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스크랩] 창세기 1-2장의 하나님 나라 신학

하나님아들 2012. 11. 21. 16:27

성경의  대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자

 

장창수선교사


창세기 1-2장은 창조 기사를 기록한다. 많은 기사들 중 창조 기사가 성경 처음부터 기록된다.  창조 기사가 갖는 신학이 기독교 교회에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기독교 교회는 창조론이 말하는 신학적인 가르침에 소홀했다.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기독교 교회는 지금까지 타락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에만 주요한 관심사를 두었다.  

즉 창세기 3장 이후의 성경 기록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을 신화(神話)처럼 생각하는 현대 신학의 영향을 받아 교회가 창조 기사를 심각하게 연구하지 않았다.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나 하나님 나라를 연구할 때 현대 신학자들은 창세기 12장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창세기 1-3장 또는 1-11장은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큰 잘못이며 실수였다.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라면(딤후3:16-17절)
기독교 교회는 창세기 1-2장 또는 1-11장도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진지하게 연구하여야 했다.  

창조 기사는 창세기와 모세오경 그리고 다른 모든 성경의 기초로 창조론의 신학은 모든 신학의 기초이다.  
이 기본적인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그 기초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게 될 것이다.  

창세기 1-2장이 말하는 신학적인 가르침은 신중히 연구돼야 한다.

1.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정의(知情意)를 가진 인격체로서 전지전능한 신이다.  그의 행위는 합리적인 목적과 의지 그리고 뜻을 가진다.(욥23:13-14절).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도 그렇다.  성경은 스스로 이 사실을 밝힌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절)  

창세 전 세워진 하나님의 작정(作定)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세 후 역사적인 실현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작정이 목적하는 바를 성취하려는 하나님의 첫 번째 시도임을 보인다.

하나님의 작정은 선택과 예정으로 구성되며 종국적인 목적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에게 거저 주시는 바 아버지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아들들이 되도록 특정한 무리를 먼저 예정한 후
나중 그리스도 안에서 이 무리를 택해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존재로 세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형제들로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들일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런 놀라운 자격을 종국적으로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에 따르면 창세 후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세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창세 후 그리스도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반드시 역사적인 성취내지 완성을 볼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건설은 불가분의 관계 아래 있다.  

그리고 특정한 무리 또한 그리스도와 긴밀한 관계 아래 있게 될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예정에서 언급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은 상속자가 되는 방법을 뜻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면 특정한 무리는 그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대표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대표자일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도 그리스도는 이중 대표자가 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창세 후 인류 역사에 반드시 개입할 것을 전제한다.  
단지 그 때가 언제일 것인가라는 문제만 남는다.  분명한 사실은 아들의 오심이 하나님의 작정을 완전한 형태로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아들 이전에 온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은 앞으로 올 메시아가 수행할 사역이 무엇인가를 미리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해 주는 모형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아들이 나타난다면 이 세상에 종말(終末)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할 것이다(막12:6, 고전15:45, 히1:2절).

하나님의 작정에서 예정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선택은 이미 구체적인 하나님의 행동에 속한다.  

예정의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로 계획된 무리는 선택의 목적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점 없고 거룩한 존재가 될 것이다.  

달리 설명한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정의 은총을 무조건적으로 입은 무리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표현이 뜻하는 시험의 원리를 통해 하나님 앞에 합법적인 상속자로 세워질 것이다.  이 때문에 특정한 무리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런 노력이 바로 믿음의 증거이며 그가 선택 받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을 절대로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은 항상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견인의 은총이 또한 필요하다.  견인의 은총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조건적인 은총을 입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무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기반할 것이다.  바로 이 사랑이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을 완성시킬 것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은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역사적으로 성취되고 완성될 것이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부 하나님의 작정은 특정한 무리가 받을 복을 잘 설명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절)  

하나님의 작정은 이 복을 아버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신령한 복은 하나님 나라 형태로 주어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의 가정에 소속한 식구(食口)가 되는 것이 최고 형태의 복(福)일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은 땅이 아닌 하늘에 속한 것으로 오로지 성령을 통해 전달될 것이다.

하나닌의 작정에서 우리 신앙 삶의 근거가 발견될 때 신자는 깊은 확신을 갖고 타협없는 신앙 삶을 살 것을 결단하게 된다.
신앙 삶의 근거를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깊은 뿌리에 두어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과 결별된 신학은 인간의 자의적인 신학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작정은 신학적으로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이 이를 증명합니다.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롬16:25-26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목적을 알아야  우리의 신앙 삶은 나침판을 얻은 듯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말씀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드려야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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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 행위에 의해 출발되었다.



천지(天地)와 그 가운데 만물(萬物)을 창조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의 유일한 주(主)와 주권자로서 자신의 통치를 출발시켰자는 것을 증언한다.  

구약의 창조론하나님 나라가 창조 행위에 의해 이 우주와 지구에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말한다.  



신약의 구원론에서 아들의 구속 행위에 의해 하나님 나라가 출발되었다는 것과 잘 대조된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하나님 나라는 우주적이며 보편적이다이 나라에서 창조주는 주인으로 만물을 계속 돌보고 보존하며 유지시킬 것이다.  

창세전 이미 세워진 하나님의 작정이 완성될 때까지……  이 때까지 만물(萬物)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속하는 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을 받는다(마5:45절).  이 은총을 우린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라고 부른다.
일반 은총 덕분에 우주와 자연과 인류 사회는 일정한 법과 법칙에 따라 질서를 유지하며 계속 존재할 수 있다(히1:2-3절).  

이들 법칙들이 위반되면 우주와 자연과 인류 사회는 파괴될수 있다.  일반은총 아래 세워진 법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은 징벌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관련된 질서와 법을 이해한다면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은 일반 상식이나 과학(科學)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고  오히려 존중해야 한다.  즉 상식과 믿음을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켜 보지 말아야 한다.미신과 맹신적인 신앙만이 이 둘을 대립시킨다.

창조의 마지막 순서로써 인간을 창조하기 전 하나님은 그 목적을 정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절)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의 진정한 통치자였다.  

그러나 인간 창조 목적에 따르면 ‘하나님의 일’인 만물 통치는 앞으로 ‘인간의 일’이 될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가 피조물 인간의 개입으로 이 땅에 실현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 신학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이 땅에 강림해야할 이유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자신의 통치를 실현시킬 것이다.리더십에 관련하여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나라는 앞에서 이미 언급된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하나님 나라와 전혀 다르다.  

우선 통치 영역이 지구에 한한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나설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실현시킬 하나님 나라는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하나님 나라의 영역 안에 항상 머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하나님 나라는 제한적이며 개별적인 그래서 특별한 하나님 나라이다.  

성경에서 보통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나라를 뜻한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 나라가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의미를 띠기도 한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여 우주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통치(統治)를 언제든지 실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도 바울의 다음 성구는 잘 이해된다.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15:24, 28절)  

이 지구상에 제한된 하나님 나라가 아들 하나님에 의해 완성될 것이며
그 때 아들은 자신의 나라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참 주인인 아버지에게 모두 돌릴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이 대리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아 다스릴 권세를 받은 것을 뜻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라면(골1:15, 히1:3절) 인간은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류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 덕분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즉 인간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랑을 받았고 그 결과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을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이 자격을 얻음에 있어 어떤 조건도 없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창조 행위를 통해 인간은 조건 없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총을 얻었다.  

하나님의 작정 중 예정이 말하는 바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무조건적인 은총이었다.  
인간의 대리 통치권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간 창조는 창세전 세워진 하나님의 작정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제한된 그리고 특별한 하나님 나라를 세울 목적을 갖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절)



문화 명령에서 하늘 통치가 분명히 제외되었다.  하늘로 상징된 우주를 포함한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는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에게만 속하기 때문이다.  



문화 사명은 하나님 나라가 인류의 번성을 통해 이 지상에 건설되고 확장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류가 번성한다면  저절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고 완성될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문화 사명과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은 모두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공동 목적을 분명히 보여준다.  여기서 구원받은 신자들이 자신의 성화를 위해 무엇에 힘써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타락 이후 인류 사회는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위대한 목표를 알려주는 문화 사명(창1:28절)을 버리며 포기했다.  즉 타락 이후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인간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려고 노력했다.  달리 말해 인간의 나라를 세우려는 자세나 노력이 바로 타락의 분명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타락전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돌아가야 한다.  신자들은 가정, 직장, 사회와 나라에서 일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참 주인 하나님의 servant로서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켜야할 leader임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인 리더십의 기본적인 철학이다.  이 사명을 잘 수행하는가는 칭의(稱義) 이후 주어진 하나의 시험과도 같다.  이 시험을 통과한다면 자신의 성화(聖化)를 잘 이룬 성숙한 신자일 것이다.  이렇게 이신칭의(以信稱義)는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은총(恩寵)이지만 동시에 신자에게 성화(聖化)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시험(試驗)이다.



3.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문화를 통해 확장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를 인간에게 맡겼다.  이의 증거로 하나님은 문화사명(창1:28절)을 인간에게 명했다.  

그 결과 만물 통치라는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일이 되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인류가 앞으로 수행할 문화 사명을 통해 이 땅에 건설되고 확장될 것이다.  

그럼 문화 사명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문화 사명은 두 가지 명령으로 구성되며 동시에 문화 사명을 이룰 두 가지 방법을 설명한다.  

첫 명령은 인류 사회 자체에 관련된 명령으로 인류는 자신의 생육과 번성과 땅에 충만을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한다.  
그 이유는 타락 이전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인류 사회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 사회의 생물학적인 번성은 인류 사회의 구성원의 수가 증가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 나라의 번성을 뜻한다.  

어느 정도까지인가?  땅에 충만하게 될 때까지이다.  생물학적인 번성도 하나님 나라 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이 명령은 단순히 개나 돼지처럼 새끼를 낳아 개체 수를 늘리는 것과 같은 생물학적인 의미만 갖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군이기 때문이다.  



여기 번성은 하나님 나라의 일군 수를 증가시킴을 뜻할 뿐만 아니라 경제, 정치, 사회와 문화 면에서 인류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그리고 평등한 권리를 누리면서 잘 사는 것을 뜻한다.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로서 하나님 앞에 모두 평등하고 대등하기 때문이다.  



문화 명령은 모든 복지(福祉)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누리는 사회를 세우라는 명령이다.  

그런 사회와 나라가 땅끝까지 충만하도록 확장되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인류 사회에 명령했다.  



이런 인류 사회는 곧 문자 그대로 이 지상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일 것이다.

이 때문에 타락 이전 문화 명령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즉 총체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타락 이후 구속이 우선으로 구속에 기반하여 문화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이 구속 사역을 교회가 맡고 문화 사명은 교회 밖에서 신자들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교회가 문화 사명까지 수행하려 한다면 정치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예수님이 로마제국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지 않은 이유가 어디 있는 분명하다.



둘째 명령은 인류 사회가 땅과 그 가운데 만물을 잘 통치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명령은 자연 관리에 관한 명령이다.  



왜 그런가?  

인류의 생육과 번성은 자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흙에서 나온 존재로 흙의 산물을 먹어야 살 수 있고 모든 의식주(衣食住) 문제는 자연에서 해결된다.

즉 인류는 이 땅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여기 잘 다스리고 통치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류의 생육과 번성을 염두에 두고 자연 만물을 잘 관리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동시에 자연에서 나오는 모든 혜택들 즉 산물들을

모든 인류가 골고루 그리고 형평성 있게 나누어 가지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화 명령은 인류의 문명 역사를 연구한 아놀드 토인비가 생각하듯이 자연을 파괴할 것을 명하지 않는다.



결국 첫 명령은 인문사회과학의 발전을 그러나 둘째 명령은 자연과학의 발전을 각각 명한다.  

그렇다면 이 두 명령은 유기적인 관계 아래 있다.  

이 두 분야의 과학의 유기적인 발전 여부가 인류의 번성 문제와 직결될 것이다.  

문과(文科)와 이과(理科)로 나누어 교육하는 것이 비기독교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 두 명령이 인류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과 연결된다면

인류 사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동기에 의해 두 과학을 연구해야 한다.  

문화 명령은 창조주 하나님이 명했고 그 핵심 정신은 이웃 사랑이기 때문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류만이 이웃 사랑을 실천할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기쁘게 지킬 수 있음과 같다.  문화 명령에 의하면 인간 윤리는 창조주 하나님 신앙이라는 종교에 기반해야 한다.  



결국 문화 사명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을 도모해야 함을 말한다.  

기독교 성경의 창조 기사에 의하면 과학은 반드시 윤리적이어야 한다.  

문화 명령에 반하는 과학 활동 즉 하나님의 명령에 반하는 과학은

결국 인류 사회를 파괴하려는 활동이 될 것을 성경은 경고한다.



자연과학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문명(文明)을 세운다면

인문사회과학은 인류의 문화(文化)를 발전시킨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도 창조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근거해야 함을 뜻한다.  

이렇게 사랑의 동기로 문화 사명이 수행됨으로 인류 사회가 발전할 것이다.  



달리 말해 하나님 나라는 인류의 문화 활동을 통해 이 땅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을 기독교 성경은 말한다.  

결국 문화 명령은 구원받은 신자들의 활발한 문화 활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지상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인류의 문화와 문명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하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그 무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땅이 아니며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과 사람들의 인격적인 활동을 통해 세워지고 확장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세상 문화를 무조건 반대하거나 멸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세상 문화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수 없다.  



그렇다고 문화 명령이 세상 문화를 무조건적으로 타협하여 수용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 나라보다 인간의 나라를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구속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킨다면 세상 문화는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의 무대가 될 수 있다.



구속후 하나님 나라가 창조론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하며

은연 중 창조론의 하나님 나라 신학을 소홀히 하는 실수를 신학계가 범했다.

이것은 이원론적인 이분법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창조론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려는 노력 후에 비로소

신약 성경이 예언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주장해야 했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들의 구속을 통해 창조 세계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자 하기 때문이다.



문화 명령은

기독교나 신자들이 세상의 상식이나 사상과 철학을 비롯한 과학(科學) 그리고 문화를 멀리하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말한다.  

기독인은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문화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해 누구보다 세상문화를 더 올바로 해독해야  한다.  이 점에서 교회와 성도는 해야 할 두 가지 일이 있다.  한편 애굽과 가나안의 관습을 버리고 대항하여 싸워야 하면서 다른 한편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실수하는 것은 이 세상을 버리고 대항하여야 할 대상으로만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켜할 무대임을 잊은 것이다.  이 점에서 세상 문화는 버리거나 대항하여 싸울 대상이면서  동시에 변화시켜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도록 해야 할 무대이기도 하다.  




세상 문화를 선한 면과 악한 면으로 나눌 것을 요구하는 이분법으로 이해하되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사상으로 통합해야 합니다.

 

 

 

4. 하나님 나라는 쉼과 일 사이 조화를 요구한다.



한국인은 쉼과 일 사이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2008년 4월 8일 발간된 'OECD 2008 통계연보'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OECD의 회원국들 중에서 제일 많이 일하면서도 생산성이 제일 낮은 나라이다.  그 이유는 흔히 직원들이 일의 효율성보다 상사에 대한 순종성에 의해 평가 받기 때문이다.  
눈치 보는 직장 문화가 노동 생산성을 떨어트리고 있다.



이것은 수직적인 동양 문화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분명히 회사와 맺은 계약에 따라 입사하지만 직원들의 진급은 여전히 상사의 은총에 좌우된다.  누군가 해고된다면 대부분 계약의 이행 여부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계약 문화에 속하는 수평적인 서양 사회에선 이런 모습을 볼 수 없다.  맺어진 계약대로 일을 잘 하느냐 또는 못 하느냐가 진급과 고가를 결정한다.  누군가 해고된다면 계약 위반이 그 원인이다.  



그러나 일의 효율성이 지장을 받지 않는다면 직원들은 눈치 봄이 없이 자유롭게 퇴근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여분의 시간을 이용하여 한국인의 가정은 더 화목해지거나 취미 활동과 자기 개발에 힘쓸 수 있다.  
종국적으로 출퇴근 시간의 보장은 한국 사회를 더욱 성숙하고 창의력 넘치게 만들 것이다.  


그럼 성경은 쉼과 일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창조의 마지막 날 마지막으로 창조되었다.  

창조 세계가 인간에게 맡겨진 후 곧 바로 안식일이 왔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서 인류가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다고 칭찬한 세상을 안식일 처음으로 목격하고 체험하며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을 진정 찬양하며 경배할 수 있었다.  
안식일 다음날 하나님이 준 문화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인류는 처음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류는 안식 후 비로소 일을 시작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는 문화 명령(창1:28절)은  인류로 하여금 인간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문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인류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가 일하기 앞서 먼저 자신 앞에 나와 경배하길 원했다.


일, 소명, 사명 또는 소명감이나 사명감보다 하나님 앞에 나와 경배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는 뜻이다.  즉 인류에게 일은 우선이 아니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쉬면서 그를 경배하고 찬양한 후 그 다음 일해야 했다.  이렇게 안식은 영적 또는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모든 일과 활동을 멈춘다는 의미도 갖는다.  



여기 쉼은 단순히 육체적인 휴식(休息)만 뜻하지 않았다.  
첫째, 쉼은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휴식을 뜻한다.  인간은 기계(機械)가 아니다.  끊임없이 일만 하도록 지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게 쉼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 육체와 정신은 그 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새 힘을 얻어 즐겁게 일에 임할 수 있다.  
         쉼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기 때문이다.  쉼 없이 일만 한다면 인류 사회는 가정과 사회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일을 잘 하기 위해서도 구성원들 사이 교제는 아주 중요하다. 이런 사랑의 교제는 일 즉 활동뿐만 아니라 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살기 위한 활동만 아니라 이웃을 위한 활동도 인류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  일을 통해 얻은 경험과 더 잘 일하는 방법에 대한 정보 교류는 쉼을 통한 교제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인간은 쉼을 통해 자신과 삶을 성찰하며 더 높은 수준의 정신 문화를 만들어 갈수 있다.  이렇게 인류 사회는 일과 쉼 사이 조화로운 균형을 통해 발전한다.



그러나 창조 안식일이 무시되는 사회에서 인간의 정신 문화가 황폐화될 뿐만 아니라 윤리도덕도 무너진다.  
강자는 약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일만 강요하여 희생만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를 막기 위해
안식일에 주인은 물론 모든 종들과 노예들도 그리고 짐승들 조차 쉬도록 명했다.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절)  

출애굽 사건 이후 창조 안식일이 강조됨은 아주 특이하다.  구속주를 통해 창조주에게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창조주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이 동등함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신분의 고하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쉬어야 했다.

안식일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며 예배하는 것은 인간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주인 창조주 하나님인 여호와가 이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창조론적 의미를 갖는 평등성은 곧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평등성과 연결되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과 비교한다면 당시 최고 선진국이었고  지상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애굽에선 달랐다.  강자(强者)는 쉬어도 약자는 쉴 수 없었다.  불평등 사회였다.



둘째, 안식일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 나와 그를 경배하며 그의 말씀을 들으며 쉴 것이다.  
         창조 세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를 안식일 재삼 확인하며
        창조주에게 감사하고 동시에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문화 사명 수행에 대한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할 수 있다.
        이런 묵상은 인류 사회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항상 일깨워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지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 실현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서로 의식하며 인류 사회는 기쁘게 서로 도울 것이다.  이 때 인류 사회는 하나님이 명한 인류 사회의 공동 번영을 위해 이웃 사랑의 동기로 문화 사명을 수행하고자 더욱 노력하게 된다.  이렇게 신앙과 종교가 인류 사회의 윤리도덕에 중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창조 안식일은 창조론과 마찬가지로 종교와 윤리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조 안식일이 무시됨으로 창조주 하나님이 잊어진다면 무슨 일이 인류 사회에 일어나는가?  

인류 사회는 진정한 주인을 상실하며 자신이 주인이 될 것이다.  

그 결과 인류 사회는 이기적이 되어 높은 수준의 윤리도덕심을 잃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강한 자나 성공한 자가 되기 위해 너도나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일하며 활동할 것이다.



역사가 말하듯이

인류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일하며 안식일이나 주일도 없다.  

발전된 과학과 기술의 도움으로 일에 방해되는 요소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밤과 계절의 구분도 없이 인간은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오로지 성공을 위해서이다.  

그 결과는 인성(人性)의 황폐화와 파괴는 불가피해졌다.  

성공지상주의나 기복주의 신앙의 위험은 여기에 있다.



셋째 창조 안식일은 하나님의 작정이 어떻게 성취되고 완성될 것인가를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작정을 이루기 위해 6일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기간 동안 열심히 일할 것이며

그 후 제 7일을 맞을 때 하나님은 영원히 안식할 것이다.  



즉 창세 전 세워진 성부 하나님의 작정은 그렇게 완성될 것이다.

이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은 제 7일 안식일 제도를 정해 인류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류는 이를 잊었다.  

그러므로 출애굽 사건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명하며 쉴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하나님은 영원한 안식이 있을 것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가르쳤다.



그러므로 창조 안식일은

성도들이 영원한 안식을 주는 제 7일이 올 때까지

문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을 요구한다.  

이 세상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는 자신의 활동과 사역에 종말(終末)이 있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덕분에 성도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고 활동하면서도 이 세상 일에 파묻히지 않는다.  6일 일한 후 제 7일 하나님 앞에 나가 쉬면서 예배한다는 창조 안식일 제도는 신앙 삶에 대해 오늘날 교회가 오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오늘날 교회는 ‘모으는 목회’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늘 교회에만 모여 그곳에서 활동하길 목회자들은 원한다.  그러나 신앙 삶의 주무대는 신자들의 삶의 현장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보내는 목회’에 좀 더 힘 써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가 아닌 세상 문화를 무대로 삼아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교회의 역할을 무엇인가?  



주일 찾아온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껏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도록, 세상에서 살면서 쓰러지고 넘어진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나라 역군으로 또 다시 힘써 일하겠다는 결단을 새롭게 하도록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더 잘 배우도록 교회는 성도를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 책망과 권면과 경고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전해져야 한다.  
이 모두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고 확장시키기 위함이다.

교회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헌금과 기도 생활을 잘하라고 설교하며 가르치는 것은 목회자의 부차적인 사역이다.



이런 금언이 있습니다.

"You are what you eat, and you eat what you are."   (너는 먹는대로 형성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먹으며 산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엇을 먹는가가 한국 교회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어지럽고 혼란스럽다면 과거 무언가 잘못 먹은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잘못 먹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혼란이 한 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지금은 의인이 숨는 시대입니다.
성경 말씀이 아닌 세상 지혜를 가르친 결과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아니라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전한 결과입니다.
현재의 필요에 맞춘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준을 잃었습니다.





5. 하나님 나라는 언약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창설했다.  아담을 그곳에 거하게 했다.  
온 세상을 적셔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네 강의 발원지(發源地)도 에덴에 있었다.  

그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과 정기적으로 만나 교제할 것이다.  
이 점에서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지은 지구라는 세계의 중앙이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처음으로 에덴 동산에서 구체적으로 출발되었다.
에덴 동산은 종교(宗敎)와 정치(政治)가 하나로 묶여져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신정정치(神政政治)가 실현된 곳이었다.


하나님의 통치(統治)는 에덴 동산을 기점으로 아담을 통해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세상 곳곳으로 계속 확장되어 나갈 것이다.  그곳에 온갖 과일들이 있지만 생명과와 아울러 선악과(善惡果)가 동산 중앙에 있었다.  

선악과는 시험하는 나무였다.  아담이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암시한다.  시험을 통해 연단을 받으며 그는 자신의 성숙을 하나님 앞에 증명해 보여야 했다.  이 점에서 그는 인류를 위해 불완전한 대표자였다.

선악과 규례를 통해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었다.  언약의 조건은 그의 순종이었고 그 약속은 에덴 동산에 영원히 사는 것이었다.  달리 말한다면 에덴 동산에 이미 세워진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남아 사는 것이었다.  

여기 언약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두 가지 면을 보여준다.  아담은 아무 조건도 없이 에덴 동산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 안에 살 수 있었다.  단순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창조 행위를 통해 그는 에덴에 살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아담이 무조건적인 언약 안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선악과 규례를 통해 그에게 순종을 요구했다.  

그의 순종 여부에 따라 아담이 에덴 동산 안 즉 하나님 나라 안에 계속 살 수 있을지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창조 기사가 말하는 에덴 동산과 선악과 규례는 구원론에서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 사이 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  

하나님의 은혜는 기본적으로 무조건 주어진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은혜는 율법이라는 조건에 충족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율법을 잘 준수한다면 무조건적인 은혜 아래 계속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제 기능과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주어진 칭의(稱義)의 은총은  율법의 준수에 근거한 성화(聖化)를 성도에게 요구한다.  



그렇다면 율법주의는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무시하고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의(義)에 달하겠다는 것이다.  

반대로 율법폐기주의의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만 강조하며 인간의 노력이 전적으로 무용하다고 주장하는데 있다.  

이 두 주장은 모두 칭의와 성화를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대립시킨다는 점에서 모두 잘못이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는 율법 준수라는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의(義)를 알려주어 신자의 성화(聖化)를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율법의 기능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 결과 피택자에게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 역할을 하지만 그 이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근거가 된다.

선악과 규례는 창조 기사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언약에 기반함을 말한다.  
좀 더 말한다면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는 건설되고 그리고 성장하고 확장될 것이다.  
언약에 따라 갓 출발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아담의 순종 여부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이 위에 에덴 동산에는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단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사단의 존재와 선악과 그리고 아담이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란 사실은
에덴 동산은 물론 그곳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가 임시적(臨時的)이며 시험용(試驗用)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선악과 규례를 통해 인류를 시험하고자 했다면 이 시험은 좋고 선한 목적을 가진다.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류만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主人)으로 영접하고 사는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 둘로 나누어질 것이다.  
언약에 기반한 시험은 창세 전 세워진 성부 하나님의 작정(엡1:4-6절)이 이미 암시하는 바였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완성될 것을 주장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취와 완성의 조건을 그러나‘그리스도로 말미암아’는 그 방법을 뜻한다.  

당연히 이 원리가 창세 후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했다.  
결국 언약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남는 것이며 곧 하나님 나라 안에 머무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언약을 지키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意志) 문제로 남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 나라가 불완전한 인간의 의지(意志)에 의해 좌지우지되도록 남겨둘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창세 전 세워진 성부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하나님 나라가 성취내지 완성되도록 계속 일할 것이다.  
인간의 불순종에 무관하게 하나님은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한한 자비와 긍휼과 인자를
인류에게 일방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베풀며
동시에 그리스도를 조건으로 인류의 순종을 시험하며 자신의 계획을 성취내지 완성해 나갈 것이다
(대하21:5-7, 시89-28-34절 참조).



이렇게 언약의 양면성인 무조건성과 조건성은
하나님 나라가 은혜의 원리와 시험의 원리를 동시에 모두 가짐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면서도 동시에 조건적으로 시험하며  또는 조건적으로 시험하면서 동시에 무조건적으로 은혜를 베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만 강조할 수 없다.  은혜는 곧 시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복주의와 형통 신학의 문제가 여기 발견된다.  시험의 원리를 강조함으로
신자들이 은혜 안에서 나타함이 없이 자기부정에 노력함으로 성화에 달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를 잘 설명하는 성구가 있다.

“그는 그 언약 곧 천 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시105:8-11절)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을 뜻하지만  언약의 상속자는 하나님이 또한 명한 율례를 준수해야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시험이 되었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기업으로 반드시 얻게 될 것이라는 무조건적이며 일방적인 약속은  이스라엘에게 율례 준수를 요구한다(대상28:8절).  이 시험에 통과한 선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성취되고 완성될 것인가?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6:16절)  


그러나 성전과 연결된 언약의 약속은 구속사의 단계에 따라 달리 설명되었다.  

언약의 약속을 말하며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순종을 요구했다(창17:7-8절).  

출애굽 사건 이후 율법 준수를 조건으로 언약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했다(출29:45, 레26:12절).  

남북 왕조의 열왕 시대 성전은 이미 예루살렘에 세워져 하나님의 언약은 역사적으로 일단 성취되었다.  

그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계속 실현될 것인가 여부는 열왕들과 선민의 율법 준수 여부에 달렸다(왕하33:1-11절).  



그리고 대선지자 시대 선민의 멸망은 이미 결정되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앞으로 세울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선민에게 새로운 영을 주어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다시는 이스라엘이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지자들은 예언했다(렘31:33, 겔11:20, 37:26-27절).  이 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위에서 인용된 신약 성경 구절은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증언한다.  

신약 시대 성도 안에 이미 하나님의 성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와 다르다.  

구약 시대 성전은 눈에 보이도록 지어졌지만

신약 시대 성전은 성도 안에 보이지 않게 세워진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살며

자신이 속한 가정과 사회 그리고 나라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열심히 문화 사명을 수행한다. 
 

이런 신자들의 수가 증가함으로 가정과 사회와 나라에 하나님 나라는 저절로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렇게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는 구약 시대의 그것과 분명히 다르다.  

신정정치 형태로 실현되었던 구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는 신약 시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구약 시대와 달리 신약 시대 종교와 정치 즉 교회와 세속 정권이 서로 분리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허락한 교회와 세속 정권의 영역 주권이 서로 달라졌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로마의 통치자로 출생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리고 지상에 사는 동안 예수님이 전혀 정치적인 변혁을 꾀하지 않은 이유였다.  


예수님은 구속을 통해 세상을 변혁시키기 원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교회는 정치와 초연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구속의 은총을 받은 신자들이 문화 사명(창1:28절)을 수행하도록 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도와야 한다.  


이 때문에 교회나 목회자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은 스승 예수님의 모범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는 복음을 전해 구속의 은총으로 사람을 변화시켜 세상으로 보내는 일을 하라고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기 때문이다.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말한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절)



언약의 세 가지 약속들이 모두 완전히 성취되엇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해야 할 것이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20:11-15절)



하나님 나라는 언약과 율법에 기반하여 이 세상에 건설되고 확장될 것이다.  

그리고 성전의 존재로 인해 하나님 나라는 완성될 것이다.  



한편 인류의 계속된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작정대로 하나님 나라를 반드시 성취내지 완성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류의 순종 여부로 시험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정의 은총을 무조건적으로 받은 자는
의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도록 노력하여 하나님 앞에 흠 없고 거룩한 존재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칭의의 은총을 성화 노력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성도만이 새예루살렘에 거할 것이다.


그리고 변화된 신자들은 사회로 나가 모든 방면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한다면 저절로 정치와 경제도 개혁됩니다.  이렇게 교회는 근본적인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모으는 목회에만 몰두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신앙인으로 제 역할을 하도록 잘 돕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기준을 잃고 자행자지한 결과입니다.  달리 말해 묵시를 잃은 결과입니다. 
소위 세속적으로 성공한 목회자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버린 목회자는 만인 앞에 과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부끄럼을 당할 것입니다.



샬롬!


장창수선교사

출처 : 그리스도와 함께
글쓴이 : 나라일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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