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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어떠한 눈으로 읽어야 할까?

하나님아들 2023. 5. 15. 20:49

성경을 어떠한 눈으로 읽어야 할까?

 

박창환의 「성경의 형성사」(대한기독교서회)

성서를 중심하고 성서의 말씀을 따라서 산다고 하는 한국교회가 실제에 있어서 성서의 정신과 엄청나게 배치되는 태도와 생활을 가지는 것은 어떤 영문일까? 한국교회는 성서를 읽는 것 그 자체에 어떠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성서를 무조건 읽기만 하면 되고 뜻을 알든지 모르든지 많이 읽고 매일 읽기만 하면 그 자체가 어떤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읽는다. 성서를 많이 읽음으로써 비록 그 뜻은 모른다 하더라도 어느 책에 무슨 말씀이 있고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정도의 피상적 내용만 알 뿐이다. 성서정독보다는 성서통독에 더 중심을 둔다.

성서는 다른 책과 다름없이 사람들이 사람의 말로 쓴 책이지만 확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람이 쓴 많은 성서자료들 중에서 하필 66권이 성서에 수집되어 기독교 경전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을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지도자들, 제사장들, 왕들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 종교생활, 도덕생활, 국가생활 등의 규범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으며 특히 예언자들을 통하여 역사를 해석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사람의 말로 전달하게 함으로써 타락한 백성에게 각성을 주며 의기소침한 백성에게 희망을 복돋우게 하셨다.

그런데 성서의 계시를 인간에게 주시던 때는 지금부터 4천년(구약)내지 2천년 전(신약)이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일반적으로 미개하고 과학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지식과 우주관과 제도와 언어와 또는 그 표현 양식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과학이 없는 옛 사람에게는 과학적으로 사실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신화적인 표현법을 써서 설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과학적 정확성을 진술하려는 과학자의 눈으로 성서를 보면서 성서의 어떤 신비한 사건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성서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전혀 전제하지 않는 것이다.

3천년 내지 근 2천년 전에 기록된 성서가 그 당시 그 특정 환경 속에 있던 특정 독자들에게 잘 이해되던 말과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들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서를 읽을 때 역사적인 한계를 고려하여 역사적인 해석을 우선 필요로 한다.

성서에 들어 있는 66권의 책은 그 저자도 각각 다르고 그 연대도 다르며 또 환경이 모두 다르다. 성서는 각이한 유형들과 양식들의 집합체이다. 시가집들, 속담집, 복음서들, 교훈문서들, 예언서들, 서간집들, 묵시서들, 역사서들, 법전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서는 역사는 역사로, 시는 시로, 비유는 비유로, 격언은 격언으로, 소설은 소설로, 희곡은 희곡으로, 신화는 신화로 각각 분류하여 거기 해당하는 적적할 해석법에 따라서 해석할 때 그 계시의 참 뜻을 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구약성서를 어떠한 눈으로?

유대인 역사학자인 조세프스(Josephus, 100A.D)는 구약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며 일정한 계시의 기간에만 기록된 것이고 그 내용 자료의 거룩한 성격때문에 세속적 문헌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그것을 다치기만 해도 손이 부정을 타고, 단어 하나도 변해서는 안된닥 말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함락 후 30년이 되는 해에 에스라가 기도의 응답으로 구약성서를 40일긴에 걸쳐서다섯 명의 조수에게 불러 주어 받아 쓰게 했다는 것이다. 즉, 에스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약 전체를 암송하여 불러 주었다는 것이다.

구약경전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2세기 그리스도인에게까지 번졌고, 에스라 때에 구약 정경이 단번에 다 완성됐다는 설은 계속 유대교와 기독교에 유행되고, 개신교에서도 채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이런 설을 부인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서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율법ㅅ(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신명기), 예언서(전기예언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후기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선지), 성문서(시편,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 룻기, 예레미야의 애가,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다니엘)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인은 율법을 가장 높이 펴가하고, 성서라면 우선 율법을 생각하게끔 되었었다. 율법은 온통 그리고 완전하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것이고, 따라서 율법의 한글자라고 모세 자신이 창안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죄를 받는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율법서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것은 하나의 합성문서이고 오랫동안 자라고 발전되어서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증거는 율법서 여러군데에서 발견된다. 신명기 34장는 모세가 죽은 후의 일을 말하고 있고, 5경에 여러번 블레셋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지만(창 21:34, 26:14-18, 출 13:17) 실은 기원전 1200년 경(모세의 출애굽시대는 기원전 1300-1200년경)까지는 그들이 팔레스틴에 나타나지 않았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정설이다. 그러므로 모세 시대보다 훨씬 이후에 된 부분들을 5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뿐 아니라 5경에는 같은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묘사하는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창조이야기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창세기 1장에는 세상 만물과 동물까지 창조된 후에 남자와 여자로 사람이 찬조된다. 그러나 2장에는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다음에 동물, 그리고 마지막에 여자가 창조된다. 홍수에 대한 기사도 두 가지다. 하나는 노아가 모든 짐승을 한 쌍식 방주 속에 넣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창6:19), 또 하나는 정결한 동물은 일곱씩, 부정한 동물은 한쌍씩 넣으라고 명령을 받는다.(창 7:2) 이와같이 이야기가 중복된 것은 5경을 오늘의 형태로 작성한 사람들(편집자들)이 그 사건들에 대한 두가지 기사들을 앞에 놓고 그 자료들을 정직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취급하는 의미에서 그 두 가지를 다 나열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5경은 하나 이상의 문서의 편집으로 형성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행인지 불행인지 5경의 저자나 편집자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런데 왜 5경의 모세 저작권을 부동의 진리라고 주장할까? 우리는 한글을 가리켜 세종대왕의 한글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만드셨다는 말은 아니다. 집현전의 학자들이 만들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존경하는 이에게 어떤 공로를 돌린다는 것은 일종의 미덕이었고 관례였다. 그렇개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모든 법과 기본적인 교훈들과 심지어 그민족 형성의 기본적인 역사까지도 포함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일종의 기본헌장으로 삼았을 때, 그들의 국부요 또 이스라엘 법의 창시자이기도 한 모세를 그 저자라고 부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시편을 다윗이, 잠언과 전도서를 솔로몬이, 룻기를 사무엘이, 열왕기와 애가를 예레미야의 글이라고 보편적으로 전해 내려왔던 것도 다같은 이치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구약의 율법이나 예언서를 막론하고 그런 문서가 생기기전에는 히브리 민족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히브리 민족에게 특별히 예언자들을 일으키시어 모든 사건들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해 주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이역사 속에서 그의 위대하신 구속적 사건들에게 계시하셨다. 그 계시는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매개로 인간에게 전해졌다.

예언서는 역사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역사적 경험을 히브리인들에게 체험케 한 하나님의 뜻을 그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히브리인과 그밖의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는 책이 곧 예언서들이다.

예언자들의 참 목적과 기능은 하나님의 뜻(계시)을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이다. 예언서 기자들은 사건을 그대로 분석하는데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사건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실현하고 설명해 주느냐 하는데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성문서는 우선 일반 백성이 널리 알고 읽던 인기있는 책들이었다. 율법이나 예언서처럼 전체적으로 또는 공식적 결정에 의해서 성서 정경에 들어 오게 된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 백성들의 일반 종교문학으로 간주되어 전해 오다가, 익명의 책들이어서 그 저작자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위대한 인물(다윗,솔로몬,에스라 등)이 쓴 책으로 돌려 정경에 넣었다.

이렇게 전승된 성서들이 정경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주후 90년 경 해안도시인 얌니야에서 유대 랍비들과 학자들의 권위있는 회의가 열렸고, 그 회의에서 구약성서의 책들이 최동적으로 낙착되어 그 수가 오늘날 우리의 구약성서의 그석과 꼭같은 것으로 결정되었다.

신약성서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도 여러 저자에 의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기록된 책들이 오랫동안, 복잡한 역사를 통해서 집성되어 이루어졌다. 초대교회는 그들 자신의 책이라고는 가진 것이 없었고 구약성서를 그대로 물려 받았었다. 구약성를 경전으로 계속 가지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생활과 죽음과 부활이 주는 감격스러운 의미에 도취되고, 성령의 감동과 지도를 받으면서 교회는 성장해 갔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신약성서의 어느 부분도 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발전하여 나갔다. 왜 1세기 사도 교회는 신약 정경을 가지지 않고 성장해 갔을까? 그것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고 하나님의 활동과 그리스도의약속을 찾아낼 수 있어서 구약성서에 대한 그들의 감격과 신뢰감이 도욱 두터워갔고, 그리스도의 사건을 목도하고 혹은 사도들이 구두로 전하는 증언을 듣고 기뻐하는 것으로 충분하였기 때문에 굳이 새로 운 성서를 필요하지 않았다. 신약정경이 곧 나타나지 않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은 1세기 사도교회가 종말적 기대를 강하게 가졌었기 때문이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곧 재림하여 심판할 것이라는 강한 기대에 영구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문서같은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복음이 구두로 전달되던 시대가 적어도 30년 이상 흘렀다. 그런데 복음의 내용이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쳐 전해지면서 어떤 면으로든지 변질되거나 확대되거나 왜곡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로의 복음 사화들이 예수의 생애와 말씀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사라고 단정할 수 있는 두어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는, 옛날 사람의 기억력은, 많은 정보를 손십게 찾을 수 있어서 구태여 기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억력이 많이 상실된 현대인의 기억력과 비교해서 상당히 뛰어나다. 책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아서 중요한 지식이라면 불가불 머리 속에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한 번 들은 것을 잊거나 외곡하는 경향이 우리들보다 훨씬 적었다.

둘때는, 쳬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와 교훈에 대한 모든 것은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계속해서 설교하던 자료였기 때문에 교회의 동동적 기억의 제재와 감시를 받아 왜곡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그러나 복음 사화의 기본내용은 변하지 않았지만 복음 기자들은 각각 그들의 신앙과 소견을 쫓아 그리고 독자들의 평편을 참작하여 적절한 해석을 붙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건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던 사도들이 점차 죽어버려 구전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그래서 불가불 구전방법을 대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글로 써서 전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발전함에 따라 희랍과 로마 사회로 선교할 필요성을 느껴 전도 내용을 문서화시킬 수 바까에 없었고, 그리스도의 급박한 재림을 기다리던 초대 교회는 지림이 점점 늦어짐을 인식하고 장래의 교회 문제에 신경을 써 문서화된 말씀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구전된 내용을 점차 문서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년서 예수의 교훈과 생애를 실은 기록을 인용하면서 그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신약 문헌의 대부분은 어떤 개체 교회 혹은 교회의 작은 단체를 위해서 기록된 것들이다. 이 교회들은 이 편지(바울서신들)들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생활의 여러 가지 위기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참 좋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편지들이 수집되고 또는 널리 반 포되어 결국 정경에 포함되게 된 것이다.

복음서의 예수의 생애와 교훈은 구전시대(주후 30-60년 이후)에 단편적인 이야기로 전해지다가 문서화되면서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는 결과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구전시대가 지나고 문서운동이 시작되자 기독교 문헌이 우후죽순 격으로 사방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누가는 자기보다 먼저 복음사건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들이 많이 잇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눅 1:1). 애굽인의 복음, 도마 복음, 맛디아 복음, 바돌로매 복음, 12사도의 복음, 바실리데스 복음, 아벨레스 복음 등등. 핸전도 여러가지가 나타났다. 도마행전, 안드레행전, 빌립행전, 베드로행전, 요한행전, 바울행전, 데클라 행전 등이가. 요한계시록 외에도 베드로의 계시록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문서들 중에서 왜 어떤 것은 성서로 채택되고 어떤 것은 버림을 받았을까? 우선 그 책이 교회의 공중 예배에서 읽혀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어떤 책이 공중 예배에 낭독되기 시작하면 그것은 보통문서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특별한 존재로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채택되는 데 표준이 된 것은 사도적 권위를 가졌는가 아닌가에 있었다. 다시말해서 그것이 어떤 사도의 저술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사도들과 작접 접촉하뎐 사람이 쓴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로 부터 보냄을 받은 예수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예수가 보내신 사도들은 곧 예수와 동등하다는 생각으로 사도의 말을 예수의 말씀처럼 권위잇게 존중하였기 때문에, 사도적 권위는 정경선택의 표준이 된 것이다.

어떤 책이 신약성서 정경속에 들게 되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하는 것이다. 우선 그것이 기록되어야 하고 다음에는 그 기록된 책이 교회에서 널리 읽혀져야 한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리에 유용한 것으로 인정되고 수락되어야 한다. 다음에는 온 교회가 채택하고 수락해야만 한다. 끝으로 온 교회의 지도자들의 회의의 결정에 의해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신약문서들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것들이 바울 서신이고, 또 제일 먼저 한 책으로 수집된 것도 바울서신들이었다. 바울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어떤 지방의 잠정적 형편을 다루어 글을 썼다. 어떤 특정 시간에 어떤 특정 교회가 당면한 급박한 정황을 취급하려는 목적에서 기록하였다. 실제 문제에 있어서 좋은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 또는 교회의 화평과 통일을 유지하게 하려고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바울서신 수집은 바울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미 소규모로 진행되어 왔었고, 그의 사망으로 인해서 자극을 받아 좀 더 활발하게 전개되던 서한수집 작업이 사도행전 발행 후에 한층 더 본격하여 종결을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는 전도자들과 교사들에 의해서 예수의 복음이 직접 선포되는 구전시대를 거쳤다. 현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들이 대번에 기록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오늘의 형태로 나타나기 전에 예수의 교훈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자료 문헌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현재 학자들이 이름 붙인 ‘Q자료’(자료라는 뜻을 가진 독일 말 Quelle을 대표하는 것) 같은 것이 있어서 마태나 누가가 자기들의 복음서를 쓸 때 자료로 사용했으리라는 것이다. Q자료는 공관복음 특히 마태와 누가의 두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예수의 교훈이 어떤 동일한 자료에서 왔으리라는 생각에서 끌어낸 가상적 자료이다. 그러나 그 개연성이 아주 짙은 것이다. 이 자료이외에도 누가가 그의 복음서 서두에 암시한 것처럼, 작고 큰 많은 복음서들이 유포되고 있었을 것이다.

사이비 복음서들을 포함한 여러 복음서들 중에서 4복음서만이 채택된 것은 4복음서 자체가 지닌 그 진리성과 권위가 독자들을 압도하고 강박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며, 그렇지 못한 사이비 문서들은 자연히 도태당하고 말았다고 생각된다. 교회는 4복음서가 한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르게 서술함에 곤란을 느꼈지만 복음서의 수를 줄이거나 하나로 통일시키지 않은 것은 교회가 사도적 증언을 무엇보다도 존중히 여겼기 때문에 다양성을 인정하여 네 복음서를 모두 수락하였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확실한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시기에 도달했다. 2세기 경에 영지주의(혼합주의 종교로 이단으로 배척받았다)자인 마르시온이 스스로 성서의 정경을 작성, 발표하여 교회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바울을 거의 우상처럼 예배하였고 구약성서를 완전히 그의 정경에서 제외시켰다. 이에 교회는 정경확정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제 2세기 중엽에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으니, 성서는 무진장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정경확정 운동에 더 박차를 가하였고, 2세기 말경에 이르러서 교회는 신약 정경을 한정하고 원칙적으로 성서 산출이 이미 끝났다는 데 합의하게 되었다.

3세기와 4세기 초에 걸쳐서 문제 된 책들을 분류하여 가려내는 과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더러는 정경으로, 더러는 외경으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정경형성의 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주후 367년에 애굽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성서와 꼭 같은 내용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그 목록은 신약 정경 형성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계점을 이루고 있다. 동방 수리아 교회만이 오늘날까지 22권을 신약정경으로 가지고 있지만 거의 모든 교회가 현대의 27권을 신약정경으로 채택했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인간의 말에 담아, 오고 오는 인간에게 전달하시고 계시다. 정경 형성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 성서의 여러 책들은 그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독특하고도 신비로운 이유때문에, 서로 성미와 구미가 다른 수억만 명의 까다로운 인간의 체질과 기질을 모두 통과하여 오늘날까지 건재하고 책 중의 책으로서의 영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