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내용은 간추린 것입니다.
선교와 문화(1) 인류의 문화와 하나님 나라
선교와 문화 사이 관계를 알려면 무엇보다 먼저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읽고 묵상해야 한다.
문화의 개념을 성경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1:28절)
주인인 창조주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고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리라고 인간에게 명령했다. 이 명령은 인류가 수행해야 할 ‘문화 사명’이라고 부른다.
이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류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다스려야 한다. (생각을 첨가해봄.....다스림에는 원칙과 책임이 필요로 한다........그 책임을 부여한 하나님께 그 다스림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과 만물에 대한 인류의 통치와 다스림 그리고 그 자세와 정신을 '문화'라 한다면 그 결과물은 바로 '문명'이다.
성경의 창조 기사가 말하는 문화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이원론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창조주 하나님과 인류의 문화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사이임을 기독교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이제 인류의 문화를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시켜야 한다.
즉 인류는 하나님은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해야 한다(창1: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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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인류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이 세상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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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력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나타나고 실현되는가? 바로 인류의 문화이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 세상의 문화는 인류에 의해 창설되고 그리고 계속 발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인류의 문화라는 형식과 틀로 이 세상에 세워지고 성장하며 확장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통치 또는 하나님 나라는 인류의 문화를 통해 그리고 문화 가운데 이 세상에 실현되고 확장될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 성경은 문화를 하나님 나라와 대립시켜 보는 이원론적 관점과 다르다.
그럼 인류 문화의 정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문화 사명에 의하면 인류는 누구나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갖는다. 그러므로 인류는 서로 사랑으로 대하며 서로를 섬기고 봉사해야 한다.
인류 문화의 핵심 정신이 사랑이어야 할 이유이다.
그렇다면 문화 사명의 최종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문화 활동 중 누구나 다 모두 골고루 혜택을 받는 인류 사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런 인류 사회가 바로 낙원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 자체일 것이다.
즉 겉으로는 인류 사회이지만 속으로는 하나님 나라일 것이다. 인류 사회와 하나님 나라가 사랑의 공동체란 뜻이다.
이렇게 기독교 성경의 창조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치 또는 나라는 인류 문화나 인류 사회와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인류 사회와 문화 가운데 실현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무대는 바로 인류 사회와 문화이다.
하나님 나라와 인류의 문화라는 단어들은 거창하고 학문적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의 뒤에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과 인류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인류 상호간의 사랑이라는 감성이 감추어져 있다.
사랑이라는 감성이 배제된다면 하나님 나라와 인류 사회 그리고 문화는 그 의미와 목적을 상실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실상은 하나님의 가정이란 사실에서도 분명하다.
사랑이라는 감성에 기반한 하나님 나라, 인류 사회 그리고 문화를 논하고 말해야 한다.
사랑의 감성이 없는 하나님 나라나 인류 문화는 너무나 삭막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우리는 사랑이 배제된 묵상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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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롬8:28절).
창세전 예정론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며(엡1:4절) 결국 창조와 구원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실현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과 설교에서도 감성과 지성은 늘 함께 가야 합니다.
창조와 타락 기사를 통해 구원론의 방향과 목적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문화와 하나님 나라를 계속 묵상합니다.
선교와 문화(2) 인류의 문화와 하나님 나라(2)
문화 사명(창1:28절)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는 인류 문화에서 실현될 것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 영역은 바로 인류 문화 자체일 것이다.
다시 말해 창세기의 창조 기사(창1-2장)가 말하는 문화 사명은
이 점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지 않은 인류 문화는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며
이 때문에 복음 전파와 선교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통치가 인류의 문화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신학적으로도 아주 중요하다.
이 중요성은 모든 이원론적인 사상을 기독교 교회가 배격해야 함을 말한다.
우선 문화 사명은 두 가지 명령문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인류 자체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과 관계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땅과 그 가운데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과 관계된다.
문화 사명의 명령문은 인류가 당연히 행하여야 할 것으로 인류의 의무와 책임이다.
이 의무와 책임의 핵심 정신은 이웃 사랑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모든 인류는
누구나 다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할 수 있는 동등한 귄리를 갖기 때문이다.
즉 이웃사랑 정신으로 문화 사명을 인류는 수행하여야 한다.
전자의 명령은 모든 인류가 의학과 인문사회 과학 분야에서 동등한 권리와 권한을 누린다고 말한다.
이 명령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생육과 번성만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가 의학,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면에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모든 법들이 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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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자의 명령은 전자의 명령과 긴밀하다.
인류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은 땅과 그 산물들과 긴밀히 관계된다.
인류의 의식주 문제는 모두 땅과 그 산물이 해결해 준다.
그러므로 후자의 명령은 산물들을 내는 땅의 공평한 분배 문제와
산물들을 효과적으로 생산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분배하는 문제와 긴밀히 관계된다.
이 문제들은 기초과학이라할 자연과학의 발전을 요구하며
산물들의 분배와 관련된 정치 제도와 경제 제도라는 인문사회과학의 발전을 요구한다.
이렇게 본다면 문화 사명은
인류 사회가 의학과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요구한다.
이를 뒤집어 말한다면 이들 과학들의 분야에 하나님의 통치 또는 나라 원리가 실현되도록 하라는 뜻이 있다.
기독교 성경은 인문계와 이공계 사이 관계가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한다.
달리 말한다면
기독교 성경의 창조 기사는 신앙과 과학 또는 믿음과 이성의 분리를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또 달리 말한다면 이웃 사랑 실천을 위해 인류 사회는 믿음과 이성을 대립시키지 말 것을 말한다.
믿음은 창조주 하나님 사랑과 그리고 이성은 이웃 사랑과 관계된다.
이렇게 문화 사명은 십계명의 핵심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하며
이들 사랑도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감성에 근거하여
인류 사회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문화 사명이 종국적으로 말하는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서이다.
기독교 성경의 창조 기사는 인류 문화와 하나님 나라가 서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신앙의 틀과 사고의 틀을 신잉인들이 바꾸어야 할 것을 창조 기사는 주장한다.
부분과 분석적인 과학이 아니라 통섭과 융합의 과학을 기독교 성경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설교자들이 본문과 무관한 말을 함을 봅니다.
이 때 본문은 하나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본문에 이입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정이입은
본문의 역사적 사실과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그 본문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설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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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선교(3) 인류의 문화와 하나님 나라(3)
문화 사명(창1:28절)은 하나님 나라 신학과 인류의 문화에 관한 성경적인 관점을 제공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萬物)의 실제적인 주인이지만 피조물 인간에게 통치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여전히 만유의 머리(대상29:11절)이며 모든 정세와 권세의 머리이다.
외면적으로 인류가 만물의 주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아래
이 우주와 지구의 모든 일들은 계속 존재하고 맡은 역할을 수행한다.
신약 성경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며 그가 곧 만유의 머리라고 증언한다(골1:16-18, 2: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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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에 의하면 타락 이전 하나님 나라와 인류의 문화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신앙과 과학 즉 믿음과 이성도 절대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창조 행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류도 나누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
이 사랑에 바탕하여 인류는 서로 사랑하여야 하며 지구와 만물도 관리해야 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인문사회과학이든지 자연과학이든지 열심히 배워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과학은 불신자들의 몫이 아니다.
그러나 아담은 불순종했다. 그 결과 인류는 영적으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 둘로 나누어졌다(창3:15절).
전자는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은총 아래 그러나 후자는 은총 밖에 놓일 것이다.
물론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아래 존재할 것이지만...
이렇게 타락 결과 이 지구상에는 하나님의 통치와 사탄의 통치 이 둘이 병존하게 되었다.
한 인류에 의한 동일한 문화로 통일된 하나님 나라 건설이 이 지구상에서 불가능하게 되었다.
노아 홍수 심판 이후 인류는 또 다시 인종적인 면에서 셋으로 나누어졌다(창10장).
그리고 나중 발생한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창11장) 세 인류들은 언어에 바탕한 수많은 민족들로 나뉘어졌다.
이렇게 이 지구상에 다양한 문화들이 창설되고 서로 달리 살게 되었다.
앞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 지구상에 세우고 확장시키려면
민족간 그리고 인종간 장벽을 극복해야 할뿐만 아니라 영적 장애도 허물어야 할 것이다.
즉 각양각색의 문화들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모아 통일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 일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후손에 의해 가능할 것이라고 원복음(창3:15절)은 예언한다.
여기서 복음 전파와 선교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복음은 제각각 이리저리 흩어진 것들을 모으는 작업을 한다.
복음을 전함으로 개인 인간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
영적인 면에서 둘로 나누어진 인류가 하나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진다.
이런 중생의 역사는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이 세상 어디서나 일어날 것이다.
이 결과 다민족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영적인 면에서 실현될 것이다.
어떻게 이것은 가능한가?
중생한 성도는 새사람으로 새로운 윤리에 힘입어 새 삶과 새 인생을 살 것이다.
이들에 의해 이 세상에 새로운 인류 문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는 문화를 보여주는 나라를 창설했듯이……
구원 이후 하나님의 법이 성경에서 늘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렇게 복음과 율법 또는 은혜와 율법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법에 근거한 새로운 문화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는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창조론의 문화 사명이 목적한 바가 구원의 역사를 통해 성취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 직전 선교 명령(마28:18-20절)을 제자들에게 남긴 이유였다. 여기서 두 가지 목적이 복음전파와 선교에서 발견된다.
첫째 목적은 개인의 중생이며 그리고 둘째 목적은 세상 문화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다.
첫째 목적은 개인 성도에게 영생을 보장하지만 구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젠 기독교와 신자들은 복음 전파나 선교를 협의적이 아니라 광의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기독인들의 신앙과 사고의 틀이 바뀌어야 함을 뜻한다.
기독교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가 세상으로 나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좀 더 전인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즉 이원론적인 가르침을 버려야 한다.
( .........사고첨가: ........교회의 가르침이 구원을 동떨어진 것으로 말할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하나님의 다스림을 전제로한 관점에서 구원을 가르쳐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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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서 간신히 구원받은 정도의 신앙 삶(고전3:15절)을 살 것인가?
아니면 한 달란트 받은 청지기처럼(마25:24-29절) 버림을 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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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으는 목회가 아니라 보내는 목회가 나라와 민족과 사회와 인류를 구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구원의 은총을 준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절)
여기 선은 자선같은 선행만 뜻하지 않고 영혼 구원을 비롯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실현되도록 하는 삶 자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구원은 영생에의 부름일뿐만 아니라 창조론의 문화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부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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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배우보다 연기를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합니다.
시나리오와 같은 성경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 사회는 동서 문화권으로 대별(大別)된다.
동양의 문화는 은총(恩寵) 사상으로 그리고 서양의 문화는 계약(契約) 사상으로 각각 대변(代辨)된다.
달리 말해 동양 사회는 은총 문화에 그리고 서양 사회는 계약 문화에 각각 속한다.
사실 이 두 문화는 기독교 성경의 창조 기사(창1-2장)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은총 문화는 창조 기사의 문화 사명(창1:28절)에 근원 한다.
문화 사명(창1:28절)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은 높은 자로서 낮은 자인 인류에게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풀었다.
하나님의 은총에 기반하여 인류 사회도 앞으로 그렇게 형성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 은총과 사랑은
인류 사회의 통치자나 지도자들이 높은 자로서 낮은 자들인 백성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잘 가르친다.
인류 사회의 질서 유지 차원에서 신분이 아닌 직분 상 높낮이가 사람들 사이 존재할 것을 말한다.
이런 은총 사상이 동양권의 유교 철학에서 잘 설명된다.
통치 철학은 높은 자의 낮은 자에 대한 사랑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유교의 통치 철학은 말한다.
즉 통치자는 성인군자(聖人君子)로서 인(仁)을 백성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통치자도 부패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치자는 윤리도덕면에서 성인군자로 취급된다. 은총 문화가 전제 정치나 독재 정치의 씨앗이 된 이유이다.
그러나 은총 문화는 기독교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
은총 문화는 또 다른 단점은 갖는다. 은총 문화는 높은 자의 은총, 사랑과 정(情)에 근거한다.
동양 사회가 대체로 수직, 상하 또는 종속 관계라는 경직된 구조를 보이는 이유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와 이에 근거한 가부장적인 권위 같은 표현들이 이를 잘 증명한다.
군사부(君師父)는 동양 사회에선 절대적인 존재로서 완전한 자로 숭배 받는다.
군사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무조건 이들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개성이나 개인주의가 용납되지 않는 이유이다.
통치자 한 사람을 위한 집단 속에 개인은 쉽게 매몰된다.
그리고 높은 자의 사랑이나 정 또는 은총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 사회나 단체에서 출세는커녕 생존도 힘들 수 있다.
이렇게 불완전한 통치자에게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 문제가 걸린다.
동양의 역사가 이에 대해 잘 증명한다.
서양 사회의 성격인 계약 문화는 창조 기사의 창조 언약(창2:17절)에 근원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주인이며 높은 자로서 피조물 인간과 절대로 대등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어 피조물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서 계약 즉 언약을 맺었다.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 자신도 피조물 인류와 같이 언약에 묶인다.
언약이란 관점에서 볼 때 창조주와 인류 사이 차이는 전혀 없다.
이렇게 계약 문화는 높낮이를 특색으로 하는 은총 문화와 달리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평등 관계를 말한다.
인류 사회의 계약 사상의 뿌리는 기독교 성경의 창조 언약이다.
즉 인류의 평등 사상은 기독교 성경의 창조 언약에 근거한다.
계약 문화에서 높은 자의 자기부정이 요구되며
그리고 계약을 지키는 한 피조물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얼마든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이 점에서 계약 문화는 은총 문화와 다르다. 높은 자인 통치자라도 낮은 자인 백성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맺어진 계약에 따라 서로 관계할 수 있을 뿐이다.
타락 이후 어떻게 이 두 문화가 동서양의 성격이 되었는가?
장남(長男)은 가문의 전통을 수호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그가 항상 보수적이며 수구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그 나머지 동생들은 장남에 대한 불평으로 항상 가득하다.
기득권을 주장하며 장남이 유익을 얻고 자신들은 늘 손해를 보기 십상이다. 이들은 서열에 따라 받는 은총을 싫어한다.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은 장자로 동양인의 조상이다(창10장). 은총 문화가 셈에 의해 문양 문화로 장착되었다.
그러나 야벳은 삼남(三男)으로 계약 문화가 더 좋았다. 계약 사상은 서열에 무관하게 언제든지 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계약 문화가 야벳에 의해 서양 사회에 정착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 사회에서 한 동안 은총 문화가 지배적이었을 것이다(창3:16절).
후에 기독교 복음이 동양 문화권보다 서구 사회에 먼저 전달되고(행16:9-10절)
기독교 문화가 아주 서서히 서구 문화의 뿌리로 자리 잡으며 계약 문화가 서구 사회를 점점 점령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 사상이 서구의 기독교 문화권에서 출발했다.
기독교 성경의 가르침 때문에 서구 사회에서 통치자는 동양 사회처럼 절대자로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 성경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의 계약 문화는 자유분방한 개인주의 또는 지나친 이기주의를 낳을 수 있다.
은총 문화가 집단적인 윤리를 주장한다면 계약 문화는 개인주의 윤리를 낳기 때문이다.
지나친 개인주의는 사회를 해체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 전파나 선교는 무엇을 위하는가?
복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켜
창조론이 말하는 은총 문화와 계약 문화를 하나로 만들어 인류 문화에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기독교 성경의 창조론은 은총과 계약을 서로 분리시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성경에서 은혜와 율법은 동전의 양면이다. 여기서도 융합이나 통섭이 요구된다.
통치자나 지도자는
자신이 속한 사회나 단체의 구성원들을 긍휼히 보는 마음으로 대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며 그들이 자신의 은사를 마음껏 발휘하도록 도와야 한다(엡6:5-9절).
사도 바울은 지체이론(고전12장)을 통해 이 두 가지를 잘 융합시켜 설명한다.
지체이론에서 기독교 관점에서 본 통치 철학과 리더십의 원리가 기가 막히게 잘 설명된다.
이 모두 복음 전파와 선교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결국 이로써 문화 사명이 목적하는 하나님 나라가 인류 문화에 건설되고 확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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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 가지로 성경의 언어나 진리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언어나 상식으로 성경을 설명하는 일은 늘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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