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스크랩] 마태복음에 나타난 복음과 하늘 나라

하나님아들 2012. 11. 21. 16:25
마태복음에 나타난 복음과 하늘 나라

양용의 (개혁신학교 교수)

1. 서론

초대교회 이래로 마태복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느 다른 복음서보다 친숙한 복음서로서 자리잡아 왔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마 6:9-13)과 팔복(마 5:3-12)은 주로 마태복음의 형태로 사용되어왔고,1) 황금률(마 7:12; 참고. 눅 6:31)이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 대한 주님의 초대(마 11:28-30) 등도 마태복음의 형태 혹은 마태복음에만 나타나는 구절들인 것이다. 누가복음의 평지설교(6:20-49)보다는 마태복음의 산상설교(5-7장)가 더 익히 알려져 있고 자주 설교되는 것도 그 한 예일 것이다. 한편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이 처음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초대교회가 마태복음을 중요시한 증거로 생각된다.2) 하지만 가장 친숙하게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이 가장 잘 이해되어 왔음을 보장하지는 않는 것 같다. 사실 마태복음은 여느 다른 복음서에 못지 않게 올바로 이해되지 못하였고, 그 결과 그릇 설교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러한 이해 결핍의 뿌리는 마태복음이 제시하는 복음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부족한 이해, 그리고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로서, 천국(天國 - 즉, 하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복음과 하늘 나라

2.1. 마태복음이 제시하는 ‘복음’이란?

그렇다면 마태복음이 제시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먼저 마태복음에는 ‘복음’(헬. eujaggevlion)이라는 단어가 4회에 걸쳐서 나타나는데(4:23; 9:35; 24:14; 26:13), 흥미롭게도 그 중 3회는 ‘그 나라의 복음’(헬. to; eujaggevlion th'" basileiva")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마태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그 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3) 여기서 ‘그 나라’는 3:2과 4:17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 가까왔다고 선포하신 ‘하늘 나라’인 것이 분명하다(참고. 막 1:14-15).

2.2.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하늘 나라’란?

2.2.1. 통상적인 이해
마태복음에서 복음과 이처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하늘 나라’란 과연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에서 ‘하늘 나라’(=‘천국’)는 죽어서나 가는 ‘하늘(?)에4) 있는 나라’라고 이해되어 왔던 것 같다. 즉, 천국은 현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현장과는 무관한, 죽은 다음에 신자들의 영혼이 가 있는 곳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아주 일반화되어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표현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상황은 아마도 장례식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과연 ‘하늘 나라’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올바른 것인가? 만일 ‘하늘 나라’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그릇된 것이라면, 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복음’ 역시 잘못 이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이 제시하는 ‘복음’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수적인 것이다.

2.2.2. 하늘 나라의 용례
‘하늘 나라’라는 개념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늘 나라’라는 표현이 어디에서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강의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에 ‘천국이라는 말이 성경 어느 책에 가장 많이 나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선뜻 요한계시록, 사도행전, 바울서신, 다니엘서, 에스겔서, 요한복음, 마가복음 등의 다양한 책들을 제안한다. 그러나 실제로 ‘천국’(=‘하늘 나라’; 헬. hJ basileiva tw'n oujranw'n)이라는 표현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타날 뿐 다른 책들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다른 공관복음서들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까지도 ‘하늘 나라’라는 표현은 전혀 발견되지 않으며, 대신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만 나타난다. 이처럼 ‘하늘 나라’는 마태복음의 독특한 표현으로서, 사실 마태는 대부분의 ‘나라’ 관련 구절들(약 51개5)) 중 ‘하늘 나라’는 35회나 사용하는데 반해,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단지 4회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2.2.3. 하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여기서 한 가지 제기되는 질문은 과연 마태가 특징적으로 사용하는 ‘하늘 나라’와 마가나 누가 그리고 신약의 다른 저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는 같은 개념인가 아니면 다른 개념인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거의 모든 신약학자들은 위의 두 표현이 같은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결론은 마태가 마가나 누가가 ‘하나님 나라’를 사용한 동일 구절들에서 자주 ‘하늘 나라’를 대체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뿐 아니라,6) 마 19:23-247)에 의해서도 분명히 확인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마태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하나님 나라’ 보다는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우리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아마도 이방인 신자들을 주대상으로 쓰여진 복음서인데 반해, 마태복음은 유대인 신자들을 주대상으로 쓰여진 복음서라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즉, 하나님의 거처인; 참고. 6:9) ‘하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지칭하는 경향이 있었다.8) 즉, ‘하늘’은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완곡어법(euphemism)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을 주 대상으로 쓰여졌던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보다는 ‘하늘 나라’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이방인들을 주 대상으로 쓰여졌던 다른 복음서들에서는 유대인들에게만 적절히 이해될 수 있던 ‘하늘 나라’라는 표현이 전혀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만 사용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다면, ‘하늘’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을 대신 부르는 완곡어법적 호칭으로서보다는 우주 공간적 ‘공중’으로서의 ‘하늘’을 연상하기 쉬운 한국인들로서는 마태복음 안에서 ‘하늘 나라’(天國)라는 표현을 대하게 될 때 그것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어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한 이해가 될 것이다.

2.3.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란?

2.3.1. ‘하나님 나라’ 개념 이해
여기서 우리는 잠시 마태복음만의 고찰을 접어 두고 공관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그에 비추어 마태복음에서의 하늘 나라의 의미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가 중심 주제였다는 사실은 공관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9) 그렇다면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헬. hJ basileiva tou' qeou')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가 지금부터 2,000여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을 그 주 대상으로 사역하셨던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헬라어로 기록해 놓은 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21세기를 바라보는 시대에 한반도에 사는 한국말을 사용하는 한국인인 우리가 그러한 복음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그 원래의 의미로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특히 정치 체제에 있어서 예수님 당시는 왕정이었던데 반해 우리는 왕의 역할이 그 자리를 잃어버린 민주주의 체제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큰 장애거리가 될 수 있다. 사실 우리말로 ‘나라’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basileiva와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tWkl]m'는 ‘영역’이나 ‘영토’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극히 드물며, 대부분의 경우 ‘통치’, ‘지배’, ‘왕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오늘날 국가/나라 개념과는 전혀 다른, 공간적이거나 정적이기보다는 역동적인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헬라어의 hJ basileiva tou' qeou' 우리말로 ‘하나님의 통치’ 혹은 ‘하나님의 왕권 행사’ 등으로 번역되는 것이 원래 의미에 보다 더 가까울 것이다.10)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늘 나라’라는 표현 역시도 우주 공간에 펼쳐져 있는 어떤 영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아무리 통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랜동안 그렇게 이해해 왔을지라도),11)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12)

2.3.2. 하나님 나라의 시간성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하나님 나라가 과연 언제 임한다고 가르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19세기 말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논의해 왔는데,13) 1950년대 이후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자신의 지상 사역과 더불어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고 그 완성은 자신의 재림과 더불어 이루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는데 의견이 모아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너무도 명백해 진다.
        먼저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더불어 이미 임하였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1) 마 12:28 -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 마 11:12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3) 눅 16:16 -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4) 눅 17:21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러한 명시적인 구절들 이외에도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전제하거나 시사해 주는 구절들은 대단히 많다. 특히 하나님 나라 비유들 중 많은 것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마 13:44-46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극히 값진 진주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 있으니 우리가 지금 그것을 확보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 눅 14:15-24의 잔치 비유의 경우, 바리새인은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게 될14) 자는 복되도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미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반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이미’ 배설되었지만(16-17절) 바리새인들의 거절로 말미암아(18-20절) 그들의 자리가 다른 자들에 의해 취하여지고 있음을(21-24절) 밝히고 있다. 즉,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현재’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베풀어져 있음과, 어떤 이들은 ‘이미’ 그 잔치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성장에 관한 여러 비유들(네 종류의 밭 - 마 13:3-9, 18-23//; 가라지 - 마 13:24-30, 36-43; 겨자씨 - 마 13:31-32//; 알지 못하게 자라는 씨앗 - 막 4:26-29)은 씨앗이 이미 밭에 뿌려졌음과 그 뿌려진 씨앗이 현재 자라나고 있음을 말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고 현재 그 시작된 하나님 나라가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여러 다양한 가르침들로 미루어 볼 때,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가르치셨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가 자신의 지상 사역과 더불어 이미 도래하였음을 가르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그 완성은 자신의 재림(혹은 ‘인자의 때’, ‘추수 때’)과 더불어 있게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성장에 관한 비유들이 잘 보여 준다. 즉, 땅에 뿌려진 씨앗이 성장하여 결국은 결실을 맺을 것이며 그와 더불어 추수의 때가 도래할 것이라는 비유들의 공통적인 내용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사역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고 현재 성장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결국은 자신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임을 가르친다. 한편 현재의 삶의 모습이 완전히 뒤바뀌게 될 미래의 상태에 대한 예수님의 기대를 보여 주는 구절들(예. 마 5:3-12 // 눅 6:20-26; 10:26; 18:4; 19:30)이나, 마지막 때가 갑자기 임하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언급들(예. 마 25:13; 눅 12:35-40),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할 것에 대한 촉구(예. 마 18:3; 막 9:47; 눅 13:24) 등도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측면을 보여 주는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시간성과 관련하여 완전한 현재성을 가르치거나 철저한 미래성만 가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현재성과 미래성을 공히 가르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일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상당수의 신약학자들이 그 해결책을 모색하였는데, 그 중 ‘현재적 성취와 미래적 완성’이라는 래드의 표현은15) 그 동안의 제안들을 잘 종합해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함께 이미 성취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 비로소 완성될 것’이라고 정리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나타나는 ‘하늘 나라’(天國)는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하늘 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동일 개념이기 때문에, 여기서 ‘하늘’은 우주 공간적 공중(영. sky)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나라’ 역시도 공간적 개념보다는 ‘통치’라는 역동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 하나님 나라는 그 시제에 있어서 개개인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그리고 그의 재림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하늘 나라’(天國)는 미래에 개개인이 죽어서 가게 되는 공중에 있는 모종의 우주적 장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더불어 이미 성취되었고 현재 지속적으로 성장해 가고 있으며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완성되게 될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서만이 마태복음이 이야기하는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3. ‘그 나라의 복음’

하늘 나라에 대한 이와 같은 기본적인 이해와 더불어, 이제 마태복음에서 ‘복음’이 의미하는 바와 그 중요성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복음’이라는 단어가 마태복음 전체를 통해 4회에 걸쳐 나타나는데, 2회는 ‘그 나라의 복음’(4:23; 9:35),16) 1회는 ‘그 나라의 이 복음’(24:14), 1회는 ‘이 복음’(26:13)으로 나타난다. 이들 중 그 처음 두 구절은 그 위치상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 두 구절은 5-9장을 감싸는 inclusio의 역할을 함으로써, 5-7장의 산상 설교는 곧 하늘 나라의 복음이고, 8-9장의 예수의 기적들은 곧 하늘 나라의 복음에 수반되는 필수적인 결과들임을 보여 준다.17) 데이비스와 엘리슨이 적절히 제안한 바와 같이, 메시야의 계시적 가르침은, 메시야 자신의 행동과 인격 안에서 그 가르침의 완전한 실현과 함께, 하나님의 활동(즉, 통치/나라)을 선언하는 바, 이것이 곧 복음인 것이다.18) 그렇다면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5-7장의 산상 설교 그리고 그와 더불어 8-9장의 예수님의 기적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3.1. 산상 설교 (5-7장) - 하늘 나라의 복음

이 길고 방대한 설교가 19세기 자유주의자들(예, 하르낙, 톨스토이 등)의 주장처럼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 윤리 규범이 아닌 것은 이 설교의 주제가 인간 스스로의 의지적 윤리 활동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라는 사실에 의해 명백해 진다. 이 설교는 결코 일반 윤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들의 특성과 임무 및 태도 등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설교를 일련의 윤리 규범으로서 율법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이 설교의 핵심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한편 이 설교는 기독론적 선언서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의 전체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성취’ 주제와 관련하여, 5-7장은 말로 나타난 메시야직의 성취를 제시해 준다면, 8-9장은 행동으로 나타난 메시야직의 성취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사실 5-7장에 제시된 예수님의 설교는 메시야가 아닌 자로서는 선포하기 불가능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는데, 설교가 끝난 후 청중들이 보인 반응은 산상 설교의 그러한 특징을 잘 드러내 보여 준다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7:28-29). 이제 본 단락에서는 산상 설교 중 몇 개의 주요 구절들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요약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3.1.1. 팔복 (5:3-12; 비교. 눅 6:20-26)
팔복의 공통 형식인 ‘복이 있나니’(헬. makavrio")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로 파악하는 것은 팔복을 적절히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실 ‘복이 있나니’라는 번역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요소가 많이 있다. 왜냐하면 makavrio"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상태를 의미하기보다는19) 오히려 ‘바람직한’, ‘칭송 받을 만한’, ‘행복한’ 등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단어는 마땅히 칭송 받을 사람, 즉, 그의 삶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흠모해야 할 그러한 사람을 묘사한다. 결국 이 표현은 ‘이것이 제자로서 선한 삶이다’ 혹은 ‘이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로서 마땅한 길을 가고 있는 자들이다’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한편 팔복은 이렇게 제자로서의 마땅한 삶을 사는 자들이 누리게 될 보상(헬. misqov")도 보장해 준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의 보상 개념은 세속적인 임금 개념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보상은 세상의 임금처럼 일에 상응하는 그런 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짧은 (세상적) 안목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은 팔복이 묘사하고 있는 바와 같은 제자로서의 마땅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상실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았을 때, 그가 받을 보상은 그가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그를 위하여 상실한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는 그보다 여러 배를 더하여 주고, 거기에 더하여 영생까지 그 보상으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참고. 마 19:29).
        결론적으로, 팔복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들의 삶의 구체적인 현상으로서, 제자들의 그러한 삶은 그들을 불경스런 세상으로부터 구별시켜 줄 것이며,20) 그들의 그러한 삶만이 진정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져다주는 복음인 것이다.

3.1.2. 예수와 율법 (5:17-20)
율법은 유대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제 본 구절은 예수께서 그 율법의 성취로 오셨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구약(‘율법이나 선지자’)을 성취하셨다고 말할 때, 과연 ‘성취하다’(헬. plhrw'sai)라는 동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의 제안이 있어 왔지만,21) ‘가득 채우다’, ‘그 궁극적인 목표를 가져오다’, ‘그 마지막 결론에 도달하다’ 등으로 이해하는 것이 LXX에서의 그 동사의 용례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경우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내다보았던 하나님의 뜻의 마지막 계시를 제공하심으로써, 이제 그 계시는 구약 성경의 목표를 다 이룬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구약 성경의 성취이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구약 성경의 증거 본문들을 축적해 나가거나 혹은 구약 예언의 예견적 성격을 강조하는 변증적 관심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마태는 예수님을, 구약 성경에 의해서 증거되었고 구원의 시대를 위해서 약속되었던,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 혹은 구속사적 성취로서 이해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즉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또한 실행하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보다 광범위한 시발점으로 시작할 때만, 5:20에서 요구되고 있고, 5:21-7:12에서 예시되고 있는 ‘더 큰 의(義)’의 종말론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두 가지 위험이 뒤따르게 된다. 하나는 율법폐기론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주의이다. 마태는 이러한 위험들과 관련해서, 18-19절에서는 율법폐기론에 대한, 그리고 20절에서는 율법주의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들을 적절히 제시한다. 예수님의 성취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은 그 그림자로서의 기능이 전격적으로 변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18절),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 율법을 업신여기거나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된다(19절).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의는 단순히 구약의 계명이나 더 나아가서 예수님에 의해 제시된 명령들을 지켜 행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러한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그 형태만 좀 바꾼, 결국은 같은 부류의 의일 것이다. 여기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더 큰 의’로서, 이는 규범들에 대한 문자적 준수 이상의 것인, 즉,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인정하고 그의 통치하에 들어감으로써 그의 백성이 되는 ‘관계’인 것이다(20절).22)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의는 결코 윤리적 행동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는 예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의 관계에 기초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의가 윤리적 행동을 배제하는 것 또한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 통치 받는 제자들의 삶의 전 영역에서 그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의 열매들을 맺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철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둘 중 어느 한 가지가 결여된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산상 설교의 결론부에 이르러 7:21-23에서 제시된 예수님의 판단 기준 그리고 7:24-27에서 나타나는 두 집짓는 자들의 비유에서 공히 강조되고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큰 제자의 의가 곧 뒤이어 5:21-48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와 비교되어, 6:1-18에서는 바리새인들의 피상적인 경건(외식)과 대조되어 설명된다. 한편 11:28-30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무거운 짐과(참고. 23:4) 예수님의 가볍고 지기에 쉬운 멍에가 대조됨으로써, 바리새인들 보다 사실상 더 철저하고 높은 기준을 제시하시는 예수님의 요구가(참고. 5:21-48) 일단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들에게는 그 사랑과 순종의 관계 때문에 오히려 쉽고, 따라서 그 관계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에게는 안식이 보장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23)

3.1.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6:33)
6:25-32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제자들이 물질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이 명령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로서 그들의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며, 따라서 그들의 필요를 적절하게 채우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명령의 절정에 이르러 이제 33절의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중심 주제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義) 두 가지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즉, 기도란 인간의 생각과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바꾸려고 설득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인간 자신의 생각과 목적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이 자신의 삶과 인격 가운데 실현될 수 있기 위해(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자신의 생각과 목적을 포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작업인 것이다. 인간의 자아는 그 힘이 너무 커서 인간 스스로는 그것을 철저하게 포기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제자들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24) 한편 그의 나라와 더불어 그의 의(義)를 구하라는 명령이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위에서 지적했듯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준다.
        본 절이 요구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의를 자신들의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자세이다. 이러한 헌신된 자세가 ‘먼저’ 있게 될 때, 자연히 제자는 물질적 관심으로 가득 차게 되거나 그런 관심에 의해 좌지우지하지 않게 될 것이다. 더욱이 제자가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선 순위에 놓게 될 때, 우리의 물질적 필요가 모두 충족될 것이라고 보장되고 있다. 따라서 이 적극적인 요구는 혹자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값싼 낙천주의나25) 무기력한 운명론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육체 자체를 격하시키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요구는 제자 자신의 진정한 목표를 방해받지 않고 추구하기 위해 다른 관심사들이 포기되어져야 함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첫째 것을 마땅히 첫째에 놓았을 때, 하나님께서 나머지 것들은 친히 돌보시리라는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은 과연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모든 제자들에게 약속된 것이며, 따라서 이는 놀라운 복음인 것이다.

3.1.4. 진짜와 가짜 (7:13-27)
7:12의 황금률과 더불어 산상 설교가 그 절정에 도달한 후, 이제 산상 설교는 네 개의 짤막짤막한 대조적 언급으로 그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들 모든 대조들은 예수님의 요구들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각 대조들은 진짜와 가짜를 대조해서 제시하는데, 그 진정성은 제자의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천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명백히 제시한다. 예수님 자신과 그의 가르침에 대한 고백적 추종 태도는 다른 이들을 그리고 심지어는 고백한 자기 자신을 속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인상적일 수 있다(특히 22절 참고). 그러나 예수님의 경고는 그런 외적 태도만으로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실천적 결과들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들 네 개의 대조들은 산상 설교, 즉, 하나님의 통치의 복음이란 흠모의 대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통치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공히 강조해 준다.

3.2. 예수님의 기적 (8-9장)

예수님은 앞의 단락(5-7장)에서는 말씀하셨고, 이제 본 단락(8-9장)에서는 행동하신다. 앞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서(7:29)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위에 놀라고 있다. 이제 본 단락에서는 그 권위가 예수님의 행동에 의해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앞 단락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결론부에서 무리가 그 능력에 놀라는 반응을 표한다(9:33). 이처럼 5-7장과 8-9장 사이의 상관 관계는 밀접하다. 이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5-9장을 inclusio로 감싸고 있는 4:23과 9:35의 주제, 즉, 하늘 나라의 복음 선포와 그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기적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태는 예수님을 말과 행동 두 측면 모두에 있어서 적법한 메시야이심을 인상적으로 보여 준다. 한편, 이러한 일련의 기적 사건들은 11:3-5에서의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적절히 준비해 준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8-9장에서 치유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유대인 사회에서 아무런 지위나 힘이 없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문둥병자, 로마인의 노예, 베드로의 장모, 두 귀신들린 자, 중풍병자, 혈루증 앓는 여인, 무명의 한 소녀, 두 소경, 귀신 들린 벙어리. 이러한 사실은 마태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대상의 보편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보인다. 즉, 하나님의 통치는 어느 특정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참고. 사 35:5-6).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그의 신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구조와 전개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의 이러한 기적들은 그의 사역의 수단이나 부수적 산물이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필연적이고 필수적인 현상이자 결과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즉, 사단의 통치하에서 영적 육체적으로 얽매어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선포에 반응하는 자들을 그 사단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그 대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는데, 그 구체적인 결과가 이러한 육체적 영적 질병들의 치유로 나타나는 것이다.

3.3. 하늘 나라의 비밀 (13장)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다루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연구 대상은 13장의 하늘 나라에 관한 8개 비유들이다. 제한된 지면 때문에 여기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간략하게나마 이 비유들 가운데 제시되는 하늘 나라의 특성을 정리해 보는 것은 마태가 제시하는 복음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일 것이다.

3.3.1. 성장하는 하늘 나라
겨자씨 비유(31-32절)와 누룩 비유(33절) 그리고 아마도 씨뿌리는 비유(1-9절, 18-23절)와 가라지 비유(24-30절, 36-43절)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보잘 것 없는 비밀스런 시작과 승리적 결과의 절정 사이의 대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형태라 할지라도 그 씨앗이 일단 뿌려진 때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이후 결실의 때까지 자라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 씨앗이 자라는 가운데 그 성장에 대한 반대 세력이 아무리 강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임을 보여 준다. 결국, 하나님의 통치 방법은 일순간에 완결되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성장의 과정을 통해 결실해 가는 방법이며, 겉으로 과시하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오는 방법이다.

3.3.2. 철저한 요구를 수반하는 하늘 나라
보화비유(44절)와 진주 비유(45-46절)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자기 소유를 전적으로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전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제자가 되려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에서 잘 드러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참고. 10:37-39). 즉, 하늘 나라를 소유하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는 한 그의 주인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으며, 오로지 그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아서 그의 주인으로서 그를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참고. 갈 2:20). 이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사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듯이, 모든 사람은 자기가 그 자신의 주인이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그 둘 사이의 중립지대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26)
        그런데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자신의 소유를 다 포기할 때 마지못해서 하거나 슬퍼하며 한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하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44절). 이는 그 농부에게 있어서 그 보화를 얻는 것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파는 것보다 훨씬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외면적인 표시나 가시적 영광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른 모든 소유보다 값진 보화이며, 가치에 있어서 모든 것을 능가하는 진주인 것이다. 따라서 이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고 오직 그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소유하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3.3.3.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는 하나님 나라
씨뿌리는 자의 비유(1-9절, 18-23절), 가라지 비유(24-30절, 36-43절), 그물 비유(47-50절)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누이게 될 것을 가르쳐 준다. 하늘 나라의 그 놀라운 가치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호의적인 반응만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하늘 나라의 가치를 충분히 모르거나(가시떨기, 돌밭) 아예 관심이 없거나(길가) 심지어 배척 혹은 대적하기까지 한다(가라지). 사실 12장에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 관한 언급들로 가득차 있다. 그런가 하면 19장의 부자 청년의 경우는 하늘 나라의 가치를 충분히 몰랐기에 재물에 대한 소유권을 철저히 포기하지 못한 경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분명 좋은 반응을 보일 것이며 (좋은 밭, 19:27의 베드로의 고백), 그런 반응을 보이는 자들은 결국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4. 결론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마태복음이 제시하는 ‘복음’이란 ‘하늘 나라’와 철저하게 연관된 개념으로서, 하늘 나라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이는 마태복음이 제시하는 복음을 바로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는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이해에 기초하여 마태복음을 읽을 경우 그 안에 제시된 복음을 적절히 이해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 짧은 글에서 필자는 하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능한 한 간략하게 개진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그 내용이 결코 새로운 것들은 아니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 내에서 충분히 소화되고 있거나 설교에 적절히 반영되고 있지 못한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개진한 이해에 기초하여 ‘그 나라의 복음’으로 대표될 수 있는 산상 설교의 몇 가지 중요한 [그러면서도 자주 곡해되는] 주제들을 하늘 나라의 관점에 초점을 맞춰 정리해 보았다. 물론 이는 개괄적인 정리일 뿐 마태복음이 말하는 복음의 진수를 소개하기에는 너무도 피상적인 내용이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제한된 지면의 한계 속에서, 마태복음을 해석하고 설교하는데 하늘 나라를 바로 인식하고 그 하늘 나라의 관점을 통해 꿰뚫어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마태복음을 해석하는데 그 구조와 문맥을 적절히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도 간단하게나마 예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목표는 설교자들이 마태복음의 특성과 주제를 좀더 바르게 인지하고, 특히 복음서 전체를 그 중심 주제에 따라 보다 올바르고 풍성하게 이해하고 설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함이다. 초대교회 이래로 많은 사랑을 받아 왔던 마태복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 어떤 설교자에게 그 복음의 진수 중 많은 부분들이 아직도 감추어져 있거나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한국교회에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마태복음을 보다 깊이 그리고 자세히 연구함으로써 자신의 설교를 보다 풍성하게 하고자 하는 설교자들을 위해 이 지면을 빌어 다음 몇 권의 주석과 신학서를 소개한다. <주석> 길리히, 「산상설교」, 솔로몬; 리델보스, 「마태복음」 (상, 하), 여수룬; 시바이쪄, 「마태오복음」, 한국신학연구소; 전경연, 「마태복음」, 대한기독교서회; W.D. Davies & D.C. Allison, Matthew I, II (ICC; Edinburgh: T&T Clark, 1988, 1991); R.T. France, Matthew (TNTC; Leicester: IVP, 1985); D.A. Hagner, Matthew (2 vols.) (WBC; Dallas: Word Books, 1993, 1995). <신학> 킹스베리, 「마태복음 연구」, 기독교문서선교회; 프랑스, 「마태신학」, 엠마오; U. Luz, The Theology of the Gospel of Matthew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G. Stanton, A Gospel for a New People (Edinburgh: T&T Clark, 1992).
출처 : 그리스도와 함께
글쓴이 : 나라일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