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계시록의 결론 (계22:6-21)

하나님아들 2024. 5. 6. 20:16

계시록의 결론 (계22:6-21)
= 재림론 =

요 약

계시록의 결론에는 계시록의 권위성과 그 핵심적 내용을 강조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먼저 계시록의 권위성으로 이 진리에 대한 믿음과 이 진리를 지켜야 함과 이 진리에 대한 감격과 이 진리를 인봉치 말 것과 이 진리를 가감하지 말고 지킬 것을 교훈하신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내용은 성화생활의 유지와 한 사람도 은혜에 동참치 못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심이며 그러기 위해 성령을 간구하고 재림을 소망하며 주어진 은혜의 직무에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다.

설 명

<계시록에 대한 자세>

1. 이 진리에 대한 믿음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6절)

2. 이 진리를 지킴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7절)

3. 이 진리에 대한 감격과 애착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8-9절)

4. 이 진리를 인봉하지 않음
“때가 가까우니라”(10절)

5. 이 진리를 가감하지 않음
“이것들 외에 더하면 - 제하여 버리면”(18-19절)



<계시록 핵심 내용 강조>

1. 계속적인 영성생활 강조(11절)
2. 성화를 이루어 주실 것을 약속(12-13절)
3. 모두 은혜에 동참하길 희망함(14-15절)



<계시록을 배운 자는>

1. 이렇게 기도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절)

2. 이렇게 행한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1절)


(본 문)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22:8-21)


(강 해)

이 시간에는 마지막 강해로서 “계시록의 결론”입니다. 성경이 66권이지만 계시록만큼 결론이 잘 되어 있는 책은 없습니다. 결론에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고 성령과 천상의 성도와 천사와 교회가 등장하여 이 책의 권위와 내용과 강조점을 거듭 거듭 부각시키신 예는 계시록 말고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볼 때 본문이야말로 계시록의 결론이자 신구약 성경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결론의 내용을 통해서 계시록이 어떤 책인가 하는 것을 또 다시 확인하며 나아가 마지막까지 우리 주님의 우리를 향한 간절한 소원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계시록의 결론에서 크게 두 가지의 내용이 반복적으로 강조됨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계시록의 권위에 대한 강조요, 다른 하나는 계시록 내용의 핵심 사항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럼 먼저 계시록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1.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6절에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계시록에 대한 믿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 신실하고 참되다는 표현은 본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으로(19:9, 21:5) 본서 전체의 내용이 참되고 진실한 하나님의 계시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 얼마나 신실합니까? 그것은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한 말씀에 잘 나타납니다. 여기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계시록이 구약 성경과 같은 권위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 이 진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7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했습니다.
이처럼 계시록은 한 마디로 주님이 오시는 책입니다. 초림은 과거요 재림의 시제는 현재와 미래형입니다. 재림의 미래형만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오리니” (에르코마이)는 원문상 현재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을 말할 때는 이 두 시제를 함께 강조해야 합니다. 즉 현재적으로도 오시고 계시고 마지막 날에는 재림으로 온전히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59:19에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한 이 말씀은 성령으로 임하시는 것을 예언하심입니다. 성령의 임하심은 성령 강림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충만하게 임하고 계십니다. 대부분 재림에 대해서는 아는데 현재 오시고 계심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성령의 임하심이 오시고 계심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천국이 얼마나 멀다고 더구나 시공간을 초월하신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나마 속히 오시겠다고 굳게 약속하신 주께서 지금까지 오시지 않는가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이 재림은 아니지만 오시고 계신 증거요 징조요 일차적 오심의 다른 형태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죽은 영혼이 주의 영의 임하심으로 거듭나 변화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15:51-52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하심과, 살전4:17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하심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우리의 육체와 우주까지라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며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대로 성화를 준비하는 자에게 복이 약속되어져 있음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성령으로 임하심보다 더 귀한 것은 없고(눅11:13), 장차 예수님 재림으로 가져올 은혜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전1:13에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도 오시고 계시고 또 온전히 오실 주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 소망은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허탕치는 소망이 아닙니다. 혹시 그 동안 기독교회가 예수님께서 속히 오신다고 외쳤는데 2천년이 되도록 오시지 않고 계신다면 너무 성급한 종말론이 아니냐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성급한 종말론이라면 시한부 종말론과 양상만 다를 뿐 역시 동일한 착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오셔서 이미 수많은 인생을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셨고 또 온전케 하시고 계시며 또 더욱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재림하실 것일 것이니 이것은 잘못된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오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오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사실 신앙 생활이란 살아 계신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으로 충만함이 곧 영생이요 성화요 행복이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재적으로도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 때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 즉 그 때 인 맞은 십 사만 사천이 되고 신령한 인 재앙이 나타나고 신령한 나팔 재앙이 나타나고 신령한 대접 재앙이 지켜지고 바벨론에서 승리와 해방을 경험하며 제사장이 되고 나라가 되고 전도자가 되고 신부가 되고 성전이 되고 새 예루살렘이 되고 계시록에서 말씀하신 성화의 온갖 진리들이 성취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진정으로 안 사람은 성령 충만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고 성령운동을 벌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이 진리에 대한 감격을 가져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8-9절에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했습니다.
요한은 계19:10에서 사람에게 경배하는 실수를 여기서 또 다시 반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를 기록함은 계시록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진리인가를 역설적으로 시사합니다. 물론 모든 성경이 감격적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에는 모든 성경의 내용이 함축되고 완성적인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더욱 감격적인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앞서간 성도는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라” 자기를 소개했듯 계시록의 모델이 된 이 형제를 통해 우리는 계시록이 과연 어떤 책이며 따라서 이 책을 보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을 진데 이 진리에 대한 감격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한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앞서간 이 성도에게 경배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전해준 진리에 감격함도 있겠지만 천상에 속한 성도의 영광스러운 모습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곧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표본으로서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이 진리의 감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은 성도들을 날마다 감격의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온전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케 하고 부활에 연합케 하며 승천에 연합케 하여 장차는 영혼만이 아니라 육체까지라도 썩지 않을 영광의 형체로 변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산상의 베드로처럼 곤하여 졸거나 감정에만 도취되어 귀한 천상의 대화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 천상의 대화란 눅9:31에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 라고 했던 대로 십자가 대속의 복음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심은 황홀경을 위함이 아니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합한 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미 믿음으로 연합되었지만 이제는 아론의 옷깃까지 흘러 넘치듯 풍성한 생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때 진정한 감격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4. 이 진리를 인봉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왜 이 진리를 인봉하지 말아야 할까요?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했습니다.
이처럼 계시록은 봉인된 책이 아니라 이미 개봉된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은 이는 없겠지만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마치 인봉한 책을 다루듯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계시록만은 주석하지 않았습니다. 겸손의 의도는 이해하나 인봉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혹자는 당시에는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금에야 핵무기 등이 등장함에 따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봉은 이미 계시록이 주어질 때부터였고 그 이해 역시 그 때부터 가능한 것이지 지금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해석상으로는 인봉이라는 뜻이 되므로 개봉의 의미가 없습니다. 계시록이 풀리지 않았다면 육적으로 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혈과 육으로 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신령한 복음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인봉하지 말라는 것은 계시록 해석의 가능성 시사는 물론 이 책을 닫지 말고 계속하여 그 복된 것을 이루기 위해 힘쓰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강해가 끝나도 계속하여 이 귀한 말씀대로 성화적인 진리 안에서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때가 가깝다는 말씀은 궁극적으로는 재림이지만 아울러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강조함입니다. 막1:15에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고, 갈4:4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여기 때는 하나님의 나라의 경륜을 암시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인봉해서는 안될 것은 이제는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여 모두가 구원을 얻게 하고 또한 이들을 은혜로 성화하도록 도와야 하며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재림의 예수를 기다리다가 모두 지쳐 있는 현실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기도했는데 주여 속히 오셔서는 안됩니다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라고 기도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주님이 어떤 형태로든 오셔야 재림 준비도 되고 맡기신 사명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에 안타깝습니다. 주님은 어떤 형태로든 오셔야 하며 오실 때 은혜가 됩니다. 즉 아기 예수로 오신 초림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사 구속의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오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은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이 임하심이 있을 때 거듭나게 되고 심령이 변화되고 신부 단장이 이루어지며 무기력에서 능력적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은 우리의 육체만이 아니라 우주까지도 영광의 형체로 변화시킬 대 사건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오심은 어떤 형태로든 은혜로운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이 야곱을 두고 서로 들어와 달라고 다투었던 것처럼 날마다 우리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때 재림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성령 안에서라도 충만히 우리에게 임하여 주실 것입니다.

5. 이 진리는 결코 가감할 수 없습니다.

18-19절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였습니다.

성경을 가감한다는 것은 가장 큰 죄악입니다. 만약 더해서 다른 것을 증거한다면 그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자칭 예수, 자칭 하나님, 자칭 성령을 주장하는 적 그리스도가 그러하고 시한부 종말론이 그것입니다. 혹은 감해서 계시록에서 복음을 제외한다면 신령한 은혜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역사적 미래를 부인한다면 방종의 신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참된 은혜를 경험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주님께서 계시록의 결론에서 거듭 강조하시는 핵심적인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앞에서는 계시록에 대한 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다른 한 가지 즉 계시록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결코 잊지 말고 적용해야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그 내용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 때 그 동안 계시록을 잘 강해했는지 여부가 아울러 판명 나게 될 것입니다.

1. 승리의 영적 생활의 원리를 결코 잊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11절에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난해한 구절입니다. 죄인을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할 자들에게 그대로 두라니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사람이 어찌 머리털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있으리라고 이런 교훈이 주어질까요? 문장의 서술로만 본다면 난해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는 죄인들의 회개를 역설하는 문장이라고 말합니다(단2:10, 10. 겔3:27, 20:39).

그런데 이 구절에는 성도들이 신령한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영적 원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거듭난 심령에도 두 종류의 생명이 공존하는데 여기에 대한 자세는 한 마디로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그만 둠이요 하나는 적극적인 의미로 그만 둠입니다. 즉 소극적으로는 죄에 대해서요 적극적으로는 성령 따라 사는 삶에 대해서입니다. 자기 힘으로 죄성과 싸우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이미 상당한 승리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내 의가 아닌 생명의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적극적인 경건 생활에 힘씀이 완전한 승리를 얻는 비결입니다. 이 일을 끝까지 하라는 우리 주님의 당부이십니다.

내가 죄와 싸우려는 순간 로마서 7장의 바울이 율법 하에서 겪었던 그 방황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악인과의 투쟁했던 다윗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다윗의 기도는 사단과 죄악과의 싸움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악의 세력을 어떻게 합니까? 온전히 하나님께 맡깁니다. 시편 37편 1절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했습니다. 이렇게 죄악이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가장 현명한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방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반쪽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또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견되는 원리는 우리의 의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자기 의로우심을 주권적으로 창출해 가시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즉 성령 받아 그 은혜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은혜로 거룩하게 살아지는 것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갈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역시 간접적인 우리의 개입일 뿐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을 마치면서 당부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 이후에라도 혹시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거나 은혜 없이 살려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롬6:11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진리의 여김마저도 은혜가 아니고는 늘 관념에 머무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혜를 구함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섬으로 죄에 대하여는 죽어지고 의에 대해서는 살아지는 은혜 가운데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행해 나갈 때 온전한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 틀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유지해야 한다는 당부이십니다.

2. 마지막 순간까지 맡은바 충성을 다하고 낙심하지 말고 성화를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확신하라고 당부하십니다.

12-13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일반적인 의미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 때 사명에 충성 봉사를 교훈함입니다. 이렇게 충성 봉사할 때 예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셔서 그 일을 온전히 이루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재림의 그 날에 큰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 중에 하셨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마16:24-27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음 완성에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처음과 나중이 되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가장 큰 일은 우리의 믿음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날까지 우리의 영혼과 몸이 온전하게 함이란 곧 성화적인 믿음을 지칭함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교훈에 예수님의 이름이 동일한 내용으로 세 번이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이 이름은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그 일을 완성하시겠다는 내용인데 세 번을 거듭 강조하심은 견고한 약속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번의 강조는 늘 넘어지고 안 된다고 결코 실망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즉 그 일을 주께서 이루어 주시지만 우리가 할 일은 우선 그것을 믿고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6:7-9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성령으로 심는 것입니다. 늘 성령 충만을 위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충실히 할 때 사역의 성과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지고 거룩하게 유지되어 주님 맞을 준비가 됩니다. 이 부분이 우리가 힘써야 할 부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각 사람에게 일한 대로 상을 주시고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주의 일과 성화는 신인 협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한 대로 갚아 주신다 하셨듯 일한 만큼 섬긴 만큼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까지 맡은 바 사명과 신앙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믿고 충성을 다해 감당하라는 당부이십니다.

3. 계시록을 마치면서 주님의 결론적인 당부는 한 사람도 씻지 못해서 은혜에 동참하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14-15절에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지식 전달이 아닙니다. 여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의 복이 언급됨과 성밖의 슬픔과 애처로움이 시사됨과 이 말씀이 계시록의 결론이라는 점에서 이 주님의 말씀은 결코 한 사람도 성안의 축복된 은혜에 동참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당부이십니다. 이 구절에서 주님의 이 간절한 심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심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 몇 번 우신 적이 있었는데 그 중에 거역하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두고 우셨습니다. 이 때 주님의 마음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그와 같이 하나님의 예비하신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자녀들을 보시고 우리 주님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습니까?

그런데 이 구절을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사람들이 천성 문밖에서 성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함과 악인들이 성밖에 있다는 말씀 등이 있습니다. 상당한 난해한 구절입니다. 내용을 보면 그들은 분명 극악한 자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불신자라면 성밖은 고사하고 영원한 격리일텐데 그들이 천성 성밖에 있다니 무슨 뜻일까요? 어떤 이는 그 곳은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한 구절을 참고할 때 지옥에서 씻음 받아 천성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이론이 되므로 오히려 위험한 주장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이곳은 세상도 지옥도 아니오 근거 없는 연옥은 더욱 아닙니다. 계21:1-2을 보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와 새 하늘과 새 땅에 안착하여 천국의 수도가 됩니다. 그렇다면 천성 밖도 역시 천국의 영역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어 이미 천국의 영역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죄성을 씻지 않고 죄를 버리지 못함으로 그 놀라운 새 예루살렘의 은혜를 모르고 있음을 보여주심입니다.

이 행실의 두루마기를 빨 때 두 가지 결과가 오는데 먼저는 생명 나무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생명 나무의 잎사귀가 치유의 능력이 있듯(계22:2) 성령으로 행실을 씻을 때 심령의 상처가 치유함을 입습니다. 그리고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듯 천성의 그 복된 은혜와 영광과 권세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행실을 씻은 자는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늘 묻는 죄성을 날마다 은혜로 씻어야 합니다. 혹시 죄병에 들어 심령이 더러워지면 그 사람은 그 은혜를 풍성히 누림이 그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은 아니지만 은혜의 경험은 누려지지 않습니다.

마치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일지라도 성안과 성밖에 거주한 자로 구분되었습니다. 아무나 성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생명 바친 신앙의 투사들만이 가능했습니다(느11:1-2).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투사가 되지 않으면 은혜 누림에서 그쳐져서 세속에 빠져 살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한센병에 걸리면 성밖으로 쫓겨났는데 이는 죄병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하나님 자녀가 되었지만 근신하고 깨여 있는 용사적인 믿음이 없어서 이 은혜 안에서 사는 하늘 나라 귀족으로 살아가지 못함은 슬픈 일입니다.

그리고 오직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했습니다. 이 말씀은 넓은 의미로는 모든 선택받은 자라는 의미지만 좁게는 계3:5에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한 대로 성화적인 행실의 흰옷을 입은 사람이 그 영광에 들어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공로로 칭의의 흰옷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행실의 흰옷까지 겹으로 입어야 합니다. 칭의 수준과 성화 수준이 누리는 천국의 영광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계시록의 결론에서 한 사람도 씻지 못해 약속하신 그 영광을 누리지 못한 자가 있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서 계시록이 성도들을 신부 단장시켜 준비시키는 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깨여 근신하여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이제 계시록의 최종 결론을 들으십시다.

1. 우리가 외쳐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16절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인류의 구세주요 소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는 소개에서 예수님은 다윗 이전이나 이후에도 영원한 메시야이심을 밝히십니다. 다윗은 메시야의 예표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계통을 계승할 뿐 아니라 그 근본이시오 실체이신 메시야 즉 왕이시오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나님 나라가 옵니다. 그 분의 통치를 받아야 구원과 자유와 행복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누립니다.

그리고 새벽 별 역시 메시야의 상징입니다. 이 별이 떠야 새 날이 오듯 그리스도가 인류의 소망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어둡습니까? 온갖 좋은 공약을 했던 통치자들이 지나갔지만 통치자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못했기 때문에 죄악의 문제를 방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면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께서 현재 성령으로 임하시든 장차 재림으로 임하시든 임하실 때 세상은 새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왕이시오 구세주요 소망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2.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시지 않고 성령과 신부의 합창으로 하실까요? 그것은 이 은혜의 자리에 초청은 성령으로 말미암고 신부된 성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이 세상 어떤 군자일지라도 예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전하지 않으면 이 복음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목마른 자 초청 및 생명수 등의 언급을 볼 때 은혜적인 성화 운동을 시사합니다. 진실로 이 계시록의 성화의 복음을 통해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여 풍성한 은혜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힘쓸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 신부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수 믿으라는 불신자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초신자가 더 전도를 잘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시록에 나타난 성화적인 신령한 은혜로 인도할 사람은 성령 충만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신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지상의 교회는 가나의 혼인집이 되어 풍성한 은혜의 포도주로 먹일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에게 앞에서 언급했듯 예수님께서 인류의 왕이시오 구세주요 소망이라고 외쳐야 할 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는 성령의 은혜를 강조하고 성화의 방편에 힘써 성화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사실 중생과 칭의는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이제 날마다 힘써야 할 사항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신부는 이렇게 초청합니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이 말씀은 은혜의 자리로 오라는 것입니다. 본인도 오고 타인도 데리고 오고 모두 은혜의 자리로 오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준비해 놓으신 생명의 은혜를 마음껏 마시라는 초청입니다. 그런데 초청의 말씀을 세 번에 걸쳐서 했다는 것은 그 간절함의 완전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강조하듯 이제는 정신 차려 근신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은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곧 은혜의 생활이요 성화의 방편입니다. 이제 계시록은 강해가 끝나지만 은혜 받는 생활은 시작되고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 받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정착됩니다. 이 은혜 운동이 곧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입니다.

3. 이 진리를 아는 자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20절에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본서에서 예수님께서는 7절과 12절에 이어 세 번째로 재림을 약속하십니다. 이 세 번의 약속은 역시 더 할 수 없는 강조를 의미합니다(그랜드종합주석).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천국이 얼마나 멀기에 예수님께서 오시는데 그토록 오래 걸리는가 반문합니다. 더구나 속히 오신다 하셨고 전지전능하시고 시공간을 초월하신 무소부재하신 예수님께서 속히 오신다 하지 않았느냐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속히 오리라는 말은 원문상 미래형이 아닌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오시고 계신 것입니다. 많은 오해는 속히 오리라는 현재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오셨고 또 성령 안에서 임하고 계시며 그리고 온전히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죽어 가는 많은 인생들을 성령으로 오셔서 살리시고 변화시켜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만드시면서 구원을 얻도록 지금도 성령으로 임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기도와 전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수 십억의 인류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이야말로 심히 바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요한의 기도처럼 담대히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모하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형태로든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 심령을 충만케 하십니다. 이 사모함의 기도는 현실적으로는 성령 충만의 기도와 동등이요 미래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구함입니다. 기억하실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시든지 재림으로서 임하시든지 오셔야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재림 공포에 빠져 있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오신다면 그 심령은 온전케 될 수밖에 없으며 그의 삶은 천국으로 변하게 되고 나아가 택한 자는 회개하여 예수 믿고 신자는 기름 준비가 되고 신부 단장이 되며 이 땅에는 놀라운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장차 오셔서 우리를 영광의 형체로 변케 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오심을 사모하는 것이 곧 주를 사랑함입니다. 마치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이 서로 남편을 자기 방으로 모시기 위해 다툰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그들을 떠나지 않았고 그들과 살며 그들 중에 있었고 그들을 먹여 살리며 책임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다투면서까지 야곱이 그들과 더욱 함께 하기를 사모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의 내주하심과 신부의 칭호에 만족하지 말고 그의 충만하신 임재를 날마다 사모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아람어로 “마라나-다" 즉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가 성찬예식 때 드리는 공식 기도문이었습니다. 그 만큼 그들은 금방이라도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듯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땅에서 겪는 핍박도 고통도 끝나고 악도 멸망하고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개설된 영원한 복락과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잊어서는 안될 것은 주님 오실 때가 언제일지 모르나 현실에서 맡은바 본분과 은혜의 직무와 사역에 충성하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21절에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하였습니다.

여러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는 이 기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기도로 끝내지 않고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하는 축복으로 끝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학수 고대하면서도 오시는 그 날까지 맡은 바 사명과 본분에 충성하며 은혜의 복음 운동에 힘써야 한다는 힌트를 줍니다. 내일 종말이 온다할지라도 오늘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계시록을 배운 자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계시록을 공부하고서 현실을 등졌다면 그것은 잘못 공부한 것입니다.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을 증거한 후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15:58)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면서 나와 온 세상이 복음화 되도록 주의 은혜에 충성해야 합니다.
특별히 계시록은 복음에 입각한 은혜운동과 성화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배운 여러분은 자신의 은혜생활과 함께 남에게도 은혜를 끼치는 영적 부흥의 귀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부흥을 일으킬 기도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언제나 주님의 임하심에는 기도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의 배경에 시므온과 안나가 있었고 성령 강림의 배경에는 120문도가 있었으며 재림의 배경에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는 재림을 갈망함과 아울러 이 땅에 성령으로 임하는 영적 부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의 축도처럼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임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오시는 주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재림의 때까지 요한계시록에서 그토록 성화 이룸과 복음 전도를 당부하심을 기억하여 더욱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합시다. 그러기 위해 날마다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날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