? 목사님이 영계가 어두워서 그래. 천국에서는 집사님 권사로 알아주는데 아직도 집사님을 집사라고 그러니.....그럴거 아닙니까?
여러분, 제일 좋지 않은 심보를 가진 말이 어떤 건지 아십니까? 당회 끝나고 권사가 안 된 집사님 보고, ‘아휴, 집사님’ “왜요?” ‘왜 집사님이 권사가 안 됐지?’ “왜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권사예요?” ‘내가 볼 때는 권사 되는 게 충분한데.....’ 제일 죄송하지만 악질 적인 말입니다. ‘아휴 권사님은 왜 장로가 안 됐지?’ “아, 내가 무슨 장로가 돼?” ‘내가 보기에는 권사님 장로 되는 게 충분한데, 왜 장로 추천이 안 됐지?’
제가 부탁하건데, 절대로 그런 식으로 이간질 하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 자기의 교만을 나타내지 마세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미움 시기 교만 이런 것들은 결국 살인으로 가는 것입니다. 살인은 사람의 목을 졸라야만 살인이 아니라 이미 상대방에게 그런 상처를 주었어요. 목회자에게 그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살인을 한 거예요.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사랑을 알았으면 이제는 그 사랑을 실천해라. 그러면서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알아서 이제는 사랑을 실천해도 그것이 상 받을 일이 아니야. 무슨 일입니까? 마땅한 일이라는 거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또 우리는 본문에서 가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생명의 삶으로, 그리고 소망의 삶으로, 사랑의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하지만 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미움으로, 시기로, 살인으로, 죽음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어떤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소망의 이야기를 듣기를 즐거워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가쉽거리를 좋아하지요. 그래서 신문을 봐두요. 앞에 있는 큰 사회적인 것 관심없고, 저 뒷면에 가서 요만한 토막 색연필, 누가 무슨 짓 하고, 간통 하다 걸리고, 무슨 연예인 누구가 이혼하고, 이런 것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가쉽을 좋아하는 사람은 큰 인물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의 이야기, 그 분의 사랑의 이야기, 소망의 이야기, 용서의 이야기에 언제나 귀를 기울일 뿐 아니라 너희가 그 사랑 알았으면, 실천하기를 원하시는 그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응답하며 한 해를 마감하고, 소망으로 새 해를 시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주님, 진리와 행함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진리와 행함에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이제는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소속이 달라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시작도 귀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어 마침도 아름답게 하시고, 그리고 새롭게 주님과 새해를 출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8 하나님께로서 난 자
제목- 하나님께로서 난 자
본문- 요한일서 3: 4- 12
사도요한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하여 죄의 성격과 기원에 대해서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를 정의하기를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죄를 가리켜 불법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에게 불법의 상태를 요구합니다. 이 불법이란 특별히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나는 시대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죄'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불법이라는 상태로 존재하는지 아십니까? 죄는 언제나 의와 대립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의로우신 주님과 불법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죄의 상태로 놓여있다면, 언제나 주님의 거룩하심과 충돌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분명히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의와 불법을 걸치고는 살 수가 없어요. 마치 중앙선을 걸치고 좌로 갈까, 우로 갈까 기회를 엿보는 운전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8절의 말씀입니다. 죄를 짓는 자의 소속을 확실하게 정의를 해 놓았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기에 이 죄로서 난 자, 마귀로부터 붙잡힘을 받은 자는 결국 마귀로 인하여 의로운 삶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 인하여 거듭난 자는 누구를 위하여 살게 됩니까?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입니다. 우리 기독신앙의 결론은 순교의 신앙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사실은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그 다짐은 초대교회로 보면 죽기를 작정한 것이지요.
초대교회 당시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알려지면 그는 로마 군사들에게 끌려가 갈고리로 눈을 빼는 형벌을 받거나 팔 다리가 잘리는 극형을 당하게 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로마시대 콜로세움에서 굶주린 사자들에게 먹이가 되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교사를 보면, 성도의 신앙이란 곧 순교의 신앙이요 십자가를 지고 갈 각오가 되어있는 헌신의 결단이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회교권에서 여러 전문 사역자들에 의해서 조심스럽게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역시 쉽지않은 사역입니다. 왜냐하면 신분증에 종교란이 표시되어 있어 이슬람이 아닌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든지 불이익을 당하도록 하는 사회적 차별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무원 임용도 안 되고 취직도 어렵기에 자영업을 하는 수 밖에 없는데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닌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러한 삶의 구조적 고통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성도의 위대한 삶과 세상과 타협하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산 자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에게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10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인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죄로부터 난 자는 마귀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들은 마귀의 자녀가 되고 싶지 않겠지요? 세상 누가 마귀의 자녀가 되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실상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귀라 하면 그 이미지가 머리에 뿔이라도 난 것으로 생각하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마귀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언제나 사탄 마귀의 모습은 우리에게 아주 유익한 존재처럼 가장하고 우리를 위하는 자처럼 부드럽게 다가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마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당신을 위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자동차 등록 댓 수로 천 만대가 넘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가정마다 자동차는 이제 필수품이 되었지요. 그 흔한 자동차 시대에 운전을 하다보면 신호를 어길 때가 있습니다. 중앙선을 넘거나 유턴금지 지역에서 유턴을 하지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렇게 해야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하지 않습니까? 도움이 안 되는데 불법을 행하겠어요?
그렇습니다.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옵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속삭일 때 우리는 맥없이 넘어가기 일수이지요. 결국 사람들은 불법을 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죄에 종노릇하게되고 결국은 사탄 마귀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강력하게 다가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가인에게는 사랑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아벨이라는 좋은 동생이 있었지요. 하지만 사단은 가인으로 하여금 시기와 미움을 동원하여 돌로 쳐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됩니다. 아벨이 누구입니까? 둘도 없는 형제입니다. 성도 여러분, 형제를 돌로 죽인다고 하는 것이 상상이나 되십니까? 그런데 죄의 종노릇하여 사단 마귀에게 이끌리면 형제도 죽일 수 있게 됩니다.
어제 종일 뉴스의 주종을 이룬 가슴 아프고 떨렸던 사건이 하나 있었지요? 6살난 아들과 5살난 딸을 한강 다리 위에서 떨어뜨려 죽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도망치다가 목격자의 신고로 붙잡혔지만 알아보니 그는 아이들을 죽이기 위해서 2번이나 그곳을 답사하였고, 반항하지 않도록 수면제까지 먹였습니다. 18살 고등학교 시절에 동거를 하다가 아이를 낳고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이 행복하거나 순탄할리 없었습니다.
이제 겨우 24살입니다. 아이들이 둘 씩이나 딸려있는 아버지의 존재를 바로 인식했을 때는 너무나 자신의 삶이 무겁게만 느껴졌겠지요. 무엇에선가 해방되고 싶은 욕망이 그로 하여금 자녀들을 살인 유기하는 길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그를 진단하면서 정신장애, 혹은 인격장애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비정한 아버지라고 많은 네티즌들이 벌떼 같이 글을 써 올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 역시 가능한 일이예요. 왜냐하면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단에게 속한다면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가능한 현실로 다가옴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믿음과 사랑 안에 거할 줄 믿습니다. 기도와 감사의 영이 그를 주장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언제나 하나님과 관계가 원만합니다. 과거에는 사람을 판단할 때 지능지수인 I.Q 즉 intelligence quotient를 중요시 하였습니다. "I.Q가 얼마야? 130입니다. 야 대단한데..." 회사에서도 취업이 쉬웠고 대우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90년대 이 후로는 학자들로 부터 새로운 기준이 제시되었습니다. Emotion Quotient 즉 감성지수인 E.Q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교육학자들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를 주도해 나가는 듯 하였으나 최근에는 새로운 지수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Network Quotient 즉 관계지수라고 하는 N.Q입니다.
보편적으로 직장생활을 6개월이나 1년도 못 가서 자꾸 옮기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 분들은 대체로 이 관계지수가 낮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는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스타일입니다. 결국 내 배짱대로 구멍가게라도 내어서 운영할 수 밖에 없는 일인데, 그것도 얼마 못가서 부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빈둥빈둥 노는 유형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제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사로 근속 10년을 한 분들, 성가대원으로 근속 10년을 하신 분들은 매년 배우자와 함께 제주도 2박3일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 재정으로는 지출이 크지만 10년을 하루같이 헌신하며 자리를 지키신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1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삶의 변화가 있었겠습니까? 가정의 변화, 직장의 변화, 자녀의 변화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약속한 헌신의 자리를 지킨다고 하는 것는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존경받기에 충분한 일이라 믿습니다.
이 관계지수는 사회생활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영적으로 신앙적인 부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지수가 높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과 원만하다고 하는 것은 성도의 생활에서 잘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 선교회는 한번 선교회원이 되면 평생을 함께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20명 -30명이 되는 그 많은 회원들의 면면을 보면 자신과 성격이나 취미 등이 맞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언제나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선교회를 통하여 주의 일에 힘쓰는 비결이 어디있습니까? 그것은 곧 모든 회원들의 Need 즉 그들의 필요를 미리 알아 채워드리는 섬김의 자세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들에게 눈높이로 다가가는 것이지요. 그 다양한 사람들보고 나에게 맞추라고 한다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는 하나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 사람은 성격이 좀 날카롭고, 저 사람은 너무 자유분방하고... 모든 공동체가 그런 면에서 늘 맞추어 줄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소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지수가 높아지면 이웃과의 관계지수도 높아질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런 모습이 됩니다. 그 사람 우리 선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야...라는 인정을 받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처음 얻은 안디옥 교회처럼 은혜의 공동체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로 이제는 정말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고 요한사도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사랑으로 시작했지만, 미움과 시기라고 하는 사단의 계략에 이끌려 결국은 형제였지만 돌로 죽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죄의 종으로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기 맘대로 할 수가 없어요. 바울도 때로는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 24- 25)
기독신앙의 위대함은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오늘을 축복하는 주님의 손길 때문입니다. 세상은 늘 과거를 따집니다. 그래서 이력서를 통해 사람을 판단합니다만, 주님은 언제나 오늘을 소중히 여기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로 결단하고 회개한다면, 거듭난 자녀로 새출발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붙잡힌 간음한 여인을 놓고도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을 테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희망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오늘 하나님께 새롭게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로서 난 자의 삶을 청산하고, 이제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로서 분명히 우리의 삶을 주님 앞에 드리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를 향해서 그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함이니라"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탄을 앞두고 주님앞에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다고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7 하나님의 자녀됨의 의미
제목- 하나님의 자녀됨의 의미
본문- 요한일서 3: 1- 3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복 중의 복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귀한 일이요 복된 일입니다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만한 자격이나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자녀 삼으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만한 삶을 살지도 못했고 그 분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의 기준에 합당하지도 않아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녀됨의 감격을 입술 뿐 아니라 심령 중심에서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자녀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하는 말씀들이 오늘 성경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14절에 보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로 알거니와...’, 19절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4장 4절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13절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 사도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됨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깊이 심어주어 이 땅에 사는 동안 부끄러움이 없는 주의 백성으로 살도록 인도하려는 목회적 열정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을 에베소서 2장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요, 이 세상 풍속을 좇던 자요,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던 자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우리의 모습, 바로 나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니까 달라진 줄 믿습니다. 달라졌다고 하는 의미에는 변질과 변화가 있습니다. 우유나 생선 같은 것을 마트에서 사 오면 언제까지 먹어야 한다는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유를 먹다보면 밀릴 때가 있어요. 오늘이 14일인데 유통기한이 13일 까지면 ‘아, 하루 지났구나’ 하고서 긴장되지만 일단 컵에 따라 맛을 봅니다.
‘아직은 괜찮네..’ 그리고 우리는 계속마십니다만 아이들은 기겁을 합니다. 기한이 넘었다면 일단 마셔보기 전에 그냥 쏟아 버려요. 요즘 젊은 사람들의 가치관은 낸정하기 이를데 없습니다만 사실 그것이 옳바른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변질되었다면 아까워도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이 변질되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거 버릴 수 있겠습니까? 버려야 되는데, 버려야 당연한데, 이걸 못 버리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성도 여러분, 변화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긍정적으로 달라짐, 예수 안에서 그 분을 닮는 변함은 언제나 은혜로운 모습이요 아름다움인 줄 믿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된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지혜로웠고 머리가 좋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술수가 뛰어나고 융통성이 탁월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서 돈도 많이 벌고 자기가 원하는 소원도 이루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부자가 되었고 이루고 싶은 일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루었기에 그는 성공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삶을 기초부터 흔들어 버리셨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복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어찌 복이 되겠습니까? 그거 착각해도 큰 착각이지요. 야곱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방법은 다 동원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형제도 속였고 부모도 속였습니다. 일가 친척도 속이면서 돈이 되는 것은 다 모았어요. 거부가 되었고 이제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들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었어요.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훅 부시면 먼지 같이, 검불 같이 날아 가거니와....’ 착각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야곱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어요. 결국 그 많은 재산들, 사회적인 성공의 이름들을 다 포기하고, 압복강에서 홀로 남았어요. 천사와 씨름하다가 천사가 떠나려고 하니까 야곱이 눈물로 고백합니다. ‘떠나지 마세요’ 그 전에는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았어요. 잘 사는 것 같이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제 철이든 야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면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말로 철들었다고 하는 거지요.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엉덩이뼈를 부러뜨렸어요. 큰 시련을 주신 거예요.
신앙생활 잘 가다가 어떤 시련이 생기면 삐끄덕 하고 그 소리가 요란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고 나서도 하나님을 향한 그 간절한 사모함, 그 사자를 붙잡는다고 하는 것은 뭐예요? 하나님을 향한 그 열정과 사모함은 변하지 않았어요. 절대로 내 환도뼈는 부러지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모함은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제야 물어보십니다. ‘내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말에 히브리적인 의미는요, 도둑놈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도둑놈이었어요. 부모도 속이고, 형제도 속이고, 일가친척도 속이고, 다 속였어요. 돈벌이만 된다면 다 속였습니다. 도둑놈이지요?
일본말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이렇게 생각하라. 일본사람들이 외형적으로는 친절하고, 아주 예의 바른데, 머릿 속에는 뭐라고 다른 사람들을 대해서 생각하고 있느냐 하면 민나도로보데스, 모두가 다 도둑놈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사람을 대한다는 거예요. 도둑놈 눈에는 도둑놈 밖에 안 보이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니 야곱이 도둑놈으로 살았으니까 자기가 상대한 모든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먼저 빼앗고, 약삭빠르게 빼앗아야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이름이 무엇이냐?’ ‘도둑놈입니다. 약탈자입니다.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입니다’ 이름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 입으로 너의 인생을 좀 내가 한 번 고백해 보라는 거예요.
그 전에는 야곱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압복강에서 주님을 만난 고백은 그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저 도둑놈 같이 살았습니다.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살았습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내 입으로 그렇게 고백할 때까지 내가 기다린거야. 그리고 이제 내 입으로 고백하니 내가 말하는데 너 이름 바꿔. 이스라엘이라 해라’
그 후에 이스라엘의 인생은 하나님의 자녀의 인생이요, 축복된 인생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많이 보는 것도 중요하시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그것은 헛수고 하시는 거예요. 헛수고 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 ‘저 헛수고인데.....’ 더 안타까운 거는요, 헛수고라고 얘기를 해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들을 만한 믿음의 분량이 안 되기 때문에 못 해 주는 안타까움이 더 마음 아파요. ‘성도님 그거 헛수고예요’ 라고 얘기를 해 주어야 하는데 못 해주는 거예요. 그거 얘기해 주었다가는 시험 들까봐요. 그나만 있는 신앙도 떨어질까봐 못 해주는 거예요.
신약에 와서 대표적으로 주님을 만난 후에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입니다. 젊은 사람이 공회 의원으로 재물도, 학문도, 권세도 가졌던 전천후입니다. 출세의 모델이지요. 얼마 전에 30대에 청와대에 최고의 지위를 가지고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던 사람이 검찰에 출두하대요. 난 1억 밖에 안 받았다고 그러대요. 그렇게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의 권세도, 젊은 나이에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모델 같은 출세의 상징도 별거 아니구나. 6개월도 못 가는구나.
사울이 그랬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더 착각하고 살았던 집은 자기가 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위해선 한다고 행동이었어요. 성도들과 상대해 보면 가끔씩 웃기는 일이 있어요. ‘목사님 저 기도해 보니까요. 하나님이 이 교회 가라고 해서 응답받고 왔어요’ ‘아, 그러세요?’ 그리고 한 몇 년 열심히 해요. 어느 날 찾아옵니다. ‘목사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요?’ ‘제가 기도해 보니까 하나님이 떠나라 그러데요. 그래서 응답받고 떠납니다’ 아주 웃기는 일이지요. 자기가 생각 다 해 놓고, 그 모든 결정은 하나님 이름 다 갖다가 써 먹는 거예요. 하나님 이름을 도용하는 거예요. 얼마나 편리하게들 사는지 몰라요. 자기가 결정 해놓고 다 하나님이 응답주셔서 하는 거고, 오는 것도, 가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이래요. 아주 목사를 앞에 놓고 희롱하고 있는 거지요. 자기 편의 대로 모든 것을 생각 하지요.
오늘 이 사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실 줄 알았어요. 성경에 보면 여호와에 대하여 특심하였더라. 그런데 다메섹에 가서 아나니아와 하는 제자와 그의 공동체를 또 잡으러 가다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지난 번 성지순례에서 처음으로 시리아의 문이 열려서 시리아에 중부연회의 감리사님들이 다녀왔는데, 그 다메섹커스에 지까라고 하는 스트릿에 다녀왔어요. 쭈욱 걸어가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바울이 걸었던 그 지까라고 하는 길, 거기에 있는 아니니아에 있는 집에 들어갔어요. 사울은 아나니아에 있는 집에 들어가서 아나니아의 보살핌을 받고, 그에게 세례를 받고, 안수 받아서 눈을 뜬 줄로 믿습니다.
참 감동적이었어요.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사울이 바울된 그 현장을 이 시리아의 문이 열려서 처음으로 들어갔어요. ‘아, 이 집에서 사울이 세례를 받고, 바울이 되었구나’ 주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니었는데 사울은 그렇게 알고 살았어요. 그런데 주님은 네가 뒷발질하기가 마치 소가 가시채를 뒷발질하기처럼 고통일거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내가 싫어하는 일을 너는 네 이름으로 그렇게 신나게 하고 있는지 너 그거 모르느냐! 사울은 거기서 주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무엇이 원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면서도 당당하게 생각했던 사울, 다메섹에서 주님 만나고 나서 달라진 줄로 믿습니다.
사울이 바울 되듯이, 야곱이 이스라엘 되듯이 변화되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집사가 되었습니다. 권사가 되었어요’ 라고 말한다고 해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그의 인격을 배우고, 그의 인격을 닮아서 삶의 내용들이 변화되어지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줄 믿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지요. 주님 만나서 달라진 것, 글쎄, 옷차림도 조금 달라져야 하겠지요? 주일예배 때는 옷차림도 달라지기를 저는 바랍니다. 가장 여러분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옷들로 입고 오시고, 좀 노인들은요, 이쁜 옷들 입혀 보내세요. 꾀죄죄하게 다니시지 마시고, 자식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또 우리 자신들도 가장 정중한 모습으로 나와야 되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데가 엎드려 절하는 기본적인 예배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지금 여러분들이 의자에 편하게 앉아 계시지만, 그 예배의 중심은 엎드려 절하는 예배의 중심의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돼요. 그러니 어떻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을 수가 있어요? 있을 수 없잖아요. 어떻게 팔짱을 끼고 예배를 드릴 수가 있어요? ‘아, 어떤 목사님들은 강단에서 다리 꼬고 있던데요?’ 그거 배우지 마세요. 그 분도 100% 온전한 것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배우지 마세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만약 여러분들이 청와대의 대통령에게 초대를 받았다면 난리가 날 거예요. 뭐, 백화점 가서 옷부터 고르기 시작하고, 벌써 한 달 전부터 머리를 볶으고 지지고 난리가 날 거예요. 여러분들이 대통령 앞에 가서 주머니에 손 넣고, 팔짱 끼고, 다리 꼬고 그리고 대화할 수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우리의 한민족의 정서로는 우리가 윗사람 앞에서 그러지 못하잖아요. 하나님이 대통령과 비교가 됩니까? 대통령을 100명이 모아놓은 들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모습이, 정말 그런 마음이 표현이 되는 것입니까? 외형적으로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 달라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전에는 내 중심이예요. 교회 오는 날은 어떤 날? 별 볼일 없는 날. 친구와 만나자는 약속도 없고, 뭐, 백화점 할인하는 세일기간도 아니고, 아무런 스케줄에 뭐가 없어서 교회나 가자. 전에는 그러고 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주님을 만난 후로는 그러지 않았어요. 내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 중심으로 달라진 줄 믿습니다. 모든 것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예요. 시간도 하나님 중심, 내 물질도 하나님 중심, 내 마음의 씀씀이도 하나님 중심, 내 삶의 기준도, 내 삶의 가치관도, 내 삶의 우선순위가 이제는 내 삶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이 나를 보고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 그 때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는 줄 믿습니다.
입으로 내 스스로 이야기 한다고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 놀랍게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은 세상 사람들이 더 잘 알아요. 우리끼리 집사님, 권사님 백날 해봐야 우리끼리 얘기하는 거예요. 근데 우리끼리도 잘 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제가 좀 당부하고 싶은데, 성도들 중에 직책이 있는 분들은요, 직책을 부르세요. 김집사님. 박집사님. 님 자 부르기 어려운 같은 선교회 또래면 김집사, 박집사 이렇게 부르세요. 함부로 이름 부르지 말아요. 천박하고 안 좋아요. 정말 덕이 되지 않아요. 그것 좀 바꿔 주세요. 이은숙 권사님, 박은경 집사님. ‘야, 은경아’ ‘은숙아’ 이렇게 좀 부르지 말란 말이예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직책이 있잖아요. 아니, 권사님, 같은 또래면 김집사, 박집사, 그렇게 부르면 얼마나 좋아요. 이게 무슨 아주 유치한 사회 모임도 아니구요. 그것은 친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끼리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세상 사람이 보면 더 냉정합니다.
제가 몇 번 이야기 한 기억이 나요. 제가 군대에 있을 때 군목을 2분 모셨는데, 새로 온 군목이 있었어요. 23, 4살 밖에 안 되었지만, 신학대학원을 나왔기 때문에 중위를 달고 입대를 했어요. 군의관과 법무관은 중위로 들어와요. 사단장은 별을 2이나 단 사람이예요. 하늘 같은 사람입니다. 일반적인 중위들은 사단장 근처에도 못 갑니다. 그런데 새로운 군목이라고 해서 새로운 목사님이라고 환영파티를 열어 주었어요. 마주 식탁에 앉았습니다. ‘목사님 우리 부대에 새로 오심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소주잔을 딱 주고, 한 잔 받으십시오. 제가 그 뒤에서 서빙을 했거든요. 육군병장 황병장. 손이 떨려요. 사단장께서 육군중위에게 술을 다 하사하시고 벌벌 떨면서 술을 받아서 돌아서서 황송하게 그 잔을 받았어요.
한 잔 마시면요, 처음에 한 잔만 받으라고 하지만, 그거 무너지면 두 잔 세 잔은 그냥 가는 거예요. ‘한 잔만 먹어. 한 잔만 받어’ 그 한 잔을 깨기가 어렵지요? 한 잔만 받으면 그냥 가는 거예요. 1차가 끝났어요. 술을 먹는 사람들은 1차로 끝나는 법이 없어요. 1차는 형식적인 모임입니다. 소위 파티 매너를 가지고 정중하게 하는 자리가 1차모임이예요. 술 먹는 사람들의 본심은 2차, 3차에 가야지 본색이 드러납니다. 초청받은 분들 다 떠나고, 연대장들, 참모들 둘러앉아서 2차가 시작이 되었어요. 정말 현대적이고 멋있는 목사님이 우리 부대 왔다고 그렇게 추켜 세우던 그 사단장이 1차가 끝나고, 2차가 시작되면서 연대장보고 사단장이 ‘이번에 온 목사도 돌파리가 왔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는 우리는 세상이 더 잘 압니다. 정신 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너희의 행실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끼리는 이야기 해서 소용이 없어요. 세상이 우리를 바라보고, 복되다고 해야 그게 복이고,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간다고 당신들은 우리 지역에서,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라고 해야 우리가 빛과 소금이예요. 그래서 주님도 너희가 세상에서 빛이요, 세상에서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한 해를 마무리 되는 이 12월 중순에 우리가 와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당시의 초대교회의 성도등을 향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된다고 하는 것, 여러분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으로 그렇게 말씀을 하면서 이제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자녀답게 사시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21세기의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 초대교회에 간곡히 권면했던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에 응답들이 바로 오늘을 통해서 증거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우리 중심이었는데, 주님을 만난 이후에 우리의 모습이 이제는 우선순위가 달라져서 하나님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믿음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먼저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이웃을 주의 사랑으로 섬길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우리의 삶의 내용이 달라지는 성도의 삶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하나님 자녀됨에 아름다운 증거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증거되게 하시고,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소망 가운데 살면서 성도의 순결함을 유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6 적 그리스도를 경계하라
본문- 요한일서 2: 18- 29
제목- 적 그리스도를 경계하라
2장 전반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스도와의 교제 그리고 성도와의 교제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코이노니아의 의미는 대단히 폭넓은 것이어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친교라고 번역하지만, 사실상 섬김, 봉사, 구제 등이 모두 다 포함되어 있는 전천후 사역을 총괄하는 말입니다.
오늘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새로운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를 경계하라’ 사실 이 표현은 대단히 전투적인 용어이어서 우리에게 도전적인 말이지만, 일상생활에서 보면 경계해야 할 적그리스도들이 사방에 널려 있음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요한 사도들은 적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말씀 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라고 함으로써 사도요한의 초대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로 활약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다고 하는 말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나 적그리스도가 저절로 생기는 법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통일교도 그랬고 전도관도 그랬듯이 그들은 언제나 기존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이단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이유로 요한의 초대교회 공동체를 떠났을까? 먹고 마시는 문제로 싸우다가 떠났을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4장 3절에 보면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그렇습니다. 신학적인 문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고백할 때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 (인성)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곧 하나님되심 (신성)도 고백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인정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신앙고백의 표현처럼 심위일체의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 성육신의 영광,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심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다시 부활하심 등이 모두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단 중에 대표적인 여호와의 증인 등에서는 삼위일체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하는 기독교는 틀렸다고 합니다만, 삼위란 창조주 하나님 (성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자) 그리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을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삼위가 하나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중요합니다. 1세기와 21세기는 너무나 많은 세월의 간격이 있습니다. 언어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우리 한글 맞춤법도 적어도 한 세대인 30-40년이 지나면 맞춤법을 새롭게 정리하여 표준을 정하곤 합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천지는 변하겠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느니라" 는 말씀처럼, 시대는 변하고 세월이 달라져 언어의 규칙과 기준은 새로워지지만 말씀의 정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요한은 우리가 그들을 적그리스도로 대해야 할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되심은 인정하면서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가장 신앙적으로 혼란을 주었던 이단 그룹 중 하나가 가현설 (Docetism)을 주장했던 적그리스도입니다.
말 그대로 예수께서 가짜로 오셨다는 거예요. 보이기는 하지만 실체가 아니라는 거지요. 하나님이신 것은 분명한데 예수 그리스도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래서 그들은 결국 성육신의 영광 곧 동정녀 탄생, 요셉의 가정에서 자라심, 먹고 마심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하심, 나아가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피흘림 까지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일부 사람들이 그런 주장에 따라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도 요한은 그런 주장을 하는 그룹들을 그들 공동체에서 떼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났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을 부정한다고 하는 것은 신앙의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부정하는 일이 되는 것이기에 그들은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26절에 보면 ‘성도를 미혹케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게 관하여 내가 쓰기를 원한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의 신앙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혹을 받는 사람들의 1차적인 반응이 거의 비슷합니다. ‘목사님 가보니까 똑같아요. 하나도 틀린 게 없던대요. 그런데 왜 이단이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이것이 첫번 째 반응입니다.
여러분들이 통일교를 가 보셔도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도 틀린 것이 없어요. 그들은 일반 신자와 자기들의 핵심멤버와 철저하게 구별을 합니다. 통일교의 원리강론이라고 하는 피가름의 교리는 일반인들에게는 아무리 다녀도 들어보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단계에 들어가면 그들의 감추어진 교리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단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다를 이, 끝 단자입니다. 처음과 중간까지는 똑같아요. 그러니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감정적인 열정만 가지고서는 무슨 재주로 그것이 틀렸다고 구별을 합니까? 이단은 끝이 다른 거예요. 처음부터 똑같아서 혼돈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가게 만들고, 나중에 가서야 ‘아, 이게 다르구나!’ 했을 때는 이미 깊이 너무 들어갔어요. 그 때는 알고도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결국은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간혹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워요. 이미 끝을 알고 나서는 아무리 목사가 권면하고, 아무리 이웃이 권면해도 돌아오지를 못합니다. 시저로 말하면 루비콘강을 건넌 거예요.
이단의 속한다고 하는 것이 그래서 초대교회의 주의 종들이 성도들을 향해서 이단을 경계하고, 적그리스도를 경계해야 함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릅니다. 앞으로 요한 사도는 이서, 삼서에 가면서 계속해서 이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의 삶의 주변에 이런 이단의 정체들이 앞과 중간을 가린 채 우리와 똑같다고, ‘우리와 똑같아요. 기독교와 똑같습니다’라고 그들이 다가올 때, 무방비 상태로 거기에 넘어가는 이들이 점점 많아질 수 있습니다. 21세기의 영적전쟁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 이단과 적그리스도가 양의 가죽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하는 것이지요. 분별력을 갖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시대에 세상을 따르지 아니하는 것을 경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단의 정체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의 신앙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들과 다른 대처의 방법 중에 하나, 그것은 2장 9절에서 11절에 있는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어두움 가운데 그들이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곧 그들이 삶에서 사랑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단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도덕적인 제한이 없어서 무도덕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적인 개념이 없어요.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죽여서라도 그들의 어떤 뜻과 의지를 관철하려고 합니다. 우리 부천에는 불미스럽게도 이단에 관계되는 집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도관이 태동한 곳도 지금 홈타운이 있는 곳이지요? 그 홈타운이 부천 수도권 최고의 주거지역이 되어서 저는 참 기쁩니다. 부천시의 가장 낙후된 지역이고, 전도관이라고 하는 잘 못된 이단이 거기에 집단적으로 거처하고 있던 그런 곳이었는데, 거기에서 교주 박태선씨가 죽으면서 몇몇 그룹들이 갈라져 나왔어요.
우리 역곡에도 한 집단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매장하고, 그런 일로 신문 방송에 드러나 있지만, 여전히 그 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이 들지 않나요? 아무리 바보라도 이정도면 알텐데....... 그런데 왜 안 그렇습니까? 이미 끝까지 왔기 때문이예요. 이제는 알고도 나올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의 종들이 해야 할 목회 사역 부분 중에 하나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단에서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도 바로 그 부분에서 초대교회에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을 이단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그런 열정이 오늘 본문말씀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예수 안에서 믿음 안에 있으면서, 내가 이것을 쓰는 이유는 적그리스도, 미혹케 하는 자들로부터 너희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라’ 그러면 성도들이 적그리스도에게서 보호받는 중요한 첫걸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의 종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주의 종의 말씀을 신뢰하지 아니하면, 그러한 성도와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적그리스도의 유혹을 막을 방법이 없지요,
지금 요한의 공동체를 떠난 자들은 요한조차도 그들은 자신들이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의 가르침조차 잘 못 됐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더 이상 같은 공동체에 있을 이유가 없는 거지요.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에 동정녀 탄생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그룹들이 어떻게 요한 사도의 목회적 지도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주님의 사랑을 전혀 행하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을 가리켜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신앙과 다른 신앙으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그들의 특징은 세력을 연대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요즘 우리 사회는 무슨 연대, 무슨 연대, 시민연대, 화물연대, 혼자서 안 되니까 연대를 해 가지고, 파워를 형성하고, 그리고 사회에 어필하려고 합니다. 긍정적인 연대라면 좋은데, 이 이단에 속하는 적그리스도들도 연대하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5장 16절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요, 우리가 복음을 전해도 사망에 이르는 범죄를 범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다고 그랬어요, 적그리스도에게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오늘 성경말씀을 보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니예요.
오늘 본문 말씀을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알지 못해서, 진리를 알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들은 앎이라. 여호와의 증인과 마주 앉아서 밤을 샌들, 그들이 손들고 주께로 돌아오겠다고, 예수를 인정하겠노라고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아요. 오히려 그 시간이 있으면, 그 정욕, 그 에너지가 있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간다면, 몇 배의, 몇 십배의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요한 사도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들이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은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우리의 삶에 적 그리스도를 경계할, 우리가 군대로 말하면 비상경계령을 내려야 할 시대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21세기를 영적전쟁에 전쟁의 시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전쟁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깨어있는 모습인 줄 믿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부탁합니다. 깨어라. 깨어라. 우는 사자와 같이 사탄마귀들이 삼킬 자를 찾아서 지금 다니고 있다는 거예요. 멍청한 사람들이 있지요. 신앙적으로 전혀 정리가 안 되어있는 사람들이 있지요? 덥석 덥석 물어갈 사람들을 사탄 마귀는 찾아다닌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2004년을 준비하면서 임원사역축제로 특별새벽기도회를 하고, 말씀으로 새로운 도전을 받기 원하여서 우리 모두가 새롭게 깨어있기를 사모하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 우리가 적 그리스도에게 이끌림을 받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적 그리스도를 경계하는, 깨어있는 성도의 생활, 내가 깨어있을 때 다른 사람도 깰 수 있고, 내가 깨어있고 다른 사람도 깨어있을 때, 우리 공동체, 우리 평안의 공동체가 늘 깨어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시대의 영적세계를 어지럽히는 이단 사상들이 횡행하는 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적 그리스도를 경계하기 위한 말씀들을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으로 분별하게 하시고, 늘 깨어 하나님의 자녀로써 우리가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아버지 하나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면서도, 말씀에 분명히 서지 못 할 때 이단에 넘어지며. 적 그리스도의 유혹을 받아 자신과 가정과 이웃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원하옵건데 요한 사도의 간곡한 권면의 말씀과 같이 이 시대에 적 그리스도를 경계하는 경계의 삶들을 게을리 하지 않고, 말씀으로 늘 분별력을 가지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5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본문- 요한일서 2: 12- 17
제목-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지난 2주간 동안 브라질 집회를 다녀오느라 여러 성도들을 뵙지를 못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지요. 특별히 여러 성도들께서 중보 기도팀을 구성해서 부족한 종의 집회 승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신 덕분에 참으로 큰 은혜의 집회가 된 줄로 믿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그 곳 목사님이 전화를 해 오셨는데, ‘브라질은 지금이 1년 중 가장 바쁜 시기가 되어서 성도들이 집회기간에 많이 참석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많이 모이지 못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5만의 한인들이 상파울로시에 거주하면서 의류업을 중심으로 생활하는데, 브라질과 남미에 약 45%정도를 우리 한인들이 의류를 담당한다고 하여 얼마나 자부심이 생기는 지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까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집회를 통하여 은혜를 사모하는지 그곳의 장로교회, 성결교회, 순복음교회, 감리교등이 번갈아 가며 찬양을 준비하고 예배 순서를 맡는 등 연합된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봉헤찌로란 좋은 안식처란 의미인데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좋다는 뜻의 "따봉"과 헤찌로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이름 그대로 은혜롭고 따뜻함이 가득한, 창립된지16년이 된 교회로서 올해 전임자가 명예롭게 은퇴하시고 새롭게 김일중목사님이 부임하여 역동적인 교회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장로님이 3분 계신데 얼마나 집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으시는지 눈물을 다 흘리시면서 " 이렇게 부흥회 하면서 은혜 받기는 처음"이라고 고백하심을 보고 성령께서 참으로 크게 역사하심을 기뻐하며 감사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흥회를 시작하면 처음에는 많이 모였다가 점점 줄어 드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이번에는 점점 많이 늘어나니 너무나 기쁘다는 고백에 먼 곳을 마다않고 찾아간 제게 얼마나 보람이 컸는지 모릅니다.
가장 분주한 시기에 부흥성회를 갖게 되어 조금은 마음에 부담을 가지고 계실 성도들에게 저는 이렇게 권면하였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실업자가 되었거나, 혹은 일거리가 없이 한가해서 부흥회나 가자 하고 모였다면 이 자리가 얼마나 한심한 자리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1년 중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시기에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모여 은혜를 나누고 더구나 9교회가 연합하여 하나님께영광을 돌리니 이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할렐루야 !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짜투리 시간이나 남은 시간이 아니라, 내가 다 써도 모자랄 소중한 시간을 주님을 위해서 드릴 때 그 자체가 하나님께 열납될 줄로 믿습니다. 세계 3대 미항 중 하나라는 ‘리오 데 자네이로’ 를 비롯하여 상파울로시 까지 브라질은 폭력 조직이 강력해서 경찰력으로도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거리의 경찰은 밀리터리 폴리스 즉 군대에서 파견나온 병력들이 치안을 맡고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회 참석을 위해 아침 일찍 거리를 나선다는 것 자체가 쉽지않는 상황이었는데도 집회 기간중 새벽기도회가 열렸고, 평상시에도 기도의 불길이 끊이지 않음을 보면서 현지 교민들의 삶에는 특별한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마음 한켠이 아픈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오히려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브라질은 올해가 이민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9교회가 연합으로 집회를 모인 일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아, 저들이 저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 제게 주어진 질문들은 상파울루 시내를 한 바퀴 돌면서 그 해답을 보았습니다. 한인 지역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져 있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그들은 주일이면 가게 문을 닫고 교회로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삶의 중심으로서의 공동체를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에베소서는 그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너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지어다’ 변함없다고 하는 것, 참으로 기분 좋은 일입니다. 사랑을 해도 변함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 힘이요 은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듯이,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사랑도 변함이 없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사도요한은 12절- 14절까지 자녀들과 아비들과 청년들에게 강력한 메세지를 통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말라’ 마치 주님께서 바닷가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3번이나 반복하여 질문하고 계신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더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대답해야 합니다. "세상보다 더 사랑합니다. 세상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할 때까지 주님은 계속하여 되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권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말라. 외형적으로는 여러분들이 세상에 속해 있어요. 대한민국에 속해 있어서 주민등록증이 있구요. 세계로 나아가면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여권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직장에 속해 있고, 가정에 속해 있고, 여러분들의 사회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소속은 하늘나라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시민, 천국의 시민권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세상을 부정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섬기거나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과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은 굉장히 차이가 있어요. 구체적으로 16절에서 요한사도는 말씀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 이런 것들은 다 세상으로 쫓아버린 것이라. 어떤 이는 책을 쓰면서 육신의 정욕을 섹스로, 안목의 정욕을 돈으로, 이생의 자랑을 권력으로, 그래서 돈, 섹스, 권력 이란 타이틀로 책을 쓴 분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집어낸 거지요.
여러분들 이런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느냐?라고 물을 때에 분명한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지금 우리나라는 정말 이런 표현은 강단에서 죄송한 표현이지만, 섹스공화국이예요. 세계에서 포르노 프로그램을 가장 많이 접속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저도 하루에 서너건씩은 받습니다. 메일을 받는데요. 교묘해서 ‘오랜만입니다’ 이런 타이틀로 편지가 와서 딱 클릭하면 포르노가 딱 뜨는 거예요. 인터넷 하는 분들 이런 경험 많이 했을 거예요. 전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최고예요.
모든 사람의 관심이 거기에 있구요. 우리의 지역지역마다 옳지 않은 여성들과 접촉하는 남자들이 사용하는 1년의 돈이 몇 조원이 될 지경이예요. 한강의 다리를 수십개를 만들어도 남을 정도의 돈을 우리는 그런 곳에 매년 쓰고 있다는 통계는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육신의 정욕입니다.
요즘은 예뻐지기 위해서 얼굴도 고쳐야 되고 팔다리도 고쳐야 된다고 말합니다. 어느 유명한 탤런트 가수를 모방하려면 모두 2.800만원은 들어야 한다는 발표는 우리는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얼마나 우스광스러운 이야기입니까?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에 도덕적 모델이 없어져 가는 붕괴의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론은 상업성을 내면에 감춘채 억지로라고 특정인을 모델화하여 청소년들로 하여금 일탈의 길을 걸어가게 만들려고 안달입니다.
안목의 정욕입니다. 돈입니다. 물질입니다. 우리의 보는 것에 만족시키고, 우리의 육신을 만족시키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돈이 최고라는 말을 서슴치 않게 합니다. 그 돈을 벌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포기하고, 예배 드리는 것도 포기하고, 우리는 성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쉽게 포기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파워를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생의 자랑입니다. 권력과 명예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사도는 말씀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세상으로 쫓아오는 것이요, 더 중요한 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
전 어느 분의 글을 보면서 참으로 큰 감동을 받았어요. 인생엔 두가지 유형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잠시 지나갈 것을 위해서 영원한 소망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구요, 어떤 사람은 영원한 소망을 위해서 잠시 있을 육신을 투자하는 사람이 있다. 여러분들은 어떤 유형에 속합니까? 잠시 지나갈 것을 위해서 영원한 소망을 포기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소망을 위해서 잠시 있을 우리의 삶을 투자하는 삶입니까?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잠시 지나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는 것이다. 사랑해야지요? 좋아해야지요? 지켜야지요? 그러나 그것이 주님보다 더 사랑하느냐? 주님보다 더라고 할 때에 거기에서 우리의 신앙은 병드는 거예요. 거기에 사탄 마귀의 유혹이 있습니다. 너 교회 다녀? 너 예수 믿어? 누가 믿지 말래? 그런데 우리를 늘 세상으로 더 끌고 갑니다. 17절에서 요한사도는 결론처럼 말씀합니다. ‘이 세상도, 이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할렐루야!
이 말씀을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경건한 삶을 위한 마그나카르타라고 말합니다.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제 왕도, 백성도 지켜야할 대헌장 그것을 그들이 만들었던 것처럼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영원함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소유하고, 그 사랑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의 마그나카르타라고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 위해서,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짧기에, 너무나도 짧기에 바람 같다고도 말하고, 안개 같다고도 말하고,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표현하는 그 짧은 인생을 아낌없이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주님을 위한 우리의 사랑,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변함없이 사랑했던 것처럼 나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보다도 더 앞서기를 원합니다.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시몬에게 물으셨던 주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 그 주님의 질문에 자신있게 그 전에는 그렇지 못했지만 오늘 이 시간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당당하게 주님 앞에 고백하면서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그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아버지, 이제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기를 원한다고 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다시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아비들아, 그리고 청년들아,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함이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 쫓아오는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온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잠시 지나갈 것을 위해서 영생의 소망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 형제를 사랑합시다
본문- 요한일서 2: 7- 11
제목- 형제를 사랑합시다
먼저 옆사람들과 인사하면서 시작합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보다 저는 이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종종 확인합니다. ‘아빠 사랑하고 있니?’ 라고 물어보면 사랑하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사랑하니? 하고 재차 물으면 보통 손을 높이 들어 자기의 어깨 너머까지 벌리면서 ‘이 ~ 만큼’이라고 자기 마음을 표시하곤 합니다.
오늘 주제는 사랑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주님과의 교제,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실천할 수 있을까를 말씀을 통해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형제와의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어떻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이미 선언하였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계명은 사실상 새 계명은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랑이라는 이 말씀의 주제는 독자들이 이미 요한복음을 통해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제 옛 계명, 즉 이미 알고 있는 계명이요 이제는 실천단계에 들어가야 할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7절 후반에 보면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제자들의 사역의 중심적 내용이요 특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아주 중요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종종 제가 성도님들 직장에 전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성도들 간에 집사님, 권사님, 혹은 장로님 같은 표현에 익숙합니다. 제가 어제도 브라질 집회를 위하여 여행사에 전화를 하였는데, ‘김사장님 바꿔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김권사님 바꿔주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그것이 더 편안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호칭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직장에 전화가 왔을 때 두 가지 반응이 생긴답니다. 하나는 ‘아, 아무개가 권사였구나.... 그 분이 그래서 그렇게 온유하고 사랑이 많으셨구나’ 하고 잔잔한 감동을 줄 수가 있는가 하면, 전화를 받는 사람이 "아무개가 집사입니까? 라고 반문할 때 ‘아차, 내가 실수를 했구나’하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살아가는 동안 교회안에서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거칠고 험한 세상이라는 삶의 자리를 우리는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기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속에 푹 빠져서는 안되겠기에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당부하기를 "너희가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한 자는 되지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요한이 권면한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좀 부담스러운 주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대상도 너무나 광범위합니다. 성경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지요?" 아멘~. 좀 자신이 없는 대답이군요. 다시 한번 묻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지요?" 아~멘. 톤이 좀 높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는 대답들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이니까 속으로 대답해 보세요....우리 크리스천들은 원수를 가질 수 있다. 혹은 없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원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수가 없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 자체가 필요가 없는 거지요. 이 계명은 알고 보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우리에게 여전히 원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원수라고 생각되어지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세요. 흔히 원수 맺은 사람들에 대한 반응은 이런 것입니다. ‘그 인간은 죽지도 않나?’ 같은 아파트 살고 있다면 ‘그 인간 빨리 이사나 갔으면 좋겠는데.... 안 가면 나라도 이사 가야지’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사도요한의 마음 속에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왜냐하면 당시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나아가 원수를 맺고 사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들을 향해서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서 서로 사랑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대단히 추상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사람이 "사랑합니다"하면 조금 예민한 사람은 "당신이 날 언제 봤다고 사랑한다고 그러느냐?"며 반응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단어는 깊은 친밀감으로 이어질 때 비로서 어울리는 말인데 처음 보는 사람보고 안내위원이 대뜸 ‘형제님 사랑합니다. 자매님, 사랑합니다" 이러니까 속이 좀 미씩거리는 것입니다.
티디에 가면 생전 얼굴도 못 보던 사람들이 ‘사랑합니다’ 하고 허그를 하려고 하면 ‘이 사람들 위선자들 아니야?’ 하고 심한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사실은 그것이 정상적인 반응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보편적으로는 너무 쉽게 사랑을 말하곤 하는데, 사도요한의 눈 높이로 보니까 사랑의 실천이 원수 간에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도 먼저 실천되어야 함을 본 것입니다.
사랑은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나면 배우자가 생겨서,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도 만족할 만한 사랑의 관계가 안 되는 가정들이 있어요. 한걸음 나아가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도 이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파트의 같은 라인에 사는 사람도 이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가는 직장의 동료들도 이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 그 다음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싫은 사람이지요, 나하고 의견이 안 남는 사람이지요. 나는 해코지 안했는데, 그는 나에게 계속 어려움을 주고, 부담을 주고, 피해를 주는 사람이지요. 안 만나면 좋고, 없으면 더 좋은 사람입니다. 원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원수를 사랑하라. 본문 말씀은 그 사랑에 대한 단계를 쭈욱 말씀하면서 먼저 사도요한은 원수 거기까지 갈 거 없고, 이웃 거기까지 갈 거 없고, 형제와 자매부터 먼저 사랑합시다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옆 사람과 인사합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조금 느낌이 달리 오면 지금까지 드린 말씀이 조금 도움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교회는 풍금만 사용하다가 피아노를 샀어요. 우리 교회도 개척할 때 피아노 살 형편이 안 되어서 풍금을, 그것도 할부로 드려놨어요. 그것도 예배에 풍금이 있어서 찬송소리에 반주가 되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런 교회들이 피아노를 사면 얼마나 행복한지 아십니까? 우리 저 그랜드피아노는 뉴질랜드로 이민간 김장로님의 딸 김민경집사 부부가 헌신한 것입니다. 10년도 넘었어요. 그걸 이렇게 볼 때마다 그 김집사 부부 생각이 납니다. 강대상을 볼 때마다 이건 아무개 장로님 부부가 했지. 하나하나 생각이 납니다.
그 교회는 피아노를 사는 기쁨을 가지고 피아노를 드려왔는데, 가지고 와서 문제가 생겼어요. 피아노를 성전의 오른쪽에 놓아야 하느냐, 왼쪽에 놓아야 하느냐 문제로 다투다가 교회가 싸우게 되고, 결국은 갈라졌어요. 교회가 갈라졌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일인데, 너무나 작은 것이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오른쪽에 놓으면 어떻고, 왼쪽에 놓으면 어때요? 그 교회의 구조에 어울리게 놓으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성가대가 오른쪽에 있으면 오른쪽에 놓으면 좋을 것이고, 성가대가 왼쪽에 있으면 왼쪽에 놓으면 좋을 것이고, 위에 놓은 형편이 안 되면 아래 놓으면 되는 것이고, 아래 놓은 형편이 안 되면 어디는 저 사회석 같은 위에다가 놓아서 반주자가 늘 돋보이는 교회도 있어요. 어쨌든 형편에 따라 하는 거예요.
우리는 모든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적이지, 그리고 배치는 좀 더 모든 사람이 볼 때 편안하고, 편리하면 좋은 거예요. 결국 그들은 그 것 때문에 싸우다가 갈라진 거예요.
지난 번 샤론의 밤에서 우리 학생들에게 한 이야기를 한 번 더 드리고 싶습니다. 서울 총각과 경상도 처녀가 결혼을 했어요. 신혼에 얼마나 달콤하고 재미가 있습니까? 어느 날 남편이 출출해서 아내보고 말합니다. ‘여보, 우리 국수나 끓여먹자’ 그랬더니 아내가 그 말을 받고 ‘국수가 아니라 국시지요’ 이 부부는 갑자기 국수가 맞냐, 국시가 맞냐 가지고 싸우다가 결론을 못 얻고 우리 이장님한테 가서 물어봅시다.
이장님을 찾아갔습니다. ‘이장님, 이 양반이요 국시라고 우기는데, 국수가 맞지 않습니까?’ ‘아니 이장님이요, 국시가 맞지, 국수가 맞습니까?’ 그리고 싸웁니다. 그 얘기를 들은 이장님이 말합니다. ‘국수하고 국시는 재료가 틀려요’ 그래서 눈이 번쩍 트였어요. ‘아니, 재료가 틀리다니요’ ‘국수는요. 밀가루로 만든 거구요. 국시는 밀가리로 만든 것입니다’ 이 부부가 궁금해 졌어요. ‘밀가루는 뭐고, 밀가리는 뭡니까?’ ‘밀가루는 봉투에 넣은 거구요. 밀가리는 봉다리에 넣은 것입니다’ 내친김에 한 번 더 물었습니다. ‘봉투는 뭐고, 봉다리는 뭡니까?’ ‘봉투는 기계로 만든 것이고, 봉다리는 손으로 풀칠해 만든 것입니다’ 그냥 두 부부는 웃고 말았어요.
자기들이 심각하게 싸우고, 해결이 안 되어서 다른 사람한테까지 가져간 문제가 별게 아니예요. 국수를 끓여먹으면 어떻고, 국시를 끓여먹으면 어때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먹으면서 만드는 과정에서 부부가 사랑과 은혜가 하나가 되어지는 친교의 자리가 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 이야기는 아주 작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를 심각하게 만들고, 다투게 만들고, 헤어지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는 일이예요.
제가 상담사례를 보았는데, 어떤 부부는 치약을 짜는 문제 때문에 이혼을 했어요. 남편은 가운데 쿡 눌러 짭니다. 좀 편하긴 하지요. 저도 치약을 보면 아이들이 가끔씩 가운데를 눌러 짤 때가 있나봐요. 그러면 제가 뒤에서 눌러가지고 반듯하게 해 놓고 짜는데, 어느 날은 저도 좀 심술이 나가지고, 가운데 짜면 기분이 어떨까? 저도 확 가운데 눌러보면 기분이 괜찮아요. 자, 문제는 쿡 눌러 짰을 때 그 사람은 기분이 편한데, 다음 사람이 쓸 때가 불편합니다. 아내가 이야기 합니다. ‘여보, 다음부터 치약을 쓸 때 뒤에서부터 눌러서 쓰세요’ ‘알았어’ 다음날 보니까 여전히 가운데가 푹 들어가 있어요. 그 다음날도 여전해요. 결국 그들 부부는 치약을 짜는 방법 때문에 갈라서고 말았어요. 갈라선 이혼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지만, 이혼의 동기는 너무나 작은 거였어요.
사랑한다고 상대방을 말하지만,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사랑을 위해서 아내가 요청하는 뒤에서 치약을 짜주는 그 정도의 수고와 배려가 없이 아내를 하늘만큼 사랑한다고, 머리가 파뿌리가 될 만큼 사랑한다고 그 표현은 얼마나 허황된 것입니까?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냐 그 말입니다. 사랑은 그래서 추상적이지 않아요. 사랑은 동사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생활에서 되어지는 것들 속에서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은 사랑합니다 이런 얘기를 잘 안 했습니다. 어떤 분은 결혼 생활 4- 50년을 해도 한번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안 했대요. 그래도 그 분들은 이혼하지 않고 4- 50년을 잘 살고, 아들 딸 잘 낳고 잘 살아요. 그들은 사랑이란 표현을 했으면 더 좋았지만 그들은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거기서 더 해서 표현을 하자고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바뀌어서 말로만 사랑한다는 말은 많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의 몸과 생각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옛사람들보다도 못 한 것이 되는 거예요.
사도요한은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안다라고 하는 표현을 요한은 많이 쓰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 중에 우선적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성도를 사랑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여러분 그 다음 단계를 사랑하시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은 그 교회 식당이 많아요. 제가 늘 부러워하는 목사님입니다. 거기는 무슨 교회 행사하면 어느 단체 회장이신데, 오늘은 무슨 식당, 오늘은 무슨 식당 계속 달라요. ‘목사님은 참 행복하겠습니다’ ‘왜요?’ ‘그 식당이 그렇게 많아서 다니시니까 참 좋네요’ ‘그렇지. 그런데 신경이 쓰여’ ‘왜냐하면 한 번씩 다 가주어야 하니까. 무슨 모임이면 이번에는 아무개식당, 또 무슨 모임이면 이번에는 어느 식당’ 다 한 번씩 가야 하는데, 메모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느 때 한 두 번 거르면 섭섭하다고 얘기가 들려 들어와서 굉장히 쉽지 않다는 거예요.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저희는 식당을 하는 분들이 별로 없는데 참 식당 하나 제대로 된 분이 왔으면 좋겠다고 그랬더니, 온누리부페가 왔어요. 부천에서 제일 큰 식당을 주셨어요. 할렐루야!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고백합니다. ‘언제나 우리가 사랑하되 정말 우리 안에 그 사랑이 다른 사람들로 인하여 알게 하라’ 그리고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 어떻게 사랑했는지 알지 않습니까? 3년을 눈물로 섬기고, 매 맞으며, 헐벗으며, 굶주리며, 멸시당하며, 조롱당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견뎌왔고 지금까지 사랑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끝납니까?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나를 본받는 자들이 되십시오’ 뭘 본받으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거 본받으라는 이야기예요.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 세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유는 하나님께 속해있기 때문인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하면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에게 속해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해있다고 하는 말은 그 사랑의 특징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보아도 적어도 평안의 교회를 출석하는 성도들은 그 분이 한 달이 되었든, 1년이 되었든, 10년이 되었든 사랑이라고 하는 흔적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꿀병 속에 젓가락을 가지고‘ 혹은 숟가락을 가지고 푹 담갔다가 꺼내던지, 살짝 댔다 꺼내던지, 거기에는 꿀이 묻지 않겠습니까? 많던 적던 우리는 주님의 속성인 사랑이 이제는 주님 안에 있는 우리라면 그 사랑이 조금이라도 맛배기라도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사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보면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 사도는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는 뭐예요? 우리가 사랑 받을만 해서 받은 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게 아니예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인 줄 믿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독생자의 주심을 통해서 확인됐어요. 그 사랑이 너무 크다. 너무 커서 그 사랑이 헤아릴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다고, 그러면 사랑을 받고나서 그저 감격만 하고, 감사만 하면 되겠습니까? 그 사랑을 우리가 나누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그 사랑을 증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알려야 하고,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할 의무와 사명이 생기는 것입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사랑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한 번 들어 보실래요? 저 한번 보세요. 제 얼굴을 보세요. 제가 예수 믿게 생긴 얼굴입니까? 조직폭력배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깡패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어떤 분들은 봐도 정말 무시무시하게 생기셨어요. 그런데 그런 분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그래요. 그런 분들은 참 산증거지요. 친구들이 그런답니다. ‘니가 예수 믿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성직자가 되고, 평신도지도자들이 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당신이 봐도 그런 내가 주님의 사랑을 이런 경우에 이렇게 입고 나서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게 전도예요.
무슨 전도를 신학적으로 전도하는 것이 전도가 아니예요. 그럴 때 ‘야,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역사하는구나.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체험되어지고, 이렇게 남아있구나.’ 하면서 옆 사람이 한 번 맛보는 거예요. 고추장 한번 담갔다고 해서 다 마실 필요가 있나요? 새끼손가락으로 한 번 맛보면 전체 간이 됐는지 안 됐는지 알 수 있잖아요. ‘아,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그걸 통해서 맛보는 거지요.
하지만 형제를 사랑하고, 자매를 사랑한다는 기본적인 사랑에 대상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조금 더 나아가서 이웃을 사랑한다고 우리가 하는 그 일에도 때때로 어려움이 올 수가 있어요. 인도에 선교하고 있던 어떤 여선교사님이 선교사역을 하면서 너무나 힘이 들고 지쳐서 절망과 비통 가운데 몸부림치다가 이제 더 이상은 선교사역을 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을 하고, 절망 가운데 있다가 하루는 산 위로 올라갔어요. 그 산 높은 곳에 올라가서 소리를 치고 싶었답니다. 그리고 이 선교사는 하늘을 향해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대요. ‘My love, I need you- 하나님,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절규하듯이 그렇게 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이야기 했답니다. 조금 있다가 이런 응답이 오더랍니다. ‘My children, I need you, too- 나도 역시 필요로 하고 있어’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존감이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신다, 할렐루야!
이 황목사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떳떳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나를 필요로 하신다. 여러분들이 늘 하나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필요로 하신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을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형제에게, 우리 이웃에게 나아가서는 없으면 좋고, 안 보면 좋은 원수에게까지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내게 필요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의 필요에 기꺼이 하나님께 응답한 하나님의 일꾼이신 줄로 믿습니다.
2004년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부족했지만 별 열매도 없이 시간만 보낸 그런 부족한 종이었지만, 내가 다시 한 번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지만, 아버지는 방탕하고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돌아왔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방탕하고 있는 중에도 사랑하고 있었어요. 한 해도 충성된 사람이 있어요. 충성도 아니고, 불충성도 아니고 그저 애매모호하게 한 해를 보낸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각하게 불충성한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분들까지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필요로 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 사랑에 붙잡혀서 오늘도 주님과 함께 새 힘으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작은 사랑일지라도 사랑을 표현하고 나누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이제 형제를 사랑하며 자매를 사랑하다가 이웃도 사랑하게 하시고, 이웃 사랑하다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 예수 안에 거하는 자
제목- 예수 안에 거하는 자
본문- 요한일서 2: 1- 6
"1% 만 바뀌어도 인생이 달라진다"는 이민규씨의 글을 보면 , 미켈란젤로가 돌을 가지고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그의 조각품을 보며 감탄하면서 이렇게 반문했답니다. ‘돌덩어리를 가지고 어떻게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느냐?’ 라고 하자 미켈란젤로가 대답하기를, ‘내가 한 것이 있다면 단지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냈을 뿐입니다.고 했답니다.
미켈란젤로의 이 대답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겸손한 마음 가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또 하나는 원칙적으로 그가 만들려고 했던 작품의 형상은 이미 그 돌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름답다라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불필요한 부분들이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도 담겨져 있는 줄 압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축복된 존재인 줄로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VIP다’ 라는 자존감이 넘치는 사람은 모든 삶의 부문에 있어서 강건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것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살아 가면서 무척 힘들어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일쑤이고, 비교하면서 스스로 좌절하고 낙담하며 인생의 뒤안길을 헤메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이 가장 귀중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좋았던 우리가 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서 멀어졌을까?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 가운데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우리 안에 들어오거나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던 그 형상이 흐려지고 더러움으로 오염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아주 중요한 관계성 회복이 "주님과의 교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일서 1장에서 "교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인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코이노니아라고 불리우는 이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케 하기 위해서 당신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은혜는 결코 싸구려가 아닌 것입니다. 생명을 내어놓아야 가능한 은총의 교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빛 되신 하나님과의 교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그리고 빛의 자녀로서 살아야할 우리의 교제를 이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가능케 한 은혜요, 사랑의 교제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교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회복 되었으며 십자가의 죽음은 곧 구약시대의 피의 제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의 제사가 가능한 것은 우리 모두가 죄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부정하면 두 가지 죄를 하나님 앞에 범하게 되는데, 첫째는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일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게 되는 일입니다. 온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보혈의 피를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요 첫 걸음인 줄로 믿습니다.
1절 중반에 보면,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언자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말은 성경에서 성령이라는 의미로 종종 번역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옆에 있도록 부름받은 사람" 이라는 의미의 파라클레토스를 우리는 보혜사, 중보자라고 해석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지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고 의지할 때에 죄사함의 능력, 구원의 능력을 얻는 자임을 보좌 앞에서 대언해 주는 대언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도록 중보자의 역할을 성령께서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따른다고 그렇게 고백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사람, 예수의 제자, 곧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나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도요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이 문제를 "안다"라는 단어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분, 주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주님을 안다라고 하는 말을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반면에 4절을 보면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 주님을 안다라고 하는 이 중요한 부분을 첫 번째 설명하기를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한가, 아니하는가로 판단을 했습니다.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그 계명, 그 말씀에 순종했는데, 어느 정도 순종하셨습니까? 죽기까지 순종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그 사랑의 수준은 생명을주시기까지.....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압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순종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을 안다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계명에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교제에 핵심입니다. 그럼으로 4절에서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아니한다라고 하면, 그것은 주님을 아는 일이 아니다. 주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하는 일이 참으로 피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영화배우 중에 감독으로 유명한 존 휴스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늘 교훈했다고 합니다. 친구들을 판단할 때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라. 단편적인 것들 가지고 친구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교훈을 하고는 했는데 언젠가 딸 안젤리카가 아빠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그래요. 반 고호를 보고나서 하는 이야기가 ‘아빠, 난 반 고호의 그림이 맘에 들지 않아요’ 그 얘기를 들은 아빠가 딸에게 말합니다. 너는 고호의 그림을 몇 가지 정도나 보았니?’ ‘이번이 처음이예요’ ‘니가 고호의 그림을 처음 보면서 고호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평가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굉장히 경솔한 것 같다’ 아버지가 딸에게 줄 수 있는 깊은 교훈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우리는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해 보면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이야기 할 때 경솔한 일들이 많지요. 미국을 열흘정도 관광을 다녀온 분들이 미국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야, 미국은 땅덩어리가 얼마나 넓은지 몰라’ ‘얼마나 넓은데?’ ‘서부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데 동부를 가도 끝이 안 나더라구. 공원을 가니까 공원이 어찌나 넓은지 끝이 안 보이고, 공원에 있는 나무는 아름드리가 몇 사람이 둘러서도 모자라더라. 야, 미국은 진짜 크더라’ 그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미국에 대한 이미지를 크다고 하는 이미지로 고정시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녀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야, 미국이 살기 좋은 낙원이라고 그러더니 인간이 살 때가 못 되더라’ ‘왜 그런데?’ ‘거기는 해가 지면 흑인들이 너무나도 무섭게 거리를 활보하고 그래서 그들이 아닌 다른 관광객이나 백인들은 다 저녁이면 멀리멀리 교외로 나가더라. 관광객들은 해가 지면 가이드가 절대로 호텔 밖 출입을 못 하게 하더라. 나가면 죽는다고 하더라. 야 그게 사람 살 곳이냐?’ 그러면 그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미국이란 나라는 사람이 살지 못할 해만 떨어지면 목숨이 위태로운 그런 나라로 생각을 할 거예요.
하지만 미국에서 한 1년, 5년, 10년쯤 산 사람들에게 ‘미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대부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글쎄요.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 열흘 다녀온 사람은 미국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안다고 하는데, 오래 산 사람은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잘 모르는 사람이 잘난 척 하는 일이 사실 우리 사회에, 일상생활에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경우도 그런 예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아느냐? 내가 주님을 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야 한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행하고, 그 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을 때 주님을 안다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조금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두 번째로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9절- 11절을 보면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을 안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일 그것이 바로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라고 사도요한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십니까? 좀 추상적으로 이야기 하지 말고, 좀 구체적으로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십시다. 가장 가까운 다른 사람은 아마도 아내요 남편일 거예요. 자식과 부모간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아내를 위해서, 그 남편을 위해서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말은 추상적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도 인사말로 ‘형제님을 사랑합니다’. 뜨레스디아스 같은 데 가면 생전 얼굴도 못 보던 사람이 손을 잡으면서 ‘자매를 사랑합니다’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굉장히 그게 싫어서 그것을 부담을 갖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이 나를 언제 봤다고 사랑한다고 하느냐’ 사실 맞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언제 알았다고 사랑이라는 심각한 단어를 함부로 쓰냐 그 말이예요. 그러나 그 사랑은 깊이가 있는 사랑하고는 조금 다른 인사성의 사랑이겠지요.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말도 얼마나 추상적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작은 생활에서 드러날 수 있어야 되요. 만약 여러분의 남편이 아내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목사인 제가 들을 때 어떻게 들어야 합니까? 아내인 성도를 남편이 사랑한다고 할 때 어떻게 들어야 제가 ‘아, 그 분이 정말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들을 수 있나요? 저희는 아이들이 학교에 등교하고나면 점심은 주로 교회 다른 행사가 없으면 우리 부부 둘이서 식사를 하게 되는데, 식사 준비를 아내가 다 차리면 이제 사무실로 식사 준비 다 되었으니까 올라오라고 그러면 올라가서 식사를 둘이 맞대고 합니다.
제가 먼저 식사가 끝나는데, 식사를 끝내고 나면 제가 먹은 국그릇과 밥그릇, 그리고 수저를 들고 개수대로 가서 막 설거지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아내가 식사하는 속도가 빨라져요. 제가 그러지요. 설거지 저도 빨라집니다. ‘내가 왜 설거지를 빨리 하는 줄 알아?’ ‘왜요?’ ‘당신 다 먹기 전에 끝낼려구...’ 당신 것은 당신이 알아서 하라구 그러면, 아내는 막 빨리 먹고 제가 설거지 끝내기 전에 얼른 갖다가 놓습니다. 그러면 제가 또 웃으면서 아내의 밥그릇도 설거지를 하지요.
우리 교사들은 아침 일찍 오시기 때문에 아침을 제대로 들고 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아침을 준비를 하더라도 남편 중에 이런 분들 있잖아요. ‘난 아침은 무조건 밥을 먹어야 돼. 밥하고 국은 있어야 돼’ 그렇게 고집 피는 남편들 있어요. 그걸 좀 바꿀 수 없나요? 얼마나 아내에게 큰 부담을 주는 일인데, 그 것을 꼭 고집을 피워야 합니까? 어쨌든 그렇게 밥을 차려 놓으면 아내는 마음이 급해지지요. 교회학교를 가야 하니까, 설거지를 못 할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러면 설거지를 놔두고 얼른 교회 가서 해 놓을 테니까 하고 갑니다.
남편이 밥 먹고 아내에게 이야기 합니다. ‘교회 가서 일 하는 건 좋은데 설거지는 하고 갈 수 없어?’ 그래도 아내는 남편이 교회 나오는 것만 해도 고마우니까 설거지를 합니다. 급한 마음에 설거지를 하고 가지요. 하지만 그 아내의 마음 속에는 무언가 개운치 않은 마음이 있을 거예요. 그럴 때 남편이 ‘여보, 당신 교회학교 늦겠어. 얼른 가. 설거지는 내가 해 줄게. 걱정하지 마.’ 이렇게 한 번 해 준다면 아내는 얼마나 살 맛이 나겠어요. 설거지 한 번 하는 것 에너지 사용으로 따지면 별 것도 아니지만 한 사람을 살 맛 나게 하는 엔돌핀을 돌게 하는 거예요. 그런 걸 왜 몰라요?
반대로 남편이 교사라면 아내가 그런 것들을 뒷바라지 해 주고, 남편이 교회학교 교사일 때 아내가 남편의 바지를 멋지게 다려놓고 와이셔츠를 멋지게 다려놓고, 점퍼입고 가려고 그러면 ‘여보, 당신이 교사인데 아이들한테 제일 멋있는 모습으로 가야지. 내가 그래서 와이셔츠 내가 다려놨어요’ 그럴 때 얼마나 남편이 자부심이 생기고, 마음에 기쁨이 생기겠어요. 모든 것이 서로 상호적인 거예요. 모든 부분에 있어서 모든 작은, 에너지로 보면 몇 칼로리도 안 되는 하지만 그 것 때문에 상대방에 대해서 자부심이 생기고, 기쁨이 생기고, 의욕이 생긴다면 왜 우리가 그것이 실천이 안 되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는 이 말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그것을 실제적으로 적용 한 번 못하면서 늘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풍성함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착각합니다. 나는 사랑하고 있지. 나는 사랑하고 살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떻게 주님은 사도요한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었어요.
놀랍게도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미워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하는 이 아이러니한 사실을 여러분들도 아시지요?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시면서도 머릿 속에 ‘나는 누구누구와는 상종하고 싶지 않아’ 이런 미움을 가지고 사랑의 주님,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이게 얼마나 기적입니까? 어떻게 예수 안에 살면서 미움을 가지고, 미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에게도 주여,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하나이다 용서해 달라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까? 기적 아닙니까?
우리가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는 그런 일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로 알기 시작하면 내 안에 미움을 가지고, 주님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 못 된 것인지를 알게 되고, 우리의 가졌던 미움들이 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미움이 사라지면 그 곳에 사랑이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이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는거다. 미움은 성령이 주는 것이 아니예요. 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징이 아닙니다. 사단의 특징이요, 어두움의 특징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6절에 보면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찌니라’ 예수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주님 안에 행하는 것인데, 다름 아닌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제 두 가지 질문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첫째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이 질문에 여러분들은 대답하셔야 합니다. 확신합니다. 긴가민가합니다. 아직 아닙니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계명을 준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답에서 확신이 되어진 분이 두 번째 질문을 들을 수 있어요. 주님을 안다고 확신할 때 그렇다면 그 분의 말씀을, 그 분의 계명을 실천하고 있느냐 하는 거예요.
사랑의 실천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작은 일상생활에서부터 성경이 말하잖아요. 너희들끼리도 사랑하지 못하면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제가 성도들간에 서로 사랑해 보라고 이야기 하면 거기도 다 이해관계가 있어요. 여러분들끼리 사랑을 표현해 보세요 그러면 거기도 자기의 성격과 성질이 나옵니다. 이왕이면 가까운 성도의 것 팔아주고, 이왕이면 가까운 성도들을 손 들어주고, 이왕이면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힘을 좀 실어주세요. 그러면 자기의 이해관계가 있어요.
같은 성도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겠다고 말합니다. 언제나 판단 속에는 이해관계가 늘 끼어있어요. 그게 신앙보다, 그게 교회보다, 그게 성도보다 더 앞서 있어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가리켜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이예요. 혹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이해관계의 계산을 넘어서지 않는 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우리가 인간이라고 하는 형제자매 일가친척이라고 하는 그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오늘 주님은 예수 안에 거하는 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 불가능한 게 아니구요. 그 사랑 그렇게 손해나는 거 아닙니다. 작지만 살 맛 나게 만들어 주고, 작지만 의욕을 북돋아주고, 작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해요. 이제 그 사랑의 이해관계를 잘라버리고, 그 사랑의 인간적인 한계를 우리가 극복해 가면서 진정한 성도로서 작은 사랑부터 실천해 가면서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평안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작은 것도 구체적으로 다가가면 실천하기 머뭇거렸던 우리였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 추상적인 개념이었고,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착각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내 이해관계가 앞서고, 내 인간적 관계가 앞섰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사랑하실 때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며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셨던 주님, 이제 그 주님의 사랑, 그 교제 안에 진정으로 거하기를 원하며 주님을 바로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귀한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 새로운 결단의 발걸음 되게 하시고, 세상으로 나아가며 주의 뜻 이루어가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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