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영원한 감사의 제목시편 118:1-7

하나님아들 2024. 5. 26. 22:44

영원한 감사의 제목

시편 118:1-7

 

 

북극의 큰 섬인 그린란드 근해를 배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큰 빙산들이 바다에 둥둥 떠서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빙산은 물위에 나타난 것의 열 배정도의 더 큰 얼음 덩어리가 물 속에 잠겨있습니다. 그래서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큰 얼음산들은 바다의 조류를 따라서 따듯한 곳으로 흘러가 녹아 없어질 때까지 2년 내지 10년 동안을 조용히 물에 떠다닙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빙산이 떠서 서서히 흘러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이상하게 생각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빙산 얼음덩이 말고도 바다의 수면에 떠서 흘러가는 수많은 작은 얼음덩이들이 있는데 그 작은 부스러기들은 빙산이 흘러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또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하면 큰 빙산은 바다 밑의 조류에 따라서 흐르고 있으나 작은 부스러기들은 물 표면의 바람과 물결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에 자칫하면 그리스도의 깊은 말씀과 진리의 깊은 물결에 따라서 움직이기보다는 세상의 바람과 유행과 분위기와 기분과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가 아주 쉽다는 것을 이 빙산 이야기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나의 기분이나 감정에 의하여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표면의 바람이나 물결에 따라 가는 것이지 참된 하나님의 진리에 접촉되어서 깊은 생명의 강물을 따라서 행하는 것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깊은 진리의 조류를 따라 살기보다는 귀를 즐겁게 하는 인간의 말이나 남을 헐뜯는 이야기나 비난하고 험담하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그것에 따라 행동하기 쉬운 약점들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표면의 바람이나 얕은 물결에 자주 휩쓸려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는 신자라면 부스러기 얼음과 같은 부스러기 신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방황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부스러기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스러기 신자로 전락하여 물결 따라 바람 따라 휩쓸려 왔다 갔다 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빙산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깊은 조류를 따라서 묵묵히 은혜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부스러기 얼음덩이처럼 표면의 바람을 따라서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부류에 속했습니까?

예레미야 17장 5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 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의 건건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시편 1편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 같이 그 행사 다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사는 사람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매사에 신중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고 하십시다.

찬송가 408장입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 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오늘은 맥추감사 주일입니다. 맥추감사는 첫(가장 좋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최상의 고백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자세는 내 인생에 대한 자세가 됩니다. 자기 인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 자기 인생에 대해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복 있는 자입니다. 그는 거대한 빙산이 표면의 상황에 끊임없이 요동하는 것이 아니라 바닷속의 큰 조류에 따라 움직이듯이 일관성 있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는 믿음이 기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인 로제티(D.G. Rossetti)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신론자의 가장 나쁜 순간은 그가 진실로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감사할 대상이 없습니다. 멋있는 경치를 보고도 그저 멋있다고 말할 뿐이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중에 찼네 "와 같은 감격과 감사의 찬양은 할 수 없습니다. 감사할 대상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하여금 살아갈 수 있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엉뚱한 곳에 가서 복 주셔서 감사하다 절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저 막연한 대상에게 감사를 합니다. 모두 감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성도만이 마땅히 감사를 받아야 할 분에게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감사해야 할 분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에 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하루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신다면 우리는 살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에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원히 감사해야 할 이유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것을 미리 계획하시고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태중에서 자랐지만 우리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이를 만든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 나라에는 여자아이가 절대적으로 모자랄 것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남자만 나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자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초등학교 남자 아이들이 여자 짝이 없어서 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남녀의 성비가 항상 1:1을 유지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엄마의 뱃속에서 만드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시 139:13,14)

이사야 선지자 또한 말하기를,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음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음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사 49 1)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사람은 생명을 경솔하게 다룹니다. 자기가 생명을 만드는 줄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의 신비를 다 캐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 유전자의 모든 비밀을 알아냈다고 해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어머니의 태에서 지으시고 영혼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기에 우리는 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시고 아끼십니다.

<사 43:>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신묘막측하게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영국의 수필가 조셉 에디슨(J. Edison)은"선을 조금도 마음속에 지니고 있지 않는 악인은 없다. 그러나 악은 조금도 마음속에 지니지 않은 선인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선과 악이 공존하며 그의 도덕성도 언제나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이에 비해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신 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리고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시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을 것이며, 감사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선하셔서 모든 일이 의로우시므로 우리는 어떠한 순간에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웨슬리 형제가 미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조지아로 갈 때였습니다. 동생인 찰스 웨슬리(C. Wesley)는 오글토프 장군의 비서로 가고, 형인 존 웨슬리(J. Wesley)는 새버나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 배에는 독일에서 온 26명의 모라비아 교도들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모라비아교는 개신교의 일파로서 지금 모라비아 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어 자유로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송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곳을 찾아 새버나 식민지로 이민을 가는 중이었습니다.

1837년 1월 초 모라비아 교도들이 갑판에서 올라가서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심한 폭풍우가 몰아쳐 그 범선의 제일 큰 돛이 갈라져 나갔습니다. 돛대는 부러져 두 동강이 되었고 갑판 위로 바닷물이 휘몰아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선장이 배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갑판 밑의 승객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모두 두려워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모라비아 교도들은 음이나 박자하나 틀리지 않고 힘차게 찬송을 계속 부르고 있었습니다.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는 배의 난간에 매달려 이 독일 모라비아 교도 형제들의 침착하고 대담한 것을 보고 그만 탄복하고 말았습니다 폭풍우가 지나간 뒤 존 웨슬리가 그 모라비아 교도 한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무섭지 않으셨소?"

그러나 모라비아 교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섭기는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요.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풍랑이 일어 배가 위태한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시고 제자들은 무서워서 예수님을 깨웠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 8:23-27).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보먼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잘 하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길까?', '하나님은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신가?'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시25: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119 : 68)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선하십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난 가운데 내어주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모라비아 교도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폭풍 가운데서도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극한 상황에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며, 또 그러한 환난을 통과한 후에는 큰 영광으로 갚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롬 2:7).

<롬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때때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에게도 시련과 고통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다른 모습인 것을 성경을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롬 5:3-5>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고후 1:3-4>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히 12:6-11> 「(6) 주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꾸짖고 나무라시며 그가 아들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다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은 고난을 징계로 알고 견디어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들로 대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겠습니까? (8) 아들이면 누구나 징계를 받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징계를 받지 않는다면 사생아이지 진짜 아들이 아닙니다. (9)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우리가 공경하는데 하물며 우리 영의 아버지께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0) 육체의 아버지는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잠시 우리를 징계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징계하여 그분의 거룩하심이 참여하게 하십니다. (11) 징계를 받을 당시에는 그 징계가 달갑지 않고 괴로운 것 같지만 후에 그것으로 단련을 받은 사람들은 의와 평안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때로 고난도 주십니다. 햇빛만 계속되면 그 땅은 사막이 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십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될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3.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분이시기에 감사해야 합니다.

찬송 532장 3절

죄가 하나도 없고 아무 병도 없는 영화롭고도 밝은 천국 올라가서 주와 같이 그 곳에 길이 살리로다 이런 소망의 삶은 참된 행복이라

주가 나의 이름 보좌 앞에 놓인 어린 양 생명책에 기록하셨을까

성도 여러분, 천국문 앞에서 우리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는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일입니다. 그때 우리의 이름이 불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지옥에서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아무 염려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2:46에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고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영생을 돈주고 산 것이 아닙니다. 선행을 쌓아서 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불러 주신 자에게 거저 주신 선물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주시고 영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난하고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영생을 얻은 자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눅 16:19-31). 부자는 너무 부자라서 그 많은 재산을 어디에다 써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벌리며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했을 것이고 부자 자신도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잔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려고 했던 거지 나사로는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부자와 나사로 중에 어떤 사람이 될래 하고 물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부자가 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거지가 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는 거지 나사로가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성경의 이야기를 끝까지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보다는 거지나사로가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영생을 얻은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나사로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틀림없이 예수님을 믿는 자였습니다. 요한일서 5:11,12 말씀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냥 죽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처럼 영원히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 많지만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은 정말 영원히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입니다. 영원히 찬양할 우리의 노래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들 중에 아무도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분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태에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기 전에 우리를 아셨던 분이십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셔서 우리가 죄 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선하신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내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어두움 가운데에 거하며 영혼의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것입니다. 천국 문에 이르러 큰 영광과 찬양을 드리기 그날까지 날마다 감사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