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빈의 비교연구
루 터 (Martin Luther)
1. 생애와 작품
1483 11월 10일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출생
1505 엘볼트에 있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게 됨
1507 사제로 임명
1512 비텐베르크(Wittenberg)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 받음 이때부터 그 학교에서 성경교수로 재직
1515 회심사건
1517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위에 ‘95개조 조항’게시
1518 카예탄의 신문을 받음 (아우구스부르크)
1519 루터와 엑크의 논쟁 (교회의 머리가 교황인지 예수 그리스도인지에 대한 논쟁)
1520 3대 논문 발표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교회의 바벨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
1520 파문장 받음
1522 신약성서 번역
1534 독일어 성경전서가 완성
1546 아이슬레벤에서 사망
2. 루터의 종교개혁
- 회심 : 1515년 로마서 강해도중 하나님 공의의 진리 터득. 이 발견에 대한 감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마치 내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린 것처럼 느꼈다.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the justice of God)라는 구절이내 가슴 속을 미움
대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의 달콤함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 비텐베르그 대학 논쟁 :
1516년 루터의학생 베른하르디(B. Bernhardi)가 대학의 구술토론(disputation)에서 많이 행하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노력/공로가 없이 그리스도를 많이 믿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다' 라고 진술하여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 95개 논제들 : 1517년 루터가 비텐부르크 캐슬 처치 정문에 <면죄부의 힘과 효능에 대한 반론>(Disputation on the Power and Efficacy of Indulgencies)이라는 제명의 95개 논조(Ninety-five Theses)를 붙여놓았다.
"1. 우리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신자들의 온 생활이 회개의 생활이 되라는 뜻이었다......
"42. 곤핍한 사람을 보고서는 지나치면서도 면죄부를 사는데는 자기 돈을 내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부를 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 만일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이 하고 있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교황은 자기 양들의 가죽과 고기와 뼈로 성 베드로 사원이 세워지느니 차라리 불에 타 재가 되기를 바랄 것이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 로마의 소환 : 1518년 8월 7일 루터는 공식적으로 이단설을 유포한다는 고발을 당하여, 재판을 받도록 로마에 소환을 받게 되었음.
-아우스부르그 청문회 : 청문회장 카예탄은 95개 논제들 가운데서 두 개의 논제를 지적했습니다. 하나는 58번이었는데, 그리스도의 공로들이 교회의 창고에 들어 있는 저장물이 되어, 면죄용으로 분배될 수 있게 되었음을 부인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7번으로서, 성례들을 적절하게, 올바르게 받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카예탄은 이 논제들은 이전부터 가르쳐진 교황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반대된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였다.
루터는 이에 대해서 자기를 고소하는 자가 자문하고 의뢰하고 있는 교황의 '칙서들'이나 '교령들'은 명백하게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으며, 선택을 해야 할 경우, 언제나 교황의 칙서들보다는 성경을 선택해야 한다고 답변하였다.
- 교회 개혁 :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등 종교개혁 3대 논문을 발표하고 교회개혁을 주장. 이들 논문을 비롯한 루터의 개혁의 주장은 즉각독일 전역에서 읽혔으며, 출판한 지 불과 며칠만에 독일 너머에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종교개혁의 불길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파문 : 1520. 6. 15 파문장
-보름스 칙령 : 1521. 4월 15일 제국법정에서 루터는 자기주장의 철회를 요구 받음. 그에 대해 루터는 유명한 다음의 진술을 하게되었다.
"내가 성경의 증거에 의해서나 명확한 이성에 의해서 납득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이나 교회 회의들만을 신뢰하지 않으며, 그들이 자주 오류를 범하고 스스로 모순을 일으켰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에 매여 있으며,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양심에 거스르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그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지도 않
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양심에 불복하는 것은 옳은 것도 안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
루터의 활동을 금하는 찰스 5세의 공식적인 선고인 보름스 칙령은 5월 말경에 포고되었다
보름스 칙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루터는 이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단으로 간주된다. 그는 4월 15일부터 21일간의 유예기간을 부여받
았다. 그 후에는 누구도 그에게 머물 처소를 제공할 수 없다. 그의 추종자들 역시 정죄 받았으며 그가 저술한 책들은 인류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야 한다.“
- 독일어 성경 : 1522년 9월, 번역 시작 11 주 만에 신약성경 독어판 발간
- 아우스부르그 제국회의 : 1530년 황제 카알 5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화해를 위해 아우스
부르크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한다.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루터의 동료이자 친구인 필립 멜란히톤
(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제출했고 그것이 1530년 6월
25일 의회에서 낭독됐다.
- 아우스부르그 협정 : 그 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는 1555년 9월 25일 아우스부르크 협정을 체결하게 되는데 여기서 독일의 가톨릭과 루터파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공존하며 영주들은 자기 영지의 종교를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분열은 고정됐다.
1517년 95개조 발표로 시작된 분란은 일단 끝났고 루터파는 종교적 자유를 얻게 됐다.
- 30년 전쟁 : 하지만 분쟁의 불씨는 계속 남아있었고 종교 전쟁의 시대가 시작됐다. 마침내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독일을 외국 군대의 싸움터로 만들어 마침내 독일을 황폐화 시켰다. 루터교는 협정 체결 이후 빠른 속도로 전파됐는데 1560년경부터 1570년까지 독일의 3분의 2가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갔다. 이후 폴란드, 헝가리, 보헤미아, 오스트리아에도 전파됐고 스칸디나비아 지방들은 완전히 루터교로 넘어갔다.
3. 루터의 신학사상
1. 하나님의 말씀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최종적 권위로 성립시켰다. 그는 성경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성경 속에 기록된 언어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에게 단순한 정보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동하신다고 이해한다.
말씀이 예수님으로 성육신하신 것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계시인 동시에,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행동이시다. 또한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로잡고 있던 악의 세력을 극복하셨다. 하나님의 계시는 곧 하나님의 승리였다.
모든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만난 것이 아니다.
루터는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주장하면서도, 그 일부분에 대해 부정적 언급을 하였다. 즉, 야고보서는 규범만 있고 복음이 없으며, 요한 계시록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힘들다고 고백했다.
루터는 성경이 그리스도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개념을 통해, 성경이 교회, 교황 그리고 전통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다고 하였다.
2. 하나님의 지식
루터는 순전히 합리적, 혹은 자연적 방법을 통해서도 하나님에 관한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통적 신학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우리가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듯이 단지 추상에 의해 하나님을 알 수는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천국으로 기어오르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의 노력은 헛된 것이다. 루터는 이들의 노력을 가리켜 “영광의 신학‘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신학은 신적 존재 자체를 그 자신의 영광 속에서 알고자 추구하는 반면,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가로놓인 막대한 간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가장 고상하고 위대하신 자기 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영광의 신학” 대신, “십자가의 신학”을 제안하였다. 우리가 십자가 속의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들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모든 선입견을 버려야만 한다.
3. 율법과 복음
우리는 신적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이 계시 가운데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나셨으니 곧 율법과 복음이다. 율법과 복음의 대조적 관계는 하나님의 계시야말로 동시에 심판의 말씀이자 은혜의 말씀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나님의 용서의 메시지인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는 우리들의 죄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냥 용서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동일한 말씀이 어떤 경우에는 동시에 심판과 은혜를 의미하게 된다. 율법의 심판이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용서는 더욱 더 감당할 수 없는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 사이에 존재하는 이 계속적인 긴장관계는 곧 기독교 신자가 죄인인 동시에 의롭다 칭함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칭의란 죄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4. 교회와 성례
루터는 자기가 살던 시대에 이미 많은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던 교리에 저항하였고 로마 교회의 권위에 반항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는 교회야말로 기독교 메시지의 가장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신학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교제를 주장하는 대신, 기독교인들의 생활을 신앙인들의 공동체 속에서 파악했다. 이 공동체를 가리켜 그는 “어머니 교회”라 불렀다.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제를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되, 동시에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가 발생하는 유기적 실체가 존재하는데 이 존재가 교회이다.
세례 혜택의 하나로 모든 기독교 신자가 다 제사장이 되었는바,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제사장이라는 의미 보다는, 믿음의 공동체를 위한 제사장이며, 동시에 이 공동체가 우리를 위한 제사장이 된다는 의미이다.
교회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성례를 통해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어떠한 예식이 진정한 성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제정된 것이어야 하며, 복음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상징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통해 루터는 단지 두 가지 성례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으니, 이는 곧 세례와 성찬이다.
루터는 가톨릭의 화체설을 부인하였으나, 성찬을 단순한 상징 혹은 영적 실재의 표식이라고 여기는 데 반대했다. 그는 ‘이는 나의 몸이다“라는 예수님의 성찬 제정의 말씀이야말로 이 성례에 실제적으로 임재하는 명료하고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루터는 성찬을 통해 신자들이 진정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는 화체설처럼 떡이 몸이 되고 포도주가 피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는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행동을 통하여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혜택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의 성찬이론을 후대의 해석가들이 공재설(consubstantiation)이라고 불렀다.
5. 두 왕국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왕국을 설립하신 후, 하나는 율법 아래, 다른 하나는 복음 아래 두셨다. 국가는 법률 아래 운영되어야 하며 그 목적은 인간의 죄와 그 결과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다.
또 다른 왕국에 속하는 신자들은 복음 아래에 있다. 이는 기독교 신자들이 국가가 복음에 의해 성취되거나 , 혹은 국가가 정통 신학을 옹립하여 이단들을 박해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진정한 신앙인들은 세속적 권한의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말씀의 능력을 통해 우리들의 생각을 남들에게 전달하고 이들의 순종을 기대해야 한다.
루터는 전통적인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론에, 심각한 의문들을 제기하였다. 실제 정치적인 방면에서, 그의 왕국이론은 구체적 상황에서 그대로 적용하기가 힘들었었다.
칼 빈 (John Calvin)
1 . 생애와 작품
1509년 7월 10일 파카르디의 노용(Noyon)에서 출생
1528년 루터신학의 권위자인 볼마르에게서 희랍어와 복음주의 신학 배움.
1532년 - 자비로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를 주석 출판.
1535년 - ‘혐오스럽고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현수막 사건으로 프란시스 1세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 바젤로 피난
1536년 -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라틴어판) 발표
1537년 - 파렐과 더불어 1월 16일에 제네바 시의회에 ‘제네바교회의 조직과 이 교회의 예배에 관한 신앙고백서’를 제출 첫째 개혁에서 칼빈은 실패로 끝남
1539년 -「추기경 사도레토에게 보내는 서한」을 펴내면서 가톨릭과 완전히 결별하고 교회, 성사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사상을 결정적으로 피력 기독교 강요 재판 (교의학 추가). 시편찬송 불어판 출간
1540년 - 결혼. 로마서 주해 출판.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부처에게 개혁교회적, 성례, 예배의식, 교회정치, 치리와 훈련, 장로제도 등을 배움.
1541년 - 기독교 강요 불어판 초판 출판.
1541년 - ‘교회법령’ 시의회 통과 - 교회 질서 잡기위해 4중적인 직제(목사, 교사, 장로, 집사) 주장
1551 - 신국(神國) 형성, 제네바를 개혁의 중심지로
1564년 - 지병으로 세상을 떠남
2. 칼빈의 프랑스 종교개혁
- 미사와 성만찬
프랑스 종교개혁에 있어서 주요한, 그리고 더 직접적인 논쟁이 되었던 것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미사와 성만찬의 문제였다. 그 주제는 1534년 어간에 칼빈이 쁘와티에(Poitiers)에 체류하면서 까디에가 "최초의 칼비니스트 공회"라고 표현한 일련의 비밀집회들 중에서 주요한 주제였는데, 특히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방식, 즉 화체설과 그리고 미사를 희생제사로 보는 "교황주의의 타락"이 문제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17일 밤 빠리의 여러 곳에 심지어는 성의 왕실 방문에까지 붙은 이른바 벽보사건이 일어났다. 그 주제도 역시 같은 성찬과 미사의 문제였다. 칼빈은 그들의 주장을 중대한 오류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강요의 서문을 대신한 1536년의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것들을 규탄했고, 그리고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자신의 성만찬론을 전개하면서 그것을 다시 비판하게 된다.
칼빈은 성찬에 그리스도의 임재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그러나 진정으로 성찬에 임재하신다고 주장했다. 이는 성찬 예식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신자들이 천국으로 옮겨져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잔치의 예고적 즐거움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 로마교회의 제 오류 비판
칼빈이 로마교회의 오류에 대해서 비판하는 문제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요한 것들만 보더라도, 성화상숭배, 면죄부판매, 천상의 또는 불가시적 교회를 교황과 로마교회의 체계와 동일시하는 오류, 성서적인 근거가 없이 마음대로 조작해낸 거짓 성례전들, 교회의 전통을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말씀과 동등한 위치에 두는 것들이다.
칼빈은 그런 오류들을 신학논설로써, 설교로써, 성서강의를 통해, 그리고 기독교강요에서 상세하게 규명하고, 참된 성서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밝혀주었다. 그런 점에서 칼빈이 로마교회와 투쟁했던 것은 단지 어떤 한 두 개의 교리만이 아니라, 그 교회의 교리와 종교 관행들 거의 전체에 대항해서였다.
3. 칼빈의 신학
1. 사상
사상의 원천은 성경이며,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의 저작들에 대한 관심을 배제할 수 없으며, 당시의 인문주의자들의 영향, 그리고 신학의 선배들인 루터, 멜랑히톤, 쯔빙글리, 마지막으로 부처-칼빈은 부처에게서 신학과 정치를 배움-의 역할이 큼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칼빈 신학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사상이다.
2. 말씀론
칼빈의 설교 말씀은 외쳐지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성령에 의한 설교 말씀은 성령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 말씀에 근거한다. 기록된 말씀의 저자가 칼빈은 하나님 혹은 성령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이 성서를 통해 친히 말씀하신다고 한다. 따라서 성서의 메시지가 파악되려면 성령의 내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율법과 복음은 설교의 실제 내용을 구축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구약과 신약의 해석학적 열쇠가 된다.
3. 인간론
아담의 큰 죄는 단순하게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믿지 않고 뱀에게 귀를 귀울였던 의심의 죄였다. 이러한 의심은 야망과 자만과 감사치 않음으로 이끌고 가서 그 결과 아담은 자신이 잘 보전하도록 주어진 본래의 모습을 상실했는데 이러한 상실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까지도 일어났다. 그러므로 아담이 본래적으로 가졌던 초자연적인 은사는 상실되었고 자연적인 은사-지성과 의지-는 부패되어 버렸다. 또한 부패된 의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의지가 없으면 어느 것도 일어날 수 없다.
4. 율법의 기능
율법이란 복음과 상반되는 어떤 것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책”과 구약성경 전반을 통해서 나타내 주신 계시를 뜻한다. 율법에는 3중적인 존재목적이 있는바 첫 번째 목적은 우리의 죄와 절망 그리고 타락을 보여주는데 있고 두 번째는 사악한자를 제재하는데 있으며 세 번째 용도는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데 있다.
5 기독론
칼빈의 기독론 연구에서 두 가지 점을 확고히 보아야 한다. 하나는 성경의
완전 영감과 신빙성이고, 또 하나는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 즉 위로부터의
기독론이라는 사실이다.
칼빈의 기독론을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루터파에 비해서 칼빈은 삼위일체의 이해를 더 강하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삼중직책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셋째는 언제나 인격의 통일성 내에서 각 성질의 온전함을 확언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육신의 목적을, 한마디로 죄인의 구속에 두고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큰 뜻이요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이었기 때문
이다(엡1:3-4).
칼빈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으로써 통치하셔야, 악이 사라지고 모든 불의가
제거되며 진정한 평화가 임한다고 믿는다.
6. 구속과 의인
칼빈에게 의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혜택을 베풀어서 받아들여 주심을 뜻하며 의인에게는 죄의 사면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다. 이것이 신앙의 참되며 유일한 기능이다. 신앙에 의한 의인은 기독교인들이 의의 전가에 만족해서 또 다시 죄의 구덩이에서 헤매고 다녀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의롭게 된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여전히 죄인이며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적인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의롭게 된 기독교인은 그의 의인의 열매를 보여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7. 예정
칼빈은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신의라고 부르며, 예정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장차 이루어질 것을 스스로 결정하셨다”라고 정의
하였다.
선택은 하나님 쪽에서 독자적으로 내리시는 결정이며, 유기에 대해서 하나님
은 유기될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허락해 주시지 않거나,
혹은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강팍하게 갖도록 능동적으로 결정하신다고
한다.
반대로 선택된 자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칼빈은 예정 교리를 무엇
보다도 성경적 원칙에 입각해서 전개해 나갔다.
8. 교회
교회를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로 나누는데 후자가 선택된 자들로 세워지는데 반하여 , 가시적인 교회는 말씀과 성례와 교회의 치리로 구성된다. 교회의 특징은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이다. 교회의 질서는 마땅히 성경으로부터 나온 일정한 지침을 따라야 하는데 여기에는 네 가지의 직분인 목사, 교사, 장로와 그리고 집사가 포함되어 있다. 교회는 또한 영적 치리권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도덕과 관습에 대한 세심한 관리를 의미한다. 칼빈은 세속의 권력자들은 교회의 치리에 협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9 성례
성례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증거인데, 외적인 징표로 확증되며 또한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향한 경건을 상호간에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의 목적은 신앙을 북돋아 주고 다른 사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 빵과 포도주는 상징으로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받게 될 불가시적인 음식을 나타내 준다 ” 라고 표현된다. 칼빈의 성례관을 영적 임재설이라 한다.
10. 교회와 국가
기독교인들은 통치자들이 연약하거나 악독할지라도 그들의 권위에 개별적으로 항거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이러한 일반적 규범에 대한 예외로서 첫 번째는 백성의 이익을 옹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 하위직 공직자들이 만일 폭군의 폭정을 종지시키지 못하면 그들의 책임을 기피하는 것으로 본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왕권에 근거해서, 우리는 인간 통치자보다도 하나님께 더욱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시민법이나 요구를 할 경우에는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와 칼빈의 비교
1 . 사상면
두 개혁자 모두가 고대 교부들과 당시에 유행했던 사상적인 측면에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루터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마다 그의 이론을 피력했던 반면,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 사상을 중심으로 모든 신학을 “도상의 신학”으로 정립해 나감을 볼 때 그들 당시의 환경적인 영향이 컸음을 엿볼 수 있다.
2 . 말씀론
루터와 칼빈에게 있어서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게 이것인데 성육신한 계시 예수 그리스도, 기록된 계시 성령, 선포된 계시 설교를 동일하게 보는 전통을 갖는다. 또한 성경의 저자는 친히 성령이시다라는 점에서 신 구약의 관계에서도 동일한 의견을 취한다.
3 . 창조와 섭리
루터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그리스도를 은총으로 등장시켜서 구원을 말한 반면에 칼빈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은총론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보려고 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창조를 계속적 진행과정이라고 하면서 섭리마저도 하나님의 창조의 계속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칼빈은 섭리라는 개념을 빌려왔다. 칼빈은 피조자에 대한 창조자
의 다양한 현존관계를 섭리라고 하였다.
4. 구원
인간의 타락과 부패에 대해서는 루터와 칼빈은 동일한 입장에 서있다. 즉 인간의 전적 완적 타락을 말하였다.
칼빈은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루터와 같은 해석에 있었다. 칼빈과 루터는 다같이 로마주의자들의 율법적 공로주의를 반대해서 인간으로서는 하나님 앞에 죄없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인간 밖에서 인간을 위해서 오시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힘입을 때에만 의롭다고 보았다.
5 . 예정론
루터는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반면,
칼빈은 이 개념을 예정이란 단어로 표현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사용했으며,
칼빈 신학 사상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6 . 교회론
루터는 교회를 정의하기를 '성도들의 회중'이라고 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의 회중 모임'이나 '거룩한 그리스도인의 무리들',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 교회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회중은 성령을 통하여 함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또한 복음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위하여 모여든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표지는 복음이다.
칼빈은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나누고, 그 어느 것이건 모든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거룩한 공회'(Holy Catholic Church)를 교회로 보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계획 가운데 택하신 자들을 이 세상에서 불러서 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고 '위에서 온 것'(From above)이요 '거룩한 것'이고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것'(Catholic or Universal)이라고 보았다.
7. 성찬론
많은 논쟁이 되었던 문제가 바로 성찬 교리인데 이 문제에서 칼빈이 루터파의 입장에 대해 반대했던 부분은 특히 의식문 가운데서 상징적인 표현방식을 허용함이 없이 떡을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각하는 점이었다. 주의 성찬에 관한 칼빈의 기본적 시각은 루터의 그것과 달랐는데 칼빈은 하늘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주님의 승천 이후로 그의 몸이 계신 곳으로서, 지상의 영역과는 연결될 수 없는 한정적이고 제한적인 장소로 여겼다. 그리스도의 몸이 본질적으로 성물에 국한하여 임재한다고 믿는 루터파의 신앙이었는데 칼빈은 이를 배격하면서 기독론의 입장에서 설명했는데 즉 그리스도의 승천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남아 계신다고 하였다.
참고도서 :
종교개혁사, justo Gonzales, 서영일 역, 은성
중세교회사, Justo Gonzales, 서영일 역, 은성
기독교사, Kenneth S. Latourette, 윤두혁 역,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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