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선교사! 목회자란!

참된 설교 /빌립보서2:6-8/ 하용조 목사

하나님아들 2024. 2. 26. 20:22

참된 설교 /빌립보서2:6-8/ 하용조 목사
2015-05-27  























설교에 따라.. 교회가, 성도가 조각되어집니다.

예배가 교회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면

교회, 그리스도의 몸에서 예배가 잘 드려지면 심장이 잘 뛰는 것과 같습니다.
심장이 잘 뛰면 모세혈관에까지 공급이 잘되는 거죠.

병이 들어도 상관이 없어요. 피만 순환이 되면 다 회복이 되는 거예요.
병이라는 게 뭐냐 하면 혈액순환이 잘 안되기 때문에,
혈액이 가야할 곳까지 못가면.. 계속 그렇게 되면.. 결국 곪게 되는 거죠.

예배가 잘 드려지면.. 교회 부분, 부분 구석구석까지 살아납니다.
설교는 예배의 심장과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대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예배가 살아납니다.

물론 찬양을 많이 불러도 예배가 되고, 기도가 많이 돼도 예배가 되지만
그 예배의 KEY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지 않죠.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렇죠? 하나님은 육이 아니세요.
시간과 공간 안에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세요.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그 임재를 어떻게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있을 때.. 하나님을 느끼는 거죠.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외우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적용하는 거예요.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죠.

말씀은 말씀 그대로 전달이 안 돼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야만
우리가 느끼고, 그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있어서는 말씀의 사역보다 더 중요한 사역이 없고

목회자의 부름은 말씀으로의 부름이에요. 제일 중요한 것이에요.
어떤 설교를 하느냐가.. 어떤 교회를 만드느냐를 결정합니다.

나중에 지나보면.. 설교한 방향으로.. 교회가 조각되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그 설교 속에는 여러분 교회의 비전도 있고

색깔도 있고, 그림도 있고, 크기도 있어요.
여러분이 어떻게 성도들을 가르치느냐에 따라.. 그 성도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설교란.. 들리는 만큼 모입니다.

▶굉장히 성실하다고.. 목회가 잘되지는 않아요.

실력 있다고 목회 잘하는 것 아니에요.
굉장히 성실하고 실력이 있어도.. 목회가 안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사이즈가지고 고민하지 마십시오.

사이즈 가지고 여러분의 인격을 결정하지 마세요.
작을 수 도 있고 클 수도 있다는 거예요.

저는 오늘 아침에 조성록 장로님의 간증을 통해서 제가 굉장히 은혜를 받았어요.
비록 교인이 10명이라도, 그 고통스러운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게 은혜요, 축복이라고요.
그리고도 계속해서6년 동안 버텼다는 것, 이게 기적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하나님은 누구를 더 칭찬하시겠어요?
교인이 많다고, 사역이 많다고.. 하나님은 그를 높이 점수 줄까요?
안 그래요. 많거나/적거나.. 그가 진실하고 충성되면 상 주실 것이고.. 그런 거예요.

▶그렇지만 어떤 분들은 설교의 gift(은사)를 하나님이 준 분이 있어요.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하나의 gift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은사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얘기하면 똑같은 얘기라도 재미있게 얘기하는 분이 있고,
간결하게 얘기하는 분이 있고 그렿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데, 어떤 사람 설교 들어보면 빤한 설교가 있어요.
한 서너 번 들어보면 뻔한 거예요. 뻔하면 졸지요.

뭐가 이렇게 기대감이 있고.. ‘다음에 무슨 얘기 하지?’ 그래야 듣지요.

이번 주 설교 끝나면, 다음 주 빨리 와야 되는데..
설교는 어떻게 보면 연속극 같더라고요. 뻔히 아는 얘기죠.

연속극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다 아는 얘기면서도.. 그러나 연속성을 가져요.
그 드라마도 기승전결이 있어요.

거기에 웃음도 있고, 흥분도 있고, 기쁨도 있고, 감격도 있고 그러면서도
그 드라마 끝날 때는 다음 드라마 안보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모래시계 드라마> 끝날 때는 서울 시내가 다 한산했잖아요?
여러분의 설교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 끝나자마자 그 다음 설교 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교는 단회적이면 안되겠죠.

오늘은 이 설교, 다음 주는 이 설교,
(신약 구약 왔다 갔다 하면.. 일년 지나고 나서 보면.. 무슨 설교 했는지 몰라요.)

드라마처럼 이렇게 연속성이 있어야 돼요.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단회성이 있어야 돼요.

다음 설교를 기대하게 하고.. 그 다음 설교를 기대하게 하고.,
그래서 여행도 못가요. 그 설교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거 빠지면 큰 일 나니까요. 그렇게 열심히 들어주시는 성도님들도 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사람들의 주먹이 쥐어져야 해요.

가슴이 두근거려야 되고, 흥분이 되고 눈물이 나고,
끝나자마자 ‘그래 오늘 나는 내가 바뀌어져야 돼!’ 그러고..
이렇게 끝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설교는 들리는 것만큼.. 사람이 모이는 법이죠.
여러분 목회자들이 서울에서 설교하셨어요.

그 설교 테이프가 미국까지 가면 여러분의 성도는 어디까지 있어요?
미국까지 있는 거죠. 1997년 당시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인터넷으로 더 쉽게 갑니다.

장소는 별 의미가 없어요. 이제 테이프로 다 돌아다니니까요. 그때 테이프를 돌려서 들었습니다.

설교는 예배의 심장과 같다고 그랬어요.
따라서 설교가 살아있으면.. 생명력이 있으면..
설교에 성령이 기름 부으시면.. 예배전체는 살아나게 돼 있어요.

조금 성가대 잘 못해도.. 조금 어수선해도..
말씀에 은혜가 있으면 다 살아나게 돼 있어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좋은 걸 하나 배웠어요.
설교를 잘하면.. 뭐든지 다 용서해요.

그러나 설교를 잘 못하면.. 용서 안 해요. 그게 설교더라고요.
※미녀는 다 용서받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설교자에게는 ‘설교’입니다.

설교를 하면 교회 전체가 다 이렇게 은혜의 단비를 맞는 것 같아요.
나는 여러분의 설교에 기름 부으심이 있게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설교에 능력을 얻게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설교가 살아 움직이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이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설교자가 아니었으면 몰라도, 설교자로 하나님이 불러주셨으면
죽을 각오를 하고 뚫으십시오.

▶하여튼 설교는 몸 안에 들어와야 돼요. 머리 안에 들어오면 안 됩니다. ←하이라이트 단락1

몸 안으로 들어야 돼요.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몸 안에 들어온 얘기는 언제 어느 때나 나와요.

원고 필요 없어요. 스위치만 틀면 나오는 거예요.
똑 같은 설교를 5분에 할 수도 있고, 1시간에 할 수도 있고, 하루 종일 할 수도 있어요.

자기 몸 안에 완전히 설교가 들어와 있어야 되지요.
(평소 삶에 복음적으로 살아야 .. 설교가 몸에 배이게 됩니다.)

여러분 설교는 죽은 영혼을 살린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6:63

여러분 제가 설교할 때는, 사람의 이성에 호소 안 해요.
이성이라는 과정이 필요하죠.

논리적인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듣지요. 논리가 없으면 안 들어요.
한 얘기 또 하고, 이 얘기 했다, 저 얘기 했다.. 그러면 잘 안 들어요.

그러나 제가 설교를 할 때는, 그 사람의 영에 설교를 하지
이성에 호소 안 한다고요.

영에다 설교를 하면 죽어있는 영혼들이 살아나는 것이 보여요.
얼굴에 그게 나타나요.

들어올 때는 죽은 얼굴이었다가.. 설교 들으면 산 얼굴로 나간다고요.
너무너무 좋아한다고요.
그건 이성이 설득된 것이 아니에요.

내 영이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골수와 관절을 쪼갠다는 말이죠.

영이 살면.. 육이 살아요.
따라서 여러분 육을 기쁘게 하는 설교나, 인간의 혼을 기쁘게 하는 설교는,
그것으로 끝나버려요.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나 spirit 영을, 영으로 설교하고, 영에게 설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설교란 incarnation 육화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incarnation, 육화란.. (원래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말씀이 내 삶에서 육화되어야 한다'.. 는 뜻입니다.
내가 말씀을 먼저 살아내고.. 그 내용을 설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1. Incarnation (육화)
그는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6

하나님이 인간과 같이 된 것을 가리켜 ‘성육신’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거 아닙니까?

설교란 그런 거예요.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몸 안으로 incarnate 되어야 돼요.
말씀이 내 몸 속에 incarnation, 성육신이 되는 게 설교예요.

이 말씀이 통째로 내 몸 안에 육신이 되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래서 내 이성으로, 내 언어로, 내 몸으로.. 내 삶으로 이 설교가 표현되어야 해요.

절규하는 사람이, 아주 한이 맺히는 사람이,
이혼당하고, 매 맞고 쫓겨나고 이런 사람보고 ‘남편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오’ 하면
두 시간 세 시간 거품 물면서 이야기해요, 너무 분해서... 그게 설교예요.

예수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데.. 어찌 흥분을 안 합니까?
어떻게 그렇게 맹숭맹숭하게 그 얘기를 해요?
그것도 기적이지...

아니 어떻게 교인을 졸게 해요? 그것도 기적이지...
복음을 가지고 말이죠.

한이 맺힌 사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젖어버린 사람들은
십자가 얘기만 하면 흥분하는 거예요.

쏟아지는 거예요. 막 쏟아지는 거예요. incarnation됐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의 설교가 incarnation되기를 바랍니다.

▶2. Identification (동일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일단 나와 동일화가 되어야 해요.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어요.
그 예수님이 인간과 identification(동일화)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도 잘 알지만, 인간도 잘 알아요.
설교자는 두 대상을 다 잘 알아야 돼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익숙해야 돼요.
동시에 인간을 알아야 돼요.

언어도.. 그냥 콩나물 장사가 얘기하는 것 같이 시장바닥에서 보통 얘기하듯이
그런 아주 생활적인 얘기를 써야지,
설교는 문어체 쓰면 안 돼요. 구어체를 써야 돼요. 그냥 생활언어!

예화도 그래요. 1800년대 나폴레옹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오늘 개똥이 엄마가 겪었던 것. 그런 거예요.

오늘 내가 설사 나서 생겼던 것, 밤 잠 못 잤던 것,
특별히 사람들은 설교를 할 때 피상적인 설교를 해요. 그렇지 않아요?
설교는 인간의 내면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돼요.

사람들은 자기 내면 속은 다 감추고 있거든요.
그 인간의 허구성, 위선, 죄성, 비밀.. 여기는 어마어마한 세계예요.
그 세계를 예리하게 파고 들어가는 거예요.

말씀가지고.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냐 하면

캄캄한 방에 전기 불을 들고 찾아가는 것과 똑 같아요.
이 문 열어보고 저 문 열어보면 거기에 인간의 질투, 간계, 인간의 두 얼굴,

인간의 욕심, 인간의 음욕, 인간의 위선 이런 것들이 얼마나 멋지게 포장되어 있는데..,
그걸 다 풀어버리는 거예요.

자, 하나씩 하나씩 풀면.. 까무라치게 놀라죠.
그럼 뭐라고 그럴까요?
'목사님이 내 얘기하지..' 그런다고요.

내가 언제 당신을 아오? 모르죠!
그런데 왜 그게 내 얘기처럼 들리느냐?

내 속의 비밀을 파헤쳤기 때문에,
그 내 속의 비밀은 나의 비밀이죠. 이렇게 설교는, 내면을 파고 들어가야죠.

겉에는 불을 켜고 있지만.. 인간의 내면 안에는 다 전기불 끄고 있다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 껍데기를 깨고..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죠!

여러분은 텔레비전 해설가가 아니라고요.
정치해설가도 아니고, 경제해설가도 아니예요. 조심하세요.

회중석에는 전문가들이 다 앉아있다고요.
정치 얘기 함부로 하지 말고, 경제 얘기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내가 전할 수 있는 메시지는 성경밖에 없어요. 성경 외에 넘어가지 마세요.
이게 우리의 전공이고, 우리가 전해야할 메시지예요.
왜냐하면 이 성경은 작은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까지 연결되어 있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고, 그리고 천국까지 가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것은 박사 아닌, 박사 할아버지라도 세상의 어떤 전문가라도
이 말씀은 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이런 설교자의 영적권위와 확신과 confidence 자신감이 있을 때
이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자신감이 있으면 말이 쉬워집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말이 어려워집니다.

제가 하나 배운 게 있어요.
설교 준비 안하면 말tone이 높아집니다. 괜히 소리를 지릅니다.

준비 많이 한 사람은 소리 지를 것 없어요.
또 했던 말 되풀이도 안 합니다. 그러나 준비 안 하면.. 했던 말 되풀이 합니다.

설교는 말이죠, 비행기가 landing을 잘 해야 돼요.
자꾸 활주로를 돌면 안돼요. 그냥 착 내려야 해요.

서론이 길면 안돼요. 설교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cut해 내느냐가 중요해요.
한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불필요한 가지를 다 쳐버려야 해요.

▶3. Communication (의사소통, 전달)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Incarnation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 Identification
‘자기를 낮추시고’ - 그래서 사람과 communication 합니다.

설교는 communication이다. 즉 상호교감을 통해 전달을 해야 돼요.
좋은 설교가란 유능한 communicator예요.

내가 설교준비를 다 많이 했어도, 어떤 상황에서는 이 설교를 포기할 용기가 필요해요.
그게 설교예요.

지난번에 어떤 분께 제가 아주 기분 좋은 소리를 하나 들었어요.
그분은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신 분이예요.

미국에서 온누리교회를 소개받고서(자기 교회를 한 3, 4년 다녔는데)
한국에 귀국하면, 온누리교회에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서울에 왔대요.

그런데 1년 반이 되도록, 나하고 손 한번 못 잡아 본거에요.
그러니까 미국이 그리웠겠죠. 거기는 교제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는데..,

좋긴 좋은데.. 사람이 하도 많고 저를 만날 기회가 없으니까,
‘목사님 제가1년 반 만에 잡아보는 손입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이 분이 저에게 이런 격려의 말을 해주더라고요.

저는 1년 반동안 목사님 손은 못 잡았지만
여기 설교 때문에, 내가 여기 붙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까 목사님이1년 동안 굉장히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엄청난 공격을 받고 있는데, 목사님이 한번도 변명을 안 하시고
똑같이 웃으시면서 설교를 하는 걸 볼 때.. 진짜 설교를 들었습니다.

‘목사님 1년 동안 변명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자기는 진짜 설교를 들었다.’
그렇게 저를 격려해 주더라고요.

설교는 내가 말하는 것도 설교지만.. 내 삶이 설교예요.
이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설교는, 사기꾼이 될 수가 있어요.

설교가 나빠서 사람이 안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와 설교자의 삶이 서로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좋은 설교를 들을수록 갈등을 하는 거예요.

설교는 communication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오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같이 밥을 잡수시고, 같이 잠을 자고, 사람하고 똑같이 살았단 말이죠.
피곤하셨고 목마르셨고 주무셨고.. 사람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람들과 동일시 Identification 되시면서
그것이 자연히 communication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폼(권위) 잡고 앉았으면.. 제자들이 따랐겠어요? 안 따랐겠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셨기 때문에 진짜 communication이 된 거예요.

여러분, 목회자들이 한번 생각해보세요.
교인들하고 얼마나 communication이 되어 있으세요?

마음과 마음, 삶과 삶.. 비록 여러분들은 목사이고 설교자이지만
교인들이 느끼기에는 ‘저분은 내 친구다!’ 이렇게 느껴야 돼요.

You are my friend, you are my brother. 이런 느낌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communication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교인이 목사가 되고 싶어해야 돼요.
'나는 목사가 제일 좋은 것 같다.' 그 정도 까지,

교인들이 ‘나는 우리 자녀가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까지 말이죠.
'다 해도, 나는 목회자는 싫다' 이러면 안 돼죠.
그 목사는 문제 있는 거예요. 모델이 안 된 거죠.

▶4. Sacrifice(희생)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 희생 sacrifice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설교자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가 보이거든요. 희생이 없는 사람에게는 예수가 안 보입니다.

낮은 데로 가면 예수가 보입니다. 손해 보면 예수가 보입니다.
희생하면 예수가 보입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핍박과 고난을 겪고도.. 가만히 있으면 예수가 보여요.
결국은 설교란 예수님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연세대학교 다니는 교수가 한분 계신데, 그 분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셨어요.
미국에서 오신 분인데, 우리 교회 등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시더라고요.

서울에 내로라 하는 교회는 다 갔대요. 왜냐하면 자기도 정착을 해야하니까.
이 설교 저 설교 다 들어봐도 잘 모르겠더래요. 그래서 부부가 이런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듣는 설교 가운데 예수님 얘기를 제일 많이 하는 설교자를 찾아가자.’
그런 기준을 세우고 설교를 듣기 시작했대요. 그래서 큰 교회를 다 갔대요.
웬일인지 제가 설교 하면서, 예수님 얘기를 많이 했나봐요.

여기오니까 처음으로 설교에 예수님 얘기가 있더래요.
‘그래서 이 교회를 결정했습니다.’ 하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설교의 시작도 예수님이요. 끝도 예수님이예요.
결국은 설교시간에 보여지는 것은, 나의 위대한 웅변이나 논리나
아주 sharp한 지성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서 끌게 하는 게 아니예요.

나는 폴 틸리히 같은 사람의 설교를 들어보면
굉장히sharp한 이 시대를 꿰뚫고 보는 그런 게 있어요.
그런데 과연 그 속에 예수님이 있느냐? 그건 별개의 문제더라고요.

칼바르트나 이런 사람들을 보면 사람들이 거기 다 빨려들어가요.
위대한 사상가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도 아니고 예리한 지성을 갖고 있지 않지만

소박할지 모르지만, 따뜻한, 그리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격려해주시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항상 거기 있어야 돼요.
이게 설교예요. 결국 예수님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설교 이전에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기릅시다.

설교의 깊이는 묵상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왜 우리의 설교가 화려한데.. 은혜가 안 되느냐.. 묵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으로부터 나오는 설교는.. 사람들이 들으면 금방 알아요.

옷도 비싼 옷하고 싼 옷보면 딱 알잖아요.
좋은 옷은 뭔가 좋아요. 선이 다르고, 질감이 다르고, 패션이 다르다고요.
그러니까 오리지널하고, 카피는 다르다니까요.

설교 딱 들어보면 ‘야, 저거 쉽게 말하는데 쉬운 게 아니구나!’ 그래요.
깊이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단순하게 얘기하는 것 같은데 격이 있구나,
저 사람은 무슨 철학자 얘기도 안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안 해도,

아 저 분은, 저 책을 다 읽었나보다..'
그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거예요.

절대로 다른 유명한 사람 말 인용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고요.
성경의 설교의 깊이는 묵상의 깊이입니다.

저는 데니스 레인 목사님을 만나서 설교를 배운 사람 중에 하나인데,
늘 만날 때마다 어떻게 똑 같은 본문인데 저렇게 설교를 하나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분은 30년 동안 큐티를 했거든요. 목사님의 설교자의 제1과업이 큐티예요.

우리 두란노에 <생명의 삶>이 있고 <말씀 묵상>이 있어요.
초신자들은 <생명의 삶>을 좋아해요.
<생명의 삶>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냐, 보니까 본문 때문이 아니라
예화 때문에 좋아하더라고요. 그거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음식 떠먹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자기가 만들어 먹는 거예요.
그런 분은 <말씀 묵상>을 더 좋아해요...

새벽기도 안하는 날은 제일 행복한 날 아닙니까?
그런데 새벽기도 하는 날은 더 행복한 날이예요.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말씀을 전할 사명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everyday 묵상, 새벽기도는 결국 묵상이에요.
묵상된 말씀을.. 그 신령한 아이디어들을.. 그날 그날 자꾸 던져드리는 거죠.

그러다보면 적용하는 훈련이 자기도 모르게 자꾸 되고
말씀을 보고 뽑아내는 훈련이 되는 거예요.

대개 목회 2~30년 하신 분들은 웬만한 주석은 다 읽지 않았어요?
뭐 한번쯤 읽어야 되겠죠. 웬만큼 대충 되지 않습니까?

그 다음부터는 주석은 나를 방해해요. 왜냐하면 고정관념을 심어주기 때문에,
그 이상 생각을 못 넘어가게 만든다고요.

주석이라는 것은 내 생각이 맞았나/ 안 맞았나를 검증해주는
하나의 울타리 같은 역할을 해줄 수는 있지만

설교는.. 성경 읽고.. 자기가 묵상하고.. 자기가 은혜 받아야 됩니다.
메인 메시지는 성경하고 싸워야 돼요.. 일대일로.. 주석책이 아니라!

저는 주로 토요일 같은 때는 매번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만
설교준비를 대충하면 제 아내에게 practice를 합니다.
그게 토요일 저녁의 제 시간이예요.

서론은 이렇게 잡았고, 본론은 이렇게 잡았고, 결론은 이렇게 잡았고..
이렇게 이렇게 한다. 그러면 여자는 센스가 있어요.

그래서 그걸 딱 잡아내요. ‘가지가 너무 많은 것 같다.’
‘또 이건 너무 하나에 치우친 것 같다.’ 그런 코멘트를 받을 수가 있어요.

목사의 설교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분은 불가능합니다.
잘못했다 말하기도 어렵고.. 잘했다 말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부인이 제일 좋아요.

부인에게 설교를 검증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서
부인으로 하여금 설교를 도와줄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좋은 방법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약점을 지적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인이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지적해주면.. 제가 자존심이 상해서 안돼요. 어려워요.
그래서 여러분의 사모님들을, 설교를 잘 평가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일이 또 참 중요합니다.

그러면 묵상된 메시지 말씀을 어떻게 설교로 끌고 갈 것이냐?
결국은 설교란.. 내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고 나면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 이런 인상이 있어야 해요.
가능하면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야’ 해요.

그러니까 너무 설교를 화려하게 하면 누가 나타날까요? 그 사람이 나타나죠.
‘말 잘하네!’ 이런 말 들으면 안돼요.

‘와~저사람 화술 좋다’ 이래도 안돼요.
하나님이 생각나야 되고,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이 설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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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어떻게할것인가

서울 서빙고동 온누리교회 담임 하용조(61) 목사는 일주일에 세번씩 혈액투석을 받는다. 한번 투석하는 데 4시간이 걸린다. 평생을 당뇨와 고혈압, 결핵 등으로 고통받은 그는 간암에 걸려 6차례 수술을 받기도 했다.

요양을 해도 시원찮을 하 목사는 요즘 새해부터 시작된 온누리교회의 40일 새벽기도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지난해 말 투석을 받고 있는 서울의 모 병원과 온누리교회를 찾아 2차례에 걸쳐 하 목사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누워서 투석을 받고 있는 하 목사의 모습을 보니 코끗이 찡해왔다. 만신창이의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하 목사를 강단에 서게 만드는 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지난 7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며 치료를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강단에 설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매주 투석하고 있지만 목회와 설교를 하는 데 부족함은 없습니다. 투석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바늘이 몸에 들어가는 순간 아픕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순간입니다. 투석받는 4시간은 저의 큐티 시간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이지요. 고통은 저에게 깨달음과 은혜를 줍니다. 밤이 낮을 알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통이 있기 때문에 기쁨이 더 빛을 발하게 됩니다. 힘들지만 울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에 불안하고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줄을 놓칠 때에 그렇지요. 믿음의 줄을 잡으면 그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왜 설교하러 강단에 서느냐고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저에게 설교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몸이 약하다 보니까 새삼 선배 목사님들이 말씀하셨던 ‘일사각오의 설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설교 마치고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매번 강단에 설 때마다 자세가 달라집니다.

사실 모든 목회자들이 매번 설교 때마다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설교를 듣고 생명을 되찾는 사람들이 생기니까요.”

-설교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바른 설교란 어떤 것입니까.

“설교의 정의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목사뿐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평신도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습니다. 단지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바른 설교는 설교자가 자신의 말을 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전하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강연입니다. 설교자는 철저히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설교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설교의 위기는 한국교회의 위기로 직결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전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바로 한국교회 강단 위기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하겠지요. 기도와 자기 성찰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더불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공급자 중심의 시각이 아니라 수용자들의 필요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적인 적응성이 필요합니다. 인간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요. 많은 설교자들이 수용자인 대중, 즉 인간들을 너무나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 없는 것이지요. 수용자 중심의 사고를 해야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사항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해야 할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중이 원하는 말이 아니라 대중에게 해야 할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다를 때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너무 청중들이 원하는 메시지만 전해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기의 본질입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타고난 설교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한국교회사학연구원은 2005년에 하 목사를 한국교회 10대 설교가 가운데 한명으로 선정했다). 설교 스타일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제가 타고난 설교자라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설교를 즐깁니다. 강단에 서면 힘이 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타고난 설교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의 설교를 굳이 구분한다면 큐티식 강해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이미지화합니다. 주로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하는데 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머릿속에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저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픽처랭귀지(picture language)’라고 할까요.

그림 언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다보니 설교가 웅변조가 아니라 설득적이고 호소적이게 됩니다. 용어를 사용할 때, 되도록이면 자극적이고 비판적인 내용을 선택하지 않으려 합니다.

-설득을 하려다 보면 예언자적인 설교는 하기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요.

“설교자마다 스타일이 있습니다. 저는 예언자적 소리는 많이 하지 않습니다. 치유와 회복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야단쳐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설교자의 삶을 통한 진정성이 깃든 말로 인해 변하는 것이지요. 예언자적인 설교를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필요하지요. 모두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비판할 사람들은 열심히 비판하고, 싸매주고 수술해줘야 할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나는 수술한 것을 싸매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프다 보니 더욱 그렇게 생각됩니다.”

-설교 준비는 어떻게 하십니까.

“사실 목회자는 일주일 내내 설교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일 설교가 끝나면 저는 다음 설교를 준비합니다. 일주일 동안 본문을 읽고 묵상합니다. 설교문은 직접 펜으로 씁니다. 수십권의 때묻은 설교 노트는 저의 귀중한 자산입니다.

설교문을 작성하는 데 하루나 이틀이 걸립니다. 설교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 쓴 것을 다섯번 찢은 적도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윌리엄 바클레이나 존 매카더 목사, 이상근·박윤선 목사 등의 주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석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번역본을 많이 봅니다. 설교 테이프도 자주 듣습니다.
조용기(여의도순복음교회) 이동원(지구촌교회) 옥한흠(사랑의교회 원로) 목사 등 국내 목회자들과 빌 하이벨스(윌로크릭커뮤니티교회) 릭 워런(새들백교회) 목사 등의 설교를 즐겨 듣습니다.

사실 워런 목사같이 설교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단지 참조할 뿐이지요. 모든 설교자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설교 본문을 정하고 설교문을 작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닌데요. 가끔 지난 설교를 리바이벌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저는 설교를 리바이벌 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설교를 다른 집회에서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새롭습니다. 해야 할 설교가 너무나 많습니다. 긴 시간에 걸쳐 사도행전에 관한 설교를 세 번 했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달랐습니다. 3년에 걸쳐 창세기 설교를 했습니다. 마태복음 가지고는 5년, 로마서로는 3년 설교했습니다. 강해설교의 묘미가 있습니다. 지금은 이사야서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예레미야나 에스겔서를 하고 싶습니다. 모두 하려면 7, 8년 걸릴 것입니다. 강해설교를 하다 보면 죽을 때까지 매번 새로운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온누리교회의 부흥 원동력은 이같은 강해설교에 있습니다.”

-설교자라면 반드시 연구해야 할 설교가의 모델이 있습니까.

“존 스토트나 로이드 존스, 존 매카더,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책들을 즐겨 읽으면 좋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의 책들도 빼놓아서는 안됩니다.
아니, 효과적이면서 바른 설교를 하기 원하는 설교자라면 반드시 이들이 쓴 책들과 친숙해져야 합니다. 캠벨 모건과 데니스 레인 목사님의 책들도 설교자들이 가깝게 해야 합니다.”

-요즘 모두들 설교하기가 힘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설교의 위기 시대라고 말하는데요.

“설교의 위기는 설교자의 위기입니다. 설교자가 말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지 못하면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즘은 설교 외에도 사람들이 들을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의 소중함을 깨닫기가 힘들어집니다. 이럴수록 목회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말씀으로 승부를 보려는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일사각오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목회자들은 죽을 각오로 설교를 준비하고, 이번 기회 외에는 전할 시간이 없다는 시급성을 갖고 설교를 전해야 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설교자가 살면 한국교회가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