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계시록의 7복 (계22:6-7)= 축복론 =

하나님아들 2024. 5. 6. 20:18

계시록의 7복 (계22:6-7)
= 축복론 =

요 약

요한계시록에는 모두 일곱 번의 복에 대한 약속이 나타난다. 그 의미를 풀어 보면 먼저 예수의 복음을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 자아를 내려놓은 하나님 주권에 순복하는 자가 복이 있다. 거룩함을 입은 자가 복이 있다. 세상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생명적인 삶을 가진 자가 복이 있다. 성경을 가감 없이 믿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날마다 자기 심령을 내어놓고 씻는 자가 복이 있다. 이 상을 종합할 때 계시록의 복은 예수님 잘 믿는 신령한 복임을 알게 된다.

설 명

☆ 계시록의 복 있는 자

1. 복음을 깨닫는 자 : “이 예언의 말씀을 - 때가 가까움이라”(계1:3)
2. 내가 죽은 자 ;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계14:13)
3. 영성을 입은 자 ;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계16:15)
4. 주님을 사랑하는 자 ;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계19:9)
5. 부활 생명으로 사는 자 ;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계20:6)
6. 말씀대로 믿는 자 ;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22:7)
“이것들 외에 더하면 -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계22:18-19)
7. 날마다 자기 행실을 씻는 자 ;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계22:14)


(본 문)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22:6-7)


(강 해)

이 시간에는 계시록의 칠 복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계시록에는 모두 일곱 번의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동안 계시록에서 7수의 여러 용례가 있었는데 계시록의 복마저 7복입니다. 좀 억지 같이 보이지만 계시록적인 사고로 볼 때 7복은 7이 완전수라는 점에서 온전한 복을 연상시킵니다. 이 온전한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 영혼이 잘되는 복입니다. 이상의 말씀을 볼 때 계시록은 복의 책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이는 계시록의 해석 방향의 힌트를 제공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즉 복의 책 계시록은 성경이 신령한 복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점입니다. 그 동안 그러한 것들을 계시록 강해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계시록에 나타난 칠 복은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의 복음을 깨닫는 자의 복입니다.

계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받는 복을 말씀합니다. 과연 계시록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인가? 이 복을 성경의 복의 개념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볼 때 이 복은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하여 받는 신령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 예언의 말씀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킬 수도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세대주의적 해석은 재림의 고조와 종말의 두려움으로 신앙을 각성시키는 면을 제외하고서는 구체적으로 지킬 수 있는 진리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키려 해도 무엇을 지켜야 할지 모르고 복이 있다는 데 그렇게 복다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가 복음의 관점에서 경험했듯 계시록은 구절마다 지켜야 할 복음의 진수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때가 가깝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재림을 가리키지만 실현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는 구원을 지칭하는 관용구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막1:15에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종합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느냐? 예수님의 복음을 깨닫는 자의 복입니다. 그는 예수 믿고 영생을 얻을 것이니 복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구체적인 성화의 복음을 만나게 되니 신앙이 정립되고 성화를 지향하게 될 것이므로 가장 복된 자가 될 것입니다. 계22:8-9절에 요한이 실수로 경배했던 천사로 나타난 주의 형제가 있습니다. 그 천사는 자신을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복된 형제는 계시록을 깨닫고 지키는 자의 모델인 셈입니다. 이걸로 볼 때 계시록이야말로 신령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롬1:17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령한 복음의 관점에서 계시록을 해석하고자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2. 겸손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계14:13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달리 표현한다면 자아를 내려놓고 하나님 주권으로 사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주안에서 죽은 자란 문자적으로는 예수 믿고 임종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문맥을 자세히 관찰하면 이 죽음은 특수한 형태의 다른 죽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 했는데 자금이란 스스로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금이란 스스로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복된 죽음의 조건이란 스스로 죽어야 하고 지금 이후로 죽어야 하며 또 한 가지는 주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럼 이전에 죽은 성도는 복되지 않는다는 뜻일까요? 그리고 여기 스스로 죽는다란 자살을 의미할까요? 그래서 성경을 육신적으로 풀면 멸망합니다. 여기 스스로 지금 주 안에서 죽는 죽음은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서 내가 죽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현재와 미래적 죽음이 강조되고 있음도 그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믿는 성도의 임종은 복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고 했듯 자아 옛사람의 죽음입니다.

그 증거로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한 바울의 간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결과로서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신 말씀으로 볼 때 안식된 삶의 원인이 행한 일과 관계가 있다고 한 점도 주시해야 합니다. 왜 믿음이 아닌 행함이 강조될까요? 그것은 이것이 다름 아닌 자아의 죽음을 암시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날마다 죽고 또 죽는데 힘써야 합니다.

이 사람이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죽고 그 죽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참음에 동참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합니다(딤후2:11-12). 그리고 이런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가 약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전5:5에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했습니다.

3. 거룩한 자가 복 있습니다.

계16:15에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거룩한 자가 복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여기 옷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의의 행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여 있어 신앙해야지 만약 술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동무들을 때리고 방탕하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내어 쫓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 원리는 은혜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성하여 깨여 있지 않으면 시험 들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 부끄러움이란 죄악을 시사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벌거벗지 않으며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 자란 성결한 자입니다. 이런 성결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 곳곳에서 강조하는 의인의 복됨입니다. 죄악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씻음의 반복적인 일은 존재하겠지만 거룩은 항상 유지되어야 합니다. 여기 “도적 같이 오리니”와 “깨여”라는 말씀이 암시하는 바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깨여 근신하며 기도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의의 옷을 지키는 생활입니다. 이런 깨끗한 그릇만이 신령한 은혜 생활이 가능합니다.

4.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계19:9에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을까요?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죄악 가운데 있는 영적으로 어린이라면 혼인 잔치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이지만 신부에 합당한 수준에 이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5. 부활 생명 안에 사는 자가 복 있습니다.

계20:6에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했습니다.
이 첫째 부활은 장차 성도들의 몸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현재적인 영적 부활이 있을 때 장차 몸의 부활에도 참여한다는 점에서 좁게는 영적으로 거듭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요5:25). 그러므로 첫째 부활이란 현재의 영적인 부활을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사람은 복이 있는 이유는 구원받아 새 사람으로 거듭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둘째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됩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더욱 믿음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빌3:10-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같이 풍성한 부활 생명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6. 말씀을 가감 없이 지키는 자가 복 있습니다.

계22:7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셨고, 22:18-19에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습니다.

성경은 가감해서는 안될 책입니다. 그래서 마5:19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일부일지라도 시인하지 않으면 신앙에 큰 쇠퇴를 가져옵니다. 가령 기도 한 가지만 그 필요성을 부인해 보십시오. 그 영적 생활은 천국에서 가장 보잘 것이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계시록 역시 결코 가감해서는 안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가감하지 말라는 경고는 계시록 해석의 중요한 지침 사항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구절 한 문구라도 무언가 의미가 있다고 믿어 충실히 해석한 결과 귀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계시록 강해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내용이 어렵다 보니 추측적으로 대충 이해하려 함입니다. 그러나 본 교재는 전체는 물론이요 작은 용어나 수식어 하나라도 빠짐 없이 문맥의 흐름에 부합한 의미로 모두 해석했습니다. 어느 한 부분 더하거나 감한 적 있었습니까? 이 계시록의 영적인 주제 역시 지어낸 것이 아니오 반드시 있어야 할 내용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본문에 충실할 수 있음은 계시록을 복음으로 볼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을 가감하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받습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모두 입으로는 희망을 이야기 하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은혜보다는 심리적으로 이미 재앙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가감할 때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린다 하셨듯 복음의 구체성을 전하지 못하니 성화와 별로 관계없고 따라서 생명적인 은혜의 삶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계22:18-19에 해석의 힌트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적 종말론을 소홀히 해서도 방종의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물론 본 강해는 그 동안 소홀했던 부분인 영적인 관점을 강조한 것일 뿐 결코 역사적 미래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시록에서 역사적인 면과 신령한 복음의 면을 함께 인정할 때 진정한 은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마다 자기 행실을 씻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계22:14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했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용서받아 이미 목욕한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는 동안에 늘 심령이 더럽힘을 받습니다. 그래서 더럽혀진 발을 씻듯 혹은 늘 옷을 세탁해야 하듯 늘 씻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은혜의 경험을 놓치고 맙니다. 물론 구원에서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날마다 행실을 씻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와 예비하신 은혜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심하면 징계 아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고전6:9-11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했습니다.

딛2:11-14에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결론>
이제까지 나타난 계시록의 7복을 종합해 볼 때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모두 믿음 안에서 바로 살라는 신령한 교훈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 5장의 8복 역시 모두 신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신앙 안에서 거룩하고 신령한 삶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복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