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혀의 권세로 경영하라
지난주에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자>라는 말씀으로 우리 삶에 언제나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을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신년 메시지로 <새해를 혀의 권세로 경영하라>는 주제로 19년도에는 우리의 소원이 성취되는 한 해가 되기를 갈망하면서 오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담이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은 그의 통치권입니다. 그래서 그가 가졌던 통치권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해서 그 통치권을 잃어버린 것인지를 오늘 말씀의 배경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을 보시면“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영어로 보면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직역하면 <선과 악의 지식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버전으로 보면‘축복과 저주의 지식나무’라고 번역된 것도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까 선(good)과 악(evil)을 축복과 저주로 바꿔서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가난과 질병과 고통과 슬픔과 상처와 원한 등의 저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이 축복과 저주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축복과 저주의 지식의 열매를 먹고서 어떻게 변했다는 것입니까?
창세기 3장 8~11절을 보시면“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는 말씀을 보게 되면,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축복과 저주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서 이들은 자신들이 벗은 것을 알고서 두려워하여 숨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는 지식나무의 실과를 먹고서 자신이 지은 죄를 의식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친히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아담이“제가 벗었음으로 두려워서 숨었습니다.”라고 말하자 하나님이 “누가 네게 벗었음을 알려주었느냐?”고 물으시면서 곧바로“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구나!”하신 것을 보면, 지식나무가 죄를 의식하게 함으로 저주를 몰고 왔다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아담의 타락은 그의 입으로 먹은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곧, 그가 축복과 저주를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자신이 벗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입으로 저주를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아담이 그 열매를 먹는 순간, 자기 입으로 저주를 말하는 지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는 아담이 축복과 저주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이 저주를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먹는 순간, 자신이 발가벗은 것을 알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곧, 그가 선악의 지식을 가짐으로 이제 그 입에서 저주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0절을 보시면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다음부터 한 입에서 축복과 저주가 섞여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담이 그 열매를 먹은 다음부터 자기 입으로 축복과 저주를 만들어내는 지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잠언 18:21절에 보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고 사는 것을 단지 육체적인 사망과 생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전반적인 모든 일에 이 원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건강이 좋고 나쁜 것이나 사업이 흥하고 망하는 것 등 이 외에 모든 일이 내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이 잘되고 안 되는 것은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알려면, 아담이 불순종한 것인지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는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아담은 다른 곳에 따로 있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6절을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함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라는 기록되게 되면,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있을 때, 아담도 그 옆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디모데전서 2장 14절을 보시면“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성경 전반에 걸쳐서 이 모든 죄의 책임이 아담에게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창세기 2장 15절을 보면“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외부의 침략자인 사탄이 있음을 암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아담은 깨어서 동산을 잘 지키고 다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어떻게 이 땅을 다스리고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람도 하나님처럼 기능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말씀으로 통치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만물을 통치할 때, 우리 입의 말로 통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혀의 권세로 만물을 다스리고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이 하와를 유혹하고 있을 때, 아담이 뱀을 향해 “당장 이 동산에서 떠나가라”고 혀의 권세로 명령했다면 그 말에 의해 사탄은 쫓겨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혀의 권세로 주셨는데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만일 그의 혀의 권세를 사용해서 “어디서 감히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라고 마귀를 대적했다면 그는 당장 쫓겨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혀의 권세를 사용하지 않음으로 인해 에덴동산을 지키지 못했고 그의 기업을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로 그의 통치하는 권세를 마귀에게 넘겨주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담은 이제 자기 혀로 저주를 말하는 불의의 혀로 전락되고 만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6절과 8절을 보십시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의 혀는 지옥의 불이 붙게 된 것입니다. 곧, 사단의 도구로 전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길이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레바퀴는 인생의 진로와 과정을 뜻하는 말로써 생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는 것은 혀로 인하여 불길이 번져가는 것처럼 불의의 혀가 인생의 전 과정을 오염시키고,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 혀를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혀의 권세. 곧, 혀를 통제하는 능력을 잃어버림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함부로 말함으로써, 저주를 만들어 내는 사탄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입의 하는 말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거듭났을 때, 이를 반드시 회복 되어야 할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성령이 친히 혀를 통제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2-4절을 보시면“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하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오셨을 때, 눈에 띄게 드러난 사건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맨 먼저 하신 일이 바로 혀를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방언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께서 그 혀를 주관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는 순간,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었던, 저주를 쏟아내는 우리의 혀를 오로지 주님의 하신 일을 높이고 선전하는 혀로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표적은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면, 이것이 혀의 권세를 회복하게 되는 것임을 말씀해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전에는 지옥 불이 되어 억제할 수 없었던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했던 혀가 성령님이 오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복음을 전하는 혀로 바꿔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혀가 성령님의 불이 붙게 됨으로서, 성령에 의해서 혀가 다스려짐으로 혀의 권세가 되찾아진 것입니다. 아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잃어버렸던 혀의 권세가 되찾아진 것입니다.
마가복음16장 17,18절에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우리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새 방언을 말함으로서 혀의 권세가 회복되어진 것을 말씀해 준 것입니다.
잠언15장 4절을 보시면“온순한 혀(건전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말씀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나무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건전한 혀로 곧, 제대로 기능하는 혀’를 가지게 되면,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생명나무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패역한 혀는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영에 구멍을 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생명과 사망이 혀에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혀가 우리의 심령을 죽일 수도 있고,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늘 새롭게 살려놓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말이 중요합니다.
신명기 30장 11~15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계명을 주셨을 때, 그들의 반응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어떻게 지켜요. 너무 어려워서 못할 것 같아요.”라고 반응했을 때, “이 계명들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씀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네 입에다 두고 마음에다 두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과 복이 너의 입에 있으므로 네 입으로 이것들을 선택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이 말씀을 인용한 구절이 로마서10장6-10절에도 나옵니다.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해 준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믿음에서 나는 의는 부정적인 불신의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다만 그것은 입에다 두고 마음에 두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본적인 원리는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영적인 원리입니다.
이 구원은 죄 사함으로 국한 되지 않고, 모든 상황에 적용됩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우리 구원도 전인적으로 나타납니다. 즉, 죄에서의 영적으로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 일어나는 가난, 질병, 저주, 고통 등, 모든 상황에서의 구원이 역사 됩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의 역사가 다방면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실제 상황에서 건짐을 받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축복된 삶이 우리 혀의 권세로 회복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고스는 일반적으로 기록 된 말씀을 가리키는 반면, 레마는 특정한 상황에서 나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별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데 왜, 이리도 나의 삶은 풀리지 않는 겁니까?” “나의 남편의 사업은 왜, 안 풀리는 겁니까? 우리 자녀는 왜, 안 변합니까?”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어 의로 여겨졌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구원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곧, 나의 환경을 변화시키지 위해서는 누구나 아는 객관적인 말씀을 나에게 주어진 주관적인 레마의 말씀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내 입술로 날마다 시인하고 선포 할 때에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일을 이미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누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 말씀을 나의 말씀을 취해서,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자신의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하며 행할 때, 축복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레에마를 잘 받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는 레에마가 주어지지 않는 겁니까?”라고 불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구하고 찾아서 믿음을 화합하는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상황에서 붙잡고 일어설 수 있는 말씀을 자신이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레마의 말씀은 가만히 앉아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33장 2,3절에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니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으로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약속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레마의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이렇게 내가 바라는 것을 능동적으로 구하고 찾고 받은 말씀이 곧 레마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나에게 레마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하고 그 음성을 듣지 못함으로서 붙잡을 말씀이 없음으로 인해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실례를 들어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믿음이 생겨야 나의 말씀으로 곧, 레마의 말씀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받고, 어떤 사람은 못 받는 이유가 이것이 하나님의 소관이 아니라 나의 믿음에 달린 것입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능동적으로 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말씀을 붙잡아 나의 말씀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레마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소관이 아니라 나의 믿음에 달린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레아마의 말씀을 내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까?
1. 나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과 또 다른 변화가 필요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곧,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라는 말입니다.
2.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말씀에서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3. 바로 그 말씀을 레마의 말씀으로 취하시고, 그것을 밤낮으로 말하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그리해야 합니까?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실재가 될 때까지! 계속 말하고 믿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에게 절박했던 필요가 무엇입니까? 75세가 되기까지 그에게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실 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는 말씀으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이 말씀을 좇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처음부터 믿음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지만, 아브람은 고아인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건 혹시나 조카 롯이 자기의 후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롯이 장성하고 소유가 많아지면서 그가 삼촌과 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가 그만 전쟁에 휘말려 포로가 되었을 때, 아브람이 그를 구출해 냅니다. 그러나 그 때, 롯은 아브람의 품으로 돌라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욕심 때문에 소돔 땅으로 돌아가 버리고 나서야, 아브람은 롯에 대한 헛된 기대를 접게 됩니다. 그 때, 그 마음이 얼마나 허전하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1-6절 말씀을 보시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렵니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 이니 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 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을 봅니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아브람은 자기 후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짐에서 길리운 자 에리에섹을 상속자로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하게 그 사람은 네 후사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이다”고 밝히 말씀해 준 것입니다. 이렇게 계시가 주어질 때, 믿음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날, 아브람은 장막 밖으로 나가 하늘의 별을 보고서야 비로소 후사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 믿음으로 그가 의롭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무려 십년을 기다렸지만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도 그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 사래가 그 당시 씨받이로 첩을 드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으로 후사를 얻고자 두 사람이 합의해서 하갈을 첩으로 들여서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하갈이 교만해져서 사래와 갈등이 생김으로서 가정불화가 일어났고, 그 환경에서 이스마엘이 커가는 13년의 기간은 하나님이 아브람을 한 번도 찾아오시지 않는 영적공백기간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17장에 와서야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하시면서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고 하는 더 밝은 계시로 언약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99살에 열국의 아비가 되라는 언약을 세우면서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준 것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늘 언약이 기억나도록 “열국의 아비”라는 이름으로 바꿔준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여기에 영적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말씀을 보시면, 아브람이 창 15장 6절에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실재가 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실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이제 입으로 시인하게 하는 과정을 거침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그 이름으로 바꿔 부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에도 그리고 집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주인을“아브라함”이라고 부르게 함으로서 그의 정체성이 분명해지고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비로소 견고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믿음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9-21절에서 보시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견고한 믿음은 바로 그의 나이 99세에 그 이름을 바꿔 부르게 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견고한 믿음이 생긴 겁니다. 그리고 비로소 100세에 이삭(웃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처럼 주님께 소망을 두고, 바라보는 소원이 있을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비전이든 사업이든, 그것이 주와 복음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면, 받은 말씀을 붙잡고 그 소원을 매일 바라보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아브라함에게 이뤄진 일이 우리에게도 현실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은 받은 말씀을 매일 선포해도 당장 외부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만 낙심치 말고 계속하십시오. 곁으론 어떤 변화가 보이지 않아도, 영의 세계에서는 이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마가복음11장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하신 기록이 있는데,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을 때 그 즉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보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 당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때로부터 뿌리가 마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음으로 말씀을 선포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암아 떠나가라”고 말할 때, 그 즉시 암의 뿌리가 마르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단지 외부적으로 증거가 될 만한 상황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선포한 대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선포하는 것이 현실이 될 때까지 선포기도를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땅에다 대고 “오렌지 나무 큐! 하면 곧바로 오렌지 나무가 쑥! 상추 큐! 그러면 상추가 쑥!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왜, 우리가 선포할 때 즉시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
창세기1장11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2장 5절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한 것을 봅니다. 분명히 창세기 1:11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대로 되었다고 했는데, 창세기 2:5절 에 보면 아직도 초목도 없고 채소가 나지 않았으며 사람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그 직시는 외부적으로는 아무 일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하나님의 원리는 말씀하실 때, 영의 세계에서는 씨가 먼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씨가 땅에 떨어지고,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어야만, 그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선포한 말씀이 현실로 이뤄지기까지 이 땅에서는 항상 시간과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복창을 하겠습니다. < 내가 어떤 일을 선포할 때, 영의 세계에서는 나쁜 것은 뿌리가 마르고 있고, 좋은 것은 씨가 생겨서 자나고 있다 > 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빨리 생기기도 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합니다. 내가 포기만 하지 않으면 내 입으로 말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에서는 씨가 심겨지고, 이를 계속 선포할 때 그 씨가 자라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 26-28절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하신 것입니다.
전도서11장3절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하신 말씀대로 비가 저절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구름에 비를 가득 채워야 쏟아지는 것입니다. 구름에 비가 어떻게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까? 그건 수증기가 올라가서 구름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의 분량이 채워질 때, 그 일에 성취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름에 비를 채우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것입니다. 내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선포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챨스 캡스 목사님이 돈이 하나도 없을 때에 계속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모든 것을 채우신다.”는 말씀들을 계속해서 고백을 했더니,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믿음의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의식과 행동이 형통의 의식으로 바뀌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금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아니, 우리가 형편이 어렵고, 돈이 없는데도“부족함이 없다”하면 거짓말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요?’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인데 “아버지께서 나를 영화롭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미래의 일을 현재의 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항상 미래의 일을 현재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묶고 푸는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16장 19절을 보시면“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내가 무엇이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고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는다는 말로 적당히 알고 있는데, 여기서 묶는다는 것은 불법을 체포하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땅에서 <이것은 불법이다>고 선포하면 그것이 하늘에서도 이미 불법으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땅에서 푸는 것은 내입으로 합법적인 것이라고 선포하면, 그것이 하늘에서도 이미 합법적인 것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이미 묶여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난. 질병, 저주가 이미 다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가난. 질병, 저주를 불법이라고 선포하면 이것이 하늘에서 묶여 있는 그대로 나에게도 묶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미 무엇이 풀려 있나요? 신령한 모든 것뿐 아니라, 거기서 파생되는 모든 좋은 것, 즉 축복, 행복, 건강, 부요함이 하늘에서 이미 풀려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그러한 상황이 아니라면, 내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축복 받는 것이 합법적인 것이라고 선포하면 하늘에 풀려 있는 복이 그대로 나에게 역사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자신의 주변 상황을 돌아보십시오. 나의 형편(상황)이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하시고자 하는 상황과 반대되는 상황이거나 맞지 않는 상황에 있다면, 즉 재정에 어려움이 있거나, 또한 질병이 있다거나 관계에 어려움이 있다면, 이제 어떻게 선포해야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그 말씀을 찾아 레마의 말씀으로 붙잡고 이것을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언제까지 선포해야 합니까?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입니다. 사업이 풀릴 때까지,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믿음으로 담대히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그렇게 하실 때,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나의 입에 있는 것입니다. 이 혀가 비록 작은 지체이지만, 거대한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작은 키인 것처럼, 우리의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고 만들어가는 것은 혀의 권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혀를 잘 훈련하는 것이 참된 경건의 능력인 줄로 아시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고 거기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레마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선포하심으로서 위대한 미래를 만들어 가시는 새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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